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홀연히 사라지고 싶을 땐 - 군산 어청도
中 전횡장군 나라잃고 표류하다
푸른섬 발견하고 ‘어청도’ 명명
전횡 절의 기리는 사당 ‘치동묘’
단정하고 깔끔한 형태의 ‘등대’
해 넘어가는 시간따라 색 바꿔
한편의 영화처럼 관람하는 묘미
어청도(군산)=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군산의 어청도는 먼 섬입니다. 중국 산둥반도의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은,
산둥(山東)까지의 거리가 300㎞나 된다는 사실에 미뤄보면 터무니없습니다만,
‘그만큼 우리 땅에서 멀다’는 의미에서 나온 얘기일 겁니다.
군산에서 뱃길로 73㎞. 군산여객선터미널에서 하루 한 번(토·일은 두 번) 뜨는 페리호를 타고
꼬박 2시간을 가야 섬에 닿습니다. 거리도 멀지만 배가 하루 한 번 뜨니 섬에 가려면 무조건 하룻밤을 자야 합니다.
어청도가 매력에 비해 덜 알려진 이유입니다. 어청도에는 근사한 등대가 있고, 훌륭한 트레킹 코스가 있으며,
역사와 전설도 있습니다. 어디 아주 먼 곳으로 홀연히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지요?
그럴 때 이곳을 권합니다. 서해 먼바다의 작은 섬, 어청도입니다.
# 감탄사로 이름을 삼은 섬…어청도
서해 북단의 멀고 외딴 바다에 떠 있는 ‘절해고도(絶海孤島)’. 전북 군산 여객선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가장 먼 섬이 어청도다. ‘어청도’ 하고 입안에서 섬 이름을 가만히 소리 내보면, 둥글고 맑다. 그런데 섬에 붙여진 이름의 한자가 뜻밖이다. ‘물고기 어(魚)’가 아니라 ‘어조사 어(於)’이고, ‘맑을 청(淸)’이 아니라 ‘푸를 청(靑)’이다. ‘어조사 어’는 감탄사로 쓰인다. 그러니 어청도란 섬 이름의 한자를 풀면 ‘아! 푸르다’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맑을 청’이 대체로 맑다 못해 푸른빛이 감도는 물의 뜻을 품고 있고, ‘푸를 청’은 대체로 나무나 숲을 말할 때 쓴다. 어청도 물색이 거울처럼 맑다는데도 ‘맑을 청’이 아니라 ‘푸를 청’이라면 ‘아’ 하고 감탄한 대상이, 물이 아니라 숲이었다는 얘기다. 왜 그랬을까. 그 사연을 뒤져봤다.
지명 유래의 전설을 꺼내보니 ‘아! 푸르다’ 하고 탄성을 지른 건 전횡(田橫) 장군과 그 부하다. 전횡은 중국 제나라 사람. 기원전 202년에 죽었으니 자그마치 2400년 전 사람이다. 제나라가 패망하자 그는 사촌 형제인 전담, 전영과 함께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제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이른바 ‘후제(後齊)’다. 그리고 형제 셋이 돌아가면서 제나라 왕을 지냈다. 장군이라고 부르지만 전횡이 왕위에도 올랐다는 얘기다.
한나라의 유방이 천하를 평정했고 후제가 다시 망하자 나라를 잃은 전횡은 부하 500명을 이끌고 바다로 나갔다. 돛단배를 타고 바다를 떠다니던 중 3개월여 만에 어청도를 발견했다. 해무로 가득한 바다를 유랑하듯 표표히 떠다니던 중에 안개가 걷히고 홀연히 푸른 산 하나가 나타나니 그게 어청도였다는 얘기다. 그 경관이 인상 깊었던지 전횡은 ‘푸를 청’을 섬 이름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 의롭고 억울한 죽음이 신이 된 곳
어청도에서 전횡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어청도 마을 안쪽에 ‘치동묘(淄東廟)’는 꼭 들여다봐야 할 곳이다. 치동묘는 전횡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치동(淄東)이란 제나라의 수도가 ‘임치(臨淄)’였으며, 전횡이 싸움에 패한 뒤에 ‘동(東)’쪽으로 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당을 처음 지은 게 백제 때라니, 섬사람들은 누대에 걸쳐 이곳에서 두 손 모아 소망을 간절히 빌었던 셈이다. 뱃사람들의 풍어와 무사의 기원이 그곳에 모였다. 어디 희망뿐이었을까. 가난한 섬살이의 절망과 바다에서의 돌연한 죽음에 대한 비탄도 깃들었으리라.
