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윤채근의 古傳幻談_03

醉月 2018. 9. 13. 05:16

여름 여자, 황진이 가을이 오기 전 떠난 이유

조선 시대 여성을 표현한 그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히는 신윤복의 ‘미인도’. 간송미술관 소장. [동아DB]

조선 시대 여성을 표현한 그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히는 신윤복의 ‘미인도’. 간송미술관 소장. [동아DB] 

“나의 여름이 끝났구나.”  

열린 문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석양을 바라보며 한숨처럼 속삭인 황진이는 손가락으로 상자 하나를 가리켰다. 그녀를 시종하던 어린 관기 초옥은 상자를 가져다 그녀 옆에 놓았다. 늦여름 매미 소리가 영통사(靈通寺) 경내를 채우다 못해 어둠까지 몰아왔다. 등잔불을 켜게 한 황진이가 간신히 몸을 구부려 상자를 열었다. 노을 빛깔 비단이 곱게 접혀 있었다. 

“초옥아. 내 이걸 자르려는데 가위를 빌려오련?”  

방문을 박차고 나온 초옥은 이웃한 방의 행자들에게 가위를 구했지만 있을 턱이 없었다. 승방에까지 들를 용기가 없던 초옥은 울상이 돼 공양간 주변을 헤매다 공양주 보살을 우연히 만나 가위를 얻었다. 급히 방 안으로 들어서자 놀랍게도 황진이가 방 중간에 꼿꼿이 서 있었다. 그녀는 비단을 가사처럼 몸에 걸친 채였다.  

“놀랐니, 초옥아? 늙은 기녀의 최후가 성불이라면 썩 괜찮지 않을까?” 

말을 마치고 몸에서 풀어낸 비단을 가위로 서걱서걱 자르는 황진이는 며칠째 병져 누워 있던 사람이랄 수 없는 활기로 넘쳐 있었다. 밤늦도록 초옥과 대화를 나누던 그녀는 문득 제 할 일을 깨달은 사람처럼 초옥에게 말했다.  

“오늘밤은 혼자 자고 싶어. 공양주 보살 방으로 건너가 자련?” 

그렇게 초옥은 1년 넘게 모신 병든 선배를 처음으로 홀로 남겨두었다. 다음 날 아침 세면 시늉으로 얼굴에 물을 찍어 바른 초옥이 황진이가 묵고 있던 행자 숙소 앞에 이르렀을 때 기이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문안 인사에 답이 없자 초옥이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방문을 열기 전 그녀는 사태를 예감하고 있었으리라. 가냘픈 황진이의 몸은 어젯밤 자른 비단으로 목을 매단 채 옷걸이에 걸려 좌우로 조금씩 흔들거리고 있었다. 

황진이의 명성을 흠모해 영통사에 요양처를 마련해준 개성유수는 고을 현령을 초검관(初檢官)으로 임명해 사건을 각별히 다루도록 지시했다. 시신을 처음 목격한 초옥은 다음 날 관아에 끌려가 초검관을 마주했다. 한참을 뚫어져라 초옥을 굽어보던 초검관이 물었다. 

“어린 관기년이 제법이구나. 한시도 지을 줄 안다고?”  

공포에 손을 벌벌 떨며 초옥이 대답했다.  

“진이 성님께서 가르쳐주셨습네다. 무어이든 다 잘 배우는 거이 제 일이니까요.” 

볼을 씰룩이며 코털을 쓰다듬던 초검관이 황진이가 죽기 전 원한을 산 자는 없었느냐 물었다. 초옥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갈병에 걸린 황진이는 물을 자주 마셔 얼굴이 부어 있었고 그 모습을 감추려 방문 밖 출입을 자제했지만 간혹 절에서 누구라도 마주치게 되면 한결같이 상냥했더랬다. 초검관이 황진이가 죽기 전 한 말 가운데 수상한 점은 없었는지 물었다. 초옥은 인생의 여름이 끝났다는 황진이의 말을 전했다. 초검관은 눈빛이 바뀌며 정색을 하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  

“여름이 끝났다라. 나의 여름날이 끝났다? 묘한 비유로구나. 가을은 없을 거라는 뜻인 게냐? 그럼 자진하겠다는 말이었을 터, 영리한 네가 그걸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냐?”



