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울산 반구대 암각화&천전리 각석&십리대숲

醉月 2015. 2. 5. 08:41

울산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각석이 햇빛을 받으며 부조로 새겨진 기하학적 무늬와 추상화된 인물 등이 도드라져 보이고 있다. 김동훈 기자 dhk@munhwa.com


바위 절벽이 국보란다. 깎아서 쌓은 탑도 아닌 자연석이 말이다. 그것도 한 지역에 두 곳이나 있단다. 그 바위들을 만나기 위해 400㎞ 가까운 길을 달렸다.

이 땅에 볼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바위나 보러 가느냐는 말 정도는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중 한 곳은 자칫 마른 계절을 놓치면 물속에 잠길 수도 있다고 해서 서둘러야 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두동면 천전리 각석이다.

태화강 상류의 바위에 숱한 동물과 사람 사는 모습을 새겨놓은 자연 속 박물관,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은 먼 길을 찾아간 보답을 충분히 해줬다.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를 살았던 사람도, 말을 달리던 신라의 화랑도 거기 있었다. 시공을 넘어서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했다.

울산의 명물 태화강 십리대숲도 찾아갔다. 대숲을 걸으며 듣는 바람의 노래는 감동 그 자체였다. 그리고 저녁 무렵에 만난 까마귀떼의 군무. 경이에 가까운 풍경 앞에서 끝내 말을 잃고 말았다.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찾은 관광객들이 망원경을 통해 암각화를 살펴보고 있다.



#반구대 암각화 = 태화강 상류의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를 찾아가는 길은 감탄사로부터 시작되었다.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모양의 반구대(盤龜臺), 한겨울의 계곡을 힘차게 달려가는 물소리…. 나무들이 앙상한 계절인데도 풍경은 삭막하지 않다. 암각화까지 거리는 600m밖에 안 되지만, 경치에 사로잡힌 발길은 자꾸 느려진다. 바람은 봄 노래라도 들려줄 듯 부드럽다. 길가에 서 있는 산수유나무에 벌써 작은 꽃망울들이 맺혀 있다. 저 속에 노란 색깔의 봄들이 꼭꼭 숨어, 팝콘처럼 우르르 터질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왕버들이 우쭐우쭐 키를 재는 늪지대를 지나고, ‘청청(靑靑)’ 소리라도 들릴 것 같은 대숲 사이를 걸어간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도시에서 묻히고 온 먼지를 털어낸다. 가장 오래 남아있는 것은 역시 마음에 묻혀온 먼지다.

▲ 울산 중구 태화동 태화강 대공원에 길이 4㎞로 조성된 십리대숲을 찾은 시민들이 곧게 뻗은 대나무 숲 사이로 산책을 즐기고 있다. 김동훈 기자 dhk@munhwa.com

황톳길을 돌고 돌아가니, 산허리가 뭉툭 잘린 곳에 스크린처럼 걸린 바위 절벽이 나타난다. 반구대 암각화다. 반구대 암각화는 너비 10m, 높이 3m의 바위 면에 새겨진 그림이다. 고래·거북·물고기 등의 바다 동물과 늑대·호랑이·멧돼지·곰·여우 등의 육지동물, 사람과 배 그림, 어로나 수렵 장면 등 300여 점이 새겨져 있다. 대부분 신석기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위와 떨어진 곳에 펜스를 설치해 놓았기 때문에 그림들을 가까이서 볼 수는 없다. 대신 실물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진과 망원경을 준비해 놓았다. 망원경 속에서 멧돼지, 호랑이 같은 동물들을 발견할 때마다 탄성이 터진다. 직접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게 끝내 아쉽지만, 그 또한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림 하나하나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이런 땐 육신의 눈보다는 마음의 눈으로 보면 된다.

마음속에 공간을 만들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림들이 하나씩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 아득한 옛날, 왜 이 깊은 산속에 저런 그림을 새겨 놓았을까. 더구나 도구라고는 기껏 돌밖에 없는 시대에. 바다는 물론 들판과도 멀리 떨어진 곳인데도 그림에는 고래나 물고기가 등장한다. 옛사람들이 남긴 흔적 앞에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나름대로 답을 찾아보는 것도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다. 이곳은 아마 선사시대 사람들의 신성한 곳이었을 것이다. 흐르는 물로써 사람의 영역과 성역을 가른 것도 그렇고 남다르게 느껴지는 장엄한 기운도 그렇다. 사람들은 부족의 안녕과 풍요, 다산을 기원하기 위해 제를 지내고 바위 절벽에 그들의 소망을 새겼을 것이다. 동물이 교미하는 모양을 그리고, 임신한 것처럼 배를 불룩하게 표현한 것들이 그 증거가 아닐까?

