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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호 율산그룹 회장

醉月 2009. 5. 1. 10:57

요즘 주변 사람들과 무역에관한 이야기를 자주하다보니 문득 생각나는 인물이 있었다.
   나도 그랬지만 그시절의 젊은이들에게는 지금도 잠적해서 소식없는 대우의 김우중회장과함께
   꿈과 야망을 심어주었던  신선호 율산그룹 회장이다. 오늘은 그들의 추억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30년 전인 1974년 9월 율산실업이란 오퍼상으로 출발해 불과 4년 7개월만에 14개 계열사에 8천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그룹으로 성장했던 `율산신화''는 79년 4월 신선호 사장의 구속과 그룹 부도로 막을 내린다.
율산이 급성장할 때 언론은 `재계 신데렐라의 탄생''이라고 끝없는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율산이 부도를 맞을 때는 `철없는 어린아이들의 무모한 모험''으로 매도했다. 그때로부터 25년이 지나면서 율산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율산 부도가 율산 내부의 원인보다는 `정치권의 음모''나 `재계의 견제'' 등에 의해 초래됐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또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젊은 율산맨들이 추구했던 열정과 아이디어, 재계의 기득권 파괴와 경쟁력에 의한 승부수, 돌파력으로 요약되는 `율산정신'' 만큼은 지금 더욱 더 유효하다는 지적도 많다. 율산의 성장과 몰락과정을 당사자의 증언을 통해 되짚어본다.

 

 

1988년 KBS에서 율산그룹을 모델로한  이환경작 '훠어이 훠어이'가 드라마로 방영되었다.


1974년 9월. 당시 만 27살의 청년들인 신선호, 강동원, 최안준, 신태승, 권순우 등 5명은 율산실업이란 오퍼상을 차린다. 신태승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은 모두 광주서중(38회) 또는 광주일고(11회) 동기동창이다. 그중 신선호는 서중을 거쳐 경기고를 졸업한다. 창립 당시 사장은 신선호가 아닌 강동원이 맡는다.
훗날 율산이 성장하면서 사장을 비롯, 율산그룹의 관리본부장, 수출담당상무 등 간부군으로 성장하지만 당시에는 사장이니, 과장이니, 사원이니 하는 직함을 들고 다녔지만 친구사이인 그들간에 직급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고 한다.
이중에서도 신선호, 강동원, 최안준은 `율산 3인방''으로 꼽힌다. 처음 강동원이 사장이 된 데는 그의 꼼꼼한 성격과 자금조달 능력 때문이었다. 젊었지만 가난했던 시절, 강동원은 서울에 있는 친척들에게 융통해 신기하게도 율산실업의 작은 살림이나마 꾸려나갔다고 한다.
고교시절 필드하키 선수를 지낸 최안준은 팔팔한 성격대로 영업을 맡았으나 처음에는 실적이 신통치 않았다. 창립멤버중 한명인 권순우는 율산이 부도난 이후 지금까지도 신 사장과 함께 거취를 같이 하고 있는 율산의 마지막 산증인이 됐다.


당시 율산실업은 말 그대로 `전화기 하나에 책상 하나''가 전부인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수출 지상주의 시대 서울에서 무수히 생겨난 오퍼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연상하면 쉽다.
이들이 사무실을 지금의 서울 남대문 앞 동진빌딩 구석방으로 옮긴 것은 75년 2월께. 바로 율산 성장의 모태가 된 빌딩이다. 동진빌딩 앞에서는 훗날 전라도 출신의 또 다른 재벌로 성장한 나산그룹 안병균 사장이 `마이웨이''란 맥주집을 하고 있었다.
이 맥주집은 의욕만을 안은채 잠룡(潛龍)의 시절을 보내고 있던 율산 젊은이들의 목을 축여주었고 후일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전라도의 대표적 두재벌의 탄생점이 마이웨이란 맥주집이었다는 것도 기연이 아닐 수 없다.


쿠웨이트서보내온신용장율산의 급성장 신화는 이곳에서 시작된다. 동진빌딩으로 사무실을 옮기던 75년 2월 무렵. 사무실만 차려놨지 사실상 일자리 없는 젊은이들의 연락처 역할 정도에 불과하던 율산실업에 엉뚱한 쿠웨이트발 L/C(신용장) 무더기가 걸려들었다. 바로 훗날 원기업을 세운 원길남이 쿠웨이트에서 국내로 보낸 각종 건축자재 수입 L/C였다.
원길남이 누군가. 원길남은 75년 당시 신기하게도 한국인이면서도 쿠웨이트 체신청의 공무원이었다. 초대 한국 이슬람교 사무총장을 지낸 뒤 쿠웨이트로 건너가 공무원까지 지낸 이색 경력의 소유자였다. 원길남은 나중에 귀국해 원기업을 차렸으나 도산하고 만다.
국내 대기업들은 아무도 원길남의 L/C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오직 율산의 무모한(?) 젊은이들만이 이 L/C에 주목했다.
수출에 혈안이 된 국내 기업들이 원길남의 L/C를 비토했던 것은 채산성 때문. 원길남은 쿠웨이트 수입업자로부터 L/C를 받았으나 원가를 너무 낮게 잡았던 것이다. 대기업에 의해 채이고 채인 이 L/C가 돌고 돌다 율산에 걸려든 것이다. 율산은 이를 받아들고 모험을 감행했다. 그리고 율산의 계산은 적중했다.
법인 등기가 되어있지 않았던 율산실업은 중동수출을 위해 75년 6월 17일 주식회사 형태의 율산실업으로 등기를 마친다. 그리고 이날 율산실업의 대표로 신선호가 등재된다. 이날은 언론에 의해 흔히 율산의 출발시점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이날은 법인 등기날이다.


