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조용헌의 영지 기행_12

醉月 2013. 1. 6. 11:28

‘조선의 숨은 왕’ 송구봉이 거처한 파주 심학산尋鶴山(옛 龜峰山)

조선의 숨은 왕이 살았던 구봉산

 

“지난 임진왜란에 정란(靖亂)의 책임을 최풍헌이 맡았으면 사흘에 지나지 못하고, 진묵이 맡았으면 석 달을 넘기지 않고, 송구봉(宋龜峰)이 맡았으면 여덟 달 만에 끝냈으리라.” 


▲ 1 구봉산 정상 바위 위에 정자가 있어 주변 형세를 살피기 좋다.
구한말 강증산의 어록을 정리해 놓은 ‘대순전경’에 나오는 말이다. 최풍헌은 도가의 인물이고, 진묵대사는 불가의 인물이고, 송구봉은 유가를 대표하는 인물로 되어 있다.

 

이 세 사람은 각각 도·불·유의 도력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이는 강증산의 독자적인 관점이라기보다는 구한말에 식자층들 사이에서 전해 오던 내용이 아닌가 싶다.

 

포인트는 송구봉이다. 그는 유가를 대표하는 도인으로 인식되어 왔다는 점이다. 송구봉은 <삼국지>의 제갈공명에까지 비유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지략이 깊고, 앞일을 내다보는 신통력을 갖추었다는 이야기이다. 근래에 ‘정여립 모반사건’을 연구한 역사학계의 분석에 의하면 정여립 사건이 일어나도록 멀리서 조종한 서인(西人)의 장자방이 바로 송구봉이라는 것이다. 정여립 사건으로 서인을 위협하던 동인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고, 특히 호남 출신으로서 당시 동인의 좌장이었던 이발과 그리고 나주의 퇴계 선생으로 존경 받던 정개청 같은 인물들이 장살 당했다. 동인의 입장에서 볼 때 송구봉은 원수 같은 인물이지만, 서인 쪽에서는 제갈공명급으로 존중 받았다. 비록 출신 성분 때문에 벼슬을 못 하고 재야에서 머물렀지만, 당대의 천재 율곡보다 한 수 위의 인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송구봉의 구봉(龜峰)은 호다. 이름은 익필(翼弼,1534~1599)이다. 왜 구봉으로 호를 지었는가? 그는 20대 중반부터 반대파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경기도 파주의 구봉산(龜峰山) 자락에서 살았고, 이 구봉산 이름을 따서 구봉으로 호를 지었다. 이 구봉산이 지금의 파주 출판단지 뒷산인 심학산(尋鶴山)이다. 구봉산에서 ‘학을 찾았다’는 뜻의 심학산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조선 숙종 때라고 한다. 숙종 때 대궐에서 기르던 학이 날아갔는데, 구봉산에서 그 학을 찾았다고 해서 찾을 심(尋)자를 써서 심학산으로 이름을 바꿨다. 파주시 교하읍 서남단의 한강변에 위치하고, 높이는 194m밖에 안 된다. 체육공원 시설이 되어 있다.

 

이 구봉산(심학산)을 답사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는 <조선의 숨은 왕>(이한우 著)을 읽고 나서다. 서인의 장자방인 송구봉이 이 산자락에서 살았고, 그 근처에 율곡과 우계 성혼이 살고 있어서 세 사람이 서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저자 이한우는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조선정치의 주류계보가 형성된 장소와 인물을 바로 이 구봉산과 송구봉으로 보고 있다. 율곡은 벼슬하느라 바빠서 제자를 양성할 시간이 없었고, 노론의 주류 인물들은 대부분 송구봉의 제자이거나 아니면 그 학맥이라는 것이다. 노론 300년 장기집권을 하게 만든 인조반정(1623)도 직간접으로 송구봉의 제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노론 독재 300년은 송구봉에서 비롯되는 셈이다. 그래서 ‘조선의 숨은 왕’이라는 주장이다.

