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화로 둘러보는 중국 명산] 1 황산
황산을 보았으니, 이제 다시 무슨 산을 볼 것인가 수많은 기암과 황산송이 어울려 빚은 일대선경
황산 듣기만 하여도 얼마나 가슴 설레는 산인가. 황산의 아름다움은 화가들로 하여금 붓을 버리게 하였고, 많은 시인들의 글구를 막히게 하여 인간선경(人間仙境)이라 불렀다. 명나라 때 지리학자이며 여행가인 서하객(徐霞客)은 중국의 산들을 두루 돌아보고 황산에 들러서는 이렇게 말했다.
五岳歸來不看山(오악귀래불간산)
黃山歸來不看岳(황산귀래불간악)
오악을 보고 나니 다른 산은 눈에 차지 않고,
황산을 보고 나니 오악은 눈에 차지 않는구나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이라는 2개의 커다란 공식명칭을 한꺼번에 거머쥔 산. 거기에다 세계지질공원으로도 등록되어 있다. 나는 그 아름답고 귀한 황산을 감히 화폭에 담아보려고 이번에 황산을 찾았다.
황산은 중국 안휘성(安徽省) 남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주봉인 연화봉(1,864m)을 비롯해 72개의 기암괴봉들이 신비함을 자랑한다. 중국 10대 명승지 가운데 유일한 산악명승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산은 황산이요, 물은 구채구’라고들 말한다.
황산은 연평균기온이 7~8℃에 256일 동안 안개가 끼어 있으며, 183일동안 비가 내린다고 하니 좋은 날씨가 매우 드문 셈이다. 그중에도 황산을 오르기에 가장 좋은 달은 5~6월, 이 시기에 비가 비교적 적게 내린다고 한다.
나는 그간 백두대간 종주와 낙동정맥, 그리고 한남금북정맥 종주로 우리 산하를 재발견하는 시간을 가진 바 있다. 이제 대륙의 명산 황산을 비롯하여 도교 5악(泰山, 華山, 嵩山, 衡山, 恒山)과 불교 4대 명산(峨嵋山, 九華山, 普陀山, 五臺山)을 그림산행으로 유람하며 폭을 넓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올해는 북경 올림픽이 열리는 해다. 때문에 중국 대륙의 명산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2008년을 맞아 곽원주 화백의 중국 명산화를 연재한다.
중국 오악을 비롯한 중국의 명산들이 이미 백두대간 그림산행을 통해 선보였던 곽 화백 특유의 힘차고 강렬한 터치로 재탄생하여 독자들께 다가갈 것이다.
이 연재는 중국 전문 여행사인 자이언트트레킹 협찬으로 진행된다.<편집자 주>
세계자연유산이자 세계지질공원
황산을 오르기로 한 오늘, 날씨가 유난히 쾌청하다. 일행은 남쪽 풍경구의 2층 누각으로 된 웅장한 좌광각에 도착했다. ‘세계지질공원’이란 육중한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자연석이 길손을 맞는다. 자광각 뒤편으로는 천도봉이 암골미를 자랑하며 위용을 드러낸다.
옥병루로 오르는 케이블카 입구에는 내외국인 관광객이 물결을 이루고 있다. 계단에 줄을 선 사람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황산의 그 명성에 걸 맞는 광경이다.
우리가 케이블카를 타려면 앞으로 3시간은 더 기다려야 된다고 한다. 중국 그림산행을 후원하는 자이언트트레킹의 이구 사장은 우리가 여기를 관광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므로 운곡사 방향으로 계획을 바꾸자고 한다.
이 대장 판단이 옳았다. 운곡사 케이블카 정류장은 너무 한가하고 조용했다. 입구에는 ‘云谷 新索道(운곡 신삭도)’라고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개통한 지 2개월 되었다고 한다. 운곡사 방향을 동해, 혹은 동해대협곡이라 한다. 곧바로 케이블카에 탑승하여 신백아역으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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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운정과 서해대협곡(45×5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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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자연유산이자 세계지질공원
황산을 오르기로 한 오늘, 날씨가 유난히 쾌청하다. 일행은 남쪽 풍경구의 2층 누각으로 된 웅장한 좌광각에 도착했다. ‘세계지질공원’이란 육중한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자연석이 길손을 맞는다. 자광각 뒤편으로는 천도봉이 암골미를 자랑하며 위용을 드러낸다.
옥병루로 오르는 케이블카 입구에는 내외국인 관광객이 물결을 이루고 있다. 계단에 줄을 선 사람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황산의 그 명성에 걸 맞는 광경이다.
우리가 케이블카를 타려면 앞으로 3시간은 더 기다려야 된다고 한다. 중국 그림산행을 후원하는 자이언트트레킹의 이구 사장은 우리가 여기를 관광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므로 운곡사 방향으로 계획을 바꾸자고 한다.
이 대장 판단이 옳았다. 운곡사 케이블카 정류장은 너무 한가하고 조용했다. 입구에는 ‘云谷 新索道(운곡 신삭도)’라고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개통한 지 2개월 되었다고 한다. 운곡사 방향을 동해, 혹은 동해대협곡이라 한다. 곧바로 케이블카에 탑승하여 신백아역으로 오른다.
- 황산에는 5개의 바다가 있다. 동, 서, 남(전해), 북의 바다와 중앙에 천해가 있다. 황산의 바다는 운해(雲海)를 말하는데, 이태백이 어느 날 황산에 올라 ‘황산은 산이 아니고 바다라네’라고 한 이후 황산에 바다가 생겼다고 한다. 삭도에서 내려 조금 오르니 황산의 4절(奇岩, 奇松, 雲海, 溫泉)이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협곡을 바라볼 수 있는 조망처에서 기암절경에 잠시 취해본다.
다시 산허리를 돌아 석순봉을 지나 시신봉에 오르니 ‘登黃山 天下無山(등황산 천하무산)’이라 한 말이 실감 난다. 황산이 좋다 해도 믿음이 가지 않다가 시신봉에 오르면서부터 비로소 믿음이 생긴다고 하여 시신봉(始信峰)이라고 한다.
시신봉에 오르니 중국 여류작가 이희촬(李曦撮ㆍ56)씨와 길림(吉林)예술학원 이금숙(李淑琴) 노사(老師)가 황산의 기암기송을 스케치하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함께 그림을 그리며 담소라도 나누고 싶지만 여정이 바빠 한국에서 온 산수화가이며 황산을 취재차 왔다고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작품 팸플릿을 받은 뒤 헤어졌다.
종종 걸음으로 시신봉을 내려서니 호랑이를 닮았다는 흑호송(黑虎松)이 나더러 잠시 쉬어가라 한다. 흑호송에서 숨을 돌리고 물 한 모금 마신 뒤 부부송에 다다르니 행복한 미소를 가득 짓고 황산을 배경으로 결혼사진 촬영을 하고 있는 신랑 신부가 너무 아름답다. 잠시 옛 꿈에 빠져본다.
몽상에서 께어나 북해로 접어들었다. 진경산수화 한 폭을 보는 듯한 필가봉 위에 ‘몽필생화’가 일필휘지 한 획을 긋고 있다.
일행은 북해빈관에 여장을 풀고 점심식사를 마친 후 본격적인 서해대협곡을 탐방하기 위하여 서해로 이동했다. 북해빈관을 나서며 전면에 보이는 곳이 사자봉과 청량대. 내일 아침 청량대에 올라 일출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서해빈관을 지나 분죽과 낙엽활엽수가 우거진 잡목지대 돌계단을 지나 조금 내려서니 단결송이 나온다. 소나무 가지가 56개이며 중국의 56개의 소수민족의 단결을 상징하기 위해 그런 이름을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소나무와 바위에 이름을 지어준 것만도 200개가 넘는다. -
- ▲ 황산의 동해 운해(55×45cm).
이정표에는 한문과 영어와 한글로 표기되어 있어 길을 찾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사거리 이정표에는 ‘서해대협곡(북쪽 입구) 0.6km’로 표기돼 있다. 서해대협곡 방향으로 조금 진행하니 천혜의 조망처인 배운정에 이른다. 대부분 일반관광객은 이곳에서 황산의 절경에 감탄하고 되돌아간다.
21년이나 걸린 서해 계단길 조성
엄청난 침봉들간의 급경사 계곡으로 이루어진 서해대협곡은 등소평이 이곳 배운정에 오른 뒤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그가 인민들에게도 이런 아름다운 절경을 보여주라고 지시하여 1983년부터 서해대협곡을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후 21년이란 긴 공사기간을 마치고 2003년부터 일반에게 개방했다.
황산의 진경을 보려면 서해대협곡을 필히 보아야 한다기에 일행은 서해대협곡으로 향했다. 북 입구에서 남 입구까지는 6.5km라고 한다. 서해대협곡은 경사가 워낙 심하고 위험한 곳이 많아 12월 초순부터 3월 말까지는 출입을 통제한다. 통제 개시 이틀 전에 이곳을 찾았으니, 우리는 운이 좋았다. 하마터면 서해대협곡을 못 볼 뻔했다.
겨울철이라 서해대협곡 출입문을 빨리 닫을지 모르니 서두르자고 현지 관광회사 최홍광 부장(가이드)이 독촉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서해대협곡에서 머무는 시간을 1시간30분밖에 안 주겠다는 것이다. 시간을 보니 오후 2시15분이다. 최 부장이 일단은 통과하고 보자 한다. 나올 때 문이 잠겨 있으면 자신이 뜯어내기라도 할 것이니 여유를 갖고 스케치하라고 안심시킨다.
동굴 속으로 난 북쪽 문인 철문을 통과하고 나니 말문이 막히는 절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무아지경으로 인도하는 선경에 드는 듯하니, 우리는 곧 시선(詩仙)이자 화선(畵仙)이 된 듯한 감흥에 빠졌다.
직벽 돌계단은 고층아파트 외벽 비상계단에 야트막한 쇠파이프 난간만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이 천길 낭떠러지 단애에 어떻게 이런 돌계단을 놓을 수 있었다는 말인가. 계단을 내려서는데 오금이 저린다.
황산에는 여러 가지 말이 많이 있는데, 지금 필요한 말은 ‘걸을 때는 옆을 보지 말고, 절경을 볼 때는 걷지 말라’는 말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얼마나 절경이 변화무쌍하면 ‘다섯 발자국마다 앞을 보라’는 말이 있겠는있겠는가. 서해 대협곡에는 직벽 높이가 300m가 넘는 위용을 자랑하는 곳도 있다.
함께한 오재룡(59)씨는 인공폐를 이식하고도 백두대간을 한 산꾼이지만, 지금은 호흡에 무리가 오는지 숨을 가쁘게 몰아쉰다. 일행은 양지바른 조망 좋은 곳에서 절경에 취하며 가져온 간식을 나누어 먹었다.
나는 비경을 화폭에 담느라 바빴다. 사진 찍기를 좋아 하는 김병중(54)씨는 간식 먹는 것도 잊고 연신 셔터를 눌러댄다. 몇 곳을 더 스케치하고 우리는 황산의 낙조를 바라보기 위해 비래석(飛來石)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황산의 돌계단은 간격과 높이가 적당하게 배열이 잘 되어 있어 걷는 데 큰 무리가 없다. 비래석으로 오르는 계단은 잡목숲 사이로 놓여 있어 위험한 낭떠러지도 없다. 계단을 올라 정자가 있는 곳에서 단애에 선 노송을 바라보며 황산의 정기를 받는다.
‘황산에 바위 없이 자라는 소나무 없고, 소나무가 없으면 기이함도 없다(無石不松 無松不奇)’고 한다. 황산 소나무는 화강암 바위틈 사이 열악한 조건에서 자라기 때문에 키가 작아도 몇 백 년은 되었다고 한다. 정자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조금 나아가니 황산에서는 처음으로 아름드리 구상나무와 마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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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산의 기암과 운해(55×45cm).
계단으로 시작해 계단으로 끝나
비래석에 올라 사해(四海)를 본다. 낙조를 보기에 너무 좋은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인파가 너무 붐비고 장소가 협소하여 낙조를 바라볼 수 있는 다른 조망 좋은 곳을 찾기로 했다. 우리는 비래석 조금 못 미처, 정자에서 오른편의 커다란 너럭바위를 선택했다. 조금 전 비래석에서 내려다본 수십 미터 절벽 위에 있는 크나큰 너럭바위다.
우리는 너럭바위에 자리를 펴고 낙조를 감상하기 위해 나란히 앉았다. 황혼에 물든 비래석과 발 아래 깔린 중첩한 산릉 너머로 떨어지는 낙조는 우리를 몽환의 세계로 인도한다.
점점 낙조가 짙게 물들기 시작한다. 최 부장이 휴게소까지 내려가서 가져온 금황산(金黃山) 고량주를 마시며 짙어가는 황산의 노을을 바라본다. 술은 내가 마시는데 비래석이 홍조를 띠고, 머리 위에 흑송은 노을 속에서 춤을 추니 취하는 것은 바로 황산 너로구나.
다음날 아침 모닝콜이 5시40분에 울려 곧바로 샤워하고 일출맞이를 위해 호텔을 나선다. 하늘을 보니 아직 별이 총총하다. 일출예정시간은 6시47분경이라고 한다. 사자봉 청량대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작은 메모지에 스케치를 한다. 여명이 밝아오고 이윽고 하늘의 구름이 요동치더니 섬광이 발하며 새아씨의 얼굴 같은 붉은 해가 솟는다. 어디에선가 함성이 터진다. 대부분의 중국 사람들은 합장을 하고 연신 허리를 굽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반절을 한다.
일출맞이를 끝내고 아침식사를 마친 후 8시에 짐을 챙겨 북해빈관을 출발 했다. 날씨는 쾌청하다. 최 부장은 가이드생활 10년만에 일몰과 일출을 동시에 본 손님들은 우리들뿐일 거라고 한다.
우리는 광명정으로 향했다. 황산에 와서 광명정에 오르지 않으면 황산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한다. 광명정으로 오르는 계단은 비교적 완만하다. 관리원이 간밤에 계단에 떨어진 소나무 낙엽을 쓸고 있다. 그래서 계단길이 깨끗하다. 쓰레기통도 곳곳에 있지만 모두 깨끗하게 비어 있다. 이곳은 또한 흡연구역과 금연구역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어 흡연 애호가들의 불편을 덜어준다.
황산은 계단으로 시작해서 계단으로 끝나므로, 산행이 끝날 때까지 흙을 한 번도 밟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인공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최대한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했다. 곳곳에 소화전도 설치되어 만약의 산불에도 철저히 대비해 놓았다.
황산의 심장이라 하는 광명정(1,860m). 황산에서 두번째로 높은 봉으로서 이 광명정에 올라야 황산 전체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건너다보이는 연화봉(1,864m)과 천도봉(1,810m)이 웅장하고, 멀리 아홉 마리 용이 하늘로 오르는 형상인 구룡봉과 사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초등학교 때 운동장만큼 넓은 통바위 오어동(鰲魚洞), 구렁이와 커다란 돌거북이 계단을 떠메고 있는 형상인 백보운제(百步云梯) 지나 옥병루에 도착하니 황산의 상징이라고 하는 1,200년 되었다는 영객송이 손을 내밀고 지친 길손을 반긴다. 옥병루 뒤로 병풍을 두른 듯한 옥병봉 큰 바위에는 일필휘지 명구들이 많이 적혀 있다.
송객송에 ‘황산을 떠난다’고 마지막 인사하고 옥병루에서 케이블카로 자광각으로 내려하며 황산을 다시 한번 뒤돌아보니 이백의 시 한 수가 떠오른다.‘ 一別武功去 何時更復還(이제 무공 산을 떠나가 버리면, 언제 이곳으로 또 다시 오려노)’. 황산 시내로 들어가는 초입, 한국인이 경영하는 서울식당에서 토종돼지인 녹차 돼지 삼겹살에 된장찌개와 소주를 곁들여 쌓인 피로를 푸는 것으로 첫번째 중국 명산 그림산행을 마무리했다.
- [한국화로 둘러보는 중국 명산] 2 태산
천하명산 제일처이자 오악독존을 오르다
태산(泰山)을 누가 5악지수(五嶽之首), 천하명산제일(天下名山第一)이라 하였는가. 천외촌에서 바라본 태산은 숲도 없는 그저 평범한 석산일 뿐이다. 저런 산을 보려고 이곳까지 왔나 하는 허탈감마저 든다.
- 그러나 막상 천가를 지나 옥항정에 서면 생각이 완전히 바뀐다. 그때서야 天下名山 第一處(천하명산 제일처), 五嶽獨尊(5악독존)이라는 말을 실감케 된다. 태산의 주봉인 옥황봉은 해발 1,542m에 불과하지만 시야에 어느 하나 거칠 것 없는 조망처에다 팔방에서 조아리며 기어오르는 듯한 중첩한 산릉들은 역시 이 산이 큰 산(泰山)임을 느끼게 한다. 천군만마를 거느리고 무소불위 권력을 가진 황제의 권위를 갖춘 산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태산이 얼마나 높고 크길래 공자도 登泰山而小天下(태산에 올라서니 천하가 작아보인다)라고 하였겠는가.
태산은 공자의 고향인 취푸(曲阜)에서 버스로 1시간 거리에 우뚝 솟아 있다. 그래서 공자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뿐만 아니라 태산은 진나라 시황제 이후 72황제가 올라 봉선의식을 행한 산이다. 웅장하고 경이로운 곳으로서 곳곳에는 명승고적들이 즐비하게 흩어져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황산이 미(美)의 산이었다면 태산은 기(氣)의 산이고 예(禮)의 산이다. 그런 태산을 논어 한 권을 들고 공자와 함께 두번째 그림산행을 위해 등행해 본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유쾌한 마음으로 택시를 타고 이른 아침 우선 대묘(岱廟)부터 돌아본 뒤 태산으로 향했다. 9시40분 태산 입구 천외촌에 도착, 거칠게 운전하는 미니버스로 몇 굽이를 돌고 돌아 중천문(847m)에 도착했다. 삭도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는 눈과 얼음이 깔려 종종걸음으로 걷는다. 중천문 삭도정류장에서 45위엔을 내고 달을 바라본다는 월관봉(月觀峰)으로 오른다.
옥황정까지 무려 7천 개가 넘는 돌계단
천교를 건너 남천문에 이르니 18반을 힘들게 오르다 지친 사람들이 계단 여기저기 아무렇게 주저앉아 땀을 닦는 것마저 귀찮아하는 표정들을 짓고 있다. 일천문에서 옥황정까지는 7천 개가 넘는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중 대송정(對松亭)에서 0.8km에 걸쳐 남천문(南天門)에 이르는 돌계단을 18반이라고 한다. 경사 50도가 넘는 1,633개의 계단이 등객의 마지막 혼을 빼는 곳이다. 이들은 7천 개가 넘는 돌계단을 걸어올라 옥황정에서 기도를 드리면 10년은 더 산다고 하여 자기 키만큼 큰 향촉을 메고 저렇게 힘든 돌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남천문 바로 옆에 망부산(望府山)과 옥황정(玉皇頂) 갈림길 표시가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옥황정으로 오른다. 남천문은 비룡암(飛龍岩)과 상봉령(翔鳳?令) 암벽 사이 해발 1,460m에 자리 잡고 있다. 원대에 세워진 것으로 삼천문(三天門)이라고도 부른다. 양사언은 이곳 남천문에 올라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하는 시를 지었다고 하나 근거는 없다. 양사언은 고성과 간성의 부사로 지내며 산을 좋아하여 설악산과 금강산을 자주 찾았다는 기록은 있다.
남천문을 지나 공터에 서니 강하고 차가운 북서풍이 얼굴을 훔친다. 천가 입구 상가지역에는 태산의 명물인 전병(煎餠)을 여기저기서 통을 돌려가며 굽고 있다. 태산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전병에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몇 계단을 올라 석문을 통과하니 이곳이 천가(天街)라고 하는 ‘하늘거리’다. 천가는 남천문에서 벽하사를 거처 옥황정까지 0.8km를 말한다. 천가에서 내려다보는 탁 트인 조망으로 태산을 왜 큰 산이라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성인(聖人) 공자가 걷고, 시선(詩仙) 이백과 시성(詩聖) 두보가 걸었을 하늘길을 여유를 갖고 조망을 즐기며 걷다가 4각 석조건물인 백운정에서 또한 사방의 절경을 조망해본다. 오른쪽으로는 멀리 망부산(望府山) 정상에 작은 정자가 중국산수화 한 폭을 보는 듯하며, 정면으로는 하늘 위에 또 하늘 산이 작게 떠 있다. 쭉 뻗은 하늘길에는 녹색 인민군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자기 팔뚝보다 큰 향을 아무렇게나 메고 복을 빌기 위해 옥황정 계단을 겹겹이 오르는 모습은 태산에서나 볼 수 있는 중국 특유의 진풍경이다.
