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ㆍ석담(石潭)ㆍ우재(愚齋)이다. 1536년(중종 31) 음력 12월 26일에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의 셋째 아들로 외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13세의 나이로 합격했으며, 조광조의 문인인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4년 금강산 마가연(摩訶衍)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으나, 이듬해 하산하여 외가인 강릉으로 돌아와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다시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자경문은 입지(立志)ㆍ과언(寡言) 등 11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세운 것이다.
22세(1557년)에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고, 이듬해 예안(禮安)에 낙향해 있던 이황(李滉)을 찾아가 성리학에 관한 논변을 나누었다. 1558년(명종 13) 별시(別試)에서 천문ㆍ기상의 순행과 이변 등에 대해 논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1564년(명종 19년)에 실시된 대과(大科)에서 문과(文科)의 초시(初試)ㆍ복시(覆試)ㆍ전시(殿試)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삼장장원(三場壯元)으로 불렸다. 생원시(生員試)ㆍ진사시(進士試)를 포함해 응시한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사람들에게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대과에 급제한 1564년에 정6품 호조(戶曹) 좌랑(佐郞)으로 관직에 나선 뒤에 예조(禮曹)와 이조(吏曹)의 좌랑을 거쳐 왕에 대한 간쟁과 논박을 담당하던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등의 대간(臺諫)의 직위에 있었다. 1568년(선조 1)에는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 나라에 다녀왔으며, 1569년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校理)로서 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던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여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정철(鄭澈)과 함께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회개혁안에 대해 논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1570년(선조 3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571년 청주목사로 다시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로 낙향했다가 파주 율곡촌(栗谷村)으로 거처를 옮겼다. 1573년(선조 6)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ㆍ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했으며, 1574년(선조 7) 당시의 사회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논한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그해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하지만 다시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관직에 올랐고, 그 뒤 대사헌(大司憲),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했다.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1575년(선조 8) 선조에게 제왕학(帝王學)의 지침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술하여 제출하였고, 1577년(선조 10)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로 낙향하여 어린이 교육을 위해 <격몽요결(擊蒙要訣)>을 편찬했으며, 1580년에는 <기자실기(箕子實記)>를 저술했다. 이 무렵 해주 석담(石潭)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社倉)을 실시하기도 했다.
1581년 대사헌과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을 겸임하며 다시 관직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거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1582년에 이조판서, 1583년에 병조판서가 되어 선조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바치며 십만양병설 등의 개혁안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다시 이조판서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등으로 임명되었다. 1584년 음력 1월 16일에 49세의 나이로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죽었다. 죽은 뒤에는 파주 자운산의 선영에 묻혔으며, 1624년(인조 2)에 문성공(文成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1682년(숙종 8)에는 성혼(成渾)과 함께 공자(孔子)를 섬기는 문묘(文廟)에 우리나라의 명현(名賢)으로 배향되었다.
저술로는 <성학집요(聖學輯要)>, <동호문답(東湖問答)>, <경연일기(經筵日記)>, <천도책(天道策)>, <역수책(易數策)>, <문식책(文式策)>, <격몽요결(擊蒙要訣)>, <만언봉사(萬言封事)>, <학교모범(學校模範)>, <육조계(六條啓)>, <시폐칠조책(時弊七條策)>, <답성호원서(答成浩原書)> 등이 있으며,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등의 문학 작품도 전해진다. 그의 저술들은 1611년(광해군 3) 박여룡(朴汝龍)과 성혼(成渾) 등이 간행한 <율곡문집(栗谷文集)>과 1742년(영조 18)에 이재(李縡)와 이진오(李鎭五) 등이 편찬한 <율곡전서(栗谷全書)>에 실려 전해진다.
[머리글]
이 글은 율곡이 29세(명종 19년) 때 대과(大科)에 장원 급제한 글로써, 변전(變轉)하는 역(易)의 수(數)에 대한 책문(策問)과 대책(對策) 이다.
문(問)
선비가 한 물건의 이치를 끝까지 연구하지 못하는 것도 부끄러워해 야 하는데 하물며 천지의 큼과 상수(象數)194)의 변화이겠는가?
태초에는 혼돈(混沌)195)이 분리되지 않아 원기가 묘망(渺茫)하였으나, 천지가 개벽됨에 만상이 거기에 매이게 되었다. 그 합벽(闔闢) 196)은 누가 주장하는 것일까?
복희(伏羲)가 으뜸으로 뛰어나 천문을 우러러 보고 지리를 굽어살피 며 하도(河圖)197)가 나오자 비로소 팔괘198)를 그었으니 만약 하도 가 나오지 않았다면 팔괘는 끝내 그어질 수 없었겠는가?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은 길이 같고 고도(古道)와 금도(今道)는 일치가 된다. 낙서199)가 나타나자 대우(大禹)가 이를 법 받아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차서를 나열하였다. 두 성인의 소견은 무엇에 의거 하였기에 번다하고 간소한 차이가 있는가?
아니면 거기에 은미한 뜻이 있는 것인가?
하도와 낙서가 위치가 서로 바뀌고 생극(生克)이 바뀌어 기우(奇우 : 음수, 양수)의 수가 크게 서로 다른 것은 하늘이 사람에게 보여주신 뜻이 전후에 다름이 있어서인가?
