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선사상의 현시대적 의의 - 용호결을 중심으로
이 진 수(한양대, 체육학과)
신선사상은 참으로 오래 전부터 우리 땅에 정착한 사상으로 신라 때에는 화랑도들의 행동이념으로, 고려 때에는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주자학적 이데올로기가 주류를 이룬 조선에서는 폐기를 중심으로 한 신체수련사상으로, 현재는 단학이란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다.
화랑도들은 풍류라 이름한 현묘한 도를 ‘천신을 제사지내는’ 齋戒 과정을 통해 체득하였다. 그 대표적인 방법은 김유신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단독입산수행’이었다. 천지신에 대한 재계와 기도는 신체에 대한 경건성을 알게 하였다.
경철학으로 회자되는 해동주자 퇴계는 ‘천선은 원치 않으나 지선을 되고 싶다1)’ 고 설파했으며, 정렴은 <용호결>을 지어 조선단학의 새장을 열었다.
이 연구의 목적은 이능화의 <용호비결>을 기본 텍스트로, 최근에 양은용이 발견한 <단학지남>을 참고로 하여 그 현대적 의의를 밝히려는 것이다. 용호비결은 조선단학파의 저술 중에서도 김시습의 잡저에 보이는 용호, 수진의 뒤를 잇는 복기이론으로 주목되는 명저이다. 이 글은 조선조 전기 중종 때 포천 현감을 지낸 정렴(鄭?, 1501-1549)이 지은 丹學書이다.
정렴에 의하면 현빈일규로부터 태식이 되고, 태식에서 周天火候가 되고, 주천화후에서 結胎가 되니 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용호결의 폐기하는 방법은 좌선식(坐禪式) 폐기법이다. 좌선식이라 말 할 수 있는 것은 북창이 책상다리를 주석하여 금강좌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폐기의 효험은 “스스로 몸이 편해져서 눈앞에 눈이 펄펄 날려도 내가 나의 육신에 깃들어 있는지, 육신이 나에게 속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아득하고 황홀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지경이 된다. 이런 지경이 되면 그 때는 태극이 갈리기 전의 상태에 있게 되는” 眞仙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정렴이 특히 강조한 것은 질병의 예방이었다. 그는 ‘의사는 병이 난 후에 고치지만 도가는 병나기 전에 고친다(醫家治病於已病之後, 道家治疾於未病之前)’고 강조하여, 병나기 전에 조심할 것을 강조한다. 이 같은 견해는 동의보감에서도 발견된다. 허준에 의하면 지인은 덕이 높고 사계절의 음양의 조화를 알며, 속세를 떠나 積精하여 全神하고 천지 사이에 노니는 사람이다. 지인은 도가에서도 지극히 높은 수준의 수련을 쌓은 인물로 도가의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일반인도 수련을 하면 누구나 지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도교가 갖는 서민적 특징이기도 하다. 정렴의 견해나 허준의 그것은 단을 수련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의 새로운 지평을 긍정적으로 보여 준다. 더구나 치심이니 수양이니 하는 용어는 주자학에서도 중요한 핵심 사상이기 때문에 일반 주자학자들이라 해도 위의 인용문을 일방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폐기의 기법은 앞에서 거듭 강조한 그대로 숨을 단전으로 내려 보내고 숨을 닫아 참는 것이다. 숨을 참는 것은 고통이지만 이것은 우리의 신체인식을 돕는 직접적인 행위가 된다. 이 행위가 익숙해지면 ‘신체가 화평해지고, 백병이 없어지는’ 효능을 보게 된다. 신체가 화평하다는 신체인식은 말하듯이 쉽게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수련기간이 필요하다.궁극의 체험은 위에서 정렴이 지적한 대로 ‘몽롱 황홀한 태극 이전의 상황’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태극 이전의 상황은 스포츠에 몰입되어 일어나는 의식의 변용상태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폐기에 의식을 집중시키는 것은 스포츠라는 외부활동에 우리가 우리의 의식을 집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들의 신체에 관한 인식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스포츠활동에서 인식성의 고양이 확실히 보장되지 않는 반면에 호흡을 단전에 넣는 폐기법은 이 인식성에 그 초점이 있기 때문에 훨씬 더 그 고양이 보장되는 장점을 갖는다.
1. 서론-한국적 신선사상과 신체수련
신선사상을 우리는 흔히 중국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중국과의 문화교류가 시작되기 이전 신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었다. 최치원은 이것을 “國有玄妙之道曰風流”라 하고 이것이 儒佛道 삼교의 장점을 아울러 갖춘 신라의 독특한 사상이라 하였다. 우리가 보통 ‘風月道’ 혹은 ‘風流道’라고 부르는 것이 이것이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國仙’도 이 현묘지도의 다른 이름이다.
최근에 발견된 필사본 『화랑세기』에 의하면 화랑은 仙徒라 하여 그 역할은 천신께 제사지내는 것이었다. 중국의 신선과 달라 한국의 선도는 천신을 제사지내는 사제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따라서 한국에서 신선사상을 논하려면 우선 이 선도의 문제가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주최 측으로부터 제의받은 주제는 <신선사상의 현대적 의의>이다.
종래의 신선사상을 연구한 학자들은 신선이란 중국어에 몰입되어 한국의 신선을 그대로 중국 스타일의 신선과 동일시한 경향이 있다. ‘풍류도의 신선’은 화랑을 국선이라 부른 것과 궤를 같이 해 한국 전통의 신선이었음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단순하게 ‘신선사상’이라 하면 중국의 그것을 연상할 수는 있다. 신라의 예원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을 때 당나라의 유향이 예원에게 신선지도에 관해 물었다. 예원은 제16세 풍월주 보종이 그 도를 얻었다고 답변한다. 유향이 신라의 신선에 관해 알 리가 없었을 터이니 그의 질문에는 중국적인 신선의 도가 전제가 된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예원이 보종공의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은 우리의 선도에 중국적인 신선사상과 동질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게 한다. 보종에 관한 기록은 화랑세기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16세 풍월주 보종의 성품은 청아하고 문장을 좋아하였으며---정이 많았다. 선과 악, 이와 해를 나누지 않았다. 술과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늘 작은 청려에 걸터앉아 피리를 불며 시가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공을 가리켜 眞仙公子라 하였다. 얼굴은 관옥과 같았고 손은 마치 하얀 새싹과 같았다. 그림을 잘 그렸는데 인물과 산수의 절묘함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2)
진선이란 정말 참 신선이란 말이요 공자란 귀족의 자제란 말이다. 그러면 당시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그를 진선이라 하였을까? 서양의 학자가 정의한 신선은 속세를 떠나 산에 살면서 황홀한 춤을 추며 사는 사람으로 죽지 않고 오래 사는 사람이다.3)
(Kohn, L.,1992;84) 포박자에 나타나는 신선은 위의 설명과는 달라 훨씬 세속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포박자에 보이는 신선은 ‘언제나 건강한 모습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성교도 하며, 높은 봉록을 받고, 이목은 총명하여 몸의 각 관절도 튼튼하고, 안색도 윤기가 나 항상 살아있는’ 그런 신선이다. (葛洪, 1987: 37709) 신선이 되려면 우선 죽지 않아야 하는 데, 갈홍은 죽음의 원인으로 첫째 정력의 소모, 둘째 늙음, 셋째 질병, 넷째 중독, 다섯째 邪氣, 여섯째 風冷氣를 든다. 따라서 이 6가지만 막는다면 우선 사망을 모면할 수 있다. 導引, 房中術, 음식의 절제, 補藥, 몸을 지키는 符籍, 精神統一 등은 사망을 막는 좋은 방책이 된다.
그런데 우리의 진선공자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보여 동서양 신선의 정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얼굴이 늘 어린아이 같았다. 늘 콩죽을 먹고 고기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정원의 여러 종류의 고목을 보고, 물고기를 기르고 학을 기르며 그 사이를 거닐었다. 우주의 진기를 깊이 살펴서 어조와 화목이 끊임없이 생기는 이치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유신공이 병이 나니 문득 몸소 치료하며 ‘공은 국가의 보배이니 나의 의술을 숨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로써 그가 편작의 학을 갖추었음을 모두 알게 되었다.”4)
신라의 신선은 죽지 않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전혀 없다. 역대의 화랑들은 정력의 소모를 막기 위한 방중술에는 전혀 힘을 쓰지 않고 오직 더 많은 자손을 얻기 위해 보다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아니 화랑제도 그 자체가 정력을 될 수 있으면 유용하게 쓰도록 유화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이 위에 제시한 포박자의 성교하는 신선을 들 수 있을지는 모르나 포박자의 그것은 ‘嗇精’에 중점이 놓여져, 미인들과 房事를 마음대로 하는 신라의 仙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화랑세기에 보이는 仙은 무리를 지어 놀면 仙徒가 되는데 그 구성원은 신라의 청소년들이었다. 중국의 신선은 童顔이라고 해도 대개는 건강한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정액을 아껴 상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신라의 선은 護國仙들로 말 타고 검을 쓸 줄 알아야 하는 전사단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선들이다. 얼굴이 아름답고아양을 잘 부려 두 태자가 총애한 제 10세 풍월주 미생의 경우, 만덕에게 춤을 배워 그 근본을 터득한 장점은 있었으나 말도 못타고 검도 쓸 줄 몰라 문노로부터 ‘무릇 낭도가 말에 오르지 못하고 검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하루아침에 일이 생기면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꾸지람을 들어야 하였다.5) 그래도 미생은 검도를 좋아하지 않고, 눈썹을 그리고 아름답게 화장하고는 미인들 속에 파묻혀 살다가 죽었다. 물론 자식은 많이 낳아 아들만 백 명이나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60세의 수를 누린 것은 관직에서 일찍 물러나 ‘養眞’한 까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6) 양진의 뜻은 진원지기를 기르는 것이니 시쳇말로 정력을 기름에 다름 아니다. 물론 미생이 어떤 방법으로 양진을 하였는지는 기록된 것이 없어 지금에 와서는 알 수 없다. 그 당시에도 황당무계한 미생의 전기가 많이 나돌았다고 하니 일세를 풍미한 花柳公子였다.
그러나 진선공자 보종은 우주의 참된 기를 깊이 탐구하여 물고기, 새, 꽃, 나무들의 자라는 이치에 정통하였다 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의술에도 조예가 깊었다니 이 같은 것은 포박자에 나오는 신선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신선이 ‘長生不死’를 그 본지로 함에 비해 신라의 仙은 시조 위화랑의 贊에 ‘살아서는 선이요 죽어서는 부처가 되었다’7)고 보이는 것처럼 신선이 되어 白日昇天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면 부처가 되었다. 신라사람 金可紀가 중국에서 선도를 닦아 살아 하늘로 올라갔다는 중국 측의 기록과는 본질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김대문의 시대에 도교가 아직 신라에 소개되지 않았거나 신라의 仙이 신라만의 독특한 것임을 강조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신라의 仙은 ‘仙徒의 선’으로 원래 이들은 神宮에서 신에게 봉사하는 무리들이었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을 받드는 일을 주로 하였는데 國公들이 신을 받들기 시작한 후부터 선도들은 도의를 서로 힘썼다.8) 그들은 나라가 위급하면 전쟁터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기도 하는 그런 戰士團的인 仙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護國仙’, ‘武道’, ‘劍道’ 란 용어가 이들 선과 결합되어 있다는 데서도 분명하다. 이 연구의 主眼도 이것에 있으므로 나중에 상세히 논하기로 하고 우선 여기서는 仙道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선도란 용어는 화랑세기에 여러 곳에 보이는데 그 용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당나라의 유향이 신선의 도에 관해 물었을 때에 공은 보종이 능히 그 도를 얻었다고 답하였다.8)
2) 미실은 이에 설원랑이 문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설원랑과 미생 등에게 문노를 선도의 스승으로 섬기라고 하였다.9)
3) 선도는 본래 우주의 청원의 기에서 나왔다. 시비로써 서로 다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형 모랑공이 오직 그 전부를 얻었는데 불행하게 일찍 죽었다. 나는 못나서 그 도를 다 듣지 못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권세와 지위로써 位를 계승하였기에 아랫사람들을 다스릴 수 없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위를 버리고 도를 구하여 참된 생이 되도록 하라.10)
4) 대세는 이에 발분하고 힘써 공부하여 신선의 참된 도를 터득하고자 하였다. 친구인 구칠과 더불어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갔다. 구칠도 공의 화랑이었다.11)
5) 선도는 보종을 따르고 무도는 유신을 따랐다.12),
이상의 예문 중에서 1)은 20세 풍월주 예원이 김춘추를 따라 당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곳의 학자 유향이 질문한 것이다. 물론 유향의 질문은 중국적 신선을 염두에 둔 것이었을 것이나 예원은 16세 풍월주 보종이 그 도를 얻었다고 대답한 것이다. 보종에 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진선공자를 말한다. 15세 풍월주였던 김유신이 낭도들에게 ‘너희들이 선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보종형공을 따라야 한다.’ 고 하였을 정도로 당시 가장 저명한 이가 보종이었다. 보종의 贊에 ‘어조의 벗으로 천리를 달관하니 말 없이도 교화하고 도모하지 않아도 아름답다. 적송의 아들은 오직 공뿐이다.’ 라고 하였다.13)적송은 중국의 신선이다. 列仙傳에 의하면 그는 신농 때의 雨師로 水玉을 먹었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았다고 한다(장지철,1992;302).