건너다보이는 산릉에 우뚝 솟은 홍덕루(弘德樓)에서는 성모여의종(聖母如意鐘)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범종소리는 나에게 세속의 무거운 짐을 이곳에 벗어놓으라 한다. 나는 공묘로 오르는 석문 앞에 선다. 석문에는 ‘望吳聖蹟(오나라 아름다운 유적을 바라보다)’라고 쓰여 있다.
잠시 공자를 생각한다. 논어에서 공자는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고, 마흔에는 모든 일에 혹함이 없게 되었으며, 쉰에는 천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고, 예순에는 사물의 이치를 들어 저절로 알게 되었고, 일흔에는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행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게 되었느니라’ 했다. 지금도 후학들은 삶의 근본의 이치를 여기에 두고 있다. 그러나 한낮 범부에 지나지 않는 나는 어찌 성인의 말씀에 범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가슴속을 파고드는 범종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다.
범종소리를 가슴에 안고 조금 오르니 벽하사다. 벽하사는 옥황상제의 딸인 벽하원군 여신을 모신 곳으로서, 송대인 1009년에 세워져 1770년에 개축된, 태산에서 가장 큰 고대 건축물이다.
이곳에서 조금 오르면 당나라 현종이 친히 썼다는 기태산명(紀泰山銘)비 가 있다 이 비갈(碑碣)은 한(漢) 이래 가장 웅장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당시의 화려한 봉선의식을 심안으로 스케치하여 본다.
- ▲ 자광각에서 본 암봉.
마치 노천 서예전시관 보듯 사방에 명필 음각
몇 발자국 더 오르니 벽애(壁崖)에 새겨진 많은 문구들 중에서 ‘오악독존(五嶽獨尊)’이라는 글씨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태산을 칭송하는 크고 작은 수많은 문구들은 마치 노천 서예전시관을 보는 듯하다. 그러니 나는 지금 2,0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공자와 함께 이곳에 서 있는 것이다.
옥황정에서 동쪽으로 70m에 위치한 일관봉(日觀峰)에서 떠오른 일출을 보면 새벽녘 운해를 뚫고 오르는 태양이 그 빛이 하도 찬란하여 어래광(御來光)이라 한다. 공자 등봉처인 첨노대(瞻魯臺)에는 웅치천동(雄峙天東)비문과 공자소천하처(孔子小天下處)라고 새긴, 키보다 훨씬 큰 비가 서 있다. 공자는 이곳에서 함께한 제자들에게 ‘동방에 작은 나라가 있는데 그곳은 인자(仁者)가 살 만한 곳이다’라고 했다.
그 때에 벌써 지금의 한국을 바라보며 공자가 그렇게 이야기 한 까닭은 무슨 뜻에서일까? 중국인들은 동쪽을 해가 떠오르는 곳이라 하여 신성시 여기며 마음으로 받든다. 그런 동쪽에 작은 나라가 있고, 인자가 살 만한 곳이라고 한 것은 우연이었을까?
‘勅修玉皇頂(칙수옥황정)’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옥황정 문을 들어선다, 옥황묘(廟)는 태산에서 가장 높은 옥황대제를 모신 곳으로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경내에는 옥황전, 영욱전, 명하정 등이 있다.
옥황정에 들어서니 향 연기와 냄새가 역겨울 정도다. 천상신부(天上神府)라는 현판이 붙은 옥황전 본전 안에 들어가 절을 하려면 100위엔을 내야만 한다. 이구씨는 옥황전 안에 들어가 또 절을 한다. 가는 곳마다 입장료에 향촉대와 절값을 별도로 내야 한다.
- “절을 하고 돈을 내지 않으면 기도의 효과가 없다”고 하니…. 중앙에 있는 탑에는 ‘태산극정(泰山極頂) 1,545米(m)’로 표기돼 있다. 탑 경계 4각 쇠사슬에는 겹겹으로 사랑을 맹세한 자물쇠가 매달려 있다. 탑 앞에 놓여 있는 커다란 향촉대에 머리 긴 어느 아가씨는 자기 키만큼 큰 향을 세우고는 연신 손을 합장하며 절을 한다. 무슨 소원을 저렇게 열심히 비는 걸까?
북적대는 인파와 여러 나라의 요란한 말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어찌 이곳을 성스러운 곳이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옥황정 뒤편에 위치한 장인봉(丈人峰)을 찾았다. 2년 전 천주봉쪽으로 오를 때 10m가 넘어 보이던 천하제일산(天下第一山)이라는 글씨를 보고도 강풍과 눈보라 속에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카메라를 꺼낼 수 없어서 그냥 지나쳤기 때문이다. 그 명필을 다시 보고 싶어 찾았다.
오늘도 바람이 약간은 쌀쌀하게 느껴지지만 그 날에 비하면 무척 온화한 편이다. 2년 전 눈보라 속 고군분투를 잠시 회상하며 가슴 후련한 명필을 감상하고 철탑이 세워진 태산제일처 삼각점을 지나 공자묘로 내려선다.
공묘는 조금 한가로웠다. 그 앞에서 논어 첫 페이지를 펼친다.‘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랴!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 하랴!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 하여도 원망하지 않는다면 어찌 군자가 아니랴!’
태산 전문가 안 교수에게서 태산석 벼루 받아
학창시절 그렇게도 졸리고 따분하던 이 문구가 이제야 그 깊은 뜻이 머릿속에 바람을 일으키니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일까? 하늘을 쳐다보니 유난히 푸른 하늘에 흰 구름 한 가닥 순풍에 일엽편주인 듯 가는 길이 바쁘다.
되돌아 남천문에 도착하니 딸아이가 배가 고파 걸을 수 없다고 계단에 주저앉는다. 가게에 들려 딸아이는 지오차이핑(부추호떡)을, 나와 이 대장은 맥주 한 잔씩을 단숨에 마신다. 이 맛을 누가 알리요.
우리는 남천문에서 걸어서 중천문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남천문에서 18반 계단길을 내려다보니 계단이 어찌나 가파른지 삼천갑자 동방삭이도 이런 곳에서는 구르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경사가 심하면 18군데에 쉴만한 반(盤)을 만들어 놓았다 하여 18반이라 하였겠는가.
조심스럽게 18반을 내려서서 조양동을 지나는데 힘들게 무거운 짐을 메고 오르는 사람의 목덜미에는 주먹만큼 굳은살이 박였다. 웬지 가슴이 찡해옴을 느낀다.
대송정에서 조금 내려서니 오대부송이다. 진시황이 봉선을 위해 산에 오르던 중 폭우를 만나 이 소나무 아래서 비를 피했는데, 그때 오대부라는 벼슬을 내렸다는 소나무다. 역광을 받아 묵화 한 폭을 보는 듯하다. 본래의 오대부송은 폭우에 떠내려가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청대인 1730년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하산을 마친 뒤 우리는 태산에 관한 자료와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대묘(垈廟) 북문 옆에 산다는 안정산(安廷山ㆍ70) 노(老)교수를 찾아갔다. 노 교수는 태안서화협회 주석으로서 태산에 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으며, 태산에 관한 많은 논문과 서적도 출판했다고 한다.
우리들은 안 교수댁으로 초대받아서 차 한 잔을 대접 받았다. 그는 태산 관련 책자와 도록을 챙겨주며 태산에 관한 이야기를 그칠 줄 모른다. 안 교수는 태산은 사화산으로서 1년에 2cm씩 솟아오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말고 그는 갑자기 서재로 올라가더니 뿌연 먼지가 낀 벼루를 들고 나와 나에게 선물했다. 이것은 태산에서 출토된 5억 년이 넘은 화석으로 만든 벼루라며 마음의 정표로 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오래 전 태산연구원으로 있을 적에 싸게 구입한 것이며, 지금은 국가에서 법으로 엄격히 규제하여 태산에서 이 돌을 채취할 수 없다고 한다.
나도 미리 준비하여간 설악산 작품 한 점을 선물했다. 아직 한국에 가보지 못하였는데 한국 산을 볼 수 있어서 너무 반갑다고 하며, 한국에도 이런 훌륭한 산들이 많이 있느냐고 하며 미소를 띤다.
안 교수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숭산 소림사를 가기 위해 정주로 가는 열차를 타려고 역전으로 향했다. 오후 햇살을 받으며 작별이 아쉬워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서 있는 노교수의 하얀 머리카락에 겨울바람이 더욱 차게 느껴진다. 5억 년의 세월의 정을 가슴으로 슬며시 끌어안았다.
[한국화로 둘러보는 중국 명산] 3 숭산
연천대협곡에서 엄청난 氣의 세례를 받다
선종 창시자 달마가 창건 수행한 소림사 품은 중악
하남성 황하 연변의 숭산(嵩山)은 중국 사람들이 상고시대 때부터 섬겨오는 천신(天神)의 산이자 황하 하신(河神)의 산이다. 숭산을 왜 동서남북 오악 중 중심이 되는 중악이며, 흔히 역사가들은 중화(中華)사상, 천명(天命)사상의 발원지라고 말하는가. 또한 중국 3대 사찰 중 하나로 선종(禪宗)의 발원지며 소림무술의 본산인 소림사가 왜 이곳 숭산에 있는 것일까. 숭산에 가보면 그 깊은 뜻을 곧 알 수 있다.
황산은 아름다움이 빼어난 산이라면, 태산은 문화역사의 산이고, 숭산은 온몸으로 산의 기를 느낄 수 있는 신비스러운 설화의 산이다. 또한 숭산은 25억 년의 지각변화 과정을 한눈으로 체험할 수 있는 연천대협곡과, 달마가 면벽 9년간 인고수행(忍苦修行)을 했다는 달마동, 그리고 팔을 자르고 달마의 제자가 된 혜가가 머물던 1,500년 된 이조암이 있다. 한 마디로 숭산 전체가 자연사박물관이자 불교역사박물관이다.
하남성 등봉시에 위치한 숭산은 72개 봉우리가 이어져 있어서 ‘숭산산맥’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태실산과 소실산으로 구분하며 소림사와 달마동, 연천대협곡과 숭산 최고봉인 연천봉(1,512m) 같은 명승지가 모두 소실산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이번 3차 중국 그림산행은 숭산 소실산을 찾았다.
- 소림사탑구(少林寺塔溝) 국제무술학교 기숙사와 함께 있는 달마 홀(Dharma Hall)에 여장을 풀고, 243개 탑이 숲을 이루고 있다는 탑림(塔林)으로 향했다. 탑신에 수북히 쌓인 하얀 눈은 천 년의 역사를 침묵으로 말하며 이국에서 찾아온 원객을 맞는다.
탑림은 소림사 역대 고승들의 부도군이다. 당나라 고승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약 천 년간 소림사에서 수행, 포교한 이름 높은 스님들의 부도가 230여 개나 서 있다. 탑 모양은 시대마다 달라 육각, 사각, 원통형을 이루고 있다. 공적에 따라 1층에서 7층까지 높이도 다르다. 명나라 말 홍건적의 난 때 명성을 떨친 소림사 주방장 긴나라가 거꾸로 매달려 요리하며 무술을 연마했다는 소림사를 둘러본 후 오유봉에 있는 달마동으로 향했다.
나는 듯 계단 오르는 소림사 스님
소림사 뒤편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초조암(初祖庵)을 거쳐 달마동으로 오른다. 길바닥은 누더기 옷처럼 어제 내린 눈이 군데군데 얼어 있다. 오르는 사람이 없어서 한적한 시골길 같다.
- 초조암을 지나서 물건을 파는 민가 한 채를 더 지나니 가파른 돌계단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다. 수직에 가까운 계단을 힘들게 오르는데 옆을 스치는 작은 체구의 스님 한 분은 소림무술이 뛰어난 듯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오른다. 지그재그 급경사 돌계단 양옆으로 소나무는 한 그루도 보이지 않고 키가 낮은 잡목뿐이다.
달마는 세속을 등지고 이 길을 따라 달마동을 찾아 오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당나라 때 도선이 편찬한 속고승전(續高僧傳)에 의하면 달마대사의 나이 140여 세 때다. 훤한 대머리와 부리부리 한 눈, 매부리코와 늘어진 귀, 텁수룩한 구레나룻과 굳게 다문 입술을 하고 구부러진 나무지팡이 하나를 짚고 이곳을 올랐을 달마 모습을 마음으로 그려본다.
드디어 달마가 면벽 9년을 했다는 달마동에 올랐다. 발아래로는 삶의 흔적인 듯 걸어온 오솔길 끝자락에 고궁 같은 소림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개울 건너에는 옛날에 절터였을 법한 밭뙈기 뒤로 우뚝 솟은 연천봉과 희미한 산릉들이 수묵화 한 폭을 보는 듯하다.
달마동 입구에는 묵현처(默玄處)라 새겨진 돌패방(牌坊)이 서 있다. 뜻은 침묵으로써 깨달음을 얻은 곳이라는데, 도가(道家)의 사상과는 어떻게 다르다는 것일까. 그래서 달마상을 유불도(儒佛道)가 융합한 상이라고 하는가. 굴문 기둥에 새겨진 ‘달마정좌 면벽구년(達摩靜座 面壁九年), 설법논도 완석점두(設法論道 頑石點頭)’ 글씨와 혜가의 ‘사문외시립 적설삼척(師門外侍立 積雪三尺)’ 문구가 말하듯, 어제 이곳에 내린 첫눈은 나에게 깨우침을 주려는 서설(瑞雪)이었다는 말인가. 스스로 나에게 한없는 질문을 던진다. 묵현처 석문 옆에는 초조 달마에서 6조 혜능까지의 소상이 새겨진 오석비(烏石碑)가 세워져 있다.
- 석문 계단 아래에는 조그만 마당이 있다. 이곳에서 면벽수행을 하며 틈틈이 굳어진 몸을 풀기 위한 운동으로 우주심령의 기(氣)와 호흡조절과 정신집중에 바탕을 둔 소림 무술을 창안했으며, 법경의 포교적 교화보다는 고행수도(苦行修道), 인욕정진(忍辱精進), 좌선각행(座禪覺行)을 본지로 삼고 수행하는 것을 중시하는 선종을 창시했을 것이다.
달마동을 뒤로 하고 오유봉 정상을 향해 오른다. 낭떠러지 절벽에 작은 계단길이 잡목 사이로 위험하게 나 있다. 힘들게 팔각정에 오르니 오후 3시20분. 일기가 좋지 않다. 태양은 구름에 가려 가끔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팔각정에서 건너다본 거구의 달마상은 동쪽을 바라보고 좌선하고 있다. 달마상 뒤 능선길은 우리의 정맥길처럼 잡목이 우거진 사이로 어슴프레하게 나 있다. 등산로는 연봉으로 이어져 있어 종주산행도 가능하다고 한다.
달마상 옆으로 다가가니 짓다만 허름한 집 한 동이 있고, 10m 기단을 쌓은 위에 5m 기단을 쌓고 대리석 조각으로 달마상을 웅장하게 만들었지만, 앞에 놓인 향촉대에는 향불도 없다. 겨울이라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아 관리하는 사람이 없나 보다. 달마상 4면 기단 모서리에 조각된 보살상들만 힘들게 받치고 있을 뿐이다.
- 비경 숨었다는 삼황채협곡 찾아나서
다음날 아침 8시에 호텔을 나서니 안개가 자욱하다. 호텔관리인은 오늘 같은 날씨에는 산행이 불가능하다고 극구 만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구 대장과 딸아이까지 모두 셋이서 이조암으로 오르는 삭도정류장에 도착했다.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이조암으로 오르는 삭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 ▲ 3륜 빵차.
- 비경 숨었다는 삼황채협곡 찾아나서
이조암 주위는 온통 설원의 세계다. 건너편 오유봉 산정의 달마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조암(二祖庵)은 선종 이조(二祖)인 혜가가 머물던 곳이라 한다. 혜가는 천 년 전 하늘에서 붉은 눈이 내리면 너를 제자로 삼겠다던 달마에게 자신의 팔 하나를 잘라 달마에게 바치고 내리는 하얀 눈을 붉은 피로 물들여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의지로 가능한 일일까. 혜가는 달마로부터 무엇을 확신하고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려 한 것일까. 구도 의지란 그토록 간절하고, 진리란 그처럼 처절하게 얻어지는 것일까. 그래서 혜가의 행동 하나하나가 사미승들에게는 큰 스승이라고 한다.
그런 혜가를 생각하며 우리는 이조암으로 들어선다. 이구 대장은 향촉을 사서 불상 앞에 세우고 절을 한다. 옆에 서 있던 스님이 나에게 물을 마시라고 하여 영문을 모르고 물을 받아 마셨다. 스님은 손을 내밀며 돈을 내라 한다.
이조암에는 본전 양쪽에 영험한 기운이 뿜어나오는 샘이 둘 있는데, 양쪽 물맛이 서로 다르다. 어느 날 이조암을 찾은 달마가 혜가에게 부족한 것이 있느냐고 묻자 물이라고 했다. 즉시 달마가 샘을 파주었는데 물에서 쓴맛 매운맛 신맛 단맛이 차례로 났다고 한다. 이는 사미승이 불가에 입문하여 부처님의 참뜻을 눈뜨게 되는 과정이라고 했다.
오유봉 위에서 이조암을 굽어보고 있는 달마상은 아침의 붉은 햇살을 받아 유난히 광채를 발하고 있다. 다시 이조암 위에 있는 작은 암봉으로 오른다. 눈길을 조심스럽게 조금 오르니 오른편으로 삼황채 이정표가 있다. 눈길이라 매우 미끄러워 진행하기 힘들 것 같다. 소실산 서편 자락에는 상고대가 피어 장관을 이룬다.
우리는 오후 10시30분에 이조암에서 내려와 15원에 흥정을 한 빵차(빵 모양으로 생겼다는 뜻인 듯)를 타고 10여 분 이동해 신비스런 비경이 숨어 있다는 삼황채 협곡을 찾아 오르기로 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터널 같은 설경을 통과하여 가파른 계단을 30분쯤 오르니 이조암과 연결되는 등산로 표지석이 나온다. 계곡을 따라 정비된 계단길을 따라 오르다보니 소림무술 수련장 같은 공터가 있다. 양옆으로는 고개를 쳐들고 허리를 뒤로 꺾어야 산정을 바라볼 수 있는 기암연봉이 이어진 협곡이다. 이곳을 붉은 운동복을 입은 무술학교 학생들이 비호처럼 뛰어 다닌다. 울창한 잡목이 하늘을 가려 여름산행에는 안성맞춤이겠다.
점점 눈은 발등을 덮고, 발 아래서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딸아이는 20분이면 된다더니 1시간이 넘었다며 힘든 표정을 짓고 쫑알대면서도 따라 오른다. 빵차 기사가 차에서 내려 20분이면 된다던 삭도정류장은 1시간40분이 넘어서야 도착했다.
삭도정류장에서 바라본 조망은 힘들게 오른 만큼 가슴 후련한 장관을 연출한다. 동편으로 건너다보이는 단애에 걸쳐 있는 암자는 고치고 뺄 것 하나 없이 탁본을 뜨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정말 그림 같은 진풍경이다. 삼황채 풍경구 표지판에는‘지질은 기묘하고 풍광은 수려하고 절은 숲처럼 빽빽이 늘어서 있고 고적은 대단히 풍부하고 예부터 지금까지 모든 여행객들의 명승지가 되었다. 삼황(三皇·복희 신농 수인)의 인류 시조가 이곳에 머물렀으며, 태실산은 용의 눈 같고 소실산은 봉황의 춤 같다’라고 쓰여 있다.
황산 서해대협곡보다 더한 절벽 계단길
천애벼랑에 매달린 돌계단을 조심스럽게 걸으며 신비의 협곡으로 접어든다. 점점 계단길은 가파른 경사에 앞도 옆도 쳐다볼 수 없는 험준한 산길로 실지렁이 같이 산허리를 감아 돈다. 황산 서해대협곡보다 더 위험하다는 생각에 오금이 저려온다. 공포와 가파른 계단에 힘이 들어 이 겨울에 땀이 비 오듯 흐른다.
가까스로 산허리에 걸쳐진 조망처에 도착했다. 모처럼 가슴을 펴고 사방을 바라본다. 화법(畵法)에서는 3원법이라 하여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고원법(高遠法), 심원법(深遠法), 평원법(平遠法)으로 구도를 잡는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어찌나 산정은 높고 계곡은 깊은지 화폭 하나에는 그 법칙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스케치를 마치고 산중턱을 돌아 사지를 모두 이용하여 험준한 소석문(小石門)을 통과하니 이 대장과 딸아이는 벌써 건너편 산자락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는데 청솔모만큼이나 작아 보인다.
