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醉月 2013. 1. 11. 15:10

미륵 신앙에서 아미타 신앙으로 경주 남산 배리(拜里) 미륵삼존불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은 신라 초기부터 박씨 왕족들의 터전이었다. 시조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을 비롯해서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에 이르는 초기 4대 왕의 왕릉이 모두 서남산 초입인 탑정동에 들어서 있는데, 현재 사적 172호로 지정된 오릉(五陵)이 그곳이다.

그곳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가면 역시 박씨 왕이었던 7대 일성왕릉(사적 173호)이 있고, 언양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배동(拜洞)에 6대 지마왕릉(사적 221호)이 있다. 지마왕릉을 지나면 8대 아달라왕과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릉이 한데 모여 있으니 이를 삼릉이라 하여 사적 219호로 지정돼 있다. 그 다음이 55대 경애왕릉(사적 222호)으로 견훤에게 피살된 비운의 왕이 묻힌 곳이다.

 

이들 왕릉의 주인공들이 모두 박씨이니 신라 건국 초기부터 망할 때까지 근 1000년 동안 서남산 일대는 박씨들의 터전으로 대를 물려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경애왕이 포석정(사적 1호)을 배동 초입에 지었던 모양이다. 아마 그 터가 부왕인 신덕왕이 등극 전에 살던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였기 때문인 듯하다.

 

서남산 일대가 박씨들의 세습 터전이란 사실은 이미 11회 <삼화령석미륵>에서 밝힌 바 있다. 일성왕릉 부근의 탑정동 남간마을이 자장율사의 누이동생 남간부인 법승랑(法乘娘)이 출가해 살던 동네인데, 그 남편 사간(沙干) 재량(才良)이 일성왕의 후손인 박씨라고 하였다.

 

그 자제 삼형제가 모두 출가하여 외숙부인 자장율사를 도와 진골 김씨 왕족이 미륵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종교적 신비와 물증으로 확인시키기 위해 반불교 내지 반진골적 성향이 강한 박씨 마을 뒷산인 삼화령에 <삼화령 미륵불삼존상>(11회 도판 10)을 조성해 모셔 놓았으리라고 했다.

 

아마 이때 자장율사와 국교(國敎) 대덕, 의안(義安)대덕, 명랑(明朗)법사 등 3형제의 숙질들은 벌써 김춘추가 왕위를 계승하여 선덕여왕의 미륵보살 시대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삼화령에 미륵보살이 아닌 미륵불상을 조성해 남자 왕의 출현을 예고했던 것 같다.

 

김춘추는 그 부친의 이름이 용수(龍樹, 570년 경∼645년 경)였다. 그런데 ‘미륵하생경’에서 미륵불이 하강해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깨달아 부처가 되고 3회의 설법으로 중생을 제도하여 미륵불국토를 만들어 간다 했으니 용수, 즉 용화수 밑에서 태어난 김춘추(604∼661년)는 미륵불일 수밖에 없었다.

 

자장율사와 명랑법사 형제들은 이런 이념을 신라사회에 계속 불어넣는 일을 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반불교적이고 반진골적 성향이 강한 박씨들을 회유하여 이들의 이해와 동의를 구하기 위해 삼화령에 우선 <삼화령미륵불 삼존상>을 의좌상으로 조성해낸 다음, 지마왕릉 못 미친 곳의 선방곡(禪房谷, 새방 뜰)에 다시 보물 63호인 <배리미륵불삼존상(拜里彌勒佛三尊像)>(도판 1)을 만들어 세우는 듯하다. 이는 대체로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년)이 등극하던 654년 전후한 시기의 일이었을 듯하다.

 

<배리미륵불삼존상>은 흔히 <선방곡3체석불(禪房谷三體石佛)>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이는 1923년 조선총독부의 발굴조사와 복원작업을 지휘했던 일본인 학자 대판금태랑(大坂金太郞)이 붙인 이름이다.

 

발굴조사 당시에는 삼존불이 모두 넘어져 있었고 제자리를 떠나 이리 저리 흩어져 있었다 한다. 다만 본존불의 대좌 일부만 제자리에 남아 있었으나 이것도 그 위에 본존을 세울 수 없을 정도로 고의로 파괴돼, 바로 그 뒤에 자연석을 놓고 본존불을 세운 다음 적당한 간격으로 좌우 협시보살을 세워 놓았다.

 

전체적으로 보아 삼존불 모두 6세기 말의 수나라 양식을 계승한 느낌이 강하다. 4등신의 비례를 보이는 작달막한 키(8자 8치)와 큰 얼굴(2자 2치 7푼)이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소년 소녀의 체구와 같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양식적 공통점을 보여준다.

 

중국 산서성 박물관 소장의 <의씨현(氏縣) 출토미륵불입상>(도판 2)과 <배리미륵삼존불입상>의 주불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양식적 공통성을 바로 실감할 수 있다.

 

우선 얼굴이 정사각형에 가까우리만큼 둥글넓적하고 앳된 동안형이다. 그리고 육계가 낮고 넓어 얼굴이 더욱 넓적하게 보이도록 한 것도 서로 같다. 목이 굵고 짧으며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을 지은 오른손과 왼손의 표현도 근본적으로 같다. 다만 <의씨현출토미륵불입상>의 왼손이 옷자락을 잡고 있어 순수한 여원인이 아니라는 점이 다르지만 손의 위치는 동일하니 자세의 동질성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오른쪽 어깨를 살짝 덮어 내린 반단식(半袒式; 어깨를 반쯤 드러내는 형식) 2중 착의법이 같다. 다만 옷주름의 처리에서 수나라 불상은 빗금과 부챗살 모양으로 사실성을 드러낸 데 반해 신라 불상은 물결무늬로 도식성을 드러낸 것이 크게 다르다. 이는 신라 상이 거의 반세기나 뒤에 수나라 상을 모방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금방 수긍할 수 있는 문제이다.

 

좌우 양손의 팔뚝을 따라 내려온 옷자락의 경우 신라 상은 짧고 수나라 상은 길어서 신라상을 더욱 어린애처럼 보이게 한다. 이는 당시 신라사람들이 추구하던 천진무구한 소년기의 인체미를 표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니, 아직 화랑이 존중되는 사회 분위기의 반영이라 해야 할 것이다.

 

두 상 모두 불꽃 형태의 광배를 지고 있었으나 수나라 상은 파손되었고 신라 상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칼은 수나라 상이 물결무늬의 곱슬머리 표현인데 반해 신라 상은 나발이다. 신라 상의 육계가 2중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광배 끝을 육계 위로 포개듯 마무리지음으로써 일어난 잘못 때문이다.

