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용문산 아래 굽이치는 물줄기 따라 정자와 누각이 빚어낸 ‘초가을 정취’

醉月 2022. 8. 29. 23:01
■ 사소해보이지만 근사한 것 많은 경북 예천


병풍 같은 큰 바위 위 ‘병암정’
그 앞 연못에 연꽃 한가득 운치

솔숲·기암괴석의 절경 ‘초간정’
일체의 인위 없이 자연과 조화
왜란·호란 겪으며 세차례 재건

퇴계 쉬어간 자리에 ‘도암대’
멀찍이서 주변경관 함께 감상을

낙동강 내성천 휘도는 ‘회룡포’
회룡대서 보는 풍경으로 유명
오르는 길 ‘詩안내판’ 감상 더해


예천=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뜨거운 폭염의 여름에는 해보지 못하는 여행이 있습니다. 뒷짐을 지고서 느긋하게 이곳저곳을 구경 다니는 여행입니다. 한여름 여행에는 대개 출발지와 목적지밖에 없습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 탓이지요. 더위는 아직 다 물러가지 않았지만, 처서가 지나면서 아침·저녁으로 바람 끝이 서늘해졌습니다. 좀 더 느긋한 여행을 다녀와도 좋을 때입니다. 그렇게 가을을 시작하는 첫 여행지로 경북 예천을 권합니다. 예천은 ‘단술 예(醴)’에 ‘샘 천(泉)’ 자를 씁니다. 삼국시대 지명도 ‘수주(水州)’였다지요. 물이 좋다는 얘기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천의 명소에 물이 빠지지 않습니다. 낙동강 지류의 명소로 꼽히는 회룡포도, 선몽대도 그렇습니다. 오래된 삼강주막도 물을 끼고 있습니다. 그윽한 정취가 가득한 정자 초간정도, 병암정도 다 물을 보고 있습니다. 예천의 곳곳을 흠뻑 적시며 흘러가는 물줄기처럼 그렇게 떠나는 여행입니다.


# 예천을 여행하는 법

예천에는 사소해 보이지만, 근사한 것들이 제법 있다. 곳곳에 빼어난 정자며 누각, 그리고 조망의 자리인 대(臺)가 있다. 이걸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며칠의 여정을 다 채울 수 있을 정도다. 고택과 전통마을이 곳곳에 있고, 공간에 깃든 이야기들도 풍성하다. 예천에도 내로라하는 여행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다른 곳만큼 압도적이지 않다. 말하자면 ‘다 고만고만한 곳들’이다. 이건 비슷비슷하다는 뜻이지 절대로 공간적 가치가 시시하다는 건 아니다. 그래서 예천을 여행할 때는 지도 한 장 들고서 순서 없이 그저 내키는 대로 다녀도 좋다. ‘꼭 가야 할 곳’을 따로 정해주지 않기로 한 이유다.

‘하지 않는 것’으로 여행은 더 풍성해지기도 한다. 꼭 가야 할 곳이 없으면 여행이 느긋해지고, 여행이 느긋해지면 그저 바삐 스쳐 지나갔던 작은 것들을 좀 더 자세히 보게 된다. 예천에서는 늦잠도 좀 자고, 오래된 추억을 그려놓은 읍내 골목도 기웃거리며 고택 툇마루에 앉아 물끄러미 풍경을 바라보는 여행을 해보길 권한다. 이런 느긋한 여행이 어울리는 지금은, 여행하기 딱 좋은 가을의 초입이니까.

먼저 예천의 정자 얘기. 구한말에 지어진 병암정(屛巖亭)부터 간다. 점술의 힘까지 빌려 어찌어찌 벼락출세로 법부대신 자리까지 오른 이유인. 그가 1898년 유배형을 받고 예천 금당실마을로 내려와 정자 ‘옥소정(玉蕭亭)’을 지었는데, 1920년 그걸 예천 권씨 문중에서 사들여 조선 전기 학자 권오복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공간으로 삼고 ‘병암정’이라 이름을 고쳐 달았다.



# 병암정이 아름다운 이유

정자는 병풍처럼 생긴 큰 바위, 그러니까 ‘병암(屛巖)’ 위에 지어졌다. 직벽의 바위 아래에는 연꽃 흐드러진 제법 큰 연못이 있고, 연못 가운데 섬까지 운치 있게 띄워놓았다. 정자 주위로 바위와 연못, 석가산(石假山) 등의 전통 조경요소까지 두루 갖췄는데, 병암정에서 이것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이 정자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풍경이었다. 정자가 아무리 격조 있고 고즈넉하다 해도, 배경이 되는 주변이 흐트러지거나 어울리지 않는다면 그 매력이 반감되기 마련. 다른 건축물과 달리 정자가 주변 풍경과 함께 읽히는 공간이어서 그렇다.

