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알고보면 쓸데 많은 신비로운 서울명소

醉月 2018. 12. 12. 23:01

서울 성북동 우리옛돌박물관 실내 전시실의 문인석. 이 석조물이 누군가의 무덤 앞에 서 있었음을, 마치 어둠과 빛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절제된 조명은 돌의 형태와 질감을 도드라지게 해 자연의 빛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표정까지 드러나게 한다.


자신이 기거하는 곳을 ‘여행목적지’로 바라보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여행은 비일상을 지향하는데, 일상은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지요. 서울을 여행목적지로 정하기까지 적잖은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매혹적인 두 곳의 박물관, 그리고 살아생전의 삶, 혹은 죽음의 공간을 보여주는 공동묘지 두 곳을 갔습니다. 익숙한 도심의 거리에서 진행되는 ‘미식 투어’에도 동행했고 젊은이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다는 호텔도 들렀지만 미술관과 묘지 얘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그 얘긴 나중에 들려드리기로 했습니다. 지금 여기 소개하는 곳들은 서울을 대표하는 곳이 아니고, 서울의 명소가 이곳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서울을 보면서 알게 된 건 우리가 익숙한 줄 알았던 서울에 뜻밖에도 수많은 흥미로운 여행지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깨달은 건 일상의 지루한 공간이 얼마든지 흥미진진한 여행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 우리 돌의 직관적인 아름다움

서울이 다른 도시와 차별화되는 것 중 하나가 ‘수준급의 박물관’이다. 서울에서 박물관을 골랐다. 전시 수준은 물론이고, 경관이나 분위기까지 빼어난 곳을 뽑기로 했다. 참고한 건 서울관광재단이 정한 ‘서울 유니크 베뉴’ 목록. 재단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연회나 회의, 만찬 등을 진행할 수 있는, 독특하고 인상적인 서울의 공간 76곳을 ‘유니크 베뉴(Unique Venue)’로 정해뒀다. 유니크 베뉴 목록의 박물관 가운데 추천받은 곳은 두 곳. ‘우리옛돌박물관’과 ‘한국가구박물관’이다.

서울 성북동의 비탈진 언덕에 들어선 ‘우리옛돌박물관’은 본래 경기 용인에 있었다. 용인에서 처음 박물관 문을 연 게 2000년 7월. 그리고 15년 만인 2015년 11월에 박물관은 서울 성북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물관이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온, 거의 드문 경우다. 박물관의 이곳저곳을 들여다보면, 박물관이 돌을 모으고 전시한 용인에서의 15년의 시간은 아마도 ‘돌의 물성(物性)에 대한 이해’의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박물관의 전시는 세심하고 정교하다.

우선 박물관에 전시된 돌의 종류에 대한 이야기부터. 3층 건물과 외부정원을 합쳐 1만8182㎡(5500여 평)에 달하는 박물관에는 1300여 점의 돌이 있다. ‘돌’이라고 하지만, 박물관에 있는 건 수석(水石) 같은 자연미의 돌이 아니라, 돌로 세운 전통미 넘치는 석조 조형물이다. 정원과 실내 전시실에는 사대부들의 무덤에 세운 문인석과 석불을 비롯해 벅수, 동자 등 다양한 형태의 돌이 가득하다. 이런 돌들이 하나둘이 아니라 거대한 군집을 이뤘다. 문인석과 벅수 등을 모아놓은 게 ‘무슨 볼거리가 될까’ 싶은데, 가서 보면 예상과 전혀 다르다.

옛돌박물관의 석조유물들은 다른 역사유물들과는 달리 그저 형상과 질감과 느낌을 직관적으로 감상하기만 하면 된다. 별다른 공부나 역사적 지식이 필요 없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박물관에서 가장 많은 문인석을 보자. 문인석은 다들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한데 모아놓고 보면 하나하나가 다 다르다.

세련된 느낌의 미남 문인석이 있는가 하면, 서툴게 깎은 못난이도 있다. 서구형 이목구비를 갖춘 것도, 툭 불거진 눈으로 해학미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도 있다. 의인화된 형상이나 표정뿐만 아니다. 문인석의 돌의 재질과 질감에 따라서도, 빛의 방향에 따라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투박하지만 친근감이 느껴지는 것도 있고, 매끄러운 질감과 조각으로 세련미를 물씬 풍기는 것도 있다.

