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_07

醉月 2013. 1. 12. 07:25

역사는 사실에 기초하고 영화는 허구로 먹고산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과 영화 ‘광해’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이번 달에는 두 가지 주제를 함께 다룬다. 어떤 사상이나 이론을 잘못 이해하는 사례 하나, 그리고 최근 인기를 끄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통해 사실과 허구의 간극을 살펴보는 것이다. 앞의 것은 우리의 주제와 일관성이 있지만, 사실과 허구의 문제는 또 다른 영역이다. 전에 영화 ‘300’을 통해 서구의 눈으로 페르시아 문명을 왜곡하는 오리엔탈리즘을 살펴본 적이 있지만 서술의 중심은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놓여 있었다. 많은 분이 ‘광해’가 어디까지 사실이냐고 묻기에, 가이드 삼아 정리해봤다.

 
2012년 10월 1일 영국 런던에서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에릭 홉스봄.

 

올해 10월 1일. 우리는 정말 훌륭한 역사학자 한 분을 떠나보냈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95세로 타계했으니 수(壽)를 누리신 셈. 19세기를 연구한 명저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3부작과 격변의 ‘단기 20세기’를 관찰자로서 적은 ‘극단의 시대’를 비롯한 3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인간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이상을 놓지 않았던 소중한 학자였다.

지난봄 학기, 내가 맡았던 역사학개론 강좌의 교재가 홉스봄의 ‘역사론’(강성호 역, 2002, 민음사)이었다. 2학년 학생들에게는 다소 어려웠을지도 모르는데 모두 열심히 읽어주었다. 2002년 이 책이 처음 번역되었을 때도 강의에서 교재로 썼지만, 지난봄만큼 감동이 크지 않았다. 다 때가 있는 법인 듯하다.

이를 계기로 고병권 선생의 지도로 열린 수유너머R의 ‘정치경제학비판요강 강독’에 참가했다. 1857~1858년에 카를 마르크스가 쓴 초고(草稿), ‘정치경제학비판요강’(김호균 옮김, 그린비, 2000)을 읽는 모임이었다. ‘요강’은 출간된 책이 아니라 연구노트인데 역사학자로서의 마르크스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저술이다. 이 책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필자처럼 조선시대를 공부하는 학자들에게 통찰력을 주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제(諸) 형태’라는 장(章)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요강’의 이 장은 그동안 스탈린을 비롯한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원시 공산제→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근대 자본제→사회주의의 역사발전 5단계설이 얼마나 비(非)마르크스적이었는지를 선명히 알 수 있게 하는 자료다. 이 장에 대해 홉스봄은 해제를 붙여 영문으로 간행했는데 1988년에 번역본이 나왔다.(성낙선 옮김,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제형태’ 1988, 지평)

 

역사학의 출발

 

에릭 홉스봄의 저서 ‘역사론’.

 

사실 역사발전 5단계설은 1859년 간행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 서언’(김호균 옮김, 중원문화, 2009)에 딱 한 줄 나온다. 아무튼 그의 글에 나오니까 마르크스의 말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만 떼어내어 마르크스의 견해가 이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견강부회다.

9월 22일 인천사연구소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역사학자 마르크스’라는 제목의 짧은 글에서 나는 마르크스의 ‘요강’과 홉스봄의 해제, 그리고 나의 의견을 정리했다. 홉스봄은 마르크스의 역사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역사학에는 다양한 인간·사회·집단 분화의 메커니즘과, 한 종류의 사회가 다른 종류의 사회로 변하거나 변하지 못하는 메커니즘을 발견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내포되어 있다.”(‘역사론’, 243쪽)

풀어보자면, 마르크스는 왜 두 사회가 다른지를 사회의 차원(Dimension)이 서로 결합하는 방식에 의해 설명한다. 여기서 상부구조-하부구조(토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상부구조-토대의 착상은 경제결정론 때문에 나온 게 아니라 다양하게 존재하는 인간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두 번째로, A사회는 A사회로 가는데, 왜 B사회는 가지 않는지 하는 이행(移行)의 문제가 있다. 이는 해당 사회의 모순 관계(Contradictions)에 대한 질문이다. 이렇게 해서 체제를 유지, 안정시키는 요소와 해체하는 요소에 대한 탐구가 동시에 가능해졌다. 이렇게 볼 때 “역사적 유물론은 역사적 설명의 기초(basis)이지, 역사적 설명 자체가 아니고,”(262쪽) “마르크스는 실제 역사 서술에서는 경제환원주의자의 정반대편에 서 있었다.”(264쪽)는 것이 홉스봄의 생각이며, “마르크스는 (역사학에서) 마지막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첫 번째 말을 한 것이다.”(271쪽)

