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및 역사전개의 動因으로서의 業의 이해
崔 鳳 守
목 차
Ⅰ. 여러 가지 動因
1. 三種外道說
2. 그 비판
Ⅱ. 共業의 주체
Ⅲ. 業說의 成立
1. 業說 성립의 기본 구조
2. 三世輪廻라는 열쇠
Ⅳ. 動因으로서의 業의 이해
1. 色界天과 劫初衆生
2. 우주 및 역사 전개의 연역
Ⅴ. 業說은 原始佛敎의 表層敎說
Ⅰ. 여러 가지 動因
우리에게 우선 크게 다가오는 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라는 문제이다. 그런데 그 인생은 우주의 始終 속에서 영위되는 한 점이다. 그래서 결국 언제 어디에서나 철학자든 宗敎人이든 과학자이든 누구나 공통적으로 우주와 그 시작에 대해서 묻고 있다.
지금부터 약 2,600여 년 전에 인도에서 탄생한 고타마 붓다(Gotama Buddha)의 一生과 그의 滅後 100년 간의 時代를 합쳐 原始佛敎時代라고 대개 부르거니와 이 시대의 인도 思想界에서도 人生과 아울러 우주의 문제가 심도 있게 논의되고 있다.
그러한 인도사상계의 견해는 상당히 복잡하여 여기서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다. 그럴 때 原始佛典에서 外道(titthiya)라는 이름 아래 정리되어 있는 견해들에 주목하게 된다. 이처럼 原始佛典에 소개된 당시의 인도 사상은 長阿含․長尼柯耶의 경우 六十二見으로 정리된 것 D. N. I, pp.12~34(N. D. P), pp.12~39(P. T. S);大正藏 1, pp.89下~93下(梵動經 內);大正藏 1, pp.266上~270上(梵網六十二見經內).
과 六師外道의 所說 D. N. I, pp.45~52(N. D. P), pp.52~59(P. T. S);大正藏 1, pp.108上~109上(沙門果經 內);大正藏 1, pp.271下~272中(佛說寂志果經 內).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中尼柯耶에 소개되어 있는 五種惡見說 M. N. Ⅲ, p.11(N. D. P), Ⅱ, pp.222~223(P. T. S).
과 增支尼柯耶 및 中阿含에 정리되어 있는 三種外道說 A. N. I, pp.160~162(N. D. P), pp.173~176(P. T. S);大正藏 1, p.435(度經 內).
이 주목할 만하다. 이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모으는 것은 3종외도설이다. 여기에는 당시의 다양한 우주론 및 人間觀이 因(hetu)의 개념을 중심으로 간단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1. 三種外道說
① 사람이 느끼게 되는 모든 樂 또는 苦 또는 不苦不樂은 과거에 지은 것이 그 원인(pubbekata-hetu)이다.
② 사람이 느끼게 되는 모든 樂 또는 苦 또는 不苦不樂은 主의 변화가 그 원인(issara-nimmāna-hetu)이다.
③ 사람이 느끼게 되는 모든 樂 또는 苦 또는 不苦不樂은 그 원인이 없는 것이다.(ahetu-apaccaya)
이상의 세 진술은 팔리 증지 니카야의 度處經(titthāyatana-sutta)에 나오는 것으로서 당시의 인도 사상을 가장 간결하면서도 포괄적으로 분류 정리한 것이다. 이것은 主部와 述部로 나누어서 살피는 것이 편리하다.
이 진술들의 주부는 어느 것이나 ‘사람이 느끼게 되는 樂 또는 苦 또는 不苦不樂’(yaṁ kiṁ cāyaṁ purisapuggalo patisaṁvedeti sukhaṁ vā dukkhaṁ vāadukkham-asukhaṁ vā)으로 되어 있고, 이에 대해 그 원인을 규정하는 것이 술부의 형식이다. 따라서 樂과 苦 등은 일종의 結果(phala)의 위상을 지니게 된다. 즉 樂果 또는 苦果로 충분히 볼만하다. 그렇게 되면 이 3종외도설에서 우리는 인간 ‘현실’의 괴롭고 즐거운 삶에 대하여 그 원인을 추구할 수 있을지언정, 일견하기에 훨씬 큰 규모를 지니는 ‘우주 및 역사’ 전개의 원인을 살핀다는 것은 다소 어려운 것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3종외도설로서 우리의 의도에 맞는 성과를 얻어 내기위해서는, ‘사람이 느끼게 되는 樂과 苦 그리고 不苦不樂’이라는 전제에 대해서 보다 광의의 해석이 허락되어야 한다. 그럴 때 漢譯 中阿含 度經의 내용은 다소 희망적이다.
① 사람이 행하는 바 모든 것은 宿命에 지은 것이 원인이다.(因宿命造)
② 사람이 행하는 바 모든 것은 尊祐의 지음이 원인이다.(因尊祐造)
③ 사람이 행하는 바 모든 것은 원인이 없는 것이다.(無因無緣)
즉 여기에는 主部가 ‘사람이 행하는 바 모든 것(人所爲一切)’으로 규정되어 단순한 현실에서의 果報만을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러한 苦․樂의 과보도 포함되겠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人間存在의 通時적 및 共時적 活動의 모든 것을 언급할 수 있는 표현이다.
만약 漢譯 中阿含의 근거가 되는 原典阿含에 苦 및 樂 등의 술어가 명시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면, 3종외도설에 대한 니카야와 漢譯 아함의 관계는 미미하나마 일종의 異說經文을 지니는 관계이다. 그리고 니카야의 경우는 현실의 果報에 중점을 둔 표현이고, 한역 아함의 경우 보다 폭넓은 인간활동 전반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보충설명과 함께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한역 아함의 표현으로부터, 우리는 우주 및 역사 전개의 원인을 추구하려는 입장을 계속 유지할 다소의 근거를 얻게 된다. 인간 존재의 통시적 및 공ㅅ적 활동은 다름아닌 인간의 역사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우주의 전개라는 규모에는 미치지 못함이 느껴진다. 인간의 역사란 우주의 전개 ‘속’에서 생각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로 느껴지므로 그러하다. 하지만 인도사상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인간의 역사적 전개란 곧 우주의 전개와 맞먹는 개념으로 받아들일만 하다. 인도인의 인간개념은 매우 주관적이다. 주관적이라함은 인식 주체인 인간의 전제하에 시간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始作이란 뜻을 나탄는 인도말 ādi를 음미하면 잘 느낄 수 잇다.
“시(始)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인도인은 특이한 사유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시’를 나타내는 가장 보편적인 고대 인도어는 ‘아디(ādi)’라는 낱말이다. ‘받는다(取)’라는 어원적인 뜻을 갖고 있다. 시작을 왜 잡는다는 뜻으로 파악했을까?……시간은 아무런 의식이 없다. 덧없이 흘러갈 뿐이다. ……‘시’는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잡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高翊晉, 無始無終의 시간개념(현대 한국불교의 방향, pp.165~166).
이러한 주관적인 시간 개념은 인도인으로 하여금 객관적인 역사의 기록을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하게 한 것 같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대륙에서 일어난 일들을 ‘역사적’으로 기록하지는 않았고 따라서 역사적 기록물을 얻기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반면에 인도인의 사유형태 속에서는 역으로 우주의 기원으로부터 시작되는 그러한 궁극적인 규모의 시간 개념이 쉽사리 자리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또는 중생의 활동의 시작과 어떻게든 맞물려 이해될 수밖에 없었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전통적인 Brahmanism에서는 우주의 시작은 곧 唯一神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당연히 우주의 시작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상은 앞서 세 가지 진술 중 두 번째의 진술에 해당한다. 따라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3종외도설의 主部인 ‘사람이 행하는 바 모든 것’ 또는 ‘사람이 느끼게 되는 모든 즐거움과 괴로움 등’을 우리는 표현 그대로 이해해도 좋고, 좀 더 광의의 해석을 허락하여 ‘우주 및 역사 전개의 全般’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다.
다음 述部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먼저 과거에 지은 것 및 主의 變化와 같은 니카야의 述語가 한역 아함에서는 宿命에 지은 것 및 尊祐의 지음 등으로 표현되고 있음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이것은 한역 아함의 근거가 되는 원전 아함도 니카야와 같은 술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봐야할 것 같다. 단 역어를 宿命造 및 尊祐造로 택한 것이다. 과거에 지은 것(pubbe-kata)를 “과거의 지음”, 宿命造를 “宿命의 지음”으로 해석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착오이다. 원어 pubbe-kata는 處格(locative)의 格限定復合語(Tappurisa)이다. 따라서 ‘과거’ 또는 ‘숙명’에 지어진 것을 말한다. 이것을 ‘과거의 지음’ 또는 ‘숙명이 지음과 같이’ 所有格(genitive)의 격한정복합어로 해석하게 되면, 마치 과거나 숙명이 主體적인 原理가 되어 짓는 행위자(agent)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과거’는 행위자가 행위를 하는 배경일 뿐 행위자는 아니다.
그러면 과거에 짓는 자는 누구일까?
3종외도설의 첫째 진술은 흔히 Jainism의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사상도 포함시키기도 한다. Jainism은 Gotama-Buddha의 시대에는 Nigaṇṭha-Nātaputta의 입장이었고, 또 그 시대에는 Nigaṇṭha 외에도 뛰어난 5명의 사상가가 더 있었다. 그 6명의 사상가중 宿作因論(첫번째 진술)에 해당하는 사상가로 Nigaṇṭha, Pakudha, 또는 (Gosāla)가 포함되기도 한다.[雲井昭善, 佛敎興起時代の思想硏究, pp.282~286.]
