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도가 잡용(道家雜用)

醉月 2013. 6. 9. 01:30

도교(道敎)의 선서(仙書)와 도경(道經)에 대한 변증설 부(附) 도가 잡용(道家雜用)

 

  • 이규경(李圭景)
    1788(정조 12)∼?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규(伯揆), 호는 오주(五洲) 또는 소운거사(嘯雲居士). 주부 덕무(德懋)의 손자이며, 광규(光葵)의 아들이다.
    그의 학문은 선대에 연원을 두고 있다. 할아버지는 박학다재하여 고금의 제자백가와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고, 문장에 있어서도 신조(新調)를 일으켜 인정(人情)과 물태(物態)를 곡진히 그려내었다.
    일찍이 정조가 규장각을 열고 명사(名士)를 검서관에 등용하였을 때 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와 함께 이른바 ‘4검서(檢書)’라 일컬어졌다.

  • 특히, 정조의 권우(眷遇)를 받아 규장각에 편서(編書)의 일이 있을 때에는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또한, 일찍이 심염조(沈念祖)의 사행을 따라 연경에 가서 그곳에서 유환(遊宦)하는 소인묵객(騷人墨客)과 종유(從遊)하고, 때로는 외출하여 산천·도리·궁실(宮室)·누대(樓臺)로부터 초목·곤충·조수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적어와 귀국한 뒤로는 명성이 더욱 높았다.
    아버지 광규도 할아버지를 이어 검서관에 등용되어 오랫동안 규장각에서 일하였다. 규경은 이러한 가풍에 젖었고, 그 위에 당시 팽배히 전하여오던 청조 실학(實學)의 학풍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금사물(古今事物)에 대한 수백종의 서적을 탐독하여 정밀한 고증으로 천문·역수(曆數)·종족·역사·지리·문학·음운(音韻)·종교·서화·풍속·야금(冶金)·병사(兵事)·초목·어조 등 모든 학문을 고정변증(考訂辨證)하여 1, 400여항목을 담아 《오주연문장전산고》 60권을 집대성하였다.

  • 그는 이 책의 〈인체내외치상변증설 人體內外置象辨證說〉에서 인체의 구조와 기능을 논하고 있다. 여기서의 의학지식은 서양고대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서양의술에 관한 내용을 최초로 기록한 저술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당시까지만 하여도 관념론에 사로잡혀 인체내부는 물론이거니와 이목구비에 대한 구조를 그려낸다는 것조차도 인성(人性)에 대한 야만적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종두변증설 種痘辨證說〉은 1854년(철종 5) 평안도지방에서 종두를 처음 실시하였다는 내용이다.
    한편, 경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국내적인 문제에 대하여 당시 사리사욕에 찬 탐관(貪官)과 부상(富商)들이 매점매석을 통하여 폭리를 자행하자 이러한 도고행위(都賈行爲)를 비판하면서 매점매석을 적극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화폐가 유통되자 비농민층만 편리하게 되고 농민에게는 유해함을 들어 이익(李瀷)의 폐전책(廢錢策)을 지지하였다. 대외적인 상행위에 있어서도 개시(開市)와 교역의 필요성을 강조, 1832년 영국상선이 우리나라에 교역을 요구해왔을 때 개시를 특허할 것을 주장하면서 조약도 엄중히 할 것을 당부하였다.
    한편, 《백운필 白雲筆》에서 농정에 관한 대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 외에 《오주서종박물고변 五洲書種博物攷辨》을 찬술, 동서고금의 사물에 통하지 않음이 없게 신지식을 제시하여 혁신적인 신기운을 조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지식과 혁신사상은 초기 개화선각인사들에게는 진지하고 절실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일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할아버지가 이룩한 실학을 계승, 조선 후기 실학을 꽃피운 박물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는 《오주연문장전산고》·《오주서종박물고변》·《백운필》 등이 있다.

     

     

    참고문헌

    • 正祖實錄, 五洲衍文長箋散稿, 五洲書種博物攷辨, 白雲筆, 朝鮮圖書解題, 한국사 13·14·16·23(국사편찬위원회, 1978). 〈柳承宙〉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2 - 도장류 1



    도장총설(道藏總說)
    도교(道敎)의 선서(仙書)와 도경(道經)에 대한 변증설 부(附) 도가 잡용(道家雜用)(고전간행회본 권 39)


  • 총설(總說)

    도가(道家)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황제씨(黃帝氏)가 공동산(崆峒山)에서 도(道)를 물었다는 것을 인하여 칭하게 되었나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도(道)란 요점과 근본을 잡아 청허(淸虛)로써 자신을 지키고 겸양으로써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니, 이는 임금이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이다. 그리하여 요(堯) 임금의 극양(克讓)과 《주역(周易)》의 겸겸(謙謙)으로, 한번 겸손하여 네 가지 유익을 받는 것에 합하니 이것이 그 장점이다. 그러나 방탕한 자가 이것을 하게 되면 예학(禮學)을 끊어버리고 인의(仁義)까지 버리려고 하면서 '오직 청허대로만 하여도 법이 될 만하다.' 한다." 하였다.


    또한 신선(神仙)에 대하여 "신선이란 성명(性命)의 진(眞)을 보전하여 세상 밖에서 한가히 구하는 것으로 애오라지 의욕을 씻어버리고 마음을 평화롭게 하여 사(死)ㆍ생(生)의 경지를 초월해서 마음속에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혹자들은 오로지 이것만을 힘써 허탄하고 괴이한 글이 점점 더욱 많아졌으니, 이는 성인(聖人)의 가르침이 아니다." 하였다.


    도교(道敎)란 이런 것에 불과한데, 그 서적은 매우 많다. 이제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를 인용하여 그 자세한 전말(顚末)을 밝히려 한다.


    《수서》경적지에 "상고 시대로부터 황제(黃帝)ㆍ제곡(帝嚳)ㆍ하우(夏禹)의 황제들이 모두 신인(神人)을 만나서 부록(符籙 미래의 일을 미리 짐작하여 적어 놓은 글)을 받았는데, 연대가 이미 멀어서 경(經)ㆍ사(史)에 알려진 것이 없다. 그 사적을 자세히 미루어 보면 《한서(漢書)》 제자(諸子)에 도서(道書)의 부류가 37가(家)인데 큰 종지(宗旨)는 모두 건선(健羨 끝없는 탐욕을 말한다)을 버리고 충허(沖虛 마음이 담박하고 공허한 것)에 처할 뿐이고, 상원천관(上元天官)이니 부록(符籙)이니 하는 따위의 일이 없다. 이 중 《황제(黃帝)》4편과 《노자(老子)》2편은 가장 깊은 뜻을 얻었다. 옛말에 도홍경(陶弘景)이란 자가 구용(句容)에 은거하여 음양 오행(陰陽五行)을 좋아하고 풍각(風角)ㆍ성산(星算)을 잘 했으며 벽곡(辟穀)ㆍ도인(導引)의 법을 이수하여 도경(道經)과 부록을 받았다.


    무제(武帝 양(梁) 나라 소연(蕭衍)의 묘호)가 본래 그와 교유했었는데, 선대(禪代)할 즈음에 미쳐 홍경이 도참의 글을 모아 '경량(景梁 하늘이 양 나라를 도와 준다는 뜻)'이란 글자를 합성(合成)하여 바쳤다. 이 때문에 무제의 은총이 더욱 두터웠다. 또 《등진은결(登眞隱訣)》을 편찬하여 옛날에 신선의 일이 있었음을 증명했으며, 또 '신단(神丹 단약(丹藥))을 만들 수 있는데 이것을 먹으면 장생(長生)하여 천지와 함께 영원히 산다.'고 하자, 무제는 홍경으로 하여금 시험삼아 신단을 만들게 했으나 끝내 성취되지 못하였다. 이에 중원(中原)은 너무 거리가 멀어 약재가 정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니, 무제는 그렇게 생각하여 더욱더 공경하였다.


    그러나 무제가 소년 시절에 일을 좋아하여 먼저 도법(道法)을 수학했었는데, 즉위한 뒤에까지도, 오히려 조사(朝士)로서 스스로 글을 올려 도법을 수학한 자가 많았다. 그리하여 삼오(三吳) 지방과 해변 가에서 더욱 심히 신봉하였으며, 진 무제(陳武帝) 역시 대대로 오흥(吳興)에서 살았기 때문에 또한 신봉하였다.


    후위(後魏) 때에 숭산(嵩山)의 도사(道士) 구겸지(寇謙之)가 스스로 말하기를 '일찍이 진인(眞人) 성공흥(成公興)을 만났으며, 뒤에 태상노군(太上老君)을 만나 겸지에게 수여하여 천사(天師)를 삼고 또 《운중음송과계(雲中音誦科誡)》20권을 주었으며, 다시 기(氣)를 마시고 도인(導引)하는 법을 전수하여 마침내 벽곡(辟穀)하는 방법을 얻었다. 그리하여 기운이 성하고 신체가 가쁜하여 안색이 고왔는데, 제자 10여 명이 모두 그 술(術)을 터득하였다. 그후 또 신인(神人) 이보문(李譜文)을 만났는데, 그는 바로 노군(老君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노자(老子)의 존칭)의 현손(玄孫)으로 도록(圖籙)ㆍ진경(眞經) 등 백신(百神)을 부르는 책 60여 권과 금단(金丹)ㆍ운영(雲英)ㆍ팔석(八石)ㆍ옥장(玉漿)을 녹여 만드는 법을 전수받았다.'하였다.


    태무제(太武帝) 시광(始光) 초기에 이에 대한 책을 받들어 황제에게 올리니, 황제는 알자(謁者)로 하여금 옥백(玉帛)과 희생(犧牲)을 받들어 숭악(嵩岳)에 제사하고 나머지 제자들을 불러다가 대도(代都)의 동남쪽에다가 단우(壇宇)를 세운 다음, 도사 1백 20여 명을 두어 그 법을 선양해서 천하에 펴게 하고는 태무제가 친히 법가(法駕)를 갖추어 부록(符籙)을 받게 하였다.


    이로부터 도업(道業)이 크게 행해져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반드시 부록을 받아 고사(故事)가 되었으며, 천존상과 여러 신선의 상을 새겨서 공양하였다.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뒤에는 남교(南郊)의 곁에 도량(道場)을 설치하니, 사방이 2백 보(步)였는데 정월과 시월의 보름에 아울러 도사ㆍ가인(哥人) 1백 6명을 두어 절하고 제사하게 하였다. 그후 후제(後齊)의 무제(武帝)가 업(鄴) 땅으로 천도한 다음 마침내 폐지되었다가, 문양(文襄) 때에 다시 관우(館宇)를 설치하고 정통한 자를 뽑아 거처하게 하였다.


    후주(後周)가 위(魏) 나라를 이어 도법(道法)을 숭봉하여 황제마다 부록을 받기를 옛날 위 나라처럼 하였는데, 얼마 후 불법(佛法)과 함께 멸망했다가 개황(開皇 수 문제(隋文帝)의 연호) 초기에 다시 일어났다. 고종(高宗)은 본래 불법을 믿었으므로 도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대업(大業 수 양제(隋煬帝)의 연호) 때에 도술로써 등용된 자가 매우 많았는데, 강습하는 도경(道經)은 모두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근본으로 하고, 다음에 《장자(莊子)》와 《영보(靈寶)》ㆍ《승현(昇玄)》 따위를 강습했다. 기타 여러 경(經)은 혹자들이 말하기를, '신인(神人)에게 전수받았다' 하나 권수가 똑같지 않다.


    도가에서 스스로 말하기를 '천존(天尊)의 성은 악(樂)이고 이름은 정신(靜信)이다'하는데, 대부분 모두 천박하고 저속하므로 세상에서 심히 의심한다. 그 술업(術業)이 우수한 자가 부적과 주금(呪禁)을 행하는 것에 왕왕 신비한 증험이 있으나, 금단(金丹)ㆍ옥액(玉液)으로 장생불사한다는 일은 역대에서 비용만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허비했을 뿐, 끝내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하였다.


    《속박물지(續博物志)》에 "한 순제(漢順帝) 때에 낭야궁(瑯琊宮)에서 그 스승을 높였으며, 우길(于吉)이 곡양(曲陽)의 우물가에서 신서(神書) 1백 70권을 얻었는데 이름은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라 하였다. 이 책에서 말한 것은 음양 오행을 종지(宗旨)로 삼았으나 무당들의 잡된 말이 많다. 뒤에 장각(張角)이 이 책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송(宋) 나라 때 숭산(嵩山)의 구겸지(寇謙之)가 장도릉(張道陵)의 도술을 배웠는데, 일찍이 노자를 만나 명을 받아 도릉을 계승해서 천사(天師)가 된 다음, 벽곡 경신(辟穀輕身)하는 방법을 전수받아 도교를 정돈하게 했다. 또 신인 이보문(李譜文)을 만났는데 그는 바로 노자의 현손으로 도록(圖籙)ㆍ진경(眞經)을 전수하여 북방 태평진군(北方太平眞君)을 보좌하여 천궁(天宮)이 고요히 움직이는 법을 만들어냈으며, 최호(崔浩)는 이 도술을 전수받았다." 하였으니, 도교의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다.


    완효서(阮孝緖)의 《칠록(七錄)》중 선도록(仙道錄)은 첫째 경계(經戒), 둘째 복이(服餌), 셋째 방중(房中), 넷째 부록(符籙)으로 모두 1천 1백 38권이며, 호응서(胡應瑞)의 선도록은 2천 5백 95질이다. 방중이란 바로 소녀(少女) 용성(容成)의 술(術)로 음정(陰精)을 채취하는 방법이다. 반고(班固)의 《한서》 예문지에 황제(黃帝) 삼왕(三王)의 방중술 20권, 요(堯)ㆍ순(舜)의 방중술 22권, 탕왕(湯王)ㆍ반경(盤庚)의 방중술 20권이 실려 있는데 모두 몹시 저속하고 음설하다.


    왕의(王禕)의 《청암총록(靑巖叢錄)》에 "노자의 도(道)는 청정(淸靜)에 근본하여 무위(無爲)로써 체(體)를 삼고, 무위이면서 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으로써 용(用)을 삼는다. 《도덕경》은 모두 5천여 자이고 81장(章)으로 되어 있는데, 그 요지는 이것을 넘지 않는다. 임금으로는 한 문제(漢文帝)와 신하로는 조참(曹參)이 항상 이 도를 써서 정치를 하여 백성이 안정하게 되었으니, 이 도를 국가와 천하에 사용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 학문이 한번 변하여 신선 방기(神仙方技)의 술이 되었고 두 번 변하여 미무 좨주(米巫祭酒)의 교가 된 뒤로부터 마침내 이단이 되었다. 그러나 신선 방기의 술도 두 가지가 있는바, 연양(鍊養)과 복식(服食)으로 이 두 가지는 지금의 전진교(全眞敎)가 바로 이것이며, 미무 좨주의 교도 두 가지가 있는바, 부록(符籙)과 과교(科敎)로 이 두 가지는 지금의 정일교(正一敎)가 바로 이것이다.


    연양의 일은 황제의 책에 비록 언급하였지만 이는 모두 후세에서 모방하여 가탁(假託)한 것이며, 적송자(赤松子)와 위백양(魏伯陽)이 나오고부터 비로소 본종(本宗)이 되었다. 노생(盧生)ㆍ이소군(李少君)ㆍ난대(欒大)의 무리로 말하면 또 연양을 변하여 복식이 되었으니, 그 술이 더욱 편벽되다. 부록의 일은 황제의 책에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는데, 장도릉(張道陵)ㆍ구겸지(寇謙之) 등이 실로 이 법을 제창하였으며, 두광정(杜光庭)과 임영소(林靈素)의 무리에 미쳐서는 또 부록을 변하여 경건(經典) 과교가 되었으니, 그 일이 더욱 비루하다.


    그러나 한번 논한건대, 연양의 말에 대해서는 구양자(歐陽子 구양수(歐陽脩)를 가리킨다)가 일찍이 《황정경(黃庭經)》을 산정(刪正)하였으며, 주자(朱子)도 일찍이 《참동계(參同契)》를 고쳐 주달았다. 이 두 분은 큰 유학자인데도 모두 그 학설을 나쁘다 하지 않았으니, 산림(山林)에 은거하여 홀로 수행하는 선비가 이것을 써서 양생(養生)을 하여 천명을 온전히 하는 것은 진실로 명교(名敎)에 죄를 짓는 것이 되지 않는다.


    과교(科文)의 설은 비루하여 떳떳지 못한 것으로 황관(黃冠 도사(道士)를 가리킨다)이 이것을 빌어 밥먹는 도구로 삼는바, 세상의 좀이 되었으나 피해가 그리 심하지는 않다. 다만 복식ㆍ부록 두 가지 학설은 본래 사벽(邪僻)하고 무망(繆妄)한 것으로 여기에 혹하는 자들은 화를 당하지 않는 자가 적다. 난대ㆍ이소군ㆍ우길(于吉)ㆍ장진(張津)의 무리는 이 때문에 몸이 죽었고, 유필(柳泌)ㆍ조귀진(趙歸眞)의 무리는 이것으로 남에게 화를 입혔다가 자신도 끝내 죽임을 당했으며, 장각(張角)ㆍ손은(孫恩)ㆍ여용(呂用)의 무리는 마침내 이것으로 천하와 국가를 패망하게 만들면서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연양과 복식 두 가지 술이 함께 전해오는데 전진교(全眞敎)에서는 이것을 겸용한다. 전진이란 명칭은 금(金) 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남종(南宗)ㆍ북종(北宗) 두 가지가 있는데, 남종은 성(性)을 우선으로 하고 북종은 명(命)을 우선으로 한다.


