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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신년특집_격변의 2012년, 앞으로 2년

醉月 2009. 12. 29. 08:51

2012 總選·大選의 격변 앞둔 한국의 정치지형  中道 선점을 위한 ‘창조적 파괴’ 시작해야

격동의 2012년을 앞두고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각계 전문가들이 말하는 2012년의 의미와 한국의 대응책


⊙ 보수·진보에 실망하여 중도층 증가 추세. 한국의 中道는 안정지향적인 보수 성향보다는  변화지향적인 진보에 가까워
⊙ 2007년 대선에서 李明博 후보의 승리는 보수가 강화됐기 때문이 아니라 中道가 보수를 선택했기 때문.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도 변화지향적인 중도가 어떤 세력과 정치 지도자를 선택할 것인가가 최대의 관전 포인트

金亨俊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 1957년 서울 출생.
⊙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졸업.美 오하이오대 정치학 석사, 美 아이오와대 정치학 박사.
⊙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 역임.
⊙ 現 한국선거학회장,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국가브랜드委 위원, 국회 운영제도개선 자문위원.
⊙ 저서·논문: <한국인의 이념 정향과 이념 갈등에 관한 고찰: 이념 변화 추이를 중심으로>
    <이명박 정부 출범 1년 평가와 과제: ‘대통령 국정 운영 리더십’을 중심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참여정치의 신장과 한계> <남북관계와 국내정치의 갈등구조: 통일 담론을 중심으로> 등.

<빈부갈등 등 각종 갈등이 심화되는 시대에 국가지도자는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사진은 2008년 광복절에 시민들과 함께 거리를 행진하는 이명박 대통령.>

국내외적으로 2012년은 격동의 해가 될 것이다. 한국에서는 2012년 4월에 제19대 總選(총선), 12월에 제18대 大選(대선)이 예정되어 있다.
 
  우리 사회가 2012년 격변의 해를 얼마나 잘 대처하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 국내 정치 안정과 정치권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정치권은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에 대한 체계적이고 실증적인 분석을 토대로 국운융성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진보와 보수 간 두 번의 수평적 정권 교체를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이념 지형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과거에는 진보(40%)와 보수(40%)가 균등하게 대세를 이루고 중도(20%)는 약한 이른바 ‘雙峯型(쌍봉형) 이념 지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997년 진보세력 집권 이후 10년 동안 한국 사회의 이념 지형은 ‘진보 30% - 중도 40% - 보수 30%’로, 이른바 중도가 강화되는 ‘單峯型(단봉형) 이념 지형’으로 변모했다.
 
  이런 현상은 과거 진보 성향을 보였던 젊은 세대, 386세대, 高(고)학력층, 수도권 거주자층이 진보세력에 대한 실망감에서 이념적 중립지대로 이탈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단국대 분쟁해결연구센터가 2009년 11월 실시한 ‘2009 갈등분쟁에 관한 국민인식조사’에서 중도강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에 대한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2008년 조사에서 30대의 ‘중도’ 비율은 35.1%였지만, 2009년 조사에서는 6.2%포인트나 늘어난 41.3%였다. 반면 ‘진보’라고 응답한 비율은 31%에서 4.5%포인트 줄어든 26.5%, ‘보수’라고 대답한 비율은 8.1%포인트 줄어든 22.9%였다. 조사팀은 “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경제에 가장 민감한 30대가 정치적인 문제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20대에서 ‘중도’라고 답한 응답자도 2008년 대비 2.2%포인트 늘어난 40.1%였다. 40대는 33.5%에서 33.7%, 50대 이상도 27.4%에서 32.4%로 5%포인트 늘었다.
 
  이런 중도 강화 현상은 국민의 관심이 정치나 이념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정치권과 언론, 사회단체 등이 양극단으로 치닫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한국 사회의 중도층이 두꺼워지고 있지만 이념 갈등은 오히려 증폭하는 모순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의 中道는 변화지향적
 
  실제로 KBS와 동서리서치가 2009년 7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압도적인 다수(89.0%)가 10년 전과 비교할 때 갈등이 ‘심각해졌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민주화 이후 이념적 갈등이 가장 심각했던 시기로 ‘李明博(이명박) 정부’라는 응답이 49.5%로 盧武鉉(노무현) 정부(17.5%), 金大中(김대중) 정부(15.4%), 金泳三(김영삼) 정부(8.6%)보다 훨씬 높았다.
 
  진보와 보수가 특정 이슈와 정책을 놓고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부정하고 배격하는 배타적 감정에 매몰될 경우, 우리 사회에 ‘중도 강화-사회 갈등 심화’라는 모순적인 상황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2012년을 이념지형적 관점에서 전망하려면, 중도층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특히 중도층에 대해 단순히 수치로 나타난 비중만 볼 것이 아니라 그에 내재된 특성을 살펴야 한다.
 
  2008년 8월 KBS와 미디어리서치가 실시한 국민의식조사에서 ‘중도’가 42.1%로 가장 많았다. 11개 정책항목 중 ‘기업 경쟁력 확보 vs. 노동자 권익 보호’, ‘표현의 자유’ ‘북한’에 대한 인식 등 6개 항목에서는 진보적인 시각이, ‘분배 vs. 성장’, ‘개발 vs. 환경’, ‘경찰 武力(무력)사용’, ‘동성애’ 문제 등 5개 항목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시각이 더 강했다. ‘주한미군’과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인식은 진보학계의 주장에 더 가까운 것으로 나타난 반면,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압도적으로 보수적 시각을 보였다.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가 실시한 국민이념조사에서는 중도의 정책 방향성이 진보라는 것이 밝혀졌다. 국가보안법, 對北(대북)지원 등 13개 정책 항목을 바탕으로 ― 는 진보, + 는 보수로 방향성을 분석한 결과, 중도의 정책 방향성은 -0.056으로 보수(0.1463)보다는 진보(-0.1175)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현재 한국의 중도층은 안정지향적인 보수 성향보다는 변화지향적인 진보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지난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승리한 것은 보수가 강화됐기 때문이 아니라 중도가 1997년과 2002년 대선과는 달리 진보 대신 보수를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도 변화지향적인 중도가 어떤 세력과 정치 지도자를 선택할 것인가가 최대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KBS와 동서리서치가 노무현 前(전) 대통령 자살 이후인 2009년 7월 실시한 사회갈등 여론조사에 따르면, ‘여야 간의 정치 갈등’이 평균 84.6점으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다음은 ‘진보·보수 간의 이념 갈등’(78.1점), ‘勞使(노사) 갈등’(77.1점), ‘貧富(빈부)격차로 인한 계층 갈등’(76.6점), ‘영호남 등 지역 갈등’(55.6점), ‘세대 갈등’(58.6점)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빈부격차가 가장 심각한 이슈가 될 것
 
  보다 심층적인 분석을 위해 ‘사회갈등의 심각성’을 종속변수로 하고 각종 갈등을 독립변수로 해서 회귀분석(regression analysis)을 한 결과, 주목할 만한 사실이 발견됐다.
 
  일반적으로 회귀분석에서는 ‘표준화 계수(standardized coefficients: 베타 값)를 통해 종속변수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독립변수들을 파악할 수 있다. 이 베타 값의 수치가 크면 클수록 종속변수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분석된다.
 
  분석 결과, ‘여야 간 정치 갈등’ 변수의 베타 값이 .265로 가장 컸다. 그러나 ‘계층 갈등’의 베타 값이 두 번째로 큰 .194로 이념갈등이나 지역갈등보다 높게 나왔다.
 
  이런 조사 결과가 주는 함의는 향후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균열 축이 지역갈등과 이념갈등에서 벗어나 빈부격차에 따른 계층갈등으로 빠르게 변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보정권이라는 노무현 정부에서조차 兩極化(양극화)가 심화됐다. 성장과 경제 살리기를 기치로 내걸고 있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이 증대하고 계층 간 소득격차가 심화되면서 양극화 현상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에 따른 계층갈등은 2012년을 기점으로 이념갈등과 결합되어 한국 사회를 깊은 어둠의 터널로 빠져들게 할지 모른다.
 
  특정한 정치 이슈는 크게 세 가지 형태 중의 하나로 변화된다.
 
  첫째, 충동·소멸형 이슈(impulse and decay issue). 한순간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소멸되어 사회의 균열 축으로는 발전하지 못하는 이슈다.
 
  둘째, 세속형 이슈(secular issue). 초기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점진적으로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면서 사회의 균열 축으로 자리 잡는다.
 
  셋째, 중대 이슈(critical issue). 어느 한순간에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정도의 엄청난 균열 축이 되어 지속적으로 사회를 갈등으로 몰고 가는 이슈다.
 
  한국 사회에서 지역주의 이슈는 1987년 대선과 1988년 총선을 거치면서 중대 이슈가 된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정치 再편성’ 가능성은 낮아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승리한 것은 보수세력이 강화됐기 때문이 아니라 중도세력의 지지 때문이었다.

  1997년 IMF 이후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계층갈등은 서서히 ‘세속형 이슈’로 부상하고 있는 듯하다. 이명박 정부가 정권 말기에 국민들이 체감할 만한 경제 살리기 성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현 정부는 중산층과 서민을 도외시한 채 오직 ‘부자만을 위한 정부’였다는 인식이 국민들 마음속에 광범위하게 퍼질 경우, 2012년 대선을 기점으로 빈부격차에 따른 계층갈등이 중대 이슈로 부상할 개연성이 크다.
 
  더구나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중산층의 규모가 가속화될 경우, 계층갈등은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새로운 균열 축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정치 再(재)편성’은 ‘정치체제에서의 급격한 변화’를 묘사하는 정치학 용어로, ‘실제 정치권에서 새로운 연합을 가져오는 힘의 도래’를 의미한다. 즉 다른 정당의 지배적인 연합을 전환시키거나 교착상태에 빠진 정치권을 새롭게 대체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치 재편성을 초래하는 핵심 요소는 이슈, 정치 지도자, 특정 정당의 지역적 또는 사회적 배경 기반의 변화, 정치체계의 구조 또는 규칙 등에서 획기적인 변화다.
 
