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간이 줄지어 선 땅끝 세상
땅끝마을 선착장
망망대해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더 나아갈 데 없는 곳이 ‘땅끝’이다. 벽에 걸린 지도를 쳐다보며 지리 감각을 익혔던 이들에게 전라남도 해남의 땅끝마을은 그 느낌만으로도 아득하고 가파르다. 금세 모든 것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은, 금방이라도 파도에 잠겨들 것 같은…. 그러나 그 끝자리 물가에 서서 온몸 가득 해풍을 맞아본 이들은 안다. 뻥하니 가슴 뚫리는 듯 환하게 다가드는 해방감을, 새로운 국면이 안겨주는 까닭 모를 넉넉함을. 그래서 ‘끝은 시작의 또 다른 이름’이란 말조차 쉽게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땅끝에
왔습니다
살아온 날들도
함께 왔습니다.
저녁
파도소리에
동백꽃 집니다
-고은 시 ‘땅끝’ 전문
끝은 결국 시간의 마무리인 만큼 모든 끝남에는 과거의 시간이 포함돼 있다. 따라서 끝남에는 그동안 지녀온 시간을 한꺼번에 무산시키는 에너지 같은 비장미가 따라붙게 마련이다. 낙화의 애잔한 몸짓, 저녁놀의 광휘 같은 것이 곧 그 마지막의 어여쁨이다.
땅끝에 왔다고 조용히, 그리고 담담하게 말하는 시의 말 속에 곧바로 ‘살아온 날들’이 들어앉는 까닭도 예외는 아니다. 무수한 감정과 경험으로 점철된 과거 시간이 ‘나’의 끝자리에 동행했음을 새삼 확인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과거 어느 때는 열정과 분노, 회한과 환희로 명명됐을 그것들이 여기서는 선생님의 야단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다소곳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줄지어 선다. 그 통절한 찰나의 절망 혹은 빛남은 이내 동백꽃의 낙화로 갈무리된다. 3연 8행의 지극히 간출한 언어로 구성된 시지만 이 짧고 간명함 속에 우주의 질서가 자리 잡으며 제의(祭儀)의 경건함까지 가담한다.
이렇듯 땅끝마을은 그 이름값과 그에 어울리는 풍광을 곁들여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사유의 시공간을 제공해 준다. 예전에는 황량하기만 하던 바닷가에 이제는 집들이 들어서고 방파제며 현대적인 선착장까지 차려졌지만 맑고 한가한 풍정까지 변한 건 아니다. 특히 선착장을 조금 비켜난 공터에서 마주하는 바다 풍경은 여느 해변에서나 쉬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밀려오는 물결과 다투듯 장난치듯 가지가지 형상의 암석이 도열해 있는 해안을 벗어나 숲길로 들어서면 비린내 풍기는 숲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빛과 그늘이 소리 없이 소란을 떠는 이 길에서도 나뭇잎 사이로 출렁이는 바다가 보이며 명랑한 새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이는 모노레일카의 승차장까지 이어진다.
아름다운 죽음의 정원
해남 여행은 뭍에서부터 바다로 가서 마무리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땅끝마을에서 시작해 뭍으로 거슬러 오르는 것이 낫다. 그 아득하고 가파른 땅의 의미를 새삼 도드라지게 깨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땅끝을 넘어오면 소나무 방풍림이 모래밭을 에워싸고 있는 송호리 해변이 나타난다. 겨울철에 더 맑고 눈부신 바닷가를 거닐다가 다시 읍내를 향하다보면 들판 너머로 예리한 산봉들이 키를 낮추고 있는 산줄기를 보게 된다. 달마산 연맥이다. 불꽃 형상의 산줄기라고 했던가. 남방 불교 도래의 전설을 품은 미황사가 이 산기슭에 앉아 있다. 장흥 보림사와 함께 남녘의 예쁜 절간으로 이름이 높지만 응달마다 잔설이 쌓인 이 겨울날엔 인적마저 뜸하다.