 

두 협시보살상 역시 수나라 시대 보살상 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보는 방향에서 오른쪽 보살 입상은 장안 부근 출토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보살입상>(도판 3)과 흡사하며 왼쪽 보살 입상은 <개황(開皇) 12년(592)명 관세음보살입상>(도판 4)과 그 양식 기법이 비슷하다.

 

다만 수나라 보살 입상이 더 화려하고 정교한 영락 장식으로 꾸며져서 완벽한 세련미를 과시한데 비해 신라보살입상은 영락과 천의가 단순 소박하여 소녀다운 천진성을 드러낸 것이 서로 다를 뿐이다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의 애기보살상을 바로 뒤잇는 양식 기법이라 하겠다. 굵고 소박한 영락 한 줄이 더 첨가될 정도의 꾸밈새가 진행된 것이다.

 

 

아미타 삼존불의 출현

중국 문화의 발상지인 황하 유역은 지구상에서 농업 문명을 일으키기에 가장 적합한 기후 풍토를 갖춘 지역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현실세계가 만족스러웠으므로 내세를 설정하는 종교나 현실 밖을 생각하는 우주 철학을 출현시키지 않았다. 다만 현실 생활에서 절대로 필요한 윤리 철학만을 발전시켰으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만 원만하게 유지하면 현실이 곧 극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한이 멸망한 이후 이민족의 침략으로 5호16국 시대가 전개되면서 끊임없는 전란으로 현실이 지옥으로 변하자 내세에 희망을 걸고 살 수밖에 없었다. 이에 외래 종교인 불교를 수용하여 이념 기반으로 삼고 이민족 지배하의 전란시대를 살아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람들의 현실적인 사고방식은 내세조차 현실에 직결시키려는 강한 집착성을 보여, 다음 시대로 예고된 미륵불 교화 시대가 중국에서 전개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미륵이 출현하여 현세의 고통을 제거해주기를 간절히 기원하게 된다. 이런 현세 구원적인 미륵신앙은 결국 미륵보살의 화신(化身)이 성군으로 하생하여 현세를 미륵불국토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대중의 열망에 따라 황제나 태후가 미륵의 화신을 자칭해 천하를 호령하는 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신라에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출현한 것도 이런 배경 아래에서 이루어진 사실이란 것을 이미 앞에서 살펴보고 나왔다. 그러나 272년에 걸친 분열의 시대가 끝나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589년), 그 통일의 대업을 당이 계승하면서 대중들은 더 이상 미륵의 출현을 갈망하는 현세구원적인 신앙에만 매달리려 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중국 불교 교단에서는 도작(道綽, 563∼645년)과 선도(善導, 613∼686년) 등이 출현하여 아미타불(阿彌陀佛), 즉 무량수불(無量壽佛)이 교화하고 있는 서방(西方) 정토(淨土) 극락(極樂)세계로 왕생(往生)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아미타 신앙을 고취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런 아미타 신앙은 조위(曹魏) 소릉공(邵陵公) 가평(嘉平) 4년(252)에 서역승 강승개(康僧鎧)가 번역한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 2권과 오(吳)나라 황무(黃武) 2년(223)에서 건흥(建興) 2년(253) 사이에 서역승 지겸(支謙)이 번역한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2권 및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요진(姚秦) 홍시(弘始) 4년(402)에 번역한 ‘불설아미타경’ 1권 외에 서역승 강량야사(畺良耶舍)가 유송(劉宋) 원가(元嘉) 원년(424)에서 19년(442)에 걸쳐 번역한 ‘불설관무량수경(佛說觀無量壽經)’ 1권 등을 기본 경전으로 삼고 있었다.

 

그중에서 ‘불설무량수경’ 2권과 ‘불설아미타경’ 2권에서는 각각 권 하에서 거의 비슷하게 석가모니불이 미륵보살에게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선행을 받들어 행하고 악행을 짓지 않으면 극락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미타경’을 독송하면 반드시 극락세계로 가서 태어나 아미타불을 뵐 수 있다고 하면서 미륵보살과 아난존자가 이 경전을 잘 받들어 세상에 널리 전파하라고 부탁한다. ‘무량수경’ 권 하에서 석가세존이 이 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 대목을 옮겨 보겠다.

 

“불타께서 미륵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는 것을 만나기 어렵고 뵙기는 더욱 어렵다. 여러 부처님의 경전과 말씀을 얻기도 어려우며 선지식을 만나 법을 듣고 행하는 것 또한 어렵다. 만약 이 경전을 듣고 믿고 즐거워하며 받아 가진다면 어려운 중에 어려움이 이 어려움보다 지나친 것은 없으리라. 이런 까닭으로 나는 이렇게 짓고 이렇게 말하였으며 이렇게 가르쳤으니 응당 믿고 따라서 법대로 수행하도록 하라. 미륵보살 및 시방에서 온 여러 보살 대중과 장로 아난 등 여러 성문 등 일체 대중이 부처님이 설하신 바를 듣고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와 같이 미륵보살을 통해 서방정토인 극락세계로 왕생하는 방법을 가르치게 되니 자연스럽게 미륵신앙에 젖어 있던 대중들은 미륵신앙을 청산하면서 미타정토 신앙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다 구마라습이 번역한 ‘아미타경’ 1권이 이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그곳에서 아미타불을 마음 속에 간절하게 생각하며 ‘아미타불에 귀의합니다’라는 의미인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열심히 외우기만 하면 극락세계로 가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염불인데 거기에다 아미타불의 양대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나무관세음보살’ ‘나무대세지보살’ 등으로 함께 부르면 더욱 신속하게 극락왕생할 수 있으며, ‘아미타경’을 읽고 외울 수 있다면 더욱 빠르고 확실하게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단순 신앙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미 대승사상이 출현한 이래 600년의 세월이 흘러 그동안 경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경전에 주석을 붙이고 다시 그 주석에 또 주석을 붙이는 일을 거듭하였으므로 이른바 논(論)과 소(疏)가 경전을 압도할 만큼 쌓이게 되었다. 그래서 교리가 문자와 논리의 늪에 빠질 형편에 이르렀으니 일반 대중들이 교리를 통해 불교를 이해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따라서 염불 신앙과 같은 단순 신앙이 대중들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더구나 통일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무수한 살육이 자행되면서 미륵불이 출현해도 현실의 예토(穢土; 더러운 땅, 오염된 땅)는 정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이 시대가 이미 정법(正法)이 끝나는 시대인 말법(末法) 시대이므로 지금 이 현실에서 구원을 얻기는 어렵다는 판단 아래 모두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신앙으로 쏠려가게 되었던 듯하다.

