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산협곡 속 아늑한 오지 경북 춘양
영암선 철도 노선 끌어들여 ‘억지 춘양’ 유래說
三災도 피해 가는 십승지… 왜란 때 선비들 피란 가던 곳
태백산 史庫地 이정표 없이 내버려 두니 자연스레 보존
조선왕조실록 수호하던 곳 이젠 종자 저장고 ‘시드볼트’ 지켜
62만평 ‘백두대간 수목원’ 언덕에 가득한 야생화 장관
노다지 찾던 금정광산… 한여름에도 입김 나올 만큼 추워
봉화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 ‘춘양’을 말할 때 꼭 해야 하는 이야기
어떤 이야기를 꼭 하고 넘어가야만 하는 지역이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특정 지역에 관한 익숙한 얘기다. 예를 들면 경남 사천과 ‘잘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이야기 같은 거다. ‘길을 잘못 들면 삼천포’라니…. 삼천포 사람들에게 이 말이 유쾌할 리 없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 말을 입에 올렸다가 사과하는 일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삼천포는 1995년 사천군과 합쳐져 사천시가 되면서 사라졌다. 행정명칭상 삼천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삼천포 사람들이 가장 싫어했던 ‘삼천포로 빠지다’는 표현 속에서, 삼천포는 여전히 살아 있다. 아이러니다.
옛 삼천포 얘기를 하면 ‘길 잘못 든 삼천포’를 설명해야 하듯, 경북 봉화의 춘양 이야기를 꺼내면서 ‘억지 춘양’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하필이면 삼천포인지에 대한 정설이 없듯, 억지 춘양도 딱 부러진 유래 없이 다양한 설이 전해진다. 평범한 소나무를 춘양목(금강송)이라 억지로 우겨서 팔아서 나온 얘기라는 이야기가 있고, 외진 춘양으로 억지로 시집왔다는 내용의 구전 노래 가사에서 비롯됐다는 주장도 있다. 가장 그럴듯한 주장은 영암선(지금의 영동선) 선로를 놓는 과정에서 당시 자유당 국회의원 정문흠이 출신 지역인 춘양으로 기차를 끌어들이기 위해 억지로 열차 노선을 오메가(Ω) 모양으로 변경했다는 데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랬다는 얘기도 있고,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분명한 건 봉화의 ‘춘양역’이란 이름이, 전남 화순에 있었던 기차역 ‘춘양역’을 빼앗아 왔다는 것이다. 봉화에 춘양면이 있듯, 화순에도 춘양면이 있는데, 어쩐 일인지 먼저 있던 경전선의 화순 춘양역이 봉화의 춘양역에 이름을 순순히 내어주곤 ‘석정리역’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여기에 자유당 원내총무였던 정 의원이 힘을 썼을 거라는 이야기다.
# 억지 춘향과 억지 춘양. 뭐가 맞을까
사실 ‘억지 춘양’은 ‘억지 춘향’이란 본래 있던 말에 라임을 맞추듯 만들어낸 것이다. 억지 수청을 거부한 춘향전의 춘향이에서 억지 춘향이란 말이 먼저 나왔고, 비슷한 어감의 춘양을 춘향 대신 슬쩍 끼워 넣은 것으로 보인다. 1955년 영암선 철로 부설 한참 전인 1920년대 기록에 억지 춘향이란 관용어가 보이니 말이다. 억지 춘향은 국어사전에 있지만, 억지 춘양은 없다. 하지만 억지 다음이 춘향이든, 춘양이든 뜻은 같다. 둘 다 ‘하면 안 될 일을 억지로 한다’란 뜻이다.
지명 앞에 부정적 단어인 ‘억지’라는 말이 붙었는데도 이곳 사람들은 거리낌이 없다. 영암선 부설과 관련된 정치적 입김이나 지역 이기주의에서 억지 춘양이란 말이 나왔다면, 오해라고 강변하거나 부끄러워할 만한 데도 그렇다. 지금이야 비록 주민 수 4000명 남짓에 불과한 오지 신세지만, 기찻길도 끌어올 정도였다며 ‘왕년의 위세’를 은근히 과시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춘양목 벌목과 금광 채굴로 경기가 좋았던 1950년대 말 춘양의 인구는 지금의 3배가 넘는 1만3000명에 달했다. 좁은 마을에 100개가 넘는 술집이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며 흥청거렸던 시절의 얘기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름난 것들이라면 모두 브랜드가 되는 세상. 춘양의 시장 이름은 ‘억지춘양시장’이 됐다. 우시장이 있었던 1960~1970년대에는 장날 하루에 소 200~300마리가 거래됐을 정도로 컸던 시장이라는데, 그때만 못하지만 지금도 춘양시장은 면 단위 시장으로는 제법 규모가 크다. 굳이 일정을 맞출 것까진 없지만, 오일장이 서는 3, 8일에 춘양에 갔다면 장 구경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 땅에 새겨진 피란과 보관의 역사
기차역도 있고 번듯한 시장도 있지만, 경북 최북단 춘양은 오지다. 그중에서도 강원 영월과 잇닿은 서북쪽이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영월의 가장 깊은 땅과 봉화의 가장 깊은 땅이 고산협곡의 지붕을 이룬다.
