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백민정_조선유학에 오늘을 묻다_02

醉月 2013. 6. 21. 01:30

주자학 경계를 넘어 군신의 경계까지 흔들다

철인왕국의 기획자 정도전

 

▲ 정도전
1388년 유명한 사건 하나가 발발한다. 요동 정벌에 나선 고려의 무장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이다. 이 사건은 왕조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여말선초(麗末鮮初)로 알려진 격동의 14세기, 한반도는 친원(親元)정책에 급급한 고위층 정치가, 사장학(詞章學)에 빠져 현실성을 잃은 낡은 유학, 낯 뜨거울 정도로 세속화된 불교가 혼재했다. 마지막 몸부림처럼 반짝하고 명멸한 공민왕의 짧은 개혁과 뒤이은 죽음은, 권문세족의 횡포에 지친 젊은 지식인들을 격분시켰다.

공민왕의 유교 부흥과 성균관 개혁의 바람을 타고 정도전은 30세(1371년)에 성균박사와 태상박사의 지위에 올랐다. 스승이자 절친한 선배인 이색·이숭인·정몽주가 그를 천거했다. 그러나 3년 뒤 공민왕이 암살되고 우왕이 즉위하며 친원파가 득세하자 의협심에 불탄 정도전은 원의 사신 접대 문제로 마찰을 빚고 전라도 나주 거평부곡에 유배된다. “예부터 사람은 한 번 죽을 뿐이니 살기를 탐하는 것은 편치 않은 일이다.(自古有一死, 愉生非所安)” 정도전은 ‘감흥(感興)’이란 오언시를 읊으며 유배 길에 올랐다.

9년의 긴 유배를 마치고 집터가 있던 개경 삼각산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미워한 고위관리 때문에 쫓겨났고, 부평부의 남촌으로, 다시 김포로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1382년 함주(咸州) 막사로 이성계를 찾아간다. 이성계는 왜구 토벌로 명성이 높았으며 당시 동북지방의 방위책임자로 있었다. 신국가 건설을 기획한 지식인 정도전과 용맹한 장수 이성계의 극적 만남이 조선 건국을 찬양한 ‘용비어천가’에 전해진다.

막강한 군사력을 등에 업은 젊은 지식인의 개혁안은 순풍에 돛 단 배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위화도 회군 후 본격적으로 합세한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는 우왕·창왕을 폐위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공양왕을 후사로 세운 뒤 이들은 땅주인들이 갖고 있던 전국의 토지문서를 불태우고 중앙 정부 관제를 개편하는 등 자신들의 정치 구상을 재빠르게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정몽주가 살해되자 곧바로 이성계를 추대해 왕으로 올리는 ‘역성(易姓)’ 혁명을 감행했다. 1392년 7월 17일이었다. 475년간 존속한 고려왕조는 공양왕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무혈혁명으로 알려진 이날의 왕조교체는 정도전·조준·남은 등 조선의 개국공신이 공양왕을 찾아가 옥새를 요구하고 ‘선양(禪讓·천명을 받은 자에게 평화적으로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공표한 것으로 끝을 맺었다.

정도전과 개혁파에 대한 사후 평가와 관계없이 조선 건국은 오늘날 역성혁명으로 기억된다. 역성혁명의 경전적 근거는 중국 고전 ‘맹자’에서 찾을 수 있다. ‘맹자’ 양혜왕의 ‘군주시해’ 사건, ‘맹자’ 진심(盡心)의 ‘군주방벌론’이 그것이다. 제선왕은 신하인 탕(湯)과 무(武)가, 천자(天子)로 모시던 걸(桀)과 주(紂)를 살해한 사건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맹자는 인의(仁義)를 저버린 평범한 남자(匹夫)를 죽였을 뿐 군주를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한편 제자 공손추가 어질지 못한 군주를 방벌(放伐)할 수 있는지 물었을 때 맹자는 이윤 같은 현명한 신하가 잔악한 군주를 방벌할 순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권력의 찬탈이라고 일축했다. 분분한 해석을 낳은 맹자의 발언은 비도덕적 군주를 내쫓거나 죽일 수 있는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맹자’를 접했던 정도전과 개혁파들도 역성혁명의 논리와 가능성을 타진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혁명이 그렇듯이 ‘역성혁명’이란, 왕조를 교체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불가피한 상황에서 초래된 필연적 사건이란 점을 사후에 정당화한 표현이다. 혁명으로 불리는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기본적으로 권력의 찬탈이자 일종의 쿠데타다. 그것이 혁명인지 아닌지는 이후의 역사가 판단할 뿐이다. 정도전 일파의 왕조교체는 당대에 역성혁명으로 포장된 쿠데타였고, 자신들이 세운 공양왕의 권력을 찬탈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현실 군주까지 포함시킨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의 군주품평(君道)에서 주문공(朱子·주희)의 ‘춘추의리’를 빌려 우왕·창왕을 논죄했다. 공민왕이 후사가 없으면 종실 친족 중 한 명을 뽑아 계승해야 했는데 근본 없는 신돈의 자식을 양육해 후사로 삼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주자가 강조한 정통론·대의명분론에 어긋나는 행위라는 것이다.

