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동양화가 말을 걸다_14

醉月 2013. 8. 19. 01:30

고산구곡을 보며 무이산에 은거한 주자를 추억하다

고산구곡가 9곡(高山九曲歌)
이이(李珥)

구곡은 어디인가 문산에 한 해가 저무누나
기암괴석이 눈 속에 묻혔는데
노니는 사람은 아니 오고 볼 것 없다 하더라

 

▲ 이의성 ‘구곡문산도’ 19세기, 60.3×35.2㎝. 종이에 색, 국보 제237호, 개인

한양 생활을 접고 해주로 이사왔다. 오랫동안 노래처럼 부르던 ‘귀거래사’를 비로소 실천에 옮겼다. 번잡한 도회지를 벗어나니 마음이 한가롭다. 다시는 북적대는 도시로 나가지 않을 생각이다. 조금 더 많이 그러모으기 위해, 최대한 빨리 승진하기 위해 머리 뚜껑을 열었다 닫는 어리석은 인생을 연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동안 많이 지쳤으니 이제 무거운 짐은 내려놓고 마음을 넉넉하게 채우겠다.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해 미뤄두고 읽지 않은 책을 다시 펴 성인의 말씀에 귀 기울이리라. 마음껏 공부한 후 생각이 깊어지면 아끼는 제자를 불러 후덕한 대화도 나눌 수 있으리.

설레는 마음으로 낙향해 짐을 풀고 나서도 한참은 고요함이 낯설었다. 느린 시간에 익숙해질 때까지 없는 구실을 만들어 하릴없이 문지방을 들락거렸다. 바람에 떨어진 꽃잎을 쓸어냈다. 낙엽 진 자리에 두둑한 눈이 얹혔다. 자분자분 걸으며 계절의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산과 계곡이 시나브로 마음을 열었다. 산책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관암에서 시작된 산책 코스는 화암(花巖), 취병(翠屛), 송애(松崖), 은병(隱屛), 조협(釣峽), 풍암(楓巖), 금탄(琴灘)을 지나 문산(文山)까지 이어졌다. 느긋한 걸음으로 돌아다닐수록 이곳만 한 별천지는 없지 싶었다. 주자(朱子·1130~1200) 선생이 도학(道學)을 집대성한 무이구곡(武夷九曲)이 이런 풍광일까. 지루해질 만하면 신기하게도 빼어난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옳지, 내가 벗들에게 꽃을 띄워 아름다운 이곳에 오게 해야지. 율곡(栗谷)은 붓을 들어 고산구곡의 흥취를 읊은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써내려갔다. 한글로 지은 시조였다.


고산의 아홉 굽이 계곡에 반한 율곡

벌써 한 해가 저문다. 산그늘에도 한 해의 끝자락이 덮였다. 문산은 구곡의 마지막 명소로 기암괴석이 멋있다. 멋있으면 뭐하나. 눈이 덮여 진경을 알 수 없는 것을. 문산의 참모습을 보려면 눈이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조급증에 걸린 세상 사람들은 와 보지도 않고 볼 것 없다고 단정해버린다.

율곡 이이(李珥·1536~1584)는 34세(1569)에 교리(校理)에서 물러나 황해도 고산군 해주의 석담에 은거한다. 2년 뒤에는 고산구곡을 둘러보며 아홉 군데의 계곡에 이름을 붙였다. 갓머리처럼 생긴 바위는 ‘관암(冠巖)’, 꽃이 흐드러진 계곡의 바위는 ‘화암(花巖)’, 푸른 병풍이 둘러친 듯한 계곡은 ‘취병(翠屛)’…. 계곡은 계속됐지만 아홉 개만 선정했다. 이유가 무엇인지 서곡에서 밝혔다.

‘고산의 아홉 굽이 계곡을 사람들이 모르더니
풀을 베고 집 짓고 사니 벗님네 찾아오네
아아, 무이를 생각하고 주자를 배우리라’

조선은 주자성리학을 국시로 했다. 남송(南宋)의 신 유학자 주희는 성리학의 종주로서 많은 지식인의 존경을 받았다. 율곡도 예외는 아니었다. 계곡에 이름을 붙일 때도 주자를 생각할 정도로 ‘주자 선생님’에 대한 흠모의 정은 강렬했다. 율곡은 사람들이 고산 계곡의 뛰어난 경치를 모르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고산구곡가’를 지은 것은 아니다.

