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黃河문명의 주역은 漢族이 아니다

醉月 2013. 6. 14. 01:30

[도발적 문제제기] 黃河문명의 주역은 漢族이 아니다?

글 : 崔恩亨 前 연합뉴스 부국장 

 

⊙ 黃河문명 외에 長江·遼東에서 古代문명 발견되면서 중국 고대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 요구
⊙ 商(殷)문명은 夷族이 건설, 周는 西戎에 가까워
⊙ 周나라가 商을 멸망시킨 후, 자신의 뿌리 왜곡
⊙ 夷族은 화하족과 동화되거나 동쪽으로 이동, 일부는 계속 황허의 중하류에 거주
⊙ 傅斯年의 ‘夷夏東西說’ 이후, 易華의 ‘夷夏先後說’, 葉文憲의 ‘新夷夏東西說’ 등 夷華관계에 대한
다양한 주장 등장

崔恩亨
⊙ 64세. 조선대 법학과 졸업. 中옌볜대 대학원 석사(동북아 및 고대 조선), 현재 옌볜대 박사과정.
⊙ 연합뉴스 기자, 同 광주전남취재본부장(부국장) 역임.
⊙ 논문: <고죽국 연구> <신패수고> 등.

商나라의 수도였던 殷墟 유적지. 원 안은 商나라 시대의 甲骨文. 상나라를 세운 것이 夷族임을 보여준다.
‘황허(黃河)문명’을 연 주체가 화하족(華夏族 또는 漢族)일까, 아니면 이족(夷族 또는 東夷族)일까?

황허문명은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문명 등과 함께 세계 4대(大)문명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문명은 20세기 중엽까지는 기원전 2000년경 중원(中原)으로 불리는 황허 중·하류와 그 지류(支流)에서 발달한 문명을 말해 왔다.

그러나 창장(長江·揚子江) 중·하류는 물론 랴오둥(遼東)지역에서도 고대(古代) 유적들이 속속 발굴됨에 따라 최근 학자들은 황허-창장문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 문명의 형성기간도 기원전 4000~2000년으로 확대됐다.

종전에는 이 문명을 일궈 낸 주인공이 화하족이라는 것이 통설(通說)이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이 문명의 주역이 이족이거나 아니면 화하족과 이족 공동일 가능성을 시사하는 유물들이 다량 발굴되고, 이를 논증하는 연구 논문이 계속 나오고 있다.

사실 이 같은 유물 발굴과 논문 발표 이전에도 화하족이 황허문명의 주역이라고 하기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었다. 중국의 신화나 전설, 또는 옛 문헌 등을 검토하면 이 문명의 주인공이 오히려 이족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중국 고대사에 웬만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를 연 商나라

황허문명을 일궈 낸 대표적인 왕조는 상(商·殷)나라인데, 이 왕조를 검토하면 이 같은 사실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상나라 때를 ‘대표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왕조 때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甲骨文)이 발명돼 중국의 역사시대가 열렸으며 제기(祭器)와 농기구, 무기 등 정밀한 청동(靑銅)기구가 널리 제작 사용됐기 때문이다.

세계 각처에 나름대로 문명의 발상지가 산재해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문명이 될 수 있는 기준인 청동기의 사용과 독자적인 글자의 발명, 국가의 성립 등을 동시에 만족시켜 주는 문명은 드물다. 중국에서 이에 합당한 시기가 상왕조 때인 것이다.

황허문명의 기간이 앞서 언급한 대로 확대되면서, 왕조를 기준으로 할 때 일반적으로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BC 1만년 전~BC 21세기) 말기와 하·상·주(夏·商·周)시대라 불리는 하왕조(BC 21세기~BC 16세기 초), 상왕조(BC 16세기 초~BC 11세기 중반), 주왕조(BC 11세기 중반~BC 256)까지를 포함하게 됐다.

상과 주왕조 때는 역사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선사(先史)시대인 삼황오제와 하왕조의 역사는 전설로만 존재할 뿐, 이들 시대가 실제 존재했는지 여부나 어떤 민족에 의해 세워졌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따라서 황허 중·하류에 거주하면서 문명을 연 주인공이 어떤 민족이었는지를 증명할 수 있는 때는 역사시대로 접어든 상왕조 때부터일 수밖에 없다. 결국 중원에 상나라를 세운 민족을 사실상 황허문명의 주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상의 문명을 이어받은 다음 왕조인 주나라가 조역(助役)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럼 상나라를 세운 민족은 어떤 민족일까?

각종 고대 문헌에 따르면 상나라는 이족인 자리(子履·湯王)가 세웠다. 20세기 이후 발굴된 갑골문이나 제기 등 유물에서도 이 왕조를 세운 민족은 이족임이 증명됐으며, 현재 이에 대한 반론은 거의 없다. 이는 황허문명의 가장 핵심적인 시기에 중원의 주인은 이족이라는 것을 말한다.

