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동양화가 말을 걸다_13

醉月 2013. 8. 4. 01:30

돈 대신 이름 남긴 시의 성인

두보 추흥

 

가을의 감흥 (秋興) 1_두보 (杜甫)

옥 같은 이슬이 단풍나무 숲을 시들게 하고 (玉露凋傷楓樹林)
무산과 무협에 감도는 기운은 쓸쓸하다 (巫山巫峽氣蕭森)
강의 물결은 하늘로 솟구치고 (江間波浪兼天湧)
변방의 바람과 구름은 땅을 덮어 어둡다 (塞上風雲接地陰)
두 번 핀 국화 보니 눈물겹고 (叢菊兩開他日淚)
외로운 배는 고향 생각나게 하네 (孤舟一繫故園心)
겨울옷을 마련하려 사방에서 가위와 자를 준비하고 (寒衣處處催刀尺)
높은 백제성에는 해질녘 다듬이 소리 급히 울리네 (白帝城高急暮砧)

▲ 추흥팔수(秋興八首) 작자미상, 모시에 연한 색, 27×30.7㎝, 선문대박물관

 

시성(詩聖) 두보(杜甫·712~770)가 ‘가을의 감흥 여덟 수(추흥팔수·秋興八首)’를 지은 곳은 쿠이저우(夔州)였다. 쿠이저우는 장강(長江) 중류에 있는 쓰촨성과 후베이성의 경계에 있는 협곡 마을이다. 충칭(重慶)시에 속한다. 장강의 거친 물살이 흰 거품을 내며 협곡의 절벽 사이를 흐르는 곳이다.

55세가 된 두보가 쓰촨성 청두(成都)에서 쿠이저우로 온 것은 그를 돕던 벗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제 의지할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다. 그는 기나긴 유랑생활로 생활은 궁핍했고 가난에 전 몸과 마음도 모두 병들었다. 언제 관직생활을 했는지 가벼운 벼슬살이의 기억마저 흐릿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시를 포기하지 않았다. 고통과 외로움이 세차게 밀려들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쿠이저우에서 400여수의 시를 남겼다. ‘추흥팔수’도 그중의 하나다.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작자 미상의 ‘추흥팔수’는 두보의 시 ‘추흥팔수’를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시와 그림이 합본된 ‘천고최성첩(千古最盛帖)’ 중에 들어 있다. 화첩의 오른쪽에는 그림 한 점이 펼쳐져 있고 왼쪽에는 두보의 시 ‘추흥팔수’가 모두 적혀 있다. 한 화면에 전부 다른 내용이 담긴 8편의 시를 동시에 그려 넣을 수는 없는 법.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추흥팔수’ 중 첫 번째 시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옥 같은 이슬이 내리자 단풍나무숲은 제 빛을 잃고 잿빛으로 변했다. 색이 빠져 나간 숲은 쓸쓸하고 황량하다. 허전한 숲 사이로 찬바람이 인다. 바람이 세차니 장강의 물결이 포효하듯 하늘로 솟구친다. 오랜 세월 객지를 떠돌며 가난과 병에 시달린 두보는 고향에 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두 번째 가을을 맞이했다. 이슬을 맞고서도 시들지 않은 국화를 보자 고향 생각에 와락 눈물이 쏟아진다. 강가에 서 있는 빈 배를 보고 있자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하다.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만들며 겨울 채비를 서두르는데 나그네는 올해도 고향에 갈 수 없는 걸까. 향수에 젖은 두보의 가슴이 그리움과 회한으로 먹먹하다.