훗날 율산그룹 수출 총책인 율산실업 수출담당상무를 지낸 최안준의 회고. “원길남의 L/C는 채산성이 맞지 않아 수출 자체가 모험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발상을 거꾸로 해 보았다. 대기업이 우려했던 점은 바로 낮은 수출가와 중동지역의 항구의 하역능력 부족으로 인한 체선비용 때문이었다. 우리는 화물선박을 직접 우리가 임대해 화주가 선주를 겸해 수출하는 방식을 생각해냈다.”
시멘트·철근수출`돈벼락''화주가 선주 역할까지 함께하는 일종의 퓨전방식의 수출기법은 그때까지는 없었다. 이같은 전략은 기가 막히게 들어 맞았다. 여기에 쿠웨이트 바이어의 신뢰, 중동지역의 무한한 건설잠재력이 곁들여지면서 율산의 중동수출은 불을 뿜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70년대 중반 한국 경제의 상황은 어땠을까. 한국 정부는 60년대 후반부터 수출 우선주의의 고도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해왔으나 70년대 초반 오일쇼크라는 복병을 맞아 극심한 국내불황을 겪고 있었다. 기름을 사기 위해 주유소 앞에 장사진을 치던 그런 시절이었다. 한국기업이 전세계를 무대로 보따리 장사를 했지만 아직 중동지역은 미개척지였다.
원길남의 L/C를 계기로 율산은 바로 그 중동을 정조준했다. 당시 중동 국가들은 넘치는 오일달러를 사회간접자본 투자에 쏟고있었다. 율산은 한국에서는 남아돌던 시멘트, 철근, 합판 등 건축자재를 긁어모아 중동 수출길을 최초로 열면서 엄청난 돈벼락을 맞게된다.


76년 3월 율산실업에 입사한 천병권(부도 당시 율산실업 수입부 과장·현재 호남대 경제학과 교수)은 “율산은 시장원리에 의해 성장한 한국 최초의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율산 직원들은 순수한 열정과 아이디어로 사막을 누볐고 맡겨진 일을 이뤄내기 위해 며칠씩 밤을 새는 것은 보통이었다”고 말했다.


율산은 원길남의 L/C를 통한 수출을 기반으로 대량의 시멘트와 합판, 철근 등 건축자재를 수출해 75년 법인 등기 6개월만에 338만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린다. 76년에는 수출액이 4천283만달러로 무려 12배의 성장을 보인다. 지금보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100만달러 수출상이 있던 시절, 무명의 무역회사로서는 엄청난 성장이었다.율산은 75년 12월 수출대금을 받은 가용자금을 운영하기 위해 신진알미늄을 인수, 율산알미늄을 세운다. 율산으로서는 첫번째 기업인수였다.
신진알미늄은 우리나라 자동차 업계의 효시격인 신진자동차 김창원의 회사다. 새우가 고래를 삼킨 격이다. 76년 8월 지방기업인 동원건설을 인수, 율산건설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해외건설공사 수주에도 참여한다. 율산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율산그룹 공채 1기로 들어간 김태욱(광주서중 39회·현 광주문화예술진흥위원)의 증언.
“입사 이후 수습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다른 회사와 달리 외국어는 물론 미술 연극 영화 등 일반상식을 많이 배웠다. 일종의 전인교육이었다. 외국 바이어를 만나도 율산인으로서 기죽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 때는 정말 일과 낭만이 함께하는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율산신화'' 주역 신선호는

율산 신화의 주역 신선호 사장은 어떤 사람일까.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파격적 아이디어와 집요한 추진력을 갖춘 사나이, 그러면서도 말이 없고 극히 내성적인 사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증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풍부한 독서와 천재적 사고였다.


율산그룹 출신인 김태욱은 신 사장에 대해 `돈키호테의 머리에, 햄릿의 가슴''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돈키호테형''이라는 말은 신 사장의 천재적 발상을 가리킨 말이다.
율산실업 수입부에 근무했던 정영철(현재 서울에서 영경실업 경영)의 회고. “간혹 신 사장이 머리에 `새집''을 짓고 다니고 양복에 비듬이 떨어져있는 것을 본적이 있었다. 신 사장이 다른 기업총수와 다른 점이 바로 이런 소탈함이었다.”


신선호는 고흥군 도양면에서 신형식·임옥빈 부부의 7남2녀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율산''이란 이름은 부친 신형식의 호에서 연유했다. 그는 광주서중, 경기고, 서울대 응용수학과를 졸업한 KS마크의 엘리트. 그러나 그의 이력은 형제들에 비한다면 오히려 한미하다.
큰형 은호씨는 대학 2학년때 하버드대에 유학한 물리학박사로 MIT를 거쳐 마이애미대 교수다.
둘째 형 상호씨는 전남대 철학과 교수를 지내다 후일 율산그룹 부사장으로 경영에 참여했다. 셋째 형 동호씨는 버클리대와 피츠버그대에서 생화학과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에서 안과의사로 활약하고 있다. 4남 춘호씨도 마이애미대 화학박사로 미국 화학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5남 명호씨는 행정고시 합격 후 재무부 제2차관보 등 관직을 거친 뒤 주택은행장과 아시아개발은행 부총재를 지냈다.


그의 처가도 화려하다. 그의 장인은 조선일보 주필과 사상계 편집인을 지낸 당대의 강골 언론인인 부완혁. 부완혁는 장준하 이후 사상계를 발행하다 김지하의 시 `오적''을 게재하면서 사상계 폐간이란 비운을 맞았다. 1977년 율산그룹 회장으로 변신을 시도했으나 율산의 몰락으로 실패했다.
부완혁은 85년 사망할 때 율산 부도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장문의 유고(遺稿)를 남겼다. 그의 딸이자 신선호의 부인인 부정애씨가 사상계의 복간을 추진중이다.

 

 

**초안준 전 율산실업 수출본부장 인터뷰


율산그룹 창업주역 중 한사람이자 실세 `3인방''으로 불렸던 최안준(현재 57세)씨가 1979년 율산 부도 이후 25년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20대 후반 율산실업 영업사원을 시작으로, 수출담당과장, 수출본부장·조달본부장 겸 율산해운 부사장 등 30대 초반까지 율산의 핵심 요직을 지냈다.
그는 율산의 성장과 몰락을 신선호 사장과 함께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로 지목돼왔었다. 그는 신 사장의 광주서중 동기다.


