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白夜). 그곳에서는 해가 지지 않았습니다. 위도 66도 33분. 북극권의 위도가 지나가는 핀란드 북쪽의 도시 로바니에미. 오후 11시쯤 설핏 기우는 듯했던 해는 지평선을 따라 수평으로 이동했습니다. 해가 막 떠오를 무렵의 창백한 보랏빛 여명은 밤새도록 계속됐습니다. 시차로 뒤척이다 자정이 훨씬 넘은 새벽 호텔 창의 커튼을 열고 내다본 텅 비어버린 도시와 강변의 모습은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을 보는 듯했습니다. 핀란드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루하지 않은 여행지’입니다. 거기에는 익숙하고 지루한 일상과는 전혀 다른 낯선 풍경이 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백야가 그랬고, 하늘을 담고 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호수, 그리고 거대한 바다처럼 펼쳐진 자작나무와 전나무, 가문비나무의 숲이 또 그랬습니다. 수도 헬싱키에서는 단정하되 감각적인 건축물도, 같은 것이 단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다양한 디자인도, 그 도시에서 거주하는 이들의 유복해 보이는 여유도 낯선 것이었습니다. 이따금 식탁에 오르는 붉은 핏기의 순록스테이크도, 집무실에서 관광객들에게 25유로를 받고 파는 기념사진을 찍느라 여념 없던 한여름의 산타클로스도 생경했습니다. 이런 풍경이 어찌나 멀어 보였던지 고작 10시간 남짓의 비행만으로 그곳에 가닿을 수 있다는 것조차 믿기지 않았습니다.
# 북극권서 해가 지지 않는 ‘백야’를 만나다 처음 맞닥뜨린 ‘북극권(Arctic Circle)’에서의 여름밤이었다. 이름하여 ‘백야(白夜)’. 여기는 핀란드 북부의 라플란드주(州)의 도시 로바니에미. 도시를 끼고 흐르는 두 강이 합수하는 지점을 건너는 ‘촛불다리’ 위에 섰다. 오우나스 강변의 자작나무숲 위로는 벌써 몇 시간째 붉은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호텔 프런트의 직원에게 ‘해지는 시간’을 묻고 나선 길이었다. 직원은 한참 인터넷을 검색하더니 ‘공식 일몰시간이 오후 11시 50분’이라고 알려줬다. 언덕 위의 호텔에서 오우나스강의 촛불 다리까지는 야생화들이 아우성처럼 피어난 침엽수림의 내리막 숲길이었다. 그 숲길에서 어린 순록 두 마리와 맞닥뜨렸고 그 뒤로도 이쪽을 잔뜩 경계하는 서너 마리의 토끼를 더 만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은 해가 지지 않았다. 북극권에서 해는 지평선과 수직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슬쩍 기운 해는 ‘옆으로’ 움직였다. 붉은 기운을 담은 하늘이 푸른 빛으로, 이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호텔 직원이 말한 시간을 넘겼지만 어둠은 찾아오지 않았다. 지평선과 가까운 구름 뒤쪽 어디쯤에 해가 있는 것 같았다. 어찌 된 게 머리 위 하늘보다 강의 거울 같은 수면 위에 담긴 하늘이 더 환해 보였다. 자정에 오우나스 강에는 낚시배가 떴고 갈매기들은 보라빛 창공을 가르며 날아다녔다. 오전 1시를 넘겼어도 사위는 아직 환해서 맨눈으로도 아무 불편 없이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초현실주의 화가의 그림 속으로 걸어들어선 것 같은 풍경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북극권의 밤이었다. 이튿날 경험한 백야는 더 극적이었다. 라플란드의 정수는 눈 쌓인 침엽수림과 얼어붙은 호수, 섬광처럼 머리 위로 환상처럼 흘러가는 오로라를 겨울에 만날 수 있다지만, 북극권의 짧은 여름에도 겨울 못지않은 다양한 투어프로그램이 있다. 사이클링, 래프팅, 보트, 스케이트보딩, 서머 봅슬레이, 승마…. 저위도의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이라면 이 중에서 백야의 시간에 ‘백야 사파리’를 단연 추천할만하다.
