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DP 성장률 15% 중국 4대 경제축 급부상 기업들이 몰려들고 있다
랴오닝성 선양(瀋陽)
신형근 선양 총영사
|
▲ 주택 철거와 아파트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인 선양. photo 로이터 |
지난해 봄 필자가 중국 선양(瀋陽) 근무를 발령받았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만주(滿洲)의 추운 날씨도 아니요, 고구려 역사나 시타(西塔·선양의 한인타운)의 한민족 사회도 아니었다. 바로 그것은 선양 총영사관에서 발생했던 각종 사고를 비롯해 사증(비자) 비리, 탈북자 보호 문제, 행정원 관리 문제였다. 사고 공관, 지뢰밭 공관의 이미지를 제도적으로 개선하고, 근무기간 동안 큰 과오 없이 임무에 충실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필자에게 주어진 지상과제였다.
부임길에 선양 외곽 타오셴(桃仙)국제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3월 초봄임에도 불구하고 녹다만 시커먼 눈으로 지저분했다. 또 을씨년스러운 날씨는 필자가 이전에 근무했던 베이징(北京)이나 칭다오(靑島)와는 사뭇 다른 “정말 살벌한 곳에 왔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했다.
부임 첫날 저녁 환영모임에서 영사관 직원들이 보여줬던 경직된 표정도 잊을 수 없다. 문제 공관으로서의 그간의 역정을 보여주는 듯했다. 환영 모임이 개최된 식당은 코리아타운으로 유명한 시타에 있었다. 시타 거리에는 평양관, 모란각 등의 북한식당을 비롯해 한국의 경회루, 초원정, 조선족 식당인 옌볜 꼬치구이집 등의 한글과 중국어 간판이 입구부터 즐비했다. 어수선한 간판은 중국인, 한국인, 조선족, 북한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산다는 정겨운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무엇인가 통일되지 않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재개발지역 같은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선양 부임 후 첫 주말에 아내와 함께 들렀던 선양 시내 타이위앤지에(太原街) 백화점 거리의 활기차고 풍요로운 분위기와 시민들의 밝은 표정에 깜짝 놀랐다. 당시 필자는 “이제 동북지방과 선양에 대한 부정적 음영에서 벗어나 하루빨리 이곳에서 우리의 진출을 돕고 위상을 드높여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 중국 정부의 동북진흥전략에 따라 중국의 제4대 경제성장축으로 부상하고 있는 동북지방 중심도시 선양의 역동적 경제성장을 목격한 것이다.
만주족과 한족을 가르는 경계
-
- ▲ 선양의 한인타운 시타거리의 평양단고기(개고기)집. photo 연합뉴스
랴오닝(遼寧)성의 성도 선양은 500년 전 청(淸)태조 누르하치에 의해 건국된 후금(後金)과 그의 아들 청태종 황타이지(皇太極)가 세운 청나라의 초기 수도다. 한때는 버드나무 울타리의 도시란 뜻에서 만주어인 ‘무크텐’이라고 불렸다. 이는 청조가 만주족 이외의 이민족이 만주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유조변(柳條邊·버드나무 울타리)’이 선양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유조변은 한족과 만주족을 가르는 일종의 봉금지역 경계선이었다.
선양은 우리 한민족의 활동이 활발히 펼쳐진 곳이기도 하다. 선양 주위에는 주몽(朱蒙)이 고구려의 첫 도읍을 세운 오녀산성을 비롯해 국내성과 광개토대왕비, 장군총, 안시성, 백암성 등 수많은 고구려 유적이 있다. 몽골 침략 이후 일부 고려왕은 심양왕을 겸하기도 했다. 충선왕(忠宣王)이 1308년 심양왕(瀋陽王)으로 책봉됐고 이후에는 고려왕과 별도로 고려 왕족이 심양왕을 맡기도 했다. 옛 심양부(선양)에는 한때 수많은 고려의 유민들이 살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1636년 청의 건국과 함께 시작된 병자호란 때 후금의 10만 대군이 출병한 곳도 선양이다. 후금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해 조선에서 끌려온 전쟁포로 10여만명의 아픔과 고통은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근대 들어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제정 러시아와 일본의 30만 대군이 격돌한 지상전의 주무대도 선양이었다. 당시 선양은 봉천(奉天)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지금도 선양은 북방의 군사 요충지다. 북한, 러시아, 몽골과 국경을 맞대면서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의 군사·정치적 영향력을 투사하는 선양군구(軍區)의 중추도시이다. 선양군구는 중국의 7대 군구 중 하나다.
인구 740만명, 동북지역의 중심
오늘날 선양은 740만의 인구를 가진 동북지방의 정치·군사·경제·문화·교통의 중심도시다. 1980년대까지 선양은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공업 기반을 바탕으로 중국의 군수산업과 중화학공업을 선도해왔다. 하지만 남방에서 시작된 개혁 개방의 흐름에 부응하지 못했고, 1990년대 후반부터 선양의 경제는 기울기 시작했다. 국영기업을 중심으로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했다. 이는 선양지역 기업들의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이어져 대량 실업 사태가 일어났다. 결국 한때는 노동자들의 집단소요가 발생하는 등 지역이 위기를 맞기도 했다.
지난 2003년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중국 중앙정부가 서부대개발에 이어 ‘동북진흥전략(東北振興戰略)’이란 새로운 경제발전 계획을 추진하면서다. 중국판 균형발전전략이다. 그 결과 중국 동북지역의 경제가 과거의 비효율에서 벗어나 성장 궤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제는 광저우와 선전의 주강(珠江)삼각주, 상하이와 쑤저우, 항저우를 중심으로 한 장강(長江)삼각주, 베이징과 톈진의 보하이(渤海)만 경제권에 이어 중국의 제4대 경제성장축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동북진흥전략의 중심에 있는 도시가 선양이다. 선양 주변 100㎞ 범위 내 8개 도시는 선양경제구라는 거대 도시권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올 상반기 선양의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은 14.6%에 달했다. 이는 중국 전체의 GDP 성장률 11.1%를 월등히 추월하는 수치다. 14.6%란 경이적 수치는 선양의 역동성과 발전 잠재력을 잘 설명해 준다.
롯데, 중국판 롯데월드 건설
선양은 한국과의 교류도 빈번하다. 선양시는 주(駐)선양 총영사관과 함께 8년째 ‘선양한국주간’ 행사를 개최해오며 한국과의 교류확대와 투자유치에 힘쓰고 있다. 이는 중국 도시 가운데 유일한 사례로 선양시의 한국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잘 대변해 준다. 인천과 선양 간에는 매일 4편의 항공편이 운항되고 있다. 또 인천~선양 노선은 중국 어느 도시를 잇는 항공노선보다도 황금노선으로 알려져 있다.
선양에 대한 우리 기업의 진출은 12만명에 달하는 조선족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LG전자 등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소규모 중소 제조업 진출이 주종을 이룬다. 최근에는 선양의 발전 잠재력에 착안해 롯데그룹이 선양 북역(北驛)에 20억달러를 투자해 서울 잠실 롯데월드 2배에 달하는 복합단지를 건설 중이다. 포스코(POSCO), SK, 금호석유화학 등 대기업의 투자도 급증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많은 한국기업들은 임금 상승, 구인난, 환경, 세무, 금융 등 제반 분야에서 중국 투자환경의 악화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동북지역 현장 관리들 특유의 보수성도 우리 기업 진출에 걸림돌이다. 실제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2만명 정도로 추산되던 한국 교민 사회는 1만5000명 선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 기업들은 국력 신장과 경제 진출, 개인의 생존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선양의 한국인 사회는 매년 개최되는 선양한국주간을 활용해 지난해 중국 최초로 ‘전국노래자랑’을 개최했다. 선양 전국노래자랑은 사상 최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대대적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선양에서 열린 전국노래자랑 예선에 참가하기 위해 1500명의 중국인이 남쪽 끝 하이난다오(海南島)를 비롯해 서남부 쓰촨(四川)과 윈난(雲南) 등 중국 전역에서 운집했다. 그중 노래자랑 참가자의 40%는 한국인이나 조선족 중국인이 아닌 중국 한족(漢族)이었다. 덕분에 이 행사는 중국 내에서의 한류 확산에도 크게 기여한 바 있다.
그 여세를 몰아 지난 7월 선양한국주간에는 선양 한국인회와 주선양 총영사관이 주축이 돼 전세계 1200명 한상(韓商)이 참가하는 ‘글로벌한상대회’를 열었다. 당시 글로벌한상대회 개막공연으로 ‘열린음악회’가 4만여명의 관객들이 모인 가운데 선양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성대히 개최됐다. 이는 한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최초로 개최된 사례다. 중국 동북3성에서 한류 열기를 다시 한번 불태우고 한민족의 단합을 과시한 셈이다.
비자발급 연 15만건… 중국 도시 중 최다
-
- ▲ 선양 올림픽스타디움의 야경. photo 로이터
주선양 총영사관은 선양에서 랴오닝성, 지린(吉林)성, 헤이룽장(黑龍江)성 등 동북3성을 관할한다. 연간 사증(비자) 발급량은 15만건가량으로 우리나라 전 재외공관 중에서 가장 많다. 지난해 사건·사고 발생건수도 590건가량으로 재외공관 가운데 1위, 이 지역에 수감된 우리 국민 수감자도 160여명으로서 전체 재외공관 중에서 가장 많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 선양 총영사관은 북한에 접경한 우리 외교의 최전방 공관으로서 많은 도전과 어려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필자를 비롯 총영사관 직원들은 사고다발 공관으로서의 이미지를 불식하고, 중국 경제의 제4대 성장축으로 부상하고 있는 동북3성 지역에 대한 경제 진출과 투자 및 관광 유치를 위해 가능한 지혜와 노력을 모으고 있다.
내년에 북한 신의주를 마주보는 단둥(丹東)에서 선양까지 고속철도가 완공되면 40분 만에 주파할 수 있게 된다. 또 남북의 철도가 연결되어 고속철도가 깔리면 서울에서 선양까지 철로로 3시간이 채 안 걸리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을 그리면서 우리는 중국의 동북3성, 특히 선양에 대한 관심과 진출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또 우리 교민사회가 더욱 건강하게 발전하기 위해 선양 현지 교민들은 한국학교, 금융, 내수시장 개척 분야에서 본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갈망하고 있다. 다시 부상하는 중국을 바라보면서 국제정세에 보다 신중하며 중국과 중국인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인들이 우리 한국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하는 노력은 우리가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과제다.
다시 살아난 진시황의 병마용들
당나라 때 동서교류 중심지에서 서부대개발 중추도시로 재도약
산시성 시안(西安)
전태동 시안 총영사
|
▲ 신라 원측대사의 유골 일부가 봉안된 시안의 흥교사. |
시안(西安)하면 진(秦)시황제의 병마용(兵馬俑)이 떠오른다. 1974년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굴한 병마용은 현재 7호갱까지 발굴됐다. 이는 시안이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화 도시임을 알려준다. 상하이 엑스포의 중국관에도 진시황 병마용에서 출토된 청동마차가 중국을 상징하는 대표 문화재로 전시되고 있다.
산시성(陝西省)의 성도(省都) 시안은 중국의 천년고도(千年古都)다. 당나라 때의 장안(長安)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시안이란 이름은 ‘안정서북(安定西北·서북 지방을 안정시킨다)’의 뜻으로, 14세기 명(明)나라 때 붙었다. 시안이란 이름이 시사하듯 지난 1000여년 동안 중국 서북 지역의 중심 도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지난 10세기 당나라 멸망 이후에는 중국 강남(江南) 지역의 개발과 북방 유목민족의 대두로 오랫동안 서쪽 변경의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시안은 지난 2000년 이후 중국 서부대개발 중점기지의 하나로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인구 840만… 중국판 햄버거 인기
인구 840만의 시안은 황허(黃河)의 지류인 웨이허(渭河)와 친링(秦領)산맥 사이의 약 1만㎢의 땅에 자리잡고 있는 대도시다. 친링산맥은 중국 쿤룬산(昆侖山) 끝자락에 있는 길이 1600㎞의 동서 방향의 산맥이다. 고대 풍수학에서는 “친링산맥의 근원이 쿤룬산과 이어져 지난 1000여년 동안 제왕(帝王)들의 용맥(龍脈)이 됐다”고 설명한다.
-
- ▲ 시안 사람들이 즐겨먹는 중국식 햄버거 ‘러우쟈모’.
친링산맥 동쪽에는 중국 5악(岳) 가운데 하나인 화산(華山)이 있다. 무협지에서 화산파의 본거지로 등장하는 바로 그 화산이다. 친링산맥은 황허와 창장(長江) 사이에 있는 화이허(淮河)와 함께 중국을 남북으로 나누는 지리적 분계선 역할도 한다. 친링산맥을 기점으로 남쪽은 쌀농사, 북쪽은 밀농사를 짓는다. 때문에 친링산맥 이북에 있는 시안 사람들은 밀가루 음식을 선호하는 편이다.
시안의 특색있는 음식으로는 중국식 햄버거인 ‘러우쟈모(肉夾饃)’와 양고기 음식인 ‘양러우파오모(洋肉泡漠饃)’가 있다. 양러우파오모는 당나라 때 장안에 있던 한 서역(西域) 병사가 넓적한 밀가루 빵을 잘게 잘라서 양고기탕에 섞어 만든 것에서 비롯됐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내려와 시안에 사는 6만4000여 회족(回族)들의 주식이 됐다. 현재는 시안의 한족들도 양러우파오모를 즐겨 먹는다.
자부심 크고 성격 급해… 축구장 충돌 잦아
시안 사람들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시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외지에 나가 일하는 것보다 고향에서 보내는 것을 선호한다. 또 평소에는 점잖고 문화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만 성격이 매우 급한 편이다. 시안 현지 공안당국의 한 관계자가 필자에게 “축구 경기에서 자주 충돌이 발생하니 축구장에 갈 때에는 조심하라”고 권고한 적이 있을 정도다.
시안의 대표적 유적으로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의 능(陵)과 병마용이 있다. 대안탑(大雁塔)도 유명하다. 대안탑은 당나라 때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세운 불탑이다. 현장법사는 인근 자은사(慈恩寺)에 머물면서 신라에서 온 원측 등 수제자와 함께 불경을 번역했다. 대안탑이란 이름은 현장법사가 인도로 가던 중 길을 잃었을 때 ‘기러기(雁)’가 날아와 인도해 주었다는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시안 시내에는 중국의 고건축물 가운데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최대 규모의 고성(古城)도 있다. 명나라 때의 성벽으로 둘레 길이만 13.7㎞에 달한다. 이는 당나라 장안성 원래 크기의 8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성벽 위에서는 매년 단축 마라톤이 열린다. 시안의 자매도시인 경상북도 경주시는 매년 이 단축 마라톤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인 1100명 거주… 물류비용 걸림돌
중국 정부가 오는 2020년까지 추진하려는 전면적인 ‘샤오캉(小康·의식주가 풍족한)사회’는 전 국토의 71%를 차지하는 서부의 발전 없이는 달성할 수 없다. 이를 위해 현재 허난(河南)성 정저우(鄭州)-시안-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를 동서로 잇는 고속철도도 건설 중이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사이의 교류 협력이 증대될 경우 시안은 그 중심 도시로 발돋움할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때 동서교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회복하려는 노력인 셈이다.
이를 위해 시안시는 △내륙 지방의 물류 문제 해결을 위해 철도 컨테이너 센터와 보세 물류센터 같은 국제 내륙항을 개발하고, △2011년 시안 세계원예박람회를 준비하는 한편, △주(周)·한(漢)·당(唐) 시대의 대표적 유적의 복원과 공원화를 통해 문화산업을 진흥하며, △2020년까지 시안을 중국 내륙지방의 국제적인 대도시로 발전시킨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시안을 베이징, 상하이와 더불어 중국의 대표적 국제도시로 탈바꿈시키겠다는 복안이다.
우리 기업의 시안 진출도 계속해서 늘어날 전망이다. 우리 기업들은 서부대개발 진전에 따라 정보기술(IT), 건설장비, 의류, 에너지 및 자원개발 등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올 들어서는 농산물 폐기물을 활용한 바이오매스(Biomass) 발전소 합작건설을 시작한 LG상사와 인쇄회로기판(PCB) 생산을 위한 심텍(4000만달러)이 있다.
하지만 중국 동부연해지방에 비하면 아직 작은 규모이며 초기발전 단계다. 한·중 양국 정부 차원에서는 2010년에 시안 인근 양링(陽陵) 농업시범단지에 ‘한·중 사막화방지 생명공학 공동연구센터’를 설립해 중국 서부의 사막화방지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국내 한 민간단체에서는 시안 동남쪽 상뤄(商洛)시에 나병(한센병) 환자 치료를 위해 인애원(仁愛院)을 건립해 헌신적으로 운영 중이다.
더욱이 시안을 비롯한 서부지역이 내수시장 확대 대상으로 부각되면서 한국인의 시안 방문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올 상반기에는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94%가 늘어난 6만2000여명이었다. 대한항공을 비롯, 우리 국적기는 인천과 시안 사이를 1주일에 9회 운항하고 있다. 한국인은 유학생 900여명을 포함해 1100여명이 시안에 살고 있다.
시안이 내륙에 있어 물류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과 동부 연해 지방에 비해 보수적인 점은 우리 기업의 진출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시안과 한국 신라 고승 원측대사 유골 봉안… 김구·이범석·이청천도 인연 시안은 고대, 중세, 근세, 현대에 걸쳐 우리와 인연이 많다. 7세기에는 한반도의 불교 승려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많이 갔다. 대표적인 승려가 삼국시대 신라의 고승 원측(圓測)대사와 의상(義湘)대사다. 특히 원측대사는 지금의 허난(河南)성 뤄양(洛陽)에서 입적했는데 유골 일부는 시안 동남쪽의 흥교사(興敎寺)에 봉안돼 있다. 중국의 항일전쟁 시기인 1940년대에는 이범석 장군이 지휘하던 광복군의 주력부대 제2지대(支隊)의 본부가 시안에 있었다. 시안 동남쪽 두취(杜曲)에 있는 제2지대 본부 건물은 현재 양곡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의 자서전 ‘장정(長征)’에 따르면 백범 김구 선생은 1945년 8월 7일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과 함께 시안을 직접 찾았다고 한다. 시안의 광복군 제2지대를 찾은 백범 선생은 미국의 첩보기관인 전략사무국(OSS)과 함께 한반도 침투를 계획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빨리 다가온 일본의 항복선언으로 계획 자체가 무산됐다고 한다. |
"여성·소비의 도시 “한국 브랜드 옷 가장 잘 팔리는 곳”
청두
임성환 코트라 청두 KBC 센터장
중서부의 핵심도시 蜀나라의 수도
한국기업 진출 적어 뷰티·레저산업 유망
“중국 내 다른 지역에 비해 ‘메이드 인 코리아’에 대한 인지도 높고 인식도 긍정적 급부상하는 청두 시장 선점 준비해야”
|
▲ 쓰촨성 청두 시내 톈푸광장에 모인 청두 시민들. 마오쩌둥의 동상이 오른손을 들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
‘청두(成都)’에 대한 이야기가 이제는 국내 매체에도 자주 언급된다. 청두에 대한 인지도도 이전보다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 대다수 한국인에게 청두는 여전히 생소한 도시로 남아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많은 사람들이 ‘쓰촨성의 청두(成都)’와 ‘산둥성의 칭다오(靑島)’를 헷갈려 한다는 사실이다. 중국 관련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청두라는 지명이 칭다오의 한글식 발음인 ‘청도’와 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국내 모 중앙일간지조차 최근 청두를 칭다오로 표기하는 오보를 냈다.
그래도 역사나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삼국지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유비(劉備)가 세운 촉한(蜀漢)의 수도, 그리고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이 한때 활동을 했던 곳으로 청두를 기억한다. 여행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자이언트 판다의 본고장, 그리고 주자이거우(九寨溝), 어메이산(峨嵋山) 등의 관광명소가 소재한 쓰촨성의 중심 도시로 청두를 알아준다. 또 젊은층에서는 허진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정우성 주연의 영화 호우시절(好雨時節)의 배경으로 유명하다.