그런데 왜 섬사람들은 나라를 잃고 도망쳐 온 패잔병 무리의 우두머리 전횡을 위한 사당까지 지어줬던 것일까. 그건 바로 전횡이 끝까지 지켰던 절의(節義)와 관계있다. 그 얘기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다. 천하를 통일한 유방은 감언이설로 전횡을 불러들인다. 유방의 부름을 받고 낙양으로 향하던 전횡은 적국의 왕에게 목숨을 구걸한다는 수치스러움에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한다. 그 소식을 들은 500명의 부하도 전횡을 따라 목숨을 끊는다. 새로운 왕조에 협력하는 대신 죽음으로 지조를 지킨 셈이었다.
섬에서는 그랬다.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억울한 모함을 당했거나 죽임을 당한 인물들이 섬사람들에게는 신이 됐다. 임경업 장군도, 최영 장군도, 송징 장군도, 사도세자도 다 그런 인물들이었다. 섬사람들은 억울하게 비명에 간 영웅들을 신으로 모시면서 위험한 바다에서 아슬아슬 살아남아야 했던 자신들의 삶과 동일시했다. 그게 외딴섬 사람들이 위험천만하게 삶을 건너가던 방식이었다.
어청도 마을 안쪽에 있는 치동묘에서는 더 이상 당제가 열리지 않는다. 그래도 치동묘는 제법 단정하게 관리되고 있다. 사당 안에는 위패와 함께 전횡 장군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붉은 옷을 입은 긴 수염의 전횡 장군이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이것과 같은 전횡 장군의 초상화가 군산시 옥구읍 치동서원의 치동묘에도 있다. 치동서원은 전횡 장군을 시조로 모시는 담양 전씨의 문중 서원이다.
# 어청도 등대의 미감, 팔 할이 경관
어청도를 대표하는 명소는 단연 등대다. 누가 우리나라 등대 중 가장 아름다운 걸 딱 하나만 뽑으라고 질문하면 생각해볼 것도 없다. 1등은 단연 어청도 등대다. 등대는 어청도 서북쪽 끝에서 망망한 바다를 마주 보고 있다. 어청도 등대가 아름답다는 건 누구나 동의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는 쉽게 눈치채기 어렵다. 좋기는 한데 왜 좋은지 잘 모른다는 얘기다.
어청도 등대는 눈에 띄게 화려한 것도, 일부러 멋을 내서 지은 것도 아니다. 그저 단정하고 깔끔하다. 등탑 지붕의 붉은색이 선명하고 시멘트 외벽의 문양과 창이 돋보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어청도 등대의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는 없다. 어청도 등대의 아름다움의 팔 할은 ‘주변 경관’에 있다. 촛농이 흘러내리다 굳은 듯한 거대한 기암의 해안, 둘 다 코발트색이어서 구분이 불가능한 하늘과 바다. 등대 주위에 쌓은 낮은 돌담과 그 돌담 안의 잔디, 초록으로 뒤덮인 등대 주변의 구릉…. 이런 주변 경관들이 순백의 어청도 등대와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다. 그래서 어청도 등대를 보는 방법은, 다른 등대와는 다르다.