 

벌거숭이 임금님

이렇게 홉스봄을 사숙하던 중에 이 분이 돌아가셨다. 다행히 이번에 내가 쓴 책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서문에서 내가 최근 홉스봄에게 배운 바를 몇 줄이나마 적어놓았던 것으로 위로를 삼아야 할까? 당신에게 배운 바를 나름대로 역사서술에 처음 적용해본 것이 이 책이었는데…. 인연의 끈이 닿은 것이 다행이라고 치자. 나중에 저세상에서 만나면 절이라도 올리고.

홉스봄은 자본주의 체제와도 싸웠지만, 그가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던 이들과도 평생 싸웠다. 그 결과 교조적 스탈린주의는 서서히 사라져갔지만, 홉스봄의 저술은 탄탄한 독자층을 형성해갔다. 이렇게 학문은 자료와 논리를 두 축으로 서서히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지난할 수도,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도 있겠지만, 왕도(王道)가 없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가 어릴 때 교과서에서 본 기억을 떠올려보자. ‘벌거숭이 임금님.’ 1837년에 나왔다는 덴마크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단편이다. 어느 날 왕에게 두 명의 재봉사가 찾아와 훌륭한 옷을 지어주겠다고 했지만 이들이 지어준 옷은 이른바 ‘나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착한 사람들의 눈에만 보이는 옷’이었다. 임금은 이 옷을 입고 행차를 했다. 소문을 들은 어떤 사람들은 입이 마르게 그 ‘아름다운 옷’을 칭찬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난 교과서에서 이 글을 본 뒤, 내내 두 가지가 궁금했다. 하나는 그 임금님이 속옷을 입었을까? 아무래도 재봉사가 훌륭한 옷을 지어준다고 했으니 아마 곤룡포 같이 겉에 걸치는 옷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속옷은 입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교과서에는 삽화가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도 속옷(고쟁이)을 입고 있었던 듯하다. 속옷조차 입지 않았다면? 참으로 가관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궁금했던 점은, 임금님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외친 소년과, 그 소년의 말에 맞장구치며 웃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무사했을까? 아니면 잡혀가서 죽도록 맞았을까? 심한 경우 음~,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겠다. 바람직한 경우는 그 소년의 말을 계기로 다들 정신 차리는 것인데, 그렇게 되었을까? 그래서 임금은 자신의 허위의식을 반성하고 속은 것을 인정했을까? 사람들은 덩달아 맞장구친 자신들을 부끄러워했을까? 재봉사들은 처벌을 받았을까?

요즘 영화 ‘광해’가 꽤 인기를 끄는 모양이다. 나도 최근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이라는 책을 냈기 때문에 영화 ‘광해’를 보았고, 언론이나 친지들이 내 책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또 영화 ‘광해’에 대해 사실인지를 묻기도 했다. 실제 여기저기서 광해군의 실제에 대한 논의도 ‘새삼’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야기 역사

그런데 나의 책과 관련해 벌어지는 논의에 대해, 그 이견(異見), 찬반(贊反)과 상관없이 저자인 나는 조금 슬프다. 그리고 내가 글을 좀 못 쓰나보다 하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나의 책, ‘광해군’은 광해군이 실제로 백성을 생각하고 나라를 걱정했던 성군(聖君)은 못돼도 명군(明君)은 된다는 항간의 풍문을 부정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이미 광해군에 대한 비판은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2010)에서 했다.

그러니까 이번 ‘광해군’은 비판보다 ‘그 시대에 대한 이해’에 초점이 있었다. 그 이해를 위해 역사서술에서 두 가지 실험을 했다. 하나는 이야기, 또 하나는 역사서술의 시각이었다. 모두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이상길 외 옮김, 새물결, 2004)의 저자 폴 벤느(Paul Veyne)와 홉스봄 두 분에게 신세를 졌다.