상나라의 첫 도읍지가 상(商)이었으나 수차 도성(수도)을 옮기다 왕조 후기에 은(殷)에 오랫동안 정도(定都)했기 때문에 은 또는 은상(殷商)이라고도 불린다. 상은 도성을 8번 옮겼는데 말기 300여 년간의 수도가 은이었다.

그러면 이제까지 황허문명의 주인공을 화하족으로 보아 온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상왕조 다음인 주왕조 때문이다.

華夏의 의미

주는 중국 서북쪽에서 세력을 얻은 주족이 상왕조의 제후국(諸侯國)이 되었다가 상을 무너뜨리고 중원의 패권(覇權)을 쥐게 됐다. 주왕조는 상왕조의 제후들을 몰아내고 이를 대부분 주족으로 대체했다. 이 제후국들이 자칭 제화(諸華), 제하(諸夏) 등이라고 하면서 오늘날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화하(華夏)라는 말이 나왔다.

주족이 자신들을 제화나 제하로 부른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상의 전(前) 왕조인 하왕조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하왕조를 설립한 우(禹)를 자신들과 같은 서북쪽 출신 민족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제왕세기(帝王世紀》 등은 우를 ‘서강이인(西羌夷人)’으로 기록하고 있다.

실제 주족과 우가 동족(同族)인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족은 스스로를 하왕조와 같은 민족인 화하족이라고 자처하면서 황허문명을 화하족의 것으로 정의해 왔다.

그럼 주족은 어떤 민족이며 하를 계승한 동족이라는 주장이 맞는 걸까?

《시경(詩經)》에 따르면 주족의 시조는 단보(亶父)로 후대에 고공(古公)단보로 높여 불리게 된 사람이다. 그는 희성(姬姓)족의 수령으로 빈(豳·현 陝西省 豳縣)에 거주하던 희성씨족 2000승(二千乘·乘은 수레나 4필의 말이 끄는 戰車 등을 의미)을 이끌고 웨이허(渭河) 유역인 치산(岐山) 남쪽 저우원(周原)으로 이주해 정착했다. 이때부터 주족이라는 말이 생겼다.

또 《사기(史記)》 <주본기(周本記)>와《후한서(後漢書)》 <서강전(西羌傳)> 등에 따르면 단보가 거주지를 옮긴 것은 주변 융족(戎族)과 적족(狄族)의 약탈이 심해 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성(城)과 집, 종묘(宗廟), 궁전을 세우고 토지를 개간하여 농업을 발전시켜 부족(部族) 국가 형태를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단보의 아들 계력(季歷)은 당시 중원의 상왕조 출신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목사(牧師)라는 직책을 맡았다. 계력의 아들 희창(姬昌·周 文王으로 追贈)은 서백(西伯)에 책봉되면서 서백후(西伯侯) 또는 주후(周侯)로 불렸다.

주족은 이같이 계속 세력을 키우다가 희창의 아들 희발(姬發·周 武王) 때 상왕조의 걸왕(傑王)을 죽이고 주왕조 시대를 연 것이다.

정리하면 중원 서쪽 융족의 일파로 추정되는 부족의 수령 단보가 상나라 말기 주원으로 옮겨 정착하면서 주족이라는 이름을 얻은 뒤 점차 세력을 확장해 그의 손자가 상나라를 무너뜨린 것이다.

周族은 中原 부족이 아니었다

商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의 패권을 잡은 周 武王.
주족은 당초 중원 부족이 아니었다는 것이 각종 문헌에 나오는데, 예를 들어 《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에 ‘주의 문왕은 치저우(岐周)에서 낳고 비잉(郢)에서 죽은 서이(西夷)’라고 되어 있다. 치저우는 현 산시(陝西)성 서부 바오지(寶鷄)시 있는 치산(岐山)현이고 비잉은 현 산시성 셴양(咸陽)시 부근이다.

그러나 같은 중원 서쪽 출신이라고 해서 주족과 우가 같은 종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고대 중원 서쪽에는 많은 융(戎)·적(狄)족이 산재해 살았기 때문에 주의 시조가 서쪽에서 유래했다는 것만으로는 우와 같은 족속이 될 수는 없다.

주족과 우의 연결고리를 강화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구전(口傳)되던 전설을 사실대로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 말기 각종 사서(史書)에 주족이 전설시대인 삼황오제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명한 황제(黃帝)의 자손이라는 글이 나타나게 된다. 주족 시조인 단보의 9대 조상이 공유(公劉)이고 공유의 5대조는 후직(后稷)인데, 후직의 아버지가 황제의 손자인 제곡(帝嚳)이라는 기록이다.

《사기》 <주본기>에 후직은 산시성 중남부 일대에 거주하던 부족의 수령으로 제곡의 아들로 소개돼 있으며 후직의 후예(後裔) 공유가 상왕조 초기 부족을 이끌고 산시성 빈(彬·현 咸陽시 彬현)으로 이주하고 공유의 후손 단보가 다시 주원으로 옮겨 주족의 시조가 됐다는 것이다.

