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外之士

자유인_수안스님

醉月 2008. 4. 6. 19:39

“먹고 죽자! 있는 것을 자꾸자꾸 죽여야 새것이 나와”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수안스님 이야기는 다 선화(禪畵) 같다. 왁자지껄하게 말하지만 귀기울이면 고요한 그림 한 폭이 떠오른다. 마음속에 평화가 가득 차 오르는 풍경이다. 이런 걸 만들어낼 줄 알아서 스님인지, 스님이라서 이런 풍경이 만들어지는 건지…. 다섯 살배기 꼬마와 덥석 친구사이가 되어 세상의 속박을 벗어나는 그에게 ‘행복’은 도처에 널려 있다.

다시 한 해가 시작된다. 나는 지금 삶의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 건가. 내게 허락된 시간은 얼마이며 그걸 무얼로 채워나갈 것인가. 누구나 맞닥뜨릴 이런 반복되는 질문에 대답을 얻고 싶어 통도사 축서암으로 갔다. 축서암은 적멸보궁인 양산 통도사가 거느린 20개 암자 중 하나다. 영취산의 우람한 적송들이 절집 둘레를 포근하게 감싸는 좋은 터에 자리잡았다. 거기 아기같이 천진한 스님이 하나 산다. 시봉하는 상좌 하나 없이 단 혼자다. 수안(殊眼)스님, 1940년생, 경남 통영 출생.

그는 웃고 울고에 거침이 없고 스킨스쿠버와 스키를 즐기며 카메라에 능하고 법문 대신 가요를 멋지게 불러댄다는 스님이다. 아프리카 춤도 곧잘 추고 몸 안에 신명과 정이 넘쳐나며 쇼팽과 바흐를 즐기고 선화(禪畵)를 하고 시를 쓰고 각(刻)을 하는 예술가 스님이다. 세상 속박을 다 벗었다고 소문난, 무장무애 자유로운 그에게 삶의 비의를 듣고 싶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허전한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옳을지 한 말씀 청하고 싶었다.

 

수안은 대긍정의 스님이었다. 대긍정이니 무장무애니 따위가 되레 거추장스러울 만큼 그는 걸림 없이 말하고 행동했다. 통도사에 내려간 우리 일행을 스님은 일단 근처 식당으로 데려갔다. 26년째 절 아래 마을에 살면서 축서암 살림을 돌본다는 유니크한 미(美)를 지닌 방림보살과, 스님이 요즘 빠져 있는 다화(茶畵·차를 마실 때 차 자리에 거는 그림)를 전시할 인사동 윤갤러리 주인과, 스님의 그림에 반해 죽는다는 몇몇 팬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술도 나오고 고기도 나왔다. 소주잔을 높이 들고 수안스님이 건배를 제안했다.

 

“자, 내가 먹고! 할 테니 여러분은 죽자, 하세요!” ‘먹고! 죽자!’가 좁은 방에 메아리치고 우리는 통쾌하게 웃어제치고 황홀하게 떠들었다.

‘먹고! 죽자!’를 외치는 스님의 얼굴은 장난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행복감에 겨운 표정, 아무것도 두려울 것 없이 이 세상이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볼이 볼그족족하고 웃느라고 실눈이 된 대여섯 살 천진난만한 동자의 얼굴인데 다름 아닌 수안스님이 그려놓은 선화 속의 동자상 얼굴 그대로였다.

 

수안의 그림에 그토록 자주 등장하는 동자상이 자화상이라는 것을 나는 스님을 뵌 지 한 시간 만에 단박에 탐색해버렸다. 그 동자는 대개 3000년 만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를 만지고 있는데 우담바라를 만지는 표정이야말로 ‘바로 저래야 한다’ 싶게 따스하고 자족적인, 그야말로 ‘환희심’ 그 자체였다.

 

그는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라 시도 쓰고 산문도 쓴다. ‘참 좋다, 정말 좋구나!’, 싱겁지만 이게 그가 쓴 에세이집의 제목이다. 처음 만났을 때 수안은 그 책의 속표지에다 이렇게 썼다. “춘유백화(春有百花) 추유월(秋有月) 하유량풍(夏有凉風) 동유설(冬有雪)!”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봄에는 백화가 있고 가을에는 달이 있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있고 겨울에는 눈이 있다! 얼마나 좋노? 참 좋제?!” 그리고 다섯 살 난 개구쟁이같이 근심 없이 웃었다. “사람들은 지금 앞에 있는 것을 보지 않고 자꾸 없는 것만 찾아대그등. 있는 거를 봐야제. 없는 거를 찾아서 머 하노? 그러다 찾느라고 볼일 다 보긋다!” 경남 사투리의 억양과 어휘가 이렇게 함축적인 울림을 가졌다는 것을 새삼 발견하는 중인데 스님이 갑자기 악동같이 씩 웃는다. “어떻노? 내 아구펀치가 괜찮제?”