문왕(文王) · 주공(周公) · 공자(孔子)에 이르러 괘의 이치를 미루어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를 지어서 책(策)으로 만들고 다시 연역(衍 繹)하여 십익(十翼)을 붙이자 역(易)의 도가 크게 세상에 드러났다. 만일 세 성인이 아니었다면 팔괘와 오복의 용(用)이 변전(變轉)하지 못하고 64괘가 끝내 이뤄지지 않았겠는가?
천지 만물의 실정은 무궁하고 64괘의 변화는 한계가 있는데 성인은 이르기를, "비록 귀신이라 하더라도 그 정상을 숨길 수 없다."고 하였으니, 한계가 있는 변화로써 무궁한 실정을 다하려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시서(蓍筮)는 잘못 맞추고 귀복(龜卜)은 잘 맞추는 장단점이 있으나 200) 모두가 밝게 길흉을 고해주는 것이니, 성인의 뜻은 반드시 사람마다 행동거지를 한결같이 귀복과 시서에 따르게 하고자 하여 그런 것인가?
진(秦) · 한(漢)이하로는 역도(易道)가 멸절(滅絶)하여 양웅(揚雄) 201) · 곽박(郭璞)202) · 순풍(淳風)203) · 일행(一行)204)의 무리가 어지럽게 번갈아 일어나서 서로 잘한다고 다투었으니, 과연 그들이 역을 그은 유의(遺意)에 도움이 있었던가?
낙양(洛陽)의 소자(邵子: 이름은 옹(雍), 호는 강절(康節)임)는 학문 이 하늘과 사람을 모두 구명하여 옛 성인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해 가지고 방도(方圖)와 원도(圓圖)를 만들었느데 그것은 무엇을 본받아 그렇게 하였는가?
그리고 원도 가운데서 반드시 구괘(구卦) 를 건괘(乾卦)의 뒤에 놓고, 복괘(復卦)를 곤괘(坤卦)의 뒤에 놓은 것은 무슨 뜻인가?
천지교(天津橋) 위에서 두견새가 우는 소리를 듣고서 소인이 권세를 잡을 줄 알았고, 마른 나뭇가지가 까닭 없이 스스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원부(元夫)205)라는 목수가 와서 벌목할 줄을 알았으니, 이는 성인이「역」을 만들 때 천년 후에 있을 장석(匠石)의 이름과 수 유(수儒)의 화란을 미리 알고서 그렇게 한 것인가?
정자와 주자 두 현인이 희경(羲經: 역을 이름. 복희가 지었기 때문에 이르는 말)에 전(傳: 정전을 이름)과 본의(本義: 주자가 낸 것)를 달았는데 혹 그 주석의 말이 서로 같지 않으니 어떤 것이 잘되고 어떤 것은 잘못된 것인가?
요즘 옥당(玉堂)의 선비를 뽑아 전업(專業)해서 역을 배우며 돌려가며 강론하게 하고 있으니, 만약 이들로 하여금 결정정미(潔淨精微) 한 뜻을 연구하게 한다면 나라를 다스리는데 도움이 있고 격물치지 (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의 학문을 하지 않아도 괜찮겠는가?
설명을 해주기 바란다.
〈 주 〉
194) 상은 천지 만물이 모두 각자 가진 상을 이름이고, 수는 태극(太 極)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4상(象)을, 4상이 8괘를, 8괘가 64 괘를 낳는 유로서 끝없이 생생(生生)하는 것을 이름이다.
195) 천지가 개벽되기 전에 원기(元氣)가 나뉘어지지 않고 한데 엉 켜 있는 모양인데, 곧 개벽이전을 이르는 말이다.
196) 합은 폐(閉)·정(靜)의 뜻이고 벽은 개(開)·동(動)의 뜻인데, 천지의 폐합(閉闔) 개벽(開闢)과 만물의 생육(生育) 사멸(死滅)을 이르 는 말이다.
197) 복희(伏羲) 때에 황하(黃河)에서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그림. 복희는 이를 보고 8괘를 그었다 한다.
198) 복희가 그린 것은 건·태·이·진·손·감·간·곤(乾兌離震巽坎艮坤) 의 여덟 괘이니 이 팔괘가 소성괘(小成卦)이고 팔괘의 뒤에 다시 각 각 팔괘를 가하면 64괘의 대성괘를 이룬다.
199) 우(禹)가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있었다고 하는 45개의 점으로 된 무늬. 우는 이것을 보고 홍범 구주(洪範九疇)를 만들었다 한다.
200) 서단귀장(筮短龜長)이라고도 한다. 귀복이 잘 맞고 시초점은 그보다 덜 맞는다는 말이다. 201)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사람. 「태현경(太玄經)」「양자법 언(揭子法言)」등의 저서가 있다.
202) 동진(東晋)사람으로 자는 경순(景純), 박학고재로 그의 사부는 동진 제1이었다고 한다. 오행 천문 복서(五行天文卜筮)에 통달하였 고, 이아(爾雅) 산해경(山海經) 초사(楚辭)등을 주석 하였으며, 또 동림(洞林) 신림(新林)등 복서서를 저술하였다.
