풍류, 술, 멋

붉게 타는 메밀꽃·솜털 반짝이는 억새… 가을, 보석같은 ‘꽃’의 바다에 빠지다

醉月 2022. 10. 20. 12:52

■ 박경일기자의 여행 - ‘만추’ 절정 맞은 꽃밭 영월·정선

- 영월 동강 변 메밀꽃밭

청보리·코스모스 나던 자리에 ‘붉은메밀’ 일본 종자 심어 대박
코로나에도 축제 인산인해… ‘인생사진’ 건지려는 연인들 가득


영월·정선=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어느 계절의 것이든 꽃은 다 아름답지요. 반갑기로는 봄입니다만, 못지않게 다채로운 꽃을 볼 수 있을 때가 가을입니다.

봄날에 매화와 산수유, 벚꽃과 유채꽃이 있다면, 가을에는 국화와 코스모스, 쑥부쟁이와 벌개미취가 있습니다. 메밀도 억새도 가을에 꽃이 핍니다. 가을이라면 붉고 노랗게 물드는 단풍부터 떠올리지만, 차고 맑은 대기 속에서 이슬과 함께 피어나는 가을꽃의 정취도 근사합니다. 단풍의 화려함 뒤에는 스러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깃들어 있다면, 가을꽃은 청량한 가을날에 저 스스로 충만할 따름입니다.

38번 국도를 타고 영월로, 정선으로 가을꽃을 마중하러 가는 길입니다. 동강 물길을 따라 피어난 강원 영월 삼옥리의 붉은 메밀꽃밭, 그리고 정선 민둥산에서 흐드러진 억새를 만났습니다. 다녀온 뒤에 머뭇거리느라 붉은 메밀꽃 얘기는 좀 늦고 말았지만, 민둥산 억새의 솜털은 지금쯤 더 화사할 겁니다.

민둥산 억새야 사실 따로 소개가 필요 없을 만큼 이름난 곳인데도 새삼 그곳 얘기를 꺼내놓는 건 그동안의 여행을 ‘리셋’하자는 뜻입니다. 코로나19로 불편했던 ‘세 번의 가을’을 지나서, 비로소 여행을 다시 시작하는 가을입니다. 야외에서 마스크를 벗고 만나는 가을은, 코로나 와중의 가을과 분명히 다르지만, 코로나 이전의 가을과도 많이 다릅니다.

코로나 이전에 익숙했던 여행지를, 지금 다시 간다면 느낌이 사뭇 다를 겁니다. 잃었던 것을 되찾은 감격과 새삼스러움 때문이겠지요.


# 메밀꽃 붉게 타오르다

계절의 속도가 빨라서 붙들고 있다가 때를 놓쳤다. 다녀왔을 때는 붉은 메밀꽃이 한창 불타오르고 있었는데, 아차 하는 사이에 절정을 넘겼다. 축제는 나흘 전에 끝났고, 꽃은 이제 새벽 추위에 하나둘 바스러지는 중이다. 이곳은 동강 물길을 끼고 있는 영월읍 삼옥리 먹골마을. 영월읍에서 동강의 대표 명소인 어라연이나 동강 래프팅 종점인 거운리로 갈 때 지나쳐가는 동강 변의 마을이다. 먹골마을 동강 둔치의 드넓은 메밀꽃밭에서 지금, 붉은 메밀꽃이 지고 있다.

‘붉은 메밀꽃’이라니…. 메밀꽃은 본래 흰색인 걸 모두가 다 알게 한 건 이효석이다. 평창의 메밀밭 얘기를 다룬 글마다 빠짐없이 인용하는,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문장 몇 줄.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푸른 달빛 아래 빛나는 흰 메밀 꽃밭이 선연하게 떠오를 만큼 생생한 묘사다. 소금을 뿌린 듯한 흰 꽃. 그런데 삼옥리에는 붉은색의 메밀꽃이 있다. 그것도 수수한 분홍빛이 아니라 농염한 붉은색이다.