나는 연천대협곡으로 내려서면서 산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연천봉 위로부터 안개구름이 쏟아져내리며 나를 마법의 세계로 끌고 간다. 순간 두려운 느낌이 엄습해온다. 말로 표현 할 수 없이 가슴을 조이는 엄청난 기(氣)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무속인 같았으면 산신의 영을 받았다고 했을 듯하다. 그곳에서 이구 대장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숭산의 정상부는 숲도 별로 없으며 지질은 대부분이 거후층석영암(巨厚層石英岩)으로 바위색은 온통 시멘트반죽을 끼얹어놓은 듯 옅은 회색을 띠고 표면은 거칠다. 낙석으로 절개된 부분은 맥반석 같은 짙은 홍색을 띄고 있다. 어쩜 영암 월출산처럼 산 전체가 맥반석인지도 모르겠다. 바위가 늙어서 표면이 흘러내려 느티나무 고목 표피처럼 주름이 졌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신비적 연천대협곡은 2억6천5백만 년 전에 발생하여 연산운동(燕山運動)으로 숭산지구가 형성되었으며…’라는 안내문이 그 배경을 말해주고 있다.
연천대협곡에 서니 인간이 너무 나약하고 작아 보인다. 급경사 계단을 오르니 어제 소림무술학교 입구에서 본 현안적교(懸岸吊橋·출렁다리)가 발아래 펼쳐진다. 적교는 가동교(可動橋)로서 공중로프에만 매달려 있어서 상하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다. 우리는 이곳을 건너야 한다. 소림무술은 동(動)과 정(靜)적인 공(功)을 잘 결합해야 한다더니 이곳이야말로 동과 공을 동시에 연마할 수 있는 소림무술의 수련도장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적교 위에 있는 너럭바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중원의 옛 땅을 내려다보니 무림 고수들의 칼끝 바람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중원의 수많은 고수들이 목숨 건 혈투 끝에 얼마나 많은 목숨을 잃었으면 ‘낙양성 십리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이 몇몇이더냐’ 했겠는가. 그 많은 무덤들의 원혼을 달래려고 빠이주 한 잔을 따른다.
갈 길이 멀어 서둘러 가는데 누군가 수도했을 법한 동굴 위에 신선동(神仙洞)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신선동을 통과하여 현천동(懸天洞)에 이르니 직립 거후층석영암석지대다. 바위 모양은 대나무 단을 묶어 세워 놓은 듯하며 ‘잔도기관(棧道奇觀)’이라 바위에 새겨진 대형 글씨가 설명을 더해준다.
계속 나아가는데 길이 너무 깨끗하고 빗자루 흔적이 나 있다. 누군가 이곳까지 올라와 길에 쌓인 눈을 쓸고 내려 갔나 보다. 조금 더 가니 커다란 자연석문이 나온다. 6,500만 년 이래 암층의 절리현상으로 형성된 석문이라고 쓰여 있다. 인간이 백 년도 못 사는데 나는 지금 6,500만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오르고 있다.
가까스로 숭산선원에 도착하니 이구 대장과 딸아이는 스님에게 얻은 빵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다. 선원 뒤가 연천봉이라고 하나 안개구름에 가리어 높이를 헤아릴 수 없다.
겨울철이 아니면 정상을 오를 수도 있다고 한다. 숭산선원은 당대부터 이곳에 있었으며, 건물은 몇 차례 보수했다고 한다. 선원 바로 옆에는 소림무술연구원이 있으며 건물을 증축 중이다.
숭산선원 맨 윗 건물 무량성전(無量聖殿)은 중앙에 불상이 모셔져 있고 단청은 되어 있지 않다. 천정은 돔형식으로 붉은 색을 띤 자연석으로 되어 있다.
오후 3시가 되어 선원을 나서는데, 내려가는 계단이 남쪽이라서 눈이 녹아 깨끗하다. 남천문을 지나 지그재그 직벽 계단을 내려선다. 무술연구소 건축자재를 메고 오르는 일꾼의 숨소리가 가쁘게 들린다. 산 아래 멀리 차도가 보인다. 딸아이는 너무 지쳤는지 반응조차 없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새로운 계단길 옆으로는 돌을 쪼아서 만든 협소한 옛길이 아직도 남아 있다.
계단을 내려서니 금궐운궁에서 노인들이 작업하고 있다. 도교인지 불교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작은 암자다. 암자에서 직선으로 주차장까지 가파른 계단이 나 있다. 나는 한 계단씩 내려서며 지나온 풍광들을 정리해본다. 숭산은 한 마디로 기(寄) 준(峻) 수(秀) 괴(怪) 유(幽) 등의 특징을 모두 갖춘 산이며, 그 비경은 모두 동편에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달마가 동쪽으로 갔을까.
[한국화로 둘러보는 중국 명산] 4 형산
유불선 공존하는 중국 민간신앙의 성지
울창한 숲·웅장한 폭포·수많은 문화유적 안은 남악
형산은 중국 오악 중 산 좋고 물 맑아 수려하기가 제일이라 하여 남악독수(南岳獨秀)라 했다. 최고봉인 축융봉(1,290m)은 도교와 불교가 한 곳에 공존하고 있어 중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산이다. ‘도(道)란 무엇인가’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청대의 시인 위원(魏源)은 형산을 그의 저서 <남악음(南岳吟)>에서 ‘항산(恒山)은 걷는 모습 같고, 태산(泰山)은 반석처럼 앉아 있는 것 같고, 화산(華山)은 거대하고 웅장하게 서 있는 것 같고, 숭산(嵩山)은 누워 잠자는 것 같고, 오직 형산(衡山)만이 날아가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옛 제왕들은 기러기가 날아와 머무는 이곳 형산에서 사냥을 즐겼으며, 잡은 짐승들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이번 그림산행으로는 제왕들의 사냥터였으며, 유불선(儒佛仙)이 공존하고, 한편 서포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의 무대가 된 형산을 찾았다. 형산은 호남성 형산시에서 조금 떨어진 남악시에 위치해 있다, 호남성은 동정호수 남쪽에 있다 하여 호남성이라 했는데. 이 지역의 2대 명소가 바로 장가계와 형산이다. 장가계는 한국 사람이 즐겨 찾고, 형산은 중국 민간신앙의 성지로서 중국인이 많이 찾는다.
일출맞이를 하는 일관대(日觀臺)
아침 8시, 장수(樟樹=녹나무)가 고목이 되어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는 길을 따라 심호흡하며 산책하는 기분으로 형산 산문을 들어선다. “현재 도로를 보수공사 중이라 모든 차량을 통제하여 축융봉으로 오르는 대중교통편을 이용할 수가 없다”는 검표소 직원의 말이다.
걸어서 축융봉까지는 4시간 넘게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시간을 벌기 위해 공사 차량을 60위안에 흥정하여 축융봉으로 오르는 삭도(케이블카) 승차장까지 가파른 급경사를 공사장 인부들과 함께 올랐다.
다시 삭도(1인당 60위안)를 타고 남천문으로 올랐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심한 폭설에 소나무와 전나무들이 목이 부러져 하얀 뼈를 드러냈다. 아픈 상처의 흔적이 가슴을 여미게 한다. 얼마 전 장사(長沙)에 80년만의 폭설이 내렸다더니 피해가 대단하다.
삭도 정류장에서 축융봉까지는 왕복 1시간30분이면 된다 하여 걸어 오르기로 했다. 숲이 울창하고 전나무 숲길이 계속 이어지며 콘크리트 포장이 된 차도와 등산로가 자주 마주친다.
축융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에는 ‘壽嶽’(수악)이라 새겨진 화강암으로 된 좌판 위의 노점상들이 이른 아침부터 호객행위를 한다. 형산이 수악이기에 어느 곳을 가도 壽자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등산로에는 얼마 전에 내린 폭설로 인하여 꺾이고 넘어진 소나무와 고목들이 아직도 어지럽게 널려 있다.
개운정(開雲亭)을 지나 고대사에 올랐다. 현판에 ‘高臺古寺’(고대고사)라 쓰여 있다. 시선이 고대사 빛바랜 창틀에 세워진 짚신에서 멈춘다. 스님이 출타했다가 방금 돌아와 젖은 짚신을 양지쪽 창틀에 걸어 놓았다.
일출맞이 장소인 상관일대(上觀日臺)의 등산로 표시를 따라 오르니 ‘禹王城’(우왕성)이라 새겨진 장정보다 큰 표지석이 나온다. 우왕이 백마를 잡아 천지신께 제사를 지내어 금간옥서(金簡玉書)를 얻어 치수에 성공한 후 ‘治水豊碑’(치수풍비)를 새겨 이곳에 세웠다고 한다. 1,000년 전에 사라진 이 우왕의 비석이 최근 형산에서 발견되었다는 호남성 문화재 당국의 발표가 근래 이 지역의 화제다.
우왕성 표지석을 지나 황톳길을 좀더 오르니 남악측후소 앞마당 너럭바위에 ‘日觀臺’(일관대)라 새겨져 있다. 야외 공연장처럼 돌계단으로 관람석을 마련하여 놓은 것을 보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올라 일출맞이를 하는지 짐작할 만하다.
축융봉으로 오르는 마지막 계단 입구의 표지석엔 커다랗게 축융봉이란 글씨와 안내문이 새겨져 있고, 그 옆으로 널따란 돌계단길이 잘 정리되어 있다. 1급 보호구라는 표지석과 잘 어울린다.
빗자루로 계단길을 쓸고 있는 허리 굽은 노인은 두툼한 겨울옷을 아직도 입고 있다. 남의 일에는 상관없이 자기 일에만 열심이다. 길옆에는 젖은 짚신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다.
비화정(飛花亭)을 지나 축융봉으로 들어선다. 화약 냄새가 진동하고, 한낮에도 폭죽 소리가 요란하다. 축융이 불신이라서 향을 피우면 필히 폭죽을 터뜨려야 한다. 중국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소원이 이루어지면 반드시 감사의 표시로 다시 이곳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 1년 내내 사람들로 북적거리며, 춘절 기간에는 더욱 심하다고 한다.
한낮에도 폭죽 소리 요란한 축융봉
축융봉이라 새겨진 폐방문을 들어서니 성제전에 축융대제(祝融大帝)가, 뒤편에는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축융전은 명대의 건물로서 유, 불, 도가 공존하는 곳이다. 이곳을 찾은 중국인들은 유불도를 함께 공유하며 자기 신앙의 방식대로 세 곳을 돌며 소원을 비는 것에 익숙해 있다.
축융봉 서쪽 문을 나서니 망월대(望月臺)가 있다. 조망이 시원스럽다. 산세가 험준하지 않아 지리산 벽소령에서 달맞이 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달 밝은 가을밤에 형산을 넘어온 기러기가 보름달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마음속으로 스케치를 한다.
이곳에 올라 동편을 보나 서편을 보나 어느 봉우리 하나 우뚝하여 모남이 없고, 어느 곳 하나 깎아지른 단애도 없다.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며, 크고 낮은 산릉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유불선이 하나가 되듯 산천 또한 그렇다. 장자의 무위자연 사상을 느끼게 하는 산세를 갖추고 있다.
먼 산자락의 실낱같은 층층 다랑논은 도가의 욕심 없는 삶처럼 한결같이 평온하고 유순해 보인다. 그러나 속 깊은 도인처럼 큰 산의 계곡은 깊고 길기만 하다. 사방이 400km라고 하니 말이다.
삭도(케이블카) 정류장으로 다시 내려와 남천문 조사전으로 향한다. 조사전은 전통 도교사원이다. 도가와 도교는 분명 다르다. 도교는 노자의 도덕경을 기본으로 하여 장도릉(張道陵)이 세운 종교로서, 원시천존(元始天尊=玉皇上帝)을 모셔놓았다.
노자는 도가 어떤 의지나 목적을 가지고 천지만물을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이 스스로 존재하고 움직이도록 한다는 무위자연 사상을 제창했고, 장자는 노자의 사상을 이어 받아 발전시켰다. 장자는 사사로운 자아의식을 버리고 사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를 것을 주장했다. 자연에 따름으로써 천지만물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노장사상은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전통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문학과 예술분야에 끼친 영향이 컸다.
우리는 조사전과 재신전을 둘러보고 장경전(藏經殿)으로 향했다. 콘크리트포장도로를 따라 힘들게 걷다가 12시30분이 되어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대불사가 내려다보이는 구멍가게에 앉아 컵라면을 하나씩 먹었다.
다시 포장도로를 따라 장경전으로 향한다. 멀리서 바라본 축융봉은 골이 깊고 우뚝하다. 한국의 야산 같지만 분명 그런 야산은 아니다. 아직도 곳곳에는 잔설이 하얀데 양지바른 산자락에는 벌써 봄이 찾아왔다. 우리의 산천에서는 보지 못한, 산수유처럼 생긴 노란 꽃이 꽃망울을 터뜨렸다. 가까이 다가가 봄의 전령사에게 가만히 입맞춤을 한다.
장개석과 송미령이 머물렀다는 마경대
장경전이 점점 가까워지자 아름드리 고목들이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하늘을 찌를 듯 울창하게 솟아 있다. 장경전은 남악 4대 절경 중 하나로서 명태조 주원장이 하사한 대장경을 보관한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2시간을 걸어 장경전에 도착했다. 이구씨(거인산악회 등반대장)는 몹시 피곤한 듯 의자에 누워 잠깐의 춘몽에 빠진다. 나는 장경전 주위의 뛰어난 풍광에 푹 빠져 화심에 잠기는데, 늙은 요전수(搖錢樹·흔들면 돈이 떨어진다는 나무)와 연리지(連理枝·다른 뿌리에서 자라다가 가지가 붙은 두 나무) 같은 특이한 나무들이 어우러진 사이로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는 윤춘정(允春亭)에 반하여 살며시 스케치북을 꺼낸다.
스케치를 마치고 나니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 대장도 잠깐의 춘몽에서 깨어나, 우리는 다시 천주봉으로 향했다. 천주봉 바로 아래 이정표에는 천주봉800m, 마경대 3,000m, 장경전 1,800m로 표시되어 있다. 장경전에서 벌써 1.8km를 걸어온 모양이다.
천주봉을 다녀온 뒤, 마경대로 하산하는 길이 지름길이라 하여 조금 내려가는데 폭설에 넘어진 나무들이 워낙 심하게 길을 막고 있어서 더 이상 내려가기가 불가능하다. 이구 대장이 위험하니 우회도로를 따라 내려가자고 한다. 우회도로는 8.5km나 되지만 할 수 없다.
차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차가 지나면 손을 들어보지만 반응이 없다. 이구 대장은 새 신발을 신고 온 게 잘못되어 발에 물집이 생겨 걷기가 몹시 불편한 모양이다.
장융산장을 지나 성제전 입구에서는 스님들이 넘어진 나무들을 치우다 말고 “절에 들렀다 가시라”며 인사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남태사 사리탑이 희미하게 보인다. 우리는 그곳까지 가야 한다.
명원산장(明苑山莊) 삼거리에서 이 대장은 걷는 게 힘들어 장개석과 송미령이 머물렀다는 마경대 탐방을 포기하고 하늘을 가린 울창한 전나무 숲길을 따라 금강사리탑이 있는 남태사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전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한참 걷다보니 금강사리탑 이정표가 나온다. 남태사 금강사리탑은 중국 3대 진신사리탑 중 하나라고 한다. 탑의 8각형은 8방을 의미하고 9층은 가장 높음을 의미한다.
남태사에서 스케치를 마치고 오후 4시에 출발했다. 이곳에서 매표소 입구까지는 아직도 3시간30분은 걸어야 한다. 발의 통증 때문인지 이구 대장은 자꾸 뒤를 돌아보며 빈 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눈치다. 한참을 걷다가 봉고차를 만나 세우니 4명에 100위안을 달라 한다. 60위안에 흥정하여 매표소로 향했다.
다음날 유, 불, 도 사원이 함께 있는 남악대묘를 구경하고 ‘壽嶽衡山’(수악형산)이 새겨진 폐방에서 ‘중화만수대정’(万壽大鼎)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향로처럼 보이는 그곳에는 만 가지의 서체로 만 자의 크고 작은 壽 자가 씌어져 있다고 한다.
우리는 걸음을 재촉하여 수렴동으로 향했다. 수렴동 입구는 차(茶)나무로 된 가로수와 등산로가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고, 벌써 홍매화와 백매화가 곱게 피었다. 용구호(龍口湖)에서 넘쳐흐르는 맑은 물은 폭포를 이루며 소리가 요란하다. 웅장한 협곡을 따라 오르니 암벽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이 옥빛으로 취민호(醉眠湖)를 물들이고, 화상(畵想)에 잠긴 화선(畵仙)의 마음을 유혹하는 듯 물소리를 호수 아래 감춘다.
도선(道仙)처럼 발자국 소리도 죽여 가며 화강암 작은 산길을 따라 오르니 성진(양소유)이가 봄날 팔선녀와 몽환의 세계에 빠졌을 법한 너럭바위에 다다른다. 거기 비스듬히 걸터앉아 천하제일천을 스케치했다.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나인 듯하다. 자기 바깥의 무엇엔가 깊이 몰두한다는 것은 유한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이며, 그것은 하나의 축복이다.
그림을 아는 사람은 그림을 설명하고, 그림을 좋아 하는 사람은 그저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그림을 즐기는 사람은 거기에 그려진 대상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산수화를 즐기는 사람은 삶 속에서도 자연을 찾고, 꽃 그림을 즐기는 사람은 삶 속에서도 꽃을 즐겨 키운다. 그러한 사람은 삶 가운데서도 자연을 사랑하기 마련이다.
천하제일천 폭포를 스케치하고 작은 등로를 따라 조금 더 오르니 복수호(福壽湖)에 이른다. 수렴동은 곳곳이 이렇게 작은 호수(?)와 폭포로 이루어져 빼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물론 호수라 이름은 붙였지만 서호나 동명호에다 견줄 수야 있겠는가. 다만 중국인의 도가철학을 이곳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연못만한 곳도 호수로 느낄 수 있는 넉넉함이 그렇다.
복수호수 주변의 풍광이 무척 빼어나 복수휴간산장(福壽休閑山莊)에서 몇 날 묵으며 그림이나 그렸으면 좋겠다. 복수산장에서 산수맥주 한 잔을 마시고 호수에 비친 형산을 바라보려니, 김만중이 소설 구운몽의 무대를 삼은 그 깊은 뜻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한국화로 둘러보는 중국 명산] 5 화산
저 산 그대로 봉황의 날갯짓이자 용의 승천
38개 암봉으로 승경 이룬 도교 발상지 5대 명봉 답파
중국인들의 산악신앙의 대상이 된 5악 중 산세가 가장 뛰어난 산이 화산이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과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계곡은 웅기험준(雄奇險峻)하여 지난 수 세기동안 무수한 침략자들로부터 장안을 지켜낸 일등공신이며, 대황하의 물줄기마저 바꾸어 버린 산이다. 화산은 산세가 워낙 험해 신비로운 기운마저 감돌기 때문에 무협지의 주무대가 되었으며, 무림고수들의 마지막 결투가 이곳 화산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화산론검(華山論劍)이라는 말이 나왔다.
또한 화산은 도교(道敎)의 발상지이자 진흥지로도 유명하다. 현재도 200여 개의 크고 작은 도관(道觀)이 있으며, 양귀비가 양태진(楊太眞)이란 도호(道號)를 가지고 여도사 생활을 한 곳도 이곳이다. 다른 명산들은 도교의 도관과 불교의 사찰이 혼재되어 있지만, 화산은 유일하게 불교사찰은 전혀 없고 도교의 도관만 존재한다.
화산은 섬서성 서안에서 동쪽으로 120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크고 작은 봉우리가 38개나 솟아 있다. 이중에 높은 5개 봉우리(落雁峰, 朝陽峰, 蓮花峰, 云臺峰, 玉女峰)를 지나는 것이 주요 산행로다. 산 전체가 험준한 화강암봉군으로 이루어져 있어 클라이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도 충분하다. 이 웅장한 화산을 보고 나면 여백 없이 하늘 끝까지 채우는 중국 산수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서안은 전시 관계로 자주 찾는 곳이 되어 낯설지 않다. 그래서 혼자 배낭을 메고 선뜻 나서 보았다. 오늘 따라 잔뜩 흐린 날씨에 방금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만 같다. 서안은 연평균 강우량이 600mm라고 하니 비가 귀한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손님이 비를 몰고 오면 귀한 대접을 받는다는 옛말이 있다. 서안공항에 도착하니 환영 나온 일행들이 “5일 전부터 봄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었으나 아직까지 비가 오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오시니 금방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다”고 하며 한바탕 웃음으로 반긴다.
무림고수들이 혈투 벌인 화산 북봉
다음날 아침 호텔 앞에 도착한 류진생(劉秦生) 경리의 차는 간밤에 내린 비로 도화꽃잎을 뒤집어쓰고 있다. 류 경리 부부와는 섬서미술관 진현 관장을 통하여 알게 된 뒤 10여 년 가까이 지내다보니 이제는 친분이 두터운 친구가 되었다. 미술관 전속 가이드인 최경화(崔京花)씨까지 함께 오전 9시 화산으로 출발했다.