203) 당나라 사람으로 역산(曆算)에 밝았다 한다. 정관(貞觀)초에 태 사령(太史令)이 되고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였다. 기사점(己巳占) 등의 저서가 있다. 204) 당나라 중으로 밀교의 개조이다. 205) 강절은 마른 가지가 저절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화택규괘(火澤 <규0x58CD>卦)의 구사효(九四爻)를 후천의 우물성괘법(寓物成卦 法)에 의하여 연득(演得)하였다. 그 효사에 원부를 만난다는 말이 있 는데 효사의 의미는 규고(<<규0x58CD>0x58CD>孤)한 중에 동덕 (同德)의 선인을 만나 무구(無咎)하게 된다는 것으로 어려운 속에서 도 동지의 구원을 받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흉징(凶 徵)에 대한 것이므로 벌목의 불길로 말한 것이다. 《규九四》
역수책(易數策)
대(對) 일리(一理)가 혼성(混成)하고 이기(二氣)가 유행(流行)하는 것과 천 지의 큼과 사물의 변화가 모두 이기(理氣)의 묘용(妙用)이 아닌 것 이 없으니, 이 말을 아는 자와 더불어 역을 논할 수 있습니다. 이제 집사(執事:일을 관장하는 사람이며 존칭도 된다.) 선생께서 특별히 역학의 은미한 뜻을 들어 승학(承學:아직 배우는 사람이라는 겸칭) 에게 하문(下問)하여 연구한 말을 듣고자 하시나 어리석은 나는 천 박한 식견으로 위편(韋編)206)이 끊어지도록 읽지도 못하였고 침서 (枕書)207)를 독파(讀破)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우러러 고명하신 물 음에 만족할 만한 답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성의(聖意) 를 받았으므로 감히 입을 다물 수 없어 아래와 같이 말씀드리겠습니 다. 만물은 하나의 오행이요,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입니다. 태극은 억지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일 뿐, 그 체(體) 는 역(易)이고 그 이치는 도(道)이고 그 용(用)은 신(神)입니다.
그러므로 천지자연의 역이 있고 복희(伏羲)의 역이 있으며 문왕·주 공의 역이 있고 공자의 역이 있습니다. 자연의 역은 팔괘로써 구할 수 없고 복희의 역은 문자로써 구할 수 없습니다. 문왕·주공이 있은 뒤에 역도의 쓰임이 세상에 밝아졌으며, 공자가 있은 뒤에 역학의 뜻이 후세에 밝아졌습니다. 그 후로는 도통이 전해지지 않아 사람마 다 이견을 품어 비록 역학을 엿본다 하나 역의 본래의 뜻에 근본하 지 않고 문사(文辭)와 상수(象數)를 멋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혹은 문자에 구애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송나라의 진유(眞儒)가 능히 유서(遺緖)를 계승하여 전성(前聖)이 다 말씀하지 않으신 깊은 뜻을 발명하였으므로 사도(斯道)가 다시 밝아졌습니다. 저는 이것을 인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저 형이상(形而上)은 자연의 이치(理)이고 형이하(形而下)는 자연 의 기운(氣)입니다. 이치가 있으면 이 기운이 있지 않을 수 없고 이 기운이 있으면 만물을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기운이 동(動)하면 양(陽)이 되고 정(精)하면 음(陰)이 되니, 한번 동하고 한번 정하는 것은 기운이고 동하게 하고 정하게 하는 것은 이치입니다.
음양이 나누임에 이의(二儀: 천지天地)가 비로소 개벽되고 이의가 개벽함에 만물의 변화가 생기는데, 그렇게 된 것은 기운이고 그렇게 되는 까 닭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저는 누가 이것을 주장하는지 알 수 없습 니다.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혼돈한 기운이 비록 천지의 시초이지만 또 혼돈 이전에 천지만물이 몇 번이나 취합(聚合)하였다가 몇 번이나 분산되었는지는 모르겠습 니다.
왕복이 한계가 없고 종시가 단서가 없으니, 아득히 바라보면 오직 무극(無極)일 뿐인 듯합니다. 고석(古昔)을 상고해 보면 복희 가 으뜸으로 뛰어나 도통이 시작됨에 하늘이 도를 아끼지 않고 땅이 보물을 아끼지 않아 이에 용마가 하도(河圖)를 지고 나왔습니다. <복희>는 이것을 법받아 팔괘를 그었으니, 대개 천지는 반드시 성인을 기다린 뒤에 이 수(數)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성인은 반드시 문서(文瑞)를 기다린 뒤에 이 이치를 세상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은 성인을 내지 않을 수도, 문서를 내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니, 이것은 자연의 응(應)이며 하늘과 사람이 서로 통하는 미묘 함입니다. 그러나 역 속에 태극이 있어 이것이 양의(兩儀: 음양)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 태양太陽· 소음少陰· 소양小陽· 태음太陰) 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는 것인데, 성인이 우러러 천문을 보시고 굽어 지리를 살피셨으니 천지 사이의 온갖 만물이 일음(一陰)·일양 (一陽)의 이치가 아님이 없었습니다.
이 이치가 있으면 이 상(象)이 있고 이 상이 있으면 이 수(數)가 있는 것이니, 어찌 다만 하도만이 그러할 뿐이겠습니까. 한 포기의 풀과 한 그루의 나무도 또한 이를 인하여 괘를 그을 수 있으니, 그렇다면 하도가 아직 나오기 이전에 팔괘의 형태가 이미 복희의 마음 가운데 갖추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정자의 매토(賣)의 설에 대하여 깊이 느낀 바가 있습니 다. 대우(大禹:우임금)가 홍수를 다스려 지평천성(地平天成)함에 미쳐 신귀(神龜)가 낙서(洛書)를 바쳤습니다.