 

그래서 수나라가 통일을 이룩한 직후부터 아미타삼존상이나 관세음보살상 등이 차차 많이 조성돼 가는 듯하니, <개황 12년(592)명 관세음보살상>(도판 4) 등이 이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아직 관세음보살상은 그 정형이 확립되지 않았던 듯, 이 보살상의 보관에는 정면에 화불이 조각돼 있지 않다. 아직까지는 상생(上生)미륵보살의 보관 정면에 화불이 표현되는 전통을 지켜왔기 때문에 갑자기 관세음보살의 보관에 화불을 표현할 경우 미륵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서로 구별되지 않을 터이므로, 서로간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관세음보살의 보관에 화불을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나 추정한다.

 

그러나 곧바로 ‘불설관무량수경’의 대량 유포에 따라 그곳에서 설한 대로 관세음보살 보관 정면에 화불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관세음보살의 상 양식을 확정해 놓으니, 1976년 선산에서 출토된 <국보 184호 금동관세음보살입상>(도판 5)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수대의 관세음보살상 양식은 뒤이어 백제와 신라에 영향을 미쳐 <보물 195호 금동관세음보살입상>(도판 6)이나 <국보 183호 금동관세음보살입상>(도판 7)과 같은 우수한 관세음보살입상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선도산(仙桃山) 아미타 삼존대불

경주박물관 강우방 관장이 실측 조사하여 논고한 바에 의하면 경주 선도산 정상 아래 동남면한 절벽을 깎아 만든 마애삼존대불은 아미타 삼존이라 한다. 좌협시가 분명히 보관에 화불을 표시하고 있다 하였다.

 

그러나 암벽의 석질이 잘 부스러져 떨어지는 안산암(安山岩)이라서 높이 약 13m, 폭 약 20m의 절벽에 삼존을 다 새겨내지 못하고 주불만 제 바위에 새긴 다음 좌우 협시 보살상은 백색 화강암으로 따로 만들어 세워 삼존의 구도를 이루어 놓았다는 것이다.

 

<선도산아미타마애삼존대불>(도판 8)이 있는 선도산 정상에 가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본존상은 현재 눈 부위 이상이 모두 부스러져 떨어져 나갔는데 이는 인위적인 파괴가 아닌 박락 현상에 따른 파손이라고 한다. 현존 높이가 5.9m인데 복원 수치는 약 7m에 해당한다고 한다. 시무외여원인을 지었으나 왼손의 여원인은 새끼손가락과 무명지를 꼬부려 <서선마애삼존불>(제 8회 도판 14)의 주불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옷주름마저 정면에서 타원형으로 중첩하는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서산마애삼존불>이 모본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우협시 보살의 형식도 <서산마애삼존불>의 우협시 보살 형식을 철저하게 모방하여 두 손으로 보주를 받쳐 든 모습이 같다. 천의가 정면에서 2중으로 타원형을 지으며 흘러내린다든지 두 팔뚝에서 양쪽 측면으로 발 아래까지 떨어진다든지 하는 것이 모두 같다.

 

그러나 양식 기법은 수나라 삼존불 입상 양식이어서 <돈황 제427굴 삼존불 입상>(도판 9)과 동일 양식이다. 아마 육계도 <돈황 제427굴 삼존불 입상>처럼 넓고 낮았을 듯하다. 입술이 얇고 입을 굳게 다문 듯 표현한 것도 수나라 불상 양식 기법을 보인 것이다.

 

좌협시인 관세음보살은 우협시인 대세지보살과 함께 백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서, 마애 석불로 조각된 주불의 좌우 벽에 기대어 세워놓았다. 딴 산에서 떼어낸 돌을 옮겨다 조성해 세웠으므로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그 석재를 운반해 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높이가 4.55m에 달하는 거상이기 때문이다.

 

이에 돌을 두 덩어리로 분리하여 옮겨다가 상하를 따로 조성하여 조립해 세우는 기지를 발휘하였다. 한 덩어리의 돌로 무릎 이하에 해당하는 부분을 감실 형태로 파내 땅에 묻어 고정시킨 다음 다른 한 덩어리의 돌로 발목까지 조각한 보살신을 그 감실 안에 끼워 세우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감실 안 밑바닥에는 발의 표현이 되어 있고, 바닥 아래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연화대좌를 상징하며, 감실 좌우벽은 천의자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턱진 보살신의 천의자락과 감실벽을 이룬 천의자락이 서로 맞물리도록 계산해 만들어서 서로 끼워 맞춘다면 두 돌로 하나의 석상을 감쪽같이 만들어 세울 수 있게 된다. 이런 공법으로 큰 돌을 운반해 오는데 들이는 인력 낭비를 최소화하면서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협시보살상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관세음보살상의 보관은 근본적으로 모란꽃잎 같은 꽃잎 장식 세 개를 세우고 관띠로 이를 연결 고정한 삼산관 형식인데, 이는 수나라 보살상의 일반적인 보관 양식이다. 다만 정면 꽃잎 장식 위에 화불좌상이 표현되어 관세음보살입상임을 드러내는데 아직 윤곽만 희미하게 파놓은 상태이다. 오른손으로 시무외인을 짓고 왼손으로 정병을 들고 있다.

 

협시보살이 시무외인을 지은 것은 특이한 예라 하겠는데, 혹시 이는 <서산마애삼존불>의 좌협시 반가사유상의 턱받친 손 모양을 의식하고 이런 표현을 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관세음보살상의 얼굴을 둥글게 표현하고 대세지보살상의 얼굴을 깊게 표현하여 한쪽은 미소띤 화사한 표정으로, 다른 쪽은 정색한 듯 근엄한 표정으로 만들어낸 것도 <서산마애삼존불>의 기본 구도를 따르려 했던 듯하다.

 

대세지보살이 4.62m로 조금 큰 것도 이런 구도의 영향일 것이다. 보관 윗부분에 감실 같은 흔적이 남아 있어 이곳에 정병(淨甁)을 조각해 끼워 넣지 않았던가 추측하고 있지만 아직 속단할 일은 아니다.

 

어떻든 선도산 정상에 거대한 <아미타삼존마애대불>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신라 사회가 이제 미륵신앙에서 벗어나 아미타신앙으로 전환해 간다는 사실을 표방한 것이라 해야 할 터이니, 이런 일이 언제 어떻게 해서 일어날 수 있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다.

 

선도산은 경주의 백호(白虎)에 해당하는 산으로 서악(西岳)이라 불리는데 일찍이 김씨왕족이 그 동쪽 기슭을 차지하고 있었다. 법흥왕릉(사적 76호)이 동쪽 기슭의 맨 남쪽에 들어서면서부터 진흥왕릉(사적 77호) 진지왕릉(사적 78호) 태종무열왕릉(사적 20호) 김인문묘 등이 차례로 세워진다. 아마 용수의 무덤도 태종무열왕릉 군(群) 4무덤 중에 하나일 것이다.