화산 입구에 도착, 화산 전용 미니버스로 갈아타고 굽이굽이 심산유곡을 찾아든다. 차창 밖으로 아무리 고개를 빼고 위를 쳐다봐도 끝없이 높은 산정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인적 하나 없는 협곡을 30여 분 달려 삭도(케이블카)정류장에 도착, 물건 파는 소리로 왁자지껄한 가운데 일단 삭도를 타고 북봉으로 오른다.
北峯頂(북봉정)이라 새겨진 패방(牌坊)을 통과하여 운대산장에 여장을 풀고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쳤다. 최경화씨는 고소공포증이 심하여 산행을 포기하고, 류 경리 부부만 함께 북봉으로 오른다. 운무로 인하여 북봉의 비경을 확연히 조망할 수는 없지만 잠깐씩 드러낸 북봉의 위용에 이백, 이상은, 백거이, 관회 같은 장안에서 이름난 시인들이 화산을 노래한 시심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三峰却立如欲 세봉우리 우뚝, 꺾고 싶어라
翠崖丹谷高掌開 푸른 절벽 붉은 계곡 높이 손 벌려 펼치네.
白帝金精運元氣 서쪽의 쇠 기운은 천지 원기를 돌려
石作蓮花云作臺 돌로 만든 연꽃 구름봉우리 짓네.
이백이 북봉에 올라 남긴 싯귀다.
북봉 정상에 오르니 운집한 군중 속에 ‘華山北峰’(1,614.7m) 표지석이 반긴다. 바로 그 옆에 ‘華山論劍(화산론검)’이라 새겨진 키보다 큰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무림고수들이 혈투를 벌인 곳이라고 한다. 북봉은 삼면이 천길 낭떠러지이므로 길은 외길, 최후의 승자만이 올라온 길을 내려갈 수 있었다고 한다. 뿌연 안개 구름 속에서 칼바람 같은 바람소리를 들으며 북봉에서 내려섰다.
이제부터는 화산에서 제일 소문난 험도, 푸른 용의 등을 닮았다는 창룡령(蒼龍嶺)을 오른다. 정말 아차 실수라도 하면 시신은 찾을 길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들 쇠줄을 붙들고 조심스럽게 오르는데 계단을 내려가던 두 아가씨가 아예 주저앉아 소리를 내어 엉엉 울음을 터뜨린다. 체면을 따질 겨를도 없나 보다. 오를 때는 멋모르고 따라 올랐다가 내려서는 길이 천길 낭떠러지로 보여 금시 굴러 떨어질 것만 같아 더욱 공포감이 드는 모양이다.
창룡령을 오르며 등골에 땀을 오싹 빼고 나니 오운정이다. 이제는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시력만큼 멀리 보인다. 조금 전에 구름 속에 가린 북봉은 이제는 흰 구름이 산허리를 감고 돌아 운대봉이라는 이름과 잘 어울린다. 석도의 기운 생동하는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석도는 말하기를 ‘그림이라는 것은 인간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의 큰 법이요, 산천의 모습과 기운의 정의로운 피어남이요, 예부터 지금까지 천지를 창생하는 기의 조화요, 음양기상의 큰 흐름이다. 붓과 먹을 빌어 천지만물을 화면으로 옮기면서 그 천지만물이 나라고 하는 존재 속에서 생성되고 노닐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다.
‘내 명은 내게 있지, 하늘에 있지 않다’
오운정 폐방을 지나 오운봉 빈관에 오르니 피리 부는 짐꾼아저씨가 미소로 반긴다. 얼굴 표정이 참으로 맑다. 바지를 반쯤 걷어 올린 종아리에는 힘든 세월만큼 굵은 힘줄이 튀어 나왔다. 육체적 고통을 괴로워하기보다는 이곳의 삶을 즐기는 진정한 도인 같다.
안개 속에 아스라이 비친 노송 너머로 흑백의 서봉(西峰)이 우뚝하니 화산의 정기가 가슴속을 파고든다. 이렇듯이 산은 일기가 불안정할 때 오르면 위험도 따르지만 예상 못했던 희열을 맛볼 수도 있다.
금쇄관으로 조금 올라 쉼터에서 바라본 운해속의 거대한 암봉들은 하엽준법을 응용한 만장의 산수화 같아 가슴속 심장은 더욱 세차게 피를 뿜어낸다. 보라, 대해의 저 연봉들을. 봉황의 날갯짓이며, 창용의 화려한 승천이니. 설경에 더욱 검게 보이는 천년 노송은 손을 들어 이별을 아쉬워하는데, 놀란 까마귀는 깊은 계곡이 떠나갈듯 울어댄다. 류 경리도 서봉의 웅장한 자태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운해 위의 연봉들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이 없다. 부인 채 경리는 실눈을 뜨고 절경에 흠뻑 취했다.
금쇄관 주위에는 수많은 열쇠꾸러미와 붉은 댕기가 바람에 요란하게 펄럭이고 있다. 금쇄관에서 조금 더 오르니 지난밤 내린 눈이 제법 많이 쌓여 은백의 세계를 이룬다. 산 아래는 도화꽃이 만발하거늘.
십팔담교(十八潭橋)와 진악궁이 있는 서봉으로 가는데 수령 천 년이 된 화산대장군 소나무가 우람하게 버티고 서 있다. ‘靑杆(청간)’으로 표기되어 있는 1급 보호수다.
화산에서 가장 큰 도관인 서봉 취운궁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상투를 올린 도사를 바라본다. 검정 도사복에 상투를 틀어올린 모습에 나이는 알 수 없으나 도사의 얼굴이 참으로 천진스럽고 욕심 없어 보인다. 도교에서 머리를 틀어 올리는 이유는 범인의 삶의 방향과 역행해 하늘을 향해 올라가겠다는 의지의 표상이라고 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자식 낳고 살다가 늙고 병들어 죽는 과정이 순행(順行)이라면 선도의 수련은 여기에 반기를 들고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도가 수행자들은 말하기를,‘아명재아불유천’(我命在我不由天) 즉, 내 명은 내게 있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취운궁을 벗어나 서봉 정상 연화봉(2,038m)을 오른다. 서봉 정상은 넓은 너럭바위로 되어 있어 수많은 시인묵객이 풍류를 즐길 만한 곳이고 좌선하기에도 좋다. 바위 위에서 기도를 올리면 기도발이 잘 받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도처는 바위가 있는 산이다. 어지럽게 씌인 대형 글씨들은 하나같이 녹색이다. 이곳에 서면 위하가 발아래 보인다고 하나 오늘은 심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너럭바위 중앙 바위틈에는 수령 300년 된 회수송(回首松)이 외로운 도인처럼 서 있다.
구름과 산릉들의 변화무쌍한 조화를 바라보며 남봉으로 향한다. 남봉을 오르는 가파른 계단 옆 단애에 선 노송이 동양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주연급 소나무처럼 고풍적이다.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땀을 흠뻑 흘리며 봉일송(捧日松)을 지나 힘들게 계단을 올라 오후 5시가 되어 남봉 정상에 도착했다. 화산 최고봉 남봉(2,160m)은 기러기가 날아와 앉아 있는 모습이라 하여 낙안봉(落雁峰)이라고도 한다. 정상에는 화강암 자연석으로 된 표지석 바로 옆에 어천지(御天池)가 있다. 복을 빌며 던져 놓은 돈을 검정도복을 입은 도인이 낚시질하고 있다. 도인은 물에 젖은 1원짜리 지폐를 조심스럽게 편다.
너무도 아름다워 붓을 꺾고 싶은 풍경 만나
정상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화산의 운기(雲氣)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이래서 화산은 중국의 수많은 시인과 화가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나 보다. 산수화가이자 이론가인 곽희는 여행을 많이 하기로 이름난 사람인데, “동양의 산수는 결코 하나의 산, 하나의 사물을 사실에 가깝게 모방하려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산수를 경험하고 미적 관조가 가능한 이상적인 산수로서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새로운 산수를 독창적으로 창조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저 그대로만 그린다면 지도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지금 선경에 드는 듯한 심경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풍광 앞에서 스스로 도인이 된다. 적어도 지금은 붓을 꺾고 싶다. 자연을 화폭에 담는다는 일 자체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내려서서 남천문으로 향했다. 거대한 돌계단을 내려서니 남천문 도관이다. 문을 들어서니 장공잔도(長空棧道)의 모험적인 사진들이 걸려 있으며 ‘華山第一險道, 全眞崖’(화산제일험도, 전진애)라고 표기되어 있다. 종루 옆 석문을 통과하니 장공잔도가 나온다. 나도 모르게 벽에 붙은 쇠고랑을 꼭 붙잡고 있다. 엉금엉금 쇠줄을 붙잡고 거인의 불룩 나온 배 같은 암벽을 돈다.
끝이 안보이는 천길 직벽에 커다란 석굴로 된 대조원동(大朝元洞) 도관이 있다. 촬영을 하려니 도사가 손짓으로 거부한다. 동봉으로 오르는 길은 울창한 송림 숲길이다.
사색하는 마음으로 숲길을 조금 걸으니 동봉빈관 현판이 보이는 바로 아래 360년이 되었다는 화산 영객송이 반긴다. 황산의 1,200년 되었다는 영객송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자태와 기세가 당당하며 너럭바위에 조망 좋은 곳에서 신선들의 벗이 될 법도 하다. 이곳에서 바라본 영객송과 어우러진 남천문의 풍광은 한 폭의 그림이다.
동봉 정상(朝陽峰ㆍ2,100m)에 올라 ‘계자번신(鷄子 身)’의 기정(棋亭)을 바라본다. 주위에 기석선경이 얼마나 웅위로우면 저 높은 봉마저 병아리가 날아오르는 모습에 비유하였을까. 그곳에서 신선들의 바둑 두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저 암봉 위 정자에서 북송 초기에 120년을 살았다는 수공(睡功)으로 유명한 진희이(陳希夷)와 송나라 태조인 조광윤이 내기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진희이가 그 바둑에서 이긴 댓가로 화산은 정부로부터 세금을 면제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세금을 면제 받으면서 화산은 도교만의 성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화산은 중국 북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도 매년 화산바둑대회를 열고 있으며 조훈현 9단과, 김용(金庸·염황배 바둑대회 창시자)도 화산에 올라 네워이핑 9단과 대결한 적이 있다고 한다.
스케치를 마치고 직벽 철난간을 붙들고 운제를 내려서서 중봉으로, 또다시 중봉에서 금쇄관을 거쳐 운대산장에 도착하니 사방이 어두워졌다. 화산의 ‘秀而雄’(수이웅·수려하고 웅장함)과 ‘雲捲天睛’(운권천정·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맑게 개임), 그리고 강한 원기(元氣)를 10년 우정의 지극한 마음들과 함께 온몸에 채운 듯하다. 다음날 우리는 드넓은 황하대교를 건너 화산을 뒤로하고 오악의 마지막 코스인 북악 항산으로 향했다.
[한국화로 둘러보는 중국 명산] 6 항산
“바위가 중첩만장(重疊萬丈)이고 괴이함을 알 수 없구나”
현공사~항산산문~관제묘~북악대문~침궁~항산산문 일주기
변방 척박하고 버려진 땅 황토고원에 우뚝 솟은 항산은 산서성(山西省) 훈원(渾源)현에 자리하고 있다. 주봉인 천봉령(川峰 )은 해발 2,017m로 변방 제일의 산이라 불린다. 당대 시인 가도는 이르기를 “천지에 오악이 있거늘 항악이 북쪽에 위치해 있도다. 바위가 중첩만장(重疊萬丈)이고 괴이함을 알 수 없구나”라고 항산의 예측할 수 없는 기세를 잘 말해주고 있다.
항산은 웅장하고 험난한 산세가 연달아 기복을 이루며 동서로 250km를 달린다. 또한 108봉이 무리지어 있어 항산산맥이라고도 한다. 항산은 가까이에 운강석굴이 있으며, 오대산이 있다. 또한 웅준한 암봉은 구름 속을 찌르고 금용협, 해협 사이로 물이 흘러 산골짜기는 고요하고 깊으니 이곳이 신선들만 산다는 선유동임을 말해준다.
전한(前漢) 문제(文帝)의 이름 유항(劉恒)을 피휘(避諱)해 상산(常山)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동쪽은 태행(太行)산맥과 오대(五臺)산맥, 서쪽과 남쪽은 황하 중류의 협곡, 북쪽은 만리장성으로 둘러싸여 있어 각각 하북·하남·섬서와 내몽고자치구와 접하고 있다.
중국의 수많은 산을 대표하는 5악은 한나라 선제(宣帝)가 정한 것으로 지금까지 내려오며, 중국 5대 명산의 총칭이기도 하다. 5악을 신선이 거처하는 곳이라 믿어 고대 제왕들은 5악을 찾아 제를 올리며 불로불사(不老不死)를 기원했다. 당 현종(玄宗)은 5악을 왕에 봉했고, 송 진종(眞宗)은 제(帝)에 봉했으며, 명 태조(太祖)는 신(神)으로 추존했다.
화산 그림산행을 함께 마친 후 유진생(劉秦生) 섬서미술관 경리는 “항산까지는 얼마 멀지 않으니 함께 동행해 안내하겠다”고 앞장선다. 대동에 있는 운강석굴을 거쳐 항산까지는 1,000km가 넘는다고 최경화(섬서미술관 전속 가이드)씨가 살며시 귀띔해준다. 그리 먼 거리를 타국 친구를 위해 ‘잠깐’이면 된다니…. 다시 한 번 국경 없는 우정을 느낀다.
호수보다 넓은 황하의 대교를 건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척박하고 나무 하나 없는 황토고원을 거슬러 올라 대동으로 향한다. 화산에서 아침 9시에 출발하여 진종일 고속도로를 달려 저녁 7시가 넘어서야 대동에 도착했다.
항산을 대표하는 문화유산 현공사
다음날 아침 8시에 대동에서 16km 떨어진 운강의 암벽에 있는 석굴을 찾았다. 운강석굴은 북위 문제 때 사문통(沙門統·승려의 우두머리) 운요(雲曜)가 만들기 시작하여 당나라 초기까지 계속하여 판 것이라 한다. 약 1km에 걸쳐 산재한 53개의 동굴에는 최대 17m의 좌상(坐像)에서 수cm 크기의 불상 51,000여 체가 새겨져 있다.
낙양 용문석굴, 돈황 막고굴과 함께 중국 3대 석굴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3대 석굴 중에서 가장 예술적 가치가 높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채색불상도 함께 볼 수 있다. 제7~19동굴까지 제각기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중국 전통적 조소에 인도,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의 예술이 합쳐져 실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운강석굴을 보고 나니 이곳은 버려진 땅이 아니라 신이 선택한 축복받은 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잠재능력이란 이토록 무한한 것인가. 예술혼의 경지는 과연 어디까지란 말인가. 혼이 살아 숨쉬는 작품들 앞에 나는 머리를 조아린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재촉, 항산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북으로 50km 떨어진 곳에 내몽고와 경계를 이룬 만리장성이 있지만, 우리는 남으로 95km를 달려 천하장관인 현공사를 안은 항산을 찾아 떠난다. 매캐한 연탄 냄새가 진동하는 작은 마을을 지나 황토고원 산악지대를 굽이굽이 찾아든다. 마음은 급하지만 곳곳에 공사 중인 비포장도로는 황토먼지를 일으키며 우리에게 ‘만만디(천천히)’ 한다.
산서 고원지대는 황토고원의 동부에 위치한다. 퇴적한 황토가 산간 곡지와 분지를 형성해냈고, 거의 반 정도의 지표가 돌로 덮여 있어 삭막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들은 푸른 산을 꿈꾸며 하얀 페인트칠을 한 작은 돌들을 쌓고 거기에 나무를 심어 놓았다. 안타까운 마음마저 든다.
험준한 산길을 굽돌아 12시가 넘어서야 항산에 있는 현공사(懸空寺)에 도착했다. 이태백이 그토록 감탄을 금치 못하며 할 말을 잃고 썼다는 ‘장관(壯觀)’석 앞에 서서 천길 단애에 걸친 현공사를 올려다보니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항산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인 현공사는 취병봉(翠屛峰) 산허리 선암절벽에 매달려 1,400년의 긴긴 세월동안 비바람을 맞으며 고고하게 견디어 왔다.
현공사의 사(寺)라는 글자에 이끌려 이곳을 불교 사찰이라고만 생각하기 쉬우나, 실은 북위시대를 대표하는 도사(道士) 구겸지(寇謙之)의 제자가 창건했다. 구겸지는 선화(仙化·도사의 죽음을 일컫는 말)하면서 공중에 사원을 건립하라는 부탁을 남기는데, 그의 제자 이교(李皎)가 북위 태화 15년(491)에 건립한 것이 현공사다. 현공사의 원래 이름이 ‘玄空寺’라는 사실에서도 도교적 색채는 한층 강하다. 그래서인지 현재의 현공사(懸空寺)에는 불상 외에도 각종 도상(道像)들이 함께 안치돼 있다.
현공사를 구경한 뒤, 유 경리가 고기를 좋아하므로 산닭 오골계탕에 이곳의 특미라는 황미(黃米·황색 찹쌀) 빵으로 식사를 마친 후 항산산문으로 향했다. 현공사 주차장 입구에는 ‘항산(恒山) 2km’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바위굴 파서 조성한 구천궁
희미한 백열등 몇 개가 달린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니 넓은 호수가 보인다. 척박한 땅에서 물을 바라보니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기분이다. 현공사에서 쳐다본 협곡의 거대한 댐이 가로막고 있던 바로 그 호수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호수를 바라보며 잠시 달리다보니 황산산문에 도착했다. 현공사의 요란한 상가지역과는 달리 주위는 너무 썰렁하고 상점이나 빈관(여관) 하나 없다. 항산 등산을 마치고 이곳에서 1박할 계획을 세운다면 낭패다.
항산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곳은 들르지 않고 현공사까지 왔다가 되돌아가는 모양이다. 대동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운강석굴만 보고 되돌아가듯. 웅장한 항산산문 오른편에 작은 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있는 노인 석상이 눈길을 끈다.
산문에서 입산료를 내고 자동차로 점점 고도를 높이며 20여 분 오르니 삭도(케이블카) 정류장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약간의 상점이 있으나 지금은 영업하지 않는다. 여름철 성수기에만 장사하는 모양이다. 삭도 정류장에는 조금 전 산문 입구에서 본 노인상이 그보다는 훨씬 큰 화강암으로 조성되어 있다. 허리 굽은 노인은 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있으며, 악기를 가슴에 안고 편안한 미소를 띠고 있다. 다름 아닌 도교를 대표하는 8신선 중 한 사람인 장과로(張果老)다.
8신선 중 2신선의 근거지가 항산이라고 한다. 여동빈이 이곳에서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즐겼으며, 장과로는 여기서 은거하며 수련을 쌓고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장과로의 신선상을 이곳에 세운 모양이다.
청나라 때 민간신앙에서 가장 숭배한 3대신은 관제(관우), 여동빈(중국 대신선), 관세음(불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관제, 관세음, 제물신을 모신다. 제물신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
산문에서 삭도 정류장으로 오르며 바라본 산천은 나무 하나 없는 척박한 땅이었으나 삭도를 타고 대묘를 향해 오르며 바라본 항산의 협곡과 산정은 신비하리 만큼 울창한 숲이 사원들을 감싸고 있다. 산이 도술을 부리는 것인지 내 눈이 잠시 환각에 빠진 것인지 혼란이 온다.
우리는 삭도에서 내려서 산문 옆 매표소에서 다시 입산료를 내고 소나무숲과 어우러진 ‘人天北柱’(인천북주) 현판이 달린 산문을 통과하여 구천궁(九天宮)으로 들어선다. 솔바람 소리가 요란하다. 구천궁은 한눈으로 보아도 고색이 창연하다. 이곳의 묘(廟)나 궁(宮), 전(殿), 사(寺) 모두 각기의 다른 여러 신들을 모시고 있다. 건물들은 워낙 경사가 심한 산록이라서 어떤 것은 아예 굴을 파서 동굴에 제전을 마련하였고, 아니면 건물의 반쯤이 굴속에 들어가게 지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산정 가까운 곳에 있어 조망은 일품이어서 가슴이 탁 트이고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하다.
구천궁을 둘러보고 관우가 신이 되어 모셔졌다는 관제묘(關帝廟)로 향한다. 관제묘 뜰에 서서 멀리 중첩한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바라보며 말발굽소리와 관우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듣는다. 태행산맥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태행산 일천리(太行山 一千里)라 할 만큼 거대한 산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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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종전에서 바라본 조망 거칠 것이 없어
이곳은 건물의 규모나 동수에 비해 도사들이 몇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눈에 띄는데 각기 다른 복장을 하고 있다. 이곳은 찾는 사람들이 적으니 도사들이 표주(漂周)를 떠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도사들의 수련과정에서 3년에서 5년은 필히 거쳐야 하는 필수조건이 표주라고 하니 말이다.
