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의 탄금호 아래에 가을 억새로 가득한 비내섬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 그 섬 앞에서 안개를 만났습니다. 모든 경계를 지워버린 남한강의 안개 속에서 슬쩍슬쩍 드러나는 강변 풍경은 먹을 찍어서 농담으로 그려낸 한 폭의 수묵화였습니다. 고요한 수묵화의 풍경 위로 이따금 새가 날아올랐습니다. 안개로 그득한 적막한 강변을 따라 걷는 길입니다. 여기는 충주의 비내섬. 그리고 그 곁의 수변을 따라 이어지는 충주의 도보 코스 ‘비내길’입니다. 아침마다 몽환적인 안개로, 반짝이는 억새꽃 무더기로 이 길이야말로 ‘가을의 길’입니다. 화려한 단풍으로 들뜬 풍경 말고, 차분한 가을의 적막한 풍경을 만나고 싶다면, 바로 여기 충주의 비내길이 있습니다.
# 충주…가을 안개로 가득한 물의 도시 당연한 얘기지만, 충주에는 충주호가 있다. 하지만 충주호는 충주의 것이라기보다는 제천이나 단양의 소유에 가깝다. 제천이나 단양 쪽의 호수의 면적이 더 넓기도 하거니와, 단양 8경을 비롯한 수변의 경관 명소들이 단양이나 제천 쪽에 죄다 몰려 있다. 충주호에 관한 한 충주의 지분은 별로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충주호’인 이유는 호수의 수문 격인 ‘국내 최대의 콘크리트 중력식댐’ 충주댐이 충주 땅에 있기 때문이다. 충주에 충주호만 있는 건 아니다. 충주에는 1985년 충주댐과 함께 조정지댐 건설로 조성된 호수 탄금호가 있다. 조정지댐이란 본댐 아래 물을 가둬 홍수조절을 돕는 보조댐을 말한다. 본댐에서 한꺼번에 흘려 내보낸 물을 담아뒀다 나눠서 내려보내며 용수공급과 전력생산을 하는 역할도 한다. 제천이나 단양의 충주호가 멀리 물러서 보는 풍경화 같은 경관을 품고 있다면, 충주의 탄금호와 그 아래 남한강에는 가까이서 다가가서 만나는 자연과 생태의 경관이 있다. 가을빛으로 물드는 왕버드나무, 물푸레나무, 국수나무, 층층나무들과 구절초와 쑥부쟁이, 억새가 만발한 호반과 강변의 경관을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충주는 물의 도시다. 충주댐으로 만들어진 충주호, 조정지댐으로 만들어진 호수 탄금호, 그리고 남한강과 달천강의 물줄기가 도시를 휘감고 있다. 요즘 같은 가을날 충주에 무시로 자욱한 안개가 끼는 것도 호수와 강 때문이다. 봄, 가을로 아침이면 촉촉한 안개가 고요하게 강을 덮고, 마을을 덮고, 또 도시를 덮는다. 야음을 틈타 몰래 진주해온 적군처럼….
