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詩佛 왕유

醉月 2013. 7. 27. 01:30

시와 그림, 불교와 도교의 만남

 왕유 문학의 고향 숭산과 종남산을 찾아

 

다재다능한 예술가에서 사색의 은일 시인으로

 

 

<숭산(嵩山)>이라고 말하면 아마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숭산 소림사(少林寺)>라고 하면 모두 <아아, 거기요!>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중국 오악(五岳) 중에서도 중악(中岳)으로 떠받들어져 온 숭산은, <소림사>의 이미지와 더불어 이제 이연걸과 같은 액션스타들이 멋진 무술 솜씨를 뽐내는 홍콩영화의 배경으로 우리들에게 제법 잘 알려진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숭산이 중국으로 건너 온 인도(印度)불교가 중국의 도교(道敎)와 융합하여 크게 번성한 곳이며, 다시 도가(道家)적 요소와 결합하여 중국불교로 재 탄생하게 된, 이를테면 중국불교의 고향임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당나라 때의 대 시인 왕유(王維)의 시() 세계는 인도불교가 중국불교로 전환하는 이 과정을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는 바, 그 문학의 정신적 고향 역시 바로 숭산인 것이다.

왕유는 누구인가? 중국 문학을 접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독자에게는 어쩌면 다소 생소한 이름인지 모르기에, 숭산으로의 답사 기행을 떠나기 전에 먼저 왕유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알아보는 것이 순서이겠다.

 

첫째, 왕유(王維; A.D. 701- 761)는 천재시인 이백(李白)과 같은 해에 태어나 일년 먼저 사망한 성당(盛唐) 시기의 위대한 시인이자, 미술과 음악 무도(舞蹈)에 모두 뛰어난 다재다능한 예술가요,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둘째, 예술가 왕유가 가장 조예가 깊었던 부문은 어쩌면 시()라기 보다는 회화(繪畵)일지도 모른다. 중국화(中國畵), 즉 동양화의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린 <남종화(南宗畵)>의 시조가 바로 왕유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산수시(山水詩)와 산수화(山水畵)를 즐겨 그렸던 그가 시화(詩畵)의 세계를 하나로 접목시킨 사실은, 중국 문화 예술 발전사에 있어 엄청난 공로를 세운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셋째,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왕유의 존재도 화가로서 인정받는 위치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중국 오천년 역사상 문학적으로 가장 찬란한 시기에 있어서, 바로 이백과 두보에 다음가는 자리에 매김되어지는 대시인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백과 두보에 다음가는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결코 그 시 세계의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고금 동서양을 막론하고 첫번째 자리를 다툼하는 대시인 이백과 두보의 시 세계가 워낙 걸출하게 뛰어났기 때문이리라.

 

넷째, 그는 중국 문학사상 가장 독실한 불교 신앙을 지닌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마힐(摩詰)이라는 그의 자()<()>라는 이름을 합하면 바로 고대 인도의 독실한 재가(在家) 신자인 유마힐(維摩詰) 보살이니, 후인들이 그를 <시불(詩佛)>이라 부르며 시선(詩仙) 이백  시성(詩聖) 두보와 병칭한 것도 당연한 일이겠다.

 

그러나 묵상과 사색의 은일(隱逸) 시인 왕유의 사상은 그래도 더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은 단순히 불교에만 심취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농후한 도교(道敎)적 색채로 가득 차 있어, 후일 도가(道家)와의 접목을 이루는 중국화된 불교와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왕유의 사상은 인도 불교와 중국 도교와의 관계, 그리고 중국 불교와 도가와의 관계를 규명해 주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가난한 말단 벼슬아치의 가정에서 태어난 왕유는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예술적 재능에 힘입어 소년 시절에 벌써 장안의 상류사회에 진출하여 화려한 각광을 받고 순풍에 돛단 듯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불과 몇 년, 나이 스물 둘에 억울한 사건에 연루되어 산동 지방의 미관말직으로 귀양을 가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가 다시 장안에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육칠년 후로 추측되며, 중앙 정단에 복귀한 것은 다시 육년이 더 지난 뒤였다. 사오년간의 산동 생활과 이년여에 걸친 숭산에서의 은거생활을 거쳐 장안으로 돌아온 왕유는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컨대 그 집안에 가재 도구라고는 오로지 다구(茶俱)와 약탕관, 낡은 책상, 그리고 밧줄로 엮은 침상이 전부였다는 사실이라던가,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고 온종일 묵상과 사색을 즐겼다는 점등은, 과거 다재다능하고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였던 예술가 왕유와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의 결정적인 전환은 필경 숭산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이 틀림없을 터였다.

