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雲禪師의 禪詩 연구*李 鍾 君**
Ⅰ. 머리말
Ⅱ. 白雲禪師의 생애와 禪思想
Ⅲ. 白雲禪師의 詩世界
1. 스승을 思慕한 詩
2. 깨달음으로 이끄는 示法詩
3. 無心의 경지를 노래한 詩
4. 物我一如의 自然詩
Ⅳ. 맺음말
Ⅰ. 머리말
白雲景閑(1298~1374) 禪師는 우리 나라가 세계 最古의 금속활자본의 문헌을 보유하게 한 「佛祖直指心體要節」로 근래에 널리 알려진 고려말의 高僧이었다. 그는 太古普愚 國師와 懶翁慧勤 王師와 동시대에 활동하면서 국운이 시련을 맞았던 당시 불교계를 이끌었던 세 분의 훌륭한 불교 지도자 중 한 분이었다. 이들 세 고승은 元나라에 가서 臨濟宗 법맥을 이어온 사실과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운명 속에 시달리던 국민들과 사부대중들을 교화하는 데 일생을 바친 활동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白雲景閑 禪師는 1351년 원나라에 가서 湖州 霞霧山 天湖庵에 주석하고 있던 임제종 18대 법손인 石屋淸珙 禪師의 법맥을 이어받았으며, 인도 출신 승려로서 원나라에 머물던 指空和尙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1년 정도 원나라에서 머물다 귀국한 백운은 왕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오로지 선승으로 살기를 염원하였던 선사였다. 백운선사에 관한 중요한 현전 자료로는 侍者 釋璨이 기록한, 상․하권의 편제로 된 「白雲和尙語錄」이 있다. 이 「어록」 상권에는 주로 法門 등의 산문이 실려 있고, 하권에는 그가 남긴 125수의 禪詩와 여러 사람들과 주고받은 글들이 실려 있다. 백운선사의 선시에 대하여 지금까지 몇 분의 학자들이 부분적으로 연구한 경우는 더러 있으나 독립적으로 연구되지는 않은 실정이다. 그리고 문학적인 측면에서 다룬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사상이나 법맥에 대하여 연구한 논문도 몇 편 있다.
백운선사의 인품과 道力에 대해서는 牧隱 李穡이 「백운화상어록」 序에서, “선비가 한 세상에 나서 서로 만나지 못한 이가 한없이 많겠지만, 지금 백운에 대해서는 더욱 유감스럽게 여겨진다. 그 道의 높이와 法語의 깊이는 나의 識量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요, 道의 안목을 가진 자가 증명할 것이다”라고 하며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 뒤에 이어지는 李玖의 序에서는, “백운은 천진하고 거짓이 없어 항상 진리를 드러내면서도 형상을 빌어 이름을 팔지 않았으며, 구름같이 걸림 없었으니 眞境에 노니는 사람이었다. 후세의 학자들도 이 법어를 보면, 마치 어둠을 부수는 밝은 등불인 듯, 더위를 씻는 맑은 바람인 듯하여 私淑의 指南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서문을 쓴다고 하였다.
이처럼 백운은 법호 그대로 흰구름같이 유유자적하면서 고고한 禪僧으로서 일생을 마친 분이었다. 공민왕 6년(1357)에는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긴다고 하면서 훌륭한 禪客들이 숲처럼 많으니 그들에게 자문을 구하라며 사양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오로지 선승으로서의 본연의 자세에 충실했던 백운선사의 선시에 대한 폭넓은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고려 말 선승들의 사상 속에서 流露한 선시와 그 인간적 면모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며, 나아가 고려 말 선시 문학의 다양성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본 연구에서는 백운선사의 선시에 대하여 그 내용상 공통점이 있다고 판단되는 작품들을 몇 가지로 분류한 다음, 그 시들을 분석하여 거기에 깃든 문학적 의미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에 따라 어록에 있는 법어들과 연관지으면서 전체적인 詩文學의 성격을 밝혀 내는 것을 이 논문의 목적으로 삼고자 한다.
Ⅱ. 白雲禪師의 생애와 禪思想
「백운화상어록」에는 그의 행장이 밝혀져 있지 않으며, 그에 대한 碑文도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그의 생애에 대하여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이색이 쓴 「어록」의 序에 의하면 백운선사는 향년 77세에 경기도 여주의 鷲嵒寺에서 입적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 뒤에 이어지는 李玖의 序에는 “을사년(1365) 가을 내가 서해에 사신으로 갔을 때, 화상은 神光寺에 있었다. 10년 동안 보지 못하다가 화상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라는 구절이 있다. 이 10년이란 수치가 정확한지는 알 수 없으나 기록대로 계산한다면, 백운선사가 입적한 연대는 1365년 을사년으로부터 10년 후가 되는 1374년에 해당된다. 그리고 향년 77세가 滿年齡으로는 76세이므로 1374년에서 역산하면, 선사의 출생연대는 1298년(충렬왕 24년)이 되는 셈이다.
백운선사는 전라도 고부군 출신으로 7, 8세의 어린 나이에 출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10세 전에 해당하는 1307년 이전에는 출가했다고 볼 수 있다. 출가할 때의 得度師가 누구이며, 어느 사찰로 출가하여 어떤 수행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더 알려진 자료가 없어 밝혀 내기가 어렵다.
백운선사는 출가 이후 40여 년 동안 고려에서 수행을 한 다음, 54세 되던 충정왕 3년(1351)에 원나라로 들어갔다. 임제종 楊岐派는 당․송을 거쳐 명성을 떨치면서 원나라에 영향을 끼쳤고, 이 종파에 속했던 石屋淸珙은 당시 江南人들의 불교계에서 주도적 위치에 있었다. 백운은 湖州 霞霧山 天湖庵에 머물던 석옥 청공을 찾아가 품고 있던 의심을 물었다. 그리고 후에는 燕京 法源寺에 머물던 胡僧인 指空에게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그 뒤 백운은 원나라의 江南과 江北을 돌아다니면서 선수행에 안목이 높은 선지식들을 두루 친견하면서 선문답을 나누었다. 운수행각을 마치고 이듬해인 1352년 정월 다시 천호암으로 석옥선사를 찾아가 여러 날 머물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백운은 석옥에게서 오로지 無念眞宗을 배워 여래의 無上妙道를 깨달았다고 한다. 이에 석옥선사는 백운의 화두 타파가 자신과 제불보살의 환희라고 몹시 기뻐하면서 칭찬했다고 밝히고 있다.
석옥선사와 이별한 백운은 平江府 杭州에 있는 休休庵으로 가서 두 달 정도 머문 후 원나라에 간 지 1년 만인 1352년 3월 22일 뱃길로 귀국하였다. 귀국한 다음달에는 성문 밖 30리쯤 떨어진 性覺寺에서 참선하는 대중들 속에 섞여, 하루종일 行․住․坐․臥하는 가운데 오로지 無心․無爲만을 끊임없이 면밀히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다음해인 계사년(1353) 정월 17일 낮에 단정히 앉아 있을 때, 永嘉大師의 ‘證道歌’에 있는 구절을 생각하다가 홀연히 大無心地에 이르렀다. 드디어 마음에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아주 끊어져 추호도 의지할 것이 없이 冥然한 경지가 되었다. 이때 갑자기 三千大天世界가 오로지 하나로 자기 자신임을 깨달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민왕 3년(1354)에 백운은 海州 安國寺로 갔다. 그해 3월 원나라에 있는 지공에게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선시로 써서 보냈다. 뒤이어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선시 12수를 또 지어 지공에게 보내고 있다. 같은 해 6월 4일 원나라의 法眼禪人이 2년 전에 입적한 석옥 청공화상의 辭世頌을 모시고 안국사로 왔다. 이때 백운은 스승을 위해 재를 베풀고 설법하면서 사세송의 뜻을 풀이하기를, 이 게송은 인도의 가엽존자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석가모니의 정법안장을 석옥선사가 자신에게 전하는 傳法偈라고 하였다.
공민왕 6년(1357) 백운선사는 입궐하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자신은 아직 최상승의 법을 이루지 못했다면서, 꺾인 병든 나무에 자신을 비유하는 선시를 지어 보내며 사양하고 있다. 공민왕 14년(1365) 6월 21일에는 왕명을 받고 海州 神光寺로 가서 주지를 맡아 법어를 내리고 머물렀으나, 두 달 뒤에는 공민왕에게 주지 사퇴를 간곡히 청하는 글을 올렸다. 이 무렵에 神光寺 懶翁臺에서 지은 시가 한 수 남아 있다.
공민왕 18년(1369) 72세 때에는 경기도 김포 望山에 위치한 孤山菴에 머물면서 지공화상의 眞影을 추모하여 지은 선시가 2수 남아 있다. 공민왕 19년(1370) 왕이 친림한 가운데 나옹선사 주관으로 諸山 납자들의 수행 정도를 시험하는 功夫選을 시행할 때, 백운선사도 千凞 등과 함께 시험관으로 참석하였다. 이때 백운선사는 話頭․垂語․聲色․言語 등의 여러 방법으로 수행자들을 시험하는 것이 좋겠다는 글을 써서 국왕께 올렸다. 국가적인 행사였던 功夫選을 마친 4년 후인 공민왕 23년(1374)에 경기도 驪州 川寧(현재 驪州郡 興川面 孝池里)의 慧目山 鷲岩寺에서 77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이러한 일평생을 살아온 백운선사의 선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법맥과 종풍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1378년 4월에 이색이 쓴 「백운화상어록」 序에 의하면, “백운선사는 원나라의 江南 霞霧山 石屋淸珙和尙에게서 법을 받았으니, 그 자신이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색의 序 다음에는 이보다 1년 먼저 쓴 李玖의 序가 실려 있는데, “道를 구하여 霞霧山 석옥에게 법을 이어받았으며, 西天의 지공에게 의심되는 것을 물어 밝힌 뒤, 귀국한 이듬해 계사년(1353) 정월 17일 마음을 밝혀 도를 깨달았다. 석옥은 임종에 이르러 백운에게 게송으로 부촉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석옥선사가 임제종 18대 법손이므로 백운은 임제종의 가풍을 자신의 종풍으로 삼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백운선사는 중국 선종의 가풍을 밝히는 법어에서도 임제선사의 뛰어남을 내세우고 있다.