이들 기록이 맞다면 단보는 후직의 15대손이고 주 무왕은 후직의 18대손이 된다. 그러나 후직에서 주 무왕 때까지의 기간은 하왕조, 상왕조를 거친 1000년이 넘는 세월인데 18대에 불과하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무왕에서 후직까지와 같은 기간 하·상왕조의 임금은 45명이며 800년이 채 안 되는 주왕조가 41대임을 감안할 때 18대는 300~400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주족의 선대(先代)는 선사(先史)시기여서 구전에 의하다 보니 일부 조상들의 이름이 누락됐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무리하게 주족을 황제의 후손으로 조작했기 때문일 가능성이다. 현재 많은 학자는 이 가운데 조작설을 지지하고 있다.

周와 夏는 同族?

조작 여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후술(後述)하겠지만, 일단 조작이 아니고 주족이 황제의 자손이라면 하나라를 세운 우(禹)와도 동족관계가 성립된다. 우가 황제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이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우의 아버지는 곤(鯀)으로 황제의 손자인 전욱(顓頊)의 아들이다. 곤은 요(堯) 임금에 의해 숭(崇·현 崇山)에 봉해져 치수(治水)를 명령 받았으나 실패해 처형당한 인물이다. 우는 곤의 사업을 이어 받았는데 요임금 다음인 순(舜)임금 때 이를 성공시켰다. 그는 치수 성공으로 순임금으로부터 왕위를 선양(禪讓)받아 중국 최초로 세습왕조인 하를 세웠다.

우는 성이 사(姒), 이름은 문명(文命), 호는 우(禹)로 역사에서 백우(伯禹) 또는 대우(大禹), 하우(夏禹)라고도 불린다. 사(姒)성은 하후(夏后)씨, 유호(有扈)씨, 유남(有男)씨 등 12개 씨족으로 구성됐는데 이 가운데 하후씨 부락의 세력이 가장 커 국명을 ‘하’로 했다고 한다.

이들 관계를 다시 정리하자면 주족의 먼 조상인 후직은 황제의 증손자이고, 하나라를 세운 우는 황제의 고손자이기 때문에 주족은 황제의 자손이자 우와도 동족이라는 것이다(전욱과 제곡은 사촌간, 우는 후직의 6촌 조카뻘이 된다).

이로 인해 주족은 삼황오제 및 우와 동족으로 황허문명의 주인공으로 부각되고 하나라를 이은 민족이자 화하족의 시조가 된 것이다. 이 가운데 이족의 나라인 상왕조 치세기간 600여 년은 화하족의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상족이 뒤에 멸망해 화하족화했다고 간주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무시된 것이다.

華夏族의 조상은 누구인가?

중국인들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黃帝(왼쪽). 계와 후직의 아버지인 제곡(오른쪽).
그러나 이 같은 논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시점이 됐다.

왜냐하면 주족과 황제가 동족이라는 기록은 비록 전설이라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고, 20세기 이후 활발한 고고학적 유물발굴에도 불구하고 주족과 황제를 연결할 수 있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령 주족과 황제가 동족일지라도 황허문명의 핵심인 상왕조가 이족의 나라인 것으로 밝혀진 만큼 어떤 명목으로라도 황허문명이 화하족의 단독 문명이라고 말할 수 없다.

주족이 황제나 우의 동족이라는 기록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은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제곡이 주족의 조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주족의 조상인 후직이 제곡의 아들이라고 기록된 각종 문헌에 상족의 시조 설(契) 역시 제곡의 아들로 되어 있다.

제곡은 원비(元妃)인 강원(姜嫄 또는 姜原)에게서 후직을 낳고 차비(次妃)인 간적(簡狄)에게서 설을, 또 다른 차비인 경도(慶都)에게서 오제(五帝) 중 하나인 요(堯)임금을 낳았다고 한다. 제곡의 아들 3명 중 한 명은 주족, 한 명은 상족의 시조가 되었고 한 명은 임금(帝)이 된 셈이다. 이는 이족과 하족이 형제라는 말이니 전설이라지만 신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이들 문헌에 따르면 후직은 제곡의 친자식이 아닌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제곡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기》 <주본기> 등에 따르면 후직은 순임금이 지어 준 이름으로 그의 당초 이름은 기(棄)인데 제곡의 부인 강원이 들에 나갔다가 거인(巨人)의 큰 발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겨 그 위를 걷자 잉태해 낳은 자식이라고 되어 있다. 강원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고 여겨 아기를 버렸는데 짐승들이 해치지 않고 보호해 다시 거두어 길렀다고 한다. 이름을 ‘버릴 기(棄)’ 자로 한 것은 아버지 없이 낳은 자식으로 버려졌다가 다시 기르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후직이 제곡의 아들이라는 것을 후대에 조작하다 보니 억지스런 이야기가 됐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더욱이 계와 후직의 아버지인 제곡은 이족이어서 이 같은 지적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黃帝는 夷族과 가까워

太昊 복희氏.
제곡은 성이 희(姬), 이름은 준(俊), 호는 고신씨(高辛氏)로 아버지는 교극(蟜极), 조부는 소호(少昊. 玄嚣. 少昊金天氏), 증조부는 황제이다.