 

따라서 태종무열왕이 그 8년(661) 6월에 58세로 돌아가 그 부친 용수의 무덤 아래에 왕릉을 쓴 다음 비석을 세울 때에 이 <선도산아미타마애삼존대불>도 함께 조성되지 않았나 한다. 그러니 문무왕 원년(661)으로부터 3년(663)에 걸치는 사이에 <선도산아미타마애삼존대불>이 조성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아마 법흥왕 이래 역대 김씨 진골왕들, 그중에도 진흥왕 진지왕 태종무열왕으로 이어지는 적장손 계열의 순수 진골왕들의 왕생 극락을 기원하는 동시에 태종무열왕의 추복을 비는 의미로 아미타삼존상을 조성했을 터이다. 이제는 돌아간 태종무열왕이 미륵불이 아닌 아미타불이 되어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백제 위덕왕의 초상 조각인 <서산마애삼존불>을 범본으로 삼아 그보다 세배는 더 큰 규모로 태종무열왕의 초상 조각인 <선도산아미타마애삼존대불>을 조성해냈을 듯하다. 이 <선도산아미타마애삼존대불>은 선도산 정상에서 바로 태종무열왕릉을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적 근거를 마련해준 것은 문무왕의 매제이기도 했던 원효(元曉, 617∼686년)대사였던 듯하다. 그는 벌써 아미타 삼존불 조성의 이념적 근거인 ‘불설관무량수경’을 완전히 이해하여 ‘불설관무량수경종요(佛說觀無量壽經宗要)’ 1권을 저술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거의 동시에 백제 웅천주 출신 학승인 경흥(憬興)대덕이 나와 ‘불설관무량수경연의술문찬(佛說觀無量壽經連義述文贊)’을 지어 ‘불설관무량수경’을 일반에 더욱 널리 홍포함으로써 아미타 신앙은 점차 일반 대중에게 확산돼 나가고 이에 따라 아미타삼존상의 조성도 증가해 나간다.

 

 

백제부흥 운동

백제 의자왕(600년 경∼660년)이 그 20년(660) 7월18일에 당장 소정방에게 항복하여 백제가 멸망했지만, 백제 유민들은 즉각 각처에서 일어나 침략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부흥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좌평 정무(正武)가 두시원악(豆尸原嶽, 연산 도솔산으로 추정)에서 일어나 나당 연합군을 납치 살육하고, 흑치상지(黑齒常之)는 임존성(任存城, 대흥)을 근거로 치열한 항쟁을 벌인다. 이에 금돌성(金突城, 신창)에 본영을 차리고 있던 무열왕은 8월26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임존성을 직접 공략하지만 지세가 험준하고 저항군의 군사력이 3만여명에 이를 만큼 막강하여 실패하고 만다. 의자왕이 항복했는데도 소정방이 군율을 풀어 약탈을 허락했기 때문에 백제인들이 결연히 일어나 한데 뭉쳐 맹렬히 저항한 결과였다.

 

이에 소정방은 부흥의 구심점을 제거하기 위해 9월3일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 수뇌부 93인과 포로로 잡은 백성 1만2000인을 데리고 황급히 바다를 건너 귀환하고,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으로 하여금 1만 군사를 거느리고 부여에 남아 이들을 진압하도록 한다. 신라왕자 인태(仁泰)는 7000 군사를 거느리고 부장(副將)으로 이를 돕도록 하였다.

 

그러나 백제 저항군들은 9월23일 사비성을 공략하여 탈환하려 하고 나당 연합군은 이를 힘겹게 물리친다. 이런 와중에 당에서는 백제의 옛 땅을 직접 통치하려는 야욕으로 좌위중랑장 왕문도(王文度)를 9월28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파견하니 무열왕은 심기가 극도로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이 도처에서 일어나 저항하므로 이의 제압이 시급했기 때문에 10월9일에는 태자와 함께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이례성(禮城, 연산 도솔산성)을 공격하여 함락하니 부근 20여 성이 두려워서 모두 항복했다. 내친 김에 사비성의 탈환을 노리고 집결해 있는 부흥군 주력부대의 거점인 사비남령을 공격하여 1500인을 참수하고, 이어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11월7일에 격파하여 사비성 부근의 부흥군 세력을 소탕한 다음, 11월22일에 서라벌로 돌아와 백제 정벌의 논공행상을 행한다. 그 사이 백제 부흥군들은 주류성(周留城, 홍성)을 근거지로 부흥운동의 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복국(復國)사업에 돌입하고 있었다.

 

백제 해상활동의 근거지로 무녕왕 이래 백제 문화의 선진 지역이 되어 왔던 태안반도 일대는 당시에도 당연히 백제 수군의 근거지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 백제 수군이 소정방이 거느리고 온 강남 수군에게 변변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아산만과 남양만, 강화만을 한눈에 제압할 수 있는 해상 요충인 덕물도(덕적도)를 그대로 내주었다는 것은 전략상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것이 혹시 의자왕의 무능과 전횡에 따른 전략적 실수인지 아니면 수군을 장악하고 있던 부여복신과의 불화 탓인지 지금으로서는 밝힐 길이 없다. 어떻든 백제 멸망기에 태안반도의 실력자였던 부여복신이 수군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하다. 그 결과 의자왕은 수륙양군의 협공으로 쉽게 무너지게 되었다.

 

이후 복신은 태안반도의 중심지인 주류성을 근거지로 본격적인 부흥운동을 일으키는데 해상세력의 수장답게 해상세력으로 연결되어 있는 일본 수군 세력의 지원을 이끌어내려는 전략을 세운다. 그러기 위해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불러들여 왕으로 추대한다.

 

그러자 백제의 서북부, 즉 태안반도 일대가 모두 이에 호응하였다. 드디어 무열왕 8년(661) 2월에 복신은 승장(僧將) 도침(道琛)과 함께 사비성 탈환을 시도하기 위해 수륙 양군으로 진격하여 포위하지만, 백마강 입구에서 다시 나당연합수군에게 대패하여 수군 1만여 명을 잃는 손실을 입고 임존성으로 물러나온다.

 

한편 신라 조정은 2월에 사비성의 위급을 통보받자 이찬 품일(品日)을 대당장군으로 임명하여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구하게 한다. 품일은 3월5일에 군사를 나누어 두량윤성(豆良尹城, 정산)에 이르렀으나 이후 한달 6일 동안 공격하고도 함락하지 못하고 많은 병기와 군량만 잃은 채 4월19일 회군하고 만다.