혹은 방망이로 때리고 혹은 할(喝) 하고 혹은 손님〔客〕이 되고 주인이 되어, 때로는 빼앗고 때로는 놓아 주면서 재빠른 機鋒이 번개처럼 떨쳤으니 臨濟와 德山은 홀로 뛰어났도다.
그의 임제선사에 대한 자부심을 지닌 평가는 스승 석옥선사가 임제종이었다는 데까지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는 글이 그의 어록에 실려 있다. 다음 글은 ‘太古和尙에게 부치는 글’이라는 제목이 붙은 문장의 내용 중 일부이다.
제자는 전생에 훌륭한 종자를 심어 대화상과 함께 동참하였으니, 우리는 다 石屋和尙의 제자입니다. 그러면 말해 보시오. 동참한 일은 어떤 것이며 일찍이 남에게 들어 보인 적이 있습니까? 지금 천하에는 指空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先師(石屋)만한 이가 매우 드뭅니다. 선사는 입적하셨지마는 공안은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백운이 太古에게 다 함께 석옥선사의 제자임을 밝히는 중요한 발언이다. 그런데 백운과 태고는 임제종 종풍을 계승한 석옥의 제자이지만, 각자의 禪旨를 선양하는 데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태고는 정통적인 간화선을 일관되게 수행하였으며 또 널리 펴는 데 반하여, 백운은 간화선에 대하여도 곳곳에서 언급하지만, 특히 無心과 無念을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원나라에서 求法한 사실을 대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면서 無念眞宗을 내세우고 있다.
山僧은 지난 해에 강남과 강북을 두루 다니면서 선지식만 있으면 모두 찾아 뵈었소. 그 선지식들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趙州의 無字, 萬法歸一, 父母未生前面目, 擧心外照 攝心內照, 澄心入定 등을 쓰기도 하면서 마침내 다른 말은 없었소. 최후에 霞霧山 天湖菴 石屋老和尙을 찾아 뵈옵고, 여러 날 좌우에서 모시면서 다만 無念의 眞宗을 배우고, 여래의 無上妙道를 원만히 깨달았던 것이오.
이러한 구도 과정으로 미루어 백운은 석옥의 선원에서 간화선으로 수행한 것이 아니라, 무념진종을 배워 깨달음을 터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중국 禪宗史에서 돈오돈수 사상을 널리 선양한 육조 혜능선사의 사상도 無上眞宗이라고 말하고 있다.
옛 성인들의 方便은 항하사 모래와 같이 많으나, 六祖가 이르기를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인다’ 하였으니, 이는 宗旨와 格式을 초월한 無上眞宗이오. 여러분들은 祖師門下의 禪客으로서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이는 바람도 깃발도 아닌 마음이 움직인 것이라고 한 육조 혜능선사의 법어를 가리켜 종지와 격식을 초월한 무상진종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무념진종이 곧 무상진종이며, 이것이 백운선사가 그토록 강조하는 무심․무념의 禪旨의 요체가 된다. 이렇게 볼 때 그가 무심․무념의 가르침을 얼마나 내세우고 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로 보아 백운선사가 무심․무념의 선사상을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백운이 무심․무념을 무엇보다 강조했음을 확인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선종의 정통적인 맥을 면면히 이어 오는 간화선을 결코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어록」에 실려 있는 그의 법어를 통해서 이런 점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대중을 상대로 한 법회에서 백운은 임제종 양기파를 수립했던 楊岐方會(986~1040)禪師와 그의 스승이었던 慈明楚圓(992~1049)禪師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끊임없이 화두를 들도록 가르치고 있다.
자명화상은 소리를 가다듬어 말하였소. “너 스스로 깨달아라. 너 스스로 깨달아라. 나는 너만 못하다. 그때 양기는 활연히 크게 깨달았으니, 실로 이 일은 言句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소. 그대들은 다만 결정코 깨닫겠다는 뜻을 세우고 行․住․坐․臥에 祖師의 화두를 들되, 면밀히 공부하면 마침내 통밑이 빠지는 것처럼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오. 간절히 부탁하고 간절히 부탁하오.”
자명선사는 임제종 6세 법손이며 그의 제자인 楊岐禪師는 7세 법손인데, 양기의 이름을 따서 임제종 양기파라고 부르게 될 정도로 뛰어난 선승이었다. 뿐만 아니라 석옥 청공도 이 양기파에 속하므로, 백운이 이런 기연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가 임제종의 정통을 이어받았다는 자부심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인용된 글의 원문에 있는 ‘提撕祖意’는 말할 필요도 없이 역대 조사들의 화두를 철저히 들고 선수행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법어에서는 선종의 주류를 이루어 온 간화선으로 수행자들을 지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운이 왕명으로 개성의 五冠山에 있는 興聖寺 주지로 부임할 때 開堂法會에서 내린 법어를 읽어 보면 역시 조사선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가 있다.
법당에 올라가 禪師는 대중을 돌아보고 말씀하셨다. “오늘 이 老僧은 왕명을 받들고 사양할 수가 없어, 조사들이 화두를 드는 맑은 가풍을 드날리고 임금님의 명령을 널리 선양하려 하오. 최후의 一句는 말하기 전에 완전히 드러나 하늘과 땅을 덮고, 물질과 소리를 덮고 있느니라.”
위에서 ‘조사들이 화두를 드는 맑은 가풍을 드날리고’는 간화선을 중요시하는 발언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최후의 일구’는 선가에서는 널리 알려진 ‘末後一句’를 그대로 인용한 것인데, 참선 수행자가 최후에 활연대오한 깨달음의 경지를 의미한다. 이러한 경지는 眞如一心의 상태로서 삼라만상과 융합한 禪定의 세계를 상징하는 말이다.
또 백운은 ‘조사선’이라는 제목의 글도 남기고 있다. 원래 조사선이란 말은 달마대사 이래 스승과 제자 사이에 心印을 사자상승하며 正傳되어 온 禪風을 말하는데, 교외별전 불립문자를 주장하는 육조 혜능 문하의 南宗禪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글에서 조사선은 어떻게 수행자들을 지도하며 어떤 경우에 깨달음이 이루어지는지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① 言語示法 …… 趙州스님: 죽을 먹었는가? 學僧: 먹었습니다. 趙州스님: 그렇다 면 발우를 씻어라. 이때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다.
② 言聲示法 …… 玄沙스님: 개울물 소리를 듣는가? 學僧: 듣습니다. 玄沙스님: 개울 속으로 들어가라. 이때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다.
③ 聲示法 …… ‘까마귀의 울음소리, 까치의 지저귐, 나귀의 울음소리, 개의 짖음이 모두 여래의 법륜을 굴리는 것이다’라는 데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④ 色聲示法 …… 망치로 치거나 拂子를 세우거나 손가락을 퉁기거나 눈썹을 치켜올리거나 방망이로 때리거나 할(喝)을 하는 갖가지 작용 이 다 祖師禪이다. 그러므로 소리를 듣고 깨달을 때도 있고, 물체를 보고 깨달을 때도 있다.
백운선사의 이러한 설명은 역대 조사들이 스승과의 만남에서 깨달은 계기들을 후학들에게 예로 들어 분발심을 촉구하려는 의도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깨달음의 사례와 계기를 이처럼 간단 명료하게 제시한 점은 조사선의 특징과 그 示法示人의 도리를 명쾌하게 분류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에 의하면 백운 경한선사의 선사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일체의 선악을 생각하지 않으면 자연히 청정한 마음의 본원에 들어가게 된다는 무심․무념이 가장 훌륭한 선의 경지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선종 역대 조사들의 수행에 대한 해박한 이해로 화두를 제시하기도 하여 조사선풍을 널리 선양하고자 하였으며, 수행자들에게는 깨달음의 여러 가지 계기가 필요함을 주장하여 임제선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정신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Ⅲ. 白雲禪師의 詩世界
백운은 禪의 眞境을 조사선으로 내세우고 있다. 세존과 가섭 사이의 염화미소에서부터 이심전심의 달마선법을 그 바탕으로 하는 조사선을 선의 중심 전통이라 파악한 그는, 性品이 현실을 떠나지 않고 엄존하는 것이라 하여, 色․聲․言語와 밀착된 상태에서 眞境에 도달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不離色․不離聲․不離言語에 바탕을 둔 禪機의 작용으로서 자연에 계합하는 깨달음의 경지가 바로 조사선의 경지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온 법계에 가득 차 있는 聲․色․言語의 자연성을 통해 진경에 이를 수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문학적으로 선시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스스로 많은 선시를, 무심을 지향하는 조사선의 바탕 위에서 짓고 있다. 필자가 게송을 수록한 그의 「어록」 하권을 하나하나 검토해
본 결과, 漢詩 절구 형식으로 쳐서 모두 125수 정도의 선시가 실려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논자에 따라 백운의 선시를 여러 각도에서 분류할 수 있겠으나, 본고에서는 스승을 사모한 詩, 진리를 드러내는 示法詩, 無心의 경지를 노래한 詩와 담박한 느낌을 주는 自然詩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佛祖의 妙理는 붉은 산꽃, 푸른 버들 등 자연 그대로 만물 속에 완연히 드러나 있고, 새의 지저귐이나 짐승들의 울음조차 모두 실상을 이야기하고 반야를 나타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백운선사는 그런 바탕 위에서 하나의 제목 아래 오언절구 13수, 칠언절구 12수로 도합 25수가 되는 ‘居山’이라는 긴 자연시를 남기고 있다. 이것은 무심을 위주로 한 조사선적 경지에서, 자연에 대한 그의 문학적 정서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 스승을 思慕한 詩
「백운화상어록」 하권에는 백운이 원나라의 湖州 하무산에 주석하던 석옥 청공선사를 친견하여 선문답을 하였던 내용의 산문 세 편이 실려 있다. 석옥과 관련된 시는 원나라에서 지은 작품과 고려에서 지은 작품의 두 가지가 있다. 1351년 53세 때 백운이 석옥선사와 같이 지내다가, 여러 산을 순회하며 선지식들을 두루 만나 보기 위해 湖州를 떠나면서 지은 ‘出州廻山’이라는 시 2수가 원에서의 작품이다. 그리고 백운선사가 귀국한 2년 후인 1354년 56세 때, 석옥선사가 입적시에 백운에게 내린 사세송을 가지고 석옥의 문인 法眼이 해주의 안국사로 찾아왔다. 그로부터 열흘 후 재를 베풀고 대중들에게 법어를 내리다가 끝에 가서 스승의 道行을 기리는 선시 11수를 지은 것이 고려에서의 작품이다. 따라서 이 양자를 합쳐 석옥선사와 관련된 시는 모두 13수가 되는 셈이다.
