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경주 "문무왕 장례길" 가다

醉月 2013. 2. 23. 01:30

일출 무렵 경주 문무대왕 수중릉이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봉길해변에 섰다.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밤을 새워 동해 용왕신에게 간절한 소망을 빌던 무속인들이 제를 지낸 음식을 해변의 백사장에 내려놓자 대왕암에 앉아 있던 갈매기떼가 일제히 날아올라 하늘을 뒤덮었다. 갈매기의 날갯짓에서 1300여 년 전 문무대왕의 장례에 펄럭였을 만장(輓章)이 언뜻 보이는 듯했다.


왕이 승하했다. 681년 7월 1일의 일이었다. 신라의 문무왕. 16년 동안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끝에 삼국통일을 이룬 왕이었다. 전쟁 속에 살았고, 전쟁이 끝났음에도 왜구의 위협에서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왕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왕의 마지막 유언이 이랬다.

“…목숨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이 예와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니, 홀연히 ‘긴 밤’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찌 한스럽겠는가.…지난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된다.…상례의 제도는 힘써 검소하고 절약함을 좇을 일이다.”

왕이 말한 ‘긴 밤’이란 짐작하다시피 ‘죽음’이었다. 왕은 그렇게 자신에게 다가올 ‘긴 밤’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음에도 크고 화려한 무덤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은 없었다. 왕은 웅장한 무덤 대신 화장을 원했다. 남은 사람들에게 왕이 끝까지 당부했던 것은 백성의 부담경감과 검소한 장례였다. 위대한 왕의 가슴 뭉클한 유언이었다.

왕은 동해의 호국용이 되고자 했다. 통일은 이뤘으되 신라는 오랜 전쟁으로 국고는 탕진됐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끝낸 왕은 평화를 갈구했다. 전쟁에 쓰였던 투구와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기도 했고, 더러는 모아서 무장산(?Y藏山)에 파묻고 평화의 세상을 기다렸다. 하지만 꿈은 멀었다. 기나긴 전쟁은 끝났지만 백성들은 지쳤고, 잦은 왜구의 노략질로 삶은 더 피폐해졌다.

왕이 신라를 지키는 용이 되고자 한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비바람을 다스리는 거친 비늘의 용이 돼서 그 신령스러운 기운으로 신라를 지키며 평화의 세상으로 바꾸고자 했다. 죽어 용이 되고자 한다는 왕의 말에 법사가 물었다. “용은 한낱 짐승의 응보인데 어찌 용이 된다고 하시냐.” 왕이 답한다. “세상의 영화를 버린 지 오래이니 추한 응보로 짐승이 된다면 그거야말로 내 뜻에 맞는 일이다.”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기록이 이렇다.

왕은 죽음의 긴 밤을 넘어 백성의 안녕을 지키는 용으로 다시 태어나 새 아침을 맞으려 했다. 죽어 용이 되고자 했던 꿈. 그것이야말로 죽음을 넘어서까지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왕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문무왕의 장례길을 따라가는 우리의 여정은 여기서 시작한다.

문무왕 장례행렬의 수레가 지나간 경주 함월산의 숲길에서 만난 용연폭포. 돌문 형상의 거대한 바위 안쪽에서 폭포가 쏟아졌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수중릉을 찾았다가 동해 용에게서 만파식적과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받아 돌아오던 길. 신문왕이 여기서 옥대 한 조각을 물에 넣자 용이 돼 하늘로 올라가며 이 폭포가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왕의 꿈,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신라 문무왕의 죽음. 죽어서 용이 되고자 했던 왕의 장례행렬은 비장하고도 장엄했으리라. 1300여 년 전 그 행렬을 따라가는 여정은 경주 한복판 낭산(狼山)에서 출발한다.

왕이 승하한 지 열흘째 되던 날. 그러니까 681년 7월 11일의 일이었다. 왕의 시신은 성안의 침소에서 경주 남산과 마주보고 있는 낭산 자락으로 옮겨진다. 낭산은 경주 한복판에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처럼 누워 있는 해발 108m의 산이다. 높이와 위세만을 보면 ‘산’이라 이름하기조차 민망하지만 예로부터 신라는 낭산을 신성한 산으로 여겼다.

문무왕의 주검은 그의 유언대로 여기서 화장돼 한 줌의 재가 된다. 문무왕이 낭산에서 화장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문무왕은 일찍이 이 산자락에다가 절집 ‘사천왕사’를 지었다. 삼국통일 후에도 물러가지 않고 신라를 위협하던 당나라를 불법으로 물리치기 위함이었다. 용맹스러운 사천왕을 모신 사천왕사에서는 적을 추풍낙엽처럼 물리치는 이른바 ‘문두루비법’의 신묘한 법회가 자주 열렸다.

