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의 歷史意識 探究를 위한 시론
車 次 錫 (Cha Cha-suk)
■│차 례│■
1. 서론
2. 現實意識과 이상적인 세계
1) "법화경"의 현실의식
2) "법화경"이 꿈꾸는 世上
3. 歷史 發展의 主體와 動力因
1) 역사 발전의 주체
2) 역사 발전의 動力因
4. 歷史 展開의 原理
1) 調和와 統一의 諸法實相
2) 創造의 原理인 感應道交
5. 결론
1. 서론
졸론은 초기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 중 하나인 "법화경"에 나타난 역사의식을 고찰하고자 한다. 역사의식이라면 역사에 관한 불교도들의 관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법화경"은 역사를 서술한 책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 초기 대승불교 운동가들이 지니고 있던 역사에 대한 시각을 살펴볼 수 있는 훌륭한 자료 중의 하나이다. 또한 졸론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 서술에 나타난 역사관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법화경"에 나타난 역사철학적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는 것이 더욱 합당할 것이다. 따라서 졸론이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법화경"의 현실관과 이상적인 세계관이다. 현실관이란 "법화경"에 나타난 현실의식을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살피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선결되어야 할 요소이기 때문이다. 세계관이란 "법화경"이 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세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이다. 현실을 극복하고 건설하고자 하는 세계가 있었다면, 그것은 역사가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합당한가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법화경"에 나타난 역사 전개의 主體와 動力因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를 전개하는 주체와 동력인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어떠한 역사를 꾸미고자 하는 意志를 확인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법화경"에 나타난 역사 발전의 근본적인 원리가 무엇인가를 탐구하고자 한다. 무엇인가 원리가 있다면 그 특징은 어떠한 것인지, 어떻게 역사를 발전시키는지를 분명하게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문제점을 살펴본다면 졸론이 추구하고자 하는 "법화경"의 역사의식과 그 특징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2. 現實意識과 이상적인 세계
1) "법화경"의 현실의식
"법화경"은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단적으로 말하자면, 현실에 대한 위기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그것을 경전에서는 五濁惡世, 後五百歲 등의 말로 대신한다. 이것들은 모두 사회가 윤리적․정신적으로 매우 불안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를 불안하게 인식하고 있던 것은 "법화경"뿐만이 아니라, 초기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소품반야경"을 비롯하여 "금강경"이나 "대보적경" 등 다수의 경전에서도 보이고 있다. 그들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현실을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진단할 수 없다. 다만, 불교의 번쇄화, 전문화, 탈대중화가 法滅의 위기의식을 팽창시켰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여기서는 주제에 충실하기 위하여 "법화경"에 나타난 불안한 사회를 표현하는 전술한 용어들을 중심으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1) 後五百歲說
후오백세설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반야부 경전이 대표적이다. 이것은 ‘正法時代가 오백 년 지나고 나면 正法이 소멸하는 시기가 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부처님께서 入滅한 이후 오백 년 간은 正法이 번영하지만, 그 뒤의 오백 년 간은 정법이 소멸하는 시기가 되며, 그 이후에는 末法時代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후 正像末 三時說의 논리적 근거가 된다.
후오백세설이 초기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것 平川彰, "初期大乘佛敎の硏究"(春秋社, 1992), pp. 157~165.
은 당시의 상황을 위태롭게 생각하고 정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기 위한 것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후오백세설이 일종의 위기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역사 인식의 표출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전적으로 염세주의 내지 소극적 패배주의로 치부하는 것은 우리들의 성급한 판단이 될 것이다. "금강반야경"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이상과 같은 의도를 여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A) 여래의 입멸 이후 후오백세에 持戒修福者가 있어서, 이 章句에서 능히 信心을 내어 이것으로 實을 삼는다면 마땅히 이 사람은 … 이미 무량한 천만 불타의 처소에서 善根을 심은 것이다.
B) 만일 當來世 後五百世에 어떤 중생이 이 경전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면, 이 사람은 가장 稀有한 사람이니라. 왜냐하면, 이 사람은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이 없기 때문이니라. 인용문 A는 대정장 8, p. 749a, B는 p. 750b에서 인용.
이상의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오백세의 시대니까 더더욱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자고 보살도의 실천을 권유하고 있다. 이것은 후오백세설을 주장하는 초기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들이 동일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당시의 불교사상가들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법화경"에는 이상의 후오백세에 대해 「약왕보살본사품」과 「보현보살권발품」에서 그 일단이 보이고 있다. 「약왕보살본사품」에서는 두 번에 걸쳐,
A) 여래께서 滅度하신 이후 후오백세에 만약 어떤 여인이 이 경전을 듣고 설한 그대로 수행한다면
B) 나의 멸도 이후 후오백세에 ("법화경"을) 널리 유포시키어 인용문 A는 대정장 9, p. 54b, 인용문 B는 p. 54c.
라고 한다. 「보현보살권발품」에서는,
A) 후오백세 濁惡한 세상에서 이 경전을 수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B) 후세 후오백세의 濁惡한 세상 중에 비구, 비구니, 우바이, 우바새로서 이 경전을 구하는 자, 수지하는 자, 독송하는 자, 서사하는 자가 있어서 인용문 A는 대정장 9, p. 61a, 인용문 B는 p. 61b.
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약왕보살본사품」은 이상의 인용문 뒤에 그와 같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법화경"을 수지한다면 여자로 태어나지 않고, 三毒의 고뇌에서 벗어나며, 보살의 신통과 無生法忍을 얻는다고 하며, 나아가 "법화경"을 널리 유포함으로써 安樂世界에 태어나고 不老不死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보현보살권발품」에서는 이상의 인용문에 이어서 "법화경"을 수지한 공덕으로 재앙을 없애고 편안하게 되며, 惡趣에 떨어지지 않고, 도솔천의 미륵보살 처소에 태어나게 된다고 말한다. "법화경"을 수지 내지는 유포함으로써 이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후오백세의 세상이기에 더더욱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고 유포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는 사람은 “오래지 않아 도량에 이르러 모든 마구니의 무리를 깨뜨리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법륜을 굴리고, 법의 북을 치며, 법의 소라를 불고, 법의 비를 오게 하여, 천신과 사람의 큰 무리 속 사자좌에 앉게 되리라.” 대정장 9, p. 62a.
고 말한다. 또한 여래의 滅度 이후에 四法을 성취하면 "법화경"을 얻게 된다고 말하는데, 대정장 9, p. 61a. 4법이란 諸佛護念, 殖衆德本, 入正定聚, 發救一切衆生之心.
이들은 모두 현실을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法華行者들의 현실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후오백세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외에도 후오백세설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末法思想 내지 法滅意識이 "법화경" 전편을 통해 표출되고 있다. 「법사품」, 「견보탑품」, 「권지품」, 「안락행품」 등에 末法思想이 보이고 있다. 예컨대, 말법사상은 대표적으로 「권지품」을 중심으로 역설되고 있으며, 惡世 내지 濁世 혹은 濁惡世로 표현된다.
다음으로 法滅意識을 보여 주는 것으로는 「오백제자수기품」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아약교진여의 作佛과 滅後의 正法과 像法에 이어서 ‘法滅天人憂’ 대정장, p. 28c.
라고 하고 있다. 「안락행품」에서는 ‘於後末世法欲滅時’ 대정장 9, p. 38bc에 걸쳐서 3번 나온다.
라는 말이 意安樂行을 설명하면서 두 번, 誓願安樂行을 설명하면서 한 번 나오고 있다. 「상불경보살품」에서는 위음왕여래의 壽量과 入滅 後의 正法과 像法의 消滅이 설해지고 있다. 대정장 9, p. 50c. 然後滅度 正法像法滅盡之後.
