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행지로 충남 부여를 택했던 건 순전히 이제 막 상업비행을 시작한 ‘열기구 투어’ 때문이었습니다. 부여야말로 열기구 투어를 하기에 둘도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더군요. 구름처럼 백제의 고도를 둥실 떠가는 열기구의 즐거움도 훌륭했지만,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은, 겨울이라서 발견할 수 있었던 부여의 다양한 매력이었습니다. 성벽 아래 버티고 선 느티나무를 찾는 연인들을 보고, 근사한 한옥 카페에서 커피 향을 맡고, 그림책 마을을 기웃거려 보았습니다. 겨울이라서 더 풍성했던 부여로 떠난 여정이었습니다. # 열기구를 타고 부여의 하늘을 날다 대형 선풍기가 불어넣은 바람으로 몸이 부풀기 시작한 열기구 풍선(구피) 안에 후욱 하고 가스 불이 뜨거운 열기를 불어넣었다.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꿈틀거리며 열기구가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여기는 백제의 고도 충남 부여. 부여는 높은 산이 없고 기류가 안정적이어서 열기구 비행의 최적지다. 이런 이유로 열기구 동호인들이 이곳 부여로 모여들었다. 국내에 있는 열기구가 모두 스물여섯 대인데 그중 스물한 대가 부여에 있다니 말 다했다. 열기구 비행이 아직 ‘희한한 취미’로 취급받는 수준이라 이렇게 얘기하긴 좀 민망하지만, 부여는 ‘열기구의 메카’다. 열기구 동호인들은 지난 11월 부여에서 ‘열기구축제’를 연 데 이어 레저회사를 설립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의 지원을 받아 이제 막 열기구 상업비행을 시작했다. 이들이 하는 건 ‘진짜 열기구 비행’이다. 수소나 헬륨 가스로 채운 풍선에 줄을 묶어놓고 고도만 높였다가 내려오는 방식의 계류비행이 아니라, 풍선 속 공기를 데워 상승력을 얻는 열기구를 타고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자유 비행인 것이다. 터키의 카파도키아나 호주 케언스 등 세계적인 관광지에서 띄우는 열기구 투어와 다를 게 없다. 풍선을 타고 하늘을 나는 건 생각보다 근사한 경험이다. 더 높이 더 빠르게 나는 비행기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하늘을 날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소망을 이루는 느낌이랄까. 낮은 고도와 느린 속도, 그리고 새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하게 비행하는 것이 열기구의 가장 강력한 매력이다. 열기구의 최고 고도는 지상 150m 남짓. 열기구를 타기 전에는 더 높이 오를수록 경관이 더 좋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정작 타보니 오히려 고도를 낮췄을 때의 경관이 특별했다. 그러고 보니 열기구를 타고 느끼게 되는 건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높이와 속도다.
# 백제의 아침을 하늘에서 보다 풍선의 정수리쯤에 매어둔 줄을 놓자 이내 열기구가 둥실 떠올랐다. 열기구는 마치 공중부양을 하듯 가볍게 떴다. 가스버너로 불을 뿜어 풍선에 뜨거운 기운을 불어넣자 고도는 금세 높아졌다. 백마강과 낙화암, 부소산성, 정림사지 오층석탑, 궁남지…. 백제의 성과 고분, 유적들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1400여 년 전 백제의 고대도시 흔적이 뚜렷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아침 볕이 스며든 호수 주위에 펜으로 그린 듯한 겨울나무들이 서 있던 궁남지였다. 열기구는 바람의 흐름을 따라 움직인다. 바람이 강하면 속절없이 떠밀려 다닌다. 하루 중 가장 바람이 적은 일출 무렵이나 일출 직후에 열기구를 띄우는 건 그래서다. 덕분에 열기구를 타면 일출의 장관을 볼 수 있다. 붉고 노란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세상을 비추는 모습을 하늘에서 보는 건,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이다. 겨울 아침의 추위는 매웠지만, 이따금 머리 위로 훅훅 느껴지는 버너의 불길 때문인지 견딜 만했다. 아니, 그보다 백마강물길과 구릉을 넘는 안개가 보여주는 경관에 정신이 팔려 추위를 느낄 사이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50분 남짓의 비행시간이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투어에는 야외 테이블에서의 식사도 포함돼 있는데, 겨울이라 식사를 실내에서 했다. 투어 명칭이 ‘열기구 로맨스 투어’라서 그럴까. 부여 시내 캐주얼 레스토랑에서의 서양식 아침 식사는 맛보다 화려한 ‘플레이팅’이 더 인상적이었다. 열기구 투어는 부여에서 해볼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체험이지만, 문제는 가격이다. 정상가격이 1인당 25만 원. 이걸 관광공사의 지원으로 18만 원까지 낮췄다는 데도 부담이 크다. 더 가격을 내릴 방도는 없을까. 원가를 셈해 봤다. 기구가 뜨는 데 최소 여섯 명이 동원돼야 하고, 비행을 위해 차량 세 대가 움직여야 하며, 여기에 대당 1억 원인 열기구의 감가상각비에 가스비용까지 합쳐 보니 가격을 더 낮출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풍선에 협찬사의 로고를 새기는 조건으로 기업의 도움을 받는다면 요금을 15만 원 아래까지도 낮출 수 있단다. 아쉽게도 관심을 보이는 회사가 없지만 말이다.