문무왕의 화장은 사천왕사에서 머지않은 능지탑에서 이뤄졌다. 능지탑은 경주의 허다한 유적들에 밀려 찾는 이 없이 호젓한 민가의 구릉진 밭 주변에 덩그러니 세워진 높이 4.5m 정도의 건축물. 허물어진 석물을 다시 쌓아두었지만 본래 모습을 알 수 없어 2단만 쌓아두고 나머지 돌은 그 곁에 모아두었다. 왕의 죽음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간 흔적이 거기 있다.

능지탑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정방형의 탑 주변을 돌며 사방의 석물에 돋을새김된 십이지신상을 둘러보다가 걸음의 수로 그 크기를 가늠해본다. 한쪽 면이 열여섯 걸음. 이게 만일 오층탑으로 서 있었다면 통일신라의 가장 큰 석탑이라는 감은사지 석탑 규모의 두 배는 넉넉히 됐을 것이었다.

몇 발짝 물러서 능지탑을 본다. 화장의 예가 치러지기 사흘 전 왕위를 물려받은 아들 신문왕도 아마 이쯤에서 선왕의 주검이 화염에 휩싸여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었다.

그렇게 문무왕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봤던 아들 신문왕도 훗날 능지탑에서 머지않은 이곳 낭산자락에 묻혔다. 능지탑을 찾았다면 신문왕릉과 사천왕사터를 함께 둘러보자. 여기다가 사천왕사터 위쪽의 선덕왕릉까지를 묶어서 가볍게 걸어서 다 돌아볼 수 있다. 수년째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사천왕사터에는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만 목이 잘린 채 덩그러니 남아 있다.

거북받침돌이 받치고 섰던 문무왕 비석 조각은 무너지고 쪼개져 국립경주박물관에 남아 있으니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정의 맨 마지막 코스로 남겨두자.

경주 낭산 자락의 능지탑. 문무왕의 주검이 열흘 만에 여기로 옮겨져 화장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 차로 또 도보로 장례행렬을 뒤따르다

문무왕의 장례행렬은 어떤 길을 택해 동해의 대왕암에 이르렀을까. 학자들이 대동여지도와 해동지도, 지승 등의 고지도로 그 길을 추정했다. 추령 고갯길에서 모차골로 방향을 틀어 기림사를 거치고 감은사 앞을 지나 대왕암까지 이르는 길이다.

학자들이 추적해낸 문무왕의 장례길은 제법 뚜렷하지만, 보문호와 덕동호가 조성되고 도로가 놓이면서 옛길을 찾기가 수월치 않다. 걸어서 그 길을 다 짚는 게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위를 걷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일부 구간에서는 차도만 있을 뿐 아예 인도가 없다. 그러니 산길을 따라 걸을 수 있는 딱 한 곳의 도보구간을 빼고는 차로 달리면서 잠깐 잠깐 멈춰서는 것으로 족하다.

경주시내를 벗어난 문무왕의 장례행렬은 명활산성을 지났다. 보문호의 서남쪽 물가를 따라가는 길이다. 명활산성 앞을 차로 달리면 보문호 물 건너편으로 관광단지가 펼쳐진다. 관광단지 쪽에서 보는 보문호는 자못 번잡스럽지만 건너편에서 보는 호수 풍경은 평화롭고 고즈넉하다. 보문호를 지나면 이내 덕동호다.

덕동호 수면 아래에 오래된 절집 고선사가 있었다. 원효가 머물고 있던 절이었다. 여기에 위세 당당한 삼층석탑이 서 있었다. 그게 감은사터의 두 기의 삼층석탑과 꼭 닮았다. 석재의 높이가 10.1m로 같은데다 도합 82장의 돌로 이뤄졌다는 것도 같다.

훗날 문무왕의 수중왕릉을 참배하려는 이들이 고선사에 들러 문무왕에 대한 경배와 함께 참배길의 무사를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고선사는 덕동댐의 건설로 물 아래로 사라지고 말았지만, 거기 서 있던 탑과 석조 유적들은 국립경주박물관 뒤뜰로 옮겨졌다. 이 또한 앞서 문무왕 비석과 함께 마지막 여정으로 미뤄두자.