그 바탕에는 주희가 있었다. 주희는 복건성(福建省) 무이산에 있는 무이구곡에 정사(精舍)를 짓고 은거하며 저술 작업과 강학을 겸했다. 그는 자신의 은거처인 무이산의 기이한 절벽과 계곡의 아름다움을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지어 찬탄했다. 주희에게 있어 ‘무이도가’는 자연경관을 노래한 시였으며 도학의 단계를 완성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존경하는 주자 선생님’을 흠모하고 따른 사람들은 ‘무이도가’의 배경이 된 ‘무이구곡도’를 그려 돌려보면서 ‘주자 대하듯’ 했다. 주희의 초상화 대신 ‘무이구곡도’가 존경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었다. 율곡이 구곡을 거니는 행위는 단순히 감상을 위한 유람이 아니었다. 학문이 깊어지는 과정을 비유한 것이다. 마치 주희가 그랬던 것처럼.

중국의 ‘무이구곡도’는 16세기에 조선에 전래되었다. 이황(李滉·1501~1570)은 성리학의 대가답게 ‘무이구곡도’를 가장 먼저 접했다. 이후 중국의 ‘무이구곡도’를 답습한 듯한 그림이 여러 점 제작되었다. 그런데 17세기에 들어 ‘구곡도’ 제작에 일대 혁신이 일어난다. 조선식 구곡도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먼 과거의 스승님인 주자 대신 바로 자신들의 직계 스승님이 머물던 실제 공간에 구곡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송시열의 화양구곡(華陽九曲), 권상하의 황강구곡(黃江九曲) 등이 그것이다. 율곡(栗谷)의 고산구곡(高山九曲)은 조선식 구곡도의 출발점이었다.


10명의 화가, 성리학을 그리다

이의성(李義聲·1775~1833)이 그린 ‘구곡문산도(九曲文山圖)’는 ‘고산구곡시화병(高山九曲詩畵屛)’ 중 아홉 번째 계곡 ‘문산’이다. 율곡의 ‘고산구곡가’의 마지막 경치다. ‘고산구곡시화병’은 모두 12폭으로 된 병풍이다. 1폭과 12폭에는 그림이 없고 글만 적혀 있는데 나머지 10폭은 각기 다른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다. 화가들은 김홍도, 김득신, 이인문, 윤제홍 등 당시 화단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이재노와 문경집처럼 미술사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생소한 작가도 포함되어 있다. 이의성 역시 최근에야 조명받은 작가다.

율곡은 고산구곡을 지정하고 시조를 지었지만 그림이 그려진 것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특히 노론의 핵심 인물인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주도적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각 그림에는 율곡의 한글 ‘고산구곡가’ 뒤에 우암이 한역(漢譯)한 시가 첨부되어 있다. 율곡의 학맥을 이은 선비들을 단합시키기 위한 조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율곡은 왜 마지막 계곡을 ‘문산(文山)’이라 했을까. 문산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승경은 장소의 풍경이 느껴지도록 명명했는데 구곡에서만 유독 형이상학적인 이름을 고집했다. 문산은 문학의 산인가, 문인의 산인가. 아니면 문리가 트이는 산이나 문기가 넘치는 산일까. 문장이나 문재를 뜻할 수도 있나. 어떤 경우든 학문(學文)을 생각하며 이름 붙인 것만은 짐작할 수 있다. 학문(學文)은 묻고 배우는 ‘학문(學問)’과 달리 주역(周易), 서경(書經), 시경(詩經), 춘추(春秋), 예(禮), 악(樂) 등 시서육예(詩書六藝)를 배우는 것을 뜻한다.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공부해야 할 필수 과목이다. 그러니 눈 덮인 문산을 보고 볼 것 없다 하는 사람은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의성이 문산을 그리면서 특별히 눈에 띄지 않게 잔잔한 필치를 선택한 것은 학문의 산은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좋은 공부이니 평생 아홉 굽이 계곡에 묻혀 살아도 여한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뛰어난 인재가 산속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율곡은 고산구곡에서 그다지 길게 앉아 있지 못했다. 한양에 돌아간 후 휴가차 이따금 들렀을 뿐이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덕분에 우리는 멋진 시와 그림을 얻지 않았는가

 

비운의 팔사마를 버티게 한 것은…
유종원 강설

 

강에는 눈만 내리고(江雪)
유종원(柳宗元)

