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육상산(陸象山) 생애와 사상

醉月 2012. 9. 11. 13:02
육상산(陸象山) 생애와 사상

 

호 존재(存齋) ·상산(象山). 시호 문안(文安). 이름 구연(九淵). 저장성[浙江省] 출생.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관직에 올랐으나 곧 물러나 귀계(貴溪:江西省廣信府)의 상산에 강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당시 유일한 석학이었던 주자(朱子)와 대립하여 중국 전체를 양분(兩分)하는 학문적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사상적 계보로는 모두 정호(程顥:明道) ·정이(程頤:伊川)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다만 주자가 정이천의 학통에 의한 도문학(道問學:問學第一)을 보다존중한 데 반하여, 상산은 정명도의 존덕성(尊德性:德性第一)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주자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성즉이설(性卽理說)을 제창하였고, 상산은 치지(致知)를 주로 한 심즉이설(心卽理說)을 제창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객관적 유심론(客觀的唯心論)과 주관적 유심론(主觀的唯心論)으로 불린다. 주 ·육(朱陸)의 교유는 1175년 여조겸(呂祖謙)의 권고로 아호사(鵝湖寺:江西省 鉛山縣)에서 처음 이루어져 평소의 강학(講學) 요점에 대한 논변(論辨)을 벌였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헤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학문을 존중하여 도의적 교유는 변하지 않았다. 상산의 학문은 그의 제자 양자호(楊慈湖) 등에 의하여 장시[江西] ·저장[浙江] 각지에서 계승 ·성행하였다. 한때 주자학에 의하여 압도되기도 하였으나, 명대(明代)의 왕양명(王陽明)에 이르러 다시 계승 ·발전하였다. 주요저서에 어록(語錄) ·서간(書簡) ·문집(文集)을 수록한 《상산선생 전집》(36권)이 있다. 

 

I.생애와 사상
육상산(1139-1192)은 주자와 함께 남송(南宋)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 교육가이다. 字는 자정(子靜), 호는 존재(存齋), 본명은 구연(九淵)으로 撫州의 金溪(지금의 江西省 金溪縣) 사람이었다. 그는 49세에 속세를 떠나 귀계(貴溪)의 응천산(應天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그가 기거하던 산이 모양이 코끼리와 비슷하다 하여 그를 "상산(象山)", 혹은 "상산거사(象山居士)"라고 불렀다.

 

육상산은 세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넉넉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집안의 가풍은 매우 학구적이어서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둘째형을 제외하고 모두 글공부를 하였다. 또한 육상산은 어릴 적부터 호기심이 풍부하였고, 사색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육상산은 여동래(呂東萊)가 고시관이었을 때인 34세에, 예부(禮部)고시에 참가하여 학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진사에 합격하였다. 이 시기 이미 육상산의 학문은 틀을 갖추게 되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가르침을 부탁 받았다고 한다. 그는 주자와 동시대 사람으로,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학문적으로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였다. 특히 주자가 학생들을 가르치던 백록동(白鹿洞)서원에서의 강의는 학생들을 매료시켜, 육상산의 강의 내용을 돌에 새겨 기념하게 했다고 한다.

 

육상산은 宋代 理學 중, "심학(心學)"의 창시자이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理學의 복잡함에 반대하여 마음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마음은 곧 理이며, 세상의 모든 理는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또한 우주는 곧 나의 마음이고 나의 마음이 곧 우주이므로, 본심(本心)으로 돌아가면 모든 이치가 완전해진다고 주장하였다. 육상산은 "사람에게는 모두 마음이 있고, 모든 마음은 理를 가지고 있으니, 마음이 곧 理이다"라고 했다.