그러나 보종을 설명한 어느 곳에서도 중국적 신선이 행한 연단술이나 생명 연장을 위한 방법이 보이지는 않는다. 김유신이 學仙을 강조하기는 했어도 구체적으로 그것의 실상은 화랑세기에 설명된 것이 없다. 물고기와 새를 벗삼아 천리를 달관한 것은 신선의 능력임에 틀림없으나 그가 신선이 되어 산속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지 않고 일반인들과 다름없이 市井에서 죽었으니 이것이 중국의 그것과 다른 것이다.
2)의 기사는 설원랑은 풍채가 아름답고 옥적을 잘 불었으나 신분이 미천하여 낭도들의 중망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미실이 당시 왕의 총애를 받고 낭도들을 호령하여 따르게 한 것이니 그 기반이 매우 약했다. 그래서 미실은 진지대왕을 폐하고 진평대왕을 세우는 데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문노파를 무마하고 설원랑을 풍월주로 만들기 위해 당시 인망이 많았던 문노로부터 미실의 자식인 설월랑과 미생이 모두 선도를 배우게 한 것이다. 당시 문노는 왕이 임명한 國仙이었다. 문노는 국선으로 화랑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므로 仙花라 불리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선도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설원랑이나 미생이 옥적이나 춤에만 능숙했을 뿐이었기 때문에 다른 과목을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서 말하는 과목이란 11세 풍월주 하종이 15살에 화랑에 들어가 배운 역사, 노래, 검술, 춤 등이 아닌가 판단된다.14)
3)의 예문은 낭도들이 진골정통파와 대원신통파로 갈리어 서로 시비가 붙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화공이 하종공에게 주장한 말이다. 선도가 우주의 청원의 기로부터 나온 것이니 시속의 시비꺼리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원래 화랑은 권세와 세속의 지위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한 말이다. 비록 속세의 사정에 의해 화랑으로 추대되었다 하드라도 ‘도를 구하여 참된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득하고 있다. ‘求道眞生’의 근본 의미는 원래 선이 세속의 정치와는 관계없는 神宮의 奉神에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선은 조상신을 받들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본분이었으니 몸을 닦아 부정을 타지 않게 하여 신이 깃들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다른 세속의 권력은 그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도가 ‘우주 청원의 기’라는 말은 뒤의 보종공 조에 보이는 ‘우주의 진기’ 라는 말과 상통된다. 청원은 깨끗한 근원이란 말이고, 진기는 참된 기이니 이것은 생명의 기라고 할 수 있다. 보종은 생과 사의 이치를 깊이 깨달았고, 이화공은 제사의 원리가 청결함에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라 할 수 있다.
4) 여기에 보이는 신선의 참된 도란 아마도 중국적인 선도를 의미하는 것 같다. 대세가 스스로를 완적이라 하였으니 이미 중국적 신선도가 신라에도 알려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결국 대세는 중국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탔을 것이다.
5)는 화랑이 무도와 선도로 크게 구분되었음을 알게 한다. 삼국의 쟁패시기에 무술을 연마하여 국가에 헌신하여 입신영달하기를 바란 낭도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김유신의 동생 흠순이 ‘빈 그릇만 지킬 수는 없다’ 하고 전쟁터로 낭도들을 이끌고 나아가 郎政을 4년이나 돌보지 않은 것은 이 같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에 보이는 낭정은 봉신하는 일을 지칭한다고 할 것이다. 나라가 위급한데 제사지내는 빈 그릇만 지킬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 때에 사람들은 공 세우기를 좋아하고 선도를 탐구하지 않았다고 화랑세기에 보인다.
이상에서 고찰한 것과 같이 신라의 선도는 중국의 선도와는 분명히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할 수 있다. 신라의 선도는 신궁에서 봉신하기 위해서 정한 절차 혹은 형식을 체계화 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김대문은 이것을 총체적으로 仙道라 하였을 것이다. 선도는 신선의 도라 해석될 수 있으나 화랑세기의 경우는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그런 선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신선이 되기 위해 화랑들은 어떤 수련 방법을 채택하였을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이는 화랑의 신체 수련으로 우리는 ‘沐浴齋戒’, ‘기도’ ‘單獨入山修行’을 들 수 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화랑은 <神宮의 大祭>를 담당하였던 <仙>의 무리였다고 한다.15)나라의 큰 제사를 주관한 것이 바로 화랑이었다는 말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해 화랑의 순국정신만을 높이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는데, 이것을 이종욱은 ‘만들어진 화랑상’이라 비판한다. 화랑이 신궁의 제사를 담당한 선도들이었음이 화랑세기에 의해 새로이 밝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영주 혹은 영지에 목숨을 건 일본 무도와는 그 본질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이제까지 화랑도의 연구로 잘 알려진 일본인 학자-미시나(三品), 이께우치(池內) 등-들은 화랑을 일본식으로 파악하고 화랑을 무사정신에 투철한 戰士로 비유하였던 것이다. 나라의 큰 제사를 담당한 司祭로서의 화랑을 연구한 학자는 전무하였다.
화랑이 사제로 있던 신궁은 어떤 곳인가?
신궁은 삼국사기 신라 제 21대 소지왕 9년(487)의 기록에 나타나며, 소지왕 17년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하였다고 한다. 신궁은 신라의 국가 체제의 정비와 왕권강화가 이루어진 시기에 설치되었다. 최광식은 천지신을 모신 신궁의 설치는 대내적으로 국가체제 정비에 따른 사상적 통일정책이며 대외적으로는 국력의 신장에 따른 국가 의식의 자주적 표현이라 주장하였다(최광식, 1994: 215). 그렇다면 신궁이 설치되기 이전의 상황은 어떠하였을까?
신궁이 설치되기 이전의 한반도는 귀신을 섬기는 부락 국가 시대였다. 각 부락마다 섬기는 신이 있었고 사제가 있었으니 곰을 섬기는 부족이 있는가 하면 호랑이를 섬기는 부족도 있었다. 각 부족들은 자신의 주신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소속 부락의 죄주들을 보호하는 부락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는 <소도>에 관한 기록은 소도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무사의 무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16) 손진태는 주에 보이는 ‘호작적(好作賊)’을 ‘각 부락 간의 적대심’으로 풀이하고 있지만(손진태,1984: 130) 어떻든 자기 경계에 대한 각 부락민의 수호 의지가 있었음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무장세력이 존재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仙徒라는 용어가 중국의 신선과는 달라 신궁에서 제사를 지내던 집단이었음은 화랑이 일본적 무사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그 기원이 시작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일본의 무사가 자신의 토지 혹은 그 땅을 준 領主에 충성하는 차원에서 출발하였다면 화랑의 그것은 鬼神에 대한 제사로부터 그 정신이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귀는 죽은 사람의 혼령을 신은 자연신을 포괄해서 신명이란 의미를 갖는다.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는 孝의 지속적 표현이므로 인간의 인격형성에 도움을 준다(金勝惠, 1994; 141) 제사활동은 신을 섬긴다는 경건한 몸과 마음을 요구한다. 제사에서의 경건함이 없었다면 공자의 유학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논어에는 공자의 제사 참여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그러므로 공자는 제사 지내기 위한 준비인 齋戒를 대단히 중시하였다. 재계는 마음과 몸을 가지런히 하고 몸을 깨끗이 하며, 또 부정한 일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다. 화랑도들의 심신수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재계였다.
김유신은 그의 두 번의 입산수행, 방술의 비결을 받은 중악에서 그리고 검술을 수련하기 위해 들어간 인박산에서도 가장 먼저 행한 것이 재계하고 하늘에 고하는 것이었다. ?향을 사르고 하늘에 고하였다(燒香告天)?라 하였으니 마음을 다하여 제단을 차렸음을 의미한다. 검술을 수련하는데 재계가 절대적인 가치를 갖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김유신의 경우 방술의 비결을 받을 때에도 재계하였음을 보면 이 재계가 화랑의 인격 수양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알게 한다. 단독 입산하여 재계하는 것이 화랑 수행의 한 가지 방법이었다고 할 것이다(이진수,1990;159).
검술을 수련하는 데에 재계가 왜 필요한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일본 무도의 탄생에 종교적이고 주술적인 영향이 심대하였던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술이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인간보다 더 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신비한 능력을 종교나 주술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신비한 靈力이라 불렀는데, 김유신의 당대에는 하늘의 별인 천관, 허성, 각성이 검술의 능력을 높인다고 생각하였던 듯 하다. 그리고 이것은 화랑이 신궁의 제사를 담당한 선도였다는 사실과 맞물려 있어 더욱 명백한 사실로 우리에게 인식된다. 제사 지낼 때의 마음가짐에 관해 체계를 세운 최초의 인간은 孔子이고, 이 공자의 사상을 조선에서 체계화한 이는 退溪 李滉이며, 다시 퇴계의 사상은 일본에 전파되어 무도에서의 敬 思想을 배태하게 한다.
앞에서 언급한 그대로 화랑의 제일의 목적은 제사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체성은 당연 신체의 敬虔을 토대로 그들의 행위가 성립되었다. 다시 말하면 경건이 바로 화랑도들의 신체성으로 굳어졌다는 말이다. 경건이란 신체성은 화랑도들이 닦아야만 했던 필수과목이기도 하다. 화랑세기에 화랑들이 신궁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던 무리들이라 하고 ?옛날에는 선도가 주로 신에게 제사지냈다(古者仙徒只以奉神爲主)? 라고 한 것도 이것을 말한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은 모든 제사 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큰 것으로 이 때에 화랑도들은 초고조의 경건함을 체득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래도 부족함을 느낀 김유신 같은 이는 두 번 씩이나 단독의 입산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권3 ?대산오만진신? 조에도 이것과 비슷한 대목이 보인다.
신라정신대왕의 태자 보천과 효명의 형제는 각각 천명의 낭도들을 인솔하고 하서군에 도착해, 각간 세헌의 집에 유숙하였다. 익일은 대령을 넘어 성오평에 도착하였다. 두 형제는 방외에 뜻이 있어 밀약하고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오대산 안으로 숨었다. 시위들은 형제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해 할 수 없이 돌아가 버렸다. 두 사람의 왕자가 산에 들어가 보니 홀연 靑蓮이 땅위에 피었으므로 형 태자 보천은 그곳에 암자를 세우고 살았다. 동생은 그곳에서 600보 동북에 있는 북대의 남쪽 기슭에 도착하니 거기에도 청련이 피어 있으므로 그 곳에 암자를 세웠다---그들은 매일 아침 寅時에 일어나 골짜기의 물을 길어 차를 다리어 오만진신에 공양하였으며 밤에는 각자의 암자에서 수도하였다(每日寅朝, 二公每汲洞中水, 煎茶獻供, 至夜各庵修道)---효명은 돌아와 왕위에 오르나---보천은 언제나 영동의 물을 마셨으므로 만년에는 육신이 하늘을 나르게 되었다(寶川常汲服其靈洞之水, 故晩年肉身飛空).
매일 아침의 4-6시 사이에 낭도 일천을 이끌던 화랑들이 세속과 인연을 끊고 골짜기의 샘물을 길어 차를 다리고, 이것을 오대산의 오만진신에게 공양하였다는 것이 우리들의 주목을 끈다. 그들의 수련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보천의 ?육신비공?으로 이 대목이 끝난 것으로 보아 이 또한 김유신의 검술 수련과는 다른 목적이었지만 그들이 지향한 바를 달성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랑도들이 지향한 것이 무도였든 혹은 방외를 떠난 자유로운 비상을 뜻하였든 그 기초에 제례의 경건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경건함에서부터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친구와는 믿음으로 사귄다는 화랑정신이 태어난 것이다. 우리가 현대의 무도에서 지금 배워야 할 것은 폭력적 용감성에 앞서 이 신체의 경건성을 배워야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조상님의 제사에 적극 참여하여 우리 전통의 경건성을 몸에 구현하는 것이 바로 무도정신과 통하는 지름길이다.