기녀 초옥의 고백

북한 인기 소설 ‘황진이’에 차형삼이 그린 삽화. [동아DB]

북한 인기 소설 ‘황진이’에 차형삼이 그린 삽화. [동아DB]

고개를 숙인 초옥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흐느껴 울었다. 한숨을 내쉰 초검관이 섬돌 아래로 내려와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말했다.  

“네가 죽였다고 의심하는 게 아니다. 안심해라. 어차피 이건 자살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유수 어른 하명이 하도 엄중해 한 치의 빈틈도 두지 않으려는 것이다. 알겠느냐?” 

고개를 끄덕인 초옥이 화장이 번져 얼룩덜룩해진 얼굴을 들며 대답했다. 

“제가 죽인 건 아이지만 죽였다 하셔도 할 말은 없습네다.”  

의혹과 호기심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초검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사연이 꽤 길겠구나. 심리를 빨리 끝내려 했는데 이거 낭팬걸. 아무튼 내겐 지금이 여전히 여름이고 너 또한 그러하다. 시간은 많으니 들어보자꾸나.”  

개성 관기 몸에서 태어난 초옥은 어미 신분을 따라야 하는 국법에 따라 진즉 기녀의 길을 걸었다. 그녀는 자신을 세상에 있게 해준 아비에 대해 물은 적이 없다. 병약했던 어미는 괴질에 걸려 임종할 때가 돼서야 초옥에게 아비 얘기를 해줬다. 초옥의 아비는 어린 시절 옆집에 살던 동갑 소녀를 짝사랑하다 그 마음이 병이 되어 사람으로서의 성정을 상실했다고 했다. 소녀에게 구애하며 기행을 일삼던 그는 상대가 끝내 거절하자 스스로 관을 짜 죽어버리겠다고 선포했다. 냉정한 소녀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친구들과 짜고 거짓 상여 행렬을 만들고는 스스로 관 속에 드러누웠다. 자신의 집 앞에서 멈춰 선 상여 앞으로 걸어 나온 소녀는 속적삼을 관 위에 덮으며 짧게 통곡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리석은 사내여. 이따위 몸뚱이가 뭐라고 목숨을 버리는고? 혹시 숨이 붙어 있다면 일어나시오. 내 거저 줄 것이니.”  

관 밖으로 뛰쳐나온 초옥 아비는 소녀 발 앞에 엎드려 기만의 죄를 용서해 달라 탄원했고 그날 밤 둘은 동침했다. 소녀는 자신의 처녀성을 헌신짝 버리듯 초옥 아비에게 적선한 뒤 곧바로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렸다. 비록 부친은 양반이었지만 어미가 거문고 타는 관기였던지라 소녀에게 그건 어차피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빼어난 미모에 출중한 학식까지 갖춘 소녀로선 고관대작의 첩실이 되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운명이기도 했다. 

소녀는 초옥 아비에게 자기 옆에서 20년만 버텨준다면 혼인하겠다고 단단히 약속했다. 그 후 초옥 아비가 겪은 삶이란 속세 사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로 점철됐다. 소녀는 초옥 아비를 대동하고 거지 행색으로 전국을 유랑했는데 간혹 먹을 것이 떨어지면 승려들에게 몸을 팔았고 잘 곳이 없으면 노숙을 했다. 몇 해에 걸친 방랑 생활이 끝날 즈음 초옥 아비는 몸이 바싹 말라 사경을 헤매야 했다. 소녀가 말했다.  

“자네가 죽으면 내 여정도 여기서 끝이야. 꼭 다시 일어나 날 지켜줘.” 