윤선도 고택 마을의 골목
돌올하면서도 기품 있는 일주문을 지나 층계를 오르면 절집의 지붕이 나타나고 그 너머로 달마산 바위 봉우리들이 창공을 등지고 선 풍광이 한눈에 잡힌다. 숨을 몰아쉬며 절 마당에 서면 그 풍경이 온전한 병풍 그림이 되어 드넓게 전개된다. 탄성은 이쯤에서 절로 나오는데, 이는 절집을 등지며 돌아서는 때도 마찬가지다. 산을 올라오면서도 보지 못했던 바다가 절 마당에서 훤히 내려다보이기 때문이다. 이름난 절집치고 명당 아닌 데 앉은 절집이 없지만, 문외한이 보더라도 미황사 절집은 명당 길지의 한가운데를 차지한 느낌이다. 법당이 부처님 앉은 데라면 불꽃 형상의 뒷산은 자연의 광배(光背)가 되며 삼라만상이 전면에 부복하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자리가 좋다보니 절을 찾은 이의 마음까지 훤칠해진다.
아는 이는 알지만, 아름다운 미황사 경내에서도 대웅보전 오른쪽에 있는 숲길이 가장 매력적이다. 이 숲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동백나무와 소나무로 가득 차 어느 때든 아늑하고 청량한 느낌을 준다. 다른 계절에는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지만 겨우내 또한 푸른 산죽이 있어 적적하지 않다. 일부러 심호흡을 하며 10여 분 완만한 숲길을 걷다보면 옛 선사들을 기리는 부도와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도밭에 이르게 된다.
고만고만한 부도와 비석들이 세월의 이끼를 덮어쓴 채 무리를 지어 있는 이곳에 서면 마치 아름다운 죽음의 정원에 들어온 느낌마저 든다. 이미 오래전에 적멸의 세상에 든 이들도, 또 머잖아 그 세상으로 옮겨가야 할 이들도 지상의 이런 바람소리와 햇살, 바다냄새와 새소리를 지척에 두다보면 그렇게 적적하지만은 않을 터라 여기는 것도 이런 자리에서 가져보는 괜한 상념이다.
비자나무 푸른 빗줄기
고산 윤선도를 떠올리면 ‘지국총, 지국총, 지국총…’ 나룻배 젓는 소리가 들린다. 이 또한 교육의 힘이다. 많은 학생의 골머리를 때리긴 했지만 학창 때 강제로나마 옛날 시 공부를 했기에 이런 연상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두륜산으로 가기 전, 읍내에서 요기를 하고 가까운 윤선도 유적지부터 들르기로 한다. 나로서도 10여 년 만에 다시 한 걸음인데 그 사이 전에 없던 유물관 건물이 마을 맨 앞에 서 있다. 은색 스틸과 대형 유리창을 끼워 현대식 구조와 한옥 양식을 섞은 유물관 외관부터 독특한데 내부 구조도 재미있다. 전시실이 딸린 지하층에서도 햇빛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깥 잔디밭과 연결시킨 통로도 퍽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용도를 십분 지키면서도 주변 분위기에 돌발하지 않는 이런 배려에서 우리나라 현대 건축가들의 안목을 짐작할 수 있다.
녹우당(綠雨堂) 앞,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그대로다! 비록 헐벗은 가지들뿐이지만 위용은 변함이 없다. 크고 오래된 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다. 예부터 반가 반촌의 자존과 위세를 이들 고목거수가 상징해왔기 때문이다. 만약 이 은행나무가 없다면 녹우당의 기품인들 온전할 수 있을까.
덕음산을 뒤로한 녹우당은 마을의 가장 안쪽에 앉아 있다. 앞은 드넓은 논밭이다. 윤선도가 직접 심었다는 비자나무들이 집을 호위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비자나무가 쏴 소리 내며 흔들렸는데 이 소리가 빗줄기 떨어지는 소리 같다고 해서 녹우당이라고 했단다. 소리에 색을 입히고 형상으로 바꾼 절묘함에도 옛사람의 멋이 있다.
여러 채의 사당과 사랑채, 안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된 윤선도 고택 중에서도 사랑채인 녹우당은 가장 특별한 집으로 일컬어진다. 이 집은 효종 임금이 왕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지어주었던 것을 윤선도가 82세 되던 해 지금의 자리로 옮긴 내력을 갖고 있다. 자세히 보면, 기와지붕이 겹으로 돼 있는 집채가 있는가 하면 처마까지 이중으로 된 집도 있는 이 마을의 고가들은 남도 특유의 경쾌함을 지니면서도 본래의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해남에서 해남 윤씨의 기반을 닦은 인물은 윤선도의 고조부인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이다. 그는 해남의 이웃인 강진에 살았는데 당대 거부이던 해남 초계 정씨 정호장(鄭戶長)의 외동딸과 결혼, 정호장의 재산을 물려받고 일약 거부가 됐다. 그 뒤 해남 도강 김씨의 땅이었던 이곳 연동리 마을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해남을 찾는 이는 꼭 들른다는 윤선도 고택. 사람들은 왜 이곳을 찾고 또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돌아가는 것일까.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만났던 인물이 살았던 곳에서 갖는 문화적 감흥이 각별해서? 부와 명예를 두루 주었다는 명당의 지기를 살피기 위해? 아니면 옛집들이 풍기는 시간의 냄새와 분위기가 좋아서? 이런 질문은 곧 나 자신한테로 돌려지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스스로 답하기를 보류한다. 땅끝의 궁벽진 고을에 이런 인문적 유산이 보존돼오고 있음이 고마울 따름이다.
