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순국시인과 용우물

醉月 2008. 9. 27. 08:04

역사란 되풀이 되는 것이고
선도는 되찾이 되는 것이다
    
   유고치로야! 이상 샘물론에 대한 너의 소감이 어떠하냐?
   사부님! 정말로 산고수려(山高秀麗)한 울나라의 자랑스러움이 담뿍 담긴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저는 샘물론 이야기에 넋을 잃었습니다. 샘물론은 정말 그속에서 솟아나는 시원한 샘물 그 자체입니다.

사부님! 그냥 끝내시지 마시고 딱 한편만 더해 주십시요. 고전 속의 샘물론 말고 이번에는 현대사 속에서 한편 들려 주십시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실제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샘물론으로요.
   유고치로야! 사부님에게 너무 무리한 요청을 하지 말아라.
   하하 신진사님! 괜찮습니다. 유고치로의 요청은 당연한 것입니다.

고전속의 샘물론을 이야기하니까 그게 피부에 생생하게 와 닿지 않는 면도 있을 것입니다.

허황되다거나 황당하게 생각되는 점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우리 한대국의 현대사에서 샘물이 한 순수한 시인의 영혼에 막대한 영향을 준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부님!
   유고치로야! 나는 이 이야기에  순국시인과 용우물 이란 제목을 붙이겠다.

우물이 감수성 강한 시인의 영혼에 영향을 주고 그리하여 그가 순국을 결심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니라. 잘 들어 보거라.
 
 
게다국 식민치하의 쌍삼년도인 계해년, 윤영석은 장남 해환이를 비롯한 7남매를 거느리고 북간도 명동촌에서 용정으로 이사하였다.
용두레 촌으로 더 유명한 용정은 앞에는 해란강이 휘돌아 흐르고 뒤에는 비암산이 우뚝 서 있었다.

그 가운데로 일송정이 푸른 솔을 안고 그림같이 서 있는데 옛날부터 절승의 길지로 알려져 북간도에서도 특히

조선인 이민들이 몰려 사는 곳이었다. 해환이는 거기서 은진중학에 입학하여 2년 후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할 때까지 살았다.
 
  평소 지극히 내성적이고 말이 없으며 사색과 명상에 잠기기를 좋아하였던 윤소년은 방과 후면 조용한 곳을 찾아 상념의 나래를 펼
쳤다. 자연히 사람이 적은 조용한 곳을 찾던 윤소년은 집에서 다소 떨어진 산을 찾게 되었다. 그 산의 이름은 비암산 맞은 편에 있는
흐리목산이었는데, 맑은 샘물이 흐르는 산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과 언제나 흰구름이 산정으로 흘러간다는 연유에서 그러하
다는 설이 팽팽이 맞서 있었다.
 
  이 흐리목산에 정준이라는 사람이 파 놓았다는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윤소년은 매일 이 우물가에 있는 방우에 와 걸터앉아서 책도 읽고 멀리 풍경도 바라보고 하늘도 쳐다보고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용주사의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날 때면 비로소 천천히 일어나 우물 속을 한참씩 들여다보곤 하는데 물 길러 사람들이 올 때까지 넋을 놓고 그러는 것이었다.
  차츰 이 우물터에 놀러오는 사람이나 물길러 오는 아낙네들에게 이 소년이 화제에 오르게 되었다. 창백한 얼굴 그러나 이목이 몹시
도 수려하고 지성미가 넘쳐 보이는 말없는 이 소년의 정체가 궁금해진 것이다. 이 소년은 곁에 누가 있던지 옆으로 누가 지나가던지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의 사색만 계속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소녀가 지나가도 산짐승이 근처에 얼씬하여도 전혀 요동치 않는 것이었다.

한번은 누군가가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을 보았더니 그것은 불나써국에서 피부가 제일 곱다는 보들레르의  악의꽃 ,

또 잼을 항상 많이 퍼 먹는다는 프란시스.잼의  생의 승리 ,  사행시집 ,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형상시집 ,  두이노의 비가  등
의 시집이었더란다.
 
  그날도 학교를 마치고 나오다 문이환은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윤해환을 보았다. 이환은 얼른 해환을 따라갔다.
   선배님! 오늘도 산보가시는 겁니까?
   어 문군이군. 그래 이환이. 자네 요즘도 예배당에 열심히 나가고 있나?
   예 선배님! 저는 대학에 가서 앞으로 신학을 전공할 작정입니다.
   그래? 문군은 안경을 썼으니까 이미 목사인데 뭘. 내 당부하겠는데 문군은 절대로 받들리는 목사가 되지 말고 받드는 목사가 되
어주길 바래. 주의 종이 되는 것이지 주의 사자랍시고 헐벗은 민중 위에 군림하는 또 다른 신이 되지는 말아주게. 억눌린 민중을 위한
목회자가 되어 달라구. 
  보라구. 왜놈의 압제 밑에 있는 우리 조선 민중은 목자 잃은 양떼 가 아닌가? 길잃은 저 양떼를 인도할 목자는 과연 누구인가?

오늘은 이환이 자네가 그렇게 죽자 사자 믿는 신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구만. 나를 따라 같이 산보를 갈 텐가?
   선배님! 그래 주시겠습니까? 저는 선배님이 믿는다는 그 시의 신 뮤즈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플라톤은 시는 모방예술이며 모방예술에는 교육적 성능이 없으며 문학적 쾌락은 이성생활에 해롭기 때문에 시인이란 존재는 공화국(Politica)에서 추방하여야 된다는 소위 시인추방론(詩人追放論)을 주장했다는데

과연 문학이 구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산보는 어디로 가실 거지요?
   흐리목산 용정으로 가세나.
   하하 그곳은 선배님의 명상의 장소요 사색의 쉼터이면서 또한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샛별같은 시의 산실 아닙니까?

저번에 교지에 발표하신 <오줌싸개 지도>도 거기서 시상을 가다듬으신 것 아닌가요?
   하하... 동시라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작품인데, 기억하는구만.
  하여튼 문군의 기억력은 대단해.
 
    빨래줄에 걸어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 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 땅 지돈가?
 
   선배님! 이 시에는 어린이의 눈을 통해 불쌍한 역사 속에 상처 입은 한 가정을 잘 보여줍니다.

이 시 속에 어린이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죽어 별나라로 갔고 아버지는 돈을 벌겠다고 만주로 갔습니다.