대우가 이를 법받아 구주 (九疇)208)를 펼쳐 놓으니 임금이 정치하는 심법(心法)이 여기에 담 기게 되었습니다. 하도의 수는 온전한 것을 주로 하기 때문에 십이 세 끝이 났으니, 천지자연의 상이고, 낙서의 수는 변화를 주로 하기 때문에 구에서 끝이 났으니 인사에 있어서 당연한 도입니다. 복희는 단지 하도에서만 얻었고 대우는 단지 낙서에서만 얻었으므로 번다 하고 간소한 차이가 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하도와 낙서가 서로 경 위(經緯:날과 씨)가 되고 팔괘와 구주가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전 후가 한 법도이며 고금이 한 이치인데, 또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대개 일·륙(一·六)이 북에 거하고 이·칠(二·七)이 남에 거하며 삼·팔 (三·八)이 동에 거하고 사·구(四·九)가 서에 거하며 오·십(五·十)은 중앙에 거하여 우수는 많고 기수는 모자라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면서 서로 생하는 것은 하도의 수이고, 구를 이고[戴九] 일을 밟 으며[履一] 좌는 삼이오[左三] 우는 칠이며[右七] 이·사는 어깨가 되고[二四爲肩] 육·팔은 발이 되며[六八爲足] 오수가 중앙에 거하 여[五數居中] 기수는 많고 우수는 모자라며 바른쪽에서 왼쪽으로 돌면서 서로 극(克)하는 것은 낙서의 수입니다.
복희가 아니면 그 누가 전체를 들어서 상수(常數)의 체를 보여주겠으며 대우가 아니면 그 누가 홍범(洪範)을 서차(서次)하여 변수(變數)의 용을 보여 주었 겠습니까. 그러나 낙서의 수를 인하여 팔괘를 그을 수도 있고 하도 의 수를 인하여 구주를 서차할 수도 있으니, 하도가 일찍이 낙서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낙서도 일찍이 하도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닙 니다.
기수와 우수의 생하고 극하는 것이 크게 다르나 그 이치는 하 나이므로, 이 이치가 하늘에 있어서는 팔괘가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구주가 되는 것이니 저는 전후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 복희의 역에는 다만 괘효만 있으니 초기에 전연 문자가 없어서 인데 천지의 이치와 음양의 변화는 모두 여기에 갖추어졌습니다. 그러던 것이 중고에 미쳐서는 백성의 거짓이 날로 심하여졌으므로 문왕이 이것을 근심하여 괘의(卦義: 괘가 지니고 있는 의미)에 근본하 여 단사(彖辭: 한괘의 의미를 단정한 말.)를 부쳤고 주공에 미쳐서는 사물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어 심오한 것을 들추어내고 음미한 것을 드러내어 밝게 천하에 보여주었습니다.
주나라의 덕이 쇠퇴하여 이 도가 다시 어두워지자 우리 부자께서 계사(繫辭)를 지어 역경의 뜻을 발휘하였습니다. 세분 성인께서 한 마음으로 복희역을 연역(衍 繹)하여 역상(易象)을 천고에 드리우심에 해가 중천에 오른 것 같이 밝았습니다. 기자(箕子)가 홍범을 무왕에게 베푼 것도 또한 대우의 뜻을 기술한 것입니다.
대저 성인은 덕이 천지와 같으며 밝음이 일월을 아울렀으며 사시와 더불어 그 차서가 같으며 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이 같으시어 심술이 동하는데서 구하여 정신이 운행되는 데서 터득하시니, 성인이 아니고서야 어찌 능히 역의 은미한 의미를 알겠습니까. 대역(大易)의 본 의는 실리(實理)일 따름이고 진실한 이치는 휴식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니, 하늘인들 어찌 세분 성인을 내지 않을 수 있으며 세분 성인 인들 어찌 대역을 연역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64괘는 복희가 이미 그 상을 그은 것이니 세분 성인을 기다린 뒤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닙니다. 크도다 역이여! 이로써 성명(性命)의 이치를 순하게 하고, 이로써 유명(幽明)의 까닭을 통달하고 이로써 사물의 실정을 극진히 하였으니, 그 체는 지극히 커서 포함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용은 지극히 신묘하여 존재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괘의 변화가 유한(有限)한 줄만 알고 64괘의 용이 무진(無盡)하다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하나에서 둘이 되는 것이라면 하나가 둘의 근본인데 어찌 둘은 많고 하나는 적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둘에서 넷이 되고 넷에 서 여덟이 되고 여덟에서 64가 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64로부터 무궁한데 이르는 것이고 보면 64는 또한 무궁의 근본이니, 어찌 무궁을 많다 하고 64를 적다 하겠습니까.
그 괘는 64이지만 그 이치와 용은 무궁합니다. 이러므로 띠는 하나만이 아니고 괘는 정해진 상이 없으며 일은 하나만이 아니고 효(爻)는 정해진 위(位)가 없습니다. 선유씨(先儒氏)가 말하기를, '한 때로만 괘를 탐색하면 변함이 없는 데 구애되니 역이 아니오, 한 일로만 효를 구명하면 막히어 통하지 않으니 역이 아니다.'하였으니, 반드시 그 이치를 궁구하고 그 변화 를 다한 뒤에야 역을 안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성인이 이른바 귀신도 그 정상을 숨길 수 없다고 하신 것이나, 길흉의 조짐(兆朕)은 반드시 복서에 상고하여야 합니다. 대개 사람의 도모(圖謀)는 마음을 쓰는 것을 면할 수 없고 마음을 쓰면 사(私)가 있음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옛적의 성왕은 황극(皇極: 대중지정大中至正의 도道) 을 세우시고도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않고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귀신의 지모(智謀)를 참고하여 그 의혹을 해결하려고 반드시 복서하는 사람을 선택하여 세워 복서를 명한 것은 마음을 말끔히 세척(洗滌)하고 재계하여 천명을 청종하려는 소이였읍니다.