예전 기억. 역사공부를 하고 있다고 나를 소개하면 사람들은 재미있는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한동안 그게 싫었다. 원래 얘기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역사학자가 옛날얘기나 하는 사람인 줄 아느냐’, 이렇게 생각했다. ‘귀여운’ 자부심이었다. 지금 보니 재미있는 얘기 해달라는 분들이 맞았다. 역사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무엇보다 안타까워할 만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고, 이번 책에서 처음 그걸 시도했다.

벤느는 “역사는 첫째 진실의 축적이고, 둘째 줄거리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광해군 전후의 시대사다. 흔히 역사는 해석의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걸핏하면 “보기 나름”이라고 말한다. 맞다. 부분적으로는. 그러나 진정한 역사공부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사실(史實)에는 늘 구멍이 뚫려 있다. ‘사람의 눈은 서로 다르다’는 그 지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상황을 합리적으로 추론해 공감할 수 있는 진실을 찾아나가는 지루하고 재미있고 때로는 숭고한 여정, 그것이 진정한 역사공부다. 그래서 역사공부는 연대의 삶, 공감의 삶, 배려의 삶을 확장시키는 토대라고 굳게 믿는다.

 

 

영화사 측은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역사와 팩션이 섞인 사극이라 말하지만 이름, 용어, 관직을 빼면 모두 허구다.

접근방법 : 세 가지 요소

그래서 다시 읽었다. 이제는 광해군 담론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이해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유령을 드러내기 위해 담론이 딛고 있는 현실을 파보았던 셈이다. 역사를 설명하는 세 가지 요소를 염두에 두면서.

인간은 맨땅에 태어나지 않는다. 타고 나면서 주어진 조건이 있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물학적, 경제학적 조건 등. 이것은 객관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 조건만 생각하면 쉽게 결정론에 빠진다. 반도(半島) 근성을 내세우는 지리적 결정론, 계급만 내세우는 경제 결정론, 원래 민족성이 그렇다는 민족성 결정론 등. 객관적 조건만 고려하면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책임을 질 수도 없다.

인간은 주어진 대로만 살지 않는다.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때론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으면서 뭔가 비전을 만들고 추구하고 가치를 부여한다. 목적의식을 가진 존재로서의 삶이다. 객관적 조건의 맞은편에 있는 의지다. 이것을 강조하면 목적론(目的論)이 된다. 그 극단에 신(神)이 있다. 이런 관념론적 목적론은 흥미롭게도 속류 유물론의 목적론과 통한다. 목적의식만 강조하면 도덕적 요청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태를 설명할 때 빈곤해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취약하다.

마지막으로 타이밍, 곧 우연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느끼는 숱한 아쉬움은 모두 이 우연의 엇갈림에서 발생한다. 얼마나 많은 연인이 타이밍의 절묘한 어긋남 때문에 이별하는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광해군 시대 시스템의 작동(객관적 조건), 사람들의 비전 또는 욕망(의지), 그리고 우연한 사건들의 엇갈림과 부딪침을 살펴보고 싶었다. 아무래도 이런 나의 시도는 실패한 듯하다. 아직도 사람들은 광해군이 벌거숭이인지 아닌지에 더 관심이 많은 걸 보면.

영화 ‘광해’를 본 분이나 볼 분을 위해 서비스 하나 하겠다. 자꾸 영화 어떤 장면을 지적하면서 그게 진짜냐고 묻는 분들 때문에 한꺼번에 대답해둔다. 우선 영화 ‘광해’ 중 광해, 허균, 대동법, 백성, 명(明)나라, 중전, 상궁, 상참 등 이런 이름, 용어, 관직 빼고 모두 허구라고 보면 된다. 영화니까, 하고 이해하면 된다.(실은 이러면 안 된다. 관객이 실제 사실과 혼동하니까.)

 

영화, 진짜예요?