영월 김삿갓면에서 88번 국도를 타고 춘양 땅으로 접어들면 곧 도래기재 고갯길을 넘는다. 도래기재를 경계로 북쪽은 남한강 수계이고, 남쪽은 낙동강 수계다. 도래기재 이쪽저쪽에 있는 우구치리와 서벽리 일대가 최고의 오지다. 차가 흔해지고, 사통팔달 길이 놓인 지금도 그러니, 예전에 이곳은 얼마나 멀고 깊은 땅이었을까.
예로부터 춘양이 자리 잡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내륙산간 골짜기를 일러 ‘삼재불입지(三災不入地)’라 했다. 삼재(三災)란 도병(刀兵·전쟁), 기근(饑饉·굶주림), 질역(疾疫·질병). 이렇게 세 가지 재앙을 뜻한다. 옛사람들은 태백과 소백 사이, 그러니까 ‘양백지간(兩白之間)’은 난세와 삼재에도 능히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 여겼다. 정감록에도, 그리고 예언가 격암 남사고의 예언에서도 양백지간에 자리 잡은 춘양은 전국의 10곳 명당을 뜻하는 ‘조선 십승지(十勝地)’로 꼽혔다.
굳이 이런 예언서를 얘기하지 않아도, 영월에서 도래기재를 넘어 춘양으로 넘어가다 보면 ‘세상과 등 돌려 사는 곳’이란 느낌이 저절로 든다. 멀고 깊으니 이곳이야말로 숨거나, 숨기기에 딱 좋은 곳. 여기에 숨거나 숨긴다면 누구도 찾아내지 못할 듯하다. 그래서 춘양에는 피란과 보관의 역사가 깊이 새겨져 있다.
# 태백산 사고는 태백산에 없다
임진왜란의 와중에 류성룡의 형 류운룡은 도체찰사인 동생의 가족을 해치려는 왜군들의 위협을 피해 노모를 비롯해 일가 100명을 춘양에 피신시켰다. 송강 정철의 손자 정양도 병자호란을 피해 이쪽으로 숨어들었다. 그 무렵 파주에 살던 강흡, 강각 형제가 여기로 피신했고,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홍언필의 손자인 홍석도 난을 피해 이곳에 은거했다.
선비들이 변란이나 당파싸움을 피해서 멀고 먼 춘양 땅으로 숨어들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비밀 문서고인 태백산 사고(史庫)가 바로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 조선왕조실록은 서울 춘추관을 비롯해 충주와 전주, 성주에 각각 1질씩 보관됐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전주 사고본만 간신히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타버렸다. 이에 선조는 전주 사고본을 토대로 조선왕조실록 4질을 만들어서 더 깊은 곳에다 숨겼다. 그렇게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로 선택된 곳이 바로 봉화의 태백산, 강화의 마니산(후에 강화 정족산으로 이전), 평안북도 영변의 묘향산(후에 무주 적상산으로 이전), 강릉 오대산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가장 온전히 남아 한국사의 기본자료가 된 게 바로 태백산 사고본이다. 태백산 사고지(史庫址)는 태백산에 없다. 태백산과 산줄기로 이어지는 봉화 춘양의 각화산과 왕두산 사이 깊은 골짜기에 있다.
지금 되돌아본대도 가장 중요한 무엇을 어딘가에 숨겨야 한다면, 여기야말로 딱 맞는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자리다. 다만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게 있으니 워낙 숲이 짙고 깊어서 다시 찾으러 올 때 길을 잃지 않을지는 절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내버려두는 거로, 꼭꼭 숨겨버린 곳
다른 지역의 조선왕조실록 사고들은 모두 복원됐지만, 태백산 사고는 복원은커녕 그 터를 찾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깊이 숨겨져 있다. 한국사의 기본자료가 된 조선왕조실록이 태백산 사고본이니, 태백산 사고가 지닌 역사적 무게감이 상당한데도 그렇다.
태백산 사고가 있었던 각화산 아래 절집 각화사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마다 관리를 맡기는 사찰이 있었는데 태백산 사고를 수호하던 사찰이 각화사다. 각화사는 사고 수호사찰이 되기 1000년 전쯤인 676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원효가 춘양중학교 자리에 있던 남화사(覽華寺)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남화사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각화사(覺華寺)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태백산 사고 얘기를 꺼내니 각화사의 스님은 물론이고 보살과 처사도 손을 내저으며 ‘절대로 못 찾는다’고 했다. 아무리 깊은 곳에 숨었다고 해도 길이 있고 이정표가 있다면야 왜 못 찾을까. 그럼에도 하나같이 ‘못 찾는다’고 말하는 건, 실상은 그들이 태백산 사고를 숨기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숨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안내판이나 지도를 세우지 않는 것이다. 지도를 들고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워낙 깊숙한 곳에 숨어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찾아갈 수 없다. 다녀오고 난 뒤에야 안 것은 설사 스님이 길을 가르쳐줬다고 해도 태백산 사고지 가는 길은, 말로 설명하기도 그 설명을 듣고 가는 것도 불가능한 길이라는 사실이다.