그러나 또 하나의 因의 분류인 五種惡見說 등의 진술 M.N.Ⅲ,p.11,①sattāpubbekata-hetu ②issara-nimmāna-hetu, ③sa-
ngati-bhāva-hetu, ④abhijāti-hetu, ⑤diṭṭadhamma-ǔpakkama-hetusuk
-ha-dukkhaṁ paṭisaṁvedenti 여기서 ①②와 동일하다. 그리고 ③④의 因은 흔히들 3종외도설의 ①에 소속시키려 하는 Makkhali의 주장[D. N. I, p.47]과 일치한다. 그리고 ③④⑤의 진술은 사실 3종외도설의 ③의 진술을 세분한 듯하다. 그래서 5종악견설의 ③④는 Makkhali, pakudha, pūraṇa 등의 부대현상론에 ⑤는 Ajita의 순수 唯物論에 잘 상응한다. 그렇게 볼 때 종외도의 ①의 전술에는 Jainism만 대응해도 좋은 것이다.
을 살펴봐도 알겠지만 Jainism만으로 대응해도 좋을 듯 하다.
Jainism의 중흥조로 알려진, 니간타 나타풋타는 靈魂을 나타내는 命(jiva)과 네 가지 實體로 구성된 非命(ajiva)을 설하는 正實體說(pañca-dravya-vāda) 및, 命과 非命을 중심으로 苦의 發生과 苦로부터의 解說의 과정을 설하는 七諦說을 가장 핵심적인 주장으로 내세운다. 宇井伯壽, 印度哲學史, p.75.
이중 과거에 짓는 行爲者를 살피려는 우리는 당연히 正實體說에 주목하게 된다. 五實體는 命(jiva)․法(dharma;운동의 조건)․非法(adharma;정지의 조건)․空間(ākāśa;장소) 및 物質(pudgala)로 구성된다. 여기서 命과 物質은 모두 활동성을 지닌다고 주장하거니와, 사실 오실체설은 그러한 命과 물질의 활발한 활동을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양상이다. 즉 운동과 정지 그리고 운동의 장소가 각각 하나의 실체로서 등장함은 命과 物質은 어쨌든 움직임과 정지를 영원히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3종외도설의 첫째 진술에서, 과거에 짓는 행위를 하는 행위자는 정신(jiva)과 물질(pudgala)의 두 실체인 것이다. Jainism은 이 둘이 不生不滅의 궁극적 尿素이기에 實體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Jainism이 우주 및 역사 전개의 初有因(first cause)으로서 정신과 물질이라는 實體 또는 이 실체의 活動을 들 것을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진술에 나오는 ‘主의 變化(issara-nimmāna)’는 바로 인도의 전통적인 사상인 Brahmanism의 sat 傳變說 등을 지칭하고 있음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태초에 유일한 有(tad ekaṁ sat)가 多化의 욕심을 일으켜 火(tejas), 水(āp), 食物(añña)을 내놓고 이 셋이 和合하여 三種復合物(devatā)들을 이루고 여기에 有(sat)가 命我(jiva-ātman)의 상태로 들어가 일체 현상계가 전개된다. 原始佛典 內에서 발견되는 Brahmanism 견해 중 sat- 전변설을 표현하는 것은 드물다. 단, 中阿含의 梵天請佛經에 나타나는 地․水․火․風․神․天․生主․梵天[大正藏 1, p.547中]의 배열과, 팔리대응경인 중니카야 범천청불경의 pathav……āpo…tejo…vāyo…bhūta…deva…pajāpati…brahman[M. N. I, p.401(N. D. P), p.328(P. T. S)]의 배열이 있어 sat 전변설과 관련된 연구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주장에서 有(sat)는 다른 말로 梵神(Brahman)도 되고 主(issara)도 될 수 있다. 따라서 Brahmanism에 입각할 경우 이 主야말로 우주 및 역사 전개의 初有因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述部의 내용중에서 음미할 말은 因(heetu)이라는 개념이다. 여기에 쓰인 因의 개념은 비교적 넓은 외연을 지닌다. 첫째 우주 전개의 기원이 되는 初有因으로서의 因이다. 둘째는 우주 및 역사 전개의 과정 중에 요청되는 動因으로서의 因이다. 여기서 初有因과 動因은 상호간의 성격은 달라도 대개 初有因과 動因의 主體는 同一者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因은 通時적인 宇宙論 속에서의 因의 구별도 가능하다. 즉 셋째로 물질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因果관계 속의 因, 넷째로 인간의 정신과 육체 사이의 因果관계 속의 因, 그리고 다섯째로 인간과 인간 상호간의 因果관계 속의 因 등으로 또한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중에서 세 번째 물질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만의 관계에서 상정할 수 있는 因의 개념은 原始佛典내에서 만큼은 특유의 위상을 부여받지 못하는 듯하다. 물론 이 관계속의 因果를 전혀 삭제할 수 없음도 사실이지만 물질적인 것 상호간의 離合集散은 自然法爾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들 사이에 因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가급적 억제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굳이 사용하자면 因과 구별되는 의미로서의 緣(paccaya)의 개념으로, 물질적인 것의 관계를 규정하는 정도이다. 大正藏 2, p.57下(雜阿含 9권 238經) 眼因緣色 眼識生;여기서 주관의 眼에 因의 개념이 결합하고 물질적인 色에는 緣의 개념이 결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때에도 緣의 개념이 곧바로 정신적 요소를 받아들이므로 해서 순수한 물질적인 것만의 관계규정은 파기되고 있는 것이다. S. N. Ⅲ, p.63, 眼과 諸色을 緣하여 眼識이 있나니라(cakkhuṁ ca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aṇaṁ);여기서는 緣의 개념속에 眼이라는 정신적 주관이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물질적인 것 상호간에서만 일어난다고 가정되는 因의 개념이 억제되고 있음은, 初有因 또는 動因으로서의 因도 단순한 물질적인 것만의 전개는 취급하지 않을 것을 예상케 한다. 다시 말해 우주 및 역사의 전개는 어떤 형태로든 의지적인 것의 활동이 전개될 때 비로소 因의 관점을 도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건전하다면 3종외도설 중 jainism이 관련되는 첫째 진술에서의 因은 정신 실체인 命(jiva)과 물질실체인 푸드갈라(pudgala)가 될 것이며, Brahmanism이 관련되는 둘째 진술에서의 因은 唯一神으로 표현할 수 잇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종의 의지적인 주체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3종외도설의 세 번째 진술은 因이 없다는 無因無緣에서의 緣이라는 술어는 因에 더하여 原因의 뜻을 강조하려는 일종의 관습적 표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입장이다. 이것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물질적인 것 상호간의 관계 또는 離合集散마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단순한 물질적인 것 상호간의 관계에는 因의 개념을 주지 않으려는 입장에서의 표현이다. 이러한 세 번째 진술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예를 찾아보면 6사외도 중에서는 파쿠나(Pakudha-kaccyāana), 막칼리(Makkhāli-Gosāla), 푸라나(Pūraṇa-kassapa) 및 아지타(Ajita-kesakambalin) 등이 모두 해당할 것이다.
이들 가운데서 아지타의 입장을 세 번째 진술에 포섭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삼라만상이란 오직 地․水․火․風의 물질 원소에 의해서 영위되는 것으로 볼 뿐 非物質적 정신 같은 것은 전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D. N. I, p.48; 특히 아지타의 견해가 5종악견에서는 ‘diṭṭhadhamm-ûpakkama-hetu’로 표현될 수 있는 듯하다. 이것은(과거나 미래를 예측할 필요가 없는) ‘현실에서의-(돌발)상황’을 뜻하거니와 굳이 因을 찾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물질 상호간의 결합에는 어떤 因果계열을 세우기 보다 우발적 또는 돌발적인 상황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원시불전의 입장을 읽을 수 있다. 그리하여 이 개념은 62견에서 보이는 adhicca-samuppanna(원인없이-발생함;우연-발생)의 개념에 대비할 수 있게 된다.
그럴 경우 우주의 전개는 단순한 물질 원소 상호간의 관계에 불과하므로 여기에 因의 개념을 줄 필요가 없어 無因無緣이라 불러볼만한 것이다.
그런데 파쿠다 등의 입장은 재고할만한 것이 있다. 이들은 다름 아닌 非物質적인 靈魂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D. N. I, p.49 pakudha는 地․水․火․風․苦․樂․命의 七要素를 不動不變의 實體로 보거니와 여기에 命(jiva)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命의 인정은 Makkhali에게도 여전하다. 그리고 pūraṇa는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역시 命을 인정한다고 볼만한 면이 많다. 六師外道의 新理解를 위해서는 拙著, 原始佛敎와 形而上學, pp.128~147, 참조할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세 번째 진술에 연결하는 것은, 바로 이들의 命이 띠고 있는 物質적 성질 때문이다. 物質적 성질이란 “모든 영혼(jiva)은 지배력이 없고 힘이 없고 정진력이 없어 이미 결정된 요소간의 결합방식과 요소의 성질에 의해 전변한다” D. N. I, p.47.
라는 이들의 설명에서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정신적 실체는 자발적인 의지가 없이 단순히 상황의 受用에만 그치므로 마치 물질과 같이 취급되는 것이다. 이처럼 파쿠다 등도 결국은 물질적인 것만의 離合集散으로 우주의 전개를 이해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들의 견해에도 因의 개념을 줄 필요가 없게 되어 역시 無因無緣이라 불러 볼 만한 것이다.
이상의 논술을 정리해 보면 3종외도설은
① 우주 및 역사의 전개는 정신실체와 물질실체를 그 動因으로 한다.
② 우주 및 역사의 전개는 唯一神을 그 動因으로 한다.
③ 우주 및 역사의 전개에는 動因이란 없고 단지 물질적인 요소의 偶發적인 離合集散이 있을 뿐이다.
