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걷는이길을
제1장 인생이 덧없을 때
제2장 생각하며 행동할 때
제3장 망상에 헤매일 때
제 4장 진리와 더불어 살 때
제5장 마음의 밭을 갈 때
제 6장 삶의 보람을 찾을 때
제7장 대지대비할 때
제 8장 인생시초
제 9장 자화상 입산 50년들 돌아보며
청담조사 행장기
제1장 인생이 덧없을 때
생의 외로운 오솔길
길은 사람이 존재라는한 언제나 있다. 그러므로 그 길은 영원하다. 인간 의 정각 역시 마찬가지이다.
완성이란 언제나 없다. 완성은 죽음뿐이다. 그 리고 그 죽음도 다만 전변에 지나지 않는다. 뜬구름과 같은 우리들의 생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을뿐이다. 그 길에 어느 때는 저토록 붉은 놀이 내리 고 눈이 덮이고 인간의 외로운 발자취가 남겨지리라. 그길은 나에게서 젊 음을 빼앗아갔다. 사랑을 빼앗아갔다. 이름과 성까지도 빼앗아 갔다. 그러 나 그 길은 더 많은 것을 주었고, 그 길은 더 많은 것을 나에게 요구하고 또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인간의 애착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생에 대한 애착이다.
사람이 음식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이 살기 위한 행동이며 또한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며 노동을 하는 것이 모두 먹고 입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은 부모의 몸에서 떨어져 나올 때부터 생을 영위하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생에 대한 애착은 욕망과 함께 생기는 것이므로 이 왕생을 누릴 바에는 보다 잘 살고 보다 오랫동안 살기 를 기도하게 된다.
남보다 잘 살려는 애착과 욕망 때문에 인간사회는 서로 반목과 질시가 따르게 되고 타락과 패륜이 계속된다. 물론 잘 살려는 욕망 이 선의의 경쟁으로 나타날 때는 사회의 질서와 도덕이 확립되는 가운데 사회의 발전이 있을 것이나 오늘날의 인간사회는 그와는 반대로 남이야 어 찌 되었든 자기 혼자만의 영락과 안일을 취하면 그만이라는 지극히 이기적 인 사상이 횡행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오래살고 보다 잘 살고 싶어도 인연이다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를 살았다고 하면 하루만큼 우리는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이 도대체 어디서 왔으며 또한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생각하면 인간은 한조각 구름처럼 생 겼다가 홀연히 없어지는 존재다. 한평생 살아봐도 누구를 위해 살았는지, 나를 위해 살았는지 남을 위해 살았는지 까닭도 모르고 한평생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 바보가 되어 한강에 가자 하면 한강으로 가고, 창경원에 가자 하면 창경원에 가고, 이리 가자 하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 하면 저리 가고, 모두가 이런 식이다. 장사하는 사람도 다 그런식이고 정치하는 사람은 더하다. 흘러가는 물과 한가지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정처없이 그 저 흐르다가 바위에 부딪치면 툭치고 흙탕물이 되기도 했다가 또 거기서 뺑뺑 돌다 막 뒤집힌다.
한강물이 어떻게 흐르느냐 하면 여러 억만년 흐르긴 흘러도 어떤 모양으로 흐르는 일정한 형태가 없다. 저쪽 모래에 부딪혀 모래를 뒤집고 흐르고 그러니 한강 물이 일정한 모양이 없다. 강원도에서 서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참 풍파도 많다. 강원도 오대산 산꼭대기 위 로 올라갔다 아래로 내려갔다 고기가 마셔버리기도 하고 사람이 받아먹기도 하고 나무뿌리에 들어갔다 돌 뿌리에 들어갔다 또 수증기가 되어 올라 가는 놈 그 신세가 어찌될지는지 모른다. 우리 인간도 한평생 사는 신세가 어찌 될는지, 오늘은 오늘 생각하고 내일은 내일 생각하고 그러니 서양철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은 알려고 하면 머리가 아프니까 그렇게 단정해버린 말에 불과하다. 곧 나는 없다는 소리와 한가지다. 허무한 인생이 물거품 같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 나는 시집을 잘 갔느니 장가를 잘 갔느니 돈이 많으니 한다. 그렇지만 그게 어째서 제 돈이냐? 돈한테 이끌리는 것이다. 돈 일원에 구속되고 저걸 누가 집어갈까 꾸어 달라면 어쩌나, 백만원 모아 놓으면 백만장 만큼 생각이 많고 백억원 모아 놓으면 백억장이 낱낱이 사람을 눌러 밤에 잠이 안오고 꿈에서까지 걱정이다. 그러니까 돈 많은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 원수가 많아지고 친한 친구가 다 떨어지고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독해진다. 권리가 높아도 높을수록 원수가 많고 고독해진다.
그러니 돈도 모을 게 못되고 권리도 높을 게 아니다. 개 돼지소리 들으면서 모았다 가 나중에 죽을때는 (지금 죽을 줄 알았으면 마음이나 좋게 쓰고 죽을걸) 그렇게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러니까 일생을 산다는 것이 무엇 때문에 사는 건지 그 까닭을 모른다. 꼭 흘러가는 물처럼 아무 까닭없이 부딪고 저리 부딪치며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인간의 일평생을 백년이라 한다면 이 일평생을 흔히들 살아간다고 한다.
이 귀중한 한평생을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하고 누구를 위해서 살고 있단말 인가? 우리는 흔히 이런 문제들을 전혀 생각지 못한 사이에 머리엔 흰머리 카락이 얹어 있고 얼굴엔 주름살이 잡히고 있다. 만일 인간들이 이런 이유 를 모르고 그저 먹고 자고 성생활만을 지탱해 나간다면 이는 저금수들의 생활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흔히 살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살아 간다는 말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말이다.
가령 인간이 ○○년의 삶의 권리 를 가지고 와서 하루 살았다는 말은 곧 일년을 죽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살아간다는 말은 죽어간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우리가 농사짓고 장사하고 정치하고 경제하고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죽지 않으려는 것인데 그래도 죽 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닌가. 이는 참으로 비참한 사실이다.
또 권력 재력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일생을 따지고 보면 죽은 이라고 하는 큰 구렁이한테 뒷다리를 물려 들어가는 개구리의 운명과 다를 것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만일 한1천년만 살았으면 족하겠느냐고 물으면, 아니 좀더 한2천년만 살았으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요, 만족의 한도를 모르는 인간의 욕망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 기간을 연장하여 1만년이나 만배의 기간을 살 수 있다 하여도 또 인간의 가수 상태가 아무리 장기간 가능하다 한들 유한계에서는 한도가 있게 마련이니 결국 종당에는 사멸을 모면할 도리가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오직 육체가 나인줄 알고 물질 문명에서 참다운 자아를 찾으려 하는 것은 마치 파초의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벗겨도 알맹이 는 없고 껍데기뿐이며 그러한 인간 사회는 아무 실상이 없다. 육체를 가지 고 (나)라 하는 뿌리가 박혀서 범부는 이것 때문에 고해를 헤매고 돌아다 니고 있다. 개나 돼지 그게 나라고 하여 남을 다 죽인다. 육체가 나라고 생 각하기 때문에 전생명 다 죽이고라도 나는 살려고 덤비는 것이다. 육체를 나라고 생각하는 여기에서 온갖 생각을 다 내는 것이다. 왜 빈껍데기만 가 지고 사느냐,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고 하느냐, 가령 이성끼리 상종하는 것 을 보더라도 여자가 바람이 나면 오늘 저녁은 이런 남자한테 끌려 가고 내일 저녁은 저런 남자한테 끌려 가고 그런 건 미친짓이다. 그런데 그것도 자꾸하면 또 하고 싶어진다. 그러면 이 세상은 혼탁해질 수 밖에 없다.
물질 문명만이 발달되고 성을 개방해 놓으면 인생이 고독해지고 허탈해진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도 없고 아껴줄 사람도 없는 신세가 되니 이유 없는 반 항과 욕구불만이 되어 자꾸 자살하는 것이다. 결국 물질문명은 인간의 행복을 객관세계에서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돼버린다. 나한테 본래 있는 행복이 정말 행복이다. 죽을 수 없는 마음을 깨쳐 얻어야 영원한 행복이다. 불에 뛰어 들어도 안 죽고 칼로 쳐도 안 죽고 원자탄 다 퍼부어도 까딱없는 것, 그 자리에서 얻어진 것이 비로소 행복이 아니겠는가. 그렇게는 못됐다 하더라도 그런 원리를 알고 믿기라도 해야한다. 안심을 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그까짓 돈 천만원 얻어놓고 안심할 수야 있는가.
바람만 불어도 어느 놈이 담 안넘어오나 깜짝깜짝 놀라고, 불쌍한게 돈버는 재미이다. 그러나 마음을 깨치면 정말 돈도 필요없고 의식주도 필요없고 생사고도 아무 상관없는데 행복을 얻는다. 지구가 다 깨져도 나는 까딱 없다. 마음을 깨쳐 놓으면 지옥을 가서 기름 가마에 집어 넣어도 거기가 극락이 된다. 그 자리는 뜨겁고 찬 것도 없고 마음대로 안 돌아가는 게 없으니 이 마음 앞에 나를 어찌할 수 있는 법이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원인을 모르고 산다. 그것은 자아를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자랑하는 5천년 인류의 문화는 인생을 불안과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끝내 절망에서 헤매이게 한다. 여기에 끌려 자아는 물론이지만 삶의 의의조차 모르고 살아오고 있다. 왜냐하면 길을 바로 들지 못하고 엇들었기 때문이다. 인생이 인생을 자기에게 찾으려 하지 않고 넓은 우주에서 막연히 헤매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영원히 헤매일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공상주의자가 인간을 옭매 놓고 밀봉교육을 시키는 것과 같이 여러 가지 사상과 학문들이 다 자기주의를 고집하고 있다. 과학 철학 종교, 정치 경제 문화 예술들이다 그러하다.
그러나 싯달다는 이 모든 것을 떠나서 인생을 자기 자아에서 찾으려고 했다. 자아에서 석가모니는 발견했다. 그러므로 인생을 억울한 미결수 즉 신원미상의 존재에 끌려 헤매이고 있는 미결수에서 완전히 무죄수로 석방한 일이다. 우리들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 그것은 곧 목숨이라 고 들한다. 그것은 모든 생물이 살아가는 원동력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흔히 세상에서는 자기 목숨은 소중히 여기면서도, 남의 목숨은 무시해버리거나 혹은 무자비하게 죽이는 수가 일쑤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당연한 일처럼 여기고 있는 슬픈 현실이다. 나를 살찌게 하기 위해 서 남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야하다니-힘센 놈이 약한 위를 짓밟고도 버젓 할 수 있는 잘못된, 너무나 잘못된 이 풍습! 우리 육체의 힘도 실제로 알고 보면 참는데서 나온다. 금생에 많이 참으면 내생에는 아주 장사가 된다. 평생 감기 한번 안 걸리고 건강하게 있다가 죽을 시간이 되면 앓이도 않고 돌아 앉아 죽는다.
저 아무 것도 아닌 무정 허공이 어찌하여 제 스스로가 변화하여 현상을 할 수 있을 것이가? 공즉시색도 또한 그리하여 진공적인 환영상의 무정 현상계가 어찌하여 그 스스로가 진공으로 변하여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는 필연코 커다란 숨은 그 무엇인가가 있어서 저 무한 대의 진공포장에다가 색즉공 공즉색이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런 영화를 상영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 진공과 물질은 다만 자유도 없는 죽음의 무정 환상이다. 그와 반대로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런 영화는 반드시 절대 자유한 이 삶의 무한 생명으로서 조화의 무한 동력이다. 그러면 저 현상계가 창조되기 전의 그 무엇인가로서 이 삶의 무한 동력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곧 우 리들의 이 마음이다. 이 세계에는 성주괴공의 무상이 있고, 이 사람의 몸뚱이에는 생로병사 가 있고, 마음에는 생주이멸이 있다. 그 사람 잘 생겼다고 좋다고 엎어질 둣 야단이더니 나중에는 슬그머니 권태증이 나 가지고 보기 싫어진다. 날마다 한 시간도 안 빠지고 가더니 이제 이틀에 한번 씩 가기 시작하고 차차 차차 나중에는 찾아와도 보기 싫을 지경으로 된다. 그렇게 그 사람 좋아하던 마음이 딱 없어지고 그래 가지고 나중에는 미운 생각이 앞서 있게 된다. 그러다가 미운 생각이 차차 차차 없어져가지고 또 좋아하는 생각이 난다. (아이고 불쌍해라 너무했다) 이렇게 변한다.
그러니 마음에 한 생각이 생겨 가지고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벼락같이 꼭 그대로 내가 죽어도 해야지 하고 글씨를 배운다, 문장을 배운다, 소 설가가 된다하고 죽어도 한다고 이렇게 서둘다가도 슬그머니 하기 싫어지 는 때가 온다. 남녀간에 연애하는 경우에도 이렇게 처음에는 서로 좋아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생이라고 하고, 그 좋아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남아있는 동안을 주라 하고, 좋아하는 도수가 자꾸 식어지고 마음이 달라지는 때를 이라 하고, 차차 서로 지조가 없어져 쳐다봐도 인사도 제대로 안하고 좋다는 마음이 하나도 없어진 때를 멸이라고 한다.
중생의 마음에 생주이멸, 이것이 있기 때문에 몸에 생로병사의 그림자가 나타나고 이 지구와 세계에 성주괴공의 모양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다 순전히 마음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아! 인생이여 똑바로 생각하자. 이 똑바른 길도 바르게 가며 이 똑바른 길도 각각 자기에 있는 것이다. 나는 나다. 나는 오직 나로서만 나다. 나 이외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또 하너만이 아닌 내가 아니라 저 모든 것들이다. 나는 아니다. 하늘도 땅도 부처님도 하느님도 진리도 다 내가 아니다. 그 너머에서 발견된 이 나는 곧 진리며 조물주며 우주의 본체로서 영원한 자유의 생명이다. 아! 다행한 일이다. 행복한 일이다.
춤추고 노래 부르며 경축하자, 등불을 밝히고 행진을 하자. 석가세손이 49년간 설법한 것이 바로 이 말이외다. 설족께서는 신원미상의 조물주와 인간의 육신이 마지막 길인 줄만 알고 절망과 무명에 헤메이고 있는 인생을 우주의 주인공으로 영원불멸의 자아인 마음의 진여를 밝히고, 둘째로 영겁으로 생사윤회하는 고를 깨우쳐 그 해탈의 길을 밝혀주고, 셋째로 인 생의 빈부귀천과 선악과 지혜와 어리석음이 다 전생의 인과응보임을 밝히고 다 나 자신이 스스로 어두운 길을 헤매일 뿐이고 다른 힘의 지배로 되 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인생으로 하여금 인생 스스로가 우주의 주인공이고 조물주임을 깨달아 자기를 알게 하고 인간 스스로가 영원의 행복을 개척하도록 했다.
우리들이 갇혀 있다가 혹은 죽음의 절망에서 풀려났을 때의 그 홀가분한 자유러움, 그것은 환희다. 그것은 푸른 하늘이다. 이 환희와 푸른 하늘을 우리와 모양을 달리한 생물에게 베푸는 일을 불교에서는 방생이라고 한다. 산 목숨을 죽이지 않을 뿐더러 한걸음 나아가 그것을 살리는 자 비! 짐승이나 물고기들이 비록 겉모양은 우리와 다르더라도, 그 목숨에 있어서는 주금도 다를 수가 없다. 모성애의 숭고함이 우리 인간사회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동물들의 모성애를 보고 눈시울을 뜨겁게 한 일을 우리는 가끔 경험하고 있으므로- 자비가 메말라가는 이 살벌한 오늘의 현실에 이 나직한 목소리들이, 우리들 이웃에 두루 번지어 메마른 가슴을 울려줄 때, 우리들의 눈매는 살기 대신 따뜻한 사랑으로 빛날 것이며 가슴마다 이웃에 대한 포근한 자비로 철철 넘칠 것이다. 해가 기울어도 문단속할 수고조차 없어질 것이며, 담장 위에는 철조망이나 유리병의 시퍼런 서술 대신에 부 드럽고 환한 꽃을 올려놓게 될 것이다. 날던 새들도 우리 팔에 내려와 마 음놓고 쉬어갈 것이고, 물론 살아있는 생명의 푸른 나뭇가지에서처럼-그날 우리는 슬기로운 식물성 왕국의 푸른 깃발을 하늘 높이 올리면서 환희를 합창해도 좋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일 수 있다. 의젓한 인간 일 수 있다.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꿈에서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르듯이, 우리가 경험하는 소위 현실 이라는 것도 그대로 꿈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다. 지금 살고 있는 생시가 바로 꿈이라고 하면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대들 것이다. 그러면 어찌 하여 그 꿈(생시)이 영원한 꿈인데도 꿈인줄 모르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똑같기 때문이다. 꿈에서도 연애해 가지고 아들딸 낳아서 대학 까지 공부시키고, 또 장가들이고 시집보내서 손자를 보고 하여 잘 산다.
이 처럼 우리가 꿈속에서 겪는 세계나 생시의 일들이 너무도 같기 때문에 그 꿈을 깨기 전까지는 그게 꿈인 줄 모르는 것이다. 꿈속에서도 태양이 뜨고 지구가 있고, 산소 수소가 있으며 온 우주가 다 거기있다, 꿈에서도 설탕은 달고 소금은 짜고 춘하추동 사시절이 있어서 날씨가 차고 더우며 어린애들 낳아서 키워보면 어려서부터 점점 자라서 커간다. 그러니 이러한 것을 어떻게 꿈인 줄로 알 수 있는냐는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꿈을 깨어볼라치면 시간은 불과 몇 분도 채 안된다. 인생이 꿈같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꿈이다. 꿈으로 한 일, 그게 사실로 한게 아니고 모두 거짓말로 한 것이다. 성불했다는 것도 역시 거짓말이다. 성불 아닌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성불했다는 말이 있는 거지 성불해야겠다는 말까지도 그게 꿈이다. 정말 실상자리에서 보면 제대로 돼있으니 꿈꿀 사람도 없다. 사람이 자는 시간도 대체로 하룻밤에 일곱 시간 내지 여덟 시간이므로 내가 잠이 든 전시간 동안에 꿈을 꾸었다고 해도 여덟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꿈속에 들어가서는 여덟 시간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잠자는 동안 꿈속에서 경험 하는 시간은 닷새 사는 때도 있고 한 달 사는 때, 한 해 사는 때, 몇 해 사 는 때 까딱 잘못하면 한평생을 사는 때도 있다. 그러니까 밤을 새워가며 꿈을 꾸었다 하더라도 여덟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는데 그것이 꿈에 들어 가서는 일평생이 되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루나 반나절 꾸도 꾸지마는 저녁마다 일평생 꿈을 꿀 수도 있는 것이므로 생시에 반나절 꿈도 꾸지 마는 저녁마다 일평생 꿈을 꿀 수도 있는 것이므로 생시에 반 시간보다 꿈 속에서 사는 시간이 훨씬 더 많게 된다.
꿈과 현실이 똑같은 것은 다 한마음이 세계이기 때문이다. 꿈을 꿀 때에도 이 몸뚱이 처자 재산을 다 그대 로 놓아두고 마음만 나아가서 꿈세계를 창조해 놓는다. 꿈울 깰 때에도 꿈 속에 있던 몸뚱이 재산 처자를 만들어서 꿈하고 똑같은 세계를 만든다. 꿈만 꿈이 아니라 꿈 아닌 것도 꿈이다. 망상은 꿈을 이룬다. 이것은 곧, 주관은 객관을 조화한다는 실증을 말하는 것이다. 주관밖에 객관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주관이 곧 객관이며 객관이 곧 주관이다. 뜨겁고 찬것이 불과 물에 있을 수 없다. 주객이 둘이 아니므로 우리의 인식밖에 기둥과 기둥이 있을 수 없으며 기둥과 기둥의 모양 밖에 인식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주관을 쉬어버린 때에는 객관도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을 쉰 이 청정한 본래의 마음법에는 기둥도 기둥 모양도 없다. 그러므로 저 기둥한 가지를 볼 때에는 곧 기둥이 나타나는 이치와 그 기둥을 나타낸 이 마음의 본연면목을 동시에 깨달을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이 저 만물을 다루면 된다. 꿈이 아무리 헛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꿈을 깨기 전에는 꼼짝없이 사실인 고와 낙을 받는 것과 같이 이 마음을 깨치지 못한 종생들을 업습에서 일어나는 천당 지옥의 꿈을 벗어날 길이 없다.
꿈 에서 죽고 꿈에서 태어난다. 우리 승려들은 꿈이 없다는 소리를 한다. 거짓말이 아니다 중 노릇을 제대로 하는 수자들은 꿈이 없다. 또 대인들, 수양이 되어 있는 사람들도 확실히 꿈이 적다. 수양이 되면 마음이 비어서 번뇌망상이 적으므로 꿈이 적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낮꿈은 평생 살아봐도 70년,80년밖에 안된다. 그것도 잠자는 시간, 병 앓는 시간 다 빼고 나면 몇 십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밤꿈은 몇 백년 몇 천년을 산다. 따라서 생시는 얼마 안되는 시간을 산 것이고 밤꿈은 낮꿈의 몇 배, 몇 십배를 더 사는 결과가 되므로 정말 꿈은 밤꿈이 아니라 생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밤꿈에만 우주를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 꿈을 깬 낮꿈에도 우주를 창조 해 내고 있다. 그러므로 꿈이라고 하면 낮꿈 밤꿈이 다 꿈이다. 밤 낮 금생 내생이 다 꿈인데 이 꿈 가운데 꿈이 아닌 것은 꿈을 꾸고 우주를 창조해 내는 우리의 마음뿐이다.
밤꿈에는 이 마음 이대로이고, 낮꿈에더 이 마음 이대로이다. 그런데 생각은 그때 그때 환경에 따라서 추우면 춥다,더우면 덥다 라고 느낀다. 생각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지만 추우면 추운지 알고, 더우면 더운지 아는 이 마음은 불변의 나다. 생사의 변천이 없고 질량의 변화가 있을 수 없는 이 나는 모든 지식의 주체인데, 이 마음의 시간과 공 간을 만들어지가지고 큰 것은 크다, 작은 것은 작다고 하는 것이다. 육신도 마음이 만든 피조물인데 중생들이 육신을 주인으로, 마음을 육신의 종으로 삼아서 주객을 뒤엎고 있다.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주관 대 객관으로 벌어 져 있는 이 우주와 인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들은 이것을 다루려고 드는 통에 온 우주의 주인공인 유아독존의 자아가 깜빡하 는 순간에 도리어 창해일속으로 한 개의 적은 육체의 인간으로 전락되어서 이 생사대몽을 이루어서 윤회와 인과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인생이 사는 것도 꿈이요, 죽는 것도 또한 꿈이다.
어찌할소냐, 이 죽음을
만물의 영고성쇠와 인간의 생로병사는 만고의 철칙이요, 대자연의 무상법 칙일진대, 어찌 무엇으로든 가로막을 수 있으며, 누구인들 능히 탈피할 수 있으리오. 사람은 나면 그 시간부터 죽음의 적에 쫓기고 있다. 사람은 개구리이고 죽음은 구렁이다. 낮이면 낮, 밤이면 밤마다 찰나도 쉬지 못하고 죽음이란 구렇이에게 쫓긴다. 자는 시간까지는 죽음의 구렁이에 쫓기는 개구리의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 중생들의 생활이다.
그것도 한번 죽고 그 치는 죽음이 아니고 천당 지옥 축생으로 내생에도 무량 겁을 쫓기고 죽는다. 마음을 깨쳐서 육신이 내것 아닌 것을 확인해야 죽음의 쫓김을 면한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죽기 전에 우리는 먼저 살기부터 해야한다. 산다는 것. 이것은 우리 인생이 태어날 때부터 걸머지고 있는 명예요 권리다. 그리고 이 삶을 위해 우리는 평생토록 일을 하고 싸우고 또는 휴식을 하곤 하는 것이다.
가령 새까만 연탄을 지고 산꼭대기까지 오르내리는 짐꾼의 경우를 들어보자. 밝기 전에 일어나 어둡도록 일을 하는 농사꾼을 생 각해 보자. 기타 교단에서 강의를 하는 이, 정치를 하는사람, 노동자, 인텔리 어느 경우를 보든지 그들은 모두 살기 위해 활동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모두 진정한 삶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그것은 그저 몸뚱이를 살찌게 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일 뿐 시시각각으로 달라져가는, 그리하여 언젠가는 죽고 말 이 육신을 편안케 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활동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 때든지 죽어 없어질 이 육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 나는 불가불 싯달다 태자를 연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싯달다 태자는 실로 이렇게 죽어 없어지는 몸뚱이 이외에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분이다. 또 하나의 삶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불성이라 해도 좋고 하느님이라 해도 좋다. 어쨌든 영원히 살아 있는 나, 다시 말해서 진여라 여래라 하는 것이 바로 이 또 하나 의 삶이다.
이것은 온갖 움직임과 생각과의 주체가 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길이다. 가령 어는 사람이 백년의 명을 타고 났다면 우늘 하루 살았다 하는 것은 24시간 목숨을 잘라버렸다는 뜻이다. 산삼 하나을 달여서 쭉 들어마시는 그 시간도 자꾸 죽어가는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누워서 자는 것도 죽어가는 것이고 오면서도 죽어가고 가면 서도 죽어가고 사는 것이 다 죽어가는 것뿐이다. 아무 사정도 없이 만분의 일초도 정지함이 없이 자꾸 가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간다는 소리는 죽어 간다는 소리다. 결코 죽고야 마는 인생이 왜 생겨났을까? 아렇다 할 목적 도 없이 왔다가 까닭도 모르게 가버린다. 맨손으로 왔다가 맨손으로 가니 뜬구름 같은 이 세상의 삶을 남을 위해 바쳤는가, 나를 위해 살았는가? 아무리 따져보아도 나느 모를 일이다. 나는 이 순간에도 흘로 죽어 들어간다. 그것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이렇다면 무엇을 가리켜 산다고 하며, 무엇이 나고, 무엇이 살고, 무엇이 죽는 것이냐? 과연 이것뿐인지 아닌지 진실로 알고자 하는 뜻에서 세상살이에 깊이 무상을 깨달아야 한다.
생사거래을 자유로 하는 일이다. 정력의 힘이다. 일평생에 공부를 다해 마치고 대원을 세워 빈틈없이 날뛰어 오히려 어긋날까 걱정이 되는 것인데. 하물며 수도를 게을리 하는 사람으로서야 무슨 힘으로 다생다겁을 육신본위며 자기본위로만 저질러놓은 죄악의 업력을 막을 수 있으랴. 설사 지견을 얻은바 있어서 불법대의는 알았다 하더라도 선정력이 없는 사람은 생로병사에 자유가 없으므로, 병에 끌리며 죽음에 끌려 속절없이 눈만 감았으니. 일생의 노릇이 헛걸음만 하고 죽어가서 가없는 저 고해의 생사파도에 표류하리니 이 누구을 원망할 것인가?
너는 진짜 열반이 아니다. 진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열반도 아니고 생사도 아니고 부주열반 부주생사하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수명은 1백년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 고금의 통례이며 무상계의 숙명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죽는것과 산다는 것, 죽으면 그것으 로 끝나고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유물론적 사고와 내생을 설정하여 사후연생을 믿는 인생관의 분기점에서 우리들은 실로 엄청난 숙제에 부딪 치게 됨을 본다.
이것은 가장 중대한 인생의 명제인 동시에 인류의 역사와 동서고금의 철학사와 더불어 오늘에 이르러 우리 앞에 가로놓여져 있다. 덴마크 총각 처녀들은 자살까지 한다고 한다. 도의적인 구속도 없고 성도 개방했고 음식도 마음대로 먹고 그야말로 지상의 극락세계이고 천당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많은 청년들이 자살을 한다. 먹고 배설하고 죽는 것보다는 좀 통쾌하게 죽자 해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수십길되는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고, 택시를 타고 가다 강이나 바다에 떨어져 물이나 꼴딱꼴딱 먹다 죽자, 그래봤자 하나도 억울한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물사상으로 는 아무리 고도로 진보해 봤자 먹고 똥싸는 것밖엔 인간을 만족시킬 만한 이상이 없다. 결국 자살할 길밖에 없다.
영혼을 부정하는 인간의 말로는 결국 비참하게 끝난다. 자살이 부쩍 늘어난다면 정말 이것은 생의 애착도 없어진 상태다. 백년 다 살아봐도 아무것도 아니다. 금방 죽어도 아깝지도 않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인간이 여기까지 가면 다 끝난 것이다. 물론 이것이 소수에 한한 일이고 전부는 아니지만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 해 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거짓말을 잘하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남이 그 사람 말은 곧이듣지 않는다. 술 먹는 사람은 정신이 흐려져서 어리벙벙해지는 것을 좋아했으니 내생에는 바보가 되어 나오는 것이다. 인간은 나서 죽는다. 그렇다면 그냥 생사의 궤도마냥 무한대의 평행선을 따라 어쩔 수 없이 망각된 채로 죽어 야 하느냐, 아니야!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 오고가는 것은 분명할 게 아닌가. 난 이렇게 내 면목도 타의에 의해 송두리째 앗겨 던져진 채 영영 시들어져야만 하는가. 아니다. 시들어져야만 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늘의 조그만 인정에 치우친다면 내일 영원히 살고 죽는 대법리를 잊어야 한다. 아니야 오늘날 숱한 인간들의 조롱과 멸시와 모욕과 증오와 버림의 슬픈 몰골이 된다 하더라도 난 분명히 대법리를 찾아야 한다. 찾지 못하여 버리고 온 아내와 그리고 버려져야만 될 자식에겐 무한의 증오와 저주의 시선이 언제까지나 지속이 되더라도 난 각오가 있어야 한다. 실달다 태자께서는 3 천년 전에 이런 걱정을 했다. "사람은 죽는다. 나도 죽을 것이다 어느 누가 나르 죽게 만들었으며 왜 그렇게 된 것이가" 그 깊은 비밀을 낱낱이 파헤치 고 쳐부수고 싶다. "우주는 상대적인 원리로 되어 있다. 높은 것이 있으면 낮은 것이 있고 더운 것이 있으면 찬 것이 있고.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전부 이렇게 대조적인 원리로 되어 있으니 죽는 것의 대조는 안 죽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죽지 않는 원리가 있을 것이다. 내가 안 죽는 원리 를 발견하고야 말겠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밤새도록 잠도 못잤다.
마침내 싯달다 태자는 궁전과 미녀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서 인도천지에 있는 도인들을 다 만나 물어봤지만 몇 백년 몇 천년 살수 있는 방법은 없지 않으나 아주 안 죽는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 오래 사는 것이 원이 아니고 영원히 안 죽는 방법, 허공이 없어진다 해도 안 죽는 원리를 발견 하자는 것이 나의 원이다." 이렇게 생각한 삿달다 태자는 개소리 닭소리 안 나는 산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서 그 해결을 위해 참선을 했다. "내가 영원히 안 죽는다. 뭐가 그리 영원히 안 죽는냐.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나다. 그러면 내가 무엇인데 영원히 안 죽나." 가만히 자꾸 따진다. "이제 까지 나라고 하는 것은 육체였는데, 만일 육체가 나라면 영원히 안 죽을 수 없다. 그러면 정신이 나인가. 그러나 이 생각 저 생각 변화무쌍하니 그 가운데 어느 생각을 나라고 할 수도 없다." 싯달다 태자는 선정삼매에 들 어서 모든 생각이 어디서 나오나 살펴보았다. 싯달다 태자의 생각은 아버지 생각도 어머니 생각도 아우 자식의 생각도 아니고 확실한 자기 생각. "그런데 생사를 면해야 하겠다. 영원히 죽지 않은 원리를 찾아보자. 이 생각은 분명히 내 생각이다. 그러나 내 생각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생각을 내는 나는 무엇인가. 생각을 내는 것이 나지 생각이 나일 수는 없다. 그러니 생각을 나게 하는 이 주체가 무엇인가" 이것이 의문이었다.
제2장 생각하며 행동할 때
영광된 봉사 욕심 버리고 일하다.
남을 위해 할 일밖에 없다. 이 육체는 내가 아니니 완전히 내버리고 나면 육체를 위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정신으 로 다만 내 이 본마음의 자세를 그대로 지니고 간직할 뿐, 오직 부모와 형 제와 아내와 남편을 위해서 살고, 친구와 이웃을 위해서 일하라. 남을 도와 주는 마음은 스스로의 기쁨을 갖는 생명이다. 생은 곧 스스로의 진리인 것 이다. 남을 위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가정과 그 사회는 행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행복과 불행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따라 있는 것이다.
신의 가호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미신을 계몽하고 자기를 찾아야 한다. 자기 마음을 밝혀 인간 자신은 영원한 진리의 주체임을 깨달아 자신 의 입장을 자신이 소멸하는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선악 은 자신의 인과응보에 있는 것이다. 선악의 과보로 얽여 있는 업장은 자신 의 참회로 자기 업장을 소멸하고 새로운 인과를 닦아 새로운 신앙의 힘을 찾아야 한다.
사람의 본성은 곧 무한한 우주의 진리이므로 자기 인과로 자 신을 얽어맨 자신의 업장을 소멸하면 자신의 신앙에 따라 무한한 힘을 이 룰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속세로부터 얽혀 있는 업장이 자기 몸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밝혀 마음이 곧 천지의 근본이고 자신은 영 원한 생명으로 생사 윤회를 하는 진리이고 선악의 과보가 다 자신에 있는 줄만 알면 인간은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다.
부처님은 남을 도와주는 것, 배고픈 사람 밥 주고, 헐벗은 사람 옷 주고, 병든 사람 구원 해 주고 이렇 게 남을 도우는 것을 해롭게 하고 남을 죽이고 하는 행위인데, 이것은 죄인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받게 되고 죄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보시하고 계행도 잘 지키고 인욕도 하여 남이 뭐라고 욕을 보이더라도 다 참아서 참았다는 생각까지 없이 참으라. 남이 욕한다고 야단치고 보복하고 칭찬해 준다고 좋아하고 이러다 보면 번뇌의 생사심만 늘지 언제 보리를 성취할 것 인가.
아픈 것을 못 참을수록 인욕을 하지 않을수록 병은 오래가게 마련이고 겁을 낼수록 병은 오래 가게 마련이다. 시치미 뚝 떼고 있으면 병이 쉽 게 낫고 뼈가 부서져도 그게 갑작스레 나아버리는 수가 있다. 몸뚱이를 버리고 나면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몸뚱이를 버려야 아픈 줄 모른다. 그러니 몸뚱이를 챙긴다든지 하는 수양이 필요하다. 애착하기 때문에 내가 살을 잡으면 아프지만 사실 몸뚱이 제가 생명이 없으니 아플 수도 없고 감각할 수 없다. 마음은 또 본래 물질도 허공도 아니기 때문에 아픔이 생길 수 없 다. 살이 아픈 것도 마음이 아픈것도 아니다. 그러면 뭐가 아프냐.
마음으 로 생각을 내서 아픈 것뿐이다. (육체가 나라는 착각을 버려보자.) (육체 생활을 좀 정리해 가지고 하루 밥 세 끼 먹던 것을 노력하여 두 끼 먹고 수양하자. 더욱더 자아완성을 위해 노력하자.) 우리 마음의 본래 자세에거 보면 무슨 지식이니 신앙이니 하는 것은 흙탕물처럼 된 것이고 헝클어진 실같이 번잡한 망상이다. (그건 무슨 귀중품이다. 보물이다, 잘 관리하자. 이 사람 무슨 병이냐, 어려서 애들과 장난을 하다 피가 많이 날 정도롤 피 부가 상했어, 그래 균이 들어가 지금 파먹고 있다.) 이 생각이 병이 되고 이 과념이 절대원리라 믿고 중생심으로 얽매이지 말라. 모든 것 다 버리고 마음을 탁 놓아라.
그러면 본래의 마음이 드러나고 육체의 주인공, 우주의 핵심, 생각의 주체를 알게 된다. 마음을 어디다 두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 보시도 하고 지계도 하고 육도만행을 하라!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부지런히 농시짓고 종일 일해도 고된 줄 모르고 아무 생각없이 일한다. 이게 내 일이라 생각 말고, 꼭 나만 먹을 거다 이런 생각 말고, 아무나 배고픈 사람이 먼저 먹을 거고 헐벗은 사람이 먼저 입 을 옷이라 생각하여 열 벌이고 한 벌이고 장만하는 것이 도인이 하는 행동 이면 모든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대보살이고 자기도 완전히 의식주를 초월하고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일아라는 것이 그때그때 어떻게 됐다고 해서 그게 아주 망하는 건가, 이렇게 말할 수도 없는 거고, 지금 한참 잘된 거이 나중에는 큰 화근이 되어 백년 살 것을 십년도 못 살고 죽 는 일이 생겨날지도 모르는 것이다.
좋은 일이 아무리 생겨도 그것을 좋다고 생각 안하고 아무리 지금 불행한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나중에 복 받은 일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것도 오히려 조작이 붙은 속임 이다. 그것도 저것도 없는 도대체 아무 생각없이 하는 것이 무소유다. 손바닥만한 거울을 갖고 서울을 비치면 동서남북으로 이십리 이상 되는 큰 서울이 입체적으로 다 들여다보인다. 상식적인 이론으로는 손바닥만한 거울 안으로 서울이 들어가면 큰 빌딩이 깨알보다 작데 축소돼서 보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손바닥만한 거울 안에 몇 억만배나 되는 서울이 그대로 들어가는 것처럼 큰 것과 작은 것이 서로 구애 없이 들어간다. 큰 것도 아니 고 작은 것도 아니다. 마음은 그 자체가 저절로 만복을 다 갖추어 있으므 로 일체 탐욕이 없는 것이요,
또한 세상 일에 아끼고 탐낼 만한 일도 없기 때문에 전재산을 버려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며, 또한 처자 와 이몸까지라도 남의 생명을 도울 수 있다면 다 희생하고야 마는 것이다.
둥근달 외로이 저 하늘에 밝았는데,
흰 눈에 덮인 저 강산은 한없이 고요하다.
웃노라, 코웃움에 천지는 무색하리.
그러나 저 어두운 중생들이 이 마음이 진실로 나인 것을 잊어버리고 그릇된 생각으로 생사에 윤회하며 소나 개나 남자나 여자나 되었을 적마다 나는 남자다 여자다 소다 개다라고 주장하고 고집하던 버릇의 뿌리가 아직 남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이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없애버리기 위하여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을 제도하되 사실은 중생이 아닌 중생을, 제도 안되는 제도를 하는 것이며, 내 마음은 또한 그런 생각조차도 없다. 그러므로 이 놀음은 순전한 자리가 되는 동시에 순전한 이타가 되는 것이며 또한 이 마음은 장엄한 것도 되는 것이다.
승려들이여. 사상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점과 말을 위한 말을 경계할 것을 명심하라. 중요한 것은 사상에 있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름다울 수도 있고 어리석을 수도 있으며, 지혜로 울 수도 있다. 각 사람은 그 사상에 동의 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고 묵살할 수도 있다. 모든 불교의 진리란 지식을 구하는 자를 위하여 세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다.
즉 세계의 비애를 해탈하려는 것이다. 지식을 경계하라는 말과 세계의 비애를 해탈하려는 말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은 행동하라는 일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각을 얻기 위해서 행동하라. 그리고 그것을 얻은 다음에도 행동하라.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고, 어느 하나를 배척하지 않으면 안된다. 취하는 길은 곧 버리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불자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버리고 얻는 데 허위로 외면으로 택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세존의 정신을 따르는 일까지도 그러하다. 우리들은 세존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려고 했던 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저 세계의 비애의 해탈인 것이다. 내가 부족해서 집이 망하고 나라가 망하고, 나 하나 잘못해서 이 나라가 혼란하는 그런 태도로 참회하고 겸양해야 된다. 그래서 우리가 복을 받는다. 이런 태도로 부부간에도 참회하고, 양보하고, 봉사해 주고 참으로 위해 줘야 이것이 자비이고, 진정한 애정이고 행복의 문이다.
세계 45억의 사람이 다같이 남을 살리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세계는 지상 극락이 된다. 이렇게 남을 해치지 않고 위해 주며 사는 자비 앞에는 적이 있을 수 없다. 노동하는 시간을 빼놓고 나면 따로 산 시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일생을 노동하는 시간에 소비하고 만 것이며, 노동하는 시간 외에 따로 산 틈이 전혀 없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만분의 일초도 쉴 새 없이 노동만 하다가 언 제 늙어서 언제 어떻게 죽는지 모른다. 꿈이나 생시나 오직 살기 위한 일념으로 하긴 했지만,
삶이 무엇인가? 인간이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 인가? 하는 것은 잠시도 생각해 볼 여지가 한 번 없이 1년 3백 65일을 맹 목적으로 살기 위한 노동에 몽땅 다 바친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참다운 삶 이 무엇인지는 젼혀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사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시간이 없다. 허망하게 시간이 다 가버렸다 하면서 마지막 탄식을 남기게 마련이다.
과연 삶이란 어떤 것이길래 그것을 위해 24시간 몸과 정신을 온통 다 바쳐서 희생을 해야 하느냐? 꼭 한 번 생각해 볼 일이 아닌가? (삶이 무엇이 냐? 어떤 것이 산다고 하는 것이냐?) 이렇게 물어보면, 이런 것이라고 확실하게 대답할 사람은 없다. 그저 살기 위해서 농사를 짓고, 장사사기 위해 서 산다고 하면 쉬울지 모른다. 이 얼마나 섭섭한 이야기인가? 사람이 우주 이전부터의 실제로서의 질량이 아닌 자기 마음을 깨쳐서, 생사를 초울 하여 전우주의 심령세계와 육신세계에 자유자재하며 전지전능한 불타의 지의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 이른바 불교에 8만4천가지나 된다.
그러나 실로 는 8만4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만일 불타의 49년 설법을 다 기록한다면, 현재 남아 있는 불경의 천만배가 더 될 것이다. 법을 듣는 중생들의 그 개성과 그릇이 다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8만4천 불법을 다시 종합적 으로 간단하게 분류하면 여섯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이른바 육바라밀이니 육동이니 하는 것이다. 첫째는 물심양면으로 남에게 이익을 주는 자비심을 행한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자신의 마음을 단속하면 행동을 조심하여 탈선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자기의 소신을 성공하기 위하여서는 모든 곤란과 애로를 다 극복 하는 것이요 넷째는 남과 나를 위하여 옳은 일이라고 생각될 때에는 그 일을 위하여 전후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전진이 있을 뿐이고 중지나 후퇴를 모르는 것이요 다섯째는 태산 같은 입지와 바다와 같은 안심으로 바라는 바 목적 성공 을 위하여 그 바깥 일에는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는 일이요. 여섯째는 위의 차례르 따라 쉬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인생의 본면목인 이 마음을 깨쳐서 태어날 적마다 일초의 틈도 없이 죽음에 쫓겨서 영겁에 헤매던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여 영원과 자유과 행복을 누리게 하며 동시에 천상과 인간의 최고의 지도자로 군림하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그 마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점령이다. 남의 생명의 자유라는 것은 손끝만큼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곧 도둑이다. 세속의 사랑은 어디까지 자기본위, 자기중심이다. 남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남자가 장가가는 것도 자기 욕심 채우려는 것이지, 처녀 욕심 채워주려고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첫날 저녁부터 싸우고 일평생을 싸운다. 서로 제 욕심만 채우려고 하니 아이들 여러 명 낳고 살아봐도 개성이 안 맞고 욕심에 안 맞아서 싸우게 된다. 속칭 그것이 사랑이다.
자비를 가진 남자라면 장가를 가더라도 남이 데려가지 않는 아주 못생긴 처녀를 하나 얻어다가 호강 시켜 줘야겠다. 하루 백만원을 벌어서라도 다 맡기고, 잘살든지 못 살든지 저 여자 뜻대로 하게 해야겠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언제나 상대를 존중하고 위해 주는 생활을 할 것이다. 이렇게 상대편 본위로만 하고 자기는 조금도 내세우지 않는 남편 앞에서는 아무리 악녀라도 보살이 된다. 그렇게 하면 그 여자 마음엔 그 남자뿐이고, 우리 남편이 제일이라는 생각만이 있을 것이다. 남편이 보살로 보이고 부처로 보인다. 그러면 서로 보살이 된다.
중생들은 언제난 조건부로 상대편을 사랑해 주려 하니, 상대도 네가 하 는 것만큼 사랑해주겠다 그러는 것이다. 네가 나한데 부족하게 해준 만큼 나도 섭섭하게 해주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내외간에 날마다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나쁜 심리로 남을 점령하는 것이고 남을 구속 하려는 것이다. 반대로 자비는 남을 해방하려는 마음이고, 남을 이해하려는 마음이다. 박애라고 하는 것도 절대의 사랑이 못되고 자기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하고 만나면 내외간이나 부자간에도 서로 38선이 생긴다. 자기를 전혀 잊어버린 사랑, 어떤 한계를 두지 않는 사랑,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외간에는 사람은 둘이지만 촌수는 없다.
그러니 두 사람이면서 하나이고 서로 피를 섞어 가지고 아들딸 자꾸만 낳으니 촌수를 댈 수 없이 완전히 하나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이에 어질고 얌전한 부인을 속이고 다른 곳에 여자가 있으면 이것은 이세상을, 아니 이 우주를 배신한 것과 같은 죄가 생긴다. 훌륭하고 착한 남편을 내버려두고 아무도 모르게 다른 남자와 친하고 있다면 이 역시 이세상을 배신한 것과 같은 죄가 생긴 다. 부부간의 배신은 죄 중의 제일 큰 죄다. 재산 많고 지위 높은 것도 관계없이 인덕 없는 사람이 있다. 내가 먹여 살려주고 내 신세를 가장 많이 진 부하들까지도 나를 욕한다. 이 사람은 전생에 부부간에 배신을 많이 한 때문이다. 남편이 바람피우고 하니 첫날 저녁부터 생과부가 되어 자기도 일생 동안을 지내는 사람이라도 남편을 나쁘다고 하지 말라.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남편을 따라주어야 한다.
밤에는 남편이 가는 대로 등불 들고 바래다주고 몇 십만원씩이라도 갖다 주면서 우리 남편 비위 좀 잘 맞추어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한다. 우리 주인은 내 힘 가지고느 위안이 안되니, 당신이 좀 해주면 내가 그 은혜를 갚겠다고 정성으로 부탁하면서 알지도 못하게 가만히 놓아두고 오라. 이것은 변태적인 자학생활이거나 히피족들의 경우에서와 같은 막살이 식으로 그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디까지나 진심으로 하는 참회생활이고 진심으로 남편을 행복하게 하려는 사랑으로 하는 생활이다. 남편이 첩을 얻었을 때, 여자는 흔히 저주를 한다. (두 사람 이 꼭 껴안고 누웠을 때 불이나 나서 타 죽었으면......) 만일 여자가 이러헥 악담을 하였다면 복을 받겠는가?
전생에 제가 나빠 가지고 남편이 그렇게 하는 줄은 모르고, 다시 산 사람 둘이나 불에 타 죽게 하는 죄를 지었으니 이런 여자는 죽어서 틀림없이 지옥에 갈 것이다. 낮이고 밤이고 24시간을 또 사람이 타 죽는 생각만 할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질투의 불길이고 성내는 마음이고 어리석은 중생의 인과생활이기 때문에 죄악의 연속이 될 뿐이다. 적어도 불자라면 이런 죄악의 불구덩이로 빠져들어가서는 안된다. 자기를 뉘우쳐야 하고 이런 업의 고랑의 벗어나는 길을 갈 줄 알아야 한다. 호강도 고생도 내가 다 지은 일이며, 부모나 남이 나를 호강도 고생도 시킬 수 없다. 내 마음 가운데 있는 복을 남이 받을 수 없고, 내 마음이 죄 지은 것을 누구에게나 줄 수도 없으무로, 제 복 제가 받고 제가 당한다.
우리의 참다운 행복은 육체나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켰다고 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 속아 사는 생활이다. 마음을 깨치지 못해서 현실을 잘못 보고 미래를 잘못 진단해서 속이 어두운 협잡배들이 자기의 진귀한 보배를 사기당한 생활이다. 우리가 오직 구해야 될 것이 있다면 마음의 밝은 원리를 깨쳐야 하는 일이며, 육체와 현실은 다 꿈이고, 착각이고, 마음 의 그림자임을 깨닫는 일이다. 인간의 육체는 흘러가는 한강물처럼 날마다 변한다. 평생을 사는 부부라 할지라도 사실은 매일 딴 사람과 같이 사는 격이다. 왜냐하면 어제의 남편은 벌써 오늘은 어딘가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즉 육체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한강물이 고정으로 존재해 있지 않음과 같다. 만일 한강물을 어떤 그릇에 담았다면 그릇에 담긴 물은 한강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한강물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한강물이란 고정적으로 존재해 있지 않는다. 그래서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다. 요새 젊은 세대이서 흔히 말하는 자아상실이니 자기부재니 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사용되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인간이냐
무엇이 사람이냐? 어디서 왔으며 잠깐 허덕이다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누가 이렇게 만들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저저롤 생긴 것인가? 인생 문제는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점점 몰라만 간다. 이 산승이 30년 전 충북 속리산 법주사의 작은 암자에 있을 때 일이다. 학계에 종사하는 명함을 내어놓은 40여 명 탐방객들은 점심을 끝내자 한시간쯤 틈이 있으니 불교를 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되묻기를 사람이 왜사느냐 ? 했더니 차츰 한 분 두 분 머리를 숙이기 시작함으로 아마 깊이 생각하나 보다 하였더니 한참이나 고요가 흐르다가 복판에 앉은 분이 일어나 서 하는 말이 못죽어서 산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그 해답을 찬동하는 눈치 이며 부정하는 이는 한 분도 없었다. 영웅호걸과 거지 천민 누구나를 막론 하고 인생의 길에 있어서는 다른 바가 없다. 예수나 공자나 석가나 다 마찬가지다. 어쩌다가 태어나 자기도 이렇게 고해에서 방황하다가 고대 죽어 야 하니...... 이런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편치 않다.