# 태백산 사고지는 왜 숨겨졌나
왜 태백산 사고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 그건 각화사가 서슬 퍼런 수행과 정진의 선원을 품고 있는 사찰이기 때문이다. 수월, 금오, 월산, 서암, 고우, 동춘스님을 비롯한 근현대의 고승들이 목숨을 걸고 이곳에서 화두 정진했다. 각화사 대웅전 마당 한쪽에 대나무를 잘라서 세운 벽 너머에 태백
선원이 있는데, 지금도 그곳에서 가행정진이 계속되고 있다. 각화사는 이제 더 이상 사고 수호사찰이 아니라, 형형한 눈빛의 선객들이 치열하게 정진하는 선원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러니 각화사 입장에서 절집은 물론이고 엄격하게 출입을 통제하는 선방의 이곳저곳까지 불쑥불쑥 발길을 들이는 등산객들이 반가울 리 없다. 그렇다고 길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냥 내버려두는 방법을 택했다. 안내판이 없으니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고, 발길이 끊기니 길은 지워졌다.
발길을 막는 사찰도 야속하지만, 짐작건대 이렇게 된 책임의 상당 부분은 일부 무례한 등산객 때문이었을 것이다. 각화산 일대가 다 각화사 소유 땅이니 태백산 사고지가 여태 복원되지 않은 까닭도 여기에 있는 듯했다.
태백산 사고는 각화사 뒤쪽으로 가파른 비탈을 한참을 올라가야 닿는 자리에 있다. 들머리는 물론이고 산중에는 그 흔한 안내판도, 이정표도 하나 없다. 길은 가늘고 흐렸으며 때로는 지워졌다. 어림짐작으로 가파른 산자락을 오르내리기를 세 시간여. 온몸이 땀범벅이 된 채 한참을 헤매다가 포기하고 돌아서기 직전에야 건물지 주위를 석축으로 쌓고 비워진 건물 자리에 안내문을 세워놓은 태백산 사고지를 찾아냈다.
# 사고지에다 이름을 새긴 까닭
사고지에서 눈길을 끌었던 건 큼지막한 바위였다. 바위에는 이름이 여럿 새겨져 있다. 대부분 구한말쯤의 관료 이름들이다. 바위에다 이름을 새기는 건 이름난 명승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사실 사고지 주변 풍경은 명승은커녕 평범하기 짝이 없는 숲이다. 여기서 그들이 느꼈던, 바위에 큼지막하게 이름을 새길 정도의 감회는 어떤 것이었을까. 짐작건대 태백산 사고에 왔다는 것보다는, 재난과 질병이 침입하지 못한다는 십승지를 찾았다는 게 아니었을까.
바위에 새긴 이름을 읽어본다. 일제가 태백산 사고에서 조선왕조실록을 가져갔을 당시의 성주군수였던 유철희(柳哲熙)의 이름이 뚜렷하다. 평안남도와 경상북도 관찰사를 거쳐 황해지사와 충북지사 등의 요직을 두루 지낸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중양(朴重陽)의 이름도 보인다. 봉화군수였던 박주동(朴注東), 봉화현감으로 부임하자마자 태백산 사고를 찾았다는 봉화현감 장화식(張華植)의 이름도 있다. 한평생 양지에서 떵떵거리고 살았던 그들에게도 과연 ‘삼재불입처’와 ‘십승지’가 필요했을까.
세월이 바뀌면서 재난의 종류도 바뀌었다. ‘현대판 삼재’라면 자연재해, 전염병, 그리고 경제공황쯤이 아닐까. 그렇다면 폭우 피해가 속출했고, 창궐한 전염병은 여태 진행 중이며, 경기침체와 물가인상의 이중고를 겪고 있는 지금이 딱 삼재가 아닌가. 십승지를 찾아간들 그걸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번잡한 세상사에 등을 돌리고 앉아서 수백 년을 고요하게 흘려보낸 자리에 서 보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지 않을까. 깊은 산중의 태백산 사고지를 찾아간 마음이 그랬다.
# 이제는 실록 아닌 종자를 지키는 땅
춘양이 품고 있는 ‘비장(秘藏)’과 ‘은거(隱居)’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이어진다. 춘양 서벽리에는 ‘시드볼트’가 있다. 시드볼트는 야생식물 종자를 영구저장하는 시설이다. 노르웨이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진 종자 저장고다. 내진 설계로 지하 46m에 터널형으로 설계한 창고는 연중 영하 20도로 유지되고 있다.