   

통도사에는 수안스님을 보러 각지에서 온 ‘팬’들이 꽤 있다. 절 인근 식당에서 스님이 즉석에서 그린 그림을 팬에게 선물하고 있다.

개구쟁이 스님

어린 소녀가 부모를 따라 절에 놀러왔다. 소녀는 수안의 맨머리를 만지고 놀면서 말한다.

“스님 니 몇 살이고?”

“니는 몇 살이고?”

“나? 나는 다섯 살이다.”

“그래? 나도 다섯 살이다.”

그 풍경을 말하면서 수안은 이렇게 덧붙인다.

“만일 옆에서 듣고 있던 소녀의 부모가 스님에게 그 무슨 버릇없는 말이냐고 지청구를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거 무슨 버릇없는 가르침이오?’ 소녀와 내가 아무 거리낄 것 없는 친구가 되었는데 그것을 가로막는 예의를 주입하려 든다면 그것이야말로 무례이며 잘못된 자녀교육이다. 어떤 지점에서는 세간의 모든 지식과 관념을 털어버릴 필요가 있다. 그렇게 알몸이 되어 다시 시작하는 마음이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물론 계기가 필요하다. 종교와 예술이 그 역할을 해야 하고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가 그것을 만들어야 한다….

다섯 살도 부족해서 나는 갓난아기의 눈과 마음을 갖고 싶어 끝없이 나를 비워간다. 그런데 벌써 육십해를 살아버렸고 입산한 지 마흔두 해나 되어버렸다(이건 7년 전의 글이다). 선(禪) 차(茶) 붓 먹 칼 돌 나무들과 함께 애인처럼 다투기도 하고 부모자식 사이처럼 부둥켜안기도 하면서 오늘을 맞았다.”

스님이 젊은 날 한계암에 계실 때의 일이다. 한계암은 밀양 표충사 근처의 암자다. 한겨울이라 솜으로 누빈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어느 날 마루에 나와 앉아 햇볕을 등에 지고 정진 기도를 하는데 어디서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앉아 있는 어깨쯤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승복의 해진 틈을 부리로 콕콕 쪼아 솜을 뜯어가는 것이었다.

“그걸 가져가 둥지를 만들지 새끼들 이부자리로 쓸는지는 몰라도 겁 없이 그걸 쪼아가는 것이 그렇게도 좋드라?”

수안스님 이야기는 다 선화 같다. 왁자지껄하게 말하지만 귀기울이면 고요한 그림 한 폭이 떠오른다. 마음속에 평화가 가득 차 오르는 풍경이다. 이런 걸 만들어낼 줄 알아서 스님인지, 스님이라서 이런 풍경이 만들어지는 건지….

“젊어서 산에서 수행하면 그리움에 사무칠 때가 있다? 그게 무슨 그리움인 줄 알어? 움직이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다. 아무것이라도 움직이는 것이 나타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 숲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다람쥐 소리도 반갑고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도 반갑고 구름 한 점이 움직이는 것도 다 반가운데 그것조차 느껴지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게 산이거등….”

 

떡 먹으러 스님이 되다

신명에 넘치는 기질이 그렇게 산속에 머물렀으니 그 에너지가 시가 되고 그림이 될 수밖에 없었겠다. 왜 그림을 그렸는가. 이것은 왜 산에 들었는가 만큼 허망한 질문이다. 그저 인연 따라 제 삶을 풀어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운명임을. 이제는 나도 그걸 알 만해진 나이에 이른 것 같다.

비구에게 왜 승려가 되었는지를 묻지 않는 것이 불가의 예라고 들었다. 그러나 가장 궁금한 것이 또 그 부분인 것을 어쩌랴. 수안스님은 “상관없어. 뭐든 다 물어봐” 하고 내게 모든 질문을 허용했다. 전에 나는 절에서 먹는 비빔밥이 하도 맛있어서 중이 됐다고 말하는 승려를 만난 적도 있다. 수안스님 대답은 그보다 더 싱거웠다. “그저 자주 놀러가다보니 내가 어느 날 절에서 살고 있드라고!”