세계의 권리를 다 거머쥐어 보아도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기어코 살아야만 할 어떠한 이유를 발견할 도리는 없다. 어떤 과학자나 철학자 또는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등 꼭 살아야 할 조건을 내세울 도리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인생이 이렇게 허무맹랑할 수야 있을까 무슨 뜻이 있겠지. 조물주가 이런 얄궂은 인간을 만들어좋았다면 조물주를 끌어내려야 할 것이요, 저절로 생겼다 해도 답답하기만 하고, 어찌 하다가 생겼다 해도 맞지 않는다. 이렇게 딱한 실정, 맹랑한 현실에 놓인 것이 우리 인생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자연 안에서 사회적으롤 얽혀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살려면 먼저 자연에 있으면서도 자연을 초월하고 자기 안에 있으면서도 자기를 초월하는 본성을 발견해야 한다.
즉 우리가 종단, 민족, 인류 등 거대한 공동체를 말하지만 인간의 실존은 역시 각 개인의 인격성에 있기 때문에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모토로 하는 우리 불자들은 우선 그 생활태도에 있어서 근면검소하고 창의와 진취에 용감한 생활적 인간이 되어야 하며 인간관계에 있어서 겸손 친절하며 협동 봉사하 는 도덕적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나라는 말은 첫째 네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객관이 없으면 나라는 생각 안난다. 상대가 있으니까, 나라는 생각을 내고 나라는 행동을 한다. 자아완성이란 물질인 육체를 위해 산삼 한 뿌리 씩 먹는 것인가, 대통령되면 완성인가, 세계 대통령이 된다 해도 그것은 인격완성일 수 없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사람은 자꾹 죽어간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것이 나인데, 자아도 쓸데 없고 지식도 신앙도 필요없다. 내가 부처이니 나만 잘 다스리면 된다. 석가여래만 천만 번 맏어봐야 석가여래 믿는 인간이고 중생일 뿐 별 수 없다. 내가 내 마음을 단속해 나아가서 번뇌망상 자꾸 없애버리는 그것이 자아완성이다. 그래서 순수한 본래의 자기 마음, 청정한 나를 깨달아 놓으면 온 우주가 그대로 먹을 것도 마음대로 무엇이든 안되는 것이 없이 전지전능해진다. 이것이 비로소 해방이고 인격 완성이다. 마음은 모든 생각의 주체가 되어서 모든 행동이나 생각의 주체 는 될 수 있어도 미리 이것의 생가은 없다.
그때 그때 그 사건에 따라 오관에 미치는 바에 의하여 그때 마음대로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정이나 긍정 이것은 내가 아니다. 한 개의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행동이나 생각의 주체가 나인 것이다. 주체 그것을 우리는 마음이라 표현하고 있다. 마음이 수양이 돼서 맑아지면 소탈해지고 번뇌가 없어져서 남의 사정을 잘 알게 된다. 마누라를 대할 때도 그렇고 영감을 대할 때로 그렇고 제 감정으로 대하면 영감 말이 제대로 안 들린다. 그래서 마음이 상했을 때 미운 생각으로 대하면 좋게 말해도 밉게 나쁘게 말해도 미웁다. 아무 생각 업이 대하면 영감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지 그것을 척 알게 되니까 마음을 맞추어 나갈 수 있고 해결할 도리가 나온다.
그렇지만 감정이 앞선 중생이 되어 놓으니까 마누라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귀에 안 들어오고 팔월 추석이 되면 아이들 고무신 하나 사주고 옷가지나 사주자고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해서 그렇겠다고 얼른 주고 돈이 없으면 어디가 빚을 내오든지 해보자고 하고 빚도 못낼 형편이면 (거 참 마음이야 아프겠지만 돈이 없어 참 안됐다)고 (아이들도 불쌍하지만 당신 말을 못 들어주니 참 안됐다)고 말이라도 고맙게 해 무면서 서로 섭섭한 눈물을 흘리며 목을 안고 울 수도 있는 거고 아무 시비가 없는 세상인데, 꼭 막혀 있으니까 큰 방에 가면 시어머니가 말이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고 그러니 시어머니 사정 모르고 며느리 사정 모른다.
응무소주로 아무 생각 없이 대하면 시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잔소리를 저렇게 하시는가 하는 걸 환히 알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줄 지혜가 나온다. 인간의 가치체계가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겠는가! 완전한 신을 가능하게 하는 가치를 찾아 세워야겠다는 데에 우리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 새로운 인간 문화권을 형성해야 하는 일대 전환기에 서서 모든 종교는 화해일치해야 할 것이며, 또한 정신계와 물질계를 담당했던 종교인과 경제인이 일체의 양면으로서 상부상조하는 협화를 이룩하는 것은 대세가 요구하는 당연한 것이다.
인간 스스로를 관리하고, 스스로를 경영할 줄 아는 인간 주권시대에 이제 당도한 것이다. 생산을 관리하고 경영할 줄 알고, 우주를 관리하고 경영하려는 듯한 기술 과학이 발달되어 새 시대를 준비하고 있지마는 인간 의 자기 관리를 못하는 데서 새 차원의 세계는 그 문을 열어젖히지를 못하 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관리권을 신명에게 위탁하는 한, 또는 물질 에게 의뢰하는 한, 시의 노예로서 천진의 인권을 스스로 행사하지 못하고 또는 물질의 노예로서 제약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완전함 같이 완전하라 심즉불이니라, 인내천이니라, 물각구태극이니라 는 모든 성인들의 가르침에 대하여도 정면서 위배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소위 세상을 산다. 현실을 산다는 말은, 따지고 보면 어느 시간 어느 장소를 산다는 말로 된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에 대해서 공간적인 면과 시간적인 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현실의 객관에만 치중한 생각이다. 그보다도 현실을 인식하는 주관인 나의 인내활동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중생들은 모든 것을 인정해서 온갖 것에 걸려 있고 구속돼 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며, 모든 망상에 젖어 있기 때문에 참 나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만일 신을 인정하면 신에 구속되고, 돈을 인정할 때엔 돈에 구속되고, 사랑을 인정하면 나를 사랑에 빼앗긴다. 술을 좋아하면 술에 미친 만큼 자유가 없어진다. 세상 사람들은 아이나 어른이나 유식한 이나 무식한 이나 모두 제 잘난 맛에 살지만 네가 무엇이냐? 어떤 것이 너냐? 이 렇게 따지면, 이것이다 하고 분명하게 내세우는 이가 없다. 이것은 나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해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주인공이 누구인지 내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삶이라면 그 얼마나 서글 픈 삶이 되겠는가?
이것이 잘못되면 인생에는 나면서부터 눈물이 있고 괴로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농사짓고 장사하느라고 자기를 돌아볼 여가조차 없어섯 자기가 무엇이냐 하는 해답을 못 얻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해 놓고, 그러면섯 제 잘난 멋으로 사는 것이 인생이다. 따라서 나라는 말의 뜻도 침착하게 생각해 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천지와 만물은 그 자체가 생겨난 그 순간부터 그것이 없어질 때까 진 우리가 인내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쉴 새 없이 변화하면서 흘러가고만 있다.
저 물건이 그렇고 또한 이 마음도 그렇다. 그럼으로 우리들은 어떠한 사물을 막론하고 그대로는 다 천변만화로 변하면서 토막토막 측정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는 연속선이 가상의 환영이다.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그러한 그것들이 또한 그렇게 흘러서 가는 이 인생의 눈앞으로 번갯 불 같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보았다고 하여야 할 것인가? 그것들을 산이다, 물이다. 너다, 나다하고 이름을 지어 부르고 있다. 나를 이름이 무엇인가? 지을 수 있거든 불러보라. 그러므로 그가 인내하고 있는 기둥이나 기둥 모양은 이 우주간에 실로 업는 존재다. 만약 무엇을 인내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다만 그가 그의 인내를 다시 인내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강한 정신력과 도덕성을 행사하는 능동적인 인간집단에 의하여 조성될 뿐만 아니라 자연 또는 사회 등 환경의 도전에 대한 역사의 기능적 중심은 바로 개인의 창조적 인격활동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금 우리나라와 세계의 환경은 어떠한가? 세계는 지금 양대진 영의 대립이 심각한 대로 있다. 군축을 운위하면서도 군확은 치열하게 경합되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는 화염이 오르고 있다. 핵전쟁을 경계하면서도 인류는 한 찰나에 전멸될 수 있다는 위험신호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환경의 도전에 인류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이런 도전에 대한 외면은 바로 역사의 사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 불자들은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 나를 찾아내야 한다. 나란 무엇인가? 나는 나다. 나는 유무를 초월하여 산 것이며 힘이며 광명이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깨끗한 것이어서 오직 나일 뿐이다. 나는 만법과 더불어 있지 않고 독립, 독존, 독권하며 유 일무이한 실상진아의 실존을 지칭함이 곧 나다. 이 참 나는 발견채득함으 로써 우주의 주인고이 되며 생사의 인과를 초탈해서 자재할 수 있다. 이 진아의 발견이 있은 연후에야 확고부동한 인생관, 세계관 내지 우주관의 확립을 보게 되어 비로곡 신념에 찬 생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이다. 참 삶의 역사는 여기서부터 비롯될진저-
그 시대 그 인생
이 시대를 우리는 불안의 시대라 하고 상극의 시대라 하고 이를 또한 심 판을 받아야 할 말세라고 서슴지 않고 부르고 있다. 고해다, 화택이다고도 한다. 현대는 인간의 지표를 상실한 시대다. 교육이란 지, 정, 의의 조화적인 발전에 의한 자아완성을 뜻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교육은 과학만능적인 발전의 결과를 말미암아 지적 측면만의 발전을 꾀하여 인간을 마치 기계나 인간건설을 위한 이른바 인간본위의 교육관을 확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예술이란 안간생활의 일상적 의미를 예술적 의미로 승화시키는 이른바 인간의식의 내면적 갈등에서 미적 양심과 희열 을 찾아내는 창작적 노력임에도 불구하고 데생 과정도 거치지 않은 듯한 추상 미술, 음률의 조화도 느낄 수 없는 듯한 전위음악, 모든 것이 마구 동원될 수 있다는 조형조각, 미학이 완전히 배제된 소설,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인 시와 같은 현대예술은 인간 정신의 유기적 질서를 파괴하여 일반대중 에게 미적 공감을 전달하지 못함으로써 풀고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저속한 통속문화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퇴폐적인 상업문화르 배격하고 대중의 지성과 정서를 개발하여 그들을 저속성의 수렁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 건전한 대중문화적 예술관을 확립하는데 지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매스 미디어란 한 나라의 문화풍조와 그 내용을 개선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관이기 때문에 이것을 잘만 활용하면 대중의 보다 높은 지적 심미적 자질의 향상과 그것으로 인한 민주시민서을 함양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ATM 미디어는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들의 선전도구나 영리기관으로 타락됨으로써 다중생활의 안녕과 이익을 가져오지 못할뿐더러 그것을 알지 못하는 불안과 갈등과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중의 현대적 기초가 되는 합리적 사고력과 도덕적 판단력을 길러주며 또한 불교복지사회 (불국정토)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궁극적 실제자에 관한 신념과 과학적 지식과 새로운 기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 그리고 불교적 인도주의자와 책 임감 등을 교화적으로 제공하는 이른바 실질적인 문화적 문맹성을 지향적인 매스콤관을 보급하는데 고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과학 기술이란 인간생활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 적극 활용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발달이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한다든가, 의약품의 발달이 인체를 변화시킨 인공적인 환경 속에서 기호나 일련번호와 같은 기술적 장치에 따라 움 직이게 함으로써 인간성이 말살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위한 인간의 궁극적 행복과 존재의의를 보다 근본적으로 보장하는데 선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법률이란 통치자나 권력자를 위해서 가 아니라 모든 국민을 위한 법인데 법치주의는 그저 겉치레의 액세서리거나 프로그램적인 외형에 그침으로써 법률에 의하기만 하면 무슨 일이고 가능하다는 형식적인 법치주의로 타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인간적인 법과 행정의 도구화가 국민의 발전과 개선의 능력을 저해시킬 뿐만 아 니라 양심의 공범과 규범의 혼란을 초래하는 것으로 단정하고 이른바 처벌 보다 교도위선의 교육형 주의를 확정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사회란 혁명이건 변혁이건 진보이건간에 개혁은 어디까지나 인간복지의 구현을 위한 제도적 발전을 뜻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사회는 그 개혁과정에서 옛 전통과 새 질서 사이를 이어주는 내면적 규범의 구심점을 상실한데다 사회변혁의 심화 확대로 말미암아 지역간의 격차, 세대간의 단절, 계층간의 거리를 크게 빚어내고 말았다.
그러므로 우리 종단은 사회변혁이 몰고 온 정신적 및 공업적인 각종 공해와 사회 각계층간의 대립을 제 거하고 사회발전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이른바 불교적 사회정의를 구현하는데 구체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경제란 생산에 기여한 노력과 성과에 대한 공정한 분배를 뜻하는 것임데도 불구하고 기업간 또는 산업간의 소득격차는 날이 갈수록 격심해져 그간 저소득만을 감수해야 했던 중소기업 내지 농공업 노동자로하여금 주권자이면서 동시에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했다. 그러므로 우리 종단은 산업간의 불균형에 의하여 야기된 근로자들의 인간적 소외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협동적 노동운동의 전개 또는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종교적 여가선용과 기업경영에서의 노동착취의식을 부식함으로써 근로자의 취업기회 및 직업 선택자유의 증대와 기업인의 사회적 소임의 자 각과 공공투자위 확대를 권장하는 이른바 불교적 경제 윤리관을 실천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정치란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되며 국가의 제도나 시책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야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정치는 비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정치를 극대화시키고 있는 반면 비정치 적인 것으로서의 인간을 극소화시킴으로써 인간의 자유는 실질적으로 상실되고 공허한 자유와 형식저인 민주제도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부내 속에서 진행되는 제도적 노예화를 반대하고 자율적 판단과 창조 적의식을 가진 주체적인 나를 회복하는 이른바 인간적 자유화를 위한 민권 신장운동을 전개하는데 지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현대사회는 고도의 동적인 사회다. 과학기술이 사회생활의 모든 면에 지배적인 영향을 준다.
이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영향력은 가정에도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까닭은 이 영향력이 사회의 구성원을 점점 경제적이고 상식적인 방법에 의존하고 인간적인 관심에 마음을 모이게 하기 때문에 세속적 영역은 점차 좁혀간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서 종교는 그 영향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세속적 활동속에 뛰어들어간다. 그러나 종교가 세속제도와 경쟁하며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고하고 이 영향은 종교를 일요일이나 축제일과 같은 한정된 시간과 교회나 사찰과 같은 일정한 장소에 묶어두려고 한다. 말하자면 현대사회는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그 특색일 뿐만 아니라 현대의 복합사회에 있어서 종교 조직체는 분립되고 다원화되어 있다.
그 회원은 자의적으로 가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종교도 이 현대 사회에서는 고대나 중세처럼 사회구성원 전체의 신앙적 충성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극히 소수의 예를 제외하고는 종교기관과 세속 정부간에 공적 관계는 없다. 이러한 특성들은 사회에 있어서의 종교의 통합기능을 크게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종교의 다원화는 세속주의의 신장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종교의 조직력이 갖는 직접적 영향력은 약화되었지만 아직도 간접적으로 사회를 단결케하는데 공헌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현대 산업사회 에서는 극히 소수의 성직자를 제외하고는 종교적 가치만으로 그 인격을 형성해 가는 일이 적다.
다시 말하면 통합력으로서의 종교적 가치의 약화는 종교집단이 주장하는 가치체계의 다양성에도 연유하겠지만 그보다 모든 종교의 가치체계에 대한 주요 경쟁자인 이른바 상업주의적인 과한, 경제, 정치등과 같은 세속의 가치체계가 날로 확대되어 가는 데 더 큰 원인이 있다. 지난날의 민족정신의 사명이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자립이었다고 하면 오늘날에 와서는 사회적 정의를 세우는 것이 민족정신의 새로운 과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 민족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나가 되기 위하여 빈부의 차별이나 귀천의 가림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물질생활에 서로 고르지 못한 생활을 불평없이 감당해 왔지만 이제 독립이 된 지도 벌써 성년이 훨씬 지났으니 우리는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하여서도 사회적 정의를 세울 때가 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민족 각자가 자발적 으로 이 나라를 사랑하고 육성하기 위하여서는 우리 사이에 차별의 생화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에 사회적 정의가 이 나라에 세워지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언제나 분렬될 가능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저마다 특수한 사명을 지니고 있는 국민 각자가 저마다 자유로운 권리만이 아니라 독립된 권리를 가지고 공통된 이념(한국사상)과 과거(역사적 경험)의 보편적인 도덕률(개인양심-민족정기-사회정의)의 발전과 실현이라느 공동목표 에 의하여 지배되는 조국이란 운명공동체로 결합될 때 비로소 참된 나가 실현되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다. 우리는 한국 사상을 말하기 전에 이미 한국 사람으로서 살고 있다.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으로서 사는데서 한국 사상도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상도 하루아침에 그 어느 개인 의 머리속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장구한 역사를 통하여 이 한반도에서 삶을 영위한 우리 선조들이 두고 두고 피와 땀으로 싸워 얻어 체험의 열매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노력의 궁극적인 목표가 우리의 살길 을 찾는데 있다면 한국 사상은 우리가 살아나아갈 앞길을 밝혀주는 것이어야 할 것이며 우리 삶에 새 힘을 불어넣어주는 활력의 몫을 담당할 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남이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길을 개척하여야 하며 걸어갈 수는 없기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한국의 정치적 독립과 자립을 외치면 그를 위하여 싸울 줄 알면서 어찌하여 그의 정치적 독립과 자립을 외치며 그를 위하여 싸울줄 알면서 어찌하여 그의 정신적인 밑받침이될 사상적 자주를 위해서는 그렇게도 무관심하단 말인가?
한국의 지도이념을 떠난 정치적 독립도 경제적 자립도 있을 수 없 는 일이거니와 한국의 지도이념이 딴 것이 아니고 바로 한국 사상이 지니 고 있어야 할 기본 정신인 것이다. 한국 사람이 겪어온 고난 극복의 역사가 중첩한 파란과 곡절로써 아로새겨질 때마다 한국의 사상의 폭이 깊이를 더하여 왔다. 신라의 통일불교, 고려의 호국불교, 이조의 구국 불교, 일관된 불교사상과 향학, 성리학, 실학에 일관된 유교사상을 2대 주축으로 한 한국 사상을 배경으로 더욱이 근세에 와서 일본의 침략을 전후하여 근대정신에 자각한 우리 민족은 3.1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많은 민죽운동을 경험하여 왔다. 다시 말하면 정치운동으로, 사회운동으로, 문화운동으로 우리민족은 일본의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저항적 자각운동을 줄기차게 계속해 왔던 것이다. 그 때문에 숱한 애국지사들과 선각자들은 생명도 잃고 고초도 당하였다. 따라서 8.15해방까지 우리가 서로 어떠한 길 을 걸어왔던지간에 목표는 오직 하나 독립이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빈부의 차이나 연령의 고하도 없었고 직업의 귀천이나 학식의 다과도 없었다. 우리가 독립을 하려면 먼저 알아야 되고 우리의 물산을 애용하면 우리의 문화를 사랑하여야 된다고 생각하여 왔다. 그때의 민족의식에는 협잡도 없었고 권모술수도 없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하나에 귀일되는 순수한 민족애만 있었다.
사상은 육체를 나로 삼는 데서
금강경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을 중시 하는 것은 이것만 떨어지면(마음)이 드러나게 되고 (참나)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상)이라 함은 내가 항상 말하는 육체를 (나)라 하고 생각을 (나)라고하는 (가아)를 말합니다. 이 (가아)인 (아상)이 있기 때문에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를 다시 한 번 더 되풀이해서 사상 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무엇인가. 발심이 무엇인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를 안다는 말은 인생을 바로 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발굴해서 자기가 갈 수 있는 길을 깨달은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깨달은 이인데, (이런 사람은 어떻게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며 어떻 게 백팔 번뇌, 팔만사천 번뇌를 항복 받아야 하겠읍니까.)하고 수보리가 부처님께 질문을 하셨는데 그 뜻을 한 번 더 풀어보면 이런 것입니다. (인생 이 꿈 속이란 것은 알지만 그러나 이해가 앞설 때는 욕심도 나고 남녀 이성끼리 만나면 이상한 생각이 일어나고 이런 쓸데 없는 꿈 속의 일에 시달립니다.
태평양 바다보다 더 복잡하고 심한 번뇌의 파도가 일어나서 잠도 제대로 못자고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되니 옳지 않은 이 마음을 어 떻게 항복 받아야 합니까.)하고 여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 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항복 받아라.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고도 제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만일 중생을 교화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것은(나다)(남이다)(중생이다)(부처다)(오래산다) 하는 분별심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것은 발심한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중생은 다 제 잘난 멋에 삽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중생을 제도하라 하시면서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는 것이므로 보살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사상(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음에 중생에 떨어진다는 것인데 이 사상은 곧 (나)로부터 벌어집니다. (나)란 생각은 본래부터 있는 생각이 아니고 객관을 상대할 때 (나)라는 생각을 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사람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이 물건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다가도 얼마 안 가면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이와 같이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이 자기의 바탕 일 수는 없고 그러 것을 좋다 싫다하고 생각내는 주체가 (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항상 말한 바와 같이 물질도 허공도 아닌 산 생명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동그라미도 네모 세모도 아닙니다.
마음 자리는 모나고 둥근게 아닌 형상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먹물은 본래 검은 것이기 때문에 세계의 먹을 다 갈아도 하얗게 될 수는 없는 것과 같 습니다. 따라서 물질이나 허공은 본래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아무리 뭉치고 천충 만층 높이 쌓아봐도 그것이 듣고 보고 생각할 줄은 모릅니 다. 그와 같이 물질적 요소로 이루어진 육체도 무엇을 보고 들을 줄은 모릅니다. 마음이 보고 싶어야 보고, 듣고 싶어야 들립니다. 육체는 내가 아니라 나의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은 육체도 아니고 모든것을 다 초월한 자리, 차원 이전이고 태초 이전이며 질량 이전입니다. 이것이 온갖 생각의 주체이고 진아입니다. 따라서 진아의 상대가 가아이며, 생각의 (나)입니다. (진아)니(가아)니 해도 실제 마음은(잔아)(가아)를 초월한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 아니니 만사의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설명으로 될 것이 아니고 스스로 깨쳐야 합니다. 깨달았다 견성했다는 말은 소위 밥 먹고 자고 이러나고 할 줄 아는 그 자기를 깨친 것이니 깨달았다고 해도 말이 안됩니다. 부처님이 깨쳐 놓고 보니 출가하려고 할 때 애쓰던 그 마음 그대로고 싯달태자 그대로입니다. (육체 말고 자기 마음 그대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아니 진실상 그 대로의 마음이 있겠구나 )하고 이해가 될 때 그래서 우주에 대자유가 이고 전지전능한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이 마음을 깨쳤다고 하는 것 이 밥 먹고 똥 싸는 그 마음, 산모가 아기 어서 나가라고 힘주는 마음 그대로이니 이것은 깨쳤다고 해도 안됩니다.
본래 미한것도 아닌데 어떻게 깨칩니다. 그런데 육체를 (나)라고 하는 데서 (아상)(가아)가 생기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이 생기는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를(나)라고 하다 보니 술에 미친 사람은 아편에 미친 사람이 되고 정치에 미친 사람, 문학에 미친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인간의 본성이 개발되지 않아서 그럽니다. 인간성은 모든 것을 초월한 것을 뜻하며 선한 것 악한 것이 인간성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걱정말고 깨치지 못한 것만 걱정하라는 것입니다.
망상을 안 일으키려면 더 일어납니다, 망상 일어나려는 것은 내버려 두고 망상도 내가 일으 키는 것이지 망상 저혼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망상은 가만 두고 염불이든 참선이든 그것만 하면 오늘 밤에 깨칠지 금생에 깨칠지 여하튼 깨치게 됩니다. 사람이 전생에 공이 많으면 금생에 깨치치고 공이 적으면 내생에 깨치게 됩니다. 하여튼 깨치게 될 그 시간을 바라고 금생에 못하면 늙어 죽을 때 까지 염불이나 하고 참선하고 마치면 그러면 내생에는 깨칩니다. 복도 많이 지어서 내생에는 복을 가지고 태어나면 머리도 지금보다 몇억만 배 좋게 태어납니다. 다만 공부하는 데는 깨치려 해도 안되고 안 깨치려 해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다 되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가 될 그런 요소가 나한테 있구나. 오온이 내가 아니구나. 말하는 여기에, 배 고프면 밥 먹는 여기에 있겠구나. 여기서 자기 관혁을 깨치게 됩니다. 그 부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마음이 부처란 소리가 어떤것 인지를 모르게 됩니다. 그러니 불교가 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평생 강사 노릇해서 제자가 수천 명이 돼도 자기가 모르고 가르치니 제자도 모르고 듣습니다. 마치 눈먼 장님에게 매달려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는 것도 그렇고 염불도 그렇고 다른 어떤 공부를 해도 불교의 근본 진리가 어디로부터 어디로 가는지, 생사를 어떻게 해서 해탈할 것인지 를 확실히 알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49년간의 기나긴 설법을 하셨던 것입니다. 육조 대사께서(응무소주이생기심)을 듣고 깨치셨는데, 그 뜻은 (번뇌 망상없이 살아라. 아무 모양, 주의 ,사상 그런거 개의치 말고 지금까지 배운거 다 청산해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라)그런 뜻입 니다. 우리가 기분으로 만물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니 제 기분대로 비판해 버립니다. 남의 말을 들어도 자기 기분좋을 때는 그 말이 좋게 듣기고 기분 나쁠 때는 나쁘게 처리되어 버리니 이것이 망상입니다. 그것은 결국 육체 때문에 하루 밥 세 그릇 먹느라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말도 나쁘게 받아들이고 나쁜 말도 좋게 받아들이는 것은 필요 없다. 나는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자살도 할 수 없고 타살도 할 수 없고 죽을 방법이 없다. 그게 이렇게 받아들이고 나쁜 말도 좋게 받아들이는 것은 필요없다. 그게 이렇게 얘기하고 듣고 있다. 이것이 마음이다.)늘 이것을 앞세워서 (나)다, (남이다)한는 것이 없는 생활을 해야 중생을 초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도 병원에 어떤 보살을 문병갔다 온 일이 있는데 별안간 사람이 와서 스님 좀 꼭 보자고 해서 누군지도 모르고 따서가서 한 시간이 나 이야기 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복잡해서 마음을 쉴 수 없다며 눈물 을 자꾸 흘립니다. 가정불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과 얘기를 해 주고 관세음보살님만 자꾸 부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이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병이 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불안해지면 대번에 이것이 독소로 변해서 온갖 병을 일으키는 때문입니다. 그래 당신이 그 마음을 풀기 전에는 천하없이 기도를 하고 한국 돈 다 갖다 바치고 기도를 천 년 만 년 해도 그 병이 낫질 않습니다. 당신이 전생에 첩이 되어 남편에게 곤란을 주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본 마누라가 되어 가지고도 남편 번 돈으 로 자꾸 딴놈과 쓰고 다니고 나쁜 짓 했기 때문에 이생에 와서 남편이 그러는 것이지 모든 것이 다 인과법인데 아무 까닭없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한 시간 정도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정말 그러냐)고 하다가 나중에는 그 말 꼭 믿겠다고 하면서 안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 가 (당신이 인과를 안 믿으면 죽는다. 암은 아무리 째고 해 봐도 별 수 없어 다른 데 또 생긴다. 기분이 만든 암이기 때문에 뇌가 또 나빠지기도 하므로 마음부터 항복받아야한다.)고 말해 주고 온 일이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바로 안정이 되어야 병도 낫습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 것도 (병원에 가면 의사가 우리 병을 책임지고 고쳐 준다)고 믿는 마음의 안정이 있기 때문에 효과가 잘 나타납니다. 치료하기 전에 벌써 자기 마음이 반은 고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주체는 마음이고 이 현실은 꿈이어서 꿈은 다 마음이 꾸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부터 백까지가 다 마음 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중생들이 스스로 우주의 주재신의 피조물이라 믿어 구속되고 자연계의 물리화학의 원리가 절대적이라 하여 그것에 구속되고 무당이나 점장이에 구속되고 그러지만 중생들의 마음자리 불성자리는 본래 부터 완전한 부처이어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전지전능한 실존이고 우주을 창조한 신이 온다 해도 그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항복하게 됩니다. 그것이 다 자기 마음이 만들었던 망상이었으니 망상이 천리 만리 사라진 본 마음자리가 나타나면 자연히 신이니 과학이니 신앙이니 미신이니 불교니 유교니 하는 따위의 제2의 산물인 그야말로 피조물들은 다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이 스스로 우주의 주재신이 있다고 믿고 자연과학의 원리에 의해 우리는 지배된다고 믿는 마음에 의해 지배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가 평소 아무것도 모르고 불법도 모르는 이런 사람이 라도 심지어는 개, 소, 돼지 같은 금수까지라도 산보고 높다는 말은 안 하지만 산보고 높은 줄 알고 물보고 깊은 줄은 압니다. 이렇게 말은 없어도 알 줄 아는 이 자신은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시간이나 공간이 아닌 실재이고 물질이나 에네르기처럼 죽은 존재가 아닌 산 생명입니다. 이것이 눈을 통해서 내다보고 귓구멍을 통해서 듣고 이러지 다른 놈은 다 죽은 것들이므로 그럴 놈이 없습니다. 보인다 들린다 하는 생각 그것이 보고 들을 줄 아는게 아니고 일체 보는 마음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없으며,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아무 생각도 없는 실재이고 실존이고 실상이고 한 이것이 직접 눈구멍으로 내다보고 귓구멍으로 듣는 것입니다. 생각 그것도 이 실상의 반야인 마음으로부터 생각되어 만들어진 피조물임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어서 어느 정도 인식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맨 처음 절에 와서 법문을 듣고 그것이 잘 듣지 못하는대로 들었지 딴놈이 들을 놈이 없습니다. 허공이 들을 수 없고 고깃 덩어리인 육체는 물질일뿐이니 역시 못 알아들을 것이고 이는 귀신이나 도깨비가 와서 듣고 알려 준것도 아닙니다. 설사 도깨비라 할 지라도 그 실상은 역시 불성자리인 마음입니다. 지옥에 가서 두들겨 맞고 아픈 줄 아는 것도 알고 보면 역시 실상자리인 그것이 알지 이것 빼놓고는 무엇이 아픈 줄 재미있는 줄을 깨달을 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르고 들은 그때도 완전히 부처가 돼 가지고 들었고 차차 법문을 들어서 세상은 무상한 것이다. 참선을 해야겠구나 하고 말을 알아들을 때에도 역시 본래 완전히 부처가 되어서 듣습니다. 그러니 제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번뇌 망상이 없어졌다고 해서 별 것이 아니고 내내 산보고 높은 줄 알고 물보고 깊은 줄 이 그대로이고 다른 면목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도가 다 돼 있는 것이므로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일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만 멀쩡한 부처가 딴 생각을하고 있으니까 가는 것 붙들어 준 폭 밖에 안됩니다. 술이 취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인 것은 아니고 술이 깨도 그 사람, 취해도 그 사람인 것과 같습니다.
중생들이 탐진치 삼독주에 위해 가지고 육체만 나인 줄 알고 이해타산하고 온갖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여 복잡한 세상을 만듭 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탐진치의 삼독주에서 깨어나라.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버려라. 내다 남이다 하는 것이 관념이고 없는 것이다.)하는 법문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공입니다. 번뇌,망상, 온갖 지식과 경험을 쌓아 가지고 하는 법은 이렇고 땅의 이치는 어떻고 인간 사회의 도리는 이런 것 이라는 관념을 가지고는 서로 죽이려고 하고 전쟁을하고 그럽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그런 하늘도 없고 그런 땅도 그런 인생도 없고 그런 아버지 어머니도 없고 내가 생각하는 그런 몸뚱이도 있는게 아닌 도리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법공입니다.
부처님 법공의 진리를 듣고 나서 여태까지의 지식을 다 놓아버리고 온갖 생각이 끊어지면 본래 있던 적멸 그 자리가 나타납니다. 마치 구름이 벗겨지고 나니 본래 있던 밝은 달이 나타난 것과 같아서 아예 없던 달이 구름 벗겨지고 나서 새삼스레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아이제 알았구나!)하고 깨달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께달았다는 생각마저 놓아버리는 이것이 구공입니다. 그러난 이렇게 아공, 법고, 구공의 이치를 깨달았다고해서 본래 부처자리인 마음 바탕이 더 밝아진 것도 아니고 알 줄 아는 성품이 잘못된 착각을 품었다고 해서 손상이 있느냐하면 그런것도 아닙니다. 근본 마음 자리는 벌레나 굼벵이가 되었다고 해서 더러워진 것도 아니고 하나도 증감이 없이 불생불멸이고 불면하는 일여평등체입니다. 그러니 애당초에 이렇게 완전한 부처가 되어 있으므로 제도 한다는 생각이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을 내가 제도 하겠다, 깨우쳐 주겠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사람은 중생 제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고 보살이 될 수는 더욱더 없는 것입니다. 그레서 내가 법사거니, 내가 누구를 가르쳐 주었거니, 걔를 내가 일러 주 었으니, 내 제자거니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르쳐 주지도 않고 제도하지도 않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제도하기는 하되 그런 생각이 없이 무심으로하고, 하는 것 없이 한다는말씀입니다. 만일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또 소승이고 공에 떨어진 것이며, 대승이 아니고 금강 경의 말씀을 바로 배운 것이 아닙니다. 금강경의 말씀은 공의 사상을 철저히 말하지만 거기에 집착하여 머무르라는 것이 아니고 상없는 마음으로 머무름없이 중생을 제도 하고 인류의 구제를 위해 공의 원리로 백천억의 육신을 바치고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중생을 발심시켜서 일일이 지도를 해서 견성을 하게 하고 보살만행을 잘 하도록 호념해 주고 부축해서 정각을 이루고 성불을 하게 하는 것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다 꿈속에섯 하는 일이고 관념일뿐 꿈을 깨고 보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도 거기까지 가는길인 노정만을 말씀하신 것인지 그 당처 자리는 시방제불이 한 마디도 말씀하시지 못한 것입니다. 그 곳은 말이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꿈속에 들어가서 꿈으로 꿈 같은 이야기를 해서 꿈으로 꿈을 깨도록 하는 말씀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꿈 밖의 이야기는 한 마디도 이야기하지 못했고 실상의 소식에 대해서는 입을 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님도 아무 상관도 없는 말씀만 하셨지 사실로 중생이 제도 받는 일이 없습니다.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이고 본래부터 그렇게 완전한 자리이므로 제도한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도하는 사람도 제도하고 제도받을 것 없는줄 알고 설법해 주므로 종일 설법을 해도 법을 주었거니 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이 자리는 일체 사상,인륜도덕이 용납되지 않 습니다. 선방에서 참선할 때 조금만 허술하면 방망이가 막 내려 옵니다. 망상이나 피우는 그런 머리통은 부서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 이 일체 중생을 실제로 제도했다 하더라도 제도 했거니 하는 생각이 있다고 하면 이 사람은 곧 중생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고 동시에 불법을 모르는 사람이니 이런 사람은 보살일 수 없고 중생을 제도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굶는 사람이게 쌀말이나 주었다 하더라도 주었거니 하는 생각이있으면 아상, 인상이 있는 것이고,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자선 보살이 제도를 했거니 제도를 받았거니 하는 생각이 있어서 선생 이니 제자니 하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고 불법을 성취할 수 없다 는 것입니다.
제3장 망상에 헤매일 때
꿈이냐 망상이냐
참선을 하든지 열불을 하든지 하여 번뇌를 쉬고 망상을 끊어야 한다. 허망한 것은 간직할 것 없다. 간직해 보아야 없어지니까 허망하지 않은 걸 찾자. 그것은 내 마음밖에 없다. 다른건 다 허망하다. 우리가 이름지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부처도 허망이고 진리도 허망이며 허망한 것은 전부 허물어지는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다. 모든 허망에서 탈피하여서 허망을 내 마음에서 버릴 때 나는 곧 내 본래 부처를 만날 수 있다.
딴 데 간 것도 아 니고 다만 육체를 나라는 착각 때문에, 딴 착각을 해서 그것이 바빠진 것 뿐이다. 우리는 육체를 나라 하고 오온을 나라고 하기 때문에 천당 지옥을 생사윤회하고 있다. 만날 돌아다녀봐도, 시집을 천만번 가봐도 소용없고 장가가도 별 수 없고 세계 갑부가 되어도 별 수 없다. 생로병사를 면할 수 없고 반야 지혜는 얻을 수 없다. 지금부터 밤낮을 가리지 말고, 오나가나 가만히 있거나 부지런히 일을 하거나 않았고 누워 있는 동안이라도 다만 모든 일에 무심할 줄만 알아가면 자연히 만사에 잘못을 따지는 분별심이 없어지며, 또한 어디에 의지할 생각도 없어지며, 어느 한 곳에도 늘어붙어 살고자 하는 애착도 없으며 또한 사방으로 돌아다니고자 하는 벌떡거리는 망상도 없어지리라.
우리가 천당 갔다 지옥 갔다 하고 육도세계를 돌아다니고 윤회를 하고 그것이 다 번뇌의 업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번뇌의 잠재 의식이 우리의 근본 마음자리를 떠나서 마음으로부터 독립되어 돌아 다니 는 것은 아니며 본 마음 자리가 한 것이다. 그러니 죽어서 천당에 가도 그 실상자리, 자기 근본정신이 올라간 것이지 망상 그것이 자체가 있어서 본 마음을 떠나서 올라간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마음이 우주에 편만했다. 즉 크다고 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작은 거냐 하면 바늘 가지고 찔러 볼 수도 없는 아무 것도 없는 존재이다. 그러면 아무 것도 없는 거면서 그 속에 우주가 다 들어가 있다. 지금 그대가 망상을 일으키고 있으나 그 망상이 일어나는 줄 아는 자리는 망상이 아니므로 그것이 곧 부처님이다. 그러므로 만약 모든 망상을 근본적으로 딱 끊어버리고 나면 그 자리는 도한 부처도 아니다.
왜냐하면, 부처도 중생도 아니고 본래부터 그대로인 이 마음에서 그대가 (나는 부처가 아니다)는 다른 망상을 낸다면 그 것이 허물이 되어서 그대는 또한 다시 이유없는 망상을 일으켜 (나는 성불 해야 할 것이다)고 생각할 것이며, 또 한 중생이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저 중생들을 제도해야 한다)고 나설 것이다. 그러니 헤아릴 수 없는 생각들이다. 그대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며 그렇게 볼 뿐이다. 망상의 늪에서 헤매일 때, 우리는 결코 나를 찾을 수 없다. 망상은 나의 부재에서 생겨나는 괴물이다. 나의 파괴자는 바로 망상, 그것이다. 도가 높아지면 죽을 때 몸뚱 이를 옷 벗듯 벗고 간다. 실은 죽는 것도 아니지만 육체가 죽는다고 보고 지게를 지고 가다 지게를 세워 놓듯이 한다. 그렇게 놓고도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때는 미해서 망상이 일어나고 하는 자세한 이야기는 여러가지 있지 만 탁한 마음, 곧 색정이 일어난다.
금생의 자기 몸뚱이는 옷 벗듯이 했지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때 깜짝 미해서 피로 엉켜서 있다. 그런데 도가 더 높은 사람을 배속에 들어갈 때는 미하지 않고 자기 공부그대로 하고 있는데 그렇게 열 달동안 가만히 하는 이도 있고 아홉 달만에 자기 공부하던 걸 나와서 미한 사람도 있고 또 여덟 달에 미한 사람, 한 달에 미한 사 람, 또 열 달을 다 선방에 앉아서 공부하는 모양으로 정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2백 80일 동안 하다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그 속에서 나오느라고 큰 고통을 겪게 되므로 출태할 때 제일 미하다. 그래서 깊고 완전하게 될 때까지 계속 닦지 않으면 안된다. 마누라를 자기 명령에 복종하도록 만든 것은 정말로 5천년을 통한 영웅 가운데 한 사람도 없지 않은가! 천하없는 영웅도 마누라한테는 꼼짝 못한 다. 백만대병을 거느리는 대장이라도 부하를 물속, 불속으로 들어가게 명령 하는 것은 할 수 있고, 항우 같은 천하장사를 단번에 때려눕힐 수는 있을 지 모르지만 기운 없는 마누라에게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고 마음대로 할 수도 없다.
우리가 기분으로 만물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니 제 기분대로 비판해 치워버린다. 남의 말을 들어도 자기 기분 좋을 때는 그 말이 좋게 들리고 기분 나쁠때는 나쁘게 처리되어 버리니 이것이 망상이다. 그것은 결 국 육체 때문에 하루 밥 세 그릇 먹느라고 그렇게 되는 것이다. (좋을 말 도 나쁘게 받아들이고 나쁜 말도 좋게 받아들이는 것은 필요없다. 나는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자살도 할 수 없고 타살도 할 수 없고 죽을 방법이 없다. 그게 이렇게 얘기하고 듣고도 있다. 이것이 마음이다.) 늘 이것을 앞세 워서 나다, 남이다 하는 것이 없는 생활을 해야 중생을 초월하게 된다. 불이 꺼져도 눈으로 깜깜하게 어두운 것을 보고 불이 켜져도 환하게 밝은 광명을 보는 것이니 어두운 때나 밝은 때나 보는 눈은 변동이 없고, 이 마음 자리는 볼 때나 안 볼때나 변하지 않는다. 중생들은 미래 것은 모르고 과거의 기억은 희미해져서 망각해야 되는 것은 번뇌망상으로 경계를 치고 그 틈바구니에 끼어 있기 때문에 망상 그것만이 나인 줄 알고 깨끗하고 자유 자재한 본체가 있다고 여간 설명해 줘봐도 좀체로 인정할 생각을 내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망상이 어떤 자체가 있어서 능동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러는 것이고 마음의 본체가 그러는 것이다.
마치 파도와 물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물의 움직임이 파도고 파도 자체가 물이듯이 실상 망상도 마음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마음이 착각을 한 것이 망상일 뿐 마음을 다 정리해 놓고 보아도 그전 마음 그대로이다. 산은 높은 그대로 있고 물도 깊은 그대로이며 성불을 해도 항상 그대로이다. 육지와 바다가 갈린다는 걸 부처님께서 늘 말씀해 놓으셨 는데 그런 예로 봐서 이 지구가 항상 안전하게 있는 그대로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자주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도 얘기하다가 갑자기 사망하듯이 지구도 역시 그런 변동이 있다. 그러니까 현상계인 이 땅덩어리도 그렇게 믿을 수 없는 무상한 존재이고 몸뚱이도 믿을 수 없는 허망 한 것이다.
양은 줄곧 이리떼의 침공을 받아왔지만 결코 그것들을 모방하려 들지는 않았다. 낭성을 본받아 미친놈처럼 고함을 지르는 허스키의 유 행가가 번지는가 하면, 발작하는 간질환자처럼 온몸을 비틀고 궁둥이를 휘두르는 것으로 첨예를 자처하거나, 제임스 딘의 영화 한두 편으로 이유없 는 반항을 시도 한다든가, 텍사스 황야의 개척자를 흉내내 권총 강도질, 폭력단의 조직, 몽둥이를 휘둘러 행인을 노리고--확실히 우리는 무언가 빠져 달아난 것만 같다. 정진하는 사람에게 가장 고민되는 것은 망상에 얽히어 정진이 잘되지 않는 그것처럼 괴로운 것이 없다.
무엇을 먹을 수도 없고 바짝바짝 사람이 마른다. 이렇게 고생을 하다가 번뇌 망상이 뚝 끊어질 때면 참 이렇구나 하는 생각을 안 낼 수가 없다. 깊은 산골짜기에만 살던 사람이 어느날 우연히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앞이 툭 트인 무변대해를 바라다볼 때 앗소리를 안 지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넓은 창해를 볼 때 기쁜 마음이 일어나듯이, 번뇌 망상이 뚝 끊어진 경지에 들어가면 이만하면 됐다 하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번뇌망상에 짓밟혀 가지고 맥을 못 쓰다가 큰 우주를 발견하고 보면 온 우주가 내 기운이 된다. 모든 생각을 다 쉬고, 쉬었다는 생각마저 없으면 천진본래의 자기 부처가 뚜렷이 나타나는 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중생이다. 중생인 시절에도 이 마음은 조금도 덜해진 적이 없었고, 부처가 된 때에도 이 마음은 또한 늘어나지도 아니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대들이 별별 망상을 다내고 온갖 망동을 다 저지른다 할지라도 어찌 텅 비어서 아무 것도 아닌 이 마음을 떠나서 할 수 있는 일인가. 비어서 아무 것도 아닌 이 마음은 본부터 클 수도 작을 수도 없으며, 어디로 새어서 흘러 갈 수도 없으며 아무 것도 하는 일도 없으며 또한 아득한 일도 없으며 깨 달아 아는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도 분명하며 진실하고 확실 하여서 털끝만한 물건도 얻어볼 수가 없으며 또한 범부도 부처도 아니라서 한점 만큼도 아는 것도 없다. 이 마음은 어디에 의지해 있는것도 아니며 어디다가 붙여서 꾸며진 것도 아니다. 끝까지 청정한 이 마음은 진리며 진아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따져보려고 할 수가 있겠는가.
참으로 부처는 입이 없기 때문에 설법을 할 줄 모르는 것이며, 허망하지 아니한 이 마음에 는 귀가 없는데 그 무엇이 들릴 것인가? 당장에 무심한 줄 알면 만법에 두루하며 천지 이전의 본래 부처 자리가 곧 우리의 이 마음인 것을 알게 되 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저 해가 떠서 온 세계를 비추어 아무 데도 거리낌 이 없는 것과 같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다만 보고 듣고 따지고 생각하며 행동하고자 하는 모든 생각만 놓아버리면, 이 본래 있는 마음만이 온전히 남아 앞뒤가 뚝 끊어져 있으며 또한 깨달아서 들어설 곳도 없으며 들어설 나도 없으므로 보고 듣는 것이 눈이나 귀가 아니고, 곧 이 마음인 것이다. 모든 생각과 일체 망상, 이것은 다 그대가 스스로 일으켜 낸 것이 아닌가. 그대가 일으키면 계속해서 있고, 내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 단지 말하는 이 마음이 곧 무심하며 또한 본래 부처인 줄 확실하게 알고 보면 이 마음은 본래 망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대 스스로가 부질없이 망상이거나 하는 딴 생각을 낸 것이다. 산은 높고 물은 깊다.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다 는 말인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악의 꽃잎들
모두 제 욕심만 채우려니 첫날저녁부터 남의 사정 하나도 안봐준다곡 싸우고 원수가 된다. 욕심을 가지면 자추를 맛볼 수 없다. 욕심 없는 대자유의 맛은 안가져본 사람은 모른다. 아무 욕심이 없어야 그때가 비로소 자유뿐이고,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고 창하가 다 우리집이 된다. 모든 것을 다 털어놓으면 모든석이 내 것이고, 붙들어 쥐려면 내 것이 되지 않는다. 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점점 더 고독해지고, 권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적이 많아진다. 권리와 돈 다버리고 나면 천하 물건이 다 내것이 된다. 아 무 욕심 없이 농사짓고 장사하면 무슨 사업을 해도 잘되지만 욕심쟁이는 혼자 돈을 벌어서 남을 위해 한 푼도 쓰지 않으니 천 사람 만 사람이 다 증오하게 된다. 그런 욕심 버리고 돈을 모으면 온 세상 사람이 다 내 식구고 재미가 날 것이며 욕심을 떠나면 내 가 없어도 하나 걱정이 안된다. 욕심 없는 처녀 시집가면 오직 남편만을 생각하고 위해 주니 이런 아내는 다시 없다고 업고 다니며 좋은 물건 다 사다 줄것이다.