정자를 보는 시선의 방향은 두 개다. 하나는 밖에서 정자를 보는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정자에 들어서 바깥을 보는 시선이다. 병암정은 그 두 가지 시선 모두 다 별 다섯 개 만점인 ‘최상’이다. 어지간하면 시선 안으로 어수선한 마을 풍경이나 하다못해 전봇대 및 포장도로가 끼어들어 거슬리는데, 여기 병암정은 그야말로 무위자연 속에 있는 듯하다. 특히 마주 서서 병암정을 바라보는 풍경이 완벽하다. 연꽃이며, 녹음이 한창인 연못 주변의 버드나무 노거수에다 바위 끝에서 가지를 뒤틀고 있는 소나무까지….



# 정자 주인을 따라 박물관으로

병암정 얘기를 앞세웠지만, 더 유명한 예천의 정자는 초간정(草澗亭)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 권문해가 마흔아홉의 나이에 정자를 지었다. 울창한 솔숲과 기암괴석, 그리고 옥류가 절경을 이룬 자리에 정자가 화룡점정(畵龍點睛)한 자리다.

정자에 앞서 정자 주인 얘기부터. 초간 권문해는 관찰사를 거쳐 지금으로 치면 국가기록원과 언론 역할을 하던 ‘사간’ 자리까지 올랐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자취는 단군 이래 역사와 인물, 지리, 문학, 예술 등을 망라한 백과사전 격인 ‘대동운부군옥’을 펴낸 것이다.

대동운부군옥은 보물이다. 국내 최초의 백과사전이란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높게 평가받는 건 권문해가 백과사전을 쓴 취지다. 중국을 사대하면서 우리 역사를 등한시하는 당시의 세태를 줄곧 비판해왔던 그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눈으로 세상을 보여주려 했다. 보물로 지정된 목판과 고본은 예천박물관에 있다. 대동운부군옥은 예천박물관을 대표하는 10대 소장 유물 중 하나다. 서가처럼 꾸며놓은 어두운 전시공간에서 세월의 때가 묻은 오래된 목판이 빛을 받아 드러내는 아우라가 제법 볼 만하다.

예천박물관에서는 이것 말고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거문고와 옥피리도 볼 수 있다. 거문고는 조선 태종이 음악에 능통했다는 아들 희령군에게 준 것. 거문고 뒷면에 ‘내사희령금(內賜熙寧琴)’이란 음각이 뚜렷하다. 옥으로 만든 피리는 함길도 병마도사 등을 지낸 장말손이 세조로부터 받은 하사품이다. 옥피리는 ‘맏사위 집으로 전하라’는 장말손의 당부로 사위에서 사위로 건네지다가 예천 권씨 가문으로 옮겨졌는데, 그대(代)에 딸이 없어 사위를 보지 못하는 바람에 초간종택에서 대대로 소장하게 된 걸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 두 번 불타서 세 번 지어진 정자

지금의 초간정은 세 번째로 지어진 것이다. 권문해가 처음 정자를 지은 것이 선조 때인 1582년. 그런데 불과 10년 만에 임진왜란의 병화로 잿더미가 됐다. 이에 권문해의 아들이 1626년에 다시 지었으나 이번에도 딱 10년 만에 병자호란이 터져 다시 무너졌다. 그리고 100여 년 뒤인 1739년에 세 번째로 세운 것이 지금의 초간정이다.

소백산 자락의 용문산에서 내려온 물이 바위를 만나 짧게 굽이치는 자리에 초간정이 있다. 물을 굽어보는 바위 언덕 위에다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앉힌 정자의 풍모는 매혹적이다. 정자를 빼고는 일체의 인위도 없는 조화로운 자연이 그곳에 있다. 초간정 정자의 경관에 대해 말하자면 맞은편에 세운 관리소 정자에 들어 내다보는 경치보다는, 정작 건너편 바위에 걸터앉아 건너다보는 경관이 훨씬 더 빼어나다. 물 건너편에서 정자를 바라보노라면 마치 딱 맞는 퍼즐 조각을 끼워 넣듯 정자를 앉혀놓은 눈썰미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눈앞의 경관에서 정자를 지워버린다면 그 감흥은 절반에도 채 못 미치리라. 풍경 속에 정자가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정자가 저 스스로 자연과 함께 풍경이 돼 빼어난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것이다. ‘명승’으로 지정된 게 초간정이 아니라, 초간정과 그 주변의 숲을 함께 포함해 가치를 평가한 ‘초간정 원림(園林)’인 이유다.