이 사정만으로도 참혹한 역사의 그늘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문군! 비분강개만으로 역사는 움직여지는 것이 아닐세. 끊임없이 사색하며 역사의 신 앞에 바로설 수 있는 자세를 가다듬을 때
역사는 그에게 주역의 사명을 맡길걸세.
  이환이! 자네는 용우물이 생기게 된 내력을 아는가?
   예. 듣기로는 북간도 개척 초기였던 병술년 봄, 정준(鄭俊)이라는 사람이 밭을 갈다 돌각담 밑에서 옛우물을 하나 발견하였는데
물 맛이 기가막히게 좋았다고 합니다. 그후 을축년에 우물틀을 짜 세우고 버드나무 두 그루를 심어서 지금의 우물처럼 꾸미게 된 거
라고 들었습니다.
 
   하하하. 자네도 아는구만. 하기사 용두레촌 사람치고 용우물의 전설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나. 모른다면 수파이겠지. 정준이가 무너
진 우물을 새롭게 판 그날 밤 우물 주위에 빛이 환하게 서리고, 우물로부터 붉고 푸른 빛이 비껴나와 밤하늘로 뻗쳤다네.

얼마 후 흰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삽시간에 우물 주위의 빈터는 온통 안개바다가 되더니 갑자기 땅이 흔들리며 큰 아름드리의

굵은 용이 푸른 빛을 내며 삽시간에 밤하늘로 날아 올랐다네. 전설에 의하면 그 용은 하늘나라에서 벌을 받아 오랜 세월 동안

우물에 갇혀 있던 용이었는데 정준에 의해 숨길이 트여지게 된 것이지. 그런데 자넨 용우물의 그 못된 흑룡 전설을 아는가?
 
   용우물의 흑룡 전설이요? 금시초문입니다.
   자네도 야소만 너무 찾지 말고 우리의 것도 좀 알게.
   하하 선배님! 민속의 탈을 쓰고 미신을 조장해서는 안되지요.
   문군! 그게 바로 왜놈들의 수작이라는 것을 자네는 왜 모르나?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그들은 우리의 민속이나 무속을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기 시작하였네.

그리고 그 빈 자리에 과학이니 문명이니 하는 것들로 대신 채워버린 거라네.

거기에 합세한 것이 자네가 믿는 야소교라는 점을 자네도 알고는 믿어야 하리...
   아이고 선배님! 자칫하면 종교논쟁으로 가겠습니다. 피차의 믿음을 존중하기로 하고 흑룡전설을 들려 주시죠.
   자알 듣게. 야소도 중요하지만 우리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네.
탐라대학 안창범 교수는  석가는 단군의 후예였다 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잖나.

그 논문에 의하면 옛날 단군시대에 울나라에 이미 고불교(古佛敎)가 있었고

석가가 수행기간 중에 인도에서 와서 이를 배워갔다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후 야소가 어린 시절 인도에 와서 불교 수행을 하고 초능력을 얻어 유태로 돌아갔다는 것은 이미 종교계와 학계에서는

다 알려진 사실이라네. 그렇다면 야소교의 근원도 결국은   
   선배님! 그건 전혀 믿을 수 없는 낭설인 듯 한데요.
   이환이 석가의 생애 중에 6년 고행기간이 있네. 그때 무얼했다고 생각하나?

불경에는 힌머리산에서 수행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걸 인도놈들은 히말라야라고 잘못 읽은 거야.

그것은 히말라야가 아니라 흰머리 즉 백두산이었다고 하면 믿겠는가?

석가는 백두산에 와서 단군에게 우리의 선도를 배운 것일쎄.
  또 야소는 30세까지의 행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잖은 건 자네가 더 잘 알걸쎄.

성경의 기록이란게 그의 나이 30세에서 33세까지의 이야기가 주류 아닌가?

그럼 야소는 30살이 되도록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성전에 올라갔던 7살 이후의 기록이 사라진 걸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는 그 기간 동안 인도에 가서 우리의 선도를 원류로 해서 발전해 온 불교철학을 공부했다고 하면 아마 자네가 믿는 기독계에서는

야단법석이 나겠지? 그런데 야단법석(野壇法席)이란 말 자체가 불교용어 아닌가?
   윤선배님! 지금 말씀하신 것은 제가 더 깊이 조사해 보겠습니다.
   문군! 자네의 싹싹한 태도가 맘에 들어. 고루한 야소교인들을 보면 너무나 배타적인 것 같아.

국권상실의 시대에 그나마 민족혼을 지탱해 준다고 할 수 있는 신명들을 그처럼 박대해서는 안되지.

나의 예감으로는 우리 민속은 세번의 고난을 받은 후에라야 민족의 가슴에 다시 부활하리라고 생각되어.
   세번의 고난이라뇨?
   첫째 왜놈들에 의하여 둘째 야소교에 의하여 셋째 경제부흥에 의하여.
   선배님! 첫째와 둘째는 이해가 되는데 셋째번은 무슨 소리인지요?
   민속이 비경제적이다 경제부흥에 장애가 된다 경제만 부흥하면 민속은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나오게 될 것이야.

저 덕국의 사회학자 스팽글러의  서구의 몰락 을 읽어보면 확연히 알 수 있지.

결국 민속을 버린 결과 서구는 엄청난 인간성의 황폐화를 맛보아야 했던 거야.
   흐음! 저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로군요.
   아직은 이해가 안 되겠지. 이 세대가 지나야 알게 될거야. 자, 그럼 흑룡의 이야기를 시작할 테니 잘 듣게. 먼 옛날    
  
역사의 오묘함이여 천명을 밝히고
선도의 신묘함이여 천리를 밝히네
  
  옛날 아주 먼 옛날 백두산 일대에 자리잡은 오붓한 마을이 있었다. 밭에선 오곡이 무르익고 강에선 고기떼가 헤엄치고 산에선 새
와 짐승들이 득실거렸다. 그런데 세상 일은 다난하고 복잡하게 마련인지 평화롭고 행복하던 마을에 재난이 덮쳤으니, 그것은 하늘에
심술쟁이 흑룡이 나타난 것이다.
  검은 구름을 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불칼을 휘둘러 이골 저골의 물골을 지져놓았다. 대번에 세상은 왕가물이 들어 곡식들은
노랗게 말라죽었고 나뭇잎은 쪼글쪼글해졌다. 밭이란 밭은 갈라져서 거북등같이 되었다.
 
  이때 어디서 왔는지 백씨 성을 가진 장수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이 장수를 모시고 왕가물과 싸웠다. 샘물 줄기를 찾느라고 숱한 사
람들이 목이 늘어지고 눈깔이 빠질 지경이었다. 괭이소리 삽질소리 메질소리가 낮이나 밤이나 연이어 울려 퍼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마침내 샘물줄기를 찾아내었다.

콸콸 솟구쳐 오르는 샘물을 보고 사람들은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들이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고 난 뒤 청청하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덮쳤다.

번쩍번쩍 번개가 치고 우릉우릉 우레가 울고 쏴아쏴아 광풍이 휘몰아쳤다.