석가모니부처님의 前身인 常不輕菩薩은 2만 억의 위음왕여래가 차례대로 출현하는 가운데 최초의 위음왕여래 滅後, 像法의 末期에 禮拜行을 해서 迫害를 받지만, 반대로 加害者에게 인연을 맺도록 해준다는 것이 줄거리이다.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목적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像法이 消滅된 이후에 위음왕여래가 출현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법화행자들의 현실의식을 잘 보여 주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2) 五濁惡世說
"법화경"에서 설정한 현실의식을 잘 대변하고 있는 것 중 다른 하나는 오탁악세설이다. 이 주장은 "법화경" 중에서도 성립이 가장 빠른 부분에 속한다고 보는 「방편품」에 나오고 있다. 이 말의 용례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사리불아, 부처님께서는 오탁악세에 出現하시나니, 이른바 劫濁, 煩惱濁, 衆生濁, 見濁, 命濁이라. 사리불아, 劫濁의 어지러운 시절에는 중생의 번뇌가 무거워 慳貪, 嫉妬하고, 여러 가지 不善의 뿌리를 키울새….” 대정장 9, p. 7b.
이상의 인용문에 나오는 五濁이란 시대적 혼란과 도덕적 타락, 人性의 低下, 사상적 혼란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여기서 혼란을 의미하는 濁이란 글자는 범어인 kaṣāya를 번역한 것이며, 이 말은 첫째, 味․色․混合物․樹液 등과 관련된 것과, 둘째, 개인의 번뇌에 관한 것, 셋째, 시대나 世間에 관한 것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들 중에서 五濁과 직접 연관되는 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의미로 밝혀져 있다. 朝山幸彦, 「Pañcakaṣāya(五濁)に關する一考察」("印度學佛敎學硏究" 15-2, 1967), p. 182 참조.
즉, 개인의 煩惱에 관한 것은 마음의 혼탁을 의미하는 用例와, 身口意 三業의 혼탁 혹은 貪瞋癡의 세 가지 혼탁, 즉 번뇌를 의미하는 用例가 있다고 한다.
다음에 시대나 세간에 관한 것은 시간이나 세간이라는 객관적인 것에 관한 일이며, 그것의 濁惡化, 즉 타락을 의미한다고 본다.
부처님은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욕망과 성품을 알고 그들을 一佛乘의 세계로 인도하고자 세상에 출현했다는 것이 또한 "법화경"의 주장이다.
吉藏은 그의 "法花義疏"에서 “저들의 의심을 끊기 위하여 諸佛께선 五濁惡世에 出現한다.”고 말하고, “煩惱와 見이 濁體이며, 이 두 가지가 중생을 이루기 때문에 중생탁이라 한다.”고 정의한다. 대정장 34, p. 497a. 爲斷彼疑諸佛出五濁惡世. 煩惱與見 正是濁體 此二成衆生故 名衆生濁 故經云 心垢故衆生垢也.
그리고 "유마경"을 인용하여 “마음에 때가 있으므로 중생에게 때가 있다.”라고 정의한다. 이어서 五濁과 三障의 차이를 묻는데, “三障은 聖道와 聖道方便을 障碍한다. …그러므로 三障은 聖道에 들어갈 수 없게 한다.”고 하고, “五濁은 通이기 때문에 諸佛이 五濁의 衆生을 위하여 三乘敎를 설한다.” 앞과 같음.
고 말하고 있다. 모두 현실을 극복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법화경"의 정신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세상은 火宅이다.
세상을 火宅이라고 말하는 것은 "법화경" 중에서도 「비유품」에 나오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나라의 읍이나 마을 안에 큰 長者가 있었다. 그의 나이가 이미 늙었으되 재산이 끝없어서 田地, 저택, 하인 등이 많았다. 그 집은 廣大하되 오직 문은 하나뿐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 살고 있었다. 집채는 썩어 낡았고, 담장과 벽이 무너졌으며, 기둥 뿌리는 썩었다. 대들보나 동자 기둥은 기울었는데, 주위에서 일시에 문득 불이 나서 이 집을 태웠다. 그때 아들 열이나 스물, 혹은 서른 명이 이 집에 있었느니라….
장자는 이 큰 불이 사방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두려워하며, 이와 같이 생각했다. ‘내 비록 불 붙은 문을 편히 벗어 나왔으나 애들은 불길에 싸인 집 안에 아직도 남아서 놀이에 미쳐 이것을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며,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아서 불이 몸에 와 닿아 고통이 다가오되 근심과 걱정을 아니하여 나오려는 뜻이 없구나.” 대정장 9, p. 12b.
인용문에서는 현실을 불난 집에 비유하고 있으며, 불난 집에서 장난에 몰두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중생들에 비유하고 있다. 중생들이 五慾樂에 탐착하여 깨우치지 못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규기스님은 그의 "법화현찬"에서 “煩惱가 삶을 따르는 것을 火起라 이름하는데, 五蘊으로 하여금 雜染性, 不淨苦性, 無無常性, 我性을 이루게 한다.” 대정장 34, p. 746b.
고 불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과 결과를 밝히고 있다.
현실을 불난 집에 비유하는 것은 비단 "법화경"뿐만의 일은 아니다. "오분율"에 의하면 “온 세상이 불타고 있다. 눈이 불타고 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이 불타고 있다. 눈의 분별이 불타고 있다. 눈이 보아서 즐거운 것이나 괴로운 것이나 모두 불타고 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불길이 불타고 있다. …眼耳鼻舌身意에서 불길이 훨훨 타오르고 있다.” 대정장 22, p. 109c.;"사분율"(대정장 22, p. 797a, 950a) 참조.
고 설법하고 있다.
인간이란 안이비설신의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것은 존재하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일체의 현상을 지칭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참다운 존재의 모습은 아니다. 극복의 대상으로 우리들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비유품」에서는 火宅에 있으면서도 그곳을 빠져 나올 생각도 않고 놀이에 몰두해 있는 어린아이들과, 그들을 바라보면서 火宅 밖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아버지의 관계를 다시 재구성하고 있다. 父子 관계는 물론 佛衆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여래수량품」에서는 놀이에 몰두하여 火宅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은 失性하거나 中毒이 심하여 약을 주어도 먹지 않는다고 한탄하면서, 그들에게 본래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良醫의 비유를 들고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박덕한 사람들이 善根을 심지 않아서 가난하고 천박해지고, 五慾에 집착하여 憶想妄見의 그물에 걸리며, 만일 여래의 永久不滅함을 보더라도 교만하고 태만해져 부처를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과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것.’ 대정장 9, p. 42c.
이라고 말한다. 여래의 方便涅槃을 설하면서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알려 주는 구절이다.
2) "법화경"이 꿈꾸는 世上
細部 題目을 ‘꿈꾸는 세상’이라고 부드럽게 표현했지만, 이것은 佛國淨土를 지칭하는 말이다. 대승불교의 시작과 함께 전개된 새로운 불교운동은 이상적인 불국정토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수많은 보살들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불국정토를 건설하는 일로 歸結되었다. 이러한 것을 불교에서는 本願(pranidhana)이란 말로 표현한다. 근본 서원이란 의미이다.
또한 本願은 두 가지로 細別할 수 있다. 總願과 別願이다.
總願이란 일종의 綱領과 같은 것으로서, 그 내용은 ‘일체 중생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다짐이다. 불국정토를 건설해야 하는 당위성은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別願은 총원의 이상을 완성하기 위하여 세부적이고 구체적으로 어떠어떠한 내용의 사회를 건설하겠다고 맹서하는 것이다.
졸론에서 알아보고자 하는 불국정토의 구체적인 모습은 別願과 직결되어 있다.
초기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들에 나타난 別願에 대하여 一瞥하자면, 다음과 같다.
반야부의 "대품반야경"에서는 28願을 말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분석하면, 차차석, 「법화경의 본서사상에 관한 연구」(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3), pp. 18~40.