표주(漂周)는 주머니에 돈을 갖지 않은 채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것을 말하며, 표주를 하려면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의약에 관한 기술이 있어야 하며, 둘째는 사주팔자를 보아 주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셋째는 학문이 탁월해야 한다. 이를 갖추면 어떠한 상황이 처하더라도 굶어 죽지는 않는다. 그래서 도사들은 보따리에 침과 귀한 약재를 넣고 다닌다. 표주를 해야만 사람이 겸손해지면서 세상사를 간파하게 된다. 세상물정을 모르면 엉터리도사다.
다시 숭영문(崇靈門)을 통과하여 ‘이곳으로 내려오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은 가파른 108계단을 올라 항산대묘인 정원전(貞元殿)에 이른다. 가파른 계단은 항산의 108봉우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정원전 또는 항종전(恒宗殿)이 있는 곳을 북악대묘라고 한다. 동악 태산의 대묘나, 남악 서악 중악 모든 대묘들이 산 아래 누구나 찾을 수 있는 곳에 거대한 규모로 조성돼 있지만, 이곳 대묘는 북악으로 정해지기 이전부터 있었던 고묘를 개수한 것이라고 한다. 항산의 산이름과 걸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속세와는 동떨어진 또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
이곳이야말로 선유동이라 할 수 있으며, 무위자연을 주장하며 벽곡(화식을 금하고 생식만을 하는 도사의 식사)을 하며 무소유를 몸으로 실천한 진정한 도사들이 거처할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북악인 이곳에서는 도교의 5방신 가운데 하나인 북악대제를 모신 사당 외에도 옥황각, 삼청궁, 순양궁, 백운동 같은 도관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항종전에서 바라본 조망은 어느 것 하나 거칠 것이 없다. 항종전에서 좌측으로 오르면 회선부(會仙府)이고 우측으로 내려서면 관제묘다. 오른쪽으로 진행하면 북악 침궁이다. 회선부로 오르는 길에 오악을 상징하는 마크가 새겨진 비석은 하도 많이 만져서 손때가 묻어 광택이 난다.
명대에 건축한 회선부(會仙府) 또는 집선동(集仙洞)은 벽에 동굴을 파서 옥황각(玉皇閣)을 모셔 놓았다. 회선부에서 나서니 천봉령(天峰岺)으로 오르는 계단에 ‘恒頂(항정), 琴棋臺(금기대)’로 표시된 이정표가 새워져 있다.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여름철에만 개방한다며 철문을 굳게 닫아 두었다. 금기대는 여동빈이 거문고를 타며 바둑을 두고 놀았다는 곳이다. 항정(恒頂)으로 오르는 절벽에는 대형 글씨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다시 침궁으로 향한다. 곳곳에 벽돌을 쌓고 붉은 칠을 했다. 침궁을 오르며 대묘 뒷편의 항산 정상과 북악묘를 바라보니 선계를 그린 산수화 한 폭을 보는 듯하다. 스케치를 하다보니 유 경리가 큰 소리로 “꾸어 왼 주(필자 이름 곽원주)!”하며 산이 떠나가라 이름을 부른다. 보이지 않아서 내가 길을 잃어버린 줄 알았다는 것이다.
다시 산문을 나서니 오후 5시가 넘었다. 산허리에 난 임도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한다. 멀리 주차장 옆에 진무묘의 평온하고 아름다운 그림 같은 풍광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산을 내려서니 솔바람소리가 발길을 붙잡는다. 아쉬움에 산정과 어우러진 항종전을 뒤돌아본다. 항상 변하지 않은 항산이 그곳에 있다. 오른편 항산암(恒山岩) 절애에 새겨진 키보다 몇 십 배 큰 ‘恒宗’이란 글씨가 이곳 항산의 모든 것을 대변해준다. 항심(恒心)은 나의 가슴속에 새기고 살아가는 언어이지만 이곳 항산에 오니 더욱 깊은 뜻을 알겠다.
북송 때 화가인 곽희(郭熙)는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嵩山多好溪(숭산다호계·숭산은 아름다운 계곡이 많고) 華山多好峰(화산다호봉·화산은 아름다운 봉우리가 많으며) 衡山多好別岫(형산다호별수·형산은 아름답고 특이한 묏부리가 많고, 常山多好列岫(상산다호열수·상산=항산은 아름답게 늘어선 묏부리가 많으며, 太山特好主峰(태산특호주봉·태산은 특히 주봉이 아름답다). 그리고 5악 이외도 천태산, 무이산, 여산, 곽산, 안탕산, 민산, 아미산, 무사협곡, 천단, 왕옥산, 임려산, 무당산 등은 모두 천하의 명산거악(名山巨嶽)으로서 세계적으로 경치 좋은 곳이다’라고 했다.
황산을 보고 5악을 두루 다 보았으니 어느 산을 찾아갈꼬. 에라, 무릉도원 금편계곡(金鞭溪谷)에서 세심(洗心)이나 하고 불교 4대 명산이나 찾아서 떠나야지.
[한국화로 둘러보는 중국 명산] 7 장가계(張家界)ㆍ천문산(天門山)
무려 3천여 개 석영사암봉의 숲
이동막걸리 마시며 중국 절경 감상
기암봉림(奇巖峰林)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았고, 산허리에 휘감은 운무(雲霧)는 원시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신선의 세계 무릉원(武陵園) 장가계(張家界). 수직으로 솟아오른 기암괴석과 만고풍상을 이겨낸 단애에 괴송, 이름모를 야생화의 꽃잎을 흔드는 바람소리, 물소리까지도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다. 주위의 모든 것들에서 억만 년의 세월을 느낀다. 하늘 아래 이런 천계선경(天界仙境)이 있었다니-. 이래서 사람들은 무릉원을 ‘와-! 와-! 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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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자산에서 바라본 기봉./ 천문산과 천문동.
산수화를 한다는 중국인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보고 싶어 하는 동경의 대상지가 장가계다. 장가계는 살아 있는 산수화의 보고이며, 모든 준법을 적용하여 일필휘지로 자기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가계는 황산, 구채구, 황룡, 계림과 더불어 중국 최고의 절경지로 꼽힌다. 무릉원의 석영사암봉림(石英砂岩峰林)의 산봉우리는 무려 3,103개에 달한다. 높이가 1,000m 이상인 봉우리가 243개이고, 최고봉인 토끼망월봉은 1,256m이다. 200m 이상 깊은 골짜기가 32개나 된다. 그중 십리화랑(十里畵廊), 금편계(金鞭溪), 삼도구(杉刀溝)가 유독 뚜렷하다. 오죽하면 인생부도장가계 백세기능칭노옹(人生不到張家界, 百歲豈能稱老翁ㆍ사람이 태어나서 장가계에 가보지 않았다면, 100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겠는가.
우리가 흔히 장가계라 알고 있는 곳은 정확히 말하면 무릉원 지역이다. 무릉원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삼림공원으로, 우리말로 하면 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의 무대가 바로 이곳. 무릉원은 크게 천자산, 장가계, 삭계욕 풍경구로 나뉘는데, 그 중 장가계 풍경구가 가장 유명하다. 그래서 지금은 일반적으로 무릉원 지역을 통틀어 장가계라 한다.
이들은 모두 등산로로 연결되어 있어 여유롭게 등산을 즐기기에 좋다. 모두 돌아보는 데 최소한 5~6일 정도가 소요되니 장가계 풍경을 마음껏 감상하고 싶다면 시간적 여유를 갖고 방문하는 것이 좋다. 금년 4월부터 리프트를 가동하여 접근이 쉬워진 천계불국(天界佛國) 천문산사(天門山寺)가 있는 천하기경 천문산 등산까지 겸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야생화 어우러져 피어난 석림은 신선화(神仙畵)
자이언트트레킹 이구 사장과 나는 형산시에서 장사를 거쳐 장가계에 밤 늦게 도착, 시내에서 숙박하고 나서 무릉도원을 찾아갔다. 첨봉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무릉원 입구에 도착하니 거인처럼 육중한 9층탑 건축물이 우뚝 서서 길손을 반긴다. 하루 걸러 비가 온다는 장가계의 날씨는 너무도 쾌청하다. 우리는 곧바로 자연 산수화랑인 십리화랑(十里畵廊)으로 접어든다.
십리화랑에는 형형색색 온갖 들꽃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꽃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기암 협곡을 배경으로 장장 5㎞에 석림(石林)과 어우러진 야생화 천국이다. 이것이야말로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닌 신선들이 그려놓은 신선화(神仙畵)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넋을 잃고 올려다본 세자매봉은 파란 하늘 위로 흰 구름을 피워 올리고 약초 캐는 노인, 맹호가 울부짖는 모습, 쥐가 하늘을 향하고 있는 모습 등등 다양한 형상의 암봉들이 병풍처럼 솟았다. 진정 천지조화의 경이로움이다.
한동안 비경에 취해 자리를 뜰 줄 모르다 먼저 천자산(天子山)으로 올랐다. 천자산은 예부터 봉림의 왕이라는 아름다운 칭호가 있을 만큼 경관이 기이하고 아름답다. 천자산은 고대 토가족(중국 소수민족 중 하나) 수령인 향왕천자가 이곳에서 봉기를 일으킨 다음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은 대지(臺地) 지형으로 높은 지역에 위치해 있어 사방의 경치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옹기종기 솟은 황룡천, 차반탑, 노옥장, 봉서산 등이 있으며, 특히 황제가 쓰던 붓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모습의 어필봉(御筆峰), 선녀가 꽃을 바치는 모습을 닮은 선녀헌화(仙女獻花) 등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시선을 압도한다. 발아래 펼쳐진 신당만, 선인교, 무사훈마, 점장대 등은 숨소리마저 멈추게 한다.
중국 10대 원수 중 하나인 하룡 장군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하룡공원 조망처에서 바라본 서해봉림(西海峰林)과 운청암(雲靑岩)의 붉은 색 직립암석은 우주를 향해 금방이라도 솟아오를 것만 같다.
이곳 천자각에서 십리화랑으로 이어진 등산로가 있다.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도보 산행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십리화랑에서 이곳으로 오른다면 이곳의 해발이 1,267m이니 1,000m의 직벽에 가까운 등산로를 오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천자산 산행을 마치고 우리는 셔틀버스를 타고 능선길을 따라 산속의 그림 같은 한가로운 작은 마을을 차창 밖으로 바라보며 원가계로 이동한다. 원가계에 도착하니 입구 양편에 늘어선 상가에서는 물건을 사라고 외치는 소리가 재래시장을 방불케 한다. 그렇게 떠드는 소리와는 무관하게 가마꾼들은 오수에 빠져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산길로 접어드니 산림욕장 같은 하늘을 가린 울창한 숲이 더위를 식혀준다. 조금 진행하다 보니 이곳 원주민으로 보이는 키가 작고 허리 굽은 노인이 종이에 만 담배를 피우다 말고 나를 쳐다보더니 꺼칠한 수염에 이빨이 하나도 없는 합죽한 입술로 “아저씨”하며 밝게 웃는다. 미소만큼 아름다운 만국 공통어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나도 미소로 답하니 스스로 자신 나이가 88세라고 한다.
세상 인연 버리고 이곳서 그림이나 그렸으면…
조금 나아가 장가계의 명소인 천연석교로 된 천하제일교 조망처에서 농담처리가 잘된 중첩한 첨봉들을 바라본다. 심원법과 부벽준을 사용한, 기운 생동하는 산수화 한 폭을 보는 듯하다.
십리화권(十里畵卷)에서 중국인 화가가 스케치를 하고 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옆에 앉아 절경을 함께 화폭에 담는다. 스케치를 마치고 돌아나오는데 거대한 바위 아래 작은 나무 가지들을 빼곡히 쌓여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고 간 모양이다.
천생교(天生橋)를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명편옥(名片屋)이라는 가게가 나온다. 우리는 가게 옆에 있는 중한우의정(中韓友宜亭) 정자에 앉아 선경을 바라보며 말린 미꾸라지 튀김을 안주로 시원한 이동막걸리를 한 잔 했다. 놀랍게도(!) 한국에서 수입해온 진짜 이동막걸리란다. 한 통에 6,000원이니 그리 비싼 것도 아니다. 거기에 김치 한 쪽, 이것은 입안의 경사다.
명편옥에는 명함꽂이를 6각형 연등처럼 만들어 여기저기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다. 주인 박영희(54)씨는 조선족 1세대라고 하며 목단강이 고향이라고 한다. 이곳에 명함이 걸려 있는 것만 해도 15,000장이 넘는다고 한다. 처음에는 천자산에서 장사를 하다가 이곳으로 옮겨와 이제는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나란히 선 돌기둥 두 개 ‘情人谷(정인곡)’에 다다랐다. 한글로는 연인곡으로 표기하여 놓았다. 위에 있는 담수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폭포를 이룬다. 연인곡을 지나는 다리 연심교 옆 폭포는 절벽이 끝이 없어 낙수가 바로 구름이 된다.
연심교 지나 소동천에서 다시 폭포를 바라본다. 장관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하기 힘들다. 장가계 풍경구의 끝자락인 미혼대에서 마지막 풍경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선경에 취하여 스케치를 한다. 아쉬움을 협곡에 묻고 돌아서는데 길바닥에 엎드린 청솔모 한 마리가 먹이에 정신이 팔려 사람이 오는 줄도 모른다. 배고픈 짐승에게는 선경이면 어떻고 비경이면 무엇하리.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백룡관광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금편계곡으로 걸어갔다. 금편계곡 수선사문(水線四門) 입구 한씨네 식당에서 해물파전에 청도맥주 한 잔을 마시고 계곡으로 들어선다. 계곡의 길이는 7.2km나 된다. 세계자연유산답게 잘 보존되어 있다.
울울창창한 숲속으로 접어드니 야생원숭이 떼가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오후에 햇살을 받은 나뭇잎은 은빛 찬란하고 맑은 물소리와 첨봉을 스치는 바람소리는 칠현금 소리보다 아름답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은 선경과 어우러져 점점 무아지경으로 끌고 들어간다. 뿌리는 둘인데 몸체는 하나가 된 황서목(黃瑞木)을 바라보며 부부라는 단어도 떠올려본다.
자초담의 물빛은 연록색을 띠고 보석처럼 맑다. 그 속에서 유영하는 산천어를 바라보니 용궁이라 해도 저렇게 아름다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초담을 지나니 민가 한 채가 나타난다. 이런 곳에서 세상의 모든 인연 버리고 그림이나 그렸으면 싶다.
세계 최장의 7,455m 천문산 케이블카
커다란 붉은 글씨로 새겨진 ‘長壽泉’(장수천)에서 약수 한 모금 마시고 산길을 오르는데 이끼 낀 바위 위에서 새끼원숭이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쳐다본다. 하도 애처롭게 보여 배낭에서 비스킷을 꺼내는데 덩치 큰 원숭이가 어깨 위로 덥석 뛰어 올라 순식간에 낚아챈다. 주위를 돌아보니 온통 원숭이뿐이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케치를 하다보니 나 혼자 뒤떨어진 것이다.
갑자기 공포감이 든다. 걸음을 재촉한다. 줄을 지어 수십 마리 원숭이 떼가 계속 뒤따라오더니 어느 순간 멈춘다. 자기 영역이 거기까지인 듯하다. 안도의 숨을 쉬고 서유기 촬영현장이라는 안내문 앞에서 첨봉이 하도 높아 보여 허리를 뒤로 하고 올려다본다. 여의봉을 든 손오공이 구름을 타고 저팔계와 내려선다.
오후 6시가 다 되어서야 금편계곡 입구인 장가계 삼림공원 매표소에 도착했다. 금편계곡은 어느 쪽에서든 꼭 한 번 끝까지 걸으며 기암절벽을 감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금편계곡 입구에서 황석채로 곧바로 오를 수도 있다. 황석채는 장가계에서 바라보는 건너편이며, 황석채를 보지 않으면 장가계를 보았다고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다음날 아침 8시 천문산 케이블카 정류장에 도착했다. 천문산 케이블카는 세계에서 가장 긴 7,455m이며, 고도차도 1,279m나 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면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그림 같은 전원풍경을 내려다보니 마치 산수화 속을 거니는 신선이 되는 기분이다.
천문산은 해발 1,518.6m이며, 장가계 시내에서 8km 떨어져 있다. 이 산은 예부터 ‘상서의 제일 가는 신성한 산’이라는 명성을 가졌다. 구름 위에 우뚝 솟은 천문산은 그 기세가 웅장하며 1,000m 높이의 절벽에 걸려 있는 천문동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대의 천연 석회암 동굴로 천하 기경을 자랑한다. 천문산 케이블카, 통천대도, 천문동, 공중카르스트화원은 천문산의 4대 기관(奇觀)이다.
천문산 정상에 도착, 동로인 동선벽야요대경구(東線碧野瑤臺景區)로 갔다. 정상은 산 아래서 보는 것과는 달리, 산 위에 또 산이 있었다. 삼림은 원시상태에 가까워 생태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게다가 카르스트 구릉과 석순이 도처에 분포되어 있고 기암괴석과 아름다운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어 그야말로 하늘의 신선이 내려와 다듬어놓은 분재 대공원을 방불케 한다. 산정에 있는 천문산사는 명조 이래로 불공드리러 오는 이가 가장 많은 상서의 불교 중심지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시야가 후련하게 트이며 장가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천길단애에 마련된 조망처에서 내려다본 거대한 암릉들은 살아 움직이는 듯하며 천군만마를 거느린 제왕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다.
삼거리 천문산사 입구 신선좌(神仙坐)를 지나 앵도만(櫻桃灣) 빈청(賓館) 앞 마당에서 광활한 앵도만을 바라보며 스케치하고 천계불국 천문산사 대웅전으로 오른다. 당대부터 있었다는 고찰은 간곳이 없고 5월에 봉헌식을 할 예정으로 엄청난 규모로 새롭게 불사 중이다.
세계 에어쇼에서 비행기가 천문동굴 통과
천문산사에서 다시 산길로 올라서는데 바위 사이로 난 작은 계단길이 조용한 명상의 산책로처럼 느껴진다. 바위에는 이끼가 수북히 자랐고 늙은 고목은 아무렇게나 편히 누워 있다. 향과수(香果樹)와 혈피수는 백년지기 친구처럼 서로 끌어안고, 하늘을 가린 채 서로 어우러진 숲은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귀곡잔도에서 건너다본 천길 절벽 중간에 동굴이 있다. 사람이 사는 흔적이 보인다. 저런 곳에서 사람이 생활한다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절벽이 얼마나 높은지, 광각으로 촬영하여도 절벽의 3분의 1밖에 촬영이 안 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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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십이화랑 비경.
알 수 없는 수수께끼를 가슴에 안고 야불장보(野拂藏춃) 휴게소에 오르니 기홍관(햮奇虹關) 갈림길 잔도(棧道)와 유도(遊道)가 나왔다. 여기서 우리가 지나온 귀곡잔도를 뒤돌아본다. 갑자기 오금이 저려 온다. 화산의 창룡령이나, 황산의 서해대협곡 잔도와는 또 다르다.
우리는 다시 천문동으로 향했다. 하늘로 통하는 큰 길이라는 뜻을 가진 통천대도를 미니버스로 오른다. 전체길이가 11km 남짓하지만 해발 200m에서 1,300m로 직상승한다. 가파른 산세를 타고 아흔아홉 구비를 돌아 오르는 통천대도는 용이 승천하는 것 같아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천문동인 상천제에 오르면 천계의 기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천문동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천연 석회암동굴이다. 높이 131.5m, 너비 57m, 깊이 60m에 이른다. 구름 위에 걸려 있는 천문동은 동굴 사이에 구름이 피어오르고 짙은 안개가 감돌면 마치 하늘나라로 통한 관문과도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역대 제왕들과 관료, 은사, 고승, 도사, 문인들이 자주 경치를 구경하러 오면서 천문산 특유의 천문화가 형성되었다. 1999년 세계 에어쇼에서 비행기가 이 동굴을 통과하면서 세계적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천문동 주차장에 있는 가게에서 컵라면을 하나씩 먹고 999계단을 오른다. 묘족전통의상을 입은 아가씨들이 큰북을 치며 아리랑을 불러주었다.
[한국화로 둘러보는 중국 명산] 8 구화산(九華山)
천길 절애와 수많은 사암 어울린 ‘구화성경(九華聖境)’
신라왕자 김교각 스님 진신불 모신 불교 4대 명산 중 하나
중국을 대표하는 신앙의 명산으로는 동악 태산(泰山), 서악 화산(華山), 남악 형산(衡山), 북악 항산(恒山), 중악 숭산(嵩山)의 5악과 아미산(峨眉山ㆍ보현보살의 거주처), 보타산(普陀山ㆍ관음보살), 오대산(五臺山ㆍ문수보살), 구화산(九華山ㆍ지장보살)의 불교 4대 명산을 꼽을 수 있다. 그 중 동남제일산인 구화산(九華山)은 지장보살 도량으로서 신라 왕자였던 김교각 스님의 진신불이 모셔진 곳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구화산은 안휘성 남부 청양현에 위치해 있으며, 천하제일 산이라는 황산산맥의 지맥이다. 최고봉은 시왕봉(十王峰ㆍ1,342m)으로, 천대(天臺)와 나란히 위치해 있다. 천대는 구화산에서 제일 높은 사찰인 천대사(天臺寺)가 천길 절애(絶崖)에 누각처럼 구름을 뚫고 높이 솟아 기승절경(奇勝絶景)을 자랑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천상세계를 연상케 한다. 또한 99개의 크고 작은 연봉들 중 1,000m가 넘는 봉우리만해도 30개나 된다.