샘물 줄기를 찾아놓은 뒷산 벼랑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광풍은 집채같은 바윗돌들을 가랑잎 날리듯 하여 샘물 줄기를 덮어버린 것이다.
 
  다음날 몰려 온 사람들은 샘물터가 눈 깜짝할 사이에 돌산으로 변한 것을 보고 경악하였다.

여인들은 눈물을 머금었고 장년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나마나 흑룡의 심술이다. 놀부보다 나쁜 놈 같으니라구.
   멍게 해삼 말미잘 같은 자식.
   아이구 못살 때를 만났구료.
   흑룡의 조화를 무슨수로 막는단 말이오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화캔아이두 후캔헬프미.
 
  그때 바윗돌에 걸터앉은 한 사나이,

몸집이 떡구유처럼 우람하고 키가 구척이 되는 백장수는 울분을 토하며 제 앞의 바윗돌을 툭 찼다.

망짝같은 돌이 고무공처럼 채여나갔다. 아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자기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흑룡을 이길 재간이 없었다.

백성들은 고을을 포기하고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그들은 짐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보며 백장수는 무기력한 자신이 한스러웠다. 지도자의 한계를 절감하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흑룡의 횡포에 대하여 자신이 전혀 개혁의 손을 쓸 수 없음을 통감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백장수님! 저희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가겠습니다.
   좋을대로 하소이다. 이 백가가 이렇듯 맥을 못추니 더는 만류할 길이 없나이다.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하였다. 백장수는 바위에 털썩 주저앉아서 처량하게 타령을 읊조렸다.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두야 간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 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 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두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두야 간다
 
  그러다가 문득 신단수 아래에 가서 빌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 옛날 웅녀 할머니께서 인간이 되기 위하여 빌었다는 신단수.
  백장수가 신단수 아래에서 빈지 이레째 되던 날, 그의 앞에 아리따운 공주가 나타났다.

아아 그것은 마치 웅녀 앞에 나타난 늠름한 사내 환웅과도 같은 존재였다.
 
   공주님! 공주님은 누구시옵니까? 여기는 위험한 곳이옵니다. 어서 피하옵소서.
  백장수는 허리를 굽혀 절을 올렸다.
  공주는 봄바람처럼 따듯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대가 물을 찾고자 싸우는 일편단심에 감천하였나니, 적은 힘이라도 부라수(附螺數-수를 덧붙임)하려고 찾아 왔나이다.
 
  이렇게 허두를 뗀 공주는 지난 밤에 꾼 꿈 이야기를 하였다.
   소녀는 조도섬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 적녀국(積女國)의 주희공주이옵니다. 지난 밤에 금방 잠들었을 때였나이다.

하늘에서 칠색 무지개를 정원에 드리우는 것이었습니다.
  무지개에 취하여 멍하니 서 있는데 하얀 옷에 하얀 수염 하얀 머리 올 하이트 칼라의 늙은이가 금막대기를 짚으며 무지개에서 내려
와 소녀에게 오셨습니다.
  소녀는 얼른  노야여! 만수무강하옵소서.  하고 공손히 문안을 드렸지요.

그 분은  나는 상계의 명광대선(明光大仙)으로서 그대에게 전할 일이 있어서 왔노라.

지금 흑룡이 백두산 일대의 물줄기를 지져놓아서 왕가물이 들었노라.

백장수가 백성들을 거느리고 우물을 파며 물줄기를 찾고 있노라. 그런데 그의 힘이 아직은 흑룡을 당할 수가 없노라.

그가 흑룡을 이기려면 백두산에 있는 옥장천(玉藏川)의 샘물을 석달 열흘 마셔야 하느니라.

이건 너의 연분과 상관되는 일이므로 네가 가서 알려야 하리로다.  하시는 것이옵니다.
  소녀가 무슨 연분이냐고 묻기도 전에 신선은 금막대기를 휙 젓더니 사라졌나이다.

깨어보니 꿈이었지만 너무나도 또렷하여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장군을 찾아왔나이다.

장군님과 소녀는 전생지연이 있는 듯 하옵니다.
 
   주희공주! 먼 길을 마다않고 이렇게 와 주시니 진정 고맙소이다.
소인에게 옥장천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길 바랍니다.
   우리 함께 가사이다.
 
  그리하여 주희공주는 백장수를 데리고 옥장천을 향하여 떠났다.
공주는 여느 평범한 규수와는 달랐다. 길을 가다가 계곡을 만나면 훌훌 날아 넘었다.

백장수는 공주의 재간에 탄복하면서 그를 따라 사흘동안 걷고 걸었다. 얼마나 많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왔는지 몰랐다.

깍아지른 벼랑이 앞길을 막아서서 백장수네는 걸음을 멈췄다.
벼랑 밑에서는 옥같은 샘물이 볼롱볼롱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 샘물이 옥장천이옵니다. 
  샘물을 다 말리기라도 할 듯이 단숨에 꿀꺽꿀꺽 들이켰다. 물을 마시고 일어서는 백장수를 보고 주희공주는,
   석 달 열흘이 차는 날 다시 오겠나이다. 하고 표연히 사라졌다.
  공주가 떠나가자 백장수는 벼랑가에다 작은 막을 치고 쉴새없이 샘물을 마셨다.

과연 석달 아흐레를 마시고 나니 힘이 마구 솟구쳤다.

집채같은 바윗돌도 공깃돌처럼 다룰 수 있었고 하늘을 찌르는 노송도 밭고랑 넘듯하였다.
  그날 저녁에 말과 같이 공주가 왔다. 둘은 너무 반가워서 격렬하게 포옹하였다.

그 포옹이 얼마나 힘찼더니 공주는 간신히 말을 하였다.
 
   백장수님! 터지겠어요.
   무엇이 터진단 말입니까?
   아기 도시락이옵니다.
   아기 도시락이라뇨???
   .........
   앗, 공주님! 소인이 너무 경솔하였습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백장수는 무릎을 꿇고 공주에게 사과를 하였다.  아이, 대장부가 무릎은 왜 꿇으십니까?

사내 대장부가 무릎을 꿇는 것은 두 가지 경우밖에는 없다 하더이다. 하나는 요강에 소변 볼 때 하고 또 하나는 여자와...   

냉큼 일어나셔요.
 
  백장수는 주희공주의 보드라운 손을 붙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이튿날까지 석달 열흘 동안 옥장천의 샘물을 마신 그는 백두산 마루에 올라가서 삽으로 땅을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그 삽이 얼마나 컸던지 08포구래인(包拘來引-싸안아 당긴다는 뜻)보다 작업량이 엄청 뛰어났다.

한삽을 퍼서 던질 때마다 산봉우리가 하나씩 생겨났다.