열 살에 전쟁이 일어났다. 밤이면 포탄이 쏟아졌고 마을 곳곳에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아들이 죽은 어머니들, 팔다리를 잃고 돌아온 아저씨들, 고아가 들끓던 시절. 한의사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은 갑자기 어려워졌다. 재산이 모조리 차압당하고 먹을 게 없어 이모네 집으로 옮겨갔다. 술지게미가 식사 대용이었다. 벌겋게 술이 올라 동네를 돌아다니던 쬐끄만 소년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싸우고 울고 배고프고 괴로워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선화 그리기에 열중한 수안 스님. 그의 선화를 보고 있노라면 평화가 느껴진다.

이웃집 목수가 그 소년을 유난히 귀애했다. 목공소에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용돈을 얻어쓰기도 했다. 어느 날 목수는 소년을 데리고 해인사로 올라갔다. 거기서 인곡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그림을 보고 절을 하라고 하시더니 달마의 부릅뜬 눈을 보고 웃음을 떠뜨리는 소년을 나무라지 않고 떡과 홍시를 내줬다. 술지게미만 먹던 소년에게 그 맛은 가히 황홀이었다. 떡 얻어먹는 재미에 절에 매일 갔다. 친구들을 잔뜩 데리고 올라가도 스님은 떡을 푸짐하게 주셨다. 떡이 있는 절이 좋아서 절에서 살아버렸다. 먹고 자고 심부름을 하다 열일곱 나던 해 아예 머리를 깎아버렸다.

 

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으셨나? “아, 아들이 절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옴마가 어데 있나? 말 안 하고 그냥 도망을 갔지. 우리 어머니는 내가 중 된 것도 몰랐어. 집에 갈 때는 중옷 안 입고 가거든. 어머니가 싫어하는데 머할라고 승복을 입겠노?”

그런데 왜 벌떡 일어서 내려오지 않았냐고 또 물었다.

“아, 내려왔제. 그란데 집에 와 있으면 또 누가 찾으러 오데. 중노릇 그만 하겠다고 집에 간 거는 아이니까 누가 찾으러 오면 또 올라오고 그랬제. 억지로 되는 게 머가 있나. 다 저절로 그리 됐어, 그라고 세월이 갔을 뿐이지.”

사미승 시절 탱화 전문가인 석정스님 문하에서 수행을 했다. 해제가 되면 불사에 나섰는데 6·25때 철없는 군인들이 망가뜨린 통도사 사천왕상의 화관을 새로 만드는 일이 그에게 주어졌다. 어린 수안이 나무를 파고 은사 석정이 탱화를 그렸다.

 

억지로 붓 잡으면 그림이 나오니…

어느 날 극락암 경봉스님이 공사장에 오셨다. 그가 판 나무를 보시더니 당신이 쓸 도장을 하나 파달라고 부탁하셨다. “팔 줄 모른다 캤더니 ‘니는 하믄 잘할끼라’ 그러셔. 파는 방법을 알아야지. 찰말로 ‘암담칠갑’이데. 석정스님이 전각의 대가라는 안강석씨를 소개했는데 이분은 가르치는 말이 너무 어려워. 무슨 말인지 모르겠드라고 했드니 이번에는 부산의 대명안과라는 데를 턱 데려가네? 거기서 운여 선생을 만났어. 김광업이라고 건축가 김중업 선생의 형님 되시지. 기독교 장로이신데 안과의사를 하면서 글도 쓰고 각도 하는 유명한 분이야. 시키는 대로 배워서 팠제. 경봉스님께 드렸드니 이건 뭐 하늘 땅이 무너질만치 칭찬을 하시네? 그게 다 어른의 덕이지. 칭찬을 하니까 진짠 줄 알고 앞뒤없이 천방지축 들고뛴 게지 뭐. 3만개를 각을 하면 전각의 대가가 된다꼬 그러대? 숫자개념이 없으니까 머가 3만개인 줄도 몰라. 그냥 보이는 대로 갑골문 상형문을 갖다놓고 무조건 팠제.”

 

운여 선생은 수안에게 각을 하려면 자꾸 원을 그리라고도 가르쳤다. 천번 만번 원을 그렸다. 계속 그리다보니 원이 그림의 원형임을 알게 됐다. 지금도 스님은 상이 잡히지 않을 때는 원부터 그려놓고 본다.

밥먹다 말고 스님은 실눈을 떴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장사를 다니셨는데 내가 길에서 놀고 있으면 날 불러. 긴 목도리를 두르고 가방 하나 들고 우리 어머닌 그때 옷도 참 잘 입으셨데이. 아이고 내 새끼, 땟국물 좀 봐라 하면서 수건에 침을 발라 얼굴을 닦아주셔. 아파도 얼굴을 가만 맡겨둬야 눈깔사탕 한 개라도 사 주신다는 걸 알거든. 그러니까 꾹 참고 얼굴을 맡기고 있제. 그런 게 요즘도 가끔 그립다. 말할 수 없이 그리워. 내가 사모곡이라는 시를 몇 개나 썼어. 한번 들어볼래?”