욕심 없는 총각이 장가들면 자기의 모든 것 다 희생해서 아내만 위해 줄 것이니 그 아내는 우리 남편 제일이라고 자랑할 것이다. 하나의 업이 멸하지 않고는 하나의 밝음을 볼 수 없다. 그 하나의 업이 자기 것이나 사회, 국가, 민족, 세계 전체의 업이든간에 주어진 업을 멸하지 아니하고는 정의로운 평화룰 이룩할 수 없다. 이 하나의 업은 미망과 어리 석은 판단과 보잘것없는 분노로 자기와 자기 이외의 세계에 있어서 그릇된 역사판단을 가져오는 무명한 욕망일 것이다. 이를 멸하지 아니하고는 부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계율이 무의미하고 또한 부처님의 지상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우리들 부처님 아들이 부처님의 지극하신 엄명을 거역한 세계로 펄럭이면 퍼져가는 부처님의 자비한 인도주의의 황국의 촌가 누항만이 아니라 도시에도 아름답게 펄럭이면 자비와 지혜로 생활하는 세계민족 선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는 남으로 인하여 입어집이 아니 라 나로 인하여 깨달아지는 자각의 종교이다. 이 자각적인 종교는 자기 속에 있는 밀알을 썩히어 많은 밀알을 거두게 하여야 한다. 한 알이 썩어 희생되지 아니하고 많은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영광이 있을수가 없다. 우리들 부처님 제자된 모든 사라이 자기가 희생하여 이룩할 연업이 무엇인지 믿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어린애들이나 모두 제 잘난 멋에 살고 있다. 만약에 내가 못생겼다고 확실하게 확정만 되면 너도 나도 자살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없는 데 가서라도 저 혼자지만 제 잘난 멋으로 살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제가 무엇인데 그렇게 잘났단 말이냐 하고 물으면 얼른 대답 못할 것이다.
현재 서양의 물질문명이 진보하여 가다가 마침내 벽에 부딪쳐서 이제 더 찾을 길이 없 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 청년들이 적어도 심리적으론 전부 히피족이 되는 것인데 히피 란 환장했다는 뜻이다. 그들의 머리는 뒤집혔고 알맹이는 없는 거품이다. 무엇 때문에 사는지를 발견할 수 없고 자기를 발견할 수 없으니 히피족이 안되고 어떻게 하는가. 히피족이라도 되는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이고 히피족도 못되는 것은 비 맞은 쇠똥 한가 지의 썩은 청년들이다. 비 맞은 쇠똥은 거름도 안되기 때문이다. 히피족도 못되는 그것은 개만도 못하다. 개는 보신탕도 하지마는 히피족도 안된 인간은 곰탕도 못된다. 그러니까 세월이 그만큼 밝아졌다. 미국 청년들은 무언가 생명의 애착이 있어 환각제를 먹을지언정 자살은 하지 않는다. 죽기는 뭔가 억울하다는 것이다. 덴마크 청년들은 미국 사람보다 앞서 있다. 그 사람들은 교육도 완전히 의무 교육이고 교통도 무료, 의료기관도 무료고 전부 공짜로 살 수 있는 극락세계고 지상천국이다. 성도 개방을 해서 여자로 생긴 것은 전부 친척이건 누구건 다 자기 마누라고 남자는 전부 영감이고 자기 남편이다.
성을 개방해서 법률에 저촉되지 않도록 돼 있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래놓고 나니 지극히 고독한 것이 사람이다. 사람이 성장하면 결혼해서 내 남편 내 아내가 결속되고 임자가 있어야 될 터인데 개방을 해놓고 나니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마음대로 뛰어 다녀도 어디가 죽어도 아무도 간섭을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덴마크 처녀 총각은 처녀 총각도 아니고 옛날 우리 습관대로 하면 잡년, 잡놈들이 되어버려서 이 사람들은 신에 염증이 난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아직 신에 다한 염증은 안 났기 때문에 애에 대한 애착이 남아 있다. 인생의 근본이 되고 있는 나란 과연 무엇인가? 죄를 짓고 삼악도 에 떨어져서 한 없는 고생을 하기도 하고 복을 지어서 천상에도 나고 사람도 세상에 나와서도 국왕, 대신이나 큰 부자로 복을 많이 받기도 하지만 그 근본 주제는 다 마음 이란 내가 하는 일이다.
잘산다고 하는 사람도 내용을 알고 보면 내외간과 부자간에 마음이 맞지 아니하여 서로 불화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전생에 도둑질한 사람과 살생한 사람이다. 또 인덕 없는 것도 큰 고통이다. 부부간에도 맞지 않고 부자 간에도 맞지 않으며, 심지어는 식모하고도 맞지 않는다. 밥을 먹어도 소화가 안되고 밤에 누어도 맘이 좋지 않아서 잠이 안온다. 부모, 형제, 친구, 동네 사람까지 모두 나를 욕하는 사람뿐이다. 이런 사람은 전생의 내외간에 배신한 죄를 지은 사람이다. 죄업으로 지옥 같은 그런 무서운 업을 지으니까 인간 세상이 그렇게 점차로 나쁜 상태로 된다. 이것을 적은 삼재, 곧 소삼재라 한다. 이 소삼재 때에 거기에서 복이 제일 많고 마음씨가 아주 나쁘지 않은 얼마의 사람만이 뒷 세상까지 살아 남았다가 그게 차차 번져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하는데 거기서부터 다시 수명도 길어지고 복도 많이 올라간다.
중생들이 십 대죄악을 다 지어서 죽으면 곧 저 무서운 아비지옥으로 떨어져서 갖은 고통을 다 받는다. 그러나 그 중생들이 저 큰 죄악을 지을 그때에 내가 죽으면 지옥을 들어갈 것이 라 생각한 일도 없거니와 또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8만 4천 지옥들이 실로 그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중생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그 업습의 그림자가 사실 과 같이 보이는 것 뿐이니 실로 있는 지옥은 아니다. 범부 중생들은 큰 착각을 일으켜 서 정말로 자아인 이 마음의 실재는 오히려 부정해 버리고 무상한 이 세상의 흐르는 가상에 속아서 허덕이니 참으로 애처로운 일이다. 이러한 망령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선악을 가리지 아니하고 온갖 짓을 저지르고, 마음의 인과법칙에 속박되어 영겁에 생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천당 지옥으로 끝없이 윤회한다.
사람을 많이 죽일 수 있는 것을 연구하는게 사람이지만 그래도 짐승들은 그렇지 않다. 그저 일 대 일로 싸우다가 하나가 지거나 하나가 이기거나 둘이다 죽으면 끝날 뿐인데, 어떻게 하면 좋은 무기로 사람을 하나 이상 더 많이 죽일 수 없나 해서 이렇게 경쟁이 심해져 점점 많은 죄업으로 엮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극악무도해지는 말겁에는 삼재가 일어난다. 사람의 나이가 20에 정명이 되면 첫째 기근겁이 와서 흉년이 자꾸들어 먹을 것이 없게 되고, 둘째는 질병겁이 오는데 생전 이름도 내용도 알 수 없는 나쁜 전염병이 돌아다니면서 집집마다 모두 앓는 사람 천지다. 그 다음 세 번째는 도병겁인데 산천초목이 모두 칼날같이 보이고 창같이 모두 죄업으로 현상계가 그렇게 되어서 닥치는 곳마다 몸을 상하게 되고 찔 려서 죽기도 하고 모두 이런 것 뿐 이라는 것이다.
자유! 이놈 때문에 좋기는 하지만 큰 낭패다. 부처는 사람을 속이는 사람이요, 사람은 부처를 속이는 부처다. 어느 사람이 참으로 속이는 사람이며 어느 사람이 진정 속는 사람일까! 정말 속지 말아야 하는데, 과연 어느 곳에서 어느 순간에 어떻게 하여야 안 속는 사람일까! 정말 속이지 말아야 하는데, 과연 어느 곳에서 어느 순간에 어떻게 하여야 안 속는 법인지 부처와 중생의 팀이 어디쯤인지 번뇌는 보리가 아니고 보리는 번뇌가 아닌 것도 같은데 이 번뇌망상 과 보리 열반이 둘이 아니라고 하니 대체 무엇을 어떻게 알고 하는 것인지!
몽땅 버리고 싶다
어떤 집념이 강한 생각은 우리를 구속하게 되는데, 소위 지식이 하나하나 늘어나서 학문이 한 가지 한 가지 발달하면 할수록 우리의 생명을 구속할 상대가 그만큼 늘어나는 것이다. 이 세상을 탁 내버리고 살아라. 전세계, 재산 전부 내 것 만들어 놓아도 내 것 아니다. 돈 백만원 모아놓으면 돈 한장 한장에 내가 구속되는 것이다. 지위가 높 으면 높을수록 생명이 구속되는 것이고 좋은 마누라 얻어놓으면 그 마누라가 완전히 나를 구속하는 것이다. 본심자리, 마음자리, 이것이 진짜 나다. 모든 생각의 주체인 자리다.
이것이 모든 조화를 부리는 것이며 온 우주에 이 나를 안거친 게 하나도 없다. 영웅이 되든지 바보가 되든지 일체 사건의 주체다 모든 것 다 버리고 네 정신만 다소 곳이 챙겨라. 거기는 호랑이도 못가고 하느님도 못가고 부처님도 못가는 마지막 자리에 도사리고 앉게 되는 자리다. 그러면 그대에는 이제 까지 쓸데 없는 생각을 했구나, 엉뚱한데 집착을 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무언가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잠재의식이 되어가지고 마음의 본연 자세가 드러나지 못하는 것이다. 미련만 근본적으로 끊어지면 잠재의식이 완전히 없어진다. 부처님은 아무생각 없이 남과 얘기하고, 음식을 잡수셔도, 누가 무엇을 물어도 사실대로 받아들인다. 아무 조건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기분에 따라 싸우고 이해에 끌려 남과 통할 수 없다. 제일 가까운 내외 사이에도 통하지 않는데 누구와 통할 수 있는가. 모든 생각을 초월했을때, 아무 생각도 없을때, 또는 그 이상 더 신선할 수 없을 때, 모든 죄악도 복도 초월했을때, 기분을 떠난 때, 이때가 정말 참 자기이니 이때에야 비로소 서로 이해가 되고 모든 것이 다 통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오고가고 밥얻으러 나가고 공양 자시고 하는 것이 다 마음 그대로의 인생 전체다. 모든 것을 초월한 이것이 진아행세도 하고 가아행세도 하는데 우주의 색심이 이것이고 다른 것이 아니다.
가령 우주를 나누면 죽은것 한쪽과 산것 한쪽으로 구별된다. 여하튼 어떻게 살아 있든 산것은 산것이다. 지금 말하고 말을 듣는 자리는 산것이며, 무정물인 돌, 막대기는 들을 줄도 생각을 낼 줄도 모르는 죽은 것이다. 죽은 것 가운데는 있는 물질과 없는 진공 허공이 있다. 에너지 자체도 죽은 것이며 생명이 없다. 과학이다. 철학이다. 종교다 하는 등의 문화는 살아있는 생명세계의 산물이다. 물질계가 죽은것이고 진공, 허공의 무생명체이고 그러므로 산 것은 있 는 물질도 없는 허공도 아닐 터이니, 유무를 초월한 비유비무의 본질이다. 본래 생길 수도, 없어질 수도 없는데 진공마저 초월한 이 마음 자리는 모든 것을 초월했고 그러니 영원히 살아 있으며, 대자유이며 절대 평등한 것이다.
인류 문화가 5천년이 아니라 앞으로 5억만년을 진보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각으로부터 나는것일 뿐 생각의 주체인 나, 생명 자체의 주인공을 맑힌 것은 아니다. 나라는 말은 네가 아니란 것으로 상대적인 일체를 부정한다. 선도 악도 아니고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이전 이고 동시에 일체를 초월한 것이 나라는 뜻이다. 나는 오직 나일 뿐 나에게 무슨 조건을 붙일 수 없는 신성불가침한 것이며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중생은 다 제 잘난 멋에 살고 있다. 부처님 말씀에 (중생을 제도하라 하시면서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는 것이므로 보살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결국 사상이 있으면 떨어진다는 것인데 이 사상은 곧 나로부터 벌어진다. 나란 생각은 본래부터 있는 생각이 아니고 객관을 상대할 때 나라는 생각을 낸다.
그러나 이 생각이 사람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지금은 이 물건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 다가도 얼마 안 가면 싫어지고 미워한다. 이와 같이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이 자기의 바탕일 수는 없고 그런 것을 좋다 싫다하고 생각해 내는 주체가 나일 수 밖에 없다. 마음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제 정신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노름꾼 만나면 노름쟁이가 되고, 술꾼 만나면 술꾼이 되고, 아편쟁이를 만나면 아편쟁이 되고, 도둑놈 만나면 도둑이 되고 깡패 만나면 깡패되어 온갖 곳으로 다 끌려다니며 마음에도 없는 일을 시키는 대로 종 노릇 하느라고 온갖 고생을 다한다. 그러니 자기를 아는 사람, 마음을 깨쳐 주객을 초월하여 부처를 안 사람은 누구를 따라 가더라도 거기 따라가서 나 한테나 남한테나 이익이 되면 따라가지만 이익이 안되면 안 간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 들 따라다니며 덕 될 것 아무것도 없다.
물질로 복을 짓는 것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하나의 부분밖에 안된다. 부처님 말씀에 성욕 같은 것이 두 가지만 더 있어도 성불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다. 돈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이런 것들은 한번 결 심하고 내던지면 돈을 봐도 욕심이 안생기고 또 좋은 부귀공명, 높은 지윈 그까짓것 헌신짝처럼 볼 수 있지만 비구니가 미남자를 볼 때 생각이 아무래도 흔들리고 또 이세 비구가 미녀를 볼 때 아무래도 한번 더 쳐다보고 안보는 체해도 옆눈으로라도 한번 슬 쩍 보게 된다. 그러니까 끊기가 참 어려운 것이어서 이놈 같은 것이 두 가지만 있다면 성불할 사람 아무도 없다. 나를 죽이는 사람도 적이 아니요, 살리는 사람도 은인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해롭게 하고 괴로움을 주는 사람한테 원한을 품지 않는 것은 오히려 쉽다. 기가 막히게 죽자 하고 그야말로 나를 숭배하고 나를 따르고 온갓 것 갖 다 대접하고 그게 생명을 바쳐서 나를 위하려고 하니 나를 따르는 그런 이를 고맙게 안 생각하는 것이 맞아 죽어가면서 원망 안하기보다 참 어렵다.
남한테 아주 분한 소리 를 들으면 생각할수록 분이 더나서 밥을 먹을 수 없게 된다. 저녁에 드러누워 자려고 해도 잠이 안 와서 벌떡 일어나 앉게 된다. 날만 새봐라 칼을 가지고 너 죽고 나 죽자 하고 분한 생각 하나로 골똘하게 될 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어떤 중대한 문제에 부딪치 게 되면 딴 생각을 멈추고 한 가지 문제에 정신을 집중하게 된다. 사랑은 사랑을 부르 고 화는 화를 낳는 것이다. 우리는 부처님을 멀리에서만 찾으려 하는데 가장 가까운 내 마음 안에 계시면서 이 세상을 커다란 배로 한다면 그 배의 노를 젖고 있는 우리에게 이 세상의 거친 노도를 넘도록 무한의 힘을 불어 넣어주는 은인으로 생각하여 그에 감사해 하고 작은 일에서나 큰 일에서나 서로 사랑해서 부처님의 한 나무의 가지로 인식 해야 하는 것이다.
무아의 사랑을 주는 자만이 그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염념히 마음의 고요를 찾아서 번뇌망상을 저버리고 고요한 마음의 힘을 길러 고요한 가운데서 부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여기에 내가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본래 고요헤서 와서 고요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염불이나 참선하는 수도인들이 처음에는 잠과 잡념과 고통에 시달려서 공부가 잘되지 아니하여 온갖 수단을 다 써본다. 밖으로 나가서 가벼운 운동을 해 보기도 하고 산책을 하면서 공부를 계속해 보기도 하고 높은 나무에 올라거서 잠과 싸워보기도 하고 돌을 짊어지고 왔다 갔다 하며 참선을 해보아도 잠이 퍼붓고 잡념만 나기 때문에 송곳으로 다리를 찌르기도 하며 칼을 턱 밑에 받치고 만져 보기도 하며 온갖 수단을 다 써가며 공부가 순일하게 잘되도록 가지 가지 방법으로 애를 써 가다 보면 차차로 잠도 없어져 가며 잡념도 덜해져서 가끔 하루나 2,3일씩 시간가는 줄 무르고 염불이나 참선의 일념으로 쭉 나가는 때가 있다. 이렇게 되면 공부에 힘을 얻고 자신이 생겨서 공부할 재미가 붙는다. 이때를 놓치지 말고 용기 백배로 정진하면 멀지 아니하여 이 마음을 깨닫고 대도를 성취하여 생사를 초월하게 된다.
제 4장 진리와 더불어 살 때
진리는 오직 하나뿐
진리가 즉 마음이요, 마음이 부처요, 불이 즉 신이요, 신이 즉 마음이요, 마음이 즉 우주요, 우주가 즉 심이요, 심이 즉 진리로 돌고 돌아가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지 둘일 수 없다. 우주의 핵심이 하나지 둘일 수 없으니 따라서 그것은 허공일 수도, 진공일 수 도 없고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물질도 허공도 만들어낼 것이 다. 그런데 이 하나인 한 핵심을 어디로부터 어디로 찾아가느냐. 허공으로 아무리 끝까 지 간다 해도 찾을 수 없다. 또 물질을 아무리 살펴봐도 거기서 생명은 안 나온다.
그러면 어디서 찾느냐. 지금 말하고 말 듣고 앉아 있는 이 생명,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 이 말이 이론에 맞나 안 맞나 생각하는 그 생각의 주체, 그 주체를 찾아 캐어들어가 보면 거기에 너도 나도 아니고 남편도 선악도 아닌 것이 살아서 분명히 주고받고 얘기할 줄 알고 일체의 주체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한다. 부처님, 하나님, 공자님, 여기 가면 다 만난다. 길은 이 길 하나뿐이다. 객관 세계에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진리는 찾을 수 없고 진리가 될 수 있는 사건이 하나도 없다. 옛날부터 진리는 아주 높고 높은 데 있는 줄만 아는 분이 많은데 그러나 요새 와서 는 평범 가운데 진리가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깨치고 있다.
그러나 더욱더 깨쳐야 할 일은 진리 가운데 참 진리는 평범 가운데 있다는 사실이다. 평범 이하의 평범은 꿈 밖에 없다. 진리! 생명! 곧 이 마음인 나는 신비다. 영원히 불가사의한 미궁의 것이다. 그러나 가장 신비한 것은 또한 가장 평범한데 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깨치면 신비는 없어지고 해방의 세계, 자유의 세계, 영원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세계의 거의 모든 종교 사상이 수용되어져 있고 세계의 상극하는 세력들이 우리 겨레 안에서 여러모로 작용 하고 있어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에게 안겨져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의 과제이기에 경제인이, 문화인이, 또는 종교인이, 정치인이 이것을 회피하려고 할 때에는 역사는 그들에게 철추를 내리게 될 것이며 가장 죄의 값인 사멸이 올 것이다. 인간을 올바르게 깨닫고 올바로 관리하여 인간을 바르게 세우는 데는 30여 억인의 인간 가족이 하나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지표가 세워져야 할 것 이라 여긴다. 나를 찾자! 나를 알자! 내가 살자! 인류의 지난 역사는 인간의 자기 관리와 겨영을 위한 예비과정이었다. 인간의 자기 관리와 경영이 무엇을 뜻하기에 그 많은 시련과 희 생을 제공하여야만 했었는가?
인간의 자기 완성은 우주의 완성이며 인간의 자기 관리와 경영이란 인간에 의한 우주의 관리권과 경영권을 설정함을 말하는 것이다. 우주의 관리 및 경영권자로서의 인간은 어떠한 인간을 정립하여야 하는 것이기에 지나간 인류사를 그 예비과정이라 해야만 하는 것인가?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내 품안에 계시고 내가 하느님 품안에서 영육이 쌍전한 완전한 생명을 비로소 인간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내 품에 계시므로 해서 전지전능의 하느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늘에 올라가면 무상지존의 하느님이 되는 것이며 인간 세상에 내려오면 관리권장인 절대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나와는 일체라 는 것이다. 일체이면서 또한 엄연히 이체로도 될 수 있음은 곧 나의 절대자유권한의 행 셍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불이일체인 나는 유시호에는 우주를 창조하고 만유를 섭리 하기도 하며, 유시호에 단 하나의 인간으로서 인류사를 이끌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나와 우주는 삼위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과 진리와 신과 불과 우주 만유와 그리고 인간은 자유한 것이며 평등한 것이다. 누구든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일인 줄로 믿는다. 생각이란 생각을 다 떼어내고 객관을 세우지 않으면 고스란히 마음 자리만 남는데 그 자리에만 앉아 있으면 어떤 귀신도 날 잡아가지 못하고 하느님이 와 도 안되고 부처님이 와도 안된다. 모든 생각이 떨어지고 나면 나를 볼 사람도 없다. 부처님도 날 못본다.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신통으로도 안 보인다.
그래서 부처님끼리는 서로 못 본다는 말도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다. 이렇게 못보는 곳까지 가면 완전히 자리를 알게 된다. 정말 큰 건 크다는 소리를 못한다. 전체가 다 내가 되어놓으면 무엇에다 비교해 많다고 할 수 없다. 그러니 많다는 소리가 작다는 소리다. 따라서 모든 착한 일해서 복을 짓는데 그런 인과로 큰 복을 많이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우주의 어느 부분을 그 복이 다할 동안 잠시 차지한 것이며, 이 우주를 다 차지했다 해도 그건 많은게 아니라 물질을 두고 한 소리니 많다고 할 것이 못된다. 꿈에도 바위는 무겁고 모래는 가볍고 그렇지만 이것은 전부 거짓말이다. 꿈속의 세계 에서는 중량이 없는 것인데 바위는 무겁다는 생각 그것이 무거웠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 그것만 끊어지면 현실세계를 그대로 초월한다. 중생들이 스스로 우주의 주재신이 있다고 믿고 자연과학의 원리에 의해 우리는 지배된다고 믿는 마음에 의해 지배되는 것뿐이다. 양은 본시 우리 겨레의 개성을 상징하듯 온유 순량하고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회의없이 수종하며, 이지적이 아니어서 개별행동을 취함이 없이 항상 집단으로 움직인다. 수령의 거동에 따라 행동통일을 긴밀히 할 줄 아뿐 아니라, 단결력과 희생정신이 투철함은 비록 야수계의 생리지만 우리로서도 배울 바 있게 한다. 가령 수급 양이 어떤 원인에서건 절벽이나 물속으로 뛰어들게 되면 남김없이 차례대로 좋아서 뛰어드는 예 라든가, 아프리카 들소의 경우, 두령 소를 먼저 사살하면 마지막 한 마리까지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맞아 죽는 예는 우리로하여금 생각게 하는바 있다. 한때 아프리카 지방에 밀생하던 들소떼는 이 규율을 준수하는 순성을 역이용한 교활한 백인 포수들에 의해 몰살, 절종 되었고 통조림으로 화해서 이 도살자들을 치부케 한 예도 있다. 양은 살아서 인류에게 젖과 털을 바치고 죽어서 고기와 뼈와 가죽까지 송두리째 바친다.
마음은 생각의 주체다
마음이 모든 생각의 주체다. 그런데 이 마음은 생각이 아니다. 지식, 사상, 정치, 경제, 예술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것조차 아니다. 그런데 결국 이(나)라는 것도 한 개의 생각이다. 자기 마음을 모르고 자기를 모른 사람이 돈 없는 가난한 사람보다도 더 가난한 사람이다. 저 가난한 사람이 밥이 없다고 가난한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이 없어 가난하다. 자기 마음만을 믿으면 이것이 곧 부자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있다. 일체가 모두 마음으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마음이 만들었다고 하면 만든 마음과 만들어진 객관 이 있게 되어 거기에는 주관 객관이 벌어질 수 있으니 일체유심이라 지을조자 하나를 빼버려야 알기 쉽다. 오직 마음뿐이다. 일체가 마음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불법이다.
우리 마음이 동서남북, 하늘, 땅, 천당, 지옥으로 쏘다닌다. 어디엘 가면 좋은 음식 좀 얻어먹을까, 어디 가면 좋은 사람을 만날까, 이런 번뇌망상으로 잠을 못자고 부산갔다 대구갔다 하며 이런 짓거리 저런 짓거리로 업을 짓고 있다. 그런데 이 번뇌의 마음을 버리면 부산 대구 생각하던 그 마음이 없어진 것뿐이지 대구나 부산 생각하던 마음자리까지 어디로 간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고 마음자리만은 영원히 그대로 남아 있 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마음이 청정하게 밝지 못하면 만사를 원망과 질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는 미신이 생기는 법입니다. 부처님께서 (내 마음이 청정하면 일체중생이 다 청정하지 못하면 일체중생이 다 나쁘게 보인다.)고 하였다.
내 마음에 때가 있으면 남도 때가 있게 되고 때가 있어 보이고 내 마음이 깨끗하면 남도 깨끗하면 남도 깨끗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을 청정하게 밝혀 자신을 계몽해야 한다. 자신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불만과 자신의 힘을 모르고 남에게 의지하는 미신이 생 기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이 인생은 밥만 먹고 똥이나 싸고, 늙고 병들고 죽어서 썩어 없어지는 존재인줄 알았더니, 참 나는 그것이 아니구나! 나의 참 면목은 마음이로구 나! 전체가 하나란 소리가 일체가 다 불법이란 소리와 한가지이니 일체법이 다 불법이고, 일체법이 다 불법이란 소리는 일체가 다 마음이라는 뜻이고 마음이 부처라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마음대로 변해서 제망중중으로 이 초 하나에 한량 없는 백성이 들어가 있는 그것이 한번에 봐도 낱낱이 따로따로 보인다. 나는 마음이 물질이냐 허공이냐 하고 항상 분간하려고 전심을 다하였다. 이것은 한 해결을 보기 위함인데, 즉 이 마음이 물질이냐 물질이 아니냐 판가름만 나면 불교를 이 해하기가 쉽게 된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외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며밖에 있거나 높은 데 있는 것도 아니며, 마음이란 우리가 밥 먹고 옷 입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프면 밥 먹을 것을 생각하고 또 우리가 일이 있어서 어디를 가려고 생각만 하 면 이 몸뚱이는 자연 따라간다. 그러니 천지의 근본이 마음이고 만사의 주체가 이 마음이다.
마음은 아무 생각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며 사상도 아니고 밝고 어두운 것도 아니며 둥글고 모난 것도 또한 아니며 남성도 여성도 아니며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일체의 것을 초월하다 보니 만사를 다 통해 가지고 있다. 그러니 이것을 내 놓고 우주의 주체가 있을 수 없고 진리가 있을 수 없다. 그런 까닭으로 마음을 깨친 이 말고는 참 지도자라고 할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 우주의 핵인 때문이다. 그러니 우주의 핵인 마음을 깨치기 전에는 누가 이 옳은 지도자가 되겠는가? 짐승이나 사람이나 죽을 때는 아주 죽는 줄 안다. 심지어 공자님도 죽으면 영원히 죽는줄 알고 죽었지만 아직까지도 죽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살아 생전의 모습과 같은 존재로 또 뭐가 되어가지고 돌아다니고 있다.
이 마음 못 깨달았으니 천당이나 지옥이나 개나 소가 되어가지고 지금 돌아다니고 있다. 그것이 그렇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제 마음대로 만들기 때문이다. 조화의 힘이란 이 마음밖에 없다. 물질도 조화를 못하는 것이고 허공도 조화를 할수 없는 것이다. 살아 있는 이 마음밖에는 조화를 부릴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확실히 이 우주의 주체인 진리의 핵이 된다면 산 것이다. 허공은 진리가 될 수 없다. 또 허공이 우주의 핵이 될 수도 없다. 또 물질이 될 수도 없다. 그러니 하는 수 없이 이 마음 우주의 핵이 되기 싫어도 되는 수밖에 없다. 오직 내 마음이 우주를 주재하는 유일한 주인공이라는 불타의 유심사상만이 참혹한 암흑에서 허덕이는 인류를 구원하는 참된 길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인생이 무엇인 가를 올바르게 알기 전에는 이 지구상에 평화와 자유가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점차 서광이 비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인류의 등불인 부처님의 정법의 새싹이 이 땅에서 싹트고 자랄 수 있는 모든 여건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러니 이 땅에 다행히 태어났을 때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이 육신과 이 마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용맹, 정진, 참회하여야겠다. 육신은 기계와 같고 자동차와 같으며 마음자리는 운전수와 같고 기사와 같으며, 몸뚱이가 옷이라면 말하고 듣는 마음자리는 옷을 입는 사람 몸에 비유된다. 그러므로 알 줄 알고 말할 줄 아는 이 마음자리인 나는 육체를 뒤집어 쓰고 있을 때나 몸뚱이를 거둬치웠을 때나 변하지 않는다.
중생 놀음하는 범부시절에도 마음자리는 조금도 덜함이 없이 제 성능을 다 하고 있으며, 이 다음에 성불해서 부처가 되었을 때도 무엇을 알 줄 아는 그 힘은 더 거룩해 지는 것도 아니다. 마치 소금을 입에 집어넣어서 짠맛을 아는 것은 아기 때나 학사 박사 때난 변함없이 똑같은 것과 마찬가지다. 육체는 산 채 그대로 송장이다. 눈동자가 무엇을 볼 줄 아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지각성을 가지지 못한 그것이 생리적으로 체계있게 조직이 되어 있다고 해서 알 줄 아는 능력이 물질에서 나올 수는 없다. 그러므로 눈이 볼 줄 알고 귀가 들을 줄 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법부였을 때는 눈을 빌어서 보기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사람이 뚫린 창구멍으로 비치는 것들을 내다보고 알고 필름에 찍혀나온 물건을 보고 느끼고 아 는 것이지, 창구멍이나 렌즈 자체가 알 줄 아는 것은 아닌 것과 똑같다.
그러므로 눈이 보고 귀가 듣고 코가 냄새맡는 것이 아니다. 알 줄 아는 마음자리가 직접 보고 냄새맡고 듣고 하는 것이다. 육체가 내가 아닌 진리를 깨닫고 나면 지식, 사상이 내가 아닌데 그러면서 또 지식을 알고 사상을 아는 참 나를 찾게 된다. 이제까지 육체가 나라는 착각으로 고생을 하고 육도를 돌아다니나 도인을 만나 마음이 나지 육체가 나는 아니다. 육체는 내 소유는 될지언정 나를 대표할 수는 없다. 이런 진리를 듣고 이제부터는 참마음을 단속해야겠구나, 지식이나 학사, 박사 노벨상 다 필요없다. 돈도 권리도 의식주도 필요없다고 결심하여 육체 본위의 생활을 차차 청산해 간다. 하루 세끼에서 두끼만 먹고 두끼에서 한끼로, 나중에는 안 먹어도 된다.
정신의 도가 높아지고 마음의 힘이 커져서 이 마음이 우주도 창조할 수 있으므로 굶어도 몸이 축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밥을 안 먹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도 아니고 도의 깊이를 굶는 능력으로 안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도 집착이고 구속이기 때문이다. 어떤 물질이나 사건에 대해도 부정 긍정의 아무 생각없이 대하라. 누워 자도, 장사를 해도, 정치를 해도 나를 위해선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나는 망하고 내가 없을 때, 그리고 남만을 위해서 살 때 나는 자꾸 커간다. 온 우 주가 전부 내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나의 평생 과제는 오로지 이 마음의 수련에 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이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마음이란 물질도 허공도 아니며 선도 악도 아니며, 여성도 남성 도 아니며, 지식도 사상도 신앙도 아니다. 그리고 이 아무 것도 아닌 것조차도 아닌 것 이 마음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이 마음은 불에 탈 수도 없는 것이고, 물에 젖을 수도 없는 것이고 자살도 타살도 할 방법이 없다. 나라는 나는 영원불멸의 것이요, 또한 절대자유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완전무결한 실체, 즉 우주 이전의 실체요, 차원 이전의 것이므로 나를 앞서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가 앞서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그것은, 모두가 다 내 이후의 것이다. 즉 모든 것은 이 마음이 창조한 것이다. 다 시 말해서 마음이 창조하면 하느님도 있고, 부처님도 있고 태양도 있고 온 우주가 건설 되는 것이다. 인류 5천년의 문화가 다 이 마음의 건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이 나의 마 음을 가리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말한다. 오직 나만이 거룩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 리의 육신은 오로지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사멸이 있으나, 마음은 사멸이 없다. 사멸이 없으므로 이 육신이 떠난 후에도 다시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삼생윤회(三生輪廻)라 한다. 부처 자리는 청정한 것이며 광명스러운 것이나 훨씬 해탈한 것인 줄로 알고, 중생은 흐리고 더러운 것이며 어둡고 깜깜한 것이며 생사로 말미암아 헤매는 것이라고만 고집한다면, 이 사람은 결코 영겁토록 마음의 대도는 깨닫지 못할것이니, 그것은 말과 글에 팔려서 명상(名相)을 고집한 까닭이다. 신통묘용이 불보살이 쓰면 나타나고, 쉬면 없어진 흔적도 없다. 그런데 어리석은 중생들은 죄악의 업신통(業神通)을 부려서 지옥 천당의 대체 세계를 나타내는 데까지는 자유이지마는 나타난 뒤에 는 인과응보의 구속에는 자유가 없다. 불보살은 때가 묻지 아니한 자심(自心)신통이기 때문에 무한수(無限數) 세계를 벌리거나 없애는데 자유자재의 해탈권이 있는 것이 중생과 다르다. 만약에 이 마음자리, 이 소식, 이 도리, 이놈, 이것, 이 법을 의론하고자 한다면, 어찌 그대가 저 말과 글귀에서 이 도리를 알 수 있을 것이며, 또한 한 생각에서나 한 가지 사물로써 이 도리를 알아낼 수 가 있으랴.
그러므로 이 마음, 이 도리, 이놈, 이것은 상대도 절대도 다 초월한 것이므로 인식조차 미치지 못하거든 하물며 말로써는 어림도 없는 것이다. 다만 살짝 가만히 이렇게 들어맞출 뿐인 것이다. 이렇게 된 이 한 소식문을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아니하는 무위법문이라고 한다. 만일 이 마음을 깨달아 알고자 한다면, 다만 이 마음자리가 본래 무심한 것을 알면 된다. 일체 동작이 다 이마음의 무심한 소식이니 제 스스로가 가만히 살짝 번개처럼 이것을 챙겨서 자취 없이 깨달아 귀신도 모르게 돌아서 들어맞는 것은 될 수 있는 일이지마는 그렇지 아니하고 만일 그대 가 남에게서 듣고 보고 배운 찌꺼기를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따져서 알려고 든다면 그럴수록 점점 더 멀어갈 뿐이니 어찌하랴.
그러나 만일 그대가 일체 언어 동작과 모든 생각들이 저 목석과 같이 다 무심한 짓이 된다고 하면 조금이라도 도를 배울 만한 분수가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마음 하나만 깨달으면 그 사람이 곧 참부처이니, 천지와 만법이 다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부처와 중생이 그 마음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마치 저 허공이 일체 만물과는 섞여지지도 아니하며 또한 허공은 깨뜨릴 수도 없 는 것과 같으며, 해가 떠서 온 천지가 어둡되 또한 저 허공은 어두워지지 아니하는 것과 같아서 밝고 어두운 것이 번갈아 바뀌되 허공은 여전히 변동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와 같아서 부처와 중생도 그 마음을 항상 그대로인 것이다. 슬프다. 인생이여! 억울 하게 까닭도 없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데 공연히 천당 지옥으로 돌아다니면서 고와 낙을 지은 대로 받으며 끝없는 생사고를 여윌 수 없으니 아무리 따지고 생각하여 보아도 이 부처님이 깨치신 실상선나, 곧 달마선을 깨달음만 같지 못하다. 이 선나법은 곧 이 마음이다. 마음밖에 불법은 없다. 이 마음이 곧 불법이므로 불법밖에 마음은 없다. 세상 사람들이 도를 배우려고 모든 부처님이 이 마음법을 전하였다는 말을 듣고 스 스로 생각하되, 이 마음 가운데 별달리 깊고 묘한 도리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을 구하여 얻을 것인가고 -
그러한 사람은 이 마음이 곧 정법이요, 정법이 곧 이 마음인 것을 알지 못하며 또한 믿지도 못한 때문인니,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을 다시 따로 찾아 구한다면 될 뻔이나 한 일인가? 천만겁을 지내도 마침내 얻을 수 없을 것이니, 아예 당장에 무심하여 문득 본정신 본마음대로인 것만 같지 못한 것이다. 모든 것을 초월한 적멸은 곧 이 마음이며 이것은 다행한 일이기도 한다. 그러니 이 우주의 모든 것 이 다 마음에서 흘러가고 흘러오고 한다. 그러나 마음은 오고 가지도 아니하며 그렇다고 해서 또한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만사는 마음의 장난으로 고락, 성쇄가 한량없이 바꾸어지는 유식이며 몽환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것에 의지하며 그것들을 탐착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부득이하여 이 생각 저 생각을 다 버리고 내 고장이며 진인류의 고장이며 또한 우주의 고장이며 또한 우주의 고장인 이 마음 집으로 돌아오는 걸음이다. 먹거나 굶거나 죽거나 살거나 하는 것은 다만 인연에 맡겨둘 뿐 이다. 그날 그날을 무사태평으로 뜻없는 세상을 살아가니 마치 넋을 잃은 사람과 같다. 온 세상에서 그 존재조차 아는 사람이 없으며 그대를 역시 세상이 알거나 모르거나 아무런 관심이 없어져 그 마음씨가 저 만길 땅속에 깊이 묻힌 바위와 같아서 도무지 금이 간 데가 없을 것이다.
문> 어떻게 하여야 이 마음법을 알 수 있을까?
답? 이 마음법은 깨달은 것도 없고 또한 아는 것도 없나니, 만약 이 마음 가운데 과연 깨달은 것도 아는 것도 없다면, 이 사람은 법을 아는 사람이다. 법은 알 수도 없고 볼수도 없는 것이니, 이 마음에 안 것도 본것도 없으면 그것은 마음을 본 것이며, 한 법도 깨닫지 못한 것이 법을 얻은 것이며, 한 법도 얻지 못한 것이 법을 얻은 것이며, 한 법도 보지 못하는 것 이 법을 본 것이며, 한 법도 따지지 아니하는 것이 법을 잘 따진 것이다.
문> 이 마음은 아무 것도 보는 게 없는 것인데, 어떠한 것이 걸림이 없는 지견인가?
답>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걸림이 없는 일체 알음알이의 바탕인 알음알이이며, 또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 보는데 걸리지 아니하는 봄이다.
문> 탐심과 욕심을 무슨 마음이라고 하나?
답> 범부의 마음이라고 한다.
문> 생멸이 없는 것은 무슨 마음인가?
답> 성문 나한의 마음이다.
문> 모든법이 다 그 개성이 없는 것을 아는 것은 무슨 마음인가?
답> 연각 독성의 마음이다.
문> 아무 것도 깨달은 것도 없고 또한 아무 소견도 없으면 그것은 무슨 마음인가?
답> 아무 말도 아니하겠다. 이 본래의 마음자리는 생각만 해 보려고 하여도 벌써 10 만 8천리나 어긋나고 마는 것인데 어찌 말로써 대답할 수 있으랴. 이 마음은 무심한 자리며 말이 없는 자리며,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자리며, 특별한 불법의 정지견도 가진 것이 없으며, 또한 피차도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생명이다, 영혼이다, 귀신이다, 혹은 불성이다, 보리다, 열반이다, 성품자리다, 중도의 뜻이다 또는 반야다, 법화다, 원각이다, 화엄이다 하는 그 많은 소리가 팔만대장경 속의 곳곳에 이름이 달리 나오고 그 어의를 좇아서 해석이 조금씩 다르다 보니 불교의 근본대의가 무엇인지 알수 없도록 현혹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술어를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한 마디로밖에 말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자유의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죽음 그 자체에 의해서만이 결정된다. 천하의 영웅과 만고의 호걸도 이 죽음 앞에선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그저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과학자, 종교자, 철학자 등 일체중생이 누구나 다 업보중생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 일체중생이 이 업안을 해탈하여 진리의 눈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 심성숭양 곧 어두운 마음을 밝게 함이니 견성(見性)이 다. 견성이란 자기성품(바탕)자리 일체만유의 본성자리 곧 진리이니 이 진리인 본심자 리를 맑고 청정히 가져 만사만리를 통찰할 줄 아는 지혜의 눈을 얻는 것이다.
생명과 영혼
우주생명이 곧 나다. 반면에 나는 곧 우주 생명이다 라고 우리가 인정을 할 수도 있 다. 이것은 다행히도 3천년 전 인도에 싯달다라고 하는 분이 그 진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였다. 그리고 깨달으셨다. 그는 인생의 죽음과 병들음과 늙음과 탄생함을 원통하고 슬프게 생각하였고 왜 내가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수 없느냐 하고 발버둥친 것이다. 싯달다 태자는 인생이 무상함에 순응할 수 없다고 반기를 들었다.
인생이 병들고 늙어 죽는 법이 있다면 반대로 영원히 병들지 않고 늙지도 않으며 살 수 있는 법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인류 5천년 역사에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하여 보지 못한 위대한 생각이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가장 슬프고 무서운 것은 무엇보다도 죽음인 것이다. 싯달다는 이렇게도 두려운 죽음의 원리가 있는 거와 같이 영원하고 불멸 하는 삶의 원리도 반드시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싯달다 태자만의 냉철한 판단력 이요, 그야말로 무서운 고집인 것이다. 과거 수많은 성인들이 있었으나 싯달다 태자와 같이 위대한 뜻을 가져본 일도 없었거니와 해결한 분도 없었다.
모든 사람에게 가장 귀중한 것이 뭐냐고 물으면 누구나 다 서슴지 않고 생명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이 우주를 다 준다해도 자기 생명과는 바꿔주지 않을 것은 물론 이며 생명은 손톱만큼도 안 떼어 준다. 그렇게 소중한 것이 이 생명이지만 그러면 그 생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이 없다. 요새 무슨 가치, 가치하고 떠들지만 우리의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사람의 참다운 가치를 논하는가. 속담에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하지만 만일 먹으면 죽인다고 총을 갖다 대면 아무리 먹고 싶은 진수성찬이 있어도 먹을 마음을 내지 못한다. 먹는 것은 오직 살기 위한 수단이다.
농사를 하든가 장사를 하든가 정치를, 철학을, 과학을 하는 것은 다 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아무리 농사짓기가 싫다 하더라도 부득이 농사를 지어야 하겠고, 부득이 장사를 해야겠고, 부득이 정치인이 되고 경제인이 되고하는 것은 삶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이 산다는 말은 누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살려고 하느냐가 문제다. 내가 살아야 한다. 내가 사는 것으로 살아야 만족한 것이다. 현대인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내가 무어냐? 제일 중요한 이 두 가지를 확실히 모르고 산다. 그러니 아무 것도 아닌 셈이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좋지만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이 생명을 어떻게 어디에 바쳐야 할 것인가가 있어야 하고, 확실히 내가 있는데 나는 무엇 인가. 이것이 제일 큰 선결 문제이다. 우리가 아는 우주는 커다란 한 개의 송장이다. 따라서 우주에서는 어디에서고 생각이 나올 데가 없다. 생각의 주체는 이 우주에는 없다. 나는 허공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말은 그것이 일체가 아니지 만 일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분명히 살아 있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참 피눈믈 나게 서러운 말이다. 유물 사상으로 찾아봐도 자기가 없으니까 나라는 생각 이것이 나가 아닌가 해서 한 말이다. 이것이 소위 동서의 철학을 대표했다 하니 참 불쌍한 일이다.
그것은 죽도 살도 못해서 자살하기는 무언가 아깝고 그러니 그런 소리를 해서 위안하고 있을 뿐인 것이니, 마치 한강 건너에서 사람이 많이 빠져 죽는데 잠깐만 하고 외쳐서 우선 위급을 구하는 격이다. 일본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으냐고 현상을 걸었는데, (죠또맛데)가 당선이 됐다. 잠깐만 기다리라는 뜻이다. 요사이 실존철학이란 바로 이(잠깐만)철학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것 가지고 안심입명하는 철학이 될 수는 없다. 다행히 부처님이 3 천년 전에 이미 생각조차도 아닌 나, 이것이 실재임을 밝혀주셨다.
물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다. 그것들은 생명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생각할 줄 모른다. 허공이 바위로 될 수 없고 진공이 바윗돌로 될 수는 영원히 없을 것이다. 바윗돌은 고사하고 모래도 안될 것이다. 모래뿐 아니라 산소나 수소도 안될 것이고 전자도 에너지로도 안될 것이다. 그 러니 허공은 태초부터 없는 것으로 영원토록 없을 것이다. 없는 것까지도 될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에너지 자체가 생명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물질 그것은 어떠한 상태에 놓인다 해도 생명으로 변할 수도 없고 거기서 생명이 생겨날 수도 없다. 무엇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배운 것을 자꾸 버리자. 이렇게 자꾸 들어가서 마음이 뚜렷이 드러나면 나중에는 우주에 모를 일이 하나도 없이 모두가 내 목전이다. 마음을 깨 쳐놓으면 내 눈이 하나가 아니라 오관이다
눈이 되고 귀가 된다. 귀라면 귀고 코라면 코고 거리가 없어진다. 거리가 없다는 말은 둘이 아니라는 말이고 주관 객관이 통일됐다는 뜻이다. 육체를 나라고 하다 보니 주관 객관의 거리를 인정하게 되고 둘로 생각하지만 마음도 아닌 이 마음이 나인 줄 어느 정도 깨달으면 이 우주와 나는 둘이 아니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때 비로소 사람이 살 기분이 생긴다. (나는 영원히 죽을 방법이 없구나.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불에 탈 수도 없다. 내 몸뚱이는 두들기면 깨지지만 이건 자살도 못한다. 자살할래야 방법이 없다. 세계의 수소탄이 다 내 몸에 맞는다 해도 육체는 죽을지 모르고 지구는 다 녹아 없어질지 모르지만 나는 죽을 수 없구나)하는 진리를 환하게 보게 된다.
지구 같은 물질이나 허공은 말도 못하고 자유나 구속을 느끼지 못한다. 물질이나 허공은 생명이 아니므로 무엇을 아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역시 송장이 아닌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물질과 다르고 허공과 다른 것이다. 이것이 생명과 생명 아닌 것과 차이다. 아는 마음이 없는 물질이나 허공이라면, 구속이니 자유니 하는 문제가 애초에 논의될 수가 없다. 요새 우리가 말하는 자유는 대인관계에 있어서 내가 남에게 기본인권을 유린당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마,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체객관으로부터 완전하게 해탈된 절대자유를 말하고, 상다세계를 초월하여 천상천하에서 훌쩍 벗어난 대자유를 말한다. 현대학문전체가 총결 하여 생명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있으나 아직 그 생명의 본질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간단하며 평벙하게 그 생명의 실질을 표현하는 말은 우리말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으로 전부 표현되어있다. 그래서 나는 처음 불교룰 우연한 기회에 듣고 대강 불교를 안 뒤부터 팔만대장경 전부가 이 마음 두글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마음 두 글자로써 남에게 불교를 이해시킬 수 있고 가르쳐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근50년 가까이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좀 바꾸어 말하면 살아있다는 소리다.
즉 생명이 있는 것을 마음이라 한다. 한문 경전에도 심죽시불 즉 (마음이 곧 부처)이며 서종도 그러하고 팔만대장경도 중요고자각 심즉시불을 말한다. 생명이란 영원한 것이며 절대자유인 것이며 그리고 남녀 노소 똑같이 평등하고완전한 것이다. 이 마음을 내놓고는 상대가 다 있고 대조가 있으면 완전한 게 없다. 가령 막대기는 짧은 것도 긴 것도 아닌데 긴 것이 나타나면 짧아지고 짧은 것 이 나타나면 길어진다. 이 세상에 불이 뜨겁고 태양이 뜨겁다고 하지만 우리가 만약 태양 가운데 살고 전 우주가 태양으로 돼 있다 하면 뜨거운 게 없다. 뜨겁지 않은 게 있기 때문에 불이 뜨겁지 불 그놈 자신은 뜨거운 걸 모르고 태양도 제가 뜨거운 걸 모른다.
이것이 상대성 원리고 불교의 원리이다. 나는 너 때문에 있고 여자 때문에 남자가 있고 나쁜 놈 때문에 착한 놈이 있다. 모두 악한 사람이라면 악한 사람 없고 모두 착하면 착한 것이 없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의 합일이기에 영혼만의 구원이나 구제만으로는 인간의 완성이 안되는 것이다. 인류의 조사인 1남 1녀는 영육의 완성체였기에 우리의 완성도 영육합일의 겸전한 구제하여야 하는 것이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인간이 영육을 온전히 한 오원경에서 벗어난 후 오랫동안을 우리는 영성에만 일변도 되었던 신명주권시대에 살아왔고, 그에 이따라 내성에 이 영을 치는 인간의 부조리가 세기의 소용돌이쳐 지배하는 한마당 가운데, 우리들이 오늘날을 살게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혼으로 도니 이 나인 이 마음은 곧 전우주의 핵심적인 진리이며 대자연의 성립이면 천지개벽과 음양조화의 원동력인 것이다. 이렇듯 영원한 실재인 이 생명이 마음을 떠나서 어느 곳에 인생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그 무엇이나 있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인생이며 5천년의 과거를 다시 깨끗이 정리한 다음에 한번 고요히 생각해 보자 꾸나. 과연 그 무엇을 남겨둘 것이 있는가. 또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 그 무엇인가? 공무에서 생겨났다가 도로 공무로 돌아가곤 하는 것들뿐이 아닌가. 바로 말하자면 그것 들은 오직 이 자기자신의 환각으로 환생환멸하는 것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 생명은 곧 진리며 신이며 불타이며 무정이며 선이며 악이며 남성이며 여성인 것이다. 따라서 온 우주인 것이다. 5천년의 인류문화를 자랑하지마는, 아직까지도 과학, 철학, 종교가들 할 것 없이 다방면으로 연구했지마는 이렇다 할 이 생명의 근본문제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더구나 영혼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죽어보지 않는 한 사후의 영혼에 대하여 누가 분명히 알겠는가? 영혼이 있다하는 사람도 미친 사람이요, 영혼이 없다하는 사람도 미친 사람이다. 거짓말을 한다면 모드지만 참말이라면 영혼이 있다 없다는 말은 입을 떼지 못할 것이다.
