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淨衆無相의 楞嚴禪 硏究

醉月 2013. 7. 13. 01:30

淨衆無相의 楞嚴禪 硏究
趙  龍  憲*

*원광대 대학원 불교학 박사과정 수료. 동양종교학과 강사.
「진표율사 미륵사상의 특징」, 「능엄경에 나타난 도교사상」,
「李資玄의 능엄선 연구」

 

차례
1. 서 론
2.『歷代法寶記』와 『楞嚴經』
3. 引聲念佛과 耳根圓通의 관계
4. 耳根圓通이란 무엇인가
5. 결 론


淨衆無相의 楞嚴禪 硏究
1. 서 론

최근에 들어와 8세기 중반에 중국의 사천지방에서 활약하였던 淨衆宗의 無相禪師(684~762)에 관련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무상선사가 초기선종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대한 문제, 티벳불교에 미친 그의 영향력, 그리고 무상의 선사상 등을 다룬 연구논문들이 한․중․일 삼국의 불교학자들에 의해서 나오고 있다. 대략 宋代 이후 20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선종사에서 잊혀진 인물이었던 無相이 근래에 들어와 이처럼 학계로부터 주목받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티벳에 최초로 중국의 선불교를 전파한 인물이 무상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티벳 선불교의 원조는 무상이라는 관점이다. 이 점은 선종사의 전개과정에서 頓․漸의 문제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사실로서, 일본학자들의 연구는 대체적으로 이 부분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山口瑞鳳의 「티벳佛敎와 新羅의 金和尙」, 「고대 티벳에서의 頓悟․漸悟의 논쟁」이나 小畠宏允의 「歷代法寶記와 古代의 티벳佛敎」와 같은 논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연구들을 가능하게 했던 배경에는 금세기 초에 돈황에서 발견된 歷代法寶記?와 ‘티벳宗論’에 관한 문서들이 작용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무상선사가 주목받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상이 馬祖道一(709~788)의 스승에 해당된다는 점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통설은 마조가 南嶽懷讓(677~744)의 제자인 것처럼 알려졌으나 진짜 법맥은 그것이 아니라 무상의 문하에서 수업한 제자라는 사실이다. 원각경대소초?를 근거로 한 이 주장은 중국의 선학자 胡適(1892~1962)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마조야말로 철저하게 돈오사상에 입각한 남종선을 가지고 당시의 선종계를 풍미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마조가 신라 출신 무상의 제자라고 한다면 중국과 한국의 초기선종사는 상당부분 다시 쓰여야 할 정도로 심각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울러 구산선문의 개창자들이 집중적으로 마조문하에 법맥을 대었던 까닭도 해명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신라의 선승들은 같은 고향의 선배에게 배운 마조에게 공부하는 것이 여러모로 자연스러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문제의식하에서 무상과 마조의 관계를 추적한 사람은 국내의 閔泳珪이다. 그가 1991년 사천지역에 들어가 무상의 유적지를 답사하여 「세계일보」에 발표한 「四川講壇」이 바로 그러한 추적작업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민영규의 작업은 해방 이후 국내 불교학자로서는 처음으로 무상의 유적지를 직접 답사하고 확인함으로써 무상에 대한 관심을 한결 고조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무상선사 연구붐을 반영하는 집적물이 바로 淨衆無相禪師?(불교영상회보사, 1993)라는 단행본이다. 여기에는 국내외 학자들의 연구논문은 물론 무상에 관한 주변자료들까지 거의 망라되어 있어서 연구자들에게는 여러 가지로 편리함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淨衆無相禪師?에 수록된 연구논문들의 전반적인 경향을 검토해 볼 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무상의 독특한 수행법인 ‘引聲念佛’을 소략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무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引聲念佛’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인성염불이 과연 무엇인가를 해명해야만이 무상의 돈오사상을 이해할 수 있고 아울러 그의 수행법이 지닌 독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성염불을 이해해야만 그의 돈오사상이 지닌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겠다. 인성염불이 무엇인가를 모르면 결과적으로 무상을 모르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만큼 인성염불에 대한 이해는 무상의 禪風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무상의 선풍을 ‘念佛禪’으로 규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무상의 선풍을 염불선이라는 틀 속에서 파악하는 한 그 사상적 핵심은 놓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무상의 선은 염불선이 아니다’라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무상이 정말로 염불선 수행자였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 그의 명제였던 三句, 즉 無憶․無念․莫忘으로 상징되는 돈오적인 선사상과 염불선과의 사상적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진다. 다시 말해서 서방정토와 타력구제의 요소까지를 포함하는 염불선을 삼구의 돈오사상과 사상적으로 같은 노선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염불선은 南宗禪류의 돈오사상 쪽하고는 노선이 다르다고 보는 것이 여러모로 자연스럽다. 둘째, 무상이 염불선이라고 한다면 그의 법제자인 마조나 더 나아가 마조계의 법을 전수받은 新羅 九山禪門 개창조들과의 사상적 연결이 九山禪門 중에서 洪陟, 慧徹, 慧昭, 玄昱, 道允, 梵日, 無染 등의 선승들이 한결같이 마조계의 선법을 이어 받았다.


 어렵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현재까지 드러난 바에 의하면 철저한 돈오를 주장했던 마조 또는 구산선문의 道義禪師(?~825?)에게서 염불선적인 요소를 조금이라도 찾아보기는 어렵다. 무상의 수행법을 염불선으로 파악한다면 구산선문과 무상의 선풍 사이에 사상적으로 비슷한 점이 발견되어야 하는데 현재 보면 양자 사이에 어떠한 상관관계를 설정하기가 어렵다. 법맥상으로는 무상-마조-구산선문으로 이어진다고 해놓고 사상적으로 또는 선풍이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이상한 일이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무상의 선풍을 염불선으로 규정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최초의 인물은 누구인가를 탐색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圭峰宗密(780~841)이다. 종밀은 圓覺經大疏鈔 卍續14 권3 下, p. 558 上.
에서 무상의 인성염불을 염불선이라고 명백하게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南山念佛門禪宗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비록 표현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내용적으로 염불선으로 이해한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 무상의 인성염불을 염불선으로 규정한 인물은 현대 일본의 불교학자들이다. 關眞大는 그의 야심작이라 할 수 있는 禪宗思想史에서 무상의 인성염불을 ‘염불과 선을 일체로 되게 하는 염불선’이라고 표현하였다. 關口眞大, 禪宗思想史, 山喜房, 昭和 39년, p. 195.
 

이후로 무상 하면 으레 염불선인 것으로 굳어졌다. 일본사람들이 염불선이라고 하니까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무비판적으로 이를 따르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학자들이 인성염불을 염불선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楞嚴經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무상의 인성염불은 능엄경에서 제시하는 가장 수승한 수행법인 ‘耳根圓通(일명 觀音法門)’인데 일본학자들은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불교계에서는 일찍이 9세기부터 능엄경?을 위경으로 판정하고松本信道, 「三論․法相對立の始源とその背景-淸辨の掌珍論受容めぐて」, 三論敎學究?, 春秋社, 1992.