 

나 훨훨 벗어버리고 고향으로 가리라. 고희가 넘으신 어머니 눈앞에 철없는 개구쟁이로 나 돌아가리라…세상 다 돌아봐도 쉴 곳이 없으니 작은 가슴 할딱거리며 나 어머니 품으로 가리라.

 

“울 어머니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데 관세음보살이 동자를 팍 안아버리는 게 나오는 기라. 원래는 따로 떨어져 있는 건데…그걸 전시장에 걸었더니 사람들이 아주 좋아죽지 머.”

스님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자정이 넘어 새벽이 올 때까지, 방림보살이 자러오지 않는다고 독촉전화를 할 때까지 쉼없이 이어졌다.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도 승려가 된 것만큼 저절로 왔다. 갑골문과 상형문자로 각을 했으니 조형감각은 이미 충분히 터득한 뒤였다. 그래도 화선지에 먹을 묻힐 줄은 몰랐는데 통도사를 떠나 한계암에서 정진하던 시절 우연히 그림 하나를 그리게 됐다. 그게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나버렸다. 여기저기서 그림을 그려달란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내가 사람이 좀 헤프거든. 넘이(남이) 청을 하믄 비비꼬며 거절을 못해. 해주다보니 자꼬 하게 되고. 자꾸 하다보니 그림이 늘고…, 어떤 때는 붓을 잡기 싫어 몇날 며칠을 비질비질하는데 그래도 약속을 해놓았으니 억지로 붓을 잡으면 또 그림이 나온다? 서령씨는 안 그래? 글 쓰기 싫어 죽다가도 막상 쓰면 나오지? 그러다가 글이 늘고…, 다 그러는 게지 오데 별재주가 있나.”

 

흰 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이렇듯 편안하게 말하지만 한계암 시절 그는 무섭게 정진하는 승려였다. 사람들의 접근을 막으려고 암자 주변에 아예 정신병자요양원이라는 팻말을 써 붙여놓았다. 가슴에 묵언패를 늘어뜨리고 조주스님의 없을 무자 화두를 들고 앉았다. 보름 단식은 예사였고 어떤 때는 20일, 40일씩 곡기를 입에 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나름의 길을 찾았지만 어느 게 길인 줄 모를 때는 그런 식의 온몸을 던져넣는 몸부림에 가까운 구도의 시절을 거쳐야만 승려가 될 수 있을 게다. 그런데 그 시절 정신병자요양원이란 팻말과 뱅글뱅글 쳐놓은 철조망에도 불구하고 주말마다 정기적으로 한계암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오면 청소도 해주고 가고 음식도 해놓고 가고 그래. 나는 묵언 중이니 고맙다는 말도 못하지. 봄날인데 빨래를 해놓고 가면서 그 여인이 인제 다음 주부터는 올라올 수 없다고 하대. 결혼해서 멀리 외국으로 떠난다는 거야. 고맙다는 뜻을 표할 게 뭐가 있어야지. 그런데 마침 앞에 붓과 벼루가 놓였고 문짝에서 떼어놓은 문종이가 보이데. 소나무 두 그루와 초가 한 채를 그렸지. 그리고 곁에다 썼어. 하필이면 서쪽만이 극락세계랴. 흰 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외국 가서 부디 잘 살라는 뜻이었제. 그런데 그게 고만 소문이 나삐렸어. 여러 사람이 보고는 나도 해달라 저도 해달라 야단이 난 거야.”

첫 전시가 열린 것도 그런 식의 우연이었다.

 

“어머니 회갑이 다가오는데 뭐 할 게 없는 거야. 반야심경 전문을 다 썼어. 길다란 종이를 접어 책을 만들어 드렸으면 싶은데 책할 돈이 없어. 그래서 병풍을 몇 개 만들어 신도들에게 팔 생각을 했제. 불교신도들이야 집안에 경전 두기를 좋아하잖아. 그걸 만들어놓고 있는데 이리역 폭발사고가 났다는 거야. 여기저기서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는데 우리 불교계만 가만 있어. 그래서 석정스님하고 의논해서 부산에서 이재민 돕기 전시회를 열기로 했지. 어차피 가져갈 병풍이니까. 전에 사람들에게 그려준 것 같은 그림을 몇 개 더 그렸어.”

