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정도전을 위한 변명

醉月 2013. 6. 10. 01:30

최후의 날      

정도전은 비굴했나  

 

 

1398년 태조 7년 음력 8월 26일의 '태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봉화백 정도전, 의성군 남은 및 부성군 심효생 등이 여러 왕자들을 해치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처단 되었다.' 조선에 유교이상사회를 건설할 야망으로 평생을 분투했던 정도전은 이날 56세의 한 창 나이에 이방원에게 목이 잘려 비참하게 죽었다. 집안도 풍비박산이 나, 네 아들 중  유와 영은 아버지를 구하러 가다가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죽음을 당했고, 담은 아버지와 형제들이 비명횡사 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조용히 자결했다.  

 

1498년 8월 26일, 만 하루 동안의 기록   이 날 정도전이 뒤집어쓴  죄목은 반란예비음모죄였다. '태조실록'은  그의 혐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방석(세자)과 이제(이성계의 사위)를 비롯하여 친군의 도진무사(도성수비대)박위,  좌부승 지(원수를 보좌하는 참모장격) 노석주, 우부승지(오늘날의 청와대  비서관격) 변중량이 대궐 안에서 임금의 병이 위급하다며 왕자들을 불러들이면 내노비들과 갑사들이 공격을 하고  정 도전과 남은 등이 밖에서 응하기로  했다. 이들은 기사일(8월 26일)에 거사하자고  약속하였 다."   즉 정도전 등이 어린 세자를 끼고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 들을 제거하는 친위쿠데타를 음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8월 26일 밤, '반란세력'이라 던 정도전이 무방비상태에서 이방원에게 기습당했음이 '태조실록'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밤이 2경(밤 10시-12시)이 되어 송현마루(지금의 한국일보 앞길)를 지나다가 이숙번의 말 을 달려오면서 이 작은 골목 안이 바로 남은의 첩의 집이라고 말했다. 정안군(이방원)이 말 을 멈춰 세우고 먼저 10여명을 시켜 집을 포위하게 했다. 그 집  문밖에는 말 몇 마리가 안 장을 풀지 않은 채로 매어 있었으며 종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정도전과 남은 등은 등불을 켜놓고 모여 앉아서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숙번은 그 옆집 서너 곳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 정도전 등은 모두 도망쳐 숨어버리고 심효생, 이근, 장지화 등은 잡혀서 죽었다.'   반란세력 치고는 너무나 싱겁게 제압당한 셈이다. 무장병력이 그들을 지키고 있었다는 기록도 없다. 더구나 이 날은 반란세력의 거사일 이었다는 것이다. 반란세력이 거사 당일에 무 방비상태로 그 구성원의 '첩의 집에 모여 앉아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은  상식적으 로 납득하기 어렵다.   정도전의 집은 송현방에서 지척인 수진방, 즉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 종로구청 자리에 있었다.

 

오늘날의 참모총장 격인 삼군부 판사를 지낸 정도전이니 호위군사를 대동할 만했건만 집에서 너무 가까운 거리라 말구종만 달랑 데리고 갔다가 화를 당한 것이다. 정말 정도전이 반란세력의 수괴였다다면 거사 당일에 호위병 하나 없이 나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옆집으로 피신했다가 붙잡혀 죽은 정도전의  최후에 대한 '태조실록'의 기록은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정도전은 안방에 숨어 있다가 소근(이방원의 종)등이 밖으로 나오라고 호통을 치자 짤막 한 칼을 손에 쥔 채 걷지도 못하고 벌벌 기어나왔다.  칼을 놓으라고 소리치니 도전은 칼을 내동댕이치고 문으로 나오면서 '죽이지 말라, 한마디만 하고 죽게 해달라'고  했다.

 

끌려나와 정안군의 말 앞에 이른 도전은 '옛날에도 공이 나를  살려주었으니 오늘도 살려주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옛날이라고 하는 것은 임신년(고려말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에게 반격을 가해 정도전이 처형당하게 되었을 때, 마침 이방원이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격살하여 살아난 사건 을 뜻함)을 가리켜서 사는 말이었다. 정안군은 말하기를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고서도 그래도 부족한 것이 있느냐, 왜 이리 악행을 저지르느냐'하고는 목을 베어 죽이라고 하였다."   이 긴박한 상황에 왕조실록의 기록원인  사관이 현장취재를 하고 있었을리  없다. 동원된 사병들을 제외하면 오직 이방원만이 훗날 사관들에게 그 순간을 묘사하여 전할 만한 위치에 있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역사로부터 영원히 매장하고자  결심했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역사를 곡필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살아남은 자만이 역사를 기록할 특권을 갖기 때문이다.  역사에 남김 마지막 대사, 자조   그러나 여기 정도전의 취후를 전혀 달리 해석하게 하는 한  편의 시가 전해온다. 시에 나 타난 정황으로 보아, 다시 못 올 길을 떠나게 된 정도전이 세상을 버리기 직전 마지막 남긴 시로 여기고 읽으면 그럴법하다.

 

현대인들이  수첩과 필기구를 항시 몸에  지니고 다니듯이 필묵을 휴대하는 것은 옛 선비들의 기본이었다. 정도전은 자기의  분신 같은 필묵으로 역사 라는 무대에 남길 마지막 대사를 정리했을지 모른다. 이 시는 '삼봉집'에 수록되어 있다.  

양조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력을 다 기울여

서책에 담긴 성현의 참 교훈을 저버리지 않고 떳떳이 살아왔소

삼십 년 긴 세월 온갖 고난 다 겪으면서

쉬지 않고 이룩한 공업 송현방 정자에서

한 잔 술 나누는 새 다 허가가 되었구나    

 

이 시의 제목은 '자조'다. 자조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비웃는다는 말이다. 죽음의 순간 에 자신을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삶과 죽음을 초탈한 자다. 공맹의 옛 성현들이 그려 낸 아름다운 이상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삼십 년을 하루같이 쉬지않고 달려 온 정도전이었다. 그 삼십 년 공업이 하룻밤의 방심으로 무너지고 말았으니 어찌 미련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역사에 남긴 마지막 대사에는 억지로 자기를 분칠하는 바도 없고, 억울하다고 몸 부림치는 바도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없다. 그저 씁쓰레한 웃음이 있을 뿐이다.   정도전은 인간에게 죽음이 있다는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던  사람이다. 30대 시절 나주 유배지에서 정도전은 그 지방의 정침이라는 선비가 왜구에 대항하여 홀로 저항하다 죽은 사연을 듣고 깊이 감동하여 글을 남긴 적이 있다.  

 

"아! 죽고 사는 것은 진실로 큰 일이다. 그러나 사람  중에 이따금 죽음 보기를(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자가 있는데 이는 의리와 명예를  위해서다. 저 자중하는 선비들이 그 의리가 죽을 만한 곳을 당하면 아무리 끓는 가마솥이 앞에 있고, 칼과 톱이 뒤에 설치되었으며, 화살과 돌이 위에서 쏟아지고, 흰 칼날이 아래에 서리고 있을지라도 거기에  부딪치 기를 사양하지 아니하고 내딛기를 피하려 하지 않는 것은 어찌 의를 중하게 여기고 죽음을 가볍게 여김이 아니겠는가......