전 지구적 재난에 대비한 야생식물의 백업시스템이어서 시드볼트 주변은 엄격한 경비가 이뤄지고 있다. 방문은 물론이고 접근도 불가능하다. 외관을 눈으로 볼 수도 없다. 시드볼트가 여기 들어서게 된 건 서벽리가 있는 춘양 일대가 태백산 사고지가 있는 데다 십승지로 꼽힌 오지이기 때문이다.
사실 춘양에서 시드볼트보다 유명한 건 서벽리의 백두대간수목원이다. 규모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수목원 전체 면적의 95%가 비공개 구역이고, 일반에 개방하는 건 5%라는데 그 면적이 자그마치 62만 평이다. 백두대간수목원의 대표 생물은 한국 호랑이다. 드넓은 수목원은 보통 호랑이가 있는 ‘호랑이숲’을 목적지 삼아 다녀오면서 구경하게 되는데, 지금 야생화 언덕에 털부처꽃과 긴산꼬리풀이 가득 피어나 장관이다.
# 깊은 산중에서 노다지를 캐다
이제 더 깊은 곳으로 가보자. 영월의 내리에서 춘양 쪽으로 도래기재를 넘기 직전에 마을 표지석이 있다. 우구치리를 알리는 이정표다. 골짜기의 모양이 소의 주둥이를 닮았다고 해서 고개 이름이 ‘우구치(牛口峙)’다. 우구치리에는 ‘금정(金井)마을’이 있다. 1923년 채굴이 시작된 금광인 ‘금정광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금을 담보로 화폐를 발행하는 ‘금본위제’를 시행하면서 ‘선원주의(先願主義)’라고 해서 산의 소유 여부와는 관계없이 캐낸 금을 근거로 광업권을 먼저 출원한 사람에게 채굴 허가를 내주는 산금(産金) 정책을 시행했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금을 찾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기록에 따르면 1933년 한 해만 전국에 자그마치 3000개 금광 개발작업이 이뤄졌을 정도였다.
우구치리의 금정광산은 경남 김해 출신의 광산업자인 김태원이 1923년 개발한 광산이다. 전 재산을 쏟아부어 굴을 파고 갱목을 넣는 끝도 없는 일을 2년여에 걸쳐 하다가 먹을 쌀이 다 떨어져갈 무렵에 노다지 금맥을 발견했다. 그는 1932년 이 광산을 일본인에게 55만 원에 팔아넘겼는데 지금 시세로 치면 550억 원 남짓의 거금이다. 광산을 팔아넘긴 그해 금정광산에서 생산한 금이 233㎏이었다는 기록을 보면 그것도 헐값에 판 셈이었다.
# 금광 갱도가 뿜어내는 차가운 입김
‘광산왕’이란 칭호로 불리던 김태원은 광산업을 해 번 돈으로 학교를 세우고, 교량 가설비를 내고, 가난한 이를 도왔다. 이러저러한 민간단체에 지원한 돈까지 대충 합쳐도 10만 원, 그러니까 지금 시세로 100억 원이 넘었다. 훗날 액화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가 파산한 그는 6·25전쟁이 나던 1950년 9월 경북 고령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금정광산에서 한창 금이 쏟아져나오던 시절, 이 깊고 좁은 골짜기의 금정마을에만 3000명이 넘는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여관과 식당이 즐비했고, 한 집 건너가 술집이었단다. 울창한 낙엽송 숲 사이 독가촌을 다 더해도 10가구 남짓에 불과한, 하루 두 번 들어오는 버스도 빈 차로 왔다가 빈 차로 돌아 나가는 지금의 금정마을을 보면 도무지 믿기지 않는 얘기다.
여기까지 갔다면 폐광된 금정광산에 가보길 권한다. 마을의 좁은 길을 따라서 차로 끝까지 올라가면 그 끝에 광산이 있는데, 갱도에서는 맑고 차가운 물과 온몸이 오싹해질 정도의 찬바람이 나온다. 찬바람은 갱도에서 나오자마자 입김처럼 허연 수증기가 돼서 주위에 낮게 깔린다. 여기는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긴팔 옷을 덧입어야 할 정도로 춥다. 사람들이 다 떠나가 텅 비어버린, 오래된 꿈속 같은 오지 마을 이야기다.
■ 춘양구곡
춘양은 오지 봉화에서도 가장 궁벽한 땅이지만, 이 깊은 오지 속에서도 유학자들은 성리학적인 삶과 도리를 생각했다. 그 증거가 바로 조선 후기 학자 경암 이한응이 춘양의 운곡천 변의 명소 아홉 곳에다 이름과 시문을 붙인 ‘춘양구곡’이다. 춘양구곡은 앞서간 학자들이 은거한 정자가 있는 굽이를 구곡으로 정했는데, 구곡 중 제2곡인 ‘사미정’과 제8곡 ‘한수정’이 가장 볼 만하다. 특히 연못을 두르고 그 가운데 아름다운 한옥을 들인 한수정의 아름다움은 각별하다.
