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어수선한 세상 속에서도 계절은 하루하루 저 스스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금강의 물줄기가 가장 서정적으로 흘러내리는 곳, 여기는 충남 금산 오지마을 수통리의 적벽강입니다. 좁은 오솔길이 강을 거슬러 오르다가 강물에 잠겨 끊긴 곳. 그 끊긴 길 위에서 보는 가을 강이 얼마나 아름답던지요. 봄날의 강이 옅은 물감으로 그려낸 수채화라면, 가을의 강은 다채로운 색깔을 두껍게 겹쳐 칠한 유화에 가깝습니다. 가을볕 아래 금강변에 곱게 물든 단풍과 초록의 물빛이 그려낸 색감이 꼭 그랬습니다. 인적없는 강변은 지금 가을로 가득합니다. 금강의 고요한 물길을 따라, 혹은 금강을 굽어볼 수 있는 산중을 걸어 가을 강의 정취와 그 강에 깃들어 있는 이야기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침묵 공간 사이로 물새들이 푸드덕 날아오르는 강변의 억새 길을 걷기도 하고, 강물이 아득하게 흘러드는 협곡을 굽어보려 가을 안개로 휩싸인 산길을 짚어 올랐습니다. 강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마을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줍기도 했고, 멈춰 서서 저물어가는 가을 강을 오래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왕조의 멸망과 인간사의 덧없음을 노래했던 고려 말의 신하를 기리는 비석 앞에 서기도 했고, 고관대작들의 말을 씻기고자 백성을 몰아냈던 관료들의 횡포를 증거하는 자리를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울었다는 1100년 된 은행나무 거목 앞에서 가만히 서보기도 했지요. 그곳에는 하루하루 깊어가는 가을의 풍경과 함께 제가 사는 땅의 고단함을 위태로운 배로 은유한 이들의 소박한 삶이 있었고, 천지개벽의 세상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꿈이 있었으며, 변란을 피해 몸을 숨겼던 왕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흔적도 있었습니다. 거기가 금산이 아니었다 해도 가을이 늘 환기하는 것은 순환입니다. 가을 강에서는 계절도 강물도, 또 그 강변에 기대 사는 이들의 삶도 순환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소란스러움 따위는 다 잊고 말입니다.
# 가장 아름다운 강의 경관을 보는 자리 이 가을에 그곳에 다녀오지 않고서 가을의 서정을 보았다 말할 수 있을까. 충남 금산 땅에서 금강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강물로 잠기며 길이 끝나는 곳이 있다. 거기가 바로 금산의 오지, 막다른 길끝 마을 수통리의 적벽강이다. 외딴 곳에 숨겨져 있지만 수통리 앞을 흐르는 물길의 경관은 금강의 구간 중에서 단연 으뜸이고, 우리 강을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능히 드는 곳이다. 오지라고 해도 적벽강은 금산읍에서 차로 30분이 채 안 걸리지만, 요즘 같은 가을에 그곳에 가려면 한없이 시간이 늦춰진다. 단풍으로 물든 금강변의 경관이, 고요하게 흐르는 초록의 물색이, 억새가 피어난 수변의 정취가 수시로 발길을 붙잡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멈춰 서게 된다면 언제 적벽강에 도착할지는 기약할 수 없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양각산과 갈선산 사이의 협곡을 흘러내려 온 금강은 수통리 마을 앞에서 절경을 빚어놓는다. 강변에 우뚝 솟은 적벽강과 함바위다. 적벽강이란 중국 양쯔(揚子)강의 적벽에서 이름을 가져온 것이다. 강변에 솟은 붉은 기운의 바위는 그러나 규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이름이야 적벽강이 더 알려졌지만, 크고 우람하기로 치자면 적벽강 옆 해발 385m 높이의 ‘함바위’가 몇 수 위다. 함바위는 ‘한바위’에서 변한 이름이다. 후백제군의 전초기지로 망국의 한(恨)이 깃들어 있다고 해서 ‘한바위’라고 했다는 얘기도 있고, 크다는 뜻으로 ‘한바위’라고 불렀다고도 전한다. 적벽강과 함바위는 금강을 끼고 나란히 서서 아름다움을 겨룬다. 적벽강과 함바위 일대는 물소리를 빼고 나면 진공의 적막이다. 강변의 나무들이 지난 여름의 무성했던 잎을 떨구고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시간. 