첫째, 경제적 측면에서 의식주의 안정이 강조되고 있다. 둘째, 사회윤리적인 측면에서 도적, 강도, 폭력 등의 사회악 철폐 내지 질서 확립이 강조되고 있다. 셋째, 인종․성별․인권에 대한 차별이 없는 사회 건설을 주장한다. 넷째, 사회복지적 측면에서 장애인의 발생 방지, 의료복지의 증대를 통한 질병 방지와 수명 연장을 강조한다. 다섯째, 법치주의의 강조와 지역 내지 민족 개념의 해소를 말한다. 여섯째, 종교적인 측면에선 윤회의 세계에서 해탈하기 위한 수행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아촉불국경"은 21願을 말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반야경"과 대동소이하다. "유마경"의 「불국품」에서는 ‘衆生이 菩薩의 淨土’라는 대전제 아래, 보살이 불국정토를 원하는 것은 일체의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화의 대상인 중생들의 근기와 자연환경과 성취 욕구 등을 살펴보고, 그에 적절하게 불국정토를 건설한다고 敎示한다. 대정장 14, p. 538a.
중생들이 존재하는 한 불국토를 건설하고자 하는 보살의 염원은 끝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나아가 중생들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는 ‘언덕과 험한 구덩이와 가시밭과 모래와 자갈, 그리고 흙과 돌과 온갖 산과 더러움과 악으로 가득차 있다.’ 대정장 14, p. 538c.
고 인식하고, 이러한 자연적․정신적․윤리적 한계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불국정토의 첩경임을 밝히고 있다.
淨土係의 대표적 경전인 "무량수경"은 법장보살의 48大願을 강조한다. 總願으로서 “여래는 끝없는 대비심으로 三界를 가엾게 여기기 때문에 세상에 출현하여 가르침을 천명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두루 참된 법의 이익을 얻게 한다.” 대정장 12, p. 266c.
고 선언한다. 그리고 48원의 구체적인 내용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들의 내용을 몇 가지로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불타에 대한 귀의, 둘째, 국토 청정과 만물을 장엄하는 것에 관한 환경문제, 셋째, 악의 소멸과 인격의 완성이라는 윤리적 문제, 넷째, 女人 往生의 서원 등 평등한 인권의 구현 문제이다.
이상과 같은 것이 초기 대승불교도들이 건설하고자 했던 불국정토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법화경"은 어떠한 세계를 건설하고자 의도하고 있는가? "법화경"에는 이상에서 언급한 경전들과는 달리 구체적인 別願이 언급되고 있지는 않다. 다만, 다른 경전에서 주장하는 別願과 유사한 淨土의 모습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다. 특히 부처님은 五濁惡世에 출현하여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이 임무이며, 그것을 一大事因緣이라고 표현한다. 일체의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知見을 開, 示, 悟, 入하는 것이 부처의 존재 의의라고 한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구체적인 정토의 모습을 설파한다. 정토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A) 그 국토는 청정하여 유리로 대지를 삼고, 많은 보배가 길 옆에 늘어서 있으며, 금으로 된 새끼줄로 길의 경계를 삼으니, 보는 사람마다 기뻐하니라. 항상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고, 각종의 유명한 꽃을 흩뿌리며, 각종의 기묘한 것으로 장엄한다. 그 대지에는 언덕과 구렁텅이가 없으며, 보살들의 무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라. 그들의 마음은 부드러우며, 大神通에 통했으며, 諸佛의 대승경전을 받들어 지닌다. 모든 성문들의 無漏後身과 法王의 아들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라. (「수기품」) 대정장 9, p. 20c.
B) 七寶로 대지를 삼으니 그 대지의 평평함이 손바닥과 같아서 언덕과 계곡, 구렁텅이가 없느니라. 七寶로 만든 臺觀이 그 속에 충만하고 모든 하늘의 궁전이 가까운 허공에 있어서 사람과 하늘이 맞닿아 서로 볼 수 있느니라. 惡道가 없으며, 여인이 없어서 일체의 중생이 化生하기 때문에 淫慾이 없느니라. 대신통을 얻어서 몸에서는 광명을 발하며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느니라. 뜻과 생각이 견고해서 항상 정진하고 지혜가 있느니라. 모두가 금색이며, 32상으로 스스로를 장엄하느니라. 그 국토의 중생은 항상 두 가지로 음식을 삼되, 첫째는 法喜食이며, 둘째는 禪悅食이니라. (「오백제자수기품」) 대정장 9, p. 27ab.
이상에서 인용한 A, B의 인용문은 가장 대표적인 것을 선별한 것이다. 「수기품」에는 인용문 이외에도 “똥이나 오줌 등의 오물이 없고, 보배로운 꽃으로 대지를 덮어서 매우 청정하며, 그 국토의 人民은 모두 寶臺와 珍奇한 누각에 산다.” 대정장 9, p. 21a.
는 내용이 첨가된 國土相이 소개되고 있다. 原始 "법화경"의 일부로 판단하는 「비유품」에는 사리불에게 수기를 주면서 그가 건설할 국토의 모습에 대해 “그 땅은 평평하고 청정하게 단장되며, 편안하고 풍족하여 人天이 많으며, 유리로 대지를 삼고 길이 4통8달 하며, 황금으로 경계를 삼고 칠보로 된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데, 항상 꽃이 피고 과일이 열려 있을 것이다.” 대정장 9, p. 11b.
라고 敎示한다.
"법화경"의 특징은 정토의 모습이 수기와 연결되어 施設되고 있다는 것이다. 수기의 十相 중 土相(불국토의 모습)에 해당한다. 형태나 내용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수기가 설해지는 곳에는 반드시 佛國土莊嚴의 誓願이 등장한다. 누군가가 성불하여 부처가 되었을 때, 그가 교화하여 완성하게 되는 불국토의 모습을 설하는 것이므로 매우 다양하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애석하게도 왜 그토록 다양한 모습을 설파하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까지 찾아볼 수 없으므로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방편품」의 설법에 따른다면, 인간의 욕망과 본성이 다종다양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다.
여기서 결론적으로 "법화경"에 묘사된 불국토의 구체적인 모습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의식주의 안정, 둘째, 윤리의 안정과 그로 인한 惡道의 소멸, 셋째, 남녀의 평등 및 인권의 존중, 넷째, 신과 인간의 평등 등이다.
이 중 세 번째로 들었던 남녀 평등의 문제는 특별하게 언급된 곳은 없지만, “여인이 없고 화생하며, 음욕이 없다.”는 구절에서 사상적 연원을 찾고자 한다.
왜냐하면, 당시의 인도는 여인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또한 "법화경"의 특징인 수기의 대상으로 남녀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 나아가 만물의 평등원리이자 구원의 실마리로서 一乘을 주장하고 있는 점에서 남녀의 평등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보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化生한다는 표현은 매우 추상적인데, 초기 대승불교 경전의 하나이자 "법화경"보다 성립이 앞서는 것으로 밝혀진 "아촉불국경"에 “아촉불의 묘희세계에는 여인은 있어도 고통 없이 懷妊하고 분만한다.” 대정장 11, pp. 755b~756a.
는 표현이 있는 것을 상기한다면,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이제까지 살펴본 불국정토의 내용은 다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법화경"이 어떠한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가를 알기에는 충분하다고 본다. 五濁惡世를 인간들이 가장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불국정토의 건설이 불교도 일반, 아니 "법화경"이 추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千年王國說을 주장하는 기독교의 목적론적 역사관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목적론적 역사관은 천지창조에서 시작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끝나는 有始有終의 時間觀을 바탕에 깔고 있다. 천년왕국이 건설된 다음의 인간 역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면, 그 다음의 문제는 생각할 수 없다. 역사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불국정토론은 궁극적 목적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終極은 아니다. 인간들의 마음가짐과 근기에 따라 다시 타락하거나 더더욱 필요한 사항을 보완하면서 퇴보와 발전을 반복할 수 있다. 물론 확정적으로 그렇게 언급하는 곳은 없지만, 불교의 기본 가르침인 無常의 법칙에 따르는 한 그것은 필연적인 결론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불교의 불국정토는 목적론적인 성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끝없이 보완․수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천년왕국론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고 말할 수 있다.