한편 指空和尙에 관하여 원에서 남긴 산문은 없으며, 귀국 2년 후 1354년 3월 해주 안국사에 있으면서 지공에게 올린 서간문 한 편이 있다. 그리고 지공화상에 관한 시는, 1351년 원나라에 있을 때 지어 올린 시가 4언으로 17수, 그의 설법을 듣고 지어 올린 시가 7언으로 7수가 남아 있다. 그리고 귀국한 이후에 쓴 서간문 속에 삽입된 시가 2수, ‘又作十二頌呈似’라는 시가 5언 12수, 孤山菴에서 지공화상의 진영을 찬양한 시 2수로, 모두 합하여 40수가 된다. 이러한 시 작품 중에는 연작시 형태로 된 것도 있으나, 이 40수는 절구의 형식으로 계산한 詩 篇數에 해당된다.
그러면 백운이 법맥을 어어받았다고 말하는 스승 석옥 청공과, 스스로 제자라고 하면서 스승으로 섬기고자 했던 지공화상에 대한 시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석옥선사가 입적에 이르러 백운에게 내린 사세송을 살펴보자.
‘辭世頌’
白雲買了賣淸風 백운을 사고 청풍을 팔았더니
散盡家私澈骨窮 온 집안이 텅비어 뼛속까지 가난하네
留得一間茅草屋 머물던 한 칸의 띠풀집에서 얻은 바를
臨行付與丙丁童 떠남에 다다라 불길 속 그대에게 맡기노라.
석옥이 백운 경한의 호인 ‘백운’을 시어로 사용하여 지은 열반게송이다. 흰구름은 백운선사를 상징하고 淸風은 석옥 청공의 가풍, 나아가 임제종의 종풍을 상징한다. 백운을 제자로 삼기 위하여 청공의 가풍을 온전히 다 넘겨 준다는 의미이다. 承句는 일체의 번뇌망상이 소멸된 경지를 의미하며, 轉句의 띠풀집은 자신의 육신을, 그리고 ‘얻은 바’는 수행을 통하여 깨달은 法印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結句에 나오는 ‘불길 속의 그대’는 번뇌의 불길이 치성한 속세를 교화해야 할 백운선사를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이 노래 結句의 ‘付與’라는 말에 함축된 의미는 백운에게 법을 부촉하는 내용이 분명하다고 판단된다. 눈 열린 제자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스승으로서, 법을 잘 지키고 이어가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심금을 울리는 시이다.
다음은 안국사에서 앞에 보인 사세송을 전해 받고, 백운선사가 재를 올리면서 법어를 하다가 끝에 가서 스승을 사모하여 지은 선시 11수에 대하여 논의해 보고자 한다. 그 중에서 스승이라는 말이 쓰인 시와, 그 스승 곁에서 깨달음을 이루는 과정을 표현한 시를 예로 든 것이다.
‘海州安國寺 設齋 小說’ 중의 게송
我師首謁及菴祖 우리 스승 처음으로 급암조사 뵈옵고는
契此三昧受傳燈 삼매를 깨닫고 법등을 이어받아
隱密履賤超過量 은밀히 수행하여 모든 것 뛰어났네
晦跡山林四十年 산림에 자취 감춘 사십 년 동안
未曾一言及人知 누구에게 한마디의 말이 없었으니
是故無人明辨出 이 때문에 아무도 그 뜻을 깨닫지 못했네.
我於壬辰正月春 나는 임진년 정월 초봄에
躬造室中受熏煉 스승 곁에 몸소 가서 단련을 받고
上元前十有三日 정월 보름 전인 십삼일에
密契無心無上宗 심오한 무심의 최상의 뜻에 계합하였네.
이 두 편의 시가 원본에는 연작시 형태로 이어져 있다. 첫 번째 시는 백운의 스승 석옥이 임제종 17세손인 及菴 宗信禪師의 법맥을 계승한 정통성을 밝히면서, 그의 도력이 뛰어났음을 표현하였다. 석옥은 41세쯤에 스승 급암의 곁을 떠나 하무산에 들어가서 천호암을 짓고 山居 생활을 40년 가까이 하면서 몸소 山田을 개간하여 경작하였으며, 땔감과 채소를 직접 채취하였다. 그리고 참선 수행의 여가에는 ‘山居吟’을 즐겨 지었다고 한다.
이 시에서 제4행~6행까지는 스승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40년 동안 山居하면서도 법을 전할 사람을 만나지 못했음을 표현한 것이다. 산림에 자취를 감추었다는 말은 자연에 묻힌 한적한 삶을 의미한다. 도를 터득한 선사가 자연을 벗삼아 산속에서 한가로운 삶을 누리는 모습은 장자의 소요유를 연상케 한다. 천지 본연의 모습을 따르고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무한의 세계에 노니는 소요유는 의존하는 것이 없는 절대자유이다. 선사들의 이와 같은 평화로운 삶은 우리들로 하여금 정신적 탈속에서 얻어지는 안온함을 느끼게 하기에 족하다.
두 번째 시는 백운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석옥의 문하에서 수행하다가 임진년(1352) 정월에 스승이 가르쳐 준 무심의 뜻에 계합하였음을 밝히는 내용이다. 선가에서는 선의 제자를 그 스승이 동반한다. 아니 떠받쳐 준다. 그래서 긴밀한 스승․제자 관계가 두 사람의 道의 본질적인 전제이다. 스승 없이는 제자의 실질적인 진전이란 불가능하며 또한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선수행 기간 동안 제자들 각자는 되도록 매일 스승을 만나서 가르침, 즉 독려나 질책을 받는다. 이와 같이 백운은 스승 곁에서 수행하던 옛일을 시 속에서 회상하고 있다.
이 시에서 ‘密契’라는 말은 수행하는 단계에서 한 단계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백운이 원에서 1년 정도 머물면서 석옥과 지공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수행을 했지만, 완전한 究境地의 깨달음, 즉 확철대오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1352년 귀국한 백운은 이듬해 계사년 정월 17일 性覺寺에서 無心․無爲를 열심히 참구하다가 永嘉大師의 ‘證道歌’에 있는 ‘망상도 없애지 말고 참됨도 구하지 말라’는 구절에 이르러 단박에 ‘無心一念’이 되어, 삼천대천 세계가 자기의 身心과 하나가 되는 확철대오를 이룩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는 백운의 수행 단계 중 어느 과정에서의 깨달음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심오한 무심의 경지에 계합하게 된 원인이 스승의 은혜 때문이라는 생각이 백운의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스승의 지도를 받은 시기와 무심에 계합한 월일을 밝힘으로써, 지난날 같이 살면서 수도하던 추억을 회상하는 마음이 시 두 편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다음의 시 역시 같은 제목에 들어 있는 것인데, 법을 전해 받는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어 주목된다.
‘海州安國寺 設齋 小說’ 중의 게송
我今亦受傳法偈 나는 지금 傳法의 게송을 받들어
轉敎未悟如我證 깨치지 못한 이를 나처럼 깨치도록 가르치려 하니
將此深心奉塵刹 장차 이 깊은 신심으로 무수한 세계 받들면
是則名爲報佛恩 이것이 곧 부처님 은혜 갚는 일이리라.
이것은 앞서 살핀 석옥선사의 전법게를 받고 재를 올리는 목적을 백운이 직접 밝힌 시라고 하겠다. 스승이 입적할 무렵에 내린 전법게송을 정성껏 받들어 사람들을 교화하겠다는 원력을 밝힌 내용이 제1․2행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원력으로 수많은 중생들을 몸소 제도하여 부처님의 은혜를 갚겠다는 교화에 대한 行願을 노래하고 있다. 이 ‘부처님의 은혜’에는 전법게를 내려준 스승 석옥선사의 은혜도 포함된다고 보아야 이 시의 뜻에 부합될 것이다. 석옥선사가 깨달은 心印을 고스란히 부촉한 이 傳法이 헛되지 않도록 스승처럼 교화에 힘쓰리라는 다짐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이 게송은 법을 전해 준 스승의 은혜를 갚겠다는 굳은 결의를 담고 있으므로, 당연히 스승을 사모하는 시라고 하겠다.