 금기시하여 왔기 때문에 능엄경이 담고 있는 정보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다고 보여진다. 그 결과 현재에 있어서도 능엄경에 대한 연구논문은 손에 꼽을 정도로 연구가 부진한 편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무상의 인성염불이 염불선이 아니라 능엄경?에서 말하는 이근원통의 수행법임을 밝히는 데 있다. 이근원통의 수행법이 능엄경에 기반해 있기 때문에 그 명칭을 ‘楞嚴禪’이라고 붙여 본 것이다.

 

2. 歷代法寶記와 楞嚴經
1)『역대법보기』의 돈오사상

현재까지 알려진 무상에 관련된 기본적인 자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無住, 歷代法寶記 無相傳(T. 51~184 下)
神淸, 北山錄 卷6 및 慧寶의 注記(T. 52~611 中)
宗密, 圓覺經大疏鈔 卷3의 下(Z. 14~278 b, c)
李商隱, 「唐梓州慧義精舍南神院四證堂碑銘並序」(836~840년, 全唐文? 卷 780)
段文昌, 「菩提寺置立記」(全唐文 卷617)
贊寧, 宋高僧傳? 卷19, 「無相傳」(T. 50~832 中)

 

이들 자료 중에서 무상의 선사상과 인성염불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시해야 할 자료는 역시 역대법보기?라고 생각한다. 역대법보기를 제일 먼저 꼽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상을 따랐던 추종자 그룹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양적으로 풍부한 분량을 가지고 있으며, 또 하나 성립 연대가 다른 자료들보다 가장 앞서기 때문이다. 柳田聖山에 의하면 역대법보기는 초기 선종사의 모든 과제를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돈황의 선종문헌 가운데서 가장 장편이란 점도 주목할 만하다. 말하자면 역대법보기?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최고의 초기 선종문헌이다”라고 평가한다. 柳田聖山 著, 楊氣峰 譯, 초기선종사? Ⅱ, 김영사, 1991, p. 22..
 

물론 역대법보기에는 무주계통에서 자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작한 듯이 여겨지는 몇 가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발견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달마로부터 전래된 전법의 가사가 6조 혜능에게서 측천무후의 초청으로 입내공양된 후 武后가 智詵에게 주어 처적-무상을 거쳐 무주의 손에 이르게 되었다는 기록이 여기에 해당한다. 鄭性本, 禪思想史?, 禪文化硏究所, 1993, p. 236.
 

역대법보기에서 자파 법맥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와같이 전법가사에 대한 기술은 약간의 허위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만을 문제삼아 참고할 만한 역대법보기?의 다른 부분까지 일방적으로 평가절하하는 태도는 현명하지 못하다. 다른 부분, 예를 들어 무상․무주의 선사상을 언급한 부분은 어느 자료보다도 신뢰도가 높은 기록이다. 왜냐하면 자기 종파의 독자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기의 사상이나 종지까지를 왜곡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종사를 살펴볼 때 설령 법맥은 바꾸더라도 법 그 자체, 즉 사상을 바꾸는 경우는 드물다. 사상을 왜곡하면서까지 획득한 독자성은 독자성 그 자체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따라서 역대법보기에 언급되어 있는 선사상에 대한 부분은 매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역대법보기에서 주장하고 있는 선사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돈오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역대법보기의 중심사상이 돈오사상이라고 볼 수 있는 첫번째 근거는 제목에서부터 살펴볼 수 있다. 역대법보기?의 부제는 ‘師資血脈傳’․‘定是非摧邪顯正破壞一切心傳’․‘最上乘頓悟法門’이다. 이 중에서 ‘사자혈맥전’은 법맥의 정통성을 드러내기 위한 부분이고, ‘정시비최사현정파괴일체심전’과 ‘최상승돈오법문’은 돈오사상을 드러내기 위한 부분이다. 특히 ‘최상승돈오법문’이라고 하는 부제는 역대법보기?의 사상적 지향점이 돈오사상에 있음을 분명하게 표명하고 있다.

 

두번째 근거는 무상이 항상 설했다고 하는 三句를 들 수 있다. 삼구는 無憶․無念․莫忘으로서, 그 의미는 이렇다. ‘무억’은 일체 지나간 일을 생각지 말라는 것이요, ‘무념’은 현재의 일체분별과 잡념을 하지 말라는 것이요, ‘막망’은 미래에 대한 망상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다. 삼구에 대한 해석이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柳田聖山은 “기억을 없애고, 상념을 없애고, 그리고 잊어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해석한다(初期の禪史 Ⅱ, p. 148). 關口眞大는 “무억이란 과거를 추억하는 일이 없고, 무념이란 미래의 영고를 염려하는 일이 없으며, 항상 이러한 지혜와 상응해서 혼미하지 않고 착각하지 않음을 막망이라 하는 것이다”고 해석한다. 필자가 택한 해석은 故 이종익 선생의 해석이다(정중무상선사, p. 381).
 

무상에 의하면 이 삼구가 바로 계․정․혜에 해당된다고 한다. 무상이 삼구를 설하는 과정에서 전후의 맥락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무상이 과연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삼구를 사용하였는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현재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불교의 전체 수행과정인 계․정․혜를 갖다가 무상은 이를 다시 삼구라는 표현으로 압축시켜 버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뿐이다. 바꾸어 말하면 수십 가지 계율을 지키고, 여러 가지 관법을 동원하여 선정을 닦고, 지혜를 연마하는 복잡하고 오랜 과정을 무억․무념․막망이라는 간단한 세 마디로 대치시켜 버린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무억․무념․막망의 상태만 된다면 계․정․혜 전체가 완성됐다고 보는 셈이다.

 

역대법보기 무상조 끝부분에 보면 삼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상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계율문이요, 상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선정문이며, 상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지혜문이다(念不起是戒門 念不起是定門 念不起是惠門)’라 하여 상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念不起)은 계․정․혜를 관통하는 핵심으로 설해지고 있다. 결국 ‘念不起’는 三學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삼학을 ‘念不起’라는 한마디로 압축시켰다는 측면에서 무상의 선사상은 돈오법으로 인식된다.

 

필자가 삼구를 돈오사상으로 보는 또 다른 이유는 삼구의 의미가 금강경의 핵심사상인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는 대목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금강경의 메시지는 과거․현재․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분별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말인데, 분별과 집착을 벗어난 상태는 바로 무억․무념․막망의 상태와 상통한다. 따라서 삼구와 금강경의 메시지는 동일한 차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금강경이 神會가 주장한 돈오사상의 소의경전임을 상기할 때, 금강경과 동일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무상의 삼구를 돈오사상으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세번째 근거는 無住의 선사상이다. 무상의 사상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무주는 삼구를 ‘無念’이라는 한마디로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였다. 무주에 의하면 ‘무념이면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 무념이면 장애도 없고 훼방도 없다. 무념이면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 진정으로 무념이면 무념이라는 것마저도 없다’고 한다. 앞의 책, 초기선종사 Ⅱ, pp. 137~138.