3. 歷史 發展의 主體와 動力因
1) 역사 발전의 주체
역사 발전의 주체는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견해도 동서양이 시각을 달리하고 있다. 서양철학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철학을 탄생시킨 그리스인들은 역사 발전의 주체를 人間으로 규정하였다. 그들은 역사의 진행을 流動的인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잘 훈련된 인간의 의지에 의해 유리하게 改造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人本主義는 그리스 역사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결국 모든 역사적 사건의 原因을 行爲者의 人間性에서 찾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의 기반이 되는 철학적 관념은 ‘人間意志’이다. 인간 개개인의 자유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자신의 목적을 선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의지 자체의 힘과, 목적을 선택하고 효과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개발하는 知力이 成功의 限界를 규정한다고 말한다. 어떠한 인간인가에 따라 현상적으로 진행되는 역사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인들이 근원적으로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며, 잠재적인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어떻게 계발하여 현실에 적용하느냐가 문제시된다. 이상익, "역사철학과 역학사상"(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96), pp. 49~50 참조.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관에 의하면 역사의 진행은 인간의 의지와 이성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와 恩寵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따라서 현재의 역사는 일시적이고 과도기적인 것이며, 현재의 역사 안에 궁극적이고 항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모든 역사는 千年王國의 시작과 함께 끝나며, 천년왕국의 도래가 현역사의 최종 목표와 최종 단계라고 본다. 이만렬, 「한국 기독교의 말세의식과 천년왕국사상」("한국 종교의 역사 이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논총 97-14, 1997), p. 191.
역사의 진행 자체도 행위자인 인간의 叡智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섭리에 따라 예정된 수순을 밟고 있는 것에 불과하며, 인간이란 단지 신의 攝理를 대신 수행하는 도구[從僕]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헤겔은 역사 발전의 主體를 絶對精神으로 보고 있다.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은 기독교적인 神을 각색한 것이다. 인간은 행위를 하되 그 행위는 神이 미리 정해 준 행위이며, 그 결과도 역시 신이 이미 정해 놓은 것이다. 신의 각본에 따라 움직인다는 한계성 때문에 헤겔은 절대정신을 ‘理性의 奸智’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상익, 위의 책, p. 78 참조.
이렇게 인간의 모든 행위를 신의 섭리나 理性의 奸智로 설명하게 된다면, 마침내는 惡에 대해서도 존재의 의의를 부여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마르크스는 역사 발전의 주체를 생산양식[下部 構造]으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意識이 삶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意識을 규정한다.” 차인석 편, "19세기 독일 사회철학"(민음사, 1988), p. 415.
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회의 物質的 土臺(하부 구조)가 사회의 意識形態를 규정하는 것이며, 국가․종교․철학․도덕 등은 사회의 意識 形態(상부 구조)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성립 근거는 사회의 물질적 토대에서 추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결국, 인간이란 물질이나 사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의 물질적 생산과 그 방식이 인간과 역사를 기본적으로 규정한다는 前提이며, 강재륜, "칼 마르크스의 인간론"(대왕사, 1983), pp. 194~196 참조.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 생산력이라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역사를 연극으로, 역사적 인물을 배우로 보고 있다. 배우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은 계급적 이해관계이며, 개인은 계급투쟁의 대열에 서서 싸우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본다. 따라서 이것은 개인의 위대성이 아무리 강조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역사적 목적 앞에서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강재륜, 위의 책, pp. 163~166 참조.
그리고 이상에서 언급된 역사의 주체에 대한 문제에서 그리스의 역사관을 제외하면 인간의 주체성을 否定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주체성이 부정되어 버리고 나면 ‘역사에 대한 책임’은 어디에서 찾을 것이며, 누구에게서 그 책임을 논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는 그리스의 역사관에서 주장하고 있듯이 역사의 주체를 인간으로 파악하고 있다. 세계를 인식의 主體와 客體로 구분하고, 인간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근본불교의 12處說과 5蘊說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12처설에서 인식의 기관인 6根은 그대로 인간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며, 인식의 대상인 6境은 인간의 삶을 담고 있는 자연환경을 의미한다. 이들 중에서도 인간의 특질을 6根의 하나인 意志(manas)로 파악하고, 客觀 對象의 특질을 法(dharma)으로 파악하여 "불교학개론"(동국대학교 출판부, 1993), pp. 52~53.
의지적 작용이 객관 대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의 의지적 작용은 객관 대상의 강력한 영향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상호 영향을 주고받지만 인간의 意志를 法에 가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必然性을 수반하며, 그것으로 인간 자신의 삶을 규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주체적인 의지적 작용을 중시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뿐만 아니라 일체의 존재를 규정하는 단어인 5蘊說에서도 인간의 의지적 작용과 식별작용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간주하고 있다. 인간의 행위를 규율하는 주체를 5蘊 중 식별작용인 意識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모리야파구나라는 수행자가 석가세존에게 ‘누가 식별작용을 享受하는가?’, ‘누가 感受하는 것인가?’, ‘누가 집착하는 것인가?’ 하는 등의 질문을 했을 때, “識別作用의 享受가 있기 때문에 여섯 가지의 의지처[6根]가 있고, 여섯 가지의 의지처에 緣由하여 接觸이 있다. 접촉에 연유하여 感受作用이 있고, 감수작용에 연유하여 妄執이 있다. 망집에 연유하여 執着이 있으며, 집착에 연유하여 生存이 있다.” SN. II, pp. 13~14. 中村元, "原始佛敎思想" 上(春秋社, 昭和 56), p. 255에서 재인용.
고 敎示하고 있다. 感覺, 意慾, 行動 등의 주체는 5蘊 중 정신을 형성하는 요소인 感受作用, 連想作用, 實行作用, 識別作用의 화합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보고 있는데, 개인적 존재의 정신을 통일시킨다는 점에서 意識의 기능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간주되고 있다. 中村元, 위의 책, pp. 261~262.
이상과 같은 점에서 인간은 자신이 행한 행위에 대한 결과를 스스로 책임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中村元, 위의 책, p. 259.
자신의 행위는 곧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이 행한 것이며, 다른 어떠한 것에 의해서 강요받은 것은 아니다. 때문에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책임질 수밖에 없다. 因果律을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법화경"도 이상에서 언급한 일반적인 불교적 논리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방편품」에서 강조하는 萬善成佛思想, 「비유품」의 핵심인 火宅의 脫出, 「약초유품」에서 敎示하고 있는 草木의 비유, 「여래수량품」에서 말하는 良醫의 비유, 「화성유품」에 나오는 化城의 비유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導師의 역할을 自任하고 있을 뿐, 선택의 자유는 개개인 각자의 판단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 판단에 따라 진실로 가치 있는 역사 창조가 가능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퇴보적이고 소극적인 역사를 창출할 수도 있는 것이다.
「비유품」에 따르자면 火宅을 벗어나는 것이 가치 있는 역사 창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誘引으로 화택에서 앞다투어 빠져 나오는 것에 대해 窺基스님은 “身業의 遞相을 애써 격려하는 것과 語業相의 격려를 서로 推排한다고 이름한다. 다투어 行業을 닦는 것을 다투어 馳走한다고 이름한다. 함께 免苦를 바라는 것을 다투어 出宅한다고 말한다.” 窺基, "법화현찬" 권5(대정장 34, p. 749c).
고 해석하고 있다. 역사 창조는 개인적 인식의 문제에 달려 있으며, 인간을 떠난 역사 창조의 행위는 별다른 의미를 지닐 수 없음을 구체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역사 발전의 動力因
“무릇 有情은 업을 自體로 삼는 업의 상속자이다. 업을 母胎로 삼고, 업을 眷屬으로 삼고, 업을 소속으로 삼는 자이다. 이 上下의 구별은 모두 업에 의해 分配된 것이다.” "중아함경" 권44, ‘앵무경’(대정장 1, p. 706b);"본사경" 권1(대정장 17, p. 663c).
“세간은 업에 의해 돌아가고, 유정은 업에 의해 돌아간다. 유정이 업에 의해 묶여 있는 것은 마치 車가 軸에 의해 움직이는 것과 같다.” "숫타니파타" 654송.