그가 열여섯 삽을 서 동서남북으로 버렸더니 16기봉이 생겨났고 움푹하게 패인 밑바닥에서는 드디어 지하수가 강물처럼 솟구쳐
올라왔다.
  백장수와 주희공주는 너무도 기뻐서 부둥켜안고 뜨거운 입맞춤을 하였다. 그때였다.

무두(舞兜)가 가새기도 전에 졸지에 광풍이 일며 먹장구름이 삽시에 하늘을 덮었다.

흑룡강에 가서 용왕의 딸을 성희롱하던 흑룡은 백두산에 큰물이 났다는 급보를 듣고 부랴부랴 날아왔던 것이다.
 
   어떤 우라질놈의 시키가 물줄기를 허락도 없이 터뜨렸느냐?

당장에 이리와서 내 칼을 받아라.
  흑룡은 불칼을 휘두르며 땅이 들썩하게 울부짖었다.

백장수는 추호도 겁내는 빛이 없이 흰구름을 잡아타고 만근도를 휘두르며 응전하였다.
  흰구름과 검은구름이 마주치자 뇌성이 울고 하늘이 진동하였다.
불칼을 휘두르는 흑룡은 불덩어리 같았고 만근도를 휘두르는 백장수는 은덩어리 같았다.

백장수와 흑룡의 싸움은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들이 싸움에 여념이 없을 때 공주는 만약의 사태에 쓰라고 조도섬의 대왕인 아버지가 주신 전가의 보도 내미조도(耐尾弔刀)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잽싸게 흑룡의 꼬리가 보일 때 내미조도를 힘차게 휘둘렀다. 순간 흑룡의 꼬리가 뭉청 끊어져 땅에 떨어졌다.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흑룡은 꼬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버렸다.
 
  흑룡을 물리치고 백장수와 주희공주가 백두산에 다시 올라보니 흙구덩이에 맑은 물이 꽉 차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오날날의 천지가 된 것이다.

백장수와 주희공주는 흑룡이 다시는 백두산에 와서 물줄기를 지져 놓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천지 속에다 수정궁을 지어놓고 결혼을 하여

아들 딸 놓고 지금까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
 
  흑룡은 하늘의 천궁으로 도망가서 사방팔방 쏘다니며 사고를 쳤다.

천도원에 들어가 주렁진 천도복숭아를 마음대로 따먹고 복숭아 나뭇가지에 앉아서 널뛰듯하다가 부러지게도 하고 명화원 꽃밭에
들어가서 데굴데굴 구르며 꽃을 여지없이 짓밟기도 하였다.

배짱이 조금만 맞지 않으면 진귀한 기물도 둘러메치고 박살내고 여간 천궁을 소란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옥황상제는 대노하여 흑룡을 붙잡아 들이라고 분부하였다.
   네 이놈! 네가 아무리 못배워 쳐먹은 신세대라곤 하지만 이리도 불법무도할 수가 있느냐?

천계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네 놈에게 오늘 엄벌을 내리리라. 여봐라! 저놈에게 곤장 백대를 안겨라.
 
  곤장수들이 달려들어 흑룡을 북치듯 장구치듯 곤장을 안기었다.
곤장을 다 맞고나니 흑룡은 전에보다 길이가 곱절은 늘어난 듯 하였다.
   저 고이얀 놈을 북간도 흐리목산으로 보내어 죄를 씻게 하여라.
 
  흑룡은 눈물을 흘리며 천궁에서 쫓겨나 흐리목산으로 오게 되었다.

흐리목산으로 와 보니 천궁에서 생각하던 것처럼 그렇게 못살 곳은 아니었다.

산에는 피둥피둥 살찐 짐승들도 있었고 해란강에는 물고기들도 많이 노닐고 마을에선 꽃다운 여인들과 끌끌한 장정들과

늙은이들이 아이들을 돌보며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흐음, 도처에 유청산이라고 여기도 살아볼만한 낙원이렷다?
  제 버릇 개주랴. 곰상곰상해진 흑룡의 성격은 며칠가지 못하였다.
조포하고 우악스럽고 무지막지하게 행동하던 그의 성질은 날이 갈수록 머리를 쳐들었다.

흑룡은 해란강을 마음대로 쏘다니며 맛나는 물고기를 하루에도 몇 백 마리씩 넙적넙적 삼켜버렸다.

배가 불러지면 둔갑법을 써서 사람으로 변장하고 이 골목 저 골목을 지키다가 여자만 나타나면 처녀고 유부녀고 가리지 않고

으슥한 곳으로 끌고가서 내키는 대로 희롱하였다.
  총각이나 장정들을 만나면 눅신눅신하게 패주거나 등골을 뽑아버린 뒤에 아무데나 던져 놓았다.

수림 속에 들어가서는 짐승들을 닥치는대로 붙잡아서 먹고 싶으면 먹고 그렇지 않으면 나무중둥을 분질러놓고 거기에다

배를 쭉쭉 꿰어서 걸어놓았다.
 
  아늑하고 화기애애하던 흐리목산은 발칵 뒤집히고 세상 만물이 공포 속에서 떨었고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그칠 사이가 없었다.
날이 흐리면 산짐승들이 천궁에다 흑룡을 공소하였고 비가 오면 물고기들이 빗줄기를 타고 천궁에 올라가 흑룡의 죄악을 밝히었고

날이 개이면 사람들이 무지개에다 흑룡의 죄악을 알리는 서찰을 띄웠다.

역사를 통하여 치화에 이르고
선도를 통하여 교화에 이른다
  
  옥황상제는 천궁으로 흑룡을 소환하였다. 소환령을 받고 천궁으로 올라간 흑룡은 낯빛은 잿빛이 되고 가슴은 두근닥근 뛰었다.

이번에 죄를 인정하게 되는 날이면 전과가 있기 때문에 무간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일.

고심하던 흑룡은 오리발 작전을 쓰기로 하였다.
  오리발(誤理魃) 작전이란 흑백을 전도하고 시비를 왜곡하는 방법이다. 때리고서 맞았다고 울고 빼앗고서 빼앗겼다고

소리지르는 수법인 것으로 후세에 일해가 쓰는 주특기가 되었다.
 
  들어오는 흑룡을 쏘아보며 옥황상제는 엄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상에서 너를 고발한 사건들이 연해연속 날아드니 어이된 연유인지 이실직고 하렷다.
  옥황상제의 노성을 듣는 순간 제아무리 악랄한 흑룡이었지만 아찔하였다.

눈탱이에서는 현깃증이 일었고 등때기에는 식은땀이 흘렀고 달구락지는 힘이 좌악 빠져 후둘거렸고 배때기는 덜덜 떨렸다.

