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락 발견’ 세계적 찬사 속 영웅 추앙… ‘허위날조’ 혐의로 숙청, 자살
“이업적은… 생물학과 의학 부문 앞에 제기된 당면한 근본 문제를 해명함에 있어서 광명한 전망을 열어주며 또한 인간의 건강과 장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새로운 서광을 비춰준다. 이 위대한 발견은 현대 생물학과 의학 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개척한 혁명적 사변이며 세계과학사에 금자탑을 이루어놓았다.…이제부터 세상 사람들이 현대 생물학과 의학을 논함에 있어서 우리나라를 말하지 않고는 논할 수 없게 된 이 사실을 두고 어찌 흥분하고 감격하지 않겠는가!”
‘사이언스’ 논문으로 황우석 서울대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가 정점에 올랐을 때 쏟아져 나온 찬사 가운데 하나일까. 그러나 출처가 다르다. 이 글은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해마다 발간하는 ‘조선중앙년감’ 1964년판(版)에 실린 것이다. 대상은 평양의학대학 김봉한 교수가 진행한 ‘인간의 경락체계에 대한 연구’. 연감에는 공적 설명과 함께 김봉한 교수의 사진 화보가 크게 실려 있다. 이 연감에 김일성 당시 수상 이외의 인물사진이 그처럼 크게 게재된 것은 처음이었다.
기이한 점은 1961년을 기점으로 5~6년간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업적”이라며 국내외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칭송되던 이 연구가, 1967년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후의 ‘조선중앙년감’에서는 김봉한이라는 이름 자체를 찾아볼 수가 없고, 중앙언론은 물론 북한의 관련 학회지, 전문지에서도 봇물을 이루던 관련 글이 일제히 자취를 감췄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온 나라를 들뜨게 한 ‘줄기세포 신드롬’, 그리고 온 나라를 충격과 혼돈으로 몰아넣은 ‘황우석 진실 게임’의 막이 서서히 내리고 있다. 사태가 말그대로 극적인 결말을 향해 치닫던 2005년 12월말, 한 북한 연구자가 기자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황우석 사태와 비슷한 사건이 예전에 북한에서도 벌어진 적이 있다”는 말이었다. “쉽진 않겠지만 꼼꼼히 뒤져보면 공식자료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도 이어졌다.
그의 말대로, 1960년대 중반에 발표된 북한의 공식자료에서는 ‘김봉한’이라는 이름과 그의 연구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봉한학설’이라고 불리는 김봉한의 연구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전통 동양의학의 핵심개념인 경락의 실체를 구명한 ‘봉한관설’이다. 다른 하나는 세포보다 작은 미세한 조직인 산알(‘살아있는 알’이라는 뜻)이 봉한관을 주행하면서 세포가 되고, 세포는 다시 산알로 변하기를 반복하며 순환 시스템 속에서 생명현상의 근본적인 기능을 수행한다는 ‘산알학설’이다(구체적인 내용은 위 상자기사 참조).
특히 김봉한 교수가 연구를 진행하다 갑작스레 좌초하는 일련의 과정은 황우석 교수와 매우 흡사했다. 정부 당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온갖 찬사를 받으며 대대적으로 추진되던 연구가 돌연 사그러들고마는 상황전개가 놀랄 만큼 닮아있는 것. 40년의 시차를 두고 남과 북에서 벌어진 그 역사의 반복을 따라가보자.
‘신분상의 한계’
자료에 따르면 1916년생인 김봉한은 경성제2고보(지금의 서울 경복고) 출신으로 1941년 경성제대 의학부(지금의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194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 의대) 생리학교실 조교수가 되어 여러 학교를 오가며 강의하던 그는 6·25전쟁 와중에 북한으로 가서 1953년 평양의학대학 생물학교실 부교수가 됐다.