이효석이 이 붉은 꽃밭을 보았더라면 소설 속에서 어떻게 묘사했을까. 미처 보지 못했는데 달빛 아래 붉은 메밀꽃밭은 어떤 느낌일까.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 흰 꽃이 아닌 붉은 꽃밭이었다면, 허 생원과 성 서방네 처녀와의 연애 장면은 좀 더 매혹적이었을까.

붉은 메밀꽃밭은 유독 남녀커플이 많이 찾는다. 이곳을 찾는 이들의 목적은 열이면 열, ‘사진’이다. 이른바 ‘인생 사진’을 건지려는 연인들이 꽃밭에 가득했다. 거대한 메밀밭의 붉은 꽃은, 사진으로 담은 사랑하는 연인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일 따름이다. 경관 농업의 소출은 그저 ‘경관’이다. 작물을 심고 거두는 본래 의미로 본다면, 드넓은 붉은 메밀꽃밭은 비생산적인 소모다. 하지만 팬데믹의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오면서 우리는 이런 소모가 필요했다. 셔터 소리와 젊은 연인들의 싱그러운 웃음소리가 꽃밭을 굴러다녔다.


# 삼옥리에 전해지는 러브스토리 두 편

붉은 메밀꽃밭의 연인들을 보면 삼옥리에 남녀 간 사랑에 얽힌 이야기가 유독 많은 게 우연만은 아닌 듯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이야 강변을 끼고 번듯한 차도가 놓였지만, 예전에 삼옥마을 주민은 강변의 위태로운 벼랑길을 걸어 다녔다. 큰비가 내리고 나면 물이 불어 길이 끊기는 것쯤은 예사였다. 그 무렵의 얘기다. 먹골마을 강변에 팔 벌려 바위를 안고 겨우 돌아가야 할 정도로 길이 좁은 벼랑길이 있었다. 마침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윗마을 먹골에서 처녀가 내려오고, 아랫마을 번재에서 총각이 올라가다 이 벼랑에서 서로 딱 마주쳤겠다. 교행이 불가능한 좁은 벼랑길이었으니 서로 껴안듯이 빗겨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둘 다 빗물에 흠뻑 젖은 채였을 것이니 처녀, 총각은 아찔하지 않았을까. 아니나 다를까, 그 인연으로 둘은 혼인해서 잘 살았다고 전한다. 그때 처녀, 총각이 마주쳤던 자리의 바위를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안고 돌았다’고 해서 ‘안돌’이라 부른다.

이번에는 비극이다. 먹골마을 길 안쪽에 열녀각이 있다. 마을에 살았던 정의영의 처 ‘평창 이씨’를 기리는 정려각(旌閭閣)이다. 엄동의 날씨에 남편 정 씨가 잔칫집에서 밤늦게 돌아오다 얼음이 깨지면서 강물에 빠졌다. 필시 잔칫집에서 술 한잔을 걸쳤을 터. 소식을 들은 아내 이씨는 버선발로 뛰어나가 남편을 구하려 얼음물로 뛰어들었다. 아내도 남편도 물 밖으로 나오지 않자 마을 주민들이 얼음을 깨고서 부부의 시신을 꺼냈는데 둘이 손을 꼭 붙잡고 죽어있었다는 얘기다. 남편이 물에 빠지는 걸 ‘보고’ 뛰어든 게 아니라, 사고를 ‘전해 듣고’ 뛰어든 것이었으니, 추측건대 아내는 차가운 얼음물에 뛰어들 때 이미 남편을 구할 도리가 없었다는 걸 알지 않았을까. 그래도 아내는 얼음물로 뛰어들어 차갑게 식은 남편의 손을 잡았다.