그는 몸서리치는 위구심을 가까스로 눅잦히고 눈물을 찔끔거리며 가련하고 구슬픈 목소리를 쥐어짜며 너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사뢰었다.
 
   오오... 개명하신 상제님이시여! 억울하고 다시 억울하옵니다.

흐리목산과 해란강의 나쁜 놈들이 갖가지 요언과 망언을 날조하여 소인을 모함하고 있나이다.

소인이 흐리목산에 이르러 보니 힘센 맹수놈들이 힘없는 짐승들을 체력을 남용하여 함부로 마구잡이로 아무러케나 제멋대로

닥치는대로 꼴리는대로 잡아먹는 것이었습니다.
  소인은 몇번의 주의를 주었지만 그들은 듣지를 아니하였습니다.
소인은 하는 수 없이 그놈들이 횡포를 부리는 순간 긴급출동하여 놈들을 붙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정말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이 흐리목산의 맹수 살해사건입니다.

이것은 정당한 수사과정을 집행하기 위하여 취하다 벌어진 정말 우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일을 왜 사전에 내게 주청하여 재가를 받지 않았는가?
   그것은 긴급한 사항이고 기밀을 요하는 사항이라 사후재가를 받으려 하였던 것이옵니다.
   네 이놈! 그걸 말이라 하느냐? 네놈은 네놈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백룡 청룡 황룡 적룡 등을 데리고 천궁으로 와서 시위를
하며 내게 사후재가를 요청하려 했던게 아니냐? 고얀놈 같으니라고. 그건 그렇다치고 해란강에서 올라온 공소는 또 어찌된 것이냐?
   그것도 흐리목산의 경우와 대동소이하옵니다. 오래된 어룡이니 거북들이 둔갑을 하여 어부를 골탕먹이고 부녀자들을 희롱하기에
몇몇을 본보기로 처단하였더니 그 일당들이 천궁에 공소를 하여 분란을 일으킨 것이오니 현명하신 옥황상제께서 무혐의 처분을 하여
주신다면 성은이 망극하겠나이다.
 
   네 이놈! 말은 문지방에 기름칠한 듯 접시에 빠다칠한 듯 매끄럽게 잘 한다마는 속아넘어갈 내 아니로다.

일후에 지상총감을 파견하여 사실의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힐 것인즉 그때 만약 거짓말이 드러나면 능지처참을 면치 못하리라.

명확한 죄상에 대하여 기소유예 처분을 내려줄 것으로 어설프게 기대했다가는 큰 코 다칠 줄 알아라.
   예으이! 소인의 말에 거짓이 섞였다면 능지처참이 아니라 그보다 더 한 벌을 주신다 해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소인도 기소유예는 싫사옵니다. 정식심판을 하여 소인의 청백을 만천하에 알려 주옵소서.
 
   듣거라. 도저히 그냥 묵과할 수가 없다. 만약 그냥 둔다면 백두산에선 국거리도 없을 거고 해란강에선 회거리도 없을 터이니,

그러면 국 과 회... 국회가 공전할 것이기 때문이로다.
  여봐라! 태현선(泰賢仙)을 지상총감으로 임명하노니 태현선은 천궁에 올라온 공소장들을 검토하고 흐리목산으로 하강하여 흑룡의
행위에 대하여 전면적인 수사를 하도록 하여라.
  흑룡의 행태에 대한 조사와 그 처벌에 대한 권한을 지상총감에게 일임하노니 엄정하게 처리할 것이요,

한대국의 의금부처럼 미리 알아서 삼십리 밖에서 설설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결코 정치적 편의 때문에 사법적 기능을 조즐 만들지 않도록 하여라.
 
   예잇! 존명(尊命). 분부 봉행하겠나이다.
  지상총감은 지상으로부터 천궁에 공소가 들어올 경우 그 수사와 처벌을 위하여 옥황상제의 특명으로 임명되는

특별검사와 같은 제도이다. 그래서 지상총감이 임명되면 공소를 당한 자는 벌벌 떨고 긴장하게 되어 있다.

지상총감은 사리에 밝고 침착하고 무예가 뛰어난 신선들 중에서 임명된다. 고로 흑룡같은 것은 강아지 다루듯 하였다.

흑룡은 천궁에서 지체하다가는 일을 그르칠 것 같아서 허겁지겁 하강하여 흐리목산으로 갔다.
  우선 자기를 공소한 당사자들을 경록이처럼 모조리 보복살해하기로 작정하였다.

지상총감이 내려오기 전 이틀 동안 흑룡은 흐리목산과 해란강을 쏘다니면서 닥치는대로 해치웠다.

흐리목산에서는 만나는 짐승마다 불을 토하여 통닭구이를 해서 죽였으며 해란강에서는 강물을 뒤집어 엎어서 물고기떼들을 몰살하였다.
 
  대도살을 당한 흐리목산에는 곡성소리가 낭자하였고 해란강에는 고기들이 흘린 피로 뻘겋게 물들었다.

흑룡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마을로 내려가서 인명을 살상하기 시작하였다.

흑룡은 마구 날치며 시뻘건 불을 토하여 가옥을 불태우고 전답을 뒤엎었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마을에서는 아우성 소리 비명 소리가 진동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흑룡은 제일 예쁜 처녀 셋을 골라서 사자봉 18층 동굴에다 가둬놓았다.
 
  불질 물질 바람질을 할 줄 아는 흑룡은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불로 태우고 물로 씻어버리고 바람으로 날려 보내어서 증거를 몽조리
인멸하였다. 흑룡은 단 이틀 동안에 이리 해놓고 통쾌한 듯이 하늘이 떠나갈 듯이 호쾌하게 하 하 하 하고 너털웃음을 쳤다.
 
  사흘째 되던 날 지상총감이 내려왔다. 흑룡은 얼굴에 웃음을 게바르고 지상총감을 치살리며 산해진미로 진수성찬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천궁에 있을 때에 꼬비쳐 논 불로주에다 비상을 풀어 넣어서 따라주었다. 그러나 지상총감은 엄정하였다.

수사중인 피의자의 대접은 냉수 한그릇도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인간세상의 형조나 금부의 관원들이 피의자와 형님 아우하면서술자리야 기생집이야 함께 어울리는 것하고는 생판 달랐다.

당장 어족 짐승 인간의 각 대표들을 불러오라고 호통이었다. 고소 고발인 진술을 들어야겠다는 것이었다.

흑룡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썰레발을 쳤다.
 
   그 못된 놈들이 소인이 천궁에 올라간 것을 알고 겁을 먹고서 몽조리 도망을 갔나이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예비군 전경 민방위 대원들을 동원하여 수색작업 검문검색 탐문수사 등을 하여 곧 잡아 대령하겠습니다.