내친 김에 샛길로 들어 무장산을 다녀와도 좋겠다. 투구 무(?Y)자에 감출 장(藏)자를 쓰는 산이다. 오랜 전쟁으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문무왕은 전쟁 없는 세상을 기원하며 여기에다 투구와 무기를 모아 묻었다. 거기에 훗날 무장사란 절집이 들어섰다. 등산로 초입에서 ‘암곡(暗谷)’이란 이름의 계곡을 따라 2.2㎞ 남짓 걸으면 무장사 절집터를 만난다. 거기에는 삼층석탑과 용 모양의 비석 받침이 남아 있다. 왕위에 오른 이후 줄곧 전쟁을 벌여야 했던 왕의 평화에 대한 기원이 이 깊고 어두운 계곡에 남아 있다.

# 용 한 마리 폭포를 타고 오르다

문무왕 장례길의 백미는 추령고개 쪽에서 시작된다. 토함산과 함월산의 관통하는 추령터널이 뚫리면서 차들은 터널을 넘어 단숨에 동해 쪽으로 달려가지만, 옛 사람들은 함월산 자락의 모차골에서 수렛재를 넘어서 기림사에 이르는 길을 택했다.

도보로 넘어가는 이 길이야말로 문무왕 장례길의 하이라이트다. 경주시가 근래에 여기에다 도보코스를 내고 ‘신문왕 호국행차길’이라 이름 붙였는데, 어찌된 게 이정표가 변변치 않아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경주시내 쪽에서 가자면 추령터널 못미처 ‘백년찻집’ 간판을 보고 오른편 샛길로 빠진 뒤 ‘자연향기펜션’의 이정표를 따라 왼쪽 길로 접어들어 줄곧 달리면 도보길의 초입에 닿는다.

모차골이란 이름은 ‘마차골’에서 나왔다. 수렛재란 고개 이름도 수레가 넘어다녔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경주와 감포를 잇는 이 길을 따라 문무왕 장례행렬의 마차가 지났을 것이다. 도보코스는 얼음이 풀리기 시작한 작은 계곡을 따라 걷는 조용한 숲길이다. 수렛재를 넘어 기림사 계곡으로 들면 수레를 끌던 말이 굴렀다는 ‘말구부리’가 있고, 장례행렬이 잠시 쉬어가며 손을 씻었다는 ‘세수방’이 있다.

거기서 좀 더 가면 용연폭포다. 용연폭포는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비바람을 잠재우고 적을 제압하는 피리 ‘만파식적’과 옥으로 된 허리띠를 동해의 용으로부터 얻어 경주로 되돌아가던 길에 쉬어갔던 곳이다. 신문왕이 여기서 용에게 받은 허리띠 한 조각을 개울에 넣으니 용이 돼서 승천하고 그 자리에 깊은 소와 폭포가 생겼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폭포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풍광은 제법 비범하다. 양옆에 마치 돌로 된 문의 형상을 한 바위 안쪽에서 폭포가 쏟아진다. 계곡의 얼음은 다 녹았지만, 폭포의 물줄기 한쪽은 아직 고드름을 달고 있다. 쏟아지는 폭포 아래 초록색 물빛이 어찌나 맑은지 물 아래 바닥의 돌들이 환하다.

길은 기림사로 이어지지만 ‘신문왕 행차길’은 딱 용연폭포까지다. 절집의 입장에서는 입장료도 내지 않고 산을 넘어온 탐방객들이 경내에 몰려들어 소란을 피우는 게 마뜩잖았을 것이고, 그 마찰 때문에 기림사로 들기 전에 지도와 이정표의 길은 끝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지도와 이정표를 지운다 해도 길까지 지워지지는 않는 법. 되도록 발소리를 죽여 기림사로 들자. 한때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렸다는 기림사는 지워진 단청의 묵은 맛이 감돌아 산문에 드는 순간 저절로 마음이 평안해진다.



# 문무왕의 수중왕릉을 보는 법

기림사를 지난 문무왕의 장례행렬은 대종천의 물길을 따라서 감포 쪽으로 향했다. 기림사에서 감포까지 가는 길에서 두 기의 우람한 석탑으로 남아 있는 감은사지를 지난다. 감은사는 문무왕이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세우기 시작한 절. 문무왕이 죽고 한 해 뒤 아들 신문왕 때에 완성됐다.

감은사는 절집의 중심 건물의 바닥에 공간을 두고 동해 쪽으로 문을 두어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감은사지는 거대한 크기에 균형미 넘치는 두 기의 석탑의 조형미가 압권이다.

이에 못지않은 것이 감은사지 석탑을 해체·보수 과정 발견된 금동사리함이다. 사리함은 1300여 년 전의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기막힌 솜씨로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사천왕상은 악귀를 막아내고 불법을 수호하는 신. 사리함에 사천왕상을 새긴 뜻은 곧 신라수호의 의지였으리라. 이 역시 국립경주박물관에 있으니 따로 시간을 내서 찾아가보자.