 

아! 사람이 정말 죽음이 없다면 사람의 도리는 벌써 없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적이 항복하기를 협박할 때에 충신이 죽음이  아니라면 어떻게 충의를 보전 하겠으며, 강포한 자가 핍박할 적에 열녀가 죽음이 아니라면 어떻게 정조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난처한 사태를 당하여 바른 길을 잃지 않는 것은 다행히도 한 번의 죽음이 있 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이 글에서, 왜구의 노예와 첩과 첩자가  된 양반 자제들을 비판하며 '그들의 소 위는 개돼지만 못한데도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은 다름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일침했다. 양반 자제란 곧 선비요, 지식인이요,  사회지도층이다. 정도전이 생각 하기에 선비란 의리에 살고 선비의 삶은 당당한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고 보는 것이 그의 신 념이었다. 의리가 없는 선비, 비겁한 지식인, 의무를 저버리는 지도층은 인간답게 사는 길을 포기했으니 금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 신념이  얼했을진대 그가 선비로서의 최후를 어떻게 마쳤을지 생각해볼 일이다.      

 

변란 현장의 재현    

운명의 8월 26일 저녁부터 다음날 저녁까지  이어진 변란에 대한 기록은 만 하루  동안의 실록기사로는 가장 길고 자세하다. 이 날의 일을 기록한  실록을 여기저기 들춰보면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정도전 변란설의 빈약한 시나리오  

'태조실록'에 의하면 1398년 8월 26일 밤 이성계는 일시적으로 건강이 악화돼 거동을 못하고 누워 있는 상태였으며, 이방원을 비롯한 이방의, 이방간  등 왕자들과 임금의 동생 이화, 사위 이제 등은 근정전 문밖 서쪽 채에 모여 밤을 지새며 임금의 병환을 살피기로 했다.   거사는 이방원의 아내 민씨로부터 시작되었다. 남편 못지 않게 담대한 심장으로 대권가도의 이방원을 측근에서 도왔던 민씨는 이날 저녁 가슴앓이를 한다는 거짓 구실로 대궐에 있던 이방원을 급히 불러내 동생 민무질과 3자비밀회동을 하였다.  

 

쿠데타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은 정확한 시기포착이다. 아내 민씨가 이방원을 그 처럼 급박하게 불러낸 이유는 쿠데타의 시기포착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보 제공자는 역시 쿠데타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민씨의 동생 민무질이고, 그 내용은 정도전이 무방비상태에서 남은을 비롯한 핵심측근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장소를 알아냈다는 급보였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이방원은 민씨의 또 다른 동생인 처남 민무구 에게 지시하여 안산군수 이숙번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자기 집 앞에 있는 신극례의 집에서 대기하도록 하였다. 안산군수 이숙번은 이미 이방원의 측근인  하륜을 통해 거사에 협조하기로 약조한 인물이었다.   소수의 이방원 세력이 다수의 관군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의표를 찌르는 기습이 필요했다. 병력동원 지시를 마치고 돌아온 이방원은 대궐 서쪽 채에서 잘 것처럼 채비를 차리다가 돌연 다른 왕자들과 함께 대궐을 빠져나와 거사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 대해 실록에서는 남은 등이 왕자들을 유인해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왕자들이 이를 피해 대궐에서 탈출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태조의 병이  심하니 왕자들은 들어오라는 전갈이 전해진 후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규례대로라면 대궐의 여러 문에 밤마다 횃불을 켜놓아야 하는데 이날 따라 대궐문에 횃불이 없어서 더욱 의심이 들었다.

 

이화와 이제, 심종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정안군은 배가 아프다고 하면서 서쪽 채 문밖에 있는 뒷간에 들어가 앉아서 한참 동안이나 생각하고 있었다. 익안군(방의), 희안군(방간) 등이 달려와서 정안군을 연이어 부르니 정안군은 '형님들이 왜 이렇게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인가' 하면서 일어나더니 양쪽 팔소매를 탁 탁 치고 혼잣말로 '형편이 어쩔 수 없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곧 말을 타고 대궐 서쪽문으로 나가자 익안군, 희안군, 상당군(이백경)이 모두 뛰쳐나왔다. 그러나 오직 상당군만  정안군의 말을 따라잡았으며 익안군과 희안군은 넘어지기도 하고 엎어지기도 하였다."   이 대목은 이방원이 정도전의 변란음모를 눈치채고 탈출하는 장면으로서 사료적으로 대단 히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 정도전이 변란을 일으켰다는 정황증거는  '불꺼진 횃불' 이외에 정도전 변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부왕을 간병하던 왕자들이 졸지에 무기를 들고  나와 사병을 이끌고 변란을 일으킨  것은 누구도 예측 못한 기만전술이었다. 대궐을 빠져 나온 이방원은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비롯해 이거이, 조영무 등 측근들과 함께 사병해산을 위해 숨겨뒀던  기병 10명, 보병 9명, 몽둥이를 든 하인 10명 등 총 29명의 초동부대를 모아  민씨가 몰래 감춰둔 병장기를 나눠줬다. 여기에 순번에 따라 정릉 경비대로 파견나와 있던 안산군수 이숙번의 정규군이 결합하였다.

 

군호를 '산성'으로 정한 이방원 세력은 맨 먼저 오늘날의 국방부 격인 광화문의  의흥삼군부 청사(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북쪽)를 장악함으로써 관군의 명령계통을 마비시켰다. 이어 군기 감을 점령해 사병들을 무기와 갑옷으로 완전무장시키고 대궐을 철통같이 포위하였다.   그 전 해 말 정도전은 패쪽 없이는  병력을 이동할 수 없도록 하는 군사반란 방어체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위기상황이 닥치자 이러한 장치는  작동되지 못했고 오히려 관군의 이동을 방해할 뿐이었다. 이방원측의  사병과 이숙번의 군대가 이동하는  데도 아무런 제동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날 밤 이방원측 군대는 "광화문에서 남산까지 말 탄군사로 가득찼다."고 할 정도로 위세를 떨친 반면, 정부군은 성 안의 궁성수비대 뿐이어서 숫적으로 크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대궐 갑사들을  이끌고 반란군을 진압하려던 세자 방석이 반란군의 위세에 눌려 궐문 밖에 나가지도 못했을 정도다.   삼군부를 장악하고 광화문 앞 6조거리에 군사를 결집시킨 이방원은 곧바로 송현방 남은의 첩의 집을 급습하여 정도전, 심효생 등을 일거에 제거하였다. 이 때의 시각이 종루에서 스물 여덟 번의 종을 쳐 통금을 알리고 도성문을 닫았던 밤 10시였다. 해가 떨어진 후 작전을 개시한 이방원측 군대는 초동단계에 이미 정부군 지도부를 제거하고 판세를 장악하였다. 이방원의 완벽한 기습이었다.      

 

정도전의 연이은 패착  

그렇다면 정도전은 이방원의 거사 계획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까. 정도전은 시국의 비상함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태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당시 정도전은 원나라를 무너뜨린 명나라가 아직 요동까지 장악하지 못한 틈을 타 요동정벌계획을 착 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반면 이방원은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정도전에게 집요한 외교공세를 퍼붓는 틈을 타 이성계 정도전 정권을 무너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도전과 이방원의 권력투쟁은 요동정벌을 둘러싸고 비화되어 쿠데타 발생 20일 전쯤  이미 비등점에 올라 있었다.