영암선 철도 노선 끌어들여 ‘억지 춘양’ 유래說
三災도 피해 가는 십승지… 왜란 때 선비들 피란 가던 곳
태백산 史庫地 이정표 없이 내버려 두니 자연스레 보존
조선왕조실록 수호하던 곳 이젠 종자 저장고 ‘시드볼트’ 지켜
62만평 ‘백두대간 수목원’ 언덕에 가득한 야생화 장관
노다지 찾던 금정광산… 한여름에도 입김 나올 만큼 추워
봉화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 ‘춘양’을 말할 때 꼭 해야 하는 이야기
어떤 이야기를 꼭 하고 넘어가야만 하는 지역이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특정 지역에 관한 익숙한 얘기다. 예를 들면 경남 사천과 ‘잘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이야기 같은 거다. ‘길을 잘못 들면 삼천포’라니…. 삼천포 사람들에게 이 말이 유쾌할 리 없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 말을 입에 올렸다가 사과하는 일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삼천포는 1995년 사천군과 합쳐져 사천시가 되면서 사라졌다. 행정명칭상 삼천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삼천포 사람들이 가장 싫어했던 ‘삼천포로 빠지다’는 표현 속에서, 삼천포는 여전히 살아 있다. 아이러니다.
옛 삼천포 얘기를 하면 ‘길 잘못 든 삼천포’를 설명해야 하듯, 경북 봉화의 춘양 이야기를 꺼내면서 ‘억지 춘양’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하필이면 삼천포인지에 대한 정설이 없듯, 억지 춘양도 딱 부러진 유래 없이 다양한 설이 전해진다. 평범한 소나무를 춘양목(금강송)이라 억지로 우겨서 팔아서 나온 얘기라는 이야기가 있고, 외진 춘양으로 억지로 시집왔다는 내용의 구전 노래 가사에서 비롯됐다는 주장도 있다. 가장 그럴듯한 주장은 영암선(지금의 영동선) 선로를 놓는 과정에서 당시 자유당 국회의원 정문흠이 출신 지역인 춘양으로 기차를 끌어들이기 위해 억지로 열차 노선을 오메가(Ω) 모양으로 변경했다는 데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랬다는 얘기도 있고,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분명한 건 봉화의 ‘춘양역’이란 이름이, 전남 화순에 있었던 기차역 ‘춘양역’을 빼앗아 왔다는 것이다. 봉화에 춘양면이 있듯, 화순에도 춘양면이 있는데, 어쩐 일인지 먼저 있던 경전선의 화순 춘양역이 봉화의 춘양역에 이름을 순순히 내어주곤 ‘석정리역’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여기에 자유당 원내총무였던 정 의원이 힘을 썼을 거라는 이야기다.
# 억지 춘향과 억지 춘양. 뭐가 맞을까
사실 ‘억지 춘양’은 ‘억지 춘향’이란 본래 있던 말에 라임을 맞추듯 만들어낸 것이다. 억지 수청을 거부한 춘향전의 춘향이에서 억지 춘향이란 말이 먼저 나왔고, 비슷한 어감의 춘양을 춘향 대신 슬쩍 끼워 넣은 것으로 보인다. 1955년 영암선 철로 부설 한참 전인 1920년대 기록에 억지 춘향이란 관용어가 보이니 말이다. 억지 춘향은 국어사전에 있지만, 억지 춘양은 없다. 하지만 억지 다음이 춘향이든, 춘양이든 뜻은 같다. 둘 다 ‘하면 안 될 일을 억지로 한다’란 뜻이다.
지명 앞에 부정적 단어인 ‘억지’라는 말이 붙었는데도 이곳 사람들은 거리낌이 없다. 영암선 부설과 관련된 정치적 입김이나 지역 이기주의에서 억지 춘양이란 말이 나왔다면, 오해라고 강변하거나 부끄러워할 만한 데도 그렇다. 지금이야 비록 주민 수 4000명 남짓에 불과한 오지 신세지만, 기찻길도 끌어올 정도였다며 ‘왕년의 위세’를 은근히 과시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춘양목 벌목과 금광 채굴로 경기가 좋았던 1950년대 말 춘양의 인구는 지금의 3배가 넘는 1만3000명에 달했다. 좁은 마을에 100개가 넘는 술집이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며 흥청거렸던 시절의 얘기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름난 것들이라면 모두 브랜드가 되는 세상. 춘양의 시장 이름은 ‘억지춘양시장’이 됐다. 우시장이 있었던 1960~1970년대에는 장날 하루에 소 200~300마리가 거래됐을 정도로 컸던 시장이라는데, 그때만 못하지만 지금도 춘양시장은 면 단위 시장으로는 제법 규모가 크다. 굳이 일정을 맞출 것까진 없지만, 오일장이 서는 3, 8일에 춘양에 갔다면 장 구경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 땅에 새겨진 피란과 보관의 역사
기차역도 있고 번듯한 시장도 있지만, 경북 최북단 춘양은 오지다. 그중에서도 강원 영월과 잇닿은 서북쪽이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영월의 가장 깊은 땅과 봉화의 가장 깊은 땅이 고산협곡의 지붕을 이룬다.