구화산은 ‘구화성경(九華聖境)’이라는 수식어가 말해 주듯, 산 전체가 불교마을이어서 연화불국(蓮花佛國)이라고도 한다. 화강암봉으로 이루어진 등산로를 따라 종주산행을 하는 데는 빠른 걸음으로 6~7시간이 걸린다. 등산로 주위에는 고찰과 역사유적지가 전시장처럼 널려 있어 불교성지 순례를 겸한 등산을 한다면 좋을 곳이다.
제자와 신도들이 지어 지장스님께 바쳤다는 화성사(化城寺ㆍ757년), 신라에서 온 여인이 지장을 만나지 못해 항상 서서 기다렸다는 낭랑탑(娘娘塔), 매달 보름이면 신비한 광채가 비추었다는 신광령(神光岺), 상선당(上禪堂), 김교각 스님의 시신이 등신불로 모셔져 있는 월신보전(月身寶殿)과 7층육신탑, 회향각(回香閣), 고배경대(古拜經臺)의 비경, 감로사(甘露寺), 기원사(祇圓寺), 백세궁(百歲宮), 천대봉(天臺峰)의 노을, 만불사(万佛寺), 일숙암(一宿庵), 동애봉(東崖峰) 등 구화산 전체가 불교성지이고 지장도량(地藏道場)이다. 청대에 이르러서는 한때 사찰이 190여 개나 되고 승려가 5,000여 명에 달하였으나, 현재 구화산에는 사찰 86동, 각종 불상 6,800기, 스님이 700여 명 있다.
구화산의 원명은 구자산이었으나 이태백이 친구의 초청으로 이곳을 찾아 “妙有分二靈氣 芙蓉開九華(花)”(묘할 손 영기가 둘로 나뉘매, 부용이 구화산을 열어 놓았도다)라고 하여 그 후로 구화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중생을 제도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으리’
이구씨(자이언트트레킹 대표)와 나는 김미연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구화산 산문에 도착했다. 구화산에 들어서려면 우선 한백옥(漢白玉)으로 제작돼 한껏 그 자태를 뽐내고 있는 구화산문 패방을 지나야 한다. 이 산문 패방에는 청나라 강희제(1645-1722)가 직접 써서 하사했다는 ‘九華聖境(구화성경)’이라는 편액의 뚜렷한 글씨가 유독 눈길을 끈다.
이곳은 99라는 숫자와 인연이 많다. 산길도 99굽이를 돌고, 봉우리도 99봉, 계단도 99계단이다, 김교각 스님이 99세에 입적한 데서 유래한 것 같다. ‘1999년 9월9일이 되면 내가 입적한 날자와 같은 날인 음력 7월30일이 될 것이다’ 라고 1,200년 전에 예언했다고도 전한다.
터널 같은 계단식 복도를 지나 김교각 스님의 진신불이 모셔진 월신보전에 다다랐다. ‘東南第一山’, ‘月身寶殿’대형 현판은 국사가 만들어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월신보전 북쪽 99계단으로 난 출입문은 평소 김교각 스님이 사용하던 문이다. 남쪽 문을 사용하지 않았던 깊은 뜻은 구화산에서 바라보면 신라가 북쪽에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장보살이 된 큰 스님도 고향산천을 그렇게 그리워했던 모양이다.
도교가 많던 이곳에 김교각 스님은 불교를 전파하여 지장도량을 만들며 “중생을 제도한 뒤에야 보살과를 이루고, 지옥이 비지 않는 한 성불하지 않으리(度盡衆生 方證普提 地獄未空 誓不成佛·도진중생 방증보제 지옥미공 서불성불)”라는 맹세를 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지장보살의 거룩한 맹세(地藏大愿)라고 한다.
월신보전에서 1,200년이 넘은 지장 김교각 스님의 진신불을 친견하고 합장한 뒤 다시 터널 같은 복도를 내려선다. 이곳 구화산에는 15구의 진신불이 모셔져 있는데, 1992년에 입적하여 95년에 진신불이 된 자명 스님이 15번째 등신불로 나타났다고 한다.
월신보전의 법당 문턱이 유난히 높은 뜻은 불가에 입문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라고 한다. 아미타불전은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기에 합장해 보지만 빌 소원이 없었다.
월신보전 지장선사(地藏禪寺)를 거쳐 행원무진(行願無盡) 산문을 나서니 구화가의 민가마을의 아침은 참으로 조용하다. 민가라 하여도 모두가 민가식 사찰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일행은 모노레일을 타고 백세궁을 향해 오른다. 백세궁은 민가식 사찰로서 외부에서 보면 일반 가정집처럼 보이지만 400년 된 백세옹의 진신불이 모셔진 곳이다. 백세궁에 오르니 전면으로는 구화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뒤편으로는 최고봉인 시왕봉과 천대봉의 암봉들이 마치 북한산의 백운대와 인수봉을 보는 듯하여 발묵에 힘이 넘치는 산수화 한 폭을 보는 듯하다.
실제 사람크기와 같은 나한상 500기
백세궁을 빠져나와 사람의 실제 크기와 같은 500나한을 둘러보고 천대로 향한다.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20여 분 이동하니 천하제일송이란 글씨가 새겨진 입석에서 1,200년 된 봉황송(鳳凰松)을 바라보며 천년 학을 생각한다. 이곳은 차 농사를 주로 한다. 작은 상가 마을 사이로 난 석판 길을 따라 오르니 염장을 한 숭어처럼 보이는 생선과 통오리, 통닭, 두툼한 삼겹살을 건조시키느라 여기저기 세탁물처럼 매달아 놓았다.
등산로 입구는 장정의 팔뚝보다 훨씬 굵은 대나무숲이 울창하다. 그런데 오늘은 케이블카가 수리 중으로 운행하지 않는다. 이구씨가 “천대봉까지는 5km 밖에 안 되니 도보산행을 하자”며 앞장선다.
금강사를 지나 혜거사 대나무밭 사이로 평면석을 깔아놓은 오솔길이 영화촬영 세트장 같은 분위기다. 산문전(山門殿)이라는 현판 아래 용화궁(龍華宮)이라 쓰인 제법 큰 절을 지난다. “규모가 크든 작든 사(寺)는 비구니 절이고 암(庵), 묘(廟)는 비구니가 생활하는 곳”이라고 김미연 가이드가 일러준다.
계단을 오르노라니 땀이 비 오듯 주체할 수 없이 흐른다. 관음동과 함께 있는 관음암은 민가식 사찰로 길이 절 안으로 통과하게 되어 있다. ‘동중유선수(洞中有仙水)’ 약수를 한 바가지 떠서 갈증을 달랜다. 절 주위 경치가 너무 아름답다. 절경에 빠져 실족이라도 할까봐서 그런 것인지 ‘안전에 주의하세요’라고 한글로 안내문을 세워 놓았다.
관음동에서부터는 직벽에 가까운 지그재그 계단길을 올라야 했다. 조금 전의 경고문을 한글로 왜 써놓았는지 이해가 간다. 서두르기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을 걱정한 모양이다. 너무 계단이 가팔라 만약 실족이라도 하면 대형사고로 이어지겠다는 생각에 머리끝이 쭈뼛하다. 걸을 때는 옆을 보지 않고 자연을 볼 때는 걷지 않는다는 말은 지금 필요한 말이다. 관음동서 천교사까지는 정말 숨이 목까지 차오른다.
산은 언제나 그렇지만 힘들게 오른 만큼 거기에 따른 보람도 크다. 천교사에 오르자 확 트인 조망에 구화가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백세궁과 6각탑은 한 폭의 원근법이 확실한 동양화 한 폭이다. 천교사 옆에 우뚝 솟은 대납촉봉을 올려다보니 옹골찬 남성미를 느끼게 한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곳마다 한 폭의 의미 깊은 그림들이 펼쳐진다.
천교사에서 조금 오르니 소나무숲이 우거진 조망처가 있다. 휴식을 취하는데 덩치 큰 원숭이가 숲속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온다. 배낭에서 빵 한 쪽을 꺼내 던져준다. 장가계 원숭이들처럼 식탐을 내고 달려들지는 않는다. 배낭을 메고 산행을 다시 시작하니 원숭이가 앞서 계단을 오르며 안내한다.
백련사에서 오르는 계단은 양쪽이 모두 벼랑인데 난간이 없다. 계단 위에 서서 천대사를 올려다보니 하도 높아 현기증이 난다. 조금 전에 본 원숭이가 이곳까지 따라와 왼편 넓은 바위에 어린 새끼와 함께 앉아 있다.
천대 정상은 선계에 드는 자리
황금색의 관음봉 원통보전 뒤에 우뚝 솟은 거대한 관음석에 법복을 입혀놓았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었을까. 관음봉 원통보전에서 고배경대로 오르는 계단은 대리석에 연꽃과 동전 모양을 조각하여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난간기둥도 정교하게 조각했다. 계단을 오르며 배경대와 천대사를 올려다보니 버리고 뺄 것 하나 없는 기승절경 산수화다.
배경대 대웅보전은 황금색 벽과 붉은 기둥 문창살까지도 5방색으로 단청이 곱게 된 중국의 전통적인 건축물로 화려하기가 그지없다. 난간에 걸터앉아 장기를 두는 노승과 젊은 승이 퍽 한가로워 보인다.
지장스님이 수도했다는 고배경대(古拜經臺)는 대웅보전 뒤쪽의 조그만 건물이다. 건물 앞 자연석 너럭바위에 스님의 발자국 모양이 뚜렷하다. 이곳에서 고행하며 수도 정진할 때에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산을 내려가는 동자승을 바라보며 스님은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한 수를 남긴다. 번역하면 이러하다.
불문이 쓸쓸하여 집 생각하더니
절방을 하직하고 구화산을 떠나는구나.
난간에 기대어 죽마 타던 어린 시절 그리워하던 너
금 같은 불도의 땅도 너를 붙잡지 못하는구나.
병에 보탤 시냇물에 달을 부르지 말라.
차 달이는 병에서는 꽃 즐기기 쉬웠구나.
서운해 눈물 흘리지 말고 잘 가거라
노승은 안개와 노을을 벗하리라.
스님은 사찰생활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어린 동자를 고향의 어머니 품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스님은 아이에게 최상의 법(法)이란 바로 어미의 품(情)임을 알았기 때문일까. 그런데 아이는 막상 내려가며 그간의 정 때문에 눈물을 훔친다. 이를 본 노승의 마음 또한 적잖이 흔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개와 노을을 벗하며 수행을 계속했다.
왼편에 우뚝 솟은 암봉을 ‘大鵬聽經石’(대붕청경석)이라 표시해 놓았다. 천대사를 오르며 고배경대를 내려다본다. 대붕청경석 아래 고배경대는 봉황이 알을 품고 있듯 위용과 평온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천하 명당이다. 암봉 위에서 천년세월을 지켜온 일그러진 괴송은 지친 나를 허공에 한 획을 그어대게 한다.
천대사 대웅보전을 떠받친 거대한 암벽에 ‘非人間’이라고 쓴 커다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백의 시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 非人間)’에서 따온 말인지, 아니면 이곳은 범인이 접할 수 없는 지장도량 불도의 땅이란 뜻인지는 알 수 없다.
천대 정상에 서니 거대한 암봉들로 쌍둥이 입석과 널따란 와석이 조화를 이룬다. 시왕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넓다란 암반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저녁노을이 서산마루에 걸려 동자승이 하산하던 희미한 산길을 물들이고 있다. 김교각 스님은 이곳에 올라 초승달을 쳐다보며 떠난 동자승과 고향산천의 그리운 마음을 떨쳐 버리기 위해 얼마나 염불로 짓눌렀을까. 선계에 드는 듯한 이곳이야말로 참선과 염불을 함께 하는 선정쌍수(禪淨雙修)의 자리라 할 수 있다. 옆에 세워진 ‘地藏古洞’(지장고동) 비석이 그것을 말해준다.
조금 전부터 따라오던 어미원숭이 모자는 바위에 앉아 저녁노을을 등진 초승달을 쳐다보고 있다. 그 모습이 이별을 앞둔 노승과 어린 동자승을 떠올리게 한다. 산길을 내려서며 눈물을 훔치며 자꾸 뒤를 돌아보는 동자승에게 울지 말고 떠나나라며 손짓하는 노승과의 이별이 자꾸 떠올라 산을 내려서는 나의 눈에 눈물이 어른거린다.
[한국화로 둘러보는 중국 명산] 9 안탕산
수많은 폭포로 넋 빼앗는 환중절승(幻重絶勝)
옛 시인들은 산과 호수의 으뜸은 서호(西湖)에 있고, 산과 강의 명승은 계림(桂林)에 있고, 산과 폭포의 아름다움은 안탕(雁蕩)에 있다고 노래했다. 기암연봉들 사이로 쏟아지는 폭포의 비경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이렇게 노래했겠는가.
중국의 산들을 두루 돌아보고, ‘五岳歸來不看山(오악을 보고 나니 다른 산은 눈에 차지 않는다)’고 말한 서하객(徐霞客ㆍ1587-1641)도 이곳을 세 번이나 찾아 ‘욕궁안탕지승 비비선불능(欲窮雁蕩之勝 非飛仙不能·안탕산의 아름다움을 탐험하는 것은 신선이 마땅히 하늘을 나는 것과 같다)’고 했다. 한 마디로 안탕산은 산 전체가 거대한 산수화를 보는 듯하며, 기봉(奇峰), 거석(巨石), 유곡(幽谷), 수호(秀湖), 동 부(洞府)가 많아 환상만태(幻像萬態)한 곳이다.
절강성 남단에 위치한 안탕산은 남안탕산과 북안탕산으로 나뉘며, 남안탕산은 평양현, 북안탕산은 낙청현에 위치한다. 필자가 찾아간 북안탕산은 고대의 명산으로 해상명산(海上名山), 환중절승(幻重絶勝)으로 불리며, 동남제일산(東南第一山)이라고 한다.
안탕산은 영봉, 영암, 삼절폭, 대용추, 안호, 양각동, 현승문, 선교의 8개 절경구로 나누며, 그중 영봉, 영암, 용추폭포는 안탕삼절로 불린다. 이곳은 당송 이래 승려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마애불이 수도 없이 많고 고찰들이 널려 있으며, 춤추는 듯한 비문과 석각들, 미적인 느낌과 영감을 표시한 시, 그림, 문학작품들만 해도 5천여 편이 넘게 전해오고 있어 문사보고(文史寶庫)라 한다.
오전 11시가 되어 안탕산에 도착했다. 간밤에 심한 태풍이 지나간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가로수가 넘어져 있고, 계곡의 불어난 물은 하얀 포말을 이루며 금시 강둑을 넘을 것만 같다.
아직도 태풍이 완전히 지나간 것은 아닌 듯 요란한 바람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세차게 휘몰아친다. 길을 가던 한 사람은 아예 우산을 접어들고 비를 맞으며 뛴다.
폭포 물줄기 강풍이 말아올려 운무로 흩뿌려
독수루비관(獨秀樓賓館)에 여장을 풀고 하늘을 쳐다보니 비바람이 곧 갤 것 같지는 않다.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어서 간단한 쌀국수 한 그릇으로 식사를 마치고 대용추폭포를 찾아나섰다. 빗속을 헤치고 오후 3시가 되어 매표소에 도착하니 지난밤 폭우로 수량이 불어나 출입을 통제한다고 한다. 힘들게 찾아온 곳인데 실망이 크다. 이번 그림산행은 아무래도 허탕 치는 것 아닌가 하는 허탈감에 공연한 걱정이 앞선다.
다시 되돌아서서 방동(方洞)경구를 내려오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암봉들과 곳곳에 하얀 포말을 이루며 쏟아지는 폭포들이 장관을 이룬다. 비에 젖은 산천은 생기를 더욱 북돋우고 비탈진 차밭은 선명한 녹색으로 청량감이 감돌아 더욱 아름답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산석으로 이뤄진 이곳은 건폭이 많아 폭포는 별로 볼거리가 없었다고 택시기사가 말을 전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운을 잡은 것이 아닌가. 어쩜 내일 날씨가 조금만 개어준다면 우리는 천하의 비경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태풍이 고맙게까지 느껴진다. 여행을 하다보면 때로는 불행도 행운이 될 수 있다는 새옹지마의 교훈을 떠올리며 조양동으로 향했다.
조양동에 도착하니 태풍 때문인지 관리원이 아예 철수하고 없다. 시간을 보니 4시30분이다. 지금부터 호텔에 들어가 잘 수는 없는 일이고 위에 보이는 폭포까지만 가보자고 배가 나온 중국 상해여행사 홍광해(洪光海) 과장을 설득해 본다.
울릉도 성인봉으로 오르는 도로처럼 나선형 길을 따라 조양동에 오르니 간밤에 폭우로 불어난 수량이 장관을 이루며 쏟아진다. 이름 없는 이곳이 이 정도라면 내일 중국 4대 명폭 중 하나인 대용추폭포는 어느 정도나 될까. 설레는 가슴으로 벅찬 기대를 해본다.
폭포 안쪽 동(洞)이 있는 곳은 비를 피할 수 있다. 이곳에서 폭포를 바라본다. 웅장함과 천둥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폭포의 경관은 예사롭지 않다. 암봉을 감돌아 불어닥친 강풍은 육중하게 떨어지던 폭포의 물줄기를 말아 올려 운무를 만들어 하늘로 사라지게 한다. 참으로 장관이다. 폭포 아래는 인공담(人工潭)을 만들어 선비조각상을 세워놓았지만 주위의 웅장함에 초라함마저 느껴진다.
폭포를 보고 옥녀봉으로 오르는 계단길에는 물이 넘쳐흐른다. 빗길을 조금 오르니 금귀봉(金龜峰)에 이른다. 숨은 비경에 산자락은 마력을 가진 듯 우리를 조금씩 빨아들인다. 처음에는 산 오르기를 힘들어하던 홍 과장이 절경에 반하여 이제는 앞장을 선다.
비래석(飛來石)을 지나 조금 오르니 조천문(朝天門)과 오로전(五老 ) 갈림길이 나온다. 태풍에 오로전 이정표가 넘어져 있고 그곳으로 오르는 길이 가팔라 보여 조천문으로 방향을 잡았다. 조금 오르다 조망처에서 빗속의 안탕산 시내와 넘실대는 하천을 한눈에 내려다본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멀리 동쪽 바다도 보인다고 한다.
비바람 강풍 속에서 우뚝 솟은 서천문(西天門)을 통과하여 조천문으로 내려섰다. 대협곡의 거대한 실경산수화가 펼쳐진다. 중국의 대가들이 그토록 감탄한 안탕산의 진경이 바로 이것이구나. 지금은 무슨 말도 필요가 없다. 이래서 안탕산에서는 말을 아끼라고 했나 보다. 할말을 잊고 만다. 산정을 휘감고 도는 운무와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물결,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비폭(飛瀑), 참으로 변화무쌍한 장관들을 연출한다. 협곡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은 서 있는 나를 중심을 잃게 하고, 홍 과장의 너울대는 비닐우의 한쪽 팔꿈치 마저 뜯어냈다. 한동안 비바람 부는 줄도 모르고 넋을 잃고 몰아지경에 빠져 있다가 폭풍우가 점점 강해져 웅장한 암봉 아래 비좁은 동천문(東天門) 계단을 내려선다.
거대한 실경 산수화로 펼쳐진 대협곡 풍경
미끄러운 계단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서니 세 갈래 하산도(下山道)가 나온다. 우리는 왼쪽으로 난 길로 방향을 잡았다. 영봉 입구쪽이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본다. 산중턱의 계단길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다. 이제부터는 협곡의 돌계단이 너무 가팔라 돌아서서 사다리를 내려가듯 쇠줄을 붙들고 내려선다. 낙석이라도 구르면 피할 길이 없겠다는 생각에 조심을 더한다. 빗물이 계단으로 넘쳐흐르고 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 여간 미끄러운 것이 아니다. 이곳은 사람의 통행이 별로 없는 길인가 보다.
조금 더 내려서니 이제는 코끼리바위가 길을 막고 버티고 서있다. 쇠줄을 붙들고 겨우 천창(天窓)에 도착했다. 하늘로 난 창문이라는 이곳은 협곡이 하도 깊어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바라본 하늘의 작은 창문은 자연 속에서 또 다른 자연을 느끼게 한다. 천문동 안내판 아래 너럭바위에서 바라본 절경은 폭풍우 속에서도 스케치북을 꺼내게 한다. 홍 과장은 찢어진 비닐우의로 비를 가려준다.