두보의 시에 비해 그림은 매우 건조하다. 시에서 우수와 애절함을 제거해 버리고 오직 ‘팩트(fact)’만을 보여주겠다는 듯 그림을 풀어내는 손길이 자못 쌀쌀맞다. 그나마 마른 붓질을 여러 차례 그린 산과 바위의 피마준법(披麻皴法)이 가을의 쓸쓸함을 드러내주는 것이 다행이다. 감상에 빠지는 것에 무관심한 것 빼고는 작가는 시의 내용에 충실하다. 화면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나무들이 곳곳에 서 있는 가운데 두 인물이 걸으며 대화를 나눈다. 한 사람이 손을 들어 이슬 맞은 나무를 가리킨다. 옆사람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본다. 동양화에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을 그릴 때 주로 배치하는 인물 구도법이다. 여러 종류의 나무를 함께 그리는 것은 남종화법에서 습관적으로 그리는 수법이다. 왼쪽 하단에는 외로운 배도 그렸고 오른쪽 상단에는 우람한 백제성도 그렸다.

시를 이해할 수 있는 소재는 전부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가을의 흥취’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시들어 퍼석거리는 단풍을 발견한 시인의 쓸쓸함, 국화꽃과 빈 배에 담긴 향수와 고적감, 저 멀리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 등이 이 그림에는 없다. 있을 것은 다 있는데 여전히 부재감이 느껴지는 아쉬움. 대상 너머의 세계를 해석하는 것은 감상자의 몫이라고 말하려는 걸까. 그림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더욱 쓸쓸해진다. 쉽게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과 마주하고 있을 때처럼.


두보가 자식들에게 재산 대신 물려준 것

두보는 이백과 더불어 중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이, 두’라고 불리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백과 두보는 중국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추앙받는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서로의 시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지만 두 사람의 시의 세계는 전혀 달랐다. 이백이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유분방한 시를 펼쳐냈다면 두보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시에 담았다. 특히 안사의 난(安史之亂·755~763)을 겪으면서 벌어지는 전쟁의 참상을 훌륭하게 시로 승화시켜 ‘시의 역사(詩史)’라 불린다.

9년 동안 지속된 안사의 난으로 중국의 인구가 3600만명이 줄어들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전쟁은 비참했다.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 두보는 시를 썼다. 자신과 백성들의 이야기를 시로 썼다. 결혼식 다음 날 남편을 수비대로 보내야 하는 신부의 비통함, 자손들을 모조리 잃은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강제징집에 맞서 한겨울의 싸늘한 길바닥에 드러누워 우는 비극, 처량한 달빛이 백골을 비추는 격전지의 밤, 전쟁에서 패한 병사가 찾아간 텅 빈 고향 등등, 이 모든 상황이 두보의 시로 승화되었다.

양귀비와 현종이 화청지(華淸池)의 온천탕에서 환락에 빠져 있던 날, 그의 아들이 굶어 죽었다는 개인사도 시 속에 기록했다. 남겨진 가족들은 누더기를 걸친 채 유랑하며 겨우 목숨만 연명했다. 잠깐 동안 미관말직에 근무했던 기간을 제외하면 두보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빈곤했다. 그는 쉰아홉의 나이에 거친 바람이 윙윙대는 강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살아 있을 때 그의 시는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의 위대성을 알려준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여년이 지난 뒤에야 등장했다. 한유·백거이 등의 눈 밝은 시인들이 두보를 발견했고, 소식·황정견 등이 그 뒤를 따랐다. 두보에 대한 존경은 중국에 국한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때 두보의 인기는 이백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그 비결을 역사가들은 군주에 대한 충성심과 백성을 염려하는 마음을 시 속에 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두보의 시를 두고 어떻게 이렇게 건조한 보고서 같은 평가를 내린단 말인가. 그보다는 사람살이에 대한 본원적 성찰이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두보는 시에 관한 한 자존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쩌지 못한 가난이야 견딜 수 있었지만 자신의 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평생 동안 ‘시어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두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며 살았다. 궁핍한 시인은 자식들에게 아무런 재산도 물려주지 못했다. 물려주기는커녕 스스로의 가난도 해결하지 못해 굶주리는 날들이 많았다. 대신 1400여수의 시를 남겼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남겨줄 것이 무조건 돈과 부동산만이 아니라는 것을 두보의 시는 말해준다. 이름 없는 촌부로 살더라도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포용하고 긍정하는 사람의 삶이라면 두보처럼 위대하다는 교훈을 들려준다. 시성(詩聖)의 가르침은 죽어서도 여전하다.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