말하자면 그게 수안스님의 첫 전시였다. 그런데 관람객의 반응이 놀라웠다. 전시장에 내놓은 게 금방 팔린 것은 물론 ‘주문이 따따블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삽시간에 인기작가가 되고 말았다. 1981년 첫 개인전을 열고 1985년엔 프랑스 한국문화원에서 초청장이 왔다. 1989년엔 파리에 이어 두 달간 유럽 순회전을 치렀다.

 

“내가 입이 경망스러워서 프랑스에서 전시를 한다고 삼지사방에 자랑을 쳤다? 하도 좋아서 말 안 하고는 못 배기겠드라고. 그런데 첨에 프랑스에 턱 가니 장소가 안 잡혀 있다고 대사관에서 우물쭈물하는 거야. 와~ ‘황당칠갑’이데. 지나가는 개한테도 자랑을 쳐놨는데 꼴이 머가 돼? 한 달만 기다리라고 해서 마르세유에도 가고 하면서 기다리다가 전시회를 열었지. 그런데 사람이 한 명도 안 오는 거야. 문화원장이 민망해서 내가 가믄 숨느라고 바빠. 이란 이라크가 한창 전쟁할 때거든. 파리가 전신만신 볼 꺼리인데 누가 한국문화원에 와? 하루 종일 멀거니 서 있는데 생각이 탁 떠올랐어.”

 

어머니가 부처이고 진리

스님은 당장 6·25후 한국의 전쟁고아를 데려다 키우는 집 주소록을 수소문한다. 그리로 초청장을 띄웠다. 우리 아이들을 키워줘 감사하니 선화도 보고 한국음식도 함께 나누자는 초대였다. “방림보살이 음식 솜씨가 좋거든. 김밥도 싸고 잡채도 하고 한국음식을 만들었어. 물론 차도 준비했지. 문화원측에서는 그걸 파리 사람들이 어떻게 먹느냐고 그러대. 아무튼 초청만 해달라고 했지.”

   

 

그런데 문화원에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 프랑스 할머니가 선화를 보더니 자기 보석 목걸이를 벗으면서 바꿔줄 수 없냐고 물어왔다.

“그럴 때 나는 뺑 돌아버리는 거지. 원한다면 당장 그려주겠다 했지. 학을 그렸어. 관객 중에 누구 립스틱 가진 거 없느냐고 물었어. 그걸 받아 학 주둥이에 립스틱으로 빨간 칠을 하는 거야. 단정학이지. 퍼포먼스가 뭐 딴 게 퍼포먼스야? 사람들이 아주 난리가 났어. 문화원 생기고 나서 서양사람이 그렇게 많이 온 전시는 처음이래.”

 

수안스님에겐 그렇게 샘솟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뉴욕에서 법문을 해달라는 청을 받은 것도 그때였다. 동국대 부총장 하던 수경스님을 비롯 학식 높은 스님들이 잔뜩 모여들었다.

“그런데 그날 뉴욕에 눈이 펄펄 온다? 단상 위에 턱 올라갔는데 쥐죽은 듯 조용해. 내 얼굴만 쳐다봐. 스님은 고기 먹으면 안 되고 머 고런 거밖에 모르는 스님들이 좍 앉은 거야. 여우도 고향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죽는다는데 스님들은 무슨 인연으로 여기와 계시오? 여러분 ‘고향설’ 아시요? 밖에 눈이 펄펄 오는데 우리 그거나 한번 부릅시다. 했지. 그걸 불렀더니 어라? 쥐죽은 듯 앉아 있던 스님들이 순간적으로 다 운다? 내친김에 ‘불효자는 웁니다’도 메들리로 불렀지. 어머니 불러서 안 우는 사람 있나? 안 울면 그건 스님도 아이다. 어머니가 즉 부처고 어머니가 곧 진리거등. 그 생각이 적재적소에 딱 나온 거지. 학식 높은 스님들한테 그런 유행가 가락이 통할라믄 명상의 힘이 없고서는 안 되는 거지. 안 그러면 그걸 끌고 갈 수가 없어.”

 

“나는 김일성이 친구다!”

스님에게 묻는 금기사항 하나 더! 마침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이 성불(成佛)이라면 거기로 가는 길은 승려마다 다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수안스님은 그 꼭대기에 오르신 건가요?”

“지가 지를 꼭대기에 올라갔다고야 말할 수 있나? 그저 가는 중이라고 하자. 인제는 지 길을 찾았으니 더 이상 헤매지는 않는다. 길을 알믄 올라가는 거사 안 쉽겠나?”

 

5공화국 전두환 정권이 막 출범한 직후였다. 스님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경찰에 잡혀갔다. 나는 이 이야기를 방림보살의 입을 통해 들었다.

