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윤채근의 古傳幻談_02

醉月 2018. 8. 8. 21:17

‘戰神’ 이순신을 흠모한 왜장 와키자카의 독백


19세기 중반 임진왜란을 소재로 일본에서 출간된 ‘에혼조선정벌기(繪本朝鮮征伐記)’ 속 이순신 장군의 삽화. 이순신이 수군절도사가 돼 거북선을 만들었으며, 충성스럽고 용맹했다는 등의 설명이 달렸다. [동아DB]

19세기 중반 임진왜란을 소재로 일본에서 출간된 ‘에혼조선정벌기(繪本朝鮮征伐記)’ 속 이순신 장군의 삽화. 이순신이 수군절도사가 돼 거북선을 만들었으며, 충성스럽고 용맹했다는 등의 설명이 달렸다. [동아DB] 


누군가를 나만큼 미워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나만큼 누군가를 미워하며 동시에 좋아할 수 있을까? 증오로 치를 떨다가도 말할 수 없는 흠모의 기분에 빠져 차 마시는 기쁨조차 잊을 수 있을까? 일흔두 살이 된 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덧없는 업보의 바다에서 만난 적장 이순신(李舜臣)을 회고할 때마다 늘 그런 상태가 되고야 만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무장 와키자카 야스하루. [wikimedia commons]

임진왜란 당시 일본 무장 와키자카 야스하루. [wikimedia commons] 

도요토미 관백 전하의 명을 받아 조선으로 출정하던 임진년, 난 혈기 하나로 뭉쳐진 30대의 핏덩이였다. 핏덩이는 조선인의 피를 묻혀가며 덩치가 커져갔고 이내 결코 이길 수 없는 적을 만나 터져버리고야 말았다. 교토의 한적한 마을에 은둔해 불교에 귀의한 이 몸이 죽음을 앞두고 새삼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은 와키자카 가문의 후손들이 세상엔 아무리 발버둥쳐도 넘어설 수 없는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아 차라리 현명한 절망을 택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현명한 절망

수군 장수이던 난 전쟁이 개시되자마자 경상도 해안이 삽시간에 점령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적잖이 실망했다. 조선 수군은 허수아비로 판가름 났다. 비록 치열하진 않더라도 제대로 된 전투를 치러보고 싶던 난 내심 경멸의 감정에 휩싸였다. 4월 중순 조선반도에 상륙해 5월 초 한양성에 도착할 때까지 조선군은 변변한 저항 한 번 하지 못했다. 의주로 피신한 왕을 구출하기 위해 조선 남부 전역에서 근왕병이 조직되고 있다는 전령의 말을 접했을 때는 6월로 당시 난 한양성에 주둔해 있었다.  

근왕병 숫자가 애초 3만에서 점점 불어나 10만에 육박한다는 첩보가 있자 우리는 척후병을 파견해 적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용인에 집결해 있던 조선근왕병이 대오조차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임이 확인됐고, 이들을 청소하는 귀찮은 임무가 마침내 내게 떨어졌다. 나 와키자카는 나른한 여름날 소풍 가듯 휘하 정예병 1000명을 인솔해 느긋하게 적진 주변에 이르렀다. 일당백인 우리가 뭘 더 기다렸겠는가? 산 위에서 농성하고 있던 아군 600명에게 협공 명령을 내린 난 망설임 없이 근왕병 본진으로 진격해 지휘부 장교부터 차례로 베어나갔다. 혼비백산한 저들은 무기를 버린 채 뿔뿔이 흩어졌고 인근 풍덕리를 흐르던 정평천(亭坪川)은 조선군 피로 붉게 물들었다.


참혹한 완패

청전 이상범 화백의 충무공 영정을 소개한 1932년 5월 29일 동아일보 기사. [동아DB]

청전 이상범 화백의 충무공 영정을 소개한 1932년 5월 29일 동아일보 기사. [동아DB]

지금 생각하면 용인에서 거둔 대승이 내겐 독이었다. 이순신이라는 전라좌수영 수사(水師)가 남해안 보급로를 교란하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또 그를 제거할 임무가 수군인 내게 지워졌을 때 나 와키자카는 한 치 앞을 모른 채 기뻐 날뛰었다. 제법 오래 버텨줄 적장을 만났으니 그보다 즐거운 일이 없었다.  