명확한 사실은, 청두는 산둥성이 아니라 해안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있는 쓰촨성의 성도란 것이다. 또 좁게는 중국 서남지역, 조금 더 넓게는 중국 중서부 지역의 핵심 도시다. 쉽게 말해 화베이(華北)의 베이징, 화둥(華東)의 상하이, 화난(華南)의 광저우가 명백한 대표 도시의 지위를 지키고 있다면, 중서부 지역에서는 청두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두는 역사도 오래된 편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1956년에 최초로 중국 전역에 네 곳의 중의약(한의학)대학이 건립됐다. 그 네 곳이 바로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그리고 청두다. 또한 청두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7대 군구(軍區) 중 한곳인 청두군구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중서부 최초’란 타이틀은 거의 대부분 청두가 독식하고 있다.
지난 9월 말에는 중국 중서부 지역 최초의 지하철이 청두에서 개통됐다. 굳이 이 같은 사실을 열거하지 않아도 기회가 되어 청두라는 도시의 모습을 한번 볼 기회가 있으면 좋을 것이다. 중국 중서부 내륙에서 청두 외에 이만큼 발달하고 번화한 모습을 가진 도시는 찾기 힘들다.
삼국지 촉나라의 수도
청두의 역사가 언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는 확실치 않다. 기원전 11~13세기로 파악되는 ‘삼성퇴(三星堆)’ 문명의 유적이 청두에서 40㎞가량 떨어진 광한(廣漢)시 삼성퇴에서 발견됐다. 삼성퇴 유적은 고촉(高蜀)왕국의 문명으로 추정된다. ‘삼성퇴’ 문명이 기원전 13세기 청두로 천도(遷都)한 흔적인 진샤(金沙)유적도 청두 시내에 있다.
기원전 4세기 고촉(高蜀)의 9대왕이 도읍을 청두로 옮겼다. 전국시대에는 통일 전의 진(秦)나라에 의해 정복되어 새로운 도시로 거듭난 바 있다. 진나라 통치기간 중에는 ‘두장옌(都江堰)’에 인공제방 건설을 통한 지혜로운 수리공정이 이루어졌다. 이후 청두는 다시는 홍수 범람으로 인한 피해를 보지 않게 됐다.
근현대사로 넘어오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이 일본군의 진공을 피해 쓰촨성으로 이동했다. 이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고 국민당이 대만섬으로 패퇴하기 직전까지 중국 본토에서 가장 최후까지 국민당 치하에 있었던 도시 중 하나가 청두였다.
“한번 오면 떠나고 싶지 않은 곳”
청두는 여러 가지로 특징 지을 수 있다. 하나는 ‘물의 도시’다. 베네치아 같은 수상 도시라거나 해안 도시도 아닌데 물의 도시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이상할 수도 있다. 우선 쓰촨성의 이름이 ‘천협사로(川峽四路)’란 말에서 유래했다. 또 앞서 설명한 두장옌 수리공정으로 풍부한 수자원이 보다 널리 퍼지게 됐다. 그 결과 청두는 농경이 크게 발달해 중국의 주요 곡창지대가 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여성의 도시’다. 청두는 전반적으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속된 말로 ‘세다’는 인상을 준다. 외모 면에서도 여성이 우월하다는 느낌을 주고, 미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곳 여성들은 패션과 의류에 돈을 쓰는 소비심리가 유난히 강하다.
또 특별히 중요한 측면은 ‘소비의 도시’라는 점이다. 청두 사람들은 삶을 즐기는 데 큰 의미를 둔다.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즐거운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길 원한다. 그래서 청두는 중국 전체 도시 중 자가용 보유대수가 베이징, 광저우 다음으로 많다. 도시 규모를 감안해서 비교해보더라도 유난히 많은 편이다.
“한국 브랜드 의류 장사가 가장 잘되는 곳은 청두”란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소비의 도시가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을 것이다. 농사가 항상 잘되고 외침의 경험이 적다 보니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걱정을 크게 하지 않는다는 점도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적으니 미래에 대한 투자가 발달할 여지도 적고, 현재를 즐기는 소비가 자연스럽게 발달하게 된 것이다. 흐린 날이 많고 화창한 날이 적다 보니 패션을 비롯한 각종 소비를 통한 기분전환의 수요가 높은 것도 한 가지 이유로 보인다.
청두의 홍보영상 가운데 중국 영화계의 거장 장이머우(張藝謀)가 감독한 영상이 있다. 주제가 ‘청두, 한번 오면 떠나고 싶지 않은 도시(成都, 一座來了就不想離開的城市)’다. 내용은 이렇다. 한 청년이 할머니가 그리워하는 고향인 청두에 온다. 청년은 거동이 불편해 청두에 오기 힘든 할머니를 대신해 청두의 사진과 영상을 촬영한다. 카메라를 통해 보고 느끼는 순간을 담던 청년은 촬영이 끝나갈 때쯤 “떠나고 싶지 않은데, 하루이틀 더 늦게 떠날까”란 고민을 한다. 이처럼 청두는 ‘풍요로워 살기 좋으며 여유로운 분위기로 편한 도시’로 자신을 포지셔닝(positioning)하고 있다. 또한 실제 많은 중국인들이 그렇게 인지하고 있다.
외지인에 폐쇄적이고 배타적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불리는 청두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데 장점은 무엇일까? 우선 풍취가 느껴지는 도시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즐기는 문화가 잘 발달돼 있다. 생활 리듬에 여유가 느껴지는 전원 도시의 분위기도 난다. 역사·문화적으로 흥미로운 요소도 많다. 소비문화가 발달된 것은 외국인으로 생활하는 데 있어 큰 장점이다.
음식도 유명하다. 중국의 4대 요리인 쓰촨요리(쓰촨 일대)는 광둥요리(광둥·홍콩 일대), 베이징요리(베이징·산둥 일대), 상하이요리(상하이·장쑤·저장 일대) 중 광둥요리와 더불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각종 간식과 길거리 음식이 발달해 있어 다양한 맛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반면 햇빛이 귀한 암울한 날씨는 가장 큰 단점이다. 햇빛 부족으로 인한 정서적·신체적 피해는 만만치 않을 것으로 우려된다. 또 하나의 단점은 대중교통이다. 최근 청두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지만, 다른 한 축을 이루는 버스는 노선이 단순하고 차량대수가 부족하다. 택시도 차량대수가 부족해 정작 필요할 때 잡을 수가 없다.
단언하긴 어렵지만 청두는 동부연해지방 도시들과 비교해 외지인과 외국인에 대해 상대적으로 폐쇄적이고 배타적이지 않나 하는 인상을 자주 받는다. 그리하여 청두 현지 기업이나 기관을 상대할 때 “동부연해지역 기업이나 기관에 비해 글로벌 감각이나 업무 진행상의 센스 또는 배려가 부족해서 힘들다”고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을 가끔 듣는다.
거주 한국인 1000여명 불과
청두에는 약 1000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 이 중 사업가와 주재원, 동반가족의 수는 약 400명 전후로 추정된다. 베이징이나 칭다오와 같이 한국인이 많은 도시와는 생활에 있어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한국인 수가 부족해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가 그만큼 덜 발달돼 있다. 실제 가끔 한국적인 문물이 필요할 때 어려움이 있다.
한국 기업의 진출도 아직 미미하다. 진출 기업 수는 수십 개에 불과하다. 현지에서 제조업에 종사하는 기업은 더욱이 몇 곳 안 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내륙에 있고 물류유통이 어려워 현지 내수가 높다고 판단되기 전에는 공장을 세울 이유가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국내 본사 차원에서 아직 청두에 대한 인지도가 낮아서일 수도 있다.
청두에 대한 우리 기업들의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현지 답사를 위해 청두를 찾았다가 코트라 사무실을 찾는 기업도 늘고 있다. 아직은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진 않지만, 청두의 여러 여건들을 검토해봤을 때 손 놓고 경쟁사들이 선점토록 내주기에는 너무 아깝기 때문일 것이다.
청두는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각종 건설 현장을 찾아보기만 해도 쉽게 체감할 수 있다. 지난해에는 쓰촨성의 고정자산 투자규모가 1조2000억위안 규모로 이뤄졌다. 2010년에는 1조5000억위안 정도가 고정자산에 투자될 예정이라고 한다.
쓰촨성 정부뿐만 아니라 중앙정부도 내륙 개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점도 참고할 만하다. 10월 말 청두에서 열리는 ‘중국서부국제박람회’의 경우 올해부터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조직위원회가 구성됐다. 지난해까지는 쓰촨성 무역촉진위원회에서 조직위원회를 구성했었다. 지역 발전에 중앙정부 차원의 관여 정도가 높아지는 추세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대로 우리 기업이 청두에 진출했을 때 당장 거둘 수 있는 성과에 대해서는 답이 쉽게 나오진 않는다. 하지만 시장 선점을 위한 계획과 준비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고 판단된다. 더욱이 청두는 중국 내 다른 지역에 비해서도 한국 및 ‘메이드 인 코리아’에 대한 인지도가 높고 인식도 긍정적인 편이다.
따라서 늦기 전에 우리 기업이 청두에서 기반을 다질 필요가 있다. 환경산업, 소매유통업, 레저산업, 신재생에너지 등은 상당히 기대되는 분야다. 특히 한국 프리미엄이 높은 미용과 뷰티 산업 역시 우리 기업들의 참여가 필요할 것으로 기대되는 분야다.
서부대개발이란 주제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 현지 기관에 “서부대개발이 무엇이냐”고 물어봐도 딱 부러지는 대답을 해주진 못한다. 하지만 청두를 필두로 많은 투자와 육성이 이뤄지고 있다. 지역경제의 신속한 발전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명확하다. 우리도 이곳에서 기회를 놓치지 말고 계획과 준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아편전쟁 林則徐, 태평천국의 난 洪秀全,
황포군관학교장 蔣介石의 도시
아시안게임 열리는 광둥성 광저우(廣州)
옥영재 코트라 광저우 KBC센터장
제조업의 메카
‘세계의 시장’으로 불려
주변 산업집적단지 400여곳
광저우 주변 한국인 3만여명 거주
|
▲ 아시안게임 예행연습이 한창인 광저우 아시안게임 메인 스타디움. photo 조선일보 이태경 기자 |
광저우(廣州) 아시안게임이 11월 12일 개막을 앞두고 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은 베이징 아시안게임(1990년) 이후 중국에서 두 번째로 열리는 하계 아시안게임이다. 11월 12일부터 27일까지 16일간 중국 광둥성 광저우에서 열린다. 광저우는 지난 2004년 카타르 도하에서 아시안게임 개최지로 선정됐다. 광저우는 아시안게임 개최로 1842년의 개항과 1978년 개혁개방 이후 또 한번의 역사적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 준비에 투입된 돈은 1200억위안(약 20조원)을 넘어섰다. 12개 경기장을 신축하는 등 50개의 경기장과 20개의 연습장을 갖추고 있다. 선수촌은 막바지 단장이 한창이다.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와 광저우시 당국은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아시안게임 요원의 선발과 훈련, 제도와 시스템 정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아시안게임 조직위는 류펑(劉鵬) 중국 국가체육총국장과 황화화(黃華華) 광둥성장이 직접 챙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시안게임 조직위 측은 “아시아 45개국에서 1만4000명의 운동선수와 스태프, 6000명의 심판과 기술 인력, 1만명에 달하는 미디어 종사자, 2000여명의 아시안게임 관계자가 광저우를 찾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따른 경제효과만 8000억위안(약 133조원)에 달할 것으로 조직위는 추산했다. 참가선수들은 42개 종목에서 464개의 금메달을 놓고 메달경쟁을 벌이게 된다.
개혁개방 후 고속성장 주도
아시안게임으로 광저우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인구 1035만명의 광저우는 광둥성의 성도(省都)다. 광저우는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후 선전(深 )과 함께 광둥성의 고속성장을 주도했다. 중국 제조업의 메카로 자리잡은 광저우는 2000여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도시다. 개혁개방 이후 불과 30여년 만에 새롭게 떠오른 선전과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광저우는 ‘양의 도시(羊城)’란 별명을 갖고 있다. 광저우 웨슈(越秀)공원에는 화강석으로 조각한 높이 11m의 ‘오양석상(五羊石像)’이 있다. 다섯 마리의 양은 광저우의 상징 동물이다. 하늘에 있는 다섯 선녀가 양으로 변해 광저우 사람들에게 농사 짓는 법을 가르쳤다는 일화를 갖고 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의 공식 마스코트도 ‘러양양(樂羊羊)’이란 이름의 다섯 마리 양이다.
다섯 마리 양 덕분에 광저우는 줄곧 풍요로움을 누렸다. 서울에 한강의 기적이 있다면, 광저우에는 ‘주강(珠江)의 기적’이 있다. 광둥성 전역에서 흘러들어오는 서강(西江), 북강(北江), 동강(東江)은 광저우에서 합류해 주강을 이룬다. 주강 하류는 거대한 삼각주를 형성한다. 광저우 사람들은 예로부터 주강삼각주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농산물을 바탕으로 독립성이 강한 기질을 형성해 왔다.
문화대혁명 말기 덩샤오핑 은신처
오양석상이 있는 웨슈공원 서편에는 남월(南越)국의 두 번째 왕인 문제(文帝)의 묘도 있다. 광저우 일대를 기반으로 한 남월은 기원전 1세기쯤 독립국가를 표방하다 한(漢)나라에 정복당했다. 청(淸)나라 말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일으켜 한때 장강(長江) 이남을 평정한 홍수전(洪秀全·1814~1864)이 태어난 곳도 광저우다. 광저우 북쪽 화도(花都)에는 홍수전이 살던 옛 집이 남아있다.
광저우 사람들은 옛 한(漢)나라 때부터 외국과의 무역에 종사했다. 청나라 말기 영국과의 아편무역이 횡행한 곳도 광저우다. 이에 청나라 조정은 임칙서(林則徐)를 광저우로 파견해 아편을 전량몰수해 불에 태웠다. 아편몰수는 아편전쟁으로 비화됐다. 결국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1842년 영국과 난징(南京)조약을 체결하고, 광저우를 비롯한 5개 항구를 개항했다. 홍콩이 영국에 넘어간 것도 바로 이때다.
지리적 여건으로 광둥 사람들에게는 반항적 기질이 다분하다. 쑨원(孫文·1866~1925)이 ‘베이징 군벌 정부’에 맞서 ‘광둥 정부’를 세우고 저항의 거점으로 삼은 곳도 광저우다. 쑨원의 직계인 장제스(蔣介石)는 황푸군관학교 출신 장교들을 이끌고 북벌(北伐)에 성공했다. 광저우 시내에는 쑨원을 기리는 ‘중산(中山·쑨원의 호)기념당’과 장제스가 교장을 역임한 ‘황푸군관학교’가 남아있다.
문화대혁명 말기 마오쩌둥과 사인방에 의해 모든 직위를 박탈당한 덩샤오핑이 은신했던 곳도 광저우 인근 바이윈(白雲)산 온천이다. 덩샤오핑은 광저우군구(軍區)사령관 쉬스요우(許世友)에게 몸을 의탁했다. 중월(中越)전쟁(1979년)을 지휘한 쉬스요우 장군은 “덩을 복권시키지 않으면 내가 북쪽으로 진격하겠어”라며 덩샤오핑의 복권에 일조했다. 결국 덩샤오핑은 1978년 집권 후 광둥성을 ‘개혁개방 1번지’로 선정해 부(富)를 안겨줬다.
“광둥어 지키자” 대규모 시위
광저우 사람들은 광둥어를 쓴다. 중국의 국부(國父) 쑨원이 사용한 말도 베이징어가 아닌 광둥어다. 쑨원 덕에 광둥어는 한때 중국의 표준어가 될 뻔했다. 성조(소리의 높낮이)가 4성인 베이징어와 7성인 광둥어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화교들이 사용하는 중국어의 절반 이상이 광둥어로 홍콩과 마카오에서는 광둥어가 필수적이다. 사용 인구만 1억명을 웃도는 광둥어는 해외에서 ‘캔토니즈(Cantonese)’로 알려져 있다.
지난 7월에는 광저우에서 “광둥어를 지키자”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광저우 지방방송 9개 채널에서 베이징어를 쓰자”는 지커광(紀可光) 광저우시 정협 위원의 발언 때문이었다. 시위에는 2000여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였다. 급기야 차기 대권주자 가운데 한 명으로 거론되는 왕양(王洋) 광둥성 공산당 서기가 “광둥어와 광둥문화를 지키겠다”며 파문 진화에 나설 정도였다.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인 선전, 주하이(珠海), 산터우(汕頭) 등 경제특구도 샤먼(厦門) 한곳을 제외하면 모두 광둥성에 있다. 중국에서 1인당 소득 1만달러를 넘어선 11개 도시 가운데 선전, 광저우, 포산(佛山), 주하이 등 무려 4개 도시가 광둥에 속해 있다. 이 도시들은 모두 주강삼각주를 중심으로 포진해 있다. 광저우 사람들이 ‘광둥인’이라는 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는 까닭이다.
LG디스플레이 등 500개사 진출
-
- ▲ 광저우 웨슈공원에 있는 ‘오양석상’. photo 조선일보 이태경 기자
급속한 경제성장과 소득증대에 힘입어 중국은 ‘세계의 시장’으로 부상한 지 오래다. 그 전만 하더라도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불렸다. 이러한 공장들은 광둥성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형성돼 있다. 광둥성의 면적은 17만8000㎢가량으로 중국 전체 면적의 약 1.8%에 불과하다. 하지만 광둥성 지역내총생산(GRDP)은 중국 전체 GDP의 12%, 교역규모는 28%를 차지한다.
광저우, 선전, 둥관(東莞), 후이저우(惠州), 포산에는 홍콩과 대만 기업을 주력으로 하는 수많은 외국 투자기업들이 제조업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LG디스플레이(광저우)를 비롯해 삼성전자(후이저우), 포스코(포산) 등 국내 대기업도 상당수 진출해 있다. 이들 대기업의 계열사와 협력업체들도 동반진출해 500여개에 달하는 광둥성 진출 우리 기업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둥관과 포산에서는 아시안게임 일부 경기가 열릴 예정이다.
광저우 주변에는 400여곳에 달하는 업종별 산업집적단지들이 형성돼 있다. 업종별 산업단지들을 중심으로 아웃소싱을 통한 상호협력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국내 중소기업들의 진출도 이어진다. 보다 저렴하면서도 기술력 있는 부품과 자재를 물색하기 위해서다. 특히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열리는 ‘광저우수출입상품교역회(캔톤페어)’는 전세계 100여개국이 참가하는 중국 최대의 무역박람회로 자리잡았다.
광저우는 유통과 물류의 새로운 중심지로도 급부상했다. 광저우의 관문인 바이윈(白雲)공항은 지난해 3700만명의 여객을 처리한 중국 3대 공항이다. 상하이, 홍콩, 선전에 이은 중국 4대 항만인 광저우항은 부산항(5위)에 이어 세계 6위의 항구로 떠올랐다. 지난해 12월 말에는 광저우와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을 잇는 최고시속 394㎞의 우광(武廣)고속철도도 개통했다. 총연장 1068㎞의 우광고속철도는 향후 베이징까지 연장될 예정이다.
물류유통망을 기반으로 광저우는 내수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여가고 있다. 원부자재 시장을 잘 활용해 세련되고 품위있는 패션의류를 제조하는 국내 중소형 의류업체들도 광저우를 중심으로 생산활동을 벌이고 있다. 광저우 의류상가에는 한국인 사업가들과 한국 물건을 찾는 구매자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중국 내수시장에서 한국산 패션의류가 품격과 미(美)를 추구하는 중국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부터다.
광둥성 전체 외국인 직접투자 21조 넘어
광저우를 중심으로 한 주강삼각주에는 한국인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다. 약 3만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한국인 대부분은 광저우~둥관~선전으로 이어지는 벨트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직업은 광저우의 모습처럼 천차만별이다. 외국생활에서 오는 외로움과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한 사교와 취미 활동도 활발한 편이다. 광저우의 한국인 사회에는 한국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수많은 모임이 결성돼 있다.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그늘도 있는 법이다. 광둥성과 광저우시는 환경과 기술 그리고 국가경제발전기여도 등을 감안해 외국인 투자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미 광둥성에는 전세계 500대 기업 가운데 200여개가 자리를 잡고 있다. 지난해 외국인직접투자(FDI)만 195억달러(약 21조6000억원)에 달한다. 또 출입국 목적이 불분명한 사람에 한해서는 입국목적 이외의 활동에 대해서 엄격한 규제와 관리를 시행해 나가고 있다.
