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산과 직벽의 바위들이 병풍처럼 계곡을 둘러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겁니다. ‘높을 고(高)’에 ‘병풍 병(屛)’. 강원 정선군에 꼭꼭 숨어있는 ‘고병계곡’ 말입니다. 여행자들의 발길이 뜸한 오지의 산자락에 숨겨진 원시림의 계곡이라 아는 이들이 드문 곳입니다. 짙은 이끼로 뒤덮인 서늘한 계곡은 평소에는 거의 인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 국토가 피서 인파로 몸살을 앓는 이즈음에도 이곳만큼은 호젓합니다. 고병계곡은 계곡 트레킹이 제격입니다. 보통 계곡 트레킹이라면 하류에서 상류 쪽을 향해 숨차게 딛고 오르는 게 보통이지만, 고병계곡은 계곡 물길의 방향을 따라 ‘내려가는’ 편안한 걸음입니다. 숲이 하늘을 가린 계곡에는 진초록의 이파리를 투과한 햇살이 초록빛으로 반짝이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넘어져 푸르게 이끼를 뒤덮은 채 자주 길을 막아섭니다. 계곡 안쪽에 비밀처럼 숨겨져 있는 폭포들은 바위를 타고 넘으며 청량한 물소리로 흘러갑니다. 폭포 아래 숲 그림자 드리운 서늘한 진초록 소(沼)의 정취도 훌륭합니다. 이런 계곡 트레킹은 굳이 속도를 낼 일이 아닙니다. 계곡을 따라가는 트레킹 코스는 3㎞ 남짓. 서두르자면 1시간 남짓에 다 걷는 길이지만 여기서는 계곡을 따라 걷다 소름 오스스 돋는 숲 그늘 아래서 다리쉼을 하며 물소리를 듣거나, 폭포 아래서 물도 맞아가면서 되도록 느릿느릿 걷는 게 제격입니다. 계곡을 따라 첨벙첨벙 허벅지까지 적셔가며 즐기는 트레킹은, 비유하자면 ‘박하사탕’과도 같은 맛입니다. 새소리와 물소리를 벗삼아 촉촉한 원시림의 계곡을 따라 내려가며 깊이 숨을 들이쉬면 온몸의 혈관까지 알싸한 박하내음이 스미는 듯 합니다. 고병계곡에서 멀지 않은 곳에 트레킹을 즐길 수 있는 또 한 곳의 계곡, 덕산기가 있습니다. 덕산기계곡은 고병계곡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고병계곡이 짙은 숲의 좁고 어둑한 계곡이라면, 덕산기계곡은 하늘이 올려다보이는 넓고 환한 느낌의 계곡입니다. 덕산기계곡의 압권이라면 단연 파란 잉크를 풀어놓은 듯한 시린 물빛입니다. 이런 물빛은 아마도 석회암 성분 때문인 듯합니다. 바닥의 둥근 자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푸른 물빛은 일부러 물감으로 만들어낸다 해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입니다. 근래 들어 외지인들에게 알려지면서 휴가철에 좀 붐비긴 하지만, 성수기를 살짝 피해 찾아간다면 훌륭한 선택입니다. 덕산기계곡에다 물가에 우뚝 선 취적봉 산길까지 이어붙인다면 산길에서 흘린 땀을 푸른 계곡물로 씻을 수 있는 근사한 트레킹을 즐길 수 있습니다. 장마 뒤에 찾아온 폭염에 포위된 채 신문을 펴든 도시의 독자들에게 초록 이끼로 가득한 시린 물빛의 계곡으로의 초청장을 띄웁니다. 번잡스러운 준비물도 필요없답니다. 일찍 서둔다면 수도권에서 당일 여정으로도 너끈한 곳이니 말입니다.
# 한치 고갯길을 넘어 고병계곡 가는 길 ‘한치 뒷산’. 가을 억새로 유명한 강원 정선군 명소 민둥산의 본래 이름이 이랬다. ‘한치(汗峙)’란 ‘땀(汗)나게 오르는 고개(峙)’란 뜻이다. 정선군 남면소재지에서 유평리 쪽으로 오르는 해발 700m 남짓의 고갯길을 이렇게 부른다. 지금은 말끔하게 포장이 된 왕복 2차선의 아스팔트 도로지만, 예전에는 ‘지에무씨(GMC)’ 트럭도 헐떡이며 넘던 험하디험한 비포장 길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한치를 오르내리자면 땀깨나 흘렸을 것이었다. ‘한치 뒷산’이란 말 그대로 그 고개의 뒷산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부분 고개 이름은 산에서 따서 붙이는 법. 그런데 여기는 반대로 고개 이름이 먼저고 산 이름이 나중이었다. 그건 산보다 한치 고개가 주민들의 삶에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한치 뒷산’이 왜 민둥산이란 이름으로 바뀌었을까. 그 단서가 ‘정선아리랑’ 한 대목에 있다. “한치 뒷산의 곤드레 딱주기/ 님의 맛만 같다면/ 올같은 흉년에도 봄과 난다.” 예부터 한치 뒷산은 곤드레를 비롯해 갖가지 나물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산나물은 척박한 산촌마을 주민들에게는 보릿고개를 연명하는 거의 유일한 먹거리였다. 산에 기대살던 주민들은 나물이 더 잘 자라도록 일부러 산 이곳저곳에다 불을 냈다. 그러다 보니 한치 뒷산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 돼 버렸고 나중에는 아예 ‘민둥산’이란 이름이 고유명사가 돼 버린 것이었다. 민둥산은 억새 명소로 이름이 나면서 발구덕마을이 있는 동쪽 사면 쪽에 부드러운 등산로가 놓였다. 발구덕마을에서는 산행 거리도 짧고 길도 부드러워 민둥산을 유순한 산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지억산과 이어진 민둥산의 서쪽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숲이 더없이 깊다. 울울창창한 참나무와 소사나무, 잣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있어 볕 한 줌 들지 않는 말 그대로 ‘원시림’이다. 민둥산을 얕잡아 보고 이쪽으로 오른 등산객들이 조난을 당하기 일쑤다. 우리가 찾아가는 고병계곡이 바로 그 깊은 원시림에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채 꼭꼭 숨겨져 있다.