 

8월 9일 이방원은 요동정벌을 위한 진법훈련에 불참한 벌로 태형 50대에 처해졌다. 요동정벌을 앞둔 이성계와 정도전이 날로 불온한 기운을 보이는 이방원을 견제하기 위해 내놓은 수였다. 비록 벌은 수하가 대신  받았지만 이방원으로서는 치욕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개국에 큰 공을 세운 왕자이자  실력자인 이방원을 태형에 처했으니 그만하면 대단한 수를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수가 정도전의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그 즈음 이방원은 이미 측근인 하륜, 이숙번과 은밀히 거사를 결의하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  선제공격의 기회를 잡은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견제나 위협의 수가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결정적인 수, 즉 단번에 적을 거꾸러뜨릴 필살의 수를  써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이 수를 쓰지  못한 정도전은 거꾸로 이방원에게 당하고만 것이다.   태형 50대로 기선을 제압한 정도전에게는 또 한번의 기회가 있었다.

 

그 즈음 정도전은 개국 이래 7년 간 미결 과제로 남아 있던 사병혁파를 단행했다. 조선의 창업은 함경도 출신인 이성계의 사병집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건국 이후 왕자들과 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 역시 언제든지 변란의 화근이 될 수 있는 골칫덩이였다.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앞둔 비상시국에 후방의 화근을 제거함으로써 적전 분열을 미연에 방지하고 총력전 체제를 갖추려 했던 것이다. 이 조치만 제대로 실행되었더라도 이방원은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수도 패착이었다. 이방원의 처 민씨가 병장기를  빼돌려 은닉할 수 있었을 정도로 사병혁파 조치는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사병혁파령을 너무 강력히 실행 할 경우 무력충돌이 일어나 요동정벌을 앞두고 전열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는지 도 모른다.   한 수 한 수 적에게 치명상을 입혀야 했던 그 시점에 연달아 두 번씩이나 헛방을  놓았으니 그러고도 정도전이 승리하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더욱이 정도전은 정적의 일거수일투족이 가지는 의미를 면밀히 검토하고 대응할 형편에 있지도 못했다.   사실 정도전에게는 요동의 패권을 놓고 냉전을 계속해온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더 큰 적 이었다. 정도전을 물귀신처럼 물고늘어지던 주원장은 석 달 전에 죽었지만, 중원천하는 주원장 사후 자칫 내전으로 빠져들 수도 있는 유동적  상황이었다.

 

명나라가 내전에 휘말린다면 요동정벌에 나서기에는 더없이 좋은 호기였다. 다시 오기 힘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 고자 정도전의 온 신경은 대륙의 권력동향을 감지하는 데로  집중되어 있었을 터이다. 이방 원은 바로 이 틈을 치고 들어온 것이다.      

 

그날 밤의 카멜레온들  

소수의 이방원 부대가 압도적 다수의 관군을 제압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이 날 밤 조정의 고관대작들이 철저한 기회주의로 일관한데 있었다.   정도전 등 주류 핵심이 이미 제거되고 이성계도 병으로 누어  있던 상황에서 좌정승(오늘 날의 국무총리격)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은 군사반란을 진압해야 할 최고책임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그 날 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자기들의 목숨을 구한 것 뿐이다.   삼군부를 장악한 이방원은 즉각 중신들을 삼군부로 불러들여 죽일 사람은 죽이고 살릴 사람은 충성맹세를 받은 후 살려주었다. 생사의 기로에서 대부분의 중신들은 이방원을 편들었으며, 조정의 대세는 거사 후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방원에게로 넘어갔다.   "정안군이 박포와 민무질을 보내서 좌정승 조준을 불렀다. 조준은 머뭇거리면서 점쟁이를 시켜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점을 쳐보라고 하고는 금방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숙번을 보내여 재촉하였다... 가회방(지금의  종로구 가회동, 재동)어구에 이르렀을때 군사들이 무기를 들고 가로막으며 두 정승만 들어가라고 하니 조준과 김사형은 말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다리를 건넜다.

 

정안군이 말하기를 '그대들은 왜 이씨의 사직을 위해서 근심하지  않는가' 하니 조준과 김사형은 깜짝 놀라 말 앞에 꿇어앉았다. 정안군이 '도전과 은 등이 어린 서자를 세자로 세워 놓고 우리의 동복형제들을  죽여 없애 버리려고 하기 때문에  나로서는 약자가 선수를 쓴 격이다.' 하니  조준 등은 머리를 쪼으면서 말하기를  '그들이 하는 짓 을 우리는 조금도 알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어 이방원은 두 정승으로 하여금 대신들의 모임을 소집하여 '정도전, 남은 등이  왕자들을 처치하려 해 그들을 없앴다' 고  의논을 모으도록 하였다.

 

이 모임도 처음에는  광화문에 근접해 있는 대신들 집무실인 도당(지금의 문화체육부 건물 자리)으로 소집하였으나 이방원 이 그들을 대궐에서 멀리 떨어진 운종가(지금의 종로)로 불러냈다.   "정안군은 생각하기를 방석 등이 대궐을 호위하는 군사들을 이끌고 대궐문을 나와서 싸움 을 벌인다면 자기들은 군사가 적은 관계로 물러서야 할  것이고, 마냥 조금이라도 물러서게 된다면 모임을 하던 여러 대신들은 상대측 군사의 진영 내에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대신들이 상대편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사람을 보내 도당에 이르기를 '우리 형제들은 거리바닥에 있고 대신들만 도당에 들어가서 논의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 곧 운종 가로 나와서 모임을 가지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한밤중에 종로통에서 이방원의 군사들이 창과 칼을 들고 빙 둘러선 가운데 당시의 국무회의가 소집되어다. 회의는 이방원의 뜻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정도전이 변란을 일으키려다 처단됐다.'는 이방원의 주장도 그대로 통과되었다.   당시 문무백관 중에 서열 1위였던 좌정승 조준은 결정적 시기에 이방원 편에 붙어 백관들의 여론을 이방원 편으로 기울게 한 공로로 좌정승 자리를 지켰다. 그해 10월 1일에 있었던 공신책봉에서는 1등 공신이 되어 토지 200결, 노비 25명, 안장과  고삐를 갖춘 말 1마리, 금 장식 띠 1개, 안팎옷감 1필씩을 받았다.

 

그러나 그 달 28일 곤란한 스캔들에 엮여 다시 한번 정승의 체면을 구기게 된다.   "순군부에서 기생 국화를 한강에 빠뜨려 죽였다. 국화는 처음에 조준이 데리고 살다가 내 버린 기생인데 여기에 앙심을 품고 조준이 앙심을 품고  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조준이 신문해 달라고 청하여 순군옥에 가두었다.  국화가 진상을 자백하자 곧  강물에 쳐넣어버렸 다."   당시에는 대역죄는 물론이고 무고한 사람을 대역죄로  모함해도 사형이었다. 죽을 고비는 넘겼으나 옛 여인을 물고기밥으로 만들고 말았으니 조준의 마음이 편치 못했을 것이다.  

 

한편 이방원이 중신들에게 줄서기를 시키는 동안 대궐을 지키는 군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도성경비대인 의흥친군위 당직 장수는  박위와 조온이었으며, 친군위 총병력은  좌,우위를 합쳐 8백46명이었다.  그러나 거사는 야밤에 단행됐으므로 이중 일부의 당직 군사들만 대궐 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부하들을 독려하며 궁성수비를 잘하고  있던 정도전 계열의 박위는 이방원이 궁궐 밖에서 나오라고 부르자 망설이다가 중대한  판단착오를 범했다. 