《불사의 신화와 사상》이란 명저로 우리에게 낯익은 정재서 교수는 <용호결>의 저자 정렴의 직계자손이기도 하다. 정 교수에 의하면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는 단전 호흡법이 있었다고 하는데 ‘화랑도들이 행했던 비법’ 이라고 그의 조모가 말했다는 것이다. 화랑도들이 단전호흡을 수련했다는 말에 제일 놀란 사람은 필자였다.
필자는 한 때 화랑도의 체육을 연구하느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최근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화랑세기까지 두루 섭렵하였지만, 그 어느 구석에서도 화랑도들이 단전호흡을 행하였다는 증거를 포착하지 못하였다.(李鎭洙,1990)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지금 유행하고 있는 단학선원이란 곳에 가면 대개 그 연원을 신라의 화랑도로부터 찾고 있지만, 사실 입증될 만한 사료가 전혀 없어, 학술적으로 체계를 세우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용호결은 조선 단학파의 주요 경전으로 지금 우리들 앞에 존재한다. 지금 세상에 유통되는 용호비결에는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에 보이는 것과 1994년에 양은용이 발굴하여 소개한 <단학지남>에 보이는 양생지남의 두 가지가 있다. 양은용은 전자와 후자에 대한 서지학적 연구를 발표하고, 후자가 더욱 오래된 원전이라 주장하였다. 단학지남의 체제는 상, 중, 하의 三編本인데, 후자는 폐기, 태식, 주천화후의 分章本이다. 전자에는 주석이 있어 주요사항에 細註를 붙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발전적인 형태를 취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는 것이다.(梁銀容, 1994; 394)
그러나 단학지남의 대부분이 1591년에 중국에서 출간된 <道書全集>을 필사한 점을 고려한다면 이능화의 용호결이 오히려 오래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정렴의 생전에는 아직 이 도서전서가 공간되지 않아, 그가 이 책을 참고도서로 사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학지남 전체를 용호결이라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문제는 앞으로도 도교학계의 숙제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이 같은 도교학계의 연구 성과를 발판으로 삼아 이능화의 용호비결을 기본 텍스트로 하고 양은용의 단학지남을 참고로 하여 그 현대적 의의를 밝히려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 용호비결은 조선단학파의 저술 중에서도 김시습의 잡저에 보이는 용호, 수진의 뒤를 잇는 복기이론으로 주목되는 명저이다. 그러나 아직 체육학적인 탐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먼저 용호결의 내용과 그 주요 개념을 분석하여 용호결의 실상을 분명히 하고, 나아가 그 현대적 의의를 기술하기로 한다.
2.. 용호결에 관해
龍虎는 용과 호랑이니, 도가에서는 용을 元神, 호랑이를 元精으로 이해한다. 용호비결이라 하였으니, 사람의 원신과 원정을 기르는 비결이란 말이 된다.
이 글은 조선조 전기 중종 때 포천 현감을 지낸 정렴(鄭?, 1501-1549)이 지은 丹學書이다. 단학이란 丹을 배우는 것을 말하는데, 이 丹은 원래 늙지도 죽지도 않는 불로불사의 신선이 마시는 약을 의미하였다. <포박자>에 보이는 연단술은 바로 이 단약을 제조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당나라 말에 단약은 사람의 내부에 있으니 이를 수련하면 얻을 수 있다는 內丹理論이 발생한다. 도인 행기하면 사람의 아랫배에 내단을 형성시킨다는 이론이 바로 이것이다. 도인은 지금의 체조요, 행기는 단전호흡이다.
신돈복(1892-1779)에 의하면 정렴은 <소학>과 <근사록>을 위주한 유가(儒家)이며 그의 용호비결이 참동계의 방법론이 된다고 하고, 이 용호비결로 노력하면 각병(却病)의 요체가 될 뿐 아니라 존성의 진기가 된다고 높이 평가하였다.(金侖壽, 1996; 283)
정렴의 자는 사결(士潔)이요, 호는 북창(北窓)이다. 나면서부터 신이하여 소시에 산사에서 선가의 육통법을 시험해 보려고 삼일 동안 정관하더니 백리 밖의 일을 훤히 알았다. 이로부터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율려 산수, 한어 및 외국어를 모두 배우지 않고 저절로 통하여 천리 밖의 일이라도 생각지 않으면 모르려니와 생각만 하면 바로 알게 되었다.(李鍾殷 譯, 1985; 229) 북창은 중종 32년(1537) 동생 금송당 정적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후로는 과업을 일삼지 않았다. 그러나 북창이 음률은 물론 천문과 의약에 조예가 깊었으므로 조정에서는 장악원 주부 겸 관상감과 혜민서 교수를 제수 하였다. 북창은 의술이 뛰어나고 약리에 정통하여 인종의 병세가 위중하였을 때 궁중에 들어가 진찰했으며, 중종이 위독했을 때 내의원과 제조들이 북창을 명의라고 천거하였다. 조정의 여론도 북창이 用藥에 참여해야 된다고 하였으며, 중종 자신도 의원들이 북창을 천거하지 않더라도 부르려 했다고 할 정도로 북창은 의술이 뛰어나 조야에 명망이 높았다. (孫燦植, 1989; 152)
북창의 家系는 대대로 단학인이 이어지고 있어, 당시 사람들은 북창과 함께 桂香堂 礎(1495-1539)와 古玉(1533-1603)을 一家 三仙이라 불렀다고 한다.(梁銀容,1994; 377) 계향당 초는 북창의 종형으로 젊어서 대과에 급제하고 벼슬을 하다가 병을 핑계하여 벼슬을 버렸다. 두문불출하고 금단의 비법을 연마하니 하늘에서 신선이 그의 방에 내려와 시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고옥은 북창의 다섯째 아우로 이름은 碏이다. 형을 따라 수련의 공부를 습득하여 36년을 홀로 살며 여색을 멀리하고 술을 즐겼다. (李鍾殷 譯, 1985; 231)고옥이 허준의 동의보감 찬술에 함께 참여하였다 함은 이미 밝혀진 바 있다. (李鎭洙, 1989; 110)
3. 閉氣가 修丹의 시작
폐기란 숨을 들이쉬고 잠시 숨을 뱉지 않고 참는 호흡행위의 하나이다. 사람은 숨을 쉬지 않고는 살 수 없다. 호흡은 계속되어야 하지만 이것을 의도적으로 멈추고 들이쉰 숨을 뱉지 않고 참는 것이다. 수단이란 丹을 닦는다는 것이다. 단은 外丹과 內丹으로 구분된다. 외단은 단사, 황웅, 자황 등을 태워 만든 화학적인 약물로 이것을 마시면 신선이 된다고 믿어 일명 仙丹이라고도 하였다. 진한시대에 시작되었는데 일부 통치자들이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수당시대에 성행하였다. 그러나 외단의 주요 약재인 단사가 수은이었으므로, 결국은 수은중독으로 인한 폐해가 드러나 외단은 쇠퇴하고, 대신 내 몸에서 단을 찾는다는 내단파가 성립된다. 몸 안의 精과 氣를 악물로 하고 神으로 이를 다려 내단을 이루는 것이다. 용호결에 보이는 수단은 이 같은 내단을 닦는 것을 말한다.
내단을 이룩하기 위한 제일의 착수가 바로 폐기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에서부터 용호결은 출발하고 있다. 폐기란 용어는 황제내경소문에 벌써 나타나고 있어 그 연원이 상당히 오래다. (卓大宏, 1981; 338-339)
“콩팥에 병이 있어 오래 된 사람은 寅시에 얼굴을 남쪽으로 향하고 마음을 고요히 가져 어지럽게 하지 말고, 숨을 7번 폐기한다. 폐기가 끝나면 혀 아래의 침을 여러 번 마신다(腎有久病者, 可以寅時面南, 靜神不思亂, 閉氣不息七遍後, 餌舌下津無數)”
중국의 양생학계에서는 대체로 위의 학설을 인정하는 편으로 기울고 있는 듯, 유점문도 중국 기공에 관한 계통적 논술로 위의 인용문을 들고 있다.(劉占文, 1989; 371) 폐기가 침을 삼키는 행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흥미로운데, 이것은 아마도 침을 삼키는 행위가 기를 아래로 내려가게 한다는 전통적인 이론에서부터 나온 듯하다. 그러나 이 인용문은 소문의 본문에 실린 글이 아니다. 이 글은 소문에 가탁하여 후대에 나온 유황제내경소문유편의 자법론에 실린 글이다. 물론 이 글의 성립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내단론이 구체화된 이후의 글인 것만은 분명하다. 소문에는 ‘폐색, 폐관, 폐장’이란 용어외에 ‘소변불통(小便閉)’ 은 보이나 아직 폐기란 용어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황제내경유편자법론에는 ‘사람이 어미 뱃속에서는 먼저 천현의 숨과 통한다---태식지문이란 이름이다(人在母腹先通天玄之息---一名胎息之門)’ 고 보인다. (著者未詳, 1987; 28577) 태식은 4세기 초에 성립된 포박자에서 겨우 보이는 용어이다.
포박자에는 행기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보인다.(葛洪, 1989; 37738)
“행기를 처음 배우는 사람은 코로 숨을 쉰 후 숨을 닫는다. 마음속으로 수를 120까지 센다. 다음에 입으로 숨을 내쉬고 다시 (코로) 들이 쉰다. 공기가 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야 한다. ---익숙해지면 세는 숫자를 늘린다.(初學行氣, 鼻中引氣而閉之, 陰以心數至一百二十, 乃以口微吐及引之, 皆不欲令已耳聞其氣出入之聲, ---漸習轉增其心數)”
행기란 도인법 등과 결합하여 행하는 호흡운동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食氣’ ‘服氣’, ‘煉氣’ 등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포박자에 보이는 행기는 숫자를 세면서 숨을 참는다는 것인데 이 기법은 그대로 용호비결에도 이용된다. 북창이 태식을 설명한 글의 끝에 갈선옹이 깊은 연못에 들어가 열흘이나 있다가 나왔다는 기록을 들고 있어 그가 포박자를 읽고 있었음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北窓은 폐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李鍾殷 譯, 1985; 451)
“복기 또는 루기라고도 한다. 황정경에 말하기를 신선과 도사는 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정, 루기로써 참으로 바른 것이라 하였으니 바로 이를 이름이다.(或曰, 伏氣. 亦曰, 累氣. 黃庭經曰, 神仙道士非有仙, 積精累氣以爲眞, 正謂此也)”
복기란 호흡한 기가 단전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엎드릴 伏字를 쓴 것이다. 명나라의 伍守陽이 편찬한 <天仙正理>의 伏氣直論에는 다음과 같이 보인다.
“服氣에 능하면 정이 되돌아 와 선천의 기로 되며, 신의 잘 엉겨 선천의 신이 된다. 때문에 정을 연마하는 이는 복기를 조절하려 하며, 신을 연마하는 이는 숨을 伏氣로 만들려 한다(唯能服氣則精可返而復還爲先天之氣, 神可凝而復還爲先天之神. 所以煉精者欲以調此氣而伏也, 所以煉神者欲以息此氣而伏也)
결국 복기는 태를 이루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 이것은 나중에 나오는 태식의 항목에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복기라는 말이다. 한국어의 복기는 服氣로 쓰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호흡 행동을 말하는 것으로 위의 伏氣와는 다르다. <道鄕集>에는 ‘복기로는 오래 살 수 없다. 장생하려면 복기해야 한다(服氣不長生, 長生須伏氣)’라 보인다. (呂光榮, 1988; 309)
그런데 위에 보이는 황정경의 인용문은 글자에 오류가 있다. 이종은은 이 오류를 그대로 번역하고 있다. 원래 이 글은 黃庭內景經의 仙人章에 보이는데 ‘仙人道士非有神, 積精累氣以成眞,’으로 되어 있다. 신선이나 도사가 신이 아닌 사람이니, 일반인도 精을 쌓고 루기하면 누구라도 신선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루기란 숨을 참는다는 말이니 伏氣의 또 다른 말이다.