    근세에 또 진우 도교(眞又道敎)가 있으며 칠조 강선(七祖康禪)의 교가 있는바, 이 학설이 각기 서로 모순된다. 부록ㆍ과교로 말하면 함께 서적이 있는바, 정일교를 믿는 종파에서 사실상 이 업술(業術)을 관장한다. 현재 정일교에서는 또 천사(天師)ㆍ종사(宗師)가 있어서 남종ㆍ북종의 일을 나누어 관장하고 있는데, 강남(江南)의 용호각(龍虎閣)과 조모산(皂茅山)의 삼종부록(三宗符籙)이 또 각기 같지 않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도가의 학설이 잡되어 여러 갈래다' 하였는데, 참으로 그렇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도가의 서적이 모두 한 환제(漢桓帝) 때에 시작된바, 지금 그들의 경전(經典)에 '천사가 영수(永壽 한 환제의 연호) 때에 노군(老君)에게서 전수 받았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태평경(太平經)》이 가장 오래 되었고 또 많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국가를 일으키고 자손을 널리 퍼지게 한다'는 말은 방중술의 음담패설에 지나지 않는다. 《대동경(大洞經)》등으로 말하면 대부분 육조(六朝) 이후의 문사(文士)가 기술한 것으로서 그 문장이 볼 만하나, 왕왕 천근하고 비루하여 그리 고상한 의론이 없다.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불교에서는 노자의 좋은 점만을 절취(竊取)했는데, 뒤에 도가에서는 또한 불가의 나쁜 점만을 절취했다'하였으니, 이 말씀을 가지고 연구해 본다면 도가의 본말을 말할 수 있다." 하였다.


    도가의 남ㆍ북종은 전수한 것이 근거가 있다. 동화(東華 신선이 사는 곳)의 소양군(少陽君)이 노담(老聃)의 도(道)를 얻어 한 나라 종리권(鍾離權)에게 전수하였고, 종리권은 당 나라 여암(呂巖)과 요(遼) 나라 유조(劉操)에게 전수하였으며, 유조는 송 나라 장백단(張伯湍)에게 전수하였고, 장백단은 석태(石泰)에게 전수하였으며, 석태는 설도광(薛道光)에게, 설도광은 진남(陳枏)에게, 진남은 백옥섬(白玉蟾)에게, 백옥섬은 팽상(彭相)에게 전수하였으니, 이것이 남종이다. 여암은 금(金) 나라 왕철(왕嚞)에게 전수하였고, 왕철은 일곱 제자에게 전수하였는데, 그 하나가 구장춘(丘長春)이며, 구장춘이 송도안(宋道安)ㆍ담처단(譚處端)ㆍ유처현(劉處玄)ㆍ왕처일(王處一)ㆍ학대통(郝大通)ㆍ마처옥(馬處鈺)ㆍ손불이(孫不二)에게 전수하였으니, 이것이 북종이다.


    진(秦)ㆍ한(漢) 이후로 마침내 신선이 되어 하늘로 날아 올라가 변화하는 도술이 있어서, 황정(黃庭) 대동(大同)의 법과 태상(太上)ㆍ천진(天眞)ㆍ목공(木公)ㆍ금모(金母)의 칭호와 단약(丹藥)ㆍ기기(奇技)ㆍ부주(符呪)ㆍ법록(法籙)으로 귀신을 잡고 부리는 것을 모두 도가로 돌리니, 이는 학자들이 그르친 것이다. 황로(黃老 황제와 노자)는 도가의 근본이고 방기(方技)는 도가의 말류이다. 노자 《도덕경》의 본뜻은 원래 육신을 단련하여 신선을 구하는 술이 아니었는데, 세상의 신선을 배우는 자들이 노자에게 가탁한 것이다. 이는 마치 선비가 글을 읽어 과거(科擧)에 응시하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 유학의 가르침이다.' 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가소롭지 않은가.


    잡도(雜道) 중에 시해(尸解)하는 한 법이 있다. '시해란 육신을 단련하여 마치 매미가 껍질을 벗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같다. 《집선전(集仙傳)》에 "육신이 산 사람과 똑같은 것이 시해이며, 발이 푸르게 변하지 않고 살가죽이 쭈그러지지 않는 것이 시해이며, 안광(眼光)이 여전하여 산 사람과 똑같은 것이 시해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도 있고 염(斂)하기도 전에 시체를 잃어버린 자도 있으며 터럭이 벗겨지고 육신이 날라간 자도 있으니, 이것이 모두 시해이다. 한낮에 시해된 자가 최상이고 한밤중에 시해된 자가 최하이며 새벽에나 저녁에 시해된 자는 지하(地下)의 주(主)가 된다." 하였다.


    도서(道書)에 "시해가 다섯 가지이니, 금ㆍ목ㆍ수ㆍ화ㆍ토이다." 하였다. 도경에 《시경해(尸解經)》이 있고 또 금단(金丹)을 만드는 학(學)이 있다.


    도경에 《황백요경(黃白要經)》ㆍ《팔공황백경(八公黃白經)》과 《침중황백경(枕中黃白經)》5권이 있다. 헌원(軒轅 황제씨(黃帝氏))의 《술보장론(述寶藏論)》에는 20종의 금(金)이 있으며, 그후의 황백술은 《황정경》의 구전팔경단(九轉八瓊丹)인바, 곧 단가(丹家) 외단(外丹)의 비법(祕法)이다. 한(漢) 나라 회남자(淮南子)는 팔공(八公)과 함께 금약(金藥)을 점화(點化)했다는 말이 있는데, 유향(劉向)이 그 책을 얻어 시험하여 만들다가 이루지 못하고 거의 죽게 되었다가 겨우 면하였다.


    한 무제(漢武帝) 때에 오리(五利 방사(方士) 소옹(少翁)의 봉호)ㆍ문성(文成 방사 난대(欒大)의 봉호) 무리가 단사(丹砂)를 변화하여 수은(水銀)으로 만들고 수은을 변화하여 황금을 만든다는 말을 제창했으며, 또 부엌에 제사하여 약물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했으나 이것 역시 효험이 없었다.


    그후 포박자(抱朴子)와 도홍경(陶弘景)도 시험하였으나 끝내지 못하였고 오직 위백양(魏伯陽)이 시험한 결과 효험이 있어서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 문득 금단의 조종(朝宗)이 되었다. 그러나 그 술(術)을 얻을 수 없어, 당(唐) 나라 유필(柳泌)은 시험하여 만들어서 복용했다가 피를 흘리고 죽었다. 임금으로 도사 파사매(婆娑寐)를 믿었던 당 태종(唐太宗)과 유필ㆍ경무(敬武)를 믿었던 헌종(憲宗)이 있는바, 이 두 임금은 모두 단약을 복용했다가 조갈증이 나서 숨졌는데, 백거이(白居易)에 이르러 깨진 화롯불을 보았다. 송(宋) 나라 반소요(潘逍遙 소요는 반낭(潘閬)의 호)가 방법을 올렸다가 태종(太宗)이 죽자, 벰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정자(程子)는 불복(佛腹)의 글을 얻어 화로를 시험해 보았고, 소자유(蘇子由 자유는 소철(蘇轍)의 자)도 시험해 보았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진희량(陳希良)의 부자는 부풍(扶風)에 사는 중에게 방법을 배워 크게 연단하는 화로를 만들었다가 대번에 화를 당하여 죽었으며, 부필(富弼)은 황백술(黃白術)을 적은 책을 쌓아 두었다가 뒤에 불에 넣어 태워버리고 크게 깨우쳤다. 양해(楊偕)ㆍ두순경(杜舜卿)ㆍ호숙(胡宿)에 이르러도 아울러 기이한 전수가 있었지만 하지 않았으며, 범중엄(范仲淹)은 동사생(同舍生 태학에 함께 있는 생도)에게 방법을 얻었고, 소자첨(蘇子瞻 자첨은 소식(蘇軾)의 자)은 부풍의 중에게 방술을 얻었으나 끝내 시험하지 않았다. 근세에 청 성조(淸聖祖)가 남쪽 지방을 순행할 적에 강남(江南)에 사는 백성 왕구웅(王求熊)이 연금(鍊金)ㆍ양신(養身)하는 비서(祕書) 한 책을 바쳤으나 받지 않고 돌려 주었으니, 이것이 금단의 대략이다.


    전설에 "금단을 만들 수 없고 생명은 헤아릴 수 없다." 하였다. 이군실(李君實 군실은 이일화(李日華)의 자)은 말하기를 "세상에서 방사로써 금ㆍ은을 점화(點化)해서 세상에 오래 살고 소녀에게서 약을 취해 장생한다 하나, 이미 기욕(嗜慾)을 채우고 또 신선이 된다면 어찌 이처럼 편리한 일이 있겠는가." 하였으니, 아! 옳은 말이다. 연단에도 위조(僞造)가 있으니, 좌자(左慈)의 행금단(杏金丹)과 허탄한 전진교(全眞敎)의 점묘(點茆) 따위를 세속에서는 제수(提手)라고도 하고 혹은 대강(臺扛)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이 술을 한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이는 방사(方士)가 없기 때문이다.


    또 교문(敎門)이 있는바, 게문(偈文)과 경(經)을 말하며 남녀가 뒤섞여 있는데, 그 조목은 백련(白蓮)ㆍ분향(焚香)ㆍ문향(聞香)ㆍ혼원(混元)ㆍ용원(龍元)ㆍ홍양(洪陽)ㆍ원통(圓通)ㆍ대승(大乘)이 있다. 산동(山東) 지방에는 분향ㆍ백련이 있으며 강남(江南)에는 장생(長生)ㆍ성모(聖母)ㆍ무위(無爲)ㆍ자단(糍團)ㆍ원과(圓果) 등 약 수십여 파가 있어서 각기 문호를 세워 서로 전수해 온다. 그 근원은 진인(眞人) 장도릉(張道陵)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장각(張角)을 시조로 삼는다. 앉아서 운기(運氣)를 공부하고 표문(表文)으로 하늘에 기도하는 것은 모두 도교의 「과의(科義)」로서, 이른바 성모(聖母)란 바로 두모(斗母)이고, 자단(糍團)이란 것은 바로 허정(虛靜)으로 천사(天師 장도릉의 존칭)가 즐기던 것이다. 용호산(龍虎山) 제사에 반드시 인절미[糍]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명(明) 나라 때에 노생(盧生)이란 자가 망령되게 위경(僞經)을 편찬하고는 《오부육책(五部六冊)》이라고 이름했었는데 근세에 그를 높여 노조(盧祖)라 하였다. 또 교비(敎匪)라는 것이 있는데 팔괘(八卦)로 표호(標號)를 지으니, 백련교(白蓮敎) 같은 따위이다. 백련교는 청 고종(淸高宗) 건륭(乾隆) 때에 난리를 일으킨바, 군대를 동원하여 토벌하느라 온 국내가 소모되었으나 오히려 뿌리를 뽑지 못하였다.


    현재 요도(妖道)에서 불식법(不食法)은 벽곡환(辟穀丸)을 말하고, 미리 일을 아는 것은 도우인(桃偶人 복숭아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을 말하고, 소단법(燒丹法)은 방중약(房中藥)을 말하고 점금술(點金術)은 축은법(縮銀法)을 말하고, 입명법(入冥法)은 말리근(茉莉根)이고, 신선을 부르는 것은 영귀(靈鬼)를 빌린 것이고, 반혼법(返魂法)은 여우와 도깨비를 부리는 것이고, 물건을 운반하는 것은 오귀(五鬼)의 술이고, 병인(兵刃)을 피하는 것은 철포삼(鐵布衫)이고, 사람을 유혹하여 나를 따르게 하는 것은 호선(狐仙)과 기이한 향(香)과 고수(蠱水)이다.


    도가 외에 또 도가 같으면서 아닌 것이 있으니 곧 비건국(毗騫國)의 왕으로, 청(淸) 나라에서는 동객이사호이 파파왕(董喀爾寺乎爾把把王)이라고 칭한다. 《남사(南史)》ㆍ《북사(北史)》에 이르기를 "왕의 머리 길이가 3척이며 예부터 죽지 않았다. 저서가 있는데 불경과 같은 것으로 3천 자가 되며, 사람의 선악과 장래의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한다. 남쪽 지방에서는 장경왕(長頸王)이라 호하며 그 자손의 수명은 일반인과 같다." 하였다.


    비건국에 대하여 《남사》에 이르기를 "이 나라는 양(梁) 나라 때에 알려진바, 돈손(頓遜)의 밖 큰 바다 섬 가운데에 있는데, 부남(扶南)에서 8천 리나 된다. 그 왕의 신장은 두 길이나 되며 목 길이가 3척이다. 예부터 죽지 않아 그 나이를 알지 못한다. 왕이 신성(神聖)하여 나랏사람의 선악과 장래의 일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감히 속이는 자가 없다. 남쪽 지방에서 장경왕이라 호하며, 왕은 항상 누대에 거처하고 혈식(血食)하지 않으며 귀신을 섬기지 않는다. 그 자손의 수명은 일반인과 같고 오직 왕만이 죽지 않는다. 왕은 또한 천축(天竺)의 책을 만들었는데 3천 자가 되는바, 숙명(宿命)의 원인을 말한 것으로 불경과 비슷하며 아울러 선한 일을 논했다." 하였다.


    우리나라 도교도 연혁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예부터 도교가 없었던바, 《북사》에서 이미 말하였다. 그 처음 시작된 것은 고구려부터였으며 승조(勝朝 고려를 가리킨다)와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따르다가, 본조의 중엽에 이르러 혁파되어 영영 없어졌다.


    《삼국사기》를 상고해 보면, 고구려 영류왕(榮留王)이 수 공제(隋恭帝) 의령(義寧) 2년(무인)에 즉위하여 당 태종(唐太宗) 정관(貞觀) 16년(임인)에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시해되었다. 그 해에 막리지(莫離支) 연개소문이 왕에게 이르기를 "유(儒)ㆍ불(佛)ㆍ선(仙) 삼교(三敎)는 비유하면 마치 솥발과 같은 것인데, 지금 유교와 불교는 아울러 일어났으나 도교는 성하지 못하오니, 청하옵건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구해 오소서." 하니, 왕은 그 말을 따랐다. 영류왕 7년(갑신) 2월에 당 나라에서 형부 상서(刑部尙書) 심숙안(沈叔安)을 보내어 왕을 책봉(冊封)하고 또 도사를 명하여 천존상(天尊像)과 도교를 보내와 노자의 《도덕경》을 강했으며, 8년(을유)에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어 불(佛)ㆍ노(老)의 교법을 배우게 하였다. 보장왕(寶藏王) 2년(계묘)에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어 도교를 구하자, 황제는 도사 숙달(叔達)등 8명을 보내고 겸하여 노자의 《도덕경》을 하사하였다.


    고려에 이르러는 이중약(李仲若)이 산에 들어가 선학(禪學)을 좋아하였다. 뒤에 항해하여 송(宋) 나라에 들어가서 황대충(黃大忠)을 따라 친히 도교의 요점을 전수받고 본국에 돌아와 상소하여 현관(玄觀 도관(道觀)의 별칭)을 설치하여 국가의 재초(齋醮)하는 곳을 삼으니, 복원궁(福源宮)이 바로 그것이다.


    《송사(宋史)》를 상고해 보면, 고려에는 도관이 없었는데 휘종(徽宗)의 대관(大觀) 때에 조정에서 도사를 보내어 고려에 가서 마침내 복원궁을 세우고 도사 70여 명을 두니, 이는 예종(睿宗) 때 무자년(예종 3, 1108)ㆍ기축년(예종 4, 1109) 사이였다. 고려 인종(仁宗) 신해년(인종 9, 1131)에 노장(老莊)의 학을 배우는 것을 금지했으며, 신라와 백제에 있어서는 역사 책에 나오지 않는다.


    본조에 들어와《경국대전(經國大典)》예전(禮典)을 보면, 10가지의 도류(道流)를 뽑는데, 금단(禁檀)을 외고 《영보경(靈寶經)》ㆍ《과의(科義)》ㆍ《연생경(延生經)》ㆍ《태일경(太一經)》ㆍ《옥추경(玉樞經)》ㆍ《진무경(眞武經)》ㆍ《용왕경(龍王經)》중에서 세 경을 읽었다. 소격서(昭格署)를 서울의 삼청동(三淸洞)에 두고 삼청(三淸)의 초제(醮祭)를 관장하게 하고 제조(提調)ㆍ영(令)ㆍ별제(別提)ㆍ참봉(參奉)을 두었으며, 또 자수궁(慈壽宮)을 설치하고 여도사(女道士)가 거주하였다. 중종(中宗) 기묘년(중종 14, 1519)에 삼사(三司 홍문관(弘文館)ㆍ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에서 간하여 폐지하였다가 을유년(종종 20, 1525)에 다시 세웠으며, 임진 왜란 이후에 영영 폐지되었다.


    또 태일전(太一殿)이 의성현(義城縣) 동쪽 빙산(氷山)에 있는바, 매년 상월(上元 정월 보름)에 강향(降香)하여 제사하다가 성종(成宗) 기해년(성종 10, 1479)에 태안(泰安)의 백화산(白華山)에 옮기고는 인하여 강향을 폐지하였으니, 이는 우리나라 도교의 전말이다.


    또 수련(修鍊)에 대한 한 가지 말이 《전도록(傳道錄)》에 실려 있는바, 신돈복(辛敦復)이 그 일을 기록하였다. 인조(仁祖) 때에 한 중이 관동(關東 강원도(江原道) 지방에 놀러 갔다가 구류되어 관청에게 수색을 당한 결과 책 한권을 내놓았는데 제목을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이라 하였다. 고을 원이 이 책을 택당(澤堂) 이식(李植)에게 보내자 택당은 위하여 한 글을 붙여 세상에 전하였다. 여기에 말하기를 "당 문종(唐文宗) 개성(開成) 때에 신라의 최승우(崔承祐)ㆍ김가기(金可紀)와 중인 자혜(慈惠) 등이 당 나라로 유학가서 종남 천사(終南天師) 신원지(申元之)와 교분을 맺었다. 신원지는 선인(仙人) 종리 장군(鍾離將軍)에게 소개하니, 그는 말하기를 '신라에는 도교의 인연이 없어서 다시 8백 년을 지난 다음에야 마땅히 환반(還反)의 지결(旨訣)이 있어서 저들에게 선양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도교가 더욱 성하여 지선(地仙) 2백이 나와 온집이 하늘로 올라가서 신선이 되어 도교를 크게 할 것이다.' 하고는 세 사람에게 도법을 전수해 주니, 《청화비문(靑華祕文)》ㆍ《영보필법(靈寶畢法)》ㆍ《팔두오악결(八頭五岳訣)》ㆍ《금고(金誥)》ㆍ《내관(內觀)》ㆍ《옥문보록(玉文寶籙)》ㆍ《천둔(天遁)》ㆍ《연마법(鍊魔法)》등의 책과 구결(口訣)이 있었으며, 또 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參同契)》와 《황정경(黃庭經)》ㆍ《용호경(龍虎經)》ㆍ《청정심인경(淸淨心印經)》과 연등(燃燈)이 있는데 서로 전수하여 명맥을 전한다." 하였다.