그때나 지금이나 보는 눈은 비슷한지, 정자가 지어진 지 200년쯤 뒤에 초간정을 고쳐 지으며 지은 중수기에서도 초간정 자리를 발견한 권문해의 ‘안목’을 평가하는 대목이 있다. 중수기에는 정자가 들어선 자리를 “긴 벌판 넓은 언덕의 한 모퉁이에 있어 조금도 스스로 광채를 드러내지 못했던 곳이라 모두들 길옆에 버려둔 곳”이었다며 “공(권문해)이 하루아침에 그것을 찾아냈다”고 적혀있다.

세 번 고쳐 지었음에도 정자에서 처음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 있다. ‘초간정사’라 쓴 현판이다. 조선 중기 대사간을 지낸 박승임의 글씨인데, 두 번의 난리를 거치면서 두 번 잿더미가 됐음에도 현판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모래 자갈 사이에서 발견됐다. 함양 출신 박손경이 쓴 중수기의 마지막 대목은, 마치 300년 뒤에 정자를 찾은 여행자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읽힌다. “두 번의 불길에도 현판이 타지 않았으니 기이하도다. 이런 사실도 함께 써서 정자에 와서 노니는 자들에게 고해주는 바이다.”



# 이름을 새겨 정자 자리를 선점하다

예천에는 지도에도 안 나오는 꼭꼭 숨어있는 정자들이 곳곳에 있다. 사람들의 손길도, 발길도 닿지 않아 퇴락해가고 있지만, 운치만큼은 빼어난 정자들이다. 오래된 정자도 있지만 구한말이나 근대 이후 지어진 것들도 많다. 먼저 감천면 증거리의 감천저수지 곁에다 바짝 붙여 지은 정자 화석정(花石亭) 얘기부터. 화석정은 구한말 학문으로 제법 이름을 날렸던 조원봉이 벼슬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세운 정자다. 정자는 훼손되고 바위에 이름만 새겼던 자리에다 1984년에 다시 번듯하게 지은 게 지금의 화석정이다. 정자는 저수지가 보이는 바위 위에 올라 앉아있다. 돌담을 두르고 설치한 현대식 대문을 두었는데,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독특한 느낌이다.

화석정 바로 옆의 바위 벼랑에는 ‘삼호정(三乎亭)’이란 뚜렷한 글씨가 음각돼 있다. 정자는 없고 글씨뿐인 건, 아직 정자를 지을 형편은 못 되지만 정자 자리를 잡았고, 지을 정자에 내걸 현판 이름까지 정했다는 표식이다. 이를테면 정자 자리를 선점한 것인데, 그 뒤로 글을 적은 이나 그 후손들의 형편이 안 되는지 정자를 짓지 못해 바위에 새긴 이름만 덩그러니 남았다. 정자는 근사한 자연경관 속에 지어졌지만, 그저 풍류와 유희의 공간만은 아니었다. 옛 선비들에게 자연이란 성리학적 질서로 이뤄진 학문적 공간이기도 했다. 자연의 법칙을 상징으로 이해한 옛 선비들은 자연을 관조하며 인간과 학문의 도리를 생각했다. 예천에 정자가, 그것도 빼어난 경관 속에 유달리 많고, 근대 들어서도 계속 지어졌던 건 유교적 전통이 그만큼 뿌리 깊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 퇴계가 찾아낸 자리… 도암대

정자와 다를 게 하나 없지만, 정(亭)이 아니라 ‘대(臺)’로 이름 삼은 곳이 ‘도암대(陶巖臺)’다. 도암대는 퇴계의 학문과 덕이 드리운 거대한 그늘 아래 지어진 정자다. 도암대가 세워진 천변의 벼랑은 퇴계가 이웃 풍기군수로 있을 때 고향인 예안(지금의 안동)으로 가던 길에 늘 쉬어갔던 자리다. 1921년 감천면의 유림들이 그 자리를 기념하고자 계(契)를 맺은 뒤, 1934년에 유림이 주도하고 퇴계 후손이 힘을 합쳐 도암대를 세웠다. 그렇게 지은 것을 1958년과 1989년, 그리고 1995년 세 번 고쳐 지은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방치되다시피 한 도암대는 아예 풀숲에 가둬진 형국이다. 정자로 이어지는 계단길은 거미줄로 가득하고, 지붕 위를 칡덩굴이 슬금슬금 덮어가고 있다. 도암대는 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 없기도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거나 그 안으로 들어서 보는 것보다는, 도암대 한참 뒤로 물러나 길 위에서 정자와 그 주변 전체의 경관을 함께 보는 게 훨씬 더 좋다. 층암이 이어지다 갑자기 끊어져 절벽을 이룬 도암대의 풍경은 정자가 없다면, 아예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데, 예전에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 날마다 백여 명이 됐는데도 그 기이한 경관을 알지 못하다가, 퇴계가 이곳을 지나다 그 경관을 보고 수레를 멈춰 올라가자 그 뒤로 사람들이 이 비범한 경관을 비로소 알게 됐단다. 그 자리에 정자를 지었으니 정자에는 퇴계와 같은 ‘대군자(大君子)’가 사물을 보는 느낌은 보통 사람이 다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존경의 마음이 담겨있는 셈이다.