  미국에서 가장 전형적인 정치 재편성은 193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루스벨트가 주도했던 뉴딜연합(New Deal coalition)이었다. 공화당 후버 정권下(하)에서 겪은 대공황의 참혹함 속에서 그동안 공화당을 지지했던 남부 백인, 지식인층, 노동자 조합, 가톨릭, 유대인, 서부 거주자들이 민주당 지지로 돌아섰고, 그 이후 이런 연합은 1960년대 말까지 수십 년 간 지속됐다.
 
  그렇다면 2012년에 한국 사회에서도 현재 유력한 大權(대권) 후보들이 자신의 지지기반을 뛰어넘어 외연을 확대하는 정치 재편성을 이뤄낼 수 있겠는가?
 
  현재 그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이들은 자신의 전통적 지지계층을 뛰어넘어 외연을 확대할 만큼의 견고한 비전과 정책, 이슈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민을 감동시키고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비전과 정책을 토대로 국민과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부의 주요 정책을 비판하면서 반사이익만 얻고 있는 실정이다. 즉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아니라 남을 통해서만 투영되는 반사체로서 지역·이념·계층을 뛰어넘어 정치판의 지각변동을 가져올 수 있는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각 정파 합종연횡의 네 가지 시나리오
 
  결론적으로 2012년을 앞두고 한국 정치의 재편성을 가져올 수 있는 대형 이슈와 이를 주도할 수 있는 정치 지도자가 부상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다만 세종시·개헌·남북문제 등을 둘러싸고 과거 대선 때와 같이 이질적인 정치세력들이 오로지 대권을 겨냥해 원칙 없는 合從連橫(합종연횡)을 전개할 개연성이 크다. 그 중심에 親李(친이)·親朴(친박)·민주당·親盧(친노)·진보 등의 정치세력이 존재한다. 이들이 주도할 수 있는 합종연횡의 시나리오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동서화합을 토대로 한국에서 최초로 영남세력과 호남세력이 연대하는 정치실험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朴槿惠(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대선 검증 과정에서 크게 흔들리고 유력 대권 후보를 찾지 못한 민주당이 친노세력에 밀릴 경우 이것이 가능할지 모른다.
 
  둘째, 친박과 이에 대항하는 모든 세력이 권력분산을 토대로 ‘反朴(반박) 대연합’을 만드는 경우다. 1997년 대선에서 YS가 알게 모르게 DJ를 밀어준 것과 같이 이명박 대통령은 퇴임 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반박 대연합’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
 
  셋째, 친박의 한나라당이 중심이 되는 보수세력과 진보대연합세력 간의 충돌이다. 현재로서는 보수에 정권을 뺏긴 진보세력들이 과연 대연합을 이뤄낼 것인가가 최대의 관심사다.
 
  孫浩哲(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2009년 12월 진보신당 주최 토론회에서 “反(반)MB 대연합은 이미 죽었고 이 같은 살해의 主犯(주범)은 민주당”이라는 극한 표현을 써 가며 丁世均(정세균) 대표를 공격했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진보운동은 위기”라고 단정한 뒤 “그 책임은 자유주의적 성향의 민주당과 친노세력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 진보진영도 함께 짊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진보세력의 미래는 민주당이 자신의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하고 민주대연합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넷째, 1987년 대선에서와 같이 국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각 세력이 지역과 이념을 매개로 多極(다극)체제를 이루는 경우다. 친이 대 친박, 민주당 대 친노, 민노 대 진보신당 등이 하나로 합치지 못하고 끝까지 대결할 경우 가능한 시나리오다.
 
  특히 친박이 현재와 같은 절대적인 힘을 갖지 못할 경우 가능한데, 그 시험대는 2012년 4월 총선에서의 성적표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 있다. 
    
  ‘국민통합’이 시대정신이다
 
  국민들이 격변의 2012년을 맞는 정치 지도자들과 정치권에 요구하는 것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꼼수 정치와 과거지향적 정치를 멀리하고 正道(정도)정치와 미래지향적 정치에 매진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치 지도자들은 첫째,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정치 아젠다를 주도하고 관철시켜야 한다. 金皓起(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시대정신을 “한 시대의 문화적 소산에 공통되는 인간의 정신적 태도나 양식 또는 이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가치의 집약”이라고 규정한다.
 
  지금까지 여론을 주도하는 정치권은 이념과 지역에 갇혀 국민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국민적 변화를 외면한 채 갈등과 대립만을 확대 재생산하고, 편가르기에 앞장섰다.
 
  2012년에 부각될 시대정신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 사회가 그동안 한 번도 이룩하지 못했지만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것이 시대정신이라면 아마도 그것은 국민통합,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兩性(양성)평등 실현 등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진보와 보수, 남과 북, 동과 서,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중앙과 지방, 남성과 여성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국민통합은 국민들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하는 아젠다가 될 것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한국 사회가 극심한 이념·지역·세대 갈등을 겪으면서 많은 국민은 2007년 대선에서 경제살리기 못지않게 국민통합을 선호했다. 이런 요구가 이념을 넘어 중도에 바탕을 둔 창조적 실용주의를 통해 국민통합을 구현하겠다는 이명박 후보가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국민의 기대는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촛불집회, 용산 참사, 미디어법 처리, 세종시 수정안과 4대강 살리기 등으로 빚어진 정치 갈등의 심화로 빛이 바랬다. 
    
  변혁적 리더십 필요
 
포퓰리즘 정치는 국민과 국가 전체에 독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사진은 세종시 원안고수를 주장하며 허수아비를 불태우는 공주·연기 지역 주민들.

  2008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 한국 사회가 아직까지 극복하지 못한 과제로 33.8%가 부정부패를 지적했다. 그 다음으로 빈부격차(28.9%), 이념갈등(12.2%), 지역분열구도(10.3%), 학벌 및 지역차별(9.6%) 순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정치 아젠다는 2012년에도 또다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둘째, 포퓰리즘의 유혹에서 벗어나 진정한 ‘변혁적 리더십’을 펼쳐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에서는 대선이 끝나면 갈등이 완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폭됐다.
 
  그 이유는 대선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선거 때 재미를 보려고 허황된 공약을 남발했기 때문이다. 집권 이후에는 이런 공약을 실천하기 위한 과정에서 여야 간에 극한 대립이 생겨나고, 심지어 대통령이 대선에서 국민에게 내건 공약을 포기하면서 엄청난 국론 분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대통령직을 걸고 쌀 개방을 막겠다던 김영삼 대통령의 공약은 우루과이라운드로 물거품이 됐다. 노무현 대통령이 약속한 행정수도 이전은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휴지조각이 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약속한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원안 고수는 ‘행정 비효율성’이라는 논리로 白紙化(백지화)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제 정치 지도자들은 순간적으로는 달콤할지 모르지만 국민과 국가 전체에 독이 되어 돌아올 수 있는 포퓰리즘 선거공약을 지양해야 한다. 특히 2012년 대선에 출마하는 후보들이 계층갈등을 정략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無限(무한)복지와 절대평등을 요체로 하는 南美(남미)의 ‘페론식 포퓰리즘’ 유혹에 빠져 들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국익을 우선하며 한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을 펼쳐야 한다. 이는 미래를 내다보고 국가의 정책목표를 설정해 과감하게 추진하는 국정능력을 겸비하지 못한 채 그때그때 발생하는 일만 처리하는 데 급급한 거래적 리더십(transactional leadership)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정치 지도자가 국가의 운명을 개척할 변혁적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강한 도덕성, 예리한 역사의식, 저항하기 어려운 설득력, 누구나 희구하는 미래의 비전,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상징성 등을 갖추어야 한다.
 
  정치 지도자가 변혁적 리더십을 행사하면, 국민과 지도자와의 관계는 승화되어 정치과정을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사회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국민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은 물론 국가가 지향하는 큰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국민의 에너지를 최대한 결집시킬 수 있다. 
    
  相生의 리더십 펼쳐야
 
  셋째, 배타적 감정을 버리고 포용과 相生(상생)의 리더십을 펼쳐야 한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을 전제로 한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보다 완벽한 통합(a more perfect union)을 위해 함께 매진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민주주의에서 상대방과 대화하고 타협을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진보와 보수 모두 완벽할 수 없다. 보수가 지향하는 가치가 ‘성장·효율·자율·경쟁·체제·안보’라면, 진보는 ‘분배·균등·투명·책임·민족·통일’의 가치를 지향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는 善(선)이고 상대방의 가치는 惡(악)이라는 극단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보수는 진보에 대해, 진보는 보수에 대한 배타적 감정을 버리고, 보수 입장에서 진보의 가치를, 반대로 진보 입장에서 보수의 가치를 수용하는 포용과 소통의 리더십을 펼칠 때 진정한 정치 선진화의 길이 열릴 수 있다.
 
  보수든 진보든 자신들의 외연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과 경쟁하는 정당이 先占(선점)하고 있는 이슈에 대해 무조건 배제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각에서 해결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정치 지도자들이 격동의 2012년을 앞두고 국가 운명을 개척할 리더십을 펼쳐 보이기 위해서는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읽는 통찰력을 갖추는 것이 급선무다.
 