 

신라군의 참패소식을 들은 무열왕은 장군 김순, 김진순, 김천존, 김죽지 등을 보내 이를 구원하게 하지만 이들이 고령 가시혜진(加尸兮津)에 이르렀을 때 벌써 패군이 거창 가소천(加召川)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회군한다. 격노한 무열왕은 패장들의 죄를 물어 엄벌에 처한다. 이런 판국에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 장군 생해(生偕)와 함께 술천성(述川城, 여주)과 북한산성(서울)을 차례로 공격하여 북한산성은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내우외환이 결국 무열왕을 격무에 시달리게 하고 노심초사하게 하여 수명을 단축시켰으니 이해 6월 무열왕은 급서하고 말았다. 그래서 태자 김법민(金法敏, 626∼681년)이 즉위하니 이가 문무왕이다.

 

문무왕은 즉위하자마자 부왕의 장례도 치르기 전에 아우 김인문 등이 가져온 당 고종의 칙서를 받고 당의 고구려 침략을 거들기 위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출진해야 했다. 6월에 벌써 소정방이 수륙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침략에 나섰다는 것이다.

 

문무왕은 8월에 서라벌을 떠나 선산 시이곡(始飴谷, 餘次里津)을 지나 상주 웅현(熊峴)을 넘어 청산(靑山), 문의(文義), 청주, 진천, 죽산, 이천으로 이어지는 노정을 잡고 떠나온다. 문무왕은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진주, 흠돌, 천존, 죽지 등 장군을 친히 거느리고 남천주(이천)까지 왔던 것이다. 남천주에서는 사비를 떠나 해로로 달려온 유인원 군대와 합류하여 다시 바다로 북진하려 하니, 백제 부흥군이 옹산성(甕山城, 수원 禿山城)에 진을 치고 이를 저지하려 한다.

 

문무왕은 이 사실을 알고 9월25일에 이를 격파하여 배후의 근심을 없앤다. 그리고 양식이 떨어져 발이 묶인 소정방 군에 다음 해(662) 정월까지 수레 2000여 대에 쌀 4000 석과 벼 2만2000여 석을 실어다 전해주니, 소정방은 겨우 굶어죽는 것을 모면하고 회군할 수 있게 되었다.

 

문무왕은 북한산주(서울)에 머물면서 김유신을 시켜 고구려 영토를 지나 평양 부근까지 와 있는 소정방에게 군량미를 전달해 주게 하는데, 김유신의 군대는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길에 임진강을 건너다 고구려 추격병에게 걸려 임진강 중류 호천(瓠川, 장단의 수탄)에서 격전을 벌이다가 오히려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다.

 

한편 백제 부흥군은 승장 도침이 스스로 영군(領軍) 장군을 일컫고 복신이 상잠(霜岑) 장군을 일컬으며 군세를 더욱 불려 나간다. 그래서 유인원과 유인궤 군대를 위협하고 신라의 구원군을 격파하여 다시 나오지 못하게 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미구에 복신이 도침을 시기하여 살해함으로써(661년) 세력이 크게 위축된다.

 

이에 유인원 등은 문무왕 2년(662) 7월에 두량윤성(정산), 대산성(大山城, 홍산) 진현성(眞峴城, 진잠) 등을 공격해 빼앗아서 신라로부터 군량미를 운반해올 통로를 확보한다. 이렇게 세력이 약화돼 가는 중에도 부여 복신은 신왕 부여풍과 화합하지 못하고 서로 시기하여 제거하려다 문무왕 3년(663) 부여풍이 먼저 부여복신을 살해한다.

 

부흥운동의 근거지인 태안반도 일대의 실력자인 부여복신을 살해했다는 것은 곧 부흥운동의 기반을 포기했다는 얘기이니, 나당연합군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래서 복신의 근거지이자 부흥운동의 근거지인 주류성을 치기 위해 수륙양군을 일으켜 사방에서 진격해 들어간다. 웅천주에서도 병선과 양곡선이 내려오고, 남양만과 덕물도에서도 병선이 발동했을 것이며, 남천주와 사벌주에서도 군사가 진격해 들어왔을 것이다.

 

이때 덕물도에는 손인사(孫仁師)가 거느린 당나라 수군 40만이 들어와 있었으며 문무왕은 김유신 등 28 장군을 거느리고 두량윤성과 주류성 공략에 앞장섰다.

 

이에 풍왕은 일본으로부터 수군을 불러들여 해상에서 격파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켜 보려 한다. 그러나 당나라 수군을 격파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일본 수군은 백강 입구의 해전에서 네 번 싸움에 네 번 모두 패배하여 400여 척의 배가 불태워지는 참패를 당하고 만다.

 

풍왕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사한 듯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고 풍왕의 왕자들인 부여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 부하를 거느리고 왜인과 함께 항복하니 나머지 백제의 모든 성들도 따라서 항복하여 백제 부흥운동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지수신(遲受信)만은 임존성에 웅거하며 끝내 항복하지 않았는데 이곳 출신인 흑치상지와 사타상여(沙咤相如) 등이 항복하여 적의 앞잡이가 됨으로써 결국 이들의 공격으로 임존성마저 함락당한다. 그래서 지수신은 가족을 버려둔 채 단신으로 고구려에 망명하고 말았다. 이로써 백제 부흥운동의 기반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사실 임존성의 저항이 얼마나 강하였던지 나당연합군이 10월21일부터 11월4일까지 보름 동안 쉬지 않고 공격하였으나 끄떡도 하지 않아, 결국 신라군은 이를 포기한 채 11월4일 회군하면서 설리정(舌利停, 서천)에 이르러 논공행상을 베풀었다 한다.

 

고구려의 멸망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것은 신라에 그 영토를 넘겨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라까지 복속시켜 당의 군현으로 편입시킴으로써 과거 한사군 시대와 같이 식민통치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에 당은 신라가 백제 영토를 차지하려는 의도를 처음부터 차단하기 위해 백제 부흥운동을 일단 잠재운 다음부터는 백제의 옛 태자 부여륭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귀국시킨 다음 백제의 옛땅을 관리하게 하고 과거의 국경대로 그 경계를 구획짓게 하는 회맹(會盟)의식을 치르게 한다.