영화 도입부에 배경은 광해군 8년, 2월 28일이라고 했다. 이어 15일간의 기록이 실록(‘광해군일기’를 말함)에서 빠져 있다고 했다. 나중에 허균(류승룡 분)이 ‘승정원일기’ 15일분을 빼오라는 말을 하는데, 승정원일기와 실록은 다른 기록이다. 광해군대 ‘승정원일기’는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불타서 전해지지 않고, ‘광해군일기’ 2월 28일 이후 15일 동안 기록이 빠진 적이 없다. 혹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나 해서 다시 확인했더니 2월 29일, 3월 1일 기록도 다 있다. 그러니까 도입부터 픽션이다.

2월 28일 기록에, ‘숨길 만한 일은 조보(朝報)에 싣지 말라’는 말이 실려 있다. 영화에서처럼 역적모의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당시 선조의 왕비였던 인목대비를 폐위시키자는 논의 때문이다. 광해군대에는 형인 임해군을 유배 보낸 이후 명나라 사신에게 은(銀)을 뇌물로 주어 구슬리는 것이 상례가 되었는데 폐모 논의마저 사신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구차한 이유였을 뿐이다.

 

   

허균(류승룡 분)은 ‘홍길동전’의 인상과는 달리 시대의 권간(權奸)인 이이첨과 결탁해 누릴 것 다 누리다가 그에게 제거당한 사람이었다.

 

광해가 교지(敎旨)를 읽는 대목이 나오는데 왕은 말로 하는 전교가 많고 그걸 승정원이 받아 적는다. 교지는 대제학 등이 쓰고 왕이 추인해 승정원에 내리면 각 관청의 서리들이 와서 베껴간다. 어디 왕이 몸소 읽는단 말인가? 그리고 상참(常參)은 국무회의, 관계부처장관회의 등을 섞어놓은 듯한 국정운영 회의인데, 근정전에서는 하지 않는다. 근정전은 예식을 하는 공간이고, 편전인 사정전(창덕궁은 인정전)에서 정무를 본다.

영화에는 중전(한효주 분)의 세력이 북인이고, 광해에 반대하는 세력이 서인으로 나온다. 당시 서인, 남인, 북인 일부는 광해군 5년 무렵 이미 조정에서 쫓겨나든지 죽었다. 아니면 아예 조정에 나오지 않든지. 이원익은 조정에 나오지 않고, 이항복은 귀양 갔다가 죽는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광해군 8년은 북인, 그중에서도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大北)의 독무대였다. 서인, 남인, 북인 일부가 나중에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왕이 교지를 읽는다?

중전의 오빠 유정호가 나오던데, 원래 중전의 오빠는 유희분이다. 북인이다. 영화에서처럼 나라를 생각하는 우국지사가 아니라 이이첨만큼이나 권세가였다. 그래서 인조반정 후 처단된다. 광해군이 중전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얼마 전 드라마로 만들어진 적도 있는데, 김상궁(김개시=김개똥)에게 빠져서 중전에 대한 모략에도 눈감았을 정도다. 그러니 정말 하선(가짜 광해) 같은 남자가 접근했다면 마음이 어떠했을까.

허균(류승룡 분)은 우리가 ‘홍길동전’에서 받은 인상과는 달리 이이첨과 결탁해 누릴 것 다 누리다가 그에게 제거당한 사람이었다. 광해군이 허균을 죽이는 데 주저했지만, 결국 이이첨의 처리에 동의했다. 허균이 승지를 지낸 적은 있으나 도승지를 한 적은 없다. 그리고 승지는 6명이어서 도승지 혼자 이러저런 일을 꾸미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이조판서 박충서(오랜만에 영화에 특별출연한 김명곤 분)가 광해군 때의 권간(權奸) 이이첨에 가깝다.

이이첨은 정인홍과 함께 오현종사(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의 다섯 훌륭한 학자를 국립대학 성균관의 모범으로 추앙하는 절차)에 반대해 사림(士林)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광해군 정권을 고립시킨다.

영화에 나오는 조 내관(장광 분) 같은 주변인물이 없지는 않았다. 광해군이 왜 요즘 살이 찌느냐고 물었을 때, 환관 이봉정이란 사람은, “선조 때에는 일이 바빠 살이 빠졌는데, 전하께서 즉위하신 뒤 일이 없어서 살이 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종종 내관을 희화화하는 경우가 많은데 주의해야 할 일이다. 궁궐의 그늘에서 일하는 이들이 없었다면 국왕도 없다. 궁궐의 나인들에 대해서도 영화는 이해가 부족했다. 사월이를 비롯한 나인들은 조선의 전문직 여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많다.