북한으로 가게 된 동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전쟁 중에 인민군 제2후방병원에서 군의관으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자발적인 월북이기보다는 서울에 진주한 인민군에 징집됐을 가능성이 크다. 남한에 처자를 두고 있어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는 전언에 비춰봐도 마찬가지다. 비교적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성격이나 관심분야 모두 좌익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경성제대 동창생들의 회고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렇듯 남한 출신, 그것도 비자발적인 월북자라는 ‘신분상의 한계’는 전쟁 이후에도 그의 입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 말 김일성 1인 체제 수립에 즈음해 사상검열 열풍이 불어닥치면서 여러 월북 과학자가 자리를 잃었다. 위험을 느낀 그는 이 무렵부터 국면 전환에 도움이 될 만한 전기를 찾으려 애쓴 것으로 보인다. 1957년까지만 해도 그의 연구주제는 전형적인 서양의학의 생리학 문제였지만, 이 무렵 동양의학에 눈을 돌린 것이다.
북한은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3차대회를 계기로 한의학 연구를 활성화하는 방침을 공식화했다. 김봉한이 몸담고 있던 평양의학대학은 이 사업의 핵심이었다. 한의학이 아닌 서양의학 교육을 받은 그가 동양의학의 핵심 주제인 경락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당(黨)의 방침에 부응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의 논문 곳곳에서 정치적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한 대목을 찾을 수 있다.
1961년 그가 발표한 경락 관련 첫 논문은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의 결정정신에 립각하여 본 연구사업이 시작되었다”는 서문으로 시작해, “우리의 성과는…우리 당 과학정책의 정당성의 또 하나의 실증으로 된다”는 결론으로 끝난다. 이렇듯 강도 높은 정치적 수사(修辭)는 북한에서도 1970년대 이전 과학논문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김봉한의 논문이 효시가 되어, 이후 다른 과학자들에게도 정치적 수사가 일종의 ‘전범’으로 자리잡은 듯하다는 게 북한 과학사에 정통한 이들의 분석이다.
이렇게 보면 김봉한과 황우석 교수의 첫 번째 공통점이 모습을 드러낸다. 알려진 바와 같이 황우석 교수는 외국유학을 거치지 않은 순수 국내파 학자로, 수의학분야에서 출발해 외국 유명 의과대학 출신 학자들을 뛰어넘는 성과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대대적인 조명을 받은 바 있다. 이 때문에 이른바 ‘진실 게임’의 초기에는 그 배경에 ‘의과대학과 수의과대학 사이의 알력’이라는 해묵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설득력 있게 제기되기도 했다.
‘국내파 학자’라는 입지와 관련해, 황 교수가 언론 인터뷰나 기자회견 등을 통해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같은 애국주의적 언급을 자주 한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논란의 와중에 여러 차례 ‘대한민국의 원천기술’ 같은 용어나 ‘국익론’이 등장한 것도 마찬가지. 과학 영역을 과학 외적인 영역 혹은 정치적인 담론에 연결해 의미를 확장하는 능력은 김봉한과 황우석 두 사람모두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의미있는 공통점이다.
최고지도자의 찬사
이후 김봉한의 논문이 국제학계에 소개되고 대대적인 찬사와 지원 속에 연구가 진행된 과정은 황우석 교수의 경우에서 지켜본 그대로다. 경락에 관한 김봉한의 첫 논문은, 발표 이듬해인 1962년 4월 4차 당대회를 통해 해외파 대신 국내파가 북한 과학계의 주도권을 잡은 뒤 본격적으로 주목받는다. 당 관료들과 정치 색채가 짙은 학자들이 논문을 격찬했고, 김일성 수상이 직접 “현대 생물학과 의학 발전에 탁월한 기여를 했다”는 축하문을 보내기에 이른다.
값비싼 현미경, 방사선 추적장치 등 첨단 연구장비가 투입된 결과물인 1963년 11월의 두 번째 논문에 쏟아진 찬사는 더욱 엄청났다. ‘조선중앙통신’ ‘로동신문’ ‘대중과학’ ‘조선의학’ 등 각종 매체에는 봉한학설이 다윈의 진화론이나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이론에 버금가는 업적이라는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급기야 1964년 2월 북한 내각은 연구를 본격적으로 확대 발전시키기 위해 ‘결정 10호’를 채택하고 내각 직속으로 ‘조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락연구원’을 조직한다. 원장은 당연히 김봉한 교수가 맡았다.