제곡은 총명하고 덕행이 높았기 때문에 큰아버지인 전욱(顓頊·황제의 손자)을 도와 많은 공을 세웠으며 이로 인해 신(辛·현 商丘시 高辛진)에 봉해졌다가 전욱이 죽자 제위를 승계받은 인물로 이족의 중요 부족 수령으로 알려졌다. 그의 능(묘)이 현재 가오신(高辛)에 있다고 한다.

또 제곡의 할아버지인 소호와 제곡의 5대조이자 황제의 아버지인 태호(太昊·伏羲氏) 역시 이족으로 기록돼 있다.
백제(白帝)로도 불리는 소호는 궁상(窮桑·현 산둥성 취푸시 북쪽)에서 태어난 이족의 수령으로 취푸(曲阜)시 일대에 도읍을 정했다. 태호의 덕행을 이어 받았다는 평을 받아 소호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또 태호는 (삼황오제 가운데) 삼황의 한 사람으로 염제(炎帝)와 황제의 할아버지로 역시 이족으로 기록돼 있다.

왕칭(王靑·山東大 교수)은 <소호씨천이와 발전적고고학 탐색(少昊氏遷移與發展的考古學探索)>이라는 논문에서 ‘소호씨는 역사 이전 동이인의 중요한 부족으로, 발굴된 도기의 명문(陶文)과 대묘(大墓) 등으로 이 같은 사실이 증명된다.

소호씨(족)는 지금으로부터 5000~4000년 전 시기인 대문구(大汶口)문화 말기부터 용산(龍山)문화 말기까지 끊이지 않은 발전과정을 겪으면서 장대하고 수준 높은 문명을 일궈냈다. … 대문구문화는 대부분 산둥성과 그 부근지대로 동이 소호씨 문화와 부합된다. 소호와 태호는 같은 족에 속한다’(<東岳論叢> 2006년 5월 제27권 제3기 47쪽)고 했다.
위의 내용 등으로 미뤄 황제와 주족과의 관계보다 황제와 이족과의 관계가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周族은 戎과 연관
少昊. 제곡의 할아버지다.
후직이 주족의 조상이 아니라는 논문도 상당히 많다. 웡인타오(翁銀陶)는 <후직은 이족의 농신(后稷,夷人的農神)>(1984년 제3기 福建師大學報)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자오페린(趙沛霖)은 <시경, 시고금연구대세(詩經, 詩古今硏究大勢)>라는 논문에서 ‘후직은 동이인 부족으로 전설상 이족의 농신(農神)인데 후대에 주족이 자신들의 조상신으로 오인했다’(1987년 제5기 河北學刊)고 단정했다.

위와 같은 사실로 미뤄 ‘삼황오제의 전설은 당시 중원에 거주했던 이족의 것인데 1500여 년이 지난 주왕조대에 이르러 주족과 화하족의 공동 전설로 각색된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두 번째로 조작설의 근거가 되는 것은 ‘주족은 선대부터 중원 서북쪽에 거주했던 민족이기 때문에 중원에서 활동했던 하왕조와 연결성이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대만(臺灣)학자 왕밍거(王明珂)는 “문헌에는 희(姬), 강(姜) 두 종족이 융(戎)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고, 주나라 무왕이 북방 청동기 계통에 속하는 청동 칼을 사용했다. 이런 증거에 따르면 상나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주나라가 중심이 되었던 서쪽 땅의 사람들, 즉 ‘서토지인(西土之人)’에는 융이 포함돼 있었다. 심지어 주나라 사람들과 강성족 모두 원래 융일 수도 있다. … 주나라 사람들이 저우원(周原)에 처음 들어갔을 때 강성족과 연합하고 동맹을 맺어 그들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희성 주나라 사람의 이 결맹에 강원(姜嫄)을 최초로 백성을 낳아 준 어머니의 기원으로 여기는 전설에 반영돼 있다. … 희성족과 강성족은 원래 모두 융에서 유래하였다”고 했다.(《中國華夏邊境과 中華民族》 2008년 5월 동북아재단 발행. 王明珂 지음. 이경륭 번역. 309-313쪽)

주족은 원래 융족과 한 갈래여서 중원에서 활동했던 하왕조와 연결점을 발견할 수 없고, 후곡의 어머니이자 제곡의 아내로 알려진 강원조차도 뒤에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禹는 東夷族일 가능성

중국 고대의 전설적 聖王인 禹임금.
세 번째로는 주나라 중기 이전 비교적 앞선 문헌인 《시경》이나 《상서(尙書)》에는 후직이 제곡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주왕조의 건립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시경》 <대아(大雅)>편이나 <생민(生民)>편, 《상서》의 <주서(周書)>편 등에는 주족의 조상이 후직까지는 나와 있으나 제곡에 대한 언급은 없는 것이다. 두정성(杜正勝·前 대만교육부 장관)은 이와 관련해 “비교적 앞선 문헌에서는 상나라와 주나라의 조상기원에 관한 기록에는 제곡의 전설이 안 보인다. 이것은 분명히 주나라 사람들이 전설을 지어내어 자신들이 화하종족 가운데 중요한 지위를 갖고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고 했다.(《先周歷史的新認識》 國立台灣大學歷史學系學報,제16기,1991년)

‘주족이 전설을 조작해 황제는 물론 이족(상왕조)과도 연관이 있는 민족이라는 것을 과시한 것’이라는 풀이다.