그런 시간에는 ‘침묵’이 가장 알맞은 배경음악이리라. 단풍의 색감이 도장처럼 찍힌 금강의 수면은 고요했고, 드문드문 집이 들어선 마을도 적막했다. 이따금 침묵의 공간을 가르며 물오리와 백로들만 날아올랐다. # 함바위에서 굽어본 금강의 물줄기
다만 양각산의 산길을 짚어 함바위를 찾아가는 게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도 희미했지만, 뚝 떨어져 솟은 함바위까지 가는 길은 무시로 지워졌다. 이쪽으로는 등산객의 발길이 잦지 않은 데다 소나무와 낙엽송이 우거졌지만, 그 아래 관목 숲이 성글어 길을 찾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때마침 밀려온 안개로 산중을 헤매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함바위고 뭐고, 다 포기하고 내려서는 길. 급경사의 비탈을 구르기도 하고, 나무뿌리를 잡고 경사면을 올라서면서 진이 다 빠질 즈음에야 함바위를 만났다. 매어놓은 밧줄을 붙잡고 바위군(群)으로 이뤄진 함바위에 올라섰다. 발 아래로 어둠에 잠겨가는 금강의 경관이 가슴을 두방망이질하게 만들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길을 고쳐 잡아 다시 그곳에 오르기로 한 건 그래서였다. 다음 날 아침, 산 아래 펜션 주인이 기꺼이 앞장 섰다. 망설임 없이 길을 짚어가자 불과 30분 만에 함바위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함바위 아래로 흘러가는 금강에 가을 아침 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딛고 선 이쪽의 양각산과 강 건너편 갈선산 사이로 금강 상류의 물줄기가 길게 이어졌다. 단풍이 막 불붙기 시작한 산자락을 끼고 흐르는 금강의 모습은 가슴이 다 뭉클해질 정도였다. 적벽강까지 와서 이걸 보지 않고 돌아가는 건 아니 될 말이다. 다만 마을 주민들에게 길을 단단히 물어야 하는 건 물론이다. 함바위로 가는 산길에다 간단한 이정표라도 세워줬으면 좋으련만, 양각산 일대가 개인소유라 금산군에서도 별 도리가 없다는 대답이다. # 강에 깃들여 사는 사람들이 꾸는 꿈
금강변의 마을 사람들은 하늘과 물에 순응만 했던 건 아니다. 때로는 하늘에 맞서기도 했다. 그 증거가 바로 금강 상류의 마을 어재리의 ‘농바우’다. 농바우는 강변에서 살짝 몸을 돌린 자리의 절벽 위에 얹힌 바위다. 마치 반닫이 농처럼 생겼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절벽 위의 바위가 영락없는 장롱의 모습이다. 강변 마을 주민들은 긴 가뭄이 들면 여기서 기우제를 지냈다. 보통은 ‘비를 좀 내려달라’고 두 손을 모으고 갖은 치성을 드리는 게 보통인데, 뜻밖에도 농바우의 기우제는 감히 하늘을 위협한다. 농바우의 농 안에는 출중한 장수의 갑옷이 들어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어깻죽지에 날개를 달고 태어난 아기 장수가 이 갑옷을 얻어 입으면 천지개벽이 이뤄진다는 속설이다.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기다리는 백성들의 꿈이 바위 안에 가둬져 있는 셈이었다. 기우제가 열리면 여자들이 밧줄을 매달아 바위를 끌어내리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 천지개벽을 두려워하는 하늘이 진노해 비를 내려줄 것이라는 게 주민들의 믿음이었다. 농바우를 끌어내리는 기우제는 ‘농바우 끄시기(끌기)’라고 불리는데, 그 명맥은 30년 전쯤 끊어지고 말았지만, 요즘도 축제 때면 민속행사로 재현되고 있단다. 이른바 ‘대동 세상’의 천지개벽 꿈이 강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라도 남아 전하고 있다. 적벽강과 농바우를 굽이쳐 흐른 금강이 지나가는 제원면 천내리의 제원대교 부근에는 ‘용호석’이 있다. 230m의 간격을 두고 서있는 용과 호랑이를 조각한 바위다. 고려 말의 것인데 해학적인 모습이 오히려 지금의 미감에 더 가깝다. 강변의 보호각 안에 세워진 이 돌을 두고 고려 공민왕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고려 말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까지 피란을 내려온 공민왕이 지관을 시켜 자신의 능묘를 정하도록 명했다. 나라의 명운이 풍전등화이던 시절이었으니 자칫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상황을 떠올려 그런 것이었을까. 아무튼 명당을 찾아 나선 지관은 금산 동쪽 20리 태백산 지맥이 흘러드는 길지를 찾아내서 보고했다. 