 

 무주는 도를 깨달은 최종 경지를 무념으로 규정한 것이다. 무념의 상태에 도달하면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역대법보기의 돈오사상은 무상의 무억․무념․막망, 그리고 이를 다시 압축한 무주의 무념과 같이 ‘분별이 없는 인식상태’를 도의 궁극적 경지에 도달한 상태로 설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분별이 없는 인식상태’에 도달하면 이는 도통한 것이다. 그런데 ‘분별이 없는 인식상태’란 계․정․혜 삼학의 틀에서 놓고 볼 때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 것인가? 계․정․혜의 삼학의 틀에서 놓고 생각해 보면 혜 쪽에다 비중을 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분별이 없는 인식상태’란 결국 인식의 문제이고 한 생각의 문제인데, 이는 분명 계율이나 선정보다는 지혜의 부분과 보다 관련이 깊다. 즉 역대법보기는 중국불교사상사에서 계와 정이 점차 비중을 잃어 가면서 상대적으로 혜에 비중을 두기 시작하는 조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을 좀 설명해 본다면 계율은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그 절대적 의미를 상실하였다. 인도에서 중국이라는 문화와 환경이 바뀌면서 계율은 변화할 수밖에 없었고, 변화한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 생략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주기 마련이다. 여지가 생긴다는 것은 절대적인 구속력이 퇴색함을 의미하고 비중이 축소되어 감을 의미한다. 선정은 어떠한가. 중국불교의 전개과정에서 계율에 대한 비중이 사라지면서부터는 삼학 중에서 정과 혜 둘만이 문제가 되었다. 천태종에서 강조하는 止觀이 이를 말한다. 정은 지이고 혜는 관이다.

 

그러다가 역대법보기의 무주와, 금강경의 하택신회 시대에 이르러서는 止觀이라는 기존의 노선에서 탈피하기 시작한다. 정의 비중이 점차 축소되고 혜의 비중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혜의 비중이 증가한다는 것은 돈오사상의 등장을 의미한다. 그리고 돈오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돈․점 논쟁이 발생하게 된다. 돈․점 논쟁이 미시적으로는 선종내의 남종과 북종간의 논쟁이었지만, 거시적으로는 정과 혜의 논쟁이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이해이다. 점파는 상대적으로 정 쪽을 강조하고 돈파는 혜 쪽에 비중을 두었다. 돈파는 기존의 선법에 해당하는 천태 지관이 정에 치중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역대법보기에서 무주는 大佛頂經을 인용하여 삼매와 지관의 폐해를 지적한다.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나도 이미 진실한 수행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대들은 아직 알아차리지 못하고 止觀의 수행법을 행하고 있다. 그대들은 그 정체를 모른다. 똑바로 마음을 청정하게 하지 않고, 사견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그대들 자신의 5온의 마귀가 달라붙고, 어떤 때는 천상의 마귀에게 이끌리고, 어떤 때는 죽은 자의 영혼이 달라붙고, 어떤 때는 초목의 영기에 몰려서, 마음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도둑놈을 내 자식으로 잘못 알아보게 된다. 더구나 잘못된 것은 거기에 만족하여 제4禪 단계에 있는 無聞比丘(지혜가 모자라는 비구)와도 같이 제딴에는 불과를 얻었다고 망언하지마는, 천상의 과보가 다하면 어느 사이에 쇠약한 모습이 나타나서 …… 아비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앞의 책, 초기선종사? Ⅱ, p. 84.

 

당시 무주가 보기에 천태의 지관은 상대적으로 선정에 치우친 형태의 수행법으로 비쳐졌고, 선정에 치우치다 보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발생한다고 본 것 같다. 5온의 마귀나 천상의 마귀에 붙들려서 도둑을 자식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삼매에 대한 부작용은 역대법보기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갖가지 소승의 禪法과 갖가지 삼매의 교리는 그 모두가 달마조사의 입장이 아니다. 白骨觀, 數息觀, 九想觀, 五停觀, 日觀, 月觀, 樓臺觀, 池觀, 佛觀이 그것이다.……좌선하면 공중을 볼 뿐 아무것도 없다. 만약 부처님의 32종 특징이나 갖가지 광명이 허공에 뒤섞여 날고, 마음대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 하는 것이 보인다면 그것은 모두 자기 마음이 흔들려서 악마의 그물에 걸려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허공이라는 적멸한 곳에 그런 것이 보인다는 것은 허망에 지나지 않는다.……여러 가지 삼매를 배우는 사람은 모두 망동일 뿐 좌선이라 할 수가 없다. 마음을 대상에 따라 변동하는 것, 어찌 그것을 좌선이라 하겠는가?……나는 삼매에 들지 않으며, 좌선도 하지 않는다. 생겨나는 일도 수행하는 일도 없이 본디가 부동이므로 새삼 선정에 들지 않는다.” 앞의 책, 초기선종사, p. 82.
 

이는 수행자가 삼매를 닦다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천상의 고급영에 사로잡힐 수 있는〔入魔〕위험을 지적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여러 가지 신통이 나오기 때문에 본인은 도를 통한 것으로 착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신통도 사라지고 결국에는 아비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지혜가 부족하면 결코 이 함정에서 나오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胡適은 지혜를 면도칼에 비유하였는데, “이 면도칼은 중세의 망령과 신, 보살과 부처, 4선정, 삼매, 여섯 개의 신성한 힘을 잘라내고 파괴하는 칼”이라고 설명한다. 胡適, 신규탁 역, 「中國禪佛敎-그 역사와 방법」(계간 多寶 17호, 대한불교진흥원, p. 19).

 

 그렇다면 지혜가 무엇이냐고 할 때 무상은 무억․무념․막망이라고 표현하였고, 무주는 이를 다시 무념이라고 하였다. 아무리 신통이 대단하더라도 무념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무상의 삼구와 무주의 무념이 강조되게 된 배경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무념을 강조한 까닭은 당시 잘못된 선정으로 인해 상당한 부작용들이 발생하였고, 이러한 부작용들을 바로잡는 처방으로 등장한 장치이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선정보다는 지혜 중심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으며, 역대법보기?에 보면 雄俊법사라는 사람이 무주에게 삼매(定)에 드십니까? 하고 질문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에 대해 무주는 삼매에 드는 일도 없고, 좌선에 머무르는 일도 없고, 마음을 얻거나 잃거나 하는 일도 없다고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서, 무주가 삼매에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柳田聖山, 초기선종사 Ⅱ, p. 158). 이와 비슷한 대목이 남악회양과 마조 사이에 주고받았다고 하는 ‘기왓장을 숫돌에 간다고 거울이 되느냐?’는 대화이다. 양쪽 다 공통적으로 정(삼매)을 그렇게 중시하지 않는 점이 흥미롭다.
 

선정이 곧 지혜(반야)라고까지 생각하였다. 鈴木大拙, 계간 多寶 17호, p. 29.
 이것은 중국불교 사상사에 있어 실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때 지혜는 무념 또는 ‘분별이 없는 인식상태’라고 규정하였던 것 같고, 무념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상태를 규정한 것이다. 따라서 무상이 주장한 무억․무념․막망 또는 무념의 상태에서 벗어난 깨달음은 그 신통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결함이 있다고 진단한 것이다. 깨달음의 경지는 무념이라는 잣대에서 벗어나면 안된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역대법보기?에서 제시한 무상의 삼구는 悟란 무엇인가를 규정한 것이고, 이를 통해 선정의 폐해를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悟는 단박에 도달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頓悟사상이 태동된 배경은 이렇게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2) 頓悟의 原理와 楞嚴經
역대법보기에서 무상과 무주가 悟의 경지를 삼구 또는 무념으로 규정하였다면 한 가지 궁금한 사항이 남는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 頓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단박에 깨칠 수 있는 원리적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즉 돈오를 뒷받침하는 원리는 무엇인가? 무상은 대불정경"?에서 그 원리적 근거를 발견하였다.