‘주족의 조상은 제곡’이라는 것이 조작이라면 주족과 하왕조와 관계는 물론 주족과 황제와의 동족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더욱이 5세기에 편찬된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우(禹)는 동이(東夷)’고 ‘주 문왕은 서강(西羌)’이라고 되어 있다. 우는 주족과 다른 족속일 뿐 아니라 오히려 동이족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고고학적 발굴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 한, 주족이 하왕조 또는 삼황오제와 동족이라는 이야기는 주대에 만들어진 전설로 남을 수밖에 없다.

 

 

 

 


夷는 오랑캐가 아니었다

갑골문 夷자.
여하튼 주왕조 때 만들어진 화하족이 현재의 한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데는 여러 가지 이론(異論)이 있으나 현재 ‘화하족=한족’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고 진위가 어찌됐건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사서에 기록된 전설을 사실로 받아들여 황제를 화하족의 시조로 봐 왔다.

그러나 요즘에는 좀 바뀌어서 황제를 화하족과 동이족의 공동 선조로 보고 황제와 싸웠다는 이족 수령 치우(蚩尤)도 화하족의 선조로 모시고 있어 일부 중국인들마저 혼란을 빚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 허베이(河北)성 줘루(涿鹿)에는 최근 중국인의 조상을 모신 3조당(三祖堂)을 조성해 놓았는데 이곳에 모셔 놓은 3명의 조상은 황제, 염제, 치우인 것 등이 좋은 예이다.

이를 놓고 국내 일부 학자들은 중국의 동북공정 일환으로도 이해하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각종 유물발굴로 화하족의 정통성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만회하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럼 황허문명의 주역 내지는 한 축을 담당한 것으로 인정받아야 할 이족에 대해 알아보자.

이족은 황허 중·하류에 오랫동안 거주한 토착민들을 총칭하는 말로 중원에 먼저 터를 잡았던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이족은 주왕조 이후 동이라며 동쪽 오랑캐를 뜻하게 됐지만 원래는 ‘동(東)’이 붙지 않았었다.

이(夷)는 고대부터 중원에 거주했던 만큼 스스로가 자신들을 동쪽이라든지 오랑캐라는 뜻으로 불렀을 리가 없다. 이족의 뜻이 오랑캐로 변질된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이족의 상왕조가 주족의 주왕조로 바뀌면서이다.

‘이(夷)’를 동서남북의 오랑캐인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의 하나로 사용하다가 후대에서는 아예 동이(東夷), 서이(西夷), 남이(南夷), 북이(北夷) 등으로 화하족 이외의 모든 민족을 낮춰 부르는 대명사로 만들어 버렸다.

‘이’가 당초 오랑캐라는 뜻이 아니었다는 것은 각종 고서나 유물 등의 기록에도 나와 있다. ‘夷’ 자는 갑골문에도 나오는 오래된 문자로 당초 의미는 인(人) 또는 시(尸)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갑골문의 ‘이’는 인(人), 시(尸) 자와 같거나 비슷하며 고대 중국 산둥성을 비롯한 중원에서는 ‘夷’와 ‘人’의 발음이 같았다고 한다. ‘시(尸)’는 제사 때 이를 주관하는 대표자를 뜻했다.

중국 최초의 자전(字典)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夷’를 2가지로 해석했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大와 弓의 합체이다. 큰 활을 쓰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또 하나는 一, 人, 弓 3자의 합체로 활을 멘 사람(一人負弓)으로도 해석했다. 모두 활을 잘 다루는 민족임을 나타낸다.

이(夷)는 또 ‘반듯하다’, ‘평탄하다’는 뜻도 있는데 큰 활에서 쏜 화살과 같이 반듯이 나아가는 것에서 나왔다 한다.

또 이(夷)가 살았던 지역이 강 중·하류로 살기 좋고 농사짓기 좋은 평탄한 지역이어서 평탄, 평화, 태평이라는 뜻도 있었다. 《신당서(新唐書)》 <이석전(李石傳)>에 태평한 시절을 ‘이세(夷世=太平之世)’, 평화로운 통일을 ‘이일(夷一=太平統一)’이라고 했다.

이들 글자의 뜻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이(夷)는 본래 황허 중·하류에 평탄한 곳(평야지대)에 거주했던 민족으로 활을 잘 다루고 제사를 성대히 거행하며 조상을 공경했던 풍습을 가진 평화롭고 예절바른 사람들의 부족을 형상화한 글자임을 알 수 있다.

