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로 전쟁 막은 애국지색(愛國之色)
중국에서는 미모 때문에 한 나라를 망하게 한 여자들, 즉 ‘경국지색(傾國之色)’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왕소군은 오히려 자신의 미모로 전쟁을 막은 ‘애국지색(愛國之色)’의 대표자로 2000년이 넘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인구에 회자된다.
앞서 흉노(匈奴)족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한말(漢末) 시인이자 비운의 여성 채염(蔡琰)의 삶을 담은 비분시(悲憤詩)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한대(漢代)는 중국 역사에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고유의 문화를 정립한 시기이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은 때이기도 하다. 특히 북방 기마민족의 군사적 위협과 국경 침범은 한 정권 내내 통치자들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당시 흉노족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의 북쪽 국경을 시시각각 위협하였다. 이런 시기에 여성의 몸으로 역사의 전면에 부각된 인물이 있으니 그녀가 바로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왕소군(王昭君)이다.
2500년 전 元帝시대 실존인물
왕소군(약 기원전 53년~?)은 실존인물이다. 그녀는 남군(南郡) 자귀(歸·지금의 호북성 흥산興山현 소군昭君촌) 사람이다. 특별한 경험 때문에 그는 후세에 많은 문학작품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작품은 원대 마치원(馬致遠·나고 죽은 해를 알 수 없음)이 쓴 잡극(雜劇)인 ‘한궁의 가을(漢宮秋)’이다.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 원제(元帝·기원전 48~33년 재위)는 후궁의 궁녀가 부족하자 화가 모연수(毛延壽)의 건의를 받아들여 민간에서 미녀들을 선발하였다. 모연수는 전국의 미녀들을 선발하면서 뇌물을 받고 초상화의 모습을 조작하였다. 빼어난 미모를 갖고 있던 왕소군은 모연수에게 뇌물을 건네지 않았고, 이에 모연수는 왕소군의 얼굴에 검은 얼룩을 그려 넣음으로써 왕소군은 입궁한 후에 황제의 간택을 받지 못하고 후궁 깊숙이 버려진다. 어느 날 밤, 원제는 소군이 타는 비파 소리를 듣고 소군을 만나 그녀의 미모에 반하여 명비(明妃)로 책봉한다. 그리곤 모연수를 참수하려 한다.
모연수는 흉노로 도망쳐 호한야(呼韓邪) 선우(單于·흉노의 왕 호칭)에게 왕소군의 실제 초상을 바치고 한 황제에게 왕소군을 요구하라고 제안한다. 원제는 원치 않았지만 왕소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흉노의 대군에 맞설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소군은 불필요한 전쟁을 막기 위해 자원하여 군대를 몰고 온 호한야 선우를 따라나선다. 원제는 슬픔을 참고 왕소군과 이별한다. 왕소군을 얻게 된 호한야 선우는 군대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고국을 잊지 못한 왕소군은 국경에 있는 흑룡강(黑龍江)에 몸을 던져 죽는다. 선우는 왕소군의 죽음과 관련해 한 조정의 추궁을 조금이라도 피해보기 위해 모연수를 한으로 돌려보낸다. 원제는 깊은 밤 정적 속에서 외로이 날아가는 기러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억장이 무너져 잠을 이루지 못한다. 원제는 모연수를 참수함으로써 죽은 왕소군을 위로한다. 그래서 이 잡극의 정식 명칭(正名)은 ‘외로운 기러기가 그윽한 꿈을 깨우는 한궁의 가을(破幽夢孤雁漢宮秋)’이다.
왕소군이 국경을 나선(昭君出塞) 이야기는 서한(西漢) 시대에서부터 원대(元代)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변화와 확대의 과정을 거쳤다.
후에 진대(晋代) 갈홍(葛洪·283?~343년)의 ‘서경잡기(西京雜記)’(일설에는 서한의 유흠劉歆 작품이라고도 함)에는 ‘왕장(王)’이라는 제목으로 이야기가 변화 발전하였다. 한나라 원제는 후궁의 궁녀가 많아 일일이 볼 수가 없자 모연수를 비롯한 진창(陳敞), 유백(劉白) 등의 화가에게 그들의 초상을 그리도록 지시한 뒤 그 초상을 보고 간택하였다. 궁녀들은 초상을 잘 그려달라고 화가에게 5만에서 10만냥에 달하는 뇌물을 주었다. 유독 왕장만이 화가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의 부름을 받을 수 없었다. 흉노의 선우가 원제를 찾아와 알씨로 삼을 미녀를 요구하자 원제는 초상을 보고 왕장을 선택해 내주었다. 출발 당일에 소군을 불러보니 그 어떤 궁녀도 따라오지 못할 미녀에다 행동과 말투 또한 우아하고 현명하였다. 원제는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정해진 약속이라 번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일을 추궁하여 화가를 모두 처단하고 그들의 재산을 전부 몰수하였다는 내용이다.