김봉한의 논문이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세계 각국에 배포된 것 또한 이 무렵부터였다. ‘On the Kyungrak System’ 제하의 이 논문은 공산권이 아닌 서구진영의 언어로 번역된 최초의 북한 논문으로, 노벨상 수상을 위한 행보의 시작이었다. 김봉한에게는 북한 최고의 학자들만이 선정되는 ‘인민상계관인’ 칭호가 주어졌고, 연구성과는 ‘경락의 세계’라는 과학영화로 제작되어 극장에서 상영됐다. 다만 체제경쟁을 의식한 정부의 정보통제로 학설 자체가 금기시됐던 한국에서만 알려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이렇듯 김봉한을 둘러싼 1964년 무렵 평양의 분위기에서 황우석을 둘러싼 2005년 서울의 분위기를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계줄기세포허브’의 출범을 비롯해 국가예산이 대대적으로 투입되어 진행된 연구사업, 황 교수의 ‘최고과학자’ 선정과 ‘노벨상 수상 추진위원회’ 발족, 각종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와 검증 없는 ‘업적’ 기사, 위인전 출간을 비롯한 ‘영웅화 작업’까지 판박이에 가깝다.
이는 연구사업이 정치권과 정부의 강력한 연계를 통해 진행됐다는 사실만 봐도 분명해진다. 2005년 10월19일 노무현 대통령은 서울대 병원에서 열린 ‘세계줄기세포허브’ 개소식에서 “이 시기에 제가 대통령 자리에 앉아서 여러분과 이 일을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척 큰 행운”이라며 “옛날에는 제가 별로 도움이 안 됐지만 지금은 좀 돕고 있고 앞으로 확실히 밀겠다”고 황 교수의 연구를 적극 지지하고 나선 바 있다. 이른바 ‘황금박쥐‘로 불린 최고위 관료들의 깊숙한 개입도 김봉한의 경우와 고스란히 닮았다.
김봉한 연구는 전문적인 내용이므로 일반인이 간단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하나씩 따라가 보면 그의 연구가 당시 학계에 던진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해볼 수 있다.
동양의학의 대표적 치료 기법인 침과 뜸은, 분명히 효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확한 작동방식이 서구의학적 관점에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침과 뜸을 놓는 자리를 경혈(經穴), 그 자극을 온몸의 장기에 전달하는 통로를 경락(經絡)이라 부르지만, 과연 경락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단순한 기의 흐름인지, 신경계의 작용인지는 분명한 결론이 없이 한의학과 서구의학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주제다. 김봉한의 연구는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의학 자체를 새로운 영역으로 진전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북한측 자료에 따르면, 우선 김봉한은 사람 몸 속의 경락을 해부학적으로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혈관계와 내분비계 이외에도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제3의 순환계가 동물의 몸 속에 그물처럼 퍼져 있으며, ‘봉한관’으로 명명한 이 순환계가 다름아닌 경락의 실체라는 것이다. 이 봉한관을 통해 액체가 흘러다니며 온몸에 갖가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동양의학의 근간이 되는 ‘경락의 기능’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간 서양 해부학의 관점에서 모호한 것으로 치부되던 동양의학의 작동방식을 해석할 수 있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서양의학에서 ‘약한 고리’로 남아 있던 발생과 치유 부분을 크게 진전시킬 수 있다. 특히 제3의 순환계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인체의 새로운 조직을 발견한 것이어서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노벨상감’이라는 말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 가늠할 만하다.
김봉한 교수는 1961년부터 1965년까지 모두 다섯 개의 논문을 통해 이러한 주장을 체계화했다. 그 가운데 처음 세 편은 경혈과 경락의 해부학적 실체를 밝히고 그를 통해 흐르는 액체의 존재와 생화학적 요소를 분석한 것이다. 나머지 두 편은 봉한관을 따라 흐르는 액체 속 산알이 조직이나 세포의 손상된 부위에 다다라 치유 또는 재생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연구결과를 담고 있다.