  그 출발점은 非(비)생산적이고 국론 분열적인 이념논쟁의 늪에서 벗어나 유연성과 조화성이 살아숨쉬는 脫(탈)이념적 중도지향의 생활정치(life politics)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중도 선점을 위한 대담한 창조적 파괴를 시작해야 한다. 또한 오직 선거 승리만을 위해 정치이념과 노선, 正體性(정체성)이 다른 세력들과 원칙 없는 선거연합을 구축하려는 치명적인 유혹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戰時작전권 전환에 따른 韓美연합사 해체  한국 안보에서 그 어떤 것도 ‘韓美연합사’를 대체할 수는 없어

⊙ 韓美 동맹은 칼집, 韓美 연합사는 칼날
⊙ 2010년 외교·국방장관 회담에서 ‘모범적 전략동맹체제’를 구축한다면, 흔들리고 있는   연합사 체제의 회복과 재정비가능

金熙相
⊙ 1945년 경남 거창 출생.
⊙ 경복고, 陸士, 서울大 외교학과, 육군大 졸업. 미국 시펜스버그大 대학원 공공행정학 석사, 성균관大 사회과학대학원 정치학 박사.
⊙ 수도군단장, 육군본부 제1군 부사령관, 국방大 총장, 대통령비서실 국방보좌관,   비상기획위원장 역임.
⊙ 상훈: 보국훈장 삼일장·천수장·국선장.
⊙ 저서: <중동전쟁> <생동하는 군을 위하여> <한국적 군사발전의 모색> 등.
金熙相 한국안보문제연구소 이사장

<2009년 9월 21일 오후 서울 미군 용산기지 나이트필드 연병장에서 열린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이·취임식에서 신임 황의돈 부사령관이 부대 사열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월터 샤프 사령관.>

2012년은 북한의 이른바 ‘강성대국’의 문을 여는 해다. 한국과 미국, 러시아, 중국의 大選(대선)과 지도자 교체의 해이기도 하다. 하필 이런 때 한국 안보의 핵심적 支柱(지주)라 할 韓美(한미) 연합사가 해체될 예정이다.
 
  거의 全(전) 사회 지도층이 몸을 던져 반대했고, 900여만 명의 국민이 연합사 해체 반대 서명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우리 軍(군)의 젊은 간부들 중에는 “한국군의 작전 역량이 높아져 해체해도 괜찮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 용기와 자신감은 가상하지만, ‘연합사 해체’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작전적 역량 제고로 극복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전략적 문제다.
 
  그렇다면 “해체는 하되 現(현) 체제의 가치와 효율성을 그대로 유지하면 될 것 아닌가”라고 한다는 말도 들린다. 지금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연합사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원천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기대다. 지휘체계별로 다양한 협의기구를 만들다 보니 너무 복잡하고 소요 인력도 크게 늘어 당황하고 있다고도 한다.
 
  어떤 전문가는 “한국군이 2012년까지 독자적 작전역량을 갖춰나가고 최선을 다해 北核(북핵) 문제를 해결하되, 여의치 않다고 판단되면 전작권 전환을 6개월 정도 앞둔 시점에 한미 양국 頂上(정상)이 만나 전환 시기를 조정하면 된다”는 주장을 한다고 한다.
 
  우리가 희망한다고 미국이 아무 때나 만나주고 조정해 줄지도 의문이지만, 지금처럼 조직과 시스템이 계속 바뀌다 보면 2012년에는 설사 미국이 합의해 주어도 연장하거나 되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다. 아니, 원래 미래가 없는 조직은 투자도 안되고 인재도 모이지 않는 법이니 연합사는 일찌감치 허울만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 
    
  연합사,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핵심체
 
  굳이 2012년까지 기다려 보지 않아도 알 사람들은 다 안다. 미 해병 지휘참모 대학의 브루스 벡톨 교수는 “현재 한국군의 군사태세와 한국 정부의 군비 투자능력에 비추어 한국군이 2012년까지 핵무장을 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반대와 우려가 하도 거세니까 많은 보완 약속을 했지만 대규모 국방투자는 진작 물 건너갔고, 아무도 보장할 수 없는 정치적 修辭(수사)들만 남지 않았는가? 2009년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를 할 때 미국의 약속도, 약속은 약속일 뿐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사 해체작업은 지금도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국가 간의 합의사항이라 되돌릴 수 없다면서 盧武鉉(노무현) 정부가 깔아놓은 궤도를 따라 그대로 질주하고 있는 모양새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함부로 휘둘러 대며 긴장을 높여온 2009년에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전작권이 전환돼 연합사가 해체되면 안보 위기가 풍랑처럼 닥쳐올 것”이라고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연합사가 해체됐다고 가정해 보자. 벡톨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야기될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닐 것이다. 냉전시대 자유세계 총체적 전력(Total Force)의 ‘局地(국지) 부분 전력’으로 존재해 왔던 한국군의 한계를 비롯한 미흡한 작전 역량과 ‘작전지휘 체계의 2원화’ 같은 것들은 오히려 작은 문제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이 적지 않다. 연합사 해체는 당장 한국의 가장 강력한 억제력을 상실케 해 북한의 誤判(오판)을 자초하거나, 한반도의 불안정성을 높이게 될 것이다. 연합사는 한미동맹의 튼튼함과 그 동맹이 세계 최강 미국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현실체요, 그 상징성이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한강의 기적을 뒷받침해 왔고, 지금도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핵심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과 親北(친북)세력들이 연합사 해체에 그렇게 많은 공을 들여온 것인데, 연합사가 해체되면 일종의 ‘승리의 神託(신탁)’이 돼 저들의 기세는 한껏 높아지는 반면, 한국사회의 발전은 점차 긴장 속에 얼어붙게 될 것이다. 연합사가 없었더라면 2009년 북한의 도발에 우리 사회가 그렇게 의연할 수 있었을까? 
    
  팽창적 中華주의 대비하려면?
 
  한국의 미래, 특히 한반도 자유통일과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恒久的(항구적) 생존에는 일종의 災殃(재앙)이 될지도 모른다.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발생할 엄청난 정치·경제·군사적 所要(소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나라, 또 장기적으로 팽창주의적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한미 연합사는 그 양호한 통로요, 관리기구이며, 존재 그 자체로 효용성이 매우 높은 기구이다.
 
  예컨대 장기적으로 세계사의 흐름이 오늘날과 같다면 북한이 중국의 배타적 영향권하에 드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 살아남는 데 연합사 체제를 튼튼히 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보다 한미연합사는 한미 군사동맹 체제의 핵심 연결고리다. 전일 어느 연합사령관이 내게 “연합사가 없었더라면 10년 햇볕 속에 한미동맹 자체가 진작 녹아 내렸을지 모른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동맹이 ‘칼집’이라면 연합사가 그 ‘칼날’이다. 연합사 없는 한미동맹의 의미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연합사는 한반도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이 되고 중국이 자유민주화하기 전까지는, 특히 팽창주의적 中華思想(중화사상)이 존재하는 한 함부로 대체할 수 없는 국가의 ‘안전장치’다.
 
  많은 전문가가 연합사 해체가 자칫 한미동맹과 한국 안보태세의 基軸(기축)을 흔들고, 한반도 자유통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장차 자유대한이 살아남기 어려운 ‘함정’을 파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하고 있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체제 유지의 한계상황에 몰려 있는 북한이 핵무기와 간접침략으로 우리를, 싫든 좋든 자유통일을 서두르지 않으면 적화통일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외통수길’로 내몰고 있는 것이 오늘 한반도의 모양새다. 아마 ‘북한 급변사태 가능성’은 그 계기가 될 것이다.
 
  반면, 북한 핵 폐기는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美北(미북) 핵 대화가 재개되고 있지만, 원자바오(溫家寶)의 북한 방문도 ‘핵 폐기보다는 金正日(김정일) 체제의 안전을 우선’하는 중국의 속내만 再(재)확인시켜 주었을 뿐이다. 중국의 거침없는 행보에서는 오래 숙성된 팽창주의적 중화사상의 위협마저 느껴진다.
 
  더욱이 오바마 대통령은 이런 중국에 인권과 민주주의 메시지조차 제쳐놓은 채 협력만 강조하고, 힐러리 미 국무장관은 2009년 11월 19일 북한과의 ‘평화협정’까지 거론했다. ‘평화협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熟考(숙고)해 보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더할 수 없는 도전과 기회가 함께 混在(혼재)하고 있는 때요, 과거 어느 때보다 튼튼한 한미동맹이 소중한 때다. 그것도 구두 약속이나 문서에 의한 형식적 동맹이 아니라, 연합사로 연결된 오늘의 한미 군사동맹 체제처럼 구조적인 것이어야 한다. 
    
  연합사 해체를 우려하는 워싱턴 政客들
 

2009년 10월 22일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제41차 한미안보협의회의(SCM)를 마친 김태영 국방부장관(오른쪽)과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이 기자회견을 마무리하며 악수하고 있다.

  현실화돼 가는 ‘북한 핵위협에 대한 대비’나 ‘자유통일번영’과 같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도전과 과제들은 너무 크고 복합적이다. 이런 시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연합사를 그대로 해체할 수 있겠는가?
 
  물론 미 의회의 태도와 펜타곤(국방성)의 분위기에 비추어 재검토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는 “아직은 적절한 시점이 아니다”라고 말했고, 마이클 그린 前(전)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국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재검토 필요성”을 강조했다. 리처드 롤리스 전 국방장관 보좌관은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문제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이처럼 우리 못지않게 연합사 해체가 가져올 결과를 우려하며 재검토해야 한다는 적지 않은 전문가들의 말을 들으면 워싱턴보다는 오히려 한국의 非(비)전략적 안목과 소극적 의지가 더 문제인 듯싶다.
 
  때마침 2009년 11월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모범적인 21세기 한미 전략동맹’으로의 발전을 다짐하고, 이를 위해 2010년 한미 외교·국방장관 회담을 개최하기로 했다.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무릇 동맹관계란 공통의 위협을 전제로, 공통의 이익과 이해를 위한 상호지원 관계다. 한미 동맹도 마찬가지다. 베트남戰(전) 이래 미군은 줄곧 한국군의 뛰어난 국제적 임무수행 역량과 미군과의 연합작전 역량을 높이 보고 크게 기대해 온 반면, 우리는 북한의 도발과 주변국의 위협을 억제하는 데 연합사보다 더 효과적인 장치가 없다고 생각해 왔다. 오늘 한미 간에 동맹 차원에서 서로 주고받을 것들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전략동맹 차원에서 접근하면, 한국 안보의 핵심적 문제를 비켜 갈 수는 없는 일이고, 연합사 해체 문제는 자연스럽게 재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없던 것도 만들었는데, 그리고 연합사 해체가 장기적으로 건전한 한미 동맹 발전에 障碍(장애)가 되고 연합사 ‘해체’가 ‘유지’하는 것보다도 미국의 경제와 안보에 더 큰 부담이 되는 측면도 적지 않은 터에 재검토하도록 하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겠는가?
 