확대 발전되면서 전설로 내려오다
‘서경잡기’ 이후에 기록된 역사서 ‘후한서’는 이 전설을 채택하지 않았지만 이후 많은 시와 소설에서 이 전설을 수용하였고, 뇌물을 받은 화가도 모연수 한 사람에 집중시켰다. 돈황에서 발견된 당대 ‘왕소군변문(變文)’은 민간에서 전해지던 왕소군 이야기를 집대성하였다. 원제 시대의 흉노족과 한족 간의 민족 모순을 크게 부각시켰고, 왕소군이 국경을 넘은 것이 굴욕적 외교의 결과였음을 강조하였다. 그중에는 화가가 초상을 그렸고, 선우 역시 초상을 보고 왕소군을 선택했으며, 흉노로 건너간 왕소군이 향수병에 걸려 결국 세상을 떠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마치원은 정사(正史)가 아닌 이 ‘왕소군변문’을 토대로 다른 문학작품과 민간 강창(講唱·이야기와 노래를 섞음)문학의 성취를 수용하여 ‘한궁추’를 써냈다. ‘한궁추’의 셋째 마디(三折)에 나오는 다음 두 곡은 원제와 왕소군의 이별 장면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매화주] 아! 광활한 들판 대하니 슬프고 처량하구나. 풀은 이미 누런색 더하고, 토끼는 벌써 서리를 맞아 하얗네. 개는 털갈이 해 듬성듬성 파르스름한데, 사람들은 술 달린 창 치켜들었고, 말은 행장 짊어졌으며, 수레는 식량 싣고서, 행렬도 사냥터를 떠나누나. 그 그 그녀는 슬퍼하며 이 한나라 군주에게 작별을 고하고, 나 나 나는 손 맞잡고 다리로 오르노라. 그 일행은 아득한 황야로 접어들고, 내 어가는 함양으로 돌아갈 것이라. 함양으로 돌아가 궁궐 담장 지나고, 궁궐 담장 지나 회랑을 돌고, 회랑을 돌아 초방으로 다가서고, 초방에 다가설 때 달은 어둑어둑할 테지? 달 어둑어둑해지면 밤에 한기 일어나고, 밤에 한기 일어나매 쓰르라미 울어대고, 쓰르라미 울면 푸른 비단 창가에…, 푸른 비단 창 마주하고 나면, 어찌 그립지 않으리오!
[수강남] 아! 그리워하지 않는다면, 무쇠 같은 마음 아니겠나? 무쇠 같은 마음이라도, 시름의 눈물 수천 줄기로 떨구리라! 미인도를 오늘밤 소양궁에 걸고, 내 거기서 공양하리니, 그건 바로 높게 타들어가는 은촛불로 아름답던 모습 비춰보기 위함
일세….
여기서 매화주(梅花酒)와 수강남(受江南)은 리듬의 종류를 가리키는 용어다. 현대로 따지면 한궁추의 한 곡은 재즈로 부르고, 다음 곡은 발라드로 부르는 식이다.
역사 속 왕소군은 흉노에 정착
한 원제는 가을 들판에 서서 왕소군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울러 혼자 몸으로 궁전에 돌아가 느끼게 될 처량함과 고독감을 상상하면서 깊은 시름에 잠겼다. 위의 ‘매화주’의 후반부는 ‘함양으로 돌아가 궁궐 담장 지나고, 궁궐 담장 지나 회랑을 돌고, 회랑을 돌아 초방으로 다가서고, 초방에 다가설 때 달은 어둑어둑할 테지?’처럼 ‘정침속마(頂針續麻)’의 수법을 사용하였다. ‘정침속마’란 송·원 시대에 유행했던 수사법의 일종이다. 앞 구의 마지막 글자나 구를 다음 구의 첫 부분에 다시 이어 씀으로써, 재미를 불러일으키거나 내용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여기서도 그 덕분에 한 원제의 상심의 정도를 부각시키고 있다.