산이란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千山鳥飛絶)
길이란 길에는 사람 자취 끊어졌는데(萬徑人踪滅)
외로운 배에는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孤舟笠翁)
홀로 낚시질, 차가운 강에는 눈만 내리고(獨釣寒江雪)

▲ 윤제홍 ‘한강독조도’ 20×27cm. 종이에 연한색. 개인소장
올겨울에는 눈이 참 많이 내린다. 바람도 매섭다. 오지 마을에 좌천되어 갇혀 지내다시피 살다 보니 어려운 살림에 마음까지 얼어붙는다. 못난 아들을 따라나선 어머니는 바뀐 물 때문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의 병이 어찌 물 때문이겠는가. 네 살 때부터 공들여 교육시킨 아들이 성공하는가 싶었는데 궁벽한 시골로 쫓겨난 까닭에 마음의 병을 얻었을 것이다. 유종원(柳宗元·773~819)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환관이 어떤 사람들인데 감히 젊은 혈기 하나 믿고 맞섰단 말인가.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독종들한테서 군 통수권을 빼앗겠다고 했으니….


진짜 어부와 가짜 어부

환관들은 바보처럼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 않았다. 개혁을 주장하던 왕숙문(王叔文)은 사형을 당했다. 유종원과 마음을 나누던 벗 유우석(劉禹錫)은 낭주로 유배되었고 한태(韓秦), 한엽(韓曄), 진동(陳), 능준(凌准), 정이(程異), 위집의(韋執宜) 등도 모두 사마(司馬)라는 직책을 받고 벽촌으로 쫓겨났다. 기득권 세력과 맞서 싸우다 변방으로 쫓겨난 이들을 가리켜 사람들은 ‘팔사마(八司馬)’라 불렀다.

쌓인 눈 위에 또다시 눈이 내린다. 가난한 사람에게 겨울은 낭만을 즐길 수 있는 관념적인 계절이 아니다. 생존을 위협받는 두려움을 느낀다. 서른셋에 영주(永州·호남성 영주시)에 폄적된 유종원은 겨울 추위를 고스란히 맞으며 지난 시간을 돌이켜본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개혁에 뛰어들었으니 실패했어도 후회는 없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무참히 꺾인 것이 아쉬울 뿐이다.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새 한 마리 날지 않을 만큼 적막하다. 워낙 후미진 시골이다 보니 친하게 지냈던 사람조차 찾아올 엄두를 내지 못한다. 길은 뚫렸으나 사람의 자취가 끊어진 지 이미 오래. 계속된 눈으로 길마저 흔적이 사라졌는데 또다시 눈이 내린다. 멀쩡한 사람을 오도 가도 못하게 가둬버린 눈은 ‘팔사마’의 의지를 잘라내고 몰아세운 환관들의 권력만큼이나 철저하고 강고하다. 그 눈 속에서 늙은이가 홀로 낚시질을 한다. 도롱이에 삿갓만 쓰고 강바람을 맞으며 낚시를 한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앉아 있는 낚시꾼은 유종원 자신이다. 그는 영주에서 10년을 견뎠다. 견디는 시간 동안 공부하며 시를 썼다. 시를 쓰는 시간은 기다림의 시간이다. 언 강을 깨뜨리고 늘어뜨린 낚싯줄에 물고기가 걸리기를 기다리듯 시는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의 끝에서 ‘강설’ 같은 대어(大魚)가 낚였다. 10년의 기다림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옛 그림이나 시에 등장하는 어부는 대부분 생업으로 낚싯줄을 드리운 진짜 어부가 아니다. 가짜 어부다. 그들은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앉아 빈말로 어부가 되고 싶다고 고백한다. 찬물에 짚신이 젖어 동상에 걸리면서도 물을 떠날 수 없는 고생스러운 어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들에게 어부는 관념적인 은둔의 세계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고려 말의 문장가 이곡(李穀·1298~1351)이 쓴 ‘강천모설도(江天暮雪圖)에 제하다’라는 시를 보자. 이곡은 이 시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먼지 자욱한 도성 거리 한낮의 뜨거운 태양(九陌紅塵午日烘)
문 닫고 그림 보니 한없이 생각이 펼쳐지네(閉門看意無窮)
어느 때나 외로운 배에 이 몸을 싣고 가서(何時着我孤舟去)
강천의 저녁 눈발 속에 혼자 낚시해 볼거나(獨釣江天暮雪中)