 

달마 얼굴에 수염이 없는 까닭은

 

숭산은 중국 문명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하남성(河南省)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다. 북쪽으로 황하를 베개삼아 뻗쳐 있고, 동쪽으로는 전설적인 상고(上古) 시대의 유적이 널린 정주(鄭州)와 송()나라의 도읍지 개봉(開封)이 자리잡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아홉 왕조의 도읍지인 낙양(洛陽)과 지척간에 있으니, 옛부터 중국인이 숭상해 온 다섯 영산(靈山)중에서도 중심 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다. 이를테면 중국의 핵심, 중원(中原) 땅 중에서도 그 심장부에 해당하는 중화 문화의 요람인 셈이다.

 

이른 새벽. 하남성의 성도(省都) 정주를 출발한 소형 택시는 중국치고는 제법 산뜻하게 포장된 도로를 상쾌하게 달리고 있다. 그런데 난데없이 <새벽 공기는 몸에 해롭다>는 이상(李箱)의 시구가 엉뚱하게 뇌리를 스친 것은 웬일일까. 꽃피는 오월이건만 아직도 싸늘한 느낌의 새벽 공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랫동안 그려왔던 중악 숭산을 드디어 찾아간다는 흥분 때문일까?

 

중고등학교 시절 그토록 심취했던 무협소설에 언제나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로 등장하는 소림사와 소림권법, 삼국지의 장비처럼 험악한 왕방울 눈과 고슴도치 수염으로 뒤덮인 달마(達摩)의 얼굴, 불로장생을 꿈꾸며 모여들었던 수많은 도사들...

 

환영(幻影)이 꼬리를 물고 망막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따금 차창에 부딪치는 빗줄기가 이 묘한 긴장감을 씻어주는 듯 싶었지만, 이번에는 그 빗줄기가 여정에 지장을 주지나 않을까 염려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슴푸레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평원 저쪽에서 늠름한 자태로 숭산이 그 모습을 보이자, 어느새 멈춰버린 빗줄기와 함께 야릇한 긴장감도 점점 희열로 바뀌고 있었다.

 

그랬다. 그것은 정녕 기쁨이었다. 늘 기대를 크게 가졌던 탓일까? 과거 탐방했던 중국 각지의 명승고적은 대부분 나에게 실망 내지는 허망한 느낌을 가져다 주었거니와, 나의 그 야릇한 긴장감은 바로 그러한 연유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그러나 숭산과의 만남은 그 첫인상부터 기쁨이었다.

 

동악 태산의 위용, 서악 화산(華山)의 험준함, 남악 형산(衡山)의 수려함, 그리고 북악 항산(恒山)의 기묘함을 모두 구비하고 있다는 자료설명을 읽으며 또 그 상투적인 중국인의 과장법이겠거니 싶어 쓴 미소를 지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아침 이내 속에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숭산의 기암절경은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망외의 소득이었던 것이다.

 

천 오백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소림사가 거듭된 중수(重修)로 생각밖에 그다지 고색이 창연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나, 소림사 주변 곳곳에 산재한 무술도장에서 풍겨나는 소림 무술의 상업성이 숭산과의 첫 대면에서 얻은 기쁨을 어느 정도 상쇄시켜 가고 있을 무렵, 숭산은 달마대사와 함께 다시 한번 내게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와 주었다.