# 비내섬, 거대한 초지가 억새 군락으로 탄금호 아래 남한강에는 비내섬이 있다. 강물이 육지를 잘라내서 섬이 된 곳인데 서울 여의도의 3분 1에 육박하는 면적(99만2000㎡)이니 작지 않은 섬이다. 섬 이름 ‘비내(比內)’. 한자로는 뜻을 가늠하기 어렵다. 나무와 억새를 베어냈다고 해서 ‘베어내다’의 사투리 ‘비내다’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큰 장마가 지나간 뒤 지형이 ‘변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섬은 온통 버드나무와 억새의 차지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억새들이 군락을 지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섬을 가득 채운 억새꽃의 흰 솜털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비내섬에는 충주시가 세워놓은 화장실 딱 하나뿐 그 흔한 나무 덱도, 벤치도 없다. 억새군락 사이로 길이 뚜렷하긴 하지만, 인위적으로 조성한 산책로도 안내판도 없다. 꾸미지 않고 그냥 놓아둔 강변 섬의 정취 그대로다. 이렇듯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은 건 비내섬이 미군의 훈련장이기 때문이다. 한·미합동 훈련이 있는 날이면 섬 곳곳에 미군 막사가 들어선다. 헬기가 날아오르고 기동훈련을 하는 전차들이 으르렁거리며 섬을 누빈다. 그러나 훈련이 없는 날에는 섬 전체를 개방한다. 섬 입구에 ‘미군 훈련일정표’가 팻말에 세워져 있는데, 당분간은 훈련 일정이 없는지 백지만 게시돼 있었다. 비내섬의 억새군락은 지난 2001년 충주의 목장들이 수입건초 대용으로 충주시의 지원을 받아 나무를 베고 조성했던 거대한 초지의 흔적이다. 푸른 초지로 가득했던 비내섬은 충주의 낙농업이 쇠퇴하고 2004년부터 미군 훈련장으로 쓰이면서 억새가 자라기 시작해 지금처럼 거대한 군락을 이루게 된 것이다. 섬의 길은 억새로 담장을 친 미로에 가깝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버드나무군락을 만나기도 하고, 너른 자갈밭을 만나기도 한다. 길을 잃어도 섬이라 굳이 길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저 내키는 대로 걷다 보면 강을 만나게 된다. 유장하게 흘러가는 강 여울에서는 오리들이 무리를 지어 물질을 하고 있었다. 섣불리 손대지 않아서 아름다운 비내섬의 가을 경관이야 더할 나위 없지만, 군사훈련장이 돼서 지금의 경관을 갖게 된 것이라 생각하면 심사는 복잡하다. # 비내길…걷는 이가 주인공이 되는 길
비내길은 섬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지만, 정작 비내섬의 한쪽 끝만 살짝 딛고 지나간다. 미군 훈련장 때문이다. 비내섬은 훈련이 없을 때는 출입이 자유롭지만, 그렇다고 섬 깊숙이까지 도보 길을 놓는 것까지는 허락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비내길은 남한강변의 자그마한 산(양지말산)의 발치를 돌면서 비내섬을 에두른다. 자의가 아니었는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그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논둑길과 복숭아 과수원길, 억새와 갈대 무성한 천변을 지나 남한강 변의 물길을 따라 짙은 숲을 따라가는 다채로운 걷기 길이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그 길이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비내섬은 비내길에 딸린 훌륭한 부록인 셈이다. 비내길을 찾은 이들은 비내섬 억새에 시선을 뺏겨 그곳만 걷다가 돌아가곤 하지만, 단언컨대 비내섬보다는 비내길이다. 비내섬에는 가지 않더라도 비내길은 꼭 걸어봐야 한다는 얘기다. 비내길의 출발은 앙성온천 광장. 온천이라면 뜨끈한 온천수를 생각하지만, 앙성 온천은 차가운 온천이다. 탄산 온천이라 그렇다. 욕조에 들면 온몸이 기포로 따끔 따끔거리는데, 그 기분이 생각보다 괜찮다. 각설하고. 온천광장 건너편 비내길 표지석에서 걷기가 시작된다. 복숭아밭 과수원 사이에 도톰하게 둑을 돋워 초지를 만들고 거기에다 길을 냈다. 차도, 자전거도 드나들 수 없는 이 길은 적당히 좁다. 이런 길은 편안하다. ‘길’이 아니라 ‘그 길을 걷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느낌이랄까. 앙성천을 끼고 이어지는 길에는 갈대와 억새가 무성하다. 억새는 이미 화사한 솜털의 꽃을 피웠지만, 갈대꽃은 좀 더 기다려야 한다. 갈대꽃까지 피어나면 이 길은 가을볕이 더 화려해지리라. 길은 이내 남한강을 만난다. 이곳에 철새전망공원이 있다. 전망대에서 남한강의 물줄기와 봉황섬 일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봉황섬도 비내섬과 마찬가지로 한 줄기 강물이 땅을 끊어내 섬이 된 곳.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습지와 무성한 버드나무와 억새들이 어우러지는 경관은 비내섬보다 한 수 위처럼 보였다. 봉황섬 앞 강변 습지에서 오리떼들이 수런거렸고 백로와 왜가리가 날아올랐다. 이르게 찾아온 겨울 철새 고니 한 마리도 홀로 수면에서 우아한 몸짓으로 순백의 깃털을 고르고 있었다.