땀과 빗물이 범벅이 되어 천문협을 내려선다. 이곳은 너무 가파르고 힘이 들어 통행하는 사람이 적은 모양이다. 돈 받기 좋아하는 중국인들이지만 이곳 입구에는 매표소조차 없다. ‘朝天門’이라는 화살표뿐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대용추폭포를 보기 위해 출발했다. 빗줄기는 어제보다 많이 약해졌다. 대용추로 가던 중 케이블카를 타고 영암경구로 오르려 했으나 태풍으로 인해 케이블카 운행을 하지 않는다. 걸어서 오를 수도 있지만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으니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산중턱의 그림 같은 묘(廟)만 바라보고 대용추경구로 이동했다.
대용추 매표소 앞 주차장에는 궂은 날씨에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차량과 인파가 북적거린다. 명소가 분명한가 보다. 산중턱 대나무가 우거진 곳에 자리한 빗속의 조용한 민가 한 채가 시심(詩心)을 불러일으킨다. 향 연기가 자욱한 용추묘(龍湫廟)를 지나 금계를 따라 오르니 중첩한 암봉들이 원객을 맞이한다. 조금 오르니 전지가위처럼 생긴 전도봉(剪刀峰)과 녹차밭의 어우름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전도봉은 보는 방향에 따라 모양과 명칭이 다르다. ‘아이를 안은 봉’(抱兒峰), ‘돛대봉’( 杆峰), ‘옥란꽃’(玉蘭花), ‘딱따구리’(啄木鳥), ‘곰바우’(熊岩), ‘악어봉’(鰐魚峰), 산 아래 운무가 깔리면 일엽편주에 돛을 올리고 항해하는 듯한 ‘일범봉’(一帆峰)으로 변한다.
보는 방향과 때에 따라 이름 달라지는 암봉들
금옥교를 건너 산 입구로 들어서니 1억3천만 년 전 화산 형성과정을 몸으로 느끼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화산 천연박물관 지대가 나온다. 마치 화산이 지금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한 구포유문암(球泡流紋岩)과 유문구조의 형성과정을 설명해놓은 화산석 지대를 지나 대용추폭포에 이르렀다. 연운봉에서 떨어지는 197m의 거대한 물줄기는 천둥소리를 내며 포효한다. 한 마리의 백용이 몸을 틀어 승천하는 듯하고, 다른 한 마리는 소용돌이치는 옥빛 담에서 꿈틀거린다. 참으로 천하제일폭포다. 이래서 옛 시인은 대용추의 아름다움을 ‘불가명상(不可名狀ㆍ말로 형언할 수 없다)고 했나 보다.
대용추에서 넋을 잃고 있다가 하산도로 접어들어 천불암(千佛岩)을 올려다본다. 중첩한 암봉들은 낮게 깔린 구름 위로 솟아올라 천불천탑을 보는 듯 기기묘묘하다.
대용추경구 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영봉(靈峰)경구로 향했다. 석교로 된 과합교(果盒橋)에 서니 높이 80여m가 넘는 두 개의 직립봉인 쌍필봉이 우선 눈을 압도한다. 석교 아래 옥빛 맑은 물과 쌍필봉은 물기 넘치는 수채화 한 폭을 보는 듯하다.
조금 걷다보니 다리 난간에 비를 맞고 앞발을 치켜든 사마귀 한 마리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빤히 나를 쳐다본다. “니하우” 인사를 나누고는 영봉고동(靈峰古洞)으로 들어선다. 영봉고동은 굴속에 또 굴이 있으며 암자가 7개나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옥빛 담들도 많다. 허원담(許愿潭)의 물빛이 하도 고와 계단을 내려서서 물을 만져본다.
호운동(好運洞)은 600년이 넘은 곳으로 이곳에 온 지 6년이 되었다는 인상이 퍽 너그러워 보이는 지원(智遠) 스님(41)이 합장하며 반갑게 맞이한다. 중앙에는 적수관음의 큰 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벽에는 음각으로 십팔나한이 조각되어 있다. 희미한 백열등에 향촉 냄새가 너무 강하고 습도는 매우 높아 땀이 비 오듯 한다.
영봉고동을 빠져나와 서요대(西遙臺) 정자에 올라서니 시원스런 조망에 반하여 명시 한 수가 저절로 나올 법도 하다. 이제는 빗방울이 그치고 구름의 이동이 빨라진다. 건너다보이는 합장봉 아래 관음동과 북두동은 천하걸작 신의 창조물이다. 주위의 연봉들은 장가계와 계림의 연봉들을 조합하여 놓은 듯하고, 청송 주왕산 정상으로 오르다 뒤돌아 기암봉을 보는 듯도 하다. 암봉 위에 또 암봉이 있고, 곳곳에는 동(洞)과 부묘(府廟)가 지천이다.
우리는 서요대와 동요대에서 건너다본 합장봉인 관음동으로 들어선다. 입구에는 정여봉(情侶峰)이라 쓰여 있고 야경(夜景)이라 표시되어 있다. 이곳의 암봉들은 보는 방향이나 때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그래서 봉 하나가 몇 개의 이름들을 갖고 있기도 하다. 관음봉도 합장봉(合掌峰), 정려봉(情侶峰), 북두동천(北斗洞天), 영봉동천(靈峰洞天)이라 하고, 야경에 바라보는 암봉들의 이름은 듣기만 하여도 아름다운 ‘독수리 날개 접다’, ‘달을 바라보는 코뿔소’, ‘시아버지봉’(公公峰), ‘부부봉’, ‘연인봉’, ‘목동봉’, ‘노파봉’, ‘사랑에 번민하는 소녀’, ‘쌍유봉’등등으로 불린다. 그래서 영봉의 풍경은 낮에는 놀랍고, 밤에는 혼을 빼앗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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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용추 불가명상(不可名狀).
모두에게 안탕산행 권하고파
관음동으로 들어서는데 다시 빗방울이 굵어지며 세찬 바람이 분다. 관음동은 높이 113m, 폭 14m, 깊이 76m나 되는 거대한 천연동굴이다. 굴 안에는 3천(泉)이 있으며 층층으로 건물이 지어져 있다.
천왕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 위 연못이 있는 쉼터에서 거대한 석벽 사이로 바라보는 세상은 정말 좁아 보인다. 이곳에선 혜안으로 마음의 소리를 볼 수 있다고 하여 관음동(觀音洞)이라 했는가. 낙숫물 떨어지는 것을 보니 빗소리가 보이고, 먼 산에 일렁이는 나뭇잎을 보니 바람소리가 보인다는 것일까. 보이니 들리고, 들리니 보인다는 것일까. 한없는 선문답을 자신과 나누며 두타고행을 하듯 쇠난간을 붙잡고 직벽에 가까운 끝없는 계단을 오른다. 마지막에는 널따란 광장이 있어 대형 관음금불상이 어두운 동굴에서 광명을 발하듯 조명을 받아 정말 황홀할 지경이다.
관음동을 나서 북두동을 둘러본 후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오르다 장군동으로 들어선다. 장군동 바로 옆 녹차밭 사이로 작은 산길이 나 있다. 어제 조양동을 지나 조천문(朝天門)과 오로전(五老 ) 갈림길에서 오로전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이곳으로 내려올 수 있다고 한다. 산길 입구에는 ‘유객금지통행(遊客禁止通行)’이라는 팻말과 위험 표지판이 함께 세워져 있다. 날씨가 좋으면 이쪽에서 다시 한번 조양동으로 산행하며 넘어 보고 싶다. 산천경개를 즐기며 산행하고 싶다면 안탕산을 권한다.
장군동에서 산을 내려서다 옥빛물이 하도 맑고 짙어 파초 잎을 꺾어 하얀 구름 위에 산수화를 그리고 땀에 젖은 얼굴은 옥수에 담근다. 이태백이 달을 따러 몸을 던졌던 그 물빛도 이토록 곱고 아름다웠을까.
[한국화로 둘러보는 중국 명산] 10 무이산
무이구곡 아홉 굽이 비경 보며 뗏목 더불어 흘러흘러
중국인들“국가중점명승구역 중 여기가 제일” 무이산(武夷山)은 태산의 웅장함과 화산의 험준함, 황산의 기이함, 계림의 수려함을 모두 담고 있다. ‘동주에서 공자가 나왔고 남송에는 주자가 있으니, 중국의 옛 문화는 태산과 무이로다(東周出孔丘 南宋有朱憙 中國古代文化 泰山與武夷)’라는 말이 있다. 이렇듯 중국인들은 무이산을 극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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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쌍유봉(雙乳峰)과 무이구곡(武夷九谷).
유독 명승지가 많은 중국에서도 “국가중점명승구역 중 무이산이 제일”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1999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자연문화유산에 등록되었으며, 36개의 큰 봉우리와 99개의 암봉, 8개의 고개, 11개의 골짜기,13개의 샘이 있어 山無水不秀 水無山不淸(산은 물이 없으면 수려하지 않고 물은 산이 없으면 맑지 못 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산이다.다리를 건너니 들머리 왼쪽엔 옛날 옥황상제가 목욕을 즐겼다는 경의대(更衣臺)와 천주봉(天柱峰)이 있고, 오른쪽엔 로마병정 머리 같은 대왕봉(大王峰)이 초가을 햇살을 받으며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옥계를 건너니 마이산 닮은 쌍유봉이 마음을 흔든다. 이곳 암봉들은 멀리서 보니, 신선이 산수화를 그리다 먹물을 쏟은듯 온통 먹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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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병봉(隱屛峰)과 정자.
천유봉으로 향한다. 천유봉은 천 길의 절벽 위에 암봉이 우뚝 솟은 무이산 최고의 절경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천유봉을 武夷第一勝景(무이제일승경)라 했고, 천유봉에 오르지 않으면 무이산을 구경했다고 말하지 말라 했다.석문을 힘들게 빠져나오니 바위에 ‘구름집(雲窩)’이 위태롭게 걸려 있다. 주자가 달을 보며 시정에 취하고 술을 마셨다는 수월정(水月亭)에 올라 무이계를 조망해 본다. 파초 잎 너머로 천유봉이 또한 그림처럼 아름답다.
- ▲ 천유각(天游閣)과 대왕봉(大王峰).
- 조금 더 올라 고석구(古石臼) 절구방아터가 있는 곳을 지나 수운료(水雲寮·수운마을) 유적지를 둘러보고 폐방을 통과하니 다동(茶洞)으로 들어서는 울창한 숲길이다. 무이산은 차가 많기로 유명하다. 조그만 바위틈새에도 차나무가 자란다. 무이암차(武夷岩茶)를 철관음이라고도 하며, 중국의 10대 명차 중 하나다.
다동에 들어서니 차향이 은은하다. 하늘 끝까지 암벽으로 둘러싸인 다동은 분명 인간세상과 동떨어진 별천지다. 절벽 아래 작은 터에 자란 차나무는 더욱 고고하고 청아해 보인다.
거대한 협곡 사이 仙浴潭(선욕담)은 선녀가 목욕을 한 곳. 이곳에서 쳐다본 하늘은 한 평 남짓해 보인다. 다동의 차나무는 쳐다보기만 해도 차향이 가슴 속을 파고든다.
다시 888계단의 천유봉을 오른다. 거대한 암봉 위의 지그재그 계단길은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난다. 난간을 붙잡고 구곡을 내려다본다. 낮게 깔린 물안개 사이로 실비단 같은 옥빛 물결 위로 점점이 꼬리를 문 뗏목의 풍광은 한 폭의 진경산수화다. 바위에서는 원추리꽃 한 송이가 저녁노을을 받아 붉은 얼굴로 가는 여름을 작별하고 있다.
일람정으로 가는 왼편 계단길로 오른다. 솔향이 은은하다. 바람 소리가 운치를 더해준다. 여기가 도솔천인가 무릉도원인가. 일람정에 올라 천유각을 바라보니 천유각의 붉은 지붕 너머로 고개를 치켜든 대왕봉이 유난히 멋스럽다.
- ▲ 선욕담(仙浴潭)과 다동(茶洞) 차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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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람정을 내려서며 구곡계를 바라본다. 천유봉을 무이제일봉이라 하는 뜻을 이제야 알겠다. 발 아래는 옥계가 우리의 동강 물줄기처럼 굽이져 흐른다. 점점 낙조가 산천을 물들이니 이곳이 선계(仙界)인가 천계(天界)인가. 산을 내려와 접순봉(接荀峰) 암차(岩茶) 찻집에서 대홍포차 한 잔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무이구곡 뗏목 유람을 하기 위해 오전 7시에 무이산 산문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8시에 뗏목이 한꺼번에 출발하면 2시간을 넘게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인산인해를 이루어 아수라장이다. 벌써 표는 매진되었다. 우리는 시간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웃돈을 주고 가까스로 승선했다. 꼬리에 꼬리를 문 뗏목들은 6명씩 정원이 차면 서둘러 출발한다. 1곡에서 9곡까지 거리는 9.5km에 1시간30분이 소요된다.
무이구곡 뗏목 유람객들로 아수라장
무이구곡은 남송 때 주희(朱憙)가 무이산 아홉 굽이의 비경에 반하여 구곡가를 지은 데서 나온 말이다. 9곡에서 뗏목을 타고 1곡으로 내려간다. 주희는 극락국(極樂國)이 있었다는 9곡에 이르러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고 하여 ‘뱃사공은 다시금 무릉도원 가는 길을 찾지만, 이곳이 바로 인간 세계의 별천지라네(魚郞更覓桃源路 除是人間別有天)’라고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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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젖가슴을 닮은 8곡의 쌍유봉(雙乳峰), 도교의 이상세계인 도원동(桃園洞)산문이 보이는 7곡, 무이산 제일의 바위산 포쇄암(선장암)이 있는 6곡, 주희가 학문했던 무이정사를 왼쪽에 둔 5곡, 강태공이 낚시를 드리웠다는 4곡의 선조대(仙釣臺), 3천년을 버텨온 홍판교(虹板僑)와 가학선관(架壑船棺)이 있는 3곡을 지났다. 수려함을 뽐내는 2곡의 옥녀봉(玉女峰)과 우뚝하게 솟은 1곡의 대왕봉(大王峰)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 얘기가 애틋하다.
무이산 박물관을 거쳐 무이궁으로 가는 길은 고풍스러운 옛길이다. 무이정녕(武夷精英) 고 건축물 앞에 함께 뗏목을 탔던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주희가 심었다는 宋桂(송계ㆍ송대에 심은 계수나무)는 수령이 이미 892년이라 거대한 고목이 되어 있다.
대왕봉을 올랐다. 시원한 그늘과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소리가 마음을 청결케 한다.
끝도 없는 지그재그 계단길에선 땀이 비 오듯 하고 숨은 목까지 찬다. 대왕정에 올라 숨을 돌리고 조금 오르니 암벽 아래 ‘오심(悟心)’이라 쓴 이끼 낀 석문에는 담쟁이가 무성하다. 누군가 생활했던 작은 터엔 바위에 홈을 파서 떨어지는 낙수를 받아 놓을 수 있는 작은 물탱크도 있다. 이렇게 식수를 구하며 어느 도사가 거처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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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천처(階天處ㆍ하늘로 오르는 사닥다리)라 표시된 바위틈새의 계단을 붙잡고 겨우 올라서니 대왕봉(432m)과 투양동(投陽洞ㆍ30m) 갈림길이 나온다. 우선 투양동을 들렀다. 투양동굴에는 앞서 간 중국 여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가 자리를 내어주며 앉으라 한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전방을 조망하니 신선이 절로 된 기분이다. 지지암과 꼬리를 문 뗏목유람선과 건너다보이는 연암봉들, 바위틈의 작은 무이암 차밭은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세속의 찌든 가슴 모두 털어버리고 나더러 풍류나 즐기며 살라 한다. 차향을 싣고 산 아래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한층 신선하다.
대왕봉 정상에는 우리의 어느 산처럼 통신안테나가 우뚝 서 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이 볼 것이 없다고 극구 등정을 만류했나 보다. 대왕봉 정상에서 무이산 시내를 내려다본다. 부촌과 빈촌이 어우러져 있다. 이들은 상대적 빈곤을 느끼기보다는 저마다의 타고난 복이 있다고 믿으며 지극히 낙천적으로 자기생활에 만족하며, 극히 운명론적이다. 그래서 이들은 암묘를 찾아 복을 빌 줄도 모른다. 정상을 내려서려는데 바람이 가지를 세차게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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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가 되어 대홍포동을 찾았다. 대홍포동을 들어서니 은둔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참으로 심산유곡이다. 이런 곳에서 생활하면 무지렁이도 도인이 될 것 같다. 검은 바위협곡에 한 평도 못되는 차밭이 여기저기 있다.
맑은 계곡에 물소리가 요란하고 산천어가 때를 지어 유영하고 있다. 차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검은 절벽 아래 대나무로 만든 차방을 지나 황제에게만 진상했다는 대홍포 차나무를 친견한다. 거대한 바위 중턱에 축대를 쌓은 곳에서 360년이 되어도 키가 1m 남짓 되는 대홍포차 3그루가 자라고 있다. 1년에 차 생산량이 500g밖에 안 된다고 하니 값을 말할 수가 없다. 지금도 국가에서 특별 관리를 하고 있다.
신선이 되어 산수경계를 동시에 즐기고 싶으면 무이산을 찾아가라. 그곳은 기승절경에 차향이 가득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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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로 둘러보는 중국 명산] 11 삼청산
‘오악의 뛰어남이 모두 이 산 안에 있네’
봉림은‘태평양 서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강암군(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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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해안 고송(古松)과 기봉(奇峰).
삼청산(三淸山)은 천하제일 선인의 산, 세상에서 둘도 없는 복지(福地)로 불린다. 도교를 대표하는 명산 중 하나이며, 흑(地)과 백(天), 태극 사상을 담고 있는 도교문화의 다채로운 유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오악의 아름다운 지형적 특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황산과 비교되기도 하는 매력 있는 산이다.
북송 문학가 소동파(蘇東坡·1037-1101)도 ‘오악의 뛰어남을 모두 보고자 한다면, 삼청산에 그 절경이 있다(남승편오악 攬勝遍五岳 절경재삼청 絶景在三淸)’고 극찬했다. 삼청산엔 옥경봉(玉京峰), 옥화봉(玉華峰), 옥허봉(玉虛峰) 3개의 웅장하면서도 기이한 봉우리가 있다 이 3개봉의 형상이 마치 도교의 시조인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이 앉아 있는 것 같다고 해서 삼청산이라 이름 붙였다.
산의 둘레는 100km에 이르며, 주봉인 옥경봉은 1,817m다. 만수원경구(万壽園景區)를 비롯해 남청원(南淸園), 양광해안(陽光海岸), 서해안(西海岸), 삼청궁(三淸宮), 옥경봉(玉景峰), 서화대(西華臺)의 7개 풍경구로 나누어져 있고, 2008년 7월 세계자연유산에 등록되기도 했다.
중국에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5대 봉림(峰林)이 있는데, 장가계 무릉원 석영사 암봉림, 계림의 양삭 이강 산수봉림, 귀주성 흥의(興義) 만봉림, 운남성 리평( 平)봉림, 그리고 이곳 삼청산 화강암봉림이다. 14억 년의 지질 변화기를 거쳐 세상에 둘도 없는 화강암의 봉림(峰林)을 형성하고 있어서 ‘태평양 서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강암군(群)’이라 말하기도 한다.
산 남쪽의 제운령 옥대에서 보면 수많은 봉우리들이 앞을 다투듯 우뚝하다. 봉래, 운장봉은 수려하고 쌍검봉은 날카로운 칼날 같다. 하지만 이런 석경(石景) 가운데 ‘삼절’ 이 있으니 사춘여신(司春女神), 관음청비파(觀音聽琵琶), 거망출산(巨혬莽出山)이 그것들이다. 산을 나서는 이무기라는 뜻의 거망출산은 홀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서 있어 사람들을 감탄케 하고, 관음청비파는 모양이 진짜와 같아 생동감이 더하다.
가장 절묘한 것은 사춘여신봉(司春女神峰)이다. 이 봉우리는 높이가 80m인데, 젊고 온화한 여인이 구름 사이에 앉아 있는 듯 자태가 고고하고, 긴 머리가 어깨에 드리워져 신비함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수백 미터 수직절벽 중간을 가로질러 잔도 가설
중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딸과 함께, 자연이 그린 수묵 산수화에 심취해 보고자 강서성에 위치한 도교의 명산 삼청산을 찾았다. 중국 연휴기간이라 예상했던 대로 곤돌라 승강장 입구는 벌써 많은 인파가 북적거린다. 40분을 넘게 기다려 겨우 탑승했다.