7월 초 운명의 그날, 조선군 판옥선 다섯 척이 우리 선단 쪽을 향해 다가오다 갑자기 후퇴하기 시작했다. 거제도 북단에서 출정 기회를 엿보고 있던 난 교만한 데다 승리에 조급해 있었다. 경쟁자인 구키(九鬼)에게 뒤질세라 선단에 출격 명령을 내리고 전속력으로 적선을 추적했다. 유인작전이란 걸 모르지 않았지만 그런들 뭐가 대수였겠는가? 어차피 갈고리로 적선을 끌어당긴 뒤 갑판에서 근접전을 벌이면 승부는 그걸로 끝이었다. 아군을 유인하려는 판옥선들은 오히려 저들의 본진으로 우리를 인도해줄 고마운 길잡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어디선가 첫 북소리가 울리고 좌우의 섬 사이로 적선이 출현했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조선군 전함들은 부채꼴로 학익진을 펼친 채 미동 없이 제자리를 지킬 뿐 우리 쪽으로 접근해오지 않았다. 피아의 전함끼리 뒤섞인 접전을 예상했던 나 와키자카는 왼쪽과 오른쪽 중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후미로 따라붙고 있던 구키의 선단에 퇴각 신호를 보냈다. 어리석은 구키는 신호를 나의 장난쯤으로 여겨 무조건 직선으로 밀고 들어왔고 한산도를 마주 본 상태로 급히 정지해 있던 나의 선단과 충돌했다. 아군 선단은 미처 조선군과 붙어보기도 전에 서로 뒤엉켜 전열이 무너졌다. 

한산도 앞바다는 차갑고 거칠었다. 물에 뛰어들기 직전 갑옷을 벗은 덕에 몸이 간신히 수면으로 떠올랐고 나 와키자카는 살아남고자 전력을 다해 가까운 섬으로 헤엄쳤다. 적선들의 함포 사격으로 산산조각난 아군 전선들은 서로 부딪치며 회전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일부 아군 전선이 반격하기 위해 학익진을 뚫었으나 대기하고 있던 적의 귀갑선(龜甲船)에 으깨져버렸다. 참혹한 완패였다.


이순신을 찾아라

섬에 올라 몸을 누이고서야 멀리 적장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이순신. 그는 아군을 전멸시키고 난 뒤 자신의 선단을 재정렬하는 의식을 치렀다. 삼엄하고도 침착한 검열이 끝나자 그가 만족한 듯 장군기를 흔들었다. 바람소리만 가득하던 바다에 짧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는 주변 섬에 피신해 있던 우리 수군들을 잠시 응시했다. 마음만 먹으면 모조리 주륙할 수 있었지만 이순신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주도면밀한 방어진을 유지하며 당포 방향으로 조용히 물러갔다.  

언제인지 모를 구조를 기다리며 부하들과 해초로 연명하던 난 밤마다 달을 보고 통곡했다. 보름 뒤 구키 선단에 구조된 내겐 ‘미역장군’이라는 치욕적인 별명이 붙었고, 한산도의 차가운 달빛은 저주가 되어 나 와키자카의 전 생애를 지배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지금도 그 순간의 분함만은 진정시키기 어렵다.  

이순신. 그 이름은 나를 더 오래 살도록 부추기는 부적이었다. 나는 이순신이 죽었음에도 그 이름을 붙잡고 오랜 세월을 버텨왔다. 사나이 와키자카를 증명하려던 그간의 헛된 노력이야말로 혹시 진정한 패배의 흔적이 아니었을까?  

오늘도 나는 습관처럼 서재 은밀한 상자 속에서 초상화 한 점을 꺼내놓고 마치 비밀스러운 제사를 지내는 자처럼 예를 갖춘다. 임진년 전쟁 7년 동안 그토록 암살해보려 노력했던 자, 하지만 와키자카라는 졸장부에게 살해당하기엔 너무나 아까웠던 자. 그림 속 이순신은 때론 슬퍼 보이기도, 또 때론 지쳐 보이기도 한다. 전쟁의 신은 본디 외로운 법. 

임진년 전쟁 첫해 내가 한산도에서 맞이한 패배는 아군 보급로 단절을 초래해 육지 본진의 발목을 잡았고, 이순신이 살아 있는 한 결코 조선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해졌다. 해전 선봉에 더는 설 수 없게 된 나는 그를 암살하는 업무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처음엔 조선어에 능통한 승려들을 적진에 투입해 독살하는 걸 시도해봤지만 아예 접근이 불가능했다. 그의 정확한 얼굴을 파악해뒀다 교전 중에 집중 공격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첩자들이 가져오는 초상들이 이상하게 제각각이었다. 나는 전쟁이 마무리될 무렵에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암살 시도를 예견한 이순신은 부하들을 그린 그림들을 자신의 초상이라 속여 우리 첩자들에게 전달했고 각 그림은 또 다른 이본을 낳아 종국엔 어떤 그림이 진짜 이순신 초상인지 모를 지경에 빠진 것이다.