최씨는 “지금까지 수많은 신문, 방송, 심지어 여성지에서도 인터뷰 요청이 왔지만 입을 다물고 살았다.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최씨는 광주일보의 인터뷰 요청에도 부담스러워 했다. `할말이 많지만 아직 때가 아니다''고 처음에는 거절했다.
인터뷰는 지난달 27일과 6일 두차례에 걸쳐 서울 강남구 역삼동 최씨의 사무실에서 7시간동안 진행됐다. 어렵게 만났지만 막상 말문을 열자 격정적으로 토로했다. 30대 초반 율산의 수출을 총괄했던 명성만큼 열정적이었다. 그를 기억하는 율산맨들은 `안되는 것이 없었던 탱크같은 사나이''라고 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영문 이름 이니셜을 딴 AJ월드라는 정보통신회사를 운영하고있다.


평범한 오퍼상에 불과했던 율산이 급성장하게 된 계기는 원길남이 국내에 보낸 L/C(신용장)라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최안준도 “여기서부터 율산의 히스토리가 시작된다”고 말문을 꺼냈다. 75년 초의 일이다.
제조업체로 부터 거부당한 L/C가 돌고 돌다 율산의 젊은이들 손에 걸려들었다. 문제는 어떻게하면 원길남이 덤핑해버린 건축자재의 수출가와 중동지역 항구의 극심한 체선(滯船)을 극복하느냐였다.
신선호, 최안준 등 율산맨들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최안준은 이 대목에서 “율산의 성공이 우연이라고 폄하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우리는 전문가의 도움을 철저히 받았다. 그들의 조언과 젊음의 활기가 시너지효과를 낳았고 새로운 기업 패러다임을 형성한 것이다”고 말했다.


율산은 우선 삼양선박의 1만400t급 트윈드래곤을 빌렸다. 그러나 이 배는 원길남의 주문량을 채우고도 여유공간이 너무 많았다. 배를 채우기 위해 청구목재의 합판, 한국제지의 종이, 부산파이프의 파이프, 동양시멘트의 시멘트, 미진금속의 피팅유, 철근 등 건축자재들을 긁어 모았다. 그래도 1만t이 채 안됐다.
원길남의 L/C가 발행된지 1년이 다되서야 트윈드래곤이 쿠웨이트항에 도착했다. 최안준의 회고. “쿠웨이트 바이어들 입장에서는 대박이 터졌다. 원길남의 말만 믿고 발행했던 L/C를 사실상 포기하고 원길남을 `사기꾼''으로 처벌할려고까지 한 판국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죽은 놈이 효자된 격이었다.”
율산은 원길남을 율산실업 쿠웨이트 지사장으로 임명한다. 신이 난 원길남도 이 명함을 만들어 뿌리고 다니며 주문을 받는다.
율산의 두번째 중동행 화물선은 진양해운의 1만8천t급 진양 11호. 율산은 이런 식으로 75년 한해동안 430만달러를 중동에 수출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율산의 여건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었다.
“첫 수출을 한 뒤에도 은행에서는 거래를 꺼렸다. 신용도 없고 담보도 없는 회사 아닌가. 신용장 나오면 그 액수만큼 현금으로 바꿔주어야 하는데 안끊어 주었다. 결국 담보가치도 별로 없는 신 사장 부친의 고흥 임야를 잡혔다. 은행이 `경리'' 역할을 하고 우리는 일만하는 격이었다.”


율산은 75년말 첫 해외지사장인 박현도를 보낸다. 박현도는 이란 테헤란을 거쳐 쿠웨이트와 사우디를 돈다.
박현도를 파견한 것은 원길남에 대한 불신 때문. “원길남은 수입가를 더욱 낮추고 자신의 커미션을 올려 달라고 요구해왔다. 신선호 사장이 `제대로 세일할 우리 사람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원길남과 율산의 인연은 이때부터 끊어졌다.


박현도는 물건을 세일할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는 현지의 건설붐을 보고한다. 중동으로부터의 주문량은 쌓여갔다. 그러나 중동 항구의 체선이란 사정을 악용한 선박회사는 운임료를 올렸다. 국내 제조업체로부터 공급 물량을 확보하는데도 어려움이 컸다. 부도 직전인 시멘트회사도 율산에 물건을 주지 않을 정도였다.
아직 20대 후반이었던 율산맨들을 아직은 믿을수 없었던 것이다.
율산맨들은 갖은 인맥을 동원해 제조회사의 수출담당 부장, 과장에게 간청했다.
“거래처의 마당을 쓸어 줄 정도로 사정했다. 그런 열정에 감복하는 사람도 많았다.”


76년 들어서면서 율산실업의 직원들은 100여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76년은 그야말로 율산의 급성장기였다.
율산의 조언그룹이자 창업멤버들의 광주서중 선배인 조원석(전 한국해운공사 전무)과 김두윤(한국 최초의해사사고 전문 정산인), 신태우(율산실업 고문, 율산해운 부사장 역임) 등 해운계 원로들은 한국 선박이 아닌 외국 선박을 빌려 수출하라는 조언을 해준다. `적기 임대와 배의 크기를 화주가 결정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율산맨들은 조언대로 일본 가와사키라인의 한국대리인인 천우사로부터 화물선 하나를 빌려 76년 사우디로 보낸다.
최초의 외국배 임대였다.
여기에 신선호 사장의 형인 신은호 박사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쉬핑브로커 라일리를 소개했다.
라일리는 77년 창립된 율산해운이 국제적 운영시스템을 갖추는데 많은 기여를 하게된다.
율산은 가와사키라인에서 빌린 화물선에 페인트칠을 새로해 `율산라인''이란 글씨와 율산마크를 큼직하게 그렸다. 물론 율산라인은 가공의 회사였지만 결과적으로 중동 바이어들에게는 해운회사까지 갖고있는 큰 회사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 뒤부터 율산의 모든 수출선은 이런 페인트작업을 부산항에서 한 뒤 출항했다.


중동 수출붐을 타고 은행이나 거래업체들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강자인 은행과 약자인 율산의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신용장만 오면 로컬 끊어 은행에서 돈을 내왔다. 무이자인 엄청난 돈이 쌓여갔다. 한마디로 쌓여서 주체 못할 정도의 돈벼락을 맞았다. 심하게 표현하면 직원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직원 스스로 월급을 싸가지고 가고 액수만 써넣을 정도로 돈 풍년이었다.”