어떤 왕조를 정통으로 간주할지의 역사인식론, 군신 간의 충절과 의리를 강조한 대의명분론은 중국이 여진족 금(金)의 침략 때문에 남송(南宋)으로 내몰린 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국토를 상실한 남송의 한족(漢族) 지식인들은 무력에 의한 왕조교체나 권력찬탈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주희도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이른바 ‘촉한(蜀漢)’ 정통론을 주장했다. 이것은 삼국시대의 실력자인 위나라 조비(曹丕)를 권력의 찬탈자로, 후한(後漢) 헌제(獻帝)의 계승자인 왕실의 친척 유비(劉備)와 그의 촉나라를 정통왕조로 인정한 주자학적 대의명분론을 말한다. 구양수나 사마광 등 북송시대 지식인만 해도 위나라를 정통으로 인정한 반면 남송의 주희는 촉한만을 정통으로 간주했는데, 정도전은 ‘경제문감·별집’에서 주희의 ‘촉한’ 정통론을 따랐다. 이것은 정도전은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에서 연원한 대의명분론, 즉 군신·부자·장유의 사회적 위계질서와 도덕적 역할을 인정한 것을 의미한다.

정도전은 주희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뿐만 아니라 호안국의 ‘춘추호전(春秋胡傳)’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호안국은 군주와 아비를 높이고 난신적자(亂臣賊子)를 토벌하는 것을 ‘춘추의리’로 삼았다. 정도전은 1391년 공양왕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호안국을 인용하며 신돈의 자식인 우(禑)와 창(昌)이 왕씨의 왕위를 찬탈한 고려왕조의 대역죄인임을 역설, 난신적자를 토벌할 것을 주장했다.(‘三峰集’ 3권 上恭讓王疏) 그런데 자신이 내세운 춘추의리론이 무색할 정도로 이듬해 공양왕 폐위사건을 일으켰을 때 정도전은 권력찬탈을 정당화했다. 공양왕이 보위(寶位)에 올라 겨우 왕씨의 나라를 보존했는데 유신(維新)의 정치를 도모하기는커녕 충직한 신하와 선량한 사람을 해쳐 천심(天心)을 이반함으로써 스스로 필부로 전락, 왕씨의 제사를 끊어버렸다는 것이다.(‘경제문감·별집’) 이것은 맹자의 군주필부론을 개혁파의 정변 논리로 이용한 것이다. 맹자가 주창한 왕도정치론, 인의예지설, 성선설 등은 송대 지식인의 인간관과 사회관에 중요한 논거를 제공했다. 그러나 사마광·소식·장구성 등 상당수 북송시대 유학자들이 그런 것처럼 주희도 맹자의 역성혁명론에 위화감을 느꼈다. ‘맹자’의 군주시해에 대한 주희의 발언을 살펴보면, 질문 당사자인 제후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신하를 추동하려는 말이 아니라고 본 것을 알 수 있다.

왕조 교체와 권력 이양에 민감했던 주희는 군신 간의 대의명분을 훼손하는 정치행위를 극도로 경계했다. 여말선초의 정권 교체는 주희 시선에서 볼 때 권력찬탈로 간주될 만한 사건이었다. 정도전은 주희의 명분론을 공유하여 군신의 위계질서를 인정하면서도, 군신의 서열과 분계를 넘어서는 지식인의 도덕적 우월성과 이에 따른 권력 공유(共有)의 정치적 정당성을 강조했다. 무장이 아닌 학자로서 왕조를 전복시킨 모험을 감행한 것도 이 같은 신념의 소산일 것이다. 이 점에서 정도전의 정치 감각은 주희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한(漢) 고조(古祖)가 장자방(張子房)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쓴 것이다”라며 조선 건국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鄭道傳來記’) 이성계에 대한 자기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정도전은 왕정(王政)에서 왕위세습이야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이지만, 실질적인 권력 운영은 최상의 유능한 인재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흔히 ‘총재(冢宰)’ 중심론으로 알려진 정도전의 국정운영론이 재상을 최고의 권력집행자, 즉 군사·행정·예산의 총괄책임자로 상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단순히 국왕을 보좌하는 것을 넘어 국정운영 전반을 통제·조율하도록 정부조직을 입안했던 데서 사대부의 정치역량에 대한 정도전의 전폭적 지지와 기대를 읽을 수 있다.