순 엄살이다. 그가 바라는 낚시는 잠시 휴가 가서 즐기는 고상한 취미생활이다. 유종원이 지향하는 낚시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유종원의 ‘강설’을 들먹거리며 자신과 같은 취향이라며 반색을 한다. 유종원이 들으면 서운할 말이다. 그의 낚시질은 과시형 은둔이 아니다. 강제된 유폐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잃지 않으려는 고독한 자기확신에의 실천이다. 유종원은 영주에서 10년을 보내고 다시 유주자사(柳州刺史)로 자리를 옮겨 마흔일곱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변방을 전전하며 백성을 위해 고심하느라 취미생활로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던 관리였다. 자기보다 더 먼 황폐한 땅으로 떠나는 친구 유우석을 위해서는 유배지를 바꾸어 주도록 진정서를 낼 정도로 의리 있는 사람이었다. 한유(韓愈·768~824)는 유종원의 묘지명에 이렇게 적었다.

“선비는 어려울 때 비로소 그의 절개와 의리를 알 수 있다.”

유종원의 추위를 학산(鶴山) 윤제홍(尹濟弘·1764~?)이 그렸다. 그렸다기보다는 유종원과 겨울 강변에서 나눈 대화를 전해주는 느낌이다. 그림은 한쪽으로 쏠려 있다. 전경에는 바위 틈 사이에서 자란 두 그루 소나무가 서 있고, 뒤로는 허물어질 듯 눈을 뒤집어쓴 가난한 집이 육중한 바위를 의지해 들어앉아 있다. 저 멀리 눈 덮인 산자락에도 영세한 집들이 나무 뒤에 숨어 강바람을 피한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 속에 움직이는 물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강 위에 떠있는 조각배조차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사람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만큼 고요하다. 윤제홍은 붓을 내려놓을 때까지 흔들리는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듯 붓질이 흐릿하다. 지푸라기에 먹을 묻혀 겨우겨우 그린 듯 간신히 윤곽선만 드러날 정도다. 그림에 비해 제시는 지나치게 반듯하다. 아니라고, 흔들리는 사람은 화자(話者)인 유종원이 아니라 전달자인 자신의 마음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유종원의 시구절은 예서로 적었다. 조각도로 판 것처럼 또박또박 새겼다.


유배를 가 본 사람만이 유배 간 사람의 마음을 안다

대사간을 지낸 윤제홍은 19세기에 활동한 문인화가로 이색화풍(異色畵風)의 시조로 불릴 만큼 참신하고 담백한 그림을 그렸다. 특히 손을 붓 삼아 그리는 지두화(指頭畵)에 뛰어났다. 그는 노론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여항문인(閭巷文人)들과도 폭넓게 교유할 만큼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다. 여러 신분의 화가들이 그린 ‘고산구곡시화병(高山九曲詩畵屛)’의 4곡(四曲)인 ‘송애(松崖)’를 그린 사람이 윤제홍이다. 그의 정치적 여정은 결코 편안하지 못했다. 38세에 사간원 정언(正言)이 된 이후 77세까지 7차례에 걸쳐 복직과 파직을 되풀이할 정도로 부침이 심했다. 그는 굴곡이 심한 관로의 마디마디에서 방점을 찍듯 그림을 그렸다. 가는 곳마다 붓을 들어 ‘기행사경도(紀行寫景圖)’를 남겼다. 청풍에서는 ‘한벽루’와 ‘옥순봉’을, 제주도에서는 ‘한라산’과 ‘방선문’을 그리며 자신의 감회를 담았다. 그런 사람의 손에서 ‘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 같은 흐릿한 작품이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화풍은 정갈하다. 이 작품이 가짜가 아니라면 윤제홍이 자신의 개성을 버리고 유종원의 시에 녹아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배 때문에 유종원은 시를 건지고 윤제홍은 그림을 얻었다. 그들이 붓을 들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 뜻이 은거에 대한 관념적 환상이었다고 왜곡된다 해도 그들은 괘념치 않을 것이다.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충분히 고통스럽고 암담하고 행복했으므로 더 이상 미련도 아쉬움도 없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운명처럼 독자적인 길을 걸어간다. ‘한강독조도’도 예외는 아니다

'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楚辭_18  (0) 2013.08.22
황교익의 味食生活_35  (0) 2013.08.20
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_16  (0) 2013.08.18
여름계곡이 띄우는 招淸狀  (0) 2013.08.11
황교익의 味食生活_34  (0) 2013.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