이상의 인용문은 유정이란 것은 업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피력하는 것이다. 역사를 창조하는 주체가 인간이라고 본다면, 5蘊을 材料因으로 삼고, 업을 動力因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때 업이란 것은 생명에 의지하고 있는 힘이 아니라, 생명 자체가 자기 창조를 도모할 때 발생하는 내적 규정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며, 換言하자면 의지의 습관화된 성격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현실적 행위[表業]의 體를 현실적 의지[現行의 思]라고 간주하고, 현실화되지 않은 업[無表業]의 體를 의지의 성격[思의 種子]이라고 한다. 박경준 역, "원시불교사상론"(경서원, 1992), p. 158 참조.
그렇다면 "법화경"에선 역사 발전의 動力因을 무엇이라고 보고 있을까? 이것은 크게 두 가지로 大別하여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중생들의 일반적인 業力이고, 둘째는 보살들의 願力이다. 현상론적으로 중생의 業力이 현실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보살의 願力은 현실을 극복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중생들의 업력을 淨化 내지 昇華시켜 이상적인 불국정토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살의 원력은 매우 이상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승기신론"도 "법화경"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동력인을 두 가지로 大別하고 있다. 이기영, "원효사상연구" I(한국불교연구원, 1994), p. 337 참조.
無明의 薰習을 받아 主客 分裂, 그릇된 자아의식의 발생 등을 거쳐 계속적으로 무명의 훈습을 뿌리치지 못하는 경우, 고통의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濁流처럼 流轉하는 좋지 않은 역사를 창조하는 流轉緣起가 첫째이다. 또한 淸淨無垢한 因, 公明正大하고 항상 평등한 一心, 眞如의 마음이 因이 되어 영원히 행복한 法界無礙의 역사를 창조하는 還滅緣起가 있다. 이것을 "법화경"과 비교하면 業力이 창조하는 역사는 유전연기에 해당할 것이며, 願力이 창조하는 역사는 환멸연기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긍정과 부정의 여부를 떠나 이상의 두 가지 동력인이 상호보완과 견제 속에서 역사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 두 가지의 사상적 특징에 대하여 다음에서 간략하게 기술하기로 한다.
(1) 衆生의 業力
"법화경"에서 중생의 業力이 창출하는 세계는 五濁惡世이다. 이때의 중생들은 「방편품」에 의하면, ‘번뇌가 무겁고, 慳貪하고 嫉妬하여 不善의 뿌리를 키우며, … 小法을 바라 生死에 집착하고, … 작은 형상으로 受胎하여 세세생생 增長하며, 薄德하고 少福하여 온갖 괴로움의 핍박을 받고, 有無의 邪見의 숲에 들어가 이러한 견해에 의지하여 62見을 두루 갖추며, 교만하고 사악하여 진실하지 못하고’ 대정장 9, p. 8ab.
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빈궁하고 福慧가 없어 生死에 들어가 괴로움이 끊기지 않으며, 五慾에 집착하는 것이 마치 모우(犛牛)가 꼬리를 사랑하듯 하여 貪愛로 자신을 가려 보지 못하고, … 邪見에 깊이 빠져 苦로 苦를 버리려 할새’ 대정장 9, p. 9bc.
라고 표현하고 있다.
「비유품」에 의하면 중생들은 자신의 업력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불을 질러 놓고도 그 속에서 희희낙락하며 나올 생각도 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묘사 대정장 9, p. 12b. 於火宅內樂着嬉戱 不覺不知不驚不怖 火來逼身苦痛切已 心不厭患無求出意.
되고 있으며,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탐욕에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탐욕에 중독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중생들을 「여래수량품」에서는 失性했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중생들의 업력이 만드는 역사도 분명 역사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퇴보의 역사요, 극복의 대상이 되는 역사임이 분명하다. "증일아함경"에 의하면, 중생들의 업력이 善인가 惡인가를 구분하는 것은 貪瞋癡 三毒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대정장 2, p. 584c. 若人貪慾瞋恚癡不盡 於善漸有滅 猶如月向盡. 若人有貪慾瞋恚癡亦盡 於善漸有增 猶如月盛滿.
三毒의 성향이 강하면 퇴보적인 역사를 만드는 것이며, 三毒의 성향이 약하면 약할수록 청정한 불국토를 창조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三毒을 根本 煩惱라고 말한다. "대반열반경"에서 “3독의 치열한 불꽃은 항상 일체의 중생을 불태운다.” 대정장 1, p. 205b. 三毒熾燃火 恒燒諸衆生.
고 하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구사론"에서는 번뇌를 隨眠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것은 인간 정신의 내부에 잠재해 있으면서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 내지 세력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 중생들은 隨眠[=惑]으로 인하여 악업을 짓게 되고, 그리하여 고통을 자초한다. 고통 속에서 방황하다가 번뇌의 회오리 속을 헤어나지 못하고 다시 악업을 짓게 되며, 그것으로 인하여 새로운 고뇌를 받게 된다. 대정장 29, p. 98c.
그리고 이들 隨眠[=惑]을 일으키는 원인은 無我의 이치를 모르는 無明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법화경"에서 業力에 의해 창출되는 역사를 부정적인 역사로 간주하고, 결국은 극복되어야 할 역사로 묘사하는 것은 無我의 이치를 모르는 無明 때문에 발생하는 三毒으로 만들어진 역사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菩薩의 願力
보살의 願力은 마음이 淨化된 還滅緣起의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강한 誓願의 힘을 말한다. "법화경"에선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즉, 「법사품」에 의하면,
“약왕아,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스스로 청정한 業報를 버리고 나의 입멸 이후에 중생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악세에 태어나서 이 경전을 널리 설한다.”
“능히 "법화경"을 受持하는 자는 淸淨土를 버리고 중생을 가엾게 여기기에 이곳에 태어난다.”
라고 한다.
이것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수행을 완성하여 청정한 업보를 획득하거나 청정토에 태어난 보살들이 일부러 자원하여 사바세계에 태어난다고 하는 願生思想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보살의 願力은 이와 같아서 중생계가 존재하는 한 보살의 서원은 다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규기, 앞의 책, p. 847a. 行六度四攝等種種行 誓度衆生. 衆生界盡 菩薩之意乃盡. 衆生界未盡 菩薩之意無盡….
「방편품」에서는 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천명하고 있다. 부처님의 知見을 開示하여 중생들이 悟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一大事因緣의 宣言이다. 대정장 9, p. 7a.
이는 시방삼세의 부처님은 누구나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불보살의 本願이기에 모든 부처님들께선 일체의 중생들이 佛道를 닦아서 성취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굳은 맹서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법화경" 전편을 통해 도처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에 詳論은 피하기로 한다.
다만, 願力을 성취하기 위해 보살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실천에 힘써야 하는가가 문제일 뿐이다. 「법사품」에 의하면 ‘如來의 使徒요, 여래가 파견하여 여래의 일을 행하는 사람’ 대정장 9, p. 30c. 當知是人 則如來使 如來所遣 行如來使.
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大信力과 志願力과 여러 가지 善根力을 지니고 있으니, 이 사람은 여래와 함께 있으며, 여래가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리라.” 대정장 9, p. 31b. 是人有大信力 及志願力 諸善根力 當知是人 與如來共宿 則爲如來手摩其頭.
는 확신을 가져도 좋다고 격려하고 있다.
이러한 「법사품」의 가르침은 여래를 절대자와 같은 존재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만일 여래를 절대자로 오해한다면, 전술한 바 있는 역사의 주체 문제에 있어서 인간은 주체적 위치를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우려한 듯 "법화현찬"에서 窺基스님은 이상의 문장들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三業이 부처님께 따르기 때문에 佛使 等(佛史, 佛遣, 佛事)을 완성한다. 使란 意業이고, 遣이란 語業이며, 事란 身業이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을 使라 이름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사용하기에 遣이라 이름하며, 부처님의 행함과 함께하기에 事라 이름한다. 世尊께서 하는 것과 만드는 것은 모두 이 법으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몰래 한마디를 설하더라도 마땅히 부처님의 業과 함께한다.” 대정장 34, p. 808b. 三業順佛故 成佛使等. 使者意業 遣者語業 事者身業. 又傳佛敎名使 用佛語名遣 同佛行名事 世尊所爲所作 皆以此法利衆生故 竊說一句 當同佛業.