백운은 원에서 만나 법을 물었던 지공화상도 스승으로 받들고 있다. 그가 귀국하고 2년 후인 1354년(甲午) 지공에게 올린 글을 보면 스스로 제자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제자는 향을 사르고 백배 예배합니다. 제자는 일찍 훌륭한 종자를 심어 스승님이 이 세상에 나오신 때를 만나 화상님을 뵈옵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백운은 지공화상을 스승으로 만나게 된 것을 전생의 좋은 인연으로 보며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백운이 스승으로 예우하는 지공화상을 흠모한 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辛卯年 上指空和尙頌’
一悟永悟 한번 깨달음에 영원히 깨달아
更不復悟 다시는 더 깨칠 것 없이
任運寂知 고요한 지혜에 맡겨 두어도
元自無心 원래의 무심 그대로 자재롭구나.
更無對治 다시는 다스려야 할
忘緣之力 허망한 인연의 세력마저도
頓悟頓修 단박 깨치고 단박에 닦아 마치니
行解相應 행과 앎(지혜)이 서로 들어맞았네.
첫째 시는 지공이 깨달은 정신 세계를 표현한 내용이다. 제1행에는 돈오돈수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원래 이 돈오 사상은 중국 선종의 기초를 확립하고 부흥시킨 육조 혜능 正傳의 禪法이다. 선종이 중국 천하를 풍미하던 당나라 때에는 남쪽 지방에 널리 퍼진 혜능의 돈오선과 북쪽 지방 신수의 영향을 받은 점오선을 일컬어 ‘南頓北漸’이라는 말이 유행하였을 정도로 돈오돈수 사상이 크게 번져 나갔다. 그후 중국 선종의 큰 흐름은 혜능 문하의 남종선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 선풍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혜능선사는 무념의 돈오법을 깨달으면 바로 부처의 지위에 오른다고 하여 돈오의 내용이 무념임을 천명하고 있다.
선지식들아, 나는 오조 홍인화상의 회하에서 한번 듣고 그 말 끝에 크게 깨쳐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느니라. 이러므로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단박 깨쳐서 각기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의 성품을 단박 깨치게 하는 것이다. 無念法을 깨친 이는 만법에 다 통달하고, 無念法을 깨친 이는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보며, 無念의 頓法을 깨친 이는 부처의 지위에 이르느니라.
이러한 혜능선사의 사상과 백운의 시를 비교해 보면, 앞의 시 제1․2행의 내용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제3행은 깨닫고 나면 해탈의 知見에 맡겨 두어도 만법에 통달하는 무심의 경지 그대로 자재하다는 의미이다. 제3행은 지공이 깨달음을 통해 얻은 지혜를, 제4행은 도의 본질을 의미하고 있다. 도는 우주 도처에 편재한다. 도는 좌우 어디로든 흐른다. 만물은 도에 의하여 조건지어져 있다. 그러나 도는 아무것도 억제하지 않는다. 침묵하며 도는 자신의 의미를 가득 채우지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도가 만물을 양육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만물의 주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는 결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원리가 아니다. 이러한 성질의 도는 그것을 깨달아 쓰는 자에게는 무한히 자유로운 것이다. 이런 것이 시에서 말하는 ‘무심 그대로의 자재로움’이다. 지공이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노래하면서 백운은 스승이 무심한 경지에서 자유로이 도를 누리던 풍모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두 번째 시의 내용은 무심의 경지에 이르고 나자 더 다스려야 할 번뇌망상이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돈오가 이루어진 경지이므로 돈오돈수를 강조한 내용이 제3행의 뜻이다. 그리고 제4행은 무심이 된 깨달음의 心的 세계와 몸으로 이루어지는 행위가 자연스레 일치하여 한가로운 無爲 閑道人의 삶을 누리는 경지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운의 「어록」 어느 곳에도 직접 지공을 만나 선문답을 주고받은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공을 만났으리라고 판단되는 내용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백운화상어록」 하권에 보면, ‘聞和尙曲說法伊及三去大法 故復作七偈呈似’라는 제목을 붙여 놓은 7언절구 7수의 시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드는 시는 바로 그 7언절구 7수 중에 있는 2수이다.
‘聞和尙說法伊及三去大法’
敎化東方卅二年 동방을 교화하신 지 32년이니 되니
西來祖意有誰傳 서쪽에서 온 조사의 뜻을 누가 전한 것인가
願爲弟子參執侍 원하노니 제자되어 섬겨 모시게 하시고
慧眼他心鑑下情 남의 마음 아는 혜안으로 이 마음을 살피소서.
十萬八千餘許里 10만 8천리가 넘는 먼 길을
喫盡艱辛底事來 온갖 고생 겪으면서 무엇하러 오셨는가
只爲傳法救迷情 법을 전해 미혹한 중생 구하려 함인데
衆生薄福甚可哀 중생들의 박복함이 심히 애석하구나.
첫째 시에서 起句는 인도에서 悟道한 지공이 원나라에서 백운을 만날 무렵까지 세월의 흐름을 함축하고 있다. 지공은 나이 19세 때 나란타사를 떠나 남인도 길상산의 보명스님을 찾아갔다. 보명스님의 질문, “중천축국에서 여기 남인도까지 걸음 수를 아느냐?”에 대답하지 못하고 6개월 동안 동굴 속에서 좌선하여 깨달았다. 그리하여 스승의 의발을 받고 교화의 길에 나선 때가 대략 20세 무렵의 일이다. 이때부터 여러 지역을 경유하여 원에 도착한 후 백운을 만날 때가 1351년이므로 그때까지의 기간이 32년 정도 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承句는 ‘祖師西來意’ 곧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禪法을 전한 의미, 혹은 佛法의 근본 뜻을 묻는 禪家의 상용어구이다. 스승 지공이 중국에 와서 교화활동을 펼친 일이 달마의 傳法에 비길 만큼 큰 의의가 있다는 점을, 백운이 설의법으로 높이 평가하는 표현이라 하겠다. 이어서 이러한 훌륭한 스승 곁에서 그 제자가 되어 모시고 싶은 마음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다. 그리고 스승이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보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轉․結句에 간곡하게 나타나 있다. 머나먼 고국 인도를 떠나 오로지 불법을 널리 펴고 사람들을 교화하려는 큰 뜻을 품고 중국으로 온 스승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시인의 가슴 속에 샘물처럼 흘러넘치고 있다고 느껴진다. 이미 도를 완전히 깨달은 백운이지만, 안목이 높은 스승의 눈으로 조금이라도 부족한 점이 있다면 보살펴 주기를 바라는 겸손한 염원이 저변에 흐르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시는 지공이 인도에서부터 험난한 먼 길을 지나 원나라에 전법하러 왔지만, 그곳 사람들이 그 가르침에 흔쾌히 따르지 않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한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起句의 10만 8천리는 표면상으로는 인도에서 실크로드 주변 지역인 서역을 거쳐 중국까지 이르는 머나먼 여정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10만 8천리는 막연히 먼 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지공화상이 선의 초조인 가섭존자로부터 108대 조사라는데, 이 108에 1,000을 곱하면 10만 8천이 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아득히 먼 길’이라는 의미와 아울러 선의 정법안장이 108대 조사인 지공화상에게로 면면히 이어온 ‘法脈相承’을 의미하는 重意를 지님으로써, 사자상승의 오랜 전통을 상징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承句는 지공이 서역 지방을 지나는 험난한 여정에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무릅쓰고 중국 땅으로 들어오게 된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이색이 찬한 지공의 비명을 보면, 迦邪國에서는 외도들이 해치려 할 때 성 밖으로 도망치기도 하였으며, 神頭國에서는 배가 고파 복숭아를 따먹다가 도둑으로 몰리기도 했다.
또 的哩羅兒國에서는 날씨가 가문 것이 지공 탓이라 하여 죽이려 하였으며, 的哩候的國에서는 도둑을 만나 벌거숭이가 되기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공이 이러한 고난을 겪은 사실을 백운은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되며, 법을 위한 험난한 도정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내용이 되겠다. 轉句는 그런 고난을 헤치면서 중국까지 온 목적을 밝힌 구절이다. 그것은 오로지 고통받는 중생들을 제도하려는 보살행으로 왔음을 노래하여 스승의 자비심에 바탕을 둔 교화 의지를 기리는 내용이다. 마지막 구절은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미혹을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는 현실을 가슴 아파하고 있다. 스승의 가르침이 뛰어나고 높다는 의미를 ‘薄福하다’는 말로 더욱 돋보이게 하는 표현 기법을 쓰고 있다. 이 結句에서 중생들의 薄福을 애석하게 여기는 주체가 백운이므로, 이 구절은 은연중에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 내용으로 볼 수 있겠다.
2. 깨달음으로 이끄는 示法詩
백운은 석옥선사의 사세송을 받고 지은 선시에서, 스승의 전법 게송을 받들어 자신도 중생교화 의지를 굳게 하고 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뿐만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하는 법어에서도 백운은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도록 역설하고 있다.