 

이방원의 군세도 살필 겸, 설마 죽이랴  하는 생각에 경호병들을 대동하고 칼을 차고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칼을 맞아 죽고 말았다.  박위가 죽었더라도  조온이 결사항전했더라면 상황은 또 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경복궁을 지켜야 했던 또 다른 당직장수 조온은  이방원과 고종사촌간이었다.  그는 밖으로 나오라는 이방원의 지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호응해, 자기 수하에 있던 근정전 남쪽 궁궐수비대를 무장 해제시켜 각자 집으로 돌려보냈다. 

 

성공한  군사반란이 으레 그렇듯 이 수도방위군의 핵심부에 반란 동조자가  있으면 승패는 결정적으로 기울고  마는 것이다.  이성계의 조카이자 조광조의 4대조인 조온은 이 공로로 2등  공신에 책봉돼 토지 150결, 노 비 15명, 말 1마리, 금은 장식 띠 1개, 안팎옷감1필씩을 받았다.   조온은 줄을 잘 섰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성계에 대한 인간적  도리는 저버렸다.  이성계의 표현에 의하면, 조온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몸뚱아리 하나뿐인데 외삼촌인 자기가 그 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출세시켰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날 조온은 이성계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 결정적 공로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방원의 거사는 표면적으로 정도전을 겨냥했지만, 그를 친다는 것은 사실상 이성계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전세가 기울고 나서, 정도전측에 가까웠던 우부승지 변중량은 '정도전·남은 등이  반역을 하다 잡혀 죽었다.'는 임금의 선포문까지 썼고, 이방원 앞에 잡혀 와서는 '제가  공에게 뜻을 둔 지가 벌써 여러 해째입니다.' 라며 구명을  요청하다가 '저 놈의 입도 고깃덩어리다.'라는 이방원의 한 마디에 목이 날아갔다.  변중량은 태조의 서형의 사위이면서도 평생 동안 종잡 을 수 없는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일관하다 인생의 종말에서까지 비굴한 최후를 맞았다. 

 

그는 고려말 역성혁명의 시기에는 이방원의 정몽주  주살계획을 정몽주에게 미리 흘려주었고, 한때는 이방원에게 붙어 정도전을 탄핵하다 귀양을 갔으며, 그후에는  다시 정도전 측에 가담하여 대명 강경론에 목소리를 높였다.  마지막 순간에는 다시 한번 카멜레온의 변신을 시도하다 굴욕적 죽음으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정도전 계열의 인사로,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의 선봉부대장이었던 문하부 찬성 유만수의 비참한 죽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스스로 짓밟은 결과라는 점에서  기억해둘 만하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하고 의흥삼군부로 돌아온 후 새벽4시경, 대세가 기울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방원에게 줄을 서려는 조정대신들이 몰려들었다.  유만수도 그틈에 끼여 있었다.   "문하부 찬성 유만수가 아들 원지를 데리고 말 앞에 와서 인사를 드렸다.  정안군이 말하기를 '어째 왔는냐' 하니 만수는  말하기를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전하를 호위하러 급히 달려오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천우가  권고하기를 '만수는 곧 도전, 은의  도당이니 죽여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라고 하니 정안군은 '안된다'고 하였다. 

 

희안권(방간)과 천우 등이 계속 우기면서 말하기를 '이런 창황한 경우에 여러 사람들의 말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니 정안군이 이숙번을 돌아보면서 '형편이 어쩔수 없게 되었다'고 하고는 그의 지목 이나 따져서 들려주라 하였다.  만수가 급히 말에서 내려 정안군의 말고삐를 잡으면서 '제가 고백하리라. 고백하리다'고 말하였다.  정안군이  아랫사람을 시켜 그를  떠내려고 하였으나 만수는 더욱 단단히 잡고 놓지 않았다.  소근(이방원의 종)이 작은 칼로 턱밑을 찌르니 만수가 벌렁 나자빠지는 것을 그만 목을 베어 죽었다. 

 

정안군이 원지에게 '너는 죄가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일렀는데 희안군이 예빈시 문앞까지 뒤쫓아가서 목을 베어 죽였다"   유만수는 천운이 다했음에도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려다 명예도 잃고  자식도 잃었다.  만일 그가 정도전의 편에 끝까지 남아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했더라면 역사에 남은 그의 족적은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필부의 죽음은 역사의 관심  밖이지만, 말끝마다 의를 앞세웠던  사대부의 최후는 역사의 준엄한 평가대상이다. 필부와 사대부의 차이는 나만을 근심하는가, 천하를 근심하는가에  있다.  천하를 근심하던 사대부가 나만을 근심하는 필부로 전략하면 애초에 사대부가 되지 않 았던 것만 못하다.  역사가 그를 조롱하고 모욕하기를 상가집 개 다루듯이 하기 때문이다.      

 

삼봉의 신원을 위하여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인 후 경복궁 앞에서 배다른 동생인 세자 방석과 방번도 칼로 베었다. 이성계가 도당에 모인 대신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설마 죽이기까지야 하겠느냐"며 내어 준 세자는 대궐문을 나서자마자 길가에서 살해당했고, "세자는 할 수 없지만 너야 귀양이나 보낼 것이다" 라며 내보낸 방번은 귀양살이를 떠나기는 했으나 한강 건너  양화나루 객관까지 밖에 못 가고 죽임을 당했다. 수족이 잘리고 아들들이 죽고 죽이는 참극을 겪은 이성계는 열흘 만에 하야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2년 2개월 후 33세의 이방원이 조선의 3대 임금으로 즉위했으니, 그가 곧 태종이다.      

 

500년 간 씌워진 역적의 굴레  

태종은 그 옛날 자신이 선죽교에서 몽둥이로 격살한 정몽주는 집권 첫 해 영의정을 추증 하며 만고충신으로 복권시켜 주었으나,  송현방에서 참수한 정도전에  대해서는 만고역적의 족쇄를 풀어주지 않았다. 정도전은 권세욕에 눈먼 모반자요, 인격파탄자였을 뿐이다. 다음은 '태조실록'의 '정도전 졸기'중 일부다.  

 

"정도전은) 도량이 좁기 때문에 남을 시기하고  겁이 많았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있으면 꼭 해치려 하고, 옛날에 품었던 감정은 기어코 보복하려 하였으며, 언제나 임금에게 권하기를 사람을 죽여서 위엄을 세우자고 하였다. 하지만 임금이 다 듣지 않았다."   태종 이후의 임금들도 정도전 역적론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광해군 대에는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이 역모죄로 체포되자 그의 시를 좋아한  것조차 역모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광해군 9년 12월 24일의 기록이다.   "역적 허균은 한 평생 정도전을 흠모하여 항상 현인이라고 칭찬하였으며  '동이시문'을 뽑 을 때도 정도전의 시를 가장 먼저 썼다."   '정도전 죽이기'의 유일한 예외는 개혁군주  정조가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을  재간행해 탐독했던 사실이다.

정도전은 대원군 대에 와서야 경복궁 설계의 공을 인정받아 복권되었다.   흔히들 정치가와 정치집단의 존재목적은 집권에 있다고 한다.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정도전은 집권에는 성공하였으나 수성에 실패하고 목숨까지  잃었으니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집권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성공한 쿠데타를 그  결과만으로 정당화할 수 없듯이 실패한 혁명이라고 너무 박대해서도 안된다. 정치가의 영광은 민을 위해 헌신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삼봉이 아니면 내가 어찌 오늘 이 자리에...  