그는 초인적 의지로 건강을 회복해 계속 소녀 곁을 지켰다. 그 뒤로 소녀가 벌인 분방한 연애 행각은 차마 입에 올리기 힘들 정도였다. 종실 벽계수와 신분을 뛰어넘는 요란한 교제를 벌이더니 가객 이사종과는 번갈아 서로의 집에 들어가 살며 각각 3년씩 도합 6년을 동거했다. 초옥 아비는 소녀의 몸종이 되어 그 모든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질투에 몸을 떠는 그에게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몸뚱이에 집착 마. 이건 그냥 살덩이야. 내가 만나는 저 남자들을 보란 말이야. 멋진 경치잖아? 우린 여전히 유랑하고 있어.”  

남자들 몸에 식상해지자 소녀는 도력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지족선사를 유혹하는 사업에 열중했고 끝내 선사의 영혼을 제 것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내친김에 송도 최고의 학자 서경덕에게 접근해 그를 무릎 꿇리고자 했다. 그녀의 도전은 실패했지만 두 사람은 남자와 여자, 양반과 기녀의 경계를 허물고 벗이 되었다. 덕분에 초옥 아비는 개경 화담의 서재에서 당대의 학자 서경덕이 설파하는 우주의 비밀에 관해 전해들을 기회를 얻었다. 소녀는 초옥 아비를 드넓은 정신의 경지와 놀라운 초월의 기쁨으로 인도했다. 

초옥이 하는 얘기를 여기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초검관이 불쑥 끼어들었다. 

“네 아비가 평생 황진이를 돌보던 비밀의 사내였더란 얘기 아니더냐? 그렇지? 몰래 숨어서 그리 헌신했으면 혼인을 했었어야 맞겠지? 그러나 그렇지 못했음을 너도 나도 다 안다. 혹 황진이 죽음과 네 아비가 연루되어 있느냐? 초검하는 자로서 난 그것이 더 궁금하구나.” 

긴 얘기를 전하느라 기진해 있던 초옥은 옆에서 권하는 냉수 한 사발을 벌컥벌컥 마신 뒤에야 간신히 대답했다. 

“제 아비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닙네다. 발써 죽었시오. 진즉 말씀드린 대로 진이 성님을 죽인 자가 있다면 바로 접네다. 쇤네 말을 더 들어주시라요.”  

초옥 아비가 황진이와 약속했던 20년을 거의 다 채워가던 어느 날, 그들 앞에 관기 한 명이 어린 계집을 데리고 나타났다. 관기가 데려온 계집은 놀랍게도 초옥 아비의 피붙이, 바로 초검관 앞에서 긴 사연을 늘어놓고 있던 초옥이었다. 초옥 어미는 초옥 아비 몰래 초옥을 출산한 뒤 혼자 키워오다 딸의 앞날을 결정하고자 굳은 결심을 하고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딸이 관기가 아닌 양인의 삶을 살도록 해주고 싶었다. 부와 명성을 이룬 황진이와 본디 양반 신분이던 초옥 아비라면 그리 해줄 거라 순진하게 믿었던 것이다.



긴 악연의 끝

황진이는 격노했다. 그녀의 분노는 초옥 아비의 외도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거라면 그녀가 백배 천배는 더 심하게 했던 짓이다. 그녀의 부화를 불러일으킨 건 초옥 아비의 무책임성이었다. 자신이 팽개쳐둔 외로운 세월 동안 다른 관기와 정분이 난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 관기를 방치하고 심지어 딸이 생긴 줄도 몰랐던 무심함은 용서할 수 없었다. 황진이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난 이사종과 그의 집에서 동거할 때 사종의 아내도 극진히 보살폈어. 그의 자식과 첩실까지 다 내 가족이었어. 인연이란 의리이니 의리 없는 인연이란 악연밖에 없겠지. 난 선업만 쌓다가 죽으려 이 세상에 왔어. 그 오랜 세월 나와 함께하고도 못 깨달았단 말이야?” 