어떤 것이 진실한 참구이며 진실한 깨달음인가? 하루종일 行․住․坐․臥 가운데서 생사의 큰 일을 생각하되, 心意識을 떠나 凡聖의 길을 참구해 내야 한다. 無心과 無爲를 배우고 그것을 면밀히 길러 언제나 생각이 없고 언제나 어둡지 않아야 한다. 마침내 의지할 데가 없어 冥然한 자리에 이르면 자연히 道에 합할 것이다. 옛 사람의 말에도 ‘無心이어야 비로소 본래의 사람을 본다’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백운선사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면밀히 화두를 들고 끊임없이 참선하기를 강조하면서, 그 길을 통해서 무심과 무위의 경지를 터득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가 지은 선시에도 이와 같이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시들이 있다.
‘示僧’
出家須了出家事 출가했으면 출가한 일을 마쳐야 하나니
未了徒名爲出家 깨닫지 못한다면 이름만의 출가리라
憶昔毗陵忘下脚 옛날 비릉이 다리를 잃었던 일과
忽然碓觜也生花 홀연히 돌절구 속에서 꽃이 피었던 일을 잊지 말아라.
‘與神光長老 口號’
師子窟無異獸 사자의 굴〔禪院〕속에는 다른 짐승 없나니
百八箇皆龍象 백 여덟 사람들 모두가 용상이네
喫粥了洗鉢盂 죽을 다 먹고 발우를 씻으니
好箇西來榜樣 (祖師)西來意 방목이 훌륭하도다.
위의 첫 번째 시는 스님들에게 출가할 당시의 初志를 일관하여 깨달음을 성취하라는 내용이다. 불타의 가르침인 無上大道를 깨닫고 말겠다는 철석같은 의지와 용기로 출가한 사문들이 잘못 빠지기 쉬운 해이와 나태를 채찍질하여 기필코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다잡아 주고 있다. 깨달음이란 ‘지금 여기’에서 깨어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개개의 모든 섬세한 의식의 제한으로부터 벗어나 하나의 집중된 의식 속으로 유일무이하게 깨어남은, 자기 자신 및 그 자신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세계나 사회에 대해 새로운 행동 관계를 포함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직 一心만 깨닫는다면 더 얻을 법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眞佛이니 부처와 중생은 一心에 있어서 다를 바가 없다. 출가한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일심의 깨달음이 가장 절실한 목적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옛적에 ‘毗陵’이라고 불렸던 唐代의 荊溪湛然(711~782)이 수행의 고통으로 다리를 앓았던 고사와, 돌절구 속에서 꽃이 핀다는 말과 같이 생각과 언어가 끊어진 절대경지를 상기시키면서 분발을 촉구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시는 6언으로 짜여 있다. 이 시에서 사자굴은 선방 혹은 선원을 상징하는 말이다. 백수의 왕이라는 사자와 같이 뛰어난 法王을 길러내는 선방에는 평범한 범부들은 아무도 없다는 의미가 제1행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入房하여 참선하는 구성원 모두가 용이나 코끼리같이 뛰어났음을 제2행에 밝히고 있다. 제3행은 함께 모여 대중 생활을 규칙대로 잘하고 있는 모습을 상징한 표현인데, ‘끽죽’은 선원에서 아침에 죽을 먹던 풍습을 상기시키며, ‘발우를 씻는다’는 말은 자기 일을 각자가 처리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행에서는, 선방 벽에 써 붙인 화두의 하나인 ‘祖師西來意’라는 榜目이 수행의 격에 잘 어울린다는 내용이다. 참선 잘하여 화두의 참뜻을 철저히 파고들어 조속히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수행자들을 독려하고 있으므로,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려는 백운선사의 간절함이 밑바탕에 짙게 깔린 示法詩라 하겠다.
다음은 어떤 수행자가 법을 청하기에 5언시로 답한다는 시제가 붙어 있는 시이다. 이 시의 길이는 5언절구로 쳐서 7수에 해당되는 연작시에 속하는데, 그 몇 수를 살펴보고자 한다.
‘復答請法以五言示之’
本來眞面目 본래의 참된 면목은
髣髴若虛空 허공과 거의 같으며
又如一點雪 그 위에 한송이 눈발이
落在烘爐中 큰 화로에 떨어지는 것 같네.
離念眞如性 생각을 떠난 진여불성은
如日處虛空 태양이 허공에 비추는 것 같지만
六根才一動 여섯 가지 감각이 조금만 움직이면
如一入雲中 태양이 구름 속에 가린 것 같네.
本來淸淨道 본래의 청정한 도는
其量等虛空 그 크기가 허공과 같아서
乾坤在其內 하늘과 땅도 그 안에 있고
日月處其中 해와 달도 그 안에 머무르네.
백운의 시 중에는 漢詩의 율격이나 운을 따르지 않고 古詩처럼 형식에 별로 구애받지 않으면서 내용 중심으로 쓴 작품들이 상당히 많은데, 위에 보인 시는 대체로 격식을 갖춘 것이라 하겠다. 특이한 현상은 위의 세 수에 공통적으로 ‘空’자와 ‘中’자를 운자로 썼는데, 위의 시제에 속한 7수 전부를 살펴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다.
첫 번째 시는 우리들 생명체의 근본인 眞如自性은 그 크기가 허공과 같다는 진리를 제1․2행에서 표현하였다. 제3행의 ‘一點雪’은 禪家에서 흔히 인간의 번뇌망상을 상징하는 용어인데, 이 시에서도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다. 허공같이 크고도 깨끗한 본성에 비하면 번뇌란 것의 실체가 활활 타는 큰 화로에 떨어지는 눈 한 송이와 같다는 내용이 제3․4행에 포함된 의미이다. 우리들 마음속에 들끓는 번뇌망상이 본래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고, 눈․귀․코․혀․몸․의식이 사물을 대함에 따라 수면의 파도처럼 일어난다는 비유가 詩語 이면에 숨어 있다. 이 두 행에 내포된 가르침은, 활활 타오르는 화로의 한 점 눈송이처럼 번뇌를 삭여 버리라는 뜻인데, 이것이 이 시의 주제가 된다고 하겠다.
두 번째 시는 생각, 즉 번뇌망상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진여불성의 작용은 태양광명이 찬란히 빛나는 것 같다는 가르침을, 제1․2행에서 비유법을 써서 들추어 보이고 있다. 여기서 시인이 포착하고 있는 ‘離念’은 우주 만물의 실체를 바로 볼 수 있는 무심의 경지를 의미하는데, ‘離念’이 되면 진여불성이 드러난다는 표현이다. 그리고 후반부는 눈․귀․코․혀․몸․의식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대상을 따라 움직일 때면, 마치 태양 광명이 구름 속에 가린 것 같다는 것을 역시 비유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 번째 시는 도, 곧 불교 진리의 크기에 관해 노래하고 있다. 우리 주변의 사물이나 현실을 떠난 곳에 도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주의 실상과 현실 이대로가 청정한 도의 모습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경지를 함축적이면서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선승들이 흔히 일컫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이다. 깨달음을 성취한 세계를 달리 표현한 ‘淸淨道’는 허공처럼 무한하고도 걸림없다는 진리를, 제1행과 제2행에서 역설하고 있다. 이것은 진리의 본체가 그러하다는 의미이다. 제3․4행은 현상계의 실상을 표현한 내용인데, 시 전체의 맥락으로는 본체와 실상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여기서 ‘調和’를 의미하는 詩語는 제3․4행에 쓰인 ‘內’와 ‘中’이 담당하고 있다.
백운선사는 출가 수행자뿐만 아니라 속인들에게도 불교의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다음의 보기 중 첫 번째 시는 조정에 벼슬을 하는 宰臣 정설(鄭偰)의 시에 酬答하는 것이며, 두 번째 시는 관음보살의 상주처라고 알려진 洛迦山에 가는 사람에게 써 준 것이다.
‘答鄭偰宰臣 詩韻-延安府使’
無爲大化門大開 무위의 큰 교화문을 활짝 열어 놓은 것은
意在金鱗透網來 쳐놓은 그물에 좋은 고기 몰리게 하는 뜻이었네
莫道水寒魚不食 물이 차가워 고기가 물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如今釣得滿船廻 한배 가득 낚아 싣고 지금은 돌아오노라.
‘送人洛迦山’
若能轉物卽如來 사물의 무쌍한 변화가 바로 여래일진대
何處靑山不圓通 어느 곳의 푸른 산인들 두루 통하지 않으랴
若無一隻頂門眼 만약 진실을 꿰뚫어 보는 지혜의 눈이 없다면
洛迦空到又空廻 공연히 낙가산에 갔다가 또 헛되이 돌아오리.