라는 세 가지 진술로 바꾸어진다.
2. 그 비판
3종외도설로 요약될 수 있는 당시의 인도 사상계에 대해 原始佛典은 다양한 측면에서 비판하고 있다. 죄악과 의지의 문제점에서 행해진 이해하기 쉬운 비판으로부터 十二緣起說의 차원에서 행해진 가장 어려운 비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十二緣起說 차원의 비판으로는 [拙著, 原始佛敎의 緣起思想硏究, pp.228~230] 참조;그리고 언표되는 것은 아니나 외도사상이 지니는 논리적 결점(Tautology에 빠짐)에 대해서 十二處說의 교설이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외 무수한 원시불교의 교설이 모두 우회적으로 외도사상에 대한 비판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회의론(不可知論;ajñā-vāda)에 대한 비판은 雜阿含 34권 長瓜經[大正藏 2, pp.249上~250上] 및 중니카야의 Dghanakha-sutta[M. N. Ⅱ, pp.193~197(N. D. P);Ⅰ, pp.497~502(P. T. S)]을 참조.
여기서는 죄악과 의지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비판과 검증 가능성의 측면에서 행해지는 비판을 음미한다.
우주의 근원에 대한 어떤 견해가 진리이려면 그것으로 인간을 포함한 우주속의 모든 현상이 올바르게 설명되어야 한다. 普遍性(universality)과 妥當性(proprieety)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어떤 현상은 잘 설명되지만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나온다면 그것을 진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입장에서 고타마 붓다가 행한 세 견해에 대한 비판을 아함은 3종외도의 소개에 이어 전하고 있다. A. N. Ⅰ, pp.160~162.
대표적으로 둘째 견해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무릇 모든 것이 유일신의 뜻에 의해 이루어질 경우 인간이 죄를 지을 때 그 죄의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그것은 당연히 신의 책임으로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 죄도 신의 뜻에 의해 지어졌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에게 죄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오늘날의 유신론적 종교에서는 缺如의 論理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듯이 느껴진다. 즉, 죄라는 것은 정당한 질서의 결여 또는 善의 결여로 볼만하다는 것이다. 우주의 완벽성을 위해서는 질서의 경여(부족함)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아닌가 한다. 善만의 우주가 불완벽하다는 관점은 참으로 지나친 억측인 것 같다.
더욱 자가당착으로 지적된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이다. 모든 일이 신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인간에게 이렇게도 하려하고 저렇게도 하려는 의욕이나 욕심은 애당초 발생조차 않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의지를 부정하려 하겠지만 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명한 사실로 인식된다. 그래서 이제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선택의 의지를 주었노라고 변론한다면 그야말로 자기 주장에 얽매인 교묘한 희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A. N. Ⅰ, p.161(N. D. P.), p.174(P. T. S), “主의 變化(issara-nimmāna)에 의지하는 자는 欲心(chanda)d이나 노력(vāyāma)이 없고 이것은 해야겠다 이것은 말아야겠다는(의지적 결정)도 없다. 이처럼 해야함과 말아야 함을 … 진실로 얻지 못해 정신상태가 흐려있는 자에게는 … 법도에 맞는 주의 주장이 있을 수 없나니라.”
첫째와 셋째 견해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설득력있는 대답을 주지 못한다. 모든 것이 宿業에 의해서 또는 물질 상호간의 우발적인 결합에 의해 일어난다면 우리의 죄도 그런 성질의 것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서 우리 인간의 잘못을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자유로운 인간 의지의 존재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앞의 세 가지 견해는 비록 우주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죄악과 자유의지라는 중요한 현상에는 결콘 적용될 수 없으므로 진리라고는 할 수 없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3종외도설은 또 한 가지 측면에서 심대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곧 검증 가능성의 문제이다. 原始佛典은 유명한 다음의 대화를 전하고 있다.
“바셋타야 세 가지 베다를 갖춘 어떤 한 바라문이라도 梵神이 있는 곳을 눈으로 똑똑히 본 자가 있는가?”
“존귀한 고타마여, 그렇지 않습니다.”
“바셋타야 세 가지 베다를 갖춘 바라문들의 스승 중 한 명이라도 범신이 있는 곳을 눈으로 똑똑히 본 자가 있는가?”
“존귀한 고타마여, 그렇지 않습니다.”
“바셋타야, 세 가지 베다를 갖춘 바라문들의 스승의 스승 중 한 명이라도 범신이 있는 곳을 눈으로 똑똑히 본 자가 있는가?”
“존귀한 고타마여, 그렇지 않습니다.”
“바셋타야 세 가지 베다를 갖춘 바라문 가운데서 일곱 세대 전의 스승들 중에서 어떤 누구라도 범신이 있는 곳을 눈으로 똑똑히 본 자가 있는가?”
“존귀한 고타마여, 그렇지 않습니다.”
“요즈음의 세 가지 베다를 갖춘 바라문들은 옛날에 노래되고 선언되고 모아진 주문구를 그대로 따라 노래하고 읊으며 영창된 대로 영창하며 낭송된 대로 낭송하는데 바로 그 주문을 만들고 그 주문을 선언한 옛 신선들이 세 가지 베다를 갖춘 바라문들에게는 있다. 곧 앗타카 바마카 바마데바 베스마밋타 야마탁기 앙기라사 바라드바자 바셋타 캇사파 바구 등이다. 그들이 ‘우리는 이것을 안다. 우리는 이것을 본다. 곧 범신이 있는 어떤 곳이라도’ 라고 말하였던 적이 있는가?”
“존귀한 고타마여, 그렇지 않습니다.”
…….
“어떻게 생각하느냐, 바셋타야. 이러한 경우 세 가지 베다를 갖춘 바라문들의 설한 바는 신통스럽지 못한 것으로 전락하지 않겠는가?”
“물론입니다. 존귀한 고타마여, 이러한 경우 세 가지 베다를 갖춘 바라문들의 설한 바는 신통스럽지 못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옳다. 바셋타야, 실로 바셋타야, 저 세 가지 베다를 갖춘 바라문들은 그들이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과 함께 하는 곳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키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곧은 길이다. 이것은 곧바로 이끄는 것이며 안내하는 것이니 그것을 행하는 자를 범신과 함께하는 곳으로 안내한다’라고.” D. N. Ⅰ, pp.201~202(N. D. P);pp.238~239(P. T. S), 이는 장니카야의 Tevijja-sutta[D. N. Ⅰ, pp.199~212(N. D. P);pp.235~253(P. T. S)]에 들어 있는 내용이고, 해당 한역경은 長阿含의 三明經[大正藏, pp.104下~107上]이다.
고타마 붓다는 진리의 체험을 중요시 한다. 어떤 주장도 그것이 스스로의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을 것을 자못 강조한다. 이상의 대화는 3종외도설의 두 번째 진술에 대한 체험 또는 검증을 묻고 있다.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도 唯一의 梵神을 본 자가 없다면 실제 長니카야에서도 제2권 大品(mahā vagga)의 경전들에는 梵神이 나타나고 또 梵神을 인식하는 방법이 설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때의 梵神은 이미 원시불교의 天神觀에 의해 수용된 果報神의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제1권 戒蘊品(silakkhaudha-vagga)의 梵神과 그 이후의 梵神은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 梵神의 實在性은 문제되는 것이다. 그렇게 문제성 많은 원리를 바탕으로 이런 저런 주장을 내세운다면 그 주장 또한 문제되는 것이다.
이러한 태초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통한 검증의 요청은 비단 두 번째 진술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첫째 진술의 경우 정신실체(jiva)와 물질 실체(pudgala)가 원인으로 주장된다. 여기서 정신실체는 不生不滅의 영속체이다. 따라서 태초부터 존재했을 것을 예상할 수 있고, 또 우주론적으로 말하면 그것이 太初로부터 존재했음이 주장의 핵심이다. 그런데 만약 태초로부터 있었고 한반도 生滅함이 없는 실체라면 그러한 정신은 당연히 태초의 상태에 대한 기억을 동반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누구도 태초에 대한 기억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첫 번째 주장(Jainism)의 중흥조인 니간타는 사실 “모든 것을 알고 보며 빠진 것 없는 智見을 인정하고, 가고 머물고 자고 깨고 하는 모든 때에 언제나 항상 智見이 일어나 있다” M. N. Ⅲ, p.6.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태초의 상태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一前生에 대한 기억조차 불가능한 것이 그의 현실이자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그도 결국 태초의 존재를 보지 못한 것이고 결국 첫째의 진술도 검증되지 않았고 검증될 수 없었던 원리를 바탕으로 세워진 문제성 많은 주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진술의 핵심인 물질적인 존재의 실체성도 마찬가지의 비판을 면할 수 없다. 태초에 진실로 물질적인 요소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이전에 정신과 물질 이전의 상태인 제3의 실체가 있었는지 실제 Brahmanism의 梵(Brahman)과 같은 경우는 정신(命我, jiva-ātman)과 물질(四大 또는 三大) 이전의ㅣ 존재이다.
에 대해서 그들은 분명 똑똑히 본 바가 없는 것이다. 단지 현실의 관찰로부터 어색한 비약을 일삼고 있는 줄 모르는 일이다.