특히 산알이 자라서 세포가 되고 다시 산알로 변한다는 ‘산알학설’은 기존의 세포분열이론을 완전히 뒤집는 것으로, 김봉한의 연구 가운데서도 서양의학의 개념과 괴리가 가장 크다. 산알을 인공적으로 배양하면 채취된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종류의 세포가 형성된다는 그의 주장은, 현대의학 개념으로 풀어보면 산알이 사실상 ‘만능 줄기세포’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보면 김봉한 교수가 수행한 연구의 정점은 황우석 팀의 줄기세포 연구와 연결고리를 갖는다.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 힘으로, 세계를 넘어”
재미있는 것은 김봉한의 연구가 정점으로 치닫던 시기가 북한에서 ‘주체사상’이라는 말이 공식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1965년 4월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김일성 수상은 “모든 문제를 독자적으로, 자기 나라의 실정에 맞게, 자체의 힘에 의거해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말로 주체사상의 단초를 처음 제시한다. 이러한 정치적 흐름은 1961년 무렵 리승기가 개발해 공업화에 성공한 비날론 연구나 김봉한의 경락 연구 같은 과학적 성과가 배경이 됐다는 게 정설이다. 사회주의 종주국의 감독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체제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제공하는 계기였다는 것이다.
이 또한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한국의 능력’을 강조하는 사례로 활용된 것과 비교해볼 만한 대목이다. 2004년 2월과 2005년 5월 ‘사이언스’를 통해 황 교수팀의 논문이 공개된 이후, 언론과 정부에서는 “우리도 선진국을 능가해 세계일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쾌거”라는 찬사가 줄을 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12월 황 교수팀이 세계 최초로 광우병 내성(耐性)소를 개발했다고 발표하자 “동북아시대, 2만달러시대의 가능성과 희망을 확실히 발견했다”고 극찬한 바 있다. 김봉한과 황우석의 연구가 모두 ‘조국의 독자적인 역량’을 강조하는 캠페인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결정적인 차이
“사회주의 지상락원에서 무병장수를 위해 본격적인 연구활동을 벌이겠다”며 기염을 토하던 김봉한의 연구는, 그러나 1965년 후반부터 갑자기 위기에 봉착한다. ‘산알-세포 순환론’이라는 도전적인 내용을 담은 다섯 번째 논문이 발표됐지만, 전문지에 조용히 실렸을 뿐 대대적인 언론보도는 없었다. ‘공산주의적 의학의 신기원’이라던 그간의 찬사 일변도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급기야 이듬해인 1966년에 이르러 김봉한과 그의 연구에 대한 언급은 공식매체에서 일제히 사라진다. 이어 김봉한이 지휘하던 경락연구원과 경락학회가 폐지되고 봉한학설을 주도적으로 지지하던 보건상과 의학연구원장이 자리에서 물러난다. 김봉한과 그의 팀은 과학계에서 아예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이렇듯 극적인 추락의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2006년의 한국은 모든 논쟁이 공개되는 사회이므로 황우석 연구의 추락과정은 낱낱이 밝혀지고 있지만, 40년 전의 북한은 전혀 상황이 달랐다. 이 과정을 기록하거나 암시한 북한측 자료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김봉한 몰락의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길은 탈북인사들의 전언이나 추론뿐이다.