단순한 저임금에 의존한 공장 생산방식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경쟁력이 약한 중소기업들은 이미 중국 기업에 하청생산(아웃소싱)을 준 지 오래다. 대신 기술개발과 수출 등 마케팅을 전담하는 방식으로 상생(相生)의 활로를 찾아 나선 상태다. 이제 중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국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살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덩샤오핑의 ‘先富論’
피해도시에서 후진타오의 ‘중부굴기’ 수혜도시로
후베이성 우한
장상해 코트라 우한 KBC 센터장
마오쩌둥이 수도 후보지로 거론할 정도로 화려한 과거 자랑
개혁·개방 이후 연해에 밀렸으나 최근 몇 년 새 급성장
|
▲ 우한역에 정차 중인 고속열차 허시에호. photo 조선일보 DB |
상하이(上海)에서 장강(長江)을 거슬러 서쪽으로 900여㎞를 올라가면 우한(武漢)이 나온다. 우한은 후베이(湖北)성의 성도다. 한커우(漢口), 우창(武昌), 한양(漢陽) 등 3개 도시가 합쳐 인구 1000만명의 대도시다.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칭다오(靑島) 등 연해도시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우한은 다소 생소하다. 역사에 정통한 사람 정도나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시발점이 된 ‘우창봉기(武昌蜂起)’가 일어난 지역으로 알고 있다.
우한은 중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赤壁), 형주(荊州) 등 역사 현장의 대부분이 우한 주위에 모여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서구열강의 조계지(치외법권 구역)가 우한에 설치되고, 내륙진출을 위한 거점 내륙항으로 대외에 개방된다. 그 결과 우한은 장강 수운의 이점을 활용해 발전을 구가하며 한때 상하이에 버금가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다.
1949년 신중국 건국 이후에도 우한은 여전히 그 위상을 유지했다. 우한은 신중국을 건국한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베이징을 대신할 새로운 수도 후보지로 강력히 거론되기도 했다. 또 소련과의 정치·군사적 긴장에 따라 기간산업의 내륙 이전이 추진되면서 ‘둥펑(東風)자동차’ ‘우한강철’ 같은 핵심 공장들이 우한으로 몰려들었다.
“대(大)우한, 허풍이 아니다”
하지만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우한은 연해 도시에 비해 크게 뒤처지게 된다. 자원과 자금이 연해에 집중 투자되면서 내륙의 경제와 산업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잃게 됐다. 급기야 우한은 지방 대도시 가운데 가장 낙후된 곳 중 하나로 추락하게 된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이 주창한 ‘선부론(先富論)’의 최대 피해도시가 된 것이다.
우한이 다시 살아난 건 2004년이다. 연해집중화에 따른 불균형 문제가 대두되자, 후진타오(胡錦濤) 정부는 2004년부터 “중부 내륙의 발전을 도모하자”는 중부굴기(中部山屈起) 정책을 내놨다. 중부굴기 정책으로 중부지역 6개성(산시성, 허난성, 안후이성, 후베이성, 후난성, 장시성)에 대한 대대적인 사회간접자본 투자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중 내륙 물류중심지인 우한은 중부굴기 정책의 최대 수혜지역이 됐다. 더욱이 지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직후 중국 정부의 내수 진작책이 내륙에 집중되면서 우한에 대한 대내외적 관심과 진출도 크게 늘어났다. 그 결과 우한은 최근 수년간 연 15%의 고속성장을 거듭하며, 내륙 경제발전을 견인하는 도시로 부상했다.
지난해 12월 개통된 우광(武廣·우한~광저우)고속철도는 우한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우한은 지정학적으로 ‘중국의 배꼽’에 해당한다. 하지만 철로 및 육로로 연해도시에서 우한을 잇는 데는 불편함과 비용발생 요인이 있었다. 반면 최고시속 394㎞의 우광고속철 개통으로 광저우에서 아침에 출발해 우한에서 점심과 비즈니스 상담을 하고 저녁에 돌아가는 일일 생활권이 가능하게 됐다.
고속철 개통 이후 우한의 여행업계는 여행객들이 크게 늘어 호황을 누리고 있다. 고속철 개통이 인적교류의 확대를 이끌어낸 것이다. 향후 우한과 상하이, 베이징, 청두(成都)를 연결하는 고속철도도 속속 개통될 예정이다. 고속철의 연이은 개통은 최근 유행하기 시작한 내륙으로의 산업 이전을 더욱 가속화하는 동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빠른 성장과 함께 과거의 활력을 되찾자 우한 시민들은 과거의 영광과 함께 거대 도시권역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우한시민들은 “상하이와 함께 도시 이름 앞에 ‘큰 대(大)’자를 붙일 수 있는 도시는 우한”이라고 주장한다. 실제 개혁개방 이전에 우한이 차지했던 중요성을 돌이켜보면 우한인들의 ‘따(大)우한’이라는 자부심이 허풍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코트라 찾는 기업인 늘어”
한국 기업의 우한 진출은 연해지역에는 아직 비할 바가 못된다. 하지만 중부 내륙 도시 가운데는 우한으로의 진출이 비교적 활발하다. 우한에는 약 70여개의 한국기업이 등록돼 있다. 제조법인으로는 조선내화, 우신기계, 빛과 전자, 스타보일러 등이 대표적이다. 사무소 및 무역법인으로는 금호고속, SK E&S, 대한항공, LG전자, 대우인터내셔널, 두산인프라코어, 현대위아, 포스코 등이 있다.
최근 우한으로 진출을 시도하는 기업은 내륙 소비시장 확보, 중국 대기업에 대한 원부자재 공급, 중국 기업에 대한 인수합병(M&A) 등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기존에 우리 기업이 연해지방에서 보였던 투자 패턴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연해지방에서는 동종 업종 간의 대규모 동반 투자가 이루어졌다. 이같은 경험은 중국 내륙지역 투자가 사전에 수요와 목적을 명확히 설정하고 추진하는 ‘타깃형 투자’로 가야함을 시사하고 있다.
우한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400여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중 유학생 및 선교사 등 비(非)비즈니스 인력을 빼면 실제 투자기업인과 그 가족은 100여명이다. 우한의 한국인 사회는 아직 미약한 편이다.
2009년을 전후해 내륙시장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유통, 제조, 서비스 등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이 진출을 타진 중이다. 그 결과 우한을 찾는 인사들도 크게 늘었다. 필자가 지난해 2월 부임한 이후 4개월 동안 코트라 우한 KBC센터를 찾는 한국인 내방객은 한 달에 한 명 정도에 불과했으나, 최근에는 일주일에 2~3명 수준으로 크게 증가했다.
“한국과 한국제품에 우호적”
최근 내륙시장에 대한 한국 기업인들의 관심이 높아진 배경에는 연해지역 시장이 포화상태인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내륙지원 정책에 따라 내륙시장의 경제규모와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높아진 점은 우리 기업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과 한국 제품에 대한 우한 사람들의 우호적 인식은 우리 기업들의 우한 시장 진출을 돕는 요인이다. 우한 시내 고급백화점의 목 좋은 자리는 한국산 의류가 차지하고 있다. 또 번화가 로드숍과 식품점에는 한국산 화장품과 한국산 유자차 등이 즐비하다. 우한에서 우리 제품이 환영받는 현장을 목격한다면 우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인프라의 미비, 행정의 비효율성 등 내륙시장이 갖는 비효율적 요소는 우한 진출의 장애 요인이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에서 ‘시장’으로 변하고 있다. 새로운 시장으로 부상한 우한과 같은 내륙시장에 대한 우리 기업의 진출은 선택이 아닌 필연이 돼야 한다. 내륙의 중심에 위치한 우한에 우리 기업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갖기를 기대해 본다.
51개 소수민족 사는 ‘봄의 도시’ 중국의 동남아 진출 교두보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
안은숙 쿤밍 한국상회 사무국장
삼국지 촉나라 제갈량이 정벌한 남만이 지금의 윈난
청나라 말기 회족 반란으로 한때 이슬람 정권 들어서
중국 20대 도시로 급성장… 신혼부부들의 허니문 코스
한국 교민 4000여명, 화훼농장·푸얼차 사업으로 성공
|
▲ 중국 윈난성 샹그리라의 자연풍경 photo 신화통신 |
13세기 중국 각지를 유람하고 ‘동방견문록’을 남긴 마르코 폴로는 쿤밍(昆明)을 “웅장하고 아름다운 도시”라고 소개했다. 쿤밍은 현재 윈난성(雲南省)의 성도(省都)다. 중국 서남부 변경의 윈난성은 지리적으로 북위 30도의 남쪽 밑에 자리잡은 저위도 지역에 속한다. 면적은 39만4000㎢로 중국 전체 면적의 4.1%를 차지하지만, 일본(37만7000㎢)보다는 조금 더 크다. 윈난의 전체 인구는 4500만여명으로 한국보다 조금 적다.
필자가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쿤밍에 처음 도착했을 때가 떠오른다. 당시 쿤밍은 고층빌딩과 말 수레가 공존하는 현대와 근세가 함께 움직이는 도시 같았다.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신축 아파트 단지 주위에는 현지 주민이 즐겨찾는 재래시장이 있었다. 주변 농토에서는 농부들이 야채를 가꾸고 있었다. 필자는 당시 “장차 이곳도 변화의 물결로 소용돌이치겠구나”란 생각을 했다.
55개 소수민족 중 51개족 거주
윈난은 인류 문명의 중요 발상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지난 1965년 윈난성 원모현(元湈縣)에서 철도기술자들에 의해 우연히 원모인(元湈人) 유골이 발견되면서부터다. 원모인은 베이징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 출토된 ‘베이징(北京)원인(호모 에렉투스)’과 비슷하지만 시기적으로 조금 더 앞선다. 대략 170만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아시아 최초의 인류로 평가받는다. 원모현 전시관에는 유골과 함께 1000여점의 문물이 소장돼 있다.
쿤밍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 때부터다. 1253년 원나라의 쿠빌라이칸은 과거 윈난성 ‘다리(大理)’를 수도로 삼던 ‘대리국(大理國)’을 정벌했다. 윈난이란 행정구역이 처음 설치된 것도 대리국이 쿠빌라이칸에 의해 멸망당한 이 즈음이다. 당시 색목인(色目人)들과 함께 쿤밍까지 진출한 몽골족은 윈난의 중심 도시로 쿤밍을 키워나갔다.
몽골족이 만리장성 이북으로 물러난 명청(明淸)대에도 쿤밍은 줄곧 윈난의 행정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지켰다. 명나라 때 대선단을 이끌고 중동과 아프리카까지 항해한 환관 정화(鄭和)의 고향이 윈난이다. 청(淸)나라 만주족(滿洲族)이 만리장성을 넘어 남진할 때 ‘천하제일관’이라던 산해관(山海關)을 직접 열어준 한족 오삼계(吳三桂)는 군대를 이끌고 윈난과 미얀마 일대를 평정한다.
윈난에 소수민족이 많은 까닭도 이 같은 외부침략 때문이다. 윈난은 중국에서 소수민족이 가장 많은 곳이다. 한족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무려 51개 민족이 윈난에 살고 있다. 삼국지에서 촉(蜀)나라 승상 제갈량(諸葛亮)이 정벌을 단행한 남만(南蠻·남쪽 오랑캐)이 지금의 윈난이다. 지금의 쓰촨성(四川省)에 기반한 촉나라는 윈난과 남북으로 경계를 마주하고 있다.
특히 윈난에 사는 이족(彝族), 백족(白族), 하니족(哈尼族), 태족(泰族), 장족(壯族), 묘족(苗族) 등은 각각 인구 100만명이 넘는다. 가장 많은 이족은 479만명에 달한다. 이들은 윈난 각지에 자치구역을 형성하며 살고 있다. 청나라 말기에는 이슬람계 회족(回族)들이 반란을 일으켜 한때 윈난에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후 1949년 신중국이 세워진 후에도 인구 700만명의 쿤밍은 중국 20대 도시 중의 하나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매년 세계 꽃박람회 열려
윈난에서는 다양한 기후를 접할 수 있다. 윈난 남쪽의 ‘시솽반나(西雙版納)’에서 북쪽의 ‘샹그리라(香格里拉)’에 이르는 1000㎞의 지역에는 열대, 온대, 한대의 기후특징이 동시에 나타난다. 샹그리라는 특유의 풍광으로 관광객에게도 인기가 높다.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튼(James Hilton)이 쓴 ‘잃어버린 지평선’(1933년)에 등장하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의 배경이 바로 샹그리라다.
윈난은 꽃과 나무 등 삼림자원이 풍부하여 일찍부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깊은 협곡과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동식물군을 볼 수 있어 ‘식물의 왕국’ ‘동물의 왕국’ ‘천연자원의 보고’로 불린다. 특히 해발 1890m 높이에 있는 쿤밍은 겨울에는 온화하고, 여름에는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이상적인 기후를 자랑한다. “더할 나위없이 좋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쿤밍은 ‘봄의 도시’란 뜻의 ‘춘성(春城)’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매년 세계 꽃박람회가 열리는 쿤밍은 꽃들로 가득한 도시다. 덕분에 ‘화훼왕국’ ‘원예의 낙원’이란 명성을 얻었다. 윈난에는 약 2100여종의 관상식물이 있으며, 야생 화훼종은 2500종 이상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매년 국제 꽃박람회를 개최하는 경기도 고양시는 지난 2001년부터 쿤밍시와 자매결연을 하고 교류협력을 진행하고 있다.
19세기에는 유럽인들이 윈난에 대거 들어와서 각종 꽃들의 종묘를 채집해 갔다. 두견화, 차나무, 보춘화(報春花), 용담(龍膽), 백합(白合) 등과 같은 많은 고급 화훼종들이 윈난에서 유래됐다. 그중 두견화, 차화(茶花), 보춘화, 용담, 백합, 옥란(玉蘭), 난초(蘭花), 녹용호는 윈난의 8대 명화(名花)로 불린다. 이들 화훼 가운데 상당수는 유럽의 많은 가정에서 길러진다.
아름다운 꽃들과 따듯한 기후로 인해 윈난은 중국의 신혼부부들이 허니문 코스로 즐겨찾는 곳이기도 하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석림(石林)’과 ‘전지(滇池)’ 등 50여개의 유명 관광지는 연중 중국 전역과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특산품 푸얼차, 중국 10대 명차
-
- ▲ 중국 윈난성 쿤밍 근교에 있는 유명 관광지 ‘석림(石林)’. 200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photo 신화통신
우리 교민 가운데 일부는 쿤밍 교외에서 대단위 화훼농장을 경영하며 상당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윈난성에 사는 우리 교민들은 약 4000명으로 추산된다. 교민들 대다수는 윈난성의 성도 쿤밍에 거주하고 있다. 어학연수를 위해 윈난 소재 대학에 등록한 유학생과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 여유로운 노년을 즐기는 사람 등등 많은 교민들이 윈난에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특히 교민 가운데 상당수는 ‘푸얼차(普普 茶)’ 사업에 종사한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있는 푸얼차는 윈난을 대표하는 특산품이다. 푸얼차는 윈난성 서남부의 ‘푸얼(普茶) ’이란 지역 이름에서 유래됐다. 중국의 10대 명차(名茶) 중 하나로 꼽히는 푸얼차는 주로 귀족들이 음용하던 귀한 차종이다. 차마고도(車馬古道·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교역하던 고대 교역로)를 따라 티베트와 인도에까지 전파됐다.
푸얼차의 약리보건 효능은 푸얼차를 즐겨 찾는 많은 차애호가들과 차상(茶商)들의 주요 관심사다. 푸얼차의 약효는 지난 30여년에 걸쳐 중국, 홍콩, 한국, 미국, 일본 등의 수많은 전문가들의 연구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임상실험을 통해 “푸얼차가 고혈압 방지, 비만 억제, 심혈관질환 예방, 항방사선, 항암 기능 등에 효과가 있다”는 결론을 도출해내기도 했다.
미얀마·베트남·라오스 등과 국경
쿤밍은 서남부 내륙에 위치한 관계로 중국의 동부연해 도시에 비해 국내기업의 진출이 전무한 상태다. 이에 쿤밍시 정부에서는 최근 해외기업의 투자유치에 적극적이다. 더욱이 이상적인 투자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행정절차를 최대한 간소화하는 등 효율적인 행정처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윈난을 동남아 시장 진출 교두보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윈난은 서쪽으로는 미얀마, 남쪽으로는 베트남, 라오스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국경선만 무려 4060㎞로 중국 전체 국경선의 5분의 1가량이다. 동방의 다뉴브강이라 일컫는 란창강(瀾滄江)과 메콩강을 연결하는 선박 노선은 중국, 태국, 미얀마, 라오스 4개국을 연결한다. 란창강과 메콩강은 같은 줄기다.
윈난은 오래전부터 중국의 대외교류 통로 역할을 도맡아왔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교역통로인 남방 실크로드가 지나갔다. 그 뒤를 윈난과 티베트를 잇는 차마고도가 따라가게 된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에 밀려 충칭(重慶)까지 옮겨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는 쿤밍과 미얀마(옛 버마)를 잇는 산악도로(일명 버마루트)를 통해 연합국으로부터 군수물자와 보급품을 공급받았다.
쿤밍은 서울, 방콕(태국), 하노이(베트남), 양곤(미얀마), 싱가포르,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등 주요도시를 연결하는 200여개 항공노선을 갖고 있다. 쿤밍은 중국 산업에 있어서 동서를 연결하는 이상적인 터미널 및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현재 쿤밍에서 싱가포르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와 철도도 건설 중이다. 동남아 인접국가의 시장을 윈난과 연결시키려는 계획이다.
물론 중국 전역의 급속한 경제발전에 발맞춰 쿤밍도 부동산 가격 및 물가 상승 같은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요즘 쿤밍 시내에서는 지하철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어, 또 한번의 변화와 발전을 예고하고 있다. 이같은 변화에 편승해 현지 교민들도 사업과 투자를 확대하는 등 한 단계 진전을 기대하고 있다. 현지 교민 및 국내 한국인에게 윈난은 또 하나의 기회의 땅임을 확신한다.
후진타오·리커창… 거물 정치인 배출,
중국에서 가장 빨리 변화하는 도시
안후이성(安徽省) 허페이(合肥)
주정선 안후이성 한국상회 사무총장
과기대 등 연구소 포진 과학기술개발의 중심지
‘중국 최고 명산’ 황산 한국 관광객 북새통
|
▲ 안후이성 황산 근교의 굉촌. photo 조선일보 DB |
안후이성(安徽省)은 중국 화둥(華東)지방의 서북부에 있다. 본래 오(吳)나라와 초(楚)나라의 땅이던 안후이성은 몽골이 지배한 원(元)나라 때는 저장성(浙江省)에 속했다.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 때인 1667년에 이르러서야 안칭(安慶)과 휘주(徽州) 두 지방의 앞글자를 각각 따서 ‘안후이’란 지명이 탄생했다.
안후이성의 면적은 약 14만㎢로 중국 전체 면적의 1.5%이다. 인구는 약 7000만명으로 그중 한족이 90%가량을 차지한다. 안후이성의 성도(省都)는 인구 492만명의 허페이(合肥)다. 안후이성은 허페이를 중심으로 우후(蕪湖), 안칭(安慶) 등 22개시 44개구(區) 56개현(縣)으로 구성돼 있다.
조조·주원장·포청천의 고향
안후이성 출신들은 중국을 좌지우지해왔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의 호적상 고향이 안후이성 츠지(績溪)다.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는 리커창(李克强) 국무원 부총리는 안후이성 딩위안(定遠) 출신이다. 때문에 후진타오와 리커창은 안후이성 출신 정치세력을 일컫는 ‘안후이방(安徽幇)’으로 분류된다.
안후이성은 예로부터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하다. 춘추전국시대 정치가였던 관중(管仲)을 비롯해 장자(莊子), 삼국지의 조조(曹操)와 명의(名醫) 화타(華陀), 명(明)나라를 건국한 주원장(朱元璋)이 안후이 출신이다. TV를 통해 소개되며 ‘개작두를 대령하라’는 유행어를 남긴 판관 포청천(包靑天·포증)의 고향도 안후이성이다.