Ⅱ. 共業의 주체
우주 및 역사의 전개를 생각할 때 原始佛敎 또는 剖派佛敎의 범위 내에서 우선 떠오르는 개념은 共業이다. 우주론적 初有因(first cause)으로서 共業을 흔히들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론적 전개 原始佛敎의 관점에서 ‘우주의 전개’라는 개념은 ‘과정’은 말할 수 있을지언정 시작과 끝을 규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太初의 唯一神(tad ekaṁ sat)을 우주의 시작으로 보는 Brahmanism과 비교할 때 차이가 선명해진다. 따라서 이 항목부터 우주의 전개라고 할 때 그 우주는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는 한 단위․한 과정만을 제한적으로 언급한다. 우주의 종합적 전개는 바로 그러한 단위 또는 과정의 ㅠ사한 되풀이라고 볼만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성․소멸의 한 단위가 바로 본래 의미의 劫(kalpa, kappa)이다. [夫極天地之始終. 謂之一劫. 而我(=世尊)更天地成壞者. 不可稱載也. 大正藏 3, p.461中]
의 초유인으로서의 共業의 관념은 器世間(bhājana-loka)을 설하는 몇몇 원시경전 속에 이미 뚜렷한 형태를 남기고 있다. ?起信經?과 ?起世因本經?에는 각각 一切世間 各隨業」力 現起成立 大正藏 1, p.310中.
또는 一切世間 各隨業力 現性此世 大正藏 1, p.365下;이외의 別行經관계에 있는 經典들인 世記經 및 大樓炭經에는 이상의 취지를 담은 文句가 뚜렷이 언표되지는 않는 듯하다.
의 경설이 설해져 있다. 여기서 一切世間은 바로 우주를 일컫는 말이고, 그것이 현재 일어나 성립되기까지는 業力에 의한 것이라는 뜻을 읽을 수 있다. 즉 우주 및 역사 전개의 初有因과 動因이 모두 業의 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業力은 누구의 業力일까. 3종외도설 중 첫째 견해도 宿業을 初有因 또는 動因으로 보았다. 그때의 業의 주체는 불멸하는 정신 실체와 물질 실체이었다. 우리는 原始佛典에서 언급하는 業力의 주체가 그러한 要素적인 정신 실체 또는 물질 실체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중생(satta)의 業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주의 성립 및 전개에 동인의 역할을 하는 業力의 그 주체와 그 作用에 대해서 ?俱舍論?같은 문헌은 다음과 같이 논급한다.
“모든 衆生의 業의 增上力에 의하여 먼저 허공에 의지하여 아래에 바람의 圓形이 일어난다.……” Abh. k.(梵本俱舍論) pp.1581~4;yad- uta- ākkāśād- vāyu- maṇḍalam-ab- hinirvṛttaṁ sarva-sattvānāṁ karma-aâdhipatyena…; 물론 이러한 진술이 原始經典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여기서 모든(sabba) 중생의 業이 한 방향을 띤 것을 예상하여 別業이 아닌 共業의 관념을 도출하고 있는 것이다.
?俱舍論?은 이어서 우주 및 역사 전개를 原始經典의 내용에 입각해 아주 잘 정리하여 소개해 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만약 우주 및 역사 전개의 동인으로서 중생의 업력만을 말하고 만다면, 우리는 앞서의 3종외도설보다 나은 견해를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생의 업이란 원시불교의 관점에서 의지의 활동이므로, 3종외ㅗ설의 첫째 문제인 죄악과 의지의 문제에는 연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太初의 존재 상태에 대한, 인식을 통한 검증은 여기서도 역시 현실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중생의 업력이 도대체 어떻게 하여 허공에다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가를 눈으로 똑똑히 본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성은 나아가 근원적인 혼란을 야기한다. 과연 중생의 共業이 우주 및 역사 전개의 初有因 또는 動因이라고 하는 관점을 고타마 붓다가 지니고 있었는가 하는 의문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Brahmanism이나 Jainism 또는 기타 唯物論 등 회의론을 제외한 어떤 사상도 태초의 존재에 대해서 나름대로 분명코 제시하고 있지만, 원시불전의 경우 우주성립의 動因을 적극적으로 천명하는 것은 ‘一切世間 各隨業力 現起成立’이라는 포괄적인 한 마디 뿐인 것 같다.
그리고 이 한 마디 조차 長阿含 속의 世記經에서 나타나지 않고 다른 別行經들 속에서만 보인다. 더욱이 世記經類 전체가 尼柯耶에서는 또한 未發見되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우리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자료론으로만 일관한다면 業力이 언급된 起世經 등의 한 마디는 그 자료적 가치를 크게 잃게 되는 것이다.
물론, 원시불교를 비롯한 불교 전체의 입장이 우주와 인간의 기원과 같은 문제는 깨달음의 내용 또는 그에 연관된 소득으로 남겨두고 있는 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자세한 언표가 없음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자세하고 구체적인 묘사는 아니라도 선언적인 指標는 제시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머나먼 깨달음의 旅程을 涅槃․彼岸․如 등의 술어로 제시하고 있듯이 말이다. 涅槃이나 彼岸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떤가는 묘사되지 않는다. 그것은 깨달음의 내용으로 行者 스스로에게 확인될 성격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우주 및 역사의 전개에 대해서도 상세한 묘사는 없더라도 가급적 빗나가지 않을 표식은 남겨 놓아야 하고 그것은 원시불교의 관련 자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럴 때 앞서의 포괄적인 언급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미약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생의 業力을 제외한 다른 원리로서 우주 및 역사 전개의 동인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특별히 있는 것도 아직은 아니다. 적어도 원시불교의 차원에서는 일단 衆生의 共業所成이란 관점만큼 우주론적 동인을 잘 말한 것도 드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길은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우주의 성립 전개는 중생의 共業이 動因이다’라고 하는 진술이 성립하게 되는 필연적인 敎理 施設(prajñāpti)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한 法門의 시설 속에서 이 진술이 3종외도설보다 진리로움을 살피자는 입장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중생의 성격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피는 길이다. 사실 중생 업력의 관점도, 태초에 어떠했는가를 본 자가 없으므로 3종외도설과 똑같은 난점에 떨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중생의 공업이 動因이 되는 모습을 가급적 짜세히 경전을 통해 살필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모습이 체계적인 면을 느끼게 해준다면 우리는 다소나마 3종외도설보다 나은 입장에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태초 중생의 성격을 밝히는 것은 핵심적이다. 태초 중생의 모습이 보다 뚜렷해지면 共業의 발생이 왜 가능한가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며, 또 그것 자체로도 태초의 벽을 두드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 항목의 논술로부터 결국 다음의 두 가지 과제를 규정하게 된 셈이다. 첫째는 業說 성립되 정규적 과정을 原始佛敎 敎說들의 체계적 施設 속에서 도출해 내는 일이다. 이 작업을 통하여 통속적으로 이해되고 있던 業報․共業․因果․三世․輪廻 등의 개념이 본래의 의미를 찾을 것이다. 둘째는 태초에 관한 언급을 가능한 한 정확히 이해하여 태초 중생의 모습을 밝히는 일이다. 둘째의 작업은 다소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 철저한 논리전개를 꾀하기가 비교적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반드시 밝혀져야 할 내용들임에는 틀림없다.
Ⅲ.敎說의 成立
1. 業說 성립의 기본적 구조
原始佛敎의 실천적 교설 思念處․四正勤․四神足․五根․五力․七覺支․八正道 등으로 묶여진 37助道法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이론적 교설을 지니고 있다.
① 三歸依․四不壞淨․六念
② 六憂行․六喜行․六捨行․六常行
③ 十業․四無量心
④ 三十七助道法
⑤ 九次弟定 등으로 修行․실천의 교설들도 깊어져 간다.
가운데에서 가장 기본적이며 제일 먼저 닦아야 할 교설로 평가되는 것은 자유의지론에 바탕을 둔 이 業의 교설이다. 그런데 실천적인 교설이 있기 위해서는 그것을 타당하고 이익이 있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론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원시불교는 十二處說을 業說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교설 중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十二處說이, 業說이 근거할 세계 및 우주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十二處說은 그 스스로 앞에 三種外道說을 뒤에 三法印說을 연결시키면서 궁극적으로 業說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제 본 논문의 논점에 중점을 두어 그 전모를 찬찬히 살펴본다.
3종외도설은 앞서 보았듯이 첫째 죄악과 의지의 문제성과, 둘째 태초의 존재에 대한 不認識이 문제된다. 여기에 더하여 논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重語反複에 빠진다. 拙著, 原始佛敎資料論, p.248.
즉 우주는 존재론적으로 파악되는 대상이다. 이런 우주의 존재를 역시 존재의 개념을 사용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존재에 대한 문제를 하나 더 추구할 뿐 우주 존재를 이해하는 데 別無所得인 것이다.
이와 같이 세 가지 문제점을 지니는 3종외도설을 止揚하고 나온 원시불교의 敎說이 十二處說이다. 十二處說은 먼저 눈앞의 현실에 대한 분석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不認識되는 것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눈․귀․코․혀․몸 등의 前五根과 색․소리․냄새․맛․촉감 등의 前五境은 모두 우리들 눈앞의 현실을 분류하고 있는 용어들이다. 그리고 의지의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채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제6근으로 意(manas) 제6경으로(意에 대응하는)法을 시설해 두고 있는 것이다. 雜阿含 13권, 生聞婆羅門經.
이러한 시설은 종합적으로 볼 때 ‘존재’를 認識으로 설명하는 경우이므로 重語反複(Tautology)에 빠지지 않는다.
이러한 十二處說 한 교설만 두고도 우리가 음미해야 할 점들은 무수히 많지만 業說과 관련지어 볼 때는 결국 제6 意根(mano-indriya)과 제6法境(dhama-attha)이 지닌 의미이다. 이는 인식 주체인 6근에는 무엇보다도 의지적 속성이 잇음을 천명하고 있으며 인식 대상인 6경은 6근에 대해 法則적 반응을 보일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의지적 속성의 천명은 6근에 완전한 자유 선택적 가능성을 부여한 것이기에 주목된다.