역대법보기 안에는 다양한 경전들이 풍부하게 인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대불정경, 선문경, 능가경, 대지도론, 금강경, 정법념경, 대반열반경, 인왕경, 유마경, 금강삼매경, 약사경, 법화경 등등 수십 가지이다. 이 가운데서 돈오의 원리적 근거를 밝히는 데 사용된 경전은 오직 대불정경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역대법보기가 지닌 사상적 특징 중의 하나가 돈오의 원리를 제시했다는 점에 있다면, 대불정경은 바로 이 핵심이 되는 돈오의 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대법보기?에서 대불정경은 다른 어느 경전보다도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측면에서 대불정경은 무상과 무주 일파의 소의경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대불정경은 역대법보기?에 인용된 이래 선종에 큰 영향을 미쳤다.

大佛頂經은 어떤 경전인가. 대불정경의 온전한 명칭은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인데 이를 줄여서 대불정경?이라 부른 것이다. 오늘날은 끝부분만을 따서 능엄경?으로 불린다. 능엄경은 701년 중국에 들어와 번역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로 僞經 여부가 논란이 되었지만, 경의 내용이 워낙 탁월하기 때문에 일본을 제외한 중국과 한국에서는 크게 유행하였다. 중국의 宋明代나 荒木見悟, 「明代における楞嚴經の流行」, 陽明學の展開と佛敎, 硏交出版, 1984, pp. 245~272.
 高麗後期에 趙明濟, 「高麗後期 戒環解 楞嚴經의 盛行과 思想史的 意義」, 釜大史學 12집, , 釜山大, 1988, p. 138.
 

들어와서는 불교계는 물론 신유학자들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는 경전이 되었다. 능엄경?은 팔만대장경의 축소판이라 할 만큼 내용이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중관․유식․여래장․화엄․천태․선․밀교 사상과 같은 대승불교 전체의 핵심사상이 일관된 원리에 의하여 조직되어 있는 점이 돋보이는 경전이다.

능엄경이 역대법보기에서 돈오의 원리적 근거로 인용된 첫번째 부분은 다음과 같다.
화상은 불정경을 인용하여 말했다. ‘광심이 그치지 않기 때문이니, 그치면 그대로가 보리의 길이다.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 본디부터 법계에 충만해 있다. 무념이면 이미 부처님을 보는 것이요, 유념이면 곧 생사에 지나지 않는다.’(和尙佛頂經云 ‘狂心自歇 歇卽菩提 勝淨明心 本周法界 無念卽是見佛 有念卽是生死’) 앞의 책, 초기선종사 Ⅱ, p. 105.

 

이 대목은 무주가 예배 염불을 착실하게 이행하는 道逸이라는 승려에게 대답한 부분이다. 예불 시간이 되어 道逸이 무주에게 같이 예불에 참석하자고 권유하자 무주가 그럴 필요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즉 광기가 그치면 이 상태가 바로 보리의 상태〔歇卽菩提〕란 것이다. 보리의 상태인데 구태여 법당에까지 가서 예불할 필요가 뭐 있냐는 반문이다. 무주는 도일에게 돈오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능엄경? 권4에 명확하게 나온다.

 

세 가지 원인이 생기지 아니하면 곧 너의 마음속에 연야달다의 미친 마음은 자연 사라질 것이다. 미친 마음이 없어지면 곧 보리의 뛰어나게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 본래 우주에 두루 퍼져서 다른 사람에게서 얻어진 것이 아니니 어찌하여 애써 수고롭게 닦아서 증득하겠느냐?(三因不生 則汝心中演若達多 狂心自歇 歇卽菩提 勝淨明心 本周法界 不從人得 何籍劬勞 肯綮修證) 尹暘星 編, 金斗再 譯, 瑜伽心印正本首楞嚴經?, 대영문화사, 1993, p. 565.
 
능엄경 권4의 주장은 불성이 너 안에 이미 갖춰져 있는데 애써서 닦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불성이 이미 있다는 것을 인식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무주가 예불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경전적 근거는 능엄경에 내포되어 있는 ‘자연주의’ 道家의 自然에서 온 말이다. ‘원래부터 그러하다’는 뜻으로 이해되었고, 이것이 중국 남종선의 돈오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돈오사상의 근저에는 여래장사상이 깔려 있고, 능엄경에도 여래장사상이 주요한 사상적 기반으로 자리잡고 있다.
 철학에서 도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돈오의 원리적 근거로 인용된 두번째 부분은 무엇인가. 무주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하나를 단순히 하나로 보아서는 안된다. 하나는 제교를 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1근이 본원으로 돌아가면 6근이 해탈을 이루게 된다. 마음을 한군데에 모아 억제한다면 무슨 일이라도 안되는 것이 없다.(一亦不爲一 爲一破諸敎 一根旣返源 六根成解脫 制之一處 無事不辨) 柳田聖山, 초기선종사 Ⅱ, p. 143.


‘하나의 근이 본원으로 되돌아가면 6근이 모두 해방된다’는 대목은 당시 전형적인 돈오의 논리를 뒷받침하던 표현이다. 무주는 여기에서 하나라는 것이 알고 보면 여럿이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1=6이라는 의미인데 이를 뒤집어 보면 6단계를 거치는 대신에 1단계만 거치면 된다. 6을 1로 축소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에서 頓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말이다. 1근을 닦으면 6근이 동시에 닦인다는 논리는 능엄경? 권6에 등장한다.
들음을 돌려 소리에서 해탈한다면 능탈을 무엇이라 이름하리오. 1根이 본원으로 돌아간다면 6근이 해탈을 이루게 된다.(旋聞與聲脫 能脫欲誰名 一根旣返源 六根成解脫)
眼․耳․鼻․舌․身․意라고 하는 6근 가운데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耳根을 집중적으로 개발하면 나머지 5근도 동시에 개발된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6근을 모두 다 닦을 것 없이 이근 하나에만 집중하면 된다.

 

3) 티벳의 頓․漸 논쟁과 능엄경
돈오사상과 능엄경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자료로서, 8세기말 티벳에서 벌어졌던 돈․점 논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도불교를 대표하는 蓮華戒(Kamalasila)와 중국의 선불교를 대표하던 摩訶衍 사이에 전개되었던 논쟁에서 마하연측이 주장하던 법은 역대법보기와 같은 돈오사상이다. 일반적으로 역대법보기의 선사상과 마하연의 선사상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비록 마하연의 선맥이 직접적으로 무상에 연원하고 있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사상적으로는 같은 노선을 택하고 있었다는 점이 이 분야 연구자들에 의하여 지적되고 있다. 즉 티벳 돈문파의 흐름으로서는 金和尙(무상)과의 만남-역대법보기의 돈오사상-마하연 선사에 의한 돈문파의 형성이라는 전개과정을 밟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小畠宏允, 「역대법보기와 고대의 티벳불교」, 淨衆無相禪師, p. 276.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마하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경전적 근거로 능엄경?이 인용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인용된 부분이  역대법보기에서 사용한 돈오의 논리와 동일하다는 점이다. 역대법보기?와 마하연 사이의 공통분모라 할 수 있는 돈오의 논리는 어떤 모습인가를 살펴보자.