청 말기 외교를 좌우한 이홍장(李鴻章)도 안후이성 허페이 출신이다. 안후이성의 무장 군벌로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한 이홍장은 양무운동, 청일(?日)전쟁 등을 주도한 거물이었다. 이홍장은 오늘날 안후이성 출신의 정치집단을 일컫는 안후이방의 시조다. 안후이성 허페이에는 이홍장이 살던 옛집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안후이성은 또 상인(商人)으로 유명하다. 안후이성 상인을 뜻하는 휘상(徽商)은 중국을 대표하는 상인 가운데 하나다. 휘상은 산시성(山西省) 상인을 뜻하는 진상(晉商)과 ‘천하제일상인’ 자리를 두고 겨뤘다. 돈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원저우(溫州) 상인과 달리 휘상은 유교적 기풍을 바탕으로 돈을 번 다음 관직에 진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상성(商聖)’ 호설암(胡雪巖)은 안후이성 츠지 출신의 대표적 휘상이다. “돈을 벌려면 칼날에 묻은 피를 혀로 핥아야 한다”는 말을 남긴 호설암은 청말 군수품 조달을 통해 중국 상권을 평정하고 관직까지 하사받았다. 루쉰(魯迅)은 ‘중국 5000년 역사상 최후의 상인’으로 호설암을 언급했다. 후진타오 주석의 부친 후징즈(胡靜之)도 잡화상을 하며 차를 팔던 휘상 출신으로 호설암과 동향, 동성이다.
안후이성은 장강(長江)과 회하(淮河) 두 물줄기에 비스듬히 걸쳐 있다. 안후이성 동남부의 첸탕강(錢塘江) 상류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역이 장강과 회하 두 물줄기의 영향을 받는다. 회하에는 협산(峽山), 경산(慶山), 부산(浮山) 등 ‘삼협(三峽)’이 있다. 안후이성에는 중국의 5대 담수호 가운데 면적만 800㎢에 달하는 차오후(巢湖)가 있다.
영화 ‘아바타’의 배경
-
- ▲ 안후이성 구화산 화성사의 등신불. photo 조선일보 DB
안후이성 황산(黃山)은 중국 제일의 명산(名山)으로 손꼽힌다. 해발 1860m의 연화봉을 중심으로 71개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다. “황산에 오르니 천하에 산이 없더라”는 탄식이 나올 만큼 봉우리마다 전해지는 전설로 가득하다. 황산은 지난 1990년 유네스코(UNESCO)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최근에는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 ‘아바타’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안후이성 서남쪽 청양현에 있는 구화산(九華山)도 유명하다. 동남제일산으로 불리는 해발 1342m의 구화산은 계곡 속 폭포와 기암괴석,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우러진 독특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중국 지장(地藏) 불교의 성지인 구화산은 우리나라 불교 신자들이 성지 순례를 목적으로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구화산 화성사(化城寺) 육신보전(肉身寶殿)에는 신라에서 건너간 김교각(金喬覺) 대사의 등신불(等身佛)이 모셔져 있다. 신라 성덕왕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교각 대사는 1300년 전 구화산으로 건너가 지장 도량을 건설했다. 특히 김교각 스님은 입적할 때 “자신의 육신이 썩지 않거든 ‘등신불’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
세계적 태양전지 업체 선테크파워 실험장
허페이는 중국 과학기술개발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허페이에는 중국과학원 직속의 중국과학기술대학(USTC)이 있다. 중국과기대를 중심으로 100여개에 달하는 각종 고등교육기관과 연구소가 포진해 있다. 허페이 경제개발구 안에 있는 대학성(大學城·대학도시)에는 약 10만명의 고급연구인력이 과학기술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중국 최대의 태양전지 모듈 제조업체인 선테크파워(Suntech Power·尙德)의 태양전지 실험장이 허페이에 있다. 지난 2005년 뉴욕 증시에 상장한 선테크파워는 2006년 일본의 태양전지 업체 MSK를 인수하면서 세계적 태양전지 업체로 부상했다. 허페이에 있는 첨단과학기술연구단지에서는 태양광 에너지와 관련된 첨단 기술을 배양하고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중국, 그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내륙도시 허페이는 지금 도시의 얼굴을 바꾸는 작업이 한창이다. 허페이 도심은 도로, 지하철, 재개발로 건설현장을 방불케 한다. 동부해안도시 발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내륙지역에는 중앙 정부로부터 위안(元)화의 무차별 지원사격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해 허페이는 전년 대비 17.3%의 성장세를 기록했다. 이로써 허페이는 6년 연속 17% 이상의 성장세를 기록한 것이다. 지난해 허페이의 1인당 연간 주민소득도 6000달러를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허페이의 주민소득은 1만달러를 이미 돌파한 상하이, 선전 등 동부연해도시보다는 많이 뒤처지는 수치다.
대규모 경기부양책과 소비진작 정책으로 안후이성의 소비자들도 기꺼이 지갑을 열고 있다. 한국인의 시선으로 볼 때 현재 안후이성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루 하루의 고된 생활과 가난의 대물림이 이어지고 있는 ‘농민공(農民工·농촌 출신 도시 노동자)’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1970 ~1980년대를 떠올리게 한다.
반면 안후이성 중산층의 여유로운 모습은 오늘날 한국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안후이성의 중산층은 물가 등을 반영해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6000만원 정도의 연수입을 올린다고 보면 된다. 또한 고가의 수입차를 타고 쇼핑센터로 몰려가 한 번 쇼핑하는 데 수천만원씩의 명품을 쇼핑하는 일부 부유층의 모습도 눈에 띈다.
포스코·금호고속·녹십자 진출
안후이성에서는 한류 열풍도 거세다. 한국산 의류와 화장품, 신발 등 모든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한국산 제품의 인기가 절정에 이르고 있다. 그 중심에서 한국인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고조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TV 드라마다. 안후이성에서 한국산 제품의 인기가 높은 것도 TV드라마의 영향이 큰 때문으로 생각된다.
많은 한국 기업과 개인 사업자들이 안후이성 곳곳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포스코, 금호고속, 녹십자, 만도기계를 비롯해 자동차 부품업체 등 상당수 기업이 안후이성에 들어와 있다. 하이닉스의 LCD 자회사 하이디스를 인수한 징둥팡(京東方·BOE)에도 IT와 관련한 한국의 운영진 및 기술 인력이 대거 진출해 있는 상태다.
한국인도 안후이성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한대문화교류유한공사의 조성혜 교수(안후이성 한국상회 고문)는 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허페이시의 성화봉송 주자로 나섰다. 조 교수는 한·중 교육문화 교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중국 정부로부터 ‘국가우의장’이란 훈장을 받고, ‘천하안휘인’에 선정되는 등 교민사회의 자랑거리다.
또 허페이 시내에서 대형 아웃렛 매장을 경영하는 코스몰유한공사의 공성문 회장은 향후 한국인들의 서비스 산업 진출에 성공 가능성과 희망을 안겨 주고 있다. 공성문 회장은 현재 필자가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안후이성 한국상회(한인회) 회장을 맡아 한국 기업인과 교민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중국 내 한국기업 및 개인 진출의 성공사례를 모아본 결과 현지 적응과 아울러 겸손한 자세가 성공의 지름길임을 알 수 있다. 현지 생활의 어려움은 그리운 벗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 교민들은 ‘도전하는 만큼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극복해 나가고 있다.
안후이성의 특산품 선지 ‘선지(宣紙)’는 안후이성에서 생산되는 고급 종이다.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으며 색채가 아름답고 산뜻하다. 잘 부식되지 않아 마음대로 접을 수 있다. 서화용 고급명지(名紙)로 명나라 때 영락대전(永樂大典)과 청나라 때 사고전서(四庫全書) 등을 집필하는 데 사용됐다. 지금도 오랜 세월 기술이 보존돼 전해 내려온다. 두부 두부가 처음 만들어진 곳도 안후이성이다. 한(漢)나라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은 안후이성에서 세계 최초로 두부를 만들었다고 알려진다. ‘회남자(淮南子)’란 책을 남긴 유안은 한고조 유방(劉邦)의 손자다. 안후이성 회남시 팔공산에서는 매년 두부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녹차 중국의 10대 명차(名茶) 가운데 안후이성에서만 4종류의 명차가 생산되고 있다. 안후이성에서 생산되는 차로는 황산모봉(黃山毛峰), 태평후괴(太平?魁), 기문홍차(祁門紅茶), 육안과편(六安瓜片) 등이 유명하다. 한약재 안후이성은 중국 한약재의 수도로 불린다. 안후이성 일대에서 한약재를 재배하고 한약방을 경영한 것은 약 18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지금도 안후이성에는 약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약재 재배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
탄산리튬 매장량 세계 2위 중국 최대 ‘천연자원의 보고’
칭하이성 시닝
석상준 칭하이성 시닝시 홍보·경제고문
중국이 꼽은 청정도시, 여름철 내국인만 1000만명 방문
마오 시장 한국에 관심 많아… 한국도시와 교류 추진
|
▲ 시닝을 대표하는 자연자원인 소금호수 칭하이호. photo 유마디 기자 |
해발 2200m의 고산지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소금호수 칭하이호(靑海湖). 티베트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달라이라마가 유년시절 수도했던 절인 타얼스(塔爾寺)가 있는 곳. 중국 서부에 위치한 고원지대인 칭하이성(靑海省) 성도 시닝(西寧)시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성 이름에서 보듯 ‘맑은 바다’의 대표 도시 시닝은 중국이 꼽은 11번째 청정도시다. 수려하지만 때 묻지 않은 자연경관도 특징이다. 600년 전 원시림을 그대로 보존한 것 하며 산이며 바다 곳곳이 자연상태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로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내국인만 1000만명이 다녀간다 하여 ‘여름의 도시(夏都)’로 불리는 곳이다.
시닝은 차세대 자동차 원료인 탄산리튬 매장량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 염화칼륨, 마그네슘염, 카바이트용 석회암, 붕산은 중국에서도 생산량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밖에 알루미늄, 리튬, 유채유, 석유 매장량도 중국 최대 수준이다. 미래 에너지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요즘, 천연자원의 보고인 시닝에 대기업과 각국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닝은 화합의 도시다. 33개나 되는 소수 민족들은 민족 특유의 복장을 하고 시내를 활보한다. 민족의 전통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이다. ‘중국 소수민족을 연구하려면 칭하이성과 윈난성(雲南省)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곳 소수민족들은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일례로 몇 년 전 시닝을 방문해 호텔에 투숙하려는데 한국 여권을 본 직원이 방긋 웃으며 사인을 해달라고 한 적도 있다. 필자가 ‘한국인 투숙객 1호’였기 때문이다.
시닝은 북쪽으로 신장의 성도 우루무치, 남쪽으로 티베트의 성도 라싸를 잇는 주요 길목이지만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이나 해외에서 시닝을 오갈 수 있는 교통편은 많지 않은 편이다. 지금 건설 중인 고속철도가 완공되는 2012년엔 베이징에서 6시간이면 시닝에 닿을 수 있게 된다. 2012년 완공 예정인 국제공항청사가 개관하면 시닝은 중국에서 ‘황금알’을 낳는 지역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고양 등 4곳과 ‘우호도시’ 체결
마오샤오빙(毛小兵·45) 시닝 시장과 필자와의 인연은 14년 전 베이징에서 시작됐다. 필자가 베이징의 한 호텔에서 한국식당을 경영할 때였다. 마오샤오빙 시장은 자그마한 체구지만 단단한 몸을 가졌고, 예사롭지 않은 첫인상을 줬다. 당시 그의 직책은 칭하이성 경제국장이었고 칭하이성 서부광업회장을 거쳐 현재의 시장직에 이르렀다.
마오 시장은 한국에 관심이 많은, 이른바 친한파(親韓派)로 지난해 4월 시닝 시장직에 올랐다. 필자는 마오샤오빙 전 국장이 시닝 시장으로 취임한 후 5개월 만인 지난 9월 그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마오 시장은 전화를 통해 “한국과 교류를 하고 싶다. 우호도시 몇 곳을 지정해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향후 한국과의 경제·관광 분야에 역점을 두고 함께 발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아름다움과 자연환경, 깨끗한 도시 미관, 경제 발전 모델들을 보고 시닝을 한국의 대도시처럼 발전시키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필자는 시닝시의 초청으로 처음 시닝행 비행기에 올랐다. 베이징에서 항공편으론 2시간30분이면 닿을 수 있지만, 산세가 험하고 동부에 비해 낙후된 지역이라 기차로는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이었다. 비행기 창밖으로 바라본 칭하이성은 산과 사막뿐인 벌판이었다. 산골짜기에 드문드문 민가가 보였다. 하지만 칭하이성의 성도인 시닝에 근접했을 때쯤 비행기 밖으로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푸른 산 속 고층빌딩이 필자의 눈을 의심케 했다.
시닝에서 무한한 자연자원의 보고를 접한 필자는 단 한번의 방문으로 시닝에 매료됐다. 시닝에서 만난 마오 시장과도 돈독해졌다. 이는 필자가 이후 시닝시 홍보·경제 고문으로 위촉받아 한국에 시닝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시닝시는 올 4월 25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관광투자설명회를 개최했고, 동시에 한국의 4개 도시(고양·전주·경주·제주)와 ‘우호도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또 지난 8월 15일부터 7일 동안을 ‘한·중우호주간’으로 정하고 한국의 유명 가수 및 화가들을 초청한 행사를 개최했다. 마오 시장은 “시닝시는 한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준비 중이며 시닝시 공항이 국제공항으로 승격되는 대로 ‘인천~시닝’ 또는 ‘제주~시닝’ 노선을 협의해 개통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금도 필자는 한 달에 한 번씩 시닝을 방문한다. 올해는 4월에 개최된 시닝시 투자설명회, 6월 튤립축제, 8월 한·중우호행사 등에 한국인 시닝시 홍보대사로 참석했다. 특히 8월에 개최된 한·중우호행사에선 한국을 알고 싶어하는 칭하이성 중국인들이 대거 참여해 한류열풍을 실감하기도 했다. 시닝 주민들은 현장에서 한국 상품 및 한국 관광에 대해 특히 관심을 보였다.
파격조건으로 외자 유치… 한국기업 극소수
중국을 찾는 우리 사업가들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지만 정작 성공 사례가 드문 것이 현실이다. 확률은 중국의 대도시일 경우 더 낮아진다. 하지만 기회가 없는 게 아니다. 필자는 우리 사업가들이 중국의 내륙도시에 좀 더 관심을 가질 것을 권한다. 중국 정부의 ‘서부 대개발 정책’으로 서부내륙도시들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고, 세계적 거상들이 서부로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내 여러 도시가 외자 기업에 대해 특별한 혜택을 약속하고 있지만 시닝시의 파격적 혜택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시닝시는 5월 5일부터 3일간 시닝시 성남국제컨벤션센터에서 ‘국제투자유치설명회’를 열고 대대적인 한국 기업 유치에 나섰다. 당시 칭하이성 상무청 장융쥔(張永軍) 부청장은 “153개에 달하는 광산업, 제조업, 관광단지개발, 농축산업 등의 주요 투자 프로젝트와 43개 지하자원에 대한 채굴권과 탐사권 경매는 새로운 시장 개척과 지하자원 확보가 절실한 한국 기업에도 큰 매력이 될 것”이라며 “한국 기업의 성공적인 투자를 위해 성(省)정부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시닝시는 외자기업이 투자한 금액의 이자를 3년 동안 대납해주는 파격적 조건을 제시, 친환경기업에는 모든 인프라시설이 완료된 부지를 제공하고 관광산업육성을 위해 호텔, 골프장 등의 부지를 무상과 다름 없이 제공하고 있다.
아직까지 시닝에 진출한 한국기업은 하수처리시설 기업 한 곳뿐이다. 칭하이성 시닝은 중국 내 최대의 자원보고다. 앞으로 많은 기업들이 무한한 미래 에너지 잠재력을 가진 시닝의 가치를 판단하고 많은 관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
동서양이 조화 이룬 동방의 작은 파리
북방교역 교두보 한국엔 ‘기회의 땅’
헤이룽장성 하얼빈
한오수 하얼빈 한인회 부회장
격동의 동북아 근현대사 공유 역사적 흔적 곳곳에
석유 생산 중국 1위 개발바람에 도시 전체가 공사장
|
▲ ‘얼음의 도시’ 하얼빈의 트레이드마크인 ‘빙설대세계’ 겨울축제. photo 신화통신 |
한반도의 2배이자 한국의 5배. 중국 동북지역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은 왼쪽에는 다싱안링(大興安嶺), 오른쪽에는 샤오싱안링(小興安嶺)산맥이 병풍처럼 버티고 있으며 옥수수, 수수, 쌀, 콩, 감자 수확량이 연산 약 5000만t에 이르는 동북 최대의 곡창지대 동북평원을 가슴에 품고 있다.
헤이룽장성의 성도 하얼빈(哈爾濱)은 이제껏 성벽을 쌓아본 적이 없는 대평야 지대로 도시 이름은 만주어로 ‘명예’ 또는 ‘명성’, 고대 여진어로 ‘그물 말리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하얼빈은 구석기·신석기시대에 인류가 활동했던 유적과 기록을 간직하고 있다. 만주족이 세운 금(金)나라와 청(淸)나라의 발상지기도 하다. 쑹화강(松花江)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고 그물을 깁고 말리던 한적한 강변 마을은 20세기 초(1903년) 러시아가 중국동청철도(약칭 중동철도)를 부설하며 국제도시로 탈바꿈했다.
네이멍구(內蒙古) 만저우리(滿洲里)에서 하얼빈을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의 국경도시 수이펀허(綏芬河)까지 연결되는 중동철도는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지선(支線)이다. 만주횡단철도로도 불린다. 중동철도의 개통으로 하얼빈은 시베리아와 블라디보스토크, 멀게는 유럽까지 철도로 연결됐다. 이로 인해 30여개국 16만명이 넘는 외국인도 유입됐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오늘날 하얼빈은 인구 50만이 넘는 큰 도시로 번성해 동북아 지역에서 가장 부유하고 국제적 성격을 가진 도시로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됐다.
외부 사람들은 하얼빈을 일컬어 ‘동방의 작은 파리’ ‘동방의 작은 모스크바’라 부른다. 중동철도를 통해 들어온 서방문화와 기존의 동방문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하며, 현재의 하얼빈 시내 곳곳과 중앙대가(中央大街)를 관통하는 약 1.4㎞ 거리의 양쪽에서 풍겨나오는 바로크와 르네상스풍의 건축물이 주는 느낌 때문이다. 특히 중앙대가에 인접해 있는 러시아 정교회 ‘성소피아 성당’은 중동철도가 부설되고 러시아인들이 대거 이주한 후 세워진 정교회 성당으로 하얼빈에 있는 러시아 건축물 중에서도 대표적 상징물이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하얼빈은 일본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였다. 또 소련군이 1년간 점령하였고 다시 1년 뒤 중국 공산당이 하얼빈을 탈환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됐다. 때문에 하얼빈은 국적을 넘나드는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고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4개국이 가해자 또는 피해자로서 격동의 동북아 근현대사를 공유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민족 영웅의 활동무대
우리에게 하얼빈은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가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했던 독립 투쟁의 현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얼빈역 플랫폼에는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지점이 바닥에 삼각형으로 표시돼 있다.
안 의사가 자주 찾았던 자오린(兆麟)공원, 최초 의거를 계획했던 지홍차오(霽虹橋)와 차이쟈쥐(蔡家溝)역도 묵묵히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저격 후 취조를 받았던 일본 총영사관 건물은 현재 중국인 소학교로 개조돼 사용 중이다.
