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外之士

신선의 꿈과 깨달음의 길_허균

醉月 2008. 4. 29. 20:30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관한 허균의 생각
 
허균(許筠, 1569-1618)은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기생과 사귀다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고,
과거 시험에서 조카를 부정 합격시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아침마다 향을 피워 놓고 부처님께 예불을 했다 하여 파직된 일도 있다.
서자들과 허물없이 어울렸다가 옥사에 연루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달이 관리들이 치르는 시험에선 번번이 일등을 했고,
그를 고약하게 비방하던 인물들조차도 그의 문학적 재능만큼은 꼼짝없이 인정했다.
 
내단 수련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도사 남궁두의 수련 과정을 적은 연단 소설〈남궁선생전〉은
오늘날 단학 수련하는 사람들이 읽어 교과서로 쓸 수 있을만큼 정심한 연단 이론을 섭렵하고 있다.
여러 번 탄핵 당해 파직되고 귀양갔지만,
오뚝이처럼 일어나 어느새 벼슬길에 복귀하곤 했다.
그는 언제나 현실 정치의 중심에 있었고,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또 그 때문에 역모를 꾀하다 49세의 나이로 능지처참형에 처해져 죽었다.
 
오늘날 그는 〈홍길동전〉의 작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백성의 무서운 힘을 역설한 〈호민론〉 같은 글은 그의 개혁사상을 말할 때면 으레 함께 이야기된다.
하지만 그가 그 바쁜 벼슬길의 여가에,
주체적 삶을 살며 세상의 영리에 초연히 벗어났던 옛 선비들의 육성을 하나 하나 모아
《한정록》과 같은 책을 엮은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는 쉴새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현실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음이 많이 허탈했던 듯 하다.
그런 마음을 추슬러 다잡고자 마음 공부와 관계된 글들을 많이 남겼다.
먼저 읽을 글은 〈수잠(睡箴)〉, 즉 잠에 대한 경계를 담은 내용이다.
 
세상 사람들은 잠자는 걸 좋아한다.
밤새도록 잠을 자고도 낮잠을 또 잔다.
잠을 잤는데도 자꾸 졸리면 병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로 안부를 물을 때 먹는 것과 나란히  잘 잤느냐 식사는 했느냐고 묻곤 한다.
사람들이 잠을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알만하다.
젊었을 때 나는 잠이 적었지만 앓는 법이 없었다.
근년 들어 잠이 점점 많아질수록 더 쇠약해 지는지라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잠이란 병이 들어오는 통로이다.
사람의 몸은 혼(魂)과 백(魄) 두 가지로 작용하게 된다.
혼은 양이고 백은 음이다.
음이 성하게 되면 사람은 쇠약해져 병들고 만다.
양이 성대해지면 사람은 건강하여 질병이 없다.
잠들면 혼은 나가고 백이 속에서 일을 꾸민다.
그래서 음의 기운이 성해져서 쇠약한 질병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잠자지 않으면 혼이 작용하게 되어,
스스로 능히 백을 제압하여 양의 기운을 침범치 못하게 된다.
그러니 잠은 너무 많으면 안 된다.

옛 경전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번뇌는 독사(毒蛇)이고,
잠은 네 마음에 달렸다.
독사가 떠나가야 편히 잘 수가 있다.
잠을 즐기는 세상 사람들은 모두 번뇌라는 독사에게 괴롭히는 바가 되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 잠(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한다.
 
"아, 성성옹(허균 자신의 호)이여!
눈은 잠자더라도 마음은 자지 말라.
눈만 자면 마음을 비출 수 있겠지만,
마음마저 잠들면 음기(陰氣)를 지닌 백(魄)이 와서 침범한다네.
백이 침범해 양(陽)이 다치면 몸은 변화해 음이 되리라.
귀신과 더불어 어울릴테니 아, 두렵구나 성성옹이여!"
 