정도전에 대한 당대인들의 평가는 극과 극이다. 조선조의 공식기록인 '태조실록'에서는 정도전을 극도로 비하하고 있지만,  그 이외에는 정도전을 비판하는  당대인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반면 이성계와 몇몇 선비들은 정도전을 극찬한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   조선의 창업자 이성계가 정도전을 어떻게 평가했는가는 정도전의 역사적 역할을 옳게  자리매김 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다.

 

이성계야말로 조선 창업공신들의 논공행상에 대해 가장 책임 있게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1395년 1월 25일 삼사판사 정도전이 정당문학 정총과 함께 '고려사'를 지어 바치자 이성계가 이를 치하하며 정도전에게 내린 글이다.  

 

"경의 학문은 경서와 역사의 깊은  문제까지 파고들어갔고 지식은 고금의 변천을  꿰뚫고 있으며 공정한 의견은 모두 성인들의 나라에서 출발하고 명확한 평가는 언제나 충실한 것과 간사한 것을 갈라놓았다. 나를 도와 새 왕조를 세우는 데 공로가 있을 뿐 아니라 좋은 계책은 정사에 도움이 될 만하고 뛰어난 글재주는 문하관계의 일을 맡길 만하다. 거기다가 온순한 선비의 기상과 늠름한 재상의 풍채를 갖고 잇다. 내가  왕위에 오른 첫날부터 경이 유용한 학식을 갖고 있어 재상으로 임명하고 또한 역사를 맡은 관직까지 겸임하게 하였더니 재상의 직책을 다하면서도 책을 만드는 데서까지 업적을 나타내었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후 술이 거나하게 취할 때마다, '삼봉이 아니면 내가 어찌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정도전의 공을 치하했으며, 정도전 역시 술이 취하면 이성계와 자신의 관계를 한고조 유방과 참모 장량의 관계에  비유하여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것 이 아니라 장량이 나라를 세운 것'이라 했다. 한다.   정도전의 스승이자 정적이요, 고려말 3은(목은 이생,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를 이른다. 길재 대신 도은 이숭인을 넣기도 한다)의 한 사람으로 조선 개국을 끝내  반대했던 이색은 정도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벼슬에 나가면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고, 어떤 일을 당해서도 회피할 줄 몰랐으니 옛날의 군자도 우리 정도전과 같은 사람은 많지 않다. 하물며 지금 사람이야 말 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그를 존경하고 존경하는 바이다."   세종 때의 명신 신숙주도 정도전에 대해 '개국 초기에 실시된  큰 정책은 다 선생이 찬정 한 것으로서 당시 영웅호걸이 일시에 일어나  구름이 용을 따르듯 하였으나 선생과  더불어 견줄 자가 없었다'고 했다. 심지어 '태조실록'도 개국 초기  그의 업적에 대해서 만큼은 ' 그 의 힘으로 도울 수 있는 데까지는  힘쓰지 않은 것이 없어서 결국 대업을  이루게 된 만큼, 정말 으뜸가는 공신이었다'는 평을 남기고 있다.  

 

정도전과 함께 이색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후에 이방원측에 가담했던 당대의 명유  권근은 '삼봉선생 진찬'이라는 글을 남겼다. 다소 칭찬이 지나친  듯하지만, 삼봉의 풍모와 기백, 학문과 화술을 짐작할 수 있는 여러 문장들을 접할 수 있다. 우선 정도전의 외모에 대한 기록이다. 정도전은 과연 어떻게 생긴 인물이었을까.   "온후한 빛과 엄중한 용모는 쳐다보면 높은 산을 우러러  보는 듯, 다가서면 봄바람 속에 앉은 듯하다. 그 얼굴이 윤택하고 등이 펴진 것을 보니  온화함과 순함이 속에 있음을 알겠다."  

 

얼굴이 윤택하다거나 높은 산을 우러러보는 듯하다는 것은 정도전의 풍채가 매우  좋았다 는 것이다. 정도전은 유배 시절에 지은 '농부에게  답하다'에서 스스로의 용모를 "뺨이 풍요 하고 배가 나왔다"고 묘사한 바 있다. '태조실록'에 전하는 정도전의 시대적 특징에 대한 유일한 기록도 "배가 나왔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비만형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등이 곧게 펴 졌으며, 온후하면서도 엄중한 기운을 풍긴다는 것은 단순 비만형이  아니라 풍채 좋고 늠름한 인상이었음을 말해준다.

 

권근은 정도전의 기백에 대해서도 격찬했다.   "빛은 만 길이나 솟아오르고 기는 무지개를 뱉어놓은 듯,  바야흐로 곤궁할 때도 그 뜻이 꺽이지 않고, 귀하게 되어서도 그 덕은 더욱 높기만 하도다. 이것은 그 마음이 넓고  스스로 만족한 때문이니 정의를 집결하여 속을 채운 데서 오는 것이리라.'   정의를 집결하여 속을 채웠다는 것은 맹자가 의로운 자의 징표로 예기했던 호연지기를 연상케 한다. 그것은 위엄이기도 하고  기백이기도 하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기도  하다. 권근은 정도전에게서 그러한 의기를 느꼈던 모양이다.   정도전은 또한 뛰어난 화술의 소유자였다. 혓바닥  하나로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을 휘어잡 았던 유세가들처럼 정도전 역시 핵심을 찌르는 빼어난 설득력으로 당대의 논객들 위에 우뚝 솟았다.   "시서를 강의함에 있어서는 능히 알기 쉬운 말로써 지극한 이치를 형용하여  배우는 자가 한 번 들으면 바로 의를 깨달았으며, 이단을 물리침에 있어서는  능히 그 글에 정통하여 먼 저 그 연유를 자세히 설명하고서  마침내 그른 점을 지적하므로 듣는 자가 다 굴복하였다.

 

이 때문에 경서를 들고 배우려는 자가 골목을 메웠으며, 일찍이 따라 배워서 현관의 자리에 오른 자도 어깨를 나란히 하여 늘어설 만 큼 수가 많았고, 비록 무부와 속사라도 그 강설을 들으면 재미를 붙여 싫증을  내지 않았으며, 부도(불교)의  무리들까지도 교화된 자가 있었 다."   정도전의 이야기는 알기 쉽고 재미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글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논리 정연한 글에 속한다.   성종때의 선비 서거정은 정도전의 성격을 짐작케 해주는 몇가지 일화를 전하고 있다. 그 가 쓴 '필원잡기'에 따르면 어느 날 정도전이 말을 타고 출근하려는 데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말구종이 신발이 서로 다르다고 지적하자, 태연하게 '한 쪽 신을 본 사람은 반대편 신을 볼 수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그대로 출근했다는 것이다.  정도전의 다소 덜렁대는 , 그러나 여유로운 성격을 알려주는 일화다.  

 

역시 서거정의 ''태평한화'에 따르면 하루는  정도전이 이숭인,권근과 더불어 각자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 얘기했는데,  이숭인은 조용한 산방에서 시 를 짓는 것을 평생의 즐거움이라 했고, 권근은 따뜻한 온돌에서  화로를 기고 앉아 미인 곁 에서 책을 읽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꼽았다. 이에 정도전은 '첫눈이 내리는 겨울날 가죽 옷에 준마를 타고, 누런 개와 푸른 매를 데리고 평원에서 사냥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 라고 했다 한다.  