감은사지를 지나면 신문왕이 문무왕의 수중릉을 참배하러 와서 올랐다는 이견대가 있다. 여기서 신문왕은 동해의 용으로부터 만파식적을 만든 대나무와 옥 허리띠를 받았다.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정의 끝은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변이다.

여기서 200m쯤 떨어진 바다에 문무왕 수중릉이 있다. 쉼 없이 부딪치는 파도가 포말로 부서지는 수중릉의 바위 주변에는 온통 갈매기떼다.

정월대보름을 앞둔 이즈음 봉길리 해안에는 무속인들의 징소리와 간절한 소망을 부적에 담아 태우는 이들로 북적이고 있다. 더러는 해안가의 횟집에서 살아 있는 물고기를 사다가 바다에 방생해주기도 한다. 전란의 피폐가 사라진 이즈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동해 용왕에게 자신의 소원을 의탁하고 있는 것이다.

문무왕 수중릉은 바위의 형상 자체로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기대를 품고 먼 길을 왔다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서는 이들도 드물지 않다.

하지만 경주시내의 능지탑에서 시작한 문무왕의 장례길 행로를 다 밟아서 이곳까지 왔다면 수중왕릉의 정신과 위엄, 그리고 역사의 수레를 끌고 갔던 위대한 왕의 꿈을 느낄 수 있으리라. 그 앞에서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을 수도 있겠다.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정의 끝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마무리하는 게 제격이겠다. 먼저 박물관 뜰에서 문무왕이 화장됐던 능지탑 주변에 서 있었다는 늘씬한 약사여래불 입상, 문무왕릉을 참배하러 가던 이들이 그 앞에서 두손을 모았다는 고선사지의 탑과 석물을 둘러보는 게 순서다.

이어 박물관 내의 미술관에 들러 당나라군과 왜구를 몰아내기 위한 기원이 깃든 사천왕사지의 유물과 감은사지 석탑에서 나온 사리함 등을 둘러보면 신화 속의 인물인 문무왕이 손을 내밀면 잡힐 듯한 따뜻한 피를 가진 인물로 느껴진다.

역사는 곧 흔적. 경주의 허다한 폐사지와 능, 그리고 묘와 탑비도 모두 지나간 사람의 흔적이자 기록이다. 1000년 신라역사를 이어온 경주 땅에서 그 흔적을 따라가며 이렇듯 감동적으로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어디 문무왕뿐일까.




▲ 경주 가는 길 = 경주여행이라면 교통수단으로 일단 기차부터 고려하자. 경부선 KTX 열차편은 서울역에서 신경주역까지 2시간 20분 남짓. 손수 운전의 피로나 기름값 부담에 앞서 이동과정에서 절약되는 시간만으로도 기차를 이용하는 보람이 있다. 경주에서의 이동은 택시나 렌터카를 이용하면 된다. 신경주역에는 코레일관광개발이 운영하는 코레일 렌터카 대여소가 있어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역에서 차 열쇠를 받을 수 있다. 코레일 회원에게는 할인혜택이 제공된다. 코레일 렌터카는 특히 5만 원 정도의 추가 비용만 지불하면 신경주역에서 차량을 빌린 뒤 경주 일대를 돌아보고 동해안을 따라 울산까지 내려간 뒤 울산역에서 차량을 반납할 수도 있어 여행 범위를 한층 더 넓힐 수 있다. 반대로 울산역에서 빌려 신경주역에서 반납할 수도 있다. 보유 차량의 관리가 잘 돼 있어 여행자들로부터 인기가 높다. 다만 주말이나 휴일에는 차량예약이 일찍 마감되니 서둘러야 한다. 1666-7787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경주의 보문호수 인근에는 특급호텔부터 콘도미니엄까지 다양한 숙소가 있다. 현대호텔 경주(054-748-2233) 경주힐튼호텔(054-745-7788) 코모도호텔경주(054-745-7701) 등 특급호텔을 비롯해 대명리조트 등의 콘도미니엄이 추천할 만하다. 경주시청 부근에는 쌈밥집이, 황오동 팔우정로터리에는 팔우정해장국(054-742-6515) 등의 해장국집이 몰려 있다. 팥앙금을 넣어 만든 빵을 내는 황남빵(054-749-7000)은 경주를 찾는 여행자들이 필히 맛보는 별미 중 하나. 최근 황남빵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 새로 선보인 주령구빵(054-753-2000)이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14면체 주사위 모양을 본떠 만든 빵인데 사과와 블루베리맛 두 가지 소를 넣어 만들어 황남빵과는 맛이 전혀 다르다. 그다지 달지 않으면서도 폭신하게 씹히는 빵과 독특한 소의 맛이 인상적이어서 관광객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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