문인석도 그렇지만, 돌로 만든 장승인 ‘벅수’나 주로 무덤가에 놓던 동자석은 한결 더 표현이 자유롭다. 벅수는 마을 어귀에 세워 전염병과 잡귀를 쫓았는데, 유독 눈에 띄는 것이 피리를 들고 있는 벅수다. 들고 있는 피리는 신라 문무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만파식적이란다.

동자석은 분방한 옛사람들의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된 석물이다. 동자라면 도교에서는 신선 곁에서, 불교에서는 부처님 곁에서, 유교에서는 무덤 주인 앞에서 그들을 모시는 역할을 한다. 무덤 주인 앞을 지키는 건 문인석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박물관의 전시물의 절반 이상이 죽은 자의 무덤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무거운 죽음 앞에서 저리도 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새삼스럽다.


망우리공원에서 가장 빼어난 전망을 자랑하는 중랑전망대에서 본 서울 강북구, 노원구, 도봉구 일대의 전경. 빽빽한 건물 뒤로 북한산과 도봉산의 암릉이 보인다. 고층빌딩 뒤쪽이 북한산 백운대고, 그 왼쪽이 북한산 보현봉이다. 오른쪽에서 가장 높은 암봉은 도봉산 정상이다. 사진에는 없지만, 전망대에서는 도봉산 오른쪽으로 수락산과 불암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 박물관…미감의 확장과 통찰을 얻다

우리옛돌박물관 인근에 주목할 만한 박물관이 하나 더 있다. 한국가구박물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전통 목가구를 주로 전시하는 곳’인데, 그것만으로는 박물관에 대한 설명은 아주 부족하다. 우선 박물관 형태부터 색다르다. 닫혀 있는 거대한 목조 대문을 열면 잔디 정원 위에 들어선 근사한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최고급 요정’ 같은 분위기다. 실례를 무릅쓰고서 이렇게 말한 건, 전통 한옥에 현대적 감각을 극도로 절제해 가미한 듯한 느낌을 주는 집을 여기 말고 본 적이 거의 없어서다.

가구박물관에는 가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박물관은 지난 1995년부터 15년에 걸쳐 지은 궁집, 사대부집, 곳간채, 부엌채 등 전통 한옥 10채를 옮겨 만들었다. 박물관 마당도, 꽃담도, 굴뚝도 우아해서 박물관 내부와 외부가 전시 오브제처럼 느껴질 정도다. 관람료 2만 원이 다소 비싸게 느껴질 수도 있고, 안내를 받으며 단체 관람을 해야 한다는 게 불편하게 생각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박물관을 보고 나면 그런 생각은 사라진다.

한옥 건물 지하로 이어지는 박물관 전시실에서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자유 관람이었다면 휙 지나치고 말 전시공간에서 가구문화와 생활사 등을 듣게 되는데, 이게 웬만한 인문학 강좌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안내에 따라 앉혀주는 자리에서 가구를 보고, 한옥 창을 열어 창밖을 볼 때마다 무릎을 치게 된다.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감상의 안목이 확장되는 경험은 놀랍다. 해설을 통해 알게 되는 건 이런 것들이다. 먹감나무와 단풍나무는 왜 쓸모가 다른지, 왜 소반의 크기가 그렇게 정해졌는지, 방에 따라 가구의 높이가 왜 달랐는지…. 작은 목가구의 단아한 품격을 따라가던 시선이 한옥의 누마루와 처마를 넘어 담 밖의 서울 성곽 야경까지 확장되기도 한다.

구구절절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그동안 한국가구박물관에서 열린 국빈 행사나 다녀간 인사들의 명단을 보여주는 것이 이곳을 설명하는 더 간명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 가구박물관에서는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 VIP 리셉션과 오찬이 열렸다. 2012년에는 한국·우즈베키스탄 대통령 회담 및 오찬이, 이듬해에는 싱가포르 총리 내외 관람과 만찬, IMF 총재 만찬이 있었고, 2014년에는 우리 대통령과 중국 시진핑 주석 내외의 특별 오찬이 있었다. 포르투갈 총리 부인, 독일 대통령, 캐나다 국회의장,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전 대통령 등도 이곳을 다녀갔다.


서울 성북동의 한국가구박물관. 박물관 이름에 ‘가구’를 내세웠지만, 여기는 가구만 보여주는 곳이 아니다. 한옥과 고가구의 뛰어난 미감, 그리고 그걸 즐기는 심미안까지 배울 수 있다.