그런데 十二처說에는 의지적 속성과 필연적 반응의 속성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12처의 어느 것이거나 三法印적인 속성을 또한 띠고 있음이 흥미롭다. 즉 눈․귀․코․혀․몸․의지 및 색․소리․냄새․맛․촉감․法」의 어느 것이나 無常하고 고롭고 無我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S. N. Ⅲ, p.3 “비구들이여 眼은 무상하다(anicca), 무상한 것은 苦(dukkha)이고 苦인 것은 無我(anattā)이다. …耳…鼻…舌…身…意(manas)는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苦이고 苦인 것은 無我이다.
눈․귀․코․혀․몸 등에 있는 물질적인 부분은 물질의 성격상 주변의 영향을 받으면 어쩔 수 없이 변하고 만다. 그러면 눈등에 있는 정신적인 부분은 싫지만 언젠가 따라서 변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前五根의 종합인 제6의근도 전5근과의 不可分離이므로 拙著, 原始佛敎와 形而上學, p.67.
역시 언젠가 따라서 변해야 한다. 이처럼 6근은 無常하다. 그러면 6근을 따라 생한 6경도 무상한 것이 된다. 無常한 것은 괴로움이다. 변하는 것이 모두 괴로움일 수는 없다. 병들었다 건강해지는 것도 변화이고 그런 변화조차 괴로움이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름지기 모든 변화가 결국에는 타락적 변화로 귀결되기에 변화하고 無常한 것을 괴로움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無常하고 괴로운 존재는 나라고 할 수 없다. 순수한 의미의 나는 常一하고 主帝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十二處說 속에서 항상 이 두 속성이 함께 함에 주의를 기울이며 다음 논술을 살펴보자. 故 高翊晉 박사는 十二處說의 두 속성으로부터 業說이 전개되어 나오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구정녕히 보여주고 있다. 高翊晉 박사의 業說 전개의 관점은 초창기(阿含法相의 體系性硏究)와 다소 달라진 면이 있다. 즉, 業說의 전개에 三法印說의 참여가 초창기에는 보이지 않으나 그 뒤의 논문(佛敎 윤리와 한국사회,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986)에서는 三法印說의 참여를 필수적인 것으로 하고 있다.
“Ⓐ 모든 것은 덧없고, 괴로움이고, 나라고 할 수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 명백한 사실을 인식하려 하지 않는다. 한사코 모든 것을 덧있고 즐거운 것이고 나라고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과 정반대되는 뒤바뀐 생각(顚倒妄想)이다.……그런 뒤바뀐 생각에서 인간은 나(個我)를 존속시키려는 끊임없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業(karma)이라는 술어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意志적 활동을 가리킨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적 활동은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인간(六根)이 대하는 대상(六境)은 일차적으로 자연(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자연에는 의지가 없으므로, 의지적 작용(因)을 받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한 자연적 반응(果)을 보일 것이다. 십이처설에서 六境을 ‘법(無意志)’이라고 규정했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경우(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의 업(因)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한 결과가 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필연적인 결과를 報(vipāka)라고 부른다.
Ⓑ 그런, 인간이 대하는 대상(六境)에는 자연물만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도 포함되어 있다.……이런 인간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도 自然法則적인 因果律은 아니더라도 일종의 법칙성이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로운 의지를 갖고 있지만 그들이 일으키는 업의 방향과 목적은 다를 수가 없다. 덧없고 괴롭고 나라고 할 수 없는 것(三法印說)에서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個我의 존속을 꾀하고 있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자기 혼자만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에 拒逆할 것임에 틀림 없고, 나와 남의 이익을 함께 위한다면 그들은 順應할 것임에 틀림없다.
Ⓒ 혼자만을 위하는 행동은 惡(a-kuśala)이라 할 수 있고, 나와 남을 함께 위하는 행동은 善(kuśala)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악한 업에는 괴로운 보가, 선한 업에는 즐거운 보가 따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악업은 남의 거역을 받아 뜻이 이뤄지기 어려워 괴로움이 되고, 선업은 남의 순응을 받아 뜻이 이루어지기 쉬워 즐거움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일종의 법칙성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고익진, 한국의 불교사상, pp.241~243.
우리는 이와 같이 인간과 자연사이의 자연법칙적 인과율과 인간과 인간 사이의 善․惡 相應의 인과율을 통합적으로 이해하여 十二處의 세계에는 業因果報의 법칙이 성립한다고 정리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원시불교에서의 ‘업인과보’라는 술어는 그 외연이 비교적 넓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因의 개념이 그러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十二處의 세계 곧 이 우주에 속속들이 적용될 것 같은 업인 과보의 법칙으로 좀처럼 쉽게 설명되지 않는 문제가 인식된다. 즉 어떤 이는 부유한 가정에 났다는 이유만으로 일생을 즐거이 산다. 그런가하면 어떤 이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궁핍함을 면치 못하는 경우를 보는 것이다. 아무리 善하게 살아도 악한 일만 닥치고 또 아무리 약하게 살아도 선한일만 누리는 경우를 허다하게 보게 된다. 최근에는 이러한 문제를 종교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사회체제상의 문제로 보는 경향이 짙어졌다. 그러나 사회체제상의 문제만으로 국한시킨다면 역시 잘못된 견해가 된다.
또 우리가 지금껏 문제로 삼는 우주 및 역사의 전개도 사실 인간의 업력이 그 원인이 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은 것이다. 광활한 우주의 질서있는 움직임이나 무한한 미래에로의 팽창이 의지적인 6근의 업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실제 이런 현상들 때문에 3종외도설이 나온 것일테다. 신의 뜻에 맡긴다든지 宿命적으로 이해한다든지 물질의 우연한 흐름으로 이해한다면 이런 문제들은 오히려 쉽사리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견해는 앞서도 보았듯이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즉 의지에 바탕한 업보적 현상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업인과보설을 택하면 우주론적인 문제 등에 걸리게 되고 3종외도설에 돌아가면 업보적 현상에 걸리게 되는 어려움 속에 있다. 우리는 두 입장의 절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주론적인 큰 범위는 3종외도설 중의 어느 하나로, 그리고 눈앞의 현실에서의 업보적 현상은 업인과보설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러한 입장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사주관상가들에게도 이러한 관점이 꽤 이용되고 있음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입장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므로 궁극적인 진리로서는 자격이 없다.
그럴 경우 우리는 여기서 어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의지의 존재를 포기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 및 인간과 인간 사이에 분명히 성립하는 업보적 관계도 결코 단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실의 관찰로부터 너무나 자명하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3종외도설은 추측 그것일 뿐이다. 검증되지 않는 가설에 불과한 神 등의 원리 때문에 자명한 사실(satya)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이렇게 업인과보의 원리를 굳게 지닌다면 문제의 현상들도 업인과보의 현상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 이 현상들이 과연 어떻게 업인과보의 입장에서 이해될 수 있을까?
2. 三世輪廻라는 열쇠
문제의 현상들도 “업․보의 현상으로 본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경우로 분석될 것이다. 하나는, 과보는 현재 인식되고 있지만 그 업인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경우와 다른 하나는, 업인은 현재 인식되고 있지만 그 과보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경우로…….
그렇게 되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위의 두 가지 경우에는 전자는 그 업인이 시간적으로 현실세계(現世)의 이전에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고, 후자는 과보가 그 이후에 來世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업과 보의 인과관계는 과거․현재․미래의 三世에 걸쳐 전개되고 있다고 보게 될 것이다.” 고익진, 앞의 책, pp.244~245.
이렇게 해서 업인과보의 삼세윤회설이 정립된다. 그런데 이처럼 윤회의 개념을 도입하고 나면 여러 가지 논점이 따라 일어난다. 첫째, 원시불교 내의 교설인 無我說과 輪廻說의 조화가 문제된다. 고익진, 阿含의 無我輪廻說(현대 한국불교의 방향, pp.165~170).
둘째, 生死의 교차순간의 존재 양태가 난해하다. 拙著, 原始佛敎의 緣起思想硏究, pp.217~226.
셋째, 前生 또는 宿世의 기억이 전혀 남아 있찌 않음도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넷째, 이생에서 지은 業이 어떻게 다음 생 또는 보다 먼 미래의 生에 과보를 불러들일 수 있는가도 문제로 등장하는 것이다.
일견하기에 3종외도설 중 Brahmanisam이나 Jainism의 윤회설보다 더 문제가 많은 듯한 原始佛敎의 輪廻說을 굳이 받아들여야 할까. 일례를 들어 네 번째 문제는 生死하는 한 중생에게 있어 어떻게 어떤 業이 그 報를 끝까지 불러 일으키는가 하는 의문이거니와 이에 대해서 한 재미있는 견해가 있다.
우리가 여러 가지 행위를 일으킬 때 동시에 우리의 신체 중에는 일종의 세력이 남게 되는데 이것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종의 業이므로 無表業(a-vijñāpti-karma)이라고 부른다. 西義雄, 日譯俱舍論, p.23;그리고 無表業에 관해서는 俱舍論界品[大正藏 29, p.3上;Abh.k.pp.7~8]과 業品 참조.
이 無表業이 무형의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다가 來生 또는 그 後의 生에 果報를 불러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作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生表色 또는 無表業論은 說一切有部의 독특한 견해이므로 물론 南傳에는 아비달마론에서도 없다. 舟橋一哉, 南傳阿比달毘達磨にわいて(宗敎硏究 12A, p.112).
그러나 이 이론이 部派佛敎時代에는 커다란 논점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俱舍論 스스로도 無表의 實有를 증명하기 위해 10개소 남짓하는 경문을 인용하고 있다[Abh. K. p.196 등 참조];成實論의 경우 無作品[大正藏 32, p.290上 참조].