이상의 인용문은 여래의 使, 遣, 事를 두 가지로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三業으로 실현되는 願力을 지칭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러할 때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이 땅에 불국정토의 건설이라는 새역사를 창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窺基의 해석이 매우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願力이 어떻게 역사 창조의 動力因이 될 수 있는가를 알려 주는 귀중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願力이 새로운 역사 창조의 動力因으로 인식된 것은 비단 "법화경"뿐만은 아니다. 이후의 많은 대승경전이나 논서들에도 등장한다. 특히 여래장사상의 발전은 法身佛의 願力을 化身으로 표현하고 존재와 세계 속에 출현하여 중생제도에 매진한다 "섭대승론"(대정장 31, p. 132c).
고 말한다. "성유식론"에서 “四智品은 本願力으로 말미암아 有情을 교화하는 바가 영속적이다. 그러므로 미래제가 다하도록 끊임이 없다.” 대정장 31, p. 57c.
고 하는 것도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時空을 초월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理法의 當體인 法身이 本願力을 지니기에 수많은 化身을 통하여 중생을 제도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결국 많은 化身菩薩을 등장시켜 本願을 代行하게 한다는 형식을 취하게 된다. "법화경"에도 후편에 약왕, 묘음, 관세음 등의 보살이 등장하는 것은 동일한 이유이다. 그렇다고 법신불 내지 화신불이 우리와 별개의 존재로 우리 앞에 他者로 別立하는 것은 아니다. 법신불은 우리들의 내면 속에 내재해 있으며, 그러한 자각을 통해 제불보살의 本願을 이해하면 우리가 바로 보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살의 願力은 매우 인식론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 歷史 發展의 原理
역사 발전의 원리를 그리스인들은 調和와 均衡에서 찾았다. 그리스인들은 우주의 존재 원리를 節度와 秩序에서 발견하고, 이러한 우주의 질서에 同化하는 것을 인간의 理想으로 여겼다. 이상의 실현이 역사의 발전이라고 인식한 그들은 조화와 균형을 가능하게 해주는 근거로 인간의 理性을 상정했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상을 중국의 역학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들은 음양의 조화와 균형에 의한 感應이 역사 발전의 원리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목적론적 역사관의 중핵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역사 발전의 원리를 대립물의 투쟁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아우구스티누스는 ‘善과 惡’의 투쟁으로,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투쟁’으로,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으로 규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상익, 앞의 책, pp. 47~49 참조.
"법화경"은 諸佛菩薩의 本願을 설파하는 경전이다. 本願이란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굳은 서원을 말하는 것이므로, 換言하면 慈悲를 강조하는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법화경"뿐만 아니라 여타의 많은 경전들이 자비를 강조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아니 생명체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존중은 "법화경"의 특징이다.
그런데, 자비라는 것은 대상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것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중생, 중생과 중생 등등의 관계 속에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법화경"의 사상은 關係의 철학이다. 이러한 관계들이 얽히고설켜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진솔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관계의 철학 속에서 전개되는 역사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혹자는 우주 및 역사를 전개하는 動因이 중생의 共業 최봉수, 「우주 및 역사 전개의 動因으로서의 業의 이해」("백련불교논집" 1, 1991), p. 62.
이라고 밝히고 있다. 共業이란 지적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불교적으로는 緣起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共業 자체가 관계성 속에서 가능한 일이며, 수많은 업들이 상관성 속에서 발생하는 것을 緣起라고 정의하는 점에서도 그렇다. 또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交織된 인간의 발자취가 역사이며, 그것은 수많은 業들의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緣起란 용어를 역사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가령, "삼국불교전래연기"라는 서책의 緣起나 사찰의 역사를 의미하는 ‘~寺緣起’ 등이 그러한 실례이다. 이기영, 앞의 책, p. 337 참조.
이상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諸法實相論과 感應道交論의 두 가지 측면에서 "법화경"에 나타난 역사 전개의 원리를 고찰하고자 한다.
1) 調和와 統一의 諸法實相
"법화경"의 대표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諸法實相論은 「방편품」에 나오고 있다. “부처가 이룩한 것은 제일 稀有하고 難解한 道理이며,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諸法實相을 능히 알 수 있다. 이른바 諸法의 如是相, 如是性, 如是體, 如是力, 如是作, 如是因, 如是緣, 如是果, 如是報, 如是本末究竟 等이다.” 대정장 9, p. 5c.
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諸法實相이란 용어의 정확한 개념은 무엇인가?
쿠마라지와가 諸法實相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原語를 조사하여 분석한 결과는 대략 다섯 가지로 분류되며, 그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한다. 中村元, 「화엄경의 사상사적 의의」(원욱 역, "화엄사상론", 문학생활사, 1988), p. 112참조.
첫째, 제법실상의 원어는 많지만 어느 원어에 따르더라도 결과는 동일하다. 즉, 모든 존재가 서로 의지하고, 한정하는 관계에서 성립하고 있는 참다운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며, 緣起와 동일한 의미이다. 제법실상의 어느 원어를 보아도 모두 緣起의 理法을 지칭하는 것이다.
둘째, 쿠마라지와가 여러 가지 원어에 제법실상이란 譯語를 부여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 정당하다.
이상의 결론에 따른다면 제법실상은 緣起와 동일한 의미일 뿐이다. 그렇다면 구태여 제법실상이라는 譯語를 채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근본불교와 달리 후세의 불교는 연기설을 狹義로만 이해하여, 연기라는 것은 시간적 先後가 있는 因果關係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따라서 시간에 관계 없는 논리적인 緣起關係에 대해서는 그것을 연기라 부르지 않고 實相이라 지칭했다. 그러나 연기설에는 시간적으로 繼起하는 因果關係를 보는 것과, 현상의 一瞬間에 相互 依存의 論理關係를 고찰하는 것 두 가지가 다 포함된다. 전자는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연기이고, 후자는 논리적이고 형식적인 연기라고 할 수 있다. 김현 역, "원시불교"(지학사, 1985), p. 101 참조.
적어도 이런 점이 고려된 것은 아닌가 하고 추측할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제법실상, 아니 緣起를 역사 발전의 원리로 상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역사 발전의 원리로 파악하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연기의 이론이 현상계의 사실적 관계를 밝히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이유에서 우리들의 실존적 不安이 발생하며, 어떻게 하면 그러한 불안을 제거하여 常樂我淨의 理想境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인생의 문제를 올바르게 알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기설은 업설과 불가분리의 상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연기설과 업설의 상관성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연기설이 지닌 역사 발전의 원리를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업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들이 있다. 불교는 자신의 행위[業]와 그 果報라는 입장에서 業을 미래의 自己形成力이라고 본다. 또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생각할 때는 독립된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시간적․공간적으로 다양한 관계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처럼 수많은 인연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그대로 緣起說에 다름아니다. 武內紹晃, 「緣と起業」("佛敎學硏究", 龍谷大佛敎學會, 昭和 59), pp. 9~10.
따라서 상대적 가치의 인정과 함께 화합과 통일이 還滅緣起를 이룩하는 捷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이론들을 보다 실천적인 측면에서 발전시키고 있다. 중관철학의 완성자인 나가르주나는 緣起를 相對性, 相互依存性으로 간주하고 독립된 개체의 自存性을 부정한다. 따라서 無自性, 空을 緣起라고 정의한다. 緣起와 空과 無自性이 동일한 개념으로 파악된다. 業과 緣起의 相關性에 대해서도 "중론" 제17 「觀業品」의 33頌에서 “모든 번뇌, 業, 身體, 作者와 果報는 간다르바城의 形態이고, 陽炎이나 꿈과 같다.” 김성철 역주, "중론"(경서원, 1993), p. 299 참조.
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業이나 業報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緣起的이라는 점을 부각하고자 하는 것이다. 중관철학의 표현대로 하자면, 업과 업보의 無自性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유식학파의 대표적 經論인 "해심밀경"과 "유가사지론"에서는 緣起를 依他起性이라고 정의한다. "섭대승론"에서는 자신의 薰習의 種子에서 생기기 때문에 依他起라고 정의한다. 武內紹晃, 앞의 책, p. 14 참조.