 

이에 신라는 마지못해 문무왕 4년(664) 2월에 왕제 김인문을 보내 유인원 및 부여륭과 함께 상주 웅령(熊嶺)에서 회맹의식을 갖고 그곳을 국경으로 확정짓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문무왕 5년(665) 8월에는 문무왕이 직접 웅진(공주)으로 가서 취리산(就利山)에서 다시 유인원, 부여륭과 회맹하여 서로 화친할 것을 맹세한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의 부흥운동 기반을 철저히 무너뜨렸으므로 백제인들이 이제 더 이상 조직적인 부흥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나라 군대만 철수하면 백제의 고토가 신라 것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회맹의식에 매우 여유로운 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 그래서 당이 회맹을 하자고 요구하면 순순히 회맹에 응하면서 백제 영토에 대한 욕심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문무왕 6년(666) 4월에는 도리어 김유신의 장자인 삼광(三光)과 장군 김천존(金天尊)의 아들 한광(漢光)을 숙위학생으로 보내면서 이들로 하여금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하니 군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사실 고구려는 백제 부흥운동이 전 해에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자 나당의 협공을 두려워하여 태자 복남(福男)을 당나라로 보내 고종을 시위하게 하는 등 대당 외교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었다. 더구나 이 해에 대당 항쟁을 주도하던 절대권자인 막리지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장자 연남생(淵男生)과 차자 연남건(淵男建)이 막리지 자리를 놓고 다투다 장자가 밀려나서 당나라로 망명하는 불상사가 일어나 국세가 분열되는 불행이 겹치고 있었으니 고구려는 여간 위태로운 상황에 몰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신라가 이 틈을 노린 것이다.

 

남생이 당나라에 망명한 것이 6월이고, 고구려 보장왕이 막리지 자리를 남건에게 넘긴 것이 8월이며, 당고종이 남건에게 특진요동도독겸평양도안무대사현도군공(特進遼東都督兼平壤道安撫大使玄郡公)을 봉하는 것이 9월이고, 이적(李勣, 592∼667년)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여 고구려 침공을 준비하게 하는 것이 12월이다.

 

이 해 연개소문의 아우인 연정토(淵淨土)는 조카들의 싸움을 지켜보다 미구에 고구려가 멸망할 것을 예견하고 그가 다스리던 고구려 남쪽 12성을 가지고 신라에 귀순해 온다.

 

문무왕 7년(667) 7월에 당 고종은 문무왕에게 그의 제 6왕제인 김지경(金智鏡)과 제 7왕제인 김개원(金愷元)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 침략에 출정시키고, 유인원과 제 5왕제 김인태(金仁泰)는 비열도(卑列道, 안변길)로 침공하며, 왕은 다곡(多谷, 평산) 해곡(海谷, 해주) 길로 침공하여 이적과 평양에서 만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문무왕은 8월에 대각간 김유신 등 30 장군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9월에 한성정(漢城停, 서울)에 이르러 이적을 기다린다.

 

한편 당나라에서는 요동도행군대총관 이적이 9월에 요하를 건너 신성(新城) 등 16성을 격파하고 좌무위장군 설인귀(薛仁貴, 612∼681년)는 남소(南蘇), 목저(木底), 창암(蒼) 3성을 함락하며 연남생군과 합세하였다. 곽대봉(郭待封)이 거느린 수군은 해로로 평양에 진격해 들어갔으나, 풍사본(馮師本)이 거느린 군량곡선이 제 때에 도착하지 못해 공격에 차질이 빚어졌다.

 

부총관 학처준(處俊)도 안시성 아래에서 3만 고구려 병사를 격파하였으나 고구려 막리지 연남건이 압록강구를 막아 방어하므로 쉽게 육군이 평양으로 진격해 들어올 수 없었다. 이에 당고종은 다음 해인 문무왕 8년(668) 1월에 유인궤와 김인문을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삼아 요동성 공략에 투입하는 한편 신라에 투항한 연정토를 당으로 불러 돌려보내지 않는다. 고구려 침공에 필요한 정보를 얻고 그를 앞잡이로 쓰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이적과 설인귀는 2월에 부여성을 함락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부여천(川) 일대의 40여 성이 모두 따라 항복했다. 이때 당고종은 요동의 전황이 궁금하여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그는 돌아와 이렇게 복명(復命, 일처리를 명령받은 사람이 그 결과를 보고함)했다 한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예전에 선제(先帝, 당태종)께서 죄를 묻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까닭은 저들의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말에 이르기를 ‘군사에 중매가 없으면 중도에서 돌아온다’ 하였습니다. 이제 남생 형제가 서로 헐뜯으며 우리 향도가 되었으니 저들의 뜻과 속임수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으며 장수는 충성스럽고 병사는 힘을 다합니다. 신이 그래서 반드시 이길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또 고구려의 비기(秘記)에 이르기를 900년(700년이어야 한다)에 이르지 못하고 80세의 대장이 있어 멸망시킨다고 했다는데 고씨가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가지고 있어 이제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

 

과연 남생 형제들의 불화가 고구려의 멸망을 직접 불러들이는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들 형제가 절대 권력을 놓고 다툴 수밖에 없게 된 데는 연개소문의 권력욕이 근본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절대권력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보수세력이 그에 기생하여 맹목적으로 추종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데 이 자체가 사회의 노쇠화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해온 지 241년이 지나 그 한계 수명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보아야 한다. 즉 문화 말기 현상인 것이다.

 

어떻든 연남건은 부여성이 위급하다는 급보를 받고 5만 군사를 급파하였으나 이적의 군사와 설하수(薛賀水)에서 만나 일전을 벌인 끝에 3만 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여 대행성(大行城)마저 함락당한다. 이적은 대행성을 함락한 후 압록강에 이르러 남건의 최후 저항을 받지만 여러 길로 몰려드는 대군의 공세에 힘입어 이를 간단하게 물리치고 단숨에 200여 리를 달려가 욕이성(辱夷城)을 함락하니 모든 성들이 항복하거나 성을 비우고 달아나 평양성까지 무인지경으로 쓸고 갈 수가 있었다. 여기에는 7월16일에 한성(漢城, 서울)까지 나와 군사를 독려하며 고구려를 협공한 문무왕의 공적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철륵(鐵勒) 흉노 출신의 설필하력(契苾何力, ?∼677년)이 가장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아래 도달하고 이적의 군대를 비롯한 대군이 차례로 뒤따라와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기를 한 달 넘게 하니, 고구려의 보장왕은 견디다 못해 9월21일 연개소문의 막내아들 연남산(淵男産)으로 하여금 수령 98인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고 나가 이적에게 항복하게 한다.

 

이적은 예로써 이를 대접하며 항복을 받아들이는데 막리지 남건은 끝내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군사권을 맡고 있던 승려 신성(信誠)의 내응으로 성이 함락하자 자살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이적이 보장왕과 그 왕자 복남(福男) 덕남(德男)을 비롯하여 대신 등 20여만 명을 포로로 하여 당나라로 돌아가니 고구려는 나라를 세운 지 70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때 고구려의 국세는 5부 176성 69만호였다 하는데, 당은 고구려 땅을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나누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고구려 침략에 수훈을 세운 우위위(右威衛) 대장군 설인귀가 검교(檢校) 안동도호가 되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에 남아 이 지역을 처음 다스려 나갔다 한다.