안중근 의사가 그토록 열망했던 조국은 독립이 되고 주권을 되찾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 유해조차 수습하지 못한 못난 후손이다. 거기다 세월이 흐를수록 안 의사의 고귀한 애국사상이 퇴색되고 잊혀져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당시 공판법정에 참여했던 영국기자 찰스 모리모가 보도한 기사 중 ‘이 세계적인 판결에서 승리자는 안중근이며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는 내용처럼 안 의사는 우리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진정한 영웅으로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얼빈 하면 빠질 수 없는 ‘731부대’ 이야기도 있다. 731부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하얼빈에 주둔시켰던 세균전 부대로 일본제국주의 잔혹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하얼빈의 남쪽 외곽인 핑팡구(平房區)에 자리하고 있으며 1936년 일본이 만주를 침공했을 때 세균전 비밀연구소로 시작된 것이다. 당시 방역급수부대로 위장하였다가 1941년에 731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731부대 사령관은 세균학 박사이자 군인이었던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중장. 부대 내부에는 바이러스, 곤충, 동상, 페스트, 콜레라 등 생물학 무기를 연구하는 17개 연구반이 있었고 각각의 연구반에선 이른바 ‘마루타’로 불리는 인간에게 생체 실험을 했다. 일제는 1936년부터 1945년 여름까지 전쟁 포로와 기타 구속된 사람 4000여명의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몽골인 등을 대상으로 각종 세균실험과 약물실험을 자행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731부대는 만행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살아있는 150여명의 마루타를 모두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곳은 전시관으로 개조되어 당시 일본군의 반인도적 만행을 보여주는 장소로 탈바꿈했다. 1층에는 생체실험 후 버려진 시체와 가족들의 울부짖음이 밀랍인형으로 전시돼 당시의 비참한 상황이 소름을 돋게 하고 깊은 충격을 주고 있으며, 2층은 세균배양과 실내·외에서 행해졌던 생체실험 과정을 적나라하게 재연하고 있다. 현재까지 공개된 마루타들의 인적 현황은 벽면 대리석에 기록돼 있다. 일제의 잔혹함과 전쟁의 참상 등 힘 없는 국가의 아픈 역사가 깊이 스며있는 곳이다.
겨울동화 같은 하얼빈 얼음축제
시베리아 쪽에서 강풍이 불어오면 본격적인 하얼빈의 겨울이 시작된다. 겨울이 되면 혹독한 영하의 날씨가 6개월(10월 중순~이듬해 4월 중순) 동안 지속되며 연중 0℃ 이하인 날만도 190일이나 된다. 연중 평균 기온이 6℃에 불과한 하얼빈의 추위로 말할 것 같으면 영하 44℃까지 내려가는 진기록을 세운 적도 있다. 때문에 하얼빈의 아파트나 일반 건물의 외벽은 남방에 비해 최소 30~50㎝ 더 두껍다. 대형 백화점이나 상점, 기타 공공건물의 출입구도 이중 유리 출입문으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출입문 밖에 추가로 두꺼운 면 가림막을 설치해 혹독한 외부 기후에 대응하기도 한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콧수염엔 고드름이 달리고, 과일가게는 과일을 상자 속에 넣어두고 두꺼운 이불로 덮어 보온상태를 유지한다. 가판 위에는 꽝꽝 언 ‘견본품’ 과일이 달랑 1개 올려져 있을 뿐이다.
빙성(氷城)에 걸맞은 한 편의 겨울동화도 이때부터 시작된다. 11월 하순에서 12월초 하얼빈을 지나는 쑹화강이 1.5~2m두께로 얼어붙기 시작하면 본격적인 하얼빈의 상징이자 겨울축제인 ‘빙설대세계(氷雪大世界)’가 시작된다. 하얼빈 겨울축제는 올해로 제26회째를 맞았으며 하얼빈 시내 외 전지역에서 진행된다.
얼음과 5색 등이 결합된 얼음조각전시, 얼음수영, 스키 등 각종 겨울스포츠가 총 결집돼 하얼빈은 거대한 축제장으로 변한다. 하얼빈 겨울축제는 캐나다 퀘백 윈터카니발, 일본 삿포로의 눈축제와 함께 세계 3대 겨울축제로 손꼽히며 3곳 중 규모가 제일 크다. 춥고 열악한 기후와 환경을 오히려 즐거운 축제와 국민 단합행사로 변화시키고 상업화한 지혜는 우리가 귀감으로 삼아 본받고 배워야할 것이다.
라일락 향기 짙은 미녀들의 도시
하얼빈의 시화(市花)는 ‘띵샹화(丁香花·라일락)’다. 해마다 5월이 되면 쑹화강 일대 스탈린공원을 비롯한 시내 공원 곳곳에 심어져 있는 수천 수만 그루의 라일락이 장관을 이룬다. 이때 라일락이 뿜어대는 향기에 전 시가지도 진동한다.
하얼빈엔 늘씬한 미녀들이 많다. 다롄, 칭다오, 항저우, 충칭과 더불어 중국에서 미녀들이 가장 많은 도시 중 한곳으로 꼽힌다. 19세기 말 중동철도를 타고 들어온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자연스럽게 이곳의 북방 중국인들과 혼혈이 된 까닭이다.
‘북방의 한 나라에 아름다운 미녀가 있어 그녀가 한 번 미소 지으니 성이 흔들리고 그녀가 두 번 웃으니 나라가 흔들린다. 나라가 망하는 일은 원치 않는 일이나 아름다운 미녀는 일생에 한번 얻기 힘드나니’.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영화 ‘연인’에 등장하는 대사다. 영화에서처럼 한 나라의 미녀는 성(省)과 나라를 흔들 정도로 막강한 경국지색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북방인들의 기질은 관료적이고, 권위적이며, 사고가 경직된 편이다. 때문에 깊이 사귀기와 일처리가 힘들지만 한번 진정한 친구가 되면 좀처럼 변하지 않고 큰힘이 되어주는 경우가 많다. 반면 동북인들은 산둥(山東)인들과 닮아 기골이 장대하고 정치인이나 군인 출신이 많으며 풍류와 멋을 아는 호연지기가 있다.
아시아나·만도기계·CJ식품 등 진출
하얼빈의 인구는 476만명(교외까지 합산하면 987만명)이며 면적은 70.86㎢로 중국 내에서 도시 면적 단위로는 가장 큰 규모다. 2009년 하얼빈의 GDP는 3258억위안(약 55조원)으로 2005년에 비해 2배나 증가했다. 연평균 성장률은 13.5%로 중국의 평균성장률(약 8%)을 훨씬 웃돈다.
하얼빈의 주력 산업은 3차 산업으로 주로 러시아와의 교류와 합작이 활성화돼있다. 2009년 대 러시아 교역량이 36억달러(약 4조원)로 그중 수입이 21억달러, 수출이 15억 달러이다. 주요 특산품 및 농산품으로는 인삼, 녹용, 모피, 버섯 등이 있고 광산자원으로는 석유, 석탄, 금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다칭(大慶)석유는 중국 총 생산량의 39%로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설탕과 석탄 생산량은 4위, 천연가스 2위, 목재 생산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얼빈은 2009년부터 시작된 1차 지하철 공사와 대규모 아파트 재개발 공사, 골목 정비사업, 도시미화사업으로 거대한 공사장을 방불케 한다. 하얼빈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 동포들은 3만6000명 정도이며 헤이룽장성 내 거주인원은 약 16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곳에 장기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은 유학생 1800명을 포함하여 약 4000명 정도이며 주요기업은 아시아나항공, 국민은행, 하나은행, 만도기계, CJ식품, 광성발전기 등이 본사 진출 전에 북방교역의 교두보로서 활동하고 있다. 기타 중소기업으로는 약 120여개 업체가 영세하게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동북과 북방지역은 사전에 철저하게 연구하고 계획하고 준비한다면 아직은 우리에게 기회의 땅이다. 중국 동북지역과 러시아를 포함한 북방지역에 대한 우리 기업들의 관심 또한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투자를 하기 전 동북과 북방지역이 가지고 있는 열악한 환경과 조건을 쉽게 생각해선 안된다. 하얼빈은 혹독한 기후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통일 한국 이후 러시아, 몽골, 유럽 등을 대상으로 하는 북방교역의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桂林山水甲天下’ 개고기 즐기는 천하절경의 도시
광시좡족자치구 구이린
박민철 구이린 한국상회 사무국장
사시사철 꽃 피고 새가 지저귀는 곳
“한국 교민 대부분 관광업 종사” 광시사범대에 한국어과도 개설
|
▲ 중국 광시좡족자치구 구이린의 한 농민이 논에서 일을 하고 있다. photo 로이터 |
‘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 구이린(桂林)의 산수가 천하의 으뜸이라는 말이다. 중국어를 전공한 필자가 구이린에 들어서는 순간 제일 먼저 뇌리를 스치는 문구가 바로 이것이었다. 처음 구이린에 간 건 한겨울인 2월 초다. 베이징(北京)과 톈진(天津)에서 오랜 기간 주재했던 필자로서는 중국 북방의 춥고 혹독한 날씨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구이린 주위의 산과 들은 여전히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중국 북방과는 달리 싱그럽고 맑은 공기에 한껏 심호흡을 했던 기억도 난다. 구이린의 산은 우선 한국의 산과는 생김새부터 다르다. 산이 대부분 뾰족하게 솟아올라 있어 마치 무협지에서 협객(俠客)들이 무술을 연마하고 도를 닦던 곳을 연상케 했다.
구이린에는 리강(?江)을 비롯해 곳곳에 물이 흐르고 있어 대자연의 풍요로움과 포근함을 느낄 수가 있다. 현지에 정착해야 할 필자로서는 이러한 산과 들, 물과 파란 하늘이 한국의 아름다운 경치를 떠올리게 했다. 또 한편으로는 이국적이면서도 포근함과 풍요로움을 주는 구이린의 풍광은 낮선 곳에 대한 어색함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게 했다.
한겨울에도 녹음이 있고 꽃이 피어있는 것은 구이린의 특징이다. 한 나무에서 낙엽이 지고 새싹이 돋아나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때문에 ‘사시사철 꽃 피고 새가 지저귀는 곳’이란 문구가 있기도 하다.
28개 다민족 공존… 개고기 즐겨
구이린은 기원전 214년 진(秦)시황제가 계림군을 설치한 후부터 행정구역상의 지명이 됐다. 구이린은 계수나무가 많아 계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계수나무 꽃인 계화(桂花)는 봄과 가을에 안개꽃 모양으로 피어난다. 그 향내가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하다. 계화향을 채취하여 향수를 만들면 그 어떤 향수도 비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구이린은 인구 5000만명인 광시성(廣西省·공식 명칭은 광시좡족자치구)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오랫동안 해왔다. 현재의 성도는 남쪽의 난닝(南寧)이다. 광시성 정부는 국민당 정부 시절인 1913년 난닝으로 갔다가 1936년 중일전쟁 이후 돌아왔으나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 집권 후인 1950년 다시 난닝으로 옮겨갔다. 구이린은 여전히 광시성에서 대외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도시다.
인구 500만명의 구이린은 다민족이 공존한다. 좡(壯)족, 먀오(苗)족, 야오(瑤)족, 둥(?)족 등 28개 소수민족 70만명이 살고 있다. 구이린 사람들은 남방 사람들처럼 전반적으로 체구가 작고 코가 납작한 편이다. 피부는 북방에 비해 습기가 높아서인지 대체로 좋은 편이다. 풍요로운 자연과 더불어 사는 현지인들의 성격은 순박하면서 낙천적이다.
구이린 사람들은 자연에서 채취한 음식을 즐긴다. 쌀과 옥수수가 주식이다. 한 가지 특이점은 개고기를 즐겨 먹는다는 것이다. 한국은 여름에 개고기를 즐기는 반면 이곳에선 겨울에 개고기를 즐겨 찾는다. “발열식품이기 때문에 추운 겨울에 영양과 열량 보충 차원에서 즐긴다”는 현지인의 설명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광시성은 전체가 소수민족인 좡족자치구로 지정돼 있다. 인구 1800만명의 좡족은 중국에서 한(漢)족 다음으로 큰 민족이다. 최근 개발 바람으로 좡족 사이에서도 빈부격차가 두드러진다. 좡족 가운데 일부는 토지 임대로 인해 땅부자가 됐다. 하지만 일부는 도시화 물결에 휩쓸려 농촌을 떠나 도시 저소득층으로 전락하는 경향도 엿보인다.
중국의 대동남아 교역 중심지
구이린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30명 정도로 매우 적다. 광시좡족자치구의 한국인은 대부분 성도인 난닝에 모여산다. 난닝의 한국인 수는 500명 정도로 추정된다. 구이린이 관광명소인 만큼 관광업에 종사하는 한국인이 많다. 나머지는 개인사업가와 유학생 그리고 종교인이다.
구이린은 지역적으로 아직 한국과의 교류가 적은 편이다. 진출한 업체는 개인 기업을 포함해 10여개 정도다. 짧게는 5~6년에서 길게는 10년 전에 진출했다. 이 중 대형버스를 생산하는 대우버스와 쉐라톤구이린호텔(옛 구이린대우호텔), 아시아나항공과 락앤락이 대표적이다.
요즘 몇몇 광물 관련 기업들이 진출한 것 외에는 아직 한국 기업들의 진출이 더딘 편이다. 류저우(柳州), 베이하이(北海), 우저우(梧州) 등지에는 전자회사, 활 공장 등 몇몇 중소기업들이 진출해 있다. 향후 한국 기업으로 S그룹, D그룹, C그룹 등 몇몇 대기업이 친저우(欽州)로 진출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남과 가까운 친저우는 중국의 대(對)동남아 교역 중심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친저우는 항만을 끼고 있는 베이하이와도 이어진다. 이로 인해 친저우에는 향후 한국 기업들의 진출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개발 중인 도시인지라 도로와 철도, 항만 같은 사회간접자본(SOC)이 많이 부족한 상태다.
최근 개발이 진행됨과 동시에 이제서야 광시좡족자치구에도 한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한국 드라마가 주목을 받으면서 광시성 사람들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특히 구이린에 있는 광시사범대학에는 한국어과도 개설돼 있다. 구이린 광시사범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한국인도 있다.
구이린 광시사범대는 한국과 자매결연을 하고 있다. 한국 유학생들도 광시사범대에 교환학생으로 들어와 공부하고 있다. 광시사범대의 한국어과에 재학 중인 중국 학생들은 졸업 후 한국으로의 진학이나 취업을 희망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중국 학생들도 상당수다.
하지만 간혹 대중매체나 인터넷을 통해 나오는 한·중 간 비방성 기사나 댓글들은 교민사회의 두통거리다. 비방성 기사나 댓글로 인해 현지에 있는 한국인이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종종 벌어진다. 따라서 가능하다면 우리나라 TV나 신문 등 언론에서 중국이나 중국사람들을 싸잡아서 비방하는 일은 자제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다.
새벽닭 울음이 3개국 깨운다
지린성 훈춘 동북아 관문으로 급부상
김동파 흑룡강신문 기자
北 나진항 통하는 관문도시 글로벌 도시로 부상하면서 부동산 붐
외자기업에 세제 혜택 한국 대기업 속속 진출
|
▲ 훈춘에서 러시아로 들어가는 인원과 차량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훈춘 세관의 모습. 한글 인사말이 독특하다. photo 연합뉴스 |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도시 훈춘(琿春)은 만주어로 ‘변경(邊境)’을 뜻한다. 5145㎢의 면적에 인구 26만명(이 중 중국 동포 39.6%)인 소도시지만 지린성에서 유일하게 항구를 통한 바닷길을 열 수 있어 요충지로 중요하다.
훈춘은 1992년 제1진 대외개방 도시가 됐다. 당시 중국 국무원은 국가급 변경국제합작구 14곳을 선정했는데, 이에 포함됐다. 변경국제합작구란 덩샤오핑(鄧小平)의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 후속조치로 소수민족이 많이 거주하는 변경(국경)지역의 정치·경제 안정을 위해 기획됐다. 이를 계기로 훈춘은 개발 열풍 대열에 들어서게 됐다.
특히 1995년 전후로는 남북한이 좋은 관계였고, 일본과 러시아 역시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훈춘은 이들 나라를 연결하는 동북 지역의 통로가 되어 각국과의 교역이 활발했다.
거기에 지난 2009년 8월 발표된 국무원의 ‘중국 두만강 지역 합작개발발전전망계획요강’(이하 계획요강)으로 훈춘시의 앞날은 더욱 밝아질 전망이다. 이 ‘계획요강’은 창춘(長春)~지린(吉林)~투먼(圖們) 등 소위 창지투(長吉圖) 지역 개발이 골자다. 훈춘이 신흥 국경개방형 도시로 면모를 바꾸면서 근해 통상구(通商區)와 국제 관광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다. 통상구란 중국어로 호시무역구(互市貿易區)를 뜻하며 국경무역을 위한 개방 지역을 지칭한다.
중앙정부의 정책으로 한산하던 소도시 훈춘에는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현재 엄동설한인데도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이 방문 중이다. 공장을 지으려는 사람, 무역하는 사람, 북·중·러 삼국을 넘나들며 관광상품을 개발하려는 사람, 그리고 이런 수요들을 겨냥한 부동산 개발이 활기차게 일어나고 있다. 훈춘엔 오늘도 러시아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으며, 중국 내국 관광객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나진항 임대, 북한 바닷길 열려
훈춘에서는 ‘새벽닭 우는 소리에 3국을 깨우고, 개 짖는 소리에 3국이 놀란다’는 말이 전해져 왔다. 도시의 동남쪽은 러시아 연해주, 서남쪽은 두만강을 사이로 북한과 접해 있어 나온 말이다.
그중에서도 3국의 접경을 가장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훈춘의 팡촨(防川) 풍경구다. 북한·중국·러시아 3개국 풍경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새벽닭과 개 짖는 소리에 3국이 들썩인다’는 말도 이곳 팡촨에서 온 말이라 한다. 훈춘시는 야생호랑이 자연보호구와 ‘지린성 8대 경치’ 가운데 하나인 팡촨에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온힘을 쏟고 있다. 훈춘시 여유(관광)국에 따르면 지난 1월부터 7월까지 팡촨을 방문한 관광객은 약 5만명에 달한다.
동북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인 훈춘엔 세계 각지를 연결하는 4개의 국가급 통상구가 있다. 중국 유일의 현급시(縣級市·행정구역 단위) 통상구를 갖춘 훈춘의 통관 능력은 연간 약 210만t. 사방 200㎞ 지역에 러시아와 북한을 주로 겨냥한 국경무역 개방지역인 통상구만도 10개에 달한다. 훈춘통상구는 비자발급과 통관수속 업무도 하고 있다. 지난해 7월 1일부터는 대(對)북한 관광도 본격화했다. 2010년 상반기 훈춘 각 통상구의 수출입화물량은 약 8만6185t. 훈춘의 유동 인구도 연간 14만3475명에 달해 전년도 같은 기간 대비 23.4% 증가했다.
무역량도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두 배에 가까운 성장세를 보였다. 훈춘통상구에 따르면, 2010년 상반기 훈춘시 수출가공구를 통해 이뤄진 무역 규모는 약 7만2000t, 교역액은 1억387만달러에 이른다. 무역량 가운데 수출은 4만t(6631만달러), 수입은 3만2000t(3756만달러)으로 수출이 우세다.
또 오는 2016년 완공을 목표로 100억위안(약 1조7300억원)을 투자해 건설 중인 동북아국경무역센터에는 향후 관광과 국제교육시설, 산업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동북아국경무역센터가 완공되면 한국과 일본, 홍콩 등으로부터 외자유치를 위한 외국인 전용산업단지 조성에 나선다. 이곳이 조성되면 훈춘은 다시 한번 동북아 물류기지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북한과의 바닷길도 본격적으로 열린다. 훈춘은 지역 내 4개의 국가급 통상구 중 한곳인 췐허(圈河)통상구를 이용, 북한 나진항을 10년간 임대하는 계약을 체결해 화물 운수의 바닷길도 열 예정이다. 이는 동북 3성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일본이나 상하이, 홍콩으로 보낼 수 있는 해상 경로를 확보하게 돼 경제발전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훈춘 췐허통상구를 통하면 북한의 원정리·나진항을 거쳐 상하이·닝보(寧波) 등의 항구에도 닿을 수 있게 된다.
두만강 개발 기대감에 들썩
국제도시의 꿈을 품은 훈춘의 도약은 도로·철도, 바닷길을 정비해 초보적 대외교통망을 형성하면서 구체화됐다. 거기에 2009년 국무원이 발표한 ‘계획요강’에 따라 훈춘이 대외개방과 동북아국제협력개발의 창구도시로서의 역할을 하게 됐다. 이에 따라 훈춘 일대의 부동산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훈춘 일대의 주택가격은 주민은 물론이고 외지인들이나 외국인이 합세하면서 치솟고 있다. 2008년 ㎡당 2000위안(약 35만원)이던 훈춘시의 일반주택 가격은 2010년 2700위안으로 상승했고, 고급주택의 경우 3000위안 이상으로 급등했다. 훈춘시 부동산국에 따르면 2003년 3월 말까지 훈춘에서 주택소유증(집문서)을 발급받은 외국인은 모두 49명에 달한다. 이 중 러시아인이 42명, 한국인이 3명이었고, 북한(2명), 미국(1명), 일본(1명)인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주택을 구매하고도 주택소유증 수속을 밟지 않은 외국인들이 많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고 부동산 업계 관계자들은 전했다.
