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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사무라이와 獨眼龍의 눈물

醉月 2011. 3. 30. 08:54

아이즈 사무라이와 獨眼龍의 눈물

3·11 일본 대지진 후쿠시마현과 미야기현 대참사 이겨내는 ‘역사의 힘’

위인에 대한 자부심이 비상사태 때 주민들의 저력으로
원전결사대 181人에서 일본 최강 아이즈 사무라이 떠올려

 

지난 3월 11일 도호쿠간토(東北關東) 대지진이 발생한 후 일본인이 보여준 행동에 전세계가 놀라고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자연재해 앞에 최대 피해지역인 미야기(宮城)현 주민들이 침착하게 대처하는 것을 두고 “인류정신의 진화”라는 유의 극찬이 해외 언론에서 잇따라 나왔고, 일본 전체는 물론 인근 국가까지 대재앙으로 몰아넣을 것으로 예상된 후쿠시마(福島) 원자력발전소의 핵폭발을 막기 위해 181인의 결사대가 투입돼 그야말로 사투(死鬪)를 벌인 것을 보고서는 전율마저 느꼈다.
   
   사고 발생 장소가 세계 3위의 대국 일본인 만큼 전세계 언론은 시시각각 속보를 내보내는 동시에 일본인들의 경이적인 행동에 대한 분석을 하느라 분주하다. 다양한 견해가 제시됐지만 한 가지 중요한 관점이 빠졌다. 바로 미야기와 후쿠시마의 역사다. 이들 지역은 일본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대중적 인기가 높은 전국시대와 메이지유신 주역들의 활동무대다. 최근 원전 폭발로 세계적 관심을 한 몸에 받은 후쿠시마는 에도막부를 지키기 위해 소년결사대까지 투입해 장렬하게 전사한 ‘아이즈 사무라이’들의 본고장인 충절지향(忠節之鄕)이고, 미야기는 전국시대 최후의 무장 다테 마사무네를 시조이자 정신적 지주로 모시는 곳이다.
   
   일본전문가 장상인 JSI파트너스 대표는 “두 지역 주민들은 어릴 때부터 위대한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고 그만큼 긍지도 매우 높다”면서 “최근 두 지역 주민들이 보여준 놀라운 행동은 역사가 과거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라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형태로 발현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선 원전폭발사고로 전 일본을 공포에 빠뜨린 후쿠시마부터 살펴보자.
       
   고전 ‘47인의 사무라이’를 보는 듯
   
   “역시 아이즈(會津) 사무라이의 후예!”
   
   지난 3월 17일 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가 우려되는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방사선 피폭 위험을 무릅쓴 자위대와 경찰의 원자로 냉각작전이 실시됐다. 이와 함께 직접 원자로에 접근해 지상 작업에 나선 181명의 원전 직원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임무에 돌입했다. 냉각수 밖으로 노출돼 방사성물질 대량 방출 위험이 커지고 있는 사용후 핵연료를 식히기 위한 것이다.
   
   이들 결사대 181명의 죽음을 무릅쓴 행동은 전세계에 깊은 감동을 줬다. 특히 일본 국민은 물론 일본 역사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들은 후쿠시마가 메이지유신 당시 사쓰마(薩摩·가고시마현) 사무라이와 함께 일본 최강의 사무라이로 불렸던 아이즈 사무라이의 본고장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전통의 면면부절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181인의 결사대’는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전인 ‘주신구라(忠臣藏)’를 방불케 하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1748년에 쓰인 ‘주신구라’는 일명 ‘47인의 사무라이’라고도 불린다. ‘주신구라’는 1702년에 일어났던 유명한 사건, 즉 주군(主君)을 잃은 47명의 사무라이들이 1년 동안 와신상담한 끝에 자신들의 주군을 자살로 몰고 간 사람에게 복수를 감행했던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극화한 것이었다.
   