# 초대(初代)…첫 자리의 인물들

서울에서 굳이 묘지를 찾아갔던 건, ‘사람’이야말로 서울 근현대사를 읽는 훌륭한 주제이기 때문이었다. 역사 속 인물의 삶은 흐릿한 문자 기록 너머에 있지만, 서울에서 만나는 근현대사 인물의 삶은 아직 또렷하다. 그가 죽어 누운 자리 앞에서 그의 삶을 생각하는 일은, 그의 존재가 실재했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환기한다. 그래서 영웅담은 더욱 위대해지고, 생전의 질곡과 고통은 더욱 생생하다. 무덤을 찾아가는 건 죽음이 아니라, 실재했던 그의 삶을 보러 가는 일인 셈이다.

북한산 아래 강북구 수유동에 역사체험 둘레길 ‘초대길’이 있다. 불러서 대접한다는 뜻의 ‘초대(招待)’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첫 번째 임기’라는 뜻의 ‘초대(初代)’다. 최초의 검사, 초대 국회부의장, 초대 대법원장, 초대 부통령…. ‘초대 길’이란 대한민국 근현대에 ‘초대’ 직위를 지낸 이들의 묘역을 도보 코스로 이어놓은 길이다.

초대길의 시작과 끝은 ‘근현대사기념관’이다. 근현대사기념관은 강북구가 지난 2016년 6월 수유동에 개관한 역사기념관. 근대 역사를 기념하는 공간이 수유동에 들어선 건 의미를 기려야 할 수많은 죽음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우선 수유동에는 3·1운동의 발원지로 일컬어지는 천도교의 봉황각이 있고, 3·1운동의 주역인 천도교 교조 손병희의 묘가 있다. 이시영 부통령의 묘도, 신익희의 묘도, 조병옥의 묘도, 이준 열사의 유해도 있다. 광복군 열일곱을 한데 묻은 묘역도 있다. 앞선 이들만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에 힘썼던 신숙, 유림, 양일동, 서상일의 묘도 이곳에 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곳. 수유리에는 불의에 항거했던 418명의 의로운 주검을 담은 4·19 민주묘지가 있다. 이들이 여기 묻힌 이유는 ‘북한산의 기운 아래 깃든 명당’이라는 것 외에 설명할 만한 다른 건 없다. 신념을 위해 뜨겁게 살았던 이들의 죽음이 이곳에 자연스럽게 모였다.

도보 코스는 참나무 숲 속에 놓였다. 알싸한 박하 향이 풍기는 겨울 숲의 차가운 대기 속을 걷는다. 무덤은 모두 다 비슷비슷하지만, 살아온 내력이나 삶의 향기는 저마다 다르다.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시영 부통령의 좌절과 여섯 형제의 비극적인 삶의 얘기부터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파견됐던 이준 열사,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두고 돌연 사망한 이승만의 정적 해공 신익희 등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초대길에서 죽음이 가장 가깝게 만져진 곳은 이준 열사 묘역이었다. 고종의 밀사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됐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분사한 이준 열사. 그는 헤이그 외곽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가 1963년에야 이곳으로 옮겨져 안장됐다. 그의 시신은 흉상 부조가 새겨진 벽체 아래 태극기를 새긴 석판 밑에 있다. 그의 유해는 고국의 햇볕과 바람 속에서 비로소 안식에 들었으리라.

초대길에서 덧붙일 곳 하나 더. 해공 신익희 묘 아래쪽에는 4·19 혁명 사적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곳이 바로 4·19 혁명의 도화선에 가장 먼저 불을 그은 자리다. 4·19 혁명이 일어난 그해 서울운동장 3·1절 기념식장에 뿌려진 ‘삐라’와 격문이 여기 있던 신익희의 제실에서 등사기로 인쇄됐던 것이다. 역사적 인물의 마지막을 묻은 자리가,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첫 장면이 됐던 셈이다.

초대길은 그저 걷기만 한다면 의미가 없다. 그곳에서 보아야 하는 건 무덤이나 죽음이 아니라, 거기 묻힌 이들의 생전의 삶이기 때문이다. 초대길을 걷는 것은 그저 무덤을 둘러보는 게 아니라 가슴 뭉클한 뜨거운 삶을 들여다보는 일. 그래서 그 길을 걷겠다면 공부가 필요하다. 초대길을 안내해주는 강북구의 해설사 서른두 명의 도움을 받아도 좋겠다.