두 편 모두 압운과 평측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평소에 무심․무념을 강조하던 백운의 詩心은 作爲 부리지 않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無爲로 표출되고 있다.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진리를 가르치는 큰 문이 大化門인 것이다. 이 진리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은 까닭은 금빛 물고기와도 같이 뛰어난 사람들이 도를 얻도록 하는 데 있다는, 중생교화의 목적을 첫째 시 제1․2행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서 ‘金鱗’은 상근기를 의미하는 불교적 상징어이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훌륭한 사람들이 불교에 귀의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아라. 황해도 延安府使인 정설이 나와 인연을 맺고 지금 시를 주고받는다. 나는 그와 함께 만선을 이룬 어부의 기쁨과 같은 흐뭇한 마음에 젖어 있다’는 선사의 만족감이 제3․4행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한 고을을 다스리는 府使와 인연을 맺고 가르침을 베푼 것이 백운에게는 의의가 컸을 것이다. 사람을 교화하거나 진리를 가르치려는 이러한 示法詩에서, 禪悅에 젖어 기쁨을 표출하고 있는 시인의 심정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말로 표현된 것 이면에 감춰진 의미, 곧 言外之意는 바로 무위라 할 수 있고, 이런 경우 표면에 나타난 형상 속에 깊이 간직된 無의 의미를 음미하는 것이 무심의 미적 체험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시는 어떤 수행자가 관세음보살이 常住한다는 중국 남해의 補陀洛迦山으로 떠날 때 지어 준 것이다. 봄이면 꽃 피고 가을이면 단풍 드는 자연현상을 여래와 동일시하면서 곳곳의 푸른 산에 여래의 원통한 威神力이 두루하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제1행에 쓰인 ‘轉物’은 우주 삼라만상이 시시각각 무상하게 변화하는 것을 상징하는 詩語이다. 그리고 ‘圓通’은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이 두루 통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의 온갖 사물이 여래의 법신이 드러난 것이니, 어느 산엔들 관세음보살의 신통한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있겠느냐고 제1․2행을 통해서 반문하고 있다. 제3행에서는 수행자에게 현실을 그대로 바로 볼 수 있는 如實知見을 갖도록 촉구하고 있다. ‘一隻頂門眼’은 수행을 통하여 탁월한 통찰력으로 사물을 바로 보는 明眼을 의미한다. 洛迦山에만 관세음보살이 상주하고 그 외 다른 곳에는 머물지 않는다면 그 圓通한 능력은 보편성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비의 손길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해 주는 화신으로서 관세음보살의 本願에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스스로 깨달아 內心의 지혜를 터득하도록 강조함으로써, 납자들로 하여금 분발심을 일으켜 궁극적인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겠다.
3. 無心의 경지를 노래한 시
백운선사는 동시대에 활약한 太古普愚나 懶翁慧勤에 견주어 볼 때 무심과 무념, 그리고 무위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의 「어록」을 보면 여러 군데에서 무심․무념을 언급하고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여러 차례의 上堂法語를 통해서 무심에 계합할 것을 역설하기도 한다.
달마스님이 바른 교법이 쇠퇴함을 매우 슬퍼하여 서쪽에서 와서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敎밖에 따로 전한 까닭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들어 성품을 깨달아 부처가 되게 한 것이었다. 바로 가리킨 그 마음은 다만 평상시의 일 없는 그 마음으로서, 거기는 아무런 현묘한 지식이나 이치의 길이 없고 無心․無爲에 꼭 합하면 天機가 저절로 열리어 아무 구애도 없고 아무 집착도 없느니라. 그리하여 천지와 그 덕이 같고 일월과 그 광명이 합해서 털끝만한 견해의 거리낌도 용납하지 않고 오직 탕탕히 크게 통할 것이니라.
이 법어에 따르면 백운선사는 달마대사의 선법을 통하여 무심․무위에 계합하면 무엇에도 걸림 없는 탕탕한 경지가 열린다고 역설하고 있다. 선종에서는 견성성불을 가장 절박하고 궁극적인 목표로 삼으며, 견성의 내용으로 大無心地가 이루어져야 함을 만고불변의 철칙으로 삼고 있다. 대무심지가 되면 탕탕하고 원융무애하여 모든 현상과 사물, 어떠한 말이나 행동에도 추호의 걸림이 없는 閑道人의 경지가 전개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백운선사의 선시에서 이러한 경지를 표현한 노래들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먼저 「백운화상어록」 하권에 수록된 ‘無心歌’를 살펴보자.
‘無心歌’
① 白雲澹泞 깨끗한 흰구름은
出沒於大虛之中 허공에 일었다 사라졌다 하고
流水潺湲 잔잔히 흐르는 물은
東注於大海之心 동쪽의 큰 바다 한복판으로 흐른다.
② 水也遇曲遇直 물은 굽이나 곧은 곳을 흘러도
無彼無此 너도 없고 나도 없으며
雲也自卷自舒 구름은 스스로 뭉치고 스스로 흩어져도
何親何疎 친함도 소원함도 없네.
③ 萬物本閑 만물은 본래부터 고요하여
不言我靑我黃 나는 푸르느니 누르느니 말하지 않네
惟人自鬧 사람들이 스스로 시끄럽게
强生是好是醜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마음을 내는구나.
④ 觸境心如雲水意 경계에 부딪쳐도 마음이 구름이나 물같으면
在世縱橫有何事 세상에 살더라도 무슨 거리낌이 있으랴
若人心不强名 사람 마음에 억지로 이름짓지 않으면
好醜從何而起 좋으니 나쁘니가 무얼 좇아 일어나리.
⑤ 愚人忘境不忘心 어리석은 사람은 경계는 버리되 마음은 비우지 않고
智者忘心不忘境 지헤로운 사람은 마음을 비우되 경계는 버리지 않네
忘心境自寂 마음을 비우면 경계는 저절로 고요해지고
境寂心自如 경계가 고요해지면 마음은 절로 여여해지리니
夫是之謂無心眞宗 이것을 이른바 무심진종이라 하느니라.
이 노래는 백운선사가 ‘무심가’라는 제목을 붙여서 지은 연작시 전문을 설명의 편의상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 적은 것이다. 한 행의 자수를 4언에서 8언에 걸쳐 거리낌없이 배열하여 한시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무심가를 마무리하는 대단원격인 맨 끝 행의 8언을 제외해 놓고 보면, 불규칙적인 가운데에도 부분적으로 어떤 규칙성도 지니고 있다.
먼저 절구 형식의 4행씩 묶어 그 詩語를 배열하면 ①의 시: 4․7․4․7, ②의 시: 6․4․6․4, ③의 시: 4․6․4․6, ④의 시: 7․7․6․6, ⑤의 시: 7․7․5․5+8언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①에서 ③까지의 시는 제1․2행 對 제3․4행이 내용과 字數에서 對偶를 이루고 있다. 단락별로 중심 제재를 찾아보면, ① : 白雲․流水, ② : 水․雲, ③ : 萬物․惟人, ④ : 人心, ⑤ : 心이 될 것이다. 백운선사가 무심가를 지을 때 무엇 때문에 시어의 자수를 위와 같이 배열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백운선사는 자기의 법호인 ‘白雲’을 시의 소재로 사용하여 흰구름의 깨끗함과 무애함을 흐르는 물의 유연성과 연결시키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룬 무심의 경지를 첫째․둘째 시에서 노래하고 있다. 이어서 만물 그 자체는 본래 고요하여 아무 말이 없는데 사람들이 오욕칠정으로 보고 느낀 것을 분별하는 행위가 무심의 경지에서 보면 부질없음을 셋째․넷째 시에서 형상화하였다. 마지막 시에서는 범부중생을 상징하는 愚人과 도를 터득한 智者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는 각각 다른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어떠한 경계에서도 흔들림 없이 如如한 그 마음의 세계가 바로 무심진종이라는 것을 맑은 심경으로 노래 부르고 있다.
다음은 ‘居山’이라는 제목하에 7언절구로 쳐서 25수에 해당하는 시 중에서, 무심의 경지를 노래한 작품을 골라 본 것이다.
‘居山’
一念不生全體現 한 생각 일으키지 않으면 전체가 나타나나니
此體如何得喩齊 이 본체를 어떻게 비유로 말할 수 있으랴
透水月華虛可見 물에 비친 달빛은 비어도 볼 수 있는데
無心鑑象照常空 무심이란 거울은 비추어도 항상 공적하네.
孤山山下好養身 고산이라는 산 아래는 살기 좋은 곳
米賤柴多足四隣 쌀과 땔나무 흔하고 이웃이 많은데
無心野老機關少 무심한 촌늙은이 뛰어난 수단이 적어
家火從他乞與人 빌려온 집안의 불씨를 남에게 주네.
두 편에 모두 ‘무심’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백운선사의 무심한 禪的 경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는 법어를 통해서도 이 시와 서로 통하는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
佛法의 지극한 이치는 허공처럼 원만하여 조금도 모자라거나 더함도 없으며, 본래 원만히 이루어져 온갖 사물이 형성되고 나타나 마치 푸른 산․맑은 물․밝은 달․맑은 바람과 같은 것이다.
‘居山’이 시의 제목이므로 시인의 위치는 산이 되겠다. 도를 깨달은 선승들은 우리들처럼 깨어 있어도 생각을 비울 수 있다고 한다. 실은 화두라는 것도 흩어진 생각을 한곳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요리조리 ‘좋다 나쁘다 푸르다 붉다’ 하는 온갖 사량분별을 딱 멈추고 나면, 존재의 실상이 거울에 비치듯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가르침이 첫째 시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轉句는 시공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진리의 근원적 세계에로의 환원을 의미하며, 結句는 현상계 안에 내재된 깨달음의 세계는 색즉시공의 도리와 통한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이 시에는 존재와 본질에 대한 백운선사의 탕탕하고 걸림 없는 무심의 경지가 푸른 하늘처럼 해맑게 투영되어 있다.
두 번째 시는 山居의 한가로움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라 하겠다. 도를 누리는 선승이기에 산이 더 살기 좋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제2행에서 이웃이 많다는 표현은 속세와 같은 이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푸른 숲과 산새들, 시냇물과 바위들, 흰구름과 산안개가 모두 이웃과 같은 존재이므로 ‘많다’는 표현을 쓴 것이라 생각된다. 제3행에서 무심한 촌늙은이 ‘수단이 적다’는 표현은 욕심이 없음을 상징한다. 성냥이 없던 시절 부엌 아궁이에 다독다독 묻어 두어야 할 불씨를 남에게 준다는 내용이 마지막 행의 표면적 뜻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이 행위에 시인의 깊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보인다. 시에서 불씨를 빌려 와서 남에게 주는 행위의 주체자는 시의 화자, 즉 백운선사 자신이다. 불씨는 무슨 물건처럼 나누어 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빌려 왔더라도 내가 살려 놓고 얼마든지 남에게 줄 수 있는 성질의 물건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백운선사가 인간 생활에 필요한 불씨를 빌려 오는 행위는 상구보리에 대응시키고, 불씨를 남에게 주는 행위를 하화중생의 교화활동으로 대응시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욕심도 분별심도 없는 순수심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행위는 선사의 걸림 없는 禪心의 세계에서 우러난 행위이므로, 이것은 무심한 閑道人의 경지를 노래한 시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居山’
推眞眞無體 진리는 찾아보아도 진리의 본체가 없고
窮妄妄無蹤 망상은 궁구해도 망상이라 할 자취가 없네
眞妄了無殊 마침내 진․망이 다르지 않으니
平等同一體 평등하여 하나의 동일체일세.