영월 김삿갓면에서 88번 국도를 타고 춘양 땅으로 접어들면 곧 도래기재 고갯길을 넘는다. 도래기재를 경계로 북쪽은 남한강 수계이고, 남쪽은 낙동강 수계다. 도래기재 이쪽저쪽에 있는 우구치리와 서벽리 일대가 최고의 오지다. 차가 흔해지고, 사통팔달 길이 놓인 지금도 그러니, 예전에 이곳은 얼마나 멀고 깊은 땅이었을까.
예로부터 춘양이 자리 잡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내륙산간 골짜기를 일러 ‘삼재불입지(三災不入地)’라 했다. 삼재(三災)란 도병(刀兵·전쟁), 기근(饑饉·굶주림), 질역(疾疫·질병). 이렇게 세 가지 재앙을 뜻한다. 옛사람들은 태백과 소백 사이, 그러니까 ‘양백지간(兩白之間)’은 난세와 삼재에도 능히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 여겼다. 정감록에도, 그리고 예언가 격암 남사고의 예언에서도 양백지간에 자리 잡은 춘양은 전국의 10곳 명당을 뜻하는 ‘조선 십승지(十勝地)’로 꼽혔다.
굳이 이런 예언서를 얘기하지 않아도, 영월에서 도래기재를 넘어 춘양으로 넘어가다 보면 ‘세상과 등 돌려 사는 곳’이란 느낌이 저절로 든다. 멀고 깊으니 이곳이야말로 숨거나, 숨기기에 딱 좋은 곳. 여기에 숨거나 숨긴다면 누구도 찾아내지 못할 듯하다. 그래서 춘양에는 피란과 보관의 역사가 깊이 새겨져 있다.
# 태백산 사고는 태백산에 없다
임진왜란의 와중에 류성룡의 형 류운룡은 도체찰사인 동생의 가족을 해치려는 왜군들의 위협을 피해 노모를 비롯해 일가 100명을 춘양에 피신시켰다. 송강 정철의 손자 정양도 병자호란을 피해 이쪽으로 숨어들었다. 그 무렵 파주에 살던 강흡, 강각 형제가 여기로 피신했고,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홍언필의 손자인 홍석도 난을 피해 이곳에 은거했다.
선비들이 변란이나 당파싸움을 피해서 멀고 먼 춘양 땅으로 숨어들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비밀 문서고인 태백산 사고(史庫)가 바로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 조선왕조실록은 서울 춘추관을 비롯해 충주와 전주, 성주에 각각 1질씩 보관됐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전주 사고본만 간신히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타버렸다. 이에 선조는 전주 사고본을 토대로 조선왕조실록 4질을 만들어서 더 깊은 곳에다 숨겼다. 그렇게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로 선택된 곳이 바로 봉화의 태백산, 강화의 마니산(후에 강화 정족산으로 이전), 평안북도 영변의 묘향산(후에 무주 적상산으로 이전), 강릉 오대산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가장 온전히 남아 한국사의 기본자료가 된 게 바로 태백산 사고본이다. 태백산 사고지(史庫址)는 태백산에 없다. 태백산과 산줄기로 이어지는 봉화 춘양의 각화산과 왕두산 사이 깊은 골짜기에 있다.
지금 되돌아본대도 가장 중요한 무엇을 어딘가에 숨겨야 한다면, 여기야말로 딱 맞는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자리다. 다만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게 있으니 워낙 숲이 짙고 깊어서 다시 찾으러 올 때 길을 잃지 않을지는 절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내버려두는 거로, 꼭꼭 숨겨버린 곳
다른 지역의 조선왕조실록 사고들은 모두 복원됐지만, 태백산 사고는 복원은커녕 그 터를 찾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깊이 숨겨져 있다. 한국사의 기본자료가 된 조선왕조실록이 태백산 사고본이니, 태백산 사고가 지닌 역사적 무게감이 상당한데도 그렇다.
태백산 사고가 있었던 각화산 아래 절집 각화사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마다 관리를 맡기는 사찰이 있었는데 태백산 사고를 수호하던 사찰이 각화사다. 각화사는 사고 수호사찰이 되기 1000년 전쯤인 676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원효가 춘양중학교 자리에 있던 남화사(覽華寺)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남화사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각화사(覺華寺)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태백산 사고 얘기를 꺼내니 각화사의 스님은 물론이고 보살과 처사도 손을 내저으며 ‘절대로 못 찾는다’고 했다. 아무리 깊은 곳에 숨었다고 해도 길이 있고 이정표가 있다면야 왜 못 찾을까. 그럼에도 하나같이 ‘못 찾는다’고 말하는 건, 실상은 그들이 태백산 사고를 숨기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숨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안내판이나 지도를 세우지 않는 것이다. 지도를 들고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워낙 깊숙한 곳에 숨어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찾아갈 수 없다. 다녀오고 난 뒤에야 안 것은 설사 스님이 길을 가르쳐줬다고 해도 태백산 사고지 가는 길은, 말로 설명하기도 그 설명을 듣고 가는 것도 불가능한 길이라는 사실이다.
