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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산공원에서 내려다본 여수 야경. 여수 여행에서 놓치지 않고 보고픈 광경이다. 여수(麗水)는 항구다. 삭풍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갯바위 언덕에 붉은 동백꽃 피어나고, 이역만리 머나먼 바닷길을 헤쳐온 화물선이 기적소리 울려대는 여수는 항구다. 넓고 깊은 앞 바다엔 큼직한 돌산도가 큰 파도 막아주며, 동백나무 뒤덮인 오동도, 세 마리의 용이 다투는 여의주 장군도에 대경도·소경도·가장도·치도 같은 아기자기한 섬들이 방파제를 이루는 천혜의 항구.
▲ 고려 후기에 창건된 흥국사는 임진왜란 당시 큰 활약을 한 의승들이 머물던 사찰이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남해의 한적한 포구였던 여수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조선시대 들어서다. 고려 말부터 괴롭혀온 왜구를 막기 위해 1479년(성종 10) 이곳 내례포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을 설치하면서 여수는 대번에 남해안 방어의 중심지가 됐다. 이후 1895년(고종 32)에 폐지될 때까지 여수는 무려 400여 년 동안 이웃의 통영과 더불어 남해안 방어에 중추적 역할을 맡아왔다. 특히 임진왜란 때의 역할은 우리 반만년 역사에서 정채(精彩)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쟁 발발 1년 전인 1591년(선조 24)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것은 하늘의 뜻이었다.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던 장군은 전쟁이 터지자 이곳을 수군의 중심기지로 삼고, 기고만장하던 왜군을 맞아 연전연승했던 것이다.
▲ 한번 잡으면 중생이 악업의 결과로 죽어서 가게 된다는 삼악도(三惡道)를 면할 수 있다는 대웅전 문고리.
환란을 당했을 때 구국의 중심에 서있던 전라좌수영의 항구 도시 여수! 이는 여수 주민들의 한없는 자랑이었다. 일제강점기에도 굳센 저항정신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역사가 주는 힘 덕분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항구 사람들을 큰 자괴감에 빠지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으니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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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순천 사건이다.
1948년 10월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의 좌익 군인들은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라는 출병명령을 거부하고 총을 들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전통을 자랑하는 항구도시 여수는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게 입은 피해에 버금갈 정도로 불바다가 됐고, 좌익과 우익이란 이념의 칼날은 살생에 살생을 거듭하면서 무고한 민간인의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 우리나라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처음 배향한 충민사는 여수 사람들의 정신적 자부심을 키워주는 공간이다.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주 4·3사건과 함께 좌우익의 이념 대립으로 빚어진 이 비극의 최대 피해자는 여수 시민들이었다. 10월19일 새벽에 몇 방의 총성으로 시작된 14연대의 반란은 1주일만에 끝나고 반란군은 26일 대부분 여수를 탈출했다. 그러나 육해공군 합동작전으로 여수로 진입한 진압군은 부역자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했으니, 당시 14연대 반란사건으로 재력가·문인·예술가 등 사회지도인사와 학생을 포함한 무려 1,200여 명이나 학살됐다. 지금은 중앙초등학교로 바뀐 종산초등학교에서, 만성리굴 앞에서, 호명동 야산에서 그렇게 수십, 수백 명씩 붉은 꽃잎을 떨궈야만 했다. 오죽하면 당시 세상을 떠난 가족의 제사를 지내는 매년 10월 하순이면 여수의 생선·과일 값이 오를 정도일까. 그 당시 폐허가 된 항구 뒷골목에선 ‘여수 부르스’란 노래가 흐느끼듯 떠돌았다고 한다.
‘여수는 항구였다 / 철썩철썩 파도치는 꽃 피는 항구 / 어버이 혼이 우는 빈터에 서서 / 옛날을 불러 봐도 재만 남은 이 거리엔 / 궂은 비만 내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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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일암은 ‘해를 향한 암자’라는 이름을 가진 절집답게 일출 광경이 좋다.