 

육상산의 심학은 불교의 선학(禪學)과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자로부터 날카롭게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선학의 性은 모든 것을 비워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는 "空"이지만, 육상산의 心은 윤리, 도덕 등을 기준으로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 주관적 의식으로 그 목적하는 바가 다르다. 즉 선학은 만물이 모두 "空"에 이르는 데 목적이 있지만, 육상산의 심학은 후천적인 노력으로 仁, 義, 禮, 智에 이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육상산의 심학은 선학적 요소를 가지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유가사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육상산의 사상은 후에 明代의 왕양명(王陽明)에게 계승되면서, 정주학파(程朱學派)와 대립되는 육왕심학파(陸王心學派)로 불리게 되었다.
육상산의 저서는 1980년 중국 中華書局에서 『陸九淵集』으로 종합·출판되었다. 『陸九淵集』에는 "文集", "謚議", "行狀", "語錄", "年譜" 등을 포함한 30여 권이 편집되어 있다.

 

II.교육의 철학적 배경
주자가 理氣論으로 자신의 교육사상을 체계화했다면, 육상산은 "道器一體(도와 사물은 하나이다)"로 자신의 교육사상을 이론화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道(내용)와 器(형식)는 사물의 두 가지 방면일 뿐 통일된 하나이다. 육상산은 "형이상자에서 시작한 것을 道라고 말하고, 형이하자에서 시작한 것을 器라고 말한다"라고 했다. 이는 道와 器가 근본적으로는 하나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道器一體"는 "性"과 "氣質"을 구분한 주자의 관점과 대립한다. 육상산에게 있어서 "性"과 "氣質"은 모두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心은 곧 心이고, 理는 곧 理이다. 이 두 가지는 사실상 동일한 것이며, 각기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했으며, "사람에게는 모두 心이 있고, 모든 心은 理를 가지고 있으니, 心이 곧 理이다"라고 했다. 이는 모두 心과 理가 근본적으로 같음을 나타낸 것이다. 즉,

 

"道器一體"를 전제로 心과 理는 하나이므로, 心은 곧 "本心(본래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理學의 입장에서 만약 心과 理가 하나라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당연히 선해야 한다. 그러나 육상산은 현실적으로 인간의 행동은 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선이 있으면 곧 악도 있다. 이를 비유하자면 손바닥의 양면과 같다. 그러나 선은 근본적인 것이고, 악은 그 근본을 위반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본래 인간은 선한 心性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벗어나기 때문에 악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氣質로 선과 악을 구분한 주자의 방법과는 대립된다. 육상산은 "仁과 義는 인간의 본심이다. 맹자는 '인간에게 仁과 義의 마음이 없겠는가'라고 했고 다시 말하기를 '나에게 본래 있었지만, 밖에서부터 내게 스며든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우매한 사람은 人과 義에 이르지 못하고, 폐단과 물욕 때문에 본심을 잃는다"라고 했다. 이는 仁과 義가 本心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후천적인 영향에 따라 본심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악한 행동을 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本心을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本心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교육이다. 왜냐하면, 仁과 義는 모두 本心에 기인하기 때문에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에 따라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없다. 마음에 따라 구하는 것뿐이다"라고 했다. 이는 스스로 다스려 마음을 따라 구하는 것이 학문의 근본적인 도리임을 나타낸 것이다.
육상산의 교육사상에 있어서, "明其本心(마음을 밝게 함)", "求放心(스스로 다스려 마음을 따라 구함)"은 그의 인식론을 성립시켜 주는 중요한 철학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가지는 곧 육상산이 주장한 교육목적과 교육역할을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III.교육방법
주자에게 있어서 "性卽理"의 중심은 마음의 體用과 性情을 구분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四端"을 설명할 때, 本心(性)의 用(情)은 本心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육상산은 本心의 用인 "四端"이 本心이라고 직접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제자 楊簡과의 대화에서, "무엇이 本心입니까?(如何是本心)"라는 질문에, "惻隱은 仁의 端이다. 羞惡은 義의 端이다. 辭讓은 禮의 端이다. 是非는 知의 端이다. 이러한 것들은 곧 本心이다"라고 했다. 이는 "四端"이 곧 本心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기초로, 주자는 내적으로 理를 회복하기 위해 학문을 했지만, 육상산은 외부에서 영향을 받아 변화시키기 위해 학문을 하였다. 그러므로 육상산에게 있어서 교육은 외적인 것으로, "擴充良知(좋고 선한 지식을 확충함)"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良知의 端은 愛와 敬을 나타내어, 이를 확충하는 것이다. 이는 聖人과 哲人의 과정이다"라고 했다. 이는 "擴充良知"의 과정이 곧 이상적 인간인 聖人과 哲人이 되는 과정임을 나타낸 것이다.