인연의 수레바퀴
도대체 흥망성쇠는 누가 하는 일이며, 누가 당하는 일인가? 이 개성 없는 인간들이, 개성없는 하늘, 땅, 만물, 이것들이 다 무엇인가? 어디서 생겨났으며 없어져서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가기는 가나 그 무엇이 가는 것인가? 정말도 답답한 일이다. 도깨비 장난이 아닌가? 그러니 무엇을 가지고 나다 너다 할 것이며, 어떠한 것을 가리켜서 흥망 성쇠라 할 것인가? 도대체 막연할 뿐이다.
더욱이 이 우주 모든 것이 모두가 연기 법칙 에서 무한으로 저 천문학자들로서는 도저히 추측조차 못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흐르고 흘러서 최후에는 아주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정말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생에 남 잘되는 것 미워하고, 도둑질이나 하고 협잡이나 하고 그런 사람은 금생뿐 아니라 내생에서 부모 덕도 없고 시집가도 남편 덕도 없고 장가가야 마누라 복도 없고 자식 낳아봐야 모두 불효하고 명 짧고 박복한 아이만 내 앞에 태어 나게 되는데 그것은 하는 수 없다. 그러나 복만 짓고 나면 엎어지나 자빠지나 잘되니 큰 돈 번 사람들은 꼭 운수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불교에서는 인과라 한다고 일소 하지만 그러나 인과는 알고 보면 과학적인 내용이 다 있다.
운수니 사주팔자니 하는 것도 들어맞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얼굴도 가령 정치가라든지 큰 사업가라 든지 다 업보로 타고나는 운명이 있다. 누가 돈을 가져가도 그 사람 갚을 건가 안 갚을 건가 그 사람 얼굴에 나타난다. 볼 줄을 몰라서 그렇지 시간시간 미래에 관한 관상이 얼굴에 나와있다. 관상 잘하는 사람은 내일은 뭐가 되고 모레는 뭐가 되고 미래를 다 설명한다. 손금에도 거기 평생이 다 들어 있다. 정말 잘 보는 사람은 피 한 방울만 봐도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 평생을 알 수 있다. 더 잘보면 전생도 알 수 있고 죽어 내생도 알 수 잇다. 인류는 누구든지 간에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사회나 인류의 행복이 신의 가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인간 자신의 노력과 자비스러운 자기 행위에 있는 것이다. 남을 도와주는 자비는 곧 자작자수의 인과로서 자기가 받을 마음의 농사인 것 이다.
마음의 원리를 깨치지 못하면 생사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데, 중생들은 항상 몸뚱이를 나라고 착각하고 의식주를 위해 생종경쟁을 하다가 죄를 짓고 온갖 고업을 받는다. 금생은 전생의 연속이며 무한 내생의 연결이며 금생에 주어진 후경이나 운명은 전생에 지은 원인으로부터 맺어진 결과이며, 금생에서 선악간에 하고 있는 우리의 일거일동은 다 내생에서 받을 결과에 대한 원인이다. 천지만물들은 서로가 연이 되며, 또한 이 연과 연끼리가 서로 모여서 어떠한 사물을 이루었다가 그것들끼리가 흩어져서 홀연히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만사가 저 뜬구름 같으며 꿈 같은 일이다. 그러니 이 세상만사가 저 뜬 구름 같으며 꿈 같은 일이다. 원한을 푸는 방법은 오직 참회 뿐이다. 영혼은 전생의 인연과계를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첫눈에 좋은 사람, 보기 싫은 사람을 다 알고 있다. 부인이 밤에 잘 나가더라도 어디 가느냐고 등불을 들고 바래다 주고 (나의 힘과 재주로는 우리 마누라를 마음껏 즐겁게 해줄 수 없으니 제발 당신이 우리 마누라 비위를 좀 잘 맞추어 주시오) 이렇게 간청을 해야 한다. 이렇게 참회를 해야 전생의 죄가 참회되고, 그래야 내생에는 그러한 여자를 만나지 않는다. 이 세상만사는 모든 것을 다만 그 인연에 맡겨 지내가면서 억겁다생으로 사생에 윤회 하는 것이며, 항상 그때 그곳에서 받아 태어난 그 몸뚱이만을 자기라고 고집하여 육신 본위의 치열한 생존경쟁에 휩쓸리고 만다.
불과 같이 일어나는 욕심에서 생겨나는 불만과 고독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와 비애에서 허덕이며 저지른 구원겁의 모든 죄악의 업습을 쉬어버리고 다시는 이 진아인 마음을 저버리고 허망무상한 육신만을 본위로 하지 말라. 가끔 부처님의 진법신이 허공과 같다고 비유로 말하지마는, 그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자리인 이 법신이 곧 허공이며 허공이 곧 이 법신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말하되, 우리의 마음인 이 법신이 저 허공에 두루하였으므로 허공이 우리의 마음인 이 법신을 포함하고 있다 하니 이것은 법신이 곧 허공이며 허공이 곧 법신인 원리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만일 저 허공과 마음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허공과 마음을 따로 갈라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는 이상, 허공이니 법신이니 하는 것은 다만 제 스스로가 별명을 지어서 그렇게 인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다 무한대는 아닌 것이다. 시간도 그렇고 공간도 그렇고 또한 법신도 그렇다. 오직 이 마음자리만이 이 우주에 두루할 뿐이 다. 현재는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현재가 없다고 하면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과거니 미래니 할 것인가? 과거다 미래다 하는 말은 원칙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다만 우리가 가정을 해서 하는 말에 불과하다. 진실 그대로를 말한다면 삼라만유의 모든 존재가 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물질 그 자체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변화 하고 있는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과거라고 하는 것은 지나간 일을 추억하다는 말이지만, 작년은 이미 작년으로서 지나가 버렸다. 작년 3백 65일 다 흘러가 버린 것이므로 작년이라고 하는 것은 다 소모되고 없어진 것이다.
또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니 하나의 추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도 경험할 수 없고, 미래도 경험할 수 없고 현재도 또한 경험할 수 없다. 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백년에 한번씩 이따금 흘러간다면 현재도 있고 과거도 있겠지만, 억조만분의 1초도 멈추는 일이 없이 찰나찰나 흘러가는 것이고 보면 우리는 그것을 어떤 것이라고 확실한 기억조차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확한 기억이라는 것은 생길 수는 없다. 비슷한 것, 거의 같은 것에 불과할 뿐인데, 이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사회도의와 질서를 몰각하고, 윤리와 인성을 땅바닥에 처박으려, 사리사욕에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해 다툼에는 맹수보다 영악한가 하면, 인간사회에 상호 불신의 씨를 뿌리며 동족과 이웃의 불행에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국가사회의 이익에 앞질러 개인 축재와 향락에만 몰두하며 탐욕과 음유와 시기와 중상과 위선과 가식과 비열과 무교양과 파렴치의 온갖 죄악을 뱃속에 가득 담 고, 아부의 웃음과 교활의 눈초리를 빈들거리는 무리들이 너무 많이 들끓는 것을 보면 벌써부터 우리 세상은 이 기계 문명의 소산인 가짜 인간들에게 침식당하고 있음이 분 명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구제받을 길 없는 가련한 생명체들을 구제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들로 하여금 소유욕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고, 이들의 가슴속에 내일을 심어주고 절망과 체념에서 구출하고 생명의 자유와 영원 성을 믿을 수 있도록 신앙을 가질 줄 아는 마음, 자기 종교를 가질 수 있는 마음을 넣 어주어야 겠다.
제5장 마음의 밭을 갈 때
마음을 깨끗이
지상의 도는 곧 마음이다. 이미 이 마음이거든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밥먹고 옷 입을 줄 알았으면 그만이다. 새삼스러이 깨치려고 하므로 곧 그러한 생각이 큰 장애가 되는 것이다.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는 망상만 버리면 도는 저절로 훤히 드러나는 것이다. 털 끝만한 생각만 일으켜도 벌써 이 마음의 천진면목과는 하늘과 땅만큼 틈 아닌 틈이 벌 어지고 만 것이다. 마음의 본래 면목이 드러나려면 좋다 싫다 생각을 곧 버리면 되는 것이다. 맞다 안맞다 하고 서로 다투는 것 이것이 도를 닦는데 제일 큰 장애가 되는 것 이므로, 이렇게 드러난 허물인 줄 알지 못하며, 또한 탐욕심과 살해심이 곧 무상대도인 것을 살피지 못하고 도를 닦는 사람은 망상을 끊고자하면 할수록 더 일어날 것이다.
이 마음은 동굴에서 저 허공과 같이 두루하여 모자라는 데도 없으며 또한 넘쳐 남는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만 밉고 가까움 때문에 이 마음의 본래 면목을 잃고 만 것처 럼 되어 있다. 모든 것을 따르지 말며 텅 비어 공한 경계도 여의고, 오직 그렇게만 지 내면 망상번뇌는 저절로 없어지고 마느니라. 망상을 끊고 마음을 쉬고 앉았으면 잠시 조용하다가 다시 더 큰 화근이 나는 법이라, 밤낮 그러다가 말게 되는 것이니 언제 한 번 이렇게 지낼 수 있으랴. 이렇게 제데로 지낼 줄을 모르면 밤낮 앞뒤로 넘어지다가 말 것이다.
망상은 버리려고 할수록 더 일어나는 것이며, 텅 빈 지경을 지키고자 하는 까닭은 내가 빈 것과 상대하고 있는 것이니 거기에 팔려 있는 것이다. 말이 수다하고 생각이 많을수록 점점 더 어긋나는 것이며, 말이 없고 생각을 쉬고 나면 어느 곳 어느 때나 이렇게 딱 들어맞는 것이니라. 이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서면 곧 이렇게 제대로 이지마는, 객관 사물에 팔리면 제 마음은 제 마음 뒤로 숨어버리나니, 곧 돌이키면 보다 더 싱싱하여져서 먼젓번에 텅 비었던 경계보다 훨씬 수승하다.
앞에서의 망상을 끊고 따라 나타났던 빈 경계가 돌변하여 복잡한 번뇌로 되는 것은, 한쪽은 끊고 한쪽은 구하 는 망견이다. 이 마음밖에 따로 진리가 없는 것이니 새로이 진리를 구하지도 말 것이 며, 오직 자기의 마음에 있는 일체소견을 다 버리면 된다. 진이니 망이니 하는 소견을 버리고 또한 무엇을 따지며 알아보려고도 하지 말 것이다. 조금이라도 시비심이 남아 있으면 제 정신을 잃어버리느니라. 만물이 다 한마음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므로, 한마음 도 또한 간직하지 말 것이다. 한마음까지도 간직하지 말면 세상 만법이 다 한마음이라 서 짝의 허물이 없다. 짝의 허물이 없어지면 일체법도 없고 한 생각도 남음이 없으면 그때는 한마음도 아니다.
온갖 생각은 저 경계가 없어짐에 따라 없어지고, 또한 모든 경계는 이 생각이 없어짐에 따라 없어진다. 그러므로 온갖 경계는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모든 생각은 경계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저 경계와 이 생각이 그 어느 것이 먼 저였고 나중의 것이냐를 알고자 한다면, 그것들이 본래부터 모두가 아무 것도 아닌 이 한마음이다. 아무 것도 아닌 이 한마음 자리가 주관 객관으로 나타나서 도리어 이 한마음이 저 온갖 것을 그 안에 있게 하였다. 다만 좋고 궂고 하는 생각만 내지 아니한다면, 어찌하여 주객이 갈라져서 한쪽 편이 되리오. 이 마음자리가 원래부터 대도인 것이라 본래 넉넉하고 휼륭한 것이다. 이미 이 마음인 이상 쉽거나 어려울 수가 없다.
좁은 소견으로 따지기만 하다가 따질수록 점전 어긋나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이론이나 숭고한 이념일지라도 그것에 집착하면 그 사람은 그 이념과 맞서는 것이 되어서 상대연기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반쪽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천진 자연한 이 마음자리를 호호탕탕 제대로 살면 이 마음 자세는 오나가나 머물지도 아니한다. 천진한 이 마음을 조작없이 제대로 가지면 이 마음 이대로가 큰 도이다. 만사에 욕심이 없이 제대로 걸어가면 산도 절도 물도 절로, 꽃피고 새가 우니 만물이 자유롭다. 태평천지이 니 세월, 생사밖에 한 가락은 날날이 닐닐이 제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인생에는 회계가 맞지 아니하는 것이다.
만족은 이 마음에 있는 것이요, 저 세상에 있는 것은 아 니다. 그러하건만 사람들은 그것을 거꾸로 찾는다. 이 짧은 인생으로서 무한대로 일어 나는 이 무지한 이 욕심을 무엇으로서 다 메울 것이가. 다만 애가 탈 뿐이다. 애가 타면 이 마음만 괴로울 뿐인데 나는 무엇 때문에 네니 내니 하는고? 천지만물로 더불어 이 마음이 본래부터 한덩어리인데, 절대한 자유만능의 본래 면목을 알고자 하거든 다만 저 만물을 미워도 고와도 말 것이니라. 만물을 미워도 고와도 아니하면 이 세상이 도리 어 곧 부처님 세상이다. 그래서 지혜 있는 사람은 저지르지 않는데 여여부동 저 어리석은 사람들은 제 발들을 밟고 넘어지게 마련이다.
저 만물이 곧 마음이요 이 마음이 곧 저 만물이다. 전체가 통틀어서 오직 다름없는 이 마음은 하나뿐인데 저 범부들은 어리석게 자기는 주관인 양 하여 저것들을 남이라고 여기고 불같은 탐욕을 낸다. 어찌 그것 이 큰 착오가 아니랴. 깨끗한 이 마음자리를 한번 그르쳐놓으면 치우쳐서 고요하거나 산란하거나 하지마는, 깨닫고 나면 좋고 싫은 것이 없다. 좋거니 싫거니 하는 것은 모두 두 조각의 모순된 살림살이로서 영겁으로 생사고해에서 골몰하는 공연한 궁금증 때문이다.
이 세상만사는 이 마음에 저지른 꿈결이요. 눈병 때문에 공연히 보이는 공중 꽃이다. 무엇을 애써 알아보려고 할 것인가? 얻었거나 잃었거나 옳으니 그르니 여러 말 말고서 한꺼번에 탕탕 놓아버려라. 눈에 잠이 없어지도록 밤낮으로 쉬지 않고 공부를 힘써 하면 천당이니 지옥이니, 인간, 짐승, 남자, 여자 하는 모든 꿈들이 저절로 없어지 는 것이니, 다 이 마음이 항상 이러하여 변쳔하지 않으면 저 천지만물과 더불어 이 마 음과 한가지로 항상 이러하다. 이러한 이 마음자리는 만법과 둘이 아니면서 항상 이러 하여 우주의 궁극체이며 고독이며 고귀독존이므로 여기에는 맞서는 짝이 끊어진 것이어서 말과 글월과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만물을 밉다 곱다로 차별하지 아니하고 무아, 무심으로 평등하게 보면 이 마음이 제대로 돌아선다. 이 마음은 그것을 무엇이라도 할 수 없을뿐더러 또한 무엇으로도 비교가 안되는 것이다. 이 마음은 까딱도 않고 움직이니 그것은 곧 움직이는 것이 아니요, 또한 움직이면서 까딱도 아니하니 그것은 곧 까딱 아니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이 마음자리는 움직인다, 아니 움직인다 하는 양쪽을 다 초월하였다. 그러니 어찌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머엇인 그 하나인들 마음에 남아 있을 수 있으랴. 이 마음자리에는 끝내 아무 법칙이 없으며, 따라서 이 마음은 깨닫는 법조차도 일정한 법을 말할 수 없다. 이 마음이 본래부터 평등하여지면 모든 망동이 다 쉬는 것이다.
이 마음밖에 부처나 조물주와 진리가 따로 있는가 하고 따지는 번뇌망상을 깨끗이 하면 본래의 정신이 바로잡히는 것이다. 좋고 싫고간에 무슨 일이든지 도무 지 마음 가운데 남기지 않으니 조금이라도 기억이 남지 아니한다. 텅 비고 밝아서 분명 히 이러하니 애를 쓰지 아니하여도 공부가 저절로 굴러간다. 이 마음자리는 말과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라 따지고 연구하는 법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실재로서 변함없는 마음에는 남도 나도 없다. 누구나 이 마음자리의 본래 면목을 꼭 알고자 한 다. 오직 만법과 이 마음이 둘이 아닐 뿐이다. 둘이 없으면 온 우주 전체가 다 이 마음 하나로 되는 것이요, 이 하나는 도리어 그 전체를 머금고 있다. 온 세상의 지혜 있는 사람들은 다 이 마음을 깨치는 선종으로 들어오느니라.
이 법에 들어서는 법은 시간이 걸리지도 않으며 또한 얼른 빨리 들어설 수도 없다. 왜냐하면 시간을 흘리기 전에 부동 일념의 순간에 곧 만년이 흘러갔으니 만년이 곧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자리는 두루 가득하여 있고 없는 곳이 없어서 온 우주의 현재 일이나 억만겁의 과거 일이나 미래 일이 항상 눈앞에 보이는 것이다. 가장 적은 것이 제일 큰 것이기 때문에 저 우주만유와 이 마음이 서로 맞서는 상대가 아닌 것이며, 가장 큰 것이 제일 작은 것이기 때문에 변두리를 볼 수가 없느니라. 저 만물이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이와 같은 도리가 아니면 그것은 간직할 것이 못되는 법이다. 한 가지가 곧 오만 가지요. 오만 가지가 곧 한 가지이다. 다만 넉넉히 이와 같은 도리를 간 직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성불하지 못할까 걱정하랴. 똑바른 신심은 우주만법과 둘 이 아닌 이 마음이니라. 둘이 아닌 신심은 말할 도리가 없으며 또한 과거도 미래도 현 재도 아니다.
나의 길, 나의 노래
길을 보고 있을 때 사람들은 걸어왔다는 사실과 그리고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내가 다시 태어난대도 기꺼이 이 길을 걷겠노라. 설령 성불을 한생 미루더라도 모든 중생을 건지리라. 육신은 죽어도 법신은 영원히 살아있다. 맑고 깨끗한 마음만이 나와 가정과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나는 밤의 산길을 좋아한다. 길들은 끝이 없이 흘러간다. 그리고 냇물도 끝없이 흘러 간다.
왜 흘러가는 것일까. 냇물은 지면이 낮기 때문에 흘러내리고 길들은 사람들의 발 자국의 때가 묻어서 흘러내릴 것이다. 그 자체의 의지로써 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 데도 달빛 아래 보고 있으면 그것은 한 의지처럼 보인다. 마치도 도라든가 보리라는 말이 그 자체로서도 품격을 지니고 있는 듯이 생각되면서……. 나는 승려이므로 많은 길을 걷는다.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고 들길을 걷는다. 문명이 발달되고 나이가 더해 가고 도시에 머물게 되면서부터 내발로 땅을 딛고 걷기보다는 승용차를 타고 가는 횟수 가 더 많아졌으나 그 탄다는 사실도 여전히 나에게는 걷는다라는 말로써 번역되고 있다.
젊은 날에 너무나도 많이 그 걷는 일을 되풀이했기 때문일 것이다. 40년의 수도생활, 춘하추동이 1백60여를 넘기도 또 산천의 수색과 형경이 네 번이나 변했건만 난 또 어디로 가야 하고 또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고 있다. 부처님께서 미묘 법문의 광장설이 40여 년이니 또한 내 한평생 수행과 같건만… 돌이켜보니 숱한 사연과 밀어들이 이 고뇌를 잊고 무상증득의 나를 찾고자 애쓰는 노승의 심정이 조급해질 뿐, 또 어쩔 수 없 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 한 해 또 한 해를 보내고 맞는다는 생각뿐이다.
아침 5시가 되면 승려들은 눈을 뜨고 일어나 대빗자루를 들고 절 뜰을 한 바퀴 쓸고 구석 구석에서 진회색의 냄새가 풍기는 법당의 문을 밀고 들어간다. 아침 염불을 왼다. 법당문을 열고 나올 때는 벌써 건너산 위로 붉고 미숙한 햇빛이 트고, 나오던 승려들의 손은 합장하여 지고 허리는 겸손하게 구부러진다. 절간을 둘러싼 대숲에서 바람에 이파리가 흔들리는 소리, 풍경이 흔들리는 소리, 이 아침의 소리들은 너무나도 미세하고 신경질적이다. 마 치 신라인들의 귀금속품과 같다.
그렇게 긴 아침이 서서히 사라지고 난 뒤, 산으로 빼 곡이 둘러싸인 산간에는 저녁이 줄달음치듯이 뒤따라온다. 더욱이 가을과 겨울에는 아 침과 저녁이 거의 일적선으로 이어지고 있는것 같다. 만산은 종일 붉은 놀에 잠겨 있는 듯하다. 낯 씻는 일, 변소에 가는 일, 그리고 먹는 일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자리를 떠난 일이 없이 정진에 몸을 맡기었다. 무수한 시간이 지나갔으나 나는 동요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한목적, 유일한 목적만이 내 앞에 있었다. 해탈하는 일, 그것이 바로 그 목적이었다.
욕심으로부터 욕망으로부터, 기쁨과 슬픔으로부터의 해탈이 목적인 것 이었다. 모든 나로부터 벗어날 때, 모든 욕심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최후의 것, 가장 본질적인 것, 이미 나는 내가 아니라는 큰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문앞에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었고, 목이 마르고 괴로움과 불편함이 잊혀질 때까지 그러고 있었고, 이윽고 그 괴로움과 불편이 사라져갔다. 점점 무의 경지로 들어갔다.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앉는 것 같지 않고 오줌을 싸도 싼 것 같지 않았다. 한 숟갈의 밥, 하나의 정좌는 밥이고 정좌이면서 곧 무였다. 아아, 승려들은 놀의 시간을 사랑한다. 더욱이나 그런 시간의 벼랑에서 또는 토굴에서 정진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토해낸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윽고 그 달빛과 놀과 일출 위로 떠올라온다. 그런 다음 그들의 허적허적한 발길은 토굴을 빠져나와 세상으로 향하여진다. 저녁은 아름답다.
나뭇가지에 닫는 바람소리, 골짜기의 물소리, 그리고 일대를 물들이고 있는 붉은 놀……. 산사람들에게 놀처럼 정겹고 속세를 그립게 하는 것 은 없다. 그것은 정진의 길에서의 그 어떤 의지라기보다는 그 어떤 분위기였고 인간적인 것의 정경이었다. 그러므로 놀이 내릴 때 산사람들은 가장 많이 동요된다고 한다. 달빛 속에는 사해대중의 아픔이 보이지 않은 밀도로서 들어차 있다. 그래서 대승들은 그 달빛 속으로 나아가 정진하는 것이리라. 승 일연의 기록에도 광덕은 밤마다 달빛 위에 떠올라 정진하였고 현수도 달빛 속에서 그의 선을 맞아들였었다.
기록만이 아니다. 사실에 있어서도 달빛은 승려들의 정진과 깊은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 선사들의 모든 게송 속에는 한두 마디 달빛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 아니 달빛만이 아니다. 저녁놀이 라든가 새벽의 써득써득한 빛깔은 승려들이 너무도 사랑하는 색채이다. 숲속을 거닐 때 인생은 마음의 폭이 한없이 넓어지고, 또 한층더 아름다워진다. 고요한 속에서 생각이 되는 일은 모두 소화되고 승화되는 법이다. 대자연을 찾아라. 비록 중이 되지 않더라도 인생의 참맛을 알게 되리다. 만상의 나무들이 누렇게 시드는데 벼랑 위에 오직 한 나무 싱싱하게 푸르러 있더라. 오늘 나는 어두운 도선사의 나무숲을 헤치고 가면서 한 게송에 의문을 던진다.
어떻게 (잎사귀가 시들고)(홀로 푸르다)는 흔적을 남기고 지혜의 바다를 건너갈 수 있을까?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아직도 미망의 그림자를 벗어버리지 못 했다는 것이 아닐까? 마치 바람처럼, 마치 달빛처럼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고, 어떠한 그릇에도, 어떠한 시간에도 자유자재로 담길 수 있는 것이 대오가 아닐까? 그러한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표현할 수도 없는, 시늉할 수도 없는 그것이라고 부르 는 것이 아닐까? 지금 생각하면 그 밤에 우리는 싸우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는 육체와 정신이, 세속적인 의리와 그 반대의 것이 서로지지 않으려고 밤새도록 버티다가, 통곡으로 아버지가 손을 들었고, 그 분에 못이겨 그분은 끝내 그의 단명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별세하시기 전날, 한 마을에 살고 계시던 할아버지와 백부님이 오셔서 가족회의를 열었다. 그분들은 어떻게 하든지 나로부터 승려가 되지 않겠다는 말을 들으려고 하였건만 끝내 실패하였다. 할아버지는 (네 아비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입술에 바른 말이라도 않겠다고 하여라)하고 간청하였지만 (어떻게 거짓말 을 하겠습니가)하고 나는 거절하였다. 그때 병중에서도 휙 몸을 돌리시고 쏘아보시던 아버지의 눈길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너무나 무서운, 원망과 저주에 가득찬 눈 이었다. 그와 동시에 할아버지와 백부님께서도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노여움에 찬 어조 로 몇번이고 뱉으시면서 문을 차고 나가시었고, 나는 그분들의 뒤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엉거주춤 서 있어야 했어다. 그 다음날 어버님은 별세하셨다.
그리고 갓난 이기였던 나의 동생이 따라서 저승으로 갔다. 세속세계를 떠나려고 나의 마음은 그 세속세계로부 터 너무나도 심한 보복을 받은 것이다. 대지의 숨결이 흰 구름에 엉겨 아스라이 지평선 위에 둥실 떠 흘러간다. 양광에 구멍 뚫린 얼음장 밑으로 시냇물이 도도히 소리치며 흐른다. 후미진 웅덩이에서 송사리 한 마리가 거센 물살을 거슬러 도약을 시도한다. 태초 로부터 이어오는 생명의 약동이다. 검은 잿빛으로 시들어 오그라진 쑥대 밑에서 파란 연두빛 어린 싹들이 짓눌리는 고갈을 제치며 앞 다투어 올라온다. 오늘이 경칩! 지하의 온갖 벌레들이 지루한 동면에서 깨어나 새봄의 생기를 들어마시며 새로운 태동의 기지개를 켜는 웅성거림을 듣는 듯하다. 하늘에는 구름이 흘렀다. 찬란히 바라보고 있는 그 의 눈에는 구름이 삽시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 들어오고 있었다.
코끼리 모양으로, 젖먹이는 어머니 모양으로, 산 모양으로, 바다모양으로, 물 긷고 가는 아낙네의 모양으로, 그리고 염소 모양으로, 토끼 모양으로 그토록 자유자재로 변하는 구름 모양에서 그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수만가지로 변화하는 생의 무상이었을까, 아니면 다만 흐르고 변하는다는 구름의 형용이었을까. 어렸을 때의 일을 세세하게 생각해 낼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쩌면 그는 그때의 구름의 변용에서 일종의 소년다운 감상적인 비애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비애는 장차의 그를 만드는 정서적인 원천을 이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겨울 사원은 언제나 적막하다. 더욱이 흰 눈이 며칠이고 계속 내려 시내로 가는 산길이 흔적도 없어지고, 눈과 나무라는 단조로운 형태로 산이 정리되고나 면, 산엔 바람소리밖에 그 고요를 깨뜨리는 것이 없다. 겨울 산의 바람소리는 쓸쓸하다.
더욱이 황혼이 어둠 속으로 묻히고 그림자들이 밤으로 밤으로 몰리는 초저녁의 바람소리는 산사람들의 가슴을 몹시도 심하게 흔들어놓는다. 그런 날의 승려들의 모습은 웬지 쓸쓸해 보이고 왜소하다. 앞뜰의 눈을 쓸고 있는 승려들, 그리고 묻힌 길을 더듬으며 걷고 있는 승려들, 꽁꽁 닫힌 방안에서 불경을 낭랑하게 외고 있는 승려들, 그들의 모습에는 속세를 떠나온 사람들의 떠나왔다는 슬픔이 그리움과 함께 깃들어 있는 것 같 다. 어쩌면 나도 그러한 슬픔 속에서 그 많은 겨울을 맞이하고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들이 떨쳐버릴 수 없도록 힘차게 몸에 달라붙어 나의 일부분으로 화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우중충 얼어붙은 하늘 폭을 쪼개고 사라져가는 제트기의 방향 을 쫓아 저 멀리 남쪽 산 너머 위, 두둥실 흰 구름 한 점, 창공에 걸려 있는 저 너머에 서 희미한 양광을 타고 봄의 숨결이 대기 속에 스며든다.
흰 눈 덮인 산비탈을 죽장으로 헤쳐오느라면 대가락 굴러가는 고엽의 행방--거기, 말라붙은 잔디를 헤쳐 대지의 맥박이 파아랗게 솟구쳤다. 삼강오륜이라는 유교의 굴레에 꽉 얽매여 있었던 그때의 아이들은 그 반항심이라는 것을 결코 나타낼 수는 없었다. 그것을 보였다가는 당장 불효 라는 낙인이 찍히고 마을에서 소문난 문제 아이가 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뚜렷이 만법 을 성취한 마음의 (여)가 따지는 망상의 바다에 빠져서뜬 갈대와 같이 표류하면서 항상 입으로는 나는 알았다고 떠들며, 배웠다고 하며, 깨달았다고 하며, 해탈했다고 하며 무슨 도리가 있는 체하면서 우세할 때에는 의기양양하다가 모자라는 입장에서 숨도 못 쉬고 비굴해지니 이러한 작은 알음알음이의 소견은 위 없는 대도를 성취하여 생사를 초월하며 저 고해에 허덕이는 무변한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하는 이 마당에 있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마음의 힘은 불가사의
옛날에 어떤 노장님이 큰 산꼭대기의 암자에서 7·8세 되는 아이를 하나 데리고 있는데 하루는 김치가 떨어져서 마을에 김치거리를 좀 얻으러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에게 단지 몇 개를 잘 씻어서 뒤집어 놓으라고 시켰습니다. 노장님이 마을에 내려가서 먹을 것과 김치거리를 한 짐 잔뜩 얻어 걸머지고 올라와 보니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낯선 단지가 절에 있었습니다. 우그러지고 비뚤어진 것들이 대여섯 개나 뜰에 널려 있기 때문에 생각하기를 (아마 옹기 장수가 왔었구나.)하면서 (항아리를 사려면 돈을 주고 좋은 걸 사지 왜 이런 것을 샀느냐.)고 나무랐습니다. (사지 않았습니다. 옹기 장수는 지나가지도 않았습니다.)(그러면 이 단지들은 어디서 난 것이냐, 모두 다 전에 없던 것들 아니냐.)(아닙니다. 그전에 있던 단지들입니다. 스님이 시키는대로 했을 뿐입니다.)(내가 뭐라 했더냐.)(씻어서 뒤집어 엎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스님 가신 뒤에 좀 놀다가 씻어서 무릎에 대고 뒤집어 놓았습니다.) 버선짝 뒤집듯 후딱 후딱 잘 뒤집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아이가 순진해서 뒤집으면 뒤집어지는 것으로만 알았던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동문들도 없이 산에서만 자랐기 때문입니다. (이놈 거짓말하지 마라. 너 그러면 한번 뒤집어 봐라.) 그래서 아이가 무릅을 대고 뒤 집으려고 하니 이제는 무릎이 깨져도 안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의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고 나중에는 의심이 생겨서 안 됐던 것입니다. 요새 심리학자들도 그런 일을 혹 경험한다고 합니다.
중국에 이광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광 사호라고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광은 본래 힘이 센 무사로서 중국 역사에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달밝은 밤에 활쏘는 연습을 하고 저물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동네 앞에 있는 남산 근처에 왔을 때인데 큰 호랑이가 자기가 타고 오는 말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광은 (저 놈이 배가 고픈 모양인데 나한테 달려들면 나도 죽고 말도 죽 을 것이 틀림없다. 도망을 가자니 호랑이가 따라 올 것만 같고 죽으나 사나 저놈하고 싸움이나 해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등에 올라 앉아 활을 호랑이에게 겨누어 정면으로 쏘았습니다. 호랑이는 자기 몸에 활을 맞으면 막 달려들어 서 원수를 죽여 놓고 나서 죽는 영특한 짐승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자기가 소리를 한 번 지르면 자기가 탄 천리마가 단 걸음에 자기 집으로 달려나갈 것이니 동네 앞에 닿으면 큰 소리를 질러서 동네 사람들이 횃불과 몽둥이를 들고 나오면 호랑이가 도망갈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집에 다 가도록 호랑이가 달려오는 소리는 나지 않았습 니다. 그래서 그는 호랑이가 정통으로 내 활을 맞고 직사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큰 백호 한 마리를 잡았다고 좋아서 밤새도록 잠도 한 숨 못자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호랑이를 잡으면 껍데기는 임금한테 바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 벌을 받습니다. 그리고 고기나 뼈는 귀한 약으로 쓰이므로 큰 횡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새벽녘에 날이 새자마자 지게를 지고 호랑이가 죽은 근처에 가서 보니 호랑이는 꼼짝 않고 있습니다. 그는 (그러면 그렇지 내 활을 네가 피했겠느냐.)하고 가까이 가 보니 화살이 꽂힌 곳은 큰 바윗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내 활 앞에는 이 세상에 감당할 놈이 없겠다고 생각하면서 활을 겨누어 다시 한번 바위를 향해 쏘아봤습니다. 그러나 화살은 튀어 나왔습니다. 다시 어제 저녁의 그 자리에 가서 활을 쏘았으나 역시 맞지 않고 튀어 나왔습니다. 이것이 역시 불가사의인데 이것도 4차원 세계의 힘이 발동된 것입니다.
5관의 힘으로 화살이 아무리 세다 해도 불가능합니다. 호랑이 뼈가 아무리 단단하더라도 내 화살이 안 들어갈 수 없다고 자신한 때문이었고 (단지는 뒤집어 놓는 것이다. 아름드리 나무도 내가 던질 수 있는 나무다.)라고 아무 생각없이 확신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마음에 아무 사심없이 한 가지로만 생각하면 이 지구도 뚫고 나갑니다. 내가 경험한 일 한가지를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전에 마산에 있을 때인데 밤중에 일어나 보니 우리 바로 앞집에 불이 났습니다. 그때는 상주 일땐데 상복을 벗어 놓고 불을 끄려고 나가니까 상주가 그런 짓 하면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그래도 나는 내가 먼저 보았으니 가야겠다고 달려가서 보니 큰집 한쪽에 불이 붙었는데 아무도 모르고 잠만 자고 있고 불은 곧 옆집으로 번지게 생겼습니다. 나는 옆 집 지붕에 얼른 올라가서 (불이야!)하고 사방에다 대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올 라선 그 집은 큰 부자집이었는데, (이 집에 멍석 있으면 올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멍석이 어찌나 컸는지 약한 사람은 지지도 못합니다. 나는 발이 썩은 닢에 미끄러질까봐 한 손으로는 붙들고 내 몸뚱이도 거기 붙어 있을 수 없는 지경인데 한 짐이나 되는 멍 석을 집어던졌습니다. 그래서 불붙는 집 건너 집에 멍석을 쭉 펴놓고 물가져 오라 해서 물을 끼얹어 불이 안붙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다 평소에는 할 수 없는 일인데, 급한 사정에 부딪쳐서 이것을 집어 던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안 된다는 생각없이 던졌 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마음이 가고 마음이 온다
우리가 천당 갔다 지옥 갔다 하고 육도 세계를 돌아다니고 윤회를 하고 그것이 다 번뇌의 업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번뇌의 잠재의식이 우리의 근본 마음 자리를 더나서 마음으로부터 독립되어 돌아 다니는 것은 아니며 본 마음자리가 한 것입니다. 그러니 죽어서 천당에 가도 그 실상 자리 자기 근본 정신이 올라간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작은 거냐 하면 바늘 가지고 짤러 볼 수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입 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없는 거면서 그 속에 우주가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또 크기롤 말하면 비행기를 타고 광속으로 몇 억만 년을 달아났다 하더라도 그게 나고 바늘로도 찌를 수 없는 그 작은 극소 안에 무한대가 들어 있고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무한한 시간을 달렸다고 해도 내내 돌아앉을 자리도 없는 거기입니다. 마치 손바닥 만한 거울에 동서 1백 리가 넘는 서울이 다 비춰 들어오듯이 그런건데 사실은 그 거 속으로 뚫고 나간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거기 동서남북이 있고 사람 왔다갔다 하고 전차가 다니고 북악산도 있고 비행기도 떠 다니고 하는 것은 눈이 속은 셈입 니다. 이런 것이 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길이 있지만은 과학으로도 불가사의한 일입니 다. 이와같이 우리가 왔다 갔다는 말도 그 거는 꿈 속에 있는 소리입니다. 지상이나 천당이나 다 공간이고 천당 있는 데가 지옥 있는 데고 극락세계 있는 사바세계 있는데고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확실히 거래가 있는것 같지만 사실은 육체도 거래를 안합니다.
내내 그 자리니까 거래할 곳이 없습니다. 사실은 거리가 있다 해도 안 되고 없다 해도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왔다갔다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게 도대체가 이게 망상이고 마음으로 생각뿐이지 사실은 그런 건 없는 것이며 형상으로 나타난 것도 그런 불가사의였고 이건 크고 저건 작다고 하지만 망상일 뿐입니다. 간장 독을 종지 안에 집어 넣는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고 미친 놈이라 할 겁니다. 몇 짐의 물이 들어 가는 독이 찻잔보다도 작은 종지 안에 어느 모퉁이 하나 남지도 않고 딱 맞게 들어가 버리는 도리가 마음 법입니다. 그러면 간장종지를 확대해서 넣어졌거나 큰 독이 축소돼서 줄어 들었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는 돼야 할겁니다. 그런데 둘 다 작고 크기 그대로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불가사의입니다. 그런데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조금 있는 것은 이 크다는 것도 거짓말로 큰것이고 작다는 것도 거짓말로 작은 것이니, 작은 것이 큰 것으로 작은 것이고 큰 것이 작은 것으로 큰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느냐하면 다 꿈이기 때문입니다. 꿈으로 크고 꿈으로 작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작은 것도 반드시 큰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크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리의 생각이지 참 말로 큰게 아니고 작다고 생각하는 간장 종지도 생각이지 실제로 작은 게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는 부처님의 신통이 나올 수 없는 것이고 이 화엄의 도리가 아니면 참말로 성불할 사람도 없고 불법을 얻을 도리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물질 자체도 진공 묘유입니다. 있긴 있으되 진공으로 있는 거고 사실로 있는 게 아니라 없는 걸로 있기 때문에 이게 묘유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여기 아무것도 없는 데라 하여 아주 없는 거냐 하면 그건 없는 걸로 없는게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게 있고 이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 있어도 거짓으로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없는 거냐 하면 또 이 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게 참말로 없는 것이지 없는 걸로 없는 그것은 없는 걸 로 있는 것이며 없는 것의 존재라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있다고 하려면 부득이 (묘유) 라고 하고 (진공묘유)의 존재라 그럽니다. 우리가 업이 달라서 안보이는 것 뿐이지 여 기도 천당이 있고 지옥도 있고 다 건립되어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대로 앉아 잠이 들면 제가끔의 꿈을 각각 꾸는 것과 같습니다. 독립만세 부를 땐 전부 묶여 들어가서 조금 기대서든지 숙직실이고 유치장이고 빽빽하게 서 있습니다. 밤낮으로 그래 가지고 잠간 자는 동안에 꿈도 꾸고 그러는데 한 사람은 서울을 차려 놓고 하는 또 부산을 건 립해 놓고 하나는 대구를, 또 다른 사람은 평양을 건립하고 모두 이렇게 제가끔 백 가 지 천 가지 꿈을 꾸어도 조금도 혼란하지 않습니다. 제각기 공간을 분리해 가지고 그렇 게 꿈을 꾸는데 그게 모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바늘로도 찌를 수 없는 그 작은 존재 안에 천당·지옥·극락세계가 다 있습니다. 그것이 큰 걸로 작은 것이므로 그렇게 되는 데 이 실상을 우리가 깨닫기 전엔 모릅니다. 우리는 실상 자리를 말로는 이렇게 하고 또 말 들을 때는 그런 것이구나 생각하지만 말 뚝 떨어지고 돌아서면 깜깜해져서 (이 것은 촛대고 저건 나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하고 현상계에 끄달리게 됩니다. 그래 서 불은 물이 아니라고 하고 불은 언제 물이 아니라고 하고 이렇게 자꾸 해오다가 처음엔 속아서 그랬지만 나중에는 진리라는 고집이 되고 법집으로 됩니다.
초로인생
초로인생 이내 목숨 만년 살 줄 믿지 마소. 앉다가도 엎어지고 서다가도 넘어지네. 빈부귀천 노소남녀 차별없이 죽어가고 북망산천 저 무덤은 크고 적고 흙이로다. 금은 보배 태산 같고 처자권속 수많아도 애착하던 이 몸조차 헌신같이 버려두고 영환 홀로 떠난 길에 뉘라서 같이 갈까 홀홀단신 슬픈 걸은 무주고혼 되었구나. 이 세상에 태어날 적에 맨주먹을 쥐고 났고 저승으로 사는 걸음 진손으로 떠나간다.
알았거나 몰랐거나 지은 죄복 남 못주고 짊어지고 가고오고 눈 어둡고 의지없이 천당지옥 사생육도 돌아설 길 아득하다. 여보시오 가는 손 님 잠시 한말 듣고 가소 꿈결 같은 우리 인생 잠시 왔다 가는 걸음 풀 끝에 이슬이요 구름 틈에 번개로다 억천만생 왔다가고 한없는 몸 바꾸어도 이 마음은 진실하여 아직 한번 변함없네 꿈이거나 깨쳤거나 산은 높고 물은 깊다. 둥글고 둥글어서 천지에 근원이요. 밝고 밝아 또 밝아서 동서만겁 통달하고 생로병사 없는 세상 자유자재 영원하다.
쾌할쾌할 일 마치고 남은 일은 중생제도 온 우주 를 살펴보니 대자연의 모든 것이 통틀어서 나 하나요 낱낱이가 부처로다. 여보시오 가는 손님 몰랐거든 생각하소. 잘되고 못되는 일 제 될 만틈 될 것이니 불평없이 인연따라 마음편히 살아가며 온갖 망상 그만두고 오나가나 자나깨나 일할 때나 노는때나 일심으로 생각하소. 이 육신을 운전하는 마음인지 영혼인지 이름 말고 무엇인고 도대체가 무엇인고 일구월심 생각하여 이 생각이 굳게 뭉쳐 앉고 설줄 몰라지고 먹고 잘줄 잊어지고 꿈에서도 이 생각만 이것이 무엇인고.
하늘땅이 이 생각만 이것이 무엇인고. 하늘땅이 한뭉치로 무엇인고 뿐이로다. 숨도 미처 쉴새 없이 일렴정성 뭉쳐지면 꿈속 꿈에 이 내 마음 깨칠 날이 가깝도다. 홀연히 깨달아서 생사꿈을 벗어나고 불법마저 초월하여 무변중생 건져주고 부처님과 다생부모 그 은혜를 다 갚으세. 구멍없는 피리부니 귀 없는 이 들어보소. 세월네월 내 모르고 흥망성쇠 꿈밖에서 좋고 궂고 맡겨두고 쾌할 태평 살아가세. 눈코귀와 이 몸까지 남을 위해 아낌없이 인간개조 선구자로 사회개선 앞장서고 국토세계 개발하여 새생활을 안정하세.
육신을 내라하면 천만겁에 생사윤회 자비하심 군면하여 극락세계 이룩하고 이 마음 개발하여 영원자유 부처되자. 이 몸 태운 향공양을 부처님께 올려보세 이것은 꿈 아닐까 꿈 깨이는 꿈이 없다. 원컨대 이 공덕이 온 세상에 두루하여 원수사랑 구별없고 지혜우치 가림없이 온 중생이 한날한시 다같이 부처되세. 또한 곡조 들어보소. 엣기하는 이 한소리 하늘땅이 간곳 없고 무변허공 폭파로다 다시금 생각하니 또한 곡조 남았구나 마음에 일이없고 만사에 뜻없으니. 세계는 원래로 태평하고 인생은 자고로 안락하다. 쿵닐닐 쿵닐닐 얼시구 좋구나 청산은 대지에 솟아 있고 백운은 허공에 오락가락 봄이오니 꽃피고 새가 울고 달 밝고 깊은 밤에 강산마저 고요하다. 선웃음 한소리에 천지는 깜짝실색 엣끼.
죄와 악
몸으로 세 가지 죄 첫째는 살생 악하다고 잡아먹고 만만타고 때렸으니 세세생생 명짜르고 가진 병신 온갖 잔병.
둘째는 도적 일 앉고서 먹고 틈틈이 도적질로 나의 피땀 훔쳐먹고 개소되어 빚갚는다.
셋째는 간음 오입 버릇되어 아들딸도 다 버리고 패가망국 원흉으로 세세생생 가정불화.
입으로 네 가지 죄 첫째는 거짓말 거짓말로 남을 속여 사기협잡 일삼는다. 의지할 곳 없게 되고 세세생생 신용없다. 이 내 신세 고달픔이 이 어찌 남의 일인가.
둘째는 속임수 사기협잡 갖은 수단 온 세상을 망쳐먹고 악도에 떨어져서 가 진 고초 다 받고 제 슬피우는 귀곡소리 가엾고 불쌍하다.
셋째는 악담 농삼아 하던 일이 악담욕설 버룻되어 싸움패로 품을 팔아 피투성이 일삼으니 세상 사람 다 싫다고 인간대우 못받는다.
넷째는 이간질 시기질투 음해작과 남의 사이 이간질로 사람오장 다 태우니 간 곳마다 난리로다. 죽어서 갈 곳이란 천만겁에 지옥살이.
마음으로 세 가지 죄 첫째는 탐욕심 보는 대로 욕심내어 한없는 탐욕으로 불타 는 정역질투 사회가정 파산된다. 타는 욕심 끝없나니 분수없이 넘지 말자.
둘째 는 복수심 흥망성쇠 돌고도니 권리세력 남용마오. 골을 내면 돌차기로 자손까지 앙화로다. 검정으로 흐르는 일 바로 된 것 누가 봤나.
셋째는 어둔 맘 마음밖에 진리 찾아 삿된 짓은 다 하누나 과학철학 종교하며 음양조화 운수 믿어 갖는 요망 다 부려도 그 운명은 못고친다.
세상만사 그 모두가 내 마음이 저질러서 원인결과 정했건만 그 근원을 모르고서 지엽에서 허덕인들 그 은명을 고칠소냐. 차라리 한 생각을 착실하게 돌이켜서 음양조화 무극태극 그 바깥에 뛰어나서 온 우주에 주인공이 됨만 같지 못하리라. 몸과 입과 마음까지 세 자기의 죄업으로 주책없이 움직여서 열가지 죄 저질렀다. 몰랐으니 지었지만 열 가지의 그 죄악을 하나하나 남김없이 뿌리뽑아 참회하고 깨끗이 목욕하고 부처님전 소향합장 수없이 예배하며 팔과 몸을 향사르어 남김없이 참회하고 또다시 맹세하여 모든 죄악 범치 말고 착한 공덕 다 닦으세.
죄악되는 열 가지는 이미 들어 알았으니 열 가지의 착한 공덕 부지런히 고루 닦세. 복과 지혜 구비하게 금생일생 잘 닦으면 내생부터 세세생생명도 길도 복도 많고 효자열녀 아들딸도 애국애족 충성 으로 인간오복 고루 타고 온 세상이 부러워한다. 일문권속 정법 믿어 불법천하 이룩하고 온 세상의 사람들이 한날한시 부처되세.
공과 덕
첫째 대자대비 넓고 깊은 자비은혜 끝없이 베풀어서 원수들을 도와주고 악마들을 제도하자. 죽어가는 목숨살려 원한을 풀어주고 산 목숨을 사랑하여 풀 한포기 밟지 마세. 남의 목숨 죽인죄로 오사급사 단명한다.
둘째 근로봉사 앉지 말고 끈기 있게 부지런히 노력하여 내 힘으로 내 벌어서 없는 사람 살려주고 피 땀으로 정성 내 모아서 다생 빚을 청산하자 앉고 먹고 편히 살면 남의 노력 도적이요. 앉고 먹은 그 죄악은 세세생생 빈천하니 차라리 굶어죽고 공벗는 덕 입지 마오.
셋째 정조청정 일편단심 이 내 마음 정조가져 고귀한 덕 청천에 백원 같고 진흙속에 백옥 같이 정조와 신의 지켜 부부간에 서로 믿고 가정화합 만사성취 백년해로 의지하자. 고래로 전해온 말 부부끼리 화합하면 국가에 충성하며 효자열녀 절로난다. 제행정조 지닌 공덕 그 얼굴이 미묘단정 부정한 인과로는 추한 얼굴 병골신세.