무왕은 지 극한 어진분으로서 지극히 어질지 못한 주(紂)를 치면서도 오히려, "짐의 꿈이 짐의 복(卜)과 합한다."고 하였으니 성인이 복서에 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후세에서는 적합한 사람을 선택 하지않고 그 귀시(龜蓍)도 사사로운 마음으로 나오고 있으니 복서 하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아! 진·한(秦漢) 이하로는 성학이 전해지지 않아 역도(易道)가 민멸 (泯滅)되었으므로 역의 전체를 아는 자는 참으로 얻을 수 없었고 역 의 일부분만을 아는 사람도 대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개 역은 만사의 근본으로 선악이 여기에서 생겨나고 사정(邪正)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역을 배우다가 잘못되어 종지(宗旨)를 잃어 사설(邪說)로 흘러들어간 자도 있었읍니다.
한나라의 양웅과 진(晋) 나라의 곽박과 당나라의 이순풍과 일행의 무리는 태현(太玄)209) 을 저술하기도 하고 성명을 담론하기도 하고 역수(曆數)를 추산하기도 하였으니 역의 일단을 알았다고 이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역 에 대해서만 추구하고 이치에 대해서는 추구하지 않았으며, 한갓 그러한 사실만을 알았을 뿐, 그렇게 되는 까닭은 아지 못하여 마침내 역학의 종지를 잃었으니 어찌 네분 성인의 유의(遺意)에 도움이 있겠습니까.
이치를 아지 못하고서도 역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위백양(魏伯陽)210)의 참동계(參同契) 따위도 역시 역을 배우다가 사설에 흘러 들어간 것이니, 어찌 다만 양웅 의 무리만이 그러할 뿐이겠습니까. 천년위에 태어나서 네분 성인의 마음을 묵계(默契)하고 학문이 천일 (天人)의 도(道)를 궁구하여 성리에 통한 분은 오직 소자(昭子: 강절 소옹康節 邵雍) 뿐인가 합니다. 소자의 학문은 진희이(陳希夷)211) 로부터 나왔으나 자기혼자만이 아는 오묘함은 스승보다 낫습니다.
복희의 괘(선천 괘)를 추연하여 방도(方圖)와 원도(圓圖)를 만들었 는데, 밖의 원은 양이 동하여 하늘이 된 것이고 중앙의 방(方)은 음이 정하여 땅이 된 것이니 천지의 이치가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원도 가운데 건(乾)은 오중(午中: 원도의 위 중앙부는 남쪽이다)에서 다하여 끝나고 곤(坤)은 자중(子中: 원도의 아래 중앙부는 북쪽이 다)에서 다하여 끝나며 구( )괘는 음이 비로소 생긴 것이오 복(復)괘 는 양이 비로소 생긴 것이며, 건은 양이 극하여 음을 생하기 때문에 구괘를 건괘의 다음에 놓고 곤은 음이 극하여 양을 생하기 때문에 복괘를 곤괘의 다음에 놓은 것이니 모두 이치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동지는 복괘가 되어 일양(一陽)이 처음 동하고 하지는 구괘가 되어 일음(一陰)이 처음 싹트니 어찌 이 도표와 더불어 서로 상응하지 않습니까. 소자는 이미 역리에 밝고 또 역수(易數)에도 정통하여 복희의 선천(先天: 복희팔괘에 따른 것)의 학과 문왕의 후천(後天: 문왕팔괘에 따른 것)의 수에 대하여 조금도 막힘 없이 정미하게 분석하여 천지의 종시(終始)와 물화(物化)에 감응(感應)을 극진히 하 여 능히 미래의 일을 알고 지혜 운용하기를 귀신같이 하였으니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천기가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흐르는 것을 보고서 문득 소인이 용 사(用事)할 줄을 안 것은 이치로써 때를 관찰하여 미연에 미리 안것 이고, 마른 가지가 바람도 없는데 스스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문득 장석(匠石)이 와서 벨줄을 안 것은 경수로써 사물을 미루어 장차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안 것입니다. 이치로써 미루면 점을 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인데 어찌 반드시 천진교(天津橋)에서 두견의 울음을 들은 뒤에야 국운이 어지러워질 것을 알겠읍니까.
수로써 미루는 것은 점이 아니면 안되므로 반드시 사물에 부쳐 성괘(成卦: 중괘를 하나 만드는 것.)한 뒤에야 물건의 운수가 다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성인께서 역을 만드시어 무궁한 용(用)을 하나의 간편(簡編:책)속에 부쳐 놓으신 것뿐이니 어찌 아무 일을 위하여 아무 괘를 그으셨겠습니까. 그 이치는 지극히 정미하고 그 상(象)은 지극히 현저하니, 오직 이치를 궁구한 사람이라야만 그 변화를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원부(元夫)의 이름 따위는 우연이니 더욱 미리 헤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역리가 무궁하다 하여 반드시 일마다에 끌어 붙이려 한다면 일곡(一曲:무궁한 전체가 아니고 그 중의 한가지 따위)이 아니겠습 니까. 저 정주(程朱) 이현(二賢)께서는 다함께 도통을 전수 받아 역학을 밝히시고 이 도가 없어지는 것을 슬퍼하시어 학자에게 진원(眞源)을 보여주었습니다.