대부분의 열녀각이 주인공의 시대착오적 순종이나 판에 박은 사례, 좀처럼 믿기지 않는 터무니없는 얘기를 앞세우는데, 삼옥리의 평창 이씨 열녀각에 얽힌 이야기는 간명하다. 곁가지도 치장도, 과장도 없다. 정려에 새겨진 이야기가 ‘진짜 있었던 일’이란 믿음이 드는 건 그래서다. 그러거나 말거나 삼옥리의 붉은 메밀꽃밭에서는 젊은 연인들도, 중년 부부들도 다들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 붉은 메밀꽃과 꽃밭 여울

붉은 메밀은 마을 특화사업을 찾던 삼옥리 먹골마을 주민들이 2013년 일본에서 종자를 들여다가 심은 것이다. 처음에는 반신반의. 한 줌의 씨앗을 받아다가 마을 텃밭에다 키웠다. 씨앗을 받아가며 재배면적을 늘리길 몇 해. 그렇게 개체 수를 늘려나가다가 동강 둔치에 가득 심었다. 삼옥리 동강 둔치는 봄이면 청보리로, 가을이면 코스모스로 가득 찼는데, 2019년부터 코스모스 대신 붉은 메밀을 심었다.

붉은 메밀꽃은 속된 말로 ‘대박’이었다. 강변을 온통 뒤덮은 강렬한 붉은색은 금세 소문이 났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코로나19의 창궐로 지방자치단체들이 하던 축제마저 다 중단했던 2019년 가을, 삼옥리에서는 ‘제1회 동강 붉은 메밀꽃 축제’가 열렸다. 첫 축제 때 방문객이 3만 명이 넘었다. 2회 때는 방문객이 몇 곱절 늘었고, 올해 3회째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대박의 비결은 희소성이다. 붉은 메밀꽃은 드물다. 강원 평창에도, 경북 영주에도 붉은 메밀꽃밭이 있긴 하지만, 아직 규모가 작다. 삼옥리의 성공을 목격한 다른 지자체들이 이제야 붉은 메밀꽃밭 조성에 뛰어들 태세다. 꽃도 유행이다. 느닷없이 인기를 누리다가도 하루아침에 외면당하기도 한다. 팜파스나 핑크 뮬리가 대표적이다. 이국적인 형태와 색감으로 인기를 얻으니, 너도나도 심어 기르는 통에 이제는 감흥이 영 예전만 못하다. 어디서 히트했다 하면 죄다 따라 하는 통에 다들 똑같아지면서 외면받는 식이다. 집라인이 그랬고, 출렁다리가 그랬다. 붉은 메밀꽃밭도 다들 따라 하면 심드렁해질까. 그러고 보면 사람들의 취향이란 변덕스럽기 짝이 없다. 먹는 것도 아니고, 꽃에 대해서까지 말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붉은 메밀꽃은 이제 끝물이다. 꽃밭에 드문드문 붉은 기미만 겨우 남았다. 아쉽지만 그래도 삼옥리에 가보길 권하는 건 날이 차가워질수록 더 맑아지는 동강을, 강변으로 내려가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다. 둔치에는 초록이 무성하고, 강변의 버드나무의 정취도 아직 근사하다. 메밀꽃이 아니었더라면 무심코 스쳐 지나갔을 테니 이 그윽한 강변 풍경은 져가고 있는 붉은 꽃들이 선물처럼 가져다준 것들이다. 삼옥리 앞 동강의 얕은 수심 구간을 세차게 흐르는 여울목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꽃밭 여울’이다. 해마다 5월이면 이 여울 구간 주변에 철쭉꽃이 화사한 연분홍 꽃을 피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정선 민둥산 억새군락

‘벌거숭이 볼품 없다’ 하여 이름 붙은 산… 이맘땐 은빛 억새물결
편하게 걷고 싶다면 동쪽코스… 산행 즐긴다면 남쪽코스 이용을


# 볼품없는 산이 명소가 되다

정선의 민둥산은 볼품없는 산이다. 민둥산의 이름은 ‘민둥하다’에서 왔다. ‘민둥하다’란 나무가 없어 벌거숭이가 된 모양을 이른다. 벌거숭이의 ‘볼품없음’의 뜻을 가져다가 산 이름으로 삼았을 정도라면 알 만하다. 산 자체의 형세나 풍광으로 본다면 민둥산은 솔직히 별 볼일 없는 ‘그렇고 그런 산’이다. 산 그림자 첩첩한 정선 땅에 있는 산이어서 더 초라하고 왜소하다.