정상을 향해 오르는 곤돌라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2,426m나 늘어져 석탄일 연등처럼 장관을 연출한다. 고도가 높아지며 종착점이 가까워지자 요란한 바람소리와 함께 곤돌라는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앞을 쳐다보니 끝이 안 보이는 암봉군과 상가가 어우러져 거대한 산수화 한 폭을 보는 듯하다.
삼청산이라 새겨진 암벽을 지나 우측 계단을 오르니 만수원경구(万壽園景區)다. 위의 거대한 암봉들에서 말로 표현이 어려운 독특한 기(氣)를 느낀다. 유향교(流香橋)를 지나 회선대(會仙臺)로 올라 10경 중 하나인 노도배월(老道拜月)과 포뢰명천(蒲牢鳴天)의 장관을 바라보았다. 직립 쌍암봉과 고송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말없이 천 년의 세월을 지키고 있다. 산릉 넘어 청회색 하늘빛은 수채화처럼 곱다.
우리는 천문빈관을 지나 왼쪽으로 접어들어 서해안과 옥경봉 코스를 택했다. 30분만 계단을 올라가면 평로가 나온다고 가게 아주머니가 일러준다. 가마꾼들이 따라 붙는다. 가파르고 힘든 곳에는 가마꾼이 항시 대기하고 있다. 경사가 많이 가파르다.
측하대(測霞臺), 신동부송(神童負松)의 그림 같은 소나무를 지나 조망 좋은 서해안차장(西海岸茶莊) 휴게소에 올랐다. 뒤따라 올라온 사람들도 모두 얼굴에 홍조를 띄고 숨을 헐떡인다. 서해안 안내문이 있는 이곳부터는 3.6km의 평면잔도가 이어진다. 뒷짐 짚고 팔을 휘저으며 팔자걸음을 걸을 수 있다.
다만 수많은 비경에 잠시도 눈길을 뗄 수가 없다. 그중 화과산(花果山), 후왕관보( 王觀寶), 사성곡(四聲谷), 송자관음(送子觀音), 비선대(飛仙臺) 같은 독특한 풍광들은 가던 길을 멈추게 한다. 잔도에서 내려다본 비선곡(飛仙谷)협곡의 비경은 황산의 서해대협곡 못지않다. 협곡이 가까운 곳은 힘주어 건너뛰면 될 법도 한데, 몇십 미터를 들어가 굽돌아 나오기를 반복한다.
되돌아본 선교돈 잔도는 몇백 미터의 화강암 직벽에 걸려 있다. 우리가 저곳을 지나왔다고 생각하니 오금이 저려온다. 잔도 위의 사람은 너무 작아 보인다. 오른편 해발 1,500m에 위치한 구정봉의 구천금병(九天錦屛)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황궁(皇宮)의 비단병풍 산수화가 저토록 아름다울까.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도송림차장(都松林茶庄) 휴게소에 도착했다. 과일과 음료수에 음식까지 팔고 있다. 딸아이가 찐 달걀 몇 개를 사온다. 휴식을 취한 후 우리는 삼청궁을 향해 계단을 내려선다. 거대한 소나무가 유난히 많다. 황산에 있는 소나무와 모양이 비슷하나 대만송이란 이름이 붙었다.
경지에 이른 수묵산수화 한 폭을 보는 것 같아
삼청궁 앞에 이르니 저수지 셋이 먼저 반긴다. 해발 1,500m나 되는 이곳에 저수지가 있다니. 그것도 셋이나 말이다. 저수지 건너편 암벽에는 천 년의 세월을 지켜온 이끼 낀 복마상상부伏魔上相部) 부조물은 세월의 모진 풍파를 이기지 못하고 손발이 마모가 많이 되었다.
삼청산, 삼청궁, 3개의 저수지. 무언가 3의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 같다. 3개의 저수지는 3지합일(三池合一)을 뜻한다고 도사가 이야기한다. 도교의 3은 3재(三才) 즉 천(天), 지(地), 인(人)을 가리킨다. 3이란 숫자는 도교뿐만 아니라 불교, 기독교 등 모든 종교에서 깊은 의미와 상징성을 갖고 있다.
유하교를 건너 고색 짙은 이끼 낀 길정수(헓吉淨水) 우물 앞에 서니 이곳이 세 곳의 저수지 발원지다. 배운교(排雲橋)를 건너 삼청궁이라 쓴 폐방에 들어섰다. 삼청복지 편액이 걸린 명대의 고 건축물 앞에 틀어올린 머리에 비녀를 꽃은 여도사가 검정도복을 입고 향을 건네준다. 향을 하나 받아 궁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남자 도인이 앞을 가로막는다. 왼쪽 문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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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진대에서 바라본 옥경봉(玉京峰).
앞마당 넓은 공터 안내판에는 주문왕후천팔괘도(周文王后天八卦圖)가 있는데, 삼청궁을 중심으로 한 팔괘를 그리고 괘에 해당하는 각 곳의 지명을 적었다. 그곳을 모두 돌아보는 것이 삼청산 태극종주 코스다. 지리산의 태극종주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삼청궁 주위에는 꽃향유 꽃과 취나물 꽃이 한창이다.
오랜 세월을 느끼게 하는 왕고묘를 둘러보고, 자연석으로 조각한 풍뢰탑의 오묘한 예술혼을 느낀다. 용호전 자연석 용과 호랑이를 어루만지며 천 년의 세월을 느낀 후 구천응원부에 합장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 찐 달걀을 먹었던 도송림차장에 도착하니 오후 1시다. 인파가 너무 많아 곧바로 삼청산 상봉인 옥경봉으로 향했다.
지도에도 옥경봉을 오르는 길은 옛길이라 표기되어 있다. 가파르고 위험하여 일반관광객은 잘 오르지 않는 듯 돌계단에는 이끼가 많이 끼었다. 등이 땀에 젖도록 한참을 뛰어올라 코뿔소를 닮은 등진대(登眞臺)에서 정상을 쳐다보니 아직도 멀었다. 땀이 주체할 수 없이 흐른다. 이제는 허기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정상을 오르며 바라본 천하비경들은 허기를 잊게 한다.
숨이 목까지 차는 험준한 깔딱고개를 혼신을 다해 올라서니 옥경봉이다. 팔방으로 뻗어나간 험산준령에 천만년 세월이 만들어낸 저 기암연봉들의 웅장함을 보라. 산정을 넘나들며 춤을 추는 듯한 취선(醉仙)의 몸짓 같은 신령한 안개구름, 노(老) 화백의 의도필부도(意到筆不到)의 일획을 닮은 실낱같은 잔도-. 경지에 이른 수묵 산수화 한 폭을 보는 것 같아 경탄을 감출 수가 없다. 어찌 옥경봉을 오르지 않고 삼청산의 진면목을 보았다고 말 할 수가 있겠는가.
먼저 올라온 중국인 세 사람은 정상에 세워진 신호전(神虎殿)의 석상들 앞에 합장하고 복을 빈다. 공자가 ‘군자는 도를 근심하고 가난을 근심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걱정할 것이 없으니 빌 것 또한 없다.
삼청산의 상징 사춘여신봉 신비로 가득
아래서 기다리던 딸아이가 물 한 통 가져가지 않은 아버지가 걱정되었는지 허겁지겁 등진대까지 올라왔다. 초코파이 2개와 찐 달걀 하나를 배낭에서 꺼내 주며 “아빠, 중국 오시면 나 절대 찾지마” 한다. 달걀을 손에 쥐니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코끝이 찡하여 온다.
양광해안 평면잔도의 출렁다리 도선교(渡仙橋)를 건너 건곤대(乾坤臺)에 이르니 아예 허공에 번지점프대처럼 사진촬영대를 만들어 놓았다. 바닥은 유리로 하여 더욱 심한 공포감이 들게 했다. 모자석(母子石)을 지나 오로조성(五老朝星)의 다섯 봉우리를 바라보고 조금 나아가니 거망출산(코브라바위)이 멀리 보인다.
협곡은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딸아이는 지쳤는지 말이 없다. 하산을 마친 뒤 저녁에는 산꿩(山雉) 요리에 빠이주 한 잔 마시고 이백의 시 한 수를 읊조리며 잠에 들었다.
나는 취해 자려니 그대 먼저 떠나가게(我醉欲眠君且去)
내일 아침 술 생각 있거든 칠현금 안고 옵세(明朝有意抱琴來)
다음날 오전 4시50분 케이블카 정류장에 도착하니 벌써부터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다. 한참을 기다려 탑승, 산정으로 오르니 어둠 속 철탑 조명은 월야를 느끼게 한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애써 빠른 걸음으로 여신봉을 향해 오르는데 땀이 비 오듯 한다. 건너편 산정은 벌써 붉게 물들고 있다. 시시각각으로 협곡의 색이 변한다. 산 아래서 운무는 요동을 치며 산정으로 기어오른다. 숨을 헐떡이며 거망출산 암봉에 도착하니 어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옅은 운무에 감싸여 희미한 붉은 햇살을 받고 고개를 치켜든 모습은 몽환의 세계에 빠져드는 듯하다.
삼청산의 상징인 사춘여신봉을 향해 뛰다시피 종종걸음으로 갔다. 옅은 안개 속에 아침햇살을 받은 여신의 자태는 참으로 고고하고 신비롭기 그지없다. 어찌 자연의 조화가 이토록 신비로울 수 있다는 말인가.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고 하더니 모든 법이 이곳에 있구나. 더 이상의 감탄사는 외려 구차스럽다.
산 아래 깔린 운무, 하늘에서 요동치는 붉은 구름, 늘어진 노송의 검은 가지-.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여신은 점점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며 나더러 이곳에 5욕(五慾)을 다 버리고 산을 내려가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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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보살의 靈風(영풍), 그것을 그리고자}
북대 엽두봉, 동대 망해봉 올라 천지 조망
[한국화로 둘러보는 중국 명산] 12 오대산 (五臺山)
산 중에서도 성지라고 이름 붙은 곳은 왠지 발걸음부터 묵직해진다. 산서성(山西省) 오대현 동북부에 위치한 불교성지 오대산은 문수보살 도량으로서 아미산(峨眉山), 보타산(普陀洛伽山), 구화산(九華山)과 함께 중국 불교4대 명산 중 하나다. 오대산은 사찰의 건립시기가 가장 빨라 그중 으뜸이며, 중국 불교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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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문암(鴻門岩)과 동대정(東臺頂).
현재 오대산중에는 100여 개의 사묘(寺廟)가 있으며, 그중 특히 유명한 것은 라마계의 진해사(鎭海寺)와 불광사(佛光寺)다. 불광사 본전(本殿)은 857년에 건립된 것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또한 신라의 혜초(慧超)가 이 산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입적했고, 이곳 오대산에서 문수진신을 친견한 자장율사는 한국으로 돌아와 상원사가 위치한 오대산을 개산(開山)했다.
오대산은 산림이 없고 누대처럼 5개봉이 솟아 있어 그렇게 불렀는데, 중대 취암봉(翠岩峯·2,893m), 동대 망해봉(望海峯·2,795m), 서대 계월봉(桂月峯·2,773m), 남대 금수봉(錦繡峯·2,274m), 북대 엽두봉(葉斗峯·3,058m)의 5대는 모두가 2,000m를 넘는다. 우리의 오대산도 똑같은 오대에 사찰과 암자가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의 오대산은 숲이 있고 이곳의 오대산은 숲이 없다는 점뿐이다.
이곳 오대산은 7개 명승경구로 나뉜다. 그중 중심이 되는 곳은 대회진경구(臺懷鎭景區)로 보살정(菩薩頂), 삼탑사(三塔寺), 현통사(顯通寺), 탑원사(塔院寺) 등의 규모가 큰 사찰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현통사는 오대산의 사찰들 중에서 400여 채의 당우가 있어 그 규모가 크고 역사가 가장 오래된 사찰이며, 탑원사는 오대산의 상징인 대백탑(大白塔)이 있는 곳이다. 대백탑은 높이가 54.6m이며, 탑의 꼭대기에는 200여 개의 동령(銅鈴ㆍ동으로 만든 종)이 달려 있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청명하고 아름다워 10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문수정토 불법의 땅으로 지극한 불심 없이는 접근하기 어려운 오대산. 나무 한 그루 없어 척박하고 버려진 땅 황토고원에 우공이산이란 말을 탄생시킨 태행산맥에서 가지 쳐 나온 오대산맥에 솟은 그 오대산을 필자는 이미 지난 4월 섬서미술관 류진생(劉秦生) 경리와 돌아보았다. 이 산을 이제 12월호에 소개하는 것은 중국 명산 기행의 마지막 회에 올림으로써 이 산의 의미가 남다름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불교성지이자 국가지질공원
운강석굴과 현공사를 둘러본 후 오후 4시30분이 되어 오대산으로 향했다. 거대한 산맥의 첩첩산중 낡은 포장도로를 따라 흙먼지를 일으키며 오대산을 찾아가는 길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저녁노을을 어깨에 걸치고 고행의 길로 들어서는 수도승의 길이었다.
산그늘에 가려 어두워진 흙집 굴뚝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작은 들판에 석양이 물드는 풍광을 감상하는 것도 잠시, 다시 협곡으로 접어들어 가파르고 굽은 산간도로를 따라 몇 시간 달리다 보니 길옆에는 잔설이 수북히 쌓였다. 오대산이 가까워지며 도로는 눈길로 변하고 날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저녁 8시가 되어 가까스로 오대산 산문을 들어서니 날은 이미 어둠으로 변했고 늦은 밤 입산료를 받는 매표소 앞 전등불만 유난히 밝다. 우선 오대산장에 숙소를 정하고 여장을 푼 다음 빠이주 한 잔을 마시며 오대산의 첫날밤을 맞이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타고 왔던 차량 위에는 하얀 눈이 수북히 쌓였다. 눈을 쓸고 있는 유 경리에게 가게 아저씨가 말을 건다. 산행 입구까지 100위안에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도로에 눈이 많이 쌓여 승용차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곳부터 걸어서 산행을 시작하면 고갯마루인 홍문암(鴻門岩·산행입구)까지도 2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그의 승합차를 타고 곡예하듯 눈보라 폭풍 속을 달려 홍문암에 도착했다.
바람이 너무 강해 날려갈 것만 같다. 4월인데 이곳은 북풍한설 한겨울이다. 그는 미리 준비해온 인민군 코트 3벌을 건네주며 입으라 한다. 유 경리와 채 경리가 코트를 입으니 모자만 쓰면 사진에서 보았던 중공군이 틀림없다.
홍문암에는 붉은 글씨로 ‘國家地質公園 五臺山(국가지질공원 오대산)’이라 새겨진 커다란 표지석이 서 있다. 홍문암과 표지석에는 수많은 빛바랜 깃발과 새로 매단 깃발이 뒤엉켜 바람에 심하게 나부낀다. 거대한 장승처럼 우뚝 선 산문에는 ‘淸凉勝地’(청량승지)라 새겨져 있다. 오른편은 동대로 오르는 길이고, 왼편은 북대로 오르는 길이다. 우리는 오대산 정상인 북대(北臺) 엽두봉(葉斗峰)을 향해 오른다.
산등성이는 나무 한 그루 없이 탁 트였고, 능선을 따라 끝이 뵈지 않는 철조망에는 라마불경이 인쇄된 오색 깃발들이 찢어져 나갈듯 펄럭인다. 백두대간의 선자령을 올라 황병산까지 다시 하는 기분이다. 등산로는 어느 곳에는 눈이 바람에 날려 길바닥이 드러난 곳이 있는가 하면 어느 곳은 허벅지까지 빠진다. 이곳 오대산은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는 언제나 눈이 내려서 산행하기 힘들다고 한다. 하기야 이들은 산행을 운동화 신고 산보하는 수준이다.
류 경리와 나는 도로를 따라 걷다가 아예 능선으로 올라선다. 잡목 하나 없는 능선에서 어쩌다 눈 위로 솟아오른 것이 눈에 띄어 행여 나무인가 하고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엉겅퀴처럼 보이는 말라비틀어진 꽃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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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회진(臺懷鎭)의 서설(瑞雪).
수행하는 마음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반복하며 한참을 오르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 고개를 드니 ‘急彎’(급만·급한 커브길)이란 이정표가 우뚝 서 있다. 산행을 포기하고픈 생각이 목까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멀리 정상 아래 눈보라 속 작은 건물 하나가 보이는 곳까지라도 진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출발한 지 2시간이 되어 겨우 법운사(法雲寺)에 도착했다. 거대한 사자석상이 양편에 높게 앉아 지친 우리를 반긴다. 붉은 색 높은 담벼락에 건물은 채색이 안 된 콘크리트 단층 건물이다. 안에서는 향을 피워 놓고 스님이 연신 절을 하고 있다. 인적 하나 없는 이 산속에서 동안거라도 하는 것일까. 널따란 평정봉(平頂峰)에서 대회진을 내려다본다. 신선이 그린 수묵화가 이토록 아름다울까. 참으로 평온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동대 오르는 길은 마치 소백산 연화봉 같아
완만하고 평탄하던 길은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점점 숨이 목까지 차오른다. 세차게 얼굴을 스치는 강한 바람과 짙은 안개구름에 가려 옆 사람도 쳐다보기 힘들다. 정상엔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영응사(靈應寺)가 있으나 강풍과 짙은 안개로 인하여 인기척조차 없다. 체감온도는 너무 떨어지고 몸을 은신할 곳마저도 없다. 곧바로 뒤돌아서서 엉덩이 미끄럼을 타며 하산을 시작했다.
미끄러지고 뒹굴며 뛰다시피 내려서니 온몸에서 땀이 솟는다. 이제는 그 혹독한 바람도 약해진 듯하다. 약간의 간식으로 허기를 달래고 우리는 다시 동대로 오른다. 동대 망해사(望海寺)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장관이라고 한다.
동대로 오르는 길은 마치 소백산 연화봉을 오르는 기분이다. 흔히 소백산 설경을 선이 고운 여체에 비교하지만 이곳에서 바라본 오대산 또한 어머니의 가슴처럼 포근하고 누나의 등처럼 편안하다. 세상살이를 어느 정도 겪은 뒤에야 그 넓이와 깊이를 느끼게 되며 나이가 지긋해야 비로소 그 진면목을 알아볼 수 있는 산. 그런 산이 바로 오대산이다.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상주하고 있는 오대산. 세파에 시달린 지친 사람은 이곳 오대산을 찾아 수행하는 마음으로 설원을 걷다보면 눈보라 속에서 지혜의 문수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신이 가난한 시대, 물질 상위의 이 혼란한 시대엔 사람들이 문수를 찾지 않는다. 문수신앙이 타력보다 자력의 신앙이며, 기복적이기보다 이지적 현학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음이나 미타에 비해 대중이 멀리할 수밖에 없다.
동대에서 내려서서 천년고찰이 운집해 있는 대배진으로 향했다. 분지처럼 움푹 파인 이곳에 어느 사찰 하나만으로도 관광지를 이룰법한 대형 사찰들이 담을 사이에 두고 모여 있다. 서로 다른 종파가 이웃처럼 모여 사찰 마을을 이루고 있다. 병풍처럼 둘러싼 산들은 칼바람을 비켜가게 한다. 이곳 사찰만 다 돌아보는 데도 2~3일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시간이 허락치 않아서 보살정, 현통사, 삼탑사, 탑원사 등 대표적인 곳을 돌아보기로 했다. 우선 황궁 형식을 딴 보살정에 올랐다. 우리 사찰에 비해 그 규모가 대단하다. 이곳저곳에서 불사가 한창이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큰 건물은 여자불교대학으로 그 규모 또한 대단하다.
보살정을 둘러보고 108계단을 내려서니 선승의 취권 동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유 경리가 선승이 끌어안고 있는 술독을 가리키며 “꿔어왼주(郭元柱)”한다. 스님이 나처럼 술을 좋아한다는 뜻인가 보다. 모두 한바탕 웃고 현통사, 삼탑사를 거쳐 오대산의 상징인 대백탑이 있는 탑원사로 들어서니 탑의 규모가 정말 대단하다. 여기저기서 널빤지를 깔아놓고 온몸으로 엎드렸다 일어나길 반복하며 합장한다. 이 혹한에 저토록 처절한 자기수행 없이는 문수를 만날 수 없나 보다.
탑원사를 나서는데 갑자기 눈보라가 세차게 휘몰아친다. 문수란 지혜다. 세속의 지혜가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문수란 실존이기도 하고 상징이기도 하다. 나는 오대산의 혹한 속에서 정상을 오르며 문수의 영풍(靈風)을 보았고, 그것을 그리려고 했다.
필자 프로필 | 호 세정(世丁).
늘 실제 산을 오르며 산을 그리는 산꾼 화가를 자임하는 한국화가로서, 월간山에 백두대간 그림산행을 연재한 바 있다. 7차례 개인전을 연 것을 비롯해 50회가 넘는 국내외 전시회에 출품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중국 서안 섬서미술관 초대작가이며,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서울 미술전람회, 대한민국 신미술대전, 동아 국제미술대전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블로그 http://blog.empas.com/kwonjoo50.
/ 그림·글 곽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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