 

육상산는 自立과 自得을 교육사상의 이념으로 삼았다. 그는 自立과 自得을 위해서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육상산과 주자는 모두 융통성과 개별성을 중시한 교육방법을 제시하였지만, 주자는 영원불변의 禮를 중심으로 보편적인 교육방법을 강조한 반면에, 육상산은 개인의 깊이 만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였다. 육상산은 주자의 교육방법에 대해, "생각이 바르지 않은 사람도 빨리 깨닫는다면, 곧 바르게 될 수 있다. 생각이 바른 사람도 빨리 (올바름을) 잃는다면, 곧 바르지 않게 된다. 어떤 때는 形迹을 통해 사람을 관찰할 수 있지만, 어떤 때는 形迹으로만 사람을 관찰할 수 없다. 形迹으로만 사람을 관찰하면 곧 사람을 이해하는 데 부족하고, 形迹으로만 사람을 판단하면 곧 그 사람을 돕기에 부족하게 된다"라고 했다. 여기서 形迹은 곧 사람의 언행을 뜻한다. 그러므로 언행으로만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며, 언행이 개인의 모든 것을 나타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육상산은 이를 주자의 교육방법에 비유하여, 그가 形迹으로만 사람을 판단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形迹으로부터 구속받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나아가서 육상산은 사람들의 수준에 맞게 차등을 두어 가르쳐야 함을 주장하였다. 즉, 획일적인 언행만으로 사람을 인식해서는 안 되며, "擴充良知"할 수 있는 깨달음의 교육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상산은 이를 위해 사람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람의 속 내면을 알려면 외적인 면만 관찰해서는 안 된다. 외적으로는 대략적인 것만 볼 수 있다"라고 했다. 이는 인간을 이해할 때, 반드시 내면과 외면 모두를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함을 나타낸 것이다. 나아가서 육상산은 자신을 예로 들어, 외적인 면으로만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나의 학문과 다른 이의 학문이 다른 점은 단지 나는 한번도 아무렇게나 글을 쓴 적이 없고, 모든 말에 핵심이 있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역시 사람을 이해할 때, 치우치지 않고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함을 나타낸 것이다.

 

육상산는 교육과정 중에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의 교육방법은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하여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데 있었다. 그의 교육방법에 대해 楊簡은 "선생님은 학생들의 마음 미세한 곳까지 깊이 알고 계셨다. 말씀에는 情이 있어 학생들은 (듣고) 땀을 흘렸다. 학생 중에 스스로 깨달은 자가 없었으며, (선생님은 학생들의) 원인분석을 도우셨다. 마치 선생님은 학생의 마음을 모두 알고 계신 것 같았다"라고 회고했다. 이는 육상산이 학생들을 깊이 이해하고 파악하였으며, 교육과정을 중에 학생들을 깨닫게 하는 교육방법을 실천했음을 나타내 준다.