그것은 無表業論 그 자체의 매력 때문이라기 보다는 윤회의 과정에서 業報가 어떻게 相應하느냐 하는 문제의 심각성에 기인한 것이었을 테다.
사실 우리는 통속적으로 業을 지으면 이 생에 그 과보를 받든지 받지 않으면 다음 生들 가운데 언젠가에 받는다라고 생각할 때, 業力이 남아가서 과보를 받게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입장에서의 業力은 바로 無形의 實體로 통속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잇음도 느끼게 된다. 이 無形의 實體로서의 業力의 관념은 바로 無表業이라는 관념과 매우 닮아 있는 것이다. 일반대중이 지니는 業의 관념은, Jainism의 宿業만을 비중있는 業으로 보는 입장과 Brahmanism의 有我論의 輪廻(ātman의 윤회)의 입장에 오히려 가까운 것이 현실이어서 우려된다.
그런데 이러한 관념은 자못 위험하다고 본다. 정신적 실체로서의 자아의 행위(表業)가 남기는 無形의 實體라는 관념은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는다. 행위 자체가 實體가 아닌데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無形의 實體가 창출된다는 말인가. 물론 有部에서는 행위도 形色으로 보고, 大正藏 29, p.67下, 身表許別形非行動爲體;Abh. K, p.192, kāya-vijñāptir-iṣyate saṁsthānaṁ na gatir-yasmāt-samskrtam ksanikam.
그것은 實有이므로 나믈대로의 이유를 지니긴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그 部派의 소견일 뿐 원시불교의 입장은 결코 아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전생에 남은 업을 어떤 경로를 통해서 과보로 받았으며, 이생에 다 못한 業은 또한 어떤 경로를 통해서 다음 어느 생에서인가 과보로 받게 되는 것일까? 이처럼 숱한 難點에 연루되기에 윤회설에 대한 반대의 입장이 존재하기까지 한다. 木村泰賢. 原始佛敎思想論, p.178.
그러나 난점이 있다고 해서, 업인과보의 삼세윤회설을 포기할 수도 없다. 난점이 없는 外道思想도 역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점의 성격이 외도사상과 원시불교 윤회설은 서로 다르다. 外道思想의 난점은 눈앞의 자명한 현실조차 타당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업보 윤회설의 난점은 자명한 현실에 철저히 기반을 둘 때 일어나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눈앞의 현실을 기반으로 업보의 원리를 도출했을 때, 업보의 원리로 해결되지 않는 듯한 문제가 인식되었다. 그때 우리는 삼세윤회라는 새로운 관점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여기서 업보의 삼세윤회는 자명한 현실에 바탕을 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업보․윤회의 원리를 도출하고 나니, 다시 본 항목에서 지적한 네 가지 정도의 난점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이 난점에 봉착하여 역시 지금까지의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즉 난점을 해결할 새로운 원리를 업보 윤회설에 바탕하여 도출해야 한다는 태도이다. 왜냐하면 이들 일련의 원리는 자명한 현실에서 출발하였고 또 그것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위의 네 가지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관점은 삼세윤회설에 철저한 논리적 기반을 두어야 하고, 삼세윤회설은 업인과보의 원리에 또 그 기반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업인과보의 원리는 바로 십이처설에 또한 그 본질적인 근거를 두고 잇는 것이다. 결국 삼세윤회설이나 그 이상의 새로운 관점도 십이처설에 근본적인 근거를 두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삼세윤회설은 단적으로 인식된 것을 강조하는 십이처설과는 엇갈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십이처설에 철저히 바탕을 두고 성립된 것이다. 즉, 검증되지 않는 가설에 불과한 神 등을 세우기보다는 현실에서 관찰 가능한 사실들을 중심으로 업인과보의 삼세윤회설이라는 필연적 귀결을 이끌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3세윤회하는 것이 중생 개개의 존재이다. 그리고 중생의 수는 거의 헤아릴 수 없다. 따라서 우주의 시작 또는 그 이전부터 무수한 중생이 항상 있어 왔음을 다시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중생이 살아갈 우주는 六境의 범주에 듦으로 중생들의 의지적 작용인 共業에 의하여 필연적인 움직임(果報)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우주의 필연적인 움직임이 바로 우주 및 역사의 전개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업인과보의 삼세윤회설을 정립함으로써 우주론적 동인이 바로 중생들의 共業임을 유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태초에 있어서의 중생들의 활동을 직접 인식한 것은 아니지만, 이 결론은 현실에 대한 냉철한 관찰과 합리적인 사유를 통하여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진리성에 있어 Brahmanism과 Jainimsm 및 기타 유물론 등의 3종외도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음을 인지할 수 있다.
본 항목(Ⅲ)의 논술을 통하여 우리는 삼세 윤회의 교설이 단순히 당시의 통속적 종교 관념을 채용한 것이 아닌 조직적이고 필연적인 교리 시설의 일환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태초의 상황을 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또 보았지만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주 및 역사 전개의 動因은 바로 중생의 共業이라는 진술을, 3종외도설보다 나은 가설로서 채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Jainism이나 Brahmanism의 윤회설이 지니는 모순점을 모두 극복한 보다 진리로운 가설 업인과보의 3세윤회설도 Brahmanism 등 처럼 “일종 가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神意說… 등 보다는 월등하게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엄연한 사실과 현상에 의해 그 타당성이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가설은 진리성을 인정받을만 하다.”(고익진, 앞의 책, p.245) 그리고 윤회의 과정을 업인과 과보로써 설명함은 不變의 영속 實體(ātman, jiva)를 상정하여 일어나는 여러 문제를 일거에 극복하는 正理인 것이다.
로서 역시 원시불교의 윤회설을 채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Ⅳ. 動因으로서의 業의 이해
항목(Ⅱ)의 끝부분에서 만났던 두 가지 과제 중에 첫째였던 業說 성립의 필연적 교리 시설에 대한 조사는 앞 항목(Ⅲ)에서 어느 정도 성취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이제는 나머지 문제를 해결할 차례이다. ‘태초 중생이 共業을 일으킨다’라는 진술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經說上의 배경을 찾아 보는 일이 남은 것이다.
1. 色界天과 劫初衆生
태초의 모습을 암시하는 귀한 자료가 니카야와 阿含에 散說되고 있다. 그러나 각 자료마다 표현에 미묘한 차이를 보여 자료에 대한 비평을 필요로 한다.
니카야에서는 대체로 세 군데에서 다음과 같이 劫初중생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A. ⓐ “언제 어디서든지 긴 세월에 걸쳐 이 우주가 生成되며 돌아가는 그런 시기가 있다. 이처럼 우주가 생성될 때 대부분의 중생은 光音天(ābhāssara)에 나게 된다. 그 중생들은 그곳에서 뜻으로 되어 있고 기쁨을 먹으며 살고 스스로 빛을 내고 공중을 걸어 다니고 깨끗하게 살면서 길고 오랜 세월을 머문다.
ⓑ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지 긴 세월에 걸쳐 우주가 소멸되며 돌아가는 그런 시기가 있다. 이처럼 우주가 소멸되어 돌아갈 때
ⓒ 이 우주에는 텅빈 브라흐만의 궁전(brahma-vimāna)이 나타난다. 그런데 어떤 중생이 있어 목숨이 다하고 福이 다하여 光音天의 무리로부터 죽어서 텅빈 브라흐만의 궁전에 태어난다. 그 중생은 그곳에서도 뜻으로 되어 있고 기쁨을 먹으며 살고 스스로 빛을 내고 공중에서 걸어 다니고 깨끗하게 살면서 길고 오랜 세월을 머무른다…….“ D. N. Ⅰ, p.17;D. N. Ⅲ, P.23.
B. (ⓐⓑ는 동일)
“ⓒ 많은 중생이 光音天에서 죽어 이곳에(idha)오게 된다. 그들도 뜻으로 되어 있고 기쁨을 먹으며 살고 스스로 빛을 내고 공중에서 걸어다니고 깨끗하게 살면서 길고 오랜 세월을 머무른다…….” D. N. Ⅲ, p.66.
A와 B의 차이는 ⓒ단락에 있다. A는 Brahmajāla-Sutta와 Pātika-Sutta에서 발췌한 내용이거니와, 光音天에서 죽은 중생들이 梵天(Brahmakāyika 및 Mahābrahmaṇa-deva)을 이루고 그런 뒤 그곳에서 죽은 중생이 다시 이 곳(idha)에 태어나는 경로를 담고 잇다. 여기서 이곳이란 바로 人間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말한다. 이에 비해 B는 Aggaññā-Sutta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단락은 光音天에서 죽은 중생들이 곧 바로 이곳으로 오는 경우를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니카야의 經說에 대응하는 漢譯文을 찾아보면
A. ① 或有此世間初壞敗時, 有餘衆生 命盡行盡. 從光音天命終 乃更生餘空梵處 …… 大正藏 1, p.69中(長阿含阿?夷經은 Dgha-Nikāya Pāṭika-sutta의 대응경이다.)
② 或有是時 此劫始成. 有餘衆生 福盡命盡行盡. 從光音天 命終生空梵天中 …… 大正藏 1, p.90中(長阿含梵動經).
③ 其劫壞敗時 下人民便上生弟十二阿衛貨羅天上. 劫壞敗時. 其天福德薄. 命盡展轉來下. 有梵天在上虛空中生.…… 大正藏 1, p.266中(梵網六十二見經).