질투와 숭배

이순신의 대척점에 있던 일본 무장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 고문헌에서 맹장(猛將)으로 그려진다.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에서 바다 건너 후지산을 바라봤다는 전설을 그린 목판화. [열린책들 제공]

이순신의 대척점에 있던 일본 무장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 고문헌에서 맹장(猛將)으로 그려진다.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에서 바다 건너 후지산을 바라봤다는 전설을 그린 목판화. [열린책들 제공] 

더 놀라운 건 이순신의 군진엔 실제 다른 한 명의 이순신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이순신의 부장인 그 이순신(李純信)은 명나라 소속 종군 화사가 그린 초상화에 자기 얼굴을 남겼다. 이 가짜도 이순신은 이순신인지라 그의 초상이 수중에 들어왔을 때 난 발을 구르며 기뻐했었다. 동맹군 화사 앞에 가짜를 내세울 순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림을 보면 볼수록 그건 이순신이 아니었다.  

필살의 의지로 이순신을 추적하던 나는 그의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출생과 성장, 혼인과 등과 과정을 모두 세밀히 파악하고 있었고, 그의 식성과 걸음걸이의 특징, 심지어 필적까지 수집하고 있었다. 그림 속 이순신은 결코 내가 아는 그 일 리 없었다. 내가 아는 이순신은 훨씬 불투명한 심연을 지닌 복잡한 사내여야 했다. 그 무렵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전신(戰神) 이순신의 모습은 증오와 선망, 질투와 숭배의 감정으로 뒤섞여 현실감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정쟁에 휘말려 파직된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게 됐을 때 비로소 그의 진짜 초상을 입수할 수 있었다. 그건 그를 그림자처럼 호위하던 승병 하나가 자기 주군의 운명이 다할 것으로 여겨 비장하게 그린 최후의 초상이었다. 조선 사찰에서 수행하던 중 전쟁이 발발하자 아군 첩자로 활동하던 일본 승려를 통해 그 그림을 건네받는 순간, 나는 그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짜 이순신 초상임을 곧바로 알아챘다. 한참을 멍하니 그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떤 점은 상상과 달랐고 어떤 점은 너무나 예상에 부합해 놀랍기만 했다. 

나는 초상의 임모본(臨摹本) 여러 개를 그리도록 해 조선군 수영(水營) 근처에 잠입해 있던 자객들에게 전하게 했다. 수졸로 강등된 이순신은 호위 없이 활동하고 있었고 내 밀지 한 통이면 그의 목숨은 끝장이었다. 나는 망설였다. 그림을 보고 또 보았다. 이미 병졸로 전락해버린 호걸을 확인 사살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얼마 뒤 벌어진 명량에서의 끔찍한 패전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한 치의 머뭇댐 없이 그를 암살했으리라.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든다. 과연 내게 그의 생명을 앗을 자격이 있었을까? 하늘이 낸 장수를 인간 와키자카의 힘으로 제거할 수 있었을까?


친필 한시

이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순신은 그림 속에서 여전히 영활하고 우울한 눈빛으로 세상을 쏘아본다. 가는 세필로 먹을 덧입혀가며 단시간에 그린 초상 속 이순신은 내게 무언가 묻는 듯도 하다. 왜 그때 암살하지 않아 더 많은 살생을 하도록 놔뒀느냐고. 아, 단 한 번만이라도 그를 만날 수 있다면 내 영지의 반을 내놓아도 좋다. 그와 한잔의 차를 나누며 이 살생의 업보를 나눠 지고 싶다. 돌이켜보면 나는 결코 그를 죽일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신병(神兵)은 하늘만 죽일 수 있다고 믿던 나는 자객들을 철수시키고 대신 정중한 서찰을 이순신에게 보냈다. 호기로운 위협으로 마음을 제압하고 달콤한 아첨으로 사기를 꺾어가며 전쟁터에서 은퇴할 것을 종용했다. 답신은 여러 손을 거치느라 보름 후에나 도착했다. 겉봉을 뜯자마자 내용보다 글씨 모양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완전히 압도된 나는 숨을 멈췄다. 글자 한 획 한 획은 기괴하게 꿈틀대며 나 와키자카를 공격해왔고 마지막의 ‘순신(舜臣)’이란 서명은 날카로운 움직임으로 내 영혼을 베었다. 일순 공중으로 분해되어 소실된 나의 영혼은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이 세계에 실재한다는 사실을 참담히 받아들여야 했다. 