양은용이 발굴한 단학지남의 다른 이름은 ‘폐식묘방(閉息妙方)’이다. 용호결에는 없는 말을 넣어 부제를 달았다. 숨을 닫는 신기한 방법이란 말이니 폐식이나 폐기는 같은 말이다. 용호결에는 폐기하는 방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李鍾殷 譯, 1985; 232)
“단을 수련하는 것은---한 마디로 족하다. 대개 단학의 시작은 우선 폐기(閉氣)하는 것이다. 이제 폐기하려는 사람은 먼저 마음을 조용히 하고 책상다리를 하고 단정히 앉는다. 다음 발을 드리운 것 같이 윗 눈까풀을 내려뜨려 내려다보며 눈으로 코끝을 대하고, 코로는 배꼽둘레를 대하고 숨을 들이마시기를 오래 계속하고 내쉬기를 조금씩 하여 늘 신기가 배꼽아래 한 치 세 푼에 있는 단전에 머물게 한다. (修丹之道---則一言足矣. 蓋下手之初 閉氣而已. 今欲閉氣者, 先須靜心, 疊足端坐(佛書所謂金剛坐也), 垂簾下視, 眼對鼻白, 鼻對臍輪. 入息綿綿, 出息微微, 常使神氣, 相注於臍下一寸三分之中)”
이것은 좌선식(坐禪式) 폐기법이다. 좌선식이라 말 할 수 있는 것은 북창이 책상다리를 주석하여 금강좌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금강좌는 결가부좌라고도 하는데 불교에서 좌선할 때의 기본자세이다. 이 자세에 관한 언급은 폐기의 조항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다시 한 번 거론된다.
“수단의 도는 폐기하는 것이 시작하는 방법이니, 가부좌를 하고 단정히 앉아서 마음을 놓고 얼굴을 펴서 눈을 내려보는데 반드시 신기가 배꼽 밑 단전에 모이도록 한다(故修丹之道, 必以閉息爲下手之方, 疊足端手, 舒顔和色, 垂簾下視, 必使神氣, 相注於臍下丹田之中)”
앉는 자세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북창이 특히 가부좌를 택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당시의 유학자들은 주자학을 신봉하였고, 이 주자학이 불교적 공부법인 靜을 중요시하는 ‘主靜’을 강조한 점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찰된다. 주자학에서의 공식적인 정좌는 무릎을 꿇고 앉는 궤좌가 아니면 지금 우리가 보통 앉는 책상다리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호결에 疊足端坐를 불교의 금강좌라고 주석을 단 것은 이것이 사원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되었을 가능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주자학적 정좌법과 구별하기 위해 북창이 일부러 폐기법의 수단으로 좌선식을 기록하였는지도 모른다. 내단학이 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金洛必, 1987; 162)
수단하는 방법에는 크게 나누어 靜功과 動功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공이 보편화 되어 있었으며, 동공은 대개 무술가들에 의해 실천되었다. 정공의 대표적인 방법으로는 意守丹田法, 意守命門法, 意守會陰穴이 사용되었다. 의수단전법은 단전에 의식을 집중시키는 것이요, 의수명문법은 등 쪽에 있는 명문혈에 의식을 집중시키는 것이며, 의수회음혈은 항문과 생식기 사이에 위치하는 회음혈에 의식을 집중하는 방법이다.(胡耀貞, 1981; 166-167) 북창이 강조하는 폐기법은 단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의수단전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폐기에 관한 이론을 소개한 의서로 우리와 관계가 깊다고 생각되는 것에 고려시대에 들어온 <聖濟總錄>이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바로 누워서 하는 행기법(正臥行氣法)을 볼 수 있다. (張志哲, 1994; 804)
“바로 누어 천천히 침을 삼키고 코로는 미미하게 납기하여 천천히 들이쉰다. 가득 채우면 안 된다. 5 번 들이쉰 후에 한 번 토한다. 토기한 후에 다시 들이 쉴 때에는 먼저 조금 토해서 미미하게 왕래하기를 3 번 한다. 손가락을 굽혀 숫자를 헤아리고 90에 이르게 한다. 배에 숨이 가득 찼다고 하여 기를 大出시켜서는 안 된다. 안에서 90息 폐기하고 한 번 마신다. 첫날부터 15일까지는 기가 열 손가락을 통해 나간다고 생각하라. 16일부터 30일까지는 열 발가락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라. 기가 수족을 통해 나가는 것을 느끼면 사지가 저절로 따뜻해지며, 몸이 가볍고 강해진다. 기맥이 유화해지며 榮衛가 調暢해진다.”
폐식하는데 숫자를 세어 그 길이를 조절하였다는 점이 용호결과 같아 주목되는데, 이 방법은 좌선식이 아니었다. 와식에도 엎드리는 법, 옆으로 눕는 법 등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누운 仰臥式이다. 성제총록에 보이는 이 폐기법이 당시의 지식층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는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새로운 의학적 지견 혹은 신선사상에 관심을 가진 당대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법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신돈이 ‘導引養氣’ 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양기에 관한 이론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할 수는 있을 것이다.(李鎭洙, 1994; 150) 그렇다고 이 같은 양기의 전통이 조선조에까지 그대로 전승되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없다. 실제로 신돈이 승려출신이었다는 것밖에 알려진 것이 없는데다가 그가 어떻게 양기의 테크닉을 소유하게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창이 승려인 大珠로부터 도맥을 전수받았다는 해동전도록의 기록은 이 용호결이 山寺를 중심으로 전승되어 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것은 양은용의 단학지남도 익명의 山人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 현대의 과학 만능시대에조차 비결이란 비밀리에 전수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정렴은 단학을 수련하는 시작이 바로 이 폐기하는 것에 있다고까지 단언하고 특히 폐기라는 소항목을 설정하고 거듭하여 설명하는 열의를 보인다.
“風邪가 안개 걷히듯 구름 걷히듯 하여 슬슬 가슴과 배로 쫓겨내려 옴으로서(처음에는 사기가 배로 내려와서 배가 부르고 아파진다) 그 내려보내는 길을 얻은 다음에 스스로 몸이 편해져서 눈앞에 눈이 펄펄 날려도 내가 나의 육신에 깃 들어 있는지, 육신이 나에게 속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아득하고 황홀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지경이 된다. 이런 지경이 되면 그 때는 태극이 갈리기 전의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진선의 경지요 진도의 길이다(則上部風邪, 如雲委霧降, 滾滾瀉下, 先走於胸腹(初則福腹次則腹痛), 得其傳送之道, 然後, 自體和平, 汗氣蒸潤一身百脈, 周流大遍, 則一意沖融, 眼前白雪, 紛紛而下, 不知我之有形, 形之有我, 窈窈冥冥, 怳怳忽忽, 已在於太極未判之前矣. 此所謂眞境界, 眞道路)”
폐기의 효능을 설명한 대목이다. 폐기란 들이 쉰 숨을 단전으로 내려 보낸 후에 입과 코로 공기가 나오지 않도록 닫으라는 말이다. <幻眞先生服內元氣訣>에는 ‘기를 조절하여 삼키고, 삼킨 뒤에는 참을 수 없을 때까지 기를 막아라!(調氣咽之, 咽訖, 使閉氣候極)’ 라고 보인다. <天仙正理>의 伏氣直論에는 폐식이란 태허의 物 없음처럼 안을 비우는 것(托名閉息者, 而內則空空如太虛之無物)이라 한다. 즉 숨이 안에서는 밖으로 새지 않게 하고 바깥의 것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폐기의 기법은 <준생팔잔>의 섭생조기결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遵生八箋은 明나라의 高濂이 1519년에 지은 책이다.
“조기의 술법을 수양하려는 이는 항상 문을 닫은 밀실에서 따뜻한 침상에 안정하고 높이 2촌쯤 되는 베개를 베고 바로 누워 눈을 감고 악고(握固)한다. 이 때에 두 발의 거리는 5촌이다. 먼저 폐기를 익힌다. 코로 기를 흡입하여 점점 배에 가득 차면 이것을 막는 것이다. 오래 되어 참을 수 없게 되면 입으로 가늘게 기를 뱉는다. 한꺼번에 뱉어서는 안 된다. 기가 다 없어진 후에는 다시 앞에서처럼 행한다. 처음에는 10식 혹은 20식을 참지 못하지만 익숙해지면 점차로 많이 참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여 70-80息 이상이 되면 장부와 흉격 사이에 청기가 가득해져 보호를 받게 된다. 아주 익숙해지면 폐기할 때에 다만 1촌 정도의 단식만 남는다.”
코로 기를 흡입하여 점점 배에 가득 차면 이것을 막는다고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神仙食氣金櫃妙錄에는 행기하는 법이 보인다.(京黑先生, 1987; 24599)
“처음에 행기할 때에는 먼저 몸이 안온하고 기가 부드러워야 하며 마음에 꺼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 불화하면 멈추고 화하면 행한다. 항상 이것을 지켜 싫어하지 말아야 한다. 적게 행하면 적은 것을 얻고, 크게 행하면 큰 것을 얻는다. 기가 이르면 형이 편안하고, 형이 편안하면 코의 숨이 조화롭다. 코의 숨이 조화로우면 청기가 이른다. 청기가 이르면 몸에 열기가 느껴지며 얼굴에 땀이 난다. 땀이 나면 일어나지 말고 신을 안정시킨다. 신이 안정되면 도는 저절로 나타난다.(初行氣, 先安穩其身, 而和其氣無與意爭, 若不和且止, 和乃爲之, 常守之勿倦也. 小行卽小得之, 大行卽大得之. 氣至則形安, 形安則鼻息調和, 鼻息調和則淸氣來至, 淸氣來至則覺形熱, 覺形熱則頗汗出, 汗出勿使起則神安, 神安則道自見矣)”
용호결에는 이 같이 자세한 설명은 없다. 행기를 위한 준비 단계를 생략한 것에 용호결의 특징이 있다.
<金司寶錄>에는 다음과 같이 보인다.
“정좌할 때에는 먼저 폐식지도를 행해야 한다. 폐식이란 처음 흡입한 호흡이 아직 사라지기 전에 다음의 호흡이 계속되게 하는 것이다. 지금 처음의 일식이 살아 있다면 다음의 일식은 억제하는 것이다. 息을 억제함으로써 더디게 호흡이 계속된다. 숨을 길게 쉬고 억제하는 것이 안정되면 마음은 부동하게 되어 움직이지 않게 된다.”
張紫陽은 폐식하고 存心할 뿐이라고 하였다. 존심하면 마음이 부동하니 호흡 또한 안정된다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과 상통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閉氣訣에 보이는 내용은 이 같은 폐기법과는 다르다. (著者未詳, 1987; 24571)
“ 수양을 하는데 갑자기 병이 생기면, 재빨리 밀실에 들어가 복기한다. 폐기하되 아픈 곳에 기가 상주하도록 마음으로 아픈 곳을 공격한다. 참을 수 없게 되면 뱉는다. 20-50 번을 이렇게 하면 아픈 곳에 땀이 나며 부드러워진다. 완전히 낫지 않으면 한 밤중이나 5경에 자주 행하고 마음으로 이를 공략하라.”
이 방법은 도홍경의 <양성연명록>에도 기재되어 있다. 양성연명록에는 폐기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글도 보인다.(陶弘景, 1987 24630)
“기를 닫아 숨을 쉬지 않고 마음속으로 200을 센 뒤에 숨을 쉰다. 매일 숫자를 느리면 몸에 신이 구비되고 오장이 편안하다. 250까지 세게 되면 눈썹에 윤이 나고, 눈과 귀가 밝아지며 몸이 건강해져 나뿐 것이 침투하지 못한다(閉氣不息, 於心中數至二百, 乃口吐氣出之, 日增息如此, 身神具, 五臟安. 能閉氣至二百五拾, 華蓋明, 耳目聰明, 擧身無病, 邪不干人也)”
양성연명록은 의학서이기 때문에 폐기의 내용도 질병의 예방이란 관점에서 기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폐기의 공효는 玄牝一竅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북창은 이 현빈에 관해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폐기 공부가 익숙해지면 얻는 것이라 하고, 신선을 수련하는 방법’이라고 주를 달았을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환진선생의 주에서도 밝힌 것처럼 현빈이 水와 母라 하였으나 이에 관한 논의는 분명한 것이 없다. <中和集>에는 다음과 같이 보인다.(李道純,1987; 5247)
“어떤 이는 미간이라 하고, 어떤 이는 배꼽이라 한다. 어떤 이는 방광이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단전이라 한다. 어떤 이는 머리에 있는 아홉 궁 중에 현관이라 하고 어린애가 나오는 여인의 음부를 현빈이라 한다. 혹자는 입과 코를 가리켜 현빈이라 한다.”