눈은 자더라도 마음은 자지 말라.
육신의 눈은 감아도 마음의 눈마저 잠들면 안 된다.
잠을 자되 마음은 깨어 있으란 말은,
맨 정신으로 자란 말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이런저런 근심이 독이 바짝 오른 독사처럼 또아리를 틀고 고개를 세우고 있다.
여차하여 빈틈만 보이면 단숨에 물어 그 독이 금세 온몸에 퍼지고 말 것이다.
번뇌는 왜 생기는가?
욕심 때문에 생긴다.
내가 남을 이겨야겠고,
더 많이 가져야겠고,
그것도 모자라 통째로 다 가져야겠기에 생긴다.
잠자리가 편치 않고 꿈자리가 사나운 것도 모두 이 마음 속에 또아리 튼 독사 때문이다.
음산한 기운이 그 빈틈을 파고 들어와 내 영혼의 축대를 허물지 않도록
마음의 창을 닦고 또 닦아 깨끗하게 지켜야겠다.
잠들지 말아야겠다.

마음이 잠들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하루에도 수없이 일어났다 스러지는 그 많은 상념들을 다스려야 한다.
생각을 어떻게 다스리나?
마음을 순리에 내맡겨 텅 비우면 된다.
텅 빈 마음 속에서는 생각들이 들어왔다가도 그대로
그 빈 통 속에서 퉁퉁 부딪치다 제풀에 돌아나가고 만다.

다음은 〈위순잠(委順箴)〉이다.

텅빈 고요 속에 몸을 맡기면 몸이 순해져서 천명에 내맡기게 된다.
능히 남에게 응할 수가 있다.
툭 터진 데에 마음을 맡기면 마음이 순해져서 도에 내맡기게 되므로 능히 사물에 응할 수가 있다.
혼연(混然)한 데에 세상을 맡기면 세상이 순해져서 때에 따르게 되어 변화에 응할 수가 있다.
자연스런 것에 일을 맡기면 일이 순조로와 이치에 내맡기게 된다.
그래서 능히 기미에 응할 수가 있다. 능히 맡기고 능히 순조롭고
능히 응할 수 있게 되면 생각이 생겨나지 않으므로 절로 능히 단련할 수 있게 된다.
바르게 할 수 있고 성의를 다할 수 있으며 고요할 수 있다.
능히 내맡기므로 성내지 않고,
능히 순한지라 다투지 않으며,
능히 응하기에 다함이 없다.
이것으로 능히 바르고 능히 안정되며 능히 정성스러움에 이르게 되어,
마침내 고요함에 능하게 되면 마치 달빛의 밝음이나 물결의 깨끗함과 같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을 단련하여 닦아 성명(性命)을 안정시킬 수 있게 되면
천하의 능한 일을 다 마친 것이다.
 
 
위순(委順)이란 말 그대로 순리대로 내맡기라는 것이다.
몸에 고요를 깃들이고,
마음에 허공을 담으며,
분별지로 세상을 가르지 않고,
자연의 법을 따라 일을 처리한다면,
마음 속에 잡된 생각이 일어날 까닭이 없다.
마음을 단련한다 함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공부를 닦는 것을 말한다.
텅 비고 고요하니,
분노가 일어날 일이 없고,
앞서려는 다툼도 없고,
아무리 써도 축나지 않는다.
달이 허공에 떠서 천지 사방을 밝히듯,
맑은 물이 바닥을 훤히 비추듯 일렁이는 생각을 걷어내고 걷어내면 고요만이 남는다.
그 고요가 바로 `본 마음`이요 `참 나`다.

 
다시 그는 이 생각을 〈연념잠(煉念箴)〉으로 이어간다. 
 
마음의 본체는 맑아 늘 깨끗하다.
움직이지 않을 땐 맑은 물거울 같고
텅 비어 신령하고 신비롭고 정밀하다.
으뜸되는 한 기운 냄새 없고 소리 없네.
잡아 둔 지 얼마 안 돼 생각 문득 생겨나지.
엎어지고 자빠져서 미친 듯 놀란 듯이.
슬픔 기쁨, 즐거움 성냄
궁하고 달하고 시들고 번화함.
망녕됨이 망녕됨을 낳아
온갖 일로 다투누나.
이때를 당하면
마음은 장님처럼 어두워져
업을 짓고 재앙 빚어
악한 길을 재촉하지.
저 깨달은 사람
재앙의 싹 깊이 알아,
도둑 보듯 생각 보고
군대처럼 무서워 하네.
보배인양 생각 감추고
성처럼 생각을 지키지.
부지런히 생각을 간직해
제멋대로 못 날뛰게 한다네.
생각 단련 어이 하나?
고요히 안정하여 정성을 다해
단련하고 단련하여,
무위(無爲)로서 곧게 하지.
단련하면 성인 되고
그냥 두면 무지렁이 백성.
이렇듯 지극한 도
굳이 처음 이름지어
황제 헌원씨는
광성자(廣成子)에게서 들었다네.
이같이 생각을 단련하면
옥경(玉京)에 조회하게 되리.
 
