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_08

醉月 2013. 1. 22. 01:30

학문은 다수결이 아니다 건강한 회의주의자가 되라!

역사 탐구의 오류 피하는 법

오항녕 |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그동안 우리는 역사를 탐구하거나 서술할 때, 또는 역사를 보는 관점 자체에 담긴 오류와 왜곡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주의 환기는 충분히 되었으리라 생각해서 좀 더 체계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더구나 사색의 계절이 아닌가! 회의주의자는 말한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 된 것은 독서를 안 하기 때문이고, ‘사색의 계절’이 된 것 또한 사색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개그콘서트의 꽃거지’. “궁금해요? 궁금하면 500원!” 거지의 이 말에 멀쩡하게 생긴 아가씨가 지갑을 뒤적여 500원을 준다. 궁금하면 못 참는 거다.

 

역사에 대한 탐구는 궁금증에서 시작한다. 나는 최근에 한국역사연구회 웹진에 올린 글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역사공부를 하고 있다고 나를 소개하면 사람들은 재미있는 얘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한동안 그게 싫었습니다. 원래 얘기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무슨 역사학자가 옛날얘기나 하는 사람인 줄 아느냐, 이렇게 생각했지요. 귀여운 자부심? 지금 보니 재미있는 얘기 해달라는 분들이 맞았습니다. 역사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무엇보다 안타까워할 수 있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처음 그걸 시도했습니다.”

한편 폴 벤느는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이상길·김현경 옮김, 새물결, 2004)에서 “역사는 첫째 진실의 축적이고, 둘째 줄거리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할머니에게 해달라던 이야기나, 역사학자인 나를 보고 해달라는 이야기는 같다. 특히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게 공통점이고, 그것의 근원은 호기심이다. 벤느의 말을 빌리자면, 호기심은 ‘인식하고 서술하는 주체’인 역사가의 ‘주관성’이라는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 자칫 역사가의 (종종 욕망과 즐거움으로 나타나는) 호기심에 역사서술이 종속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해 비판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호기심이란 ‘인류학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지적인 활동’이다. 역사가의 ‘역사 쓰기’뿐 아니라 독자의 ‘역사 읽기’ 또한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호기심’에 의해 이루어진다. 벤느의 생각에 이 호기심은, 사회적인 요인들, 예를 들어 역사가의 사회적 위치, 이해관계, 이데올로기, 독자의 계급성 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사무욕(無私無慾)’한 인류학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국가든, 전쟁이든, 동성애든, 음악이든 무엇이든지 역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이 호기심이라는 인간의 속성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질문

호기심은 곧 질문으로 이어진다. 궁금하면 묻는 것이다. 이게 중요하다. 세상에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답이 나오는 질문과 답이 없거나 많아서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는 질문이 그것이다. 수학은 답이 나오는 질문이 대부분이다. 오랫동안 못 푼 문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시간이 걸릴 뿐이지 답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에 비해 인생의 많은 질문은 답이 없거나 여러 가지 답이 얽혀 있어서 어느 것이 답이라고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사랑이 뭔지, 인생이 뭔지, 더 구체적으로 나는 왜 그녀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는지, 하루하루가 왜 이리 팍팍한지 등등.

답이 떨어지는 질문은 그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답이 없거나 여럿인 질문은 질문이 질문을 낳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어쩌면 답이다. 질문하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마치 스님들이 수양하면서 들고 있는 화두(話頭)처럼. 아니, 그게 화두일 것이다. 불가(佛家)에만 화두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선가의 깊은 경지를 감히 짐작할 바는 아니나, 나름대로 정의하자면, 꾸준히 남아서 해결을 기다리는 문제의식, 풀려고 늘 지니고 다니는 문제의식이 넓은 의미의 화두가 아닐까 한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갖는 질문도 그런 화두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공부란 답을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질문을 잘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호기심이 질문을 낳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 호기심을 풀기 위해서라도 질문을 잘 다듬어야 한다. 질문을 잘하는 것, 이게 모든 탐구의 첫 관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의심

 

송시열(1607~1689·왼쪽), 그리고 윤휴(1617~1680). 조선시대에 주자(朱子)의 주석과 다른 해석을 냈던 윤휴. 조선 사람들은 논쟁을 했을지언정, ‘주자의 주석에 손을 댔다 하여 사람을 죽이고 귀양을 보내는 야만적 행태’는 저지르지 않았다.