양은용이 발굴한 <단학지남>에서는 <오진편>에서 인용한 현빈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보태고 있으나, 이것도 형이상적인 설명으로 일관하여 더욱 알기 어렵다. 현빈이란 대단히 추상적인 개념으로, 인간의 신체의 한 부분이 아닌 ‘規中’ 이라 하고, ‘一意不散, 結聖胎仙’이라 한다. (鄭磏,. 1994; 436) 규중이란 결국 현빈은 실제로 폐기의 수련을 통해 획득되는 그 어떤 것으로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이 같이 이해하는 것이 용호비결을 쓴 북창의 의도와 일치하는 것이 아닐까?
현빈이란 용어는 원래 노자의 도덕경 제6장에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것을 현빈이라 한다. 현빈의 문은 천지의 뿌리라고 하는데 겨우겨우 이어지는 듯하면서도 쓰는 데 힘들이지 않는다’고 한 데서 처음 보인다.(林采佑 譯, 1997; 63) 玄은 깊고도 묘함을 牝은 암컷을 의미하니 만물을 낳는 근본이라 하겠다. 따라서 노자의 도덕경 어디에도 현빈이 사람 몸의 한 구멍(一竅)이라 직접 가리킨 곳이 없다.
일규란 무엇인가? 唐代의 司馬承禎은 氣의 血이라 하여 ‘祖竅’라 하였으며, 王道淵은 그의 <還眞集>에서 현관일규는 ‘심장의 아래로 콩팥의 위’ 즉 중단전이라 하였다. 邱處机는 그의 <大丹直旨>에서 ‘배꼽 아래 일촌 이푼’이라 하였으니 하단전을 현관일규라 하였음을 알겠다. 용호비결에서는 현관일규는 하단전을 가리킨다.
정렴에 의하면 현빈일규로부터 태식이 되고, 태식에서 周天火候가 되고, 주천화후에서 結胎가 되니 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현빈 일규란 또 무엇인가? 태식을 논하는 다음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태식은 위에서 언급한 폐기와 함께 용호경의 주요한 항목을 이룬다. 용호결에는 폐기, 태식, 주천화우의 세 항목이 있다. 태식은 폐기법이 더욱 체계화된 것으로 중국에서는 晋代에 들어와 발전한 것이다. 원래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호흡운동은 토납법이라 하여 중국 전국시대의 莊子에 보이는 용어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폐기에 관한 이론이 아직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낡은 숨은 뱉고 새로운 숨을 마신다는 뜻의 ‘吐故納新’이 고작이었다.
진대로 들어와서 포박자에 ‘태식하는 이는 코나 입으로 숨쉬지 않는다. 마치 태아가 자궁속에 있는 것 같다(得胎息者, 能不以鼻口噓吸, 如在胞胎之中)’라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운급칠참>에는 다음과 같이 보인다. ‘사람은 어머니 배속에 영아로 있을 때 스스로 내기를 마실 수 있고 악고하고 수일하였는데 이것을 태식이라 한다(人能依嬰兒在母腹中自服內氣, 握固守一, 是名胎息)’ 북창도 태식을 ‘태아가 어머니의 배 안에서 숨쉬는 것(在母胎之息)’이라 규정한 점에서는 이상의 견해와 차이가 없다. 다만 폐기의 수련으로 얻는 현빈일규가 태식과 밀접하게 관련된 점을 강조한 것에 북창 이론의 특징이 있다.
위에서도 이미 언급한 그대로 현빈일규는 원래 철학적이고도 추상적인 개념이었으나, 실제로 단을 수련하고 폐기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신체적인 생리현상을 설명하는 상위개념으로 변화된다. 노자에서는 우주의 원리를 해명한 철학 용어로 사용되었지만 이것이 후대로 내려오면서는 내단을 수련하는 신체기법을 의미하는 용어로 탈바꿈한 것이다. 폐기가 익숙해지고 신기가 정해져 단전에 늘 기가 머물게 되는 단계를 현빈일규라 규정한 용호결의 이론도 이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현빈일규를 얻는 단계야말로 단을 닦는 법으로 이것 이외에는 다른 법이 없다는 것이 북창의 사상이고 용호결의 한 특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용호결에서 태식의 항목을 설명한 대목에 보이는 ‘經曰’의 經은 <高上玉皇胎息經>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著者未詳, 1987; 1122항)
(玉皇天尊曰, 胎從伏氣中結, 氣從有胎中息, 氣入身來謂之生, 神去離形謂之死. 知神氣可以長生, 故守虛無以養神氣, 神行卽氣行, 神住卽氣住, 若欲長生, 神氣相住, 心不動, 念無來無去, 不出不入, 自然常在, 勤而行之, 是眞道路)
明代에 성립된 <성명규지>에는 위의 글이 달마조사께서 태아의 숨쉬기를 가르친 말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보인다.(李允熙 譯, 1997; 257)
“태아는 아래로 엎드린 기 속으로부터 맺히고 기는 태아가 있는 속에서 숨쉰다. 기가 몸 속으로 들어가면 살게 되고 신이 몸뚱아리를 떠나면 죽게 된다. 신과 기가 오래 살게 할 수 있는 것임을 알고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 곳을 굳게 지킴으로써 신과 기를 길러라. 신이 움직여 가면 기도 가고 신이 머물면 기도 멈춘다. 만약 오래 살고자 한다면 신과 기가 달라붙고 마음에 생각이 움직이지 않으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 나가지도 않고 들어오지도 않으면 저절로 언제나 변함없이 머물러 있게 된다. 부지런히 이렇게 하는 것이 진리의 길이다.”
원전은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달마선사의 지명도가 높은 것에 가탁하여 이 경문이 여러 갈래로 일반에 전승되어 내려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윤희에 의하면 저자를 알 수 없는 <諸眞聖胎神用訣>에도 위의 것과는 다른 달마선사태식결이 있다고 한다.
북창은 위의 글을 따로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용호결에 옮겨 실었을 뿐이다. 그대로 읽어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글은 쉬운 글이 아니다. 당나라의 幻眞 선생은 위의 글을 다음과 같이 주석 하였다. (幻眞先生註, 1987 2665-2666) 이 환진이 주석한 글은 18세기 조선의 단학자인 신돈복의 道家直旨獨照經(衆妙門)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양은용의 단학지남에 발문을 쓴 신돈복이 이 주석을 다시 그의 중묘문에 실은 것은 조선 단학파의 주요경전으로 이 용호결이 계속 전승되어 읽히고 수련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태란 복기하는 중에 맺힌다(胎從伏氣中結); 배꼽아래 3촌을 氣海라 하는데, 하단전이라고도 하고 玄牝이라고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과 코를 玄牝이라 하는데 이는 잘못 안 것이다. 입과 코는 다만 현빈이 출입하는 문이다. 玄이란 수요, 牝이란 母다. 사람의 음양이 서로 상감하여 수모가 결합하면 3개월만에 태가 이루어지며 10개월 만에 형체가 구비되니 사람이 탄생하는 것이다. 수도하는 이는 언제나 기를 배꼽 아래로 보내야 하며 몸안 에 신을 지켜야 한다. 신기가 서로 합쳐 현태를 탄생시킨다. 태가 이루어지면 스스로 덩어리가 되나니 이것이 내단으로 불사에 이르는 길이다.
기는 태중식이 있음을 따른다(氣從有胎中息); 신은 기의 아들이요, 기는 신의 어머니이다. 신과 기는 형체와 그림자처럼 서로 붙어 다닌다. 태모가 이미 엉키면 신자는 스스로 숨쉰다. 기가 없다면 흩어질 것도 없다.
기가 사람 몸에 들어오면 살고 신이 형체를 떠나면 죽는다(氣入身來謂之生, 神去離形謂之死); <西昇經>에는 몸이란 神의 집이요, 신은 몸의 주인이다, 몸이 안정되면 신도 그 안에 거주하며 몸이 조급하게 움직이면 신이 떠나간다. 신이 떠나가고 기가 흩어지면 생을 얻을 수 없다. 양생의 도를 배우는 사람은 항상 그 신을 붙잡아 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주인이 집안에 있으니 어찌 제 집이 부서지게 내버려두겠는가?
신기가 오래 살게 하는 근본이니 이를 굳게 지켜야 할 것이며, 虛無로써 신기를 길러야 한다(知神氣可以長生, 故守虛無以養神氣); <道經>에는 ‘나의 命은 천지에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 이것을 아는 이는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끊으며 기를 보호하고 정을 길러 애욕에 끌려 경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염담하여 신기를 기르는 것이 장생의 도이다’ 라고 보인다.
신이 가면 기가 가며, 신이 머물면 기도 머문다(神行卽氣行, 神住卽氣住); 마치 말탄 이가 말을 가게 하거나 멈추게 하는 것과 같다. 원기를 사용하되 현빈과 떨어져서는 안된다. 먼저 신을 붙잡아 굳게 지켜야 한다. 신이 떠나지 않으면 身氣도 역시 흩어지지 않아 자연스럽게 내실을 이루게 되어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된다.
오래 살고 싶다면 신기가 상주하여야 한다(若欲長生, 神氣相住); 상주란 신과 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玄剛은 ‘근소한 양의 양기라도 없어지지 않으면 鬼가 되지 않으며 한 호리의 음기라도 없어지지 않으면 仙이 될 수 없다.’ 고 하였다. 元氣는 양기이며 食氣는 음기이다. 언제나 식을 없애고 욕심을 절제하여 원기가 안에서 움직이도록 하여야 원기가 건장해진다. 음기가 저절로 소멸되면 양을 저절로 강장해진다. 음이 약해지면 백병이 생기지 않으며 신은 평안하고 몸은 건강해져 오래 살 수 있게 된다.
마음이 부동하여 오락가락하는 생각이 없다면 자연스레 신이 상주하게 된다(心不動, 念無來無去, 不出不入, 自然常在); 신과 기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는 본래 한 몸이었으나 세상에 나와 외경에 접해 애욕의 당김을 받는 것이다. 숨 한 번 쉬기도 전에 그 근본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 사람이 이러한 방법을 알아 언제나 정념을 끊고 사물에 신의 출입과 거래가 있음을 잊지 않아 이를 오래 학습하면 신을 항상 함께 상주하게 된다.
부지런히 이것을 행하는 것이 진정한 도의 길이다(勤而行之, 是眞道路); 태식의 공은 뒤에 관절에 기가 개통되고 모발이 무성하게 되는 것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코 속에 약간의 기를 흡입하면 이 기가 사지의 모든 털구멍을 따라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신이 상주하여 돌아가지 않게 된다. 이것을 계속하여 다음 기가 다다를 때까지 기를 토하지 않는다. 끊어지지 않게 천천히 계속 흡입하고 토하지 않으며 목구멍 속으로도 기를 흡입시키지 않아 있는 듯 없는 듯 흩어지게 한다. 이렇게 하면 內氣가 흐르지도 않게 되고 흩어지지도 않는다.”
용호결의 태식에 관한 항목은 북창의 독창이기 보다는 북창이 폐기의 이론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태식이란 용어가 등장하고 이를 주석한 것처럼 보인다. 태식을 귀근복명이라고도 하는데 북창은 이 대목을 주석하는 과정에서 袁了凡의 태식론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歸根復命은 노자에 ‘夫物藝藝,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曰復命’이라 보인다. 근은 어린 나이를 말하는 것으로 귀근은 반노환동을 의미한다. 복명은 본성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崔希范의 入葯經에는 ‘歸根竅, 復命關, 貫尾閭, 通泥丸’이라 하였다. 明나라의 陸西星이 註하기를 ‘귀근은 바로 복명이요, 관은 바로 구멍이다. 두 군데가 아니다. 노자는 귀근왈정, 정왈복명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의 구멍으로 임독의 두 맥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라고 하였다. 任脈은 기경팔맥의 하나로 배꼽 아래에서 시작하여 밑으로는 회음부로 나가며, 위로 올라가 음모를 거쳐 배를 지나 바로 上關元을 거쳐 인후부에 도달한다. 다시 턱밑과 입술을 돌아 얼굴을 거슬러 올라가 눈 밑에 도달한다. 기공에서 상용되는 경맥의 하나로 소주천이나 대주천에서 정기가 통하는 통로이다. 督脈은 아래 배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회음부로 나가 등골 안을 따라 위로 올라가 머리 뒤의 풍부에 도달하며, 뇌 안으로 들어가 위로 백회혈에 이른다. 다시 얼굴 가운데를 지나 코밑에 이른다. 임맥과 마찬가지로 정기의 통로이다. 丹書에서는 河車路라고 한 데도 있다. 북창은 연단의 성공여부가 이 임독 두 맥의 통함에 있다고 강조한다.