# 고병계곡 원시림 속에 비밀처럼 숨은 폭포 정선군 남면사무소에서 59번 국도를 따라 정선읍 쪽으로 1㎞쯤 달리면 우측으로 갈림길이 나온다. 이 길이 바로 한치를 넘는 길이다. 민둥산 서쪽 허리를 감아도는 이 길을 달리는 느낌이 참 독특하다. 길이 이어지는 모양새는 산자락을 끼고 도는 거친 임도 인데, 달리는 길은 중앙선까지 그려진 아스팔트 도로다. 산중의 허리를 타고 벼랑을 끼고 이어지는 길이면서 도로사정은 잘 정비된 국도를 방불케 할 정도로 편안하니 드라이브의 즐거움이 각별하다. 한치 고개를 넘어가다 왼편으로 ‘삼내약수’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하면 곧 고병계곡의 들머리다. 고병계곡의 물길은 삼내약수의 앞을 흘러내린다. 계곡 트레킹이라면 계곡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게 보통. 그러나 고병계곡의 상류는 길도 험하고 풍경도 별다른 게 없으니 상류에서 하류 쪽으로 트레킹 코스가 이어져 있다. 이미 해발 700m 남짓까지 차로 올라왔으니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 제법 길다.
계곡에는 따로 길이 없다. 도저히 건널 방도가 없는 바위벼랑에 짧은 다리 하나, 그리고 직벽의 바위를 타고 내려서는 철계단 하나 말고는 길의 자취가 아예 없다. 계곡 위쪽에서 만난 나권주 유평2리 이장은 “2년 전쯤 등산로를 정비해 놓았는데 계곡이 좁아 큰비 한 번이면 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고 했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온통 초록의 세상이다. 물가 쪽으로 쓰러진 몇 그루의 아름드리 나무가 온통 이끼로 뒤덮인 채 자주 길을 막아선다. 길 없는 계곡을 따라가며 나무둥치까지 타고 넘자니 발을 물에 담그지 않을 도리가 없다. 발목에서 무릎까지, 때로는 허벅지까지 적시면서 이리 저리 물을 건너가며 계곡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이끼 낀 바위가 좀 미끄럽기는 하지만, 서두르지만 않는다면 길이 위험하거나 힘겹지는 않다. 고병계곡에서 최고의 경치를 빚어내는 곳이 할미폭포와 사다리폭포다. 짙은 숲 속에서 연이어 나타나는 두 개의 폭포인데 두 곳 모두 어둑한 진초록의 숲 속에 있어 비밀스러운 느낌으로 가득하다. 처음 만나는 할미폭포가 협곡의 바위 사이로 수려한 풍광을 빚어낸다면, 그 아래쪽의 사다리폭포는 웅장한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제법 힘차다. 할미폭포가 여성적이라면, 사다리폭포는 남성적이라 할 수 있겠다. 폭포 아래서 숲그늘에 들면 서늘한 기운에 오스스 소름이 돋을 정도다. 아무리 폭염의 날씨라도 계곡물에 뛰어들면 금세 입술이 새파래진 채 햇볕이 드는 자리를 찾을 게 틀림없다. 트레킹 코스는 3㎞ 남짓으로 그리 길지 않은 편. 59번 국도가 지나가는 유평교 아래서 조양강의 물길에 합수하면서 계곡은 끝난다. 계곡의 풍경을 만끽하자면 되도록 느린 걸음으로 걷는 게 요령이다. 어차피 ‘주파’가 목적이 아니니 계곡 끝까지 내려섰다가 다시 물길을 되짚어 올라와도 좋겠고, 최고의 경치만 즐기겠다면 사다리폭포까지만 갔다가 되돌아올 수도 있겠다. # 덕산기계곡에서 보석 같은 물빛을 만나다 여기 고병계곡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덕산기계곡이 있다. 덕산기계곡은 고병계곡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고병계곡이 좁고 깊으면서 어둡다면, 덕산기계곡은 넓고 부드러우면서 환하다. 두 곳이 전혀 다른 풍광이 펼쳐지는 곳이니 한데 묶어 계곡 트레킹의 매력을 다양하게 즐기기에 제격이다. 덕산기계곡의 물길은 본래 정선읍과 오지마을 북동리를 잇는 옛길이었다. 그러던 것이 문치재를 넘어 북동리로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놓이면서 옛길은 흐려졌다. 쓰임새를 잃은 옛길이 몇 번의 수해로 끊기면서 길은 아주 잊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이곳을 찾아낸 오지여행자들이 저희들끼리 쉬쉬하며 드나들면서 덕산기계곡이 외부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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