75년 12월 율산은 첫 제조회사를 인수한다. 신진알미늄을 인수해 율산알미늄을 차린다.
경기도 광주에있는 신진알미늄은 조업율 20%선에 머물던 부도 직전의 적자기업.
“신진알미늄을 인수해 공장에 가보니 직원들이 일은 하지않고 축구를 하고 놀고있었다. 공장사람들의 80%가 전라도 출신이었다. 직원들을 운동장에 집합시키고 `밀린 월급 일주일안에 모두 주겠다. 떠날 사람은 당장 떠나라. 기계 녹 털고 2주일후부터는 24시간 3교대 풀로 가동한다. 집에 다녀올 사람들은 그동안 휴가다녀와라''고 말했다. 2년동안 공장이 제대로 돌지 않았던 직원들은 믿지않았다. 그러나 일주일만에 알미늄 원자재가 공장으로 들어가니 그때부터 일을 하기 시작했다.”


율산은 77년초 동진빌딩(이 빌딩 4개층을 씀)에서 서울 한복판 동방빌딩 7, 8층으로 사옥을 옮긴다. 입주 당시 2개층의 4분의 3이 비어있었는데 3, 4개월만에 빈 공간이 모두 채울 정도로 인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율산은 76년 말부터 2, 3달 간격으로 공채 신입사원을 채용한다. 당시 율산은 셀러리맨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율산에 들어와 6개월만 지내면 최고참이던 시절이었다. 율산이 다른 사람이 키운 회사를 빼앗지 않은 것 처럼 다른 회사의 인재를 스카우트하지 않았다. 율산은 백지상태의 사람들을 원했다. 율산이 직접 교육한 율산맨들을 원한 것이다. 그런데 뽑고 나서보면 다른 회사 대리, 계장들이 경력을 속이고 신입사원으로 들어와있었다.”


율산은 75년 430만달러 수출을 시발로 76년 4천300만달러, 77년 1억6천500만달러를 수출해 수출물량을 급성장시킨다. 신선호 사장은 75년 이후 3년동안 동탑산업훈장을 시작으로 은탑, 금탑산업훈장을 받는다.
78년 2월에는 대망의 종합무역상사 지정도 받는다.
율산은 또 78년초를 전후해 율산실업을 비롯, 율산알미늄, 율산해운, 광성피혁, 율산전자, 율산중공업, 호텔내장산, 율산제화, 동아공업, 경흥물산 등 14개회사를 거느려 외형상 `그룹''의 형태도 갖춘다.
그룹 전체 종업원은 8천명에 육박한다.


77년은 율산의 전성기였다. 이런 가운데 78년이 밝았다. 율산의 몰락은 역설적으로 이때부터 시작됐다.
78년 3, 4월께. 신선호 사장의 장인이자 율산그룹 회장인 부완혁(85년 작고)은 율산 중역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언론인 부완혁은 사위의 회사에 회장으로 영입됐었다.
최안준이 전한 부완혁의 말. “이대로 가면 2~3년안에 율산은 무너진다. 신 사장도 주주로만 남고 나머지 창업멤버들은 모두 회사를 나가라. 외부전문가나 공직자 출신들을 모셔 회사를 경영할 때가 됐다. 그동안 하버드대 비지니스스쿨 같은데 가서 공부하라. 그러다보면 율산의 존재는 남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율산은 뿌리채 없어진다.”


율산은 당시 절정기를 누리고 있었고 재정상 문제점도 발견되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정국의 흐름과 정보에 정통했던 부완혁의 이 말은 불과 수개월뒤 예언처럼 들어맞는다.
부완혁의 예지력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었다. 율산의 성장은 이미 기존 재벌들의 견제대상 정도가 아닌 타도의 반열에 올랐다. 재계의 견제와 음해가 난무하기 시작했고 율산맨들도 스스로의 창업정신에서 벗어나 재벌의 구태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최안준의 말.
“우리는 우리대로 강변했지만 재계의 기득권세력은 우리를 거부했다. 기업이 커가고 계열사가 늘면서 나도 모르게 매너리즘에 빠진 부분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스스로) 재벌놀음화 된 부분도 있었다. 행정규제와 주위의 질시도 심했다. 우리를 두고 `기존의 질서와 상거래를 문란케한다''는 음해가 떠돌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78년 시멘트 수출중지와 추석 명절 때의 밤빔사건, 79년 초 신선호 사장 납치사건이 동시다발로 발생했다. 걷잡을 수 없었다.”

 

 

**갖가지 신화와 진실 


율산의 급성장을 두고 몇가지 신화같은 얘기가 떠돌고있다. 그러나 신화는 가공되기 마련이다.
사실에 기원하지 않거나 각색된 신화 탄생은 율산 성장의 미스테리에 또 다른 상징성을 부여했다.


대표적인 것이 신선호 사장의 장형 신은호 박사와 사우디 황태자와의 관계. 소문은 이렇다. 하버드대 물리학 박사 출신인 신은호가 미국 유학중 사우디 아리비아의 황태자 알파시 왕자의 룸메이트였다.
알파시 왕자가 율산의 중동 진출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내용이다.
최안준의 사실 확인.
“그런 소문이 무성했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율산이 중동에 진출하는데 사우디 황태자의 도움은 전혀 없었다. 단 율산이 중동에 진출한 뒤 중동국가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왕자들을 율산에 우호적인 세력으로 만들려고 했고, 사실 이들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또 다른 신화 하나. 율산의 수출선이 처음 쿠웨이트항에 도착했을 때의 일. 소문은 이렇다.
`신선호와 최안준이 이 배를 같이 타고 왔다. 신선호는 항구 체선으로 하역이 늦어지자 기발한 꾀를 생각했다. 신선호는 조니워커 한병을 들고 선장실을 찾는다. 다음날 아침 이 배의 갑판에서 불이 났다. 신 사장이 화물선의 선장과 담판을 짓고 배에 불을 지른 것이다. 사우디의 항만법에 화재가 난 배는 우선 하역한다는 조항을 이용한 것이다. 당연히 율산의 화물선은 의도된 소형화재를 이용해 긴급 하역을 하게된다.''
최안준의 말.
“그런 얘기를 나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사실은 좀 다르다. 우리가 화물선을 타고 한달이상 걸리는 항해를 같이 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중동 현지의 율산 직원이 `체선으로 인해 미치겠다''고 연락이 와서 내가 즉흥적으로 물었다. `선장실을 전부 태우면 얼마나 들겠냐''는 질문이었다. 그 직원으로부터 전달된 선장의 대답은 `2천달러''. 나는 직원에게 당장 불을 지르라고 지시했다. 하루 체선료만 수만달러인데 2천달러면 껌값이었다.”