속히 안 잡히면 현상금이라도 걸겠습니다. 그러하오니 잠시 한유(閑遊)하시며 기다리옵소서. 세월이 좀먹습니까.
괜찮은 계집을 몇 준비하여 놓았습니다. 맛이 괜찮을 겁니다. 히히히.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그대는 피해자를 가해자로 가해자를 피해자로 조작하려고 하는가?

나를 어수룩한 짱구로 아는가?
이 상을 즉시 물리게. 내가 못 먹어서 걸신이 들린 자로 착각하지 말게.
 
  지상총감은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그는 흑룡을 내버려두고 현장검증을 하기 위하여 흐리목산으로 떠났다.

해란강으로 내려가면서 곳곳에 널부러져 있는 시신과 부상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허리가 부러진 미꾸라지 눈탱이가 찌그러진 가자미 등판이 밟힌 새우 수염이 뽑힌 가재 앞발이 부러진 농게 갈빗대가 부러진 멸치
눈알이 빠진 붕어  이들은 지상총감을 보자 대번에 대성통곡을 하였다.
 
   말도 마시우. 그놈의 피비린내 나는 살생으로 우리 족속들은 무참히도 끝장났수다.

우리들만이 겨우 목숨을 건져냈수다. 옥황상제도 무심하시지. 흑흑흑.
   이제 걱정하지 마라. 내가 흑룡을 치죄할 터이니 시름놓고 살아가라. 나는 정치권의 눈치나 여우새끼처럼 살살 살피면서 기소유예
처분 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범죄는 법정최고형으로 그냥 조지삐린다.
 
  지상총감은 흑룡을 불러가지고 한 작은 우물속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호통을 쳤다.
   네가 지은 죄를 이실직고하여라.
  흑룡은 꼼짝 못하고 작은 우물 속에 들어가 납작 엎드려 가지고는 아무일도 없었다고 변명하였다.
   네 이놈! 나를 핫바지저고리로 아느냐?
  지상총감은 추상같이 호령하며 발로 땅을 한번 힘차게 굴렀다.
그러자 그 서슬에 사자봉 18층 동굴문 어구에 쌓였던 집채같은 바위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서 우물을 덮쳤다.

이때부터 세상을 무너뜨릴듯 우렁찬 소리를 사자후라 부르게 되었단다. 순식간에 흑룡은 바위감옥에 갇힌 꼴이 되었다.

그리고 18층 동굴에 갇혔던 세 명의 처녀가 화들화들 떨면서 나왔다. 그녀들은 흑룡의 만행을 증언했다.
 
   개같은 자식.
   불알을 까놀 시끼.
   씨벌놈.
 
  바위감옥 속에서 흑룡의 가냘픈 애원성이 들려왔다.
   지상총감님! 죽을 죄를 지었으니 목숨만 살려주옵소서! 소인을 구해 주신다면 제가 그동안 모아 논 비자금을 몽땅 드리겠습니다.
   네 이놈! 중광이처럼 허튼소리나 하면서 세상을 훔치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면 큰 오산이다.

이제부터 네 놈은 이 돌우물 바위감옥 속에서 9만4천년을 살아야 네 죄가 탕감되리라.
 
  지상총감은 우물의 제일 꼭대기 돌에다 옥황상제의 어인이 찍힌 봉인장을 붙였다.
   흑룡은 듣거라. 누구든지 이 봉인장을 뜯어주기 전에는 너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이후로 9만4천년이 지나야 누군가가 이 봉인을 뜯고 너를 구해 줄지니

그동안 너는 그속에서 네가 지은 죄를 회개하여 개과천선 하도록 하여라.
 
  지상총감은 그렇게 말하고 흑룡의 울음소리를 뒤로 들으며 다시 천궁으로 올라가 버렸다.

이 우물이 바로 용우물이며 병술년 봄 정준이란 사람이 밭을 갈다 돌각담 밑에서 이상하게 생긴 부적같은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줏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흐너진 우물 하나를 발견하여 팠는데 물맛이 기똥차게 좋았다.

그때서야 흑룡은 우물에서 나와 하늘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승천하였다. 그후로 이 동네를 용두레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역사는 마음의 근본이요
선도는 마음의 광명이다
  
   아하! 선배님! 정말 재미있는 전설이로군요.
   문군 내가 거기를 오고가면서 지은 시인데 한번 들어볼라나?
   아, 예 들려 주십시요.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이렇게 지었는데 아직 제목을 정하지 못했어.  문군 자네가 제목을 하나 붙여주겠나?
   하이고 선배님도 제가 어떻게 제목을 붙입니까?
   아따 이 사람 겸손은    앞으로 이 민족을 위해 많은 일을 해야할 사람이 숫기도 없이 빼기는. 그러지 말고 제목을 붙여 보게.
   흐음, 그러면 시를 다시 잘 살펴보고요. 선배님의 시는 항상 친근하고 쉬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군요.

또 단순하면서도 어딘가 긴 여운 말할 수 없이 절절한 여운을 남겨 주고요.
 
  1연은 길이 가고 있는 방향을 노래했고,
  2연은 길의 시간적 배경,
  3연은 길에서 만나게 되는 것들,
  4연은 2연의 변조로 길에 대한 신념과 의지를 노래했고
  5연은 1연의 반복으로 수미쌍관법을 사용하였군요.
  자신의 길에 대한 신념을 노래한 시라고 보여집니다. 윤선배님!
 새로운 길 이란 제목을 붙이면 어떻겠습니까?
 
   역시 문군의 안목은 대단해. 이환이는 나의 맘을 너무나도 잘 읽고 있어. 신과 통하는 사람을 신통하다고 한다며?
   윤선배님! 새로운 길을 가자면 어려움이 따르겠지요. 그것이 내일 수도 고개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야 할 포기할 수 없는 그런 길이겠지요.
   문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가야만 하네. 우리 민족을 위해 분명히 가야하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네.

그것은 저 친일 앞잡이 이모 윤모가 부르짖는 내선일체도 황국신민도 결코 아니라고 생각하네.
   선배님! 맞습니다. 나의 조상은 단군이지 천조대신이 아닙니다.
배달은 배달이고 쪽바리는 쪽바리입니다. 무슨 얼어죽을 대동아공영권이란 말입니까?

착취를 해먹고서 나중에 은혜를 베풀었다고 눙을 칠 놈들이 아니겠습니까?
   쉬잇! 목소리가 너무 크네. 감정을 가라앉히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들은 흐리목산의 용정 우물가에 다다랐다.
   그래도 선배님은 선배님이 가실 길을 새롭게 찾으신 것 아닙니까? 그 길이 무엇입니까? 문학을 통한 민족의식의 계도입니까.