 

인도 선종의 이십 팔대 조사(祖師)였던 달마대사가 중국에 건너와 이 곳 숭산에 소림사를 세우고 중국 선종의 초대 조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우리에게도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중국 불교의 참된 성지는 소림사라기보다는, 그 뒤에 솟은 오유봉(五乳峰) 중턱의 달마동(達摩洞)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달마가 구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오로지 벽만 마주 보고 좌선(坐禪)했다는 그 석굴이다. 신기한 것은 그 때 좌선하고 있던 달마의 그림자가 저절로 새겨졌다는 이른바 <면벽석(面壁石)>이란 바위였다. 지금은 소림사 경내에 보물처럼 모셔져 있는 그 바위에는, 마치 한 폭의 초상화처럼 눈을 감고 있는 달마의 얼굴 표정과 수염까지 너무나 생생하게 새겨져 있는지라 그것이 자연적인 현상이라고는 도저히 믿겨 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진위(眞僞) 여부가 뭐 그리 대단하랴! 중요한 것은 그가 오랜 좌선과 명상의 세계를 통해 후인들에게 구도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문득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한 노 비구니가 새로이 계를 받은 젊은 비구니에게 말한다. <달마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느냐?> 그 말을 하는 순간 카메라는 벽에 걸린 달마의 초상화를 비춘다. 그리고 놀란 토끼 눈이 된 젊은 비구니. 노 비구니는 그 때 한마디 더 덧붙인다. <이것이 네가 일생동안 풀어야 할 숙제니라.>

 

고슴도치처럼 잔뜩 돋은 달마의 수염을 보여주며 <왜 달마의 얼굴에 수염이 없냐>고 묻다니. 논리와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선가(禪家)의 언어이다. 바로 그 점을 이해하는 것이 논리나 이성의 언어와 문자를 배격하는 선종을 이해하는 첩경인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인간이 일생동안 사용하는 뇌 세포는 많아야 30%, 적게는 1%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머지 대부분의 뇌 세포는 한번도 사용하지 못한 채 사장되는 셈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그 뇌 세포가 이를테면 의식(意識)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라면, 사장되는 부분은 논리나 이성이 전혀 필요 없는 무의식의 세계, 아니 보다 심층에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영역인지 모른다. 어쨌든 그 세계의 뇌 세포마저 활용할 수 있다면 인간에게는 엄청난 초능력이 생기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겠다.

 

이른바 <득도(得道)>, <해탈>이니 하는 것도 혹시 그 세계 속에 뛰어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논리와 이성이 필요 없는 그 세계를 엿보려면, 필경 논리와 이성에서 출발한 인간의 상념을 먼저 없애야 할 터. 그래서 무념(無念) 무상(無想)의 경지를 공부하는 참선이란 방법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조용한 곳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앉아 무념의 경지에 들어가려 노력해 본 적이 한번이라도 있다면, 그게 말이 쉽지 사실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 수 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쓰면 애쓸수록 오히려 온갖 잡념, 백팔 번뇌가 주마등처럼 뇌리를 어지럽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 <수일(守一)>, 처음부터 단번에 무념의 경지에 들기는 어려우므로 한가지만 골똘히 생각하자는 것이다. <달마의 얼굴에 왜 수염이 없느냐>는 화두(話頭)는 이러한 <수일>의 방법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념 무상 무아의 경지로 나아가 그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선가의 독특한 언어인 셈이다.

왕유의 시에 보면 곳곳에서 이러한 좌선의 방법을 통해 해탈의 세계에 들고자 하는 그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계곡 물이 끝나는 그 곳을 찾아가,

구름 이는 그 때를 앉아서 지켜보네.

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

<종남별장>중에서

 

 

텅 빈 산, 아무도 없는데,

두런두런 어디선가 말소리.

울창한 숲속, 스며드는 노을 빛

다시 푸른 이끼위에 비추인다.

空山不見人, 但聞人語響̥ 返景入深林, 復照靑苔上̥

<녹채에서>

 

홀로 앉아 있노라니 귀밑머리 슬픈데,

텅 빈 방에 찾아오는 깊은 밤의 나래.

비를 맞고 떨어지는 산 과일 소리,

등불 아래 숨어있는 풀벌레 소리.