일체의 모든 것은 業의 貯藏庫인 아뢰야識에서 생기고, 그 種子는 스스로 薰習된 種子이다. 이렇게 現行種子現行과,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변화[無常性], 그것이 행위에 대한 원인과 결과가 相互 轉變하는 의식의 轉變이자 의타기성인 것이다. 의타기성의 세계가 현실이자 욕망의 세계이며, 극복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정지함이 없는 변화[無常性]를 停止시키려는 입장이 遍計所執性이며, 그런 점에서 ‘依他起性 卽 遍計所執性’이라는 迷惑의 世界가 展開된다. 또한 변화를 如實하게 알 때 ‘依他起性 卽 圓成實性’의 깨달음의 세계가 전개된다. 이것은 변화를 감지하고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변화를 주체적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의식의 발로이다.
"법화경"의 諸法實相論도 이상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窺基는 "법화현찬"에서 實相에 대해 “여래장 法身의 體요, 근본이 不變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智慧는 이 實相의 체를 알고 源底를 깊이 통달한다. 그러므로 究盡이라 이름한다.” 대정장 34, p. 703c.
고 말한다. 法身이란 眞如를 인격화한 것이며, 진여란 존재가 서로 의지하여 성립하고 있는 연기의 실상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에 그 참모습을 의미하는 法身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법신이나 진여가 독립된 형이상학적 원리는 아니다. 단지 연기의 이법, 즉 緣起性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實有性이 존재할 수 없으며, 무자성 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대반야경" 57권(대정장 5, p. 321a).
2) 創造의 原理인 感應道交
感應이란 諸佛菩薩의 應現과 敎化를 誘發시키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중생의 수준을 의미하는 機가 성인을 感動시켜서, 그것에 대해 諸佛菩薩이 應한다고 하는 사상을 말한다. 이것은 물론 불교의 독자적인 사상체계는 아니며, "주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管野博史, "中國法花思想の硏究"(春秋社, 1994), p. 79.
주역의 相補的인 陰陽論으로 현상세계를 설명하는 점에 영향을 받아 그 이론체계를 불교에 수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이러한 感應論을 "법화경"을 해석하는 데 응용하기 시작한 사람은 竺道生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機인데, 제불보살을 感動시키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機는 바로 衆生의 代用語이다.
道生은 "法華義疏"의 「서품」 주에서는 蒼生機를, 「방편품」 주에서는 物機를, 「신해품」 주에서는 神機와 含大之機․冥機․懷大之機를, 「비유품」 주에서는 扣一之機와 昔化之機를, 「관세음보살보문품」 주에서는 道機와 悟機라는 말을 사용하여 중생의 특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방편품」 주에서 “(사리불이 부처님께 설법을) 세 번 간청한 이유는 聖人이 그러한 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중생[機]이 그러한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法華義疏"(卍續藏經 150, p. 807 上). 所以三請者 非聖欲然 機須爾耳.
라고 하여 중생들이 성인들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또한 “국토에 優劣이 있고, 壽命에 長短이 있는 이유는 성인이 어찌 그러할 것인가? 중생이 그것을 볼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다양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卍續藏經 150, p. 819下. 所以國有優劣壽有修短者 聖豈然耶 機須見之 故示其參差.
라고 하여 중생들이 매우 다종다양함을 나타내고 있다.
道生은 특히 感應에 있어서 機의 役割을 중시하는데, 그것은 感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機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時란 중생의 機가 성인을 감동시키면 성인이 應할 수 있다. 범부와 성인의 道가 交流한다. 좋은 기회를 상실하지 않는 것을 一時라고 말한다.” 卍續藏經 150, p. 801 下. 時者 物機感聖 聖能垂應. 凡聖道交 不失良機 謂之一時.
고 하는데, 이것은 時空의 주역이 중생임을 선명하게 하는 것이다. 道生은 여기서 진일보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感聖하기 위해서 扣聖을 강조한다. 「비유품」 주에서 “옛날에 교화를 받은 중생들이 성인을 두드리자 성인이 곧 府應했다.” 卍續藏經 150, p. 813 上. 昔化之機扣聖 聖則府應.;기타 宅主旣來 昔緣亦發 機以扣聖 假爲人言. 聖應遂通 必聞之矣.;「신해품」 주, p. 815 下. 含大之機扣聖 爲見父.;「관세음보살품」 주, p. 831 下. 物有悟機扣聖 聖有遂通之道.
고 말한다. 즉, 성인의 應化는 준비된 범부에게만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만일 안으로 道의 根機가 없으면 성인은 (중생에게) 應하지 않는다.” 卍續藏經 150, p. 831 下. 苟內無道機 聖則不應矣.
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凡夫가 일방적으로 聖人의 救濟 對象이 되는 것이 아니라 凡夫 스스로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救濟 自體는 普遍的인 道理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문제가 되는 救濟란 用語는, 절대자가 피절대자를 자기의 意志대로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에 契合함으로써 현실 속에서 스스로가 구현할 수 있는 救濟의 樣相을 피력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은 道生의 感應論을 계승하고 있는 사람은 天台이다. 그는 "법화현의"에서 十妙를 설명하면서 感應妙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파하고 있다. 천태는 그의 "법화문구"에서 방편에 대해 해설하면서 十法을 세운다. "법화문구" 권3 下(대정장 34, p. 27b).
그 중 여섯 번째로 體用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이때 體는 實相으로서 분별하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用은 一體法을 건립하되 차별이 있어서 동일하지 않음을 지칭한다. 다시 이 十法에 대하여 十妙를 세우는데, 십법의 體用에서 配對된 것이 바로 十妙 중의 感應妙이다. 구원의 報身本佛이 自行의 圓因과 圓果를 만족시킴으로써 佛智의 慈悲와 중생의 信智가 境智冥合하여 道交하는 것을 感應妙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천태는 "법화현의"에서 機와 應에 대해 각각 세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고 정의한다. 機에 대해 설명하자면, 대정장 33, pp. 746c~747a.
첫째, 微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은밀하다는 의미로서 중생에게 可生의 善이 있기에 성인이 應하면 善이 발생하고 不應하면 생기지 않는다고 정의한다. 둘째는 關이라는 의미가 있다. 중생이 善이 있든 惡이 있든 성인의 자비와 관계한다는 의미이다. 셋째는 宜라는 의미가 있다. 無明의 苦惱를 뽑아 버리고자 하면 悲에 適合해야 하고, 法性의 즐거움을 주고자 하면 慈에 適合해야 한다는 뜻이다.
應에 대해 말하자면, 대정장 33, p. 747a.
첫째, 赴의 의미가 있다. 機에는 可生의 理가 있는데, 機가 은밀하게 움직임을 이끌어서 성인이 그것에 다다른다는 뜻이다. 둘째는 對라는 의미가 있다. 상대가 있어야 된다는 의미이며, 중생을 買에 비유하고 여래를 賣에 비유하여 賣買가 성립하는 것으로 보며, 機에 대해서 關을 논하고 應에 대해서 對를 논한다고 본다. 셋째는 應이라는 의미가 있다. 慈悲의 법으로써 응한다. 어떠한 법으로도 그 적합한 바에 응하기 때문에 應이라 한다.