이순신은 시 한 수로 답신을 대신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을 완벽히 외울 줄 안다.


만 리 강산은 붓끝에서 이뤄지고 萬里江山筆下成
텅 빈 숲 적적하니 새조차 울지 않네 空林寂寂鳥無聲
복사꽃 의구하여 해마다 피는데 桃花依舊年年在
구름은 흐르지 않고 풀만 절로 푸르다 雲不行兮草自靑


붓을 칼처럼 구사한 사나이

충남 아산시 현충사에 보관된 난중일기 친필 초고본. [문화재청 제공]

충남 아산시 현충사에 보관된 난중일기 친필 초고본. [문화재청 제공]

시를 곰곰이 읽고 또 읽자니 그건 살기로 가득한 협박이었고 온유한 표현 속에 감춘 번쩍이는 비수였다. 만리강산은 조선의 강역일 테니 붓은 칼을 대신한 비유요, 결국 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새 울음조차 사라진 텅 빈 숲은 초토화된 우리 일본군 진영을, 해마다 피어날 복사꽃은 영원무궁할 조선의 역사가 아닌가. 그렇다면 구름은 뭔가? 흘러가야 할 구름은 왜 멈춰 있는가? 비가 내린다는 뜻이다. 비가 내리고 풀은 절로 푸르다는 건 일본군이 전멸된 뒤의 으스스한 광경이었다. 비가 붉은 피를 씻어내고 나면 그 자리의 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푸를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경고.  

이순신의 섬뜩한 서명은 그가 붓을 칼처럼 구사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그는 우리 일본군 심장에 칼을 겨누고 남김없이 없애겠다고 말한 것이다. 두려움에 나는 주저앉았다. 이순신은 나 와키자카가 죽일 수 없는 자였다. 그는 죽음 그 자체였고 살생을 업으로 한 마군(魔軍)이며 우리가 만든 지옥을 끝장내기 위해 명부에서 파견한 신장(神將)이었다. 

운명을 깨달은 나 와키자카는 그 뒤로 이순신 암살을 포기했다. 아니, 조선을 정복하려는 그 어떤 희망도 품지 않게 되었다. 압도적으로 우세하던 우리 일본군이 명량에서 조선 수군에 의해 모래성처럼 무너졌을 때, 나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량해전에서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믿지 못했다. 나는 지금도 그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다. 

조선전쟁이 끝나고 나는 이순신의 서찰을 친애하던 후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영전에 바쳤다. 10여 년 전 떠난 가토의 영혼은 자신의 영지 구마모토성 혼묘지(本妙寺)에 모셔졌는데 나는 그의 명복을 빌며 이순신의 친필 한시를 기꺼이 절에 기부했다. 전쟁으로 맺은 악연을 두 사람은 저승에서나마 풀 수 있었을까? 사실을 말하자면, 나 와키자카는 악연일망정 이순신과 다시 만날 순간을 설레며 기다린다. 극락왕생을 포기하고 그와 마주 앉아 한산도 전투에서의 일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이다.




※ 이 글은 이순신 장군과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 사이의 인연을 역사적 실제 상황에 토대를 두고 허구적으로 직조해본 것이다. 실증을 거친 진짜 이순신의 초상은 현존하지 않는다. 충민사와 제승당 등에 있던 초상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대부분 사라졌으며 비록 남아 있었다 해도 이순신의 실제 모습을 묘사했다는 보장이 없다. 필자가 보기에 이순신의 인격성을 가감 없이 담은 유일한 초상은 납북 국어학자 이중화가 전남 벌교에서 발견한 사진본이다. 이 역시 진위를 고증할 길이 없지만 이순신의 역사적 실재성을 구현한 독보적 가치를 지닌다. 이것이 진본을 촬영한 것이라면 원본은 일본군 측에서 암살을 목적으로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순신의 육필 칠언시가 가토 기요마사의 개인 원찰인 구마모토 혼묘사(本妙寺) 보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서명과 낙관까지 갖춘 장군의 필적이 어쩌다 그곳에까지 흘러들어갔는지는 미스터리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순신에 대한 존경과 증오가 혼재된 독특한 회고담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와 더불어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가담해 영주로서의 안정을 꾀했고 천수를 누리다 1626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