 

頓悟大乘正理決에 등장하는 마하연 돈오사상의 경전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질문: 마음을 관찰하여 습기를 없앤다는 말은 어느 경전에 그 증거가 있는가?
대답: 대불정경에 이런 말이 있다. ‘1근이 이미 근원으로 돌아간다면, 6근 일체가 해탈을 완성한다.’ 小畠宏允, p. 273에서 재인용.

 

마하연은 諸經要抄?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이 대승 돈교의 법문에서는 일체 중생이 모두 본래부터 스스로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천만 가지 경론 또는 대․소승교의 문자나 말도 오직 중생의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을 바로 관찰함으로써 불도를 성취할 따름이다. 이 법은 또한 返源이라 하고, 返照라고도 하고, 또는 反流․회향․무생 ……이라고도 일컫는다. 또한 법은 견문각지를 벗어난다고 일컫는다.……대불정경에 이런 말이 있다. ‘본래 1精明이란 것이 나누어져서 6화합체가 된다. 1개소 활동을 멈추면 6용은 모두 행해지지 못한다. 1근이라도 返源한다면 6근도 모두 해탈한다. 聞을 반원하면 자성을 들음〔聞〕으로써 그 자성이 무상도를 성취하고, 봄〔見  〕을 반원하면 마음을 봄〔見〕으로써 견성하여 불도를 성취한다.…… 小畠宏允, p. 274에서 재인용.

 

마하연이 돈오의 근거로 제시한 ‘1개소 활동을 멈추면 6용은 모두 행해지지 못한다’라든가, ‘1근이라도 반원한다면 6근도 모두 해탈한다’는 표현들은 모두 능엄경의 내용들이다. 이 부분은 앞에서 언급한 역대법보기의 돈오사상과 동일한 논법에 해당된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역대법보기와 티벳 돈문파를 대표하는 마하연이 자파 주장의 이론적 근거를 공통적으로 능엄경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사천지방과 티벳의 선불교가 頓悟와 능엄경?이라는 2가지 요소를 공통분모로 하여 서로 연결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라 아니할 수 없다.

 

티벳의 라사에서 벌어진 돈․점 논쟁 가운데서 마하연이 주장했다고 하는 6바라밀에 대한 견해도 ‘一根旣返源 六根成解脫’과 같은 맥락이란 점이 발견된다. 마하연과 연화계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핵심은 6바라밀에 대한 견해차이였다고 한다. 연화계의 주장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을 차곡차곡 거쳐야만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는 漸의 입장이었고, 반면에 마하연은 방편에 해당되는 보시나 지계를 거치지 않더라도 곧바로 6바라밀의 마지막 단계인 지혜(반야)에 이를 수 있다는 頓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山瑞鳳, 「古代 티벳에서의 頓悟․漸悟의 논쟁」, 普照思想 제4집, 1990, pp. 85~87.
 

이 입장은 지혜에 도달하기만 하면 역으로 6바라밀 전체가 완성된다고 하는 의미를 깔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마하연의 주장은 1근이 근원으로 돌아가면 6근이 모두 해탈한다는 능엄경?의 주장과 맥락이 같다. 6근은 6바라밀에 1근은 혜(반야)에 배대시킬 수 있다. 동일한 문법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하연이 6바라밀에 대해서 이처럼 과감한 해석을 가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경전적 근거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즉 능엄경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우리는 마하연이 사용했던 방식이, 계․정․혜를 3구로 환치시킨 다음 삼구를 다시 念不起(무념․반야) 하나로 압축했던 무상, 무주의 방식과 같은 노선임을 발견할 수 있다. 무상과 무주의 입장도 계․정․혜라고 하는 삼학을 무념 하나로 압축한 것이니 말이다.


3. 引聲念佛과 耳根圓通의 관계
무상에 대해서 이제까지 알려진 것은 삼구가 무억․무념․막망이라는 것과 인성염불이라고 하는 독특한 염불법으로 수행했다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삼구가 사상이라면 引聲念佛은 수행법이다. 인성염불이라는 수행방법을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경지가 삼구라는 측면에서 양자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성염불은 방법이고 삼구는 목표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양자의 관계는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어떤 상관관계에 놓여 있는 셈이다.

 

본 논문에서 일차적으로 돈오사상을 다루고 이차적으로는 돈오의 원리적 근거와 능엄경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았던 것은 이러한 상관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래서 본 장에서는 능엄경을 연결고리로 하여 인성염불에 대해서 접근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수순을 설정하는 까닭은 ‘돈오’-‘능엄경’-‘인성염불’이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돈오라는 목표와 인성염불이라는 방법이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다면

당연히 그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능엄경은 인성염불과도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밀접한 관계란 결국 능엄경?이 인성염불을 해명할 수 있는 열쇠에 해당함을 의미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능엄경?의 주된 수행법인 ‘이근원통’이 ‘인성염불’에 해당된다고 여겨진다. 이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역대법보기부터 조사해 보자.

김화상은 매년 12월과 정월에 사부대중 백천만 인을 위하여 수계하였다. 엄숙하게 도량을 시설하여 스스로 단상에 올라가서 설법하며, 먼저 引聲念佛을 하며 一聲의 숨을 다 내뱉게 하고, 염불 소리가 없어졌을 때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억․무념․막망하라. 무억은 계요, 무념은 정이며, 막망은 혜이니라.’ 이러한 삼구는 바로 총지문이다. 柳田聖山, 초기선종사 Ⅱ, pp. 93~94.

 

인성염불이란 것이 과연 어떤 염불법인가를 살펴볼 수 있는 단서는 ‘一聲의 숨을 다 내뱉게 하고, 염불 소리가 없어졌을 때’라는 대목이다. 먼저 인성염불은 오늘날 우리가 하는 것처럼 ‘나무아미타불’을 소리내어 외우는 염불법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一聲’이란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여러 글자가 아닌 어느 한 글자에 집중하는 염불법으로 보여진다. 그 한 글자는 ‘나’가 될 수도 있고, ‘옴’이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一聲의 숨을 다 내뱉게 한다’는 것은 ‘나…’ 하고 소리를 내든지, 또는 ‘오…ㅁ’ 하고 소리를 내면서 몇 분이 됐든지 간에 계속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 같다. 계속해서 소리를 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숨이 다 내뱉어지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부처님을 염한다거나 아니면 그 글자가 지니는 뜻에 집중하는 염불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방정토를 염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인성염불이 목표로 하는 최종 도달처가 무념이라는 점에서 인성염불은 稱名念佛이나 觀念念佛, 觀想念佛 또는 기타 다른 염불의 형태하고도 다르다. 韓普光은 관념염불이나 관상염불과는 다른 형태의 염불로 보았다. 「念佛禪이란 무엇인가?」, 佛敎硏究? 10호, 1993,  p. 155. 鄭性本도 淨土에서 행하는 관념염불이나 구칭염불이 아닌 독자적인 수행법이라는 견해이다. 新羅禪宗의 硏究, 민족사, 1995, p. 112.
 