# 겨울 부여에서 보다 부여여행이 꼭 겨울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백마강 기슭의 버드나무 푸른 여름이거나 애잔한 정서와 어울리는 가을이 부여 여행으로는 제격이 아닐까. 하지만 부여에는 겨울만의 매력이 있다. 겨울에 부여를 가야 할 이유는 끝도 없다. 그중 하나가 바로 국립부여박물관이다. 박물관에는 ‘백제문화의 정수’로 꼽히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건 복제품이고, 진짜 백제금동대향로는 부여에 가야만 볼 수 있다. 당대 최고의 작품이라는 전문가들의 최상급 찬사에도 불구하고 간혹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것들이 있다. 모자란 안목 탓이 크다. 하지만 백제금동대향로는 그 아름다움에 누구든 반할 수밖에 없다. 연꽃이 새겨진 몸체와 산봉우리가 새겨진 뚜껑, 그리고 뚜껑 위에서 여의주를 물고 있는 봉황, 향로의 몸체를 받친 74개의 산봉우리와 상상의 짐승과 동식물, 신선까지…. 향로에는 160여 개의 형상이 빈틈없이 조각돼 있다. 가서 이 향로와 눈을 맞춰 보면 안다. 어떤 문장으로도 향로의 미감을 감히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 하필 왜 지금 백제금동대향로일까. 이유는 한 가지. 지난여름 무렵 박물관 2전시실에 백제금동대향로만을 위한 독립공간을 따로 마련했기 때문이다. 별실을 만들어 소음을 막고 주위 공간을 최대한 어둡게 해 향로를 비춘 빛이 더 밝게 느껴지도록 공간을 구성했는데, 과연 이전보다 향로 본연의 색감과 세부 형태의 아름다움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관람객의 집중도가 이전보다 훨씬 더 높아졌다. 더불어 푸른 겨울밤이 어울리는 곳으로 부여 시내 한복판의 정림사지를 빼놓을 수 없다. 이르게 내린 푸른 어둠 속에서 조명을 받은 오층석탑이 은은하게 떠오르는 모습은 자못 감동적이다. 그런데 겨울에 정림사지는 오후 다섯 시면 문을 걸어 잠근다. 담장 너머로 보거나 슬쩍 열어둔 문 사이로 보는 수밖에 없다는 게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겨울 이른 아침의 궁남지도 덧붙인다. 궁남지 주변의 연밭은 꽁꽁 얼어붙었는데, 궁남지의 물은 아직 얼지 않았다. 아침 햇살이 번질 무렵이면 궁남지 수변의 갈대도, 버드나무도 아침 볕으로 붉게 달궈진다. 황금빛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궁남지의 수면 위에는 지금 겨울을 나는 철새들이 수런거리고 있다. # 저무는 해와 따스한 차 한잔
가림성을 특별하게 하는 것은 성 아래 당당한 체구의 느티나무 한 그루다. 어느게 맞는지 모르겠으되 나무의 나이를 두고 누구는 400살이라 하고, 누구는 250살이라고도 한다. 가림성에는 뜻밖에도 젊은 연인들의 발길이 잦은데, 여기까지 올라온 연인들은 모두 이 느티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이 나무를 일러 ‘사랑나무’라 부르는 건 이 때문이다. 연인들은 백제의 역사나 산성의 자취가 아니라 이 나무를 보러 이곳까지 오고, 붉게 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이 나무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느티나무가 아니라, 연인과의 사랑을 근사한 배경의 사진으로 새기러 여기까지 오는 것이겠다. 그러니 백제 동성왕과 가림성의 역사 이야기 따위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그렇더라도 어떠랴. 연인들은 사랑이 더 중요하고, 그 사랑을 새기는 데 이곳이 더없이 좋은 장소니 말이다. 느티나무 앞에 서면 부여 임천면 일대는 물론이고 논산, 강경, 익산, 서천 일대의 경관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날이 좋으면 익산의 용화산이나 서천의 장항제련소까지도 볼 수 있다. 여기 말고도 새로 생긴 가볼 만한 곳이 부여 곳곳에 있다. 부여읍에는 ‘껍데기는 가라’의 시인 신동엽의 문학관이 있고, 근대건축물 6동을 이어붙여 조성한 아담한 ‘관북 문화공간’도 있다. 최근 이곳에 ‘사비 북카페’가 들어섰다. 