하지만 딱 한 계절, 가을만큼은 다르다. 정상 일대에 물결치는 억새군락 하나만으로 민둥산은 일찌감치 가을 산행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전국 곳곳에 억새 명산들이 있긴 하지만, 억새가 그려내는 풍경만큼은 민둥산을 따를 곳이 없다. 온 산정을 가득 채운 억새 군락지의 광활한 면적도 면적이지만, 부드러운 곡선의 능선도 일품이고, 주변에 파도처럼 일어선 산 그림자도 근사하다. 산정의 가파른 능선 아래로 정선 남면의 무릉리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것도 인상적이다.

지금 민둥산에는 억새가 한창이다. 억새에는 꽃이 핀다. 억새에 매달린 탐스러운 솜털이 꽃이다. 지금 민둥산은 억새꽃의 바다다. 억새는 순백의 치렁치렁한 솜털이 흩날릴 때가 진짜다. 억새꽃은 오래 피어 있지만 솜털이 탐스러운 은빛으로 반짝이는, 가장 화려한 순간은 길어봐야 보름 남짓이다. 그러니 민둥산으로 억새를 보러 가겠다면 서둘러야 한다. 더 늦어도 억새는 볼 수 있겠지만 눈부신 절정의 감동은 지금 아니면 느낄 수 없다.

# 모욕적인 이름과 잘 지은 이름

민둥산 정상 부근의 능선에는 왜 나무는 자라지 않고 억새만 가득할까. 전설이 있다. 오래전 민둥산 아래에 용마(龍馬) 한 마리가 있었는데, 범상찮은 용마의 출현이 마을의 환란을 예고하는 것이라 여긴 마을 주민들이 두려워한 나머지 말 주인을 죽이고 말았다. 주인을 잃은 용마는 밤낮으로 울어대며 온 산을 돌아다니다 화암면에 있는 용마소에 빠져 죽었는데, 그날 이후로 민둥산에 나무가 자라지 않고 억새만 무성하게 됐다는 얘기다. 산정의 능선에 나무 대신 억새만 남은 것이 용마의 저주였던 셈인데, 그렇다면 저주는 실패다. 억새가 민둥산 아랫마을 주민들이 관광객들을 불러모으는 중요한 자원이 됐으니 말이다.

전설은 말 그대로 전설일 뿐, 민둥산에 나무가 없는 진짜 이유는 석회암 지대라 지형 변화가 심해 나무가 굵게 자라지 못한 데다 산자락 아래에 터를 잡고 살던 화전민들이 화전을 일구기 위해 오래전부터 해마다 산에 불을 놓기를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나무들이 사라진 자리를 억새가 차지해버린 것이다.

지금이야 억새가 색다른 관광명소를 만들어내지만, 과거에 억새 산은 아무 쓸모 따위 없는 불모지 취급을 받았다. 민둥산이라는, 산의 입장이라면 듣기에 ‘좀 모욕적이다’ 싶은 이름이 붙여진 연유다. 그랬던 민둥산이란 이름이 이제는 오히려 직관적으로 드넓은 억새밭을 떠올리게 해 명성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민둥산’이란 이름을 떠올리면 곧바로 머릿속에서 ‘억새’란 단어가 자동생성될 정도니 어찌 보면 기막히게 잘 지은 이름 아닌가.