이에 공민왕은 능묘에 필요한 석물을 준비하도록 했지만 훗날 홍건적의 난이 진압돼 개경으로 돌아갔고, 방치된 석물이 바로 용호석이라는 얘기다. 용호석 앞에서 관심이 가는 건 변고에 휘말려 피란을 떠나온 공민왕의 처지보다 지관이 꼽았다는 최고의 길지는 어디쯤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산세와 지세는 모를지라도 따지고 보면 이렇듯 금강이 부드럽게 굽어 흐르는 어디인들 명당이 아닐까. 감히 천지개벽을 도모하며 하늘을 꾸짖을 줄 아는 사람들이 그 명당에 산다. # 상징과 은유… 세마지와 어풍대, 그리고 은행나무 용호석에서 멀지 않은 제원면 소재지인 제원리 버스정류장 부근에는 ‘세마지(洗馬池)’와 ‘어풍대(御風臺)’가 있다. 세마지는 뜻 그대로 말을 씻기던 연못이다. 본래 이 연못은 마을 주민들이 더위를 식히고 멱을 감던 곳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관아에서 주민들의 출입을 막은 뒤 ‘세마지’라 적어놓고는 이 연못에다 관리들이 묵어가는 역원의 말을 데려다 씻겼다. 이에 한 청년이 앞장서 항의를 했지만 역원에 끌려가 볼기만 맞고 쫓겨났다. 이에 청년이 분풀이를 하고자 세마지 주변의 풀밭에 불을 놓았고, 큰불이 나서 말이 다 죽고 말았다. 그 뒤부터 해마다 제원리에는 큰불이 끊이질 않았다. 해마다 마을을 휩쓰는 불을 끈 건 조선 중기의 문신인 미수 허목이다. 허목은 잇단 불이 죽은 말의 원혼이 부리는 조화와 바람을 모시지 않은 탓이라고 판단하고 말을 씻기던 세마지를 흙으로 메워 없애고 그 자리에 ‘바람을 모시는 곳’이란 뜻의 ‘어풍대’ 글씨를 새겼다. 그 뒤로는 불이 나지 않고 마을의 평화가 계속됐다고 전한다. 해마다 마을을 휩쓸던 불이란 바로 ‘민심’을 은유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고작 말을 씻긴다며 백성들을 쫓아내고 항의하는 이를 볼기를 쳐서 엄벌에 처한 관리들에 저항하던 백성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야기는 결국 허목이 세마지를 백성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묻어버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상징과 은유…. 과연 그것이 정답이었을까. 이 가을에 금산 땅에서 또 가봐야 할 곳이 하나 더 있다. 금산의 진악산 자락에는 절집 보석사가 있다. 작고 소박한 절집이지만 가을이면 보석사는 말 그대로 ‘보석’처럼 빛난다. 절집 들머리의 한쪽은 전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다른 쪽은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잎을 떨어뜨리고 있다. 바람에 우수수 떨어진 은행잎들이 노란색 양탄자처럼 폭신하게 깔려 있다. 이 길과 절집의 주인공은 단연 길끝의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다. 가까이 다가서면 그 면모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나무는 거대하다. 수령이 보석사 창건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나무가 살아온 시간이 줄잡아 1100년이다. 이 정도 수령이라면 중심 가지가 부러졌거나 삭아있을 법한데도 나무는 아직도 장엄하고 위압적이다. 한눈에도 ‘귀물’임이 느껴질 정도다. 절집 아래 마을 주민들은 마을에 변고가 있거나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는 우우 울음소리를 낸다고 했다. 저물어가는 시간, 숲에서 귀를 기울인다. 은행나무의 울음 대신 절집의 종소리만 가을 속으로 둥그렇게 퍼져나갔다.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양각산과 함바위의 들머리 양각산장의 숙박요금은 평일은 7만 원, 휴일은 11만 원이다. 금산읍에는 한방스파 호텔 &휴가 있다. 트윈룸 기준 주중 6만 원, 주말 8만 원. 조식과 스파이용권을 포함하면 주중 7만2000원, 주말 9만2000원이다. 금산의 먹거리로는 단연 금강에서 잡히는 물고기로 끓여내는 어죽과 도리뱅뱅이다. 제원면 천내리와 저곡리 일대에 어죽집들이 몰려 있다. 원골식당(041-752-2638), 저곡식당(041-752-7350) 등이 추천할 만한 집이다. 도리뱅뱅이는 모양도 메뉴 이름도 이색적이지만, 맛으로만 놓고 본다면 민물새우 튀김이 훨씬 더 낫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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