   일본은 지방 분권의 전통이 강한 나라다. 일본 역사에서 일본인이라는 의식이 처음 싹튼 것은 메이지유신이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일본은 향토의식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메이지유신으로 일본 역사상 진정한 중앙집권체제가 등장하는 듯싶었으나, 2차대전 후 다시 지방자치가 활성화되면서 일본은 전통으로 돌아갔다. 이를 반영하듯 일본인들은 평소에는 지역을 행정구역명으로 부르지만 사석에서는 여전히 옛날 명칭으로 부른다. 후쿠시마 사태에 아이즈가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메이지유신 직전의 일본은 막번(幕藩)체제였다. 중앙정부인 막부(幕府·바쿠후) 아래 지방정부인 번(藩·한)이 있는 체제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운 에도막부(1603~1867년) 말기 일본은 막부를 돕자는 좌막파(佐幕派)와 막부를 타도하자는 토막파(討幕派)로 나뉘었다. 토막파 진영에는 조슈(長州)번과 사쓰마번이 선두 경쟁을 벌였던 반면, 좌막파의 태두는 아이즈번이었다. 메이지유신 초기인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이 실시된 후 조슈번은 야마구치(山口)현으로, 사쓰마번은 가고시마(鹿兒島)현으로, 아이즈번은 후쿠시마(福島)현으로 각각 명칭이 바뀐다.
   
   
   방어법은 가르치지 않고 공격술만 가르쳐
   
   적을 보면 내 수준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아이즈가 어떤 곳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사쓰마라는 존재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에도시대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최강의 사무라이는 사쓰마였다. 사쓰마는 검술을 가르칠 때부터 방어법을 가르치지 않고 ‘일격필살’이라고 하여 공격술만 가르치는 곳으로 유명했다. 잇폰(一本·한방)을 강조하는 일본 정신에 가장 부합하는 무사도를 갖고 있는 곳이 사쓰마라는 동네다. 방어법을 안 배웠으므로 일격이 실패하면 죽거나 다칠 가능성이 높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기풍을 가진 곳이 사쓰마였다.
   
   가장 두려운 적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다. 사쓰마는 임진왜란 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용맹함과 잔인함으로 조·명 연합군으로부터 ‘귀신 시마즈’라고 불리며 악명을 떨쳤다. 시마즈(島津)는 800년간 사쓰마를 다스린 영주 집안의 성이다. 사쓰마는 에도막부 초기인 1609년 오키나와의 전신인 유구(琉球)를 침공해 속국으로 삼았는데 이때도 압도적 무력을 바탕으로 힘들이지 않고 제압했다. 사쓰마는 에도막부 말기인 1863년 8월 당시 세계 최강국인 영국의 함대를 상대로 포격전을 벌이는 대담성을 보였다. 이런 사쓰마가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된 것은 당연하다. 비록 조슈가 사쓰마와 함께 막부를 쓰러뜨린 양대 주역이었지만 무력 면에서는 비교가 안 됐다.
   
   아이즈는 이런 사쓰마를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는 기개와 무력을 보유한 사무라이들이 있는 유일한 지역이었다. 아이즈도 사쓰마 못지않게 ‘일격필살’의 기풍이 충만했다. “아이즈는 사쓰마만, 사쓰마는 아이즈만 상대할 수 있다”는 표현을 보면 알 수 있다. 아이즈는 마지막 영주가 에도막부 말기의 유명한 암살조직 신센구미(新選組)를 창설하는 등 사실상 혼자서 막부 지키기에 나섰다. 그러나 한 주먹이 두 주먹을 막을 순 없는 법. 에도막부에 아이즈 같은 번이 하나만 더 있었더라면 메이지유신은 더 늦어졌을 공산이 크다는 게 일본 역사가들의 중론이다.
   