국무원의 ‘계획요강’에 따라 해외 기업들도 훈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훈춘국경경제합작구는 내자기업과 외상투자기업을 대상으로 우대정책을 펼치고 있다. 기업의 소득세를 15% 세율로 징수하기로 하는가 하면 10년 이상 경영한 외상투자기업에 대해서는 이윤을 창출한 첫해부터 두 번째 해까지 기업 소득세를 면제해주고, 3년에서 5년까지는 50%만을 징수하는 등 각종 혜택을 제시하고 있다.
훈춘은 주변국과 협력하여 훈춘의 기반시설과 무역 파트너 관계를 구축해 국외자원 개발가공, 국제물류, 다국적 관광 등 훈춘을 국제화의 창구로 만든다는 야심찬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훈춘의 개방정책에 따라 한국 대기업들도 훈춘에 속속 진출 중이다. 그 대표적 예로 한국의 포스코는 지난 7월 지린성과 한국공업단지 건설을 포함한 각 분야에 걸친 투자협력 관련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훈춘과의 상생을 위해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땅에는 항저우가 있다”
저장성 항저우
알리바바 회장 등 ‘저장재벌’들이 중국 경제 주물러
이동훈 기자
|
▲ 눈으로 뒤덮인 항저우 서호. 호수 위 단교(사진 가운데)에서 눈이 녹아 내리는 ‘단교잔설’은 ‘서호 10경’ 중 하나다. photo 신화통신 |
“위(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아래(땅)에는 쑤·항이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
중국인들이 항저우(杭州)를 가리킬 때 항상 언급하는 말이다. 저장성(浙江省)의 성도(省都) 항저우(인구 810만명)는 장쑤성(江蘇省)의 쑤저우(蘇州)와 함께 수려한 풍광으로 1, 2위를 다투는 도시다.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 때 중국 각지를 여행한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도 ‘동방견문록’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진귀한 도시”라고 항저우를 격찬했다.
지난해 12월 31일 항저우역에 들어온 고속열차의 문이 열리자 기차역 승강장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역 대합실은 관광상품과 호텔을 선전하는 호객꾼들로 넘쳐났다. 지난해 10월 시속 350㎞의 후항(?杭·상하이~항저우)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200㎞ 떨어진 양 도시는 45분 거리로 좁혀졌다. 신설된 상하이 훙차오(虹橋)역에서는 항저우행 열차가 20분에 한 대꼴로 출발했다.
항저우역을 빠져나온 관광객들이 직행하는 곳은 서호(西湖)다. 항저우 한가운데 있는 서호는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겨울철 눈으로 뒤덮인 서호를 호숫가 옆 뇌봉탑(雷峰塔)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일품이다. 뱃사공들이 노를 젓는 서호 주변에는 결혼 사진을 찍으려는 신혼부부들로 가득했다. 항저우는 중국 신혼부부들이 즐겨찾는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서호 옆 레스토랑들이 밀집한 ‘서호천지(西湖天地)’는 연말과 1월 1일 원단(元旦)을 맞이해 가족 친지들과 함께 외식을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식당을 찾은 손님들이 주로 시키는 요리는 ‘동파육’과 ‘거지닭’ ‘시후추위(西湖醋魚)’다. 시후에서 잡아올린 초어(草魚)를 새콤달콤하게 쪄낸 ‘시후추위’와 연꽃잎에 진흙을 발라 구워낸 닭인 ‘거지닭’은 항저우를 대표하는 요리다.
항저우의 또 다른 대표요리인 ‘동파육’은 중국 북송(北宋) 때의 정치가이자 문인인 소식(蘇軾)이 만들어낸 요리다. 항저우 지방관으로 좌천된 소식이 바둑을 두다 찜통 위에 올려둔 돼지고기를 그만 깜박한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쪄낸 돼지고기 특유의 묵직하고 달달한 맛이 일품이었다. 동파육이란 말도 소식의 호인 ‘동파(東坡)’에서 비롯됐다.
동파육 외에도 항저우 곳곳에는 소식의 흔적이 남아있다. 서호를 가로지르는 제방의 이름도 ‘소식이 쌓은 제방’이란 뜻의 ‘소제(蘇堤)’다. 서호도 ‘호수의 아름다움이 서시(西施)의 미모에 비견된다’하여 소식이 붙인 이름이다. 오(吳)나라를 망하게 한 서시는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이다. 연중 물을 머금고 있는 서호로 인해 항저우는 피부미녀들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중국 10대 명차 ‘용정차’ 주산지
수(隋)양제가 만든 경항(京杭·베이징~항저우) 대운하의 시종점인 항저우는 오래전부터 상업과 무역이 발달했다. 항저우를 중심으로 한 저장(浙江)상인들은 차를 내다팔며 부를 축적했다. 중국의 10대 명차 가운데 하나인 용정차(龍井茶)의 주산지도 항저우다. 용정차는 항저우 교외에서 딴 찻잎과 호포천(虎?泉)에서 나온 물로 끓여낸 차를 최상품으로 친다.
항저우에는 ‘상성(商聖)’ 호설암(胡雪巖)의 옛 집도 남아있다. 호설암은 청(淸)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혼란을 틈타 군상(軍商)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올린 거상(巨商)이다. 호설암은 본래 안후이(安徽)성 츠지(績溪) 출신의 휘상(徽商·안후이성 상인)이지만 항저우와 상하이 등지에서 전장(錢莊·금융기관의 일종)을 운영하며 무역업에 종사해 거부(巨富)를 축적했다.
호설암의 뒤를 잇는 중국 최대의 갑부도 항저우 사람이다. 항저우 출신의 쭝칭허우(宗慶後) 와하하(娃哈哈) 회장은 물과 음료수 배달로 시작해 13억 중국의 드링크 시장을 평정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전형적인 저장상인인 쭝칭허우 회장은 지난해 개인재산 800억위안(약 14조4000억원)으로 후룬리포트가 선정한 중국 최고의 부호로 선정되기도 했다.
중국의 부동산 가격을 밀어올리는 것도 저장상인의 힘이다. 특히 저장성 남부에 있는 원저우(溫州) 상인들은 단체로 관광버스를 타고 중국 전역을 누비며 아파트와 빌딩을 매입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또 항저우 바로 남쪽의 이우(義烏)는 ‘소(小)상품의 천국’으로 불리는 곳이다. 라이터, 단추, 바늘, 액세서리 등 각종 상품을 전세계로 공급한다.
오늘날 상하이(上海)를 금융중심지로 만든 사람들도 저장재벌들이다. 하지만 저장재벌들의 전성기는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집권기였다. 항저우 인근 닝보(寧波) 출신인 장제스는 장(蔣), 쑹(宋), 쿵(孔), 천(陳)씨의 ‘4대 가족’들을 중심으로 권력과 재력을 결합시켜 저장재벌 전성시대를 열었다. 결국 오늘날 대만의 경제력도 저장재벌들이 만들어낸 셈이다.
시진핑도 저장성 당서기 출신
한편 최근에는 IT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움직임도 보인다. 중국 최대의 B2B사이트 알리바바(阿里巴巴)와 인터넷 오픈마켓 타오바오왕(淘?網)을 이끄는 알리바바그룹 마윈(馬云) 회장 역시 저장상인이다. 알리바바그룹의 본사는 저장성 항저우다. 항저우 출신의 마윈 회장은 한때 항저우 서호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통역과 관광가이드를 하기도 했다.
마윈은 항저우 서호변에서 ‘서호논검(西湖論劍·서호에서 검을 논한다)’이란 IT 포럼도 개최한다. 서호논검은 신필(神筆) 김용(金庸)의 무협소설 ‘화산논검’에서 차용한 말이다. 마윈은 김용의 팬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김용의 무협소설에는 항저우가 종종 배경으로 등장한다. 김용의 베스트셀러인 ‘사조영웅전’ ‘의천도룡기’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한편 저장성 전성시대는 또 한번 열릴 예정이다. 차기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로 유력시되는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은 저장성 당서기 출신이다. 시진핑 부주석은 지난 2002년부터 2007년까지 항저우에서 저장성장, 저장성 당서기로 근무했다. 항저우에서 경력을 쌓은 시 부주석은 이후 상하이 당서기를 거쳐 이너서클인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회에 진입했다.
시진핑 부주석은 항저우 당서기 시절 항저우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의 복원을 승인한 바 있다. 서호변에는 한때 김구 선생이 머물던 임정청사가 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현 루쉰공원) 의거 직후 김구 선생을 비롯해 임정 요인들이 1932년부터 1935년까지 머물던 곳이다. 항저우 임정청사는 2007년 복원돼 한국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악비 금과의 결전 주장하다 옥사한 남송의 장군 항저우의 옛 이름은 임안(臨安)이다. 부유했지만 문약했던 남송(南宋)은 항저우를 수도로 삼았다. 거란족의 요(遼)나라와 여진족(만주족으로 개명)의 금(金)나라에 의해 황허(黃河) 유역의 허난성(河南省) 카이펑(開封)에서 밀려난 남송은 장강(長江) 이남의 항저우로 수도를 옮겼다. “위에 천당이 있다면 아래에 쑤·항이 있다”고 처음 읊은 사람도 남송 때의 시인 범성대(范成大)다. 항저우를 찾는 중국인들은 서호 옆에 있는 악비(岳飛)의 무덤 ‘악왕묘’에서 ‘진충보국(盡忠報國·충성을 다해 국가에 보답함)’이란 말을 되새긴다. 등에 ‘진충보국’이란 문신을 새긴 채 전장(戰場)에 나섰다는 악비는 중국의 이순신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금나라에 맞서 싸울 것을 주창한 악비는 금과의 화친을 주장한 간신 진회(秦檜)에 의해 옥사당한다. 악비의 무덤 앞에는 쇠창살에 갇힌 채 무릎을 꿇고 결박당한 진회의 동상이 놓여있다. 악왕묘를 찾는 중국인 관광객들은 진회의 동상에 가래침을 뱉고 지나간다. 하지만 풍광이 수려한 항저우에 수도를 둔 남송은 일찍이 멸망의 길을 걸었다. 이후 남송의 멸망에서 교훈을 얻은 중국 역대 정권은 북방 이민족과 대치한 만리장성 이남의 베이징에 수도를 두는 전통을 확립했다. |
6개 왕조가 수도로 택한 황도
장쑤성 난징
이동훈 기자
|
▲ 난징 자금산에 있는 쑨원의 묘역 ‘중산릉’을 찾은 대만 국민당 고위 인사들. 신해혁명을 일으킨 쑨원은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로부터 중국의 국부로 추앙받는다. photo 로이터 |
1월 1일 원단(元旦)을 맞이해 중국 난징(南京)의 ‘진회하(秦淮河)’는 붉은색 등불과 용장식으로 불야성을 이뤘다. 난징의 청계천 격인 진회하 일대는 난징의 최대 번화가 중 하나다. 십리(十里)에 걸쳐 상가들이 늘어서 있다 해서 십리진회(十里秦淮)라고도 불린다. 화재 위험으로 시내에서 폭죽사용은 금지됐지만 간간이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려나왔다.
장쑤성(江蘇省)의 성도인 난징(인구 770만명)은 황도(皇都)다. 난징은 베이징(北京), 시안(西安), 뤄양(洛陽)과 함께 중국의 4대 고도(古都) 중 하나다. 6개 왕조가 난징을 수도로 삼았다. 중국 도시 가운데 ’경(京)‘자가 붙는 도시는 베이징과 난징 두 곳뿐이다. 난징을 수도로 삼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권은 베이징의 이름을 베이핑(北平)으로 바꿔 불렀다.
난징의 옛 이름은 건업(建業)이다. 난징이 처음 수도로 데뷔한 것은 삼국지에 나오는 오(吳)나라의 손권(孫權)이 건업을 수도로 삼으면서부터다. 손권이 거닐었다는 석두성(石頭城)과 사자산(獅子山)은 누렇게 넘실대는 장강(長江)을 마주하고 서있다. 난징을 동서로 관통하는 장강은 대형 선박이 오고갈 만큼 수량이 풍부하고 폭이 넓다.
오나라의 손권은 장강을 방패막이로 삼아 조조(曹操)의 위(魏)나라와 대치했다. 하지만 오늘날 장강은 천혜의 방어막이 아니라 난징의 주요 수상 교통로로 기능하고 있다. 바다처럼 너른 장강으로 인해 난징은 내륙도시지만 항만을 갖고 있다. 난징항은 중국에서 가장 큰 내륙항이다. 장강 위에는 난징과 상하이를 오가는 대형 선박들이 즐비하다.
주원장과 쑨원의 묘
장강 위에는 길이만 6.7㎞에 달하는 장강대교가 놓여있다. 지난 1968년 중국 독자 기술로 건설한 장강대교는 한때 장강에서 가장 긴 다리란 명성을 갖고 있었다. 장강을 끼고 있는 난징은 겨울이면 삭풍이 몰아친다. 반면 여름이면 장강의 습도가 더해져 난징은 화로를 방불케 한다. 난징은 충칭(重慶), 우한(武漢)과 함께 중국의 3대 화로로 불린다.
난징의 또 다른 상징은 육중한 성벽이다. 북쪽으로는 장강(長江)이 넘실거리고 동·서·남쪽으로는 커다란 성벽이 도시를 에워싸고 있다. 지금도 시 외곽으로 가려면 성벽 아래를 통과해야 한다. 벽돌로 쌓아올린 성벽의 높이와 두께는 상상을 초월한다. 난징시 남쪽 중화문(中華門) 성벽에는 말을 탄 채 성벽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마도(馬道)도 놓여져 있다.
역대 제황(帝皇)들의 묘도 성벽으로 둘러싸인 난징에 몰려있다. 난징시 외곽 자금산(紫金山)에는 중산릉이 있다. 중국의 국부인 쑨원(孫文)의 묘소다. 신해혁명(1911년)을 일으켜 전제군주제를 폐지한 쑨원이지만 그의 묘역은 중국 어느 황제의 능묘보다 커다란 규모를 자랑한다. 쑨원의 시신이 안치된 한백옥(漢白玉) 관 위로는 국민당의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보인다.
쑨원이 묻혀있는 난징 자금산은 중국 최고의 명당으로 불린다. 간혹 산에서 황제의 색깔인 보라색(紫色) 기운이 뻗쳐나온다고 한다. 중산릉 바로 옆에는 명(明)나라를 연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묘도 있다. 한 산등성이에 시대를 달리하는 최고권력자 2명이 묻혀 있는 셈이다. 명 태조 주원장은 건국 당시 베이징에 수도를 둔 몽골족의 원(元)나라에 맞서 일어나면서 난징에 수도를 두었다.
“귀신들이 많은 도시”
황제의 기운으로 인해 청(淸)나라 말기 중국 남부를 유린한 태평천국(太平天國)이 도읍으로 삼은 곳도 난징이다. 난징에 수도를 둔 태평천국은 난징을 천경(天京)이란 이름으로 바꿨다. 태평천국의 난이 진압되면서 난징은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 난징 곳곳에는 아직도 태평천국의 수뇌부들이 실제 사용하던 집무실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후 난징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때 다시 수도로 태어난다. 난징시 한복판에는 쑨원과 장제스가 머물렀던 총통부(總統府)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중국 공산당은 국공내전에도 불구 장제스의 유적을 그대로 보존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때문에 난징은 중국에서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보다 장제스의 흔적이 더 많이 남아있는 흔치않은 도시다.
명당이라는 난징은 중국에서 ‘억울한 귀신들이 가장 많은 도시’란 별명도 갖고 있다. 태평천국의 난 때 벌어진 천경보위전(난징방어전)을 필두로 중·일전쟁 때 일본군과의 난징전투, 국공내전 때 난징전투 등 수없이 많은 전투를 목격했다. 난징시 한복판에는 중·일전쟁 때 무려 30만명이 학살당했다는 대학살의 현장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 벽에는 ‘300000’이란 숫자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난징대학살 당시 학살당한 사람 수를 나타낸 것이다. 곡소리가 울리는 난징대학살 기념관에는 당시 사망자들의 유골이 그대로 놓여져 있다. 흙 속에 묻혀있는 유골들은 당시의 처참한 광경을 재현한다. 난징의 필수 방문 코스인 이곳 기념관에서 일본말 사용은 절대 금물이다.
이 밖에 중화문 남쪽 우화대(雨花台)에는 국민당에 의해 공산당원들이 처형된 곳으로 지금은 혁명열사능원으로 조성돼 있다. 1949년 국민당을 대만으로 내몰고 정권을 잡은 중국 공산당이 우화대에 초대형 기념관을 만들었다. 공산당 유적지 관광을 뜻하는 ‘홍색(紅色)관광’의 필수코스로, 장제스의 흔적들로 도배돼 있는 난징에서 흔치 않은 곳이다.
LG전자 공장 명성… ‘LG路’도 있어
난징의 대표기업은 쑤닝(蘇寧)전기다. 가전유통업체인 쑤닝은 베이징 기반의 궈메이(國美)와 함께 가전유통시장을 남북으로 양분하고 있다. 최근 궈메이가 황광위(黃光裕) 회장의 구속에 이은 경영권 분쟁으로 주춤하는 사이 쑤닝은 사세를 키우고 있다. 쑤닝의 장진둥(張近東) 회장은 개인 재산 350억위안(약 6조3000억원)으로 후룬리포트가 선정한 부호순위 7위에 올라있다.
1963년 난징에서 태어난 장진둥 회장은 난징사범대학(중문과)을 졸업하고 지난 1990년 쑤닝전기를 창업했다. 에어컨 판매대리상으로 출발했으나 회사를 키워나가 중국 가전유통시장에서 궈메이와 함께 1, 2위를 다투는 기업을 만들어냈다. 지난 2009년에는 일본의 소매가전 판매업체인 라옥스(Laox)의 지분을 사들여 최대주주로 떠올랐다.
한국기업으로는 LG전자와 금호타이어, 금호석유화학, 코오롱 등이 난징에 생산공장을 두고 있다. 특히 LG전자는 난징시의 대표 한국기업으로 명성이 높다. 난징시 북쪽에는 ‘LG로(路)’라는 지명이 있을 정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1935년부터 1937년까지 한때 난징에 머물렀다.
난징과 상하이 경제는 상하이, 정치는 난징 오랫동안 수도로 군림했지만 난징 사람들의 상하이(上海)에 대한 콤플렉스는 숨길 수 없다. 난징은 줄곧 수도 지위를 유지했으나 경제력에서는 상하이에 늘 압도당했다. 난징을 수도로 삼은 장제스 국민당 정부도 난징을 정치 수도로 두고, 상하이에 경제 수도를 두었다. 공교롭게도 상하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의 이름은 ‘난징루(南京路)’다. 지난해 12월 개관한 난징에서 가장 높은 츠펑(紫峰)타워(높이 450m) 역시 상하이 국제금융센터(높이 492m)보다 42m가량 낮다. 때문에 츠펑타워는 상하이 국제금융센터에 이어 중국 대륙에서 두 번째로 높은 빌딩이란 타이틀에 만족해야 했다. 난징의 장강대교도 최근 개통된 상하이 장강수교(하저터널, 총길이 25.5㎞)에 장강 최장의 다리란 타이틀을 넘겨줬다. 양 도시 간 교류는 빈번하다. 지난해 7월 후닝(?寧·상하이~난징)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양 도시 간 거리는 73분으로 좁혀졌다. 시속 350㎞의 고속열차는 10여분에 한 대꼴로 난징과 상하이를 오간다. 상하이를 출발한 기차는 난징을 거쳐 베이징까지 올라간다. 징후(京?·베이징~상하이)철도의 중간역인 난징역은 공항과 같은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
“자본주의를 알고 싶으면 원저우로 가라”
저장성 원저우
이동훈 기자
“10명 중 9명이 사장”
도시 전체가 시장통
부동산 투기의 대가들 제주도 투자에 최근 관심
|
▲ 장신다오에서 바라본 원저우를 가로지르는 오우강 풍경. 사진 우측이 원저우 시내다. photo 이동훈 기자 |
지난 1월 31일 시속 250㎞로 달리던 고속열차 허셰호(和諧號)가 원저우(溫州)에 가까워지자 열차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원저우 사람들이 집값을 다 올렸어” “원저우 아이들은 중학교만 졸업해도 장사를 해” 하는 이야기였다. 상하이 홍차오(虹橋)역을 출발한 열차가 4시간30분 만에 원저우에 닿자 춘절(春節·음력 설)을 맞아 선물꾸러미를 손에 든 승객들이 일제히 내렸다.