위의 시는 연작시 ‘居山’ 25수 중 열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시는 범부들이 진리와 망상을 이원적으로 분별하는 착각을 바로잡아 眞․妄이 둘이 아님을 표현하여 양변이 융합된 무심의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경지를 백운선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경전에는 일체의 장애가 곧 최후의 깨달음이요 得念과 失念이 모두 해탈이며, 이루어지고 멸하는 法이 모두 열반이며 지혜와 어리석음이 다 반야라고 하였다. 法界의 지혜로 모든 현상은 허공과 같음을 비추어 보면, 일체 法의 현상은 모두 허망하여 當體가 적멸하고, 적멸하기 때문에 本性은 평등하다 하였느니라.
위에서 법은 도를 말하며, 도는 진리와 같은 말이다. 선에서 깨닫고자 하는 진리는 단일성으로서의 진리, 말하자면 존재, 즉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生起로서의 진리와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존재의 진리란 우리에게 오랫동안 친숙해진 知性의 추론들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경험인 셈이다. 서양 철학의 대부분은 존재와 비존재, 이 두 개념들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다. 도는 그러한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도는 결코 그런 식의 이원론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는 우주 도처에 편재한다. 도는 좌우 어디로든 흐른다. 만물은 도에 의해 조건지어져 있다. 그러나 도는 아무것도 억제하지 않는다. 침묵하며 도는 자신의 의미를 가득 채우지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도는 만물을 양육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만물의 주인은 아니다. 도는 주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는 결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원리가 아니다.
이와 같은 통찰력으로 무심에 도달한 백운선사의 心的 경지는 그대로 그의 선시에도 정신적 바탕을 이루고 있다. 흙탕물이 가라앉으면 맑은 물이 되듯이, 眞․妄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상이 제1․2행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진․망이 둘이 아닌 이치를 알고 나면, 진리와 망상뿐만 아니라 온갖 사물들도 차별성을 드러낸 그대로 평등하여 무심과 진여는 하나의 몸이라는 정신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4. 物我一如의 自然詩
선승들이 흔히 말하는 ‘물아일여’라는 의미는 미혹을 벗어나지 못한 우리들의 사유로서는 완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경지는 이해의 차원이나 관념의 범주에서 논의될 성질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체험을 통하여 자신이 직접 깨달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언어로 말해 보았자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물과 그것을 파악하는 주체로서의 내가 대립하는 둘이 아닌 하나로 되기 위해서는, 불교에서 지향하는 절대평등이나 無我나 無心의 경지에 오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백운선사는 평등을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평등이란 학의 다리를 끊어 오리 다리에 잇는다거나 산을 무너뜨려 골짜기를 메워야 되는 것이 아니다. 이 法이 진리의 자리에 머물러 세간의 모든 현상에 머무르게 되면 곧 일체법의 현실 그대로가 스스로 진실이요, 그 자리가 해탈이며 그대로 적멸인 것이다. 그러므로 노승은 주장자를 보고 다만 주장자라 하는 것이다. 산은 산이며, 물은 물이며, 스님은 스님이요, 속인은 속인일 뿐이다.
선사의 이 법어는 불교의 어떤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을까. 불교에서는 모든 현상에 대한 인식의 주체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 인식의 주체가 무엇인가를 철저히 따지는 입장이 불교의 유식학이다. 空의 바탕이 되고 있는 緣起의 本源은 무엇인가?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眞如一心이라 한다. 일체 중생이 구족하고 있는 이 진여일심은 우주 만유의 본체이며, 이로부터 無盡緣起가 전개된다고 보고 있다. 이 진여일심의 경지에 이르고 보면 모든 차별과 막힘과 얽매임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주객이 있을 수 없고 현상과 본체가 따로 없으므로, 眞俗一如, 物我一如의 경지가 펼쳐진다는 내용이다. 불교의 심오한 자연관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성립된다. 따라서 삼라만상은 진여일심의 작용이기에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나와 동일체인 경지로 접어든다. 이때의 자아는 자연과 일체가 되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무심과 無碍의 경지로 승화되기에 이른다.
산승으로서 일생을 보내고자 했던 백운선사는 자연을 벗삼아 함께 어우러지면서 조화와 걸림 없는 경지에서 물아일여의 세계를 노래한 여러 편의 시를 남기고 있다.
‘居山’
洞中流水如藍染 골짜기 흐르는 물은 쪽빛 같은데
門外靑山畵不成 문밖의 청산은 그림으로 된 것이 아니네
山色水聲全體露 산색과 물소리에 전체가 드러났건만
箇中誰是悟無生 이 중에서 어느 누가 무생을 깨달으리.
山靑靑水綠綠 산은 푸르고 물은 초록색인데
鳥喃喃花蔟蔟 새는 기저귀고 꽃은 우거져 있네
盡是無絃琴上曲 이 모두가 무현금의 곡조이거니
碧眼胡僧看不足 벽안의 호승〔達磨〕도 원만히 보지 못했네.
두 편의 시 모두가 한 폭의 산수화를 대하는 듯이 한적하고 유유자적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자연미는 인간과 대립적인 객관적 대상의 미가 아니다. 무위자연의 도에 순응하고 이를 존숭하는 가운데 체험되는 인간의 미적 감동에 근원을 둔 미이고, 예술미는 그러한 자연미와 인간 사이에 매체 내지 통로로서 존재하게 되므로, 결국 예술미는 자연미와 동일한 것으로 완상되는 것이다.
첫째 시의 제1․2행은 배경을 묘사한 것이며, 제3행은 산색과 물소리가 진리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마지막 행은 이러한 산색과 물소리를 빚어낸 근원적 바탕이 바로 無生의 진리인 줄을 아는 단계에서, 외부의 자연과 시인의 정신 세계가 하나의 합일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뜻을 노래한 구절이다.
둘째 시도 제1․2행에서 시인이 살고 있는 주위의 배경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 禪的인 표현이 집약된 詩語는 ‘無絃琴’이다. 禪家에서는 이 말을 혹은 ‘沒絃琴’이라고도 한다. ‘줄이 없는 거문고’, 이것은 일반 상식이나 상상을 초월한 깨달음의 세계에서 빚어낼 수 있는 오묘한 작용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 말의 유래는 당나라 선불교계에 거사로서 숱한 일화를 남긴 방거사(龐居士)와 당시 선종의 천리마로 일컬어지던 마조 도일선사와의 문답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시에서 푸른 산에 흐르는 맑은 물과 새가 노래하고 꽃이 피는 자연현상이 모두 진리의 세계에서 울려 오는 곡조와 같은 소식이라고 보았다. 제4행의 진의는 달마를 폄하할 뜻은 추호도 없으면서, 오히려 진리의 세계가 현묘함을 강조한 시적 기법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리라 생각된다. 자연 현상에서 무현금의 곡조를 듣는다는 의미는 자연과 백운선사의 禪心이 하나로 어우러져 물아일여의 세계를 이루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주변의 자연 경관을 예리한 禪的 통찰력으로 파악하여 시를 엮어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시도 자연과 詩心이 조화를 이루면서 빚어낸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出州廻山’
去時一溪流水送 갈 때는 어느 시냇물이 보내 주더니
來時滿谷白雲迎 올 때는 골짜기의 흰구름이 맞이하네
一身去來本無意 일신이 가고 오는 일에 본래 뜻이 없건만
二物無情却有情 무정한 두 자연(물․구름)이 도리어 정을 주네.
流水出山無戀志 흐르는 물은 산에서 흘러도 그리워하지 않고
白雲歸洞亦無心 흰구름은 산골짜기를 감돌아도 또한 무심하구나
一身去來如雲水 일신의 가고 오는 일도 물이나 구름 같아
身是重行眼是初 몸은 거듭 다니지만 눈에는 처음 같네.
이 두 편의 시에는 ‘出州廻山’이라는 시제를 붙여 놓았다. 여기서 ‘州’자는 백운선사가 법을 물었던 원나라의 석옥 청공선사가 40년 가까이 머물던 ‘湖州’를 가리킨다. 스승의 곁을 한동안 떠나서 여러 산에 주석하고 있던 선지식들을 두루 순방하려고 호주를 벗어나면서 지은 시라고 보면 되겠다. 禪家에서는 누구나 여름과 겨울 각각 3개월씩 하안거와 동안거를 이수해야 한다. 안거가 해제되면 ‘운수행각’이라 하여, 도가 높은 여러 山의 선지식들을 친견하고 그동안의 공부를 점검하는 萬行을 허용한다. 오랜 전통을 가진 이러한 가풍은 중국에서 정착된 풍습이다.