獨坐悲雙鬢, 空堂欲二更̥ 雨中山果落, 燈下草蟲鳴̥ 

 <가을 밤 홀로 앉아>에서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을 찾아가 명상에 잠겨있는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지 아니한가? 얼마나 오래 앉아 있으면 구름이 일어나는 때를 지켜 볼 수 있는 것일까? 숲 속에 비쳐드는 희미한 노을 빛이 <다시()> 푸른 이끼 위에 비추인다니, 그렇다면 시인은 어제 이 때쯤에도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다는 말인가? 추적추적 비 내리는 가을 밤, 머얼리 집밖에서 산 과일이 비에 섞여 떨어지는 소리를 판별해 낼 수 있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집중력이 필요할까?

 

모든 상황을 짐작해 볼 때, 왕유는 좌선을 하고 있음이 거의 틀림없어 보인다.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적멸(寂滅)의 세계를 추구하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만 인식하며 <시불(詩佛)>이라고 호칭한 이유가 여기 있겠다.

 

왕유의 토납, 신선이 되는 길을 찾아서

 

그런데 왕유를 그저 독실한 불교 신자로만 보아 넘기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우선 왕유 당시에는 선종이 아직 널리 보급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고, 둘째 그가 사용하고 있는 수일의 방법이 적멸과 해탈의 세계를 추구하는 불자의 것으로만 보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중의 하나인 <죽리관(竹里館)>이란 시를 읽어보자.

 

 

그윽한 대나무 숲에 홀로 앉아,

거문고 뜯다가 또 다시 장소(長嘯)를 터뜨리네.

깊고 깊은 숲속이니 그 누가 알겠는가,

밝은 달이 찾아와 서로 함께 비춰보네.

獨坐幽篁裏, 彈琴復長嘯̥ 深林人不知, 明月來相照̥

 

그런데 여기서 <장소(長嘯)>란 무엇인가? 그의 시에 심심치않게 등장하는 이 <장소>란 단어의 의미를, 글자 그대로 번역해서 <길게 휘파람 분다>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인 것이다.

 

<장소>는 도교의 수련 방법 중의 하나를 의미한다. 육조(六朝) 시대의 유명한 도사 갈홍(葛洪)에 의하면, 신선이 되기 위한 도교의 수련 방법으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보정(補精), <접이불루(接而不漏)>의 방법으로 동녀(童女)와 교접하는 이른바 <방중술(房中術)>이 그 첫째요, 불로장생의 기화요초를 구하기 어려우니 만들어 먹자는 <연단술(鍊丹術)>이 그 둘째이다. 그러나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방법은 <행기(行氣)>라고도 하고 <토납(吐納)>이라고도 하는 일종의 호흡법이었다. 예컨대 요사이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단학(丹學)>이라던가 <기공(氣功)>이 바로 이에 속한다. <장소>는 당나라 때 유행했던 호흡법의 하나로, 유명한 도사이기도 했던 이백의 시에도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왕유가 좌선할 때 수일의 방법으로 채택한 것은 선가의 언어라기보다는 도교의 호흡법으로 보는 것이 보다 일리 있는 추측일 것이다. 그리고 이 도교의 호흡법은 아마도 바로 이 숭산에 살고 있는 도사에게 배웠을 게 틀림없다.

 

원래 숭산은 달마와 인연을 맺기 전에는 도교의 근거지였다. 북위(北魏)의 유명한 도사 구겸지(寇謙之)가 바로 숭산을 근거지로 하여 도교를 민간에 크게 전파시켰던 것이다. 특히 왕유 당시에는 초연사(焦練士)라는 신인(神人)의 경지에 이른 도사가 숭산에 살았다고 하는데, 그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이백도 그의 이름을 흠모하여 숭산을 찾아와 일흔 두개의 봉우리와 골짜기를 빠짐없이 뒤지며 그를 찾았지만 끝내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시로 써놓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왕유의 작품을 보면, 그는 아마도 왕유와 상당한 교분이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왕유는 숭산에 은거할 당시, 신선이 되기 위한 꿈을 가지고 초연사에게 <장소>의 호흡법을 배웠을 것이다. 더구나 고증에 의하면 왕유가 숭산에 은거한 것은 이십대 후반이었고, 도광선사(道光禪師)에게 참선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삼십 세 즈음이니, 그의 마음을 먼저 사로잡은 것은 불교가 아니라 도교임이 틀림없겠다.