 
풀어 간추리면 이렇다.
마음은 본래 맑고 깨끗한 텅빈 허공이다.
잔잔한 수면 같고 드넓은 하늘같아,
냄새도 없고 소리도 없다.
하지만 잠시만 그대로 두면 마음의 수면 위로 온갖 헛생각들이 일렁인다.
기쁨과 슬픔이 작용이 되고,
얻고 잃음이 망상이 되어,
생각은 생각을 낳고 망녕됨은 망녕됨을 부추긴다.
맑고 잔잔한 수면엔 파도가 일고,
텅빈 허공엔 먹구름이 몰려온다.
온갖 추악한 냄새,
귀를 찢는 소음이 밀려든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마음의 문은 닫혀버려 대낮에 길을 잃고 그 자리서 울게 된다.
 
깨달은 사람은 이 헛생각이 온갖 재앙을 불러오는 빌미임을 잘 안다.
도둑을 지키듯 외적을 막듯 조심하고 무서워한다.
보배처럼 감추고 성처럼 지켜서 제멋대로 날뛰는 일이 없도록 한다.
생각은 어떻게 다스려야 좋을까?
고요히 내면을 응시하며 자세를 안정시켜,
한결 같은 정성으로 무념의 진아(眞我)를 찾을 일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무위이화(無爲而化)의 경지에 들게 되면,
신선이 따로 없게 된다.
 
이렇게 대자유의 경계가 눈앞에 활짝 펼쳐지려면 먼저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어떻게 오는가?
허균은 자신의 거처를 `각헌(覺軒)` 즉 `깨달음의 집`이라고 이름짓고
〈각헌명(覺軒銘)〉을 지었다.
그 글을 읽어본다.
 
사람만이 각성(覺性)을 지녔을 뿐이다.
각(覺)이란 한 글자는 의심하는 마음을 끊어버리고,
삿된 망념을 없앨 수 있다.
어지러운 것을 하나되게 하고,
참된 평상으로 돌아오게 한다.
사람이 진실로 그릇이 맑고 밝으며,
심신이 툭 트여 환하면 삿된 기미가 어디로 좇아 들어오겠는가?
다만 어둡고 어지러움이 절로 생겨나 보고 이해하는 것이 전도되는 까닭에
바깥의 삿된 것과 떠도는 기운이 틈타게 된다.
그러나 바깥의 삿된 것과 떠도는 기운도 내가 보고 이해하는 것이
전도됨에서 말미암은 것일 뿐,
밖에서 온 것은 아니다.
안이 절로 바르지 못한 까닭에 바깥의 나쁜 것이라고 말한다.
마음에 주장하는 바가 없으므로 떠도는 기운이라고 한다.
각성이란 마땅히 흐려지기 쉬운 줄을 알아야 한다.
오로지 정성으로 길러야만 환해진다.
안정시켜 붙들어야만 맑아진다.
지극히 맑고 밝으면 도를 이룰 수가 있다.
공경을 다해 귀신을 섬기는 것은 도리어 하늘이 준 본래 성품을 섬김만 못하다.
성성옹은 이 말을 가슴에 새기는지라 집 이름을 각헌(覺軒)이라 하였다.
인하여 명(銘)을 지었다.
 
사람에겐 성품 있어
깨달으면 어둡지 않네.
깨닫지 못한 자는
물욕에 어두워
먼지 낀 거울 같다.
먼지 털면 환해지듯
깨달으면 원만해져
크고 밝은 거울 같다.
밖으론 망녕됨 삿됨 막고
안으론 맑고 밝음 보존하네.
맑음과 밝음은
공경과 정성이니,
이 깨달음 신선도 아니오
부처도 아니며,
또한 성인도 아니어서
마음으로 건너 편 마주함일세.
 