# 공동묘지가 인문의 여행지로…

▲ 망우리 공원의 기슭에 있는 이중섭 화백의 묘. 친구들이 심었다는 여윈 소나무 아래 있다. 묘 앞에 자그마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무덤은 그의 그림이 누리는 대접에 비하면, 쓸쓸하다.
다음 인물들의 공통점은? 소파 방정환, 화가 이중섭, 이인성, 시인 박인환, 한용운, 사학자 문일평, 독립운동가 오세창…. 답은 모두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힌 인물’이라는 것. 망우리 공원은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개장해 1973년까지 4만7000여 기의 무덤이 들어섰던 공동묘지였다. 만장(滿葬)에 이른 후, 유족들이 묘지를 꾸준히 이장해가 지금 망우리 공원에 남은 묘는 7500여 기 남짓이다. 한때 무덤만으로 가득한 벌거벗은 산이었던 묘지는, 이제 공원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울창한 숲이 됐다.

‘역사의 지층’. 망우리 공원에서 줄곧 떠올린 이미지는 ‘화석’이었다. 망우리 공동묘지에는 그 시대에 서울에 살던 이들이 지위를 가리지 않고 묻혔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상투 튼 선비와 일본인이, 자본가와 노동자가, 유학자와 대중가수가 모두 자신에게 허락된 반 평이나 한 평쯤 되는 땅에 죽어 누웠다. 누구든 죽어서는 가여운 영혼이었으므로 내 편, 네 편이 없었다. 묘지에서는 모두 이웃이었다.

1933년부터 1973년까지. 망우리 공원에 묘지가 조성됐던 ‘40년’은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가장 격동하던 시기였다. 식민지배에서부터 해방을 거쳐 6·25 전쟁과 4·19 혁명을 넘어서 압축적 경제성장의 초입에 들어섰을 때까지. 가장 드라마틱했던 시기에 살다간 이들이 죽어서 여기 망우리 공원에 묻혀 있는 것이다. 기록으로, 증언으로 그 죽음을 하나하나 발굴한다면,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풀려나올 것인가. 이름난 삶을 살지 않은 평범한 이들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망우리 공원에는 이름을 이루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위인이 묻혀 있다. 대한민국 예술사에 큰 획을 그은 이들도 적지 않다. 뜻밖이었던 건 화가 이중섭의 묘가 아직 처음 쓰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것이었다.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다. 황달, 영양실조, 간장염에 시달렸던 말년의 이중섭은 정신분열 증세까지 보였다. 병원에서 죽어 무연고자로 처리됐던 그는 사흘 만에 고향 친구에게 발견됐다. 이중섭의 유해는 화장돼 반은 여기 망우리에 묻혔고, 나머지 반은 일본의 처가 묘에 합장됐다. 그의 그림은 천정부지로 가격이 오르고, 그의 이름은 최고의 브랜드 네임이 된 지 오래지만, 여윈 소나무 아래 황량한 그의 작은 묘를 찾는 이는 거의 없다.

무덤에서는 생전의 삶만 떠올리게 되는 건 아니다. 무덤이 드러내 보이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소파 방정환의 죽음에 가까이 있고자 자신은 물론이고 온 가족의 묘를 근처의 묘역에 썼다는 그의 제자 최신복의 사연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뜨거울 수 있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그 사연을 알고 이 무덤 앞에 선다면 누구나 ‘내가 죽으면 누가 나의 죽음 곁에 머물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리라. 망우리 공원에는 조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했던 일본인의 묘도 있고, 스물일곱 나이에 요절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의 대중가수 차중락의 묘도 있다.

망우리 공원의 묘지의 숲을 걸으면 삶과 죽음의 사이, 과거와 현재의 사이에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보인다. 망우리 공원이 근대를 산책하는 공간이자 스스로 각성하는 인문의 여행지인 건 그래서다. 30년 넘게 망우리 공원의 묘지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묘비를 읽고 역사를 뒤진 작가 김영식 씨의 말을 빌린다면, 망우리 공원이야말로 ‘수많은 근현대 인물을 한곳에서 만나는, 다른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진귀한 여행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인문 여행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