정자의 전(傳:정 이의 역경주석)은 성인의 유지(遺 旨)를 발명하였고 주자의 본의(本義:주자의 해석)는 길흉의 정수(定 數)를 밝힌 것인데, 그들의 독득(獨得)한 견해는 언어와 문자 사이에서 구할 수 없으니, 비록 주석한 말이 서로 같지 않을지라도 제가 어찌 감히 그 잘잘못을 경솔히 논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성조(盛朝)에서는 사문(斯文:유학)이 크게 떨치어 옥당(玉堂)의 선비가 전업(專業)으로 역을 배워 깊이 결정정미(潔淨 精微)212)한 뜻을 밝히고 개물성무(開物成務)213)의 도를 천명하여 우리 임금님의 문명(文明:학문과 덕행이며 선정에 따르는 문채.) 214)하신 덕을 이어 받들고 우리 백성의 마땅히 행하여야할 도리를 보여주어 치교(治敎:다스리고 가르침.)가 아름답게 밝고 저 상서로운 봉조(鳳鳥:성덕에 응하여 이른다는 새.)가 이르고 도서(圖書: 하 도낙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 볼만 하니, 어찌 도움이 작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역의 도는 체용일원(體用一源: 보이지 않는 체와 나 타난 용이 한 근원이라는 말.) 현미무간(顯微無間: 현으로 인하여 미를 볼 수가 있으므로 사이가 없다는 말.)215) 한 것이니 진실로 격물 치지가 아니고서는 그 이치를 볼 수 없고 진실로 성의 정심(誠意正 心)이 아니고서는 그 진실을 실천할 수 없으니, 격치 성정(格致誠正) 은 역 가운데 한가지 일입니다.
격물 치지를 하지 않고서 성인의 도 를 보고자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단항(斷港: 물이 마른 항구)에 배를 띄워 큰 바다로 내려가기를 구한는 것과 같고, 성의 정심을 하지 않고서 성인의 도에 가고자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촌보도 옮기지 않으 면서 태화(泰華: 태산과 화산)에 오르기를 구하는 것과 같으니, 대역 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면 이 격치 성정을 버리고서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제가 집사의 물으심에 이미 대답하였으나 또 집사께 사뢸 것이 있습니다. "상천의 일이 무성무취(無聲無臭:하늘의 하는 일은 소리도 없 고 냄새도 없다는 말.)216) 한 것은 역의 지극히 은미한 것이오, 소리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217)는 것은 역 의 지극히 현저한 것이며 하늘이 높은 것과 땅이 두터운 것과 일월이 밝은 것과 인물이 번성한 것과 산이 솟고 내가 흐르는 것은 역의 용(用)이고 하늘이 높은 까닭과 땅이 두터운 까닭과 일월이 밝은 까닭과 인물이 번성한 것과 산과 내가 솟고 흐르는 까닭은 역의 체(體) 이니, 크게는 천지 밖과 작게는 추호(秋毫)의 끝까지 어찌 대역의 밖을 벗어나는 것이 있겠습니까.
복희가 획괘(획卦)하심에 역이 괘효에 붙여지고, 문왕이 단(彖)을 지으심에 역이 단상(彖象)에 붙여지고, 공자가 계사(繫辭)218)하심에 역이 계사에 붙여졌으니, 괘효(卦 爻)와 단사(彖辭)는 역이 이미 형현(形見)한 것이지만, 모름지기 복희가 팔괘를 긋지 않아 역이 형현하기 전에는 역이 없었다고 이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집사께서는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삼가 대합니다."
< 주 〉
206) 옛적의 대쪽으로 엮은 책은 부드러운 가죽끈으로 편철되었으 므로 공자는 만년에 역을 좋아하여 이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읽었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역학연구가 부족하다는 겸사로써 위편 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207) 관매역수에 보면 강절은 잠을 자다가 깨어 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베고 있던 와침(瓦枕)을 던졌더니 와침이 뻐개졌는데 거기에는 아무 연월일에 현인 강절은 격서침파(擊鼠枕破)라고 써있더라는 것 이다. 그래서 도공(陶工)에게 물어 은자를 찾아 비전을 받았다는 말 이 있다. 강절만큼 역학에 얻음이 있어야 이런 일이 있는데 자신은 그만 못하다는 것.
208) 우(禹)가 홍수를 다스림에 하늘이 준 우언(禹言) 대법(大法)이 아홉 가지이니, 요·순·우 임금 이래의 정치사상을 집대성해 놓은 홍 범구주(洪範九疇)를 말한다.
209) 양웅(揚雄)의 찬이니 총10권이다. 역에 준의(準擬)해서 지은 것이다.
210) 한나라 사람이니 도술을 좋아하여 산중에 들어가 신단(神丹)을 만들었다고 한다. 참동계(參同契)는 백양의 저술로서 주역에 비의 (比擬)하여 말하고 있으나 실은 연단(煉丹)을 이른 것이다. 이에 대 하여 주자가 말한 것이 있다.