“부산만 나가믄 술에 취해삐리니 스님 술버릇 때문에 힘들어 죽겠어예. 형사들이 절에 나타나지 않은 지가 몇 해 안 됩니더” 한다.

사연은 이랬다. 하도 재미있어 수안스님 얘길 하면서 이걸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느 날 한 예술애호가가 스님에게 술을 산다고 찾아왔다. 함께 술집에 들어갔다. 스님 곁에 젊은 아가씨가 와서 앉았다. 술이 취하면서 스님은 스님답지 않게 아가씨의 어깨도 만지고 손도 만졌다. 호기심 많고 정 많은 스님이라 이름이 뭐냐? 집이 어디냐? 물어볼 것도 많았다. 수안스님은 그날도 오늘 나와 마주앉아 술 마시듯 아이처럼 즐거워했고 환희심에 겨워 웃고 또 웃었을 것이다. 술을 진탕 마시고 기분 좋게 취해 숙소로 들어간 것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 예술애호가의 오해에서 출발한다. 아까 스님의 동작을 지켜본 그는 수안이 여자를 탐낸 걸로 착각한다. 밤 깊어 그 술집 여자를 스님 방으로 예고 없이 올려보낸다. 술이 얼큰해져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든 스님, 갑자기 문을 열고 나타난 여자를 본다. 스님 눈에 그 여자는 아까의 가엾은 중생이 아니라 청정비구의 몸을 망치려고 등장한 마구니(악마)였다. “요망한 년 썩 꺼져라!”고 일갈한다.

비구승으로서 금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술을 좋아하지만 ‘하나를 어겼으니 하나는 더 철저하자는 심산인지’ 술에 취하면 몸가짐을 더욱 청정하게 가지는 것이 이를테면 스님의 술버릇이었다. 쫓겨난 그 여자는 아까의 예술애호가에게 전말을 보고했고 미욱한 그는 여자에게 한 번 더 올라가보라고 말했던 모양이다.

 

여자가 스님 방에 다시 나타났다. 스님은 화가 극도에 달한다. 술에 취했겠다, 이런 요망한 년이 청정비구를 호려? 하면서 마구니임에 틀림없는 그 여자를 쫓아 속옷바람으로 호텔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이때부터가 코미디의 시작이다. 알고보니 그 여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건만 알 리 없는 스님은 여자를 잡는다고 복도를 뛰어다닌다. 이년 저년 해대며 호텔 복도를 뛰어다니는 술 취한 스님, 그러면서 “나는 청정비구”라고 외쳐대는 스님, 종업원들이 달려와 옷자락을 잡고 몸싸움이 시작된다.

“남들 눈에는 여자 잡으려고 뛰어다니는 꼴이 되지 않았겠어요? 아이고 우리 스님 아무도 못 말려.”

   

 

방림보살의 얘기도 신이 난다. 그런데 종업원들에게 잡혀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스님, 한술 더 떠서 난데없이 “이놈들아 내 몸에 손대지 마라. 나는 김일성이 친구다”라고 외쳐버린다. 이유는 모른다. 그저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숱한 공안사범을 일부러 만들어낸 전두환 정권에 대한 울분이 그런 식으로 터져나온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발언으로 스님은 졸지에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이 된다. 북에 관련된 게 뭔지 매운 취조를 당하고 축서암은 별안간 요주의 사찰이 되고 만다.

“말도 마세요. 그 후 축서암에 형사들이 주기적으로 들락거렸다고요. 법당 짓는 돈은 어디서 나왔냐는 둥 별걸 다 묻고 다녀요. 간첩 돈으로 짓는다 어쩔래? 하면 기 막혀 하며 가버리죠. 김영삼 대통령이 들어서고 나니 형사들이 발길을 끊데요. 아휴~.”

나중 알고보니 스님은 오래 전부터 단기(檀紀)를 써왔는데 이게 엉뚱한 오해를 불러온 것이었다. 공안원은 수안스님이 ‘김일성이 내 친구’라고 소리쳤다는 이유로만 잡아간 것은 아니었다. 진작부터 단기를 사용하던 승려니 민족주체사상에 입각해 김일성 만세를 외쳤다고 추론했던 것이다.

“단기? 단기를 쓰면 마음이 새로워져. 역사 속의 나를 한번쯤은 되새기게 되고 다른 각도로 인생을 음미하게 되잖아. 서기 2000년만 새로운 게 아니야. 숫자 하나만 바꿔놔도 사람은 4000년 전의 단군에서부터 4000년 뒤의 나에게까지 시공을 꿰어 찰 수가 있다고!”

이 심각한 단기의 해석 차이, 이쯤 되면 그 시절의 일들은 블랙 코미디 중에서도 최상급 수준의 코미디다.