# 민둥산 억새 이렇게 가자

민둥산이 억새 산행의 대표 명소로 알려지면서 여기저기 자주 소개되니, 쉽게 오를 수 있는 동네 뒷산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민둥산을 오르는 산행코스는 남쪽과 동쪽에 있다. 정상까지 최단 코스는 민둥산 동쪽 발구덕 마을에서 오르는 코스다. 발구덕 마을은 민둥산 7분 능선의 분지에 있다.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차를 타고 발구덕 마을까지 들어가서 거기서부터 산행을 시작하면 정상까지는 30분 남짓이면 충분하다. 이 정도면 뭐 ‘동네 뒷산’이라는 말이 그리 틀리지 않다.

하지만 억새가 필 무렵에 이렇게 등산하는 건 불가능하다. 발구덕 마을까지 이어지는 도로의 등산객 차량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3일까지 이어진 민둥산 억새꽃 축제 기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축제가 끝난 뒤에도 차량통제는 계속되고 있다. 마을의 차량통제는 불가피하다. 산중의 발구덕 마을에 주차공간이 거의 없어 행락객들의 차를 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발구덕 마을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발구덕 마을까지 2.6㎞를 걸어야 하는데 족히 1시간이 걸린다. 발구덕 마을까지 1시간, 거기서 정상까지 30분. 그래도 이 코스가 정상까지 가는 가장 짧고 빠른 길이긴 하다. 빠르게 가는 길이 늘 좋은 것도, 덜 피곤한 것도 아니다. 줄곧 아스팔트를 딛고 가야 하는 이 길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 민둥산 억새, 이렇게 보자

추천하는 건 민둥산 남쪽의 증산초등학교 옆 등산로로 오르는 코스다. 증산초교에서 출발해 정상까지는 급경사코스(2.6㎞)와 완경사코스(3.2㎞) 두 개가 있는데, 완경사라고 해도 가파른 구간이 곳곳에 있어 만만히 볼 일은 아니다. 민둥산 산행을 나들이쯤으로 우습게 보고 왔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급경사코스로 정상에 올랐다가 원점으로 내려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3시간 남짓. 완경사를 택하면 20~30분쯤 더 걸린다. 제법 숨도 차고 땀도 나는, 등산 초보자라면 장딴지가 팍팍해질 정도의 본격 등산 코스지만 민둥산은 그만한 수고를 바치고도 남을 만큼 넉넉한 풍경을 보여준다. 억새군락이 흐드러진 정상 능선을 따라 걷는 맛도 훌륭하고, 정상을 앞두고 뒤돌아보면 역광을 받은 억새가 솜털을 반짝이며 물결치는 모습도 장관이다.

민둥산 정상의 북쪽은 석회암 지형 특유의 가운데가 푹 꺼진 ‘돌리네’ 지형이라 제주의 오름처럼 능선을 따라 둘레를 한 바퀴 돌 수 있다.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능선을 딛고 돌 수 있는데, 살짝 귀띔하자면 ‘억새가 밀집한 군락을 역광으로 바라보며 걸을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야 한다. 억새 감상은 순광보다는 역광이다. 빛의 방향에 따라 억새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역광의 억새꽃은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그 모습을 마음에 담아두려 오래 보고 서 있었다. 야외에서 마스크를 벗고서 3년 만에 만끽하는, 그야말로 보석 같은 가을 풍경이었다.

■ 한치 뒷산 약수길

‘땀 한(汗)’에 ‘산 우뚝할 치(峙)’.‘한치(汗峙)’란 ‘땀나게 오르는 고개’라는 뜻이다. 민둥산의 본래 이름이 ‘한치 뒷산’이다. 한치 뒷산, 그러니까 민둥산 서쪽 자락에는 숨겨진 근사한 드라이브 코스가 있다. 한치 뒷산의 가슴팍쯤 되는 해발 700m를 오르내리며 이어지는 ‘약수길’이다. 화암약수까지 길이 이어졌다고 해서 약수길이다. 이 길을 차로 달리면 부감으로 단풍 물든 가을 산의 색감을 눈에 가득 담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