LST와 헬기를 이용한 중동항구 하역도 업계에서는 전설처럼 유명하다.
열악한 중동 지역 항구의 극심한 체선은 중동수출의 최대 걸림돌.
율산은 베트남전이 끝난 뒤 폐기상태였던 LST와 현지의 헬기를 이용해 속도전으로 하역작전을 끝냈다.
최안준의 확인.
“불을 지르는 것도 한두번 아닌가. LST와 헬기 하역은 다른 회사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영국 회사에서 헬기를 임대했고 LST 상륙허가를 받아 율산을 위한 임시도로까지 개설했다. 그 과정에서 1년동안 헬기 4대가 추락하는 사고도 있었다. 어찌됐든 이런 방식의 하역은 현지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78년 초. 부완혁 회장의 `창업멤버 전원 퇴진'' 주장에 율산 임원급 창업 멤버들은 도고온천으로 향한다.
이들은 격론 끝에 `모두 (현직에서) 물러나자''는 결정을 내린다. 신선호 사장에게 집단사표가 제출된다.
그러나 신 사장은 부 회장의 주장과 전혀 다른 처방을 내린다.
오히려 대규모 인사를 통해 자신의 친정체제를 강화해버린 것이다.
율산그룹 기획본부장이자 실세인 정문수는 소규모 회사인 율산엔지니어링 사장으로, 강동원은 경흥물산사장으로 사실상 좌천된다. 반대로 수출본부장 최안준에게는 권한이 집중됐다.


정문수는 창업멤버는 아니지만 율산의 역사에서 빼놓아서는 안될 인물. 조대부중, 경기고, 서울법대를 거친 수재, 정문수는 행정고시에 합격, 보사부 서기관으로 있다가 율산의 기획본부장에 영입된다. 정문수 이후 율산에는 30대 초반의 고시 출신 관료들이 대거 몰려온다. 인적쇄신을 주장했던 부완혁과 상공부차관보 출신으로 율산 부사장을 지낸 이문홍도 율산을 떠난다. 율산으로서는 최초로 터진 경영층 내부의 불화였다.


재정운영 관리 잘못 최안준의 회고.
“77년 말 재무재표상 문제가 없었다. 고정여신에 대한 부채는 거의 없었다. 정부의 수출장려책으로 무역금융만으로 그룹을 충분히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78년부터 빚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들지만 자금관리를 잘못한 점이 있었다. 여유자금이 있을때 프로젝트별로 재정운영을 패키지화해서 장기대부에 의존해야 하는데 무역금융이라는 초단기대부로 투자한 것이 잘못이었다. 78년초 유동성자금이 고정화되면서 자금사정이 악화됐다.”


78년 중반을 넘어서면서 율산이 위험하다는 소문이 사채시장을 중심으로 나돌았다.
외부적 요인도 율산을 위협했다.
78년 여름 율산의 주요 수출품목인 시멘트, 합판, 철근 등의 수출이 돌연 금지됐다. 또 3억달러 규모의 사우디 주택성의 아파트 건설회사가 사우디 국내외사정으로 갑자기 지연됐다. 온산알미늄 대단위 공장건설에 대한 장기 대출조치가 1년여 지연됐다. `8·8 투기억제조치''로 인해 부동산경기도 급격히 식었다.


지금까지 거론되는 율산 몰락의 원인은 ▲단기성 자금을 고정자산에 묶어놓는 등 관리능력 부족 ▲주 수출국인 사우디와의 마찰이 과장돼 자금시장의 신용도 하락 ▲저돌적이고 독창적인 경영스타일이 기존재벌의 반감을 부름 ▲차입경영으로 몸집불리기에 몰두 등이다.
여기에 78년 추석명절을 전후한 밤빔사건과 79년 1월 신선호 사장 납치사건이 연쇄적으로 터진다.


문제는 율산몰락 이후 끊임없이 제기되고있는 `정치적 외압설'' 또는 `율산 타살설''.
다시 최안준의 말.
“부완혁 회장의 예언적 발언(이대로 가면 율산은 2-3년안에 무너진다·) 이후 1년동안의 과정은 단발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히스토리로 연결된다. 모든 것이 조직적이고 치밀하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뤄졌고, 여기에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적 악평이 떠돌았다. 율산 몰락에는 하나의 시나리오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79년 9월을 넘어서면서 율산그룹은 극심한 자금난에 부딪친다. 율산은 재무부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 주거래은행인 서울신탁은행등은 이해 9월 30억원, 11월 40억원 등 총 70억원의 구제금융을 지원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율산은 보유 부동산 처분에 나서지만 정부의 투기억제조치로 이미 똥값이 된 상황이었다. 79년 2월 20일 은행감리가 시작됐다. 이 시기 율산은 새 회장으로 진의종을 영입한다. 진의종은 직전 개편된 경제팀 수장인 신현확 부총리의 경성제대 법문학부 동기였다. 그러나 감리단은 호텔내장산을 시작으로 율산제화, 율산전자 등 계열사를 하나씩 매각해갔다.
“기업을 살리는 감리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죽이는 감리''가 시작됐다. 주력기업을 살리는 것이 아닌 신선호 퇴출을 위한 수순을 밟았다. 최종적으로 남은 것이 율산실업, 율산건설, 서울터미널 등 껍데기만 남았다.”