태식의 효과는 모든 관절에 기가 통하고 모발이 무성하게 되는 것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그대로 導引과 行氣의 효험과 일치한다. 도인은 체조요, 행기란 호흡운동의 총칭이다.
주천화후란, 인체의 정기가 위에서 언급한 임맥에서 독맥으로 도달하여 한 번 회전하는 것을 소주천, 정기가 수태음폐경을 시작으로 발의 궐음간경에서 끝나는 순환을 계속 반복하여 밤낮으로 끝이지 않는 것을 대주천이라 하는데 이 둘을 총칭한 용어이다. 이때의 정기란 단을 수련하는 과정에서의 의념, 정신을 말한다. 숨을 들이쉬어 단전에 밀어 넣고 여기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단전에 넣은 숨이 흩어지면 공기가 되고, 엉기면 불이 된다. 이 불을 意念으로 순환시키는 것이다.
장자의 대종사편에 ‘진인은 발뒤꿈치로 숨쉬고, 일반인은 목구멍으로 쉰다(眞人之息以踵, 衆人之息以喉)’ 라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미 전국시대에 주천화후의 기초이론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한무제 때에 활약한 동중서(BC176-104)는 ‘하늘의 기는 언제나 밑으로 내려와 땅에 퍼지니 도를 배우는 사람은 발로 이 기를 당긴다(天氣常下施于地, 是故道者亦引氣于足)’ 이라 하였다. (董仲舒, 1987;89) 여기에 보이는 道者를 도인을 행하는 사람으로 해석해도 위에 나오는 踵息의 논리를 거슬리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보충 설명한 것이라 보아 무방할 듯 싶다.
동중서보다는 후대에 속하는 荀悅(148-209)은 그의 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순열, 1987; 22)
“배꼽 옆 2촌 되는 곳을 관이라 한다. 관은 숨을 멈추게 하여 갈무리하고, 신체의 여러 곳으로 보내는 곳이다. 숨을 길게 쉬는 사람은 관으로 호흡하는 사람이다. 이 숨은 점차로 상승하며 그 神은 점점 전일하게 된다. 관으로 숨쉬므로 숨이 부드럽고 길다. 숨이 짧으면 그 맥이 점점 빨라지고 신이 몸으로부터 떠나간다. 어깨로 숨쉬는 것처럼 되어 숨이 어지러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도인하는 사람은 항상 관으로 숨을 쉰다. 이것이 중요한 술법이다.(隣臍二寸謂之關, 關者所以關藏呼吸之氣, 而稟受四體也. 故氣長者以關息, 氣短者氣息稍昇, 氣脈稍促. 其神稍越, 至於以肩息. 而氣舒, 其神稍專, 至於以關息, 而氣衍矣. 故道者常致氣於關, 是謂要術)”
위에 보이는 관은 關元이니, 氣海라고도 하는 경혈을 말한다. 길게 호흡하는 것과 관원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단전에 기를 갈무리하는 기법을 설명한 것이라 하겠다. 이 長息의 이론은 남북조시대에 이르면 의식으로 기를 움직이는 방법으로까지 발전된다. 《양성연명록》에 ‘행기로 백병을 없애려면, 아픈 곳을 염두에 둔다. 머리가 아프면 머리를 생각하고, 발이 아프면 발을 생각하며 화기로 이를 계속 공격한다. 시간이 지나 때가 되면 머리나 발 아픈 것이 저절로 없어진다.(凡行氣欲除百病, 隨所在作念之, 頭痛念頭, 足痛念足, 和氣往攻之, 從時至時, 便自消矣)’ 라 보인다.
唐代에 이르면 이것이 존상의 이론과 결합되어 더욱 발전한다. 司馬承禎의 《天隱子》에는 정기가 운행하는 경로가 ‘머리-발-단전-척맥-니환으로 나타난다. ’스스로 존상하기를 기가 머리에서 발에 이르고, 다시 발에서 시작하여 단전에 이르며, 위로 척려 위를 지나 니환에 들어간다. 다시 그 기를 생각하여 바로 니환으로부터---기가 척려위를 따라 니환에 들어간다. 이것이 수양의 대요이다.(存想自身, 從首至足, 又自足至丹田, 上脊膂, 入于泥丸, 想其氣如云, 直貫泥丸---氣從脊膂上徙泥丸, 此修養之大綱也)‘
송대에 들어오면 도가에서도 내단학적 이론이 더욱 발전되고 체계화되는데, 이것은 실제적인 수련에 현묘한 상징이나 비유들을 들어 부가적인 논설로 채색된 이론이 대부분이었다. 북창이 ‘수단의 도는 지극히 쉬우나 그 이론서가 너무 많고, 황홀난측하여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龍虎, 鉛汞, 爐頂, 九轉還丹 등의 형이상적인 용어가 등장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러나 수련은 몸으로 행하는 실제적인 것이었으므로 결국 추상적인 이론은 지식층의 전유물이 되고, 의학이나 실제 수련의 방면에서는 인체 생리학에 부합되는 운기론이 등장한다. 내단학파가 주장하는 ‘三關’의 이론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운기하여 ‘撞三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삼관은 尾閭, 夾脊, 玉枕의 세 경혈을 말한다. 삼관을 뚫는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정기를 미려로부터 협척으로 운반해, 뇌로 넣는다. ---처음에는 머리 뒤로 들어가게 하는데 대추혈의 셋째 마디를 굳게 닫고 기가 지나가지 못하게 한다. 먼저 협척을 굳게 닫아 기가 지나가지 못하게 한다.---나중에 드디어 하나가 일어나 바로 뇌로 들어가 가득 채운다. 뇌가 가득 차면 단이 저절로 현응으로 내려 가는데 그 맛이 달고 향기가 난다. 이렇게 되면 내단이 이루어진 것이다.(運精氣自尾閭夾脊入腦, ---其當初偃頭向後, 緊閉大椎穴第三節, 不令其過, 先緊閉夾脊不令氣過---, 後漸漸一起直入腦滿, 腦滿之後, 丹自玄膺而下, 其味甘, 其氣香, 至此則內丹成矣)”
明代가 되면 정기의 운반로는 한층 복잡해진다. 하단전-척맥-니환-모발-얼굴-머리꼭대기-양 어깨-엄지 손가락-흉부-중단전-하단전-대퇴-무릎-종아리- 발꿈치-용천혈로 정기를 운반할 수 있다는 이론은 뒤에 대주천 이론의 기초가 된다. 이것이 ‘주천공’이라 하여 소주천과 대주천으로 분리된 이론이 등장하는 것은 淸代로부터이다. 汪昴가 지은 《勿葯元詮》에서 소주천의 경로는 기해-미려-협척-쌍관-옥침-곤륜-작교-중루-이궁-기해이다.
동의보감의 ‘등에 삼관이 있다(背有三關)’ 라는 대목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선경에 가로되 등위에 삼관이 있으니 머리 뒤가 옥침이요, 협척은 녹로라하며, 수화가 열리는 곳은 미려라 한다. 모두 정기가 오르내리며 왕래하는 길이다(仙經曰, 背後有三關, 腦後曰玉枕, 夾脊曰轆轤, 開水火之際曰尾閭, 皆精氣昇降往來之道路也) 선경이란 아마도 신선술에 관한 일반경전을 총칭하는 것 같다. 배유삼관이 등장하는 경전으로는 원대의 소원단이 저술하고, 이것을 다시 청대에 들어와 동덕수가 편집한 《金丹大成集》을 들 수 있다.
동의보감에는 역진론에서 인용한 환단내련이란 대목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許浚, 1976;76)
“불을 운반할 적에 갑짜기 미려에 물체가 솟아 협척과 쌍관을 들이치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리며, 소리가 거꾸로 올라가 니환으로 들어간다. 니환에 들어간 것이 입천정에 닿으며 과립이 입안으로 내려온다. 그 맛이 마치 아이스크림 같은데 향기롭고 부드러우며 달다. 이 같은 증상이 바로 금액환단이다. 천천히 삼켜 다시 단전으로 내려 보낸다. 언제나 이 같이 하여 멈추지 않으면 오장이 맑게 비어 눈을 감고 내시하면 촛불을 밝히고 보듯 내장이 환하게 보인다.( 凡運火之際, 忽覺尾閭有物, 直衝夾脊雙關, 瀝瀝有聲, 逆上泥丸, 復自泥丸, 觸上顎顆 顆降入口中, 味如氷酥, 香甘軟美. 覺有此狀, 及是金液還丹也. 徐徐嚥歸丹田, 常常如此不絶, 則五臟淸虛, 閉目內觀, 臟腑瀝瀝如照燭)
동의보감에는 翠虛編도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남송의 陳楠(?-1213)의 저술이다. 따라서 허준은 송, 원, 명대의 서적을 두루 참고하였다는 것이 되며, 이것은 거의 같은 시대를 산 북창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용호결은 그가 서두에서 밝힌 대로 ‘말이나 소가 땀을 흘리면서 끌어야 할 만큼’ 많은 단서들을 소화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용호결과 거의 같은 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되는 《단가별지구결》에는 다음과 같이 운기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李鍾殷 譯註, 1992; 189)
“먼저 기를 운행하여야만 선천을 만회할 수 있다. 때문에 눈은 보지 말고, 귀는 듣지 말고, 입은 말하지 말고, 코는 냄새 맡지 말아야 한다, 우두커니 혼자 앉아서 눈으로 코를 보고 코로 가슴을 보고, 마음으로써 기를 억제하며 오래하면, 그 기가 융화되어 곡해(배꼽) . 단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음으로 즉시 기를 미려로 돌려서 척주를 따라 쌍관을 올라가 곧게 뇌에 도달하면 기가 항중으로 들어갈 것이다. 수련을 오래하여 숙습이 되면 점차로 천장으로부터 심궁으로 내려갈 것이다. 이 같이 운기를 오래하면 잇몸 위에서 단 침 한 덩어리가 흘러 내려올 것이다. 이것이 곧 선천진일의 조기로서 본근으로 돌아오는 징후이니 급히 혀로 수습하여 천천히 삼켜 배꼽 아래로 내려보낸다.(先要運氣, 乃可挽回先天故, 欲運其氣則, 目不視, 耳不聞, 口不談, 鼻不臭. 兀然孤坐, 以眼視鼻, 以鼻視心, 以意抑氣, 久則自知其氣融入谷海臍也, 卽以意斡氣轉于尾閭, 後夾脊雙關, 而上直抵腦後納氣于項中, 煉之久熟漸自天庭, 降之心宮, 如是運之久久則, 自顎上有甘津一塊流下, 此乃先天眞一祖氣還返之候, 急以舌收之, 徐徐嚥下, 送于臍下下間也)”
위의 인용문은 광해군 때의 조탁(1552-1621)이 지은 이양편 그리고 18세기로 내려와 강헌규(1797-1860)의 주역참동계연설에도 보여, 조선 단학의 주요 이론이었음이 판명되었다.(金侖壽, 1990; 274)
선천진일조기는 사람이 태어날 때에 가지고 나오는 원양진기를 말한다. 보통은 선천일기라고 한다. 이 진기는 사람이 태어나면 임맥이 저절로 막혀 유통되지 못한다. 운기하여 임독맥이 통하여야 선천진기가 유통되고 내단을 이룰 수 있다. 용호결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사람이 태 속에 있을 때에는 코와 입으로 숨쉬지 않고 다만 배꼽줄로 어미의 임맥에 통하고 임맥은 다시 코로 통하여 어미가 숨쉬면 또한 숨쉬어서 배꼽줄이 떨어지기에 이른 뒤에야 호흡이 비로소 입과 코에 통한다. 그러나 그 보호하여 기름이 마땅함을 잃으면 진기가 풀려서 병이 생기고 요절하는 일이 있게 된다.”
북창은 폐기법을 중심으로 하여 용호결을 구성하고, 주천화후도 이 이론을 기본으로 하여 설명한다. 주천화후를 북창은 ‘뜨거운 기가 온 몸에 퍼지는 데 불과한 것(不過曰, 熱氣遍身也)’ 이라 간단하게 정의한다. 주천화후는 運氣라고도 하여,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그 체계는 북창이 내린 정의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북창은 용호결의 구성을 폐기법을 중심으로 짰으므로 기를 운용하는 복잡함을 피하고 대신 ‘熱氣’가 몸에 퍼지는 현상으로 이해시키려 한다.