 

한편 왕유가 도광선사에게 배운 참선도 달마의 선종 계통이 아니라, 중국 도교와 색채가 매우 비슷한 천태종이었을 확률이 높다. 천태종은 인도승 용수(龍樹)가 중국에 와서 창시한 종파로, 그는 원래 장생(長生)과 양성(養性)을 주요 수련목표로 삼는 인도 바라문교 계통의 승려였던 것이다. 이 종파 역시 선종과 마찬가지로 참선을 수련 방법으로 삼았으나, 그 선학(禪學)의 이론 체계는 먼저 개인의 불로장생을 추구한 연후에 불도(佛道) 정진에 힘쓴다는 것이었으므로, 그 수련 과정에 있어 중국 도교가 추구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성격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훗날 중국불교의 대명사가 된 선종이나 도가의 정신이, 온 인류가 함께 추구해 나갈 공동선(共同善)에 궁극적 가치를 두고 있다면, 천태종이나 중국 도교는 개인의 구복(求福)에 치중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왕유는 적멸과 해탈의 세계를 엿봄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목적하에 참선을 배운 것이 아니고, 자기 혼자 신선이 되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하에 좌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증거는 곳곳에 엿보인다.

 

늙으막엔 오로지 조용한 게 좋아라,

세상만사 모두가 관심밖의 일이네.

돌이켜서 보아도 뾰족한 수 없으니,

옛날 살던 숲으로 하릴없이 돌아온다.

晩年惟好靜, 萬事不關心. 自顧無長策, 空知返舊林.

<장소부에게 화답하며>에서

 

중년에는 도교에 심취하여,

늙으막엔 남산 기슭에 터 잡았다.

흥이 나면 언제나 혼자서 찾아가네,

좋은 경치 찾아내면 괜히 혼자 좋아한다.

中歲頗好道, 晩家南山陲. 興來每獨往, 勝事空自知.

 <종남별장>에서

 

아무리 왕유의 심령이 대자연과 성공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할지라도, 이렇게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좋은 경치를 혼자 찾아 즐기는 식이라면, 좋게 말해준다 해도 단지 작가 개인의 즐거움 정도요, 나쁘게 말하자면 극단적인 이기주의라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물론 도가와 도교는 얼핏 보아 매우 닮아 보인다. 사회적 공동체 안에서 생활 규범으로 규제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개인주의적인 면모라던가, 이득이나 명성, 야망 따위에 개의치 않는 점 등등의 이유로 사람들은 흔히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도가와 도교는 비슷한 얼굴을 지니고 있지만 각자 추구하고 있는 내면의 질은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도가의 <>는 장자가 말했듯이 시끄러운 저자거리나 더러운 똥속에도 있고, 도연명이 말했듯이 바로 우리 집 담장 밑에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 충실하되 삶의 목표를 반드시 이루기 위해 집착하지 않는다. 목표의 달성보다는 과정을 중시한다. 때문에 목표에 집착하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현실에 충실하는 가운데, 그저 물 흐르듯 흐르는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려 한다. 도가의 <무위(無爲)><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집착이 담긴 행동을 하지 않는다>란 의미인 것이다.

 

하지만 도교는 그렇지 않다. 도교의 목표는 오직 하나, 불로장생의 신선이 되는 것에 있다. 도가의 <무위>가 인류가 공동으로 지향하는 형이상학적 명제가 될 수 있는 것에 반해, 도교주의자들은 신선이 되기 위한 강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다. 온 천하 세상만사가 어찌되던 간에, 그저 나만 신선이 되면 그만이다.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아닐 수 없다.

 

왕유의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아무리 대자연과 하나로 동화되는 데 성공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적 끊인 곳에서 도교의 수련법이나 익히다가 수확한 것이라면 그 한계는 저절로 드러나게 마련인 것이다. 인적끊인 절경 숭산의 봉우리가 아니라, 그저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평범한 전원에서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평범하게 살아간 도연명을 <고금 은일 시인의 으뜸>으로 꼽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느끼는 아쉬움이랄까.