원저우남역 플랫폼에는 ‘상도온주(商都溫州)’라는 네 글자가 붙어있었다. ‘상도(商都·상업의 수도)’라는 말을 실감케 하듯 원저우 시내에서 한 시간여 떨어진 원저우남역에는 각종 호객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기차역 앞에서는 택시 기사들과 곧바로 흥정이 벌어졌다. 일부 승객들은 행선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팀을 짜 가격을 깎느라 정신이 없었다.
원저우 상인은 중국의 유대인
저장성(浙江省) 동남부에 있는 인구 807만명의 항구도시 원저우는 중국의 상업 수도다. 중국의 유대인이라 불리는 원저우 상인은 진상(晉商·산시성 상인), 휘상(徽商·안후이성 상인) 등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상인이다. “중학교만 졸업해도 장사를 한다”는 한 열차 승객의 말처럼 원저우 시내 잡화점에는 코흘리개 아이들이 가게를 보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진상과 휘상이 정치권력과 결합해 부를 축적하는 스타일이라면 원저우 상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부를 축적한다. 예부터 “못 버는 돈이 없다”고 알려진 원저우 상인들이 부를 축적한 방식은 상하이 푸둥(浦東)과 같은 중앙정부의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가 아닌 자영업을 통해서였다. “10명 중 9명이 사장”이란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곳도 원저우다.
원저우남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1시간가량 이동해 찾은 원저우 시내. 원저우 시내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동대문 시장을 방불케 했다. 철거와 재개발로 인한 흙먼지로 시내는 어수선했지만 빼곡히 자리잡은 크고작은 점포에서는 갖가지 소(小)상품들을 팔고 있었다. 남성용 가죽구두와 여성용 겨울부츠를 비롯한 각종 피혁제품과 의류 등이 주로 눈에 띄었다.
원저우는 소상품 제조의 천국이다. 1978년 개혁개방 직후 중국식 경제성장의 모델로 ‘원저우 모델’이란 말까지 나왔다.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고(故) 덩샤오핑(鄧小平)은 “우리는 원저우의 모험가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보수파였던 고(故) 리셴녠(李先念) 국가주석도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원저우로 가라”는 말을 남겼다.
원저우 여행객들은 삼륜차(三輪車)를 타는 것을 시작으로 계속 흥정을 벌여야 한다. 도시 곳곳에서 흥정이 벌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저우화(溫州話)’라는 고유한 지역 방언을 쓰는 원저우 상인과의 흥정은 상당한 인내를 요한다. 흥정은 원저우 사람들의 삶의 일부분인 듯했다. 가격정찰제에 익숙해져있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피곤한 도시로 보였다.
피혁·라이터·단추 유명
원저우가 처음 개방된 것은 1876년 중국과 영국 간의 옌타이(煙臺)조약 체결 직후다. 원저우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오우강(甌江) 한가운데에 있는 섬 장신다오(江心島). 그림 같은 풍광의 장신다오에는 과거 영국 영사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3층 벽돌건물이 있다. 원저우 사람들은 영국 영사관을 최고급 레스토랑으로 개조해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비교적 일찍이 개항돼 원저우 사람들은 해외 진출이 왕성한 편이다. 원저우 출신 해외 화교(華僑)들은 약 2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원저우 구(舊)시가 한가운데는 1962년에 개업한 ‘원저우화교반점(華僑飯店)’이란 5성급 호텔이 있을 정도다. 지난 2001년 9·11테러 때 미국 성조기를 대량 납품해 재미를 본 업자들도 뉴욕의 원저우 화교들로 알려져 있다.
원저우 상인들은 가죽을 가공한 피혁 제품으로 중국 대륙을 석권했다. 땅이 넓어 발품팔 일이 많은 중국은 구두 같은 가죽 제품의 교체주기가 짧다. 2008년 베이징(北京)올림픽의 피혁제품 공식 스폰서를 맡은 아오캉(奧康)을 비롯해 캉나이(康奈) 등 중국의 유명 피혁 브랜드는 모두 원저우 태생 기업이다. 고속철도역에 특산품으로 피혁제품 매장이 입점해 있을 정도다.
패션업이 발달한 곳도 원저우다. 원저우 구시가 묘과사(妙果寺) 인근의 시장통에서 출발한 메이터스방웨이(美特斯邦威·Materbone)는 중국을 대표하는 유명 캐주얼브랜드다. 디자인만 하고 생산은 일괄 하청을 주는 나이키(Nike) 생산방식을 일찍이 도입해 효과를 봤다. 시내 곳곳에서는 ‘한국패션’ ‘한국유행’ 등과 같은 한국어 간판도 자주 눈에 띄었다.
원저우에서는 단추와 아동용 완구를 비롯해 양말, 빨대, 라이터, 열쇠, 강관, 재봉틀, 자동차와 오토바이 부품 등 각종 물품을 제조한다. 원저우는 한때 ‘동방 제일의 단추공장’이란 별명도 갖고 있었다. 이 밖에 원저우는 선글라스를 비롯한 전세계 안경테 시장의 70%, 금속라이터의 80%, 면도기의 60% 등을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악명 높은 ‘원저우 차오팡퇀’
소상품 제조로 자본을 축적한 원저우 상인들은 부동산으로 더욱 부를 키웠다. 원저우 차오팡퇀(炒房團·부동산투기단)은 악명이 높다. 대형 관광버스를 빌려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부동산을 매입한다. 2001년 157명이 함께 상하이로 상경해 3일 만에 100여채의 부동산을 매입하면서 원저우 차오팡퇀의 명성이 전국에 퍼지기 시작했다.
원저우 차오팡퇀의 규모는 100여명이 함께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대형그룹 외에도 10명 내외의 조촐한 가족형으로 움직이는 차오팡퇀까지 각양각색이다. 이들 부동산 투기단의 활동 반경은 인근 항저우, 상하이는 물론 쑤저우, 베이징, 선양, 하얼빈에 이른다. 매입 대상 부동산은 주거용 아파트와 상가, 토지, 고층빌딩을 망라한다.
원저우 상인들은 부동산과 같은 실물이 아닌 주식에는 가급적 손을 안 대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철저히 뭉쳐 다니면서 가격 상승 효과와 입소문을 극대화하는 것은 원저우 차오팡퇀의 특징이다. 중국의 일부 부동산개발업자들은 분양 실적을 높일 목적으로 “원저우 차오팡퇀이 다녀갔다”고 헛소문을 내는 방식으로 마케팅을 하기도 한다.
현재 원저우 시정부는 연간 2억달러까지 개인의 해외직접투자를 허용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원저우 상인들의 해외부동산 구매를 촉진하기 위한 조치로 중국의 지방정부 가운데는 최초다. 현재 원저우 시당국의 이 같은 정책 추진은 외환관리법상 중국 중앙정부에 의해 제동이 걸려있는 상태지만 조만간 허용될 것으로 현지 언론은 내다보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 제주도도 원저우 상인들이 기웃거린다는 소식이다. 2009년에는 원저우 국제회의센터 인근 샹그릴라호텔에서 원저우 상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투자설명회가 열리기도 했다. 지역신문인 원저우상보(溫州商報)는 “원저우와 상하이, 원저우와 선전을 잇는 고속철도가 속속 개통되면서 원저우 상인들의 활동반경도 넓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원자바오의 고향… 최근 집중 개발
열강에 무릎 꿇은 ‘톈진조약’의 현장
톈진
유마디 기자
고속철로 베이징에서 불과 30분
해안선 130㎞, 상하이 못지않은 야경
서태후가 반한 ‘거우부리’ 만두 유명
|
▲ 제조·물류·첨단산업을 주력으로 하는 톈진의 경제중심지 빈하이신구의 모습. photo 연합 |
중국 베이징에서 142㎞ 떨어진 거리를 최고시속 350㎞로 25분 만에 주파하는 초고속 열차. 정확히 18개의 주름으로 빚어진 청나라 말 서태후의 기호식품 거우부리(狗不理) 만두. 원나라 때부터 중국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항구도시…. 중국의 직할시 톈진(天津)을 말할 때 떠오르는 것들이다.
2008년 말 기자가 베이징에서 톈진으로 향하는 고속 열차에 탑승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베이징남역(北京南站)에서 톈진으로 가는 기차는 15분마다 한 대꼴로 운행됐다. 승차권 58위안(약 1만원)을 지불하고 열차에 올라 노트북 컴퓨터 전원을 켰다. 문서 몇 개를 열어보고 영화나 볼까싶어 영상 프로그램들을 뒤적거리는데 “우리 열차 잠시 후 톈진역에 도착합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일반열차로 세 시간 거리의 톈진행이 익숙했던 터라 예상치 못한 도착안내 멘트에 당황했다. 당시 기자가 탔던 열차는 베이징남역에서 톈진으로 가는 고속철인 ‘허셰호(和諧號)’였다.
중국 정부는 지난 2008년 6월 대지 면적 49만9200㎡에 준공한 베이징남역에서 톈진으로 가는 고속철인 ‘허셰호’를 개통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일주일 앞둔 8월 1일 선보인 허셰호는 평소 승용차로 3시간이 소요되던 징진(京津) 생활권을 30분 미만인 6분의 1로 단축시켜 화제를 낳았다. 허셰호는 올 연말까지 베이징~상하이, 하얼빈~다롄, 광저우~선전 등 12개 노선에서 추가 운행될 예정이어서 ‘중국 1일 생활권’이 가시화될 예정이다.
수차례 조차지… 여러나라 문화 공존
고속철에서 내려 톈진역 광장으로 나오면 역에서 톈진 시내를 잇는 해방교(解放橋)가 나온다. 1949년에 지어진 해방교는 적이 침략했을 때 톈진 시내로의 접근을 봉쇄하기 위해 쉽게 무너뜨릴 수 있도록 설계됐다. 듬성듬성 연결된 나무 판자로 만들어진 흔들다리라 금방이라도 강 속으로 구두가 빠질 듯했다.
톈진은 베이징과 상하이에 이어 중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경제도시이자 항구도시로 도시 면적 1만1305㎢에 인구 1100만인 중국 4대 직할시다. 지리적으로는 화베이(華北) 지구의 보하이만(渤海灣)을 끼고 있으며, 해안선 길이는 130여㎞다.
톈진은 베이징에서 고속철로 30분이 안되나 인접 도시 베이징과는 사뭇 다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베이징과 겨우 142㎞ 떨어진 곳인데도 톈진 사투리가 있다. 내륙인 베이징과는 달리 강과 바다가 끊임없이 등장하는 풍경도 이채롭다. ‘바다강’이라는 뜻을 가진 하이허(海河)는 톈진역과 시내를 관통해 동남쪽 바다로 합류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둠이 깔리고 도시 조명이 하이허를 비추기 시작하면 톈진은 상하이 못지않은 야경을 선사하기도 한다.
산둥반도의 항구 도시들처럼 과거 원나라 때부터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던 톈진은 지리적 접근성이 뛰어나 수차례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 톈진이 받았던 핍박은 1858년 6월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 4개국과 맺은 톈진조약이 대표적이다. 청이 영국과 맺은 조약에는 △외교사절의 베이징 상주 △국내 여행과 장강 통상 승인 △새로운 무역규칙과 관세율 협정 △개항장(開港場)의 확대 △그리스도교의 공인이 포함되어 있다.
톈진의 도시 분위기는 다른 중국 전통 도시와 다르게 느껴진다. 이는 톈진이 수차례 전쟁터로 이용돼 포격과 침공을 맞았고, 수차례 조차지 시대를 거치며 겪은 영욕의 역사 때문이다. 톈진은 1895년에서 1902년까지 일본·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벨기에 등에 조차지를 내줘야 했다. 오늘날 톈진의 건축양식과 도시 미관이 마치 여러 나라의 문화가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의 결과다.
빈하이신구, 종합개혁시험구 지정
톈진은 1949년 건국 후 항구도시의 장점을 살려 중기계·화학제품·철강·조선 산업을 일으켜 중국 제3의 도시로 컸다. 도심을 잇는 주요 도로는 세 개의 도시순환도로와, 도심에서 외곽으로 나가는 14개의 환도로가 교차하는 거미줄 모양을 형성한다. 톈진의 외곽은 수도 베이징이 도시 확대에 따라 동남쪽으로 커지면서 베이징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이에 따라 향후 ‘베이징은 정치중심, 톈진은 경제중심’으로 하나의 권역이 된다는 전망도 나온다.
톈진하면 음식으로는 거우부리(狗不理) 만두를 빼놓을 수 없다. 1858년 개점해 15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거우부리는 허난성(河南省) 출신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가 당대의 황실 실권자 서태후에게 조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거우부리는 호빵 같은 질감에 닭육수와 돼지고기를 다져 넣은 만두를 팔던 점포 이름이다. 만두를 맛본 서태후가 “그 어떤 음식도 이보다 못할 것”이라는 말로 극찬하면서 톈진의 만두집들이 모두 거우부리집의 만두를 표방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거우부리는 궁중식 인테리어로 외국인 관광객들을 유혹해 ‘너무 상업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의 고향이기도 한 톈진은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이끄는 4세대 지도부 출범 이후 집중 개발되고 있다. 대한항공, LG, 금호타이어, 외환은행 등 한국기업의 대형 입간판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베이징무역관에서 톈진 지구를 담당하고 있는 황염봉 연구원은 “해외진출 한국기업 데이터에 등재된 톈진 내 우리 기업 수는 총 763개이다. 대부분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로 휴대폰이나 가전제품 등 전자·정밀기기·기계·부속품을 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최근 톈진이 투자유치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빈하이신구(濱海新區)에도 많이 진출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중국 국무원은 지난 2006년 2270㎢ 규모의 톈진 빈하이신구를 ‘종합개혁시험구’로 지정, 광둥성 선전(深)과 상하이 푸둥신구에 이은 세 번째 ‘국가 종합·역점 개발구’로 키우고 있다. 빈하이신구는 베이징과 허베이(河北), 산둥, 랴오닝을 포괄하는 환발해권의 중심지로 ‘시험구’로 결정된 지난 2006년부터 매년 70억위안(약 1조1870억원)이 투입되고 있다. 시험구 운영 6년째인 지난 연말 중국 국가발전개혁위는 “2010 상반기 톈진 빈하이신구의 GDP(지역내총생산)는 2231억위안(약 38조원)으로 상하이 푸둥의 2226억위안보다 5억위안 더 많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중국이 ‘제3의 성장축’으로 야심차게 준비 중인 빈하이신구가 대규모 투자로 선전과 상하이 푸둥처럼 중국 경제를 이끄는 견인차가 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물류·항만도시 상하이와 투톱 장제스·장징궈 부자의 고향
저장성 닝보
이동훈 기자
과거 해상 실크로드의 기점
저장재벌의 주류 ‘닝보방’ 중국 최고 재벌 집단 군림
|
▲ 상하이와 닝보를 연결하는 ‘바다 위의 만리장성’ 항저우만 해상대교. photo 신화통신 |
상하이(上海)남역 장거리버스 터미널서 출발한 시외버스가 항저우만(杭州灣)에 이르러 잠시 멈췄다. 이어 버스가 올라간 곳은 ‘바다 위의 만리장성’으로 불리는 ‘항저우만 해상대교’. 총연장 36㎞에 달하는 항저우만 해상대교는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해상대교로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 잠에서 깬 버스승객들은 카메라를 꺼내며 연방 감탄사를 내뱉기 시작했다.
36㎞의 다리를 건너 도착한 곳은 저장성(浙江省) 닝보(寧波). 자욱한 바다안개를 헤치고 다리를 건너는 데는 25분이 걸렸다. ‘바다 위의 만리장성’이란 말을 실감케 했다. 지난해 12월에는 ‘해천일주(海天一洲·바다와 하늘의 큰 섬)’라는 해상 휴게소도 문을 열었다. 해상대교의 가운데 지점에 입체교차로를 설치해 조성한 바다 위 휴게소다.
과거 상하이에서 닝보로 가기 위해서는 육지로 오목하게 들어간 항저우만을 빙 둘러가야 했다. 지금도 철도는 상하이에서 항저우를 둘러서 닝보로 들어온다. 항저우만을 가로지르는 다리 가설은 닝보 사람들의 최대 숙원이었다. 지난 2008년 5월 항저우만 해상대교가 놓이면서 상하이와 닝보는 다리 하나로 직결됐다.
상하이와 ‘중국의 허브항만’ 경쟁
인구 719만명의 닝보는 저장성 제일의 항구도시다. 과거 ‘해상 실크로드’의 시작점으로, 상하이가 부상하기 전까지는 중국 화둥(華東)지방 최대의 항구도시였다. 한때 중국 제일의 비단과 도자기 수출항이고, 세계 7대 선박왕 중 2명을 배출하기도 했다. 닝보의 경제력은 저장성의 성도(省都)인 항저우(杭州)를 오히려 앞선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같은 배경이 있어 한때 ‘닝보·저우산(舟山)항’은 세계 최대의 컨테이너항인 상하이와 중국의 허브 항만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수심(水深) 등 ‘양항(良港)’으로서의 조건은 닝보가 상하이를 앞선다는 평가였다. 하지만 상하이는 항저우만 가운데 있는 대·소 양산도에 심수항인 양산항(洋山港)을 조성해 닝보를 꺾고 중국의 국가 허브 항만의 지위를 가져갔다.
닝보 도심의 삼강구(三江口). 융강(甬江), 펑화강(奉化江), 위야오강(余姚江) 등 세 개의 강줄기가 한데 모여든다 해서 삼강구란 이름이 붙었다. 닝보 삼강구에는 상하이 황푸강(黃浦江)변의 와이탄(外灘)보다 더 오래된 라오와이탄(老外灘)이 있다. 닝보의 라오와이탄은 서양식 근대건축물이 즐비한 상하이 와이탄보다 20년 앞서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다.
닝보와 상하이의 경쟁은 역사가 오래됐다. 닝보와 상하이는 중국과 영국 간의 1840년 아편전쟁 발발 직후 중국에서 가장 먼저 개항된 5개 항구도시 가운데 하나다. 난징(南京)조약의 부속조약인 오구통상장정(五口通商章程)을 체결하면서다. 광저우(廣州), 샤먼(厦門), 푸저우(福州) 등도 이때 상하이, 닝보와 함께 문호를 개방했다.
1844년 오구통상장정에 따라 닝보가 개항되면서 외국인들은 닝보 라오와이탄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옛 영국영사관과 천주교당이 한데 모여있는 라오와이탄변은 현재 멋진 카페와 술집들이 늘어선 곳으로 변했다. 저녁이 되자 라오와이탄은 삼강구를 바라보며 맥주와 음악을 즐기는 닝보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고려사신들이 머물던 ‘고려사관’
닝보는 우리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닝보 시내 한복판에 있는 월호(月湖). 수려한 풍광의 월호변에는 고려사관(高麗使館)이란 기와집이 있다. 닝보에서 ‘고려’란 이름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고려의 사신들이 닝보에서 머물던 곳이라 전한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는 고려사관 안에는 고려와 남송(南宋)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각종 문물과 자료가 전시돼 있었다.
요(여진족), 금(거란족), 원(몽골족)에 밀려 장강(長江) 이남으로 내려온 남송은 항저우(옛 임안)에 수도를 뒀다. 닝보는 항저우의 입구 역할을 하는 곳이다. 항저우에서 닝보는 열차로 1시간30분 거리. 과거 심청이가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중국 상인에게 팔려간 곳도 닝보 인근의 저우산군도(舟山群島) 일대라는 속설이 있다.