# 태백산 사고지는 왜 숨겨졌나
왜 태백산 사고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 그건 각화사가 서슬 퍼런 수행과 정진의 선원을 품고 있는 사찰이기 때문이다. 수월, 금오, 월산, 서암, 고우, 동춘스님을 비롯한 근현대의 고승들이 목숨을 걸고 이곳에서 화두 정진했다. 각화사 대웅전 마당 한쪽에 대나무를 잘라서 세운 벽 너머에 태백
선원이 있는데, 지금도 그곳에서 가행정진이 계속되고 있다. 각화사는 이제 더 이상 사고 수호사찰이 아니라, 형형한 눈빛의 선객들이 치열하게 정진하는 선원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러니 각화사 입장에서 절집은 물론이고 엄격하게 출입을 통제하는 선방의 이곳저곳까지 불쑥불쑥 발길을 들이는 등산객들이 반가울 리 없다. 그렇다고 길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냥 내버려두는 방법을 택했다. 안내판이 없으니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고, 발길이 끊기니 길은 지워졌다.
발길을 막는 사찰도 야속하지만, 짐작건대 이렇게 된 책임의 상당 부분은 일부 무례한 등산객 때문이었을 것이다. 각화산 일대가 다 각화사 소유 땅이니 태백산 사고지가 여태 복원되지 않은 까닭도 여기에 있는 듯했다.
태백산 사고는 각화사 뒤쪽으로 가파른 비탈을 한참을 올라가야 닿는 자리에 있다. 들머리는 물론이고 산중에는 그 흔한 안내판도, 이정표도 하나 없다. 길은 가늘고 흐렸으며 때로는 지워졌다. 어림짐작으로 가파른 산자락을 오르내리기를 세 시간여. 온몸이 땀범벅이 된 채 한참을 헤매다가 포기하고 돌아서기 직전에야 건물지 주위를 석축으로 쌓고 비워진 건물 자리에 안내문을 세워놓은 태백산 사고지를 찾아냈다.
# 사고지에다 이름을 새긴 까닭
사고지에서 눈길을 끌었던 건 큼지막한 바위였다. 바위에는 이름이 여럿 새겨져 있다. 대부분 구한말쯤의 관료 이름들이다. 바위에다 이름을 새기는 건 이름난 명승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사실 사고지 주변 풍경은 명승은커녕 평범하기 짝이 없는 숲이다. 여기서 그들이 느꼈던, 바위에 큼지막하게 이름을 새길 정도의 감회는 어떤 것이었을까. 짐작건대 태백산 사고에 왔다는 것보다는, 재난과 질병이 침입하지 못한다는 십승지를 찾았다는 게 아니었을까.
바위에 새긴 이름을 읽어본다. 일제가 태백산 사고에서 조선왕조실록을 가져갔을 당시의 성주군수였던 유철희(柳哲熙)의 이름이 뚜렷하다. 평안남도와 경상북도 관찰사를 거쳐 황해지사와 충북지사 등의 요직을 두루 지낸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중양(朴重陽)의 이름도 보인다. 봉화군수였던 박주동(朴注東), 봉화현감으로 부임하자마자 태백산 사고를 찾았다는 봉화현감 장화식(張華植)의 이름도 있다. 한평생 양지에서 떵떵거리고 살았던 그들에게도 과연 ‘삼재불입처’와 ‘십승지’가 필요했을까.
세월이 바뀌면서 재난의 종류도 바뀌었다. ‘현대판 삼재’라면 자연재해, 전염병, 그리고 경제공황쯤이 아닐까. 그렇다면 폭우 피해가 속출했고, 창궐한 전염병은 여태 진행 중이며, 경기침체와 물가인상의 이중고를 겪고 있는 지금이 딱 삼재가 아닌가. 십승지를 찾아간들 그걸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번잡한 세상사에 등을 돌리고 앉아서 수백 년을 고요하게 흘려보낸 자리에 서 보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지 않을까. 깊은 산중의 태백산 사고지를 찾아간 마음이 그랬다.
# 이제는 실록 아닌 종자를 지키는 땅
춘양이 품고 있는 ‘비장(秘藏)’과 ‘은거(隱居)’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이어진다. 춘양 서벽리에는 ‘시드볼트’가 있다. 시드볼트는 야생식물 종자를 영구저장하는 시설이다. 노르웨이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진 종자 저장고다. 내진 설계로 지하 46m에 터널형으로 설계한 창고는 연중 영하 20도로 유지되고 있다.
