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란의 진주, 세계의 절반이라 불리는 이스파한의 이맘 호메이니 광장. 맨 왼쪽부터 샤이흐 로트폴라 사원, 자미아 사원, 이맘 사원이 빙 둘러서 있다. 그 옛날 폴로경기가 펼쳐졌던 광장에 이젠 관광객들을 맞이할 마차가 기다리고 있다. |
다시 서쪽으로 세 시간쯤 가서 소문난 고도 이스파한에 이른다.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자얀데 강변에 있는 카우사르 국제호텔 605호에 묵었다. 내려다보이는 강가의 야경이 문자 그대로 황홀경이다. 인구 160만의 이스파한은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하는 교통요지다.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부터 ‘가발’이란 이름으로 알려졌고, 7세기께 ‘세파한’으로 바뀌었다. ‘세파한’은 페르시아어로 군인을 뜻하는 ‘세파’의 복수형이니 곧 군인들이 모이는 ‘군영’의 뜻이 된다. 이 곳은 10세기까지 자얀데 강을 사이에 두고 페르시아인과 유대인들이 각각 사는 남북 두 개의 도시로 나눠져 있었다.
그 뒤 사만조와 지야르조, 가즈나조, 셀주크조 지배를 받으면서 이런 구분은 점차 사라졌고, 13세기 중엽 몽골군의 내침을 당했으나 큰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14세기 말 티무르 정벌군에게 저항했다는 이유로 7만명이나 학살을 당하면서 잘린 머리를 쌓아 언덕을 만들 정도로 대참상을 겪었다.
16~17세기 압바스 1세 때 전성기
100만 인구·사원 160개 ·공중탕 273곳…
‘세계의 절반’으로 불린 건축의 도시
지금도 ‘열린 박물관’으로 시민과 호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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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초부터 사파비조(1501~1732)의 치하에 들어가 1598년 5대 압바스 1세가 수도를 가즈빈에서 옮겨오면서 전성기를 맞게 된다. 당시 여행 기록을 보면, 이스파한은 인구 100만에 사원이 160곳, 학교 48곳, 여관 1800곳, 공중목욕탕 273곳이 있는 세계 굴지의 대도시였다. 그래서 이때 이스파한을 ‘세계의 절반’(네스페 자한)이라 불렀다. 그러나 18세기 전반 아프간족의 침탈과 그를 계기로 건국한 잔드조가 시라즈로 천도하면서 이스파한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이스파한은 지금도 ‘이란의 진주’란 미명을 지닌 이슬람 세계 유수의 도시다. 어디를 가나 미명에 걸맞는 유적 유물이 즐비하다. 우선 찾은 곳은 16세기 압바스 1세 때 조성한 이맘 광장이다. 이란인들이 즐겨 부르는 ‘세계의 그림’(나그셰 자한) 광장이며, ‘열린 박물관’이라고도 한다. 원래 ‘왕(샤)의 광장’이라 불렀으나, 혁명 뒤 ‘이맘 호메이니 광장’(이맘 광장은 약칭)으로 바뀌었다. 호텔에서 페르다우시교를 건너 도심 광장까지 차로 20분이 걸렸다.
아라베스크의 극치 로트폴라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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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인데도 광장 주변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광장 서쪽, 6층짜리 알리 카푸(높은 문)궁의 문으로 들어갔다. 이란 최초의 고층건물로 왕이 귀빈들을 맞던 영빈관이다. 경사가 꽤 가파른 계단을 밟고 맨 위층에 올라가니 기둥 18개에 떠받친 사방 20m, 높이 1의 탁 트인 테라스가 나타난다. 여기서 왕은 눈 아래 광장에서 펼쳐지는 폴로경기를 관람했다. 테라스에 딸린 연주실은 돔식 천장에 서로 다른 모양새의 구멍들을 뚫어 음의 공명을 조절했다고 한다. 남북 512m, 동서 163m의 긴 네모꼴 광장과 그 언저리 건물들이 한눈에 안겨온다. 오른쪽(남쪽)엔 이맘 사원과 자미아 사원이, 맞은편(동쪽)에는 샤이흐 로트폴라 사원이, 왼쪽(북쪽)엔 게이사리예 바자르가 배치되어 있다. 한마디로 페르시아 조형미술의 진수를 집대성한 파노라마라 할 수 있다.