넷째 정직하자 정의 앞에 이 몸 바쳐 만고에 빛이 되고 세상을 구원한 덕 세세생생 행복하다. 정직하면 위덕 있다. 덕있는 이 한말 하면 온 천하에 법이 되며 온갖 사람 다 믿는다. 말 한마디 거짓되어 신용 한번 잃고 나면 돈 세상이 믿지 않아 일일이 낭패된다. 남 속인 죄악으로 세세생생 버림받고 간 곳마다 고독신세 한탄한들 무엇하리.
다섯째 진실하자. 남 속여 모은 재산 일시잠깐 보관되나 끝내 잘된 예가 없고 자손만대 앙화로다. 듣기 좋게 발라 맞쳐 남 못살게 속인 죄로 모진 병에 죽어가면 발설지옥 고통이다.
여섯째 점잖하자 한치되는 이 입으로 일생신세 죄우한다. 성현들의 경계말씀 가슴속에 깊이 새겨 자비롭게 일러주고 원만히 해결하면 온 천하의 남녀노소 한 가족이 되고 만다. 악담패설 하는 사람 온 세상이 원수되어 간 곳마다 불평이고 시시때때 싸움이다. 악담패설 지은 죄는 세세생생 병신험상.
일곱째 공경하자 만물 중에 영장으로 인간세상 행복함은 서로가 공경하며 화합으로 이루었다. 공자님의 인의예지 공경이 근본이요. 예수님의 박애정신 사랑의 근본이요. 석여래 대자대비 하심이 근본이라 낙원행복 바라거던 하심공경 힘써 닦자.
여덟째 보시적선 한방울의 물이라도 내 덕을 베풀망정 털끝만한 신세라도 공없이는 받지 말자. 보시적선 주인공은 간 곳마다 환영이요. 의식주에 부족없이 세세생생 호강이다. 복은 지어 나눠먹고 죄는 지어 남 못준다. 힘껏 노력 벌어서 소원따라 나눠주자. 흩어주면 모여들고 감춰두면 가난 든다. 탐내고 아낀 죄로 죽어서 아귀되고 세세생생 추한 얼굴 그 무엇 때문일까.
아홉째 인욕하자. 허망한 세상일에 제가 속아 된골 내면 십년감수 경계말씀 옛적부터 일러왔다. 이 세상에 모든 일이 내 마음의 그림자다. 제 그림자 미워하니 제 골 내여 돌차기다. 성공은 참는 공덕 한번 참아 내 몸 안락 두 번 참아 가족 행복 세 번 참아 천하태평 내가 참고 네 가 참아 온 세상이 참다보면 사바세계 극락으로 참고참아 이뤄진다. 부처님의 그 성상도 참는 공이 이루었으니 육도만행 가운데서 인욕공부 제 일된다. 무진장의 공덕문이 참는 것이 열쇠로다.
열째 정신차려 흩어진 맘 거두고서 온갖 생 각 다 버리고 정신차려 눈뜨고서 올바르게 살펴보라. 산이 높고 물 깊은줄 잘도 아는 이 맘자리 이 자리를 깨고 보라. 혼연일체 본래면목 마음밖에 천지밖에 마음 없이 이름 없고 모양없어 모든 흔적 끊어졌다. 무량무수 저 부처님 이 도리를 깨치시고 천지를 두루 알며 임의대로 자유자재 범부중생 슬퍼하사 간절하게 일렀건만 꿈속 꿈에 꾸는 미혹한 저중생들 아득하고 아득하여 돌아갈 줄 모르도다. 마음밖에 진리 찾고 마음밖에부처 찾고 마음밖에 신을 섬겨 과학이니 종교까지 만들어서 이라저리 얽매어니 꿈깰 날이 기약없다. 이 육신은 허망하고 주관객관 거짓이라 이것저것 할것없고 너와 내가 따로 없다. 통틀어서 마음이며 마음마저 아니로다 깨달으면 본래 주인 모르면 종이로다. 제 좋아서 종질하며 고독불만 설워 말라 고와 낙은 정한 인과 인연 좇아 살아가라. 일심으로 공부하여 한눈 깜짝 한 동안에 깨고 보면 변함없이 범부 그냥 부처로다. 제 법신앙 잃은 과보 세세생생 미신사도 잡신사도 권속되어 애닯고도 불쌍하다.
도산사의 밤숲을 거닐면서
깊은 밤 승려들을 바람과 적요를 만난다. 그것들은 길을 건너고 나무숲을 헤치면서 풍경소가 뎅그렁뎅그렁 울리는 산간의 사원을 찾아온다. 승려들은 바람 소리를 본다. 바람은 기체이다. 그러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데도 본다고 하는 것은 보는 것이 눈이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나뭇잎이 흔 들리는 것을 보고 하늘이 푸른 것을 보고 노을의 아름다움을 보고 적요의 쓸쓸 함을 보고 그것들 속에 내재한 만상의 이치를 본다.
승려들이, 아니 사유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시간을 이러한 밤으로 택하는 이유는 밤에 가장 조용하게 그 모든 것들과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의 밤을 나는 찾아 갔던가! 검은 이파리 사이에서, 냇물가에서 의문들은 머리를 들고 일어서고, 그 것들은 마치 도금한 놋그릇돌처럼 반짝이면서 나의 가슴에 되부딪친다. 무수한 파장이 일어난다. 물결은 왜 아래로 흘러가며, 나뭇잎은 왜 한없이 석석이는 것 일까? 왜 나는 그 소리들은 따라 걷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알자는 것일까? 안다는 것이란 또 무엇일까? 물결은 왜 이리 아리로 흘러가며, 나뭇잎은 왜 이 한 없이 석석이는 것일까? 왜 나는 그 소리들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알 자는 것일까? 안다는 것이란 또 무엇일까?
물결이 흐르는 것은 땅이 경사졌기 때문에 흐르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은 바람에 밀리기 때문에 흔들릴 것이다. 마음이 있어서 흐르고, 흔들리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밤에 밖에 나와 보면 그런 평면적인 대답이 무미건조하고 그 너머에 그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같다. 그것이 무엇일까? 조주스님은 이럴 때 무어라고 대답하셨을까? 여전히 무라고 대답하셨을 까?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스님이 무라고 대답하셨을 때에는 다만 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무라는 말로 인해서 얻어질, 보다 크고 절대한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었일까? 뒷날 대승들은 그것이 일체를 열어주는 열쇠라고 했고, 일체를 쓸어버리는 쇠빗자루라고도 했고, 나귀를 매어 두는 말뚝이라고 했다.
여기에 모든 정진하는 승려들의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조주스님의 무는 각자의 길로서 보는 수밖에 없다. 조주스님의 무의 그 의지들은 조주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할지언정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제승들은 조주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할지언정 무자에 떨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무자화두에는 좋은 비유가 하나 있으니 나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보여주리라. 옛날 양귀비가 궁성으로 갔을 때 그는 그의 애인을 궁성 아랫 집에 살게 하고 매일 (소옥아 소옥아)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시종의 이름을 불러댔었다. 그렇게라도 하여 그의 음성을 애인에게 들려주는 의도에서였다. 다시 말하면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애인에게 전달하려는 데에 있었다.
이와 같이 무자화두는 무자에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자를 통해서 얻어질 그 무엇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째서 조주스님은 무라고 했는가. 그리고 뒷날의 대승들은 어째서 그것 을 일체 명근을 끊어버리는 칼날이라고 했는가를 의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들은 밀고 나아가면 그 끝에거 잡상들이 피어오를 것이다. 그 잡상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을 버려둬야 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그 의문 하나만을 간절히 일으키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의문이 끊어지지 않도록 이어주면서 오래 나아가기만 한다면 그대들은 견성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견성이란 무 었인가? 자기의 본성을 보는 것이다. 본성이란 그러면 또 무엇인가?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자기의 본체, 즉 만물의 근원에 자리한 불이다. 어떤 처사는 그 불을 구하여 일생을 보낸 끝에 어느 한 대승을 만나 이야기했었다. (이대로 시주만을 얻어먹고 도를 얻지 못하면 죽어서 소밖에 될 것이 있겠소?) 이 때 대승 의 말, (소가 되어라도 무비공만 되면 좋지) 무비공이라는 그 말에 순간 처사는 대오하고 끓어 엎드리었다.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무비공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있어지는 세계였다. 그러나 그 대사와 처사가 간지 수백년이 지 난 뒤의 한 작은 암자에서 전가선사는 의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무비공이라는 말에는 없다라는 허물이 있고 미각시아가라는 말엔 깨닫다라는 허물이 있으니 그런 허물을 가지고 어찌 제 9암마리식을 건너갈 수 있을끼? 건너간다라 는 말엔 건너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구문상으로 불가피하게 존재하여야 하는 것 이지만 해탈이 있어서는 그것이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해탈을 그르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수한 승려들 은 이렇게 의문에 의문을 넘어간다. 가령 나만 하더라도 일찍이 견성의 미미한 그림자를 보았을 때 세상에 내어던진 소리,
만상의 나무들이 누렇게 시드는데 벼랑 위에 오직 한 나무 싱싱하게 푸르러 있더라
오늘 나는 도선사의 나무숲을 헤치고 가면서 그 계송에 의문을 던진다. 어떻게 잎사귀가 시들고 홀로 푸르다는 흔적을 남기고 지혜의 바다를 건너갈 수 있을까?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아직도 미망의 그림자를 벗어버리지 못했다는 것이 아닐까. 마치 바람처럼 마치 달빛처럼,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 있고, 어떠한 그릇에도, 어떠한 시간에도 자유자재로 담길 수 있는 것이 대오가 아닐까? 그러 한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표현할 수도 없는 시늉할 수도 없는 것이라 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그럴 것이다. 그래서 효봉종사꼐서는 입멸하시면서 수 많은
불자들이 송을 바랐을 때,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것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다면 달빛이 천강에 비추리 라고 했던 것이다.
효봉이 모든 것을 군더더기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속에 서 말로 표현된 모든 것이 군더더기란 뜻보다는 그 분의 생애에서 모든 것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법기암 토굴에서의 결사적인 정진 끝에 오도한 이후로 그 분은 한국불교의 통합과 불교의 전파를 위해서 몸을 바쳤고, 그리하여 그 분은 63년 4월 11일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개인의 길에서 종정이라든가 전파는 저추장스런 것에 지 나지 않는다. 개인의 길에서는 언제난 정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함께 세상을 태어났다는 인연 때문에 사해대중들을 깨우치치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아니다. 이렇게 말할 것이 아니다. 차라리 불교는 사해대중의 구제에 더 큰 뜻이 있을지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득도를 한 다음 우베라촌에 서 내려왔고 의상 또한 고국 신라로 돌아왔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그들이 왜 내려왔는가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누구에게로 돌아왔는가?
그의 나라로, 그의 형제들의 곁으로 온 것이다. 우리가 이곳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어떤 사실 앞에서도 우선하는 일이다. 우리들은 한국인이다. 많은 한국인의 구제가 오늘의 한국 불교의 명제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기 애국론을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교육의 목표는 단순히 애국자를 배출한다거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아니며 또 대중들을 천당 으로 인도하는데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죄악과 번뇌와 고통 속에 잠긴 인간을 참 인간이게 하는 것, 그들로 하여금 죄악과 번뇌를 버리고 진정한 안락을 누리게 하도록 하는 것, 지혜롭게 하는 것, 자비로은 협조자이게 하는 것, 그것 이 불교의 참 뜻인 것이다.
그것을 원효는 오직 (자리와 타리를 염원하고 보리, 즉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는 인간의 모든 지식이 필요하다. 아니 오히려 붓다가 그러했듯이 그러한 모든 지식은 궁극적인 이해의 진리와 체현에 필수불가결의 기초지식이기도 한다. 이렇나 불료의 대명제 앞에서 한국불교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매일의 신문들이 활자화하고 있듯이 내분, 탈퇴, 불만, 파문, 반대 타락의 일변도가 아닌가? 이러한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는 책임이 다른 파에 있고 나에게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이유가 있다면 그들에게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책임은 양자에게 다같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따진다거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불교가 대중을 구제하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싶을 뿐이다. 이것이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나의 (유신 재거론)이라는 것이 되겠지만 나는 굳이 유신이라는 말로서 그것을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그 말을 너무나도 세상을 떠 들썩하게 했기 때문이다.
나의 유심론
내가 내세운 세 가지 큰 항목 중의 하나인 불경 한글 번역은 나의 주장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용성대사의 큰 뜻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경번역사업은 일찍이 대사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불경은 승려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차라리 더 많은 대중들의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은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한글 세대들이 계속 자라나고 있기 때문에 불경 번역은 한국 불교의 가장 시급한 최대사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경 번역과 더불어 또다시 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일은 불료의 대중화 내지 불교의 현실화 운동이다.
사람들이 한가로운 때, 신심이 두터운 때에는 사찰이 산간에 있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사람들이 분주하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믿음이라는 것을 가지기에 어려운 시대에서는 신자와 승려들의 대화와 이해소통으로 그 갭을 메꾸어야 한다. 사람들은 시달리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먹고 출근하고 많은 일과 사교에 시달리고 그리고 저녁이면 솜같이 지쳐서 집으로 돌아간다. 밥을 먹고 잠에 떨어진다.
다음날도 같은 일이 되풀이 된다. 사찰을 찾을 만한 시간이 없는 것. 불교가 그들을 찾아가야 한단 말인가는 다음 문제가 따라온다. 어떻게 대중들을 찾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승려들의 교육문제와 연관된다. 이제는 극락이라든가 기이한 선문답으로 대중들을 거느릴 수 없다. 그러기에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너무나 영악하다. 그들은 환상이라든가 가상적 세계의 약속을 뿌리칠 수 있도록 충분히 영리하다.
그렇기 때문이 승려들은 그들과 정식으로 만나는 수밖에 없다. 정연한 논리로서 보리의 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나로서 이 세 가지 문제는 파벌이라든가 이해타산을 넘어서서 공감할 수 있고 공감으로써 실 현시킬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랬는데 어떻게 그런 결과가 빚어질 수 있었단 말인가. 내가 제의한 모든 안건은 깡그리 부결되고 말았었고 그리하여 나는 며칠을 번민한 끝에 탈퇴 성명을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각계의 지인들은 거기서 나의 경솔성을 지적하고 돌이켜 생각하라고 권유했었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런 식으로 한국 불교의 내일을 바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이 글을 쓰는 지금은 그 탈퇴가 오히려 한국 불교를 제자리로 옮겨놓는 경첩이 되고 말았지만, 탈퇴라는 너무오 소란스러운 사건으로까지 치달리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때의 나의 심경엔 많은 앙금을 남기고 말았다. 그 앙금은 지금도 조용한 시간이면 나를 찾아온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고즈적한 밤에 문을 열고 나가 나무 숲 사이로, 냇물가로 거니는 것이리라. 도선사의 마지막 층계를 밟고 내려가면 밤나무숲에서는 물큰한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그리고 10월의 독특한 산 냉기와 달빛의 매끈매끈한 감촉이 나를 휩싼다. 그 냉기가 좋다.
그리고 달빛이 좋다. 때때로 나는 밤숲을 거닐면서 (좋다 좋다)라는 말을 무심하게 입밖으로 흘러낼 때가 있는데, 냇물을 따라 흘러내려 가고 있는 한 이파리 단풍을 주워들고 그 앙상히 드러난 엽맥을 보고 있을 때, 이슬 내린 바위에 않아 잠들어 조용해진 시내로 뻗어내린 신작로를 보고 있을 때, 그 말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소리내지 않으면 안되는 성질의 것처럼 보인다. 나는 밤의 산길을 좋아한다. 길들은 끝이 없이 흘러간다. 그리고 냇물도 끝없이 흘러간다. 왜 흘러가는 것일까. 냇물은 지면이 낮기 때문에 흘러내리고 길들은 사람들의 발자국의 때가 묻어서 흘러내릴 것이다. 그 자체의 의지로써 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달빛 아래 보고 있으면 그것은 한 의지처럼 보인다. 마치도 도라든가 보리라는 말이 그 자체로서도 품격을 지니고 있는 듯이 생각되기에. 달빛 속에는 사해대중의 아픔이 보이지 않은 밀도로서 들어차 있다. 그래 서 대승들은 그 달빛 속으로 나아가 정진하는 것이리라. 중 일연의 기록에는 광덕은 밤마다 달빛 위에 떠올라 정진하였고 현수도 달빛 속에서 그의 선을 맞아 들였었다. 기록만이 아니다. 사실에 있어서도 달빛은 승려들의 정진과 깊은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 대승들의 모든 게송 속에는 한두 마디 달빛의 이야기가 들 어가 있다.
아니 달빛만이 아니다. 저녁 노을이라든가 새벽의 써득써득한 빛깔은 승려들의 너무도 사랑하는 실체이다. 아침 다섯시가 되면 승려들은 눈을 뜨고 일어나 대빗자루를 들고 절 뜰을 한바퀴 쓸고 구석구석에서 진희색의 냄새가 풍기는 법당의 문을 밀고 들어간다. 아침 염불을 왼다. 법당문을 열고 나올 때 는 벌써 건너 산 위로 붉고 미숙한 햇빛이 뜨고, 나오던 승려들의 손은 합장하여 지고 허리는 겸손하게 구부러진다.
절간을 둘러싼 대숲에서 바람에 이파리가 흔들리는 소리, 풍경이 흔들리는 소리, 이 아침의 소리들은 너무나도 미세하고 신경질적이다. 마치 신라인들의 귀금속품과 같다. 그렇게 긴 아침이 서서히 사라지고 난 뒤, 사능로 빼꼭이 둘러싸인 산간에는 저녁이 줄달음질치듯이 뒤따라 온다. 더욱이 가을과 겨울에는 아침과 저녁이 거의 일직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만산은 종일 붉은 노을에 잠겨 있는 듯하다. 아아, 승려들은 그 시간을 사랑하다. 더욱이나 그런 시간의 벼랑에서 또는 토굴에서 정진하고 있는 사 람들은 그 노을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온 몸으로 토해낸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윽고 그 달빛과 노을과 일출 위로 떠올라온다.
그런 다음 그들의 허적허적한 발길은 토굴을 빠져나 세상으로 향하여진다. 법설이 시작되는 것이다. 또다시 나는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다. 그래서 머릿글을 빨리 끝내야겠다. 길을 보고 있을 때 사람들은 걸어왔다는 사실과 그리고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오늘밤 나에게도 그러한 사람들의 상습적인 사고는 되풀이 일고 있다. 나의 반생은 어떤 일을 하면서 걸어왔던가. 그리고 어떻게 앞으로 걸어가야 할 것인가. 서구의 어는 시인은 (모든 연대기적인 사건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것이 어떻게 그의 정신의 성장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는 사실만이 중요 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은 불교적인 어투로 번역하자면 그의 본성을 어떻게 찾아가고 있던가라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수도기가 될 것이다. 나는 다음 글이 수도기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을 바라기에는 한 사람의 삶 속에는 너무나 너저분한 사건들이 가득 차 있고 우연이 걸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건들 속에서 내가 염원한 나의 유신재건이라는 커다란 명제를 볼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그것이 어떻게 싹트고 어떻게 커 나왔던가를. 그럴 수만 있 다면 그것은 써걱써걱한 관념이 아니고 싱싱한 삶이며 웅변이 아니고 사실이며 허위가 아니고 실체일 것이다. 그렇기만 한다면 그것은 진짜일 것. 그러면 대중들이여! 우리는 이제 저 기릉을 따라 내려가 보자. 과거를 만나러 가자.
글방의 부엉이
(부엉이 부엉이, 부엉이야, 부엉아, 무엇을 보고 있니? 엉큼한 눈으로..)라고 그가 글방의 마당에서, 짚더미 옆에서, 무화과나무 그늘에서, 또 강 언덕에서, 알지 못할 상녕에 잠겨 걷고 있을 때, 생각하고 있을 때, 동무들은 뒤따르고 그 를 놀려댔다. 어떤 때에는 옆구리를 찌르고 어떤 때에는 돌멩이질을 했다. 그러나 순진하고 어리석은 소년이었던 그는 그 놀림이 귀찮고 굴욕스럽기는 했으나 그들과 어울려 싸운다거나 대항하여 이기고 싶을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그런 동무들로부터 떨어져 언제나 조용하고 명상적인 분위기에 잠겨 있고 싶었다.
부모들의 권유로 그는 진주 남강가의 봉연제라는 한문서숙에서(하늘천 따지 검을 현 누를황)이라는 어음만이 들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종종 눈을 멈추고 그 소리를 듣기를 즐겨하였다. 그때마다 스승의 담뱃대가 그의 머리 위로 날 아왔다. (이놈아, 그렇게 정신을 팔고 있으니 성적이 떨어지지)이런 꾸중이 들어왔다. 그는 담뱃대가 머리에 맞는 아픔보다도 (정신을 팔다니 그게 무슨 말일 까? 정신을 팔 수도 있는 것일까?)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의 생각은 언제나 배우는 그것 보다도 그 주변에 그 둘레에 더 많이 머물러 있었고, 그랬으므로 성적은 더욱더 떨어져갔다. 성적이 떨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결과 가 왔을지도 모른다.
그날 담뱃대와 퀴퀴한 냄새가 들아차 있는 서숙의 분위기 보다는 쉬는 시란이면 나와 노는 마당의 모든 것이 좋았다. 그것들을 사랑하였다. 햇빛이 내려 비추면 백색으로 반짝이는 마당, 그 둘레에 심어져 있는 사철 나무의 흔들리는 잎사귀들, 그리고 보이지 않게 일체를 흔들고 가는 바람을. 그 는 마당가의 볏짚에 작은 몸들 기대고 서서 무심한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보았다. 지붕위로 흘러내리는 햇빛도 보고 하늘도 보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흘렀다. 찬란히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에는 구름이 삽시간 어머니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 들어오고 있었다.
코끼리 모양으로, 젖먹이는 어머니 모양으로, 산 모양으로, 바다 모양으로, 물긷고 가는 아낙네의 모양으로, 그리고 염소 모양으로, 토끼 모양으로. 그토록 자유자재로 변하는 구름 모양에서 그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수만 가지로 변화하는 생의 무상이었을까. 아니면 다만 흐르고 변한다는 구름의 형용이었을까. 어렸을 때의 일을 세세하게 생각해 낼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어쩌면 그는 그때의 구름의 변용에서 일종의 소년다운 감상적인 비애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비애는 장차의 그를 만드는 정서적인 원천을 이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의 모든 장점을 우리가 오늘 들추어 추겨세워준다고 할지라도 그 무렵의 그는 분명히 훌륭한 소년은 아니었다. 훌륭한 사람으로서의 자질이 보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스승은 종종 공부는 못해도 순량한 놈이라고 했고 동무들은 부엉이 부엉이 하고 놀리면서도 좋은 놈이라고 칭찬하기를 잊지 않았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조용한 그늘이 아들의 얼굴에 흐르는 것을 보고 그는 틀림없이 장차 현자가 될 것이라 고 내심으로 기뻐하였고, 그의 어머니도 아들의 걸음걸이에서, 말씨에서, 행동 거지에서 예절 바르며 친절한 성미를 찾아내고 그 무엇에도 비견할 수 없는 사 랑을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부모들의 사랑은 그 누구나 맛보고 자라나는 성질의 것일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사랑으로부터 늘 벗어나려고 반항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삼강오륜이라는 유교의 굴레이 꽉 얽매어 있었던 그 때의 아이들은 그 반항심이라는 것을 켤코 나타낼 수는 없었다.
그것을 보였다가는 당장 불효라는 낙인이 찍히고 마을에서 소문난 문제 아이가 되기 때문이다. 어느 면에서는 몹시도 기민했다고 할 수 있는 그는 켤코 반항하지 않았다. 불편한 대로 부모들의 사랑과 기대를 등에 지고 매일 매일 아무런 재미도 없는 몽련제로 가는 것이었다.
하늘천 따지를 읽기 위해서. 그날도 그렇게 책을 읽고 쉬는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왔었다. 볏집에 기대어 구름을 보고 있었다. 이백의 초산진산계 백운백운 처처장수군을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17세라는 성숙기에 이르렀던 그에게 그때 임이라는 영상 은 이미 깃들어 있었고, 임이라는 영상의 깃들었다면 구름에 그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가 무엇인가를 열중하고 있었을 때 였다. 한 친구가 (부엉이 부엉이, 부엉이야 부엉이)하고 너무나도 큰 소리로 그의 고막을 울리면서 그의 왼팔을 잡아당겼다.
그는 쓰러졌고 일어섰을 때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분노가 전신에서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그는 친구에게 대들었다. 몇번이고 넘어졌다가 일어섰다. 나중에는 손에 잡히는 대로 돌을, 부지깽이를, 삽자루를 집어던졌다. 싸움이 끝났을 때는 장독대의 항아리가 부서지고 창문이 깨어져 마당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선생은 노발대발했다. (이놈 고약한 놈 같으니라구. 설사 서우가 잘못했다선지어라도 깨우쳐 이해시켜 쥐야지 그 렇게 원수처럼 대드는 법이 어디 있는냐. 우리 서숙에서는 너 같은 독종은 필요 없으니 나가) 그는 선생의 말이 떨어지는 즉시로 책보를 싸들고 나왔다. 걸음이 덜덜 떨렸다. 어버지와 어머니가 몇번이고 그에게 (그것은 선생의 잠시로 화풀이니 다시 나가)고 사정했으니 완강히 거절하였다. 어버지는 할 수 없이 그 렇다면 하고 그를 진주 제일보통하교에 입학시켜 주었다.
이상한 이야기 같지만 소년기에는 엉뚱하게 변모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예민한 소년들 일수록 일어날 가능성이 많다. 나에게도 그 변모가 왔었다. 보통학교 학생이 되면서부터 나는 어리석은 아이의 틀에서 벗어나 무엇에나 앞장서려고 했고 그 무엇에나 지지 않으려고 바둥거렸다. 그렇게 서너 달을 하고 나니 나의 성적은 빼어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학년에는 1,2등을 다투기 시작하였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언제나 우쭐거리는 법이다. 나는 공부 못하는 아이들, 어수룩한 아이들을 놀려 먹기 시작하였고 겨울이면 그런 애들을 찾아가 눈덩이를 옷속에 집어넣고 도망갔다. 아이들은 내 뒤를 따라왔고 그 대열은 그리하여 너무도 자연스럽게 달음질 경주가 되는 것이었다.
그때의 남강에는 뱀들이 득실거렸다. 그래서 아이들은 헤엄질이나 고기잡이를 그들끼리 가지 못하고 언제나 나를 앞장 세웠다. 나는 뱀들을 숭숭 붙잡아 뚝 너머로 집어던졌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와아 하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물방울이 강물 위로 뛰어오르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그때 누구나 없이 일인 교사의 말씨와 동작을 사랑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담배만 피우고 앉아 맹자왈을 가르치는 서숙의 늙은 선생보다 그 일인 교사 에게서는 신선하고 향긋한 무어라고 했으면 좋을까 사람을 달게 끌어들이는 일면이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나 새겨들었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이나 모방하려고 애썼다. 선생은 나를 좋아했었던 듯하다.
선생 은 학생들에게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그것을 대답해 내지 못하면, (이순성,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하고 목을 나에게로 향하여 돌리는 것이었다. 나는 서슴없이 일어나, (겨울에 독이 깨어지는 것은 독에거 물이 얼어 그 부피가 커지기 때문입니다. 나뭇잎이 푸른 것은 나뭇잎 속에 있는 엽록소가 푸르기 때문입 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선생은 (좋아 좋아)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자리에 앉았다 모든 급우들의 시선이 나에게 몰리는 듯한 느낌을 가지면서 한편으로는 무심한 듯이 눈길을 창밖으로 돌리었다. 창밖은 언제나 햇볕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마치 소년들이 무한한 꿈처럼 운동장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고 우리들의 꿈은 무한하게 그 밖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꿈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붙어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창창하게 타고 있을 때, 우리들에게는 그 꿈의 실체인 사실이라는 것이 찾아오는 것 같다. 그리하여 그때 나에게도 그 꿈의 형체일 수 있는 사랑이라는 것이 찾아왔던 것 같다.
너무나 놀랍던 마음이란 말
나는 어느날 서장대의 기슭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목이 탔다. 기슭 아래 자리잡고 있는 호국사를 찾아가 물울 얻어 마셨다. 한참 꿀꺽꿀꺽 마시고 있는 데, 한 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더니 이렇게 물었다. (왜 사람은 물을 마셔야 하느냐?) 나는 미처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떠올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찬 줄 아느냐?)(마음이 뜨겁다고 생각하고 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만약에 우리가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차다는 관념을 털어버릴 수만 있다면 그것은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저 돌멩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듯이 우리를 주관하고 있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인 것이다. 육체가 나라고 자각할 때 사람들은 의식주를 필요로 하게 되고 그 끝에서 그는 죽음의 허무한 허울을 보게 된다. 그러나 마음에서 나를 발견할때 우리는 생사를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불타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오욕을 벗어 버리고 마음을 찾는 일 인 것이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너무도 뜻밖에 들은 그 마음을 설법 하여 주신 분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하시고 온 박포명스님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은 뒤로부터 마음이란 말에 중치가 막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벙어리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가 토요일만 되면 다시 호국사로 그 마음을 들으러 갔었다. 갈수록 미로와 같은 세계였다. 인간의 실체란 미도 추도 아니며 고도 낙도 아니다 다만 공일 뿐이다. 그 공속에서 보는 나만이 영원한 것이다. 세존께서는 그 공을 만나려고 집과 식구들 곁을 떠나 우루베라촌으로 들어가셨다. (그러니 승려들아, 너희들도 집을 떠나 산으로 가라, 가서 여러분의 공을 만나라)그의 설법이 어떻게나 독특하고 황당무계한 것이었던지 나는 그 앞에서 언제나 올빼미 같이 눈을 뜨고 그의 입만 보고 있었다.
유난히 큰 그의 입에서는 사바세계의 소년으로서는 매정스럽고 잔인한 것 같지만 소리가 거침없이 튀어나왔고 넘쳐 흘렀다. 나는 그의 말의 무서움에 오돌오돌 떨면서도 떠나라 떠나라는 말이 어쩌면 그렇게도 아름답고 쓸쓸할까 하고 생각하면서 그 떠남을 실행에 옮기려고 마음의 준비를 다져가고 있었다. 드디어 초가을의 어느날 나는 떠났다. 합천 해인사까지 이틀을 걸어갔다. 일주문을 지나 법당으로 들어갔다. 불상 앞에서 꿇어 앉았다. 우람찬 자세로 앉아있는 불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은 소리가 계곡의 돌자갈을 스치고 흐르는 여울물처럼 흐르고 있는 것 같았고, 그러한 불타의 목소리 속에서도 승려로서의 나의 내일을 기약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곳 승려들은 나를 학생이라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다. 나는 다시 이틀을 굶고, 진주가 20여리 쯤 남은 고개에서 지나가는 마차에 실린 자전거를 빌어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마차는 마침 쌀을 싣고 우리 정미소로 가는 것이었고, 아버지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부탁 한번으로 빌릴 수 있었다. 1차의 출가에서 실패한 나는 부모님들의 눈치를 조심조심 살피면서 다시 떠날 기회를 노렸다. 집을 빈 이틀 사이에서는 집에서는 소동이 났었던 모양이다. 유교사상이 깊이 물들어 있는 부모들로서는 거렁뱅이나 되는 중을 그의 아들이 됐다는 일을 용납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독자인 내가 대를 이을 생각을 않고 인연을 끊겠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무렵 나는 벌써 그 인연의 끈이 얼마나 가늘고 허무한 것이가를 알고 있었고 가늘고도 질긴 그 줄을 끊어버리는 일이 대오로 행진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지름길이라고 확신히 믿고 있었다. 나와 백년해로를 하겠다고 온 아내에게만이 그지없이 죄스러웠다. 그의 젊은 나이를 내가 떠난다면 그는 홀로 보낼 것이다. 그 때의 도덕률로서 남편이 떠났다고 하여 재가한다는 것은 허락될 수 없었으며, 그래서 그녀는 더욱 떠나간 남편을 생각하며 수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 추단은 사실로서 맞아 떨어졌다.
딸이 하나, 그 뒤에 태어났었다고는 하지만 딸하나를 보고 그가 그 많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고, 나와의 추억과 그리고 그의 부덕이 그 많은 밤을 홀로 보낼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 무렵 그 여자는 내가 그 의 곁을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일까를 불안하게 떠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의 그런 불안, 기다림 때문에 어쩌면 나는 더 빨리 떠나려고 하였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폭풍전의 바다가 어둡고 지겹듯이 기다리는 그 시간이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서는 벅찬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이 오고 나뭇잎이 땅에 떨어져 흙에 묻힌 날 길을 재촉하였다. 사흘을 걸어가니까 백양사로 가는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의 탑리고개에는 보기에도 성근 눈이 내려 덮이고 있었다. 전라도의 눈은 몹시도 크고 가볍게 내리는 것 같다. 나뭇가지에, 풀숲에 내려 앉아 있는 눈색은 마치 내가 찾아가려고 하는 서방정토의 진경인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 눈을 밟으며 다시 더 이틀을 걸어가니 드디어 백양사의 운문암이 나타났다. 다리를 건너가 만공스님을 찾으니, 스님은 서울로 올라가시고 스님이 올때까지는 그 누구도 입문시키지 말라는 엄명이 내려져 있었다. 닷새를 걸어왔다는 하소연을 해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보리와 나는 인연 이 없는 모양인가)하고 탄식하면서 그날밤 나는 노스님의 방에서 아픈 다리를 쉬었다.
스님은 중병에 걸려 있었다. 끄르륵 끄르륵 목에서 가래 끊는 소리가 밤새도록 들렸다. 새벽2시쯤이었다고 생각된다. 노스님은 부스럭부르럭 일어나 나를 깨워서 말했다. 자기의 고향은 함경도 함흥이며 백만장자의 아들이었는데 부의 누추함이 싫어서 떠나왔다는 것,자기는 내일 모래쯤은 죽을 것이며 산간세계에서는 그 죽음이 몹시도 냉랭하게 다루어진다는 것, 그러니 숨이 끊어지기 전에 자기의 행적을 깨끗이 청소하겠으니 자기를 좀 일으켜 달라는 것, 나는 스님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는 벽장을 열고 그 속에서 보자기를 꺼냈다. 그속에서 귀한 듯한 몇권의 책과 노트를 꺼내어 옆으로 치우고는 나머지를 역시 나의 도움을 받아 부엌으로 가지고 가 태웠다.
모두 태우고 나서 그는 (다 탔구나)하고 중얼거렸다. 밤이 샜다. 염불소리와 빗자루 지나가는 소리에서 아침이 오고 부 저장이 문을 열고 공양을 가지고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부저장은 인사 겸(스님 어떻습니까)하고 물은 다음, (그만 단념하기오, 스님 인자 더 못삽니더)하는 것 이었다.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놀랍기 그지 없는 그 소리를, 그러나 스님은 아무런 동요없이 듣고 가야지 하는 것이었다. 그 가야지라는 말꼬리를 따라 산바람이 솔잎과 대나무숲을 몹시도 시끄럽게 흔들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백양사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사이에 아마도 그 노스님은 입적하셨을 것이다. 그는 좌선한 채로 그의 죽음을 맞아들였을 것이고, 그의 동료들이 나무아미타불을 뇌며 사르는 불길에 타 재가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그의 동료들은 무섭고 끔찍스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죽음이라는 것을 초개같이 여길 수 있어서일까. 그래서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우리집의 사립문을 밀고 우르르 달려나 오신 어머님과 마주하였을 그때까지 끔찍스런 그 죽음의 상념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다음 어머님의 수다스러움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어 디를 갔다가 왔느냐. 아버지가 몹시 노여워하고 계시니 조용히 들어가거라)(어이쿠 어이쿠 이 무슨 팔자고)소리를 여러번 말씀하셨다.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랫목에 깔아놓은 이불속에 발을 넣었다. 그러는새에 짧은 저녁해가 지고 밤이 왔고, 나는 어버님의 기침소리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안방으로부터 새나오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런 긴장을 움직임없이 이겨내기란 어려운 법이다. 긴장을 이긴다는 것은 이미 세속감정을 털어버린 사람들이나 지닐 수 있는 태도인 것이다.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을 수 있는 것이 견성한 분들의 정숙인 것이다. 드디어 그 긴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왔다. 그 새 아버지의 얼굴은 숯덩이처럼 검게 타 있었다. 인사를 드리려고 들어온 나를 보고 갑자기 (이 나이가 되어서 무슨 꼴이냐, 아들로부터 이런 불효를 받다니.)하고 부르짖더니 대성통곡을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밤에 우리는 싸우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육체와 정신이 , 세속적인 의리와 그 반대의 것이 서로지지 않으려고 밤새도록 버티다가, 통곡으로 아버니가 손을 들었고, 그 분에 못이겨 그 분은 끝내 그의 단명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별세하시기 전날, 한 마을에 살고 계시던 할아버지와 백부님이 오셔서 가족회의를 열었다. 그 분들은 어떻게 하든지 나로부터 중이 되지 않겠다는 말을 들으려고 하였건만 끝내 실패를 하였다. 할아버지는 (네 아비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입에 바른말이라도 않겠다고 하여라)하고 간청하였건만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하고 나는 거절하였다.
그때 병중에서도 휙 몸을 돌리시고 쏘아보시던 아버지의 눈길을 지금도 나는 기억한다. 너무나 무서운 원망과 저주에 가득 찬 눈이었다. 그와 동시에 할어버지와 백부님께서도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노여움에 찬 어조로 몇번이고 뱉으시면서 문을 차고 나가시었고, 나는 그분 들의 뒤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서 엉거주춤 서 있어야 했었다. 그 다음날 아버님은 별세하셨다. 그리고 갓난아이였던 나의 동생이 따라서 저승으로 갔다. 세속 세계를 떠나려고 하는 나의 마음은 그 세속세계로부터 너무나도 심한 보복을 받은 것이다. 언제나 다행스럽게 생각한 것은 그런 보복을 받으면서도 불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버리지 않고 그 다음에 겨울, 드디어 출가의 길에 나설 수 있었 다는 점이다.
겨울 산의 고독
겨울 사원은 언제나 적막하다. 더욱이 흰눈이 며칠을고 계속내려 시내로 가는 산길은 흔적은 없어지고, 눈과 나무라는 단조로은 형태로 산이 정리되고 나면 산엔 바랍소리밖에 그 고요를 깨뜨리는 것이 없다. 겨울 산의 바랍소리는 쓸쓸 하다. 더둑이 황혼이 어둠속으로 묻히고 그림자들이 밤으르 밤으로 밀리는 초저녁의 바람소리는 산사람들의 가슴을 몹시도 심하게 흔들어 놓는다. 그런 날의 승려들의 모습은 왠지 쓸쓸해 보이고 왜소하다. 앞뜰의 눈을 쓸고 있는 승려들, 그리고 묻힌 길을 더듬으며 걷고 있는 승려들, 꽁꽁 닫힌 방안에서 불경을 낭랑 하게 외고 있는 승려들, 그들의 모습에는 속세를 떠나온 사람들의 떠나왔다는 슬픔이 그리움과 함께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나도 그러한 슬픔속에서 그 많은 겨울을 맞이하고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들이 떨쳐버릴 수 없도록 힘차게 몸에 달라붙어 나의 일부분으로 화아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이즈음, 특히 몇 십년만의 폭설이라고 신문들이 떠들던 69년의 세모 무렵에 도선사에서 선운각까지의 길을 오갈 때의 나의 걸음걸이에는 그 외로움이 더욱 깊이 스며들어있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 체온만으로 추위를 물리칠 힘이 없어 요즈음 나는 몇 겹으로 옷을 껴입는다. 그리고 그위에 장삼을 입고 죽장을 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죽장의 고리에서는 찰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그 죽장을 잡은 바른손은 춥고 꺼칠꺼칠하다. 우수만이 아니다. 나의 볼도 이마도 이미 메마른 노년기를 느끼게 하고 있다.
마치도 한 그루의 앙상한 고목과도 같다. 그 렇게 눈 위에 발자국을 찍으면서 나는 산길을 걸어 선운각의 다리를 건너 간다. 그 곳에는 한 대의 차가 기다리고 있고, 나는 그 차를 타고 선학원으로 또는 총무원으로 향한다. 그것이 근래의 나의 일과이다. 그러나 그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었다. 어지간히 먼 곳이 아니라면 걸어갔었다. 서울에서 부산이라든가, 광주에서 대구와 같은, 이 끝에서 저 끝과 같은 곳이 아니라면 나는 걸었었고, 승려 의 세계에서는 그것을 수행의 한 방편으로 여기고 있다.
그 때 이혼수속을 마치고 진주에서 해인사로 갔을 때에도 나는 걸었었고, 그곳에서 서울로 올 때에도 도보 반, 차편 반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걷는다는 말을 강조할까 하고 독자들은 의아해 할지도 모른지만, 그것은 이제부터 기술하려고 하는 부분이, 이 회상기에 가장 많아 걸었던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내가 해인사에서 서울에 도 착하였을 때, 젊은 승려들 사이에서는 불교정화중흥운동의 바람이 일고 일었고 그 중흥운동이 열렬한 지지자였던 나는 한국 정통불교수호의 기치를 들고 피곤이 풀릴 새도 없이 이내 다시 여행길에 올랐었다.
지리산의 골짜기를 비롯해서 충정도, 전라도, 강원도의 심산에 자리한 강원을 찾았다. 강원이라고 해야 초라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지만 그런 곳까지 다니면서 한국불교의 앞날을 위해 일할 동지를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그 때의 고통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 는 정도이다. 지금은 그렇지만도 않았지만 그 때에는 승려들이 무일푼으로 떠나는 것이 거의 불문율로 되어 있었고, 그래서 동전한푼 지니지 않고 떠났던 나 는 두세달 동안의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밤을 지새고 때로는 머슴들이 거처하는 방에서 그들의 온갖 익살과 놀림에 태연히 대꾸해 가며 새우잠을 자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중에는 어떻게나 초라한 몰골로 변해 있었던지 가는 곳마다 마을의 아이들이 뒤따라 오며 누더기 중이 라고 놀려대었다. 사실 그 무렵 나는 서울에서도 (누더기수좌)라고 별명이나 있었다.
그토록 헌옷에 맨발로 다녔던 것이다. 나의 그 고생은 조그만 결실을 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얼마 후에 50여명의 젊은 승려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고,그들은 모두 불교정화를 부르며 짖었다. 이 모임에 세칭 전국학인 대회라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 보면 초라하기 짝 이 없는 것이었는데도 그 모임은 의의로서는 그후의 어떤 모임보다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모임은 한국불교정화운동의 시초인 동시에 나의 염원인 정화불사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젊은이들의 중흥운동도 일경의 탄압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해체하여야 하는 운명에 놓이고 말았다.
그 때 그들에게 모임이란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고, 더욱이나 불교인들의 모임이란 항일의 주체세력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라하여 학인들의 중흥운동의 기치는 소리없이 내려지고, 곳곳에서 모였던 젊은이들은 다시 뿔뿔이 산간으로 흩어져 버렸었다. 한국 불교를 위해서는 불행스럽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 개인을 위해서는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때까지 불사의 뒤치다꺼리만을 도맡아 하고 있었고, 또 주의에서도 으레 그러려니 여기고 있었던 터에 일경들의 그 탄압과 그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진정한 의미에서의 나를 위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운동이 깨어지고 또 강원수업도 마치게 되자 표연히 길을 떠나 만공스님이 계시는 충남예산 정혜사로 내려갔다. 정혜사에 도착하던 날은 섣달 그믐이었다. 그날밤 나는 만공스님과 함께 기울져가는 한국불교를 중심으로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주고 받았고, 그날방 스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는 이후의 내 발걸음에 커다란 지침이 되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로부터 벗어나 해탈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도 나는 사찰일을 돌보야 했다. 어쩌면 나는 속인들이 말하는 일복이라는 것을 타고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 다. 내가 처음 승복을 입은 일본에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내 일에 몰려 지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 절에서 3년을 보내고 나니 더 이상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스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선방으로 들어갔다. 낯 씻는 일, 변소 에 가는 일, 그리고 먹는 일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자리를 떠난 일이 없이 정진에 몸을 맡기었다 나는 문앞에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었고, 목이 마르고 괴로움과 불편함이 잊혀질 때까지 그러고 있었고, 이윽고 그 괴로움과 불편이 사라져 갔다. 점점 무의 경지로 들어갔다.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앉아 있어도 앉은 것 같지 않고 오줌을 싸도 싼 것 같지가 않았다.
한숟갈의 밥, 하나의 정좌는 밥이고 정좌이면서 곧 무였다. 사람들이 뒤에 들려주어서 안 사실이지만 그 때 내 얼굴은 열에 달아올라 새빨게지고 신경이 타서 나중에는 청동색으로 변했었다고 한다. 그들은 저러다 죽지나 않을까하고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진하는 길에서의 되돌림이란 그 자신만이 하지 않아면 안되는 법이다. 타인이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성원하고 기원했을 뿐 제지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나는 점점 더 무를 확대시켜 가고 있었 다. 창을 두둘기는 빗소리와 풍경을 울리는 소리, 그리고 나뭇잎이 구르는 소리 만아 들렸다. 그리고 밤이 어둠이 밀리고 밀린 끝에 아침이 오고, 창살이 햇빛 을 가득 받아 타올랐다가 꺼지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선방의 수좌들 사이에서는 내가 견성했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만공스님께서도 견성했다는 인가를 해주시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 자신 속에 너무 많은 미혹의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느꼈었다. 그랬으므로 그 인가를 받을 수 없었다. 겸손히 사양하고 오대산의 적멸궁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퇴락해 가는 불법의 중흥과 세계의 평화와 안락을 위해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다만 겸손 으로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견성을 한 승려들은 게송을 지어 그의 해탈으리 깊이를 나타내는 법인데 나는 그것을 짓지 않았었다. 그만큼 철저하게 그 미혹을 쫓아내려고 버둥거렸었다. 백일기도를 하러 오대산에 들어갔다는 사실도 그 미혹의 그림자를 쫓기 위한 구실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날 나로부터 게송을 지어 받고 싶다고 한 동료가 어떻게나 심하게 조르는지 그 것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옛부터 모든 불조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
어찌 현학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길가고탑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견성과 파계의 사이
오대산 속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있던 나에게 어느 날 한 장의 편지가 전달되 어 왔다. 그 편지는 진주의 불교신도회에서 정혜사로 보낸 것을 정혜사에서 다시 오대산으로 부친 것이었다. 내용인즉 진주로 내려와서 훌륭한 부처님의 법을 들여달라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나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앞 에서도 말했듯이 나에게는 너무나 많은 미혹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거느린 채로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과감히 뿌리치고 정진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망설임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다시 정혜사의 만공스님으로부터 편지가 날아왔다. 부처님의 법을 설하여 주라는 명령이었다. 할 수 없이 행장을 차리고 길을 떠났다. 불심이 대단한 진주 시민들은 (내 고장의 자랑 운운)한 벽보를 사방에 붙이고 나를 맞이해주었다. 법회가 있던 날의 연회사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때문에 나의 설법이 거의 들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런데로 그 모임은 소기의 성과를 충분히 거두었다. 왜냐하면 그 무렵의 모임이란 무엇을 듣고 깨우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 이야기하였다는 데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로서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법회가 끝난 뒤에 나를 찾아와 내 장삼자락을 잡고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님의 모습이었다. 그때 그분의 눈물엔 많은 감회가 어려있었을 것이다. 당신의 아들이 이 만큼 되었구나 하는 데서 오는 감격과 이미 당신의 곁을 떠난 아들을 보는 모정이 얽혀있었을 것이다. 우는 어머니를 보는 아들의 심사란 켤코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속가를 따났다 고 할지라도 내가 그의 아들임에는 분명한 사실이고, 그것을 강조하면서 어머니 로서의 자기를 나타내려고 버둥거리는 모습은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그런 복잡 한 심정의 움직임에는 아마도 나는 떨어져 갔었던 듯하다. 비록 인연을 끊었다 고 할지라도 그 옛집에 하루쯤 쉬어가는 것이 어머님의 뒤를 따라 그 옛집을 찾아가서, 거기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님의 간곡한 부탁,(네가 중 이 된 것도 좋지만 집안의 혈통만은 이어야 되지 않느냐)는 청천벽락과 같은 부탁을 받아들여야 했었다. 이혼한 뒤에도 집에 남아 어머니를 봉양하는 아내와 그들이 처하고 있는 험한 생활이 나로서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도록 강압되었던 것이다. 나는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아내의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아내의 방문을 열었을 때의 흙내와 땀에 절은 여인의 냄새,
그것은 유혹하는 요기스러운 것이기보다는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짙은 슬픔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 기억한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그의 죄스러운 눈. 왜 그녀가 죄스러 워야 했을까? 죄스런 것은 오히려 내 편이 었을 것이고, 그녀는 당연한 한 여인으로서 나를 요구하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의 나에 대한 사랑은 나를 파계시킨다는 죄책에 떨로 있었다. 나는 슬프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슬프게 접하였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기 전에 집을 나와 동구길을 걸었다. 사위가 너무나 어둡기만 했다.