지금부터는 어청도 등대를 보는 법. 등대 앞으로 가서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까지는 똑같다. 그러고는 멀찌감치 뒤로 물러서서 등대가 가장 잘 보이는 계단에 앉는다. 거기서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등대를 본다. 해가 질 무렵이라면 더 좋겠다. 어청도에서 해는 등대 뒤로 진다. 해가 넘어가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색을 배경으로 등대가 서 있는 모습이라니…. 그래서 요즘 같은 휴가철의 어청도 등대 앞은 마치 극장 같다. 관광객들이 등대와 그 너머의 해가 지는 바다를 향해 계단에 빼곡히 앉아서 영화를 보듯 일몰을 ‘관람’한다.
진짜 영화 팬들은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와도 자리를 뜨지 않듯이, 어청도 등대를 잘 보려면 해가 떨어지고 나서 한참 뒤까지 머무는 게 요령이다. 해가 진 하늘이 온통 푸른빛으로 물드는 순간도 좋고, 어둠이 내려올 즈음 어청도 등대의 등탑에 불이 켜지고 직선의 불빛이 밤바다를 가르는 모습도 좋다. GPS의 시대에 등대는 이미 쓸모를 잃었다지만, 항해하지 않는 이들에게 등대의 불빛은 여전히 인문적 상징이자 위안이다. 그리고 좋은 여행 목적지다. 그것만으로도 등대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
어청도에서 맑은 날에는 매일 이곳을 찾아가길 권한다. 해는 날마다 다른 빛깔로 하늘을 물들이며 떨어지고, 그때마다 어청도 등대의 낙조 풍경도 달라지니 말이다. 운 좋게 어청도 등대 뒤로 아름답게 지는 해를 봤다면, 섬을 떠나서 일상으로 되돌아간 이후라도 어디선가 근사한 낙조와 맞닥뜨릴 때마다 여기 어청도 등대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이런 근사한 낙조를 어청도에서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하면서 말이다.
# 청어 떼 몰려들고, 고래를 잡았던 섬
사실 어청도는 ‘그림 같은’ 섬은 아니다. 다른 섬에는 흔하디흔한 해수욕장 하나 없으니 ‘피서지’도 아니다. 외딴섬의 오래된 정취가 남아있는 것도 아니다. 예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어청도는 영해 기선상의 섬이라 군사적 요충지다. 이런 이유로 오래전부터 해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갖가지 시설을 섬에 지었다. 산 중턱을 뭉텅뭉텅 깎아내 부대를 짓고, 보급소를 짓고, 숙소를 지었다. 그 시설들이 섬 중턱에서 마을을 짓누르고 있다. 군부대 관련 외지인들이 드나들면서 마을도 차츰 예전 어촌의 모습을 잃어갔다.
어청도의 주민은 주민등록으로는 168가구에 450여 명이지만, 실거주 인구는 100가구에 200여 명 정도다. 지금 섬의 형편은 어렵다. 주민들은 거의 전적으로 어업에 종사하는데 번듯한 배도 없고 젊은이도 없어 낚시로 고기를 잡는 ‘채낚기’나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채낚기로 하루 종일 잡아봐야 우럭이나 노래미, 장어 20마리 안팎. 낚시꾼을 태운 레저 배가 잡는 고기보다도 적다.
어청도에도 ‘좋았던 시절’은 있었다. 어청도는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어업의 전진기지로 흥청거렸다. 청어 떼가 몰려들고 돔, 가오리, 광어 등으로 ‘물 반 고기 반’이었다던 시절이었다. 1880년대 일본 어민들이 들어와서 잠수어업을 시작했고, 1898년에는 인천에 살던 일본인 20가구가 이주해왔다. 10년 뒤 일본인 가구는 40가구로 늘었다. 멀고 외딴섬에 1903년 일본우편수취소가 문을 열었고, 심상보통학교 교육이 시작됐다는 것만 봐도 그때 섬의 위세를 알 수 있다. 어청도 등대도 그 무렵인 1912년에 세워진 것이다.