이족이 중원의 선주민으로 가장 먼저 황허문명을 연 위대한 민족이라는 것이 최근의 고고학 발굴과 고대사 연구에 의해서 보다 분명해지고 있다.

중국 《신화통신》의 인터넷판 신화왕(新華網)이 2009년 9월 24일자 《중국문화보(中國文化報)》를 인용한 <동이족 문화족적을 찾아서(推尋東夷族的文化足跡)>라는 제목의 보도가 이 같은 사실을 잘 표현했다. 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東夷族에 대한 중국의 再평가

浙江省 良渚에서 출토된 옥기(왼쪽)와 도기(오른쪽).
<최근 수년간 동이족의 창조적이고 빛나는 문화는 전문가들에 의해 부단히 제시되고 있으며 중화민족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는 동이족의 족적을 찾는 것이 필수다. … 동이족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수령은 태호, 치우, 소호. 대순(순임금) 등이 있다. ….

최근 1세기 동안 고고학적 발굴로 전통인식이 크게 바뀌었는데 8300년 전의 산둥 후이문화(后李文化)를 시작으로 약 7300년 전의 북신(北辛)문화, 약 6500년 전의 대문구(大汶口)문화, 약 5000년 전의 삼리하(三里河)문화, 약 4500년 전의 용산(龍山)문화, 약 3900년 전 악석(岳石)문화 등이 모두가 동이인(東夷人)이 창출한 계단적 문화로 밝혀졌다.

또 1973~1978년 발굴한 창장 하류의 7000~5000년 전 추정 하모도(河姆渡)문화에서 발굴된 2구의 두개골도 황허 유역민과 동족으로 보이는 남방몽골인종으로 분석됐다. 이에 앞서 발굴된 항저우(杭州) 주변 창장 하류 타이후(太湖)지구에서 발견된 저장(浙江)성 양저(良渚)문화는 지금으로부터 5300~4200년 전의 것으로 출토된 옥기나 도기류로 볼 때 치우(蚩尤), 방풍씨(防風氏), 우민국(羽民國) 등 부족(이족) 시기와 일치한다.>

특히 이 기사에 나오는 치우는 황제와, 방풍은 우(禹)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어서 이족이 오래전부터 중원의 주인임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이 기사 중 ‘후이문화’는 황허문명 중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주거지와 도기(陶器) 등이 발견됐으며 이족의 것임이 확인됐다. 특히 가마터를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결과 8500년에서 74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져 ‘중국 최초의 가마(中華第一窯)’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周건국 이후에도 명맥 유지

이족은 고대는 물론 서융족인 우왕이 세운 하나라나 주족이 세운 주나라에 중원의 주도권을 빼앗긴 뒤 일부는 하족과 동화되고 일부는 중원 동쪽이나 랴오둥 등으로 쫓겨났지만 일부는 계속 황허의 중·하류에서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어 하나라 때 이족 유궁씨(有窮氏)족의 수령이자 유궁국의 군주인 후예(后羿)가 하나라 5대왕인 상(相)을 몰아내고 6대 왕위에 올랐으며 후예의 가신인 한착(寒浞)이 7대왕에 오르는 등 이족이 60여 년간 하나라의 왕(天子)을 차지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 주나라 때는 상왕조의 후예 무경(武庚)이 포고(蒲姑), 상엄(商奄), 서융(徐戎), 회이(淮夷 ) 등의 동이국가 지지하에 반란을 일으켰다. 주는 수년간 고전 끝에 이를 평정해 무경을 죽이고 포고의 땅은 제후국 제(齊)를, 상엄의 땅에는 노(魯)를 세웠으나 서융과 회이는 끝내 정복하지 못해 화수유역에 상당기간 독립적 지위를 계속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특히 이 기록에 나온 서융은 주나라가 얕잡아 부른 명칭으로 사실은 서국(徐國)을 가리키며, 서국은 중국 역사상 가장 긴 44대 군왕 1649년을 이어간 제후국이었다. 우를 도와 치수한 공이 있는 백익(伯益)의 아들인 약목(若木)이 세운 나라로 하나라와 상나라에 이어 주나라 후기인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했다.

발굴된 춘추시대 동기(銅器)와 명문(銘文)에는 서국 왕이 주왕에 맞서 동등한 왕을 칭했다는 기록과 함께 각종 문물도 주왕조의 것과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발달돼 있었다고 한다.

중국 동부지역에는 서국 외에 래국(萊國) 등 다른 이족 제후국도 오랫동안 존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족은 중국의 문명이 시작된 때부터 주나라 때 까지 수천 년간 명맥을 이어 가면서 발전하던 민족임을 알 수 있다.

傅斯年의 ‘夷夏東西說’

《夷夏東西說》을 주장한 푸쓰녠.
이족이 황허문명의 주역 중 하나임을 사실상 인정한 첫 논문은 중국학자 푸쓰녠(傅斯年・1896~1950)이 1933년 발표한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이다.