 

눈보라 치는 겨울밤 나그네는 무사히 집에 돌아왔을까
유장경 ‘봉설숙부용산’

 

눈을 만나 부용산에 머물며(逢雪宿芙蓉山)
유장경(劉長卿)

해 저물어 푸른산이 멀리 보이는데 (日暮蒼山遠)
날은 춥고 초가는 가난하구나 (天寒白屋貧)
사립문에 들리는 개 짖는 소리 (柴門聞犬吠)
눈보라 치는 밤에 돌아오는 나그네 (風雪夜歸人)

▲ 최북 ‘풍설야귀인’ 18세기, 종이에 연한색, 66.3×42.9㎝, 개인

 

삶이 아무런 감동 없이 흘러갈 때 이런 독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갑자기 내린 폭설로 한 열흘쯤 인적 끊긴 오두막집에 유폐되어버렸으면. 하루에 한 번씩 지나가던 버스도 끊긴 지 오래, 산새도 날아오지 않는 고립된 초가집에 갇혀 사람 키만큼 높이 쌓인 눈이 녹기만을 기다려야 한다면 내게 허락된 삶의 시간이 눈처럼 순정해지고 명징해질 수 있을까. 헛된 욕망,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나 본래의 나, 고요한 영혼을 되찾을 수 있을까. 입에 밥 한 숟가락 떠넣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다른 소중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눈보라 속을 뚫고 나그네는 어디로 가는가

내가 그런 막연한 생각만으로 마음속 오두막집에서 칩거하고 있을 때 실제로 눈 때문에 고생한 시인이 있었다. 당나라 시인 유장경(劉長卿·709~786)이다. 한겨울에 길을 떠난 시인이 느닷없이 내린 폭설에 발이 묶였다. ‘눈을 만나 부용산에 머물며(逢雪宿芙蓉山)’는 시인이 하룻밤 몸을 의탁한 초가에서 지은 시다.

해가 저물었다. 눈보라 치는 밤이 찾아왔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기 전 눈을 들어 먼 산을 바라보니 산색이 푸르다. 겨울이 시작되는 산골 마을의 초가는 홑겹을 입은 노인처럼 가난하다. 집집마다 추운 밤을 견디기 위해 싸리문을 걸어 닫았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밤이다. 객지에서의 여수(旅愁)에 잠겨 시인은 쉽게 잠들지 못한다. 밤이 깊어지도록 뒤척이며 잠을 청하고 있는데 사립문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눈보라 치는 밤에 누군가 돌아오는가 보다. 방 안에 있어도 한기가 느껴지는 이런 밤에 누가 눈 속을 걸어 돌아오는가.

최북(崔北·1712~1786)이 유장경의 시에서 마지막 구절을 취해 ‘풍설야귀인’을 그렸다. 나무가 휘어질 정도로 바람이 심하게 부는 밤길을 지팡이 짚은 나그네가 걸어간다. 예상치 못한 발자국 소리에 잠들어 있던 개가 뛰쳐나와 컹컹 짖는다. 주저앉을 듯 가난한 초가집 앞 나무들이 거칠게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지푸라기처럼 휘날린다.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찬바람이 휙휙 불어댄다. 먼 산은 어둠 속에서 형체만 남기고 주저앉아 있다.