기쁨속에 만난 기암절경의 숭산은 헤어짐에 앞서 새로운 가르침을 던져주고 있었다. 명당 자리는 천하 절경의 장소에 있는 게 아니라, 포근하고 따뜻하게 우리의 삶을 감싸 안아주는 그런 곳에 있다고 말하던 어느 풍수지리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어느덧 소실봉 뒤로 붉은 낙조가 찾아오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종남산(終南山). 왕유가 만년에 은거하며 시와 그림의 합일을 이루어 냈다는 그 곳을 찾아, 명상과 사유의 고장 숭산을 떠나는 나의 마음은 그러나 왕유에 대한 집착으로 점점 벅차오르고 있었다.

 

시와 그림의 완벽한 조화

 

왕유에 대한 진정한 자리 매김은 명상과 사색의 시인으로써가 아니라, 산수시와 산수화의 세계를 하나로 접목시켜 중국 예술을 한 단계 위로 승화시킨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마땅하리라. 왕유의 이러한 성취는 대부분 지금 내가 찾아가는 서안 남쪽 종남산 기슭의 망천(輞川)이란 곳에서 그가 은거할 당시에 이루어졌다.

 

새벽에 가까운 아침. 서안 시내는 이제 나에게도 제법 익숙해 진 거리가 되었다. 시내를 빠져나온 택시는 종남산을 찾아 새벽의 외곽도로를 달린다. 몇 년 전만 해도 서안 시내에서 종남산이 보였다건만 지금은 뿌우옇게 오염된 공기에 좀처럼 시야가 트일 줄 모른다. 관광 수입과 공업 발전이라는 두마리의 토끼를 쫓아가는 오늘의 서안을 상징적으로 대변해 주는 현상이랄까?

 

문득 서안의 유명한 소설가 지아핑와(賈平凹)가 쓴 소설 <황폐한 도시(廢都)>가 떠올랐다. 나는 오늘 과연 이 <황폐한 도시> 근처에서 산수시와 산수화를 하나의 세계로 합일시킨 왕유 문학의 산실을 만날 수 있을까? 아직도 매캐한 바깥 공기에 걱정스러워지는 마음을 애써 지우기 위해, 나는 화가로서의 왕유의 위치를 머리 속에 정리해 보았다.

 

중국 산수화는 위진 시대 고개지(顧愷之)<여사잠도권(女史箴圖卷)>에 등장하는 자연 풍경을 그 효시로 친다. 그 후 육조 시대의 종병(宗炳)과 초당 때의 오도자(吳道子)에 의해 발전되어 온 산수화는 성당(盛唐) 시대에 이르러 소위 <북종(北宗)><남종>으로 구분되어 진다.

북종의 창시자인 이사훈(李思訓)은 힘차고 준엄한 필법으로 농염한 색채를 사용하여 자연 풍광을 꼼꼼하게 그려냈다. 그의 붓끝으로 그려진 화려한 산수는, 그러나 보는 이에게 상상력을 발휘할 아무런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이래서야 그림 속에 그윽한 운치가 담길 리가 없다. 시골 이발관에 걸린, 그런 그림의 이미지라면 너무 그를 폄하한 것일까?

 

왕유는 달랐다. 그는 보다 부드럽고 우아한 필법으로 수묵(水墨)만을 사용하여 자연 풍광의 윤곽만을 그렸다. 그 주위의 공간은 여백으로 남겨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 윤곽의 <뼈대>에 살과 옷을 입히게 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력의 나래를 펼치게 하는 이른바 <백묘(白描)>의 수법이다. 문학적이 아닐 수 없다. 왕유에 의해 이렇게 창시된 <남종>의 화가들은 때문에 먼저 문인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남종화><문인화>라고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산수를 그리려면 붓끝이 가기 전에 먼저 그 이미지를 포착해라.

왕유의 이 선언은 그 산수화의 비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시작(詩作)의 비결이리라. 화가가 그의 붓을 먹물에 담그기 전에, 그리고 시인이 글로 시를 쓰기 전에는 그들의 사상은 하나일 터이므로

 

향적사는 어드메 쯤 있는 걸까?