무념이란 한 생각 일으키는 것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인데, 어떻게 부처님을 생각한다거나 또는 염을 관한다거나 상을 관할 수 있겠는가. 논리적으로 볼 때 무념과 염불은 양립하기가 어렵다. 인성염불은 그 표현에 있어서 인성 다음에 염불字가 붙어 있어서 일단 염불의 범주에 넣고 생각하기 쉽다. 이 때문에 인성염불 하면 관습적으로 염불선의 범주에서 파악하려고 했던 것 같다. 念佛禪의 형태는 3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念佛이 主가 되고 禪이 從이 되는 경우이다. 이때는 서방정토로의 왕생이 목표가 된다. 둘째는 선이 주가 되고 염불이 종이 되는 경우이다. 이때는 유심정토가 된다. 내 마음속에 정토가 있다는 관점이다. 셋째는 자타력을 겸수한다는 의미에서 염불과 선을 똑같이 반반으로 병립시키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關口眞大가 禪宗思想史에서 말하는 염불선의 의미는 셋째의 개념에 해당하는 것 같다. 하지만 念不起(無念)를 목표로 하는 인성염불은 이 3가지 형태 중에서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인성염불은 기존의 어떤 염불(선)과도 다른 형태로 보아야 맞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인성염불은 염불(선)이 아닐 수도 있다. 염불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는 인성염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염불에 중점을 두어 왔다. 즉 염불은 염불이되 인성하는 염불이라는 해석이 그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해하는 방식은 引聲이라는 글자에 보다 주목하는 것이다. 염불은 별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引聲이란 글자 그대로 소리를 끌어당김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아…’나 ‘미…’ 또는 ‘오…ㅁ’이 됐든지 간에 하나의 소리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문맥상으로 볼 때 끌어당긴다는 것은 자기가 입으로 소리를 내는 것으로 파악된다. 숨을 다 내뱉게 할 때까지 한다는 표현으로 보아서 한참 동안 발성했던 것 같다. 숨을 내뱉게 하기 위한 발성에 집중할 뿐, 소리가 지닌 의미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인성염불은 오직 소리에 집중(관)하는 수행법으로 결론내릴 수 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인성염불의 정확한 이름을 붙인다면 ‘引聲修行法’이라고 해야 맞다.

인성염불이 소리에 집중하는 인성수행법이라고 할 때, 이 수행의 방식은 능엄경에 나오는 耳根圓通과 일치한다. 인성염불을 이근원통으로 판단하는 첫번째 근거는 소리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성염불이라는 것이 소리에 집중하는 수행법이라는 이유이다. 인성염불에는 결코 염불적인 의미나 방법이 들어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수식관을 하거나 화두를 잡는 선법도 아니다. 耳根을 통하여 소리에 대한 집중을 중시하는 특이한 수행법이다. 따라서 인성염불과 이근원통은 양쪽 모두 引聲을 통한 수행법이라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두번째 근거는 역대법보기?나 티벳의 마하연측에서 돈오를 주장할 때마다 등장했던 ‘一根旣返源 六根成解脫’이 이근원통章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능엄경 권6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듣는 놈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소리로 인하여 그 이름이 있게 되었네. 듣는 놈을 돌이켜 소리에서 벗어나면 해탈한 놈을 무엇이라 이름하랴! 하나의 근이 본원으로 돌아가면 여섯 개의 근이 해탈을 이루게 되리라.……여섯 개의 근도 이와 같아서 원래는 하나의 정밀하고 밝음에 의지하여 이것이 나뉘어 여섯 개와 화합하나니 한 곳이 회복함을 이루면 여섯 작용이 다 이루어질 수 없어서 티끌과 때가 생각을 따라 없어져서 원만하게 밝고 청정하고 오묘하게 되리라. 남은 티끌은 아직도 배워야 하지만 밝음이 지극하면 곧 여래이니라.(聞非自然生 因聲有名字 旋聞與聲脫 能脫欲誰名 一根旣返源 六根成解脫……六根亦如是 元依一精明 分成六和合 一處成休復 六用皆不成 塵垢應念消 成圓明淨妙 餘塵尙諸學 明極卽如來) 尹暘星 編, 金斗再 譯, 瑜伽心印正本首楞嚴經, 대영문화사, 1993, pp. 859~863.

 

능엄경의 卷數를 나누면 전체가 10卷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에서 6단락 즉 卷6은 ‘이근원통’장이다. 耳根의 작용과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할당된 파트가 바로 권6의 ‘이근원통’장인 것이다. 이 장에서 ‘一根旣返源 六根成解脫’은 이근의 圓通함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원통이란 표현은 ‘부분이 아닌 전체’ 즉 ‘편벽되지 않고 두루 통한다’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능엄경 권6의 주장은 耳根을 닦아야만이 두루 통하게(원통) 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一根旣返源의 一根이란 耳根을 지칭하는 것이다. 耳根을 통하면 나머지 根도 다 통하게 된다고 하겠다.

 

이상을 종합하면 ‘인성염불이 이근원통이다’라는 근거는 첫째, 양쪽 모두 소리〔聲〕에 집중하는 수행법이라는 점, 둘째, ‘一根旣返源’의 돈오 논리가 이근원통을 설명하는 논리라는 점이다. 즉 능엄경이 근원통의 탁월성을 설명하는 논리가 ‘一根旣返源’인 것이다. ‘一根旣返源’의 원래 의도는 돈오의 홍보가 아니라 이근원통의 홍보용이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다가 頓․漸 논쟁이 발생하자 漸派를 공격하는 頓派의 핵심무기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근원통도 자연스럽게 돈오를 성취할 수 있는 수행법으로 채택되었을 것이다. ‘一根旣返源’과 이근원통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이근원통의 사상적인 측면이 돈오이고, 수행적인 측면이 이근원통이고 인성염불이었다. 바늘 가는 곳에 실 가듯이 ‘一根旣返源’이 가는 곳에 ‘이근원통’도 같이 갔다고 보아야 한다.

 

4. 耳根圓通이란 무엇인가
耳根圓通은 능엄경에서 열거하는 25가지 수행법 중의 하나이다. 25가지 수행법 중에서 관음보살이 사용한 이근수행법을 가리킨다. 이근수행법이 기타 수행법에 비해서 가장 圓通한 방법이라고 되어 있다. 圓通이란 말은 가장 빠르고, 전체적이고, 쉽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근원통이란 어떤 수행법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음 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趙龍憲, 「李資玄의 楞嚴禪 硏究」, 종교연구 12집, 한국종교학회, 1996년 4월.
 