감리단 계열사 매각경찰의 수사도 시작됐다. 경찰청 특수수사대는 3월 20일 신선호 사장을 불러들인다. 결국 4월 3일 특수대에 파견나와있던 주광일 심재륜 검사는 율산그룹 신선호 사장을 업무상횡령과 외환관리법위반 혐의로 구속한다. 신 사장이 구속된 이틀 뒤인 4월 6일 율산그룹 전 계열사는 일괄 부도처리된다. 주거래은행인 홍윤섭 서울신탁은행장은 업무상 배임으로, 정문수도 외환관리법 위반혐의로 4월 13일 전격 구속된다. 홍 행장과 정문수는 이후 법정투쟁 끝에 무죄판결을 받는다.


최안준이 보는 율산부도의 배경은 무엇일까.
“신선호 사장과 정문수 외에 다른 어떤 사람도 구속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주요 혐의는 나중에 무죄가 됐다. 율산의 경영이 그만큼 깨끗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율산이 왜 부도났는가는 핵심간부인 나에게도 미스테리다. 율산의 잠재력과 국부가 하루아침에 사장됐다. 그렇게 큰 그룹을 무너뜨리면서 신선호 하나에게 모든 책임을 돌렸다. 그 (율산 몰락) 단초를 제공한 사람은 어디 갔는가. 돌만 던지지 개구리의 운명은 몰라라 했던 것이다.”


그룹 최상층부인 자신도 모르는 부도 이유가 있을수 있을까. 그렇다면 가해자는 누구일까.
“어찌보면 율산은 너무 순진했다. 나만 죄를 짓지않으면 되지, 세금 잘내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 율산의 기본생각이었다. 율산은 아이디어를 통해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었다. 기존질서를 뒤엎고 변화를 유도해갔다. 이 과정에서 변화를 거부한 사람들은 엄청난 견제를했다. 율산몰락에는 엄청난 음모와 정치적 배경이있다. 정부의 합동작전이었다. 율산은 결국 이지메를 당했다. 처음부터 율산을 몰락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닐 지 몰라도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 결국 이렇게 된 것이다.”


최안준의 설명을 들으면 율산몰락에는 경제외적인 요인, 즉 정치적 요인이 많았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배경과 주역들의 이름에 대해 그는 함구했다. “언젠가는 말해야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며 말문을 닫았다.
`외압주역'' 끝내함구율산 부도 이후 최안준은 가혹한 수사를 당한다. “내 뒷조사를 철저히 당했다. 그룹 내에서 업무추진비를 가장 많이 쓴게 나다. 신 사장보다 더 썼다. 당시 신문에는 날마다 내가 곧 구속된다고 도배질을 했었다. 은행 지점장, 서기관급 이상 공무원, 신문사 국장급 하나만 불면 풀어주겠다는 회유를 엄청 받았다. 대한민국의 수사란 수사는 모두 받았다. 검찰, 경찰청, 특수수사대는 물론, 서빙고분실에서 거짓말탐지기 검사까지 받았다. 79년 3월부터 6월까지 꼭 석달간이었다. 이건개, 이종창, 심재륜 등 당대의 검사들의 조사를 모두 받았다. 아무리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았다.”신선호 사장은 1심에서 징역 7년, 2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주요 혐의인 업무상횡령 부분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신 사장은 사건이 대법원에 계류중이던 80년 7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동안 권력자 박정희는 사망했고, 율산의 14개 계열사는 다른 재벌들의 차지가됐다.

 

**밤빔사건과 신선호 납치 


밤빔사건과 신 사장 납치사건은 율산의 도산과 외형상 직접적 관련은 없다. 그러나 5개월여의 시차를 두고 발생한 두사건은 `청년재벌 신화''라는 율산의 이미지에 결정타를 먹였다. 율산의 내리막길에 터진 이 두사건은 몰락 과정의 상징적 사건이자, 정치적 음모설의 배경이된다.


먼저 `밤빔''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율산 계열사인 경흥물산이 만든 기성복 제조업체의 브랜드다. 70년대 후반 `맥그리거'' `반도패션'' `뱅뱅''이 주름잡던 기성복시장에 율산이 도전한 것이다.
이 밤빔이 하필이면 78년 9월 추석 직전 전국에 매장을 연다.
이 과정에서 하나의 아이디어가 나온다. 밤빔을 티켓으로 만들어 고객들과 관계 기관, 거래처, 은행에 선물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밤빔티켓이 청와대 사정반에 적발됐다.
당시 율산만이 선물공세를 했겠는가, 모든 기업이 마찬가지인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밤빔사건은 관료집단이 밀집된 세종로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결국 율산으로 부터 밤빔티켓을 받은 공무원들이 대거 옷을 벗고 공직을 떠난다. `그런 사건하나도 수습 못하는 집단, 결국 어린아이들이군''이라는 비웃음이 관가를 떠돌았다.


신 사장 납치사건은 더 극적이다. 79년 1월 25일 오후 1시께, 서울 중구 태평로 동방빌딩 7층 율산그룹 사장실. 신선호 사장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전화의 목소리는 20대로 젊었지만 고압적이었다. “정부 고위기관 비서실인데 윗사람이 좀 보자고 합니다. 할 얘기가 있으니 오후 2시 30분까지 경제기획원 앞으로 나오기 바랍니다.”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신 사장은 막막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정중한데다 `정부 고위기관''이란 말은 그를 옥죄었다. 물어볼 것도 없이 `청와대 비서실''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는 접대용 마크포 승용차를 타고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2-3분 뒤 25, 6세가량의 청년 2명이 다가왔다.
이들은 신 사장의 운전사를 차에서 내리게 한 뒤 직접 운전을 했다.
그러나 차는 청와대 방향으로 달리지 않았다. 신 사장은 “어디로 가는가, 무엇을 원하는가”고 물었다. 그들은 “뻔한 것 아니냐. 경기도 여주 근처 조용한 곳에서 얘기하겠다. 대우그룹 김우중을 택하려다 신 사장이 더 잘 통할 것 같아 택했다”며 신사장의 두팔을 양』쪽으로 끼고 꼼짝 못하게했다.차는 삼청터널을 지나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했다.신 사장에게 탈출할 기회는 이때 뿐. 차가 톨게이트에 들어서 정차하는 순간, 신 사장은 “사람 살려”라며 뒷문을 열고 달아났다. 신선호 납치사건은 이후 범인들이 붙잡히면서 단순한 인질납치극으로 결론났다.
재벌총수의 백주납치사건은 세상을 뒤흔들었다. 문제는 신 사장이 탈출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터졌다. `재벌총수가 순순히 따라 간것이 납득이 가지않는다''는 기자들의 집요한 질문에 “사실은 청와대 비서실을 사칭했기 때문에 따라나섰다”고 실토해버린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이 어딘가. 무소불위의 권력기관 아닌가. 당시 김계원 비서실장이 신 사장의 회견내용을 전해들은 뒤 노발대발했고, 이것이 율산을 회생불능으로 몰고 갔다는 얘기가 떠돌고있다.