    최고운(崔孤雲 고운은 최치원(崔致遠)의 호)도 당 나라에 들어가 환반(還反)하는 학설을 얻어 전하여 아울러 우리나라 단학(丹學)의 시조가 되었으니, 그 가장 뛰어난 것은 《참동계》의 16가지 구결이다. 단학파 중에 저서하여 전수한 것으로 정염(鄭)의 《단가요결(丹家要訣)》, 권극중(權克中)의 《참동계주해(參同契注解)》, 이지함(李之菡)의 《복기문답(服氣問答)》, 곽재우(郭再祐)의 《복기조식진결(服氣調息眞訣)》이 그 관건이며, 근세에 허미(許米)가 단학에 대한 공부를 깊이 깨달아 도교의 서적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니, 이는 단학의 시말(始末)이다.


    또 시해(尸解) 한 파가 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시해가 다섯 가지인바, 곧 금ㆍ목ㆍ수ㆍ화ㆍ토 다섯 가지의 시해이다. 신라의 석현준(釋玄俊)이 당 나라에 들어가 그 법을 배워 보사 유인(步舍游引)하는 술을 저술하였다. 최고운 역시 중국에 유학하여 그 법을 얻었으나 우리나라에 돌아온 다음 잊어버렸다. 그리하여 현준(玄俊)에게 배우니, 현준은 바로 그의 외삼촌으로 가야 보인법(伽倻步引法)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 또 양수 시해(量水尸解)와 송엽 시해(松葉尸解)가 있는바, 이 법 역시 4, 5가지로 나뉘었으니, 이는 모두 도가의 지말(枝末)이다.


    그 전도의 근원을 소급해 보면 종리권(鍾離權)이 신라 사람 최승우ㆍ김가기와 중 자혜에게 전수하였으며, 최승우는 최고운과 이청(李淸)에게 전수하였고, 이청은 명법(明法)에게 전수하였으며, 명법은 다시 자혜에게 전수하여 그 요점을 모두 얻었다. 자혜는 권청(權淸)에게 전수하였고, 권청은 원(元) 나라 설현(偰賢)에게 전수하였으며, 설현은 김시습(金時習)에게 전수하였고, 김시습은 홍유손(洪裕孫)에게 《천둔검법(天遁劍法)》과 《연마진결(鍊魔眞訣)》을 전수하였으며, 또 옥함(玉函)에다가 단약을 만드는 요점을 기록하여 정희량(鄭希良)에게 전수하였고, 《참동계》ㆍ《용호경》의 비지(祕旨)를 윤군평(尹君平)에게 전수하였다. 윤군평은 곽치허(郭致虛)에게 전수하였고, 정희량은 중 대주(大珠)에게 전수하였으며, 대주는 정염(鄭)과 박지화(朴枝華)에게 전수하였다. 홍유손은 밀양(密陽)에 사는 과부 박씨(朴氏) 묘관(妙觀)에게 전수하였고, 묘관은 강귀천(姜貴千)과 장도관(張道觀)에게 전수하였으며, 곽치허는 한무외(韓無畏)에게 전수하였다. 권 청은 남궁두(南宮斗)에게 전수하고 또 조운흘(趙云仡)에게 전수하였다.


    스승의 전수없이 여러 책에 흩어져 나오는 것으로는 남추(南趎)ㆍ최탕(崔湯)ㆍ장세미(張世美)ㆍ강귀천과 단양(丹陽)의 이인(異人), 이광호(李光浩)ㆍ갑사(岬寺)에 사는 중과, 김세마(金世麻)ㆍ문유채(文有彩)ㆍ정지승(鄭之升)ㆍ이정해(李廷楷)ㆍ곽재우ㆍ김덕량(金德良)ㆍ이지함ㆍ정두(鄭斗) 등 여러 사람인데, 듣고 보는대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산만하여 차서가 없다.


    도가가 당초에는 선도(仙道)가 아니고 구류(九流)에 나열된 것이었는데, 후세에는 마침내 신선을 도교라 하여 점차 방기(方技)의 유(流)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변증이 없을 수 없다. 신선도 다섯 종류가 있으며 도사도 다섯 등급으로 나뉘어진다.


    천선(天仙)이란 여러 겁(劫)을 수행하여 일찍부터 영근(靈根)과 혜성(慧性)을 간직하고 선(善)한 가문에 의탁하여 태어나서 천진 그대로 도(道)에 들어간다. 지인(至人)이 무상(無上)한 한 가지 방편을 전해 주어, 하늘과 땅을 화로와 솥으로 삼고 해와 달을 물과 불로 삼아 청정(淸靜)하고 자연스러워 내외가 지극히 순수하며 삼계(三界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를 뛰어나 우리[樊籠]를 타파하니, 이는 바로 하늘을 의지하여 하늘에서 나온 자이다.


    지선(地仙)이란 올바른 행실을 반드시 실천하고 뜻은 세속을 떠날 결심이 굳어 장년기에 도를 배워서 조화의 기이한 것을 환히 알고 생물의 이치를 안다. 단약을 연단하고 약을 먹어 장생해서 육신을 세상에 오랫동안 머물러 두어 육지에서 신선을 행하니, 이는 바로 땅을 의뢰하여 땅을 얻은 자이다.


    신선(神仙)이란 날 때부터 선풍 도골(仙風道骨)이 있어 크게 충성하고 크게 효도하여 공을 많이 쌓고 행실을 닦는다. 소년에 도를 사모하여 진세(塵世)에서 살기를 싫어하고 명산 복지(名山福地)에 들어가 정(精)을 연마하여 기(氣)로 만들고 기를 연마하여 신(神)으로 만들고 신을 연마하여 허(虛)로 만들어, 먼저 옥액(玉液)을 수련하고 뒤에 금단(金丹)을 연단하여 음이 다하고 순전히 양만 있어, 범인(凡人)을 초월하여 성인에 들어간다. 형(形)ㆍ기(氣)를 분화하여 유유자적하게 소요(逍遙)하니, 이는 바로 신을 연마하여 신으로 돌아온 자이다.


    인선(人仙)이란 겸손하고 공경하는 것으로 자기를 지키고 사람과 함께 하기를 잘한다. 중년과 말년에 명리(名利)에 대한 기심(機心)이 없어서 환경을 대하면 정욕을 잊어 운기(運氣)로 명을 접속시킨다. 납[鉛]을 뽑아 내고 수은을 더하여 감(坎)을 취하여 이(离)를 메운다. 토해내고 들이마시는 것을 때에 따라하고 도인(導引)으로 뼈마디를 단련해서 심신이 안락하여 병을 물리치고 수명을 연장하니, 이는 사람을 빌어 사람을 구제하는 자이다.


    귀선(鬼仙)이란 성품이 본래 용렬하여 대도(大道)를 깨닫지 못하고 다만 한 가지 화두(話頭)를 갖고 마음을 어지럽지 않게 하여 식신(識神)이 깨치는 것을 한 경지로 삼으며, 혹은 재계(齋戒)를 잘 지켜 육신은 마른 나무와 같고 마음은 꺼진 재와 같아서 선정(禪定)할 때에는 음신(陰神)이 나올 수 있고 죽은 뒤에는 정령(精靈)이 흩어지지 않아 능히 투태(投胎)하고 탈사(奪舍)하니, 이는 바로 순전히 음뿐이고 양이 없어 끝내 귀신의 기미를 떠나지 못한 자이다.


    이것이 바로 선도의 다섯 가지 종류로서 천선ㆍ지선ㆍ신선ㆍ인선ㆍ귀선이다. 이 다섯 가지 중에 천선과 지선은 절대로 배우기 어렵고 신선이나 인선에 이르면 약간은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범속하고 고루한 것을 뛰어넘고 벗어나지 않으면 결코 바랄 수 없으니, 《참동계》의 환반하는 지결을 자세히 읽으면 반드시 할 수 있다. 귀선으로 말하면 끝내 귀신의 기미에 들고 마니, 이것은 비록 각각 다섯 신선 가운데 나열되긴 하지만 어찌 할 만한 것이겠는가.


    예로부터 신선이 신을 내는 것에 대해서는 딴 특별한 말이 없다. 신은 이미 나의 원신(元神)이니 금액(金液)을 점화해서 따뜻하게 10개월을 기르면 기(氣)가 충족하고 신이 신령스러워 환골 탈태를 하고 스스로 나와, 몸 밖의 몸을 가져서 빛이 구천(九天)에 비추니, 이는 존상법(存想法 나의 신을 보존하여 나의 몸을 생각하는 것)에 비할 수 없는 것으로 실로 양신(陽神)의 광(光)이다. 귀신은 볼 수도 없는 것이고 알 수도 없는 것이다. 귀신을 만일 알 수 있고 볼 수 있다면 이는 음신과 같은 것이요 양신이 아니다. 10개월의 공이 완전하여 불 온도가 어그러지지 않으면 기가 충족하고 신이 온전하여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자유로이 한다. 몸 밖의 몸이란 바로 법신(法身)으로, 모이면 형체가 이루어지고 흩어지면 기가 이루어진다. 음신은 능히 분신(分身)하거나 화형(化形)하지 못하지만 양신은 한 몸으로 백만 개의 몸이 되어 각기 음식할 수도 있고 사물을 응접할 수도 있으며, 사람이 그를 합치면 다시 하나가 되니, 이른바 '성스러워서 알 수 없는 것을 신이라 한다.[聖而不可知之之謂神]'는 것이다. 은현(隱顯)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고 변화가 무쌍하여 해와 달 아래서 걸어도 그림자가 없고 쇠나 돌에 들어갈 때에도 장애가 없으며 천리 만리를 순식간에 도달하고 과거와 미래를 일일이 모두 알아야만 바야흐로 양신이 될 수 있다. 양신은 출입할 때에 모두 정문(頂門)을 말미암으니,


    아, 훌륭하다. 반환(反還)의 도여! 천지와 똑같이 훌륭한데 사람만이 능하니, 천지 사이에 무엇이 사람보다 신령스러운 것이 있겠는가.


    도사에 있어서도 다섯 가지 등급이 있다. 《삼동도과(三洞道科)》에 이르기를 "도사가 다섯 가지이니, 첫째는 천진도사(天眞道士)로 고현(高玄)ㆍ황인(黃人)의 따위이고, 둘째는 신선도사(神仙道士)로 두충(杜沖)ㆍ윤궤(尹軌)의 예이고, 셋째는 산거도사(山居道士)로 허유(許由)ㆍ소보(巢父)의 무리이고, 넷째는 출가도사(出家道士)로 송윤(宋倫)ㆍ팽심(彭諶)의 무리이고, 다섯째는 재가도사(在家道士)로 황경(黃瓊)ㆍ전갱(籛鏗)의 무리이다." 하였다.


    도가에서 이미 노자를 높여 조종으로 삼았으니, 노군의 내력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에 여러 말을 수집하여 중복되는 것을 따지지 않고 그 기록한 바를 따라서 근본 학설을 보존하려 한다.


    노자에 대하여 진(晉) 나라 이석(李石)의 《속박물지(續博物志)》에 "노군의 어머니가 일찍이 태양의 정기가 유성(流星)처럼 낙하하여 입 안으로 날아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이때부터 임신하여 72년 만에 진(陳) 나라 와수(渦水)의 오얏나무 아래에서 낳았는데, 왼쪽 겨드랑을 찢고 나왔으며 몸 길이가 12척이었다." 하였다.


    주 정왕(周定王) 3년(정사)에 노자가 출생하였는데, 《유서(類書)》에 이르기를 "노자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이(耳)이며 또는 담(聃)이라고도 하고 또는 백양(伯陽)이라고도 하는바, 초(楚) 나라 고현(苦縣) 뇌향(瀨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가 밤에 오색 진주가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진주를 삼켜 임신해서 뱃속에 있은 지 81년 만에 오얏나무 아래에 소요하다가 그를 해산하게 되었는데, 그는 어머니의 왼쪽 겨드랑을 찢고 나와서 오얏나무를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나의 성이다.' 하였다. 신장이 8척 8촌이며 살갗이 황색이고 눈썹이 아름다우며 귀가 길고 눈이 크며 이마가 넓고 이빨이 성기며 입이 네모지고 입술이 두터우며 이마에는 삼오(三五)의 달리(達理)가 있고 일월각(日月角)이 또렷하며 코에는 쌍주(雙柱)가 있고 귀에는 삼문(三門)이 있으며 발로는 이오(二五)를 밟고 손에는 십문(十文)을 잡고 있었다." 하였다.


    노담이 산림에 있을 적에 공자(孔子)가 보고는 "유신(游神 정신을 쓰고 있는 것)하는 바를 들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노담은 "나는 현재 물건의 태초(太初)에 유신하고 있다." 하였다. 공자는 "나는 새는 화살로 잡을 수 있고, 달아나는 짐승은 그물로 잡을 수 있으며,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로 잡을 수 있지만, 용에 있어서는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서 어쩔 수가 없으니, 노자는 그 용과 같다." 하였다.


    노자는 주(周) 나라가 쇠망하는 것을 보고는 푸른 소를 타고 관(關)을 나가니 자주빛 기운이 떠 올랐다. 윤희(尹喜)를 위하여 《도덕경》을 지었다. 양읍(襄邑)의 남쪽 뇌향(瀨鄕)에 노자의 사당이 있으며 사당 안에 아홉 개의 우물이 있는데, 능히 청결하게 재계하고 이 골짝에 들어오는 자는 더운 물과 시원한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으며, 한 우물에 물을 뜨면 아홉 개의 우물이 모두 움직인다 한다.


    윤희는 주 나라 대부(大夫)로 관을 맡았다. 그의 어머니가 낮 꿈에 하늘에서 붉은 비단을 내려 자기 몸을 감싸는 꿈을 꾸었다. 진인(眞人 윤희를 가리킨다)이 태어날 때에 육지에 있던 그 집에서 즉시 연꽃이 나왔는데 빛깔이 몹시 고왔다. 눈에는 태양의 정기가 있었으며 키가 크고 모습이 단아하며 팔이 무릎 아래까지 드리워서 당당히 천인(天人)의 용모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수많은 서적을 관장하고 있었으며, 천문(天文)과 비위(祕緯 비밀스러운 위서(緯書))를 잘 알아 위로 천문을 관찰하고 아래로 지리를 살펴서 모두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비록 귀신도 그 참모습을 숨길 수 없으므로 노자가 감탄하였다 한다.


    진강(陳剛)의 자는 무욕(無欲)이며 별호는 진무귀(陳无鬼)이다. 그의 말에 "노자는 주 나라 말기에 출생하였는바, 바로 지금의 하남부(河南府) 영보현(靈寶縣) 지방이다. 그의 아버지는 이름이 광(廣)으로 시골의 가난한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부잣집에서 품팔이하며 나이가 70이 넘도록 아직 아내가 없었으며, 노자의 어머니 역시 시골 어리석은 부인으로 나이가 40이넘도록 아직 남편이 없었다. 이들은 우연히 산중에 있다가 구차히 결합하였는데, 천지의 영기를 얻어 노자를 밴 지 80개월이나 되었다. 그의 주인은 임신 기간이 오랜 것을 미워하여 집에 있지 못하게 하므로 부득이 들판의 큰 오얏나무 아래에 달려가서 머리털이 희고 눈썹이 흰 한 아들을 낳았다. 그 어머니는 남편인 광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으므로 곧 오얏나무[李]를 가리켜 성을 하였으며 귀가 큰 것을 보고는 마침내 이(耳)라 이름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의 머리털이 흰 것을 보고 노자(老子)라 불렀다. 장성하자 주 나라 천자가 관람하는 장서각의 낮은 벼슬아치가 되었는데, 고사와 고례(古禮)를 많이 알고 있었던 까닭에 공자가 그에게 예를 묻고 벼슬을 물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나이가 들자 주 나라 황실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보고는 마침내 푸른 소를 타고 서쪽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 관문을 지키는 윤희를 만나 스승이 되어 《도덕경》 5천 자를 짓고는 마침내 진천(秦川) 주질현(盩厔縣)에서 죽어, 그 무덤이 이곳에 있으니, 이것이 노자의 본말이다. 생전에 능히 주 나라 황실의 혼란을 구원하지 못하고 또 터럭끝 만한 공업을 세상에 세우지 못했는데, 죽어서는 마침내 도리어 천상의 삼청(三淸)이 되었다 하니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현묘내편(玄妙內篇)》에 "노자의 어머니는 남편이 없다." 하였다. 《노사(路史)》소호기지(少昊紀志)에 "노자의 아버지는 건원고(乾元杲)로 나이가 72세였으나 아내가 없었는데, 이웃 사람 익수(益壽)와 야합(野合)하여 임신한 지 10년 만에 노자를 낳았다." 하였다. 위(魏) 나라 최홍(崔鴻) 이 지은《전량기(前涼記)》에는 "노자의 아버지는 이름이 건(乾)이고 자가 원고(元杲)로 배안의 발병신에 귀가 없으며 한쪽 눈은 밝지 못하고 고단하여 나이 72세가 되도록 아내가 없었는데, 이웃 사람 익수씨(益壽氏)의 늙은 여자와 야합하여 임신한 지 80년 만에 마침내 노자를 낳았다." 하였다. 《현묘내편》에 "노자가 처음 낳았을 때의 이름은 현록(玄祿)이다" 하였고, 하상공(河上公)은 이르기를 "노자의 일명은 중이(重耳)이다." 하였으며, 《사기》에 "노자의 자는 담(聃)이다." 하였다.


    《원화지(元和志)》에 "노자의 어머니 사당이 진원현(眞元縣) 동쪽 14리에 있다. 건봉(乾封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원년에 책봉하여 선천태후(先天太后)라 호하였으니, 노자의 어머니이다. 노자의 아들은 이름이 종(宗)으로 위(魏) 나라 장수가 되었다. 종의 아들은 주(注)이고 주의 아들은 관(官)이며 현손 가(假)는 한 문제(漢文帝)에게 벼슬하였다. 가의 아들 해(解)는 교서왕(膠西王)의 태부(太傅)가 되어 자손들이 대대로 현달하였으며 모두 충효(忠孝)로 가문을 계승했다. 박주(亳州)에 노군의 비(碑)가 있다.


    노군(老君) 뒤에 장도릉(張道陵)이란 자가 있었는데, 호가 천사(天師)로 도교의 괴수가 되었으니, 이 역시 그 사실을 간략히 기재하지 않을 수 없다.