그런 시간에 그 회오와 슬픔으로부터 보는 자연의 흑색은 너무도 아름답고 가슴 깊이 짙은 슬픔으로 젖어 오는 것이었다. 마치 수려한 한편의 산수화가 우리들의 가슴에 끼쳐주는 감동과 같았다. 그리고 다시 1년의 세월이 흘러산 뒤에 나는 오대산 상원사에서 아내로부터 보내온 여식을 낳았다는 편지를 받아 읽었다. 나는 그 죄업을 말없이 받아들여야 했었고, 그것을 씻기 위하여 다시 적멸보궁으로 들어가 백일참회를 했었다. 그때 태어난 그 파계의 씨는 20의 젊은 나이로 삭발을 하고 나의 길을 좇아와 수도정진한 결과, 지금은 전국 비구니 강원에서 법설을 가르치고 있는 강사가 되었다. 강원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각이난다. 죄업을 씼을려고 전국 각지를 돌아 다니면 수행을 하다가 광능봉선사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퍽 오랜만에 불경 번역자로서 이름 있는 운허스님, 현역경원장을 만났었다.
그동안 쌓인 회포를 털어 놓는 중에 우연히 춘원 이광수 선생의 이야기가 나왔다. 운허스님은 춘원이 바 로 자기의 6촌형님이요, 장래가 유망한 청년인데 그가 지금 법화경의 번역을 서 두르고 있으니 그를 설득하여 번역을 중단하게해 달라는 것이었다. 춘원이 비록 법화경을 10여년간 공부했다고 하지만 아직 불법을 옳게 해득하지 못했으니 틀림없이 오역이 생길 것이며, 일단 춘원이 번역했다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명역으로 알고 그것만을 잀으려 할 것인 즉 미리 그 해독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운허스님의 청을 따라 자하문 밖 소림사로 갔다.
마침 춘원은 그 절 근처에 새집을 짓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런 이들이 갖는 재기를 온몸으로 풍기고 있었다. 그는 법화경에 심취해 있는 것 같았다. 그 법화경이야말로 완벽한 종교서적이며, 그 문장의 유려함과 비유의 광대함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그는 칭찬이 대단했었다. 그러나 그때의 그의 불법의 이해력은 내가 보기엔 미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법화경은 가야성에서 도를 이룬 부처님의 본도를 말 한 것으로서 경정 중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법화경을 그가 다 이해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그러나 나는 그의 그런 허점을 찌르고 들어가기 보다는 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고, 그에게 불법을 가르쳐줄 수 있는 방법을 택 하기로 했다. 그것이 그와 교우를 가지는 길이었다. 그런 연후에 나는 춘원과 3 일동안 쉬지 않고 의견교환을 했다. 심지어는 밥을 먹고 변소에 갈 때도 대화 를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진지하게 문제점에 대해서 주고받는 데에는 조금도 두 사람 사이의 의견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드디어 나흘째가 되던 날 그의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 기미를 알아챈 나는 더욱 설법에 열을 올렸다.
그때 그와 나의 애기의 내용은 너무도 오랜시간이 흘러서 지금은 기억해 낼 수 없지만 그의 재빠른 이해력에 내가 감탐했었다는 사실만은 뚜렷이 떠올릴 수 있다. 그의 넓은 이마엔 조금도 비뚫리지 않고 혼미함이 없이 사물을 정곡으로 뚫어보자는 예지가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불쑥 우리 민족이 독립을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고 물었던 것 같다. 그 때 그는 먼저 민족의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대답했고, 다음 나에게 그 질문을 되돌려 주었다. 나는 그것을 인과의 법칙으로써 설명하였다. 우리가 피압박 민족이 된 것은 일종의 과보이다.그러니 일인만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을 뉘우치고 그것을 바로잡아야 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몹시다. 관념적으로 그런 중대한 문제 를 이야기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관념속에서도 그는 그의 입장을 나는 나 의 입장을 조심스럽게 천명했고 그런 상이한 사고방식에도 불구하고 며칠 새에 우리는 많은 것에서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생각된다.
특히 어려움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내가 그에게 법화경 속에서 앞으로 자꾸 몰랐던 것들이 발견될 것이라고 했을 때 그는 조금의 불만도 없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알면 알수록 어려운 것이 불경이고 법화경이다. 가지를 붙잡았나 하고 보면 잎사귀요, 줄기를 붙잡았나 해서 보면 가지인 것이 불법이다. 그처럼 불법의 진리에 도달하 기까지에는 수십 수백의 눈에 보이지 않는 관문을 지나야 되는 것이다. 춘원은 그 한 관문을 그 때 지났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때 나는 춘원에게 법화경을 번역하지 말라는 말은 한 마디도 안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남기고 간 말의 뜻에서 그것을 알아차렸고, 그뒤로 그것에서 손을 떼었었다. 그후 그는 (꿈)이니 (이차돈의 죽음)이나 하는 작품을 내었는데 이는 모두 불교의 감화에서 우러나온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육당과 춘원을 만난 자리에서 그전과는 달리 솔선하여 불교의 의식을 해설한 책자인 (불자필람)을 번역해 주기를 부탁했더니 육당은 능력이 없다고 거절하였고, 춘원은 즉석에서 쾌락하였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미루어 오다가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북이라는 불행한 사태를 만나고 말았다.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기록하다가 보니 나와 춘원과의 교우가 대단한 것같이 되었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더 많은 대중들, 대사들과 친하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원의 이야기를 길게 쓰게 된 것은 그에게서 불교의 대중문제라고 할 수 있는 불자와 불법의 관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신도들은 불법을 승려들처럼 알 필요가 있을까, 즉 그 어려운 법화경을 신도을은 이해 할 필요가 있을까? 이론상으로는 지식으로서의 불교는 누구나 알아야 한다. 불승이란 그것을 몸으로 사는 자이고 신도란 그 지식을 믿는 자이다. 그것이 서로의 한계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때 춘원에게 너무 바랐었고, 일반적으로 한국불교는 신도에게 그러한 바람을 너무 갖던가 전혀 갖지 않는다는 병페를 지니고 있다.
가장 바람직한 일은 언제 어디서나 평형이다. 그리고 그 평형을 얻는 길은 자제로써만이 아니고, 그것을 알 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불교는 학승을 앞으로 대량 배출하 여 불교의 진리를 대중들에게 쉽게 설명하여 공감속에서 평형을 얻어야 할 것이 다. 진리는 아우그스티누스에 의해서도 단테에 의해서도 이야기되어야 하며, 미 컬란젤로에 의해서도 부각되어야 한다. 그렇게 각자가 자기의 길로서 이야기할 때 진리의 전모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서양의 기독교에 비하면 동양의 불교 는 너무 많은 단애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불교의 진경은 승려들에 의해서만이 규명되고 있을 뿐, 그밖에는 무수한 오해와 이설이 범랍하고 있는 것 같다. 앞 으로의 한국 불교가 해내야 할 것길은 그런 오해와 이설을 불식기키고 불교의 다닝ㄹ화 내지는 대중화를 이루는 일일 것이다. 누차 이야기하는 바이지만 불교 정화운동이란 곧 그 대중화운동의 투쟁적 어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제 6장 삶의 보람을 찾을 때
물고기는 물 속에 살면서도
물고기는 물속에 살면서도 물을 모르고, 사람은 불법 가운데 있으면서 부처를 모른다. 사람은 불심 속에서 나고 불심 속에서 살며 불심 속으로 죽는다. 공기 도 물도 다 오염되어 있지만, 그러나 마음만은 더럽히고 싶지 않다. 함께 괴로 워하고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웃는 곳에,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영원한 평화가 있다. 꽃을 보고 기뻐하고 함께 웃는 곳에,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영원한 평화가 있다.
꽃을 보고 기뻐하는 것보다도 꽃을 피워놓고 남을 기쁘게 하는 마음, 이것이 곧 자비의 마음씨다. 물건은 싸움의 원인이 되고 마음은 평화의 씨앗이 된다. 사랑하지 말고 미워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니. 이렇게 애증을 초월했을 때 완전한 자유가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다.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 가을에는 달이 빛나고 겨울에는 은빛 산하. 다음에 번뇌가 없으면 사시사철 언제난 좋은 계절이다.
자비를 가지고 부르는 소리에는 하늘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다. 원한에는 자비로, 싸움에는 화평으로, 비방에는 협동으로 대하는 길만이 곧 부처의 진리이다. 남을 용서하는 것을 배워라. 그러면 너의 인생은 밝아진다. 남을 미워하지 않고 멸시하지 않고 어떤 상대에게도 사랑을 잃지 않고 상대를 깊이 보살펴 주는 마음, 이것이 곧 자비다.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만 자신의 몸이나 마음을 가꾸는 일에 기쁨을 갖는 사람은 드물다. 바른 믿음은 등뼈다. 바른 마음은 인생을 밝게 하고 행복은 얻게 한다.
욕심 때문에 행실은 세상을 구하고 욕심 있는 행실은 사람을 울린다. 덧없이 변해 가는 세상 가운데서 항상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은 사람의 성실이다. 믿음이 이 세상 나그네 길의 양식이다. 더 이상 없는 재물이다. 믿음이란 남에게 감사하고 자신을 참회하는 일이다. 스스로를 아는 일이 부처님을 아는 일이지요, 부처님을 믿는 일이 스스로를 믿는 일다. 자비 앞에서 어떠한 적도 있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무장될 때 비로소 사회정화나 민족통일도, 세계평화도 이 루어질 수 있다. 원수로 무장하지 말고 자비로 무장할 때 즉 자비로 무장된 부 처님 마음만이 나라와 가정과 나 스스로를 영원히 지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죽어 없어지는 몸뚱이 이외에 또 하나의 삶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불성이라 해도 좋고 하느님이라 해도 좋다. 어쨌든 영원히 살아있는 나, 물질이 아닌 나, 다시 말해서 진여라, 여래라 하는 것이 바로 이 또 하나의 삶이다. 이것은 온갖 움직임과 생각과의 주체가 되는 존재이기도 한다. 부처님은 유신과 유물을 초월하여 모든 것은 인간 각자에 영원한 자세의 진리가 있음을 깨달아 유신사상의 미신과 유물사상의 위기를 구제하여 인간 자신에 영원한 생명과 희망의 길을 개척해 주었다.
즉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윤회하는 인생자체에 영원한 희망을 알려주었다. 많은 부인들이 남편에 대해 자유행사를 하려 하고 남편이 부인에게 자유행사를 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남을 구속하는 것은 될지언정 참된 의미의 자유는 아니다. 흔히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은 고통이 아닌 줄로 알지만 사랑하는 것도 큰 고통이다. 사랑이 싹트면 밤에 잠도 잘 안 오고 밥맛도 없어지고 먹는 것이 소화도 잘 안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은 남을 소유하겠다는 것이고 구속이요, 고통이다. 참 죄는 나에게 있다. 절대로 남이 잘못했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자. 저 사람을 기쁘게 하여 좋은 사람 만드는 것도 내가 할 수 있고 독사와 같은 나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사람은 모두 생각에 얽힌 탓으로 마음이 흐려져서 무엇을 생각한다고 해도 올바른 판단이 되지 않는다. 마음이 밝아지면 그것이 나와는 상관이 없지만 생각을 해달라고 하면 그래야만 아무 부담 이 없고 마음에 꺼리는 데도 없고 참되고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 우리가 흔히 악하다든지 선하다는지 하는 말을 쓰고 있지만 그 기준은 뚜렷하지 못하다. 가령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악이지만 전쟁터에서는 사람을 많이 죽여야 공로가 크다 고 하듯이 선악의 구별은 분명하지 않는 것이다. 술취한 사람이 졸다가 잠꼬대를 하는 식으로 번뇌, 망상, 탐욕에 살지 말라.
태풍에 밀려 다니는 파도처럼 이 생각 저 생각, 생각에 따라서 이것이다 저것이다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중생 놀음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쳐다본다. 생각해 본다. 들여다 본다. 맛을 본다, 무엇을 어떻게 해본다는 이러한 말들을 연구한다, 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본다는 말은 우리의 아는 힘을 다 발휘해야 한다는 소리다. 우리에게 아는 힘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지 알줄 아는 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성립되지 않는다. 한국의 돈을 전부 다 모았다고 한 끼에 밥 두세 그릇을 먹는 것도 아니고 옷을 한꺼번에 몇번을 껴입을 수도 없으니 아무 것도 아닌 셈이다.
천당도 있고 지옥 도 있어서 어떤 중생은 지옥에 살 때도 있고 천당에 살기도 하며 또 사바세계에 있어도 그대로 극락세계가 되고 갖가지 차별의 세계를 제 각기 살고 있다. 각각 자기의 꿈세계에서 사로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꿈을 꿀 때 문을 열지 않으면 방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꿈속에 있는 문이 무슨 구애가 있을 수 있으며 꿈속에 있는 이 몸뚱이가 어떻게 걸림이 있겠는가. 한 개의 환상이고 거짓말이 므로 허공이 허공을 지나가는 것처럼 아무 구애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꿈속에 문을 열지 않으면 나가지 못하는 것은 오직 (문을 열지 않으면 못나간 다.)는 관념 때문이다.
전생에 복을 좀 지어서 금생에 돈이 잘 벌어지거든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회사업도 하고 잘 도와야 한다. 공연히 남이 쓸 돈을 혼자만 갖고서 좋은 일에 사용하지 않으면 죄만 되고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 내 것이 본래 아니고 필경 내 것이 될 수도 없다. 육체를 나로 알고 의식주를 생명으로 생각한는 착각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뿐이다. 현실세계에서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웃기도 하고 성내고 하는 그것은 하나도 기억이 안된다. 아무 생각없이 하기 때문이다. 아무 조건없이 이야기를 하고 듣 고 앉고 눕고 하는 그것이 이익도 안되고 해도 안되고 이 세상만사가 하나도 나 에게 아무 상관이 없다. 마음에 다른 것은 다 생각하고, 보고, 애착을 가질 것 이 없고, 현상도 적멸도 아무 것에도 미련을 둘 것이 없는 줄을 분명히 알아서 모두 집어던져 버리는 그러한 경지에 다다랐을 때가, 무엇을 수양하고 참선할 것이 남아 있을 도중이 아닌 마지막 반야에 들어갔을 때이다.
설탕은 달고 소금 은 짠 것은 수상행식 때이고, 관념 때문이다. 파도가 칠때나 파도가 가라앉은 때나 물은 변함이 없고 물의 성질은 항상 그대로이다. 바람이 부니까 물이 움직여 보인 것뿐이지 물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다만 우리의 생각이 파도와 물이 다른 것으로 여기는 것뿐이다. 육안은 단순한 물질의 구조에 불과하며 신경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세포로 구성된 것일 뿐이다. 아무리 치밀한 구조로 이뤄진 세포라 하더라도 신경 그 자체는 물질일 수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물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닌 아는 능력을 가진 생명이 있다. 그것이 곧 마음이다. 도인이 되면 아무 괴로움이 없고 자유스런 사람이 된다. 마음을 깨친 도인이 되어 세상을 그렇게 살면 참으로 편안하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조건부로 시집가려고 하지 말고 조건부로 돈도 모으지 말며, 사람을 대해도 조건부로 대하지 말라. 그러면 부처님과 똑같은 경지에 도달한다. 아무리 태풍이 불어와서 백두산만한 파도가 일어난다 해도 물은 변하지 않는다. 천당을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파도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물의 성질만은 그대로이다. 또 물에다 똥을 섞어서 똥은 똥대로 물의 성질이 단 것으로 변하지 않는다. 단 것은 어디까지나 설탕이 단 것이다. 즉 당분이 수분에 섞여 있는 것 뿐이다. 이와 같이 물과 똥을 섞지 않으며 물과 당분과도 안 섞인다.
물 가운데로 똥이 돌아 다니는 것이고 물 사이에 당분이 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우리 의 마음도 미워하고 사랑하고 희노애락에 섞여서 물들지 않으면 따라서 더러워 질 것도 깨끗해질 것도 없다. 애착과 소유의 욕망으로 살다보면 이것이 관습이 되고 업이 되어 무서운 힘을 가지고 우리를 지배한다. 이 업에 의해서 다음 생이 좋게도 나쁘게도 결정된다. 가령 세계에서 좋은 보석을 한 개 선사받았다고 하면 그날부터 잠을 못 잘 것이다. 도둑이 언제 담을 뛰어 넘어올지 모르고, 언제 어디서 강도를 만날지, 택시를 타고 가도 안심이 안된다. 이와 같이 마음에 소득이 있으면 안심이 안된다. 태양이 아무리 밝다 해도 땅속이나 벽속까지는 밝힐 수 없지만 마음은 땅속, 우주의 구석구석까지 다 밝힌다. 우리의 마음은 오가는 곳이 우주에 가득하기 때문에 극락세계도 사바세계도 지옥과 천당도 손바닥에 놓인 구슬보듯이 환히 보인다.
애착심을 버려라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들은 스스로가 얻어서 자기를 얽어맨다. 사랑한다는 것 은 상대방을 구속하면서 동시에 나를 구속하는 행위이다. 너는 내 것이니 꼼짝 마라 하고 꽉 잡아매어두고 한발짝도 용납을 하지 않는다. 사랑처럼 무서운 지옥은 없다. 모두가 자기 중심으로 움직여서 제 욕심만 채우려고 시집가도 장가간다. 독사보다 나쁜 마음이 이 사랑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다.
분별 시비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오로지 자비만 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사람이 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사람답게 살기는 어렵다. 물건을 탐내는 마음을 버려라. 사람의 가치는 재물이 많고 적고에 달려 있지 않다. 나는 무엇이냐? 내가 죽지 않는 방법은 무엇이냐?
이렇게 정리 하다보니, 남을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마음, 죽는것은 싫어하고 사는것은 좋아하는 마음, 이 마음을 정리해야 된다. 인간의 망상은 상대세계를 초월한 진아를 저버리고 물질로 이루어진 가아와 현 실이 실존하는 것으로 인정한 그때서부터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를 믿는다는 말은 곧 생사가 없고, 망상이 없는 진아를 믿는다는 뜻이다.
확고한 자기를 발견한 그날부터, 다시 말하면 산택이 없고 증애가 떨어진 진아를 믿는 그날부터 농사를 짓든 장사를 하든 정치를 하든 참다운 나를 사는 삶을 누리는 것이며 참된 행복을 창조하는 생활이 되는 것이다. 한 생각이 털끝만큼만 틀려져도 이 생각과 참 나와는 하늘과 땅처럼 벌어진다. 아니 하늘과 땅보다 더 벌어진다. 그러므로 나는 중생이다 하는 생각은 아예 털끝만큼이라도 가져서는 안되고, 나 는 본래부터 부처다 하는 생각도 가져서는 안된다. 그 모든 생각이 다 망상이며 이것을 망상이라고 하여 떼려고 하는 그것도 역시 망상이다.
부처가 되려고 하는것도 망상이다. 이치를 따라 이리저리 따져봐도 망상만 더해 갈 뿐 마음은 드러나지 못한다. 들끊는 생각을 억지로 참으려 하지 말고 마음을 턱 놓아버리 면 못자던 잠도 잘 자게 되고, 시끄럽던 머리속도 조용해진다. 이렇게 계속하면 망상은 차차로 없어지고 마음 하나만 남는 것이다. 마음은 본래 나니 너니 하는 구별이 없으므로 목을 베어가더라도 아무렇지 않 게 앉아 있을 수 있고, 대접을 잘 받거나 욕을 먹더라도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좋다 나쁘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까지는 의식주에 있어서나 모든사물에 대해서 좋다거나 싫다는 생각을 초월해야 한다.
남이 나에게 호떡을 사주든, 따귀를 때리든, 칭찬을 하든, 욕을 하든, 높은 자리에 앉혀주든 낮은 자리로 밀어 버리든,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순경에나 역경에도 마음이 태산처럼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마음 가운데 맞느니 안 맞느니 시비곡절이 없고 보면 마음에 병이 없다. 불법은 좋고 다른 법은 나쁘다. 이런 분별심 때문에 우리는 제 마음을 바로 지키지 못한다. 이 옳고 그르다고 하는 것은 나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면 나 라는 생각을 놓아버리면 나는 뮈가 될 것인가?
나라는 것도 생각이니까 이 생각 마저도 버려야 한다. 마음은 본래 아무 생각이 없는데 괜히 망상, 시비를 하여 마음 가운데 위순을 두는 것이 큰 병통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확실히 모르고 서는 몇 백겁을 돌아다니며 화두를 한다. 참선을 한다고 애써봐도 헛수고만 될 것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여 번뇌망상을 끊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진땀만 뻘뻘 흘릴 뿐 결과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러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모든 사물을 대하여야 한다. 마음을 모양에 비교하여 말할때에는, 둥글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마음, 이것은 끝이 없고 시작이 없는 무한대한 것이므로 둥글다고 비유하여 말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둥근 모양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모난 사각형은 더욱 아니다. 허공이 무한대하여 끝이 없으니 우리가 그 모양을 생각할 때 둥글 것으로 상상 한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생각이고 추상이지, 허공의 참모습이 둥글다고 할 수는 없다. 허공의 실상은 둥근 것도 모난 것도 아니며, 시작도 끝도 없다. 어 떻게 말할 수 없어서 둥글다고 했을 뿐이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생각으로 허공 의 모양을 상상해 본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우리늬 마음자리도 허공처럼 끝 도 없고 시작도 없는 것이다. 이 마음의 참모양을 다 생각해 낼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성불한 셈이다. 생각, 이것이 나는 아니다. 긍정 부정은 내가 아니고 부정하고 긍정하는 주체가 나다. 농사짓는 것도 장사하는 것도 내 일이 아니고, 정치, 학문도 내일이 아니다. 그것을 하는 주체를 알아야겠다. 그게 무엇이냐? 생각하고 말하고 들을 줄 아는 이게 무엇이냐?
태자는 날이 가고 해가 가도록 이것만을 생각했다. 이 생각을 날이 갈수록 가속도로 되어 마치 한 개의 불씨가 커져서 온 태산이 불로 번지듯이 오직 (이 뭐냐)하는 내적 추구의 일념으로 천지가 꽉 찼다. 싯달다 태자는 이렇게 하다가 납월팔일(음12월8일)새벽별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깨달으셨다. (세벽에 별을 보다가) 깨친 것이 아니라, (새벽 별을 보고)깨친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최고의 진리이다.
말로도 못 전하고 글로도 못 전하고 행동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도 사상도 신앙도 물질도 허공도 아니어서, 자살할 수도 없고 타살할 수도 없다. 칼로 벨 수도 없고, 불에 탈수도 없으며, 물에 젖을 수도 없는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태초 이전이고 차원 이전이어서,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절대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고 나이다.
그러므로 이걸 발견하여 믿는 것이 불교이다. 움직이는 생각을 억지로 쉬려고 하면 머리속은 오히려 더 시끄러워진다. 서울이 시끄럽고 번거롭다고 하여 백두산 꼭대기로 도망을 하여 앉아 있어봐도 서울의 생각은 머리속에서 더 세차게 소용 돌이친다. 그러니 억지로 번뇌망상없는 데로 돌아오면 더 큰 망상이 솟는다. 그 리하여 우리는 시끄러움이 싫다고 하여 조용한 곳을 찾든가, 조용한 곳이 나중에는 싫증이 나서 다시 번잡한 곳으로 나오든가, 또 생사가 싫어서 열반을 구하든가 하여 양쪽을 왔다갔다 이쪽 저쪽을 건너뛰고 하다 보면 우리의 진면목을 잃어버린다. 생사를 벗어나려면 오직 생사를 밝고 차고 나가라는 말이다.
어디를 가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부처님께서 별을 보고 깨치셨던 뜻을 필경 알게 되 는 때가 있다.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도 사심망상이 용납되지 않으므로 다만 화두만을 들어서 (저게 어째서 무가 되는가?)(이게 뭔가?)하는 것만을 의심해 가 는 것뿐이다. 아무 것도 없는 무아지경이 열반처럼 앞에 슬그머니 나타나서 그곳이 도리어 번뇌자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우리의 요망된 분별심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어느 텅 빈것에 애착하여 주저앉아 가지고, (아, 그렇구나. 이것이 바로 부처도 중생도 아니면서 부처놀음도 하고 중생놀음도 하는 것이로구나, 이것이 열반이로구나)이렇게 생각하는 동안에 주객관이 대립되어 뚜렷이 나타나게 된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좋아서 우리가 이것을 잘못 열반인줄 알 고 거지가 어쩌다 곰팡이 핀 떡덩어리 하나 얻어가지고 밤새도록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다 결국은 못 먹고 버리듯이 앞에 나타는 열반경계는 나한님이나 독성님들이 취하는 경계로서 이 경계가 슬그머니 변해서도 번뇌가 일기 시작한다. 신물이라는 말을 삼가서 하지 말라. 곧 하지 말라는 말이며, 추심이라는 말은 무엇을 추심한다. 찾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무슨 진리를 찾으려 들지 말고 깨쳐보려고도 하지 말라는 말이다. 다 되어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부처가 되어 있으므로 깨치려고 하다가는 영원히 깨치신 것을 네가 깨치려고 해서는 안된다. 추심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리고 마음 가운데 바늘 끝만한 시비를 일으켜도 8만 4천 번뇌가 일어나서 정신을 잃게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옳다 그르다 하는 시비 를 아예 따지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둘이란 하나로 말미암아 생긴다. 하나가 없으면 둘이 생기지 않는다. 하나하면 벌써 둘이 생기고, 둘 할 때 벌써 셋이 생기고, 이렇게 하나가 있으므로 무한수가 나오게 된다. 그러면 하나, 이것은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 없는데서 온 것이다.
인간은 본래 동양이나 서양이나 하나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아왔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없는데로 부터 우주가 생겼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 하는 것과 동시에 백천만억 무한수가 벌어진다. 그래서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근본 마음자리 이것을 말한다. 마음 가운데 허물이 없고 보면 모든 법이 법이랄 것도 없이 한 법도 없게 된다. 그러나 이 마음은 본래의 마음 그대로다. 전체가 내가 되어버린다. 그러니 저 무궁한 객관을 상대할 무슨 법이 따로 없다.
어떤 한 생각이 하나도 일지 않으며 이때의 마음은 마음이라 할 수도 없다. 주관 객관을 따지고 드는 짓은 버릇 때문에 이 순간에도 거짓을 짓고 있다. 음식도 좋은 음식 나쁜 음식을 생각지 않으면 소화도 잘된다. 아무 기분없이만 먹는다면 우리가 비지만 먹더라도 그 속에는 산삼녹용이 다 들어 있는 것같다. 그러므로 우리의 한 생각 가운데는 온 우주가 다 벌어지듯이, 이 한 생각 가운 데 독고도 있고 영양도 있다. 그것은 기분으로 정추를 가리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나 가지고 고집을 하게 되면, 우리는 거기 알맞는 도수를 지나쳐서 중도를 잃어버린다.
벌써 신심을 어긴 것이다. 똑바른 신심이란, 경추를 보지 말고, 지동을 하지 않으며 시비를 가리지 않는 것이다. 시비를 가리지 않겠다는 생각까지는 하기 쉽지만, 정말로시비를 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란 쉽지 않다. 바로 그것이 문제다. 무엇이라도 고집을 하면 안된다. 그러면 벌써 도수를 넘고 분수를 잃어서, 그 사람은 반드시 나쁜 길로 달려가게 된다. 모든 것을 버리고 놓아두어라.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을 모두 버리고 불교까지도 믿지 말란 말이다. 탁 놓아버려서 해방이 되라는 말이다.
이 생명을 해방해 주란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끝까지 제몸을 동여매어 가지고 스스로 구속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탁 놓아 버리면 자연스러워 본래 그대로의 자세로 된다. 시집가고 장가갈 생각내지 말고 일해 가지고 모아서 모두 다 불쌍한 사람에게 주어라. 모든 것이 나에게 필요없으니 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을 성인이라 할 것이다. 부처님이고 보살이고간에 그 사람과 안 맞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렇다면 얻어 먹으면서 다리 밑에서 자더라도 마음 편할 것이다. 죽어도 그는 편안하게 죽는다. 그러니 내 마음 본래 그 자체가 도라는 말이다.
아무 생각 없고 생각 없다는 것도 없이 귀먹은 듯이 일체를 떠나버리는 것이다. 어떤 한 생각 일으키면 그것이 계념이요 벌써 괴진이다. 마음에 파도가 일어서 마음자리가 요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혼혼침치하여 파도가 친다. 물에다 조그마한 모래알 하나라도 던지면 그만큼 물결이 일어난다. 무엇을 본다고 생각하고 분별 망상을 일으키면 정신 상태가 흐려져서 좋지 못하게 된다. 이리하여 우 리에게 생사의 고가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뿐 두 가지가 있을 수 없다. 마음이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을 번뇌망상이고 올바른 진리는 아니며, 그 것은 싸우는 진리일 것이다. 마음이란 부처도 중생도 유정도 부정도 아니기 때문에, 지금 말 듣고 말하는 이 마음자리는 서로가 독같고 질량이 똑같다는 말이다.
똑같다면 구별할 수도 없이 한덩어리겠지만 모든 부처님들 께서는 제각기 중셍과 인연 맺었던 것을 가지고 성불하는 것이므로 확실히 각각 개성이 따로 있는 것이다. 미한 사람에게 대적멸에 나타날 때도 있고 그러다가 다시 번뇌망상이 앞서고 한다. 대적멸과 번뇌망상이 자주 번갈어서 나타난다는 말인데, 마음을 깨치지 못해서 생사열반 양쪽을 왕래하는 사람은 미한 사람이며 본래의 마음자리에 들어서지 못한 사람이다. 깨닫고 나면 모든 것이 좋고 나쁘고의 구별이 없다. 이 세상 모두가 꿈속이다. 지금 이것은 낮꿈이고 어젯저녁의 꿈은 밤꿈이며 지금 이 삶은 금생 꿈이고 과거는 전생 꿈, 미래는 내생 꿈, 이렇게 꿈으로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나고 죽고 하는 것도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며, 우리가 석가여래를 보았다는 것도 역시 꿈속의 일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져보는 이것들이 꿈속에서 벌어진 한낱 꼭두각시놀음이란 뜻이다. 우리는 잠이 오라고 하면 눈두덩이 벌써 무거워지면 눈을 뜨기가 싫어진다. 눈을 스스로 감다 보면 점점 잠 속으로 취해 들어가면서 꿈속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 눈에 잠이 없으면 모든 꿈이 사라지게 된다. 천당꿈, 지옥꿈, 인간꿈, 중생꿈 내지 부처꿈이 한꺼번에 없어진다. 이러한 꿈을 꾸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눈에 잠이 없는 동안 공부를 하란 말이다. 본래의 마음이 달라지만 않으면 1만법이 항상 한결같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러하며 우리 마음자리는 변하지 않는다. 이 지식도 사상도 신도 아니고 모든 생각도 아닌 이 마음은 우주의 모든 사물을 다 알고 있다. 그리하며 죽었다 태어나고, 태어 났다 다시 죽는 우리의 몸뚱이는 달라질지언정 우리의 마음만은 항상 그대로이다. 우리가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거기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다. 누가 나 한테 욕을 하거나 병신이 되도록 때리더라도 참으면 아무런 원망하는 마음을 가 지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 업이 남지를 않는다. 기억한다는 것은 업이 남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따지지 말고 마음에 간직하지 않아야 한다. 까닭만 하여도 나에게 업만 남게 만든다.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다가 는 다시 나고, 나서는 병들어 적고 하는 고통이 되플이 된다.
내가 만사에 간섭만 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생사윤회가 닥치지 않는다. 이것을 믿는다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먼저 믿음터라도 이렇게 되어 있어야 한다. 깨쳐가지고 능력이 들어서는 것은 둘째 문제로 하고 우선 아무 것도 기억을 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는 망상과 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하루 밥 세끼 먹기 위해서 서로 경쟁을 하며 애써 다투어가면서 살아간다. 머리속과 마음이 헝클어지고, 항상 몸뚱이에 마음이 집착해 가지고, 너니 나니 따지면서 생사고해에서 부침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깨쳐서 생사에 얽매이지 않고 날이 더웁거나 춥거나 상관하지 않을 만큼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비로소 마음을 안심할 수 있다. 이 마음만은 생명이 있어서 생각할 줄을 안다. 물질도 허공도 선도 악도 여성도 남성도 아니어서 어떻게 변할 게 없으며, 불에 탈 수도 없고 물에 젖을 수도 없고 그러므로 마음은 태초 이전부터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며 성불하여 중생제도하는 그 시간까지도 그대로 변하지 않는 것은 마음뿐이다. 허명자조한 경지, 나도 없고 남도 없는 그래서 아무 것도 없 는, 없는 것마저 없는 경지, 상응을 해서 계합하고자 하거든 둘이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석가여래와 내가 둘이 아니고, 개와 내가 둘이 아니며, 저 태양과 지구와 내가 둘이 아니다. 이렇게 마음이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 서면 모 두가 하나가 된다. 실은 하나도 아니다 모든 것이 나의 마음에 포용되었으면서 하나라는 숫자와 형상을 표현하여 내세울 수도 없다. 모든 것이 나의 품에 들어 와있으며, 있는 그대로 나의 마음속에 포용된다. 그러나 억지로 내것이라도 끌어들이려고 하면 오히려 그것들이 어디론지 달아나버리고 포용되지를 않는다. 제멋대로 앉도록 가만히 그대로 두면, 모든 것이 곧 나이고 내가 곧 모든 것이어서 둘이 아닌 것이다. 주관과 객관은 거리가 없다. 둘이 아니다. 우리가 육체를 나라고 착각하기 때 문에 거리를 인정하게 된다.
발과 머리 사이는 거리가 있겠지만 나하고 거리가 없는 것처럼, 나와 몸뚱이는 어느 부분과도 거리가 없다. 그러므로 등도 나의 등이면서 나이며, 앞가슴도 나의 앞가슴이면서 나다. 그저 그렇게 생긴 것이 나이므로 앞도 뒤도 없는 것이다. 머리가 위에 있고 발이 아래에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머리가 나의 위에서 있는 것이 아니고 발이 나의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계란 없다. 우리의 마음은 작을 때는 바늘끝 위에도 올라앉을 수도 있고 또 클 때는 온 우주를 둘러싸고도 모자람이 없기 때문에, 그 크고 작은 것을 말할 수 없으며 동시에 무슨 거리나 경계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가장자리를 볼 수도 없다.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있다 없다는 말이 모두 들어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있다고 해도 안되고, 없다고 해도 안되며, 또 뮈라고 해도 맞지 않지만 표현할 글자가 하나도 없다. 본래 그 내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있을 유자가 본래 없을 유하렸더라면 없다는 뜻으로 통할 것이고 없을 무자가 있을 무라고 하였더라면 있다는 뜻으로 통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어느 누가 처음 성전헤 놓았으면 그렇게 쓰이기 마련인 것이니, 글자 그 자체는 아무 의미를 가지고 있지를 않는다. 없다는 말은 우리의 약속일 뿐 말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없다는말이 있다는 것 도 아니다. 그러나 있다 없다라는 말은 확실히 없고 있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 라, 다만 우리의 관념에 따라 그렇게 표현하였을 뿐, 실제로는 없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세상은 꿈 같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리 불법을 많이 들어도 별도리가 없고, 부처님 말슴 한마디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세상은 꿈이다.- 이렇게 생각해야만이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이도 해도 될 게 없는데, 다만 이 몸뚱이를 나라고 집착 하기 때문에 하루 밥 세끼를 먹어야 하고, 또 전쟁을 하기 위해서 새파란 젊은이가 총 메고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 인간은 싸우는 그 시간까지도 살아보려고 애쓴다. 육신을 나라고 하기 때문에 공포증이 나고 억울하고 분해한다.
마음을 똑바로 갖는다는 것- 그것이 마음의 본연자세 갖기이다. 이것을 인식하게 되면 거기에 가까워진다. 아니 아무 것도 인식할 것이 없다. 왜 그것이 꿈이기 때문 에 우리는 꿈에 부처님을 만났다. 옥황상제를 만났다. 예수를 만났다. 극락에 갔다. 천당에 갔다. 절에 갔다. 예배당에 갔다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꿈인 것처럼 중생을 제도하였다는 것도 한낱 꿈이다. 가령 개미 같은 곤충도 기어가다 앞에 무엇이 툭 떨어지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촉각을 세워가지고 가만히 더듬거리면서 따져본다. (어떤 다른 짐승이 나를 해치려고 하는가, 어떤 해를 입 히려고 하는가, 아니면 우연하게 위에서 흙덩이가 굴러떨어진 걸 가지고 내가 놀란 것이 아닌가?) 이런 것을 살핀다. 그렇게 살피다가 무슨 소리가 더 안나면 안심을 하고 가던길을 다시 간다.
이것도 역시 사유이다. 자기의 행동을 생각하여 보고, 그 생각으로부터 판단이 나서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참선을 하면 마음을 깨칠수 있다. 정신이란 것은 생명의 충동이요 환경의 충동으로 일어난 것이며 제멋대로 일어 난 것일 뿐 본래는 아무 것도 없다. 외계로부터 충동을 받기 전에는 아무 생각도 안 일어난다. 그러므로 충동에서 일어나는 생각, 그것이 어떻게 나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그때 그때 임시로 생긴 것이어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거기에 충동을 받아 생각을 일으키지만, 본래는 이러한 충동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란 과연 어떤 것이가? 바지껍데기 모양 따라다니가만 하다가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냐? 나는 도대체 어떤 실재인가? 여기서 나라는 말, 나라는 생각, 이것이 무엇이냐, 천파만랑 파도치는 환경의 충동 속에서 우리는 우주의 주체가 무엇인지 찾을 수 없다. 바람 따라 이는 물결처럼 우리는 이리저리 불려다닌다. 불려 다니는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며, 결국 나라는 생각을 내게 된다. 이것 하나뿐이다.
나라는 생각, 이거 하나 가지 고 우리가 나라고 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가 만일 나라는 생각을 놓아버린다면 죽어버린다. 일체 행동도 없어지고, 아무 연구할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근본적으로 이 나를 내놓고는 다른 아무 것도 없다. 부처님께서 막 태어나셔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셨다. 이 독존의 독이 뜻하는 것은 영원불멸한 것, 물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면서 영원히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나라고 하는 데에는 안죽을련다 하는 뜻이 도사리고 있다. 죽기 싫어하는 것이 나라는 생각이다. 이 나라는 한 생각이 없다면, 목을 베어가든 옷을 벗겨가든 두들겨맞든 아무 말도 안할 것이다. 죽어도 죽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러니 단지 나라는 주체, 이놈 속에 나는 영원히 안 죽는다 하는 뜻이 들어 있다. 동시에 나란 절대자유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나는 어디까지나 남한테 구속을 안 받아려고 하고, 어디까지나 자유를 주장한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영원 불멸인 동시에 절대자유를 뜻한다. 그러면 이것이 어찌된 말인고 하니, 바로 생명이란 말이다. 나는 살아 있다는 말이다. 살아 있다라는 말은 이 생명이 온갖 조화를 부리는 주체라는 것이다.
제7장 대지대비할 때
인생과 불교
인생과 불교가 둘이 아니고 우주와 인생도 둘이 아니며 불교와 우리 각자는 둘이 아니다. 또한 석가모니불이 깨친 진리와 우리가 자신의 밑바탕의 부처를 찾아 깨치려는 것도 매한가지이다. 내가 오늘 저녁에 해질 무렵에 간다. 너희들은 부디 딴짓 마라. 극락도 있는 거고 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는 줄 알고 또 사람이 부처가 되는 법이 있으니 잘 명심하고 신심으로 살아야 한다. 인류가 불교 에 돌어오면 전쟁이 없어지고 약소민족들은 완전히 해방이 되어 영원한 독립을 얻을 수 있는 사상이 불교에 있다.
아! 그것이 그러하건대 개가 되어가지고 서로 먹으려고 머리가 깨어지도록 저희들 끼리 물고 싸우는가 하면 개미가 되어가지고 저희끼리 싸우고 일체중생이 이와 똑같은 형식으로 싸우며 헤메이고 있다. 이러고 보니 참으로 부처님 말씀 대로 가련하고 슬픈 것이다 어리석음에 의한 슬픔이 얼마나 슬픔의 존재가 되겠는가. 예수님이나 공자님은 박애니 인이라고 그렇게만 말했지 우리 부처님과 같이 가련함을 말씀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자비를 말씀하시었다. 박애나 인은 부처님의 자비의 설법인 사랑의 자심에 해당하고 슬프고 가련하게 여기시는 비심의 설법은 오직 부처님만이 말씀하시었다.
(반야심경)의 요지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즉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돋 있는 것이니 진공에 돌아가서 소모되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없느느 것이고 있는 채로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이 꿈이기 때문이고 나 자신이 꿈을 일으켜 놨기 때문에 있는 채로 없는 것이다 이 손이 아무 것도 거리낄 게 없는데 괜히 쓸데없이 여기 초가 있고 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초가 부러지기 전에는 손이 통과되지 않는다는 관념이 있기 ㄸ문에 손에 초가 걸리게 되는 것이다. 즉, 이렇게 생긴 티끌로 쪼개지기 전에 물체인 채 그대로 지구가 아니라는 말이 되고 그러므로 미진 자체가 미진이 아니라는 게 어디까지나 물질의 근본을 얘기하는 말이면서 그것이 합해서 구성적으로도 그렇고 동시에 바다, 물 보배라 하는 현상계의 존재 그대로 역시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 걸 세계라 하고 미진이라고 한 것이므로 곧 미진이 아니고 세계가 아니다. 세존이 사해대중과 만났다는 사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되풀이해서 이야기하자면 세존은 대중을 만나기 위해서 그의 정각을 가졌고, 그러므로 오늘의 불교 역시 오늘의 대중을 만나기 위해서 그의 정각을 가져야 한다. 정각이란 인생의 고를 벗어버리는 문제의 해결이다. 이 문제의 해결 속에 오늘의 불교의 존재 이유가 있다. 불교사상에 들어서면 우리는 모두 남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 그러면 가정도 편해지고 내 맘도 편해지고 이렇게 맘이 편하면 전세계가 편해진다. 내 맘이 더러우면 온 중생이 다 더러운 사람이 되고, 내 맘이 청정해지면 온 국민이 다 청 정해진다.
그러니 이 세상을 자유평화롭게 하려거던 네 맘부터 바로 잡아라. 공연히 세상이 냉혹하다 국가가 어떻다 정치하는 사람 나쁘고 부패했다 하지만 그 렇게 아무리 나쁘다고 해봤자 근본적으로 고쳐지지 않는다. 우선 너부터 고치면 모두 좋은 사람 돼간다. 그러니 저만 착해지면 모두 착해진다. 우선 너부터 나쁜데 가담하지 말고, 저 자신 하나가 정화되면 그러면 너를 대하는 사람도 다 너같이 된다. 사람이 나쁘다, 세상이 나쁘다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나쁜 길로 간다는 건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 산이다 물이다 하며, 보이는 대로 높다 깊다 하고, 분명하게 사물을 판단하는 주관의 본체인 이 마음이 모든 생각을 쉬었을 때에는 쉬었다는 것까지도 없어져서 청정하고 순진한 이것만이 독립하여 이렇게 이러한 것을 부득이 하여 법이라고 하며, 이 법을 얻어보았으되, 보이는 것은 없으므로 이것을 부처라고 한 것이다.
나를 잊어버리면 곧 그것이 불도인 것이다 무엇이든지 생각하거나 따지는 것은 마귀의 친속인 것이다. 이 마음은 비록 그대가 깨닫지 못하고 헤매는 때라고 할 지라도 변하거나 잃어진 것도 아니며, 또한 깨달은 거라고 할지라도 마치 손에 쥔 물건을 찾는 것과 같아서 새삼스레이 딴 곳에서 얻어온 것도 아닌 것이다. 변할 수 없는 천진자성의 마음은 흩어져 때가 묻거나 닦아 고쳐서 성해질 수가 없는 것이오. 내가 공연한 착각으로 보는 저 무한대의 허공체가 온통 그대로 이 마음 하나뿐인 것이다. 유와 무의 상대적 입장에서 본말과 시비를 가리고자 하는 의논의 말을 끝맺을 수가 없는 농담 희롱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똥과 같은 것이니 담아다가 버리게 한 것이다.
우리의 여래장인 이 마음은 본래부터 청정하며, 비교 고요하여서 한 법도 간직한 것이 없으므로, 또한 불성도 마음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경 에서 말하기을 저 모든 부처님의 세계도 그것이 또한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누가 불도를 배우고 닦아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소견이라는 불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어떤 바보가 있어서 말하되 내가 이러이러 한 기회에 어느 선지식을 만나서 그 스님이 눈썹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문득 도를 알았다고 하며 달마선의 이치를 증오체득하였다 하여 풍을 치고 도인 행세를 하고 돌아다니다가 정말로 선지식을 만나서는 한 마디도 입을 버릴지 못하고 도무지 마음이 깜깜하여 칠흑같이 되고말며,그러나 어쩌하다가 한 마디의 맞은 듯 하며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날뛰며, 만약에 대답을 못하고 남에게 눌리고 꺾였을 때에는 그 마음이 불안하여 어쩌할 바를 몰라서 당황하나니 그러한 덜된 정신을 가지고 달마선을 배워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경우도 닿지 아니 하는 일이다.
만사에 등한하여 무사히 지내가며 쓸데없는 망상을 내지 말며, 또한 진리를 구하지도 말고 다만 무슨 소견이든지 다 버려라. 버리려는 생각까지도 버려라. 안으로 이 마음을 살피려는 소견이나 밖으로 진리를 구하려는 생각까지도 버려라. 마도나 불도나 할것없이 다 악도이다. 그러므고 문수보살이 유무만유를 통묶어서 그것이 오직 하나뿐인 이 마음의 살림살이인 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보는 부 처님에 대한 소견을 막 내자마자 홀연히 그 몸이 철위산속에 빠져 있어 보인 것 이다.
문수보살은 큰 진리의 실지이며 보현보살은 방편의 권지이라. 보현보살은 권지로써 그 마음을 다스리고 문수보살은 실지로써 그 마음을 다스렸지만 필경에는 권지와 실지가 다 이 평등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은 애초에 부처도 중생도 아니어서 아무 분별이 없는 청청한 진리이기 때문에 만약에 부처의 소견을 일으킨다면 문득 중생의 소견이 앞선다. 유무이거나 단상이거나 한 소견의 주관을 일으키면 곧 객관의 세계가 벌어진다. 주관 객관은 곧 한 물건의 양연인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소승, 대승 나누 는데 소승의 아라한도는 소승불교의 성위로서 곧 번뇌를 끊어가지고 망상을 쉬고 쉬고 하여 번뇌망상을 완전히 끊어서 남음이 없으면 이것이 나한인데 소승은 이것을 소승열반이라 하는데 대승에 비해 마음의 경계가 적으므로 많은 사람을 실을 수 없다는 뜻으로 소승이라 한 것이다.
이들은 번뇌망상만 끊으면 된다는 지론이다. 가르치는 사람도 아무 것도 배울 것 없고 깨달을 것도 미할 것도 없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도 그렇다. 선지식이나 보살이나 부처님도 다 그런 사상이다. 완전한 대성자가 되기 전에는 감기몸살이 되기전에는 감기몸살이 들면 쌍화 탕이라도 먹어야 하고 병원에 가야겠구나 하지만 쌍화탕 먹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건강하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듯이 불법 배우는 것도 육체가 모든 소득이 있는 것이 목표다. 나머지는 다 허튼소리고 육도만행을 해라 하는 것도 부득이 해서 다른 종교처럼 천당에 가서 좀 편안하게 살려고 하느님에게 어기지 않고 늘 복종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지도자의 부하가 되기 위해서는 하는 것도 아니고 모르던 진리를 깨달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제 마음자리 그대로가 곧 진리이 니 이 자리를 깨달아야 하겠다는 것을 확인할 때 비로소 불교 믿는 냄새도 나고 불교 믿는 신도이며 참다운 신행이다. 대승불법은 중생이 그대로 부처가 다 되어 있으니 몸뚱이가 나라는 생각만 쉬 라는 것이다. 소승불법모양 저 혼자 나한이 되어 한쪽에 가만히 앉아 있다면 초견성만 해도 할 수 있다. 남의 상좌가 잘못하면 때리고 그런 가운데 그걸 초월 해서 종일 만나 시비를 하였지만 나는 만나 일 없고 시비한 일없고 그런 심정에 서 얘기해 주고 가르쳐준다. 그 사람은 물론 얘기해도 안한거고 얘기 안해도 안 한 것도 없다. 이것이 대승불법이다. 대승불교의 이런 큰 불법을 성취하려면 이 몸뚱이를 초월하여 남 잘되면 미워하고 시기질투하고 도대체 남의 말 잘안 듣는 그런 중생들 틈에 끼어 그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고 불법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내가 중생을 교화했다, 그 공이 내게 있다, 그런 생각 하지 말고 무주상보시 하라. 이것이 대상사상이다. 세존께서 49년간이나 어두운 중생들을 위하사 일러주신 진리의 불법을 자세히 듣고 철처히 배우자. 그리고 또한 깊이 생각하여 밝게 따져서 할 일과 하지 못 할 일을 철저히 분간한 다음에 버릴 것은 버리고 고칠 것은 고치고 개척할 것은 개척하여 하루빨리 중생을 구제하며 대도를 성취하여 부처님의 은혜를 갚아야 하겠다. 불교는 신비속에 숨어 있는 객관성의 진리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이 마음이 곧 불교이기 때문이다.