# 옛 나루터서 수묵화의 풍경 앞에 서다 비내길은 철새전망공원에서부터 줄곧 남한강의 물길에 바짝 붙어 숲길을 따라간다. 양지말산의 발목을 적시는 강물을 끼고 걷는 길. 숲은 아직 초록인데, 길섶에 활짝 피어난 구절초와 쑥부쟁이 무더기들이 여기도 가을이 이미 당도했음을 알린다. 강이 뿜어내는 습기를 머금어서일까. 공기는 청량하고 발밑으로 느껴지는 푹신한 길의 느낌이 기분 좋다. 작은 오르막과 내리막. 길이 끊긴 곳에는 통나무다리가 놓였다. 길은 편안하지만, 이 길에서 보폭을 넓히는 건 아니 될 말이다. 여기야말로 비내길의 전체 구간 중 가장 느리게 걸어야 할 구간이다. 이윽고 길은 조대나루에 당도한다. 조대나루는 이쪽 앙성면에서 강 건너 소태면으로 나룻배가 오가던 자리다. 나루터 부근에는 다슬기를 잡는 배가 느릿느릿 그림처럼 떠 있다. 이쪽에서 충주는 물론이거니와 남한강을 통틀어 손꼽히는 품질의 다슬기가 잡힌다. 다슬기라고 다 같은 건 아니다. 충주 시내의 한 다슬기 전문 식당 주인에게서 들은 얘기 한 토막. 같은 다슬기라도 어디서 잡았느냐에 따라 맛이 다르단다. 수온이 찬 곳에서 자라는 다슬기는 끓여 놓으면 쓴맛이 돈다고 했다. 그 는 식당에서 쓰는 다슬기가 바로 이곳에서 잡은 것이라고 자랑했다. 피영선(58) 씨는 조대나루 일대에서 배를 띄우고 바닥을 긁어 다슬기를 잡는다. 충주의 남한강 일대에서 내수면 어업허가를 받고 다슬기를 잡는 20여 명 중의 한 명이다. 하루에 스무 시간을 온 가족이 교대해가며 다슬기잡이에 매달린다는데, 건져 올린 다슬기가 제법 튼실하고 굵직하다. 봄가을에는 아침에, 여름에는 한밤중에 안개가 끼어 배를 띄우지 못하는 날이 많다. 그러나 피 씨는 밀려든 안개가 자욱하게 풍경을 지웠다가 드러내는 장면이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했다. 한때 도시에서 카센터를 운영하면서 ‘기름밥’을 먹었다는 그는 “안개 탓에 일을 못해도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웃었다. 이튿날 아침 조대나루에서 피 씨가 말했던 안개와 맞닥뜨렸다. 강변 일대가 가득한 안개로 가둬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진공과도 같은 고요 속에서 오리며 왜가리가 안개 사이로 날아오르는 모습은 수묵화의 장면 그대로였다. 안개는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겨우 걷혔다. 요즘은 거의 매일 아침마다 안개가 낀다니 아침에 서둘 것도 없이 비내길을 걸으면 이런 경관과 마주할 수 있다. # 하늘재와 종댕이길…충주의 ‘풍경길’
덧붙이자면 충주시가 내놓은 도보 여행 코스인 7개 ‘풍경길’ 중 여기 비내길을 빼고 꼭 가봐야 할 곳을 꼽는다면 ‘하늘재길’과 ‘종댕이길’이다. 하늘재길은 충주의 미륵대원지에서 문경을 잇는 고갯마루인데, 길의 역사가 156년 신라 아달라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두대간을 넘는 가장 오래된 길인 셈이다. 신라가 망한 뒤 마의태자가 이 길로 금강산으로 향했고,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안동으로 향할 때 이 고개를 넘었다. 묵은 역사만큼 길은 유장하다. 하지만 길 초입의 미륵대원지 일대가 지금 기약 없는 보수공사 중이라 늦춰서 찾아가는 편이 더 낫겠다. 종댕이길은 충주호를 끼고 솟은 심항산의 둘레를 걷는 길. 4㎞에 달하는 전 구간이 호수를 곁에 두고 이어진 숲길이다. 비록 눈이 번쩍 뜨일만한 경관은 없지만, 이 길이 관통하는 느낌은 편안함이다. 길의 초입과 끝에 내리막길과 오르막 외에는 숨을 고르지 않고도 느긋하게 걸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충주호의 수위가 껑충 내려가서 호수의 경관은 좀 아쉬운 편. 이곳 역시 접어두었다가 충주호 수위가 더 올라가는 늦단풍이 물들 무렵에 찾아가는 게 더 좋을 듯하다. # 앞 뒤로 보물을 거느린 국보 이야기 다시 비내길 부근 이야기로 돌아가자. 