 

누구든 역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오류를 범한다. 그러므로 역사학도는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오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의심하는 것이다. 나 자신도 의심하고 자료도 의심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미 제출된 연구논문이나 저서도 의심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공인된 것처럼 보이는 역사적 진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것, 이것이 오류를 줄이는 첫걸음이다.

이를 건강한 회의주의(懷疑主義)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회의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간과되어온 질문을 제기하고, 공인된 답을 새로이 조망하고, 증거를 세심하게 재검토하는 자세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어떤 학자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책이 현실을 재단하던 시절!…조선의 사대부들은 제 손으로 책을 고르지 못했고, 주어진 책은 도무지 버리지를 못했다.…주자의 주석에 손을 댔다 하여 사람을 죽이고 귀양을 보내는 야만적 행태가 멀쩡히 자행되어서는 만만 안 되는 일이었다.”

조선시대를 두고 했던 통탄이다. 실제로 나는 이 ‘통탄’의 배경이 무엇인지 몰랐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 이 일이 언제, 누구의 일을 가리키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몇 차례 그분에게 전화를 했는데, 통화가 성사되지 못했다.) 추론컨대 문맥으로 보아 양란(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정조(正祖) 이전인 것으로 보였을 뿐이다. 그건 확실했다. 아마 백호(白湖) 윤휴(尹?)에 대한 서술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근사하리라 생각한다. 조선 성리학에 대해 ‘정통과 이단’의 투쟁이라는 인상을 갖게 했던 미우라 구니오(三浦國雄)의 논문이 나온 이후, 곧잘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윤휴의 논쟁을 두고 위와 같은 인식에 바탕을 둔 서술이 많기 때문이다.

 

 통탄

사실을 기초로 앞의 인용문을 살펴보자. 이 인용에는, ‘주자학을 신봉하는’ 송시열이 ‘주자학과 다른 경전 해석을’ 했던 윤휴를 ‘이단’이자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귀양 보내고 사약을 내려 죽게 했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는 학계의 매우 일반적인 통념이기도 하다. 이러한 통념에는 주자학(=성리학)과 견해가 다르면 좋은 나라 사람, 같으면 나쁜 나라 사람이라는 식민주의 콤플렉스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 내가 쓰는 학술용어로는 ‘콩쥐팥쥐론’이다.

성리학과 ‘다른’ 해석을 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다른 해석’이 ‘왜’ 그 사회에 기존 학설들보다 더 기여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사상사 연구에서는 그게 빠져 있다. 성리학과 다른 해석이라는 것만으로도 용서가 된다. 희한한 학문 풍조가 아닐 수 없다. 기실 간단한 몇 가지 사실만으로도 윤휴는 송시열보다 퇴행적이고 과격하다.(나의 책, ‘조선의 힘’, 오래된 미래, 조선성리학 참고) 그런데도 주자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윤휴는 좋은 나라 사람이 됐다. 앞으로 더 논의를 거치더라도, 그 논의가 진전을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동안 조선 사상사를 보는 우리의 ‘태도’만은 고쳐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학문 같지 않은 논의를 학문의 탈을 쓰고 계속하는 셈이 될 터이므로.

 

진실

윤휴는 사약을 받았다. 그러나 윤휴는 주자 주석과 다른 해석을 저술한 탓에 귀양을 가고 사약을 받은 것이 아니다. 윤휴의 ‘중용신주(中庸新注)’에 대해 사문난적이라는 송시열의 비판은 효종 4년(1653)경에도 있었다. 그런데 숙종이 즉위하고 서인이 실각한 뒤 남인 정권에서 윤휴가 우참찬(右參贊)으로 있다가 귀양을 간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후사(後嗣)가 없던 숙종이 건강이 악화되자 조정에서는 병권을 둘러싸고 김석주(金錫胄) 등 외척과 허적(許積) 등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들의 대립이 치열했다.