전 지구적 재난에 대비한 야생식물의 백업시스템이어서 시드볼트 주변은 엄격한 경비가 이뤄지고 있다. 방문은 물론이고 접근도 불가능하다. 외관을 눈으로 볼 수도 없다. 시드볼트가 여기 들어서게 된 건 서벽리가 있는 춘양 일대가 태백산 사고지가 있는 데다 십승지로 꼽힌 오지이기 때문이다.
사실 춘양에서 시드볼트보다 유명한 건 서벽리의 백두대간수목원이다. 규모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수목원 전체 면적의 95%가 비공개 구역이고, 일반에 개방하는 건 5%라는데 그 면적이 자그마치 62만 평이다. 백두대간수목원의 대표 생물은 한국 호랑이다. 드넓은 수목원은 보통 호랑이가 있는 ‘호랑이숲’을 목적지 삼아 다녀오면서 구경하게 되는데, 지금 야생화 언덕에 털부처꽃과 긴산꼬리풀이 가득 피어나 장관이다.
# 깊은 산중에서 노다지를 캐다
이제 더 깊은 곳으로 가보자. 영월의 내리에서 춘양 쪽으로 도래기재를 넘기 직전에 마을 표지석이 있다. 우구치리를 알리는 이정표다. 골짜기의 모양이 소의 주둥이를 닮았다고 해서 고개 이름이 ‘우구치(牛口峙)’다. 우구치리에는 ‘금정(金井)마을’이 있다. 1923년 채굴이 시작된 금광인 ‘금정광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금을 담보로 화폐를 발행하는 ‘금본위제’를 시행하면서 ‘선원주의(先願主義)’라고 해서 산의 소유 여부와는 관계없이 캐낸 금을 근거로 광업권을 먼저 출원한 사람에게 채굴 허가를 내주는 산금(産金) 정책을 시행했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금을 찾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기록에 따르면 1933년 한 해만 전국에 자그마치 3000개 금광 개발작업이 이뤄졌을 정도였다.
우구치리의 금정광산은 경남 김해 출신의 광산업자인 김태원이 1923년 개발한 광산이다. 전 재산을 쏟아부어 굴을 파고 갱목을 넣는 끝도 없는 일을 2년여에 걸쳐 하다가 먹을 쌀이 다 떨어져갈 무렵에 노다지 금맥을 발견했다. 그는 1932년 이 광산을 일본인에게 55만 원에 팔아넘겼는데 지금 시세로 치면 550억 원 남짓의 거금이다. 광산을 팔아넘긴 그해 금정광산에서 생산한 금이 233㎏이었다는 기록을 보면 그것도 헐값에 판 셈이었다.
# 금광 갱도가 뿜어내는 차가운 입김
‘광산왕’이란 칭호로 불리던 김태원은 광산업을 해 번 돈으로 학교를 세우고, 교량 가설비를 내고, 가난한 이를 도왔다. 이러저러한 민간단체에 지원한 돈까지 대충 합쳐도 10만 원, 그러니까 지금 시세로 100억 원이 넘었다. 훗날 액화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가 파산한 그는 6·25전쟁이 나던 1950년 9월 경북 고령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금정광산에서 한창 금이 쏟아져나오던 시절, 이 깊고 좁은 골짜기의 금정마을에만 3000명이 넘는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여관과 식당이 즐비했고, 한 집 건너가 술집이었단다. 울창한 낙엽송 숲 사이 독가촌을 다 더해도 10가구 남짓에 불과한, 하루 두 번 들어오는 버스도 빈 차로 왔다가 빈 차로 돌아 나가는 지금의 금정마을을 보면 도무지 믿기지 않는 얘기다.
여기까지 갔다면 폐광된 금정광산에 가보길 권한다. 마을의 좁은 길을 따라서 차로 끝까지 올라가면 그 끝에 광산이 있는데, 갱도에서는 맑고 차가운 물과 온몸이 오싹해질 정도의 찬바람이 나온다. 찬바람은 갱도에서 나오자마자 입김처럼 허연 수증기가 돼서 주위에 낮게 깔린다. 여기는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긴팔 옷을 덧입어야 할 정도로 춥다. 사람들이 다 떠나가 텅 비어버린, 오래된 꿈속 같은 오지 마을 이야기다.
■ 춘양구곡
춘양은 오지 봉화에서도 가장 궁벽한 땅이지만, 이 깊은 오지 속에서도 유학자들은 성리학적인 삶과 도리를 생각했다. 그 증거가 바로 조선 후기 학자 경암 이한응이 춘양의 운곡천 변의 명소 아홉 곳에다 이름과 시문을 붙인 ‘춘양구곡’이다. 춘양구곡은 앞서간 학자들이 은거한 정자가 있는 굽이를 구곡으로 정했는데, 구곡 중 제2곡인 ‘사미정’과 제8곡 ‘한수정’이 가장 볼 만하다. 특히 연못을 두르고 그 가운데 아름다운 한옥을 들인 한수정의 아름다움은 각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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