비내섬과 비내길을 찾았다면 함께 들러 볼만한 유적이 몇 곳 있다. 충주에는 중앙탑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신라 때 세운 우람한 탑평리 칠층석탑이 있고, 고구려 영토 확장기에 세운 충주 고구려비도 있지만, 이런 곳들이야 워낙 이름나 따로 일러주지 않는다 해도 충주를 찾았다면 꼭 가보게 되는 곳이다. 석탑, 비석과 함께 충주가 갖고 있는 국보 3개 중의 하나인 소태면 오량리의 청룡사지 보각국사탑은 빼어난 미감에도 불구하고 다른 두 곳과 달리 알려지지도 않았고, 발길도 뜸하다. 청룡사지는 비내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강 건너편의 산자락에 있다. 태조 이성계의 스승인 보각국사의 입적을 기리는 부도 탑 앞에는 보물인 사자석등이, 뒤로도 보물인 탑비가 있다. 국보 하나가 앞뒤로 보물을 거느리고 있는 셈이다. 고즈넉한 솔숲 속에 당당하게 서 있는 부도탑은 균형미도 탁월하거니와 몸체에 새겨진 조각의 솜씨도 빼어나다. 국보의 ‘격’이 느껴진다. 탑신에는 구름과 용, 사자가 돋을새김 돼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앞발을 들어 새끼 사자와 유희하는 모습도 있다. 비내섬이 있는 앙성면 땅은 아니지만, 차로 15분 남짓이면 가닿을 수 있는 가금면 봉화리의 보물 마애불상군도 들러 볼만하다. 마을 뒷산의 삼각형 모양의 햇골산 중턱의 가파른 석벽에는 반가사유상을 비롯한 보살상과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남한강을 끼고 있는 사찰의 불교유적들은 거개가 왕실과 관련된 것들인데, 돌에 새긴 투박한 솜씨에 미뤄보면 이곳만큼은 대중의 믿음이 깃든 곳인 듯하다. 삼국이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땅, 충주. 승전과 패전으로 권력은 나아가고 또 물러섰지만, 그 과정에서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이의 고통이 지나갔을까. 서툰 솜씨로 바위에서 꺼낸 이 불상 앞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이가 합장하고 소망을 간절하게 빌었을까.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비내길이 시작되는 앙성온천 부근에 온유관광호텔(043-855-8877)이 있다. 호텔은 충주의 수안보 지역에 몰려 있다. 뜨끈한 온천욕과 숙박을 겸할 수 있어 좋다. 상록호텔(043-845-3500), 조선호텔(043-848-8831), 파크호텔(043-846-2331), 한화리조트(043-846-8211) 등이 추천할만한 숙소다. 충주 시내에는 호텔 더 베이스(043-848-9900), 리버호텔(043-851-2235), 충주그랜드관광호텔(043-848-5554) 등이 있다. 충주의 음식 중 대표적인 것이 남한강에서 잡아낸 다슬기로 끓여내는 올갱이국이다. 중국산을 쓰는 곳도 적잖으니 믿을만한 곳을 찾아가야 한다. 칠금동의 매일식당(043-845-8688)은 비내섬 인근에서 잡아낸 다슬기만 쓴다. 올뱅이식당(043-851-2927)도 충주사람들이 추천하는 곳이다. 충주 자유시장 부근에는 순대만두골목이 있다. 이 골목의 순댓국은 시래기를 넣고 끓인다. 왕순대만두(043-847-5826)가 이 골목의 대표격이다. 대우분식(043-854-6848)의 감자만두나 복서울식당(043-842-0135)의 시래기해장국도 추천할만하다. |
'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산 수통리 적벽강 이야기 (0) | 2016.11.03 |
---|---|
여수의 먼바다 손죽도 이야기 (0) | 2016.10.29 |
가을의 전망대 경남 합천 (0) | 2016.10.15 |
숨어버린 絶景 진도 관매도 (0) | 2016.10.08 |
남설악 망경대&주전골 둘레길 (0) | 2016.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