 

“색깔에서 놓여나야 해”

스님은 그림 소재를 어디서 찾을까. 그것 역시 자연스럽기는 스님의 다른 일상과 매한가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어느 날 부모의 손을 잡고 한 아이가 축서암에 왔다. 그 아이는 스님께 절한다고 엎드리다가 그릇에 담긴 물감을 엎질렀다. 고마운 사람에게 마음을 전할 그림 하나를 꼭 그리고 싶었었다. 수중에 남은 마지막 경명주사를 풀어 붉은 물감을 만들어놓고 무얼 그릴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며칠을 끙끙대던 중이었다.

 

아이는 놀라고 부모는 당황해 어쩔 줄 모른다. 스님이 얼른 손을 뻗어 물감을 엎지른 아이를 품에 담쑥 안았다. “괜찮다, 놀라지 말라” 말하고는 화선지에 푹 들이부어진 붉은 물감을 손으로 둥글둥글 휘저었다. 순식간에 큼직한 붉은 꽃이 그려졌다. 그 바깥으로 잎사귀 8개를 그려 넣고 가운데 스물 몇 개의 꽃술을 심어 넣었다.

 

“조오타. 이건 우리 둘이 합작한 그림이다! 그랬더니 그 부모가 좋아죽는 거야. 아주 까무라치네. 그렇게 좋아하니 가지고 가라고 줘삐렸지. 그런데 어라? 며칠 후에 그 부모가 또 온기라. 그림값이라고 봉투에 얼마를 들고 왔어. 괜찮다 캐도 부득부득 돈을 내놔. 그러면서 날더러 물어. 스님 근데 그 꽃이름은 무엇입니꺼? 햐. 이거 뭐라 카기는 캐야겠는데 뭔지를 내가 아나? 모른다 캐뿌리믄 쪽팔리잖아? 마침 뜰에 모란이 잔뜩 피드라? 그 꽃이 모란같이 생겼거든. 모란이라고 칼까 하는데 퍼뜩 우담바라라는 말이 떠오르네? 우담바라가 피믄 부처님이 출현한다 카거든. 까짓 거 뭐 ‘우담바라다!’ 캐뿌릿제. 그런 게 다 그렇게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기라.”

 

그때부터 수안스님은 즐겨 우담바라를 그렸다. 붉게도 푸르게도 검게도 그렸다. “색깔에서 놓여나야 해. 꽃이라고 오데 다 붉은가.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아. 먹고 죽자! 그 말이 딱 맞다니까. 있는 것을 자꾸자꾸 죽여가야 새로운 게 나오거등.”

사람들은 수안스님의 우담바라를 보고 둘레의 잎은 8정도를 뜻하고 가운데의 꽃술은 28성좌를 뜻한다고 해석했다. “그럴 때는 그저 가만 있는 기제 뭐. 구라가 되잖아? 히히.”

 

호기심이 많으니 수안스님은 탐도 많다. 탐심이 중죄라는 것은 스님에겐 해당사항 없다. 탐나는 것을 보면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 같아진다. 홍콩에서 본 돌도 그렇고 중국 양주에서 본 붓도 그랬다.

석도스님은 수안 그림의 정신적 지주다. 양주8괘의 하나로 중국에서도 신격화한 석도스님은 선화가로서 명말 청초를 살다간 희대의 선객이었다. 수안은 석도의 힘과 기개가 넘치는 그림을 미치게 좋아했다. 날개를 단 유려한 운치와 솔직담백한 고백이 다 좋아 그의 진본을 한 번이라도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자신의 그림이 팔려 돈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그는 망설임 없이 중국 양저우(揚州)로 달려갔다. 양저우박물관에 들러 꿈에 그리던 석도의 그림을 직접 본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박물관장의 안내로 들른 붓 공장이 문제였다. 그중의 붓 하나를 잡고 그는 놓지 못한다. 붓털의 촉감이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우면서 기세는 꼿꼿했다. 천하명품이었다.

   

 

“그 붓 공장에서 내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니까. 산양의 겨드랑이 털로 만든 붓이래. 당장은 안 되고 주문하고 나서 1년은 기다려야 완성된다는 거야.”

꼭 갖고 싶었다. 욕심이 발동했다. 아이 조르듯 방림보살을 졸랐다. 귀국한 뒤에도 대붓의 촉감을 못 잊어 잠을 설칠 정도였다. 1년 뒤 붓이 완성됐다는 연락이 왔다. 부쳐줄 수도 있다 했지만 기어코 다시 양저우로 찾아갔다. 양저우시장을 비롯해 글씨와 그림에 한몫한다는 중국 내 1급화가 100여 명이 모여 앉아 있었다.