  지금 당장 미국 정부를 설득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총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적극 시행해야 한다. 활용 가능한 한미 민간연구소와 단체, 그리고 재검토해야 한다고 적극 나서는 양국의 전직 고위 관계자나 전문가도 하나 둘이 아니다. 때문에 합리적 설득 논리를 개발하고 워싱턴 주요 언론의 관심과 공감을 이끌어내면, 미 정부와 의회를 움직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그런 바탕 위에서 2010년 외교·국방장관 회담에서 문자 그대로 ‘모범적 전략동맹체제’를 구축한다면 흔들리는 연합사 체제의 회복과 재정비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래야 자유대한의 미래가 있을 것이다.⊙

 

체제위기의 벼랑에 선 북한의 2012년  ‘강성대국’ 건설과 ‘쇠락’의 갈림길

⊙ ‘미래 낙원 건설’을 제시하는 대중조작은 모든 독재자의 전매특허.    

     독재자들은 교묘하게 대중의 지지를 유도하여 자신의 권좌를 위협하는 경쟁자들을 제거
⊙ 강성대국의 門은 21세기가 아니라 19세기로 열려 있어

南成旭 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
⊙ 1959년 서울 출생.
⊙ 고려대 국어교육과·경제학과, 고려대 대학원 경제개발학 석사. 미국 미주리주립대 대학원  응용경제학 박사.
⊙ 한국북방학회장, 국가정보원 연구위원, 남북경제연합회 부회장,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외교통일안보분과위 자문위원 역임.
⊙ 現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남북경제연구소장.
⊙ 저서: <김일성의 북한><북한의 체제전망과 남북경협><현대 북한의 식량난과 협동조합 개혁> 등.

<2009년 말 ‘100일 전투’를 독려하는 북한의 선전포스터.>

시대 구분은 역사학자들의 고유 영역이다. 과거를 진단하고 역사의 교훈을 찾는 과정에서 시기를 가르는 것은 불가피하다. 역사 시기 구분의 주요 기준은 대부분 왕조 교체나 혁명, 전쟁 등 격변적 사건이다.
 
  반면 미래를 예견하는 시대 구분은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특이한 접근방법이다. 유사 종교의 혹세무민적 지구종말론을 제외하고는 특정시점에 대한 미래전망은 매우 제한적이다. 1990년대 말, 2000년이 도래하면 컴퓨터의 인식 시스템이 제대로 인지하겠는가라는 기술적 혼란 방지 관점에서 다가올 미래에 관심이 집중된 사례가 있다.
 
  이제 새로운 시점이 東北亞(동북아) 국제정치 질서의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2012년은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몇 개의 행사와 사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새로운 체제의 도래를 예측하는 기준이 될 것 같다. 한국의 總選(총선)과 大選(대선), 4월 17일 韓美(한미) 간 戰時(전시)작전권의 이양, 미국의 대선 및 중국 후진타오 지도부 교체 등 큼지막한 정치 일정 등이 예정되어 있다.
 
  다양한 국제정치적 일정이 맞물리면서 일부 성급한 전문가들은 ‘2012년 체제’라는 용어까지 구사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2012년 체제 화두의 중심에는 동북아 정치질서의 이단아인 북한이 있다.
 
  북한은 최근 들어 어느 동북아 국가보다도 2012년 강성대국을 공개적으로 반복해서 강조한다. 마치 그때가 되면 사이비 종교집단들이 주장하듯 갑자기 북한에 천국이 도래할 것 같은 분위기다.
 
  천국 건설의 이면에는 현실의 고단함이 전제되어 있다. 강성대국 비전은 ‘고난의 행군’으로 지칭되는 처절한 생존게임에 매몰된 사회에 새로운 메시아적 희망을 제시하여 인민들을 통제하고 동원하는 정치노선이자 통치담론이다.
 
  강력한 미래 지향적 구호는 사회주의의 전형적인 인민통솔 전술이다. 대중동원(mass mobilization)을 통해 통치력을 공고히 하고 지도자의 건재를 과시하는 리더십에서 훗날을 선전하는 캐치프레이즈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과거 스탈린이나 마오쩌둥(毛澤東) 역시 이데올로기로 포장한 밝은 미래를 제시하며 인민들의 궁핍과 곤궁을 무마시켰다. 특히 미래 특정시점에 난관이 일거에 해소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미래 낙원 건설을 제시하는 달콤한 대중조작은 모든 독재자의 전매특허다. 독재자들은 교묘하게 대중의 지지를 유도하여 자신의 권좌를 위협할 수 있는 경쟁자들을 제거한다.
    
  이밥에 고깃국, 기와집과 비단옷은 가능할까?
 
  소련 공산당은 1960년대 초, “1980년이 되면 돈도 없고 부족도 없는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게 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중국도 유사한 상황이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마오쩌둥은 인민들에게 “3년 만 열심히 일하면 만년 동안 아무 문제없이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1980년 소련은 더 어려워졌고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은 100% 실패로 돌아갔다. 1957년 권력기반이 약화된 마오쩌둥은 인민공사를 중심으로 하는 대약진운동을 전개하지만 처절하게 실패한다.
 
  대중을 선동하는 그의 선택과 이용방법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래 세상을 떠나는 1976년까지 13억 중국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는 비법이었다. 마오쩌둥은 명분을 세우는 데 능숙했다. 명분 축적은 대중지지 획득에 매우 중요한 통치수단이다.
 
  북한체제의 대중 동원은 1950년대 마오쩌둥의 통치 리더십을 연상시킨다. 金日成(김일성)과 金正日(김정일)의 통치이데올로기는 스탈린 유일독재체제에 민족주의와 유교의 가족주의가 포장됐다.
 
  북한체제는 주민들의 지속적인 내핍과 인내를 강요한다. 현재 북한은 김정일의 건강 악화에다 北核(북핵) 문제로 인한 국제사회의 압박 등으로 체제 위기(regime crisis)에 직면해 있다.
 
  구조화되고 만성적인 경제난은 새로운 비전 제시를 요구하고 있다. 2009년 12월 화폐개혁은 심각한 북한 경제난의 상징이다. 심지어 2002년 7월 경제관리개선조치 당시 이미 화폐개혁을 준비했을 정도로 진퇴양난이다. 지난 1960년대 등장한 “이밥에 고깃국, 기와집과 비단옷”으로 상징되는 자력갱생의 경제 시스템은 거덜이 난 만큼 이를 대체할 새로운 통치이데올로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목표 시점은 지도자의 초능력과 신비감이 결합된 시기다. 북한은 소위 5년, 10년 등 꺾어지는 해의 별난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주민들에게 목표 초과달성과 독려를 위해 중간 시점을 부르짖는다. 그런 측면에서 2012년은 북한 당국에 체제 수립, 지도자의 탄생을 상징하고 적당한 시간이 남아 있다는 기간을 활용하여 재차 주민들을 몰아붙일 수 있는 이상적인 시점이다.
 
  특히 1912년 출생인 김일성과 1942년 출생인 김정일이 각각 100세와 70세를 맞는, 양자를 포괄하는 절묘한 해라는 점에서 과거 권력과 현재 권력을 동시에 상징하는 때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1983년생인 김정은의 생일을 갑자기 앞당겨 1982년으로 수정 주장하는 것은 2012년에 30세에 도달하는 차세대 지도자의 신비감을 강화하여 3대 세습의 정당화를 선전하기 위한 조치다. 
    
  강성대국이 나오게 된 시대적 배경
 
  숫자는 북한 통치 방식의 중요한 상징 도구다. 심지어 숫자를 보면 북한이 보인다고 할 정도다. 4월 15일, 2월 16일은 지도자의 탄생일로서 인민들은 이날을 생일로 신고할 수 없다. 이제 부각되는 새로운 숫자는 2012다.
 
  2012년 강성대국론은 두 가지 화두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강성대국 부분이다. 북한은 修辭(수사)와 구호의 나라다. 수사와 구호를 관찰하면 정책과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1980년대 이전의 話頭(화두)는 국가의 정체성과 독립을 지킨다는 주체사상이었다.
 
  1980년대를 관통하는 주제는 대중운동과 反(반)제국주의였다. 1990년 전반은 우리식 사회주의였고, 1995년 선군정치가 등장했으며, 1998년 들어 처음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하고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강성대국을 주창했다.
 
  1998년 9월 제10차 최고인민회의는 헌법 일부를 재차 수정하면서 故(고) 김일성을 ‘영원한 지도자’로 추대했다. 김정일은 새 사회주의 헌법이 인정하는 국가 최고의 직책인 국방위원장에 재선출됐다. 당시 <노동신문>은 ‘당 지도부의 위대한 령도하에 강성대국을 건설하자’는 표현으로 강성대국이란 용어를 공식적으로 등장시켰다.
 
  이후 강성대국은 종종 ‘부흥강국’이나 ‘강성부흥’과 같은 말과 혼용됐다. 북한이 정의하는 강성대국은 “국력이 강하고 모든 것이 흥하며 인민들이 세상에 부럼없이 사는 나라”다(윤현철 <고난의 행군을 낙원의 행군으로>, 평양출판사, 2002). 정치·군사와 경제강국 달성이 국정지표로 공식화된 것이다.
 
  1998년부터 사회주의 강성대국의 국정지표는 1980년 말 이후 침체와 나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경제를 회복시키고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 이후 이행이 지지부진한 북핵문제를 타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제시됐다.
 