    장천사 도릉의 자(字)는 보한(輔漢)으로 장량(張良)의 자손이라 하기도 하며, 아니라고도 한다. 이응(李膺)의 촉서(蜀書)에 "장도릉이 뱀에게 먹히어 상승(上昇)하였다는 설은 잘못이다. 도릉 이후 대대로 부첩(符牒)과 기초(祈醮)를 맡아 일삼아 왔으며, 또 송(宋)ㆍ원(元) 시대로부터는 천사라는 직호(職號)를 수여했다가 명(明) 나라 초기에 진인(眞人)으로 호를 고쳤는데, 품계(品階)가 정2품(品)이다. 공자(孔子)의 자손에게 대대로 연성공(衍聖公)을 수여한 것과 같으나, 반열(班列)이 연성공의 위에 있어서 도교를 높이는 것이 성인(聖人 공자를 말한다)을 높이는 것보다 중히 했다." 하였다.


    청(淸) 나라 왕사진(王士禛)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때 강서(江西)의 수신(守臣 지방을 맡은 관원)이 말하기를 '장씨에게 직함과 인장(印章)을 주는 것이 법전에 실려 있지 않으니, 길이 폐지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따라 조칙으로 진인이라는 호를 버리고 상청관 제점(上淸觀提點)이라 했었는데,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초기에 다시 회복하여 지금까지 내려온다." 하였다.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12년(정묘)에 복준(覆準)하기를 "강남(江南)의 장씨가 용호산(龍虎山)에 세거(世居)하는바, 진인이란 칭호는 조관(朝官)의 경(卿)이나 윤(尹)의 칭호가 아닙니다. 그 옛 명칭을 그대로 두는 것은 바로 유품(流品 품계가 있는 일반 관리)과 구분하기 위한 것인데, 이는 진실로 상고할 만한 옛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 번이나 특별한 은혜를 받아 품계가 광록대부(光祿大夫)에까지 이르고 3대(代)나 봉해 준 것은 너무 분수에 지나친 영광이므로 의리상 당연히 고쳐야 합니다. 정일 진인(正一眞人)으로 말하면 용호산의 상청궁(上淸宮)에 있는 도교의 신도를 통솔할 책임이 있으니, 도법을 전하는 제점(提點)보다는 약간 낫습니다. 상고하옵건대, 태의원 사(太醫院使)의 품계가 정5품이니, 의원이나 무당은 본래 서로 비등합니다. 그러니 정일 진인 역시 당연히 정5품을 수여해야 합니다. 조근(朝覲)이나 연회에 참예하는 것 역시 불편하니, 도류(道流)들을 이 사이에 참예하게 하는 것도 일체 정지해야 합니다." 하였다.


    1행


    자고로 황로(黃老)와 신선술(神仙術)을 좋아한 연 소왕(燕昭王)ㆍ제 선왕(齊宣王)ㆍ진 시황(秦始皇)ㆍ한 무제(漢武帝) 같은 역대의 제왕은 먼 옛날이니 말할 것 없고, 도교를 높인 것은 당 현종(唐玄宗)보다 심한 자가 있지 않다. 당 현종 천보(天寶) 원년에 황제는 친히 노자에 제향하고 현원황제(玄元皇帝)로 봉했으며, 몸소 어버이 사당에 제향하고는 장자(莊子)를 남화진인(南華眞人), 문자(文子)를 통현진인(通玄眞人), 열자(列子)를 충허진인(沖虛眞人)에, 경상자(庚桑子)를 동허진인(洞虛眞人)에 봉하여 배향하였다. 처음에 태청궁(太淸宮)이 완성되자 기술자를 명하여 태백산(太白山)에서 흰 돌을 캐다가 현원황제의 상(像)을 만들어 남향하고 좌우에 현종과 숙종(肅宗 현종의 아들)의 상이 모시고 서 있게 하였다.


    송 진종(宋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원년(무신)에 천서(天書)를 얻었는데, 황제가 이르기를 "신인(神人)이 성관(星冠 도사가 쓰는 관)과 붉은 옷을 입고 나에게 고하기를 '마땅히 천서를 내릴 것이니, 정전(正殿)에다가 황록도량(黃籙道場)를 베풀라.' 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조원전(朝元殿)에서 재계하고 신의 주문(呪文)을 저장해 두었다. 그런데 마침 황성사(皇城司)에서 아뢰기를 '왼쪽 승천문(承天門) 지붕의 남쪽 귀퉁이에 황색 비단이 치미(鴟尾)위에 내려져 있다.' 하므로 궁중의 사신을 시켜서 가보게 하였더니, 비단 길이가 두 길쯤 되는데 푸른 끈으로 묶여져 있으며 은은히 글자가 있었다." 하였다. 재상인 왕단(王旦) 등이 재배하고 축하하니, 황제는 도보로 승천문에 이르러 우러러보고 재배한 다음, 진극수(陳克叟)를 시켜 읽게 하였다. 이 천서는 황색 글자로 3폭에 씌어져 있었는데 황금 궤에 넣었다가, 25년인 건흥(乾興) 원년(임술)에 황제가 붕(崩)하자 천서를 순장(殉葬)하였으니, 이 역시 도교를 높인 것의 하나이다.


    휘종(徽宗) 중화(重和) 원년(무술)에 태학(太學)과 벽옹(辟雍 학궁(學宮)의 하나)에 각각 《황제내경(黃帝內經)》ㆍ《도덕경》ㆍ《장자》ㆍ《열자》에 대한 박사(博士) 1명을 두게 하였다. 채경(蔡京)이 "고금의 도교에 관한 일을 모아 기지(紀志)를 만들자." 하니, 이에《도사(道史)》라는 명칭을 하사하고는, 장주(莊周)를 봉하여 미묘원통진군(微妙圓通眞君)을 삼고, 열어구(列禦寇)를 치허관묘진군(致虛觀妙眞君)에 봉하여 책명(冊命)을 행하고 혼원 황제(노자)에 배향하였다. 이때 임영소(林靈素)라는 도사가 있어서 존숭하는 일을 맡았다.


    《송사(宋史)》 영소전(靈素傳)에 "본명은 영악(靈蘁)이었는데 선화(宣和 송 휘종의 연호) 때에 지금의 이름인 영소로 사명(賜名)하였다. 영소는 채경을 북부육동(北部六洞)의 마왕(魔王)과 제이동(第二洞)의 대귀두(大鬼頭)라 하고 동관(童貫)을 비천대귀모(飛天大鬼母)라 하여 황제에게 벨 것을 권하였다. 원우간당비(元祐姦黨碑)를 보고는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하고 시를 지어 올렸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소와 황이 문장가가 되지 못하고/蘇黃不作文章客
    동과 채가 도리어 사직신 되었구려/童蔡飜爲社稷臣
    삼십 년 동안 정론이 없었으니/三十年來無定論
    간당이 누구인지 알 수 없네/不知姦黨是何人


    그 다음날 황제는 이것을 채경에게 보이니, 채경은 황공해서 밖으로 나가기를 청하였다. 그의 관직은 '고상신소옥청부 우극서대선경 뇌정옥추원명 보화천사 동명문일계원응진전도보교종사 금문우객 충화전시신 행시진태재동중서문하평장사 상주국 노군 개국공(高上神宵玉淸府右極西臺仙卿雷霆玉樞元明普化天師洞明文逸契元應眞傳道輔敎宗師金門羽客沖和殿侍宸行時進太宰同中書門下平章事上柱國魯郡開國公)'이며 봉읍(封邑)이 8천 7백 호로서 실봉이 3천 호였고, 자옥방부통진달령원묘호국선생(紫玉方符通眞達靈元妙護國先生)이란 호를 하사하였다. 정화(政和) 7년(정유)에 휘종은 교주도군황제(敎主道君皇帝)라 존칭했다." 하였다. 원 성종(元成宗)은 방사(方士) 장여재(張與材)를 태소응신광도진인(太素應神廣道眞人)으로 삼아 강남 여러 도(道)의 도교를 통솔하게 하였다.


    무릇 역대의 여러 임금들이 도교를 존숭하기는 쉬웠고 도교를 배척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불교를 높이고 도교를 배척하는 것을, 이단(異端)을 물리친 것이라고 한다면 옳지 못하다.


    몽고(蒙古)의 헌종 몽가(憲宗蒙哥) 때에 북지(北地) 장춘궁(長春宮)의 도사가 번승(番僧)과 혐의가 있었다. 그리하여 번승은 달단(韃靼)의 임금을 달래면서 말하기를 "도경(道經)은 위작이고 황당한 말들입니다. 몽가 때에 도사가 불교를 배척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머리 깎고 중이 되었습니다. 이제 마땅히 도경을 불살라야 합니다." 하였다. 달단의 임금은 과연 남군(南郡)ㆍ북군(北郡)에 있는 도장경(道藏經)을 불살라버리고 다만 노자의 《도덕경》을 허락했으며, 거의 도사를 멸하여 머리 깎고 중을 만들었다. 명 성조(明成祖)는 금단(金丹)과 도경의 책을 훼손하였다.


    도교의 시초는 천전 도서(天篆道書)가 있는바,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그 내용이 가장 자세하다.


    《수서》경적지에 "도경이란 맨 처음에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있었는데, 태원(太元)보다는 먼저 태어났고 자연의 기(氣)를 부여받아 충허(沖虛 회포가 담박하고 공허한 것)하고 응정(凝定) 원대하여 궁극을 알 수 없다. 천지가 없어지느니 겁수(劫數)가 끝나느니 하는 말은 대략 불경과 같다. 그들은 말하기를 '천존의 체(體)가 언제나 존재하고 불멸하여 매양 천지가 처음 개벽하게 되면 혹은 옥경(玉京)의 위, 또는 궁상(窮桑)의 들에 있어서 비도(祕道)를 전하는데 이를 개겁(開劫)하여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다.' 한다. 그러나 이 개겁은 한 차례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연강(延康)ㆍ적명(赤明)ㆍ용한(龍漢)ㆍ개황(開皇)이 있는바, 이것이 그 연호이다. 이 사이의 거리는 41억만 년이다.


    구제해 주는 대상은 모두 여러 천선(天仙)의 상품(上品)으로서 태상노군(太上老君)ㆍ태상장인(太上丈人)ㆍ천진황인(天眞皇人)과 오방(五方)의 천제(天帝) 및 여러 선관(仙官)이 있어서 서로서로 전수해 받는데 일반 세상 사람들은 여기에 끼지 못한다. 이들이 말한 경(經) 역시 원일(元一)의 기(氣)를 받고 자연히 생긴 것으로 조작한 것이 아니어서 이것도 천존과 같이 항상 존재하고 불멸한다. 그리하여 천지가 파괴되지 않으면 깊이 쌓여 있어 세상에 전하지 않다가 만일 겁운(劫運)이 열리게 되면 그 글이 스스로 나타난다.


    이 글은 모두 여덟 글자로서 도체(道體)의 심오한 이치를 묘사한 것인데, 이를 천서라 한다. 글자는 크기가 사방 한 길쯤 되는데 8각에서 빛이 나와 광채가 휘황찬란한바, 자연히 마음이 놀라고 눈이 현황하여 비록 여러 천선(天仙)이라 하더라도 능히 자세히 볼 수가 없다. 이것은 천선이 개겁할 때에야 천진황인을 명하여 천음(天音)으로 고쳐 읽어 분석한 다음, 천진황인으로부터 여러 신선에 이르기까지 서로서로 계급을 두고 순서에 따라 전수해 준다. 그리하여 여러 신선이 전수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세상에 전수된다." 하였다. 이는 바로 도교의 본말인바, 세속의 선비들이야 어찌 이것을 알겠는가.


    1행


    도가의 글씨는 32종이 있다. 명 나라 진계유(陳繼儒)의 《미공비급(眉公祕笈)》에 도가의 글씨를 기록하고는 "도가의 자학(字學)은 삼동경(三洞經)


    교부(敎部)에 나온다." 하였는데, 그 종류는 다음과 같다.


    본부(本部) 운전(雲篆) 팔체육서문(八體六書文) 부자(符字) 팔현(八顯) 옥자결(玉字訣) 황문제서(皇文帝書) 천서(天書) 용장(龍章) 봉문(鳳文) 옥첩금서(玉牒金書) 석자(石字) 제소(題素) 옥자(玉字) 옥록(玉籙) 옥편(玉篇) 문생동(文生東) 옥찰(玉札) 단서(丹書) 옥책(玉策) 복운지서(福運之書) 낭규경문(琅虯璚文) 백은지륜(白銀之綸) 적서(赤書) 화련진문(火鍊眞文) 금호묵집자(金壺墨汁字) 경찰(瓊札) 자자(紫字) 자연지자(自然之字) 사회성자(四會成字) 낭간예서(琅簡蕊書) 석공(石碽). 보유(補遺)로는 무광(務光)의 도해서(倒薤書)와 석상선전(石上仙篆)이 있다.


    《집고록(集古錄)》에 송(宋) 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선전(仙篆)을 논한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복주(福州)의 영태현(永泰縣)에 무명의 전서(篆書)가 관음원(觀音院) 뒷산 위에 있는데, 세속에서는 선전이라고 전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조금도 전각한 흔적이 없어서 마치 사람이 손가락으로 진흙에 글자를 만든 것 같으며, 둥근 돌 모양을 따라 수레 바퀴처럼 원형으로 씌어져 있어서 머리와 끝을 알지 못한다."

     

     

    도경(道經)

    도가의 경(經)은 권질(卷帙)이 매우 많아서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고 할 만하다.


    송 나라《삼조국사지(三朝國史志)》에는 반고(班固)의 《한서》 예문지의 도가(道家) 외에 다시 신선을 열거해 놓고는 방기(方技)에 넣었다. 동한(東漢) 이후에 도가가 비로소 나타났는데, 진선(眞仙)의 경고(經誥)가 특별히 나왔다. 당 나라 개원(開元 당 현종의 연호) 때에 이 책들을 열거하여 도장(道藏)의 서목을 만들고 삼동경망(三洞瓊網)이라 한바, 총 3천 7백 44권이었다. 그 후 난리통에 혹은 파손되고 없어지기도 했었는데, 송 나라에서 다시 관원을 보내어 대조한바, 이 사실이 《노석지(老釋志)》에 자세히 적혀 있다.


    일찍이 이 서적을 구하여 7천여 권을 얻은 다음, 서현(徐鉉) 등을 명하여 교수(校讐)하게 하여 이 중에 중복된 것을 버리고 3천 7백 37권으로 만들었다. 송 나라 대중상부(大中祥符 송 진종(宋眞宗)의 연호) 때에 왕흠약(王欽若) 등을 명하여 옛 서목을 대조해서 삭제도 하고 보충도 하니 모두 4천 3백 59권이었다. 동진부(洞眞部)가 6백 20권, 동원부(洞元部)가 1천 13권, 동신부(洞神部)가 1백 72권, 태진부(太眞部)가 1천 4백 7권, 태평부(太平部)가 1백 92권, 태청부(太淸部)가 5백 76권, 정일부(正一部)가 3백 70권인데, 이를 합하여 신록(新錄)을 만드니, 총 4천 3백 59권이며, 6부(部)가 3백 11가지였다. 또 편목(篇目)을 찬하여 올리니, 《보문통록(寶文統錄)》이라 사명(賜名)하였다.


    《수서》 경적지에는 도경의 서목을 사부(四部)의 끝에 넣었으며, 당 나라 관소록(毋昭錄)에는 을부(乙部)와 병부(丙部)에 산재해 있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도가에서 말하기를 삼동(三洞)과 삼태(三太)가 모두 옥경(玉京 옥황상제가 살고 있다는 선경)에 있다 하는데, 상진(上眞)만은 구해 볼 수가 없으며, 장군방(張君房)이 수집한 도서는 모두 4천 5백 65권이었는데, 숭관(崇觀 송 휘종의 연호인 숭녕(崇寧)ㆍ대관(大觀)) 사이에 증가되어 5천 3백 87권에 이르렀다." 하였다.


    나는 상고하건대, 도서(道書)에 1권을 규(㢧)로 쓰는데 《진고(眞誥)》에는 권(卷)과 같이 쓴다 하였다. 혹은 규()로도 쓰는데 《정자통(正字通)》에 "음은 주(周)이다. 도서에 1권을 1규()라고 하는바, 도구성(陶九成 구성은 도 종의 (陶宗儀)의 자)의 《설부(說郛)》에 썼다." 하였다. 구본(舊本) 《자휘보(字彙補)》의 일설(一說)에는 규()는 곧 권(券)자라고 하였으며, 《자전(字典)》에는 양신(楊愼)의 《전주고운(轉注古韻)》을 인용하여 "규()는 음이 규(樛)이니 곧 도경(道經)에서 이를 빌려 권질(券帙)의 권(卷)자로 쓴다." 하였다. 《설문(說文)》에 의하면 "규(糾)는 마땅히 규()로 해야 한다. 규(糾)는 두르는 것[繞]이다. 도경에 있는 규(㢧)는 마땅히 규()로 써야 한다." 하였다. 《동관시론(東觀詩論)》에 "소송(小宋 송기(松祈)를 가리킨다)의 태을궁시(太乙宮詩)에,

     

    고목은 천 길이나 높고/古木千尋竦
    신선 그림은 몇 폭이나 열렸는가/仙圖幾弔開


    했다." 하였는데, 그 주(注)에 "《진고》에 1권을 1조(弔)라고 했다." 하였다. 《진고》에 "규()는 곧 권(卷)자이다." 한 것은 글자를 약자로 쓴 것이니, 조(弔)자가 아닌데, 이것을 모른 것이다. 벽허자(碧虛子) 진경원(陳景元)은 《진고》를 근거로 하여 이 글자를 편(篇)자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틀린 것이다.


    왕사진(王士禛)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 "도서에는 1권을 규()라고 하였고, 《속설부(續說郛)》에는 포형(包衡)이 말하기를 '도서에 1권을 1규(㢧)라고 하는데 음은 주(周)이다. 규(㢧)는 규()로도 쓰는데 축(軸)과 같다' 했다." 하였다. 제가(諸家)의 해석이 대동소이한바, 대개 권(卷)과 같다.