 

유학하는 우리나라 선비들 치고 눈 내리는 벌판에 말달리며 개와 매를 데리고 사냥하기를 즐겨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개국  이후 직접 '진도'를 지어 병사들에게 강의하고 군사훈련을 지휘하기도 했다. 이 또한 정도전의 호방한 성격을 전해주는 일화다.   그러나 성격이 여유롭고 호방하였다. 해서 정도전이 마냥 호인풍의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 다. 일상사가 아니라 정치투쟁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정도전만큼 깐깐하고 집요한 인물도 없었다. 정도전은 자신의 반골기질을 거평 부곡 시절에 지은 '농부에게 답하다'에서 농부의 입을 빌어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그대의 죄목을 알겠노라. 그 힘의 부족함을 헤아리지 않고 큰 소리를 좋아하고, 그 시기의 불가함을 알지 못하고 바른 말을 조항하며, 지금  세상에 나서 옛 사람을 사모하고, 아래에 처하여 위를 거스른 것이 죄를 얻은 원인이로다."   옛 사람을 사모한다는 것은 요순시절의 이상주의를 지향한다는 말이요, 아래에 처하여 위를 거스른다는 것은 그의 혁명아적 기질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권력을 잡은 것도 이 때문이었고,  목숨을 잃은 것 또한 이 때문이었다.  맨주먹밖에 없던 낭인시절에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시절에나 그는 이 길에서 결코 흐트러짐이 없었다.        

 

천민의 피    

정도전(1342-1398)의 자는 종지,  호는 삼봉이며, 경북  봉화사람이다. 출생지는 외가였던 충청도 단양으로 알려져 있다. 단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천하명승  단양팔경이고, 그 중에서도 으뜸은 도담삼봉이다. 도담삼봉은 소백산 자락을 휘감아 돌던 남한강이 매포읍 도담리에 이르러 강 한가운데 봉긋하게 일궈낸 봉우리 세 개를 일컫는다.  

 

이 지방에는 정도전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여럿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1304-1366)이 젊었을 때 관상쟁이를 만났는데, 10년 후에 결혼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얻을 수 있다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정운경은 이 말을 듣e고 10년 간 금강산에 들어가 수양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담삼봉에 이르러 비를 만나 길가 어느 초막집에 유숙하게 되었는데 우씨 소녀를 만나 정도전을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정도전의 출생지가 도담삼봉 근방일 가능성을 암시해준다.   그러나 외가가 단양이라는 사실과 구전만으로 정도전이 도담삼봉에서 출생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를 증명할 역사적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출생지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없다는 것은 정도전이 본향인 봉화에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말해준다.

 

본향에서 태어났기에 굳이 출생지를 따로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정도전의 본가는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치면 경북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로, 영주에서 봉화로 가는 지방도로 중간쯤에서 왼쪽을 꺽어져 들어간 벽촌이다.      

 

청백리 아버지가 남긴 것  

정도전의 집안은 봉화에서 대대로 향리를 지냈다. 정도전이 지은 아버지의 행장에 보면 5 대조 정공미가 호장을 지낸 사실이 나온다. 호장이라면 고을의  아전 격으로 조선시대의 이방, 형방 같은 말단 아전을 말한다. 이 정공미가 후에 봉화 정씨의 시조가 되었으니 그의 조상 중에서는 그 이상에 지위에 올라간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정도전의 4대조와 3대조도 호장 벼슬을 세습한 듯하며, 봉화 정씨로 중앙 정부에서 벼슬을 지낸 사람은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처음이었다. 정운경이 첫 벼슬을 했을 때 정도전의 나이는 8세였다.  

 

정운경은 외삼촌의 도움으로 개경에 유학해 고려 충숙왕 때  과거에 급제했다. 당시는 실력으로 과거를 통과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지방 향리 출신 신진 사대부들이 서서히 득세하던 때다. 정운경 역시 그런 경우다. 그는 후에 벼슬이 형부상서까지 올라갔다. 형부상서라면 임금이 직접 임명하는 정 3품 당상관으로,  오늘날의 법무부 장관에 해당한다. 고을  아전의 자식으로서 아무런 가문의 후광없이 당상관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정운경이 대단한 실력형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인물됨을 짐작할 만한 일화가 하나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정운경이 복주목의 판관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 고을 승정(승려의 벼슬)이 길에서 도둑 에게 해를 당하고 겨우 목숨만 붙어 있었는데 지나던 관리가 그를 보고 연유를 물었더니 다 음과 같이 말했다. "베 몇 필을 가지고 가다가 밭에  거름을 주던 일꾼들이 술 마시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또 아무 곳을 가다가 밭에서 김매던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얼마쯤 가는데 뒤에서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나는 밭에서 김매던 사람이다. 불러서 이야기하려는데  대답 하지 않는 이유가 무어냐' 하더니 대답할 겨를도 없이 나를 치고 베를 빼앗아 갔다." 관리가 그를 부축하고 집으로 데려갔으나 얼마 안가 죽었다.  

 

아전들은 김매던 자를 잡아다가 목사에게 알렸고 김매던 자도  죄를 자백했다. 그대 정운경이 외지에서 돌아와 자초지종을 듣고는 "승정을 죽인 자는 이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했 다. 목사가 "이미 자백했소"라고 하니, 정운경은 "어리석은 백성이 고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겁을 먹고 헛소리를 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밭에서 거름주던 주인을 불러 "내가 들으니 네가 일꾼들에게 술을 먹일때 승정이  지나가니 승정의 베에 대해 말한 자가 있다고 하는데 숨기지 말라"고 넘겨짚으니, 밭주인의 대답이 "한 사람이 좌중에서 말하기를 '승정의 베로 술값을 보충하겠다.' 고했습니다."는 것이었다. 이에 정원경은 그 사람과 아내를 구속하여, 남자는 밖에 두고 아내부터 국문하면서, "아무 달 아무 날에 너의 남편이 베 몇 필을 너 에게 주었다 하는데 그 베가 어디서 생겼다고 하던가" 하고 또 넘겨짚었다.

 