닝보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장제스(蔣介石)다. 한때 중국대륙을 통일한 장제스 전 총통은 국공(國共)내전서 패해 대만으로 쫓겨났다. 닝보시 남쪽 펑화(奉化) 지커우(溪口)에는 ‘장씨고거(蔣氏故居)’라는 장제스의 옛 집이 그대로 남아있다. 다만 마오쩌둥(毛澤東)과 국공내전을 벌인 장제스의 이력을 감안 ‘장제스’ 대신 ‘장씨(蔣氏)’로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장제스의 아들인 장징궈(蔣經國) 전 대만총통이 태어난 곳도 ‘장씨고거’다. 장제스·장징궈 장씨 부자의 집권기 때 닝보 출신의 저장재벌들은 대거 상하이로 진출했다. 현재 ‘장씨고거’는 닝보를 찾는 대만 사업가와 여행객들이 찾는 필수 코스로 변했다. 한편 중국 국무원은 1996년 ‘장씨고거’를 문물보호단위(문화재보호구역)로 지정해 입장료 수입을 챙기고 있다.
바오위강 등 선박왕 2명 배출
-
- ▲ 닝보 고려사관 photo 이동훈 기자
항구를 끼고 있는 닝보 사람들은 일찍부터 상업과 무역에 종사했다. 특히 닝보 출신 상인들은 장제스의 국민당(國民黨) 집권기 때 전성기를 누렸다. ‘닝보방(寧波幇)’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1917년 상하이 최초의 대형 실내오락장인 ‘대세계(大世界)’를 만든 황추주(黃楚九)가 대표적이다. 상하이를 ‘동방의 파리’로 만든 사람도 닝보상인들이다.
현재 중국 최고의 재벌집단으로 불리는 저장(浙江)재벌의 주류도 ‘닝보방’들이다. 같은 저장상인 계열이지만 원저우(溫州) 상인들은 약간 비주류 별종으로 취급된다. 닝보방들은 1949년 장제스가 마오쩌둥과의 내전에서 패해 대만으로 도망가자 홍콩, 마카오, 대만으로 대거 탈출했다. 이는 닝보방들이 해외 화상들의 주축을 이루는 계기가 됐다.
닝보는 무려 2명의 선박왕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닝보시 한가운데 있는 닝보대학교. 닝보대학교는 닝보 출신의 선박왕 바오위강(包玉剛) 회장이 1986년 세운 대학교다. ‘개작두’로 유명한 송나라 때의 명판관 ‘포청천(包靑天·바오칭톈)’의 후손인 바오위강은 국공내전 직후 홍콩으로 건너가 대형 선박만 200척 이상을 거느린 선박왕이 됐다.
중국인 최초로 홍콩상하이은행(HSBC)의 이사회에 진입한 바오위강은 영국 왕실로부터 작위도 하사받았다. 개혁개방에도 공헌해 닝보에 들어선 닝보상방 문화공원에는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과 바오위강이 손을 잡고 있는 조각상도 있다. 닝보상방문화공원은 지난 2009년 10월 닝보 출신 재벌들이 갹출해 조성했다.
범(汎)닝보방에 속하는 둥하오윈(董浩云) 회장 역시 해운업으로 부를 축적해 ‘현대판 해상왕 정화(鄭和)’라는 별명을 얻었다. 둥하오윈은 닝보 인근 저우산군도 출신이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과도 막역한 사이로 알려졌던 둥하오윈 회장은 1997년 홍콩의 중국반환 직후 아들인 둥젠화(董建華)를 홍콩의 초대 행정장관(옛 총독 격)에 올려놓는 위력을 과시했다.
최근 닝보상인들은 IT분야에서도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 중국 최로로 ‘삐삐’를 개발해 유명세를 탄 중국의 토종 휴대폰 업체 닝보버드(波導)가 대표적이다. 중국 최초의 포털사이트 왕이(網易)의 창업주로 한때 중국 최고 갑부에 오른 딩레이(丁磊), 세계 최대의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의 장쭝머우(張忠謀) 회장 역시 닝보 출신의 기업가로 유명하다.
대문호 루쉰을 낳은 곳 이곳에 가면 샤오싱酒에 취해 보라
저장성 샤오싱
이동훈 기자
|
▲ 중국 샤오싱 월왕전에 걸려있는 월왕 구천의 그림. 장작 위에 앉아 곰쓸개를 바라보며 칼을 가는 구천(왼쪽 그림)과 범려와 문종의 도움으로 칼을 쥐고 재기한 구천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photo 이동훈 기자 |
지난 2월 찾아간 저장성(浙江省) 샤오싱(紹興). 월(越)나라의 수도였던 샤오싱은 쇠락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한때 샤오싱은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와 함께 ‘동방의 베네치아’로 불렸다. ‘동방의 베네치아’란 말처럼 시내 곳곳에 놓인 석조 다리 아래로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물 빛깔은 검었고, 역한 하수도 냄새마저 올라왔다.
인구 437만명의 샤오싱은 저장성의 중소도시다. 샤오싱은 저장성의 성도(省都) 항저우(杭州)와 항구도시 닝보(寧波) 사이에 있다. 항저우에서 샤오싱까지는 차로 1시간, 상하이에서는 2시간가량 걸린다. 한때는 월나라의 수도로 위용을 떨쳤지만 이제는 여느 관광도시마냥 자전거를 개조한 삼륜차(三輪車)들만 도로 위를 마구잡이로 질주하고 있었다.
샤오싱의 옛 이름은 회계(會稽)다. ‘오월동주(吳越同舟)’ 등의 고사로 유명한 춘추전국시대 월(越)나라는 지금의 샤오싱을 수도로 삼아 강국 오나라와 대치했다. 월나라의 흔적을 따라 찾아간 샤오싱 시내에 있는 부산(府山)공원. 하지만 월왕이 머물렀다는 월왕대(越王臺)는 노점을 펴고 각종 농산물을 파는 재래시장을 끼고 있어 입구마저 찾기 힘들었다.
오월동주·와신상담의 배경
월왕대는 월왕 구천(句踐)이 곰의 쓸개를 핥으며 지냈다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가 나온 곳이다. 오왕 합려(闔閭)를 무너뜨린 구천은 장작 위에 누워 자며 복수를 다짐한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에게 패했다. 이후 구천은 오나라의 수도인 지금의 쑤저우로 끌려가 2년간 노예생활을 하며 부차의 ‘똥’을 핥아먹는 등 부차의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이때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바친 서시(西施) 역시 샤오싱 출신이다. 서시는 왕소군(王昭君)·초선(貂蟬)·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중국 4대 미녀로 꼽히는 인물. 샤오싱 서남쪽 주지시에는 서시마을이 남아있다. 본래 서시는 구천의 책사이자 오른팔인 범려의 애첩이었지만 부차에게 접근해 정보를 빼내고 오나라의 재정을 탕진시키는 역할을 해낸다.
서시의 도움으로 샤오싱에 복귀한 구천은 결국 10년 만에 부차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 홍콩 언론인 김용의 무협소설에 종종 나오는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늦지 않다(君子報仇 十年不晩)’는 말도 이때 나왔다. 월왕대 위에 있는 월왕전(越王殿)에는 구천이 ‘와신상담’ 끝에 오나라의 부차를 꺾고 ‘춘추오패’로 등극하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월왕 구천은 부차를 치기 위해 출정할 때 병사들에게 샤오싱주(紹興酒)를 한 사발씩 들이켜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샤오싱주는 샤오싱을 대표하는 술이다. 짙은 누런색을 띠는 샤오싱주는 황주(黃酒)의 일종이다. 황주는 맥주, 포도주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술로 꼽힌다. 알코올 도수 15~20도 내외의 황주는 중국 서민들이 즐겨 마시는 술이기도 하다.
샤오싱주는 황주 중에서도 최상품으로 쳐준다. 찹쌀을 보리누룩으로 빚어 만든다. 샤오싱에서 난 찹쌀과 샤오싱 감호(鑒湖)에서 뜬 물로 빚는 것을 가장 최상품으로 쳐준다. 감호의 물로 술을 빚었다고 해서 ‘감호명주’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특히 샤오싱 사람들은 딸이 태어나면 태어난 그해 샤오싱주를 빚어 딸이 시집갈 때 건네주는 전통을 갖고 있다.
보통 샤오싱주는 진흙으로 빚은 큰 독에서 3년 이상 숙성시킨다. 샤오싱 시내에는 샤오싱주를 직접 담글 수 있는 박물관도 마련돼 있다. 또 샤오싱 시내 곳곳에는 둥그런 홍등(紅燈)을 입구에 내건 술집들도 곳곳에 즐비하다. 한겨울에는 샤오싱주를 살짝 데운 다음 저민 생강을 곁들여 마시는 샤오싱주가 일품이다. 더운 여름에는 얼음을 넣어 마셔도 된다.
이때 샤오싱주와 함께 ‘취두부(臭豆腐)’를 먹는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썩은 두부의 겉을 살짝 튀겨내는 취두부는 샤오싱을 대표하는 먹을거리 가운데 하나. 마오쩌둥(毛澤東)이 살아생전 즐기던 음식으로 두부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호남지방에서 즐겨먹는 삭힌 홍어처럼 중독성이 있어 취두부는 샤오싱주와 꼭 함께 먹는다.
썩은 두부 튀겨낸 ‘취두부’ 별미
호적상 샤오싱 출신인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는 샤오싱주에 많은 애착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개혁개방 총설계사로 불리는 덩샤오핑(鄧小平)도 살아생전 샤오싱주를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덩샤오핑은 1985년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그와 회담할 때 ‘고월용산(古越龍山)’이란 샤오싱주를 연회석상에 등장시켰다.
지금은 중소도시이나 샤오싱은 역사적 전통이 풍부하다. 샤오싱 회계산에 있는 대우릉(大禹陵). 대우릉은 중국 고대 우(禹)임금의 묘로 알려진 곳이다. 우임금은 황하(黃河)의 범람을 다스려 중국에서 요(堯)임금, 순(舜)임금 등과 함께 신격화된 존재다.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의 시조로 묘족(苗族)을 남방으로 몰아낸 인물이기도 하다.
샤오싱 시내 서남쪽에 있는 ‘난정(蘭亭)’. 월왕 구천이 난을 심고 길렀다는 난정은 중국 최고의 명필로 불리는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가 붓글씨를 연습한 곳이다. 왕희지가 글씨를 연습해 주변 연못의 물이 검게 변했다는 일화가 내려온다. 난정에는 왕희지와 왕헌지(王献之) 부자(父子)가 함께 남겼다는 ‘아지(鵝池)’라는 글자를 새긴 비석을 볼 수 있다.
루쉰 생가, 세계적 관광지로
이 밖에 명(明)나라 때의 대사상가이자 양명학(陽明學)의 시조로 유명한 왕양명(王陽明·본명 왕수인)이 태어난 곳도 샤오싱이다. 중국 근대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는 차이위안페이(蔡元培)의 고향도 샤오싱이다. ‘5·4운동의 아버지’란 별명을 갖고 있는 차이위안페이는 신해(辛亥)혁명 직후 베이징대 총장 등을 역임하며 5·4운동 촉발에 일익을 담당했다.
또 샤오싱은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을 배출한 곳으로 명성이 높다. ‘아큐정전(阿Q正傳)’ ‘광인일기(狂人日記)’ ‘공을기(孔乙己)’ 등을 통해 중국인의 전근대성과 노예의식을 폭로한 루쉰은 중국의 대문호로 불리는 작가다. 샤오싱 시내 한복판에 있는 ‘루쉰구리(魯迅故里·루쉰의 옛마을)’는 루쉰이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샤오싱의 최대 관광지로 변했다.
루쉰(본명 저우슈런)의 친동생이자 수필가로 유명한 저우쭤런(周作人)이 태어난 곳도 루쉰구리다. 형(루쉰)만큼은 빛을 못봤지만 샤오싱 출신의 이들 형제는 중국 근대를 대표하는 문필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들 형제가 공부했다는 루쉰의 옛집 맞은편 삼미서옥(三味書屋)의 책상에는 루쉰이 지각을 하지 않기 위해 썼다는 ‘조(早·일찍)’란 글자가 남아있다.
또 루쉰구리 입구에는 루쉰의 단편소설 ‘공을기’에 나오는 ‘함형(咸亨)주점’도 그대로 남아있다. 함형주점은 샤오싱주를 시켜먹는 관광객들로 늘 만원이다. ‘루쉰구리’ 안에 있는 루쉰의 옛 집과 기념관에도 루쉰 형제가 공부한 책상과 걸상, 침대, 쌀독 등이 그대로 보존돼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서울 4배 크기의 호수 ‘太湖’ 품고 중국의 할리우드를 꿈꾼다
장쑤성 우시
유마디 기자
|
▲ 삼국연의 촬영 세트장인 우시 삼국성에서 ‘유비·관우·장비와 여포의 대결’이 공연 중이다. photo 유마디 |
지난 3월 3일 오후 상하이 훙차오(紅橋)역을 출발한 열차가 장쑤성(江蘇省) 우시(無錫)를 향해 달렸다. 우시는 2010년 7월 1일 개통한 난징(南京)행 고속열차(快速東車·CRH)의 중간역. 역사적으로는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발상지다. 도시 이름은 3000여년 전 주석이 많이 난 데서 왔다. 당시는 생산량이 많아 ‘여우시(有錫)’로 불렸으나 지나친 채굴로 주석이 모두 고갈되자 지금의 이름이 됐다고 한다. 우시(無錫)는 ‘주석이 없다’는 뜻이다.
상하이에서 난징까지 창장(長江)삼각주를 잇는 고속열차가 개통되면서 300㎞에 달하는 상하이~우시 구간은 42분이면 닿게 됐다. 열차 내부는 말쑥한 정장을 갖춰 입은 승객들의 차림새만큼이나 깔끔했다. 분위기도 과거와 확연히 달랐다. 5년 전만 해도 괴나리봇짐을 지고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과 침대 위아래칸을 나눠 썼다. 중국 열차칸의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과거의 봇짐은 이제 바퀴 달린 캐리어로, 후줄근했던 옷차림은 명품을 걸친 정장을 심심치 않게 볼 정도로 바뀌었다.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우시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이다.
우시로 가는 기차 안에서 기자의 옆에 앉았던 한 승객은 중국 유명 부동산·금융 투자회사인 ‘이하우스(E-house)’ 투자총감이라고 적힌 명함을 먼저 내밀었다. 위(寓)씨 성을 가진 그는 “정부나 기업의 기금을 가지고 국내 또는 세계에 투자해 수익을 내주는 게 우리의 일”이라며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투자 유망 지역이나 부동산 프로젝트 사업에 관여한다”고 말했다. 기차 안에서 만난 위씨와의 대화는 투자와 개발에 적극적이며 저돌적인 오늘날 중국의 모습을 실감케 했다.
평균시속 320㎞로 달리던 기차는 30분 만에 쑤저우(蘇州)역을 주파하더니 금세 목적지인 우시역에 닿았다. 승용차로 3시간은 걸렸을 법한 거리였다. 역사 밖으로 나와 잡아탄 택시가 교외를 향해 달렸다. 시 외곽으로 가자 창밖으로 ‘중국 3대 담호’ 중 한곳인 타이후(太湖)가 보였다. 장쑤성과 저장성(浙江省)을 두르고 있는 이 거대한 호수의 면적은 2400㎢. 서울시(605.41㎢)의 4배에 달하는 면적이다.
중국 15대 경제 핵심도시로 부상
개혁개방을 기점으로 우시의 도시 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1981년 중국 정부가 지정한 전국 15개의 경제중심도시 중 한곳으로 지정되는가 하면 1984년엔 전국 10대 중점관광도시로 꼽혔다. 이듬해인 1985년엔 공업단지를 정비, 본격적 대외개방을 통해 해외자본을 대규모 유치했다. 그 결과 우시는 중국 도시실력 순위나 투자환경 순위에서 상위권에 머무르게 됐다.
2011년 3월 3일 중국 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兩會) 전국인민대표대회 도시별 보고에서 마오샤오핑(毛小平) 우시 시장은 “지난해 우시의 국내총생산(GDP)은 5758억위안(약 97조7000억원)으로 인구가 620만명임을 감안할 때 1인당 GDP가 1만3780달러에 달한다”고 밝혔다. 마오 시장은 “우시가 20~30년간 경제발전에 목매어 왔다면 이제는 전략적 조정을 통해 하이 테크놀러지를 육성할 때”라며 “이를 목표로 지난해 우리 고기술산업을 두 자릿수 이상으로 성장시켰다”고 설명했다.
우시는 오늘날 장쑤성 내 경제종합순위에서 쑤저우에 이어 2위다. 중국 도시별 순위는 8위다. 중국 정부가 2001년 우시를 전통산업에서 고도화산업으로 전환키로 선포한 지 10년. 중국 첨단산업단지의 메카로 불리는 우시의 주력 업종은 전기전자(31%)와 기계·자동차부품(22%)이고 그 뒤를 의류, 신소재, 생물의약이 잇는다.
상하이에서 128㎞ 정도 떨어져 있는 호수 타이후 주변에 전세계 소프트웨어 업체들을 유치, 전략적 도시를 구축하겠다는 우시의 전략은 통했다. 우시를 돌아보는 내내 신축 중인 공장 부지를 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장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우시는 고질적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지난 몇 년간 세금 면제와 토지 무상 임대 등의 조건을 내걸고 수천 개의 외자,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고 오늘날의 경제 발전을 이룩한 우시는 타이후의 심각한 오염과 마주하고 있다.
대하드라마 ‘삼국연의’ 촬영지
우시가 오늘날의 입지로 거듭난 데에는 ‘거대한 호수’를 뜻하는 타이후의 공헌을 무시할 수 없다. 급격하게 늘어난 공장들의 용수난을 지금껏 타이후가 해결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업용지가 늘어나면서 타이후의 오염도가 심각해졌다. 이에 따라 장쑤성 정부는 2007년 타이후 수질오염 종합처리에 대한 사업회의를 개최, 타이후 수질오염 개선을 위한 10개 주요대책을 제시했다. 이 중엔 타이후 주변 지역에서 심각한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화학·인쇄·염색·전기도금 공장 2000여개를 점차 폐쇄하겠다는 계획도 있다.
우시 시정부가 내민 두 번째 성장 전략은 관광자원. 대표적인 것은 타이후의 절경을 배경 삼은 CCTV(중국중앙방송)의 대하드라마 삼국연의(三國演義) 세트장이다. CCTV는 1990년대 삼국성(三國城) 세트장에서 총 84편 분량의 삼국연의를 촬영했으며 이후 2010년판 삼국연의도 이곳에서 촬영을 마쳤다. 공원 안에 있는 건축면적 8만5000㎡ 부지의 세트장엔 오(吳)나라 왕궁, 감로사, 칠성단, 봉화대 등 수십 개의 대형 세트장과 타이후 수면에 20여척의 배를 띄운 ‘적벽대전’ 세트장이 있다. 세트장은 대부분 촬영만을 위해 단면 세트장을 건축하는데 삼국성 세트장은 황궁, 수군 병영군영, 도원(桃園) 등 실제 크기를 본뜬 건물들로 이뤄져 있어 유적지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삼국성 세트장에는 삼국연의와 같은 역사 드라마가 친숙한 내국인 관광객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세트장은 여느 테마파크처럼 시간에 맞춰 각종 공연을 선보였다. 이 중 삼국지 주요 인물이 등장하는 전쟁 장면을 연출하는 ‘유비·관우·장비와 여포의 대결’ 공연은 삼국성의 하이라이트다. 말을 타고 선보이는 전투 장면은 박진감 넘치는 기마 스턴트로 가장 많은 호응을 받기도 했다. 삼국지와 수호지를 촬영한 이 세트장으로 우시를 ‘제2의 유니버설스튜디오’로 육성하겠다는 우시 시정부의 포부가 곳곳에서 묻어났다.
우시는 도시의 여행상품 개발을 위해 2007년 4월 시정부 주최로 ‘우시휴양관광발전계획대회’를 열기도 했다. 대회에서 사회과학연구원 여행연구센터 웨이샤오안(魏小安) 연구원은 “우시가 대외 경제 교류를 통해 경제가 발전한 도시라는 인상은 이미 심어진 상태”라며 “우시에 진출한 외국의 선례와 지역적 협력을 더한다면 우시는 여행도시라는 브랜드를 잘 정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시의 관광 발전 가능성에 대해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