B. ① 天地始終劫盡壞時. 衆生命終皆生光音天. 自然化生 以念爲食 …… 其後此地盡變爲水 …… 其後此水變成大地. 光音諸天福盡命終來生 此間雖來生此猶以念食.…… 大正藏 1, p.37中~下(長阿含小緣經).
② 天地破壞. 更始成之後. 人皆在十五阿衛貨羅天上. 其天上人. 以好喜作食 …… 時其水滿天下地. …… 天地成之後. 彼天人福德薄祿. 命欲盡者從阿衛貨羅天上. 來下遊此間地. 亦以好喜爲食. 大正藏 1, p.305中(大樓炭經 天地成品);A ③과 B②는 ‘十五’는 A③처럼 ‘十二’로 고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光音天은 色界第六天이므로 欲界六天과 합쳐 제12天이 되기 때문이다.
C. ① 此世天地還欲成時. 有餘衆行 福盡行盡命盡. 於光音天命終生空梵處 …… 或有是時 此世還成世間衆生多有生光音天者. 自然化生 …… 其後此世變成大水 …… 其後此世還欲變時 有餘衆生福盡行盡命盡 從光音天 命終來生此間. 大正藏 1, p.145中(長阿含世記經 世本緣品).
② 世間轉已. 如是成時. 諸衆生等. 多得生於光音天上. 是諸衆生 生彼天時. 身心環豫 …… 稱時世間轉壞已成. 空無有物諸梵宮中. 未有衆生. 光音天上. 福業盡者. 乃復下生梵宮殿中 …… 稱時復有諸餘衆生. 福壽盡者. 從光音天 捨身命已亦於此生. 身形端正 …… 大正藏 1, p.358上~中(起世經 最勝品).
③ 如是成時. 其衆生輩. 多得生於光音天上. …… 彼三摩耶世間轉壞. 其轉壞時. 虛空無物. 於梵宮中. 有一衆生. 光音天上福盡命盡. 從光音天下來. 生彼梵宮殿中 …… 彼時復有自餘衆生. 福業壽盡. 從光音天. 捨身命已. 於此處生. 身形端正 …… 大正藏 1, p.413中(起世因本經 最勝品).
한역문의 A․B는 니카야의 A․B文에 각각 상응하는 내용들이고 C文은 니카야 AB文의 내용이 한꺼번에 설해져 있어 따로 분류해 놓았다. 이상과 같은 니카야와 한역아함의 經說들을 비교할 때 우리는 먼저 두 가지 면에 관심을 갖게 된다. 첫째는 우주의 生成 단계와 消滅단계의 구별이다. 니카야의 경우 생성하는 우주(samvaṭṭamāna-loka)와 소멸하는 우주(vivaṭṭamāna-loka)가 구별되어 있다. 그런데 한역의 경우 C의 ②․③만이 轉成時와 轉壞時를 구별하고 있을 뿐이다. C의 ②․③ 중에서도 起世因本經의 ③만이 가장 뚜렷한 명시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외의 한역문들은 A①․③ 및 B①은 소멸단계만으로 우주의 시작을 잡고 있고(此世間初壞敗時, 其劫壞敗時, 天地始終劫盡壞時), A②와 B②는 생성단계만으로 우주의 시작을 언급하는 양상이다(此劫始成, 更始成之後). 이처럼 생성단계만으로 또는 소멸단계만으로 또는 그 둘을 모두 언급하는 등의 經說이 모두 다 어느 한 자료에서만 홀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둘 또는 셋씩 여러 자료에서 復數로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한역의 경우 그 原本 Text에도 역시 생성단계만으로 또는 소멸단계만으로 설해져 있었다고 보게 한다. 따라서 세 가지 구성이 모두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할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들이 왜 세 가지로 나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유를 논급하기에 역부족이다. 단지 생성단계와 소멸단계가 함께 언급되는 경우에 중점을 두어야겠다는 입장을 취할 뿐이다. 그것은 니카야에서 원전으로 명백히 언급되어 있고, 이 경우에 대한 원만한 이해가 가능하다면 나머지 두 경우에 대한 이해도 자연히 가능해질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관심을 가질 부분은 태초에 光音天으로 대부분의 중생이 온다고 하거니와 光音天에 오기 전에는 어떤 존재였던가가 생각해 볼만하다. 대개의 자료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고, 한역 A③과 B②에 ‘下人民’ 또는 ‘人’으로 나타난 것이 고작이다. 여기서 B②의 人은 단순히 衆生一般에 대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잇지만, A③의 下人民은 우주가 소멸단계에 들었을 때 아위화라(Ābhāssara)天에 ‘上生’한다고 못박고 있으므로 光音天 중생 이전의 상태로 보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외의 경우 光音天으로 오는 중생들의 본래의 상태에 대한 언급은 없으므로 자료로서의 가치가 다소 멀어진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상의 자료들이 ‘우주 및 역사 전개의 동인으로서의 중생 共業’을 이해하는 데 어떠한 기여를 하는지 살펴보자. 위의 자료들에 공통되는 요점은 우주의 시작단계에 중생들은 ‘光音天’으로 온다는 사실이다. 왜 하필이면 중생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光音天이라는 限定으로부터 시작할까. 光音天은 欲界六天․色界十八天․無色界四處 중에서 色界第六天(第二禪의 최상天)에 위치한다. 그 많은 天界와 선정 단계가 있는데 굳이 第二禪에 속하는 色界 제6천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니카야와 같은 경우 생성단계의 광음천은 그대로 있거니와, 소멸단계에 들어서 비로소 중생들이 光音天으로부터 梵宮으로 또는 이세상으로 下生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우리는 七識住라는 교설에 주목하게 된다.
“몸이 여러 가지이고 생각이 여러 가지인 중생들이 있다. 곧 인간과 일부의 천신과 일부의 아래로 떨어진 자들이다. 이것이 첫 번째 식별(viññāṇa)의 머뭄이다.
몸이 여러 가지이고 생각이 하나인 중생들이 있다. 곧 범신의 무리로 처음 태어난 천신들이다. 이것이 두 번째 식별의 머뭄이다.
몸이 한 가지이고 생각이 여러 가지인 중생들이 있다. 곧 광음천의 천신들이다. 이것이 세 번째 식별의 머뭄이다.
몸이 한 가지이고 생각이 한 가지인 중생들이 있다. 곧 遍淨天(subhakiṇha, sk. śubhakṛtsna)의 천신들이다. 이것이 네 번째 식별의 머뭄이다.” D. N. Ⅱ, p.55(N. D. P), p.69(P. T. S).
이외에 無色界의 前三處인 空無邊處 識無邊處 無所有處가 각각 식별의 머뭄이 있어 모두 七識住를 이룬다. 여기서 우리는 光音天이 바로 제3 식주에 해당하고 그곳의 중생은 몸은 하나이되 생각은 여럿인 중생으로 묘사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제3식주의 전후에 몸은 다르되 생각이 하나인 제2식주로서 梵神의 무리(Brahmakāyika)와, 몸도 하나고 생각도 하나인 제4식주로서 편정천이 존재하고 있다.
앞서 경설은 光音天 중생의 경우 우주가 생성할 때 나타나는 것으로 묘사한다. 즉 우주의 생성이 먼저이고 중생의 나타남은 그 이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생이 우주를 생성시켰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우주의 생성의 일환으로 중생이 참여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원시불교의 業說은 중생이 初有因의 역할을 해야함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따. 그럴 때 우리는 光音天 중생 이전의 중생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3식주 보다 경계가 높은 제4식주의 중생을 주목하게 된다. 제2식주는 니카야의 발췌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주의 소멸단계에서 광음천 중생이 下生하는 한 장소이다. 따라서 우주의 生成단계 이전의 중생의 상태는 아무래도 광음천보다 높은 제4식주의 편정천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光音天보다 높은 경계는 꼭 편정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제1식주는 欲界, 제2식주는 色界 제1선, 제3식주의 광음천은 색계 제2선을 대표한다. 그리고 제4식주의 편정천은 색계 제3천을 또한 대표하고 있다. 여기서 대표한다는 표현은 色界의 제1선․2선․3선에는 각각 三天이 구성되어 있거니와 그들이 모두 포함된다는 뜻이다. 俱舍論에서도 식주에 언급되는 하늘은 대표적임을 언급하고 있다. 일례로 광음천을 들어보면 ‘최후의 것을 들므로써 아울러 제2선이 포섭됨을 알아야 한다’라고 논급한다[Abh. K, p.11610-11 atra punaḥ paryantagrahaṇāt - sakala - dvitiya - dhyāṇa-graharaṇaṁ veditavyam]
이어 無色界 前三處도 광음천보다 높은 경계이다. 또 七識住에 無想衆生處(asaññā-satta-āyatana)와 非想非非想處의 二處를 더해 九衆生居 D. N. Ⅲ, p.203, 여기서 無想衆生天의 위치는 一身一想의 편정천과 無色界初處인 空無邊處의 사이이다. 따라서 無想天은 色界소속이라 할 만하다.
가 설해지거니와 이들은 광음천보다 높은 경계이다. 이처럼 광음천보다 높은 경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편정천을 드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七識住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듯이 色界 제4선 중의 최상위 五淨居天(suddhāvāsa) D. N. Ⅱ, p.40.
은 중생이 그곳에 태어나서(upapati) 거주하고(āvaIsa) 윤회할 경우(saṁsāva) 이세상에 다시 올 수 없다. M. N. Ⅰ, p.144.
따라서 五淨居天으로 대표되는 色界 제4선천의 중생들은 우주의 생성과 소멸에 크게 관여하지 않을 것을 예상케 한다. 특히 우주가 완전히 파괴될 때는 火災․水災․風災의 三災가 일어나거니와 각각 光音天․遍淨天․廣果天(veha-phala, sk, bṛhatphala-deva)에까지만 영향을 끼쳐 멸해버린다. 大正藏 1, p.137中.