“긴 테이블과 원탁에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좌악 앉아 있어. 이 붓을 살 사람이 과연 붓 임자가 될 만한지를 테스트하기 위한 거지. 눈앞에 붓과 벼루와 물감이 놓였데!”

무거운 침묵 속에 스님이 붓을 잡았다. 수안은 붓을 주먹 쥐듯 네 손가락으로 잡는다. 그렇게 악필로 붓을 잡고 물감을 찍어 동자상 한 폭을 단숨에 완성했다. 마지막 점을 찍고 붓을 내려놓자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기 모인 100명 고수가 다 내 앞에 줄을 서데. 아, 나야 기분이 째지지! 모두에게 한 장씩 선사했어. 새벽까지 한자리에 서서 그림을 그려도 지치지를 않아. 중국의 1급수라는 치들이 새벽까지 단 한 명도 자리를 뜨지 않아. 물론 밤새도록 별별 술과 차가 다 나오고…, 하하.”

 

윙크하는 달마

스님은 거처하는 방문 앞에 흰 봉투를 서른 장쯤 쌓아두었다. 뭐냐고 물으니 돈이란다.

“축서암까지 돈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제법 있어. 오면 얼른 줄랴고 저렇게 쌓아둔 거지. 자장면값밖에 안 되는 돈인데 저렇게 놔둬야 내주기가 쉽거든. 그런데 거지가 오면 ‘또 오세요’가 잘 안 된다? 그림 사러 오는 사람한테는 입이 지가 알아서 ‘또 오세요,’ 요 지랄을 떠는데. 이래 가지고 무슨 중이라고 할 수 있겠나?”

 

그래도 축서암에 오는 거지들은 명절이면 스님 입을 내복을 사가지고 올라온다. 스님은 아침마다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 전에 돈을 바친다. 하루하루 봉투를 바꿔서 올려놓고 기도한다.

“남북한 7000만 동포가 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이 돈을 받으시고 대신 이자를 듬뿍 얹어서 중생들 품 안으로 돌려주십시오 하고 빈다. 승려가 무슨 돈 타령이냐고? 아니지. 승려일수록 돈을 알아야 해. 돈의 가치를 알고 돈의 귀중함을 알고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아야 진짜 스님이지. 돈을 비웃으면 가짜야.”

수안스님은 돈버는 법도 훤하게 안다고 했다.

 

“그거 아주 간단해. 돈을 모으려면 우선 돈이 도는 법칙을 알아야 하거등. 제행무상 부증불감의 원리인데 그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고 어느 것도 영원히 멈춰 있지 못한다는 뜻이거든. 변하고 움직이고 돌아다니는 흐름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지. 그게 바로 인과의 법칙이야. 누군가를 위해 성심껏 베푼다면 그 대가가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어, 베풀어야 돈을 벌 수 있어. 꽉 싸매고 있으면 절대로 돈이 안 들어와. 나도 공짜 물감을 쓰고 공짜 종이를 쓰면 절대 그림이 안 팔린다? 그게 희한하드라고!”

새벽 3시, 스님은 작업실로 들어가서 낮에 그린 그림을 한아름 안고 나왔다. 11월 말경 인사동 윤갤러리에서 수안스님의 선화전이 열릴 예정이다. 그때 걸 그림들이다.

“좋지? 내가 내 그림의 가장 열렬한 팬이야. 아까도 그리다 말고 하도 예뻐서 동자에게 입을 쪽쪽 맞췄어. 오르가슴을 넘어 법희충만이 될 때 이런 그림이 나와. 그러니 그림과 법은 둘이 아닌 거지.”

희고 붉은 차꽃 아래 엎드려 있는 두꺼비가 여럿 보였다. 수안스님은 지난 여름 더위를 피해 법당 앞 차나무 밑에 엎드린 두꺼비란 놈을 봤더랬다.

김서령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중앙중 교사, ‘매일경제’신문·‘샘이깊은물’ 객원기자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저서 ‘김서령의 가’

“그게 난데없이 오늘 턱 떠오르더라? 뭘 그릴지 몰라서 며칠 끙끙거렸는데 두꺼비 때문에 다 풀렸다 아이가.”

그 두꺼비는 영락없는 달마였다. 수안스님은 “두꺼비가 윙크하지?” 묻지만 그건 한눈이 크고 한눈이 작은, 흐뭇하게 엎드려 윙크하는 달마선사였다. 왕방울 같은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던 달마 대신 서늘한 차나무 아래 엎드려 윙크하는 달마도다!

거기 12월의 메시지가 가득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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