 

도봉산 기운 뭉쳐 강으로 가는 형국
‘조선의 숨은 왕’이 살았던 구봉산의 형세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인걸은 지령(地靈)’이라 하는데, 그 산의 기운과 형세를 보면 거기에 살았던 인물의 사이즈가 나온다. 대개 비례한다. 기운이 강건한 바위산에 살면 강건한 기질의 인물이 나오고, 평야지대에 살면 포용하는 품이 넉넉한 인물이 나오기 마련이다.

▲ 2 북한·도봉산의 기운이 흐르다 뭉친 곳인 구봉산 정상 주변엔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있으며, 바로 앞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합쳐지는 명당이 심학산(옛 구봉산)이다.
당나라 유우석이 쓴 ‘누실명’이라는 글에서 ‘산부재고(山不在高) 유선즉명(有仙則名)’이라고 설파했다. 산이 높다고 전부가 아니다. 낮아도 기운이 뭉쳐 있으면 명산이다. 심학산(구봉산)이 그랬다. 높이는 200m가 채 안 되지만 산 뒤로는 바위 봉우리로 뭉친 북한·도봉산이 조산(祖山)으로 받쳐 주고 있었다. 구봉산의 할아버지는 도봉산이었다. 조손(祖孫) 간에는 서로 닮기 마련이다. 할애비를 보면 손자를 볼 수 있다. 도봉산의 손자가 구봉산이라는 이야기는, 도봉산의 강건한 바위 기운이 손자대에 와서 그 끝에 뭉쳐 있다는 말이다. 호박이 가지의 끝에 열리듯이, 산의 기운도 그 끝자락에 뭉친다. 그래서 명당은 산의 중심부에 있는 게 아니라 바깥의 끝자락에 만들어진다.

 

이걸 ‘결국(結局)’이라 부른다. 구봉산은 도봉산의 결국이었다.

 

산을 오르면서 왜 이름에 거북 구(龜)자가 들어갔는지 의문이었다. 우선 산을 멀리서 보면 거북이 형세로 보인다. 산의 모습이 거북이 등처럼 둥그스름하다. 뾰족하거나 각이 진 형상이 아니다. 정상 부근에 올라가보니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다. 이런 바위는 유심히 보아야 한다. 마치 거북이 등껍질을 상징하는 바위였다.

 

거북이는 물이 필요하다. 여기는 교하(交河)읍 아닌가? 물이 교차한다는 곳이다. 굽이굽이 흘러온 한강 물이 임진강 물과 만나는 곳이다. 한강과 임진강 물이 합해져서 흐르다가 강화도 쪽에 가서는 다시 예성강 물과 합해진다. 풍수에서 보는 물은 재물과 물류, 인심의 흐름을 상징한다. 물이 합해지면 돈도 합해지고, 인심도 합해지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교하’는 상징하는 바가 크다. 지금은 자유로가 만들어져서 한강물을 차단하는 제방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자유로가 만들어지기 전인 1950~ 1960년대만 해도 교하는 한강물이 깊숙하게 읍내로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곳곳에 배를 댈 수 있는 나루터가 있었던 것이다. 도봉산에서 잉태된 구봉산의 거북이는 바로 이러한 한강물이 둘러싼 지역에 살고 있다고나 할까. 굳이 구봉산에 이름을 붙여 보자면 ‘영구입수(靈龜入水)’ 형세이다.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물로 들어가는 형국’이다. 구봉산 정상에서 강물을 바라 보니 한강물이 이 산을 활처럼 둘러싸고 흐른다. 활처럼 곡선을 그리면서 그 산을 감아 흐르면 아주 좋게 본다. 이걸 금성수(金星水)라 부른다. 구례 사성암(四聖庵)을 섬진강이 둥그런 원을 그리면서 감아 흐르듯이, 이 구봉산도 한강물이 활처럼 감아 흐른다.