두 편의 시가 공통적으로 제1․2행에서는 시냇물과 흰구름을 묘사함으로써 한적한 산골의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똑같이 ‘白雲’이라는 시어도 쓰였다. 이 시어는 ‘흰구름’이라는 일반적 의미와 백운선사의 호로서 ‘백운 자신’을 가리키는 두 가지 의미, 곧 重意를 띠고 있다. 시냇물과 구름이 묘한 대조를 이룬 채, 의인화하여 선사의 詩心과 교감하면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돌아가야 한다는 인생의 도리에 투철한 선사들의 정신 세계에서는 흐르는 물이나 흰구름의 처지와 인생행로가 특별히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시에 쓰인 ‘백운’은 그 自性의 空함과 자재함을 나타내면서, 백운선사가 도달한 무심의 경지에서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닌 물아일여의 경지를 시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하고자 한 소재라 하겠다. 그런데 시 두 편에서 공통적으로 제1행과 제2행에는 去時․來時, 流水․白雲, 送․迎, 出山․歸洞, 戀志․無心 등의 시어들이 짝을 지어 對偶를 이루고 있다. 禪家에서 백운을 선시의 소재로 사용하는 예는 흔히 있었던 일이어서 그의 스승이었던 석옥이나 동시대인이었던 태고나 나옹에게도 있었던 일이지만, 특히 景閑은 ‘백운’이라는 법호를 가지고 있었고, 백운을 그의 無心의 表象으로 표현하고 있는 데서 위의 시는 그 의미가 더욱 깊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시는 백운이 고려로 돌아온 뒤에 원나라의 지공에게 지어 보낸 12수의 게송 중에 들어 있는 것이다.
‘又作十二頌呈似’
平常心是道 평상심이 그대로 도일 때는
諸法覿體眞 모든 법은 본체 그대로 진리인 줄 알리라
法法不相到 온갖 진리는 서로 어긋나지 않나니
山山水是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無爲閑道人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에게는
在處無蹤跡 어디 있으나 그 자취가 남지 않네
經行聲色裏 걸어가거나 소리와 사물 속에 있어도
聲色外威儀 소리나 사물을 초월한 위의를 지니노라.
이 시는 평측과 운이 제대로 갖추어지지는 않았으나, 첫 시 제3행의 ‘法法’이라는 쌍성과 제4행의 ‘山山’이라는 첩운을 구사하고 있다. 둘째 시의 제3․4행에서 ‘聲色’이라는 시어가 반복되고 있다. 이 게송은 비록 스승 지공에게 지어 올린 시이지만 진리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으므로 선문답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선문답에서 대답 형식은 ‘무엇은 무엇이다’라는 식의 원리적인 논리로 설명하는 짓은 거의 하지 않는다.
거기에 나타나는 것은 대답하는 그 자체의 전인격적인 禪的 작용이며 法과 人이 일체가 된 하나의 완결된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만큼 질문자 자신에게 있어서도 ‘왜 그것을 묻는가?’ ‘왜 이것을 묻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긴박한 물음을 먼저 자신에게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히 모르는 것만으로 묻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야만 선문답이 사람과 사람, 法과 法의 극도의 긴장을 품은 대결이 된다. 선문답은 一回的이며 고쳐 묻는다거나 고쳐 대답하는 일은 결코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결하는 양자는 그 누구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두 편의 시가 동일하게 제1행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화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제4행은 공히 물아일여의 禪的 경지를 압축한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의 세계에서는 일상생활 그대로를 도의 활용으로 삼는 평상심을 운용하므로 삼라만상 그대로가 진리의 표출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는 내용이 처음 시의 제1․2행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깨달음의 세계에서 진리는 대립을 떠나 원융을 이루므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 그대로 나와 하나가 되어 자연과 시인이 조화를 이루는 정신 세계를 온전히 그려내고 있다.
두 번째 시에서 제2․3․4행은 禪家에서 흔히 말하는 ‘格外道理’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구절이라 생각된다. 이 격외도리는 眞空妙有의 다른 표현인 ‘無’나 ‘空’에 해당하는 경지이다. 禪에서 無 및 텅 비어 있음〔空〕은 어떤 허무주의적 세계 파악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범주들과 개념들을 넘어 이러한 것들에 앞서 놓여 있는 현실성에 대한 최고의 긍정인 것이다. 無에는 무엇보다도 순전히 합리적이고 이원론적인 사유체계의 파괴가 암시되어 있다.
진리를 터득하여 격외도리의 威儀를 누릴 수 있는 無爲의 한가로운 道人은 언제 어느 곳에 머물더라도 아무런 걸림이 없다는 의미가 제1․2행에 표현되어 있다. 걷거나 행동하거나 소리와 사물을 접하더라도, 마치 연꽃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듯이 경계를 초월한 당당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제3․4행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閑道人과 자연에서 빚어내는 聲色은 조화를 이루게 되어 물아일여의 시적 승화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Ⅳ. 맺음말
고려 후기의 선종에서 간화선을 참선의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불교계 전반에도 여러 가지 영향을 주었다. 高僧의 게송이 간화선에서 환영되자 고려 후기의 선승들은 자신들의 어록을 남기거나 정리하는 데에 당시의 교종 승려들보다도 오히려 큰 관심을 두었다. 普照國師․眞覺國師․圓鑑國師 등의 어록이 현존하고 있으며, 太古國師․懶翁王師 등의 어록도 남아 있다.
白雲 景閑禪師는 太古나 懶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원에 가서 임제종 선승들을 만나 교류한 후 돌아왔으나, 당시 儒佛 교체기에 정치 세력 간의 갈등에 관여하지 않고 초연한 태도를 지킨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가 흔히 선시라고 일컫는 것이 선사들의 어록에는 대개 ‘게송’으로 기록되어 있는 노래들이다. ‘게송’은 선사들이 수행을 통하여 터득한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로, 일종의 종교적 아포리즘(Aphorism)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시는 선문답하는 정신적 경지와 일치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 장의 선사상에서 살핀 대로 백운선사는 일체의 번뇌를 벗어나 청정한 마음의 본원을 회복하는 무심․무념을 특히 강조하였으며, 아울러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하는 조사선풍을 선양하고자 평생토록 노력했던 고승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정신이 늘 깨어 있도록 가르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늘 깨어 있음’이란 우리 밖에 있는 것이건 우리 안에 있는 것이건 허구들로부터 벗어남을 일컫는다. 그러기에 ‘여기 지금〔卽今〕’에서의 ‘깨어 있음’이란 더 이상 은폐되어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는, 즉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함을 뜻한다. 이 사실은 너무나 가까이 있어 우리가 끊임없이 지나쳐 버릴 정도이다.
이러한 선사상의 독자적인 성격을 고려하면서 백운의 선시에 대하여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요약 정리하여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째, 스승을 사모한 시에서는 石屋禪師로부터 임제종 법맥을 계승한 정통성을 은근히 강조하면서 깨달음으로 이끌어 준 은혜에 대한 찬양과 수도하던 시절의 회상을 작품의 밑바탕에 깔고서, 스승을 사모하는 마음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石屋과 指空 두 스승에 대한 존경심, 사람들을 교화하여 그 은혜를 갚겠다는 정신, 나아가 스승과 함께 수도하던 시절의 그리운 심정을 담담하고 겸손하게 표현한 시들이 있었다.
둘째, 깨달음으로 이끄는 示法詩에는 출가 수행자의 목적을 상기시키는 한편, 끊임없이 화두를 들어 조속히 깨달음을 성취하여 眞人의 경지를 터득하도록 간절히 촉구하는 작품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깨달음을 완성하고 나면 평상심 그대로 진리를 운용할 수 있다는 내용과 사람들을 교화하여 禪悅을 누리고 있는 자신의 심정을 정갈한 詩語로 형상화하기도 하였다.
셋째, 無心은 백운선사가 평소에 강조한 선의 궁극적 경지였다. 끊임없이 화두를 들어 확철대오를 이룩하지 않으면 大無心地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선종의 철칙이다. 이러한 무심의 경지를 노래한 시에는 眞․妄이 둘이 아닌 경지로 만상의 차별상 그대로가 평등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대하여 그는 탕탕하고 걸림 없는 무심의 禪定을 맑게 투영한 시들을 노래하였다. 나아가 어떠한 경계에도 흔들림이 없으며 현상과 이치가 둘이 아닌 무심의 원융무애하고도 여여한 그 마음의 세계가 바로 無心眞宗이라는 것을 표현한 시들의 의미를 음미하였다.
넷째, 백운선사는 조사선의 바탕 위에서 물아일여의 자연시를 남기고 있다. 산승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예리한 禪的 안목으로 자연 경관을 통찰하여 산색과 물소리 같은 자연과 시인의 정신 세계가 하나의 합일점에서 승화하는 물아일여의 자연을 노래한 시들이 생생한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렇듯 靑山과 구름, 선사의 詩心이 함께 어우러진 淡然하고 寂照한 경지를 생동감 있게 표현한 시들은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백운선사의 모든 선시에 관류하고 있는 사상은 無心․無念의 선사상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육조 혜능선사 이후의 정통 선종 사상과 일치하는 선사상인데, 그는 이를 무심진종이라 부르며 중요시하였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와 같이, 백운선사가 노래한 선시의 문학적 가치는 고려시대 漢詩文學에 선시가 마땅히 포함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인정받는 데 보탬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의 선시 중에는 漢詩에 필요한 압운을 고려하지 않은 작품들도 상당히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가지 형식에 얽매이거나 자질구레한 속박을 물리치는 선사들의 자유분방한 기질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동시대에 활동했던 太古普愚나 懶翁慧勤의 선시가 대체적으로 압운과 평측에 들어맞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유독 백운선사의 시에는 어찌하여 이러한 파격이 많이 나타나는지, 그 까닭을 본 논문에서는 밝혀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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