율산그룹 계열 14개 회사가 일괄부도 처리된 10여일이 지난 79년 4월 17일 국회 재무위(위원장 장승태)가 긴급 소집됐다.
율산 부도 당시 금융기관 총여신액은 1천332억원. 수출관련 여신 629억원, 시설자금 여신 205억원, 해외건설공사 관계 지급보증 108억원, 기타여신 39억원 등이다. 종업원은 창립 당시 20명에서 78년말 8천100명. 해외건설 종사자만 1천명에 달했다. 해외지사도 31개나 됐다.
재무부장관 김원기는 율산의 급성장에 대해 “수출과 해외건설활동에 주력하면서 각종 제도적 지원을 최대한 활용한 결과다. 초기 중동건축 자재의 수출과 해운으로 출발해 수출선수금을 받아 사업확장에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김 장관은 이어 “그러나 14개 기업을 인수·창업하면서 순수 주식취득자금은 14억원에 불과하고 100억원이 넘는 기존채무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자기자본과 사내유보가 부족했다”고 방만한 경영을 부도 이유로 밝혔다. 즉 기업인수가 사내유보 등 여유자금이 아닌 기업 채무의 인수나 계열회사 상호출자 및 대주주 관계인에 대한 가불금을 통해 이뤄졌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김 장관은 항간에 떠돌던 `외부압력설'', `율산타살설''에 대해 전면 부인했다.
김 장관은 “(외부 압력은) 전혀 없다. 확실히 말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이용만 재무부차관보도 “78년 9월 이후 율산계열기업의 자금부족이 표면화됐다. (주거래은행인) 서울신탁은행을 중심으로 채권은행 공동협의하에 일부 긴급자금 지원했고 율산도 부동산 처분 등을 통한 자체회생을 확약했다. 그러나 자금부족을 해결하려는 자체 노력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 당국자의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 있었다. 이 차관보는 “전체 여신 1천332억원은 계열사나 부동산 매각으로 거의 갚을 수 있다. 따라서 금융기관의 손실은 없다”는 취지의 말을 한다. 부채를 전체 자산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율산부도의 배경을 추궁하는 야당 의원들의 추궁은 매서웠다. 신민당 김승목 의원은 “건국 이후 유례없는 중대한 금융부정사건이자 국민적 공분을 사는 사건이다. 고도성장 정책과 수출제일주의 정책의 문제점이 드러난 정치권력적 특색을 지닌 사건이다”며 전 경제팀인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 남덕우 경제기획원장관, 김용환 재무부장관 등 전 경제팀 3인방을 증인으로 요청했다.


왜 하필이면 전 경제팀인가. 또 왜 청와대 비서실장이 경제팀에 속하는가.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지만 김정렴은 비서실장 9년동안 우리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김 실장을 정점으로 한 `경제 3인방''의 파워는 막강했다. 권력개입을 밝혀줄 이들에 대한 증인출석 요청은 물론 여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율산부도의 배경을 놓고 지금도 이들 경제 3인방과 김계원 비서실장-신현확 경제기획원장관-김원기 재무장관의 신실세간 갈등설이 떠도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승목 의원은 “억대 이상 대출은 어디에서 지시해야 나온다는 것 다 안다. 그런데 일개 하수인인 은행장만 구속한 것은 국민들을 호도한 행위다”고 비난했다.
담양·곡성·화순 출신 신민당 고재청 의원은 “김정렴, 남덕우, 김용환 경제팀이 이 나라 재정금융을 한손에 쥐고 모든 일을 저질렀다고 보고있다. 1972년 이후 수십개 사건, 박영복 사건, 한독맥주사건, 고려원양사건, 원기업사건에도 책임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왜냐 권력의 심층부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율산은 현대 할아버지와 대우 아버지가 한것을 그대로 배워서 썼다. 율산이 무슨 (새로운) 꾀를 낸 것은 아니다”고 정부를 공격했다.
해남·진도 출신 민정회 임영득 의원은 “율산은 분명히 호남인의 기업이었다. 때문에 호남에서는 왜 하필이면 율산이 얻어 맞아야되느냐 많은 종합상사들이 수출금융을 악용하고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는데 왜 율산이냐며 분개하고 있는 여론이 있다”며 지역색을 거론했다.


79년 2월 20일부터 시작된 율산그룹에 대한 채권은행 감리는 부도 전까지 내장산관광호텔, 율산제화, 동아공업, 율산전자, 유신관광 등 5개 기업을 처분해갔다. 이후에도 알짜기업인 율산해운은 범양상선에, 율산알미늄은 효성 등 재벌들에게 헐값에 팔려나간다. 일사천리식 진행이었다.
그런 가운데 율산맨들의 회생을 위한 노력도 벌어졌다. 사원들은 율산의 수출부문이라도 유지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탄원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당시 동아일보 김동욱 회장 등 각계 인사들이 신 사장의 선처를 촉구하는 탄원서를 정부에 내기도했다.