왜? 이 마음은 모든 생각과 행동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 마음!마음!마음! 과연 알기 어렵다. 모든 일에 주체성일 뿐이다. 이 마음! 아예 마음 깨달음을 말라. 이 마음! 알고자 하면 벌써 둘이 된다. 둘이면서 또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둘이나 말이다. 어렵다. 어렵지만 신비는 아니다.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이 마음 바로 이놈 보고 안 생각하면 된다. 곧 이놈이다. 이 마음이다. 아무 것도 섞이지 아니한 이 마 음!이놈! 물질도 아니요, 허공도 아니다. 유무를 초월했다. 무엇인고! 알고자 하면 이 마음은 생각으로 변한다. 그러나 변한 것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살피자, 곳 그것이다. 이놈이다. 어렵다. 어려워! 그러나 어렵게 되어서 어렵게 된 것은 아니다. 쉬울 것도 없이 쉬운 것이다.
왜? 곧 너고 나 다. 주인공이여! 주체성이여! 살펴라 챙겨라 너다 나다 이러고 보니 쉽지도 어렵지도 않다. 무사태평이다. 뛰고 놀아라 춤추고 노래부르자. 천지의 근원이요 만물의 바탕이다. 제발 이 주인공님아! 이 세상이 다 무상하고 여기는 고해고 불붙은 집이고 그러니 아예 방심하지 말고 네 일좀 해야지 만날 이 몸뚱이 그렇게 가꾸어줘 봐야 갈 때는 헛수고했다고 인사도 안하고 나를 배반하고 가는 놈이니 그놈만 위해서 그렇게 살지 말아라. 나도 평생에 염불해서 이런 좋은 수가 있지 않느냐. 90장수도 하고 병 안앓고 꼬부라지지도 않고 그리고 가는 날짜 알고 내가 지금 말만 떨어지면 간다 곧 갈 시간이 되었어. 이러니 너희들도 그랬으면 좀 좋겠느냐.
2달이고 1년이고 드러누워 똥을 받아내고 이래 놓으면 그 무슨 꼴이냐. 너희한테도 벌어먹을 것도 못 벌어먹고 모자간에 사로 정도 떨어지고 얼마나 나쁘냐. 부디 신심으로 염불도 하고 부디 그렇게 해라. 일체중생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중생이고 또 일체부처가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고 일체불법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불법이다. 세간에서는 국민학교 부터 대학을 나와거 결혼을 하고 사회에 진출하는 개체성장이 확실히 있다. 그 래서 졸업한 학교가 있고 배운 지식이 있고 그 자식을 평생토록 기억하여 이용을 해야 하는 소득이 있다. 그렇지만 불법을 배우는 것은 불법의 맨 첫 자부터, 소승불교에서부터 배울 것도 없고 수도할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무소득을 목표로 한다.
중생들이 탐진치삼독주에 취해 가지고 육체만 나인 줄 알고 이해타산하고 온갖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여 복잡한 세상을 만든다. 그래서 부처님 께서 (탐진치의 삼독주에서 깨어나라,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버려라, 내가 남이 다 하는 것이 관념이고 없는 것이다)하는 법문을 하신 것이다. 이것이 아공이다. 번뇌망상, 온갖 지식과 경험을 쌓아가지고 하는 법은 이렇고 땅의 이치는 어떻고 인간사회의 도리는 이런 것이라는 관념을 가지고는 서로 죽이려고 하고 전쟁을 하고 그런다. 그러나 네가 생각하는 그런 하늘도 없고 그런 땅도 그런 인생도 없고 그런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몸뚱이도 있는 게 아닌 도리를 말씀하셨는데 이갓이 법공이다.
부처님의 법공이 진리를 듣고 나서 여태까지의 자식을 다 놓아버리고 온갖 생각이 끊어지면 본래 있던 적멸 그 자리가 나타난다. 마치 구름이 벗겨지고 나니 본래 있던 밝은 달이 나타난 것과 같아서 아예 없던 달이 구름 벗겨지고 나서 새삼스레 생긴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아아, 이제 알았구나! 하고 깨달았다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 이 깨달았다는 생각마저 놓아버리는 이것이 구공이다. 오래 익혀온 모든 지식과 사상과 고집물을 남김없이 모조리 버려야 한다.
유마 거사는 (나는 모든 소유를 다 버렸노라)하였으며 (법화경)에는 (과거 20년동안 의 설법은 우선 집안의 똥이나 치우게 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것은 이 마음 가운데에 지니고 있던 모든 생각과 소견이나 일체 주의주장을 몽땅 버리게 하신 말씀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도 자기의 본래 마음자리가 곧 도인 것을 잊어버리 고, 또리어 이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을 부정하고 드디어 달리 따로 법을 구하여 깨달으려고 한다. 온갖 공을 들여 갖은 수행을 다 닦아서 점차로 도를 깨쳐가자고 한다면 아러한 사람은 억만겁을 부지런히 닦아도 영원히 불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수도하는 사람으로서 음식을 먹을 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망상과 욕심으로 먹는 것이요, 둘째는 지혜와 도심으로 먹는 것이다. 지혜와 도심으로 먹는다는 것은 육신을 거두기 위하여 주는 대로 생기는 대로 아다 먹을 뿐이고, 평생에 별로 음식에 탐욕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망상과 욕심으로 맛좋은 음식만 찻아서 온갖 망상으로 오직 입에 맞는 것만 찾아서 양껏 먹고도 허덕거리는 것을 말한는 것이다. 음식 먹는 것만 보아도 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구하는 것이 없으면 곧 이 마음이 청정하여 한 생각의 망상도 일어나지 않으며, 무엇이나 애착하는 일이 없으면 모든 망상이 봄바람에 눈 녹아내리듯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 마음에 생멸하는 잡념이 없으면 그 사람은 곧 부처이다. 부처님께서 8만4천법을 마련하신 것은 저 어두운 중생들의 8만4천의 사견망상을 버리게 하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것은 다만 저 중생들을 교화 인도하여 그 마음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이 한가로운 때, 신심이 두터운 때에는 사찰이 산간에 있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사람들이 분주하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믿음이라는 것을 가지기에 어려운 시대에에서는 신자와 승려들의 대화와 이해소통으로 그 갭을 메꾸어야 한다. 전체가 하나이고 하나가 전체이면서 또 그대로가 없는 것이어서 거금이 아니고 현장이 아니고 모두가 아니다. 이 촛대가 모두 이렇게 섰는 데 우주 전체가 모두 이 촛대 선 곳이 내내 모든 것이 선 자리아고 저기 선 것 이 여기다. 이와 같이 포개있는 거리 없는 것을 보는 것이 불가사의힌 신통이 다.
참선의 넋두리
참선이란 바로 이 마음을 찾는 공부이다. 이리저리 헤매지 않고 이 마음을 직접 찾는 지름길이 바로 참선이다. 불도를 닦는 사람들도 감히 선법에 들어서지 못하는 것은 모두들 저 아무 것도 아닌 허공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겁 을 내어 멀리 절벽만 쳐다보다가 물러서 도망치기가 일쑤다. 그러므로 근래에 불도를 닦는 사람들은 대개가 불교의 지식을 구하는 이들뿐이고, 자심불의 도를 깨닫는 이는 흔들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시달리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먹고 출근하고 많은 일과 사교에 시달리고 그리고 저녁이면 솜같이 지쳐서 집 으로 돌아간다. 밥을 먹고 잠에 떨어진다. 다음날도 같은 일이 되풀이 된다. 그들에게 사찰을 찾을 만한 시간이 없는 것이다.
불교가 그들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그러면 한국 불교는 어떻게 대중들을 찾아가야 한단 말인가? 라 는 다음 문제가 따라온다. 어떻게 대중들을 찾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승려들의 교육문제와 연관된다. 이제는 극락이라는 기이한 선문답으로써 대중들을 구제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너무나 영악하다. 그들은 환상이라든가 가상적 세계의 약속을 뿌리칠 수 있도록 충분히 영리하다. 그러기 때문에 승려들은 그들과 정식으로 만나는 수밖에 없다. 정연한 논리로서 보리의 참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골목에서 외치는 저 엿장수는 도리어 이 마음, 이 법, 이 소식을 여지없이 설명하고 있다. (싸구려 싸구려, 말만 잘하면 거져 준다오) 이말을 알아들었는가? 다겁으로 힘써 마음을 가진 범부들은 밝고 날카롭고 재치있어 입을 버리기 전에 이미 알아듣고 마는 것이다. 이 마음은 이미 이 나의 이 마음에 누가 깨달을 수 있으며 무엇을 따로 깨달을 것이 있으랴. 이렇게 여지없이 제대로 된 뒤에는 저 청산 깊숙이 들어가서 산명수려한 곳에서 밝은 달과 흰 구름을 벗삼아 깃들이는 도인도 있고, 혹은 걸인의 행색으로 시정에 들어가 공원이나 거리에나 시장의 한 구석에 앉거나 서거나 돌아다니면서 연대갑자를 다 잊어버리고, 얼 빠진 등신처럼 그날 그날을 자내는 도인도 있다.
그런가 하면 왕사로 출세하여 임금의 스승이요, 국민의 사표로서 인간을 개조하여 사회를 개선하여 지상극락을 건설 하는 도인도 있다. 대수도원을 경영하여 인간과 천상의 사표가 될 수 있는 수천 명의 승도들을 빈틈없이 지도 육성하고 있는 도인도 있다. 또는 대자대비하여 청정엄숙한 도인도 있는 반면에 광인행과 잡승행도 있다. 이렇게 신비막측한 수도행각에 있어서는 일정한 법칙이 없으므로 법부의 속정으로써 왈가왈부는 범부와 성인을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초월하여 사의불용하는 해탈 아닌 해탈 만행에 대하여 누가 감히 미오를 말할 것이며, 또한 선정이니, 태식이니를 말할 수 있으랴. 참선하면 견성한다고 자꾸 참선만 하고 앉아만 있지, 그러나 참선을 무엇을 무엇때문에 하는 줄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해서는 안된다. 참선하면 견성성불한다고 그러는데 견성성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니 큰 일이다.
옳은 선지식 만나서 그런 걸 알고 참선도 다 해본사람, 그런 선지식 많이 공부하면 그 지식이 되기 때문에 무위법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다. 요새 정립이란 말을 쓰는데 인생관이 정립됐다, 국가관을 정립한다, 확실하게 결정을 해서 흔들리지 않고 튼튼하게 서 있다. 그런 뜻이다. 불교에는 또 선정 이란 말이 있다. 참선을 하는데 다른 생각 하나도 없이 화두만 뚜렷한 그것을 선정이라 하고 삼매에 들었다고 한다.
염불이나 참선이나 진언이나 어떤 공부를 해서 내 몸뚱이도 없고 생사도 없고 그렇다고 자는 것도 아니며 허망한 환상에 빠진 것도 아닌 깨끗한 정신이다. 우리는 동서남북으로 마음이 갈가리 찢겨져서 잠도 못자고 마음도 편치 못한데 이 마음이 딱 정립이 돼서 가장 깨끗한 기분, 잡념이 하나도 없는 또렷한 마음만 남아 있을때, 마음이 정립되어 선정 삼매에 들어섰을 그때에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안락할 때다.
성품이 곧 이 마음이니 마음과 성품이 둘이 아닌 이치를 확실하게 깨친 사람을 조사라고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자기의 심성을 깨닫는 때에야 비로소 달마선종이 전하는 말도 글월도 아닌 교외별전의 이상야릇한 이치를 의논할 수 있다. 중생들이 천만억겁을 살아오면서 세세생생에 익힌 버릇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이 세가지 마음이 뿌리 깊이 마음에서 박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뿌리째 뽑아버리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부득이하여 선정 닦는 방법과 방편지혜를 가르쳤다. 만약 누구든지 이 마음이 본래부터 언제 한번 번뇌망상을 일으켜 본 적이 없는 것을 알고 보면, 무엇을 닦으며 따로 또한 깨달을 법이 있으랴. 보통 초학자로서는 오히려 면방하고 의혹하는 것이 무리가 아닌 것이다.
선종에서 말솜씨나 배우고 돌아 다니는 사람들에 있어서 말로는 생각으로서는 턱도 닿지 않는 앞뒤가 뚝 끊어진 이 화두에 대하여 두 가지로 논평하고 있는데 그 한가지는 조사들의 공안은 이것이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의 그 살림 살이 전체 내용을 그대로 흠뻑 드러내놓은 것이라고 하여, 둘째는 화두를 일심으로 의심하는 바람에 모든 사견과 번뇌망상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여 본래 마음 자리가 저절로 드러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가 다 천만부당한 소견들이다. 참으로 총명 영리한 사람들은 이따위 어리석 은 망상을 내지 않고 바로 정직하고 날카로운 판단으로 뜻깊이 알아차려 화두를 생각하되, 마치 큰 바위가 태산 꼭대기에서 굴러 내려오는 것과 같이 점점 가속도로 굴러서 보기만 해도 무섭게 정진해 갈 뿐이다.
선지식, 스님네들이 화두의 참뜻을 몰라 그 의심이 마음 가음데 꽉 맺혀서 자나깨나 그 의심을 놓을 수가 없게 되면 이것을 참으로 생사를 해탈하고자 하는 진실한 발심인 으로서의 참으로 알고자 한는 의심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얼마 동안은 의심이 죽 잘 나가다가 가끔 의심이 없어지곤 하는 수가 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신심과 결단심과 성심이 부족한 탓이다. 그것은 번뇌망상에 끌리고 잠에 속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공부는, 이것을 주작화두의 공부라고 하여 참선이 아직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한층 더 마음을 가다듬으며 몸을 다시 한번 더 단정하게 도사리고 앉아서 온전하고 똑똑한 정신으로 화두를 잡두리해야만 한다.
만약 잠마군이가 와서 덮치고자 하거든 빨리 그 즉시로 자기가 잠에 쏠려들어가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잠이 오기 시작하면 벌써 눈가죽 이 무겁고 뻣뻣하기 시작한다.이러한 때에 얼른 다시 정신을 챙겨서 몸을 다시 단정히 입속말로 조용하게 화두를 한두번 들먹거리면 잠이 달아나고 온전한 마음으로 참선으로 참선이 잘되느니라. 그래도 만약 잠이 완전히 물러가지 아니하며 화두가 똑똑히 의심이 되지 아니 하고 희미할 때에는 일어나 마당에 내려서서 발끝만을 디디고 수십보를 천천히 걸으면 눈이 가뿐해지고 정신이 깨끗해지느니. 다시 자리에 가 앉아서 천번 만번 화두를 챙기며 의심을 일으켜야 한다. 이와 같이 생명을 떼어 놓고 애를 써가며 차차로 공부가 순일해져서 힘쓰지 아니하여도 공부가 저절로 굴러가며 화두의 의심이 천만배나 힘차게 나가게 되느니라. 이렇게 된 연후에는 화두를 놓을래야 놓을 수가 없게 된다.
마치 산상에서 막 내리구르는 큰 바위와 같아서 붙잡기는 커녕 그 근처에도 갈 수가 없이 쏜살같이 구르는 것과 같이 되느니라. 참선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첫째로 조심할 일은 너무 욕심을 부려 상기가 되거나 몸에 병이 나게 하여서는 공부를 잘 못하는 것이다. 대저 좌선은 힘쓰는 사람은 다만 몸을 단정하게 앉아서 눈을 보통으로 뜨고 또 한 몸과 마음을 구태여 돌아보지도 말며 생명조차 생각지 말고 화두만을 하되 혹시 정신이 희미하여 곤하거나 번뇌망상이 일언나거든 다시 한번 정신을 챙겨서 정진하면 차차로 힘을 얻어서 눈이 안정하며 따라서 마음이 안정하고 마음이 안정하면 몸이 안정하느니라. 그러면 곧 선정력을 얻어서 시간이 가는 줄을 알 지 못하며 몸과 마음이 가뿐하고 한없이 안락하느니라.
그러나 기능을 삼아서는 도리어 사도에 떨어진다. 참선공부로 성취하고자 하는 이는 첫째로 인정을 멀리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구멍 뚫린 독에 물을 채우기와 같아서 뒷구멍으로 정신이 새서 흘러가는 곳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자기 허물을 깨닫지 못하고 그럭저럭 지내다 보면 공연히 시주들의 공밥만 썩히고 헛되이 늙고 마는 것이리라. 정말로 간절히 공부하는 사람은 고개를 뒤로 젖혀도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며 머리를 숙여도 땅이 보이자 아니하고 산과물을 보아도 산과 물이 아니며 다니더라도 다니는 것을 모 르고 앉아도 앉은 것을 모르며 천만대중 가운데 있어도 한 사람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몸이나 마음 할것없이 전 생명을 통틀어 뭉쳐서 한 개의 화 두에 대한 의심덩어리만 남는 것이다. 이 의심을 타파하지 못하면 맹세코 일어서지 아니할 것을 각오하는 것이다. 마치 실족하여 큰 불 속에 빠진 사람과 같아서 여기서 무슨 잡념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놈아! 곧 나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낼 사이가 없다. 그저 곧 달아나는 것이 가장 상책인 것이다. 옛과 지금을 막론하고 공부로 성취한 사람들은 다 이와 같이 했느니라.
성불하는 길
모든 것이 다 허망한데 그중에 허망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뿐이다. 그것을 꼭 알아야겠다 하면 그것은 이미 견성에 연결된느 생각이다. 남이 다 성불하고 맨 나중에 성불해야 한다. 성불해야 안심이지 성불하기 전에는 어디로 가나 고통이다. 천당을 가나 극락을 가는 높은 것 낮은 것 다 있다. 이 마음을 깨쳐놓고 나면 나 보다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다. 잘날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고 머리가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고 그러니 평등의 세계이다. 거기는 시기질투도 없고 사람 만나면 서로 부처니까 서로 반갑고 치하를 하고 지낸다. 그래서 모든 현상은 실다운 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객관을 다 떨어버 리면 그처럼 여래를 보다고 한 것이다.
부처가 중생이요, 중생이 부처니 말이다.
불법과 세간법을 가릴 것 없이 일체소견과 주의주장은 모조리 버릴 것이오. 그러므로 저 부처님 당시의 유마거사는 그 방안에 온갖 물건을 없애버리고 다만 침대 하나만 두고 항상 일체중생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병을 앓으며 드러누워 있다. 우리들이 부처님은 과거사를 다 아신다고 신통이라고 하지만 성불하고 보면 사실은 본래 그런 것 뿐이고 모든 착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어서 종소리가 깡깡이다 땡땡이다 하고 듣는 그런 업을 해탈했기 때문에 과거를 과거인 줄 알고 봤던 것인데 이제 보니 항상 목전지사다.
비유하면 어린아이들에게 하나에 둘울 더하면 몇 개냐고 물으면, 하나, 둘 꼽아 보고서야 셋인 줄 알고 어른들도 좀 복잡한 계산은 수학적인 지식을 빌어서 알게되지만 부처님은 항상 나타나 있으니까 연구하고 셈을해서 아시는 것이 아니다. 일체를 분별하지 않고 즉각으로 아는 무분별지다. 성불해야 하겠다. 생사를 해탈해야 하겠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무상하다 고 하지만 이것은 모두 다 쓸데없는 생각일 따름이다. 부처가 된다는 생각도 없어지고, 그것이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도 없어져서 온갖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 들어가면 성품이 이렇구나, 내가 견성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누구나 한 번 날 수 있다.
이럴때 아차!하고 곧 그 생각을 돌려서 저절로 끊을 줄 알아야 한다. 이렇구나! 하는 생각도 망상이기 때문이다. 이 생각 저 생각 다 버리고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객관대상, 곧 산보고 높은 줄 알듯 이 객관의 사물을 아는 것이라, 제가 저를 알 때는 아는 걸로 아는 것이 아니고 다만 객관세계를 보고 잘못 안 지식을 정리해 버리는 것이므로 아무 생각없고 아무 허물 없는 알줄 아는 마음만 남아있다. 그렇게 되면 알았다는 생각도 저절로 없어진다. 부처님께서는 무분별지로 분별없이 아시고 과거사도 미래사도 분별없이 아시고 중생을 제도하시는 것도 분별없이 제도하셨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견성하는 그날부터 종일설이 미진설로 하루종일 말을 해도 말한 것이 아니다. 견상을 하고 나면 무슨 색안경을 끼고 어떤 조건으로 무엇을 하지 않고 다만 무심한 마음 으로 무심중에서 말을 하고 듣고 하므로 마치 바람소리와 물소리와 같다. 그래서 둘이다. 셋이다 하는 것도 앞에 나타나니까 무심히 알지 우리 모양으로 어떤 선입주견을 가지고 아는 것이 아니다. 마치 거울에 물건이 비추는 게 아니라 일체동작을 우리와 같이 하는 것은 움직임이 아닌 때문이다. 꿈속에서 움직였다는 것이 꿈밖에 가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전혀 거짓말이듯이 사실로 가도 간것이 아니고 와도 온것이 아니고 가도 오도 안했다고 해도 가도오도 안한 것도 아니다.
부처님께서 생사의 큰 꿈을 완전히 깨우게 하는 8만4천 가지 방법으로 지도 하는 그 제일 요긴한 초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문제로서의 문제가 아닌 문제가 아닌 문제이기 때문에 깨닫기 이전의 문제도 아니며 또한 깨달은 이후의 문제도 아니다. 왜냐하면 깨닫기 이전은 어두운 중생들의 생사 꿈이요, 깨달은 뒤라면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의 꿈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과연 이 꿈을 어디서 깨야 깨는 것일까? 생시도 이놈이요, 잠시 들어도 이놈이요, 꿈에도 이놈이다. 태중에서도 이놈이요, 배 밖에 나와서도 이놈이요, 늙어서도 이놈이요, 병들어도 이놈이요, 죽는 때에도 이놈이요, 억만집 이후에 도 이놈이요, 소나 개로 태어나도 이놈이요, 지옥을 가도 이놈이요, 천당극락을 가도 이놈이요, 억만겁 이전에도 역시 이놈이었다.
이 천지에 이놈만은 어디에 빠져 있어도 물 한방울이 묻거나 젖지 아니한다. 진실하고 깨끗하고 자유자재한 변하지 아니하는 실상 자리로서 사고방식이 미치지 못한다. 어느 때에는 중생도 되었다가 홀연히 부쳐도 된다. 그러나 또한 부처도 중생도 아니다. 따라서 생사도 열반도 보리도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 인가? 이놈! 잠을 자다가 잠이 아닌 꿈으로 나갔으니 잠도 아니고 꿈도 채 아닌 그 순간은 면목이 무엇일까? 꿈에서 깨어 생시로 나가니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닌 그 즈음에는 무슨 상태일까? 이놈이 자유 천지에서 뛰노는 법계의 주인공이다.
이놈이 중생의 생사 꿈도 이루고 부처의 열반 꿈도 이루는 것이다. 무실무허한 것도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시는 것은 범부가 이 마음 자리 말하는 이것이 불생불멸의 존재구나 하는 원리를 의지해서 그걸 한번 깨달아봐야겠다고 확실히 인식이 돼서 하나부터 열까지 목숨을 걸고 할 일이 이 것뿐이라고 마음 속에 깊이 작정이 되면 이것이 범부의 발심이다. 그렇게 하다가 정진해서 계행을 지키고 만행을 닦아 점점 깊어져서 아공, 법공, 구공을 초월해서 뭐라고 이름지을 수 없는 그런 자리에 이르면 그걸 (아뇩다라삼먁삼보 리)라 한다.
깨달았다는 것은 이 마음자리를 알아낸 것을 말하는 것이니, 육도만행을 닦는 형식과 하등의 상관도 없다. 육도만행이라는 법은 다 이 범부 중생들을 불법으 로 인도해 들어오게 하는 방편이 아닌가. 가령 무량겁을 닦아서 보리진여해탈실 제법심을 얻어 바로 십지에 올라서서 사과성위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다 이것 은 성불해 가는 도중의 일이므로 불심인 이 마음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부처님의 무심경계에서는 채용이 둘이 아니므로 생각이 움직여도 무심히 움직인 것 이어서 움직인 게 아니다. 마치 물이 일어나고 꺼지고 해도 물의 본 성질에는 아무 변동이 없듯이 이 무심히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채용이 둘이 아닌 구경의 자리다.
이 자리는 부처님뿐 아니라 중생들이 제가 몰라서 그렇지 중생들 자신 도 본래는 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중생들이 망념, 착각 때문에 모든 것이 마음대로 안되지만 사실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내가 마음대로 안되도록 해놓은 것이므로 결국은 마음대로 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한쪽 신통은 있는 셈이다. 이렇게 한쪽 신통만을 고집하다 도리어 구속당하는 중생의 허물을 벗어나는 비밀방법은 오직 한 길 무심뿐이니 인간은 모든 생각 비울 것밖에는 할 일이 없다. 그런데 중생들은 그 전체를 쓰지 못하고 한 쪽 신통만을 고집해서 도리어 구속을 당하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별다른 특별한 보리심을 일으켜 가지고 불법을 배워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대 뜻대로 하라. 그러한 별다른 보리심을 가지고는 무량 백천먼겁을 닦더러도 다만 보신불이나 화신불은 될지언정 그 본래 마음자리인 천진불과는 아무런 교 섭도 없는 것이다.
모든 큰 보살들의 거룩한 일체공덕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이 마음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깨닫기만 하면 곧 이마음이 부처인 것을 안다. 그런데 근래에 불도를 닦는 사람들이 흔히들 곧 이 마음을 고치려고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마음 밖인 딴 곳에서 형식적인 가지가지의 방문에 의하여 헤매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마음을 닦는 법과는 정반대되는 길이다. 모래밭을 한량없이 많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 또는 8만4천의 왕들이 밝고 지나가도 저 모래들은 기뻐하지도 아니하며 또한 소, 개, 염소, 똥벌레가 지나가거나 송장이 썩고 있거나 해도 모래 알들은 싫어하지도 아니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우리의 이 마음도 또한 청정하여 아무 생각도 모양도 없으므로, 범부 중생과 부처가 조금도 차별이 없는 것이니, 다만 곧 이 마음에서 모심할 줄만 알면, 그것이 곧 불법의 궁극인 것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당장에 무심할 줄 모르면 영겁에도 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또한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문자에 사로잡혀도 생사를 벗어나가기 어렵다. 한 마디 법을 듣고 즉석에서 무심해 버렸거나 무량겁으로 드나들며 한량없이 닦은 뒤에 비로소 무심하여 부처를 이루는 이거나 그 결과는 다 똑같은 것이다. 무심하면 곧 부처이니 새삼스러이 닦을 것도 없고 깨달아 들어설 곳도 없고, 또한 이 지경에는 사실상 얻은 것도 없고 또한 얻을 것도 없어서, 진실하며 헛되지 아니한 것이다. 쉽게 깨달았거나 그 도의 공덕에 깊고 얕음의 차별은 없는 것이다.
꿈틀거리는 작은 벌레까지도 저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무량한 보살 대중과 같이 이 마음으로 평등하여 털끌만큼도 다름이 없다. 수도하는 사람으로서 주의할 바는 세상만사를 다만 보고 듣는 데서 그칠뿐, 옳고 그른 것은 따질 것이 없으며, 또한 그러한 일에 불평만으로 감정을 내지 말 것이며,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을 떠나서 따로 이 마음을 찾으려고도 말 것이며, 보고 듣는 것을 버리며 따로 참되고 좋은 법을 얻으려고 하지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고 듣는 이것만이 곧 참된 본래 마음이라고 생각하여도 어긋나 는 것이다. 또한 보고 듣는 것과 떨어져 있는 줄 알아도 잘못이다. 어떠한 주의 주장을 세우지 말며, 무슨 일이든지 살고 죽는 일에까지라도 태연 무심하면 탕탕하여 걸림이 없는 경지에 소요자재하므로, 어떠한 곳일지라도 수도장이 아닌 곳이 없다. 본래부터 청정한 부처인 이 마음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또한 소유물을 간직한 것도 없다. 어느 때든지 도를 깨닫는 것은 시간이 걸리지 않고 순간작이어서 1초도 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깨닫고 보면 저 과거에 천만다행으로 드나들며 수행을 한 것이 다 헛된 짓 한 것임을 마침내 알게 된다.
마치 힘센 장사가 자기 머리에 꽂은 구슬을 찾던 일과 같아서, 다만 본래부터 자기 머리에 꽂혀 있던 그 구슬 을 발견한 것 뿐이므로, 따로 찾느라고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한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구슬을 구슬대로 온전했던 그 일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께선 꿈 밖에서 꿈울 깨어가지고 (그대로 전체가 꿈 아니라) 하긴 그게 바로 무실무허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짓말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한마디로 하자면 환의 존재이기 때문에 허망하다. 그레서 (내가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 한다)고 하셨다. 대개 도를 닦는 데는 그 방법이 한량없으나 그것을 묶어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정신으로써 들어서는 법이요. 둘째는 행동으로써 들어서는 법이다. 먼저 정신으로써 들어서는 방법은 불도를 닦아 이 마음을 깨달아 죽지 아니하고 우주에 자연스런 사람이 되고자 하면 부처님의 말씀과 조사들의 말씀을 자세히 배우고 철저히 들은 다음에 백번 죽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물러서지 아니할 발심과 정신을 성취하여 부처님과 달마조사에지지 아니할 용기로써 저 청산 깊숙이 들어가서 조용히 앉아 생각하되 모든 중생들이 다같이 진실하고 허망하지 아니하며 천지만물에 걸림없이 자유자재한 이 마음 하나만이 자아일 뿐인데, 다만 이 육신을 자아라고 착각하여 일어나는 번뇌망상 때문에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만약 허망한 일을 버리고 마음의 고장으로 돌아가고자 하거든, 먼저 이 마음을 꽉 막힌 벽과간이 부동하게 하여 앞뒤가 뚝 끊어져서 적멸무위하며 청정 본연한 고장 마음이 되게 해야한다. 여기에는 나도 남도 없으면 범부와 성인도 없나니 이에 굳게 멍추고 어떠한 일 을 막론하고 절대로 딴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일은 아예 경전이나 어록 같은 것은 공부에 손해가 되는 것이니, 보지 말고 열심히 정진만 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천진한 본 고장이므로 새삼스러이 이것을 되따지거나 또한 딴 망상을 내지 말고, 그대로만 정진하여 고요하고 깨끗하게 나아가면 이 마음을 크게 깨칠 날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정신 놀음으로 들어서는 방법이다.
다음 행동으로 들어서는 방법은 이른바 네 가지 방법이 있는데, 8만4천 가지 수도방법이 다 이 가운데 들어 있다. 그 네 가지 방법이란 원수풀이와 인연 맡겨 두기와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 것과 조작없는 본연의 마음 그대로 살기이다. 첫째, (원수풀이)란 것은, 만일에 공부하는 도인이 어떠한 고생을 당할지라도 스스로 생각하되 내가 과거 무량겁에 이 본연의 마음을 등지고 허망한 업보육신을 가지고 나라고 하여 찬당 지옥으로 생사에 윤회하면서 한량없이 남에게 원수도 맺었을 것이며, 남의 가슴을 태우기도 했을 것이며, 남을 손해보게 하고 남의 생명까지 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금생에는 큰죄를 지은 일이 없지마는 이것은 다 남의 전생에 지은 죄로 인과응보가 닥치는 것이요, 저 하늘이나 인간 들이 만드는 일은 아닌 것이니, 달게 받고 추호도 원망하지 말아야 할 것인 줄 알고 진실로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하시기를 (고생을 당하더라도 걱 정할 것은 없다)고 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이러한 마음 가짐이 근본마음과 합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원수 를 만날 때 일수룩 도는 더 높아지고 무량겁에 한량없이 지은 죄를 다 창산하게 되는 것이므로 이렇게 참으로 발심하여 도를 닦는 사람은 저 천당과 지옥에 걸림이 없어서 자유자재로 때와 곳이 다 수도장이어서 도만 높아지고 본래 마음은 점점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이 수행방법을 (원수풀이)라고 한다.
둘째 (안연에 맡겨두기)라는 것은 인간과 만물이 다 뚜렷한 자아의 본성을 상실하고 있다. 그것들은 웬일인지 까닭 모를 이것 저것의 인연들이 뭉쳐 있다가 없어질 뿐이다. 그리하여 더러는 고생도 하다가 잘 살기도 하지마는 저 뜬 구름 같이 인간만사가 다 인연들이 서로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과보가 닥쳐와서 거들거리고 호강을 하지마는 이것도 또한 뜬그름 같아서 복이 다 되고 인연이 흩어져서 거지가 되는 것이 저 인연 그것들이 그러는 것이지만 이 마음은 털끝만큼도 변동이 없는 것이다. 행복에도 놀아나지 아니하면 이것이 마음의 본연면목에 들어맞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 수행방법을 (인연에 맡겨두 기)라고 한다.
셋째,(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기)란 것은 일체중생들이 너무도 오랜 동안을 두고 거룩한 이 불멸의 마음이 있는 줄을 모르고 항상 그 허망한 몸뚱이에만 애착해서 여기서 죽어 저곳에 나고 저것에 죽어 여기서 나고 하여 4생6도로 돌아 가며 태어나 언제나 그 태어난 곳을 내 고장으로 애착하고 온갖 살림살이를 다 구한다. 지각이 있는 사람은 이 마음을 깨닫고 저 세속의 허망한 온갖 일을 다 버리고 진실하고 허망하지 아니하며 인생의 고장인 이마음으로 돌아와서 다 마음이 청정하며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서 할 일이 없는데 크게 안심하는 것이다. 이 몸이 비록 세상에 붙어 있으나 천지만물이 허망하여 다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 소원할 것도 없으며, 또한 좋아할 일도 없다.
죄와 복은 정함없이 항상 서로 꼬리를 물고 바꿔지는 것이므로 그것을 따르다가는 잠시도 믿고 안심할 도리가 없다. 이러한 삶의 뜻조차 모르면서 한없는 허욕으로 살겠다고 눈코도 뜰새 없이 날뛰어야 하니, 마치 물에 빠진 것 같고 불타는 집안에서 헤매는 것과 같 다. 이 몸이 원래 고생주머니인 것인데 누가 감히 편하고자 할 것이가. 이 세상이 이러한 곳인 줄 알았기 때문에 온갖 생각을 다 쉬어버리고 아무 것도 구하는 것이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구하는 것은 다 고생이니 구하지 아니하면 참 편하리라)고 하셨다. 반드시 그러하다. 세상일에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 하면 그것이 곧 첫째가는 행복이고 자유이며 해탈인 것으로서 또한 도인의 행세인 것이다.
넷째 (제대로 살기)라는 것은 이 마음이 본래 모든 형상이 아니므로 온 우주에 두루하였나니 청정하여 아무 욕심이 없는 것이므로 불멸하며 자유하며 빛과 함 을 내며 우주를 창조하며 그를 다스린다. 그러므로 이 마음은 일체만물의 바탕으로 4행6도에 묻는 때의 일이 없으며, 또한 애착된 일도 없으며 피차가 없기 때문에 이 마음을 법이나 진리이니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에 법에는 깨졌다는 부처의 허물도 없으며, 탐옥의 중생의 때도 없으며 또한 나라는 아만심도 없다)고 하셨다. 지혜있는 사람이 만약 이 마음의 이치를 믿고 알아들었다면 마땅히 본래 마음으로 돌아와서 이 영원한 생명, 자유의 생명이 제대로 살 것이다.
광명을 찾아서
우리 마음속의 본태평 천진불로서 가없이 일체중생을 비추면 환몽이 곧 진이며 중생어가 곧 여래어며 중생심이 곧 부처마음이다. 치산치업과 사농공상의 생업은 모두 본태평 천진불이 전의하는 용상이라 도무지 이 진여의 본성을 떠나 있는것은 없다. 다만 중중생생이 조업한 미집으로 인하여 스스로 속아 스스로에 얽매여 미와 오,범,성 생, 불,자와타,인과과, 염과정, 성과상 등을 소유하여 분별 하고 계박해서 해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본태평 천진불은 성성하여 요요일광 이다. 중생들이며, 항상 진신수수하라. 스스로 조업헌 미집을 절파하는 신심을 개오 수수케 하여라. 신심은 보리심을 발하는 시초이며 일체제불의 근원이 됨이며 불과성취의 인연이 되느니라.
신심을 이거한 중인은 사나의 신심이 수숩된 만채라 이다.중인들이여, 오늘 우리들이 믿고 있는 것이 몽환인가 살펴보자. 우리가 진여에 계합하며 진신하고 있다면 중생을 보살피는 자비심을 더욱 현발시키고 우리가 몽환에 편잠하였다면 이를 간파하여야 한다. 중인의 대병은 몽환인데 스스로 이병에 빠져 병을 이롭게 하는 삼독치심을 가짐은 타삼악도할 보과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 산문은 산정의 납일처럼 소란하다. 이것은 공부에 마음을 두어 운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늘은 맑고 푸른데 뱉을 일점이 부유하지 않는 하늘은 그저 무심할 뿐이다. 산문은 운수의 왕래와 담선이 있어야 한다. 사미행자의 율의가 장로비구의 습행이 되어야 한다. 산문의 청규는 백장의 정맥이요 승증의 생명이다.
이것이 조계산을 푸르게 하는 총림이다. 총림은 신행이 발원하고 행과가 만발하며 성취가 증득하는 곳이다. 합나행과 마나연이 없는 총림은 한림의 정골처럼 번뇌스럽기만 하다. 그러므로 총림은 계, 정, 혜 삼학을 참수하고 이행을 구족하는 곳이다. 이것은 중생을 제도하는 여래심의 본처이다. 산문처처와 총림방방이 모두 보살의 보시장이 되어 방생을 자재롭게 하여야 한다. 우리들 조계산하의 승가는 일시, 일법, 일념,일행이 부처님이 유계한 정법에서 수습하여야 한다. 유계의 범주를 벗어남은 스스로 산문출송을 자인한 소업이리라. 사문은 고행이다.
안위한 해탈을 소작함이란 도시 몽한 속의 공화를 견취함이다. 고행은 자기극복의 시초이다. 자기를 주장하는 자만을 조복받기 위하여는 고생스러운 참회가 있어야 한다. 중노릇을 꿈같이 편하게 하려는 것은 이미 중노릇이 아닌 것이다. 중노릇은 중생활을 대신하여 사는 삶의 처음이다. 삶의 처음은 황무한 벌판에서 길을 만들어 나아감이다. 칡덩굴 가시밭길을 탄탄대로 만드는 일이다. 중생을 앞질러 사는 중 노릇이므로 여기는 각오와 결심이 있어야 하다. 항사모래알 보다 긴 겁수로 중노릇을 하였다 하더라도 중생을 대신하고 중생을 앞질러 고행하고 제행을 일삼지 아니한 중 노릇이라면 한 찰나 희념보다 못한 죄업 속에 살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중인승가는 중 노릇의 큰 마음을 지어 염념증진 하고 신신작불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중생들이여, 중생이 중생을 보살피고, 중생이 육도를 보살피고, 중생이 인다라망을 보살피고, 중생이 유정무정 일체중생 실유불성을 보살피고, 또한 중생이 보살피는 그 중생을 보살피는 새해가 되어야 생불이 호융하여 무별무이한데 생불을 어디서 찾을 건고?
중생이여! 사행하여 사과하는 열반을 증득하자. 그러면 범속과 유정과 정각유정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모두가 일생성불의 우담발체를 개발할 것 이다. 금시금일에 생불을 호응케 하고 중생을 보살피게 할 것이다. 이것은 초발 신심을 구경불과에 오르게 한 문무의 공부다. 승가여! 조계산문이여! 안으로 계, 정, 혜를 수업하고 밖으로 방생보시하여 출가장부의 본지를 살리자. 우리의 해태심에 삼아승지겁의 과보가 됨을 자각하여 중 노릇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여 도제양성, 포교사업, 역경불사를 잘 이끌어 나갈 것이다. 이 삼대본업의 처음도 진승의 행동에 있고 회향도 진승의 노력에 있는 것이다. 능엄의 대다라니백번 외어 참회한다 손치더라도 중생을 보살피는 큰 마음보다 못하다 응무소주이생기심인데 보살되는 마음이 보살이다. 사부대중 즉 비구, 비구니, 청신사, 청신녀들이여 우리는 정계를 지키며 정법을 수호하여 스스로를 보살피며 구제하는 데 힘쓸지어다. 그리하여 나라 안팍과 시방세계가 부처님의 광명받으사 평화롭고 풍요로운 열반 깃들게 하여라.
욕도 칭찬도 없는 자리
요사이 구두선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우리 절에서 쓰는 문자가 하나씩 하나씩 사회에 나간 말입니다. 법을 입으로 배운 사람이지 참말로 앉아서 정진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을 구두선이라 한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거짓말하는 것, 책임없 는 말, 실천없는 말을 뜻하는데 그러나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 집에 불이 났는데 집안에서 장난에 정신이 빠진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아이들이 평소에 좋아하던 양수레 사슴수레 소수레가 밖에 있으니 나와서 가지고 놀라고 하여 아이들을 불덩이의 재난 일보 직전에서 무사히 구출해냈다 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자식들을 살리려고 부모가 거짓말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참말보다 더한 참말입니다.
부처님이 49년 동안 고구정년으로 말씀하신 8만 4천의 법문도 사실은 중생들의 꿈을 깨워주기 위한 방편일 뿐 그 실상 자리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살고 계신 박고봉스님이라고 공부를 잘하는 스님인데 송만공스님 제자입니다. 한번은 고봉스님이 만공스님 계시는 토골 을 내려다보고 (도둑놈 만공아 송 만공아. 네가 견성을 했어? 이 도독놈아. 견성을 함 내놔 봐라.)이렇게 욕을 한나절을 퍼부어 놓고는 절 큰방에 내려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절에 참나무 절굿대가 큰 게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찧을 수 도 없는 것이데 만공스님은 이것을 들고 (이놈을 이것으로 쳐 없앨 수밖에 없다. 욕을 해도 분수가 있지)하며 이 몽둥이를 들고 찾아 다닙니다. 만공스님의 힘이 장사입니다. 밥 푸는 놋주걱, 놋그릇 두꺼운 것을 종 만든다고 많이 모았는데, 만공스님 혼자 앉아서 종이 포개듯이 접어서 갭니다. 우리가 평소에 만공 스님 힘쓰는 것을 이때 처음 봤습니다. 만공스님이 힘이 장사인 줄을 대개 알고 있는 것은 김 좌진 장군과 팔씨름을 하면 왼팔은 만공스님이 이기고 오른팔은 비기어 승부가 없을 정도입니다. 김 좌진장군과 잘 알아서 가끔 놀러오고 그랬는데 뚝심으로 우뚝 쓰는 힘은 만공 스님의 힘이 훨씬 셉미다. 그은 생각없이 쓰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 스님 하품하는 소리가 이십리 밖에서 들린다고 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만공 스님이 (이 놈의 자식, 세상에 망신을 줘도 분수가 있지 이렇게 까지 할 수가 있느냐. 비구니 비구가 있는 데서 이게 무슨 짓이냐. 용서할 수 없다. 이놈이 여기 있느냐. 어서 큰 방문을 열어라)호통을 칩니다. 그러자 고봉스님은 문을 활짝 열고 쓱 내다보면서 (스님 왜 그러십니까.) 하고 태연하게 인사를 합니다. 그러니까 만공 스님은 (허허)하며 돌아서 가면서 바윗돌을 번개처럼 때리는데 바윗돌이 잘라져서 몇 동강이 나 버렸습니다. (스님 왜 이러십니까.)하는 소리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지금 금강경을 배웠으니 알 수 있는 소리입니다만 송만공이라는 존재가 뭐 있느냐는 말입니다. 존재가 아닌 존재인데 그것은 욕을 할 수 없는 것은 더 우스운 일이 아니냐는 뜻입니다. 만일 성내는 마음이 생기면 언제 성불하려고 그러느냐는 겁니다. 그 렇지만 깨쳤어도 한편은 역시 중생이 남아 있고 한편은 근본자리를 부처님과 같 이 깨쳐 놨고 아직 수치가 덜 떨어져서 그런 것입니다. 자성을 깨쳐서 자기 본 래의 면목을 보면 그중에 공부를 옳게 하거나 약갼 잘못하거나 시장을 돌아다닐 때도 그것을 보고, 산중에 있을 때도 그것을 보고 전부 그겁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그것을 보고 돌아앉을 때도 그것을 보고 그런 경지인데 만공스님 고봉스님 두 분이 서로 충고한 것입니다. 당나라 당시 조주스님이라고 굉장한 도인이 있었는데, 그분이 계시던 절에서 십리 밖 산밑에 한 노인이 호떡장사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공부하는 스님네들이 조주스님을 한정없이 찾아오는데 처음 오는 사람은 그 노인이 있는 곳에 갈림길이 있어서 자연히 길을 묻게 됩니다. 그러면 그 노인은 절로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갈은 가리켜 줍니다. 그 행인은 바로 가는줄 알고 한참 올라가면 그 노인이 스님 스님 불러 놓고는 아, 그리 가면 절이 없으니 이리 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되돌아서서 내려와서는 다시 올라가서 절에 가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한 사람 두 사람이 아니고 열 사람 백 사람이 그렇게 당하고 보니 (늙은이가 처음 부터 바로 길을 가리켜 주지 않고 꼭 한 번 저쪽으로 잘못 가리켜 놓고는 다시 불러서 가리켜 주고 스님네들를 놀린다.)고 여론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문을 둘 은 조주 스님이 당장 주장자를 들고 오늘 이자를 타살해야겠다. 공부하는 스님네 한 시간이 바쁜데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니 당장 때려 죽여서 지옥업보를 적게 받게 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내려가십니다. 그러니 스님네들도 뒤에 멀찌기 떨어져서 어떻게 하나 하고 따라갑니다. 조주스님은 일부러 다른 데서 처음 오는 사람처름 노인 있는 데로 옵니다. 노인 한테 길을 물어 보니까. 역시 다른 길을 가리켜 줍니다. 그래 스님들은 저놈의 늙은이 오늘 혼나겠다고 하면서 어떻게 되는가 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조주스님은 그저 고맙다고 하고 그냥 올라 옵니다. 그리고는 절에 와서 앉아 계십니다. 이것이 조주스님이 그 늙은이를 쳐서 타살한 것입니다. 그게 어찌해서 타살인가. 여러분 스스로 한 번 풀어 보십 시오. 천 번 만 번 설명한 것입니다.
아인시타인이 원자가 우주의 궁극체인 줄 알았는데 요새는 또 더윽 분석이 돼서 전자는 중성자니 양성자니 하는 것을 밝혔고 또 그게 마지막인 줄 알고 이렇게 생각했더니 더 근본이 되는 에네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념으로 알지 사실은 어떤 것이니 모르는 것입니다. 세밀한 그것도 물질은 물질이겠는데 이놈이 때로는 물질로 전자로 양자로 중성자고 보이고 아떤 때는 그게 또 그것 도 저것도 아닌 에네르기 존재로 보인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물질도 아니고 전자도 아니고 에네르기 아닙니다. 이래도 보이고 저래도 보이고 하니까 마치 종소리가 깡깡도 땡땡도 아니라고 하면 사실 종소리의 실상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과 한 가지입니다.
그러니 아인시타인이 현상계가 아니고 먼지가 먼지가 먼지가 아닌 이 이치까지 충고를 해 준 턱입니다. 그러니까 이렇다 저렇다 생각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은 다 참 진리인 실상과 현상계는 틀립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의 이름을 듣고 어떤 개념을 가졌던지 그 개념과 딱 맞는 사실이나 똑같은 물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그 이름을 듣고 그 내용의 설명을 듣고 짐작해서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것과 사실과는 맞춰 보면 전혀 반대도 있고 또 비슷한 것도 있지만 딱 맞는 것 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령 비행기의 경우에도 세밀한 설계를 해 가지고 그대로 잘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조립해서 내어 놓는 그 시간부터 숨쉬는 시간부터 설계와는 달리 부패해 가는 세상입니다. 또 만드는 그 도중에 설계와는 달리 부패해 가는 세상입니다. 또 만드는 그 도중에 설계와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모든 것은 찰나도 쉬지 않고 변멸하는 것이므로 완성품의 반만 만들었다 해도 실제의 설계와는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천 시간쯤 비행해도 모르지만 엄밀하게 따져서 물질적으로는 변동은 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설계에 맞은 건축도 제대로 할 수 없는거고 현상이란 본래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따지는 분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불자를 안 들어 보고 하는 소리밖에 안됩니다. 이런 식으로 따진 게 금강경이니 글자의 뜻은 전부 확실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삼천대천세계도 세계가 다 세계고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 불교는 과학적이요 철 학적이요 동시에 완전한 종교입니다. 과학이 아니 과학, 종교가 아닌 종교, 초과학, 초종교인 동시에 초도 아닙니다. 그런데 더구나 아무것도 없는 걸 가지고 몇억만 배 했으면 말이 안 되고 그게 몇 배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맑아지면 없는 걸 없는 것으로 보는 도수가 있고, 그와 동시에 사실은 아무 도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뵈는 것이니 도수가 있다고 하면 마지막이고 없다고 하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부 과학적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현대의 과학이나 철학이 고도로 발달할지언정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현대의 과학이나 철학이 고도로 발달할지언정 이런 원리 를 떠나서 허황되게 설명한 것은 한 자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미진 전자같은 요소들이 뭉쳐서 태양이니 지구덩이니 화성이니 목성이니 금성이니 하는 세계가 이루어진 것이므로 세계가 아닙니다. 그게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있는 것 같은 거지 그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까지 세계가 말하고 중생이라 말했지만 그게 세계가 중생이 아니며, 있다면 모두 꿈같이 있는 것입니다. 파초 줄기 속에 알맹이가 있는지 자꾸 벗겨 보면 껍데기 뿐고 알맹이는 없습니다.