봉한학설 재확인 연구, 어디까지 왔나 | |
1967년 김봉한의 연구가 폐기된 이래 일본 등에서 그 신빙성을 검증하거나 재확인하는 작업이 시도됐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봉한학설에서 말하는 봉한관은 투명한 까닭에 이를 확인하려면 주변조직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염색약이 중요한데, 김봉한 교수는 논문에서 ‘특별한 청색염료’ 같은 식으로 모호하게 표현했을 뿐 약물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봉한학설 재확인 연구에 도전한 것은 한반도 남쪽의 학자들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연세대 원주의과대학 생화학교실의 김현원 교수가 북한에서 김봉한 팀의 일원으로 일했다는 김원영씨의 도움을 받으며 연구에 착수했다. 김원영씨는 동국대 한의대 팀의 산알분리 및 배양실험에도 참여했다. 본격적인 성과물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서울대 한의학물리연구실의 소광섭 교수팀이 연구에 뛰어들면서부터다. 우선 김봉한 교수가 논문에서 사람의 혈관 내에 있다고 주장한 ‘내봉한관’의 실체를 확인하기로 한 소 교수팀은, 여러 나라를 돌며 김봉한 팀의 연구자료를 수집했다. 여기서 얻은 자료를 참조해 새로운 염색법(acridine orange)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고, 2002년 6월 마침내 형광현미경을 통해 흰쥐의 혈관에서 내봉한관으로 추정되는 실체를 구분해낸다(사진 참조). 혈관 안에서 근육이나 피부 안쪽 세포에서나 발견되는 ‘막대모양’의 핵을 가진 전혀 새로운 조직을 발견한 것. 관찰된 핵은 김봉한 교수의 논문에 나오는 봉한관의 핵과 모양이 매우 흡사했다. 소 교수는 이를 정리해 2004년 미국 해부학회가 발행하는 학술지 ‘해부학 기록’ 5월호에 발표했고, 논문은 표지에 올랐다. 2004년 여름에는 흰쥐의 간 표면에서 유사한 조직이 발견되었고, 봉한관뿐 아니라 관끼리 만나는 봉오리인 ‘봉한소체’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소 교수팀은 설명한다. 이 내용은 그해 9월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침구수의학회에서 발표됐다. 비슷한 시기 연세대 김현원 교수팀도 투과형 전자현미경을 이용하여 토끼의 혈관 및 장기에서 봉한관으로 추정되는 가느다란 줄의 다발과 그 안의 미립자를 촬영해 공개했다. 이들은 최근의 성과를 근거로 기존에 알려진 혈관계나 림프계가 아닌 ‘제3의 순환계’가 존재한다는 점, 그 안에 미립자가 흘러다닌다는 사실 자체는 거의 확실해졌다고 말한다. 물론 반론도 있다. 특히 이 같은 조직은 혈전이 엉겼거나 굵기가 가는 림프관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가 만만찮다. 적잖은 해부학자들은 인체 내에 그간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순환계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낸다. 이들은 경락이 제3의 순환계라는 견해 역시 상당부분 기존의 봉한학설에 기반을 둔 추측이기 때문에, 정확한 실험을 통한 추가검증이 필요하다고 비판한다. 앞으로 연구가 진행되면서 구명(究明)돼야 할 부분이라는 것이다. 현재 소 교수팀에서 몰두하고 있는 작업은 발견한 관 조직 속의 입자가 과연 김봉한이 주장한 ‘산알’인지, 이들이 과연 그의 학설처럼 세포의 치료와 생성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만능 줄기세포’인지를 밝혀내는 일이다. 그 성과에 따라서는 줄기세포를 훨씬 간편하게 추출하는 획기적인 방법이 제시될 수도 있다. 현재 이 연구는 과학기술부가 지원하는 국가지정연구실(NRL) 사업으로 수행되고 있다. |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탈북 인사들은 “김봉한의 연구 대부분이 허위날조로 드러나 당국에서 서둘러 폐기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말한다. 내부적으로는 이러한 설명이 사실상 ‘당국의 공식 견해’나 다름 없었다는 것. 그러나 어떤 부분이 어떻게 날조됐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진 것이 없고 전해진 바도 없다고 한다.
황우석 교수의 경우 ‘논문 데이터 조작’이라는 명시적인 잘못이 분명한 증거와 본인의 시인을 통해 확인됐지만, 김봉한 교수의 경우는 이론 자체가 잘못됐는지 여부에 대한 학문적 입증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존재하지 않는다. ‘허위날조’설의 근거가 전혀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 이 결정적인 차이로 인해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는 봉한학설이 학문 외적인 이유로 폐기됐다는 전제하에 그 타당성을 검증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다음쪽 상자기사 참조).
봉한학설의 재확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학자들은, 김봉한 교수의 연구가 갑자기 폐기된 것은 당시 국내외에서 일어난 갖가지 반발이 주원인이었을 것으로 분석한다. 우선 내부적으로는 동양의학 복권(復權)작업의 주도권을 서양의학자 출신인 김봉한에게 빼앗긴 기존 동의학자(東醫學者·북한에서 한의학자를 일컫는 말) 그룹이 격렬하게 반발했고, 해외에서는 사회주의 국가 전문가들이 파격적인 김봉한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으며 비판했다는 것이다.