왕족 전용이라 미나라(첨탑)가 없는 샤이흐 로트폴라 사원은 압바스 1세가 장인이자 대설교사인 레바논 출신의 로트폴라를 위해 17년(1601~1618)을 걸려 지었다. 쪽빛 바탕에 다양한 채색의 타일로 모자이크한 벽면장식은 아라베스크의 극치다. 안에서 본 천장은 마치 아롱진 공작새가 깃을 편 형상이다. 자미아 사원은 집단예배 사원으로 규모가 크고 역사도 오래됐다. 8세기 지은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서 개축을 거듭해, 지금 건물 대부분은 12~14세기 것이다. 총체적으로는 아기자기한 아라베스크 양식과 시대별 특색이 역력해서 이란 사원사 연구에는 귀중한 교본이 된다. 경문과 당초무늬를 섬세하게 수놓은 미흐랍(벽감)은 이란이 자랑하는 걸작 예술품이다. 넓은 중정(76×6)을 지나면 미로 같은 회랑들이 이어지는데, 천장은 무려 470여개의 작은 돔으로 연결돼 있다.
경탄 속에 옆 이맘 사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원래는 ‘왕(샤)의 사원’으로 불렀다. 페르시아 건축예술의 백미라는 이 사원은 압바스 1세의 명령으로 1612년 시공해 그의 사후인 1638년 완공했다. 두 개의 미나라와 정문을 메카 쪽에 45도로 살짝 돌리고, 음향을 최대한 확산시키기 위해 높이 54m의 외측과 38m의 내측으로 구성된 2중 돔을 얹은 것이 특징이다. 조용할 때는 종잇장 뒤집는 소리까지 들린다고 한다.
» 영빈관이었던 체헬소툰 궁전 벽면에 새겨진 호화로운 세밀화. 방문한 외국왕을 위한 연회 장면이다. |
또 한 가지 볼거리는 알리 카푸궁 뒤편에 있는 ‘40개 기둥’이란 뜻의 체헬 소툰 궁전이다. 원래 거울로 장식한 20개 기둥이 정원의 연못 수면에 비쳐 40개로 보인 데서 유래한 말이다. 압바스 2세의 명에 따라 1647년 영빈관으로 지었다.
주목되는 것은 세밀화 6폭이다. 그 중 3폭은 오스만과 인도, 우즈베키스탄 왕들이 원조를 청하러 내방할 때 베푼 연회 장면이고, 다른 3폭은 오스만과 두 차례, 인도와 한 차례 붙은 전투 장면이다.
원래 세밀화는 서양, 사산조에서 종교서적의 삽화, 장식으로 쓰이다 이슬람 시대 바그다드 화풍과 일칸(이란) 화풍으로 나뉘어 발전했다. 특히 사파비조에 절정을 이루면서 인도 등 주변국 화풍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란을 비롯한 서남아시아 일세를 풍미하던 이 독특한 화풍을 직접 음미할 기회를 얻은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이스파한이 ‘이란의 진주’임을 좀더 실감하려고 광장 북쪽의 게이사리예 바자르를 찾았다. 1천여개 점포를 거느린 이 재래시장은 이란의 어제와 오늘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카펫과 금속 세공, 유리그릇, 갖가지 토산품들로 차 있다. 사산조 연주문이나 포도당초문, 수렵문 같은 전통 문양을 계승한 ‘페르시아 카펫’의 원산지다. 보통 카펫 한 장을 짜는 데 몇 년, 심지어 10년 이상이 걸린다고 하니 그 값어치를 짐작할 수 있다.