1940년대부터는 고래잡이 어선들의 기항지로 이름을 날렸다. 고래잡이 배들은 어청도에 회사를 차리고 일대 바다에서 잡은 고래를 끌어올려 그 자리에서 해체했다. 고래잡이 회사에서 어청도에 잡은 고래로 만드는 고래기름 가공 공장까지 지었다고 했다. 해방 이후 어청도는 홍어잡이 기지가 됐다. 홍어잡이가 끝나면 섬은 저인망 불법 어선이 드나들었다. 씀씀이가 특히 헤픈 불법 어로 선원들을 겨냥해서 다방과 여관, 음식점들이 섬 곳곳에 들어섰다. 섬사람들은 ‘그 무렵이 어청도가 가장 흥청거렸던 시절이었다’고 기억했다.
섬에는 그때의 자취가 드문드문 남아있는데, 손바닥만 한 섬에서 그걸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여객선 선착장 남쪽 해안가에 있는 ‘명진민박’은 예전 포경회사 자리이고, 빨래를 걸어놓은 민박집 앞마당이 그때 잡은 고래를 부려놓고 해체하던 곳이다. 고래 해체장 바로 옆에는 ‘고래등 다방’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어청도 임시파출소로 쓰고 있다.
n자형 섬에 이어진 트레킹 코스
능선따라 오르내리는 ‘안산넘길’
바다·하늘 교차하며 절경 이뤄
228종의 조류 사는 ‘마법의섬’
남반구 서식 철새들 모여들고
원추리꽃 흐드러진 군락 눈길
# 푸른 바다 끼고…최고의 트레킹 코스
어청도는 영어 알파벳 소문자 n자처럼 생겼다. 가운데 움푹 들어온 만(灣)이 웬만한 바람이며 파도를 다 막아줘서 천혜의 항구 역할을 한다. 트레킹 코스는 n자처럼 생긴 섬의 등지느러미를 따라 능선으로 이어진다. 섬 트레킹은 바다 조망을 확보하기 위해 능선을 타고 가는 게 보통. 어청도도 예외는 없다. 그러니 군산에서 배를 타고 어청도로 들어서면서 섬의 생김새만 딱 봐도 트레킹 코스가 그려진다.
어청도의 숲은 생경하다. 섬 전체가 초록의 녹음으로 가득하지만, 어쩐지 나무보다 관목이 더 많은 듯하다. 동남아시아 섬의 숲과 비슷한 느낌이다. 왜 그런가 했더니 소나무 재선충 때문이다. 10년 전쯤 소나무 재선충이 섬 전체에 한꺼번에 퍼져서 소나무가 죄다 죽었다. 군데군데 서 있는 고사목이 그 흔적이다. 등대 주변의 소나무를 비롯해 섬 안의 소나무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만 남았다. 소나무가 없으니 숲이 휑하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이득이 되는 것도 있다. 나무가 없어 시야가 확보되니 섬 트레킹의 매력인 탁 트인 조망을 얻게 된 것이다. 어청도의 트레킹 코스는 모두 4개다. 1코스는 어청도 등대로 가는 길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긴 하지만, 마을에서 등대까지 2㎞가 채 안 되니 뭐 트레킹 코스라 할 게 없다. 2코스는 마을과 포구 안쪽의 바다를 끼고 해안 나무 덱 길을 걷는 코스다. 선착장과 마을 그리고 나무 덱 길을 잇는데, 이것도 구간 전체가 평지라 말만 트레킹 코스지 가벼운 산책 수준이다.