천태지의는 이러한 것을 因果論에 입각하여 전개하고 있으며, 중생의 根機가 다르기 때문에 感應의 양상도 매우 다양하여 동일한 형식을 지니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다만 感應에 대한 정형화된 네 가지 형식을 수립하여 感應의 展開樣式을 소개하고 있다. 대정장 33, p. 748b. 여기서 네 가지로 대별한다.;첫째, 冥機冥應과거의 善力에 의지하는 것이 冥機이며, 은밀하게 법신의 도움을 받는 것을 冥益이라 한다. 둘째, 冥機顯應과거에 善을 심은 것이 명기이며, 문득 부처를 만나 법을 듣고 現前에서 이익을 얻는 것을 顯益이라 한다. 셋째, 顯機顯應현재의 몸과 입으로 精勤하여 게으르지 않아서 感이 내려오게 되는 것이며, 수행인이 도량에서 禮懺하여 능히 靈瑞를 느끼는 것이다. 넷째, 顯機冥應사람이 一世가 勤苦하더라도 현재의 善을 쌓을 것 같으면 感이 나타나지는 않으나 암암리에 그 이익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感應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玄義"에서는 “衆生의 善惡은 三世가 있는데, 어느 세상으로 機를 삼는가? 聖法도 三世가 있는데, 어느 세상으로 應을 삼는가?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현재는 머무르지 않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機도 얻을 수 없고 應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機應을 논하는가?” 대정장 33, p. 747c. 問衆生善惡有三世 何世爲機 聖法亦有三世 何世爲應. 過去已謝 現在不住 未來未至. 悉不得爲機 亦不得爲應 云何論機應耶.
라고 自問하고, 이에 대답하길, “至理의 입장에서 三世를 속속들이 이해하자면 모두 不可得이기 때문에 機도 應도 없다. … 다만 세속의 文字와 數 때문에 三世가 있다고 말하고, 4悉檀의 힘으로 중생에게 隨順해서 설명한다.”고 하면서 三世의 慈悲로 應을 삼고, 三世의 善惡으로 機相을 삼는다고 말한다. 대정장 33, p. 748a.
이것은 중생의 業力과 本願力이 결합하여 感應을 가능하게 하며, 그것이 사회적 화합과 사회의 집단무의식을 정화하여 역사 발전의 원리로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慈悲의 誓願으로 機感이 相關하며, 능히 寂에 상즉해서 비춘다. 그러므로 本感應이라 말한다.” 대정장 33, p. 765b. 慈悲誓願 機感相關 能卽寂而照 故言本感應也.
고 정의하고 있다. 本感應이란 "법화경"을 本迹으로 구분할 때 「여래수량품」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久遠本佛의 感應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經證으로 「여래수량품」의 “만일 어떤 중생이 나의 處所에 찾아오면 나는 佛眼으로 信根 등의 利鈍을 관찰하고 응당 제도할 바에 따라….” 대정장 9, p. 42c. 若有衆生 來至我所 我以佛眼 觀其信等諸根利鈍 隨所應度.
라는 구절을 들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에 대해 ‘중생이 찾아오는 것’은 法身을 感扣하는 것이고, ‘내가 佛眼으로 관찰한다는 것’은 자비로써 應하는 것이며, ‘여러 가지 根機의 利鈍’은 十法界의 冥顯과 欣厭이 不同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대정장 33, p. 767b.
이상의 인용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冥顯이란 용어에서 冥은 과거를, 顯은 현재를 의미한다. 미래를 의미할 때는 非冥非顯이라 한다.
이상에서 感應論에 대하여 간략하게 고찰하였다. 그러나 의문시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感應이 從屬과 被從屬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인가이다. 만일 그러한 관계라면, 그것은 역사의 주체를 인간으로 간주하는 주장이나 無我論과 相馳된다. 이것은 感應을 설명하는 대목이 體用을 논하는 부분에 속하며, 특히 作用 측면에 비중이 놓여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에 대해 천태는 “體는 곧 實相이니 분별이 있을 수 없으며, 用은 일체의 사물을 성립시키되 차별이 있어서 동일하지 않다.” 대정장 34, p. 38a.
고 정의하고, 체와 용의 관계를 感應道交로 구체화시켰다. 이것은 불교가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종교라는 점에 비중을 두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구제론을 전개할 필요성에서 발생한 것이 아닌가 본다.
이러한 주장을 보다 선명하게 補助해 주는 것은 "법화문구"에 나오는 理事에 대한 견해인데, “만일 理가 아니라면 事를 세울 수 없고, 事가 아니라면 理를 나타낼 길이 없다. 이리하여 事에는 理를 나타내는 功能이 있다.” 대정장 34, p. 37c.
고 말한다. 또한 “理는 眞如이니 진여는 본래부터 청정한 것이어서 부처님이 계시든 안 계시든 언제나 변화하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理를 實이라 지칭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事는 心意識 등이니 청정하고 부정한 업을 일으켜서 改動이 일정하지 않다.” 위와 같음.
고 정의한다. 理는 眞如이고 事는 現像이라는 의미로서, 전술한 體用의 논리에 대비하자면 理는 體이고 事는 用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事에 理를 나타나게 하는 功能이 있다고 했으므로 事를 움직이는 주체인 인간 내지 중생이 理를 드러나게 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理를 진여라 했으며, 그것의 속성은 自然法爾라는 점에서 理가 바로 緣起의 理法임을 推論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연기의 이법이 어떻게 感應할 수 있으며, 연기의 이법과 感應한다고 해서 어떻게 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道生은 ‘不變之體 爲湛然常照’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理가 중생과 관계없이 존재할 뿐인 靜止的인 것이 아니라 活動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管野博史, 앞의 책, p. 91 참조.
理의 활동은 부처와 범부의 感應이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이유로 본다. 理에 합치하면 깨닫는 것이고, 理와 배치하면 범부의 現實態인 것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구원에 불과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역사의 창조가 된다.
또한 천태는 理事가 感應하게 하는 것은 諸佛菩薩의 誓願이며, 보다 현실적으로는 제불보살과 교감하게 된 중생들이 그들의 誓願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가능해진다고 본다. “만일 誓願이 없으면 苦樂을 관찰하더라도 拔與할 수 없다. 慈力 때문에 機의 麤妙에 따른다.” 대정장 33, p. 749b. 若無誓願 雖觀苦樂不能拔與 以慈力故 隨機麤妙.
는 고백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연기의 이법을 體得함으로써 존재의 궁극적 의미를 확연하게 인식하고 還滅緣起의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잡아함경"에서는 “나는 여래의 아들이다. 그의 입으로부터 태어난 자요, 법으로부터 태어난 자요, 법에 의해 형성된 자요, 법의 상속자이다. 왜냐하면 파실타여, 여래의 칭호는 法身이라고도 梵身이라고도 法成이라고도 梵成이라고도 불리기 때문이다.” 대정장 2, p. 196c.
라고 말한다. 法의 인격적 체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새로운 역사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들의 정화된 업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법화경"을 연구하는 선지식들이 感應論을 구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 결론
이상에서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법화경"에 나타난 역사의식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첫째, "법화경"은 현실을 法滅의 말세로 규정하고 극복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시에 말세로 규정되는 현실을 극복하고 건설되는 불국정토는 인간들의 욕망이 충족되고, 삶의 조건이 완비된 사회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이들은 기독교의 천년왕국과 마찬가지로 목적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역사의 주체가 인간이고, 그들은 업력에 의해 늘 변화의 道程 속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종극적인 목적지로 설정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둘째, "법화경"에 나타난 역사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며, 인간이 자기 자신의 주체적인 자유 의지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우주와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간주한다. 인간이 자연 내지 문화적 환경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기는 하지만,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연관성 속에서도 주체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를 역사의 주체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의지는 행위를 유발하며, 그 행위는 끝없는 자기 창조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역사 창조의 동력인이 된다고 본다.
셋째, 역사를 발전시키는 원리는 緣起이며, 수많은 중생들의 다종다양한 의지와 그 의지의 결과로 나타나는 業力의 交織이 연기이므로, 이것은 조화와 통일의 원동력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또한 "법화경" 독자의 感應論을 역사 발전의 원리로 展開했는데, 이것은 연기의 理法과 중생의 믿음이 합일하여 제불보살의 本願을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感應의 주체가 중생이라는 것은, 결국 현실 속에 불국정토를 건설하고자 하는 제불보살의 本願을 굳은 믿음을 기반으로 내가 실현하고자 할 때 가장 力動的인 역사 발전의 원리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결론에 덧붙이자면, 불교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순환론적 역사의식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순환이 아니라 변증법처럼 끝없이 부정과 창조를 반복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마치 스프링과 같이 순환을 하면서 새로운 창조를 의도한다는 점을 상기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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