이스파한의 정취를 만끽하는 데 자얀데 강을 떼어놓을 수 없다. 글자 뜻 그대로 이 강은 생명을 주는 강이다. 서남쪽 자그로스 산맥에서 발원해 이스파한 중심부를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도시를 남북으로 갈라놓고는 400㎞를 유유히 더 흐르다 카비르 사막에서 자취를 감춘다. 강 위에는 11개의 크고 작은 다리가 있다. 5개는 옛적에, 6개는 근래에 놓은 것이다. 가장 유명한 다리는 시오세 폴(33 다리)이다. 시오세는 다리 위에 있는 작은 아치 33개에서 유래한다. 1602년에 놓은 길이 300m, 너비 14m의 이 다리는 도심에서 남북으로 뻗은 대동맥 차하르 바그(4개의 정원) 거리를 중간에서 이어준다. 유람의 운치를 살리기 위해 차량 통행은 금지되고 사람만 거닌다. 다리 밑층 차이하네(찻집)에서 산들바람 속에 향 짙은 홍차를 마시며 망중한을 즐겼다.
한 장 짜는 데 10년 넘는 카펫도
동쪽으로 1.5㎞쯤 가면 길이 133m에 너비 12m의 카주 다리(1666년 완공)가 나타난다. 상하 두 층으로 된 다리 상층은 원래 왕들이 주연을 베푸는 테라스였다. 하층은 예나 지금이나 수량을 조절하는 갑문 구실을 한다. 다리 북쪽에 자그마한 사자상이 있는데, 사자를 한번 건너타면 금방 결혼한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무언가 타자의 힘으로 자아를 만족시키려는 건 동서양 어디서나 인지상정인가 보다.
이맘 광장을 쉼터로 열고, 궁전, 사원의 부속건물을 전통 상품 매점으로 쓰며, 시오세 다리 위를 여유작작 거닐고 그 밑에 차이하네를 차려놓고 즐기는 이란 사람들, 그들은 문명의 창조물들을 박제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 살아 숨쉬게 한다. 그 지혜가 한결 돋보인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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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호화 건축 도시…오늘날 핵 개발의 핵으로
이스파한의 번영과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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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도시 이스파한의 영화는 사파비 왕조를 부흥시킨 샤 압바스 1세(1587~1629)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정복왕 티무르가 사마르칸트를 세계 건축의 수도로 건설한 것처럼, 압바스 1세는 12세기 셀주크 왕조의 이 옛 도읍을 이슬람 세계의 새 중심지로 부활시키려 했다.
1597년 이스파한으로 천도하면서 그가 꿈꾼 것은 ‘세계에서 가장 호화롭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세계 최대의 광장이었다는 이맘 광장을 닦고 둘레를 대형 상가인 아케이드와 대형 건물군으로 둘러 싼 특유의 도시계획이 실행됐다. 현란한 채색 타일로 장식된 샤이흐 로트폴라 사원, 누각인 알리 카푸, 마스지드 샤(이맘 사원) 등은 압바스 1세의 의지가 녹아 있는 걸작들로 이슬람 건축사의 최고 정점이자, 모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압바스 1세의 치세 당시 이스파한이 ‘세계의 절반’으로까지 불리면서 번영한 것은 활발한 정복 활동과 상업 중시 정책 덕분이다. 그는 중앙아시아로 진출해 골칫덩어리였던 우즈베크 칸국을 복속시켰으며 오스만튀르크로부터 아르메니아, 이라크 등도 회복했다. 또 특산인 비단, 공예 사업을 국가적으로 지원하고 아르메니아 상인들을 활용해 국제 교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둬들였다. 실제로 16~17세기 중근동과 중앙아시아, 인도는 밀접한 광역 경제권이었다. 튀르크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던 사파비조와 오스만튀르크, 무굴제국은 교역로의 안전을 상호 보장하고, 저관세 정책으로 옷감, 향신료, 도자기 등을 중심으로 한 세계 최대의 교역지대를 형성했다.
그러나 압바스 1세는 이스파한이 몰락하는 빌미도 만들었다. 그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린 중앙아시아 쪽 세력들과 끊임없는 갈등을 빚었다. 현지의 수니파 무슬림에게 시아파 개종을 강요한 탓에 강한 반발을 산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사후 이스파한은 약탈과 살육의 표적이 된다. 1722년 아프간족이 들어와 약 3000명의 학자와 귀족들을 학살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18세기 카자르 왕조 때도 상업도시로 명맥은 이었지만 정치적 주도권은 지방 소도시였던 테헤란으로 넘겨주게 된다. 그런 이곳이 요즘 국제사회와 갈등을 빚고 있는 이란 핵 개발의 핵심대가 됐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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