211) 진희이(陳希夷). 이름은 단()이니 희이는 사호(賜號)이다. 태극 도설은 주렴계의 자작이 라고도 하나 청대 황종염(黃宗炎)의 고증에 의하면 위 백양에서 시작되어 종리(鐘離) 여동빈(呂洞賓)을 거쳐 진 단에 전해졌고 다시 충방(<0x76E0>放) 목수백장(穆脩伯長)을 거쳐 염계에 전해졌다고 한다. 하여간 태극도설에 대하여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212) 결정정미라는 말은 주자의 말로서 역설강령(易說綱領)에 보인다. 역은 다른 경전과 같이 실사를 이른 것이 아니고 현공설(縣空說) 일 뿐임을 이른 것이다. 그래서 주자는 이말은 불범수(不犯手)라고 하였다.
213) 사람은 무지하면 의혹되고 주저한다. 그래서 복서를 하여 길흉 이 판단되면 길한 일을 하는데 용기가 날 것이므로 사업을 하게 되 고 성공을 가져오게 된다. 물은 인물이요 무는 사무를 이른다고 주자는 어류(語類)에서 일렀다. 《易 繫辭 上》
214) 학덕이 얼마만큼 있나 그에 정비례하여 나타나는 문학적인 광채를 이른다. 건괘 九二효상에 현룡재전·천하문명(見龍在田天下文 明)이라 하였고 서경 순전에 준철문명(濬哲文明)이라고 있다. 원시 사회에서 문명사회에로라는 문명속에 이 문명도 포함되나 기계문명 과 대칠할 때는 의미가 다르다.
215) 정이천의 역전서(易傳序)에 나오는 말이다. 지미(至微)한 이 (理)와 지저(至著)한 상(象)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형이상의 이는 지극히 은미하여 나타나지 않고 형이하의 이는 항시 나타나고 있다. 이로부터 말하면 이의 용은 이의 체속에 이미 갖추어지고 있으니 일 원이고 상으로부터 말하면 현저한 속에 은미한 것이 들어 있으니 무관하다.
216) 《詩 大雅 文王》에 보이는 말이다. 중용은 명덕의 극치는 성색을 가하지 않고 자연히 화하여 그 무엇이 그렇게 하는 것인지 모르는 것임을 시의 이말을 인용하여 비유하고 밝힌 것이다. 주자는 시의 이 구절을 태극도설의 무극이태극을 해설하는데 인용하였다. 이의 형이상의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217) 《詩 大雅 旱麓》에 보이는 구절이니 자사는 이를 인용하여 연비어약 즉 천지상하에 화육이 유행하지 않음이 없는 것을 일러 도 의 비(費)함을 밝힌 것이다. 이의 용을 말한 것이니 그래서 율곡은 역의 지현(至顯)자라고 하였다.
218) 계사: 이어 맨 말이라는 뜻이니 역의 괘효의 밑에 단 단상 십익 (彖象十翼) 등을 말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상하전의 계사만을 이르는 말로 쓰고 있다.
[원문]
對一理渾成二氣流行天地之大事物之變莫非理氣之玅用也知此說者可與論易也今執事先生特舉易學之微意下詢承學欲聞研覈之說愚也糟粕淺見韋編未絕枕書未破安足以仰塞明問旣辱盛意不敢囚舌而爲之說曰萬物一五行也五行一陰陽也陰陽一太極也太極亦強名耳其體則謂之易其理則謂之道其用則謂之神是故有天地自然之
易有伏羲之易有文王周公之易有孔子之易自然之易則不可以八卦求也伏羲之易則不可以文字求也有文王周公然後易道之用明於世有孔子然後易學之義昭於後厥後道統不傳人懷異見雖窺易學不本其初文辭象數或肆或拘有宋眞儒克紹遺緖發前聖之餘蘊而斯道復明矣愚請因是而白之夫形而上者自然之理也形而下者自然之氣也有是理則不得不有是氣有是氣則不得不生萬物是氣動則爲陽靜則爲陰一動一靜者氣也動之靜之者理也陰陽旣分二儀肇闢二儀旣闢萬化乃生其然者氣也其所以然者理也愚未知孰主張是不
過曰自然而然耳混沌之氣雖爲天地之始而又未知混沌之前天地萬物幾聚幾散耶往復無際終始無端眇而視之其惟無極乎若稽古昔伏羲首出道統攸始天不愛道地不愛寶於是龍馬負圖于以則之乃畫八卦蓋天地必待聖人然後乃以是數示之人聖人必待文瑞然後乃以是理著於世天不得不生聖人亦不得不出文瑞也此則自然之應而天人交與之玅也然而易有太極是生兩儀兩儀生四象四象生八卦聖人仰觀俯察天地之閒萬物之衆無非一陰一陽之理有是理則有是象有是象則有是數豈獨河圖爲然哉一草一木亦可因之畫卦則河