아니면 새로운 문화의 창조입니까? 저는 어찌해야 하는 건지 당최 모르겠습니다. 오늘 선배님이 지도 좀 해 주십시요.
   자네는 자네가 믿는 하나님이 있잖은가? 자신의 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곧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삶이 아닐까?
   선배님! 인간이 과연 신 앞에서 부끄럽지 않고 떳떳하게 설 수가 있을까요?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문군! 그야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겠지. 그러나 부끄러움을 안다면 언젠가는 가능해지겠지.

저 샘물을 보게 티 하나 없이 맑으므로 하늘을 담을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지금 울나라에는 자기가 하는 짓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 투성이라네.
   선배님!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살지를 않고 사람이 너무 맑으면  친구가 모이지 않는다 합니다.

또 사람이 너무 곧으면 부러져서 요절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전 선배님이 너무 맑고 곧으신 게 걱정이 됩니다.

여학생들도 사귀시고, 목거지에도 자주 나오십시요. 친구들이 걱정합니다.

선배님이 하도 그러시니까 혹시 호모가 아니냐 혹은 나르시서스처럼 자기익애에 빠진 건 아닌가 하고요.
   내가 호모가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자랑스럽겠는가?

그처럼 민족적인 대서사시 일리아드라든가 오딧세이를 써서 민족적 자긍심을 높여 보겠네.
   아이구 참! 선배님도 그런 호모가 아니라 레즈비언의 라이발 호모를 말하는 겁니다.
   문군! 나를 염려해 주는 것은 고맙네. 나도 어릴 땐 이국소녀들을 무척이나 연모했다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가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그러나 문군! 겨레가 신음하고 있는 이 때에 나의 육신은 너무 안일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는 부끄럽기 한량없네.

나는 요즈음 이렇게 힘없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 부끄럽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내가 아무리 피를 찍어 시를 쓴다한들 시대의 어두움을 조금도 밝히지 못하고 있는데,

도대체 시를 써서 무엇을 어찌 하겠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네.
   선배님!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요. 그러한 선배님의 갈등이 결코 헛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의 시를 쓴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시 정신이 망국의 절망 가운데 자포자기하는 우리에게 작은 위안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과연 위안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부끄러움에 사로잡힌다네. 이러한 내심정을 읊은 시를 들어 보겠나?
   예. 선배님의 시란 가을이 지나가는 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도 같습니다.

그것을 듣노라면 가슴 속의 티끌이 다 씻어지는 듯한 기분입니다.
 
    들어보게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흐음 선배님이 가야할 길이란 식민지하에서 일제의 질곡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의지와 신념으로 민족에 광명을 선사하는 일이며,
고결한 지성으로 불굴의 절조를 노래하는 것이로군요.
  그 길을 가기 위하여 종교적인 자세로 하늘에 대고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군요.

선배님! 그렇다면 과연 선배님은 무기력한 창백한 나약한 어찌할 수 없는 행동이 결핍된 인테리겐차로서의 부끄러움을 극복하셨습니까?
 
   문군! 이 용정우물을 들여다 보게. 우물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물이 우물이지 무엇입니까?
   그런가? 우물은 거울과도 같네. 자기의 모든 것이 거기엔 다 비치네. 이를 명경지수라 하지.

희랍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서스는 연못 속에 비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기열애에 빠졌다지 않은가?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나이야. 자기의 욕됨과 자신에 대한 미움을 넘어서 자신의 미를 발견하곤 죽도록 사랑할 수 있었으니...
   선배님! 예수를 믿어 보시지요. 그를 믿음으로서 모든 죄악과 부끄러움에서 해방을 얻으시지요.
   이 친구야! 왜놈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것만도 몸서리가 치는데 한술 더떠 신까지 수입하여 믿어야 하는가?
   선배님! 신은 진리 그 자체입니다. 진리에 국경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
고 말했습니다...
   문군! 그럼 내가 몇가지 물어 보겠네.
   의문나시는 거라든가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요.
   내가 알기로는 상제께서 위 없는 으뜸자리에 계시고 큰 덕과 큰 지혜와 큰 힘으로 하늘을 만드시며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는데 티끌
만치도 더하고 부족함이 없으며 밝으시고 밝으실 뿐만 아니라 신령하시고 신령하시어 인간의 지혜로는 감히 명량할 길이 없다고 하시
네. 여기에 자네가 믿는 야소와 혹여 틀리는 데라도 있는가?
   없습니다.
   하늘에는 천궁이 있어 온갖 착함으로써 섬돌을 삼고, 온갖 덕으로 문을 삼았다네. 상제님이 계신 데로서 뭇신령과 신선들과 모든
밝은이들이 모시고 있어, 지극히 복되고도 빛나는 곳이니 오직 참된 본성을 트고, 모든 공덕을 다 닦은이라야 천궁에 나아가 길이 쾌
락을 얻을지니라. 여기에도 자네가 믿는 천당과 틀리는 데가 있는가?
   없습니다.
   그렇담 자네와 내가 믿는 신은 같은 신이구만.
   선배님! 그게 그런 게 아니라 생명이 있는 신이...    

문군! 자네가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내 짐작하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야소도 고난받는 유태민족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하여 그들의 사상과 관념이 만들어 낸 민족신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우리의 사상과 관념에 부합하는 신이 필요한 걸세.
  야소는 유태의 구세주는 될지언정 한대국의 구세주는 될 수 없다고 보네.

유태는 양을 치는 유목신을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벼를 기르는 농경신을 필요로 하네.

양의 제사는 받고 벼의 제사는 받지 않는 신을 믿어야 한다면 우리는 이 시대의 가인이 될 수밖엔 없잖은가?

진정 우리를 구원할 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백마를 타고 광야를 달려오는 초인일까 아니면 백학을 타고 창공을 날아오는 신선의 아들일까?
  나는 용이 나와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 용정에 와서 우물을 수천번도 더 들여다 보았다네.

나는 세계관 인생관 이런 좀 더 큰 문제보다 바람과 구름과 햇빛과 나무와 우정,

이런 것들에 대해 더 많이 애정을 느끼고 괴로와 해 왔는지도 몰라. 거울을 볼 때마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껴.
  저번에 박물관 원족(遠足)을 갔을 때... 
  
역사를 깨달아 상제의 은혜를 알고
선도를 통하여 상제의 조화를 알라
  
   아아 그때 말이지요? 그때 선배님은 청동거울 앞에서 두 시간이나 서 계셨지요?

마치 노당(盧塘)의 생각하는 사람처럼요.  그 동경 속에 무엇이 보이던가요?
   그때 내가 그 구리거울을 보면서 시를 하나 썼다네. 들어보게나.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 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선배님! 욕된 삶에 대한 자책과 참회를 노래한 시로군요. 그러면 이 용우물을 놓고 쓴 시는 없습니까?