윤휴는 체찰부(體察府)를 다시 설립해 허적이 당연직으로 도체찰사를 맡고, 자신이 부체찰사를 맡으려고 했다. 남인 중심으로 병권을 잡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안 숙종은 김석주를 부체찰사에 임명했다. 윤휴는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후일 이 사건이 사사(賜死)되는 이유가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를 관리, 단속하라는 말이 위의 행위와 연결돼 숙종의 버림을 받았던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조선시대에 ‘주자의 주석에 손을 댔다 하여 사람을 죽이고 귀양을 보내는 야만적 행태’는 없었다! 이런 기초적인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고 쓰는 행태야말로 야만적이다. 아! 이 기가 막히는 역설! 안타깝게도 조선 사상계에 대한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적 접근으로 실제 사상계의 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오히려 자신들의 편협한 편견으로 도배했다. 단지 앵무새처럼 ‘정통과 이단’‘사문난적’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의 반복을 학문의 이름으로 포장했을 뿐이다. 그래서 남은 것은 사실의 왜곡과 오해, 그리고 답답한 편견뿐이었다.

 

비판

 

 

파리의 에펠탑. 에펠탑은 1889년 파리 박람회가 보여준 문명과 야만의 질서를 공간화한 것이다.

역사 문헌은 종종 가짜인 경우도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라고 알려진 중세 문서의 진위(眞僞) 논쟁이 대표적이다(리처드 말리우스. 멜민 페이지 지음, 남경태 옮김, ‘역사 글쓰기, 어떻게 할 것인가’, 휴머니스트, 2010). 그 문서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황의 도움으로 나병이 치료되자 그 보답으로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서유럽의 정치적 지배권을 로마 교황에게 양도하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이후 오랫동안 그 문서는 유럽에서 교황이 세속 군주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로 사용됐다.

15세기 이탈리아의 로렌초 발라는 그 문서에 의심을 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치세에 관해 기록한 사람들 중 왜 아무도 그가 나병에 걸렸다는 사실이나 그 기증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왜 그 문서에 훨씬 후대에 만들어진 용어가 사용된 걸까? 왜 9세기까지 누구도 그 문서를 인용하지 않았을까? 왜 그 문서에는 여러 가지 역사적 오류가 있을까? 결국 발라는 문서의 내용이 실제의 역사적 사건과 무관하고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작성된 것이 아니라고 추론했다. 그리고 그의 견해는 훗날 공인됐다.

 

위조

하지만 이런 의심이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한 동양학자 에드먼드 백하우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1944년에 죽은 뒤 30년이 지나 그의 회고록이 발견됐고, 이는 옥스퍼드대학 보들리언 도서관에 기증됐다. 그 회고록이 다소 외설적이라는 평이 있어 트레버-로퍼에게 분석을 의뢰했다. 그런데 백하우스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위조자(僞造者)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는 중요 문헌을 정교하게 위조했고, 중국 문헌 자체도 엉터리였다(Trevor-Roper, H. R., Hermit of Peking - The Hidden Life of Sir Edmund Backhouse, Dufour Editions, 1993년, 남경태 역, 앞의 책, 재인용).

트레버-로퍼는 백하우스가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 즉 왜 회고록까지 꾸며내면서 사기극을 벌였는지 고민했다. 그의 결론은 이러했다.

“그에게 역사는 학문도 아니고 세상을 이해하는 수단도 아니었다. 보상심리의 대상이자 세상을 회피하는 수단이었다.”

그런데 6년 뒤 트레버-로퍼 교수는 논쟁이 된 역사기록을 만났다. 1983년 독일 잡지 ‘슈테른(Stern)’에 새로 발견됐다는 아돌프 히틀러의 일기를 발췌한 기사가 실렸다. 경험이 풍부했던 트레버-로퍼는 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하나의 문헌이든 이런 문헌이든 서명은 쉽게 위조할 수 있다. 그러나 35년에 달하는 기간에 대해 일관성 있는 기록을 조작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비평가들은 틀림없이 공격을 가하겠지만 이런 문헌을 작성한 엄청난 노력은 쉽게 부정될 수 없다. 그 기록물은 사실 개별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문서의 집합일 뿐만 아니라 전체로서 일관성을 가진다. 일기는 그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것이 그 문헌을 신뢰할 수 있는 내적 증거이다.”