깨닫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잔뜩 때가 낀 거울과 같다.
사물을 비추지 못하는 것은 이미 거울이 아니다.
하지만 물로 씻어내고 수건으로 닦아내면 거울은 다시 사물을 비춘다.
마음의 먼지도 이같이 털어낼 일이다.
세상 살아가면서 생겨나는 온갖 망념들은 바로 거울에 덕지덕지 붙은 때다.
환한 거울 앞에서는 모든 사물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감출 수가 없다.
거울에는 거울의 아(我)가 없다.
지나가는 사물이,
세계가 있을 뿐이다.
거울은 나이면서 나가 아니고,
세계가 아니면서 세계다.
내가 없으므로 세계를 받을 수가 있고,
그 세계는 바로 나이기도 한 것이다.
표면이 흐려지면 거울은 사물 비추기를 거부하고 제 자신을 고집하게 된다.
제 자신을 고집할 때 거울은 이미 거울이 아니다.
부지런히 닦지 않으면 거울은 금세 더러워진다.
마음밭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차분히 가라앉혀 침묵을 깃들여야 한다.
생각을 걷어내야 한다.
그 끝에 깨달음이 있다.
이 깨달음은 유불도 삼교의 가르침을 넘어선다.
나와 우주의 사이,
나와 세계의 사이에 간극이 없어진다.
무어라 말할 것이 없게 된다.
 
그런데 이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단련하는 공부는 도가의 내단 수련 과정과 아주 흡사하다.
앞서 말한 허균의 〈남궁선생전〉은 첩이 집안 조카와 사통하는 것을 본 남궁두가
남녀를 죽여 수배 죄인이 되어 떠돌다가,
무주 적상산에서 스승을 만나 내단을 수련하는 과정을 엮은 이야기다.
처음 수련 단계에서 스승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대저 모든 방술은 먼저 정신을 모은 뒤에 이룰 수가 있다.
하물며 백(魄)을 단련하고 신(神)을 드날려 신선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겠는가?
정신을 모으는 것은 잠자지 않는 것으로 시작한다.
너는 먼저 잠을 자지 않도록 해라."

앞서 본 잠을 줄이라는 〈수잠(睡箴)〉의 단계다.
이 단계를 무사히 넘기자 스승은 그에게 위백양의 《참동계》를 만 번 읽게 하면서 다시 이렇게 말한다.
 
"대저 신선술을 배우는 자는 생각의 실마리를 끊어 없애고 편안히 앉아
정기신(精氣神) 삼보(三寶)를 단련하여 감리(坎 )와 용호(龍虎)를 교제(交濟)하여 단(丹)을 이루게 된다." 

순리에 맡겨 생각을 없애는 〈위순잠(委順箴)〉,
〈연념잠(煉念箴)〉의 단계다.
이 단계에서 남궁두는 벽곡(壁穀)의 수련에 들어간다.
벽곡이란 불에 익힌 곡식을 먹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생식이다.
검은콩을 가루내고,
황정(黃精)과 복숭아씨 가루를 한 숟가락씩 물에 타서 하루에 두 번만 먹었다.
여기에 호흡하는 법과 운기(運氣)하는 법을 익히자,
오히려 얼굴에 살이 찌고 기운이 상쾌해지며 온갖 생각이 말끔히 사라지는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다시 몇 년을 더 수련했다.
이제 그는 꼼짝도 않고 앉아 눈감고 마음의 눈으로 바깥을 투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궁두는 윗 잇몸에 조그만 오얏 같은 물건이 돋아
여기에서 단물이 나와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서주기(黍柱基)가 세워져 화후(火候)를 운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깨달음을 이룬 〈각헌명(覺軒銘)〉의 단계다.

스승은 기뻐하며 삼재경(三才鏡)과 칠성검(七星劍)을 꽂아 주문을 외워 마귀를 물리치고는 그를 독려한다.
다시 6개월을 수련하자,
단전이 충만해지면서 배꼽 아래에서 황금빛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급히 도태(道胎)를 이루려는 욕념(慾念)을 못 이겨 순간적으로
이환(泥丸)에 불이 붙어 고함을 지르며 방을 뛰쳐나오고 만다.
깨끗이 닦았던 거울에 다시 때가 앉은 것이다.
결국 그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지 못해 천선(天仙)의 경지에는 못 오르고 지선(地仙)에 머물고 만다.