‘사파리’라면 엘크 사슴이나 순록 같은 야생동물을 관찰하는 프로그램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툰드라 숲을 지나서 나지막한 구릉 ‘카트카’까지 오르는 트레킹이다. 노르웨이에서도 피요르 유람선 여행을 ‘사파리’라고 하는 것을 보면,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서’ 하는 트레킹이나 유람선, 철도 여행 등을 모두 ‘사파리’라고 부르는 듯했다. 사파리 투어의 목적지 카트카 일대는 1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에 무려 2㎞ 두께의 얼음으로 덮여있던 곳. 엄청난 중량으로 짓누르던 얼음의 무게로 부서진 돌들이 5㎞에 걸쳐 너덜지대를 이루고 있는 땅이다. 카트카 구릉 정상의 높이는 180m. 라플란드의 땅이 대부분 평지라 이 정도의 높이만으로도 거칠 것 없는 시야가 펼쳐진다. 거기서 마주하는 건 백야의 하늘이다. 정상의 나무덱 위에 서면 시야의 90%쯤이 하늘이고 나머지 10%는 침엽수림의 바다다. 카트카 정상에 서자 가문비나무숲 너머 지평선 위의 하늘에 노을과 함께 색색의 구름이 펼쳐졌다. 석양은 오랫동안 계속됐다. 해는 지평선 뒤로 넘어가는 대신 대지와 수평으로 이동했고, 태양의 행로를 따라 시시각각 구름의 붉은 기운이 잉크를 엎지른 것처럼 번져나갔다. 자정이 되자 현지 가이드가 기다렸다는 듯 배낭에서 스파클링와인 한 병을 꺼냈다. 곧이어 일행은 ‘지지 않는 태양’ 아래서 새날을 맞는 건배를 했다. 거기서 보는 모든 풍경은 비장하고 장엄했으며 한편으로는 몽환적이었다. 낯설었고 믿을 수 없는 이런 풍경이야말로 여행자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 최고의 순간’으로 오래 간직해 둘 것이었다. 아 참, 백야 사파리를 설명하면서 빼놓지 말아야 할 게 있다. 바로 모기 이야기다. 라플란드의 여름 모기는 악명 높다. 오죽하면 모기 그림과 함께 ‘핀란드 공군’이란 글을 써넣은 티셔츠를 관광기념품으로 만들어 팔까. 로바니에미에 머물던 며칠 동안 낮 기온이 17도를 넘긴 날이 없었다. 우리로 치자면 서늘한 가을 날씨인데도 모기들이 극성이었다. 북극권의 기후에 적응했는지 여기서만큼은 ‘기온이 낮으면 모기가 없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최악의 모기떼는 백야 사파리에서 만날 공산이 크다. 사파리를 진행하는 여행사에서는 마치 양봉업자들이 쓰는 것 같은 모자를 준다.‘얼굴모기장’이라고 하면 딱 맞다. 그러나 카트카 정상의 돌너덜 지대에는 거짓말처럼 모기가 없어서 백야의 풍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핀란드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수도 헬싱키만큼 유명한 도시가 바로 여기, 로바니에미다. 백야에 먼저 시선을 뺏기긴 했지만, 로바니에미는 백야 말고도 여러 이미지가 중첩돼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산타클로스다. 도시에서 북쪽으로 8㎞쯤 떨어진 북위 66도 33분 북극권 위도의 경계에 ‘산타클로스 마을’이 있다. 왜 하필 거기일까. 그걸 설명하자면 1927년의 핀란드 라디오방송 진행자의 발언, 1984년의 영국 ITV의 영국항공 라플란드 취항 특집방송,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영부인의 방문 등 다양한 스토리가 곁들여진다. 사연이 어찌 됐든 중요한 것은 로바니에미가 전세계에서 거의 ‘공식적’으로 산타의 집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이다. 노르웨이와 덴마크도 북극권의 땅에 산타마을을 만들었지만 이미 30여년 전에 만든 로바니에미의 ‘원조’ 산타마을을 이길 수 없었다. 그렇다면 로바니에미의 산타마을엔 산타가 살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살고 있다’. 하지만 집무실에서 산타가 열중하는 일이란 선물목록을 작성하는 게 아니라, 관광객들과 대화를 나눈 뒤 기념사진을 함께 찍어주고 사진 값을 받는 일이다. 집무실에서 만난 산타는 풍성한 은빛 수염에 코끝에 걸친 안경까지 영화나 만화 속의 산타 모습 그대로였다. 외모로만 보자면 영락없는 진짜다. 하지만 이곳의 산타는 선물을 주는 것보다 장사에 더 소질이 있어 보였다. 