  다음은 2012년이 강조되기 시작한 시대적 배경을 분석한다. 북한이 공개적으로 ‘2012년’을 주창하고 나선 것은 2007년 11월 30일 평양에서 개최된 전국지식인대회다. 노동당 중앙위원회 최태복 비서는 “2012년은 김일성 동지의 탄생 100돌이 되는 뜻깊은 해로서 2012년까지는 강성대국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2년의 의도
 
  이후 북한의 각종 매체는 2012년을 모든 행사나 정책에서 후렴처럼 강조했다. 2008년 신년 공동사설에서도 “2012년에는 기어이 강성대국의 대문을 활짝 열어놓으려는 것이 우리 당의 결심이고 의지”라고 재확인했다.
 
  북한의 정책을 우회적으로 홍보하는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2008년 2월 14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2년을 이른바 ‘강성대국’ 달성의 해로 정하는 “결단”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김정일이 지난해 현지지도를 계속하던 중 “조국(북한)이 고난의 길로부터 낙원의 길로 들어섰으며 강성대국으로 최후 돌격전을 위한 시기가 성숙했음을 통찰”하고 “2012년을 향한 역사적인 결단을 내렸다”고 전했다.
 
  조선신보는 김정일이 2007년 말 한 해를 결산하면서 “2008년을 흥하는 해, 비약하는 해가 되게 하자”, “우리 모두 일을 많이 하고 공화국(북) 창건 60돌을 맞는 승리의 광장에서 만나자”고 말하고 “새해의 휘황한 설계도”를 제시했다고 소개했다.
 
  신문은 이날 다른 기사에서도 김정일이 “2012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자”고 “호소”했다며 “2008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기 위한 새로운 공격전이 시작된다”고 했다. 신문은 또 김정일이 지난해 여러 경제 부문을 현지지도하면서 “이제는 우리가 확고히 낙원의 길에 들어섰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북한 당국의 2012년 강조 의도는 분명하다. 2002년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경제개혁은 실패했고,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북·미 간의 이견으로 미국이 공급하던 중유 50만t은 중단됐다. 한국이 건설 중이던 경수로 공사도 중지됐다. 2006년 1차 핵실험 이후 국제사회의 제재는 강화되고 있었다. 6자회담도 북한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2007년 겨울은 북한으로서는 새로운 동력이 필요한 시기였다. 새로운 슬로건으로 인민들을 다독거리고 체제유지의 명분이 절실했다. 결국 북한은 전가의 보도로 2012년 카드를 집어들었다. 2012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근로에 매진하자는 의미다. 2012년을 내세워 현재를 통제하고 인민들을 지도부의 방침에 순응하고 복종케 하는 선전선동 전술이다. 미래와 현재를 오버랩시킴으로써 현실의 고단함에 미래의 청사진을 포장하는 심리전이다.
 
  이제 김정일의 표현대로 ‘휘황한 설계도’로 제시된 2012년 강성대국의 모습과 그 실현 가능성을 진단해 보자.
 
  2012년까지 타임테이블에는 정확하게 2년이 남아 있다. 우선 경제강국 건설 측면에서 접근하자. 북한은 2009년 노동력 동원에 기초한 150일 전투와 100일 전투를 공격적으로 전개했다. 150일 전투는 목표 대비 112%를 달성했다고 선전했다. 북한 선전매체들은 김정일이 “빨치산의 아들”이어서 “전투형식을 제일 좋아한다”며 그의 150일 전투 지휘를 “정신은 백두의 공격정신, 전법은 빨치산의 축지법, 전투형식은 현지지도 강행군”이라고 표현했다. 
    
  점점 심각해지는 경제난
 
  특히 노동신문은 김정일이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면서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를 주장할 때부터 “앞을 훤히 내다보시며 150일 전투 개시의 시점까지 생각하고 있었다”고 선전했다. 노동신문은 김정일이 “150일에로 갑시다”라는 말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할 때도 “150일에로 갑시다”라고 말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이 결여된 단순 노력동원(labor-intensive approach) 방식의 접근은 한계가 있다. 속도전을 강조하지만 속도를 낼 만한 사업을 찾기 어렵다. 가을 들판의 수확도, 건물 공사도 수작업이 대다수다. 서울에서 1명의 기술자가 처리하는 포클레인 작업에 수십 명씩 매달린다. 그나마 노동력이라도 보탤 일거리조차도 흔치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최근 일부 중동국가들의 대북 소액투자가 진행되고 있으나 鳥足之血(조족지혈)이다. 최근 들어 2012년 강성대국을 앞두고 평양시내의 살림집(아파트) 건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나 자본 부족으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해외동포 사업가를 유치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중국에서 제공하는 準(준)원조성의 지원 외에는 소비재 생산을 획기적으로 늘리기는 어렵다. 현재 소비재 시장의 70%는 중국산이다. 먹는 문제 해결 역시 어렵다. 2009년 식량 생산량은 수해와 냉해로 평년작 이하인 380만t 내외로 예상되고 있다. 식용과 종자용을 합한 최소 소요량인 500만t에 부족량은 100만t을 상회한다. 2010년 상반기 외부의 대규모 지원 없이는 대규모 기근을 면하기 어렵다.
 
  전체 북한 주민들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800만명 정도가 심각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는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의 보고가 계속되고 있다.
 
  북한 식량난은 총체적인 경제난의 결과다. 농업은 비료, 농기계, 농약 및 수리 관개 시설 등 일반경제 여건과 토지와 노동력이 결합된 종합산업이다. 일부 열대기후 국가를 제외하고는 제조업이 부진한 국가가 농업 생산량을 단기간에 증가시키기는 어렵다. 2012년에 농자재 투입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기는 불가능하다. 남측에서 비료와 농약 등을 제공하지 않으면 해결은 요원하다.
    
  화폐개혁 카드까지 꺼내
 

2009년 4월 북한의 로켓 발사에 대해 북한은 ‘150일 전투의 신호총성’이라고 선전했다.

  북한은 2009년 11월 30일 화폐개혁을 전격 시행했다. 12월 4일 <조선신보>는 “11월 30일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은행이 발행한 새 화폐와 지금까지 써오던 낡은 돈을 바꾸어 주는 화폐교환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북한의 화폐개혁은 화폐경제와 시장경제의 기능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반시장적 정책이라는 점에서 長考(장고) 끝에 둔 자충수다. 화폐개혁의 의도는 ▲시장경제에 대한 통제 강화 ▲인플레이션 압력 해소 ▲재정역량 강화의 목적이다. 단기적으로 화폐량 부족에 따른 불황형 경제침체, 달러라이제이션(dollarization) 현상의 심화, 시장기능 약화로 인한 생산 감소, 빈곤층의 생활난 심화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다.
 
  화폐개혁은 당국이 인민에 대한 통제 강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번 조치로 인플레 압력 감소, 재정능력 확보 및 시장경제에 대한 강한 통제력 회복 등의 정치적 이익을 단기적으로 챙길 것이나 생산 감소와 주민들의 심리적 불만 확대 등의 소모적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다.
 
  화폐개혁 조치는 당국이 시장경제와 사회주의적 통제경제 사이에서 여전히 갈등하고 있으며, 시장은 미국의 군사제재보다 두려운 존재라는 것을 상징한다. 화폐개혁보다는 공급을 증가시키기 위해 자본시장을 개방하는 금융과 투자개혁이 필요한 시점이었으나 북한은 역설적으로 비 올 때 인민들의 우산을 뺏는 퇴행적 정책수단을 선택했다. 경제를 시장보다는 정치논리로 해결하려는 정권의 한계다.
 
  다음은 군사강국 건설이다. 북한은 2009년 4월 5일 장거리 로켓 발사 이후 “인공지구위성 광명성 2호의 발사와 축포의 불야성으로 전체 인민의 사기와 기세를 하늘을 찌를 듯” 높인 후 “마침내 150일 전투의 신호 총성”을 울린 것이라고 말해 장거리 로켓 발사의 대내용 의미를 부각시켰다.
 
  강성대국에서 군사력 증강은 핵심부분이다. 북한은 2012년 강성대국에서 플루토늄 핵무기 개발을 완성하고 농축우라늄 방식의 핵무기 개발도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2009년 9월 4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폐연료봉 재처리로 추출된 플루토늄이 무기화되고 있다. 또한 우라늄 농축실험이 성공적으로 결속(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며 국제제재 중단을 압박한 바 있다.
 
  외부 탐지가 어렵고 핵실험이 불필요한 우라늄 방식의 핵무기는 국제사회에 엄청난 위협이 될 것이다. 이외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개발을 통해 핵무기에 대한 대미 위협을 증폭시킬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치군사 强國(강국)과 對美(대미) 평화협정 체결이다. 북한으로서는 2012년 강성대국 진입에 앞서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결정적인 목표다. 북한은 2009년 8월 31일 평양방송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는 문제는 무엇보다 미국이 우리 공화국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버리고 朝美(조미) 사이에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해결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최근 평양 입장에서 북·미 간 최대 화두는 평화협정이다. 
    
  19세기로 열린 강성대국의 門
 
  2009년 12월 8일 보즈워스 특사의 방북 당시에도 평화협정은 북한의 한결같은 요구사항이다. 전쟁이 끝난 지 57년이 지난 시점에서 정전체제를 종식하고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는 태도는 매우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치명적인 핵무기 보유다. 2007년 말 북한 뉴욕대표부는 미국에 “우리를 인도처럼 대우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1974년 핵실험에 성공하여 일시적으로 제재에 직면했지만 일정 시점 후 관계가 정상화된 인도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핵무기를 보유한 상태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유엔 안보리의 각종 제재를 풀면서 북·미 국교정상화를 하겠다는 것이 속내다.
 
  이른바 북한 2012년 구상의 이상적인 모습은 핵무기를 보유한 상태에서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핵무기 군축협상을 통해 미국과 한국으로부터 엄청난 경제적 보상을 받아 경제적 곤궁을 해결하면서 김정은 후계체계를 구체화한다는 복안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북한이 2012년에 열려는 강성대국의 문은 21세기가 아니라 19세기로 열려 있다. 역사는 특정국가가 군사적 위협으로 국가목표를 일시적으로는 달성하지만 중장기적인 시점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특히 독재국가나 강대국의 흥망은 내부 모순에 좌우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북한이 당면한 내부 모순은 자체만이 해결할 수 있다. 북한의 딜레마는 핵을 포기했을 때 체제유지와 외부의 경제적 지원 여부일 것이다. 김정일 입장에서 핵을 포기했을 때 3대 세습이 가능하겠는가가 최대의 난제다. 세습 이외에 다른 리더십의 교체는 상상할 수 없다.
 