마지막으로 남궁두를 하산시키며 스승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이미 인연이 박하여 이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하산하여 머리를 기르고,
황정을 먹으며 북두성에 늘 절하도록 해라.
살인하거나 음란한 짓,
도둑질을 하지 말고,
비린내 나는 생선이나 개고기 소고기를 먹지 말며,
남을 몰래 해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지상선(地上仙)이니라.
이를 닦아 행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하늘로 날아 오를 수도 있지.
《황정경》과 《참동계》는 도가의 으뜸가는 경전이니 늘 지니며 외우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도인경(度人經)》은 태상노군이 도를 전한 글이고,
《옥추경(玉樞經)》은 뇌부(雷府)의 여러 신이 높이는 것이다.
이를 지니고 있으면 귀신이 두려워 공경하게 되느니라.
이밖에 마음을 닦는 요결은 오직 속이지 않음을 으뜸으로 치느니라.
무릇 사람이 한번 선과 악을 생각에 담게 되면 귀신이 좌우에 늘어서 있어 모두 먼저 이를 알게 된다.
옥황상제께서 강림하사 가까이서 마지막 심판을 하게 되면 문득 두궁(斗宮)에 이를 기록하여
보응하는 효과가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빠르곤 하지.
어리석은 자는 제멋대로 아득하고 어두워서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여기곤 한다.
그들이야 저 푸른 하늘 위에 참 주재자가 있어 그 자루를 잡고 있음을 어찌 알겠느냐?
너는 인내하는 마음은 비록 강하지만 욕념(慾念)이 사라지지 않았으니,
혹 삼가지 않아 한 번 이단에 떨어지게 되면 영원히 고통을 받게될 것이다.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앞서 허균이 마음을 닦는 방법을 적었던 글들과 도가의 내단 수련 과정을 적은 〈남궁선생전〉은 다시 이렇게 만난다.
그렇다면 그가 이토록 길게 설명했던 도가의 내단 수련이란 것은 결국은
마음을 텅 비워 욕념을 걷어내고 거울처럼 투명하게 되어,
거기에 온갖 사물을 깃들여,
내가 세계가 되고 세계가 내가 되는 그런 조화를 추구하는 마음 수련의 환유가 아니겠는가?
단전에 불이 붙어 천선(天仙)이 되지 못했다 함은 끊임없이 갈고 닦지 않으면
다시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을 일깨움이 아닌가?
벽곡을 하고 호흡법을 익힘도 욕심을 버리고 피를 맑게 해서 잡념을 걷어내란 말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제야 알겠다.
저 단학의 수련이란 것이 결국은 마음공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은 결코 속세를 떠나 가족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깊은 산 속에서 풀뿌리나 캐어 먹으며 사는 삶을 부추기는 것일 수는 없다.
생식하고 고기 안 먹고,
잠 안자고 수련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학의 등을 타고 태청허공을 날아 오르고,
겨드랑이 밑에 날개가 돋아 보허등공(步虛登空) 하는 신선이 되고자 함인가?
그리하여 천상선계에 올라가 밤마다 서왕모의 요지연(瑤池宴)에 참여해
한 알만 먹으면 천년을 산다는 선도(仙桃)를 따먹으며,
장생불사 한다는 유하주(流霞酒)를 마시는 호사를 누리고자 함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을 훨훨 나는 신선이란 것도 결국은 잡념을 걷어가 해맑아진 마음이 얻게 되는
대자유의 경계를 비유한 것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허균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그것을 벗어난 자유의 세계,
즉 신선의 꿈을 꾸고 있었다. 두 발은 땅을 딛고 있으면서
그의 두 눈은 끊임없이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마음에서 욕심을 걷어내면 몸이 둥실 떠올라
광대무변의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으로 꿈꾸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그것이야 말로 큰 욕심인 줄은 몰랐던 것 같다.
그 꿈을 성급히 이루려고 역모를 계획하다 그는 죽음을 당했다.
그의 호는 교산(蛟山)이다. 교(蛟)는 이무기다.
이무기는 용이 되려다 승천하지 못하고 못에 사는 이물(異物)이다.
그의 호 교산은 용으로 승천하지 못한 그의 꿈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허균! 그의 글을 읽노라면 떠오르는 생각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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