산타와 함께 찍은 동영상과 사진 값이 50유로다. 쉿. 아이들에게는 비밀이지만 이곳의 산타는 ‘교대근무’를 한다. 평소에는 보통 핀란드 사람처럼 ‘루돌프’와 동족인 순록으로 만든 스테이크를 먹기도 할 것이다. 유년시절에 누구나 한번쯤 품었을 법한 의문 하나. ‘산타클로스는 어떻게 하룻밤에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줄 수 있을까.’ 그 답이 산타집무실 입구에 도면과 해설도로 그려진 ‘지구자전 속도 통제장치’에 있다. 해설도에 따르면 지구의 중심에 톱니바퀴가 있고 톱니에 연결된 손잡이를 밀면 지구가 회전하게 돼있다. 반대로 손잡이를 당기면 자전이 멈추는데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가 이렇게 지구자전을 멈춰 시간을 정지시킨다는 설명이다. 산타마을에는 통나무로 지은 ‘산타우체국’도 있다. 핀란드 체신청이 운영하는 진짜 우체국이다. 1985년 문을 연 이래 이 우체국에는 198개국 어린이들이 산타 앞으로 부친 1600만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지난해에 받은 편지만 55만 통. 이 중에서 한국에서 보낸 편지도 1만 통이나 된다. 우체국에서는 편지를 부칠 수도 있는데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산타우체국의 소인을 찍은 편지나 카드, 소포 등을 고국으로 보낸다. 산타마을에서는 사진을 찍는 데도, 편지를 부치는 데도 적잖은 돈이 들지만 그게 약삭빠른 관광지의 ‘상혼’으로만 여겨지지 않는 것은 크리스마스의 들뜬 기분과 동심의 유쾌함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 북유럽 디자인의 간결한 아름다움 로바니에미도 그렇지만, 수도 헬싱키를 비롯한 핀란드의 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도시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북유럽 특유의 미감이다. 건축부터가 그렇다. 핀란드 남부의 오래된 도시 투르크나 포르부, 그리고 헬싱키의 구 도심을 빼면 건물들은 죄다 직선과 정방형의 간결하고 효율적인 형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각진 네모의 건물들은 딱딱하다는 느낌이 없다. 화려한 색감이나 형태없이 절제된 색감과 간결한 구조만으로도 건물들은 세련된 미감을 빚어낸다. 상점가의 간판 글씨까지도 주위 풍경과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무엇 하나 허투루 만든 것 같지 않다. 핀란드의 건축은 거장 건축가 알바 알토를 빼고는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바르셀로나에 가우디가 있다면, 핀란드에는 알바 알토가 있다. 먼저 들렀던 로바니에미도 전후의 폐허 위에 알토가 디자인해 만든 도시다. 수도 헬싱키의 곳곳에서도 알토의 흔적과 만나게 된다. 디자인박물관에도, 핀란드건축박물관에도, 생전의 집과 아틀리에에서도 알토의 미학적 디자인을 만날 수 있다. 알토가 생전에 창업한 가구매장인 아르테크에서는 그가 디자인한 가구가 여전히 팔려나가고 있다. 알토뿐만 아니다. 핀란드의 디자인 전통은 아라비아나 아딸라의 도자기와 유리잔. 피스카스의 칼, 마리메꼬의 프린트 옷감 등 일상용품 브랜드의 상품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진다. 작은 소품들도 단순 명료한 디자인과 과감한 색감이 빛난다. 건축물부터 작은 상점의 물건까지 모두 다 간결한 아름다움으로 저마다 빛나는 도시. 여행자에게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 헬싱키의 최고 관광 명소는 헬싱키 대성당이다. 옥색의 돔을 올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순백의 성당은 기품이 넘친다. 서유럽의 거대한 성당처럼 치솟아 압도하는 대신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성당의 흰 빛과 색맞춤이라도 한 듯 성당 주위로 순백의 갈매기들이 허공을 가르는 모습이 이국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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