79년 추석 직전 율산직원 수백명이 주거래은행인 서울신탁은행 명동본점 앞에서 일종의 시위를 벌였다. 다름아닌 `1천원 예금 후 다시 찾기운동''. 길게 늘어선 수백명의 율산직원들이 천원짜리 한장을 들고가 예금을 한 뒤 다시 예금을 찾는 일종의 합법적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들은 새 주인을 찾지 못한 율산실업과 율산엔지니어링 등 일종의 페이퍼컴퍼니 사원들이었다.
이것이 효과가 있었다. 추석 이틀 전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지시가 서울신탁은행에 내려온다. 율산의 체불임금과 퇴직금을 청산해주라는 것이었다. 서울신탁은행에서 곧바로 10억원을 대출해 주었다. 부도를 당하고도 임금체불에 의한 근로기준법 위반이 없었던 유일한 사례가 바로 율산이다.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박 대통령과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비극의 10·26사건이 터진 날 박 대통령의 마지막 일정은 삽교천 방조제공사 준공식 참석이었다. 준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을 갖다 김재규의 총에 맞았다.
바로 이 삽교천 방조제공사가 율산건설에서 시공한 마지막 공사였다. 율산부도에 직간접적 영향을 행사한 국정 최고책임자가 부도 난 기업의 건설현장 준공식 참석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세상사의 인과응보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율산맨들은 율산몰락 이후 각각 뿔뿔히 흩어졌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이 대부분이었던 그들은 이후 대부분 사회 각 부문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한다. 그러나 일부는 젊은 시절의 잘 나가던 시절로 인해 좌절의 나날을 보낸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들은 “율산이 구상했던 수많은 아이디어와 프로젝트가 곧바로 국부(國富)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며 “이런 구상이 실현 직전 무너졌다”며 지금도 안타까워했다.
율산실업 수입부에서 과장을 했던 천병권(현 호남대교수)은 경제학자답게 율산의 몰락을 한 마디로 요약했다.
“율산은 한국기업사에서 정경유착없이 시장원리에 의해 성장한 최초의 기업이다. 그런 기업이 가장 반시장적 원리에 의해서 몰락한 것이 안타깝다. 또 그많은 유무형의 자산이 완전히 궤멸된 것은 국가적 차원의 비극이었다.”

**재기 밑천 ''센트럴시티''는

서울 강남 호남선 터미널이 들어선 지상 16층의 웅장한 건물. 바로 터미널과 호텔, 백화점 등으로 구성된 복합생활공간, 센트럴시티다. 현재 율산그룹 신선호 사장은 (주)센트럴시티의 회장이다.
율산은 79년 부도 이후 공중분해됐지만 강남의 금싸라기 땅 호남선 터미널 부지는 그대로 남았다.
사는 집까지 담보로 잡혔던 급박한 상황에서 신 사장은 어떻게 1만8천781평의 이 땅을 지킬수 있었을까.


율산이 서울시로부터 이 땅을 구입한 것은 77년 4월. 평당 7만원, 총 13억원이 지급됐다.
세간에는 율산이 터미널부지에 군침을 삼켰다지만 취재 결과 사실은 달랐다.
77년 어느날 신 사장은 당시 서울시장인 구자춘의 호출을 받는다.
구 시장은 다짜고짜 “터미널 부근이 잡상인 투성이이니 이를 현대적 시설로 정비해달라”고 요청한다.
구시장의 요청은 박정희 대통령의 `서울터미널 부근 정비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당초 서울시의 구상에 율산은 없었다. 현대, 삼성, 대우 등 굴지의 기업들이 채산성이나 또 다른 특혜를 요구하며 난색을 표시하면서 율산에까지 차례가 왔다. 이를 율산이 덜컥 안게된다.
“서울시에 사기당했다” “병신같은 어린애들”이라는 비아냥이 재계에 돌아다닌다. 그러나 율산은 78년 3월 호남선 터미널을 가건물로 지어 호남·영동선 고속터미널 영업을 시작한다. 20여년동안 서울 강남의 경부선 터미널과 비교되며 호남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그 가건물이다. 이후 율산은 본공사를 위해 지하 2층 터파기공사를 하다 부도를 맞았다. 일본의 최담단 H빔 기술을 동원해 지어지던 호남선 터미널공사는 이후 센트럴시티가 준공될 때까지 20여년을 가건물상태로 운영된다.


신 사장이 터미널 부지를 인수한 데는 서울시의 강권도 있었지만 나름대로의 구상도 있었다.
바로 복합문화생활공간이었다. 신 사장 등 율산맨들이 구상했던 빅 아이디어중 하나였다.
빌딩을 지어 아래층은 터미널, 중간층은 전문상가, 그 위는 호텔로 활용한다는 것이 신 사장의 구상이었다.
심지어 불과 5년전 국내에 소개된 멀티플렉스에 대한 계획도 당시 구상에 잡혀져 있었다.
율산은 부도 직전 과천 서울랜드 공사를 수주했고, 잠실 석촌호수 주변에 종합레저시설을 설립하기 위해 땅도 매입했다. 석촌호수 프로젝트는 부도 이후 결국 롯데로 넘어갔으며 현재의 `롯데월드''라는 이름으로 롯데에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있다.

부도 이후 채권단은 율산의 부동산을 모두 팔아치웠다.
한푼이라도 건지려는 채권단이 터미널부지는 왜 팔지 못했을까.
땅 주인은 율산이지만 법적인 등기가 서울시로 돼있었기 때문이다. 77년 율산이 이 땅을 매입할 당시 서울시의 환지확정이 이뤄지지 않아 돈을 받고도 율산에 소유권이 넘어가지 않은 것이다. 82년 서울시의 환지결정이 이뤄졌지만 이번에는 계약조건이 문제가됐다. 계약서에 용도를 터미널로 못박고 `일정기간 내 터미널을 건축하지 못할 경우 계약을 무효로한다''는 단서조항이 있었다.
역설적으로 이 조항이 신 사장 재기의 밑천이 됐다. 채권단은 터미널부지에 복합건물을 신축해 그 수익금으로 부채를 갚겠다는 율산의 현실적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후 율산은 건물신축에 따른 자금주를 찾아 92년 11월 종합터미널 신축계획안을 낸다. 가건물을 헐어내고 지하 3층, 지상 16층, 연건평 4만6천881평의 백화점·호텔·터미널 복합건물을 짓겠다는 것이 주내용이었다.
그 결과 2000년 9월 1일 메리어트 호텔이 지어지면서 웅장한 서울센트럴시티가 완공된다.
20여년만의 엑소더스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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