현재 이 수행법은 북방불교권에서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수행법이다. 필자가 그 동안 인편으로 수집한 정보를 종합하여 추측해 보면, 이 법은 김화상의 사후에는 티벳으로 흘러들어가서 밀교의 전통적 수행법 중의 하나로 정착된 것 같다. 반면에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秘傳으로 전승되어 왔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 일부가 염불선이라는 형태로 변용되어 내려왔다. 그러므로 현재의 염불선에는 부분적으로 이근원통의 원리가 스며들어 있긴 하지만 원래의 오리지날한 방법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근원통의 본래 모습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현대의 인물은 대만의 南懷瑾 현재 대만에 90이 넘는 고령의 나이로 생존해 있다고 들었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중국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법을 고스란히 전수받았으며, 학문적인 성취에 있어서도 그야말로 대가의 경지에 도달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강점은 학문적 깊이와 실제 수행체험을 겸비하였다는 데에 있다. 현대 불교학의 추세가 실제 수행상에서 발생하는 문제와는 동떨어진 시시콜콜한 고증학에 몰두하는 경향임에 반해 그는 수행상의 문제와 학문의 세계를 모범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특히 요가․密敎․禪․仙道․周易이 지닌 수행상의 비밀을 회통하는 데 있어서 독보적인 식견을 소유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30여 권이 넘는 저서들이 한결같이 높은 質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대표적으로 89년에 출판된 如何修證佛法(臺北, 老古文化事業公司)은 그가 지닌 학문세계의 호한함과 수행체험의 깊이를 여실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2천 년 중국불교의 수행전통이 密密相傳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名著라고 생각된다.

 

남회근은 이근원통을 觀音法門이라 표현한다. 南懷瑾, 觀音菩薩與觀音法門, 臺北, 老古文化事業公司, 1985, pp. 35~37.
 觀音이라 한 까닭은 관세음보살이 행한 수행법이라는 뜻과, 소리를 관한다는 뜻의 2가지의 이유 때문이다.

이근원통 수행은 처음에는 소리에 집중(觀)하는 단계이고, 다음에는 ‘듣는 놈을 돌리는(反聞聞性)’ 단계로 접어든다. 처음 과정이 끝나야만 반문문성의 과정으로 진입함은 물론이다.

먼저 소리에 집중하는 법을 알아보자. 소리를 집중하는 데 있어서도 다시 2가지 단계로 나뉜다. 내면의 소리(內耳聲)와 바깥의 소리(外耳聲)가 그것이다. 남회근 저, 최일범 역, 정좌수행의 이론과 실제, 논장출판사, 1988, pp. 227~228.

 

내면의 소리 : 이는 자기의 체내에서 내는 소리 즉 念佛․念呪․讀經소리 등을 듣는 것이다. 念의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큰 소리로 염하는 것, 작은 소리로 염하는 것(金剛念), 마음의 소리로 염하는 것(瑜伽念)이 있다. 염할 때에는 귀로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처음에는 염불 혹은 염주하는 소리에 마음이 집중되었다가 안되는 경우가 많지만 점차 一念, 一聲에 마음이 집중되어 마음이 고요해진다. 여기에서도 보면 3단계를 설정한다. 일단 큰 소리로 염불이나 염주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高聲念佛이 그것이다. 그 다음 단계로 작은 소리로 염한다는 것은 입 속에서 웅얼웅얼하는 것이다. 이 상태를 계속해서 지속하다 보면 굳이 입으로 웅얼웅얼하지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마음속으로 염하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염불이나 주력 혹은 독경을 오랫동안 지속함으로써 수행의 힘을 얻는 경우는 이러한 경우이다.

 

요가에서는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는 방법이 계발되어 있다. 秘音觀想法이 그것이다. 손가락으로 두 귀를 막고, 눈은 감고서 내부의 소리를 듣는 방법이다. 여기서 내부의 소리라는 것은 심장에서 나는 秘音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명상법은 어리석은 사람들도 할 수 있다고 한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두 귀를 막고 네번째 챠크라인 아나하타 챠크라에서 나는 비음 나다(nada)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 소리에 의식을 집중함에 따라서 내부의 소리가 외부의 소리를 압도한다. 보름 정도를 하면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李泰寧, 요가의 이론과 실제, 민족사, 1991, p. 102.

 

이 외에도 쿤달리니(Kundalini)라고 부르는 원초적 에너지가 폭발할 때도 내면에서 소리가 들린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인체의 각 챠크라를 통과할 때 소리가 난다. 북소리, 종소리, 파도소리, 플룻소리 등이 그것이다. 이는 수행자 본인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임은 물론이다. 무케르지(Mookerjee)는 그 소리를 4가지 형태로 구분하기도 한다. 거대한 것으로부터 가장 미세한 것의 순서로 바이카리(형식으로 실현된 음), 마드야마(미세한 형식의 음), 파시얀티(미분화 된 형식으로 우주에 대한 상이 내재해 있는 음), 파라(들을 수 없는 음) 등이 있다. 바이카리는 청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음의 단계로 양 표면이 서로 부딪칠 때나 또는 현을 뜯을 때 생성된다. 마드야마는 들리는 음과 내부 진동과의 과도기적 단계를 이른다. 파시얀티 단계에 이르러서는 음은 오직 영혼이 깨어 있는 수행자에게만 들릴 뿐이며, 파라 단계에 이르게 되면 음은 청각적인 성질을 훨씬 넘어서는 그 무엇을 의미하게 된다. Ajit Mookerjee, Kundalini, 1982, p. 30.
 

능엄경 권6에는 妙音․觀音․梵音․海潮音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러한 표현도 쿤달리니가 통과할 때 들리는 소리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趙龍憲, 앞의 논문 참조.

 

바깥의 소리 : 어떤 소리든지 물체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물이 흐르는 소리나 폭포소리 또는 바람이 불어서 풍경이 울리는 소리나 범패소리를 듣는 것이다. 처음으로 마음이 소리에 완전히 집중되었을 때 능히 졸지 않고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않으면 자연히 이런 경지를 계속 지켜나갈 수 있다. 바깥의 소리에 집중한다고 할 때 가장 보편적인 소리는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이다. 우리 나라에서 절터를 잡을 때 양쪽에서 흘러오는 물이 合水치는 곳을 선호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이와 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는 가장 쉽게 定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선사들 가운데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돈오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百丈禪師 문하에서 어떤 승려가 종소리를 듣고 깨우쳤는데, 백장은 “뛰어나도다. 이것은 관세음보살의 입도하는 방법이다(俊哉, 此乃觀音入道之門也)”라고 말하였다. 이 외에 香嚴은 대나무가 부딪히는 소리에 견성했고, 圓悟는 닭이 날개치는 소리를 듣고 오도하였다. 南懷瑾, 정좌수행의 이론과 실제, p. 229.

 조선조의 西山休靜이 대낮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오도했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 속한다.
이근원통의 마지막 단계는 反聞聞性이다. 듣는 성품 자체를 다시 반문한다는 의미이다.
그 들음을 버리고 듣는 놈을 돌리게 된 다음이라야 지극히 요긴함이 된다. 무릇 들음을 버리고 듣는 놈을 돌리게 되면 부처님의 광명과 보리수와 無說示와 衆香處에 다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期於遺聞反聞然後爲至要 夫至於遺聞返聞則佛光明 菩提樹無說示衆香處皆可入矣) 瑜伽心印正本首楞嚴經, p. 850.