  선택의 시간은 2년 남았다. 2012년이 종착역은 아닐 것이며, 북한은 새로운 시점을 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별로 없다. 선택은 빠를수록 바람직하다. 남은 기간 동안 평양시내 살림집을 몇 채 더 건설하고 공사가 중단된 102층 류경호텔 외벽에 유리를 붙인다고 해서 강성대국이 되지는 않는다. 근본적인 엄중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김정일이 비핵화 없이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으면서 빈곤 속에 강성대국을 지향할 것인지, 비핵화하에 국제사회의 경제적 지원을 수령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2012년이 북한이 진정한 강성대국의 문을 여는 해인지, 쇠락과 쇠퇴의 길로 추락하는 해인지는 전적으로 평양에 달려 있다.⊙

 

미국에서 본 2012년의 한반도  韓美 FTA, 2010년 내에 반드시 통과시켜야

⊙ 北核 문제는 韓美관계 갈라 놓을 수 있는 불씨. 2012년 이전에 北核에 대한 뚜렷한 성과 도출해야
⊙ 미국은 전작권 전환 예정대로 진행할 것. 이 경우 한미연합사(CFC)에 버금가는 조직 창출에  초점을 맞춰야

李河遠 朝鮮日報 정치부 기자  (may2@chosun.com)

<2009년 12월 1일 미국의 새 아프가니스탄 정책을 발표하기 위해 뉴욕 주 웨스트포인트의 육군사관학교를 찾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육사 생도들에게 환영을 받고 있다.>

2012년은 한반도 안팎의 중요한 정치적 행사가 총 집결된다는 의미에서 벌써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 ‘2012년 체제’에서 남북한은 그 어느 때보다 미국의 국내정치와 깊은 함수 관계를 갖게 될 전망이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기록을 세우며 2009년 갈채를 받았던 버락 오바마 美(미) 대통령은 2012년 초부터 再選(재선)을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에 착수하게 된다.
 
  미국의 현직 대통령은 거의 예외 없이 대통령 후보로 다시 지명돼 왔다. 하지만 당내 정치적 기반이 약한 그로서는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고, 정권을 잃고 절치부심해 온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와 맞서야 한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오바마 대통령은 2012년의 모든 목표를 11월 大選(대선)에서의 재선에 두고, 국내 정치는 물론 외교 문제를 풀어 갈 것이 확실시된다.
 
  현재로선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 전망은 불투명하다. 미국에서 그의 지지율은 2009년 12월을 기점으로 모든 여론조사에서 50%를 밑돌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염증은 물론, 10%를 넘는 실업률과 경제난이 가장 큰 원인이다. 수십 년째 계속되고 있는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대선 직전에 현직 대통령이 51% 이상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재선하기 어렵다는 통계도 있다.
 
  2009년 하반기 그가 가장 크게 주력해 온 건강보험 개혁안은 통과되더라도 보수층의 반발을 비롯한 후폭풍이 예상된다. 이어 그가 추진하려고 하는 기후변화와 이민개혁은 엄청난 예산이 수반돼 반발하는 이들이 많다.
 
  주류 백인사회에서는 흑인 대통령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하고 있다.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가 2009년 11월 오바마의 대선 승리 1년을 맞아 외교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그의 평균 성적은 B- 로, 2009년 취임 직후인 4월 같은 조사 때 얻은 B+에 비해 두 단계 하락했다.
 
  이런 오바마에게는 2010년 11월 실시되는 미국의 ‘중간선거’가 1차 관문이다. 435명의 하원의원 전원과, 33명의 상원의원, 39명의 주지사를 다시 뽑는 이번 선거에서 오바마는 고전이 예상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상원에서의 민주당 우세가 뒤바뀔 가능성은 없지만, 하원의 경우 지금처럼 오바마 대통령의 인기하락이 가속화된다면 공화당이 다수당이 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공화당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재정 적자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 예산을 늘리려는 오바마 행정부에 대해 비판적이다. 하원에서 의석수가 역전될 경우,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하는 개혁은 힘을 잃기 쉽다.
    
  對北정책은 ‘원칙을 지키는 단호한 대응’
 
  오바마 대통령이 2009년 말 아프간에 미군 3만명 증파 계획을 밝히면서 철수시점을 2011년 7월로 제시한 것도 그의 중간선거와 재선 전략과 관계가 있다. 9년째 접어드는 ‘인기 없는 전쟁’이 2012년 대선에서 주요 의제가 되는 것을 그는 바라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미국민의 복지와 관계없는 의제들은 가급적 그의 책상에 올라오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2012년 체제 중 가장 먼저 논의돼야 할 문제는 北核(북핵)이다.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후의 미·북관계는 ‘원칙을 지키는 단호한 대응’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의 對北(대북)정책은 북한이 1993년 1차 북핵 위기를 일으킨 후 가장 단호한 것이었다. 그의 대북 인식은 2009년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으로 상당한 불신감을 가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동안 부시 행정부와 不和(불화)했던 베네수엘라, 쿠바와는 상당한 관계개선이 이뤄졌지만, 유독 북한만이 오바마 행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북아의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에 대해 불쾌해 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2009년 4~5월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에 대해 유엔 안보리 제재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대북결의 1874호’를 가동시켰다. 백악관에 대북제재 조정관을 신설해서 중국과 북한의 주요 활동 무대인 동남아 국가에 강력한 대북 조치를 촉구, 적지 않은 효과를 이끌어 냈다.
 
  북한의 무기를 싣고 항해 중이던 강남호가 寄港地(기항지)를 찾지 못해 回航(회항)하는 일도 벌어졌다. 북한이 2009년 8월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초청했음에도 불구하고, 4개월 만에 단출한 규모의 대표단을 보내 “미·북 양자회담은 6자회담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것도 상징적이었다.
 
  2012년 4월 17일로 예정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은 오바마 행정부의 북핵 문제에 대한 대응과 긴밀히 관련돼 있다. 미국은 현재로선 전작권 문제의 연기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는 2009년 10월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의 발언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게이츠 장관은 서울에서 개최된 한미연례안보회의(SCM)에서 “나는 한미 양국이 (2012년 4월) 전시작전 통제권 전환의 시한(데드라인)을 맞출 것으로 분명히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작권 거론은 사치
 
  게이츠 장관의 이 발언은 전작권 전환 문제와 관련한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 인사들의 언급 중 가장 강한 것으로, 이 문제가 再論(재론)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실제 2009년 SCM에서도 전작권 전환과정을 점검하고, “2012년 4월 17일 전작권 전환에 대한 양측의 의사를 재확인했다”는 문구가 포함됐다.
 
  오바마 행정부는 특히 미군 희생자가 1000명에 육박하는 아프간 전쟁을 수행 중인 상황에서 동맹국이 제기하는 전작권 문제는 사치스럽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한미 관계의 아킬레스건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다. 2007년 체결된 한미 FTA는 미 의회에서 통과 여부가 불확실하다.
 
  워싱턴 DC의 외교소식통들은 “2010년 4~5월까지 오바마 행정부가 한미 FTA 비준안을 제출하지 않으면, 사실상 2010년 통과가 불확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미 연방의회 의원들이 중간선거 때문에 2010년 8월 이후에는 사실상 의회활동이 休止期(휴지기)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2010년에도 통과되지 않을 경우, 한미 FTA는 모멘텀을 잃고 폐기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한미 양국이 추진해 온 한미 FTA가 통과되지 않은 채 2012년을 맞게 될 경우, 적지 않은 內傷(내상)을 입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2012년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2012년 전에 북핵 문제에 대해 뚜렷한 성과를 도출해 내야 한다. 북핵 문제는 언제라도 한미관계를 갈라 놓을 수 있는 ‘불씨’가 될 수 있다.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낮아 보이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북핵 문제에 대해 적당히 타협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오바마 행정부보다 훨씬 더 강경했던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초반에는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 중의 하나로 부르며 강경 정책을 취했지만, 하반기로 갈수록 북한과 타협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2008년 10월에는 퇴임을 불과 3개월 앞두고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 조치를 단행했다. 이라크 전쟁에서 4000명이 넘는 미군이 사망하면서 수렁에 빠지고, 다른 외교정책에서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북핵 문제에서라도 성과를 거두겠다고 유화적인 자세를 보인 것이다. 
    
  동맹체제 더욱 강화해야
 
  하지만 북한은 보란 듯이 2007년 2·13 합의에 따른 重油(중유) 100만t을 대부분 챙기고, 영변 핵시설을 재가동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외교분야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을 때, 북한이 시간벌기용으로 유화적인 조치를 제안하고 나오면 이는 한미관계의 갈등으로 연결될 소지가 있다.
 
  전작권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가 아니라 민간이 중심이 돼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되, 확실한 대안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 미국은 북핵 문제가 풀리지 않을 경우, 전작권 전환시기를 늦출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이 전작권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은 전작권 전환 합의를 되돌려 한국의 좌파들로부터 극심한 反美(반미)운동의 타깃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기구였던 한미연합사(CFC)에 버금가는 조직을 창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한미 FTA의 발효는 양국의 무역을 대폭 신장시켜 양국관계를 더욱 튼튼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집중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한미 FTA에 대해 불신감을 가진 민주당 내에 한미 FTA가 미국의 경기를 신장시키는 자극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각인시켜야 한다.
 