여기서 광음천은 色界 제4선중 아래에서 3번째 위치하는 하늘이다. 따라서 오정거천은 3재의 위험으로부터도 벗어나 있어 마치 우주 成敗의 바깥에 위치하는 듯하다. 이처럼 色界 제4선중 적어도 오정거천의 중생 만큼은 우주의 생성․소멸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의 경계는 無色界이다. 따라서 色法의 참여가 필연적인 우주의 생성 등에 역시 관계하지 않을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면 광음천 이상의 경계로서 우주의 생성과 소멸에 관여할 수 있는 하늘은 색계 제3선의 편정천 등과 색계 제4선의 아래의 세 하늘 無雲天(anabharaka-deva), 福生天(puṇyapra sava-deva), 廣果天(bṛhat-phaladeva)
그리고 無想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중에서 실제 우주의 생성에 共業을 일으킬 무리들은 편정천의 중생들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각도 하나이고 몸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색계 제4선의 아래의 세 하늘은 그 중생들에 있어 생각의 一․異가 어떤가를 經說로부터 얻을 수 없고 색계 제4선의 아래의 세 하늘도, 原始佛敎의 四禪을 면밀히 검토할 때 一想일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3선과 같이 제4선도 捨(upekkha, sk. upekṣa)의 修習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一想은 一想이되 거의 無想에 가까울 것도 유추할 수 있다. 捨念淸淨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無想天은 생각이 없으므로 특별하게 의지적 작용인 業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편정천의 중생들이야말로 한마음 한 뜻 한 몸으로 우주를 생성하기 위해 의지적 작용(業)을 일으킬 수 있고 그 의지적 작용은 그 중생 모두에게 공통되므로 ‘共業’이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술이 건전하다면 우리는 ‘우주생성의 初有因은 편정천 衆生들의 共業이다’라고 정리할 수 있게 된다.
2. 우주 및 역사 전개의 연역
우주 생성의 초유인을 遍淨天 衆生들의 共業으로 두고, 앞서의 經說들과 기타 原始佛典의 經說들을 참조하여 우주 및 역사의 전개를 연역해보자.
편정천(subha kiṇha) 중생들이 一想(eka-saññin)의 의지적 作用인 共業을 일으켜 우주가 서서히 성립되어 간다. 이때 우주의 성립은 ‘합쳐 굴러감(sam-vaṭṭmāna)’으로 표현되듯이 무질서하게 흩어졌던 요소들이 지속적으로 질서를 갖추며 결합하는 과정임을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성립된 우주 속에, 편정천 중생들 중 命과 福이 다한 대부분의 중생이 그곳에서 죽어 바로 아래 境界인 光音天 중생의 모습으로 일단 태어난다.
광음천 중생들은 몸은 하나이나 생각은 서로 다르다(nānāsaññin). 이처럼 생각이 다르므로 더 이상 우주 생성의 의지를 집결시키지 못한다. 그리하여 우주는 소멸의 단계로 접어든다. 소멸은 ‘갈라지며 굴러감(vi-vaṭṭamāna)’으로 표현되듯이 질서있게 결합된 구조가 다시 무질서하게 흩어져가는 과정임을 유추할 수 있다. 물질적인 것은 스스로 離合集散하므로, 생각이 서로 다른 이상 중생들은 그 흩어짐을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소멸의 과정이 서서히 진행되는 동안 광음천의 중생들 중 어떤 중생은 命과 福이 다하여 바로 아래 경계인 梵天의 중생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좀더 아래 경계로 생각되는 유희타락天(khidda-padosika-deva)의 중생 또는 意타락天(mano-padosika-deva) 유희타락천에 대해서는 D. N. Ⅰ, pp.18~19 및 D. N. Ⅲ, pp.25~26 참조. 그리고 의타락천에 대해서는 D. N. Ⅰ, pp.19~20 및 D. N. Ⅰ, pp.26~27 참조.
의 중생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광음천에서 곧 바로 이 세상(idha-loka)으로 오는 중생도 있고 梵天이나 유희타락천, 의타락천에서 복과 목숨이 다하여 이 세상에 오는 중생도 있다. 또 평정천보다 높은 경계로 보이는 無想天 중생들이 생각을 일으키는 바람에 이 세상에 오는 경우도 있다. 無想天 중생의 환생에 대해서는 D. N. Ⅰ, p.26의 adhiccasamuppanna-vāda(偶發論)참조.
이중에서 특히 광음천 중생이 소멸의 과정에서 죽어 바로 이세상에 오는 데 여기서 빛을 내며 날아다닌다. 그 초창기에, 이 세상은 太初(agga, sk. agra)라고 부를만한 곳으로 칠흑같은 어둠이 있고 온통 물로 되어 있다. 이곳에는 해도 달도 없고 중생이 중생이라고 불리고 있을 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물위에 평평하고 맛있는 땅이 나타난다. 어떤 침착지 못한 중생이 땅을 손가락으로 맛보고는 집착한다. 여기에 渴愛(taṇhā)가 들어 간다. 이어 모든 중생이 손으로 덩어리를 만들어 땅을 먹는다. 그러자 중생들에게서 스스로의 빛은 사라지고 달과 해 및 별이 나타난다. 오랜 뒤 맛있는 땅은 사라지고 ……. 男․女의 구별이 생기고 …… 왕족․사제․서민․노예의 四姓 계급이 생긴다.…… 이 세상에서의 太初로부터의 전개는 니카야의 Aggañña-Sutta와 한역아함의 小緣經, 世記經, 大樓炭經, 起世經, 起世因本經들이 거의 일치한다.
이러한 과정 중에서 輪寶(cakka-ratana)에 의해 통치를 하는 轉輪王이 나타나고, 전세대의 마지막 전륜왕으로부터 새로이 나타나는 전륜왕 사이에서 80,000세의 중생이 늘어나는 惡業에 의하여 결국 10세까지 수명이 줄고 다시 善業을 지어 80,000세의 수명을 회복해가면서 한 歷史週期를 이루고 있다. D. N. Ⅲ, 제3경 cakkavatti-s에는 輪寶가 없이 정치를 하는 第八의 王에 의해 惡(pāpa)이 연쇄적으로 발생해가고 이어 善(kusala)이 회복되는 과정을 자세히 담고 있다.
이세상(idha-loka)은 바로 이러한 역사주기를 부단히 되풀이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 외의 다른 세계에서도 중생의 활동은 활발하게 영위되고 또 빠짐없이 생사윤회들을 할 것이다. 이러한 세월이 오랫동안 흘러가면서 결국 우주의 모든 요소들은 완전한 무질서로 흩어져 버릴 것이고 그것은 바로 우주의 소멸과정(흩어짐<vi->의 과정<-vattamāna>)의 완료인 것이다. 이러한 생성에서 소멸까지가 바로 一劫(kappa) 劫의 범위는 다양하다. 번쇄한 아비달마 교학에서는 ‘최초의 風輪으로부터 器世間의 완성까지를 1小劫으로 하고, 20소겁이 1中劫이고, 4중겁을 1大劫으로 규정한다. 결국 한 우주는 1대겁을 시간적 단위로 하여 생성․소멸하는 것이 되므로, 修行本起經에는 말하는 極天地之始終謂之一劫(大正藏 3, p.461中)의 劫은 바로 1대겁의 개념일 것이다.
이다.
완전한 무질서 속에 흩어진 요소들에 대하여, 善業과 正業을 행하여 편정천에 태어난 중생들이 다시 一想의 의지적 작용인 共業을 일으켜 다시 우주는 서서히 성립되어 간다.…… 그리고 또 소멸한다. …… 이렇게 무수한 劫의 되풀이가 있는 것이다.
이상이 尼柯耶와 阿含의 자료를 통하여 유추할 수 있는 우주의 始終이다. 俱舍論 등의 문헌은 이러한 우주가 다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규정하고 있다. 俱舍論 分別世品 三之五 권20[玄奘譯]참조.
여기서 우리는 우주 및 역사 전개의 初有因과 動因이 바로 중생의 共業임을 자못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이 가장 큰 규모인 우주의 성립과 소멸에 있어서도 중생의 共業이 動因이 돠을 살폈다. 아울러 업보의 3세윤회 자체가 냉철한 논리의 귀결임도 살폈다. 따라서 이 우주의 어느 곳에서도 業因果報의 法則이 적용되지 않는 곳은 없음을 재삼 확인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주 및 역사 전개의 動因은 唯一神 등이 아닌 중생의 共業이다’라고 다시 한번 결론내리고자 한다.
Ⅴ. 業說은 原始佛敎의 表層敎說
業說을 궁극에까지 밀고나가 우리는 우주 및 역사 전개의 절대적인 動因이 바로 중생의 業力임을 정립할 수 있었지만, 실제 우리는 겨우 ‘動因’의 성격을 규정한 것에 불과하다. 宇宙論은 단순한 動因의 파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주를 구성하는 본질에 대한 파악, 또는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본래적인 모습(實相)을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우주론의 궁극적 과제이다.
業說은 原始佛敎의 여러 敎說들 가운데서 初入에 해당한다. 또는 표층에 해당한다. 따라서 業說에 입각한 우주론은 역시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業說 이후에 중층적으로 전개되는 여러 원시불교의 교설들을 통하여 이제는 우주의 본질에 대한 시사를 얻기는 참으로 어렵다. 언설적인 해명을 업설처럼 그렇게 적극적으로 베풀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단지 행자 스스로의 해결을 위하여 ‘깨달음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가지고 제시할 뿐이다.’ 고익진. 불교의 우주론(현대 한국불교의 방향, p.151)
이와 같이 우리가 본 논문에서 다루었던 문제와 그 해결의 위상이 (원시)불교 전체에 비추어 볼 때 표층적인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모든 논술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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