구름덮힌 봉우리 자꾸만 올라갔다.

울울창창 숲속엔 오솔길도 없는데,

깊은 산, 어디선가 종 소리...

不知香積寺, 數里入雲峰̥ 古木無人徑, 深山何處鐘̥

 

시냇물은 날카로운 바위에서 흐느껴 울고,

햇빛은 푸른 솔가지 사이에서 차가웁다.

어스름 저녁 텅 빈 연못 구비에서,

조용히 참선하니 스러지는 백팔번뇌...

泉聲咽危石, 日色冷靑松̥ 薄暮空潭曲, 安禪制毒龍̥

<향적사를 찾아서>

 

흐느껴 울며 흐르는 계곡물, 소나무 사이로 간신히 엿보이는 차가운 햇빛, 그리고 머얼리 구름덮힌 봉우리... 오솔길도 없는 깊은 산속의 분위기와, 그 속에서 대자연과 하나가 되어 명상에 잠긴 시인의 모습이 선명히 우리들 앞에 펼쳐지고 있다. 정말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게 있다. 이 시의 제목은 <향적사를 찾아서> 아닌가. 그런데 우선 향적사를 찾아나선 사람이 그 곳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작품 끝까지 향적사에 대한 일언반구도 없는 것이 또 그러하다. 비슷한 단서라고는 오로지 <()>, 한 글자이다. 그러나 그 종소리가 향적사에서 들려오는 것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향적사가 어디 있느냐고 전혀 따지고 싶지 않다. 오히려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상상력의 여백에 마음이 넉넉하다.

 

이 시의 이런 묘한 재미는 언제나 북송 시대의 황제 예술가 휘종(徽宗)에 얽힌 그림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문학과 미술과 음악과 도교에 미친 황제 휘종은, 과거 시험에 시제(詩題)를 내주고 그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게 하는 과목을 두었었다. 어느 해의 시제는 <깊은 산에 묻힌 절(深山幽寺)>이었다. 그런데 일등으로 당선된 그림에는 온통 산만 있을 뿐, 절의 모습은 전혀 그려져 있지 않았다. 단지 화면 오른쪽 밑의 계곡으로 물을 길러 나오는 스님 한 사람만 보일 뿐...

 

왕유의 시와 이 그림은 그 발상이 너무나도 비슷하지 아니한가? 시인, 또는 화가 왕유에게는 자연의 형태나 색채가 주는 아름다움은 애시당초 관심밖이었을 것이다. 그의 자연 관찰은 논리적인 경험의 진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종남산을 찾아 나선 자동차는 먼저 향적사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건 또 어인 일인가?

오솔길조차 없는 깊은 숲이야 천이백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없어질 수 있다 치더라도, 구름쌓인 봉우리는 어찌 된 스토리란 말인가?

향적사는 누우런 황토 벌판에 덩그마니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찌 된 영문인지 한참동안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향적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왕유가 무작정 나선 점이나, 끝내 찾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점으로 보면, 왕유가 엉뚱한 산에 가서 향적사를 찾아 헤맸던 것일까? 아니면 종남산 어딘가에 있던 이 절이 훗날 여기로 장소를 옮긴 것일까?

 

한참동안 추측을 거듭하던 나는 갑자기 가벼운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면 건방진 말일까. 하지만 왕유가 던져놓은 그 시의 여백이, 나에게 상상력의 나래를 한없이 펼치게 해주는 효과를 조금쯤은 알 것도 같았다.

 

향적사를 지나 종남산으로 가는 길은, 때마침 끼어 있는 엷은 안개 덕택인지 제법 왕유 시의 분위기와 닮아 있었다. 남전현(藍田縣)에 들어서자 왕유가 은거했던 망천(輞川)을 찾아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별무소득이었다. 하지만 아쉬움은 전혀 없었다. 종남산 기슭은 군데군데 아침 안개에 희미하게 보이는 독립 가옥들과, 싱그러운 초록 들판에 수놓인 노오란 유채꽃으로 한껏 시정(詩情)이 넘쳐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고고학자도 아닌 마당에 그가 살던 진짜 별장이 어디였던 그 무슨 상관이랴!