물론 정치현실은 정도전이 구상한 이념적 상황과는 달랐다. 사병(私兵)혁파에 반발한 태종 이방원의 반격과 암살, 왕권강화가 보여주듯이 사대부들은 무력을 독점한 왕권의 전횡을 견제하지 못했다. 이처럼 왕권이란 단순한 상징적 권위에 가둘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정도전의 정치구상을 음미하는 것은 지식인의 이념적 지향 때문이다. 국가란 공공(公共)의 것임에도 세습 왕조에서는 국가를 왕실의 소유로 간주, 최대의 사가(私家)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점은 조선시대 형법의 기초가 되는 ‘대명률직해’의 형률조항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라를 훔치는 대역죄나 모반죄를 일반 도적죄와 동일한 항목에서 취급한 것이다. 역모죄를 왕실의 소유물을 훔치는 도적행위로 간주하던 풍토에서 정도전은 왕권을 공적(公的) 권력의 상징, 도덕적 인격의 화신으로 한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 점이야말로 정도전 일파의 권력찬탈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지 재고하도록 하는 중요한 정치적 변수가 된다.

▲ 동궐도

과연 정도전의 신국가 건설 기획은 국가적 공공성을 얼마만큼 제고시켰을까? 우리가 급진개혁파의 왕조 교체를 미완의 혁명으로나마 간주할 수 있다면 그것은 권력운영의 공공성 확보에 달려 있다. 고려는 당률(唐律·당나라의 법령)에 따라 삼성육부(三省六部)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특히 귀족적 의사협의체인 도평의사사가 그 중심에 있었다. 고대 중국의 이상적 관제(官制)인 주관(周官)을 기록한 유교경전 ‘주례’가 오래전부터 주목받았지만, 고려의 중앙관제는 주관과는 거리가 멀었고 일정한 형태의 법전도 없었다. 고려 말 개혁파들은 중앙관제를 새롭게 정비하기 위해 ‘주례’의 육전(六典·治典,賦典, 禮典, 政典, 憲典, 工典) 체제를 도입했고, 중앙부서뿐만 아니라 포괄적인 법전까지 마련했다. 중국에서 육전 체제를 처음 반영한 것은 ‘당육전(唐六典)’인데 이것은 중앙 직제(職制)만 규정한 것으로 형률이 포함되지 않은 미완의 작품이다. 북송시대 왕안석의 신법도 ‘주례’에 근거한 법전 편찬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원나라 때 황제의 조칙(詔勅)을 반영한 ‘경세대전(經世大典)’(1331년)이 만들어지면서, 육전 체제를 바탕으로 재상의 역할, 황제의 위상을 기록한 첫 법전이 등장했다. 정도전의 사찬서(私撰書)인 ‘조선경국전’(1394년), 공동편찬한 조선 최초의 법전 ‘경제육전(經濟六典)’(1397년)도 원나라 ‘경세대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육전 체제의 기본구성, 재상 중심의 관제(官制)만을 언급한 ‘주례’에 국왕의 지위·역할까지 함께 첨가했다는 두 가지 성격만 같을 뿐, 원나라와 조선의 법전은 서로 그 내용이 상이했다. 따라서 ‘경제육전’ 및 ‘경국대전(經國大典)’(1485년)의 기초를 마련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은 조선의 국가체제와 독자적 이념을 담은 가장 기본적인 법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경국전’의 총론(總論)은 국왕의 이상적 지위와 성격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주례’의 재상론(宰相論)과 달리 국왕의 지위를 구체적으로 기술했다는 점에서, 이 저작은 군주와 재상의 공치(共治), 상보적 정치운영을 주장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군주를 천리(天理)를 실현한 내성외왕(內聖外王)의 도덕적 인격자로, 재상을 실무적 관료의 대표자로 설정함으로써 정치의 이념과 현실을 모두 갖추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도전의 국정운영을 단순히 재상 중심의 ‘신권(臣權)’ 강화책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국왕의 지위를 초월적 자리에 남겨 두지 않고 구체적으로 기술했던 것은, 달리 보면 왕조사회의 절대자인 국왕의 위상을 제한했다는 말과도 같다. 국왕은 절대권력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도덕적 인격을 구현해야 하고, 아직 그런 성인의 인격에 이르지 못했다면 현인(賢人) 재상과 학자관료의 제왕학수업(書筵·經筵)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유한한 존재로 그려졌다. 정도전이 ‘경제문감’ ‘상업(相業)’에서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는 재상의 격군(格君) 역할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바르게 해서(正己) 임금을 바로잡고(格君), 인재를 등용하여(知人) 온갖 실무를 잘 처리하는(處事) 것을 재상의 핵심과업으로 삼았다.