그러면 3코스와 4코스가 남는데, 4코스는 트레킹 코스가 지나가는 당산과 헬기장 주변이 한창 군부대 시설 공사 중이라 일부 구간은 통제된 상태다. 야산을 대규모로 파헤쳐 놓은 데다 안전 문제도 있으니 접근하지 않는 게 좋겠다. 그렇다면 하나 남는 트레킹 코스는 3코스다. 1·2코스가 싱겁고, 4코스는 가지 못한대도, 전혀 아쉽지 않은 건 3코스가 다른 코스 모두를 더한다 해도 바꾸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안산넘길’이란 이름이 붙은 3코스는 마을에서 어청도 등대로 가는 길의 고갯마루에 있는 팔각정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공치산(115.9m)과 안산(106.6m), 검산봉(103.1m)을 차례로 넘어가서 독우산(87.2m) 아래 동방파제로 내려섰다가 되돌아온다. 줄곧 능선을 따라가는 이 길은 제법 오르내림이 있는데, 길의 방향과 높이가 달라지니 같은 경관도 다양한 시선으로 보인다. 고도를 높이면 능선 너머로 바다가 보이고, 고도를 낮추면 하늘이 가까워지는 식이다.
# 새도 있고, 꽃도 있고…날것 같은 섬
트레킹을 시작하자마자 길 위에 천연덕스럽게 앉아있는 새를 봤다. 흔하게 볼 수 없는 여름새 후투티다. 어청도는 내국인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세계적인 탐조의 명소로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영국의 환경운동가 나일 무어스가 2002년 어청도에 228종의 조류가 서식한다는 사실을 국제조류보호협회에 보고했다. 무어스는 조류 서식지로 어청도의 환경적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어청도를 ‘마법의 섬’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이때부터 어청도가 해외에 탐조의 섬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청도에서 새를 많이 볼 수 있는 건 남반구 철새들이 번식을 위해 북반구로 이동하는 중간 지점이기 때문. 어청도에서 새를 가장 많이 볼 수 있을 때는 5월 무렵. 그래서 새를 볼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산길에서 후투티와 마주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주변이 온통 새소리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마을을 산책하는데 민가 바로 뒤편 숲이 생전 처음 들어본 새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공치산에서 목넘쉼터로 내려서는 길 주변은 온통 원추리 꽃밭이다. 노란 원추리꽃이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흐드러졌다. 홍도를 비롯한 섬에도, 무주의 덕유산에도 원추리가 많다지만, 이만한 원추리 군락은 어디도 흔치 않다. 어청도의 트레킹 코스는 좋지만 한여름의 폭염에 좀 지쳐서 ‘굳이 한여름 뙤약볕에 트레킹을 할 이유는 없겠다’ 싶어 다른 계절에 어청도 방문을 권할까 했는데 원추리를 보고는 마음이 달라졌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피어난 원추리 꽃물결을 보려면 요즘 같은 뜨거운 여름날이어야 한다.
어청도에는 번듯한 해수욕장은 없지만,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가볍게 해수욕을 할 만한 곳은 있다. 3코스 트레킹을 마치면 2코스 해안 덱을 딛고 마을로 돌아오게 되는데 덱 중간에 백사장이 있다. 모래는 굵고 거칠지만 산길을 걷느라 땀에 젖은 몸을 바다에 담그고 더위를 떨쳐버리기에는 충분하다. 일행 중 한 명이 그 바다로 뛰어들었다. 외지인의 발길이 덜 닿은 절해고도를 걸으면서 날것 같은 섬을 느꼈다면, 해수욕장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바다에 뛰어들어 느끼는 건 날것 같은 바다다. ‘날것 같은 섬’과 ‘날것 같은 바다’가 그곳에 있다. 어청도를 권하는 이유다.
■ 어청도와 전횡도
군산 어청도에 전횡을 기리는 ‘치동묘’가 있지만, 전횡이 은거했던 섬은 중국 산둥(山東)성의 지모(卽墨)시에 있는 섬 ‘전횡도’라는 게 정설이다. 전횡도는 서울 여의도 면적의 절반쯤인 1.46㎢(44만여 평) 크기의 섬이다. 섬 안에는 전횡의 부하 500명을 기리는 무덤 자리도 남아있다. 그렇다면 왜 바다 건너 우리나라 어청도에 전횡의 이야기와 그를 기리는 사당이 남아있는 것일까. 전적으로 추론이지만, 그건 아마도 전횡과 부하들이 식량 등을 구하기 위해 해적질을 하며 서해 일대의 섬을 드나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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