그러나 결국 이 일기는 위조임이 밝혀졌다. 트레버-로퍼 같은 명성이 높고 이론적으로 무장된 역사학자마저 사기극에 말려들었던 것이다. 논문을 쓸 때 1차 사료의 진위를 따질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회의(懷疑)의 중요성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논두렁에 서 있는 허수아비. 허수아비는 논두렁에만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의 마음에도 허수아비를 세울 수 있다. 거기에 나쁜 감정을 품으면 역사는 왜곡의 길로 한없이 빠져든다.

 

“오류는 단지 실수 자체가 아니라 실수에 빠져드는 방식이다. 오류는 잘못된 추론을 가리킨다. 참된 사실의 전제에서 잘못된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다.”(David H. Fischer, Historians′Fallacies, HarperPerennial, 1970). 데이비드 피셔의 말이다. 그의 책은 역사 탐구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오류를 잘 정리한 책으로, 앞으로 우리도 그의 구획에 따라 하나씩 차례로 검토할 예정이다. 한때 그의 책이 나오고 나서 역사학자들은 그 책에 자신의 이름이 나오지나 않는지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오늘은 그가 말한 대략을 소개해 이해를 돕고자 한다.

하나의 원인을 찾으려는 데서 생기는 오류. 운이 좋게 간단한 사건에서 특별한 이유를 찾아낸다면 좋겠지만, 세상일이 그렇듯이 대개 이런 운은 드문 편이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에 쉽고 단순한 원인을 찾고 싶다는 유혹, 빨리 버릴수록 좋다. 흔히 그 사람의 계급, 출신 등을 이유로 행위를 설명할 때 자주 발생한다. 이 경우 타당성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다. 역사 사건의 설명으로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원인은 로마인들이 납 수도관의 물을 마셨기 때문이라든지, 미국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패배한 원인은 리 장군이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졌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들 수 있다. 복잡한 힘의 작용으로 일어난 사건은 복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한국사 해석에서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예전 어떤 공영방송 프로그램에서, “인조반정은 조선을 기울게 한 치욕의 역사로 남았다”고 단정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조선을 두 번이나 침략해 조선인민의 생활터전을 유린하고 포로로 잡아간 후금에 대해서는 ‘대륙에 떠오르는 후금’ ‘중원을 점령한 후금’ ‘여진 1만이 되면 천하가 감당할 수 없다’는 말로 그 ‘위세’를 치켜세우며 조선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했다. 후금 방송인지 조선 방송인지 알 길이 없다. 이건 차치하자.

조선은 인조반정 이후 약 290년 있다가 망했다. 290년이라…. 보통 중국 한 왕조의 역사 중 200년을 넘은 경우가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이런 해석은 어떨까 장난삼아 해본다.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패퇴한 것은 남북전쟁 때문이다.” 아니, 아예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패퇴한 것은 1776년 독립전쟁 때문이다.”