   아이즈번 사무라이들의 막부에 대한 충절은 대단했다. 메이지유신 직후 일본은 내전상태에 돌입했고 정권을 장악한 토막파 계열의 정부군은 아이즈번이 주도하는 좌막파의 저항에 맞서 고전을 거듭했다. 아이즈는 소년결사대 백호대(白虎隊)까지 결성해 분투했으나 1868년 아이즈번 영주의 거소가 있던 아이즈와카마쓰(會津若松)성이 함락되고 수많은 사무라이들이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아이즈번의 패배로 보신전쟁(戊辰戰爭·무진전쟁)에서 승리, 메이지유신 신정부는 비로소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아이즈인들의 원한
   
▲ 다테 마사무네 초상화
그 후의 이야기는 씁쓸하다. 조슈와 사쓰마가 주도하는 정부군은 패배자 아이즈를 가혹하게 다뤘고 철저하게 출세길을 막았다. 당연히 이들 지역에 대한 아이즈인들의 원한은 깊어갔다. 아이즈인들은 9년 후인 1877년 사쓰마 사무라이들이 신정부에 맞서 일으킨 세이난(西南)전쟁에 대거 자원해 사쓰마에 대해 복수한다. 사쓰마에 대한 원한은 풀었지만 조슈에 대한 원한은 풀 길이 없어 앙금이 남아 있다. 1988년 보신전쟁 120주년을 맞아 야마구치현 하기(萩)시가 아이즈와카마쓰시에 자매결연을 제의했지만 아이즈와카마쓰 시민들은 설문조사에서 “아직 보신전쟁의 원한을 잊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2007년 봄에는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쓰(會津若松)시를 방문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선조들이 아이즈에 폐를 끼친 것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야마구치현 출신인 아베 총리의 이 발언은 약 140년 전에 발생한 비극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아베 총리의 발언은 후쿠시마 현민들의 민심을 오히려 자극하는 결과만 낳았다. 두 지역의 반목은 일본의 대표적인 지역감정 사례로 꼽힌다.
   
   “다테 마사무네의 쇼료(所領·영지)를 덮친 쓰나미. 역사 속에서 지진은 여러 번 도호쿠를 괴롭혀왔다.” 지난 3월 13일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 발행되는 유력 지방지 가호쿠신포(河北新報)의 인기 코너인 ‘가호쿠쥬(河北春秋)’에 실린 칼럼의 일부다. 주민들은 “마사무네님이 이번 지진을 보고 마음이 아파 얼마나 눈물을 흘리실까요” 하는 말을 주고 받으면서 서로 위로를 건넸다.
   
   이번 지진과 쓰나미의 최대 피해지역인 미야기현도 주민들의 자부심이 강한 곳이다. 확실한 정신적 지주가 있기 때문이다. 미야기현은 과거에 센다이(仙臺)번이었고 번조(藩祖)는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1567~1636)다. 그는 다케다 신겐,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전국시대 무장의 마지막 인물이다. 어릴 때 오른쪽 눈을 실명해서 독안룡(獨眼龍)이라는 별호로도 유명하다.
   
   
   도호쿠 평정한 ‘독안룡 마사무네’
   
   그는 대단한 군사적 천재였다. 영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8세에 집안을 이어받아 불과 5년 만에 오슈(奧州·도호쿠지방)의 절반을 평정했다. 전성기 때 그는 현재의 후쿠시마현과 미야기현을 다스렸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시운이었다. 너무 늦게 태어난 것이다. 그가 뜻을 펼 만반의 준비가 된 무렵에는 이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잡은 후였다. “그가 1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천하의 패권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게 다테 마사무네에 대한 일본 역사가들의 평가다. 대중적 인기도 높다. 그를 소재로 한 역사소설도 많고 1987년에는 NHK가 대하드라마 ‘독안룡 마사무네’를 방영하기도 했다.
   
   웅지를 품고 있었고 그에 걸맞은 역량도 갖추고 있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한 채 삶을 마친 다테 마사무네에 대해 일본인들은 동정적이다. 특히 미야기현 주민들은 다테 마사무네를 신처럼 받들어왔고 우리는 ‘독안룡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이번 지진에 미야기현 주민들이 침착하게 행동한 것의 이면에는 일본인의 공통점 외에 ‘독안룡의 후예’로서 부끄럽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1990년대 대한민국 국적의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베이징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던 김종미 베이징대학 초빙교수는 “후쿠시마현과 미야기현의 사례는 평소 역사가 주민들에게 체화돼 있을 때 비상시에 좋은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며 “우리나라도 내 고장 위인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 주민들이 자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