‘조선경국전’ 치전(治典) 총서(總序)에서 정도전은 총재만이 백관을 지휘하며 만민을 다스릴 수 있기에, 군주의 역할은 재상 한 사람을 선발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했다. 임금의 직분이 재상을 뽑아 전권을 위임하는 것이라고 본 것은, 조선시대 맹위를 떨친 군주무위(無爲)정치론과 재상위임통치론을 연상시킨다. 총론(總論) ‘정보위(正寶位)’에 따르면 국왕의 자리는 만물을 낳고 기르는 세계의 근원적 힘(天地生物之心)을 덕(德)으로 삼고 인(仁)을 구현하는 자리다. 하지만 주자학의 우주론으로 치장된 이런 보위에 걸맞은 현실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편으로 정치실무를 담당할 재상을, 다른 한편으로 도덕성과 공공성의 담지자인 군왕을 내세웠지만, 정치실무뿐 아니라 도덕성조차 사대부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 세습왕조의 군주다. 이 때문에 정도전은 재상 중심의 국정운영만이 왕권의 자의성을 막고 국가적 공공성을 제고할 효과적 전략이라고 믿었다. 정치 공공성에 대한 정도전의 집요한 관심은 대관(臺官)과 간관(諫官), 오늘로 치면 검찰과 언론을 독립시켜 국왕 및 정치인에 대한 감찰·탄핵·간쟁이 가능한 정치체제를 구상하게 했다. 정변으로 시작된 정도전의 정치기획이 과연 얼마만큼의 혁명적 의미를 창출했는지는 공적 국가 구상에 관한 그의 공헌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달려 있다.

국가법전의 기초를 마련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은 성인 군주, 다시 말해 철인왕(哲人王)을 국가의 수장으로 상정했다. 도덕적 완성자가 일국의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여말선초 사대부들이 받아들인 주자학의 이념적 지향이었다. 주희는 ‘대학장구’ 서문에서 하늘은 똑같은 인의예지의 본성을 주었으니 누구라도 자기 본성을 다 실현할 수 있으면 백성의 군사(君師·군주이자 스승)가 되어 요순 같은 성왕(聖王), 즉 철인왕을 이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귀족 자제들만 읽던 ‘대학’이란 경전을 대인(大人)의 학문, 즉 보통 사람 누구든 배워 익힐 수 있는 보편적 텍스트로 전환시킨 주희의 공로였다. 이런 세계에서 세습 군왕과 지식인 관료 사이의 위계질서란 도리어 작위적 구분이 아닐까? 조선 건국을 도모한 정도전은 군신을 막론하고 누구든 최고의 도덕적·정치적 인재가 국정운영과 권력의 향배를 결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찬탈이냐 혁명이냐의 위태로운 경계를 넘나든 철인왕국의 지도자 정도전은 어떤 면에서는 주자학 이념을 한계까지 밀어붙인 장본인이다. 주자학의 이상을 좇다가 결국 주자학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며 이로써 조선유학에만 가능했던 사유실험을 감행했다. 주희는 누구나 군사가 될 수 있다고 했지만 생의 마지막까지 군신의 엄격한 위계를 고수했다. 방대한 중국제국에서 지방향촌의 문인 관료에 머물 수밖에 없던 남송 이후 대다수 지식인들은 황제 권력과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험을 감수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조선 건국의 주체들은 중앙의 정치 일선에서 군주를 훈도하고 견제하며 유교적 철인왕국을 수립했다. 여기서는 규모의 적정성, 즉 사상과 이념을 실험하기 위한 최적의 지리적 조건이라는 조선 특유의 상황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강대국 변방에 처한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일정한 사유 경향을 갖듯이, 적정 규모의 국가 형태는 유학 이념을 극적으로 실현하기 좋은 물리적 여건을 제공했다. 불교와 전면전을 벌이며 새로운 인간상·인륜공동체를 구상하고, 유교적 소양의 관료를 흡수할 정부조직과 법전을 정비하고, 한양 수도 건설사업에까지 뛰어든 전방위지식인 정도전이 가능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으론 위태로웠지만, 이것은 조선유학이 스스로 변신하며 현실 생명력을 이어간 탁월한 조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