또한 선행한다고 해서 뒤에 벌어진 사건의 원인은 아니다. 이런 오류는 특히 사건들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필연적인 원인이 아닐 경우에 나타난다. 피셔는, 1929년 10월 뉴욕 주식시장이 붕괴하고 이후 대공황이 뒤따랐지만, 이것을 두고 주식시장의 붕괴가 대공황을 초래했다고 해석하면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둘은 인과 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 위기(Crisis)의 서로 다른 현상이라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과도한 단순화의 오류도 주의해야 한다. 이는 내가 많이 지적하는 문제다. 19세기 역사가들은 역사는 필연적인 진보의 과정이며, 그 결말도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백인종이 전 세계 유색인종보다 우월하므로 결국 승리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것이 더 나은 세계로 가는 진보라고 여겼다. 문명(文明)이란 말도 19세기 중반에 문명-야만의 위계질서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식민지 사람(인종)을 전시하는 이른바 ‘식민지관’이 1855년 만국박람회(런던) 때 최초로 등장했다. 파리코뮌 이후의 경영위기 타개책에서 비롯된 동물원의 원주민 전시가 식민지관의 인종 전시로 형식을 바꾸어 제도화된 것은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1889년의 파리 만국박람회부터였다. 위압적인 에펠탑과 박제화된 식민지관의 수직적 위계는 문명과 야만의 ‘질서’를 공간화함으로써, 박람회가 제국주의의 권력 장치이자 국민국가의 문화 장치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위기지학(爲己之學)’

이런 단순화는 역사가 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고 본 역사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신이 볼 때) 선(善)을 행하면 번영할 것이고 신의 계율을 어기면 몰락하리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기독교와 함께 어떤 인간이나 사회의 불운(不運)조차 죄(罪)가 되었다. 그러나 차분히 살펴보면 역사의 소용돌이와 파도는 그렇게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양상을 띠지 않는다.

유사하게 과거를 알면 미래의 실수를 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지나친 단순화에 속한다. 이런 사고는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인간사로 흘러드는 것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발명, 사고방식, 발상의 조합은 우리의 예측을 완전히 뒤집어버릴 수 있다. 에릭 홉스봄도 지적했듯, 역사가들은, 특히 현재 역사가들은 역사가 미래와 현재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해 대단히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역사의 필연적인 진보를 누구도 예견하지 않는다.

피셔는 ‘허수아비’라는 용어와 관련된 오류를 지적한다. 상대가 아직 아무런 입장도 취하지 않았는데, 또는 뚜렷한 증거도 없이 어떤 사건을 적의 탓으로 돌릴 때 허수아비를 내세운다. 송나라 때 간신(奸臣) 한탁주(韓?胄)는 명장(名將)이자 충신 악비(岳飛)를 모함할 때, ‘막수유(莫須有)’의 논리를 내세웠다. ‘드러난 것은 없지만 틀림없다’는 말이다. 과거 군사정권에서, 아니 그 후로도 얼마나 추정과 가정에 의해 ‘적(敵)’이 만들어졌는가?

대개 이런 경우는 감정에 치우치든지 사심(私心)이 개입된다. ‘실학(實學)’이라는 용어를 내세워 실(實)과 허(虛)를 대립시킴으로써 성리학을 ‘허학(虛學)’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허수아비의 가까운 실례일 텐데, 여기에 가학(家學)을 숭양(崇揚)하려는 사심이 덧붙여지면 자기 조상은 좋은 사람, 그렇지 않은 학자들은 나쁘거나 흠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이런 오류의 바탕에는 논리나 증거로 입증하기보다 어떤 입장이나 주장을 하는 사람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 유혹을 직시해야 한다. 서로 대립되는 견해를 공정하게 취급하고 정확하게 기술하며 객관적으로 비판하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올바른 의미의 공부가 된다. 남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신의 성숙을 가져오는 공부, 조선시대 말로 ‘위기지학’이 되는 것이다.

시류에 영합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자세도 필요하다. 내 용어로는 ‘벌거숭이 임금님’이 되겠다. 이는 다른 많은 역사가가 동의한다고 해서 무조건 옳다고 보는 입장이다. 편할지 모른다. 또 전문가가 합의를 무시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러나 전문가라고 해서 집단적 편견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시장(市場)의 우상(偶像)은 어디서고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소수의 입장에 처하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이다. 어떤 심리학 실험은 인간은 무리에서 벗어나느니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수의 의견을 따르려는 민주적인 욕구가 반드시 역사적 결론에 도달하는 최선의 길은 아니다. “학문은 다수결이 아니다.” 훌륭하고 바람직한 역사 연구는 역사가들의 합의에 구애되지 않고 증거를 끈질기게 추구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하지만 합의된 사실을 논박할 때는 더욱 충분한 증거가 필요하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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