4. 주자학적 단학론
주자학을 성리학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程朱學이라고도 한다. 程은 정호와 정이의 형제를 朱는 주자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주자학을 받들었으니 사회 전반에 이들의 사상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程子는 사람들이 오래 살기 위해 수련하는 것을 도적이라 비난하면서도 保形煉氣에 관해서는 그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朱子의 조식잠은 조선의 선비들에게 회자된 바 있다. 퇴계 같은 학자도 마음의 병을 앓고 있던 제자 정자중에게 주자의 조식잠을 추천하며, 마음을 기를 것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李鎭洙,1992; 136)
정렴과 거의 같은 시대의 율곡(1536-1584)은 그의 의약책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李珥;1979;426-427)
“장수나 단명의 數는 비록 하늘에 달렸으나 보호하고 양육하는 수단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병들기 전에 기를 기르고 병이 든 후에는 병을 치료하여 정명을 순하게 받아서 섭생을 잃지 않는 것만이 병을 고치는 방법일 뿐이다.---비록 기를 박하게 타고났을지라도 잘 양생만 하면 장수도 기약할 수 있을 것이요, 기를 비록 후하게 타고났을지라도 만약 해친다면 요사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죽지 않고 오래 사는 방도라든지 매미처럼 허물을 벗고 뼈를 바꾸는 방술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대낮에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사람도 결코 없을 것이요, 영단으로 원기를 되돌린다지만 그런 약도 반드시 없을 것이다. 황금을 단련해서 약을 만들 수 있겠는가, 이슬을 먹을 수 있겠는가, 천지간에는 實理 뿐이다.‘
율곡은 실리를 주장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신선술의 존재를 부정하였지만 기를 기를 수는 있다는 養氣論을 편다(李珥, 1979; 119-120)
“인의의 마음을 잘 기르면 가린 것이 열릴 수 있어서 그 천부의 본심을 온전히 할 수 있게 되고, 진원의 기를 잘 기르면 허가 실이 될 수 있어서 그 하늘로부터 받은 명을 보존할 수 있다. 그 기르는 방법도 또한 밖에서 他物에 가탁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흔들리거나 손상되지 않게 할 따름이다.---사람의 기는 천지와 서로 상통하므로 양심과 진기도 천지의 기와 함께 생장한다. 다만 그것이 상하고 해되는 것은 여러 갈래이어서 생장이 소멸하는 것을 능히 이겨내지 못하여, 계속 질곡되어 없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양심을 해치는 것은 귀, 눈, 입, 코와 사지의 욕망이고, 진기를 해치는 것도 또한 이 욕망 아닌 것이 없다. 대개 귀와 눈이 성색을 좋아하는 것은 진실로 마음에 해로운 것이지만, 음난한 소리와 아름다운 색은 뼈와 살을 결단내는 도끼와 톱이요, 입과 몸으로 즐기고 좋아하는 것은 진실로 마음에 해로운 것이지만, 입을 상쾌하게 하는 맛은 반드시 오장을 상하게 하고, 한가하고 안일한 것은 근육과 맥을 해이하게 하여, 드디어 행동과 휴식을 올바른 도리에서 어긋나게 한다. 喜怒는 그 중용의 도리를 잃어버려, 마음은 날로 방자해지고, 기는 날로 방탕하게 되어 마침내는 一氣의 관통이 끊어지고, 백해의 유대가 틀어지게 되는 것이니 장차 어떻게 입명하며 세상에 길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
양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의의 마음 곧 양심을 기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진기를 기르는 것이다. 위의 주장은 주로 진기를 기르는 법을 논한 것이다. 율곡이 주장하는 養氣의 방법은 밖에서 他物에 가탁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흔들리거나 손상되지 않게 할 따름이라는 것이다(其養之術, 亦非外仮他物, 只是無所撓損而已) 건강향상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건강을 해치는 요소가 가까이 오지 않게만 하면 된다는 말도 된다.(陳潤洙, 1904; 156) 이 같은 주장은 정자의 ‘생을 잊고 욕심을 쫓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忘生徇欲爲深恥)’는 것과 상통한다.
여기에서의 생은 천리를 말한다. 이것은 몸이 건강하다거나 평안한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실제의 이치 즉 실리이다. 정자도 신선술을 알고 있어 장수하는 방법을 묻는 제자들에게 그 이치를 설명하여 밝은 대낮에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것과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산림 사이에 살아 몸을 보호하고 기를 닦아 수명을 늘릴 수는 있겠다. 비유하자면 화로의 불을 바람부는 곳에 놓으면 불이 쉽게 타버리고 밀실에 두면 쉽게 타지 않는 이치와 같다(白日飛昇之類則無, 若言居山林之間, 保形煉氣, 以延年益壽則有之, 譬如爐火置于風中則易過, 置之密室則難過, 有此理也) 고 하였는데, (潘富恩, 1988; 313) 이 같은 정자의 이념은 율곡의 實理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것은 주자학자 일반의 사유체계이기도 하다.
조선 단학파가 자주 거론하는 인물로 우리는 택당 이식을 들 수 있다. 그가 해동전도록을 얻어 이를 퍼트렸다는 설이 자주 대두되곤 하지만 그의 문집에는 신선술을 부정하는 듯한 기록이 실려 있다.(이한우, 1995; 57)
“양생과 연년에 관한 술법은 많지만 묻겠다. 이른바 마음을 닦고 정을 단련하며 약을 마시고 금기의 방술을 얻은 사람이 있는가? 황제의 방법이요 팽조의 기술이 있어 후세에 전해오지만 학습한 이가 없다. 혹은 목피를 먹어 장수한다 하고, 혹은 거북이처럼 숨쉬어 장수한다고 하며, 혹은 복숭아 열매를 먹거나 구기자를 먹어 장수한다고 한다. 이것이 무슨 술법인가? ---정자는 수양하면 오래 살 수 있다고 하였는가. 정자가 수양하면 오래 산다 한 것은 나라의 제사에서 복을 비는 것을 비유해 말한 것이다. 주자는 조식잠을 지어 수일하면 1200살까지 살 수 있다고 하였으니 성현이 오래 산 이유가 이와 같다. 그러나 두 선생도 역시 오래 살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대개 신선은 죽지 않는다는 말은 황탄한 소리이다.(問養生延年, 其術多矣. 所謂頤心神 ,練精服食, 禁忌之方, 何者爲得與? 黃帝之法, 彭祖之術, 後世多傳而未有以學習, 或湌木皮而壽, 或效龜息而壽, 或湌桃實而壽, 或餌枸杞而壽者, 何術與? ---程子以修養之可以延年亦有數與? 程子以修養之可以延年, 比之於國祥之祈夭永命, 朱子作調息箴, 及有守一處千二百歲之於. 聖賢之所以自必長年者如此, 然二先生亦不能享有上壽何與? 大抵神仙不死之說固已誕妄而不可學)”
이것은 조선왕조의 관리를 뽑는 과거시험에서 출제된 시험문제이다. 이 같은 문제가 출제된 배경에 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당시 신선술에 관한 지식층 계급의 사회적 인식이 매우 높았음을 단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사회의 지도이념은 실사구시의 주자학이었던 만큼 황당하게만 보이는 신선술의 팽배는 주자학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사상으로 판단되었을 것이다. 과거의 응시자들은 사회의 선도계급이었으므로 이들에게 신선술에 관한 시험문제를 제시하고 그들의 견해를 보려는 의도가 작용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가 합격의 영광을 누렸을 것임은 시험문제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아 극히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정렴이 소학이나 근사록을 중심으로 하여 가훈을 삼았다고 하는 사실은 신돈복이 용호결의 발문에서 이미 개진한 것이다. 정렴도 당시의 사회 이념이었던 주자학의 주요 경전을 가학의 기본으로 삼았고, 주자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생활태도를 견지하였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가 개진한 용호결은 신선이 되기 위한 술법에 관한 황단한 이론을 다룬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이 주자학적 實理를 벗어나지 않는다. 조선의 주자학자들과 같은 시대를 산 정렴이 그들과 특별히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의 몸이 일반 주자학자들 보다 매우 허약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신체적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율곡이나 택당 등으로 대표되는 주자학적 사상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건강을 위한 직접적인 노력이 필요하였을 것이고, 이 같은 필연성에서 용호결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용호결은 수많은 다른 신선술을 다룬 경전들과는 분명히 다른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이 글이 丹을 직접 수련하여 그 효능을 체험한 사람이 쓴 글이라는 점이다. 저자인 정렴은 丹을 수련하는 것은 결코 황탄한 일이 아님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실제적인 문장으로 기술하였던 것이다. 자신의 허약한 몸을 단련하는 과정에서 그는 당시의 사회상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신선술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율곡이나 택당으로 대표되는 일반 주자학적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어떤 이는 이단의 조그만 술법이라 하여 즐겨 행하지 않으니 애석하다. 변화 비승의 술을 내가 감히 말할 바 아니나 양신에 이르기까지도 천 가지 방법과 백약이 더불어 화하지 않음이 없어서 행한 지 한 달이면 백병이 모두 가시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으랴. 대저 풍사의 병이 혈맥 속에 숨어서 알지 못하게 돌아다니건만 그것이 몸을 죽게 하는 도끼날이 됨을 알지 못함이 오래 되다가 경락으로 전하여 고황으로 들어간 연후에야 의원을 찾아 약을 먹으니 때가 이미 늦었다(或者以爲傍門小術, 莫肯行之惜哉. 變化飛昇之術非愚所敢言, 至於養神千方百藥, 莫之與化, 行之彌月, 百疾普消, 可不爲之盡心乎. 夫風邪之患伏臟血脈之中, 而冥行暗走, 不知爲殺身之斧斤久矣. 傳經深入膏肓, 然後尋醫, 服藥亦已晩矣)”
정렴은 도가의 궁극 목표라고 할 수 있는 ‘하늘을 날아 오르는 변화 비승’에 관해서는 일보 후퇴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렇다고 그가 변화 비승의 술법을 모르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것은 그가 수많은 仙書들을 섭렵한 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가 변화 비승에 관해 주장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주자학적 실리에 맞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자학의 입장에서 보면 신선은 이단일시 분명하지만 그 술법을 행하면 짧은 시일 안에 건강해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고, 이 같은 주장은 주자학적 단학론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렴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질병에 걸리기 전에 미리 예방하자는 것이다. 그는 ‘의사는 병이 난 후에 고치지만 도가는 병나기 전에 고친다(醫家治病於已病之後, 道家治疾於未病之前)’고 강조하여, 병나기 전에 조심할 것을 강조한다. 이 같은 견해는 동의보감에서도 발견된다, (許浚, 1976; 75)
“지인은 병나기 전에 먼저 고치며, 의사는 병난 뒤에야 고친다. 병나기 전에 먼저 고치는 것은 마음을 고치는 것이요, 수양이라고도 한다(至人治於未病之先, 醫家治於已病之後, 治於未病之先者曰治心, 曰修養)“
지인은 덕이 높고 사계절의 음양의 조화를 알며, 속세를 떠나 積精하여 全神하고 천지 사이에 노니는 사람이다.(許浚, 1976; 74) 지인은 도가에서도 지극히 높은 수준의 수련을 쌓은 인물로 도가의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일반인도 수련을 하면 누구나 지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도교가 갖는 서민적 특징이기도 하다. 정렴의 견해나 허준의 그것은 단을 수련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의 새로운 지평을 긍정적으로 보여 준다. 더구나 치심이니 수양이니 하는 용어는 주자학에서도 중요한 핵심 사상이기 때문에 일반 주자학자들이라 해도 위의 인용문을 일방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렴은 단을 수련한 체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신체가 화평하고 땀기운이 축축하고 부드러우며 온 혈맥이 주류하여 크게 통한다. 마음이 융화하여 마치 눈앞에 백설이 분분히 내리는 듯, 나의 형체가 있음과 형체의 내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몽롱 황홀하여 태극이 아직 판별되기 전의 세상에 놓여 있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참 경계요. 참의 길이다(身體和平, 汗氣蒸潤一身百脈, 周流大遍, 則一意沖融, 眼前白雪紛紛而下, 不知我之有形, 形之有我, 窈窈冥冥, 怳怳忽忽, 已在於太極未判之前矣. 此所謂眞境界. 眞道路)”
5. 신선사상의 현대적 의의
1)제사를 통한 신체 경건성의 회복
퇴계는 54세 되던 해에 守谷 李澯(1498 - 1554)이 쓴 8폭의 양생설을 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車柱環, 1978 ; 75).