    진(晉) 나라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에 도경의 총목이 모두 6백 70여 종인데, 그 조목은 다음과 같다. 《삼황내문(三皇內文)》 천ㆍ지ㆍ인 3권ㆍ《미언(微言)》3권ㆍ《원문(元文)》상ㆍ중ㆍ하 3권ㆍ《내시경(內視經)》ㆍ《혼성경(混成經)》2권ㆍ《문시선생경(文始先生經)》ㆍ《현록(玄錄)》2권ㆍ《역장연년경(曆藏延年經)》ㆍ《구생경(九生經)》ㆍ《남궐기(南闕記)》ㆍ《이십사생경(二十四生經)》ㆍ《협룡자기(協龍子記)》7권ㆍ《구선경(九仙經)》ㆍ《구궁경(九宮經)》5권ㆍ《영복선경(靈卜仙經)》ㆍ《삼오중경(三五中經)》ㆍ《십이화경(十二化經)》ㆍ《선상경(宣常經)》ㆍ《구변경(九變經)》ㆍ《절해경(節解經)》ㆍ《노군옥력진경(老君玉曆眞經)》ㆍ《추양자경(鄒陽子經)》ㆍ《묵자침중오행기(墨子枕中五行記)》5권ㆍ《일보경(溢寶經)》ㆍ《현동경(玄洞經)》10권ㆍ《식민경(息民經)》ㆍ《학명경(鶴鳴經)》ㆍ《기산경(箕山經)》10권ㆍ《원시경(元示經)》10권ㆍ《녹대경(鹿臺經)》ㆍ《자연경(自然經)》ㆍ《소동경(小僮經)》ㆍ《음양경(陰陽經)》ㆍ《하락내기(河洛內紀)》7권ㆍ《양생서(養生書)》1백 5권ㆍ《거형도성경(擧形道成經)》5권ㆍ《태평경(太平經)》50권ㆍ《도기경(道機經)》5권ㆍ《구경경(九敬經)》ㆍ《견귀기(見鬼記)》ㆍ《갑을경(甲乙經)》1백 70권ㆍ《무극경(無極經)》ㆍ《청룡경(靑龍經)》ㆍ《관씨경(官氏經)》ㆍ《중황경(中黃經)》ㆍ《진인옥태경(眞人玉胎經)》ㆍ《태청경(太淸經)》ㆍ《도근경(道根經)》ㆍ《통명경(通明經)》ㆍ《후명도(候命圖)》ㆍ《안마경(按摩經)》ㆍ《반태포경(反胎胞經)》ㆍ《도인경(導引經)》10권ㆍ《침중청기(枕中淸記)》ㆍ《원양자경(元陽子經)》ㆍ《환화경(幻化經)》ㆍ《현녀경(玄女經)》ㆍ《순화경(詢化經)》ㆍ《소녀경(素女經)》ㆍ《금화산경(金華山經)》ㆍ《팽조경(彭祖經)》ㆍ《봉망경(鳳網經)》ㆍ《진사경(陳赦經)》ㆍ《소명경(召命經)》ㆍ《자도경(子都經)》ㆍ《보신기(保神記)》ㆍ《장허경(張虛經)》ㆍ《귀곡경(鬼谷經)》ㆍ《천문자경(天門子經)》ㆍ《능소자안신기(凌霄子安神記)》ㆍ《용성경(容成經)》ㆍ《거구자황산공기(去丘子黃山公記)》ㆍ《입산내경(入山內經)》ㆍ《왕자오행요진경(王子五行要眞經)》ㆍ《내보경(內寶經)》ㆍ《소이경(小餌經)》ㆍ《사규경(四規經)》ㆍ《홍보경(鴻寶經)》ㆍ《명경경(明鏡經)》ㆍ《추생연명경(鄒生延命經)》ㆍ《일월임경경(日月臨鏡經)》ㆍ《안혼기(安魂記)》ㆍ《오언경(五言經)》ㆍ《황도경(皇道經)》ㆍ《주중경(柱中經)》ㆍ《구음경(九陰經)》ㆍ《영보황자심경(靈寶皇子心經)》ㆍ《잡집(雜集)》ㆍ《서록(書錄)》ㆍ《용교경(龍蹻經)》ㆍ《은함옥궤기(銀函玉匱記)》ㆍ《정기경(正機經)》ㆍ《금판경(金版經)》ㆍ《평형경(平衡經)》ㆍ《황로선록(黃老仙錄)》ㆍ《비구진경(飛龜振經)》ㆍ《원도경(原都經)》ㆍ《녹로교경(鹿盧蹻經)》ㆍ《현원경(玄元經)》ㆍ《도형기(蹈形記)》ㆍ《일정경(日精經)》ㆍ《수형도(守形圖)》ㆍ《혼성경(渾成經)》ㆍ《좌칠도(坐七圖)》ㆍ《삼시집(三尸集)》ㆍ《관와인도(觀臥引圖)》ㆍ《호신신치백병경(呼身神治百病經)》ㆍ《함경도(含景圖)》ㆍ《수산귀로매치사정경(收山鬼老魅治邪精經)》3권ㆍ《관천도(觀天圖)》ㆍ《입오독중기(入五毒中記)》ㆍ《목지도(木芝圖)》ㆍ《휴량경(休粮經)》3권ㆍ《균지도(菌芝圖)》ㆍ《채신약치작비법(採神藥治作祕法)》3권ㆍ《육지도(肉芝圖)》ㆍ《등명산도강해칙지신법(登名山渡江海勅地神法)》3권ㆍ《석지도(石芝圖)》ㆍ《조태백낭중요(趙太白囊中要)》5권ㆍ《대백잡지도(大魄雜芝圖)》ㆍ《입온기역병대금(入瘟氣疫病大禁)》7권ㆍ《오악경(五岳經)》5권ㆍ《수치백귀소오악승태산주자기(收治百鬼召五岳承太山主者記)》3권ㆍ《은수기(隱守記)》ㆍ《흥리궁택궁사법(興利宮宅宮舍法)》5권ㆍ《동정도(東井圖)》ㆍ《단호랑금산림기(斷虎狼禁山林記)》ㆍ《허원경(虛元經)》ㆍ《소백리충사기(召百里虫蛇記)》ㆍ《견우중경(牽牛中經)》ㆍ《만필고구선생법(萬畢高丘先生法)》3권ㆍ《왕미기(王彌記)》ㆍ《왕교양성치신경(王喬養性治身經)》3권ㆍ《납성기(臘成記)》ㆍ《복식금기경(服食禁忌經)》ㆍ《육안기(六安記)》ㆍ《입공익산경(立功益算經)》ㆍ《평도기(平道記)》ㆍ《도사탈산율(道士奪算律)》3권ㆍ《정심기(定心記)》ㆍ《이문자기(移門子記)》ㆍ《귀문경(龜文經)》ㆍ《귀병병(鬼兵法)》ㆍ《산양기(山陽記)》ㆍ《입망술(立亡術)》ㆍ《옥책기(玉策記)》ㆍ《연형기(鍊形記)》5권ㆍ《팔사도(八史圖)》ㆍ《극공도요(郄公道要)》ㆍ《입실경(入室經)》ㆍ《녹리선생장생집(甪里先生長生集)》ㆍ《좌우계(左右契)》ㆍ《소군도의(少君道意)》10권ㆍ《옥력경(玉曆經)》ㆍ《번영석벽문(樊英石壁文)》3권ㆍ《승천의(昇天儀)》ㆍ《사령경(思靈經)》3권ㆍ《구기경(九奇經)》ㆍ《용수경(龍首經)》ㆍ《갱생경(更生經)》ㆍ《형산기(荊山記)》ㆍ《사금경(四衿經)》10권ㆍ《공안선연적부자대람(孔安仙淵赤斧子大覽)》7권ㆍ《식일월정경(食日月精經)》ㆍ《동군지선각로요기(董君地仙却老要記)》ㆍ《식육기경(食六氣經)》ㆍ《이선생구결주후경(李先生口訣肘後經)》2권ㆍ《단일경(丹一經)》ㆍ《태식경(胎息經)》ㆍ《행기치병경(行氣治病經)》ㆍ《승중경(勝中經)》10권ㆍ《백수섭제경(百守攝提經)》ㆍ《단호경(丹壺經)》ㆍ《민산경(岷山經)》ㆍ《위백양내경(魏伯陽內經)》ㆍ《일월주식경(日月廚食經)》ㆍ《보삼강육기경(步三罡六紀經)》ㆍ《입군경(入軍經)》ㆍ《육음옥녀경(六陰玉女經)》ㆍ《사군요용경(四君要用經)》ㆍ《금안경(金雁經)》ㆍ《삼십육수경(三十六水經)》ㆍ《백호칠변경(白虎七變經)》ㆍ《도가지행선경(道家地行仙經)》ㆍ《황백요경(黃白要經)》ㆍ《팔공황백경(八公黃白經)》ㆍ《천사신기경(天師神器經)》ㆍ《침중황백경(枕中黃白經)》5권ㆍ《백자변화경(白子變化經)》ㆍ《이재경(移災經)》ㆍ《압화경(厭禍經)》ㆍ《중황경(中黃經)》ㆍ《문인경(文人經)》ㆍ《연자천지인경(涓子天地人經)》ㆍ《최문자주후경(崔文子肘後經)》ㆍ《신광점방래경(神光占方來經)》ㆍ《수선경(水仙經)》ㆍ《시해경(尸解經)》ㆍ《중둔경(中遁經)》ㆍ《이군포천경(李君包天經)》ㆍ《포원경(包元經)》ㆍ《황정경(黃庭經)》ㆍ《연체경(淵體經)》ㆍ《태소경(太素經)》ㆍ《화개경(華蓋經)》ㆍ《행주경(行廚經)》ㆍ《자래부(自來符)》ㆍ《금광부(金光符)》ㆍ《태현부(太玄符)》3권ㆍ《통천부(通天符)》ㆍ《오정부(五精符)》ㆍ《석실부(石室符)》ㆍ《옥책부(玉策符)》ㆍ《침중부(枕中符)》ㆍ《소동부(小童符)》ㆍ《구령부(九靈符)》ㆍ《육군부(六君符)》ㆍ《현도부(玄都符)》ㆍ《황제부(黃帝符)》ㆍ《소천삼십육장군(少千三十六將軍符)》ㆍ《연명신부(延命神符)》ㆍ《천수신부(天水神符)》ㆍ《사십구진부(四十九眞符)》ㆍ《천수부(天水符)》ㆍ《청룡부(靑龍符)》ㆍ《백호부(白虎符)》ㆍ《주작부(朱雀符)》ㆍ《현무부(玄武符)》ㆍ《주태부(朱胎符)》ㆍ《칠기부(七機符)》ㆍ《구천발병부(九天發兵符)》ㆍ《구천부(九天符)》ㆍ《노경부(老經符)》ㆍ《칠부(七符)》ㆍ《대한액부(大捍厄符)》ㆍ《현자부(玄子符)》ㆍ《무효경(武孝經)》ㆍ《연군용호삼낭벽병부(燕君龍號三囊辟兵符)》ㆍ《포원부(包元符)》ㆍ《침희부(沈羲符)》ㆍ《우교부(禹蹻符)》ㆍ《소재부(消災符)》ㆍ《팔괘부(八卦符)》ㆍ《감건부(監乾符)》ㆍ《뇌전부(雷電符)》ㆍ《위희부(威喜符)》ㆍ《현정부(玄精符)》ㆍ《음양대진부(陰陽大鎭符)》ㆍ《압괴부(壓怪符)》10권ㆍ《육갑통령부(六甲通靈符)》10권ㆍ《옥부부(玉斧符)》10권ㆍ《만필부(萬畢符)》ㆍ《거승부(巨勝符)》ㆍ《옥력부(玉曆符)》ㆍ《침중부(枕中符)》ㆍ《호공부(壺公符)》20권ㆍ《육음행주용태석실삼금오목방종부(六陰行廚龍胎石室三金五木防終符)》합5백권ㆍ《팔위오승부(八威五勝符)》ㆍ《북대부(北臺符)》ㆍ《치백병부(治百病符)》10권ㆍ《구대부(九臺符)》9권ㆍ《군화소치부(軍火召治符)》ㆍ《채녀부(採女符)》.


    당(唐) 나라 단성식(段成式)의《유양잡조(酉陽雜俎)》에 선경(仙經)의 도서가 모두 24종인데, 그 조목은 다음과 같다. 《자일왕검(雌一王檢)》ㆍ《사규명경(四規明經)》ㆍ《오주중경비귀질(五柱中經飛龜帙)》ㆍ《비황자경(飛皇子經)》ㆍ《함경도(含景圖)》ㆍ《와인도(臥引圖)》ㆍ《원지도(園芝圖)》ㆍ《대외신지도(大隗新芝圖)》ㆍ《견우경(牽牛經)》ㆍ《옥진기(玉珍記)》ㆍ《단대경(丹臺經)》ㆍ《금루경(金樓經)》ㆍ《중황장인경(中黃丈人經)》ㆍ《협룡자녹대경(協龍子鹿臺經)》ㆍ《옥태경(玉胎經)》ㆍ《관씨경(官氏經)》ㆍ《봉망경(鳳網經)》ㆍ《육음옥녀경(六陰玉女經)》ㆍ《백호칠변경(白虎七變經)》ㆍ《등중유수섭제경(縢中有首攝提經)》ㆍ《적갑경(赤甲經)》ㆍ《금강팔첩록(金剛八疊錄)》.


    이상 기록한 것 중에는 《포박자》의 도경 이름과 같은 것도 있는데, 여기서는 모두 기록하였다.


    【보유(補遺)】 무릇 48종인바, 그 조목은 다음과 같다. 《옥추경(玉樞經)》 《포박자》와 단 성식의 도경 목록에 《옥추경》이 실려 있지 않은데, 이는 두광정(杜光庭) 등의 위작(僞作)이라는 설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나 보다.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의 책에는 "《옥추경》을 뇌성보화천존법어(雷聲普化天尊法語)라 칭하는데, 두광정 등이 위찬(僞撰)한 것이라고 한다." 하였다. 또 도가와 석가의 이본(異本)이 있다. ㆍ《참동계(參同契)》ㆍ《청화비문(靑華祕文)》ㆍ《영보필법(靈寶畢法)》ㆍ《금고(金誥)》ㆍ《입두악결(入頭嶽訣)》ㆍ《내관옥문보록(內觀玉文寶籙)》ㆍ《천둔련마법(天遁鍊魔法)》ㆍ《용호경(龍虎經)》ㆍ《청정심인경(淸淨心印經)》ㆍ《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ㆍ《십대동천령보본원경(十大洞天靈寶本元經)》ㆍ《태소랑서(太霄琅書)》ㆍ《상방대동진원묘경(上方大洞眞元妙經)》ㆍ《사십구장경(四十九章經)》ㆍ《사마자미(司馬子微)》ㆍ《천은자(天隱子)》ㆍ《장춘자(張春子)》의 수첩외단비요(手帖外丹祕要)》ㆍ《단방감원(丹房鑑源)》ㆍ《금단경(禁壇經)》ㆍ《영보경(靈寶經)》ㆍ《과의연생경(科義延生經)》ㆍ《태일경(太一經)》ㆍ《진무경(眞武經)》ㆍ《용왕경(龍王經)》ㆍ《중왕경(中王經)》ㆍ《호명경(護命經)》ㆍ《노자력장중경(老子歷藏中經)》ㆍ《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ㆍ《삼존보록(三尊譜錄)》ㆍ《태청금액신기경(太淸金液神氣經)》ㆍ《오악진형도(五岳眞形圖)》황제(黃帝)가 산에 가서 몸소 형상을 그린 것이다. ㆍ《동령진경(洞靈眞經)》ㆍ동방삭(東方朔)의《매귀서(罵鬼書)》,《도서(道書)》20권, 위백양(魏伯陽)의《참동계(參同契)》《삼상류(三相類)》《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성명규지(性命圭旨)》ㆍ《수양총서(壽養叢書)》, 여구방(閭丘方)의 《태평경(太平經)》13편ㆍ《동소지(洞霄志)》,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10권ㆍ《포박자(抱朴子)》내편(內篇)ㆍ외편(外篇) 1백 16편, 도홍경(陶弘景)의 《진령위업도(眞靈位業圖)》ㆍ하(夏) 나라 무광(務光)이 염교를 거꾸로 해서 쓴《태상긴진경(太上緊眞經)》3권ㆍ 왕문록(王文錄)의 《태식경소(胎息經疏)》ㆍ장군방(張君房)의 《운급칠첨(雲笈七籤)》.


    【노자도덕경】 1권으로 주(周) 나라 이이(李耳)가 찬한 것이다. 도덕경을 찬하여 주 나라 관문(關門)을 지키던 윤희(尹喜)에게 주니, 바로 주 평왕(周平王) 42년이었다. 모두 5천 7백 48자이며 81장으로 되어 있다. 한 경제(漢景帝)는 《황자(黃子)》와 《노자(老子)》는 의미가 더욱 깊다 하여, 자(子)를 경(經)으로 고치고는 비로소 도학(道學 도교의 학)을 세워 조야(朝野)로 하여금 모두 외게 하였다. 조위(曹魏 삼국 시대의 위(魏) 나라) 때 산양(山陽)의 왕필(王弼)이 주(注)했고, 남조(南朝) 때 송(宋) 나라의 범양(范陽) 사람 조충지(祖沖之)가 해석하였으며, 휴령(休寧) 사람 김안절(金安節)이 《역로통언(易老通言)》과 《노군실록(老君實錄)》을 저술하였다.


    관복고사(觀復高士) 사수호(謝守灝)는 말하기를 "《도덕경》은 당 나라 부혁(傅奕)이 여러 본(本)을 상고하여 그 글자를 낱낱이 교감하였다. 항우첩본(項羽妾本)이 있는데, 제(齊) 나라 무평(武平 북제(北齊) 후주(後主)의 연호) 5년에 팽성(彭城) 사람이 항우의 첩 무덤을 발굴하여 얻은 것이며, 안구망지본(安丘望之本)이 있는데, 위(魏) 나라 태화(太和 북위(北魏) 효 문제(孝文帝)의 연호) 때에 도사 구겸지(寇謙之)가 찾아낸 것이며, 하상장인본(河上丈人本)이 있는데 이것은 제(齊) 나라 처사 구미(仇微)가 전한 것이다. 이 삼가(三家)의 본은 5천 7백 22자로서 한비(韓非)의 《유로(喩老)》와 서로 맞지 않는다. 또 낙양(洛陽)에 관본(官本)이 있는데 5천 6백 35자이고, 왕필본(王弼本)은 5천 6백 83자, 또는 5천 6백 10자이며, 하상공본(河上公本)은 5천 3백 55자, 또는 5천 5백 90자로서 여러 본이 서로 틀린다." 하였다. 석 적지(釋適之)의 《금호기(金壺記)》에 "주 나라 뇌향(瀨鄕)의 석실(石室) 가운데에 전서(篆書)로 쓴 《노자도덕경》이 있는데 채옹(蔡邕)이 예서(隸書)로 증거했다." 하였다.