  정부 간 교류는 물론, 民官(민관) 합동 차원의 1.5트랙에서 한미동맹의 미래에 대해 꾸준한 논의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한미동맹의 미래를 낙관하는 이들이 많지만, 미국에서는 그 미래에 대해서 중립적이거나 신중한 인사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끊임없는 양국 간의 협의와 교류로 美英(미영) 동맹처럼, 以心傳心(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아야 불안요소가 많은 2012년을 수월하게 넘길 수 있다.⊙

 

공산당·행정부·군부 지도자 물갈이 앞둔 中國  동맹국 북한을 잃지 않으려는 정책에 변화 없을 것  

⊙ 중국의 한반도 정책은 중국과 미국의 힘이 균형을 이루는 곳이 한반도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도 인정한다는 개념

朴勝俊 朝鮮日報 중국전문 대기자  (sjpark@chosun.com)

<2008년 6월 18일 평양을 방문한 시진핑 정치국 상무위원(왼쪽)이 김정일과 함께 회담장으로 향하고 있다.>

2012년 가을 중국공산당은 제18차 全黨(전당)대회를 개최한다. 후진타오(胡錦濤) 現(현) 당 총서기의 임기는 그때 끝나고, 새 당 총서기가 탄생할 예정이다. 현재 선두주자는 시진핑(習近平) 정치국 상무위원이다. 그러나 변수가 남아 있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리커창(李克强) 정치국 상무위원이다.
 
  거기에다 중국공산당이 추진하고 있는 ‘당내 민주화’의 진척도에 따라 당 총서기를 선출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예정대로라면 시진핑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
 
  후진타오의 국가주석직은 2013년 3월로 임기가 만료된다. 후진타오의 집권 동반자인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임기도 같은 때 끝난다. 이들과 함께 8000만 중국공산당원의 총사령탑인 9인의 정치국 상무위원도 2012년 가을에서 2013년 봄 사이에 물갈이를 하게 된다. 말 그대로 완전히 면모를 일신한 중국이 탄생할 전망이다.
 
  량광례(梁光烈) 국방부장과 궈보슝(郭伯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軍部(군부) 고위층도 70세를 넘기면서 일제히 은퇴하고 새로운 얼굴들이 지휘봉을 잡을 전망이다.
 
  중국공산당과 행정부, 군부 지도자들이 일제히 새 인물로 교체되는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한국에서도 대선이 벌어져 새 대통령이 등장하게 될 전망이다.
 
  문제는 북한이다. 한국과 중국의 지도부가 완전히 새로운 인물로 바뀔 예정인 데 반해, 북한은 金正日(김정일)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방위원장의 자연수명이 끝나지 않는 한 지도부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작다.
 
  김정일은 1994년 金日成(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의 최고실권자로서 기능을 발휘해 왔고, 2012년 말이면 18년 넘게 평양의 최고 권좌에 앉아 있게 된다. 그럴 경우 김정일은 평양의 권좌에서 편안한 자세로 서울과 베이징(北京)의 경험이 모자란 ‘뉴 페이스(new face)’들과 핵문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문제, 美北(미북) 관계 정상화 문제를 놓고 씨름을 벌일 준비를 할 것이다.
 
  1942년생인 김정일은 그때면 70세가 될 것이고, 중국의 경우 1953년생인 시진핑이 최고 권력자가 될 경우 59세, 한국의 새 대통령은 현재 후보군이 대체로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중반 출생자들이므로 대체로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의 대통령이 탄생할 전망이다. 
    
  ‘平和發展’ 외교전략
 

덩샤오핑(오른쪽)과 함께 의논을 하고 있는 중국 국가주석 마오쩌둥(왼쪽). 중국의 외교정책은 덩샤오핑의 ‘평화발전’에 따라 오늘날까지 경제발전에 주력하기 위해 평화로운 국제환경을 만든다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때 김정일의 상태가 더욱 노련해질 것인지, 아니면 노쇠해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만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북한의 노인과 한국·중국의 年富力强(연부역강)한 정치지도자 간의 머리싸움이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지도부가 후진타오에서 시진핑으로 바뀌더라도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외교정책의 기조는 바뀌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외교정책은 마오쩌둥(毛澤東) 시대의 ‘軍事備戰(군사비전)’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의 ‘平和發展(평화발전)’으로 변화했고, 현재는 덩샤오핑의 ‘평화발전’ 시대라 할 수 있다.
 
  마오쩌둥의 군사비전이란 언제든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세계대전에 대비한다는 전략이었고, 덩샤오핑의 평화발전은 중국이 개입해야 하는 세계대전의 발생 가능성이 작다고 보고, 경제발전을 위해 평화로운 국제환경을 만든다는 전략이다.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두 후계자 역시 덩샤오핑의 평화발전 전략에 따라 외교정책을 운용해 왔고, 후진타오의 후계자 역시 평화발전 전략을 변경할 가능성은 작다고 전망할 수 있다.
 
  덩샤오핑의 평화발전 외교전략은 미국과도, 러시아와도, 인도와도, 유럽과도, 어떤 지역과도 평화로운 관계를 만든다는 큰 그림으로 되어 있다. 그런 큰 그림의 바탕 위에서 중국의 한반도 정책은 중국과 미국의 힘이 균형을 이루는 곳이 한반도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도 인정한다는 개념이다. 2012년 말에도 중국의 그런 외교정책의 기조는 바뀔 가능성이 작으며, 중국 자신들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 다시 말해 어떤 경우에도 북한이라는 동맹국을 잃지 않으려 하는 정책에는 변화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북한에 대해 장단기 정책에 구분이 없었다. 김일성 통치기간 내내, 그리고 김정일 통치 전반기에는 단기적으로든 장기적으로든 북한 정권의 지속성도 보장해 주고 장기적으로 북한에 대한 영향력도 지속적으로 확보한다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중국이 주관하는 6자회담이 2003년부터 진행되는 과정에서 북한이 두 차례의 핵실험으로 중국의 국제적인 체면을 손상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중국은 북한에 대해 단기 정책과 장기 정책을 분리해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中, 북한 핵실험으로‘리더십 체인지’도 고려
 
2009년 10월 6일, 평안남도 회창군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묘를 참배한 원자바오 총리가 6·25전쟁에서 전사한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의 묘에 헌화하고 있다.

  김정일의 북한이 2009년 5월 두 번째 핵실험을 한 이후, 중국 외교관들은 “북한에 대한 외교정책을 장단기로 구분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단기적으로 중국과 김정일 정권과의 관계가 계속해서 원만하지 않을 경우, 김정일 정권과의 공개적인 不和(불화)를 감행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럴 경우, 과거 미국이 언급하던 북한에 대한 ‘리더십 체인지(Leadership Change·지도자 교체)’도 불사하는 상황을 연상시키는 말이었다.
 
  물론 중국이 북한에 대해 리더십 체인지를 할 수단이 제한적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중국으로서는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의 권력 이양을 은근히 환영하고 부추기는 쪽의 수단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한국이다. 중국의 외교정책은 먼저 세계 전략을 세우고, 그에 따라 한반도 전략을 세우는 식으로 최소한의 체계를 갖추고 있다. 북한 역시 모든 것을 희생해 가면서도 통일은 달성해야 한다는 정책 基調(기조)를 갖고 있으나, 우리의 경우 일관된 외교정책 없이 5년 임기의 대통령이 교체될 때마다 새로운 대북정책과 대외정책을 수립해 온 것이 사실이다.
 
  2012년 새로운 한국 대통령이 등장하면, 또다시 새 대통령의 생각에 따라 대북정책과 외교정책의 기조를 손질하게 될 것이다. 한국으로서는 대통령이 바뀌더라도 지속가능한 외교정책을 수립하느냐의 여부가 2012년 말, 동북아의 변화의 바람 속에서 ‘한국號(호)’가 방향을 잃지 않고 제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2년이라도 앞서 미리 ‘지속가능한 외교정책(Sustainable Foreign Policy)’을 마련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한반도와 朝貢(조공)관계를 맺고 있던 중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것은 1910년 일본과 한반도의 합방 때문이었다. 이후 6·25전쟁이 난 1950년까지 40년 동안 중국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전무한 상황을 경험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자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바로 다음해의 어수선한 상황인데도 마오쩌둥이 전쟁 개입에 나선 데는 다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되찾겠다는 각오가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마오의 외교정책 가운데 ‘?美(간미·미국에 맞선다)’라는 말에서 그런 각오를 읽을 수 있다.
 
  중국은 마오의 결단에 따라 한국전쟁에 수십만 명의 중국 젊은이들을 보내 목숨을 희생시키면서 한반도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되찾았다. 2009년 10월 초 평양을 방문한 원자바오 총리가 평양근교 중국군 병사들의 무덤을 찾아가 “조국은 이미 강대해졌다. 조국은 여러분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지속가능한 통일·외교정책 수립해야
 
  2010년은 그 한일합방 100년이 되는 해이며, 그런 점에서 중국 지도자들의 머릿속에는 다시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생각이 오락가락할 것이다.
 
  2012년 한국호의 운명을 떠맡을 새 대통령과 측근 정책 입안자들은 그런 중국의 생각과 북한의 생각을 알고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된 뒤에 즉흥적으로 통일정책과 대외정책을 좌우할 것이 아니라, 한반도 통일문제를 보다 긴 역사적 안목으로 보고, 자신이 대통령을 하는 동안만 유지되는 정책이 아니라 어떤 대통령이나, 어떤 집권 세력도 함부로 바꿀 수 없는 ‘지속 가능한 통일정책과 외교정책’을 한국이 보유할 수 있도록, 대통령 후보군에 있을 때부터 준비하는 일이 필요하다.⊙

 

러시아의 한반도 등거리외교  經協 위해 北核 해결에 팔 걷어붙일 듯

⊙ 러시아가 北核 문제 해결에 나서는 직접적인 이유는 남한의 적극적인 러시아 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 핵문제 해결 없이는 經協은커녕 시베리아 투자와 개발 여건마저 악화된다는 계산
   

 鄭昺善 朝鮮日報 기획취재부 기자  (bschung@chosun.com)

<2009년 11월 25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오른쪽)이 평양을 방문한 세르게이 미르노프 러시아 연방의회 의장(왼쪽)과 악수하고 있다. 러시아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김정일 면담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러시아 외교부는 새해 외교정책 순위에서 아시아와 한반도를 어느 수준에서 결정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물론 외교적으로 가장 우선 순위는 옛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의 연합체인 독립국가연합(CIS)이라는 것은 異論(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음으로 EU·미국·중국의 순서지만, 중동과 아시아를 두고 우선 순위를 정하기는 상당한 고민이 따를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중동지역에서 미국을 견제하려는 정책을 구사해 왔지만, 외교적으로 별 소득이 없었다. 그나마 러시아는 지난 10년 동안 이란에 제공한 원자력발전소로 미국을 견제하면서 체면을 유지했다.
 