 

한강·임진강·예성강 합쳐 재물·인심 넘쳐
옛날에는 서울 마포나 노량진에서 배를 타고 이곳으로 왕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교하의 촌로들 이야기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도 젊었을 때 구봉산의 송구봉을 찾아와 공부했다고 한다. 물론 기록은 없고 구전이기는 하지만, 이순신이 1545년생이니까 11년 연상인 송구봉을 찾아와 배웠을 가능성은 높다. 동시대를 근처에서 살았던 것이다. 율곡도 송구봉의 천재성을 공공연하게 인정했으니까 송구봉의 이름은 당대에 이미 널리 알려졌었다. 신분이 미천해서 벼슬은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서울 변두리에서 책 보고 제자양성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순신도 그 명성을 듣고 구봉산에 찾아 왔을 것이다.


▲ 구봉산은 신령스런 거북이가 물로 들어가는 영구입수의 형세다. 정상에서 보면 한강물이 산을 활처럼 둘러싸고 흐른다.
교통수단은 배였다. 마포나 노량진에서 배를 타면 아마 1시간 정도면 올 수 있지 않았을까? 걸어서 오면 꼬박 하루 걸리는 길이었겠지만 한강의 물길을 따라 배를 타고 오면 멀지 않은 길이었다. 그렇다면 송구봉은 서울 밖으로 정적들을 피해서 거처를 옮기기는 했지만, 교통편으로 보면 그리 먼 거리에 살았던 것은 아닌 셈이다.

 

송구봉이 구봉산 시절에 키웠던 대표적인 제자를 한 사람 꼽는다면 사계 김장생(1548~1631)이다. 김장생의 아버지인 김계휘는 이율곡을 통해서 송구봉을 알게 되었다. 율곡으로부터 송구봉의 학문이 깊다는 이야기를 들은 김계휘는 13세 먹은 어린 김장생을 구봉산의 송구봉 집에 맡긴다. 이런 게 역자지교(易子之敎)이다. 자기 자식은 자기가 교육하기 어렵다. 어느 정도 말귀를 알아들을 때가 되면 친구나 또는 믿을 만한 선생에게 자식을 맡겨서 교육시켰다. 자식을 바꿔서 가르치는 풍습이 조선에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합리적이다. 10대 중반이 되면 사춘기가 되고, 사춘기에는 부모 곁을 떠나 다른 환경에서 공부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다른 영양소를 섭취해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13세의 김장생은 송구봉 밑에서 훈도를 받는다. 이 훈도라는 것이 매일 교과과정 체크를 받는 방법이 아니다. 송구봉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때 물어 보거라”하고 평소에는 세세하게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부는 자기가 의문을 품었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법이다. 의문도 없는 상태에서 강제로 주입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송구봉을 연구한 이한우에 따르면 이 시절에 구봉이 제자인 김장생에게 가르친 핵심 사상은 ‘예’(禮)와 ‘직’(直) 이었다고 한다. <논어>에 나오는 ‘극기복례’(克己復禮)와 ‘옹야’편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인 ‘인지생야직’(人之生也直)이 그것이다. 사람은 곧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예’와 ‘직’ 사상은 김장생을 거쳐, 김장생의 수제자인 송시열에게 전수된다. 우암이 화양동 계곡에 암서재(巖棲齋)를 짓고 공부하면서 바위벽에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 새겨 놓고 ‘예가 아니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강조한 배경에는 조사부(祖師傅)인 송구봉의 철학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가 숙종 때였고, 그 주제가 다름 아닌 예를 논하는 ‘예송논쟁’이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다른 일도 아니고 하필 ‘예’ 때문에 죽고 사는 일이 벌어지는 발단도 어떻게 보면 송구봉의 구봉산 시절에 배태된 셈이다. 