김봉한 팀의 연구가 정점에 올랐을 무렵 소련과 동독은 연구진을 파견하는 등 이를 관심 있게 지켜봤지만, 그 과정에서 북한측 경락 연구자들과 마찰이 적지 않았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실제로 김봉한 팀이 사라진 이후인 1967년 소련 의학계는 “경락에 대한 실체발견을 과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 북한에서는 소련측 발표에 대한 반박은 물론 봉한학설과 관련된 어떤 연구논문도 발표되지 않았다.
한편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탈북 인사들은 “허위날조는 허울이었을 뿐 실제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김봉한 팀의 든든한 후원자였다는 당시 조선로동당 실력자 박금철의 숙청과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일제 때 보천보 습격사건에 가담한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광복과 동시에 풀려난 박금철은, 북한 건국과정에 참가해 이른바 ‘갑산파’의 선두주자로 당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 부위원장으로 권력서열 4위에 오른다. 김봉한 연구의 절정기는 박금철의 권력 진출 시점과 대략 일치한다.
그러나 박금철은 11년 뒤인 1967년 5월 당 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숙청되어 정치범수용소에 유폐됐다. 탈북 인사들은 이 때 박금철에 대해 제기된 비판 가운데 하나가 김봉한과 관련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박금철이 경락연구소에서 일하는 맏딸의 학위논문을 김봉한 교수와 연구자들에게 대신 쓰도록 했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김봉한 연구가 쇠퇴하는 징후가 나타난 시점과 박금철의 숙청시기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등, 세부적으로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김봉한에 관해 논문을 쓴 전북대 과학학과 김근배 교수는 “갑산파 숙청은 1967년의 일이지만, 김봉한에 관한 언급이 공식매체에서 일제히 사라진 시점은 1966년이었다”고 지적했다. 관련 탈북 인사들을 몇 차례 만난 바 있는 김 교수는 “전언을 100% 신뢰할 수는 없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김봉한에 관해 가장 구체적인 정보를 갖고 있는 인물은 1992년 탈북해 서울에 온 외과의사 김원영(62·가명)씨다. 김씨는 평양의대에 재학 중이던 1960년대 중반 김봉한 팀의 일원으로 경락연구소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주장해왔다. ‘신동아’는 여러 경로로 김씨의 소재를 수소문했지만, 몇 해 전 해외로 출국한 김씨의 종적을 끝내 확인할 수 없어 대신 그와 함께 봉한학설 재확인 연구를 추진했던 전문가들로부터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생체실험 vs 난자 채취
김씨의 전언에 따르면, 봉한학설 폐기의 결정적 원인은 갑산파 숙청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심각했던 것이 생체실험의 윤리 문제였다고 한다. 김봉한 교수 팀이 1950년대 후반 경락의 해부학적 실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숙청되어 수용소에 있던 인물들을 산 채로 다리 등을 해부해 관찰했다는 것이다. 김봉한 교수와 가족관계상 친분이 있던 김씨는 어린 나이에도 김 교수와 동행해 이 같은 작업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다.
수 차례에 걸친 생체실험을 통해 김봉한 팀은 살아 있는 인체의 경락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실험이 김봉한 교수가 자신의 학설을 완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것. 김 교수가 애초에 경락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6·25전쟁 당시 부상당한 병사들을 무수히 치료하면서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순환계 조직’의 흔적을 확인하면서부터였다는 설명도 덧붙여졌다.
문제는 봉한학설이 국제학계에 소개된 이후에 벌어졌다. 많은 해외 학자가 “생체실험 없이는 이 학설을 입증할 수 없다”며 윤리 문제를 들고나왔다는 것. 생체실험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동물실험 결과만을 가지고 무리한 결론을 내렸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고, 생체실험을 했다고 시인하면 엄청난 윤리적 비판을 받을 상황에 직면했다고 한다. 여기에 갑산파 숙청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가 맞물려 김봉한과 그의 연구 모두가 폐기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회고다.