이처럼 현상계 전체를 파고 들어가면 나중에 아무것도 없는 데 도달합니다. 그 래서 허공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전자 이전에 에네르기 이전에 허공이 변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됩니다. 역시 광명이 멀리 가서 소모되고 없는데 로 돌아가는 걸 보니 역시 물질이 생긴 것도 없는 데서 생겨 없는 데로 돌아가는 게 아니야 하는 것은 과학자들도 인정하는 단계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주의 구성이 아무것도 아닌 허공인데 허공이 우주나 전자 산소 수소로 보 일 뿐 참으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반야심경에 색즉시공공즉시색 그러는데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물질, 곧 색이요, 지금 있는 것이 곧 없는 거라는 그 말입니다.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은 오 천만 자나 되는 요점을 이백칠십 자로 종합해서 기묘하게 되어 있는데 이 반야심경의 첫 구절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즉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니 진공에 돌아가서 소모되어 있는 게 아니라 있는 그 대로 없는 것이고 있는 채로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이 꿈이기 때문에 내 자신이 꿈을 일으켜 놨기 때문에 있는 채로 없는 것입니다. 이 손이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는데 괜히 쓸데 없이 여기 초가 있고 손도 있고 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초가 부러지기 전에는 손이 통과되지 않는 다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손에 초가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생긴 티끌로 쪼개기 전에 물체인 채 그대로 지구가 아니라는 말이 되고 그러므로 미진 자체가 미진이 아니라는 게 어 디까지나 물질의 근본을 얘기하는 말이면서 그것이 합해서 구성된 지구라는 이 현상계 모든 물질도 그대로 곧 물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렇고 동시에 바다 물 보배다 하는 현상계의 존재가 그대로 역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 다.
그런 걸 세계라 하고 미진이라고 한 것이므로 곧 미진이 아니고 세계가 아닌 것입니다. 그걸 무엇 때문에 문제로 삼았느냐 하면 (이게 지구다, 요거는 우리 대한 민국 이다, 저거는 중공이다.)그런 생각 이런 착각을 갖고 쓸데없는 객관에 대한 욕심을 가지게 하는 데서 문제가 벌어진 것입니다. 내가 사는 동안에 천지가 있는 거고 만일 천지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존재라면 천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천지는 두드려 부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이 (나)를 도외시하고 공자니 맹자니 노자니 예수니 하는 분들이 객관이나 신에게 자신을 예속시켜서 구속되 고 얽히고 만들고 그랬지만, 인류의 오천 년 문화의 사상은 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생긴 것이고 전재하는 것이데 이 (나)를 밝히지 않고 항상 객관에서 진리를 구하는 데서 잘못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불교는 이 (나)의 실제를 깨닫는 것 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현인이나 성인은 불교에서 말하는 불보살의 근처도 못가는 정도입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틀린 겁니다.
모두가 다 마음의 그림자고 꿈이고 환으로 있는 겁니 다. 그러나 미진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미진이라 한다는 말은 미진이라 이름지 을 수 있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고 무엇이든지 이름을 붙여 주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크다고 하면 안크다는 말이고 작다고 하면 크다는 말이고 이렇게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 상대성 원리를 연구한다고 하지만 아인쉬타인은 수박 겉 핥기로 조금 애기하려고 하다 갔지 불교에서 말하는 근원을 철두철미하게 알맹이까지는 미처 모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을 탁 놓아버리고 세상을 살면 수월합니다. 돈 모으는 것도 참말로 모으려는 욕심으로 모으는게 아니고 아무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하고 하는 것이므로 남 주는데도 아무 힘 안 들이고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수 물 삼자가 청정한 것입니다. 누가 내 눈이 필요하다면 눈도 빼주고 코도 베어 주고 온갖 것을 다 보시하자는 것입니다.
삼천대천 세계의 먼지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여러 백천 겁을 두고 약도 되어 주고 잡아 먹혀서 양식도 되어 주고 하면 그 복이 한량 없을 겁니다. 그런데 재산이나 칠보를 삼천대천 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보시하는 것은 한 생각 비우면 할 수도 있지만 몸뚱이 생명을 보시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것도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한평생 두평생도 아닌 한량 없는 세월을 두고 한량없이 많은 몸을 남에게 보시했다면 그 공덕이 한없이 많겠지만 그러나 앞에서 조주스님이 길을 잘못 가리켜 주는 노인을 타살하겠다고 내려가서 별일없이 고맙다고만 하고 돌아온 소식, 만공스님이 절구공으로 고봉 스님을 때려 죽인다고 하다가 (스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하는 한 마디에 박장 대소하고 그만 둔 그 소식을 체득하지 못하고서는 참으로 큰 공덕을 지을 수는 없으며 금강반야의 도리를 받아 지닐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제 8장 인생시초
산다는 것
곰곰이 생각하고 찬찬히 따져보소 착하거나 악하거나 지은 운명 그대로다.
대 자연과 인과사회 흘러가는 인과법칙 그 테두리 그 안에서 될만치 되고 만다.
원인은 마음대로 결과는 구속이다. 착하고도 잘못 살고 악한 사람 잘만 사니 세상 이치 진리 없다 함부로 원망마오.
전생에 복 못 지어 명이 짧고 복이 없다.
이 세상을 원망 말고 이 내 마음 바로잡자.
강태공은 성인이되 운수 나쁜 팔십년은 앉은 자리 풀도 안나,
세상 멀리 동정호로 곧은 낚시 드리워서 액운을 넘어서고 행운의 팔십년은 주문왕의 스승되다.
석가여래 세존님은 성인 중의 성인으로 그 재질과 그 인격은 천상천하 독보로다.
사십구년 팔만장경 인류의 태양이요,
생명근원 이 내 고장 돌아가는 그대로다.
전의 생에 지은 선악 금생 운명 좌우한다.
천만억겁 전생부터 옳은 스승 못 만나서 이리 짓고 저리 닦아 죄와 복이 원인되어 결과 이미 정해졌다.
원인있고 인연 닥쳐 결과 어찌 없을소냐.
원인에 서 결과 맺고 결과 다시 원인되어 나고 죽고 나서 생사고해 돌아치니 억만겁에 끝이 없다.
부귀빈천 그대로가 영웅범부 할것없이 도대체가 생사윤회 인과법칙 구속한다.
나고 죽고 죽고 나서 생사 서로 꼬리물어 한정없는 생사바다 몽중고생 지루하다 잘되어도 꿈속이요 못되어도 꿈속이다.
천생인간 도사이신 대자대비 불타께서 고해중생 건지고자 삼천년 전 그 옛날에 인도나라 정반왕궁 태자로서 태어났다.
십구세에 입산수도 삼십세에 견성성불 오탁악세 고해중생 암흑천지 횃불들어 사십구년 전도하니 사부제자 생겼도다.
팔만사천 대장경은 아난존자 전하시고 정법안장 불조혜명 가섭존자 대를 잇고 팔십평생 갸륵한 일 여덟토막 나눠보자.
첫째는 천상에서 마야부인 태중으로
둘째는 사월팔일 룸비니원 탄생하고
셋째는 사대문 밖 인생허망 깨치시고
넷째는 이월팔일 성을 넘어 출가했다.
다섯째는 설산수도 한번 앉아 육년 동안
여섯째는 정법으로 마왕 파순 항복받고
일곱째는 이월보름 구시라국 열반하다.
이와 같은 거룩하신 여덟가지 모법보여 시방세계 중생제도 팔천번째 왕래로다.
팔만사천 대장경은 둥글고 또한 밝아 인류문화 끼 침이니 보배 중의 보배로다.
석가여래 전전생에 가리왕의 혐의입어 눈빼이고 코귀베고 사지마저 오려내니
불법보호 대원으로 거룩하신 옥황상제 보다못해 크게 성내 돌개바람 뇌성벽력 돌우박을 퍼부으니
가리왕은 참회하고 천상선약 전단향토 바른 즉시 잣우어서 원상여전 회복되다.
인육선인 대보살은 가리왕과 상제에게 한결같이 무심하다.
석가여래 과거전쟁 백천만생 수도할 제 반구절의 법 듣고자 이 몸 죽어 바치면 서 영홍천도 법을 빌며 내생 일을 부탁하니
법을 배워 도 닦는 이 아니어찌 본안보리 또 한가지 예를 들자.
옛날옛적 국옹 때에 독수리에 쫓겨드는 비둘기를 살리려고 만승천자 귀중한 몸 다 뜯어서 새밥 주다.
몸과 마음 조복받고 무상대도 성취하여 생사를 초월하여 온 세상을 구제코자 이처럼 애를 쓰니 시비가왕 갸륵하다.
팔만사천 대장경이 한자한자 낱낱이가 무수생명 바 쳤으니 그대로가 뼈살되다.
다겁다갱 드나들며 세세생생 애써 모아 팔만장경 전해주사 그 은혜가 망극하다.
뼈를 갈고 살을 밴들 그 은혜를 갚을손가 마음깨쳐 중생구제 이것이 불은보답.
발심보살 법장비구 사십팔원 세우시고 백천만겁 드나들며 남녀노소 차별없이 평등자비 보는 대로 먼저 인사하심이여
구국국민 대자비로 무량대복 지으시고 역불참선 다라니로 용맹정신 지혜 닦아 성불하신 아미타불 극락정토 장엄하니
시방제불 모든 부처 일삼아 선전이다.
이와 같은 소식 듣고 시방세계 중생들이 가기 쉽고 깨기 쉬워 너도 나도 다루어서 낱낱이 가는 사람 백천만억 되건마는
넓도 좁도 아닌 극락 많도 적도 아닌 적 아닌 대중 마음 닦아 최상공양 향상일로 구품연대 시방삼보 받들면서 무량중생 구제로다.
탐욕악심 중생업력 오탁사바 이룩하고 사십팔원 보살공덕 극락세계 장엄토다.
문수보살 대지혜와 보현보살 두타만행 관음보살 서른두몸 신통조화 중생구제 지장보살 서원력은 지옥중생 다하도록
달마조사 구년 동안 말없이 앉으시고 헤가대사 눈속에서 팔을 끊어 법구하고
육조대사 조계종풍 달마대사 예언대로 한꽃송이 다섯잎이 결과가 찬란하다.
이차돈은 옮음 지켜 목을 바쳐 흰젖 솟고 자장율사 계율 가짐 죽음으로 맹세 하고 원효대사 두타만행 거리에서 왕궁에서 대자대비 베풀어서 억조창생 건지시고 불법저통 주인공인 보조국사 태고왕사 지공나옹 무학대사 대대로 법을 잇고 서산사명 대도성취 장하신 자비방편 임진왜적 항복받아 전멸겨레 구원하다.
우 들은 뒤를 이어 서른일곱 수도방법 육도만행 두루닦고 삼승일승 초월하며 불법마저 벗어나서 차례단법 전후이어 불보살님 받들면서 중생교화 이룩하자. 유리왕의 원수 풀어 노소남녀 학살할제 서가종족 정법 믿고 인과보복 달게 받아 추호도 대항없이 죽음으로 빚갚으니 신앙이야 아마도 이로 모범 삼으리. 시간공 간 만물들이 내 마음의 그림자다. 잘된다고 기뻐 마소 내 마음의 그림자다 못한다고 슬퍼마소 내 마음의 그림자다 세상을 원망 마소 내 마음의 그림자다 불평하지 마옵소서 내 마음의 그림자다 천상이나 지옥들이 내 마음의 그림자다. 그림자 굽었다고 미워 말고 바로 서소. 이 내 마음 바로 서면 온 세상이 바로 선다. 온 세상 사람들아 마음밖에 천지 없다. 내 마음이 참 좋으면 온 세상이 다 좋 다오. 남의 탓을 하지 말고 이 내 마음 바로 갖자. 무서운 저 지옥도 내 발로 걸어가고 한없이 좋은 천당 내복으로 올라간다. 고해바다 육도중생 제질질러 꿈이로다. 한 생각만 돌이켜서 이 내몸 바로 깨쳐 꿈속 품의 꿈밖으로 생사꿈을 깨고 보면 온 우주에 주인공이 내 아니고 누구던가 천상천하 나만 높다 우리마음 가르쳤네. 유정이나 무정이나 생긴 것은 없어진다. 없던 것이 생겼으니 없는 데로 돌아간다. 근원으로 돌아가고 근원에서 싹이 튼다. 있다 없다 하는 것이 꼬리물고 일어난다. 기멸하는 그 인연이 상대원리 어길소냐. 같은 인간 얼굴 달라 제가끔 타고난 업보 동업중생 다 각각이 업보마다 다 달라서 죽을 시간 죽을 장소 죽을 방법 다 다르게 전생전생 그 전생에 이미 벌써 정해졌다. 아 는 것도 쓸모없고 몰랐다고 잘못 없다. 이미 정한 인과대로 사는 대로 살아간다. 저 무거운 삼악도를 알고서야 누가 가리. 다겁다생 살아오며 오탁악세 돌아 치며 몸과 입과 마음으로 열가지 죄다 저질러 끝없는 생사고해 벗어날 길 아득 하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나의 집념
내가 불교에 귀의한 이래의 이청담이라면 불교정화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불법은 청정본연을 말하는 것이다. 본래 청정도 주지 않는 것이어늘 하물며, 어찌부정이 있겠는가. 그러나 정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부정이 있음을 또한 어찌하랴. 모든 종교사는 종교본연의 근본을 좀먹는 비본질적 요소와 대결하여 싸우는 투쟁의 역사이다. 비본질적 요소는 두선 교단의 토인 인계율에 도전하다 이 도전을 받고 계율의 순수를 고수하려는 정화운동은 일어난다.
근대 한국 불교의 정화운동이란 불교와 불법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교단을 구성하고 있는 승단의 정화를 말하는 것이다. 청정하여야 할 승려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었을 때, 마땅히 본부 세존께서는 정하신 율법에 따라 대치되는 요소는 제거해야 한다. 이 운동이 바로 근대 한국 불교의 정화이다. 어떻게 보면 현데 한국 불교사에서 정화와 반정화의 투쟁은 가장 치열했다고 볼 수 있다. 원래 한국불 교의 정화문제는 멀리 1920년대로 소급된다. 일제가 이 땅을 침략한 이래 우리 나라 불교계에서는 여러 모로 변동이 일어났다. 그중에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승려들이 술,고기,담배를 먹는 특히 대처문제였다. 원칙적으로는 대처하지 않는 것, 이것은 부처님 이후 출가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이다. 글자 그대로 수천년 동안 움직일 수 없는 권리를 가진 전통이기도 했다.
어쨌든지간에 청정해야 할 불법문중에 훼법분자 대처승이 생겨났으니 근대 한국 불교 승단에서 막행, 막식 하여 처자를 거느린 비법승배들이 종권에 등단하고 교계를 혼탁케 한 데서 마침 내 호법정화의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일본의 한국침략과 더불어 민족의 주체성 을 말살하려는 식민지화정책의 비호아래 파계환법자들이 사찰을 장악하고 교단 에서 당당한 호령하게 됨에 그들의 수효는 순식간에 늘어갔고 이때부터 불교는 타락의 길로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이러는 가운데 적은 비구스님들을 모아 불조 보위책으로 1926년 12월 서울 안국동 선학원을 본거지로 종풍의 중흥을 꾀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불교정화운동의 봉화인 것이다.
1950년 이후 나는 당시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찾아 뵙고 불교정화의 동기와 의의를 설명하였다. 그후 대통령은 (처자있는 승려들을 사찰 밖으로 물러나고 한국 고유의 승풍과 불조의 혜명을 잇기 위해 독신승이 사찰을 지키게 하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것이 정화추진의 일대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드디어 1954년 6월 20일 서울 선학원에 서는 원토비구들이 모여 교단정화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8월 20일에는 전국 비구승대회를 소집, 정화운동의 기본방침이 결정되었다. 교계 신도의 호응은 물론 사회 일반 여론도 사회정화 민족종교부흥의 관점에서 전폭적인 성원을 보내주었다. 이 때 나는 도총섭(총무원장)에 선출되었고 정화 완수를 위한 순교단을 조직하였다.
2월 5일에는 정화의 실천의 제일보로 태고사에 합법적으로 입주, 조계사라고 했다. 이때부터 정화운동은 격심한 호법투쟁양상을 띠기 시작하였고 쌍방의 충돌이 빈발하여 승가의 본의가 아닌 유혈충돌까지 발생하였으나, 한편 전국 각처에서 비구승들은 축출되고 폭행을 당했으니 충돌을 비구스님들께서 정법에 죽으리라는 비장한 각오를 낳게 하여 마침내 정화완수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1955년 6월 10일 법당에서 철야정진 단식기도를 하고 있는데 비법배(대처 승)3백여명이 새벽의 기습을 감행하였다.
기도 삼매중의 법당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변하고 2인 3인조로 닥치는 대로 치고 받으면서 기도 중인 대중스님을 끌어내어 내동댕이를 치곤 하였다. 천인공노할 참경은 그저 입을 다물고 펜을 놓을 따름이다. 나는 이때 다친 몸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몇 년 동안이나 고생하다가 부처님의 가화를 얻어 회복하긴 했다. 그러나 우리 비구승 3백 50명은 끝끝내 굴하지 않아 순교적인 정진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피나는 정화불사는 전국 방방곡곡에 진행되어 1968년 8월 13일 총무원장으로 정화운동의 기반은 더욱 굳히어 전국 사찰의 90퍼센트 이상이 우리 정화교단 산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1962년 4월 10일 이른바 통일종단의 형성이 이루어져 이로써 정화불사는 일단락 을 짓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통합종단 내에서 일어난 몇 가지 불상사와 각 사찰에서 자행됐던 불교신앙과는 거리가 먼 미신행위는 쉽사리 근절되지를 아니했 다. 1966년 대한불교조계종 제 2대 종정에 추대된 나는 불교 근대화작업을 추진 하던 중 정법현양을 위한 나의 염원은 더욱 불타고 있었다. 무사안일주의 문중 파벌주의 화합의 미명 아래 고개를 쳐드는 대처승 무리들의 현대사회에 대한 무 관심이 모든 풍조는 나의 염원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고 그렇게 16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투쟁해온 나의 정화이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러 가지 고민 끝에 1969년 7월 5일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교회에 마지막으로 근대화를 위한 유신 재건안을 내놓았다. 최후로 정화이념을 실천할 기회를 다시 한번 얻어보자는 생각에서 였다. 화동이란 명목 아래 종회 의원 자격을 얻은 대처승들과 야합하던 무능 비구승들은 나의 유신재건안을 여지없이 묵살시키고 현대한국 불교 조계종 내에서 그토록 애타게 염원하던 불교근대화작업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를 나 스스로의 잘못으로 깨닫고 뼈저린 참회의 마음으로 종단을 떠나 불교 근대화, 정화불사의 기치를 또다시 들게 됨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는 없었다.
청담조사 행장기
보사의 길목
한국 근대 불교계에서 중흥조라 할 청담큰스님은 한국불교 종단의 대표요, 세계불교의 지도자이기 앞서 한 도인이었다. 지금부터 75년전에 경상남도 진주변 두리에서 그리 대단치 않은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나 스스로 뜻한 바 있어 출가 를 단행, 45년동안 한경같은 신앙의 용맹정진 끝에 한 떨기 크나큰 연꽃을 피우 게 된 큰스님이다.
한국근대 불교계의 우뚝 솟은 거봉인 청담 큰스님은 조사님으로 숭앙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미 반세기 전에 불교 학인대회랄 열어 불교의 정통을 되찾는 개혁의 횃불을 들고 씨앗을 뿌려왔으며, 40세에 유교법회를 개최 하여 호국불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기에 최선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1954년부터 15년 남짓 오직 정화유신을 불사를 성취하기에 헌신했기 때문이다.
청정비구로서의 조계종단을 본궤도에 올려 놓았고, 한국불교를 세계문화의 수준에 끌어 올린 것도 청담조사가 아니고서는 현실이 어려운 과업이었다. 현세기 있어서 한국 불교에 최고 영도자의 한 분이었던 청담 큰스님으니 그늘에서 19년을 하루같이 수행해 온 나로서는 미좌의 말석에 바다와 같이 그 법을 미래세가 다 하도록 잊을 길이 없어 부족하나마 큰 스님의 생애를 돌이켜 간추려 보는 글을 청담조사 열반 7주년을 기념하여 쓰게 되었다. 하지만 이 글은 큰스님 행장의 입문기밖에 되지 않는다.
마음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부처님의 길에 이를 것인가?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우리 사회나 나라도 저절로 잘될 수가 있다. 거듭 참회하면서 자비의 실천에 실망하지 말일이다. 이러한 큰스님의 유심사상은 영원한 희망의 등불일 수 있다. 돌아볼 때 청담스님은 한두마디로써 도저히 표현할 수는 없는 무량광명의 법신이었다. 인성을 갖춘 부처님이요, 마음의 대해가 이를 만 하다. 큰스님은 어떤 일에나 순교자다운 자세로 일관하였다. 올바른 생사관을 지니고 무슨 일이든지 부처님에의 믿음을 완전히 실천하는 종교인의 참된 표본이 되었다. 우리 같은 우승으로서느 열 배 이상 노력하고 참선공부에 정진한다 하더라도 큰스님의 절반의 절반에도 그 덕행이 미칠 수 없다. 큰 스님은 물론 한 인간으로서 더운 피를 지니고 있었고, 희노애락의 감정을 지닌 터였으나, 오랜 절차 탁마 속에 수도와 신행으로 마침내 보살의 길에 도달하였다. 이런 점에 서도 청담 큰스님의 길은 인간으로서 누구나 참답게 사는 길목이 되어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자비로운 한평생
청담 큰스님은 20세기의 햇살이 동녘에 눈부신 1920년 11월 19일, 진주시 수정동 540번지에서 한 농가의 맏아들로 법체를 드러냈다. 성산 이씨 화식씨와 제주고씨를 양친으로 하여 신기한 용꿈을 꾼 태몽 뒤에 산 용으로 세상의 빛을 맞이하였다. 어린시절의 이름은 찬호였고 입산수도하면서 슨호라는 법명을 받았 다. 도호가 올연이가도 했으나, 큰 스님은 1954년 불교정화의 횃불을 들면서 법호를 청담으로 하여 그밖의 다른 이름들을 버렸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의 청담스님만으로 구분은 만족하셨다.
의기 논개의 충혼이 어린 진주 남강 기슭 호국사 라는 절에 다니게 되면서 차츰 마음의 눈을 뜨기 시작한 소년은 17세 무렵까지 서당에 다니다가 이듬해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해 3.1운동이 일어난 해로 전국방방곡곡에서 만세의 물결이 소용돌이침에 진주 일대인들 조용할 리가 만무 하였다. 진주 제일 보통학교 학생으로 찬호는 학생시위대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관헌에 잡히는 몸이 되었다. 1주일만에 훈계방면되었으나 감수성이 남달리 예민한 그는 항일 의식이 더욱 고조되어 있었다. 진주제일 보통 학교를 거쳐서 22세에 늦게나마 진주농고에 입학한 스님은 당시 사회의 관습에 따라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여러 가지 속박에도 불구하고 찬호 청년은 재학시 에 학우단을 조직하고, 합천해인사 호남 백양사에 입산하려 했지만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일본유학의 꿈을 실현하였고 효고껭쇼윤지에 입산하여 아끼모도준 가문하에 독실한 행자 수업을 했다. 찬호 행자 1년반만에 환국하여 경남 고성 옥천사에 입산하고, 영호 박 한영 강백 문하에서 득도한 것은 26세 때였다. 이 때 순호스님이 되기에 이른 그는 출가 동기로서(나 자신을 구제하자!) 그 다음 (사회와 겨레와 나라를 구제하자!) 라는 원력을 굳혔다. 그러나 큰 스님은 젊은 시절부터우리 불교계의 마틴 루터 였다.
그 해 가을부터 개운사강원에서 운허스님 등과 불교학인대회의 발기를 하고, 영남 일대를 비롯한 전국사찰을 순례하기도 한 순화 수좌는 이듬해 봄 서울에서 마침내 학인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27세에 불교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순호 수좌는 1930년 5월17일 서울에 있는 개운사에서 대원 불교 전문 강원 이대 교과를 졸업하고 난 뒤에 1934년 7월15일 충남예산군 덕숭산 정혜사 능인 선원에서 만공 대선사 문하 수선안거이후, 20여년에 걸쳐 전국 각 선원에서 참선 수도하였다. 그 후 1954년 가을 서울 선학원에서 전국 비승구 대표자 회의를 주도하여 불교 정화운동을 발기했다. 20여년간 오로지 정화 불사에 몸바친 뒤로는 무서운 아라한으로 돌변하게 된다.
그러나 정화초기의 큰스님의 과격한 행동은 단순한 급진이 아니라 쓰러져가는 한국 불교의 정통을 바로잡고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한 눈물겨운 대비원에서였다. 해방된 지도 10년 가까이 되었건만 이때의 한국불교는 썩을대로 썩어버려 목숨을건 대수술 없이는 도저히 소생시킬 수 없는 빈사의 지겨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청담큰스님의 생애 중 가장 어렵고도 보람찼던 순간이 시작된 것이데, 흔히 스님을 가리켜 호매불굴의 월력보살로, 불세출의 구국 보살로 격조 높은 대승 보살로 우리 불자들이 추앙하는 것을 홀로 앉아 소승적 일변사의 행결에만 전념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광명과 자비 속으로 일체 대중을 안아들이느냐 하는 남달리 높은 이상과 깊은 원력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불교정화운동의 야전 사령관으로서, 앞장섰던 청담 스님의 높은 법력과 대승적 원력은 사찰마다 세찬 정화유신의 불길을 활활 태워 올렸다. 여러 가지 어려운 고비를 넘긴 끝에 어느 정도 정화불사가 열매를 맺기 시작하자 큰스님은 종단의 행정수반인 초대 총무원장으로 취임, 그 동안 난장판 이 돼버린 종단 살림을 본궤도에 올려 놓았다. 갖은 곤욕과 시비 속에서도 큰스 님은 미동도 없는 위엄과 굳은 신념으로 천 번이나 만 번이나 참아 이겼다. 종단의 대소 직책을 싫다 않고 짊어지며 쉬지않고 성숙헤 갔음이 사실이다.
1955 년 8월29일에 대한 불교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에 취임한 큰스님은 다음해인 1956 년 1월5일 총무원장의 자리를 사임하고 대한불교중앙종회의자직에 취임하였다. 한편 이 해 10월 25일 네팔 개최의 제4차 세계불교도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 룸비니 성역화 불사는 이때부터 비롯된다. 그 후 1957년 9월 5일 경남합천 해인사의 주지로 취임하고 다음해인 10월25일 태극주최세계불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3년여 뒤인 1961년 그 한 해 동안 불교계에서의 큰스님의 활약을 알아보면 10월1일엔 중창한 삼각산의 도선사주지로, 다음달인 11월 1일에는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으로 취임하고,11월6일 캄보디아에서 개최된 제 6차 세 계불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3개월후인 이듬해 1962년 2월 15일, 룸비니 한국협회의 총재로 취임한 큰스님은 다시 4월6일 불교재건 비상종회 의장직 을 맞아 4월8일 대한 불교 조계종 총무원에서 대중사 법계를 품수하였다. 재단 법인 동국학원 이사장직을 1964년 9월 17일에 맡았으며, 1966년 9월 20일엔 대한 불교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으로 재임되었다. 1966년12월 31일자로 대한 불교 조계종 통합종단의 제2대 종정에 추대된 청담스님은 1967년 1월1일 대한 불교조 계종 전국 신도회 총재에 취임하였다. 또한 이 해에8월 20일엔 대한 불교조계종 잘로원장, 10월 20일엔 대한민국 종교인협회의장단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1968 년 4월15일 도선사에 호국참회원을 건립하였으며, 동년 8월10일 국민교육헌장 심의위원에 피임된 큰스님이었다.
1970년 7월17일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에 재임된 바 있는 큰스님은 8월15일 광복절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12일 세계불교연합회 장로협의회 회장, 9월 3일 3.1국민회의 의장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큰 스님은 마지막해인 그 해 10월10일 부터15일까지 6일간 열린 세계고승합동법회에 참석한는 등 불교계의 발전에 기여하면서 다대한 업적을 남기고, 청담 큰 스님은 이 해 11월 15일, 70세의 일기로 열반에 든다. 그 날 조계사 법당에서는 경건한 기도회도 베풀어지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는 10시 15 분 주치의 서 순규박사에 의해서 청담큰스님의 임종이 발표되었다. 1971년 11월 15일, 우리 불교계는 너무나 큰 충격의 날이었다. 한평생을 교단 재건괴 불법 중흥에 바쳐 돈 청담 큰스님이 열반에 드신 날이기 때문이다.
7순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 시도 쉬임없이 불법을 펴다가 사바의 보살행에 홀연히 종언을 고한 큰스님의 업적은 1천만 우리 불자들만의 슬픔이 아닐 수 없었다. 꽃다운 나이 24세에 출가하여 20년간의 각고 정진 끝에 견성을 이루어 모든 번뇌를 진작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큰스님은 너무나도 크고 높은 이상 때문에 자기의 인격의 완성이란 미덕에 홀로 유유자적할 줄 모른채, (설령 금생의 성불을 내생으로 미 루는 한이 있어라도 모든 중생을 다 건지고 말겠다.)난 관게음보살님의 대원을 그대로 이어 받아 무명에 허덕이는 우리 중생과 더불어 살며, 우리의 고뇌를 당 신의 고뇌로 알고 살아 왔다. 무려 반 세기 동안 불교 유신, 정화 불사에 있어 서 정법을 위해 몸을 돌보지 않던 큰스님, 중생제도에 있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림이 없이 중생을 괴로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고통을 함께 하여 부처님의 자비와 광명을 나누어 주던 큰스님이었다.
큰스님의 70평생은 고난과 인욕, 그리고 언제나 교화를 위해서 싫증을 재지 않는 설법 삼매로 일관되어 온 보살의 길이었다. 큰스님은 일찍이 입산 득도한 이래, 원적에 이르기까지 거 의 반세기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의 24시간 동안 오직 불법 이외에 아무것 도 생각함이 없었고, 입적하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어떻게 하면 모든 중생들을 부처님의 광명과 자비 속으로 안아 들이느냐?)하는 높은 이상과 넓은 원력 때문 에, (마음)과 (나)를 설하며, 수 많안 중생들에게 신심을 일깨워 주기에 조금도 지칠 줄을 모르는 참으로 (큰스님)이었다. 또한 불의와 타협할 줄을 몰랐던 큰 스님은 한 나라의 종교적 부패가 그 나라의 운명을 비참하게 만들고 그 겨레의 정신생활을 타락 시킨다는 사실을 미리 간파하여 우선 불교 정화의 깃발을 높이 는 한편, 나아가서는 사회정화에도 귀감을 보였다.
그리하여 큰스님은 정화불사의 유신대업을 줄기차게 용맹으로 끝내이룩하였다. 그뿐이겠는가. 널리 세계 여 러나라 불교게에 한국 불교의 우수성을 선양함으로써 국위를 크게 향상시킨 것 도 바로 큰스님이었다. 종회 의장으로서, 세계불교 연합 장로원장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단체의 최고 지도자로서 큰스님이 끼친 바 업적은 참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정말로 이 국가와 민족과 더 나아가 세계인류에 남긴 큰스님의 본래 면목인 맑고 깨끗한 자비로운 마음과 인자한 마음은, (다시 태어난대도 기꺼이 이 길을 택하겠다)라는 크고 높은 원력으로 켤코 사라지지 않고, 온 우주에 두루 충만할 터이다. 온 중생의 가슴마다 태양처럼 찬란히 빛날 터이다. 큰스님의 육신은 비록 세상을 떠나고 안 계시더라도 큰스님의 법신만은 늘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서 모든 번뇌를 말끔히 씻어줄 것으로 믿어진다. 세수 70, 법 럽45로 대열반에 든 큰스님의 업적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의 손실이었 으나, 인류전체의 새로운 깨우침을 촉구하였다.
믿음의 실천자
큰스님은 부처님의 믿음을 그대로 살고 간 대표적 불교인의 한 사람이다. 큰 스님같은 신앙인을 일컬어 비로소 우리는 실천적 종교가라고 할 수 있다. 청담 큰스님의 종교는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기상이 넘쳐 있었다. 예컨대 스님의 법어 중에서 "믿음은 죽음보다 강하다."를 보면 이러하다. 어느 종교룰 막론하고 그 종교에 대한 순교의 가치와 순교자의 위치는 그 종교사에 있어서 지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가 위기를 당했을 때 그 위기를 극복하고 또는 그 종교의 첫발생세이 필연코 따르는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모든 분파의 종교와 모든 종교인들은 이러한 선각자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서 진리의 전당에서 교주가 설파하신 진리의 말씀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불교사에도 이와같이 피를 흫려야만 했던 순교를 일찍이 불교 전수초기에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즉 신라 법흥왕 15년에 있었던 이차돈의 순교가 그것이다. 처음 신라에 불교가 수입, 전포되어 왕이 이를 대흥코자 할 때에 여러 신도들이 (승려들은 머리를 깍고 괴상한 옷을 느리고 있으면 말씨도 야릇하니 상도가 아니외다 만일 불법을 백성들이게 미게 하여 필연코 후환이 있으리라)하고 절대적인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정세 를 주의깊게 관망하던 당시 내사사인 이차돈은 (이 불법은 홍전의 비상한 결심과 실천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왕실에 나아가 자기의 목슴을 바쳐 불법을 일으켜 뜻과 그 결심을 상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왕은 불도에 어찌 살생이 있겠느냐고 거절했으나 대신들의 의논이 백성을 현혹시키는 이차돈을 죽어야 한다고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차돈은 (불법이 신령하오면 나의 이 죽음에 이적이 있으리라)예언하고 목에 칼을 받으니 잘라진 목에는 흰 젖빛의 피가 공중에 솟아 오르고 천지가 캄캄해지며 하늘에서는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감히 불법을 훼방하거나 불신하는 이가 없었고 왕도 불법 신앙을 백상에게 허락했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이처럼 극적인 이차돈의 일화에서 그 사실여부를 가리자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담겨진 종교의 순교적인 정신과 그 의의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특히 불교의 포교를 위하여 슨교한 이차돈은 승려가 아니고 일반 신도였다는 데 더욱 주의를 끈다. 다만 그는 법흥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고 있던 귀족일뿐이 었다. 그를 처형할 때에는 그의 잘려진 목에서 나왔다는 유혈에는 신라의 사회와 왕실로 하여금 불교에 대한 적대감을 불식시키고 흔연히 신앙 할 수 있도록 합리화시키는 요소가 잠재하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라하여 신라 불교는 민간 신앙은 물론 귀족과 왕실에까지 파고 들어 이른바 호국불교라는 명목으로 그 세력을 신장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신라의 정치 문화등 모든 분야갸 불교의 영향 아래 발달되어 찬란한 불교국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 대와 사회는 급속도로 변모 진전하고 있다. 더구나 교계안에서는 근대화의 소리가 드높아 가도 있는 실정이다. 이제 우리는 새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정신과 자세를 취하여 낡은 껍질을 탈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러한 사상의 구현은 오직 이 차돈의 순교정신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부처님의 정법을 호전키 위하여 귀중한 자신의 목슴을 선뜻 바친 이차돈의 순교적 정신으 로, 오늘의 승려는 청청 수행을 철저히 하여 상단을 확립하고 삿된 미신 불교를 타파하여, 또한 사부 대중이 합심하여 불교 현대화의 길을 모색하지 않아면 안 될 것이다. 만일 이러한 교단 자체의 체질이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고 구태의연한 낡은 굴레 속에서 머물러 있는 한, 불교 최고의 목적인 자작이나 중생제도의 실현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자각과 중셍제도가 결여된 즉 상구보리를 하지 못하고, 하화중생도 불가능한 종교는 인간과는 무관한 종교가 되고 말 것이요, 또한 이러한 종교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종교는 이미 그 생명을 상실한 것이다. 신라의 이 치돈은 이러한 종교의 생명과 그 사명을 구제하고 순교의 단두대 위에 기꺼이 그 목숨을 올려 놓았던 것이다. 그 피의 대가로 많은 우리의 선조들이 참다운 길을 찾았고, 그 생명의 빛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 리도 이 사회에 필요한 종교, 또한 현대인들이 필요로 하는 종교로서 불교의 근대화가 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선각자 이 차돈이 1천 5백여 년 전에 피훌린 순교의 정신을 바르게 이해실천하는 길이다.
여기에 한국불교 1천6백년 이래 청담큰스님의 염원과 과업이 있었던 줄안다. 종교인에 있어 믿음을 간파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믿음을 죽음과 등가물로 삼기에는 참으로 위대한 용단을 필요로 한다. 그러기에 청단 큰스님은 한국 불교중흥의 기수일 수 있었고, 유신정화의 횃불로서 영원히 불타기에 이르렀던 줄 믿는다. 5년 전에 큰 스님이 열반했을 때 노산선생이 아래와 같이 청 담큰스님 각령앞에 추도의 노래를 지은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칠십 년 한평생 고행과 참선
발심과 서원으로 오직 한 마음
없음의 큰 진리를 깨달으시어
지혜와 법력을 갖추시었네.
(후렴)
청담 큰스님 정신의 기둥
가신 둣 길이 여기 계시옵소서.
병들고 무딘 중생 건지시려고
막대 짚고 거리로 내려오시어
동서도 밤낮도 가림이 없이
부처님 귀한 말씀 외치시었네.
열반의 백팔 범종 울려 퍼지고
금강경 독경 소리 은은한 속에
육신은 가시어도 법신은 불멸
성불하신 그 모습 바라봅니다.
불교 정화의 상징
불교계는 물론 근대 한국의 거대한 정신적 지주의 하나로 살다 간 청담 큰 스님은 이미 국운이 급변하던 시절에 태어나 잠시 속세와의 인연을 맺어 가정을 가지기도 했으나, 24살 때 불법에 귀의하여 당시의 고승인 석학 박 한영 강백스님을 은사로 득도, 마침내 어렵고도 먼 수도의 길을 내디뎠다. 이로부터 큰스님의 일생은 한 마디로 구도정진과 불교정화를 위한 거룩한 생애였다고 말할 수 있다. 큰스님은 일찍이 수도하는 무명승려로 자리할 때부터 교단정화와 불교중흥을 위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로지 (내가 설령 금생의 성불을 내생으로 미루는 한이 있어도 모든 사람을 다 건져 놓고 말리라)는 일대서원에서 비롯 된 것이다. 더욱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당하고 근대화 과정에서 핵심을 잃고 대다수 국민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와좌왕, 사상의 혼란과 퇴폐풍조가 성행할 무렵 큰스님은 이 나라의 혼란을 실생활과 사고방식의 혼란으로 파악하였고, 그속에서 전통의 단절과 수도 연마의 미흡으로 한국 불교가 썩어가며 마멸 하는 몸뚱아리를 붙들고 씨름하기 시작했다.
결국 큰스님은 온갖 번뇌망상을 피를 짜고 뼈를 깎는 가혹한 수도정신에서 와해시켰고, 이것을 통해 한국불교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데 어떤 예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해방과 독립, 6.25의 참화가 지나간 54년부터의 활약과 말 그대로 불교 근대화의 총수라고 할 만큼 정력적이고 헌신적인 것이었으며, 62년 통합종단을 이룩함으로써 불교 정화운동을 일단 매듭을 지어 한국 불교사에 새로운 유신적 전환점을 찍었다. 스님의 훌륭한 공적은 여기부터 우리가 더욱 피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말하자면 민족 종교로서 현대에 와서 구심점을 잃어버린 듯이 보이기도 했던 불교를 스님은 심산 유곡의 사찰에서부터 사회로 이끌고 나와 대중들의 가슴마다 자비로운 따뜻한 손길로 포근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60년대에 접어들면서 스님은 각 종교간에 대화를 나누었고, 모든 종교의 한국 토착화를 위해 투자한 노력은 비단 종교계만의 일이 아니라, 민족적인 저력을 총화 축적 시키는 한 지름길이 기도 했다. 과연 스님의 생애는 구국 재건을 위한 청정 비구 승단의 부활과 불교 중흥을 위한 교육,포교,역경등의 현대화를 위한 귀한 헌신과 봉사와 희생적 노력으로 사회정화와 국가의 유신에 전 국민이 융합 단결할 수 있는 내일을 다짐 하는 데 큰 귀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혀 불의와 타협을 몰랐던 스님은 한 나라의 운명을 비참하게 만 든다는 사실을 미리 갈파하고, 불교정화를 불퇴전의 용맹으로 끝내 이룩함으로 써 국민발전을 위한 중요한 종교적 지표를 제시했으며, 더욱이 불교적 가치관 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사상적 무정부 샹태를 극복 지양하고, 인류를 온갖 무지와 죄악, 빈곤과 비참으로부터 진정한 세계평화와 인류번영을 위한 자유로운 이상 사회건설을 일대염원으로 삼고 살아온 큰스님은 열반의 최후 순간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일체 중생을 부처님의 광명과 자비의 품속에 안아들여서 말 그대로 온전한 중생 제도의 대원력을 실천하려다 거룩한 순교를 하기에 이르렀다.
생명의 목소리
큰스님은 (사랑이 산다는 것은 바로 죽는다는 것이다.)라는 윤회사상의 존재론적 풀이에서부터 (육신은 비록 죽어도 법신은 영원히 살아 있다.)는 유심철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설법을 남겼다. 오늘날 처럼 삶의 지표를 잃은 채 그 날그날 뜻없이 살아가는 많은 대중에게 큰스님의 심오한 법어와 숱한 경구는 7 년 가뭄 속의 단비가 아닐 수 없다.
실로 대중들이 목마르게 마시고 싶어하는 생명의 목소리였다. 때문에 큰스님의 사상은 불교 신앙을 통해서 얻은 개인적인 삶을 해결하는 전통 사상의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신앙의 내적 조화로부너 민족 번영과 인류의해방을 위한 구체화 된 신, 해, 행, 증을 바탕으로 한(월력의 행동론)이었다. 다시 말해서 큰스님 청담사상의 핵심은 중생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제반 질서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불교가 단순히 인간의 자기 해탈의 표현으로만 고려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질서의 모순과 질곡으로 인한 인간의 비참에 반항으로 고려됨으로써 오늘의 현실을 변화시키는 (원력의 불교학), 즉 오늘의 미래에 대한 인간의 창조적 책임성을 바탕으로한 불교적 가치관을 사회적 질서의 전 영역에서 행동적으로 추구하는 실천불교학이었다.
이 때문에 스님은 그 행적, 그 법문, 그 예술, 그리고 죽음조차 그 하나 하나 모두가 항상 새롭고 순수했을뿐더러 일체만물을 새롭게 하는 부처님의 진 리가 이루어지는 최후 순간까지 설령 성불을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일체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민족사의 발전과정 속에서 경험되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 정의와 자유의 참된 인간성의 실현을 위해서 온갖 고난을 기쁨으로 짊어진 이 땅이 (불후의 비구)였다.
따라서 청담스님의 생애와 그 사상을 요악하면, 큰스님은 늘상 승려이기 때문에 전에 인간이라는 차원에서 사바세계를 헤매는 대중과 더불어 살며 그들의 고뇌를 당신의 고뇌로 알고 살아 왔다. 그래서 스님은 항상 이 번뇌 많은 세상을 거만하게 굽어보고 살지 않고, 도리어 삶의 무의미와 죄책감, 그리고 죽음의 공포의 소용돌이 속에서 빛을 잃고 헤매는 무리와 살결을 맞대고 감성, 이성이 교차되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이를 잡고, 그 속에서 보다 (참된 빛)과 (보다 착한 삶)(보다 아름다은 사랑)을 찾는 해탈의 길을 스스로 택했다.
모든 번뇌를 능히 벗어날 수 있을 법한 일이었건만, 큰스님은 너무나 인간적이기 때문에 자기 인격의 완성이란 미덕에 홀로 교만하지 않고 당신이 피를 짜고 뼈를 깎아 성취한 모든 진선미를 적게는 남과 더불어, 크게는 민족과 더불어, 더 크게는 삼라만상과 더물어 나누어 가지고 섬기며 사는 가장 넓은 길을 스스로 택했다. 말하자면 고뇌를 면하기 위해 부처님을 찾으면서 부처님이 곧 내 마음이기 때문에 좋은 것, 나쁜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포괄한 그 (마음) 을 새롭게 하는 무의 경지에서 스님은 속된 것과 성스러운 것을 자유자재로 오간 셈이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이 단순한 진리의 표현이 아니고 인간의 고통의 표현이며, 역사에 극락정토를 가져오는 혁명적인 힘이며, 사회적불의를 이기는 절대적이고 새롭고 어두움을 이기는 광명, 즉 부처님의 자비 속에서 자기 고통의 위안만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고통과 악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과 뜻을 사회적으로 행동하는 데서만이 구원한 부처님이 역사적,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스님은 (나)라는 소우주와(참나)라는 대우주를 수시로 넘나 들며 일체 만물을 새롭게 제도하려는 서원의 여행에서 그때마다 새로운 마음가 짐으로 대해 온 영원한 구도자였다.
이러한 사상적 특징이 큰 스님의 인격과 성격을 원력 보살적 인간성으로 발전시켰고, 그러한 창조적 인간성이 애국과 정화로 원력 보살적 인간성으로 발전시켰고, 그러한 창조적 인간성이 애국과 정화로 상징되는 호국보살적 인간형으로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이타적 인간형인 보리 (깨달음)와 번뇌와 무서운 갈등과 엄청난 독설속에서 인간 때문에 한없이 울고, 또한 인간이란 그 전체 원리 때문에 한없는 침묵을 지켰던 것인데, 이러한 구도의 특징이 큰스님의 인격을 대승보살적 인간상, 즉 성자적 인간으로 승화시켰 다. 우리는 청담 큰스님을 따를 수 있다. 그 빛나는 길을 걷기 어려운 이 마당 에 어떻게 그 이상을 뛰어 넘느냐 하는 것은 영원한 세기적 과제의 하나인 줄 안다.
제 9장 자화상 입산 50년들 돌아보며
프롤로그
어언 내 나이 올해 70세, 입산한 지 만 45년이다. 그러니 나는 입산 50년을 회고할 자격이 없다. 1926년 저 남쪽 해변가 경남 고성 옥천사에서 중이 되었다. 그로부터 때론 군상들이 제 나름의 생활에 바쁜 도회의 생활로, 또 어느 땐 심산유곡 노송거암하의 암자에서 생활함에 그 인연을 남기고 또 법연을 간직한 사찰이 두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 숱한 법열의 상존속에 오간 법연과 오뇌 속에서 한 가닥 뜬그름처럼 자성이란 한낱 가날픈 물건을 찾고자 떠돌다 지금은 삼각산 도선사에 정주하니 마냥 감회가 무상할 뿐이다. 40년의 수도생활, 춘하추동이 1백60여를 넘기고 또 산천의 수색과 형경이 네번이나 변했건만 나도 어디로 가야 하고 또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고 있다. 부 처님께서 미묘 법문의 광장설이 40여 년이니 또한 내 한 평생 수행과 같건만... 돌이켜보니 숱한 사연과 밀어들이 이 고뇌를 잊고 무상증득의 나를 찾고자 애쓰는 노승의 심정이 조급해질 뿐, 또 어쩔 수 없는 계절의 순환속에서 한 해 또 한 해를 보내고 맞는다는 생각뿐이다. 아니 나 자신 몸과 마음을 운반하여 겨우 어제 오늘을 지나서 내일에 이를 뿐이다.
에필로그
불교의 진리를 설파하신 세존께서는 세계를 완전한 것으로 켤코 끊어질 수 없는 사슬로서 인고의 법칙으로 매인 영원한 사슬로서 설명하셨다. 아무도 세계를 그처럼 분명하게 말하지는 못하였고, 그것에 반대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실로 세존의 말씀을 통하여 이 세계는 수정같이 알아지고 우연의 지배도, 신들의 지배도 받지 아니한 흠없고 완전한 종합체로서 나타났다. 이 세계가 선하냐, 악하냐, 괴로우냐, 즐거우냐는 차선의 문제이다. 세계의 문제는 그것의 구성과 운행이다. 그것을 그는 인과로써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 법칙도 그 인과를 벗어나야 한다는 해탈의 경지에 오면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잃어버리고 만다. 여기서부터 불교는 이론을 떠나서 종교로서의 그의 길은 시작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가부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선인들이 지적해 주었듯이 논쟁을 유발시키는 사상이나 지식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름다울 수도 미울 수도, 지혜로울 수도 어리석을 수도 있고, 동의 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 세존의 설법은 지식을 구하는 자를 위한 설명이 아니고 비애를 이기려는 하는 자를 위한 힘인 것이다. 그리고 그 법설은 그의 독특한 탐구의 방법인 명상을 통하여, 참선을 통하여, 인식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배움을 통하여 이루 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진리는, 즉 인류의 평화와 안식을 배움으로써 아니고 세존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편력과 고통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이 관계하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 그것 또한 되풀이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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