해가 저물녘에는 푸른색을 띠었던 산이었는데 밤이 깊어지자 흰색과 검은색만으로 정리되었다. 눈 쌓인 산은 빈 화면을 그대로 둔 채 하늘과 산자락에 연한 먹을 물들였다. 지금 내리는 눈 이전에 이미 내린 눈이 상당량 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의 옷자락을 잡고 초가집에 주저앉힌 눈이다. 무채색이 주는 한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묽고 연한 먹의 농담 변화만으로 그린 몰골법의 나무와 짓이긴 듯 깔깔하게 그린 잡풀들이 금세라도 바람에 날아갈 듯 위태로워 보인다. 농묵을 찍어 빠른 필치로 그린 산등성이와 길가의 바위는 휘청거리는 듯한 그림의 가벼움을 지그시 눌러준다. 뒷산 언덕에 삐져나온 짧은 나무와 바위의 속살을 못을 치듯 진한 먹으로 그린 것도 안정감을 준다. 어떤 경물이든 그의 붓끝에서 짓이겨진 겨울밤이 거친 필치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최북은 그림을 팔아 생활한 ‘생계형 화가’였다. 호를 ‘붓으로 먹고산다’는 뜻의 ‘호생관(毫生館)’이라 한 것도 자신의 처지를 시니컬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문인 신광수(申光洙·1712~1775)는 ‘최북을 노래함(崔北歌)’에서 화가의 어려운 처지를 이렇게 적고 있다.

‘최북이 장안에서 그림을 팔고 있는데/ 평생 오두막 한 칸에 사방 벽이 비었구나/ 문 닫고 온종일 산수를 그리고 있으니/ 유리안경 하나에 나무필통 하나뿐이구나.’


거친 인생을 살았던 화가의 가난한 겨울

그런데 유리안경 너머의 그 눈도 한쪽뿐이었다. 자의식이 무척 강했던 그가 어쭙잖은 양반이 그림을 요구하자 자신의 눈을 찔러 거부의사를 밝힌 것이다.

최북(崔北)은 자신의 이름 ‘북(北)’을 파자(破字)하여 ‘칠칠(七七)’이라 불렀다. ‘칠칠맞다’고 조롱하고 싶으면 어디 맘대로 해봐,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북은 중인 신분으로 ‘비천하고 미미했지만 사람됨이 굳세었다. 체구는 작달막했지만 술 석 잔이 들어가면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었다’고 신광수는 전한다.

그는 어느 눈보라 치는 겨울날 질척거리는 성곽 밑에서 얼어 죽었다. 그러니 ‘풍설야귀인’은 유장경의 시를 그린 시의도(詩意圖)임과 동시에 최북 자신의 삶을 예견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눈보라 속에서 집을 향해 가던 인물은 집에 당도하기 전에 쓰러져 죽은 최북 자신의 자화상일 것이다. 실제로 당나라 시를 그림으로 표현한 ‘당시화보(唐詩畵譜)’ 속 ‘봉설숙부용산(逢雪宿芙蓉山)’을 보면 눈보라 속 나그네가 초가집으로 들어오고 있다.

최북의 그림 속 나그네가 따뜻한 집을 지나쳐 컴컴한 어둠 속을 향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시는 읽는 사람의 처지에 따라 전혀 다른 상황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백 명이면 백 가지의 심상을 일으킬 수 있는 예술 작품의 위대성과 미묘함을 최북의 ‘풍설야귀인’에서 확인한다.

그런데 유장경은 시 속에 등장한 나그네를 진짜 본 것일까. 아니다. 그저 잠 못 드는 밤에 개 짖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나머지는 시인의 상상이다. 개가 짖는구나. 그럼 누가 오겠구나. 그는 이 추운 날에 어딜 다녀오는 걸까로 시작된 시인의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면서 비로소 찾아오는 두고 온 집에 대한 그리움. 기회만 있으면 떠나고 싶었던 집이 아닌가. 그런 남루한 집이 그립다니.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고 감추고 싶었던 처지가 행복했다니. 여기까지 생각이 진행되면 시인의 마음은 이미 몸보다 앞서 집에 가 있게 된다.

돌아오면 비로소 알게 된다. 특별한 사건 하나 일어나지 않은 매일매일이 그대로 행복이었다는 것을. 버리고 싶었던 현실이 가장 귀한 장소였고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는 명당이라는 것을. 입에 밥 한 숟가락 떠 넣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철없는 생각 대신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여태 살아왔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때부터 나그네는 밥 한 숟가락을 떠 넣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일할 수 있게 되리라. 그 쉬운 진리를 깨닫기 위해 열흘씩이나 외딴 마을 오두막집에 갇힐 필요는 없다. 최북의 ‘풍설야귀인’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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