눈앞에 보이는 그 어떤 것이라도 왕유가 사랑하지 않은 것이 있었을까 보냐!

 

비 개고 난 산에는,

나날이 짙어가는 가을 빛.

밝은 달, 소나무 사이에 비치고

맑은 물, 돌 위를 흘러간다.

空山新雨後, 天氣晩來秋̥ 明月松間照, 淸泉石上流̥

 

떠들석한 대나무 숲, 빨래 나간 여인네들 돌아오고

연꽃 잎이 움직이니, 고기잡이 나간 배가 지나간다.

봄꽃이여, 질테면 지게나!

나는 이 곳에 살며 지내리라...

竹喧歸浣女, 蓮動下漁舟̥ 隨意春芳歇, 王孫自可留̥

<산 기슭 가을 저녁>

 

나는 왕유의 이 그림같은 시를 사랑한다. 여기에는 숨죽인 참선의 적막감 대신에, 도연명처럼 전원생활을 사랑하고 즐기는 소박한 삶에 대한 애정이 넘쳐 있다.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숨어 신선이 되기를 꿈꾸고 해탈의 세계를 엿보는 왕유가 아니어서 좋고, 전원의 평범한 이웃들에게 따뜻한 애정의 시선을 보내는 왕유라서 더욱 좋다.

오랫만에 맛보는 그의 이 새로운 면모는 필경 망천이라는 이 시골 동네의 정겨움 때문이리라.

종남산은 알고보니 하나의 산이 아니라 길게 뻗쳐 있는 산맥이었다. 평균 고도는 이천 미터. 그러나 숭산과 같은 기암괴봉의 절경이라기 보다는 덩치 큰 남산의 이미지를 가졌다. 특히 남전현과 가까운 지역의 종남산은 오르면 오를수록 넉넉하게 안아주는 우리의 덕유산과 닮았다.

 

인적 드문 곳에 계수꽃이 떨어지니,

조용한 밤, 봄날의 산은 비어 있다.

떠오르는 달에 놀라는 산새,

때때로 봄날 개울에서 노래한다.

人閒桂花落, 夜靜春山空̥ 月出驚山鳥, 時鳴春澗中̥

<새 우는 개울>

 

또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다. 만년의 그는 곧잘 썩 좋은 시를 많이 쓰고 있다. 이제 그의 참선은 거의 신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있다. 개인적인 소승(小乘) 불교의 신앙에서 점차 대승적 차원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떠오르는 달에 산새가 놀란 이유는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신선함이다. 매일 밤 떠오르는 달을 보고 새롭게 경이(驚異)로움을 맛볼 수 있는 시인의 정신적 완숙함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아집을 버리자 찾아온 깨달음의 세계에서 시인은 산새가 되어 즐겁게 노래한다. 그러자 언제나 그 시세계의 계절적 무대이던 가을도 봄으로 바뀌어 버렸다.

 

종남산의 낙조는 저녁 안개를 물들이며 찾아왔다. 저 밑 산길 막다른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를 가리우며 피어오르던 안개가, 이윽고 능선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안개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종남산의 연봉들을 바라보며 잠깐 상념에 잠겨 보았다.

역사에 가정법이란 무의미한 것이라지만, 만약 61세에 열반의 길에 오른 왕유에게 조금 더 이승에서의 삶이 허락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시작(詩作) 세계의 변화로 미루어 보아,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불(詩佛)>이 탄생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왕유가 숭산보다 종남산에 먼저 은거했다면 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혹시 도연명을 능가하는 도가 사상을 대표하는 시인이 되지는 않았을까?

공연한 상념은 꼬리를 무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좌선하는 자세로 앉아 피어오르는 종남산의 안개를 지켜보고 있었다.

왕유의 산수화처럼 종남산은 희미한 윤곽만을 남기고 여백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白夜 호수 숲의나라 핀란드  (0) 2013.08.02
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_24  (0) 2013.07.31
禪詩모음  (0) 2013.07.26
아름다운 여행지 4選  (0) 2013.07.25
황교익의 味食生活_33  (0) 2013.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