    제가경해(諸家經解) 엄군평(嚴君平)의 《노자지귀(老子指歸)》, 양호(羊祜)의 《노자주(老子注)》2권, 나중(羅仲)의 《노자주》2권, 종회(鍾會)의 《노자주》2권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본조(本朝)에 박세당(朴世堂)의 《신주도덕경(新注道德經)》2권과 홍석주(洪奭周)의 《노자도덕경주(老子道德經注)》2권이 있다. 초굉(焦竑)의 《노자익(老子翼)》 초굉이 여러 주가(注家)를 모아 《노자익》을 만들었다. 주가는 모두 65이다. 에 "도경에 《노자력장중경(老子歷藏中經)》이 있는데 어쩌면 노자가 지은 것일 것이다." 하였다. 우선 여기에 기록하여 후일 밝게 변별할 자를 기다리는 바이다.


    【장자남화경(莊子南華經)】 3권으로 주 나라 장주(莊周)가 찬한 것이다. 모두 30편(篇)으로 수십만 자(字)에 이르는데 편은 다시 내편(內篇) 7편과 외편(外篇)ㆍ잡편(雜篇) 셋으로 나뉜다. 진(晉) 나라 탁군(涿郡) 사람 노심(盧諶) 이 주(注) 했으며, 남조 때 송 나라 범양(范陽) 사람 조충지(祖沖之)가 해석하였다. 진(晉) 나라 초군(譙郡) 사람 대옹(戴顒)은 《장주대지(莊周大旨)》를 저술했고, 무명씨(無名氏 즉 저자미상)는 《장자궐의(莊子闕疑)》를 지었으며, 곽상(郭象)은 《익장(翼莊)》을 지었고, 명(明) 나라 원숭도(袁崇道)는 《도장(導莊)》을 지었고, 원굉도(袁宏道)는 《광장(廣莊)》을 지었다.


    곽자현(郭子玄 자현은 곽상의 자)은 이르기를 "시골 선비들이 망령되이 기괴한 말을 지어냈으니, 알혁의수지수위언유부자서지편(閼奕意修之首危言游鳧子胥之篇)은 모두 교묘하고 잡된 것으로 10분의 3을 차지한다." 하였다. 엄군평(嚴君平)은 《노자지귀(老子指歸)》를 지으면서 《장자》를 인용한 것이 모두 수십 조항인데, 한결같이 《장자》에 들어 있지 않은 것들이다. 임운명(林雲銘)은 《독장자법(讀莊子法)》을 지었는데 마치 패(貝)를 보는 것과 같다.


    《장자》를 경(經)이라고 한 것은 당 현종(唐玄宗) 천보(天寶) 원년에 있었던 것으로, 노자를 높여 현원황제(玄元皇帝)라 하고 장자를 높여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 하고 그의 저서를 높여 《남화경(南華經)》이라 한바, 남화란 장자가 살던 마을 이름이다. 청 고종(淸高宗) 건륭(乾隆) 때에 《천록임랑서목(天祿琳琅書目)》에 실려 있는 송판(宋版) 《남화경》에 노자의 상(像)이 있다. 명 나라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때에 사인(舍人) 왕불(王紱)이 칙명을 받들고 찬(贊)을 지었다. 혜시(惠施)는 장자의 제자이다.


    제가경해 진 나라 곽상(郭象)의 《장자주(莊子注)》, 진 나라 상수(尙秀)의 《장자주》, 초 굉(焦竤)의 《장자익(莊子翼)》 초굉이 여러 주가를 모아 《장자익》을 만들었다. 주가는 모두 49이다.


    【열자(列子)】 8편으로 주 나라 열어구(列禦寇)가 찬한 것이다. 열자의 이름은 어구로 정(鄭) 나라 사람이다. 그의 저서는 모두 8편으로 되어 있는데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을 가리킨다)의 《사기(史記)》에는 열자를 전(傳)에 넣지 않았다. 이 책은 비록 유향(劉向)의 《교수략(校讐略)》에 실려 있는 숫자와 합하긴 하지만 사실인즉 전오씨(典午氏)가 남도(南渡)한 이후에 바야흐로 제가(諸家)에서 섞여나왔을 것이니 진본(眞本)인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당 현종 천보 원년에 열자를 충허진인(沖虛眞人)을 삼고 현원황제에 배향했으며, 송 휘종(宋徽宗) 중화(重和) 원년에 열자를 치허관묘진군(致虛觀妙眞君)으로 봉한 다음 책명(冊命)을 행하고 혼원황제(混元皇帝 노자. 현원황제와 같음)에 배향하는 한편, 태학(太學)과 벽옹(辟雍)에 《내경(內經)》ㆍ《도덕경》ㆍ《장자》ㆍ《열자》에 대한 박사(博士)를 2명씩 두었다.


    【문자(文子)】 노자의 제자로 이 책에는 평왕문도(平王問道)가 있다. 당 현종 천보 원년에 문자를 통현진인(通玄眞人)으로 봉하고 현원황제에 배향하였다.


    【경상자(庚桑子)】 이름은 초(楚)로 주 나라 때 사람이다. 당 현종 천보 원년에 경상자를 통허진인(通虛眞人)으로 봉하고 현원황제에 배향하였다.


    【석각도경(石刻道經)】 도경도 석각(石刻)한 것이 있어 마치 유가(儒家)의 석경(石經)이 있는 것과 같으므로 아울러 기록한다.

     

    석각도덕경(石刻道德經) 명 나라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이 《도덕경》에 쓰기를 "《진사(晉史)》에 우군(右軍) 왕희지(王羲之)가 산음(山陰)의 담양촌(曇村)에 사는 도사를 위하여 《도덕경》을 써주고는 거위를 채롱에 넣고 돌아갔다 하는데, 《광금석운부고(廣金石韻府考)》를 상고해 보면 여기에 《도덕경》이 실려 있은즉, 후인들이 돌에 새겼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하였다.


    또 청 성조(淸聖祖)의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畫譜)》 서변증(書辨證)을 상고해 보면 여기에 《왕씨법서원(王氏法書苑)》을 인용하였는데, 이백(李白)이 우군(右軍)의 글씨에 대하여 쓴 것이 두 편이 있다. 하나는 《황정경(黃庭經)》을 써주고 거위와 바꾼 일이며, 하나는 《도덕경》을 써주고 거위와 바꾼 일이다. 그 첫편에,

     

    우군이 본래 청진하니/石軍本淸眞
    소쇄하게 풍진을 벗어났네/瀟灑出風塵
    산음에서 도사를 만나/山陰遇羽客
    거위를 좋아하는 손님 맞이하였네/要此好鵝賓
    흰 비단에 도경을 쓰니/掃素寫道經
    필법의 정묘함 신과 같았네/筆精妙入神
    글씨 다 쓰자 거위 채롱에 넣고 가니/書罷籠鵝去
    언제 주인과 작별한 적 있었나/何曾別主人


    하였는데, 이는 《도덕경》을 써주고 거위를 얻은 일을 말한 것이다.


    일찍이 송 나라 하송(夏竦)의 《고문사성운해(古文四聲韻解)》를 상고해 보니, 여기에 《고노자(古老子)》를 인용하였다. 그렇다면 《노자》는 고본(古本) 전각(篆刻)이 있는 것이다.


    석각황정경(石刻黃庭經) 고사기(高士奇)의 《천록지여(天祿識餘)》에 "진(晉) 나라 왕우군이 33세에 난정서(蘭亭敍)를 썼고, 37세에 《황정경》을 썼는데, 후세 사람들이 돌에 새겨 전한다." 하였다. 《동관여론(東觀餘論)》을 상고해 보면 "《황정경》을 세상에서는 일소(逸少 왕희지의 자)가 썼다고 전하는데, 내가 일찍이 상고해 보니 틀린 말이다." 하였다. 《왕씨법서원(王氏法書苑)》에는 "황백사(黃伯思《동관여론》의 저자)의 말이 틀렸다. 《황정경》을 써주고 거위를 바꾼 것과 《도덕경》을 써주고 거위를 바꾼 것은 각기 두 일이다. 이태백(李太白)은 이것이 두 가지 일임을 알았기 때문에 왕우군의 글씨에 대하여 쓴 것이 2편이다.

     

    그 1편인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에

     

    경호의 맑은 물결 일렁이는데/鏡湖淸水漾淸波
    광객이 배타고 돌아가니 고상한 흥취 많고야/狂客歸舟逸興多
    만일 산음의 도사를 만난다면/山陰道士如相見
    응당 황정경 써주고 흰 거위와 바꾸리/應寫黃庭換白鵝


    하였는데, 이는 《황정경》을 써주고 거위를 얻은 일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또 《광금석운부고(廣金石韻府考)》를 상고해 보면 왕유공(王維恭)의 《황정경》이 있으니, 어쩌면 왕유공이 쓴 것이 석각본인지 모르겠다.


    천태경당(天台經幢) 이것은 《광금석운부고》에 보이는데, 석각 도경인 듯하다. 아직 뒤에 참고하기로 한다.


    고노자(古老子) 《광금석운부고》를 상고해보면 여기에 《고노자》가 있는바, 이것도 후세에서 돌에 새겨 전한 것이다. 또 하송(夏竦)의 《고문사성운해(古文四聲韻解)》에 보인다.


    【도가사첩(道家史牒)】 도가에도 실기(實紀)가 있어 사첩(史牒)과 같다. 그러므로 도사(道史)ㆍ선사(仙史)라는 명칭이 있으니, 지난 일을 가지고 장래 일을 알 수 있다. 여러 서적에서 널리 뽑아 대략 수록을 하나, 짐작건대 반드시 누락이 있을 것이다.


    도가 사첩(道家史牒)은 한(漢) 나라 유향(劉向)의 《열선전(列仙傳)》에 72인, 진(晉) 나라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 송 나라 채경(蔡京)의 《도사(道史)》, 등목(鄧牧)의 《장천우모산지(張天雨茅山志)》, 두광정(杜光庭)의 《동천복지기(洞天福地記)》, 장송여(張松如)의 《귀대완염문(龜臺琬琰文)》에 신선 72인, 왕언(王言)의 《서화선록(西華仙籙)》에 여선(女仙) 36인, 부운도사(浮雲道士)의 《선사(仙史)》에 고금의 진인(眞人)과 열선(列仙) 47인, 증조(曾慥)의 《집선전(集仙傳)》, 심분(沈份)의 《속신선전(續神仙傳)》, 우리나라 본조(本朝)에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海東異蹟)》, 불초(不肖)가 찬한 《속보해동이적(續補海東異蹟)》, 무명씨의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일본(日本) 사람의 《신선전(神仙傳)》이 있다.


    【도가화첩(道家畫牒)】 옛사람들이 선도(仙道)의 유적을 회화(繪畫)한 것이 있는바, 이 역시 민멸(泯滅)하기 어려우므로 간략히 도가 사첩의 끝에 부록한다.


    도가화첩은 곽충서(郭忠恕)의 누거선도(樓居仙圖), 당 나라 관동(關仝)의 선유도(仙遊圖), 촉(蜀) 나라 석각(石恪)의 옥황조회도(玉皇朝會圖), 주량(朱梁 오대(五代) 시대 주전충(朱全忠)의 후량(梁後)) 장도(張圖)의 자미조회도(紫微朝會圖), 무명씨의 황정경도(黃庭經圖), 육황(陸晃)의 장생보명진군(長生保命眞君)ㆍ구천정명진군(九天定命眞君)ㆍ천조강액진군(天曹降厄眞君)ㆍ천조익산진군(天曹益算眞君)ㆍ천조장록진군(天曹掌祿眞君)ㆍ구천사명진군(九天司命眞君)ㆍ천조사복진군(天曹賜福眞君)과 이팔백(李八百)의 누이가 《황정경》을 생산해 내는 상(像), 임지미(林知微)의 팽조예북두도(彭祖禮北斗圖), 진(晉) 나라 위협(衛協)의 목천자겸요지도(穆天子謙瑤池圖).

     

     

    선약설(仙藥說)


    도교 이외에 다시 일종의 선약(仙藥)에 대한 학설이 있는바, 바로 복이술(服餌術)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약물이란 것이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보면 진실로 황당하다. 굳이 취하여 기록한다.


    《유양잡조(酉陽雜俎)》에 나오는 선약(仙藥)은 다음과 같다. 종산백교(鍾山白膠)ㆍ낭풍석뇌(閬風石腦)ㆍ태미자마(太微紫麻)ㆍ태극정천(太極井泉)ㆍ야진일초(夜津日艸)ㆍ청진벽적(靑津碧荻)ㆍ원구자내(圓丘紫柰)ㆍ백수령합(白水靈蛤)ㆍ팔천적해(八天赤薤)ㆍ창랑청전(凔浪靑錢)ㆍ삼십육지(三十六芝)ㆍ용태예천(龍胎禮泉)ㆍ붕악전류(崩岳電柳)ㆍ현곽기총(玄郭綺蔥)ㆍ회수옥정(佪水玉精)ㆍ백랑상(白琅霜)ㆍ월례(月醴)ㆍ홍단(虹丹)ㆍ홍단(鴻丹)ㆍ청요여령화(靑腰女靈華)ㆍ북제현주(北帝玄珠)ㆍ오정금(五精金)ㆍ백호탈치(白虎脫齒)

     

     

    도관(道觀)


    【도관(道觀)】 한 원제(漢元帝)가 병에 걸리자 방사(方士)를 구하니, 한중(漢中)에서 도사 왕중도(王仲都)를 보내왔으므로 곤명관(昆明觀)에 처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후세에서 도사가 거처하는 곳을 모두 관(觀)이라 하였다.


    【정사(精舍)】《삼국지(三國志)》강표전(江表傳)에 "도사 우길(于吉)이 오회(吳會) 지방을 왕래하면서 정사를 세우고 향을 사르고 도서(道書)를 읽었다. 손책(孫策)은 그를 베면서 말하기를 '옛날 남양(南陽) 사람 장진(張津)이 교주 자사(交州刺使)가 되어 항상 붉은 파두(帕頭 머리를 싸매는 것)를 쓰고 거문고를 타며 향을 사르고 사속(邪俗)한 도서를 읽었는데 만이(蠻夷)에게 살해되고 말았은즉, 이는 매우 무익(無益)하다.' 했다." 하였다. 그렇다면 도사가 거처하는 곳 역시 정사라 하는 것이다.


    당 나라 《혼원육전(混元六典)》에는 천하의 관(觀)이 1천 6백 87곳이라 하였으며, 청(淸) 나라 《회전(會典)》에는 성조(聖祖) 강희(康熙) 4년 직성(直省 황제가 직접 관할하는 성(省))에 칙명으로 세운 것을 통계해 보니, 큰 사묘(寺廟)가 총 6천 73곳이며 작은 사묘가 총 5만 8천 6백 82곳이며, 도사가 총 2만 1천 2백 86명이라 한바, 석교(釋敎) 하(下)에 자세히 보인다.

     

    상설(像設)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도가의 학설은 노자에게서 나온 것으로 이른바 삼청(三淸)이란 대체로 불가의 삼신(三身)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삼신에 법신(法身)은 석가(釋家)의 본성이고, 보신(報身)은 석가의 덕업(德業)이며, 육신(肉身)은 석가의 진신(眞身)으로 실지로 존재한 인물이다. 그런데 지금에 이 교를 믿는 자들이 마침내 나누어 삼상(三像)을 만들고 아울러 진열하였으니, 이것은 이미 본지를 잃은 것이다. 그런데 도가의 무리들이 저 불가의 짓을 모방하고자 하여 마침내 노자를 높여 삼청인 원시천존(元始天尊)ㆍ태상도군(太上道君)ㆍ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 하고 호천(昊天) 상제(上帝)는 도리어 그 밑에 앉게 되었으니, 패려(悖戾)하고 참역(僣逆)한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다.


    또 옥청원시천존(玉淸元始天尊)은 이미 노자의 법신이 아니고 상청태상도군(上淸太上道君)은 또 노자의 보신이 아니다. 가령 두 상이 있다 하더라도 노자와 하나가 될 수는 없으며, 노자는 또 상청태상군(上淸太上老君)이 되니, 이는 불가의 잘못을 따른 것으로 더욱 잘못된 것이다. 노자의 학파들은 다만 자기의 교주인 노자ㆍ관윤(關尹)ㆍ열자ㆍ장자 등을 제사하고 안기생(安期生)ㆍ위백양(魏伯陽) 등에게까지 미칠 뿐, 천지(天地)와 백사(白祀)는 당연히 천자(天子)의 사관(祀官)에 소속시켜서 도가로 하여금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진무(眞武)는 본래 현무(玄武)였는데 청 성조(淸聖祖)의 휘(諱)를 피하기 때문에 진무라 하는 것이다. 현(玄)은 거북이고 무(武)는 뱀이니, 이는 본래 허성(虛星)과 위성(危星)의 형상과 비슷하기 때문에 인하여 북방(北方)을 이름하여 현무 칠성(玄武七星)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현무를 진성(眞聖)이라 하여 그 아래에 진짜 거북과 뱀을 만들어 놓았으니, 이는 아무런 의의가 없는 것인데 또 천봉(天蓬)ㆍ천유(天猷) 및 익성진군(翊聖眞君)을 보태어 사성(四聖)이라 하니 더욱 의의가 없는 짓이다.
    이른바 익성이란 바로 지금에 말하는 효자(曉子)란 것인데 진종(眞宗) 때에 이 신(神)이 내려왔다. 그러므로 마침내 신군(神君)으로 봉하였다. 사조제(謝肇淛)의 《오잡조(五雜組)》에 "진무상제벽하원군(眞武上帝碧霞元君)은 향화(香火)가 끊기지 않고 내려온다."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예종(睿宗) 때에 복원궁(福源宮)을 세우고 우류(羽流 도사) 10여 명을 두고 재초(齋醮)와 과의(科義)를 한결같이 송(宋) 나라와 같이 하였다. 인종(仁宗) 때에는 정 지상(鄭知常)이 왕에게 청하여 팔성당(八聖堂)을 궁중에 두고 모두 상을 수놓아 만드니, 이는 진 시황(秦始皇)이 임오년(시황 28, 서기전 220)에 산천의 여덟 신에게 제사한 따위이다. 첫째는 백두악(白頭岳) 태백선인(太白仙人)이고, 둘째는 용원악(龍圓岳) 육존자(六尊者)이고, 셋째는 월성악(月城岳) 천선(天仙)이고, 넷째는 구려(駒驪) 평양선인(平壤仙人)이고, 다섯째는 구려 목멱선인(木覓仙人)이고, 여섯째는 송악(松岳) 진거사(震居士)이고 일곱째는 증성악(甑城岳) 신인(神人)이고, 여덟째는 두악(頭岳) 선녀(仙女)이다. 곡령(鵠嶺 송악산)은 여덟 신선이 거주하는 곳이라 하여 송악산에 팔선궁(八仙宮)을 짓고 정지상이 팔성문(八聖文)을 찬했는데, 여기에 '이 사이에 팔선을 모시되 백두를 받들어 우두머리로 삼았다.' 한바, 팔선이란 곧 팔성이다.