 

인조반정 핵심공신들이 송구봉 학맥
후일 노론 300년 집권의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불과 거사 3일 후에 반정의 주역들은 김장생을 사헌부 장령에 제수했다. 왕에게 정치와 학문을 자문해 주는 명예직이었지만, 반정의 주역들이 자신들의 사부인 김장생을 정권의 정신적인 지주로 여겼던 것이다.

▲ 1 구봉산의 기운은 북한·도봉산의 끝자락에 해당한다. 멀리 북한·도봉산의 능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2 구봉산 정상엔 나무데크가 놓여 있어 많은 사람이 이용한다
반정의 1등 공신 9명 가운데 대부분이 송구봉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이었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김류, 이귀, 김자점, 심기원, 신경진, 이서, 최명길, 구굉, 심명세가 핵심 공신인 9명이다. 김류, 신경진은 직접 송구봉으로부터 배운 제자이고, 구굉과 최명길은 김장생의 제자이니까 송구봉의 손자 제자인 셈이고, 김자점은 송구봉의 친구인 호원에게서 배웠으니 조카제자에 해당하고, 심기원은 송구봉의 절친한 친구이자 정치적 평생 동지였던 정철의 제자인 권필의 제자이니까 심기원도 역시 손자제자이다. 심명세도 또한 송구봉의 동지였던 심의겸의 손자이니 송구봉의 제자나 다름없다. 이렇게 보면 인조반정 핵심공신들의 대부분은 송구봉의 학맥인 것이다. 송구봉의 ‘직’과 ‘예’가 현실정치에 투영되었을 때는 인조반정이라는 정변으로 표현되었다고나 할까. 그 기초작업이 모두 교하의 구봉산 자락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모든 일의 시작은 불가에서 말하는 ‘한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한 생각’이 시작된 장소가 구봉산이니, 조선후기 300년의 운명을 결정지은 역사적 장소라고 어찌 아니할 수 있겠는가. 물로 들어가려는 신령스런 거북이(靈龜入水)가 알을 낳았으니, 그 알을 깨고 태어난 인물이 송구봉인가? 역사적 평가라는 것은 참 어렵다. 수백 년 시간이 지났다고 평가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구봉산이 있는 교하(交河)는 근래에 풍수학자인 최창조에 의해서 주목받은 장소이다. 통일한국의 수도를 교하에 잡아야 한다는 것이 최창조의 주장이다. 교하는 서울과 강화도 개성을 사정 거리권에 둘 수 있는 입지다. 최고의 장점은 물이 교차한다는 점이다. 물류와 생태에 유리한 점이다. 고대부터 도읍지는 강물이 닿는 곳에 자리 잡았다. 배를 띄워야 화물이 운반되니까 말이다.

 

저녁 석양이 지는 5시 무렵에 구봉산 정상에 있는 팔각정에 올랐다. 이 팔각정이 좋은 이유는 멀리 임진강이 한강과 합류되는 지점을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라는 점이다. 두 개의 강물이 합수되는 지점을 본다는 것은 장엄한 광경이다. 두 개의 강물은 두 개의 세계를 뜻한다. 둘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를 목격한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인 것이다.

 

둘이 하나로 합쳐져야만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 창조와 잉태가 그것 아닐까. 한강과 임진강이 합해져서 서쪽의 강화도로 흐른다. 강화(江華)는 글자 그대로 ‘강의 꽃’ 아닌가. 서해로 흐르는 세 개의 강물, 즉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물이 이곳에서 합쳐지기 때문에 강화라고 했던 것이다.

 

흔히 명당을 ‘삼산양수’(三山兩水)라고 표현한다. 봉우리 3개가 연달아 내려오는 지점을 양쪽에서 흘러오는 물이 만나서 흐르면, 그곳은 명당이다.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곳이다. 양수리가 작은 양수리라면 교하는 큰 양수리에 해당한다. 현대 대도시는 수기(水氣)를 필요로 한다. 문명이 불(火)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물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균형이 된다. 생태적으로 좋지 않은 것이다. 교하는 물이 풍부한 곳이다. 앞으로 크게 열릴 지역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