 

한편 문무왕은 고구려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으로부터 평양으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났으나 혜차양(次壤)에 이르렀을 때 당의 여러 장수들이 이미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으로 되돌아온다. 10월22일에 김유신을 태대각간으로 삼고 김인문을 대각간으로 삼는 등 논공행상을 행하고 11월5일 포로로 잡은 고구려인 7000명을 거느리고 서라벌로 돌아온다. 그리고 6일에는 문무신료를 거느리고 선조 사당에 나가 당나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사실을 고한다.

 

이로써 삼국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 할 수는 없으니, 당을 끌어들여 우리 민족이 대물려 살아오던 터전을 저들의 손에 넘겨주고 우리 민족을 저들의 노예로 끌려가게 함으로써 오히려 우리 국토를 분열시키고 우리 민족을 흩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군위(軍威) 석굴 아미타삼존상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缶溪)면 남산(南山)동 양산(陽山)에는 국보 109호로 지정된 <군위석굴 아미타삼존상>(도판 10)이 있다. 일명 학소대(鶴巢臺)라 불리는 바위산 절벽 중턱에 천연동굴이 뚫려 있는데 그곳을 조금 확장 정비하고 아미타 삼존불을 모셔 놓은 것이다.(도판 11)

 

인도의 아잔타 석굴을 비롯한 무수한 석굴사원이나 중국의 돈황석굴, 운강석굴, 용문석굴 등을 모방하여 조성한 석굴사원으로, 인공석굴이 아니라는 점에서 인도의 석굴사원 형태를 계승한 진정한 의미의 석굴사원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에 모셔져 있는 불보살상이 삼국시대 말기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걸치는 시기의 양식기법을 보이고 있다. 주불좌상은 얼굴이 크고 상체가 우람하나 무릎 폭이 좁아서 마치 <삼화령미륵불삼존상>(제 11회 도판 10)의 조성 비례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전체적인 양식기법은 당태종 정관(貞觀) 13년(639) 명이 있는 <정관 13년명 불좌상>(도판 12)과 비슷하다. 다만 <정관 13년명 불좌상>이 시무외 촉지인(觸地印)을 짓고 있는데 반해 <군위석굴 아미타삼존상> 주불은 항마(降魔) 촉지인을 짓고 있는 것이 다르다. 아미타불이 항마 촉지인을 짓는 통일신라 특유의 조상 양식이 이로부터 비롯되는 듯하다.

 

항마 촉지인이란 석가세존이 마왕(魔王) 파순(波旬)을 항복받고 대각(大覺)을 이루어 불타가 되는 순간에 짓고 있던 손짓이다. 왼손을 왼쪽 무릎 위에 손바닥이 보이도록 위로 펼쳐서 편안히 놓은 것이 항마인이다. 마왕을 항복받은 사실을 표시하는 손짓이다.

 

이때 석가세존은 지신(地神; 토지를 맡아 다스리는 신)을 건드려 깨어나게 해서 마왕으로부터 항복받은 사실을 증명하게 하는데, 증인으로 지신을 불러내기 위해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엎어 대고 손가락은 무릎 아래 땅을 가리키게 하여 지신을 건드리는 시늉을 하니 이런 손짓을 촉지인(觸地印; 지신을 건드리는 손짓)이라 한다.

 

그런데 아미타불로 하여금 이런 항마 촉지인을 짓게 한 것은 백제와 고구려를 항복받은 것이 마왕을 항복받은 것이라고 생각한 당시 신라인들의 사고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항마 촉지인을 지은 아미타불상이라는 독특한 불상양식이 출현하였고, 이런 불상양식이 이후 아미타 신앙의 토착화와 더불어 우리 고유의 불상양식으로 자리잡아 나갔다고 보아야 하겠다.

 

주존은 굴실의 안벽 중앙에 턱을 만들어 엉덩이 부분을 걸치게 하고 무릎 아래로는 높이 70cm의 딴 돌을 받쳐 고정하였는데 앞에 받친 네모난 딴 돌의 표면에 옷주름무늬를 새겨놓아 포수좌(袍垂座) 형식의 방형(方形) 대좌임을 상징하였다. 머리로부터 무릎까지 이르는 주존불의 불신(佛身) 높이는 218cm이다.

 

좌우 협시보살상 역시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의 협시보살상이 보이던 작은 키에서 벗어나 초당(初唐) 양식을 계승한 백제 말기의 <보물 195호 금동 관세음보살입상>(도판 6)처럼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데, 약간 몸매를 비틀어 이른바 삼굴신(三屈身, 3방향으로 몸을 꺾음)의 교태를 지었다. 7세기 중반 초당 시대에 유행하던 보살상 양식의 전형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불보살상은 7세기 중·후반기에 당나라 양식을 받아들여 조성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삼존의 근엄한 얼굴 표정에서 <선도산아미타마애삼존대불>(도판 8)보다도 더 초당 양식에 근접한 느낌이다. 따라서 <선도산아미타마애삼존대불>이 조성된 이후 어느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언제 왜 이곳에 이런 삼존불상을 조성해 모셨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삼존불상의 성격을 먼저 규명해야 한다. 이 삼존불상이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62년 9월22일 황수영 선생을 비롯한 신라 오악조사단에 의해서였다. 이때 조사에서 석굴의 크기는 폭 380cm, 높이 425cm, 깊이 430cm, 주불 총 높이 288cm, 좌협시보살상 높이 192cm, 우협시보살상 높이 180cm라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석굴사원임을 인정하여 국보 109호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좌협시보살입상의 보관에서 화불(化佛)좌상의 존재를 확인하고 우협시보살입상의 보관에서는 정병(淨甁)의 존재를 확인하였기 때문에 <군위석굴 아미타삼존상>으로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보관에 화불이 새겨지면 관세음보살이고 정병이 새겨지면 대세지보살인데, 이 두 협시 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는 것은 아미타불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교리적 근거는 유송(劉宋) 원가 연간(424∼442년)에 서역승 강량야사(畺良耶舍)가 번역한 ‘불설관무량수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아난(阿難)과 위제희(韋提希, 마가다국 빈바사라왕의 왕비)에게 이르시기를 이 생각이 이루어졌으면 다음에 마땅히 무량수불의 불신(佛身)과 광명(光明, 몸에서 나오는 빛)을 살펴보아야 한다. 무량수불의 몸은 백천만억 야마천의 염부전단 나무와 같은 황금색이고 불신의 높이는 60만억 나유타 항하사 유순이다.