    또 한 가지 증거가 있다. 신라(新羅) 진흥황(眞興王) 신미년(진흥왕 12, 551) 에 비로소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하였으니, 이는 비록 불가의 일이긴 하지만 도가의 재초(齋醮)를 겸한 것이다. 상국(相國) 신흠(申欽)의 《승국유사(勝國遺事)》에 "팔관회는 매년 11월 15일 하는데 이는 복을 비는 것이다. 둥근 뜰에다가 윤등(輪燈) 한 자리를 만들어 놓고 사방에 향등(香燈)을 나열해 놓으며, 또 채붕(綵棚)을 맺되 각각 높이가 다섯 길이 넘게 하고, 온갖 유희와 가무(歌舞)를 하며 앞에는 사선 악부(四仙樂部)와 용(龍)ㆍ봉(鳳)ㆍ코끼리ㆍ말ㆍ수레ㆍ배를 베푸니, 이는 모두 신라의 고사(故事)를 쓴 것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이 법은 고려 태조(太祖)의 훈요십조(訓要十條) 가운데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를 베풀라는 말을 따라 행한 것이다. 국조(國朝 조선조)에 들어와 소격서(昭格署)를 설치하니, 중국의 태일전(太一殿)에 초사(醮祀)하고 칠성(七星)의 여러 별에게 제사하는 의식을 따른 것으로, 그 상(像)은 모두 머리를 산발한 여자의 모습이다. 삼청전(三淸殿)에서는 옥황상제(玉皇上帝)ㆍ태상노군(太上老君)ㆍ보화천존(普化天尊)ㆍ재동제군(梓潼帝君) 등 10여 위(位)를 제사하는데 여기는 모두 남자의 상이다. 기타 여러 단(壇)에는 사해(四海)의 용왕(龍王)과 신장(神將), 명부(冥府)의 시왕(十王), 수부(水府)의 여러 신을 만들어 놓았는데, 위판(位版)에 이름을 써 붙인 것이 무려 수백 개나 된다.


    이 초사(醮祀)에 참가하는 헌관(獻官)과 서원(署員)들은 모두 흰 옷과 검은 건을 쓰고 치재(致齋)하며, 관을 쓰고 홀(笏)을 꽂고 예복(禮服)을 입고 제사를 지낸다. 여러 과일과 밥ㆍ떡ㆍ다(茶)ㆍ탕(湯)과 술을 올리고 분향백배(焚香百拜)하며, 도사들은 머리에 소요관(逍遙冠)을 쓰고 몸에는 아롱진 검은 옷을 입고 경쇠를 24번 울린 다음에 두 사람이 도경을 외며, 또 축사(祝辭)를 푸른 종이에 썼다가 불사른다. 청사(靑詞)에는 소격서 기우청사(昭格署祈雨靑詞), 마니산 참성초 삼헌 청사(摩尼山塹城醮三獻靑詞), 소격서 진무초 청사(昭格署眞武醮靑詞), 수성초청사(壽星醮 靑詞), 분야성초 삼헌 청사(分野星醮三獻靑詞), 태일초 삼헌 청사(太一醮三獻靑詞)가 있다.


    대저 도가에서 상(像)을 만들어 놓은 것은 허무하고 황당한 것 같은데, 여러 돌ㆍ나무ㆍ뼈ㆍ뿔ㆍ자개ㆍ껍질에도 간혹 천연적으로 그려진 신선과 부처의 상이 있고 보면 실지로 있는 듯도 하다. 《잠운루잡기(簪雲樓雜記)》에 "대흥(大興)에 사는 시랑(侍郞) 이석당(李奭堂)의 아우 아무개가 농막을 헐다가 주모(珠母) 한 개가 나왔는데, 크기가 5~6촌쯤 된다. 이 안에 진무상(眞武狀)이 있는데, 의자 위에 단정히 앉아 오른 손으로 의자를 잡고 왼손으로는 ……(원문 1자 빠짐)…… 거북과 뱀이 발을 받들고 영관(靈官)이 창을 메고 모시고 있는데, 눈을 부릅뜬 모습을 했으며 구름이 에워싸고 네 신장이 나타나 있는데 황홀하여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바, 모두 모습을 갖춘 사람의 상이다. 그 등에 '고려의 국왕이 바친 것'이라고 새겼으며, 자금(紫金)으로 만든 궤에 넣어져 있었다. 이는 아마도 궁중의 물건이었는데 민간에 흘러 들어간 것일 것이다. 이씨는 열 꿰미의 돈을 주고 샀는데, 수 문제(隋文帝)의 합리불(蛤蜊佛)이나 송 나라 조무구(晁無咎)의 저치백불(猪齒白佛)보다도 더 기이하다." 하였다. 주모(珠母)란 진주 조개이니, 조화는 참으로 공교하다 하겠다.


    《묵장만록(墨莊漫錄)》에 "통천서(通天犀) 가운데 해ㆍ달ㆍ별ㆍ구름ㆍ꽃봉오리ㆍ산ㆍ물ㆍ새ㆍ물고기ㆍ용ㆍ신선ㆍ귀신ㆍ궁전ㆍ의관(衣冠)과 미목(眉目)이 완연히 이 뿔 속에 나타나 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신선과 귀신은 예부터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이것을 모방해서 상을 만든 것으로 족히 괴이할 것이 없다. 이미 천연적인 상이 있으니, 어찌 인위로 만든 상이 없겠는가.

    부록(符籙)과 재초(齋醮)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에 "여러 신선이 천서(天書)를 맨 처음 얻어서 인간에게 전수하는 것도 연한(年限)이 있는바, 상품(上品)은 연한이 오래고 하품(下品)은 연한이 짧다. 그러므로 현재 도(道)를 전수받은 자들은 49년을 경과한 다음에야 비로소 인간에게 전수할 수 있다. 그 대지(大旨)를 미루어 보면 이 역시 인애(仁愛)하고 청정(淸靜)하여 많은 수양을 쌓아서 점차 장생(長生)하여 자연히 신화(神化)하게 되는 것이다.


    도를 전수받는 법은 맨 처음에 오천문록(五千文籙)을 받고 다음에 삼동록(三洞籙)을 받고 다음에 동현록(洞玄籙)을 받고 다음에 상청록(上淸籙)을 받는데, 녹(籙)은 모두 흰 비단에 씌어 있는바, 천조(天曹 하늘에 있다는 여러 관서)의 관속(官屬)과 좌사(佐使)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또 여러 신부(神符)가 이 사이에 섞여 있다. 이것을 받는 자는 반드시 먼저 깨끗이 재계(齋戒)한 다음에 금환(金環) 하나를 나누어 각기 반을 갖고 약속을 한다. 재계하는 방법은 황록(黃籙)ㆍ옥록(玉籙)ㆍ금록(金籙)ㆍ도탄(塗炭) 등의 재계가 있는데, 세 층의 단을 만들고 층마다 면절(綿蕝 띠풀을 묶어 위치를 품시하는 것)을 두어 한계를 만들고 옆에는 각각 문을 열어 이 면절의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그런 다음 고기 꿰미처럼 나란히 열(列)을 이루어 면박(面縛 두 손을 뒤에 묶고 얼굴을 내밀어 죽을 각오를 하는 것)하고 자신의 과오를 낱낱이 말하여 신명이 고백하되 밤낮을 쉬지 않고 혹은 칠일 또는 이칠일(二七日 즉 14일)에 끝난다.


    또 재액(災厄)을 없애는 법이 있다. 음양 오행의 술수(術數)에 의하여 사람의 수명을 추수(推數)하여 마치 장표(章表)를 올리는 의식처럼 쓰고는 아울러 폐백을 갖추어 향을 사르고 읽기를 '천조에게 아뢰노니 부디 제액해주옵소서[奏上天曹 請爲除厄]' 하는데, 이것을 상장(上章)이라 한다. 한밤중 여러 성신(星辰)의 아래에 술ㆍ포ㆍ면ㆍ음식ㆍ폐백을 진설해 놓고 천황(天皇)과 태일(太一)에게 낱낱이 제사하고 오성(五星)과 여러 별에게 제사하며 상장하는 의식과 같이 글을 만들어 아뢰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초(醮)라 한다. 또 복이(服餌)ㆍ벽곡(辟穀)으로 찌꺼기를 제거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루 기록할 수가 없다." 하였다. 초제(醮祭)의 축원문(祝願文)을 청사(靑詞)라 한다.

    도가 잡용(道家雜用)


    《수서》경적지에 "도가의 재초(齋醮) 이외에 또 나무로 인(印)을 만들어 성신(星辰)과 일(日)ㆍ월(月)을 그 위에 새기고 기(氣)를 마셔 붙게 한 다음 병을 앓는 자에게 찍으면 병이 낫는 자가 많다. 또 칼 위에 올라가고 불속에 들어간 다음 불사르고 찌르게 하여도 칼날이 상해를 입히지 못하고 불꽃이 뜨겁게 하지 못하는 방법도 있으며, 또 복이(服餌)ㆍ벽곡(辟穀)ㆍ금단(金丹)ㆍ옥장(玉漿)ㆍ운영(雲英)으로 찌꺼기를 제거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루 기록할 수 없다." 하였다.


    【타발(佗髮 머리를 풀어 헤치는 것)】도사들이 머리 풀어 헤치는 것은 한 나라 때부터 이미 그러하였다. 《사기(史記)》귀책전(龜策傳)에 "술로 초사하고 머리를 풀어 헤친다.[醮酒佗髮]" 하였는데, 색은주(索隱注)에 "타(佗)의 음은 도아절(徒我切)이니, 머리를 풀어 헤치는 것이다. 현재 도류(道流)들이 법석(法席)을 베풀고 부주(符呪)할 때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을 한다." 하였다.


    【도사의 영패(令牌)와 인(印)】 도사들은 영패와 인이 있다. 《물리소지(物理小識)》에 "벼락을 맞은 대추나무를 사용하여 인패(印牌)를 만드는데, 이는 대추나무 속이 붉고 단단하며 벼락을 맞아 신통함을 취한 것이다. 《당육전(唐六典)》의 연문식법(羡門式法)에도 대추나무 속으로 만든다 하였다. 구양현(歐陽玄)의 《규거지(睽車志)》에는 '귀신은 백옥(白玉)을 두려워하니 백옥으로 만든 인을 차되 웅정낭(雄精囊)에 넣어야 한다.' 했다." 하였다.


    사조제(謝肇淛)의 《오잡조(五雜組)》에는 "단풍나무와 대추나무 이 두 나무는 모두 신령을 통하기 때문에 점괘를 치는 자들이 많이 취하여 식반(式盤)과 식국(式局)을 만드는데, 단풍나무가 제일 좋고 대추나무는 나쁘다." 하였다. 《당육전》의 삼식(三式)에는 "육임(六壬)으로 점치는 국(局)은 단풍나무를 하늘로, 대추나무 속을 땅으로 삼는다." 하였다. 이 때문에 장문성(張文成)의 태복판(太卜判)에 "단풍나무는 하늘이고 대추나무는 땅이다.[楓天棗地]"란 말이 있으며, 《영기경(靈棋經)》의 법에는 '반드시 벼락맞아 쪼개진 대추나무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더욱 신기하게 맞는다.' 하였다. 병법(兵法)에는 "단풍나무와 대추나무로 말을 매 놓은 말뚝을 만들면 말이 놀라고, 수레바퀴를 만들면 수레가 엎어진다." 하였다. 이는 아마도 신(神)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니, 마치 귀(鬼)가 예장나무와 버드나무 뿌리에 깃들여 있는 것과 같다.


    【천사(天師)의 법검(法劍)】도목(都穆)의 《철망산호(鐵網珊瑚)》에 "광미(廣微) 장여재(張與材)가 법검 한 자루를 소장하고 있는데 칼자루는 옥으로 되어 있다. 칼자루 위 양 면에는 각각 2행의 전문(篆文)이 있는데 1행에 10여 자씩이며 칼 길이는 4척 남짓하다. 양면에는 모두 자금(紫金)으로 가늘게 법전(法篆)이 씌어져 있으니, 그 일면을 대략 기록해 보면 ●ㆍ●ㆍ●ㆍ●ㆍ目ㆍ內ㆍ有ㆍ免ㆍ春ㆍ夏ㆍ秋ㆍ冬이 있고, 그 아래에는 삼태성(三台星)과 북두성(北斗星)이 있으며, 그 일면에 있는 글자는 능히 분변할 수는 없으나 맨 아래에 뇌(雷)ㆍ전(電)ㆍ운(雲) 세 자가 씌어 있다. 칼 양면에 모두 칼날이 있어 이지러지지 않았으며, 또 한 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1천 7백년 동안 여러 대에 걸쳐 이 법검을 의뢰하여 교를 펴고 있다." 하였다.


    【헌원경(軒轅鏡)】 도가에서는 오래된 고경(古鏡)을 사용하는데 이는 사마(邪魔)를 물리치는 방술이다. 헌원경이란 주사(硃砂)로 끈을 바르고 네 거울을 둘러 놓아 서로 비추게 하는 것인데 사(邪 잡귀)를 물리친다. 방이지(方以智)는 "능엄단(楞嚴壇)에 16개의 거울이 위아래에서 비춘다."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의미한 것이다.


    【환실(寰室)】 곧 수련하는 정사(精舍)이다. 무릇 타좌(打坐 불교에서 가부좌(跏趺坐)하는 것을 말한다)할 때에 실내를 너무 높게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높으면 양이 성하고 밝음이 많아서 백(魄)을 상하게 된다. 지붕은 너무 낮게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너무 낮으면 음이 성하고 어둠이 많아서 혼(魂)을 상하게 된다. 음ㆍ양이 적중하고 밝음과 어둠이 서로 반씩 되게 하며 사방 벽에는 모두 여러 개의 창문을 내어 일ㆍ월ㆍ성두(星斗 두는 북두칠성)의 기운을 통하게 한다.


    【통기(通氣)하는 탁약(橐籥 쇠를 불리는데 쓰이는 기구)】 단가(丹家)의 비결에 금ㆍ은으로 탁약을 만들되 안에는 입과 코의 세 구멍이 통하는 숨통을 만들고 겉에는 비단으로써 방식대로 싼 다음 목 뒤에 띠를 묶어 매어 그 입과 코를 고정시켜 진기(眞氣)가 흩어지지 않게 한다. 이것은 환실(寰室)에 들어가 잘 때에 사용하는 것으로 곧 호흡통인 것이다.


    【유목 의자(楡木椅子)】 느릅나무로 만드는데 그래야만 독이 없다. 수양하는 도가가 앉는 것이다.


    【동화제군상(東華帝君像)】 동화제군상을 그려 뒷방에 받들고 장등(長燈)과 향수(香水)로 제사한다.


    【천전(天篆)】 환실(寰室)의 사방 벽에 천전을 붙여 놓는다.


    【조기(祖氣)】 무릇 도가의 서부(書符)에는 조기가 있다. 그 법은 동쪽을 향하여 기(氣)를 취해서 한입으로 마셔 뱃속으로 넣되 배꼽 밑 한치 세푼까지 이르게 했다가 그치고는 다시 배 위에서 입으로 올라오게 한 다음 붓을 들고 한 번 불어서 점선이 부권(符圈)의 안에 있게 하는데, 이것을 조기라 이름한다. 또 한 가지 법에는 조기란 곧 신(腎) 밑에 있는 수기(水氣)이다. 뇌국(雷局)을 사용하여 수(水)ㆍ화(火)를 화합하게 하여 미추골(尾椎骨) 밑에 이른다. 미추골 밑이란 바로 미려혈(尾閭穴)로서 위로 이환(泥丸 단전)에서부터 함께 나와 작용한다 한다. 도결(道訣) 주(注)에 자세히 보인다.


    【도수결(搯手訣)】 염결(捻訣)이라고도 하며 또 겹결(恰訣)이라고 한다. 겹(恰)은 《광운(廣韻)》에는 고흡절(苦洽切)이라 하였고 《집운(集韻)》에는 걸흡절(乞洽切)이라 하였는데 음은 모두 겹이다. 《설문(說文)》에는 "마음을 쓰는 것이며 또 적당하게 한다는 말이다." 하였다. 도(搯)는 자서(字書)에 음은 도(叨)라고 하였다. 《지북우담(池北偶談)》에 "도수결은 왼손 중지(中指) 셋째 마디에 가로로 그어져 있는 지문을 큰 손가락 손톱으로 두드리는 것인데, 주문(呪文)을 욀 때에 두드린다." 하였다. 도(搯)는 자서에 보면 마음으로 헤아리는 것이라 했을 뿐, 특별한 깊은 뜻이 없다. 주전공(朱錢功)의 《담산잡지(澹山雜識)》에 "사보문(謝寶文)이 옥관(獄官)으로 있을 때에 어떤 죄수 하나가 이 법을 잘하여 스스로 형틀을 벗곤 했는데, 늙은 하인이 '붓뚜껑을 가지고 양손의 중지를 두드리라.' 하므로 그 말을 따르니 죄수가 그 술을 쓰지 못했다." 했다. 도가와 불가에는 여러 가지 결(訣)이 있다.


    【보두 답강(步斗踏罡)】 도가에 보두 답강하는 법이 있는데, 이는 소위 북두성(北斗星)의 괴성(魁星)과 천강성(天罡星)을 밟는다는 것이다.