푸쓰녠은 베이징(北京)대학 총장대리와 타이완대학 총장 등을 역임한 중국의 저명한 사학자로 그는 이 논문에서 중국문명을 일으킨 민족은 중국 동쪽에 거주했던 이족과 서쪽에 거주했던 하족에 의한 것임을 주장했다.

그는 “은상(銀商)과 서주시기 지금의 산둥성과 허난(河南)성 동부, 장쑤(江蘇)성 북부, 안후이(安徽)성 북쪽, 허베이(河北)성 해안, 랴오둥(遼東)과 조선(朝鮮)의 양안(兩岸)에 거주하던 태호와 소호, 제(濟)와 서(徐)부족, 풍(風) 잉(盈), 언(偃) 성씨 등이 모두 이(夷)다”며 “이족이 중원 서쪽에 거주하던 하족과 수차 투쟁하고 융합하면서 중국의 문명을 열었다”고 밝혔다.

그는 중국의 지형을 크게 동평원구(東平原區)와 서고지계(西高地系)로 나누고 경제적·문화적 발전 여건이 좋은 동평원구에서 이(夷)와 은(殷)이 성립되고, 지형상 무력이 강한(싸움이 잦았던) 서고지계에서 하(夏)와 주(周)가 성립되어 이하(夷夏) 간의 대립구도가 형성되었음을 주장했다.

그는 또 상(商)을 고조선과 같은 계통으로 보았으며 고구려 등의 고대 한반도까지를 고대 동이족의 범주에 넣었고 상이 망한 후 기자(箕子)가 고조선으로 향한 것을 ‘선왕이 살던 곳을 좇은 것(從先王居)’이라고 판단해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임금이 되고 개화시켰다는 중국사학계의 정설도 부인했다.

푸쓰녠이 이 같은 주장을 한 근거는 무엇일까?

그가 논문을 발표한 시점은 대대적인 고대유적지 발굴을 시행하면서 중국 한자의 원형이 이족이 세운 상나라 때 만들어진 문자이고 중원의 선주민이 이족임을 증명하는 유물이 속속 밝혀지는 시기였다.

특히 그의 논문이 발표되기 5년 전인 1928년에 상나라의 19대 왕 반경(盤庚)에서 마지막 왕인 제신(帝辛·紂王) 때까지(BC 1324~1065) 상의 도읍이었던 은(殷)에서 대량 발굴된 유물에는 세계 고고학상 최대 발굴의 하나인 갑골문이 포함돼 있었다.

夷夏先後說의 등장

은허로 불리는 이 유적지는 왕궁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1200m²의 집터와 유적지가 있는데, 그 안에 있는 700여 개의 땅굴에서 3만여 조각의 갑골문이 나왔다. 60여 명이나 순장된 큰 묘도 발견되었다.

또 황허 상류를 중심으로 ‘양소문화’(BC 5000~BC 2000)가, 황허 중·하류에서 ‘용산문화’(BC 3000~BC 1500)가 발굴되었는데 푸쓰녠은 양소문화는 화하, 용산문화는 동이의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발굴이 계속되면서 ‘양소문화’ 상층에서 ‘용산문화’가 발견되면서 이 같은 가설은 부정돼 현재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하동서설>은 문명의 주역이 화하족만이라는 통설을 뒤엎는 일대 사건으로 하-주 중심의 정통 역사관을 비판하고 주변 세력으로 간주되던 이(夷)의 존재와 역할을 새롭게 제기해 황허문명 중심론에서 다원주의적 중국문명론으로 옮겨 가는 현실을 처음으로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후 중국의 역사, 신화, 고고학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근에도 <이하동서설>을 잇는 논문이 속속 발표됐는데 이화(易華·中國社科院民族學與人類學所 硏究員)의 <이하선후설(夷夏先後說)>과 예원셴(葉文憲·蘇州科技學院 교수)의 <신이하동서설(新夷夏東西說)> 등이 그것이다.

<이하선후설>은 ‘역사와 전설 등으로 하왕조 이전 동아시아는 이족(夷族)과 만족(蠻族)의 땅이었다. 우(禹)는 동이와 서이 가운데 하왕조를 세웠다. 고고학 발굴과 연구로 하왕조 이전은 유목과 농경의 구분이 아직 없었으며 이족이 동아시아 신석기 정주농경문화를 창조했다. 하족은 청동기 유목문화를 들여와 이와 하가 결합해 중국역사를 창조해 독특한 동아시아문화전통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夷夏先後說> 2012.2 民族出版社 부록 ‘靑銅時代世界體系中的中國’)

<신이하동서설>은 ‘동이는 산둥지역을 중심으로 대문구문화나 용산문화 등으로 찬란한 문명을 일궜다. 이후 하왕조 때 지금의 기노예완지구(冀魯豫皖地區)의 서쪽은 하족이, 동남북은 동이족(동쪽은 東夷, 북쪽은 商族, 남쪽은 淮夷)이 거주했는데 하족은 회이(淮夷)와 혼인연맹 관계였고 동이와 상족은 밀접한 관계였다. 이족과 화하족은 대립적 관계를 지속하다가 화하족이 대거 동쪽으로 진입해 동이족은 축출되거나 화하족과 융합돼 동이문화는 소멸하게 됐다’는 것이다.(蘇州科技學院 발행 《中國史硏究》 2002년 3기 ‘新夷夏東西說’)

기로예완(冀魯豫皖)은 허베이(河北), 산둥(山東), 허난(河南), 안후이(安徽) 등 중국 4개성의 간칭(簡稱)이다.