  2000년대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이 ‘강한 러시아’ 정책을 기치로 실리외교를 강조해 왔고, 이 정책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現(현) 정권이 踏襲(답습)하고 있는 지금, 아시아와 한반도 문제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더 이상 러시아의 정책 우선을 중동에 두기 힘든 시점이다. 중동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2009년 몰아닥친 국제 금융위기 餘波(여파)로 중국과 일본, 인도, 한국 등 경제 역량이 강한 국가들을 위주로 한 실리외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으면서 중동 선호정책이 고스란히 아시아 선호정책으로 쏠릴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는 새해 아시아와 한반도에 외교 역량을 집중 投射(투사)할 가능성이 크다. 한마디로 對(대)한반도 정책의 새판짜기 전략을 들고 나올 가능성이 커보인다.
 
  러시아가 한반도를 보는 가장 큰 관심사는 北核(북핵) 문제와 經協(경협)이다. 러시아가 표방하는 한반도 정책의 근본은 ‘한반도의 안정’이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한의 안정이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핵을 무기로 국제사회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 러시아로 볼 때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북핵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다. 
    
  北, 러시아를 不信
 

강원도 산불진화의 일등공신인 러시아제 대형 헬기 ‘카모프-32’. 한국은 ‘불곰사업’을 통해 러시아제 무기를 도입했다가 후속지원 문제로 골치를 앓았다.

  러시아는 6자회담에 참가하면서 북한을 설득,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나섰지만 북한은 이미 러시아를 믿지 않는 상황이 됐다. 최근 세르게이 미르노프 러시아 상원의장을 특사자격으로 파견해 金正日(김정일)에게 친서를 전달하면서 러시아의 입장을 전달하려 했지만, 북한 측은 김정일과의 면담 주선 자체를 거부했다.
 
  러시아는 어떤 방식으로든 북한이 국제사회의 흐름에 동참해 주길 바라지만, 북한 정권은 러시아의 입장을 간파하고 共助(공조)보다는 ‘속태우기’에 나서고 있다. 그만큼 러시아와 북한의 관계는 예전의 血盟(혈맹)관계에서 벗어나 있다. 북한을 보는 러시아의 시각은 기존과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러시아가 북한 핵문제 해결에 나서는 직접적인 이유는 남한의 적극적인 러시아 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나아가 러시아·남북한 간 3각 협력이 가능하다는 입장에서다. 핵문제 해결 없이는 경협은커녕 기존의 시베리아 투자와 개발 여건마저 악화된다는 계산 때문이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와 極東(극동) 개발을 국가 大計(대계)로 여기고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시베리아 경제 살리기 구상을 집중했지만 변화가 없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TSR)를 軸(축)으로 남북한의 경제적인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매번 북핵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러시아가 새해 한반도에 집중적인 관심을 쏟기 위한 전제는 마련됐다. 2010년이 한국과 수교 2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10년 주기를 ‘유빌레이’라 부르며 대대적인 경축 행사를 벌이는 것이 관례다.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 있고, 한국은 러시아에 대한 관심을 키우기 위해 정치·경제·외교·문화 분야 등 다양한 관점에서 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
 
  더구나 한국에서 G20(주요 20개국) 정상회담이 열리는데다, 수교 20주년이 겹쳐 역대 가장 다양한 외교적 행사가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2009년 2월 이고르 세친 부총리를 비롯해 4월에는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 8월에는 빅토르 이사예프 극동지역 대통령전권대표 등 러시아 고위 인사들의 한국 방문이 줄을 이었다.
 
  2009년 9월에는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양국 관계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됐다. 李容濬(이용준) 외교통상부 차관보와 알렉세이 바라다브킨 러시아 외교부 아·태담당 차관이 대표로 참석한 제10차 한·러 정책협의회에서 2010년 한·러 수교 20주년 기념행사 준비, 에너지·자원협력, 극동시베리아 개발 등 양국 간 주요 협력과제를 집중 논의했다. 
    
  한국의 투자협력 끌어내는 것이 급선무
 
2009년 7월 9일 G8 확대정상회의가 열린 이탈리아에서 이명박 대통령(왼쪽)과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한-러 정상회의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여기에는 한·러 대화 출범, 양국 경제단체 간 비즈니스 다이얼로그(Dialogue) 개최 등이 포함됐다. 상호 이해와 신뢰를 우선시하자는 것이었다. 교역, 투자 증진, 西(서)캄차카 해상광구 공동개발, 러시아産(산) 천연가스 도입, 극동지역 물류단지 조성, 첨단기술 분야에서의 협력 확대 방안도 논의됐다. 오는 201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한국 기업의 참여를 희망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무엇보다 한국의 투자협력을 끌어내려는 의지가 강하다. 통상적인 에너지 외교를 벗어나 에너지를 중심으로 다양한 경협을 하려는 것이다. 송유관을 통해 한국과 일본, 미국 등으로 에너지 수출 루트를 다변화하는 전략을 마련하는 등 유럽에 집중돼 있는 에너지 공급루트를 확대하려 하고 있다.
 
  러시아는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訪韓(방한) 시점과 기간에 대해서도 고심 중이다. 2010년 11월 G20정상회담 일정 외 추가적인 방한을 할지에 대해서도 한국과 조율 중이다. 물론 이 방문이 여의치 않을 경우, G20 방문 일정에다 양자회담을 하는 형식으로 방향을 잡고 있지만, 정상회담이 끝나는 시점에 한·러 정상회의를 추진하고, 한국에서 열리는 수교 기념행사 폐막식에 참석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새해 러시아가 한반도에 거는 기대는 외교 역량 강화와 상통한다. 남북한을 아우를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어하면서 남북한에 고위 인사를 파견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기대는 쉽사리 성사될 것 같지가 않다. 러시아는 ‘한반도의 안정’을 외교적 修辭(수사)로 활용하지만, 예전처럼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북한은 러시아가 자신을 절대 代辯(대변)해 왔던 혈맹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관계는 2001년, 그리고 2002년 김정일의 러시아 방문 이후 확실해졌다.
 
  한·러 양국은 최근 대사를 교체하고 한·러 새로운 시대를 모색하고 있다. 러시아는 브누코프 駐韓(주한) 러시아 대사를 통해 全方位(전방위) 로비를 하고 있다. 최근 한국이 李允鎬(이윤호) 신임 러시아 대사를 임명한 것에 대해서도 호감을 갖고 있다. 우리가 러시아에 장관 출신(지식경제부 장관)을 대사로 보낸 데 대해 러시아의 기대가 큰 것이다. 
    
  남북한 상대로 실리외교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생산된 원유를 태평양으로 수송할 극동 나홋카 인근 코즈미노 원유선적터미널 건설현장. 러시아는 이르쿠츠크 타이셰트에서 코즈미노까지 총연장 4663㎞의 송유관을 건설 중이다.

  러시아의 ‘이중성’과 ‘극단성’은 러시아의 정치 외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러시아의 저명한 철학자 베르자예프는 러시아인의 극단성을 캄캄한 밤, 작은 등불 하나에 의지해 끝없는 시베리아의 平原(평원)을 질풍처럼 달리는 트로이카(삼두마차)에 비유한다. 이중성과 극단성이 국제정치에서 미국을 견제하고 大國(대국) 기질의 러시아를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에 슬라브 민족 우월주의, 러시아 정교라는 基調(기조)를 우선으로 외교를 하기 때문에 국제정치와 외교에서 이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러시아와의 관계를 매끄럽게 할 수 없다.
 
  러시아는 미국보다는 유럽, 유럽국가 중에서도 强國(강국)으로 통하는 독일과 이탈리아, 프랑스와는 전통적으로 연대를 맺거나 외교적인 역량을 강화해 왔다. 하지만 동유럽 등 국력이 약한 나라에 대해서는 힘으로 압박하는 외교전략을 구사해 왔다. 우리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1990년 외교수립 이후 번번이 러시아에 당한 꼴이 됐다. 경협차관을 제공하고서도 협상과정에서 주도권을 잃었고, ‘불곰사업’을 통해 러시아제 무기를 들여오면서도 후속지원 문제로 매번 끌려다녔다. 한국은 한국대로 러시아를 우습게 보고 덤볐다가 외교적으로 곤욕을 치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한국 외교에 상당한 상처를 냈다.
 
  2008년 1월 李在五(이재오) 한나라당 최고의원을 대표로 한 대 러시아 대통령 특사단은 러시아 방문 중에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접촉조차 하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러시아가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해 오면서 우리에게 상당한 부담을 안긴 것이다.
 
  2010년은 지난 20년 동안 동시에 남북한을 상대한 러시아가 과연 실리외교를 중심으로 대 한반도 외교정책을 다시금 정립할지를 가늠할 수 있는 한 해가 되리라는 평가다.
 
  미 의회조사국(CRS)은 최근 <남한: 국내 정치와 외교 개관(South Korea: It’s Domestic Politics and foreign pollicy outlook)> 보고서에서 “한·러 수교 이후 20년이 흘렀으나 양국 관계는 低(저)발전 상태”라며 “6자회담 틀 내에서 양국이 협력해 왔으나 그마저도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국제사회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미국은 모르지만 중국보다는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지를 보이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남북한에 확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한반도에서 미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최고의 효과적 수단이라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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