 

IV.독서법
주자는 성현의 책을 읽는다는 것이 도를 얻기 위한 주요 방법이라고 했다. 즉, 책을 통해 성현의 이치를 자신 것으로 전수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육상산에게 있어서 독서는 이치를 전수 받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치를 밝히는 근본적인 방법은 될 수 없다. 그에게 있어서 독서는 일종의 깨달음의 과정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육상산은 젊은 시절 책읽기를 그리 중시하지 않았으나, 점차 학문이 깊어지면서 그 역시 독서를 매우 중시하였다. 그러나 육상산은 독서법에 대해 주자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육상산의 독서법은 "理"를 통해 경서의 가치를 주자와 다르게 논하였다. 그는 "心"과 "經"의 관계를 통해 경서의 가치를 주장했는데, 육상산에게 있어서 경서는 "나의 마음과 같으나 성인이 먼저 얻은 것"이었다. 이는 책을 읽지 않아도 누구나 성인처럼 이치를 깨닫을 수 있음을 나타낸 것으로, 경서는 本心의 외재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독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수단으로 자기 수양을 위한 방법에 불과하다. 육상산에게 중요한 것은 "心"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이치는 "經"으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自得, 自成, 自道를 하려면 스승, 친구, 서적에 의지해선 안 된다"라고 했다. 이를 통해 육상산은 학문하는 사람이 주체적으로 공부해야 하며, 학습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자신의 마음임을 나타낸 것이다.

 

둘째, 육상산의 독서법은 방법론적인 면에서 주자와 견해를 달리하였다. 주자는 경서의 모든 글자를 분석하여 문자적 의미를 분명하게 하였으며, 세세한 의미를 통해 전체적인 진리를 밝히고자 했다. 그러나 육상산은 세세한 의미보다는 전체적인 내용을 더욱 중시하였고, 경서의 문자적 의미에는 그리 비중을 두지 않았다. 육상산은 "바위를 丈(사람 키 정도의 길이를 재는 단위)으로 측량하면, 착오가 적게 날 것이다. 銖(한 냥의 1/24로, 작은 물체의 무게를 재는 단위)로 측량하면 바위는 반드시 잘못 측정될 것이다. 寸(손가락 정도의 길이나 폭을 재는 단위)으로 측정하면 丈보다 반드시 착오가 클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상세하고 작은 것을 중시하기보다는 전체적인 것을 중시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나타낸 것이다. 나아가서 육상산은 글자의 뜻을 해석하는 것보다는 의미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함을 주장하였다. 그는 "성현의 말은 스스로 명백했다. 들어와서 곧 효도하고 나가서 곧 공경하는 것을 제자들이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대에게 들어와서 효도하고 나가서 공경하라고 분명하게 말한 것이다. 더 이상 무슨 해석이 필요하겠는가?"라고 했다. 이는 경서의 해석보다는 마음으로 깨달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므로, 독서법을 통해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셋째, 육상산은 주자와 달리 비판적인 독서법을 주장하였다. 그는 책을 읽을 때, 반드시 의문을 갖고 접근해야 하며 경서를 신봉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육상산은 "학문을 위해 의문을 갖지 않음을 근심해야 한다. 의문을 갖으면 곧 발전이 있다. 공자 문하의 子貢과 같은 사람은 곧 의문을 갖지 않았기에 도에 이르지 못했다"라고 했다. 이는 당시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던 경서도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학문하는 사람은 모든 것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상산에게 있어서 인간이 창조한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즉 책을 읽을 때, 끝없는 의문을 가지고 理와 부합하는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여 습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육상산은 주자와 함께 南宋을 대표하는 교육가였다. 이 두 사람은 학문적으로 서로 다른 입장에 서 있었지만, 서로의 학문을 존중하였던 사상적 붕우(朋友)였다. 육상산은 중국 유가의 心學을 창시한 사람이다. 그는 주자의 이분법에 반대하여 우주만물이 인간의 한가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일원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철학적 기초에 근거하여 그의 교육사상도 기존의 理學思想과 대립적이었다. 육상산은 윤리, 도덕적 성장보다는 마음의 깨달음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에게 있어서 모든 교육과정은 마음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육상산의 心學은 후에 明朝의 개혁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왕양명(王陽明)에게 계승되어 체계화되었다. 그의 사상은 전통사상과 봉건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한 중국 근대사상의 대표적 학파를 이루게 된다. 현재 중국에서 육상산을 주자와 대등한 위치에서 평가하는 이유도 그의 사상이 근대 개혁사상으로 계승·발전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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