미황사
여관이며 식당과 매점들이 있는 집단 시설구역에서 대흥사 절간까지 가는 길은 꽤나 멀다. 겨울철엔 이곳을 내왕하는 차편도 없다. 그러나 우거진 숲이 터널을 이루고 계곡 물이 따라 흐르는 이 길은 즐겨 걸음을 나선 이들에겐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아름다운 길이 된다. 예전에 있던 편의시설이 죄 철거됐는데 유서 깊은 기와채 여관 유선장이 예전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 열린 대문으로 들어가 화단이 있는 마당을 한 바퀴 돌아본다. 햇빛을 받고 있는 장독대뿐만 아니라 댓돌에 얹힌 손들의 신발까지 정다워 보인다. 여관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대흥사 일주문을 만난다. 울퉁불퉁한 두륜산 봉우리들도 멀리 쳐다보인다.
계곡 따라 걷는 숲 터널
도대체 어느 느티나무가 그런 못된 버릇을 가졌고, 그런 가슴앓이로 속까지 텅 비었단 말인가. 일주문으로 가기 전, 어느 시인이 일러준 대로 개울가의 고목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그런데 피안교 아래쪽 유선장 여관 담장을 감고 도는 개울 양옆에는 늙은 느티나무가 한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무 기둥에 횅하니 구멍이 나 있는 모양도 마찬가지다. 마침내 나무들을 둘러보던 내가 푸푸, 웃고 만다. ‘자발없는 관음증’을 가진 자는 개울가 느티나무가 아니라 굳이 그것을 찾으려는 나 자신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 무더운 한여름 밤 네댓 아낙 놀러 나왔지.
대흥사 피안교(彼岸橋) 밑 으늑한 개울가의, 말추렴 반지빠른 마흔 뒷줄 아낙들이 푸우 푸 멱을 감았지. 유선장 감고 도는 가재 물목 돌팍 위에 웃통이며 속옷이며 훌훌 벗어 던져놓고 멱 감았지, 멱을 감았어. 미어질 듯 풍만한 샅이며 둔부 이리 움찔 저리 움찔, 출렁거리는 앞가슴을 홀라당 드러내고 멱을 감았지. 접시형 젖가슴에 원뿔꼴 유방하며 반구형 사랑의 종 감긴 달빛 풀어내고 물장구 첨벙첨벙 멱 감는 아낙네들 곁눈질하던 저 느티나무, 아니 볼 것 훔쳐다 본 자발없는 관음증 느티나무. 벌거숭이 여인네들 속살 몰래 보기 송구하여 아으! 타는 가슴 쓸어내리다, 천년토록 쓸어내리다,
횅허니 도둑맞은 드키 속이 저리 비었대.
- 윤금초 시 ‘대흥사 속 빈 느티나무는’ 전문
에로티시즘 운운을 떠나서 시가 재미나서 잘 읽힌다. 느티나무를 음험한 노인네로 의인화한 수법이 그럴싸할 뿐만 아니라 멱 감는 여인네 그림이 탁월하다. 허나 느티나무 처지에선 억울하기 짝이 없다. 세월 때문에, 병충해로 인해 속이 뚫렸건만 인간 여편네들 때문이라고 몰아붙이다니 이런 몹쓸! 그리고 궁금증은 따로 있다. 왜 하필이면 대흥사 절문 앞 느티나무란 말인가?
무슨 화두(話頭)라도 되는 양, 절 마당을 걸을 때도, 두륜산 봉우리를 쳐다보면서도, 추운 날 푸른 잎을 꼿꼿이 세운 파초 잎을 보면서도 문득문득 그 질문을 해보았는데 결국 돌아온 내 답변은 에라이,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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