<이하선후설>에 따르면 중국문명은 선주민인 이족이 먼저 이룩하고 후에 청동기를 가지고 진입한 하족과 함께 뒤를 이었다. <신이하동서설>은 이족이 선주민이지만 이족과 화하족이 동과 서에서 서로 다투고 융합하면서 중원문명을 이뤘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들 논리의 공통점은 문명의 주역이 화하족만의 것이 아니라 이족과 화하족 공동의 산물이라는 것으로 전환,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장 핵심적인 문자발명과 청동기 사용, 고대국가 성립 등을 이룬 상족과 이족에 대한 기여 가중치를 주지 않은 평가에 그쳐 화하족 우선의 편향성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볼 수 없다.

중국의 인터넷 <위키백과>에 동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해 놓고 있다.

‘동이문화는 진(秦)나라 이전 중국의 가장 오래된 문명의 하나다. 동이문명은 많은 방면에 중원문명과 쌍벽을 이뤘다. 동이인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 활과 화살, 예제(禮制)와 금속을 발명, 사용한 민족이다’

이 글은 이족이 문자, 예법, 금속 등을 발명한 민족이라고 하면서도 중원민족은 아니라는 것을 강력히 시사한다.

황허문명은 황허 중·하류 중국 중원에서 발생한 문명인데 이족의 문명이 중원과 관계가 없다면 과연 중원문명은 무엇을 발명한 문명이란 말인가? 그리고 문자나 예법, 금속을 발명한 찬란한 이족문명의 이름은 무엇이란 말인가? 윗글은 짧지만 현재 중국인들의 역사 편견을 단편적으로나마 확실히 보여준다. 편향적인 시각은 문장의 이율배반성조차 눈치채지 못하게 한 것 같다.

우리 스스로를 동이족이라 부르지 말자

결론적으로 말하면, ‘황허-창장문명은 이들 강의 중·하류에 먼저 터를 잡은 이족에 의해 시작돼 전설의 삼황오제 시대와 상왕조 시대까지 계속되다가 상왕조 뒤를 이은 화하족의 주왕조 때로 이어져 발전했다’는 가설을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이(夷)는 오랜 황허문명의 역사에서 비하되고 잊혀 왔다고 볼 수 있다. 단 삼황오제와 상왕조 중간에 있는 하왕조 시대의 주인공이 범(汎) 동이족인지 아니면 범서융족인지와, 하왕조와 화하족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는 꼭 밝혀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런 근거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동이족으로 부르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 동이족으로 부르지 말아야 하는 데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는 앞서 언급한 대로 ‘이’라는 글자가 당초와는 달리 오랑캐라는 뜻으로 변질돼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마을에 살고 있는 힘센 사람인 갑(甲)이 같은 마을에 사는 을(乙)에 대해 ‘못난 놈’이라고 말하고 다닌다고 해서 을도 스스로 “내가 ‘못난 놈’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동이로 부르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우리를 포함해 이족으로 불리는 민족은 중원 문명의 주역이었기 때문에 비칭을 계속 사용한다면 선조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다.

실제 우리가 오랑캐라 할지라도 스스로 오랑캐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일 뿐 아니라 우스운 일이기도 하다. 이 같은 잘못은 시정되어야 하기 때문에 필자는 이제까지의 글에서 애써 ‘동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피했다.

사실 ‘이’라는 종족의 개념을 어디에 둘 것이며 고대 중국의 이족과 동이족으로 불리는 우리가 같은 종족인지 등에 대해 아직 정확히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화하족이나 한족 역시 그 명칭과 근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역시 학문적으로 논란이 있다.

그렇지만 중국 한족이 화하족이고 우리들은 조선족이고 동이족이라는 보편적 명칭이 사용되고 있는 현실에서 비칭어(卑稱語) ‘동이’라는 단어를 꼭 써야 하는지 의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또는 ‘이족’으로 ‘동(東)’자를 빼거나 ‘동북아족’ 등으로 명칭을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민정_조선유학에 오늘을 묻다_02  (0) 2013.06.21
율곡_易數策  (0) 2013.06.19
백민정_조선유학에 오늘을 묻다_01  (0) 2013.06.11
정도전을 위한 변명  (0) 2013.06.10
도가 잡용(道家雜用)   (0) 2013.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