어차피 감상은 보는 사람의 몫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위 절벽을 한참 바라본다. 환상처럼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아랫도리만 가린 사람들이 강을 거슬러 올라온다. 산과 바다에서 잡아온 것들을 놓고 제를 지낸 뒤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는다. 잔치가 끝나자 사다리를 올리고, 석공은 단단하고 날카로운 돌로 바위를 쪼기 시작한다. 그의 손에서 고래가 태어나고 호랑이가 포효한다.

 

 

 

 

 

 

 

 

 

 

 

▲ 울산 울주군 상북면 석남사를 찾은 관광객들이 반야교 위에서 가지산 자락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

# 천전리 각석 = 반구대 암각화에서 대곡천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천전리 각석(국보 147호)과 만나게 된다. 15도 정도 경사진 바위면 상반부에는 각종 동물문양과 동심원, 나선형, 마름모 등이 새겨져 있다. 하반부에서는 신라시대의 행렬, 돛단배, 말 등의 세선화와 명문(銘文) 등이 있다.

천전리 각석이 반구대 암각화와 구별되는 것은,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 시대별 궤적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다. 가까운 곳에서 그림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감동 역시 남다르다. 시간과 공간을 조합해서 나만의 영상을 만들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찬찬히 들여다보면 잘 짜인 시대극을 보는 것 같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문을 닫고 들어가면 청동기 사람들이 나오고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 신라 왕족이 찾아오고 젊은 화랑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주변에 펼쳐진 풍경은 반구대 암각화보다 더 아름답다. 각석 앞 너럭바위에 앉아 쾅쾅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냇물에 마음을 씻는다. 신라의 화랑들도 이곳을 즐겨 찾았다지? 옛사람들과 만남이 준 뿌듯함 때문일까. 세상은 겨울답지 않게 풍요로워 보인다.

# 태화강 십리대숲 =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을 품은 대곡천은 가지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쳐 태화강을 이룬다. 태화강에는 아름답고 특별한 대숲이 있다. 이름하여 십리대숲. 이곳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진가를 실감할 수 있다.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지는 오솔길. 바람을 타고 흐르는 대나무들의 노래. 잎 사이로 명주실처럼 가늘게 풀어져 내리는 햇살…. 마치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간 듯 행복해진다.

그 길을 울산시민들이 걷는다. 자진모리장단으로 씩씩하게 걷는 젊은 여성도,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듯 천천히 걷는 노인도, 숲에서 나올 무렵이면 얼굴이 가을 하늘처럼 맑아진다. 벤치에 앉아 바람에 마음 한 자락 널어둔다. 세상 한가운데 있는데도 세상은 아득히 멀다. 무릉도원이 이랬을까?

까마귀 군무와 만난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어느 순간 하늘을 올려다보니 까만 점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조금 지나자 먼 산에서도 숲에서도 건물 사이에서도 쉴 새 없이 나타난다. 한낮에 멀리 나갔던 까마귀들이 돌아오는 것이다. 하늘이 온통 까맣게 물들더니 달빛마저 까맣게 흐른다. 이 광경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그저 입만 떡 벌어질 뿐이다. 어떻게 저렇게 한꺼번에 모여들지? 어떻게 저 많은 새들이 한 번도 부딪히지 않지? 저희끼리의 언어가 있는 게 틀림없다. 울음소리도 특이하다. 여름밤 무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닮았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까마귀떼도 서서히 대숲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곳에서 함께 밤을 지낸 뒤 아침이면 다시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 그 밖의 가볼 만한 곳 = 산과 바다를 함께 껴안은 울산에는 명승지가 많다. 그중에서 단 한 곳만 추천하라면 단연코 석남사다. 해발 1240m의 가지산 자락에 터를 잡은 석남사는 청도 운문사, 계룡산 동학사와 더불어 비구니 도량으로 이름이 높다. 특히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끼고 절까지 올라가는 길은 한눈을 팔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다. 시간을 머금은 아름드리 소나무, 굴참나무와 이야기를 나누며 올라가다 보면 700m의 거리가 짧고도 아쉽다.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입구에 위치한 울산암각화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실물 크기로 복제된 반구대 암각화를 보고 있다.