# 회룡포를 명소로 만든 자리, 회룡대

예천에도 기왕에 이름난 전국구 명소들이 있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 물길이 휘돌아나가는 회룡포가 대표적인 곳이다. 회룡포는 물이 오메가(Ω)의 위아래를 뒤집어놓은 모양으로 흐르면서 땅의 삼면을 섬처럼 가둔 곳. 땅이 물방울처럼 생겨서 육지와 이어져 있는데, 이어진 좁은 목을 몇 삽만 떠낸다면 그대로 섬이 될 것 같은 지형이다.

땅에서는 이런 지형이 안 보이지만, 비룡산의 절집 장안사 위 언덕에 세운 ‘회룡대(回龍臺)’ 앞 난간에서 그 모습을 ‘꽉 찬 시야’로 볼 수 있다. 마을을 크게 감아 도는 강물과 강 주변의 백사장과 숲, 경지 정리된 마을의 논까지…. 회룡포를 보는 회룡대의 거리와 높이는 딱 적절하다.

회룡대에 올라 보는 것과 올라 보지 않는 것, 그 감회의 차이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이다. 회룡대가 없었다면, 그러니까 물돌이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자리가 없었다면, 회룡포가 지금처럼 이름난 명소가 됐을까.

회룡포는 1995년까지 ‘의성포’였다. 의성에서 이주한 경주 김씨들이 대대로 살았고, 의성 상인들이 여기서 소금을 부려 ‘의성포’라고 했다. 의성포의 감입곡류형 물돌이 지형이 TV에 소개되면서 관광지가 됐는데, 문제는 의성포란 이름을 듣고 지레짐작한 이들이 예천이 아니라 경북 의성을 찾아가는 일이 잦았다는 것. 이에 예천군은 1996년에 의성포의 회룡마을 지명을 따서 회룡포라고 이름을 바꿨다.


# 시를 읽듯이 천천히 여행하기

회룡대는 장안사 입구에 차를 세우고 10분쯤 걸어 올라가면 된다. 올라가는 길에 시(詩)를 적어놓은 나무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계절별로, 혹은 시간별로 읽기 좋은 시들을 적어두었다. 김용택 시인의 ‘강가에서’는 그곳에서라면 언제든 읽어도 좋은 시다. “ 강가에서/ 세월이 많이 흘러 / 세상에 이르고 싶은 강물은 / 더욱 깊어지고 / 산 그림자 또한 물 깊이 그윽하니 / 사소한 것들이 아름다워지리라./ 어느 날엔가 /그 어느 날엔가는 / 떠난 것들과 죽은 것들이 / 이 강가에 돌아와 / 물을 따르며 / 편안히 쉬리라. ” 회룡포를 내려다보러 간 게 마침 저물 무렵이라면 나희덕 시인의 시 ‘그런 저녁이 있다’를 권한다. “…/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 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들으려 한다./…” 이것 말고도 적어서 걸어둔 시가 여럿이다. 이즈음 예천여행은 천천히 시를 읽듯이 여행하는 게 요령이다. 벽화가 그려진 읍내 맛고을문화거리를 걷고, 금당실마을의 그윽한 송림 숲을 느린 걸음으로 산책하며 공사 중인 용문사 대장전에서 금빛 후불 조각과 윤장대를 구경해보시길. 명심보감에 실린 효자 도시복 생가를 찾아가는 길에서 드라이브도 즐기고, 소백산하늘자락공원의 전망대에 올라 유장한 소백산 줄기를 바라보고, 삼강주막마을에서 막걸리 한 잔도 하면서 여유 있게 예천의 초가을을 느껴도 좋겠다. 내친김에 용궁면의 청원정과 풍양면의 삼수정, 용문면의 감로루와 야옹정까지 정자와 누각을 더 둘러보면 어떨까. 다 해도 좋고 다 하지 않아도 좋은 지금은, 여행하기 좋은 초가을이다.


■ 논쟁적 인물, 이유인

병암정 자리에 처음 정자를 지었던 세도가 이유인은 논쟁적인 인물이다. 벼슬에 오른 뒤 양지만을 좇아 ‘탐관오리’란 비판이 따라붙는다. 그가 결정적으로 인심을 잃은 건 주민에게 일당 한 푼 없이 예천 금당실마을에 99칸 집을 지으면서부터다.그런데 그 집은 제 집이 아니라 왕실의 별궁인 ‘행궁’이었다. 그렇든 말든 손가락질은 이유인에게로 향했다. 과(過)가 크긴 하지만, 작은 공(功)마저 없을까. 그는 적잖은 돈을 독립군 군자금으로 내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