황진이는 초옥 아비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으니 그는 자신의 소원을 막 이루기 직전 무저갱의 나락으로 떨어지고만 셈이었다. 절망한 그는 초옥 어미에게 얹혀 지내며 술독에 빠져 살다 급사해버렸고 황진이는 장례비를 대는 것으로 그와의 긴 인연을 마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옥 어미마저 병들어 죽게 되자 황진이는 기꺼이 초옥을 떠맡았다. 그녀는 초옥을 집에 들이며 이렇게 말했다.  

“네 어미는 널 양인으로 살게 하고 싶었어. 하나 네 아비와 내가 저지른 모진 업보가 널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관기로 살며 아비 업보를 풀어줘. 우리 같은 운명은 평범하게 살자들면 주변 사람들을 다치게 해.”  

몇 년이 더 흐른 뒤 그토록 강건하던 황진이도 자기 어미가 그러했듯 소갈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어린 관기로 막 이름을 얻어가던 초옥은 개성유수에게 찾아가 황진이 병간호를 하게 해달라 간청해 허락을 받았다.  

여기까지 초옥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초검관이 다시 말을 그치게 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다 알겠다. 그럼 네가 아비의 복수로 황진이를 죽였느냐? 아니 심약해진 틈을 타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간 게냐?”  

고개를 저은 초옥이 대답했다.  

“아닙네다. 진이 성님은 제 아비와 어미 무덤도 써주고 가진 재산을 다 털어 가난한 기녀들 구휼도 해준 성인이 아닙네까? 여자의 몸이지만 요순황제만 못하다고 누가 기러겠습네까?” 

“그럼 네가 죽였다는 말은 무슨 뜻이더냐?”



노을빛 비단

배우 장미희가 주연한 1986년 영화 ‘황진이’의 한 장면. [동아DB]

배우 장미희가 주연한 1986년 영화 ‘황진이’의 한 장면. [동아DB]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초옥이 황진이가 죽던 날 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석양을 바라보며 자신의 여름이 끝났다고 되뇌기 직전, 황진이는 초옥으로부터 선물 하나를 받았다. 작은 상자였다. 누워 있던 황진이는 초옥으로 하여금 상자를 열어 안의 물건을 꺼내 보이게 했다. 노을빛 자하(紫霞) 비단이었다. 황진이의 눈가에 슬픔이 감돌았다. 

“울고 싶어지네. 그 비단은 네 아비가 나와 첫날밤을 지낼 때 가져왔던 거야. 내가 돌려주며 20년 뒤 혼인할 때 다시 달라고 했지. 그때 치마를 만들어 입고 너울너울 춤을 춰주겠노라 말했었어.”  

말을 마친 황진이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고 속삭였다. 

“나의 여름이 끝났구나.”  

붉은 햇살이 찬란히 쏟아져 들어왔다. 상자를 구석에 옮겨놓고 다가선 초옥이 물었다. 

“가을은 아이 옵네까?”  

고개를 끄덕인 황진이가 초옥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지 않아. 내 머리카락이 보이니? 마흔이 다 되어 백발이 나고 있어. 난 남들 두 배의 몫을 누리며 살아왔어. 내 삶은 가을 없이 여름으로 끝날 거야.”  

황진이의 말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낀 초옥은 오늘밤엔 한시도 성님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다시 상자를 가져오게 해 비단을 꺼내 든 황진이는 유난히 쾌활해져 이렇게 말했다.  

“이걸로 치마를 지어보련다. 더는 미모로 세상을 미혹할 수 없겠지만 옥황상제나 염라대왕 같은 늙은이들이라면 내 못 할까?”  

원기를 되찾은 듯한 황진이의 모습에 안심한 초옥은 가위를 구하기 위해 방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환히 빛나는 달님을 바라보자니 오늘밤은 불길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생겼다. 아비의 유품이 성님을 기쁘게 했으니 참 좋은 날이었다. 그녀가 황진이를 흉내 내어 한양 말로 하늘을 향해 속삭였다.  

“여름은 끝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