카페라고는 하지만 커피나 차를 파는 건 아니고 백제사와 향토사 등의 자료를 찾아 읽을 수 있는 무료 도서관 겸 쉼터다. 7000여 권의 역사, 고고학, 미술사, 여행 분야 책은 물론이고 논문 등을 비치했다. 북카페 가장 안쪽은 2층 구조로 복원해 놨는데, 높지는 않지만 2층에서 창밖으로 보는 부여 시내 풍경이 소담하다. 겨울 여행이라면 카페도 빼놓을 수 없다. 고즈넉한 한옥을 카페로 개조해 일약 명소가 된 규암면의 ‘합송리 994’는 한옥의 독특한 분위기와 핸드드립 커피 맛으로 일찍이 이름난 곳. 국립부여박물관 옆 쌀 창고를 개조해 만든 복합문화공간 겸 카페 ‘G340’도 높은 천장과 다양한 주제로 연출한 분위기가 독특하다. 부여 시장 인근의 북카페 ‘아무튼 같이’도 부여를 찾는 젊은이들이 꼭 찾는 명소로 꼽힌다. 세도면의 펜션 겸 한옥카페 ‘수리재’는 카페에서의 식사와 차, 디저트, 뜨끈한 황토방에서의 낮잠까지 포함한 5시간짜리 ‘하루 쉬자 세트메뉴’를 판다. # 마을 주민들이 쓰고 그린 그림책
그런데 최근 들어 서동요 테마파크를 찾아오는 발걸음이 잦아졌단다. 왜 그럴까. 다름 아닌 테마파크 인근의 ‘송정 그림책마을’ 때문이다. 테마파크를 끼고 있는 저수지 초입의 마을이 그림책 마을로 불리는 ‘부여군 양화면 송정 1리’다. 이 마을 어르신 23명이 지난해 그림책미술관 시민모임 지원을 받아 동화책을 펴냈다. 손수 그림을 그리고 글도 썼다. 이름하여 ‘내 인생의 그림책’ 시리즈다.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온 마을 주민들이 직접 쓰고 그린 이야기 중에는 잔잔한 것도, 유쾌한 것도 있으며 간혹 콧날을 시큰하게 하는 것도 있다. 송정마을에는 이런 그림책을 읽기에 딱 좋은 그림책 마을 카페가 있다. 커피나 차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북카페’다. 카페에서는 마을 할머니 9명이 교대로 일한다. 커피도, 스무디도, 셰이크도 팔지만, 여기서는 메뉴판의 ‘시골 음료’ 항목으로 분류된 미숫가루나 식혜, 매실차, ‘건강차’나 ‘꽃차’ 항목의 메뉴를 주문하는 게 좋겠다. 조청이 딸려 나오는 가래떡 구이를 곁들인다면 금상첨화다. 이날 카페를 지키고 있던 전열귀 할머니가 쓴 동화책을 펼쳐봤다. 제목은 ‘서울 나들이’. 칠 남매 모두 서울에 나가 살아 해마다 고춧가루며 참기름이며 한 해 농사로 거둔 것들을 머리에 이고 지고 가져다 주었다는데, 동화책에 그 얘기를 담았다. 송정리가 부여의 남쪽 끝이라서 그런지 입말에 전라도 사투리가 좀 섞였다. 큰 보따리를 진 할머니 그림 옆의 글을 천천히 읽는다. “보따리가 세 개나 네 개니께, 이늠 보따리 갖다 놓고, 다시 와서 이늠 보따리 갖다 놓고 허지. 그래도 재밌어, 갈 때는. 올 때는 울고 와. 아쉬워서.” 자신이 쓴 동화책을 읽는 것을 못내 부끄러워하던 전 할머니에게 “지금도 가을이면 잔뜩 이고 지고 자식 보러 서울 가시냐”고 물었더니 되돌아온 전 할머니의 얘기. “지금이사 택배가 있응께, 그냥 부쳐 불지라. 편한 세상이여, 시방은….” 아무리 편리하다고는 해도 할머니가 바리바리 싸서 이고 지고 간 정까지 택배가 대신할 수 있을까. 송정마을에는 느티나무 아래 멋진 버스정류장이 있고, 거기에 책을 읽는 할머니 조형물이 있다. 마을 안쪽에는 500살 도토리나무도 있고, 늙은 팽나무도 있으며 사철나무 돌담길도 있다. 마을을 산책하고, 책 마을 카페를 찾아 뜨거운 차 한잔 앞에 놓는다면, 거기서 마을 주민들의 티 없고 순박한 삶을 담은 동화책을 읽는다면 얼마나 마음이 따스해질까. 때마침 창 너머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진다면 더 좋겠고…. ■ 여행정보 강원도의 대표 음식인 막국수가 뜻밖에도 연고 하나 없는 부여에서 첫손으로 꼽는 음식이 됐다. 순전히 백마강 유람선 탑승장 근처의 ‘장원막국수(041-835-6561)’ 때문이다. 초라한 농가주택이 식당인데 식사 때만 되면 손님들로 가득 찬다. 메뉴는 수육과 막국수가 전부. 막국수가 순하면서도 깊은 맛을 낸다. 부소산성 입구의 ‘구드레 돌쌈밥’은 오랜 내력의 쌈밥집이다. 달짝지근한 불고기와 부드러운 수육에 돌솥밥과 쌈을 곁들여 낸다. 귀촌 요리사가 운영하는 내산면의 소담돈까스(041-832-5246)도 평판이 좋은 곳이다. 궁남지 인근의 궁남손칼국수(041-835-2162)는 담박한 멸치육수로 끓여낸 칼국수를 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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