 

주변 인물들과 대동법

‘도 부장’(김인권 분)도 재미있는데, 영화 속 인물과 완전히 성격이 다른 인물이 있었다. 광해군 1년 강화에서 임해군을 죽인 별장(別將) 이정표(李廷彪)라는 자다. 이 자는 광해군 6년 영창대군을 죽일 때도 별장으로 호송을 담당했다. 그 사이 포도대장(현재의 서울지방경찰청장), 충청도 병사(兵使·지역 사령관)로 승진을 거듭했다. 강화 유수(강화 특별시장)까지 승진하는데 광해군은 그가 강화에 부임할 때 따로 불러 격려했다.

영화에 대동법 얘기가 많이 나왔다. 대동법은 공물로 바치던 특산물을 전세(田稅)로 바꾸어 내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땅이 많은 사람은 반대한다. 그럴 수 있다. 누가 안 내던 세금 내라는 데 좋아하겠는가? 그러므로 정책을 시행할 때는 절차와 설득이 필요한 것이다. 왕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다만, 이 정책은 임진왜란으로 불명확한 경지 상황을 조사하고 공물을 조정하는 작업이 선행됐어야 했다.

영화에서 산골에 살던 사월이네 집에 바다에서 나는 전복을 내라고 배정하는 데 그런 일은 없다. 단 생산되던 특산물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산되지 않아 사거나 남에게 비용을 주고 부탁해 내는 방납(防納)을 했는데, 그 고통이 컸다. 그런데 그 방납의 주체가 왕실, 세력가였기 때문에 개혁이 어려웠던 것이다. 특히 광해군 주변의 왕실과, 좌의정 기자헌 등 핵심 북인세력이 방납의 주체였기 때문에 대동법 시행이 어려웠다.

종종 역사는 관점 차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아니다. 역사는 무엇보다도 사실에 입각한다. 사실을 확인하고, 그 사실을 놓고 그 다음에 관점이 개입하는 학문이 역사학이다. 사실을 부정하면 역사학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든 ‘역사’라는 말을 붙이려면 사실 확인부터 했으면 한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라는 영화가 있다. 할리우드에서도 조디 포스터와 리처드 기어 주연으로 리메이크된 영화이기도 하다. 전쟁에 나갔던 남편이 돌아오는데 나중에 그 남편이 가짜로 밝혀진다는 얘기다. 여기서 남편과 아내, 남편과 친구 및 마을 사람들, 재판관의 갈등이 긴박하게 펼쳐진다.

이 영화를 만들 때 자문으로 참여했던 역사학자 나탈리 저먼 데이비스는 나중에 같은 제목의 책을 썼다. 그가 책을 다시 쓴 이유는 영화로는 역사의 풍부함을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허구와 상상력을 통해 역사를 풍부하게 만드는 듯하지만 실은 영화가 역사의 풍부함을 담아내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준 실례다. 실로 광해군 시대를 어떻게 2시간에 담을 수 있겠는가. 광해군 시대만 해도 수십 편의 영화를 만들 소재와 이야기가 있다. 역사공부에 관심이 있는 우리 집 작은아이는 “조선시대를 조금 아는 사람은 불편했을 영화”라고 했다.

‘역사 대중화’를 말하는데, 그 말 자체가 오만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역사를 만들고 있다. 원래 역사는 인간의 존재 조건이자 결과이고, 모든 사람의 것이다. 다만, 역사적 사건을 소재나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할 때 ‘역사’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학계에서 논란이 되는 관점이나 해석의 경우는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만, 광해군이 여자였다는 식으로 사실을 왜곡하면 안 되지 않을까?

 

영화 ‘광해’에 대해 두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첫째, 역시 백성을 위하는 임금이 제일이라는 이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한다. 둘째,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만든 감독과 배우들의 고민과 노고가 헛되지 않기 위해 나 같은 역사학자들이 먼저 더 탄탄한 연구를 내놓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 안타까웠다. 더 좋아하게 된 배우들, 이야기를 만든 작가, 메시지를 고민한 감독에게 미안했다. 역사학자로서 많이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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