반구대 암각화는 아무 때나 찾아가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65년 대곡천 하류에 사연댐이 완공된 이후 침수와 노출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침수, 노출은 불규칙적이다. 2013년에는 가뭄으로 침수되지 않았지만, 2014년에는 사연댐 유역에 많은 비가 내리는 바람에 8월부터 약 2개월간 침수됐다가 10월 중순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나마 전보다 나아진 게 그렇다. 과거에는 8∼9개월 정도 잠겨 있었는데 상류에 대곡댐을 쌓은 뒤로 기간이 크게 줄었다. 댐을 없애거나 수위를 대폭 낮추면 되지만 문제는 사연댐이 울산시민들의 식수원이라는 데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돼 있는 문화유산이 물에 잠겨 있으니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2013년에는 울산시와 문화재청이 가변형 투명 물막이 시설(키네틱 댐)을 설치하기로 합의했지만 안전성 문제 등을 이유로 시행이 미뤄지고 있다. 반대론자들은 영구적 조치가 아니라는 점과 주변 경관을 해친다는 점, 물막이가 암각화를 우리 안에 가두고 옥죄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문화재위원회는 지난해 투명 물막이 시설에 대한 타당성 검토를 한 결과 심의를 ‘보류’하기로 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논의의 원점회귀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대체 상수원 확보가 최대 관건이다.

천전리 각석은 댐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기 때문에 큰 논란은 없다. 다만 명칭과 관련해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각석(刻石)이라는 말은 글자나 무늬 따위를 돌에 새긴다는 뜻이다. 천전리 각석에 그림이 있는데도 암각화라고 하지 않고 각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신라시대 명문(銘文) 등이 함께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천전리 각석’보다는 ‘천전리 서석’ 또는 ‘천전리 암각화’라는 명칭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호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 2011년에는 ‘이상현’이란 이름을 몰래 새겨 놓아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각석에서 100m가량 떨어진 곳에 문화유산해설사가 상주하는 부스와 안내소가 있지만 훼손을 막기에는 시야가 닿지 않는 등의 문제가 있다.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면 인근에 있는 울산암각화박물관을 찾아가면 된다. 다양한 자료와 복제모형물을 통해 암각화에 대해 상세히 알아볼 수 있다.

태화강에 날아드는 까마귀들은 몽골 북부와 시베리아 동부 등에 서식하다가, 매년 10월 말부터 다음 해 3월 말까지 찾아와 머문다.

밤에는 태화강 대숲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인근 울주군과 경주시의 농경지를 돌아다니며 먹이를 구한다. 떼까마귀와 갈까마귀가 섞여 있는데 매년 약 5만 마리 이상이 찾아온다고 한다.

울산시는 까마귀 군무 체험행사를 열고, 태화강을 찾은 까마귀가 해충·풀씨 등을 먹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길조(吉鳥)라고 홍보하는 등 까마귀를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고 있다. 시민들은 해마다 보는 풍경이기 때문에 익숙한 표정이지만, 소음 등 불편을 호소하기도 한다.


# 반구대 암각화·천전리 각석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서울산나들목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조금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나온다. 천전리 각석은 반구대 암각화에서 2㎞ 정도 떨어져 있는데 걸어갈 수도 있다. 승용차를 이용하려면 35번 국도로 나와 조금 달리다가 표지판을 따라 들어가면 된다.

# 묵을 곳·먹을 것 = 울산에서는 롯데호텔 울산(052-960-1000), 현대호텔 울산(052-251-2233) 등 특급호텔과 올림피아관광호텔(052-271-8401), 태화관광호텔(052-273-3301) 등 관광호텔이 여러 곳 있다. 시내 곳곳에 모텔이 있으며 울주군 진하해수욕장에 진하마리나리조트(052-900-8888)가 있다. 언양읍 일대는 한우 불고기 요리로 유명하다. 별다른 양념 없이 구워서 소금에 찍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언양한우불고기특구나 인근 두동면에 있는 봉계한우불고기특구를 찾아가면 된다. 울산 시내의 삼산동 농수산물센터나 울산중앙시장에 가면 고래 고기를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