그랬더니 그 아내의 대답이 "아무 달 아무  날 남편이 베를 가지고 와서  빌려준 베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는 것이었다. 정운경이 다시  남자를 불러 "빌려주었던 사람이  누군가" 하니 범인은 말이 막혀 사실을 자백했다. 목사와 아전들이 놀라 물으니, 정운경은 "대개 도둑이란 종적을 감추고 누가 알까 두려워하는데, 그가 '나는 김매는 자요' 한 것 이 바로 거짓인 것입니다." 라고 했다 한다. 법을 맡은 관리로서 그의 수완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전해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정도전에 의하면 정운경은 "평일에 가산을 돌보지 않고,  세간의 이익에 담박"하였으며, "집 에는 쌓아놓은 재산이 없고 처자는  추위와 배고픔을 면치 못하였으나 담담하게  처신했다" 하니 경제적으로는 넉넉치못한 형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운경은 아들이  역적으로 몰린 후 편찬된 '고려사'에 청백리 다섯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될 정도로 청렴결백하였다. 훗날 정도전이 집안 살림에 관심이 없어 아내의 애를 태우고, 평생토록 재물과 관련한 잡음 이 없었던 점은 아버지 정운경의 영향인 듯하다.  승려와 노비 사이에 난 외할머니   정운경은 진사시험에 합격한 후 우연이라는 선비의 첩의 딸과 결혼했다. 우연은 고려개국 공신 가문인 연안 차씨 집안의 사위였으니 정운경과는 비교가  안 되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러나 정운경 역시 이미 초시에 합격한 성균관 학생으로 오늘날 사법연수원생 비슷한 신분 이었으니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따라서 정운경이 비록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지만 중앙 귀족가문과 혼사를 맺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또 고려말까지만 해도 첩의 자식인 서얼 자제들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 않았으므로 우연의 서녀와의 혼사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혼인은 훗날 참혹한 비극의 단서가 되어 '태조실록'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태조실록'의 '정도전 졸기'에 의하면 정운경의 장모, 즉 정도전의 외할머니는 승려 김진과 여자 노비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승려 김진은 고려의 명문가인 단양 우씨 우현보 집안의 인척이었는데 자기 종인 수이의  아내와 간통해서 딸을 낳고 승려를  그만둔 후, 수이를 쫓아내고 그 아내를 데리고 살았다 한다. 김진은 딸을 특별히 사랑하여 명문가인 연안 차씨 집안의 인척인 선비 우연의 첩으로 시집보내고 노비와 토지와 집을 모두 우연에게 물려주었 다는 것이다. 후에 김진의 딸과 우연 사이에서 난 딸이 바로 정운경의 처가 되었다.  

 

봉건시대에 양반이 여자 노비들을 건드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또 승려가 여자를 건드리는 일도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승려가 파계까지 해가면서  그 여종을 안방에 들여 놓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아마도 김진이라는 승려는 그  여자 노비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듯하다. 그러나 김진은 증손자인 정도전이 후에 자기 가문과 원수가 되어 피를 부르는 살육극을 연출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진이 속햇던 우현보 가문은 고려말 구세력의 대표였고, 우현보의 손자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읭 사위였다. 우현보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도전이 처음 벼슬길에 나설 때부터 자기 집안 종의 자손이라고 업신여겼으며, 대간  벼슬에 있으면서 정도전이 벼슬을 옮길 때마다 정도전의  고신(관직임명사령장)에 서명을 해주지 않아  그를 괴롭혔다고 실록에 기록돼 있다. 봉건시대의 개혁정치가에게 핏줄시비는 오늘날의 개혁정치가에게 색깔 시비만큼이나 떨쳐버리고 싶은 약한 고리였을 것이다. 정도전은 당시의 원한이 뼈에 사무쳤던 듯, 조선 건국 후 우현보와 아들 3형제, 그리고 맞손자를 귀양보낸 후, 3형제에게 곤장형을 가해 몰살해버렸다. 피의 복수였던 셈이다.  

 

이와 관련하여 '태조실록'의 '정도전 졸기'는 정도전에 대해 "옛날에 품었던 감정은 기어코 보복하려 하였다"는 평을 남기고 있다. 우씨 형제 장살사건은 정도전의 정치인생에 가장 큰 오점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극의 책임을 정도전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고려말에는 역성혁명세력과 구세력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을 물고 뜯는 치사 한 인신공격이 횡행하였다. 한때 정도전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으며 당대  선비들 사이에서 '덕의 으뜸'으로 칭송받던 정몽주조차 대간들을 움직여 그를 탄핵하면서 "천한  혈통을 감추기위해 본주인을 제거하려고 모함했다"는  것을 죄상으로 들었으니 정도전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본주인'이란 표현은 정도전을  우현보 집안의 노비쯤으로 본 것이요, 정도전의 개혁운동을 천민의 피를 감추기 위한 '핏줄 콤플렉스' 정도로 깎아내린 것이다.   역성혁명의 와중에서 핏줄시비로 피를 부른 사례는 정도전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운경에 이어 정도전도 명문가의 서얼여자와 혼인했는데 묘하게도 그의 처 역시 연안 차씨의 인친이었다. 정도전의 아내 최씨는 최습의 첩의 딸로, 최습은 우연의 정실부인인 연안 차씨의 오빠 차안도의 사위였다. 정운경과 마찬가지로 정도전도  연안 차씨 집안 사위의  서녀를 아내로 맞은 것이다.

 

빈한한 가문의 유능한 청년과 유력한 가문의 서얼 여자의 결합은 당시의 중매꾼들에게는 제법 합리적인 혼인방식으로 여겨진 듯하다.   이런 식으로 연안 차씨 집안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 가운데는 후에 조선 개국공신이 된 인물이 많다. 이방원의 측근이 된 하륜,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한 조영규, 정도전과 가까웠던 함부림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연안 차씨 서얼계통의 피를 받았다. 반면 고려의  충신 정몽주는 연안 차씨 집안의 외손녀의 아들로 연안 차씨의 정통 핏줄을 이어받는 인물이니, 조선 창업은 연안 차씨 정통 핏줄과 서얼 핏줄을 불상용의 정적관계로 갈라놓았던 것이다.   고려의 개국공신 가문이었던 연안 차씨 집안은 고려가 망한 뒤 조선왕조에 협력하지 않았다. 조선 왕조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몰살된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차원부도 연안 차씨 가문 사람이었다. 연안  차씨 집안은 서얼 계통의 조선  개국공신들과는 비록 피를 나눈 사이였지만 불편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는 정도전,  하륜, 조영규, 함부림 등 조선 개국공신들의 혈통상 약점을 드러내는 족보를 공격무기로 퍼뜨리면서 완전히 원수 가 되어버렸다.  

 

태조 7년 하륜은 자객을 보내 차원부와 내외친족 70여명을 일거에 몰살하고, 해주에 보관중이던 족보 목판본도 불태워버렸다. 여말선초의 격동기에 핏줄을 둘러싼 갈등이 부른 또 하나의 비극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가운데 서얼 출신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성계의 일족 가운데서도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의 비첩의 아들이 이복 아우  이화, 이성계의 서형 이원계의 아들 이조, 이자춘의 비첩녀의 아들 조온처럼 서얼쪽 인물들이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시대에는 서얼 출신이라도 일단 벼슬길에 진출할 수는 있었으나  고 위직으로 진출하기는 어려웠다. 특히 명문거족의 서얼여인들과  혼인하는 신진 사대부가 적지 않았으나 그 자제들은 실력은 있으되 핏줄의 약점 때문에  요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이러한 신분적 한계에 대한 불만이 체제에  대한 불만과 결합해 역성혁명을 폭발시킨  하나의 에너지로 작동했던 것이다.      