오랫동안 이곳에 오셔서 사색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용우물은 내 사색의 새로운 활력소 였어. 나는 비로소 이 샘가에서 나를 새롭게 발견한 기분이야.

나를 인식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우리 용우물 물이나 한 바가지 떠먹고 또 이야기하세.
   그러시지요. 제가 떠 올리겠습니다.
 
  둘은 두레박에 우물을 퍼서 마셨다. 이제 여름도 다 가고 가을로 접어드는 때라 그런지 우물물은 간장을 녹일듯 하였다.

우물물을 마시고 나서도 한참이나 윤선배는 아무 말도 없었다. 파아란 하늘에는 낮달이 걸려 있었다.

새파란 하늘을 그대로 담은 듯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윤선배의 얼굴은 너무나도 비애로와 보였다.

문군은 그러한 윤선배의 얼굴을 쳐다보며 문득 이천년전 유태의 갈릴리 호숫가를 배회하던 예수의 모습을 상기하였다.
  창백한 윤선배의 얼굴에 식은 땀을 흘리며 기도를 올리는 예수의 얼굴이 포개졌다. 갑가지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기인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이윽고 해가 지고 어스름이 깔릴 무렵 윤선배는 일어났다. 문군은 천천히 윤선배의 뒤를 따랐다.

거진 흐리목산을 다 내려왔을 때였다. 갑자기 윤선배는 말하였다.
   문군! 용우물에 나랑 다시 가보겠나?
  그리곤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오던 길을 되걸어 산으로 가는 것이었다.

문군은 다소 의아하기도 하였지만 안 그러면 안 될 것같아 윤선배를 뒤쫓아 갔다.

윤시인은 용우물로 가더니 우물 속을 넋놓고 들여다 보는 것이다.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문군! 가지. 하는 것이었다.
  그날의 이상스런 행동을 문군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동료들 간에는 윤선배가 좀 실성한 기가 있다는 말까지 돌았다. 그러나 문군은 절대로 그런게 아니라고 확신하였다.
 
  며칠 후 윤선배가 찾아왔다.
  평양 숭실중학으로 전학하게 되었단다.
  대처로 가게 되어 좋으시겠다는 문군의 인사말에 윤선배는 쓸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떠나기 전에 문군과 다시 한번 용정을 산보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용우물을 보고 되돌아 올 때까지 윤선배는 아무 말도 없었다. 헤어지기가 너무도 섭섭하여 해란강으로 나갔다.
일송정에 올랐을 때 그리하여 도도히 흐르는 푸른 강물을 굽어보면서 윤선배는 중얼거렸다. 시에서 강물은 거개 역사를 뜻하지.

청사(靑史)라고 하지.
 
  윤선배는 강 건너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창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일송정푸른솔은늙어늙어갔어도한줄기해란강은천년두고흐른다 
   지난날강가에서말달리던선구자지금은어느곳에거친꿈이깊었나
 
  2절은 문군이 받았다.
 
   용두레우물가에밤새소리들릴때뜻깊은용문교에달빛고이비친다 
   이역하늘바라보며활을쏘던선구자지금은어느곳에거친꿈이깊었나
 
  둘은 약속이나 한듯 용문교 다리로 올라갔다.  그리고 나머지 3절을 나즈막한 소리로 함께 불렀다.
 
   용주사저녁종이비암산에울릴때사나이굳은마음길이새겨두었네 
   조국을찾겠노라맹세하던선구자지금은어느곳에거친꿈이깊었나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문득 용주사에서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푸르른 강물소리가 귓가에 와 닿는 듯 하였다.
 
   망국민에게 고향이 있을 수 있을까?
   동산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다는데 사람에게 고향이 없겠습니까.
   망국민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고 하잖는가.
   그 고향도 선지자나 선구자를 항상 박대한 걸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윤선배는 말을 멈추고 다시 돌아서서 다리를 걷는 것이었다.

옆에서 바라보니 그의 눈에 무엇인가 이슬처럼 반짝이는 것이 비쳤다.

가냘프게 읊조리는 음성이 해란강의 푸른 물결소리에 젖어서 축축하게 문군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음성이라기보다 차라리 물새의 젖은 울음과도 같았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 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작별을 아쉬워하는 문군에게 윤시인은 곱게 접은 하얀 종이 하나를 내놓는 것이었다.
   저번에 자네와 용정 우물가에 갔을 때 지은 시야.
  그날 집에 돌아와서 드디어 시를 완성했다네.
  지금 읽지 말고 내일 읽어 보게나.
 
  문군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남행열차를 타고 떠나는 윤선배를 플랫포옴까지 전송하였다.

까마득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집에 돌아와 종이 편지를 펼치고 거기에 적힌 시를 읽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Turning around the curve of a hill,
           I walk alone to the well beside a paddy,
           And look inside quietly.
 
           Inside the well, the moon is fair,
           The clouds are floating in the clear sky,
           And the cool autumn breeze is blowing;
 
           And there is a man looking at me
           I turn awaay, not wanting to see him.
 
           While I walk, I feel sorry for him;
           I go back - to see him still there.
 
           I turn away from him again;
           As I walk, I start missing him.
 
           Inside the well, the moon lies fair,
           The clouds are sailing in the open sky,
           And the blue wind of autumn is blowing;
           And there is a man - like memory.
 
                                  ----- Self-Portrait
 
 
  문군은 이 시를 읽고 깊은 감회에 빠졌다. 윤선배는 우물이라는 매체를 통한 자아성찰을 통하여 진정한 자기애를 획득하였구나.

윤선배는 우물 속에서 자연과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음을 보았구나.
  이를 통해 그는 개인적인 삶을 버리고 보다 큰 민족의 현실로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하셨구나.

물론 개인적인 행복에 대한 미련을 쉽게 떨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러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자신이 미웠고

부끄러웠던 거였어.
  그래서 윤선배는 다시 우물로 돌아가자고 했던 것이야.

그리하여 미움과 가엾음의 과정을 통하여 진정한 그리움의 세계에 도달한 거야.

즉 미움→가엾음→미움→그리움이라는 변증법적 갈등을 통하여 진정한 자기애의 모습을 지니게 된거지.
  이것은 나르시즘적인 자기도취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야.

그것은 자신조차도 구원하지 못하지만 윤시인적 자기애는 자신뿐만 아니라 민족을 구원하는 샛별이 될거야.
  그는 내가 믿는 예수처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조용히 흘리면서...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고 시대처럼 다가올 아침을 기다리며 겨레에게 눈물과 위안의 손을 내밀어 악수해 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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