이러한 전언이 사실이라면, 황우석 교수 연구에 대한 최초의 문제 제기가 난자 채취를 둘러싼 윤리 문제에서 촉발된 것과 비교해볼 때 의미심장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후 70명에 달하던 김봉한 연구팀은 대부분이 숙청됐지만, 당시 아직 어린 학생이던 김씨는 화를 면할 수 있었고 훗날 북한 의학계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던 1992년 무렵 숙청위기를 피해 탈북에 성공했고, 2002년 무렵까지 한국에서 진행되던 봉한학설 재확인 연구에 참여해 도움을 줬다.
“유배 도중 자살한 듯”
김봉한 교수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엇갈릴 뿐 명확한 기록은 없다. 김원영씨는 “지방 수용소로 유배되어 가는 도중에 자살한 것으로 들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논문폐기가 결정된 직후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려 다리가 부러지는 등 그의 자살시도를 목격하기도 했다는 것. 이외에도 시골농장에 유폐됐다가 자살했다는 설, 탄광에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병을 얻어 숨을 거뒀다는 설도 있다. 이들 전언의 유일한 공통점은 김 교수가 봉한학설이 폐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는 것 뿐이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적극 지원했던 오명 과학기술부총리나 박기영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이 최근 자리를 떠난 것처럼, 김봉한의 침몰 당시 관계부처 고위관료들이 모두 경질되는 등 북한 과학계는 엄청난 후폭풍을 겪었다. 봉한학설의 침몰은 북한사회를 전반적으로 크게 위축시키는 계기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의학은 물론 과학계 전반이 대폭 축소됐고 주도세력이 교체됐으며, 외국과의 학술교류는 전면 중단됐다. 이 시기 북한의 사회체제 전반이 한층 움츠러들며 폐쇄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양상이 나타났다는 분석도 있다.
이에 비춰볼 때 황우석 교수의 침몰이 한국 과학계에 미칠 영향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사이언스’ 논문이 공식 폐기되면서 국제 저널들이 특별한 이유없이 한국 학자가 쓴 논문의 게재를 거절하는 등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에 시달린다는 소식이 줄을 잇고 있다. 1월12일자 ‘매일경제’는 “스웨덴의 줄기세포 전문가인 카롤린스카 대학의 호바타 교수가 한 국내 학자에게 ‘어떤 한국 과학자와도 접촉이 금지됐다’며 6월 열릴 예정인 관련세미나 불참소식을 전했다”고 보도했다.
전북대 김근배 교수는 “김봉한과 황우석의 연구 진행과정에서 나타난 메커니즘의 유사성은 후발주자 국가들의 대형 과학 프로젝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이라고 설명했다. 안정적인 재원과 연구인력을 확보한 선진국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나면 국가기관의 대대적인 지원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봉한 교수의 경락연구원은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팀과 매우 흡사한 형태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70여 명에 달하는 연구진, 소련 등 선진국에서도 구하기 어렵던 고가 장비 투입은 물론, 심지어 철저한 분업체계로 인해 연구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사람은 전체 진척내용을 쉽게 알지 못하는 형태도 유사하다.
김근배 교수는 “문제는 이렇듯 국가를 등에 업은 연구 추진과정에서 권력과의 밀착이나 연구자의 정치력 발휘, 특정 이데올로기와의 결합 등이 나타나기 쉽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다 보니 연구자 본인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반대로 정치적 이유로 연구 자체가 무산되는 일도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분석은 어쩌면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침몰하게 된 것도 이러한 근본적인 구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론으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특정한 과학 프로젝트가 전국가적인 이슈가 되면, 과학자 본인이 진행상황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주변을 의식해 무리수를 두거나, 윤리적인 문제를 무시하면서까지 성과에 집착하게 되는 등의 위험요소가 언제든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봉한과 황우석, 남과 북에서 벌어진 아이러니한 역사의 반복이 남긴 뼈아픈 교훈이다.
* 참고 및 인용자료 : 김근배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에서’(‘한국과학사학회지’ 1999년 21권 2호), 공동철 ‘봉한학설은 노벨상 받을 만한 업적’(‘신동아’ 1997년 4월호), 소광섭 ‘경혈과 경락의 실체’(‘과학사상’ 2003년), 그 외 북한의 공식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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