圖未出之前八卦之形已具於伏羲方寸中矣愚於程子賣兔之說深有感焉及乎大禹治水地平天成神龜貢書于以則之以敘九疇人君爲治之心法於是乎在焉河圖之數主全故極于十而天地自然之象也洛書之數主變故極于九而人事當然之道也伏羲獨得乎圖大禹獨得乎書雖若煩簡之不同其實則河圖洛書相爲經緯八卦九疇互爲表裏前後一揆古今一致又何疑哉蓋一六居北二七居南三八居東四九居西五十居中耦贏而奇乏左旋而相生者河圖之數也戴九履一左三右七二四爲肩六八爲足五數居中奇贏而耦乏右旋而相克者洛書
之數也微伏羲孰能揭其全以示常數之體微大禹孰能敘洪範以示變數之用耶然而洛書之數亦可因之以畫八卦河圖之數亦可因之以敘九疇圖未始不爲書書未始不爲圖奇耦生克雖曰懸絕而其理則一也此理在天而爲八卦在人而爲九疇愚未見前後之有異也噫伏羲之易只有卦爻初無文字天地之理陰陽之變畢具於此降及中古民僞日滋文王是憂乃本卦義以繫彖辭爰及周公因事設敎鉤深闡微昭示天下周德旣衰斯道復晦惟我夫子乃作繫辭發揮經義三聖一心以衍羲易垂象千古如日之中箕子之陳洪範于武王者亦述大禹之意
也夫聖人德合天地明竝日月與四時合其序與鬼神合其吉凶求之於心術之動得之於精神之運非聖人烏能知易之微意乎大易之義實理而已眞實之理不容休息則上天安得不生三聖三聖安得不衍大易哉若六十四卦則伏羲已畫其象不待三聖然後乃成也大哉易也以之順性命之理以之通幽明之故以之盡事物之情其體至大而無不包其用至神而無不存人知六十四卦之變有限而不知六十四卦之用無盡也自一而二則一者二之本也其可謂二多而一少乎自二而四自四而八自八而六十四卦亦猶此也自六十四而至於無窮則六十四
亦無窮之本也其可以無窮爲多而六十四爲少乎其卦則六十四而其理無窮其用亦無窮也是故時不一而卦無定象事不一而爻無定位先儒氏曰以一時而索卦則拘於無變非易也以一事而明爻則窒而不通非易也必也窮其理而盡其變然後可謂知易矣聖人所謂鬼神莫能遁其情狀者豈欺我哉易者所以定吉凶而生大業者也吉凶之兆必稽卜筮蓋人謀未免乎有心有心未免乎有私是故古之聖王皇極雖建而不敢自是國有大事參諸鬼謀以決其疑必擇建立卜筮人乃命卜筮所以洗心齋戒以聽天命也武王以至仁伐至不仁尙曰朕夢協朕
卜則聖人之謀及卜筮斯可知矣但後世不擇其人其龜蓍又出於私心則與不卜何異哉嗚呼秦漢以下聖學不傳易道遂泯知易之全體者固不可得知易之一端者亦不世出蓋易者萬事之本也善惡由是而生邪正由是而出是故學易而失其宗則流於邪說者亦有之矣漢之揚雄晉之郭璞唐之李淳風一行之徒或著太玄或談性命或推曆數可謂知易之一端矣然而惟求於易而不求於理徒見其然不見其所以然卒失易學之宗則安能有補於四聖之遺意歟不知理而能知易者愚未之聞也若魏伯陽之參同契亦學易而流於邪說者也豈特揚雄輩爲
然哉若其生于千載之下得契四聖之心學究天人通乎性理者其惟邵子乎邵子之學出自陳希夷而其獨知之玅則靑出於藍而靑於藍者也推伏羲之卦作方圓之圖圓於外者爲陽動而爲天者也方於中者爲陰靜而爲地者也天地之理皆在是矣圓圖之中乾盡午中坤盡子中姤卦則陰之始生者也復卦則陽之始生者也乾陽極而生陰故置姤於乾後坤陰極而生陽故置復於坤後皆可以理推也冬至爲復一陽初動夏至爲姤一陰初萌豈不與此圖相應歟邵子旣明易理又精易數於伏羲先天之學文王後天之數剖析精微遊刃無礙盡天地之終始盡
物化之感應能知未來運智如神夫豈易言哉天氣自南而北則便知小人之用事此則以理觀時而逆見其未然也枯枝無風而墜則便知匠石之來伐此則以數推物而預知其將然也以理而推則不待占而可見矣何必天津鵑叫然後乃知國步多艱耶以數而推則非占不可也必待寓物成卦然後乃知物數當盡也聖人作易寓無窮之用於一簡編耳豈必爲某事而畫某卦哉其理至微其象至著惟窮理者可以盡其變耳若元夫之名則偶然也尤不可逆料也易理無窮而必欲事事牽合則無乃一曲乎若夫程朱二賢俱傳道統洞明易學悼斯道之湮晦示學
者以眞源程子之傳則發聖人之遺旨焉朱子之本義則明吉凶之定數焉其所獨見者不可求之言語文字閒也雖或註語之不同愚安敢輕議其得失哉恭惟 盛朝斯文大振玉堂之士專業學易深明潔淨精微之義闡揚開物成務之道承我 王文明之德示我民當行之理佇見治敎休明鳳至圖出豈曰小補之哉然而易之爲道體用一源顯微無閒苟非格物致知則不得見其理苟非誠意正心則不得踐其實格致誠正易中之一事也不格致而欲見聖人之道則譬如航于斷港而求泛大洋也不誠正而欲之聖人之道則譬如不移寸步而求陟泰華也欲學
大易者捨是何以哉愚旣對執事之問而又有復於執事焉夫上天之載無聲無臭者易之至微者也鳶飛戾天魚躍于淵者易之至顯者也天之高地之厚日月之明人物之繁山川之流峙者易之用也天之所以高地之所以厚日月之所以明人物之所以繁山川之所以流峙者易之體也大而天地之外小而秋毫之末安有出於大易之外者哉伏羲畫卦則此易寓於卦爻文王作彖則此易寓於彖象孔子繫辭則此易寓於繫辭卦爻彖辭則易之已形已見者也須知伏羲未畫八卦此易未形未見之前不可謂無易也執事以爲何如謹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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