    【우보(禹步)】 세상에서 말하기를, 우(禹)는 짐승 이름인데 너풀너풀 걸으며 귀신을 잡아먹기 때문에 귀신들이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도가에서 그 걸음을 흉내내는 것이라 한다. 일설에는 하우씨(夏禹氏)가 홍수를 다스릴 때에 걸음을 절둑거리니 귀신들이 두려워하여 복종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보라 하게 되었다 한다. 갈홍(葛洪)의 《등섭부록(登涉符籙)》을 상고해보면 우보법이 있는데, 반듯이 서서 오른쪽 발을 앞에 놓고 왼쪽 발을 뒤에 놓으며 다음에 다시 오른쪽 발을 앞에 놓고 왼쪽 발은 오른쪽 발의 뒤에 놓는다. 이것을 모두 합하여 일보(一步)라 하며, 다음에 다시 오른쪽 발을 앞에 놓고 다음에 왼쪽 발을 앞에 놓아 왼쪽 발을 오른쪽 발에 따른다. 이것을 모두 합하여 삼보(三步)라 한다. 이처럼 하면 우보가 끝나니, 곧 삼보에 발자국이 아홉 개인 것이다.


    【어고간자(漁鼓簡子)】어고간자는 무시로 치는 악기이다. 대나무를 잘라 돼지의 새끼보를 양쪽 끝에 붙이고 대쪽을 쪼개어 마치 제비꼬리처럼 만들어 대통을 치면 쨍하고 소리가 난다. 도사들이 이 어고간자를 갖고 다니기 때문에 선인(仙人)인 한상자(韓湘子)를 그릴 때에는 반드시 이 기구를 안고 있으니, 이것이 맨 처음 잘못된 것이다. 한상자는 당 나라 사람이다.


    【신선골(神仙骨)】 《명사(明史)》에 "예부(禮部)에서 말하기를 '대서양(大西洋) 사람 이마두(利瑪竇 마테오리치)가 갖고 온 것이라 하며 또 신선골이 있다 하는데 이미 신선이라고 칭한다면 스스로 하늘로 날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어찌 뼈가 있겠습니까?' 했다." 하였다. 이는 당 나라 때의 불골(佛骨 석가여래의 사리(舍利))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해동이적(海東異蹟)》에 "장한웅(張漢雄)이 수련하여 도(道)를 얻었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소요산(逍遙山)에 들어갔다가 적에게 잡혀 작살(斫殺)되자 흰 기름과 같은 피가 나왔다. 다비(茶毗 화장(火葬))하였더니 삼주야(三晝夜) 동안 서광(瑞光)이 하늘에 비치었다. 사리(舍利) 72알을 얻었는데 크기가 감실(芡實)만하고 색깔이 감벽색(紺碧色)이었다. 이것을 탑 속에 보관해 두었다." 하였다. 도가에도 사리가 있다면 이것은 신선골이라 하는가 보다.

     

    총론(總論)


    신선술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비록 천상(天上)에서 닭이 우느니 구름 속에서 개가 짖느니 하는 말은 있지만, 녹비공(鹿皮公)은 옥화(玉華)를 삼켰으나 시체에서 벌레가 생겨 문 밖으로 나왔고, 가계자(賈季子)는 금액(金液)을 마셨으나 시체 썩는 냄새가 백 리까지 풍겼으며, 황제(黃帝)는 형산(荊山)에서 아홉 개의 솥을 가지고 선약(仙藥)을 만들었다고 하나 교령(喬嶺)에는 묘가 남아 있으며, 이옥(李玉)은 운산(雲散)을 복용하여 남몰래 신선이 되었다고 하나 피살되어 머리와 발이 각각 있었다. 묵적(墨狄)은 홍단(虹丹)을 마시다가 물에 빠져 죽었고, 영생(甯生)은 석뇌(石腦)를 복용하다가 불에 타 죽었으며 무광(務光)은 부추를 베다가 청령천(淸泠泉)에 빠졌고, 백성(柏成)은 기(氣)를 마시다가 창자와 위(胃)가 썩었다. 경액(瓊液 선약)을 두번 먹고 관(棺)에 들어간 자도 있으며, 도규(刀圭 약물(藥物))를 한 번 먹고 시체가 된 자도 있으니, 신선이란 실제가 없는 헛 말일 뿐이다.
    먼저 도사가 되었다가 뒤에 벼슬한 자는 당 나라 시중(侍中) 위징(魏徵)과 승상(丞相) 노정(盧程)이며, 먼저 벼슬을 했다가 뒤에 도사가 된 자는 당 나라 예부 시랑(禮部侍郞) 하지장(賀知章)과 하남 참군(河南參軍) 정선(鄭銑)이며, 주양승(朱陽丞) 곽선주(郭僊舟)는 시를 지어 바쳤다가 파직되고 도첩(度牒)을 받아 도사가 되었다.

     

    별론(別論)


    세상에 전하기를 장생 불사하는 것을 신선이라 한다. 그러나 공동자(空同子)는 말하기를 "신선도 죽는 수가 있으니, 기(氣)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였다. 기에는 사라지고 불어나는 것이 있는데, 기가 불어나면 썩어 냄새가 풍기는 육신도 신선이 되고, 기가 사라지면 정령(精靈)도 말라빠지게 된다. 신선이란 천지와 일월의 정기를 훔쳐 비록 매미가 껍질을 벗듯 육신을 벗어나 신이 된다고 하지만, 원회(元會)의 수가 다하면 천지와 일월도 파괴되고 없어지는데 하물며 그 힘을 빌려쓰는 자이겠는가. 또 《황극경세(皇極經世)》를 보면 대화(大化 천지)가 장차 끝날 적에는 유회(酉會)에서 6천 년을 경과한 후에는 신선도 모두 없어져 남지 않는다 하였다. 또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의 《완위여편(宛委餘編)》을 보면 신선은 파두(巴豆)를 먹으면 즉시 죽는데 쥐는 먹으면 자란다 하였으니, 신선이 도리어 쥐만도 못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신선을 부러워할 것이 뭐 있겠는가.

     


    [주D-001]요(堯) 임금의……받는 것 : 극양(克讓)은 능히 겸양하는 것.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요 임금의 덕(德)을 열거하면서 "진실로 공손하고 능히 겸양했다.[允恭克讓]" 한 말이 있다. 겸겸(謙謙)은 겸손하고 또 겸손한 것. 《주역(周易)》 겸괘(謙卦) 초육 효사(初六爻辭)에 "초육은 겸손하고 또 겸손하니 군자가 이 상(象)을 취하여 큰 내를 건너는 것이 길하다.[初六謙謙 君子用 涉大川 吉]" 하였다. 이는 음효(陰爻)인 초육효는 본래 유순한데다 또 맨 밑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라 한다. 겸괘 단사(彖辭)에는 "천도는 가득한 것을 덜어내고 겸손한 것을 더해 주며, 지도는 가득한 것을 변하여 겸손한 데로 보내주고, 귀신은 가득한 것을 해치고 겸손한 것을 복주며, 인도는 가득한 것을 미워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한다.[天道虧盈而益謙 地道變盈而流謙 鬼神害盈而福謙 人道惡盈而好謙]" 하였는데, 한번 겸손하여 네 가지 유익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 말이다.
    [주D-002]풍각(風角)·성산(星算) : 풍각은 고대의 점후법(占候法)으로 사방 즉 동·서·남·북의 바람과 사우(四隅) 즉 동남·동북·서남·서북의 바람을 살펴 길흉을 점치는 것이며, 성산은 천문(天文)과 산수(算數)를 가리킨다.
    [주D-003]금단(金丹)……옥장(玉漿) : 금단은 신선이나 도사들이 조제하여 만든 불로(不老)·불사(不死)의 약으로, 곧 황금액(黃金液)의 단사(丹砂)로 구워 만든 환단(還丹)을 말한다. 도가에서는 특히 이 단(丹)을 중요시하는바, 내단(內丹)·외단(外丹)의 분별이 있다. 내단이란 자기 몸에 있는 단전(丹田)의 정기를 수련하여 이룬 것이며, 외단이란 바로 단사로 구워 만든 단약(丹藥)이라 한다. 운영(雲英)은 운모(雲母)의 별칭. 팔석(八石)은 도가에서 복용하는 여덟 가지의 석약(石藥)으로, 주사(朱砂)·웅황(雄黃)·운모·공청(空靑)·유황(硫黃)·융염(戎鹽)·초석(硝石)·자황(雌黃)이다. 옥장은 옥이 녹은 물로 일명 옥천(玉泉)이라 하는데 맛좋은 음료로 복용하면 불로 장생한다는 것이다.
    [주D-004]알자(謁者) : 궁중에서 빈객(賓客)을 안내하는 일을 맡아보며 또 임금의 명을 받아서 사방에 사자(使者)로 나가던 관리의 이름.
    [주D-005]미무 좨주(米巫祭酒)의 교 : 후한(後漢) 말기 장도릉(張道陵)의 손자인 장노(張魯)가 스스로 칭한 명호(名號). 장도릉은 촉중(蜀中)의 명학산(鳴鶴山)에서 도술을 배웠는데, 환자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다섯 말의 쌀을 받았으므로 오두미도(五斗米道)라 칭하게 되었다. 그후 장노는 이것을 계승한 다음 관명(官名)인 좨주(祭酒)를 따서 미무 좨주라 하였다. 이 교는 장각(張角)으로 이어져 결국 황건적(黃巾賊)이 되어 후한이 멸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주D-006]전진교(全眞敎) : 금(金) 나라의 도사 왕철(王喆)은 삼교평등회(三敎平等會)를 만들어 유교의 충효(忠孝)와 불교의 계율(戒律)과 도교의 단정(丹鼎 : 단약을 만드는 솥)을, 한 화로에서 도야된 것이라 하여 전진교라 하였으며, 스스로 중양자(重陽子)라 호하고 전진암(全眞菴)에 거주하였으므로 전진도사(全眞道士)라 칭하게 되었다.
    [주D-007]백옥섬(白玉蟾) : 원명은 갈장경(葛長庚). 남송(南宋) 사람으로 경주(瓊州)에 살았으며, 자(字)는 여회(如晦)이고 호(號)는 해경자(海瓊子). 처음에는 뇌주(雷州)에 이르러 백씨(白氏)의 양자(養子)가 된 다음 옥섬이라 이름하였다. 무이산(武夷山)에서 도(道)를 배워 태일궁(太一宮)에 거주하고 자청명도진인(紫淸明道眞人)에 봉해져 도교 남종(南宗) 오조(五祖)의 하나가 되었다.
    [주D-008]삼청(三淸)의 초제(醮祭) : 삼청은 도교의 삼신(三神)으로 옥청 원시천존(王淸元始天尊)·상청 영보도군(上淸靈寶道君)·태청 태상로군(太淸太上老君)인데, 이 옥청·상청·태청은 또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한다.
    [주D-009]구류(九流) : 아홉 가지의 학파로 유가류(儒家流)·도가류(道家流)·음양가류(陰陽家流)·법가류(法家流)·명가류(名家流)·묵가류(墨家流)·종횡가류(縱橫家流)·잡가류(雜家流)·농가류(農家流)를 말한다. 《漢書 藝文志》
    [주D-010]영근(靈根)과 혜성(慧性) : 원래 불가의 말로 사람이 태어날 때 영특하고 훌륭한 근기(根機)를 받은 것을 말한다.
    [주D-011]감(坎)을 취하여 이(离)를 메운다 : 감은 북방으로 물에 해당하는데 정(靜)을 의미하며, 이는 남방으로 불에 해당하는데 동(動)을 의미한다. 동은 욕정(慾情), 정은 수양(修養). 곧 수양으로 욕정을 억누르는 것을 말한다.
    [주D-012]투태(投胎)하고 탈사(奪舍)하니 : 투태는 영혼이 딴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탈사는 도가에서 남의 시신(屍身)을 빌려 화신하는 법. 건강(建康)에 진 도인(陳道人)이 있었는데 항상 오인(仵人: 시체를 검사하는 사람)과 왕래하며 술을 마시곤 하여 매우 친하였다. 도인은 그에게 "나는 17~18세의 건강한 남자 시신을 얻고 싶다." 하였다. 하루는 유 태위(劉太尉)가 한 소년을 매질하여 죽자 오인이 갖다 주었더니, 도인은 그 시체를 목욕시킨 다음 자기의 옷과 관을 입혀 한 탑자(榻子) 위에 가부좌(跏趺坐 : 발등을 포개고 앉는 좌법〈坐法〉)시키고 자기도 그 앞에 가부좌하였다. 다음날 아침 보니, 도인은 시체로 화하고 소년의 시체는 살아 있었다. 이것이 바로 탈사법이라 한다. 《癸辛雜誌》
    [주D-013]삼오(三五)의 달리(達里) : 도(道)를 통달할 수 있는 상징의 주름이라 한다.
    [주D-014]복준(覆准) : 복의(覆議)를 거쳐 비준(批准)하는 것.
    [주D-015]치미(鴟尾) : 일명 치미(蚩尾)라고도 하는데 지붕의 등마루에 기와로 만들어 놓은 짐승의 모습. 이는 원래 한(漢) 나라 궁전에 화재가 많았는데, 하늘에 있는 어미성(魚尾星)의 상(像)을 만들어 지붕 위에 놓으면 화재를 방지할 수 있다는 술자(術者)의 말을 따른 것이라 하기도 하며, 또는 치(蚩)는 해수(海獸)이기 때문에 화재를 막을 수 있다 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한다.
    [주D-016]원우간당비(元祐姦黨碑) : 원우는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원우간당이란 사마 광(司馬光)을 위시하여 여문저(呂文著)·문언박(文彦博)·소식(蘇軾)·정이(程頤)·황정견(黃庭堅) 등 당시의 문인(文人)과 학자 1백 19명으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신종(神宗) 때 구파(舊派)인 사마광은 신파(新派)인 왕안석과 격렬한 당쟁을 벌였는데 신종의 뒤를 이은 철종은 구파를 등용하였다. 그러다가 휘종(徽宗)이 즉위하자, 숭녕(崇寧) 원년 간신인 신파의 증포(曾布)·채경(蔡京) 등은 휘종에게 구파의 2백 20명을 간당이라 하고 비석에 새겨 단례문(端禮門)에 세울 것을 주청하여 그 다음 해에 완성하였으니, 이것이 원우간당비이다.
    [주D-017]소(蘇)·황(黃) : 문장가인 동파(東坡) 소식(蘇軾)과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을 가리킨다.
    [주D-018]동(童)·채(蔡) : 소인인 동관과 채경을 가리킨다.
    [주D-019]한우충동(汗牛充棟) : 서적이 많아 수레에 싣고 소로 끌게 하면 소가 땀을 흘리고, 쌓아 올리면 마룻보에 가득함을 말한다.
    [주D-020]《유양잡조(酉陽雜俎)에……다음과 같다 : 현재 《유양잡조》에는 24종에 그치지 않고 35종에 이르며 그 순서도 다른 바, 참고하기 위하여 적는다. 《자일왕검》·《사규명경》·《오주중경비귀질》·《비황자경》·《녹로교경(鹿盧蹻經)》·《함경도》·《와인도》·《원지도》·《목지도》·《대외신지도》·《견우경》·《옥진기》·《납성기(臘成記)》·《옥안기(玉案記)》·《단대경》·《일월주식경(日月廚食經)》·《금루경》·《삼십륙수경(三十六水經)》·《중황장인경》·《협룡자녹대경》·《옥태경》·《관씨경》·《봉망경》·《육음옥녀경》·《백호칠변경》·《구선경(九仙經)》·《십상화경(十上化經)》·《등중유수섭제경》·《삼강육기경(三綱六紀經)》·《백자변화경(白子變化經)》·《은수경(隱首經)》·《입군경(入軍經)》·《천추경(泉樞經)》·《적갑경》·《금강팔첩록》.
    [주D-021]전오씨(典午氏)가 남도(南渡)한 이후 : 동진(東晉) 시대를 가리킨다. 전오(典午)는 진(晉) 나라의 성인 사마씨(司馬氏)를 가리키는데, 진 나라는 원래 장안(長安)에 도읍하였으나 오호(五胡)의 난리 때문에 강동(江東)인 건강(建康)으로 천도(遷都)하였으니, 이 이전을 서진(西晉), 이 이후를 동진이라 칭한다.
    [주D-022]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 : 하 빈객은 태자빈객(太子賓客)을 지낸 하지장(賀知章)을 가리킨다.
    [주D-023]《삼국지(三國志)》 강표전(江表傳) : 강표전은 원래 진(晉) 나라 우부(虞溥)가 찬한 것인데, 현재 전하지 않고 오직 《삼국지》의 주(注)에 만이 인용된 바, 이 말은 오지(吳志) 손책전(孫策傳) 주에 나오는 말이다.
    [주D-024]채붕(綵棚) : 그늘을 지게 하기 위하여 나무로 시렁을 만들고 채색 비단으로 꾸미는 것인데, 불교의 행사 때에 많이 사용한다.
    [주D-025]녹비공(鹿皮公)은……나왔고 : 녹비공은 곧 녹비옹(鹿皮翁)으로 한(漢) 나라 사람인데 재주가 있어 손으로 기계를 만들었으며 사슴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산에 들어가 은거하여 선술을 익혔다. 옥화(玉華)는 아름다운 옥으로, 도가에서는 옥을 복용하면 장생 불사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먹었던 녹비공도 결국 죽어 시체에서 벌레가 나왔으므로 한 말이다.
    [주D-026]원회(元會)의 수 : 역학가(易學家)인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황극경세(皇極經世)》에 보면 천지의 시종수(始終數)는 12만 9천 6백 년인데 이것을 1원(元)이라 한다. 이것은 다시 달의 수인 12지지(地支)로 나뉘어져 1회(會)는 1만 8백 년이 된다 한다. 그리하여 하늘은 자회(子會)에서 개벽되고 땅은 축회(丑會)에서 개벽하였으며 사람과 물건은 인회(寅會)에서 비로소 태어났다. 미회(未會)의 3~4천 년을 경과하고 나면 사람이 50세가 넘어 혈기가 쇠하는 것처럼 천지도 늙는다. 다시 유회(酉會)의 6천 년을 경과한 뒤에는 유도(儒道)가 쇠하고 신선이 모두 없어져 남지 않으니,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소위 우물에서 연기가 나오고 나무에서 불이 난다는 시기이다. 술회(戌會)와 해회(亥會)를 경과하면 현재의 천지가 완전히 파괴되고 다시 새로운 천지가 개벽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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