 

듣는 것, 즉 소리에 대한 집중도 놓아버리고 無說示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반문문성이다. 無說示란 아무것도 설하는 것이 없는 경지로서, 무상이 인성염불이 다한 뒤에 제시한 삼구와 상통하는 의미라고 판단된다. 즉 무설시는 무억․무념․막망의 경지인 것이다. 반문문성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방법이 후대로 내려오면서는 ‘듣는 놈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公案으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이다. 소위 念佛公案法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雲棲祩宏(1535~1615)이 禪關策進에서 주장한 ‘염불하는 자 이것이 누구인가?’라는 공안은 雲棲祩宏, 「智徹禪師淨土玄門」, 禪關策進, 大正藏 48, p. 1102 b.

 

 이근원통 중에서 마지막 단계인 반문문성의 원리를 응용한 것으로 보인다. ‘듣는 놈 이것이 무엇인고?’ 또는 ‘염불하는 자 이것이 누구인가?’를 돌파할 때 소리를 넘어선 무설시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며, 이것이 무상이 말한 삼구이고 무주가 말한 무념의 경지라고 여겨진다.
이근원통의 방법을 다시 정리하면 일단 바깥의 소리 또는 내면의 소리에 집중한다. 소리의 종류는 바람소리나 물소리도 가능하고, 염불․주문․독경소리도 가능하다. 이때 염불이나 주문, 독경이 지니는 문자적 의미는 문제가 안되고 오직 소리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좀더 나아가면 인체내의 챠크라가 돌아갈 때 발생하는 북소리나 플룻소리 등을 들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그 소리마저 떠나버린다. 이처럼 소리에 집중하는 이근원통의 수행법은 능엄경에서 제시하는 독특한 수행법이기 때문에 ‘염불선’과도 다르고 기타의 선법과도 다르다. 그래서 필자는 이근원통의 수행법이 능엄경에 바탕한 선법이라는 뜻에서 ‘楞嚴禪’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았다.

 

5. 결 론
본 논문의 결론은 무상이 사천지역에서 대중들을 교화한 인성염불이 능엄경의 수행법인 ‘耳根圓通’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먼저 무상의 선사상이 頓悟사상이라는 데 주목하였다. 무상 또는 무주 일파의 돈오사상에 내포된 돈오의 의미는 계․정․혜 삼학 중에서 혜 쪽에 보다 비중을 두는 사상운동이었다고 평가된다.

 

三學을 三句로 대치시킨 무상의 작업도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경향은 역대법보기가 분명하게 표방한 사상적 노선이었다고 여겨지며, 티벳의 마하연으로 대표되는 돈문파의 노선과도 일치한다. 6바라밀 가운데 보시나 지계 등의 5바라밀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지혜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마하연의 주장에서 당시 돈문파의 지향점이 무엇이었던가가 나타난다. 이러한 노선은 금강경에 입각하여 돈오를 주장한 신회의 입장과도 궤를 같이하는 움직임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들이 돈오를 주장하게 된 배경에는 禪定의 위험성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즉 잘못된 선정에 탐닉하다 보면 入魔의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다. 선정이 여러 가지 신통묘용은 잘 나투지만, 그 신통이 알고 보면 高級靈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고급영에 사로잡혀 있다 보면 진정한 반야지의 획득은 어렵게 된다고 본 것이다. 역대법보기에서 기존의 삼매나 止觀을 신랄하게 비판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잘못된 삼매로 인한 入魔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돈오파는 그 대안으로 혜를 제시한 것 같다. 이때의 혜를 무상은 삼구로 제시하였고, 무주는 다시 무념으로 압축하였다. 수행의 최종 목적지를 무념으로 기준 삼는다면 入魔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역대법보기는 이러한 돈오의 원리적 근거를 능엄경의 ‘一根旣返源 六根成解脫’에 두고 있다. 이 논리는 다른 대승경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임은 물론이다. 아울러 능엄경은 잘못된 삼매로 인한 入魔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그 사례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능엄경 권10의 ‘禪種 50魔’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능엄경은 삼매의 오류를 지적할 뿐만 아니라 돈오의 논리를 제공하는 데 있어서 더할 나위 없는 적합한 경전이었음이 드러나며, 무상․무주․마하연으로 이어지는 돈문파의 이론적 배경을 뒷받침하는 핵심경전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능엄경의 전체 구성은 卷10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돈오사상의 출처는 卷6에 해당되는 부분으로서, 卷6은 이근원통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근수행이 갖는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25가지 수행법 중에서 가장 빠르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25가지 수행법 중에서 가장 수승한 법이 이근원통이라는 것이고, 수승하다는 것은 결국 빠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어떻게 빠른가를 설명해야 하는데, 이를 설명하는 논리가 바로 ‘一根旣返源 六根成解脫’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능엄경에서 표방한 돈오사상의 핵심논리는 이근원통에서 나온 것이다.

돈오는 이근이고 이근은 돈오를 지칭한다. 돈오사상의 뿌리에는 이근원통이라는 수행법이 버티고 있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역대법보기를 비롯한 티벳 돈문파의 배경에는 이근원통이라는 수행법이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돈오라고 하는 새로운 사상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행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불교의 사상은 수행을 통한 果位의 형태로 증명될 때 힘을 발휘한다. 증명하기 위해서는 수행법이 중요하다. 당시 사천과 티벳의 돈문파는 돈오를 뒷받침하는 이근원통법을 수행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필자가 무상의 인성염불이 이근원통이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인성염불이 이근원통이라고 판단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소리이다. 인성염불은 소리에 집중하는 수행법이었다. 인성염불은 타력에 의한 서방정토의 왕생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염불적인 요소는 희박하다고 판단된다. 그렇다고 기타 다른 형태의 禪法도 아니다. 어느 한 글자의 소리를 택해서 이를 길게 소리내는 방법일 뿐이다. 소리를 내는 까닭은 서방정토를 염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내는 소리에 자기가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이 방법은 內耳聲과 外耳聲에 집중하는 이근원통법과 일치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인성염불은 ‘楞嚴禪’이라고 호칭해야 맞다. 능엄경의 선법이란 뜻이다.

무상의 인성염불이 이근원통이라고 할 때 우리는 한 가지 부수적인 수확을 거둘 수 있다. 그것은 무상과 신라 구산선문과의 사상적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양자는 돈오사상이라는 공통점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무상의 이근원통도 돈오사상이고 능엄경의 修證論은 頓悟漸修의 체계이다. 능엄경 권10의 ‘理則頓悟 乘悟倂鎖 事非頓除 因次第盡’이 여기에 해당한다. ‘理는 頓이지만 事는 非頓’이라는 頓悟漸修론의 최초 진원지는 능엄경이다. 능엄경에는 돈오와 점수 두 부분이 공존해 있지만, 역대법보기를 비롯한 돈문파에서는 주로 돈오에만 주목하였다. 점수에 대한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점은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구산선문도 돈오사상이다. 그러나 무상을 염불선의 틀에서 파악하는 한 이러한 공통점은 결코 발견될 수 없다고 본다. 능엄경을 중간에 대입시켜야만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중무상과 신라 구산선문은 마조와 서당지장을 통한 법맥상의 연결뿐만 아니라 돈오라는 사상적 측면에서도 서로 연결되고 있었던 점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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