“天仙은 원치 않고 地仙은 되고 싶다. 옛사람이 이 말을 나에게 일러주었지만 쇠약해지는 병에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하면서 오래도록 돌아가지 못하였다. 수곡 李公이 江皐에서 정양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으로 그 일을 사모하고 있었다. 하루는 전 감찰 許모군이 수곡이 쓴 양생설 8 폭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 글을 읽고 그 글씨를 완성한 나머지 수양하는 일에 감흥을 갖게 되니 더욱 朱子가 佰陽의 책(참동계)을 사랑한 뜻을 알게 되었다. 아아! 수곡이 지선이 될 수 있는데 난들 될 수 없겠는가. 書尾에 몇 글자를 적어서 돌려보낸다. 내일 산으로 돌아가련다.”
천선은 하늘에 있는 신선이요, 지선은 하늘을 나는 신통력은 없으나 명산에서 노니는 신선이다. 쇠약해지는 병,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함, 내일 당장 산으로 들어가겠다는 퇴계의 간절한 염원이 엿보인다. 산은 퇴계에게 養生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에게 양생은 血氣를 기르는 직접적인 목적에 보태어 敬哲學의 기반을 이루기 때문이다.
居敬을 평생의 신조로 살았던 퇴계에게 敬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 지를 한 제자가 물었다. 퇴계가 대답하였다.
‘경은 제사 지낼 때의 몸가짐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천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살아온 전통을 갖고 있으며, 이 전통에 의해 한민족 개개인의 인격적 정체성이 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접하는 현실의 미디어는 한국에 존재하는 200개의 미인대회, 유방과 성기의 확대 수술, 탤런트 이영자의 지방흡입술, 중학교 미술교사의 알몸 사이트 등을 전달하고 있다. 미셀 푸코는 외친다.
“벗어라! 그러나 날씬하고 잘 생기고 햇볕에 잘 그을린 피부여야만 한다.”
‘얼짱’ ‘몸짱’이 난무하는 시대다. 신장은 175cm, 몸무게 45 Kg, 34-24-34인치의 몸매가 한국 여자에게 가당한 일이기 나 한가. 가능보다는 불가능이 훨씬 많으니 갈등의 폭은 더욱 깊어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은 지 오래다. 제사의 전통은 현대에도 존속되고 있지만 단순한 풍속으로 흘러 그 깊은 뜻이 점점 잊혀져 가는 것도 현실 상황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아우르게 한 풍류도, 단군의 홍익인간, 퇴계의 경철학은 모두 제례에서의 신체의 경건성에 그 바탕을 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약을 복용하여 신선이 되려는 외단사상은 나 자신이 아닌 외부의 힘을 빌리는 것이니 1000년 전에 이미 그 폐단이 분명해져, 나를 알고, 나 스스로의 안에 갖추어진 내단을 단련해야 한다는 내단사상으로 바뀌어졌다. 약이나 성형으로 얼짱, 몸짱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행위는 스스로의 경건성을 손상시키는 일에 다름 아니다. 과거의 신선사상을 오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과거를 되돌아보고 나의 앞을 보려는 것일 뿐, 復古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2) 폐기를 통한 몰입
폐기하는 방법은 불교의 참선하는 자세와 별로 차이가 없다. 선은 그 자체의 사상체계를 갖지 않으며 어떤 특별한 사고형태의 관계를 거부하는 한편 참신한 신심단련의 방법을 채택한다. 선은 정신을 단전에 집중시켜야 하며 모든 정신적 육체적 활동을 이 부분에서부터 시작해야 함을 배운다. (李鎭洙 譯, 1995; 38) 금강좌로 자세를 취하고 공안을 생각하는 것이 참선이라면, 용호결의 그것은 호흡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용호결에 보이는 글 가운데에 ‘항상 신기로 하여금 배꼽 밑 일촌 삼푼 되는 곳에 머물게 하라(常使神氣, 相住於臍下一寸三分之中)’고 한 말이 있다. 신기의 신자가 귀신 신이니, 귀신이 기라 번역할 만도 하지만 이때의 신은 사람의 정신이나 意識을 의미한다. 호흡에 의식을 집중하면 이것이 신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스포츠로 땀을 흘리며 거친 호흡을 무의식적으로 내뿜는다. 무의식적으로 내뿜는 숨은 신기가 못된다. 서양의 스포츠에도 호흡이니 심폐의 지구력이니 하는 용어들은 있지만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라는 神氣에 관 한 이론은 없다. 최근에 들어와 스포츠심리학 분야에서 경기력 향상을 위해 참선 혹은 이미지 훈련법을 연구하고 있으나 이것도 사실은 우리가 말하는 신기의 기법을 펼쳐서 말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폐기의 기법은 앞에서 거듭 강조한 그대로 숨을 단전으로 내려보내고 숨을 닫아 참는 것이다. 숨을 참는 것은 고통이지만 이것은 우리의 신체인식을 돕는 직접적인 행위가 된다. 이행위가 익숙해지면 ‘신체가 화평해지고, 백병이 없어지는’ 효능을 보게 된다. 신체가 화평하다는 신체인식은 말하듯이 쉽게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수련기간이 필요하다. 이 같은 호흡법은 한국의 경우 단전호흡이라 하여 도장에서 가르치고 있다.
한국의 전통 단전호흡법이라고 하는 국선도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金在恩, 1996; 301)
“국선도의 초기 수련단계; 기분이 상쾌해지고 몸이 경쾌해지며 유연해진다. 시장기를 느끼고 소화가 잘되고, 트림이 자주 나며, 방귀가 잦다, 손발에 땀이 나며, 대변이 순해진다. 맥박은 정상화되며 병이 호전된다. 단전부근에 열기를 느끼고, 몸에 가벼운 진동을 느낀다” 물론 이것은 초보적인 단계의 체험에 불과하다. 궁극의 체험은 위에서 정렴이 지적한 대로 ‘몽롱 황홀한 태극 이전의 상황’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태극 이전의 상황은 스포츠에 몰입되어 일어나는 의식의 변용상태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폐기에 의식을 집중시키는 것은 스포츠라는 외부활동에 우리가 우리의 의식을 집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들의 신체에 관한 인식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스포츠활동에서 인식성의 고양이 확실히 보장되지 않는 반면에 호흡을 단전에 넣는 폐기법은 이 인식성에 그 초점이 있기 때문에 훨씬 더 그 고양이 보장되는 장점을 갖는다.
서양인들에게 이것은 설명되지 않는 신비적인 체험으로 비칠 것에 틀림없다. 스톤은 신비적인 체험이 외적인 목표물(집중할 대상)의 이용을 포함하는 어떤 활동도 신비한 통합의 달성에 공헌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깨달음을 스포츠에서 성취하려는 것은 곤난하다고도 한다. (李鎭洙 譯, 1995; 132) 스톤의 주장은 동양적 신체와 그 主靜의 원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집중해야할 대상물은 바로 우리의 호흡이고, 우리의 단전이다. 이것들은 二原으로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다. 호흡과 신체는 하나의 근원을 가지며, 호흡에 의식을 집중함으로 하여 전체적인 통합을 이룩한다.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 이 용호결이 구선의 활인심에 보이는 도인법에 응용되는데 이것은 용호결이 직접 신체운동과 결합하게 되는 최초로 이것은 중국에도 보이지 않는 한국만의 독특한 방법이다. 이것이 용호팔단금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이미 필자가 학계에 보고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는데, 이 문제는 스포츠의학 혹은 운동생리학 분야에서도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램이다.
폐기의 생리작용에 관한 연구는 그렇게 활발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상당히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다.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는 방법은 폐기하는 시간을 길게 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라 할 수 있다. 폐기는 폐기하는 사람의 복압을 주기적으로 상승시켜, 복강의 혈액순환을 촉진시키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위장의 蠕動을 촉진시킨다. 폐기의 시간이 길면 귀가 울리는 耳鳴, 어지럼 증세인 暈眩感, 땀이 나는 현상이 발생한다.(卓大宏,1981; 340) 용호결에서는 이 같은 증상을 좋은 현상이라 이해하고 있으나 이것은 현대의 생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오류라 할 것이다. 실제로 폐기의 시간이 길어지면 혈압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증상이 나타난다.
이 같은 이유를 들어 니담은 (Needham, J.) 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호흡 훈련의 큰 목적은 자궁 속의 태아의 호흡으로 되돌아가려고 시도하는데 있다. 모체와 태아를 연결하는 혈액순환 속에서의 기체(산소와 탄산가스)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자궁 속 태아로의 복귀는 도가의 단순한 공상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흡기와 호기를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하게 유지하려 하고 특히 숨을 될 수 있는 대로 오랫동안 막은 채로 참아보려 하였다. 그들이 체험하고 또 자기들에게 좋다고 믿었던 주관적 효과가 거의 무산소혈증(anoxaemia)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경험한 것이 귀울림, 어지러움, 발한과 같은 窒息仮死的(질식가사적)인 징후였기 때문이다.’ (李錫浩 外譯, 1987; 206-207)
정신통일에 의한 망아의 경지를 산소 부족으로 인한 질식 증세로 밖에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니담은 기의 운용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것이 된다. 오늘날 스포츠에서의 절정체험(peak experience)은 신체와 정신의 통일로 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이것은 운동을 통한 의식변용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李鎭洙, 1996;130)
용호결은 우리가 신선술이라 부르고 신비롭게 생각했던 동양적 비법을 폐기라는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기법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그 위치는 한국의 수련도교의 중심 경전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것의 현대적 의의는 위에서 언급한 그대로 폐기를 통한 단전에의 의식 집중이 신체의 인식성을 확충시킨다는 것이다. 정렴에 의하면 그 경지는 ‘태극 이전의 황홀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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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天仙不願作地仙
2) 公性淸雅, 好文章, 多情? 爲人笑啼, 溫良若婦女. 見人疾苦, 哀憐若己痛, 至於禽獸亦然. 未嘗害一虫一草, 不辨善惡利害, 不好飮酒好色. 常跨小靑驪, 吹笛過市, 人指之謂眞仙公子. 面如冠玉, 手若白荑. 善畵人物山水, 妙入神境.
3) It connotes, first, the idea of a takeoff, a seperation from normal life, be it in an ecstatic dance or by going into the mountains; and, second, the notion of longevity and the complete avoidance of death.
4) 色常如嬰兒. 常餐豆粥, 不喜食肉, 朝起視園中多種古木, 養魚飼鶴, 逍遙其間.--- 雖然深察宇宙之眞氣, 魚鳥花木生之理, 莫不精通. 庾信公有病, 公輒自治曰, 吾公國寶也, 不可秘吾術也. 以此皆知其有扁鵲之學也.
5) 文弩責之曰, 凡爲郞徒者, 力不能上馬使劒, 一朝有事當, 何用乎?
6) 乃讓于夏宗公, 而退養眞.
7) 在地則仙, 在天則佛
12) 古者仙徒只以奉神爲主, 國公列行之後, 仙徒以道義相勉, 於是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有是而生.
8) 柳享問神仙之道 公答以保宗能得是道.
9) 美室乃知薛原之不及文弩 乃命文弩爲仙道之師 使薛原美生等師事之.
10) 二花公曰, 仙道本出于宇宙淸元之氣, 非是非相爭之謂也. 吾兄毛郞公唯得其全, 不幸早卒, 予以不肖不能盡聞其道, 爾等皆以權地襲位, 無以御下, 予竊恥之, 不如捨位求道, 以令眞生可也.
11) 大世乃發憤力學欲得神仙之眞道, 與友仇漆浮海而西, 仇漆者亦公之花郞也.
12) 仙道從保宗, 武道從庾信
13) 魚鳥爲友, 達觀天理. 不言而化, 不謀而美, 赤松之子, 其唯公耳.
14) 公年十五而入花郞, 學史于兎含公, 學歌于二花公, 學劒于文弩公, 學舞于美生公, 皆得其精.
15) 花郞者仙徒也. 我國奉神宮, 行大祭于天.
16) 信鬼神, 國邑各立一人, 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謂蘇塗, 立大木縣鈴鼓, 事鬼神, 諸亡逃之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 有似浮屠而所行善惡有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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