 

미간에 있는 백호(白毫)는 오른쪽으로 뚜렷하게 돌아서 5개의 수미산과 같고 부처님의 눈은 맑고 깨끗하기가 사방의 큰 바닷물같이 분명하다. 몸에 있는 모든 터럭의 구멍에서는 빛이 솟아나서 수미산과 같이 커지고 머리에서 솟아나는 둥근 빛(圓光)은 백억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와 같은데 원광 안에는 백만억 나유타 항하사 수의 화불(化佛)이 있고 하나하나의 화불은 또 무수한 화보살(化菩薩)을 시자로 삼고 있다.

 

무량수불은 8만4000 대인상(大人相, 미남이 되는 기본적인 요소)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하나의 대인상은 각각 8만4000 수형호(隨形好, 미남이 되는 세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중략)

 

다음에는 응당 관세음보살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보살은 키가 80억 나유타 항하사 유순이고 몸빛은 자금색(紫金色, 자주빛이 도는 황금색)이며 정수리에는 육계(肉)가 있고 목에서는 원광(圓光)이 나오며 그 지름이 100 유순이다. 그 원광 중에는 500 화불이 있는데 석가모니와 같고 하나하나의 화불은 500 보살과 무수한 여러 천인들로 시자를 삼고 있으며 거신광(擧身光, 온몸에서 나오는 광명) 중에는 5도(五道, 인간, 축생, 아수라, 아귀, 지옥) 중생의 일체 모습이 모두 나타난다.

 

정수리 위에는 비릉가마니(毘楞伽摩尼)와 같은 기묘한 보배로 천관(天冠)을 만들어 썼는데, 그 천관 중에 하나의 화불을 세워 놓았으니 키가 25 유순이다. 관세음보살의 얼굴은 염부전단 나무와 같은 황금색이고 미간의 백호상은 7보(寶) 색을 갖추어 8만4000 종류의 빛을 뿜어내는데 하나하나의 광명에는 한량없는 숫자의 화불이 있고 하나하나의 화불은 무수한 화보살로 시자를 삼고 있다.(중략) 그 나머지 몸매가 아름다운 것은 불상과 다름없는데 오직 정수리 위의 육계와 정수리를 볼 수 없는 상호만 세존에게 미치지 못한다.(중략)

 

다음은 대세지(大勢至)보살을 보아야 한다. 이 보살은 몸의 크기가 역시 관세음보살과 같으나 원광의 지름은 250 유순으로 250 유순을 비추며 거신광은 시방(十方)의 나라를 비추는데 자금색으로 인연있는 중생은 모두 볼 수 있다. 다만 이 보살의 한 털구멍에서 나온 빛을 보면 곧 시방세계의 무량제불의 깨끗하고 신묘한 광명을 모두 볼 수 있으므로 이 보살을 무변광(無邊光)이라 부른다.

 

지혜의 빛으로 일체를 비춰서 삼악도에서 벗어나 무상도(無上道)를 얻게 하므로 이 보살을 일컬어 대세지라 한다. 이 보살은 천관(天冠)에 500의 보배로운 연꽃이 있고 하나하나의 연꽃에는 500의 보배로운 받침이 있으며 하나하나의 받침에는 시방제불의 깨끗하고 신묘한 국토의 크고 작은 모습이 모두 나타나 있다. 정수리 위의 육계는 발두마화(鉢頭摩花, 홍수련 꽃)와 같은데 육계 위에는 한 개의 보병(寶甁)이 있어 여러 광명을 가득 담고 있다가 불사(佛事)가 있으면 널리 드러낸다. 나머지 여러 신상(身相, 생김새)은 관세음과 같아 다름이 없다.”

 

이로 보면 이 군위 석굴 안에 봉안한 삼존상은 틀림없이 아미타삼존상의 전형을 완벽하게 갖춘 아미타삼존상이라 할 수 있다. <선도산아미타마애삼존대불>의 경우 우협시 대세지보살상의 보관에서 아직 정병이 있었던 확증을 찾아내지 못한 상황이므로, 현존한 아미타삼존불 양식으로는 이 <군위석굴아미타삼존상>이 ‘불설관무량수경’의 내용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해낸, 우리나라 최초의 아미타삼존상이라고 해야 하겠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곳에 이런 아미타삼존상을 앞장서 조성해 놓았을까. 이것은 이곳의 지리적 여건을 살펴보아야만 해결될 문제이다. 지금은 이곳이 군위군이지만 옛날에는 신녕(新寧)의 속현인 부계(缶溪)현에 소속된 땅이었다. 팔공산 북쪽 지맥이 흘러 내려와 동남쪽으로 팔공산 상봉을 바라볼 수 있도록 터진 계곡의 뒷산 절벽 중턱에 석굴이 있어 그 안에 아미타삼존상을 조성해 모셔 놓은 것이니, 이 아미타삼존상은 파계사 뒷산인 팔공산 연봉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지점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그 영토를 차지하고 나서는 팔공산을 중악(中岳), 계룡산을 서악(西岳), 지리산을 남악(南岳), 토함산을 동악(東岳), 태백산을 북악(北岳)으로 설정하게 되니 통일 후 가장 먼저 중악의 위치를 확정하여 이를 성지화(聖地化)할 필요성이 절실했을 듯하다.

 

그래서 중악 기슭인 이곳에 자연 석굴이 있고 그 석굴 안에서 중악의 상봉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아미타삼존상을 조성해 모시려는 생각을 해내지 않았나 한다.

 

더구나 이곳은 경주에서 백제나 고구려의 옛땅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길목이었다. 경주-영천-신령-부계-군위-선산-상주로 해서 백제로 가거나, 신령-부계-함창-문경으로 새재를 넘든지 신령-부계-군위-비안-예천-풍기로 해서 죽령을 넘는 길이 모두 이곳을 거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동원된 장병들이 모두 이곳을 거쳐갔을 터인데, 전쟁터에서 죽고 다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허다했을 것이다. 이에 이들이 서방정토인 극락세계로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불사가 거국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절실했을 터이니, 문무왕이 그 8년(668)년 11월5일에 고구려 정벌을 끝마치고 서라벌로 회군해 돌아오면서 이곳에 아미타삼존상을 조성해 모시도록 명령한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런 생각을 하도록 한 것은 원효(元曉, 617∼686년)대사였을 듯하다. 앞서 밝힌 대로 원효는 이 <아미타삼존상> 조성의 교리적 배경이 되고 있는 ‘불설관무량수경’에 대한 연구가 깊어 ‘불설관무량수경종요’ 1권을 지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인(慈仁)현이었고, 요석공주에게 장가들어 문무왕에게는 매제에 해당하는 인척 관계가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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