작가 마치원의 호는 동리(東籬)이고 자가 천리(千里)였다고 한다. 대도(大都·오늘날의 베이징) 사람으로서 강소성과 절강성 일대에서 관리 생활을 하다가 노년에는 항주의 시골에 은거하였다. 청년 시절 공명을 얻지 못하자 원정(元貞) 서회(書會)에 참가하여 민간 예술인들과 함께 극본을 창작하였다. ‘서회’란 송대와 원대에 걸쳐 설화인과 희곡 작가 및 예술인들의 조직을 가리킨다. 항주와 북경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많은 서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서회에 참가한 작가들을 ‘재인(才人)’이라고 불렀다. 마치원의 글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로부터 ‘희곡계의 장원(曲狀元)’이란 소리를 들었다. 노년에는 도교를 신봉하여 신선 도사극이 적지 않으며 소극적인 사상을 담았다.
그러나 역사 속의 왕소군은 문학작품에 그려진 내용과는 사뭇 달리 흉노에 정착하여 50여년을 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는 호한야 선우와의 사이에서 아들 한 명을 낳았고 그 아들은 후에 우일축왕(右日逐王)에 봉해졌다. 왕소군은 호한야 선우가 사망하자 당시 흉노의 관습대로 호한야 선우의 맏아들 조도막고(雕陶莫皐)의 처가 되어 딸 둘을 낳았다. 한족은 부친의 처첩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을 꺼려했고, 왕소군이 이 같은 처지를 겪어야 했던 걸 비극으로 생각했다. 왕소군이 생을 마감하자 지금의 내몽골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 대흑하(大黑河) 남쪽 교외에 묘를 만들고 ‘청총(靑塚)’이라 이름하였다. 가을에 풀들이 색을 잃을 때에도 왕소군의 묘만이 푸르러 그렇게 불렀다고도 하고, 풀이 없는 돌무덤인데도 불구하고 멀리서 바라보면 유독 왕소군의 묘는 푸른 기운이 돈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일부 역사학자는 지금의 청총은 단지 의총(疑塚)일 뿐 실제의 무덤은 확인할 길이 없다고 주장한다.
왕소군 소재로 한 詩만 700여수
역사적으로 왕소군을 바라보는 시각도 매우 다양하다. 원대 시인 조개(趙介)는 50여년 동안 한족과 흉노족의 갈등을 막은 공로를 높이 사서 한의 명장 곽거병(藿去病)의 공로에 못지않다고 평가하였다. 낯선 북방의 초원에 볼모로 잡혀가 고생한 왕소군을 동정하는 다수의 견해에 대해 현대 중국학자 바이양(柏楊)은 전혀 새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즉 왕소군이 만일 후궁에 남아있었다면 요행으로 원제의 부름을 받았다 하더라도 일개 궁녀로서 후궁을 벗어나지 못하고 늙어 죽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왕소군이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그의 사랑을 받았고, 그녀의 미모와 한에서 시집 왔다는 특별함이 그녀를 흉노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게 해주었다는 주장이다.
왕소군 이야기가 후세에 미친 영향은 심대하다. 왕소군의 이야기를 다룬 시는 700여수에 달하고 관련 소설은 40여종에 달한다. 500여명이 넘는 작가들이 왕소군을 소재로 작품을 창작하였다. 고대에는 이백과 두보를 비롯하여 백거이, 이상은, 채옹, 왕안석, 야율초재(耶律楚材) 등이 있고, 근현대에는 곽말약, 조우, 전한, 전백찬(?伯贊), 노사 등이 있다. ‘한궁의 가을’ 이외의 대표작품으로는 명대 전기(傳奇·희곡 장르의 명칭) ‘화융기(和戎記)’, 명대 잡극 ‘소군출새’, 청대 장회소설 ‘우봉기연(又鳳奇緣)’ 등이 있다.
1967년에는 홍콩에서 이한상(李翰祥) 감독이 ‘왕소군’이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2006년과 2007년에는 각각 49편과 30편으로 이루어진 TV연속극을 제작하기도 했다. 특히 바이올린 협주곡 ‘왕소군’도 만들어졌다. 이 곡은 앞서 ‘양산백과 축영대’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던 천강(陳鋼)이 일본의 연주가 니시자키 다카코(西崎崇子)를 위해 특별히 작곡하여 1986년에 상하이(上海)에서 초연을 가졌다. 천강은 이 곡을 ‘양산백과 축영대’의 자매편으로 간주하고 서정성과 희극성을 부각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삿갓의 팔도기행_자유로~임진강 (0) | 2010.12.11 |
---|---|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34 (0) | 2010.12.11 |
한국의 명품소나무 (0) | 2010.12.08 |
윤제학_상왕산 개심사 (0) | 2010.12.07 |
한국화로 둘러보는 중국 명산 (0) | 2010.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