 

개혁파의 정치학교 '이색 스쿨'의 우등생    

어린 시절의 정도전에 대한 기록은 '태조실록'에 단 한 구절 남아있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명민했으며,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해 널리 많은 책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정도전이 어렸을 때 누구에게 학문을 배웠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아버지 정운경이 어린 시절 봉화와 안동의 향교에서 유학을 배우기  시작했던 사실로 미뤄볼 때 그 역시 어린 시절에는 고향 인근의 향교에 나가 책을 읽기 시작했을 것이다.
    영주 산골에서 개경의 명문사학으로   정도전의 학문의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 올라와 당대의 명유 이색(1328-1396) 문하에서 공 부하면서 본격적으로 개화하기 시작한다. 정도전이  이색의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덕이었다. 즉 정운경이 개경에서 유학하던 시절 이색의 아버지이자 대학자이던 이 곡과 '나이를 따지지 않는 벗'이  되었던 것이다. 이곡 역시 한산  지방의 향리 자제로 지방 사대부 출신이라는 신분적 동질감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더욱 쉽게 친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정도전이 정확히 언제부터 이색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에 15-16세  시절에 개경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357년 15세 때 개경에 올라와 그 후 이색 문하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색은 13세에 성균관시험에 합격하고 26세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나라의 회시(2 차 시험)와 전시(황제 앞에서 보는 최종시험)에 연거푸 1등, 2등으로  합격했으니 흔치 않은 국제적 천재였다.   이색이 개경에서 문생들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원나라에서의 유학과 벼슬살이를  마치고 귀국한 1356년경부터일 것이다. 당시 신진사대부 계열의  새세대 인재들은 원나라에서 선진 성리학을 흡수하고 막 귀국한 젊은 천재 이색에게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결과 '이색 스쿨'은 당대의 최고명문 엘리트사학으로 각광받았으며 고려말 개혁파 유신 대부분이 '이색 스쿨'출신이었다 할 정도로 개혁파  선비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정도전을 비롯해 정몽주, 이숭인, 권근, 이존오, 김구용, 김제안,  박의중, 윤소종 등 후에 여말 선초의 중앙정계를 주름잡은 개혁파 정치가들이  대부분 이색 문하였으니,  '이색 스쿨'은 개혁파의 정치학교 역할을 한 셈이다.  

 

이색이 전파한 성리학은 온건개혁파 유신들  및 역성혁명파 유신들의 공통된  정치이념이 되었다. 성리학이 이처럼 진보적 이념으로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고려의 국가종교이던 불 교가 건강성을 잃고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면서, 진보적 지식인  사이에 새로운 이상에 대한 갈망이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불교와 달리  '수기'의 자기수양적 측면만이 아니라 '안백성'의 민본주의적 측면까지 겸비한 유교성리학의 장점이 고려말의 적폐를 타파할 새 로운 이념을 갈구하는 지식인들의 요구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더구나 성리학은 유가의 이상인 도덕정치를 실현하는 데 최고권력자인 임금의 과오를  방지하기 위해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의 '정군' 혹은  '격군'이론을 고도로 발전시 킴으로써 사대부지식인들의 정치참여의지를 크게 고무하였다.  조선조의 지식인들이 임금을 바로 잡기 위해 목숨을 건 상소를 거듭한다든지, 임금을 철학이 있는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매일같이 임금과 함께 '경연'이라는  정치세미나를 열었다든지, 이를  끝내 거부한 연산군을 왕위에서 아예 끌어내려 버렸다든지 하는  역사적 사례들은 모두 다 성리학의  '정군'사상에 입각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이 새로운 개혁이념을 마른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쏙쏙 흡수해 들였다.  '태조 실록'의 표현처럼 '타고난 자질이 총명했던' 정도전은 '이색 스쿨'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유교이상정치시대의 도래를 꿈꾸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 사학 '이색 스쿨'의 진취적이고 개혁 적인 분위기는 정도전의 학구열을 한껏 자국했을 것이다.  

 

스승 이색은 훗날 정도전을 평가하여 "삼봉은 뜻을 세운 것이 대단히 높아 그가 학문하는 데 연구하여 밝히는 것은 포은(정몽주)과 같고, 저술하는 것은 도은(이승인)과 같았으니, 은 미한 말을 분석하고 옛 시화를 화답하는 데는 한때의 거벽들이 모두 팔짱만 끼고 앉아서 감 히 겨루지를 못하였다"(정도전사문록발문, 1384년 10월)고  하였으며, 타고난 재주로 문장에 능하고 성리학에 밝은 정도전에게 모두 첫 자리를 양보했다고 한다
   

정치는 사람에 대한 투자  

정도전은 1369년 27세 때 3년상을 마치고 삼봉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정도전은 개경에서 벼슬살이를 할 때나 혹은 그 이전부터 남경, 즉 오늘날의  서울에 허름한 초가집을 하나 갖 고 있었다.   정도전의 시에 흔히 '삼봉 옛집'을 둘렀나 감흥이 묘사되고 이를 그리워하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그의 시에 보면 "하챦은 나의 터전 삼봉 아래라"라고 되어 있는데, 삼봉의 영마루에 걸어 올랐다거나 서북향으로 개성의 송악산이 보인다는 묘사를 보면 이것이 도담삼봉이  아 니라 서울의 북한산을 뜻함을 짐작할 수 있다. 정도전은 재야시절이던 40세 때 북한산 밑에 '삼봉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그의 집이 그곳에  있었기에 학당도 그 곁에 지었을 것이다.   '삼봉집'을 보면 그와 편지나 시를 주고 받거나 막역한 교우관계를 나눈 친한 벗들이 대단 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역성혁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기획력이나 정책능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폭넓은 인간관계도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상이 끝나고 나니 정도전이 가장 보고 싶고 그리운 얼굴들은 개경에 있는 벗들이었다. 개 경의 벗들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바로 정몽주, 이숭인, 이존오, 윤소종, 권근 등 이색의 문하 에서 동문수학하며 유교이상하회 건설의 꿈을 함께 나눴던 동지들이다. 하루는 정도전이 삼봉 마루에 올라 서북쪽의 개경 송악산을 바라보며 벗들을 그리는 시른 지었다.

 

'삼봉에 올라 경도의 옛 친구를 추억함'이라는 시다.    

고요히 앉았자니 먼 데 생각이 일어  

저 삼봉 마루에 오르게 하네  

서북쪽 송악산 바라보니  

높고 높게 검은 구름 무심히 떴네  

벗님네들 그 아래 있어  

낮과 저녁 서로 어울려 노는구나  

나는 새 구름 뜷고 들어가니   내 생각 끝끝내 유유하네   ...  

한 번 가기 어려움도 아니건마는   어째서 이다지 머뭇거리는지   ...    

 

 높이 뜬구름 아래로 벗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고, 스스로  날아가는 새가 되어 그들 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 바로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정치란 사람에 대한 투자라고들 한다. 예나 지금이나 그러한 진리에는 변함이 없다.  정도 전이 친구들을 끔찍히 생각했음은 다음해 추석을 맞아 부여에서 삼봉까지 찾아온 동창생 이 존오에게 보낸 시에도 잘 드러난다.

 

함께 한가위 보름달을 구경하고 작별한 뒤 지은 시다.    

평생에 밝은 달 사랑하건만  

밝은 달이 항상 둥근 것은 아니네   ...  

달이 지니 사람이 잠 못 이루고  

사람이 돌아가니 달이 또 돋아  

사람이란 모였다 흩어지는 것  

달도 또한 차면 이지러지네  

사람이 달과 서로 어긋나니  

아름다운 기약 서로 틀려만 가네  

한 달에 달은 한 번 둥그는 거라  

달 대하면 오래도록 서로 생각나네    

달이 차고 이지러듯이 사람도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가 있는 법

사람과 달이 서로 그리워하건만 아름다운 서로의 기약은 어긋나가기만 한다.

마치 열에  들뜬 연인 사이를 노 래하듯 정도전의 시는 아름답고 애잔하기까지 하다. 시와 인간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 지만, 시로 나타난 정도전의 감수성은 퍽 예민하고 따스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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