그러나 여수 시민들은 50~6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라 말한다. 당시 희생자들은 대부분 진압군에 의해 발생했음에도 반란군의 소행으로 알려졌고, 무엇보다 사건의 명칭을 ‘여수·순천반란사건’이라고 하는 바람에 피해자인 여수시민들이 오히려 반란의 주체로 오인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시민들의 가슴속에는 억울한 죽음의 상흔이 피멍울로 고여 있다. 다행히 1990년대 들어 개칭운동이 일어났는데, 국방군 제14연대 좌익계열의 일부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이므로 가장 객관적이면서도 오해의 소지가 없는 ‘여수14연대반란사건’이라는 명칭이 힘을 얻었다.▲ 씩씩한 기운이 느껴지는 흥국사 홍교.
순천을 지나 들어선 여수. 때는 피었던 동백꽃도 움츠리는 엄동설한의 계절이라 해도 영취산(靈鷲山·510m) 기슭을 맨 먼저 들르지 않을 수 없다. 전라선에서 여천선이 갈리는 덕양역을 멀찌감치 스쳐 여천선을 따라가다 보면 여천산업단지를 통과하게 된다. 외지에서 온 승용차 운전자라면 눈이 휘둥그레지게 마련인 대형 덤프트럭과 트레일러들이 질주하는 도로에서 여수가 공단 많은 산업도시임을 명백히 깨닫게 된다. 대형 굴뚝에선 새하얀 연기가 솟아오르고, 밤엔 어두운 바다를 온통 밝힐 정도로 휘황찬란하다.
나라를 살린다는 절 흥국사(興國寺)는 여수의 정신사를 이끌어왔던 사찰이다. 삭막할 수밖에 없는 공단 깊숙한 곳에 노동자들의 육체와 정신을 위무하는 영취산과 흥국사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마치 강원도 사북·고한의 탄광지대에 있으면서 막장 광부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정선의 정암사(淨巖寺)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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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남관에서 바라본 여수항. 멀리 돌산대교가 내려다보인다.
- “바다로 떨어지는 저 붉은 동백꽃을 어이하리!”
- 여수 - 전라좌수영 400년간 터 잡은 항구 도시
▲ 시전동 선소는 임진왜란 당시엔 순천부 소속으로서 순천귀선으로 불리는 거북선을 만든 조선소다.
영취산에서 흘러내리는 중흥천을 거슬러 오르면 일주문보다 홍교((虹橋)가 먼저 반긴다. 비록 지금은 주 통행로가 바뀌어 다리로서의 기능은 하지 못해도, 홍교는 세속과 불국토의 갈림길로서 흥국사의 불이문(不二門)이다. 다리 중간엔 바깥으로 가로지른 머릿돌이 튀어나와 있는데, 그 머릿돌 끝마다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홍예 아래 천장에도 ‘용머리’가 매달려 계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는 언제 침입할지 모르는 사악한 무리를 경계하고 행인의 안녕을 지켜준다. 아담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선암사 승선교와는 달리 전체적으로 강건한 기세를 느낄 수 있는 홍교다.
매표소 지나 최근에 지은 일주문으로 들어서면 왼쪽 언덕으로 부도전이 있다. 이어 아름드리 느티나무 벚나무가 반기는 길을 얼마쯤 걸으면 ‘흥국사중수사적기’라 쓰인 비가 반긴다. 그런데 오른쪽 계류 너머로는 절집에선 그다지 흔치 않은 체력 단련장이 보인다. 물론 해인사처럼 축구할 수 있는 운동장까지 갖춘 절집도 있긴 하지만, 바다에서 멀지 않은 절집에 이렇게 체력단련장이 있는 데는 까닭이 있다.
역사적으로 흥국사는 의승 수군(義僧 水軍) 본부였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 휘하의 전라좌수영의 본영에서 활약하던 승군들은 이곳과 주변의 20여 암자에 머무르며 훈련도 하고 작전도 세웠다. 1593년 1월에 쓴 충무공의 장계에 의하면 1592년 9월경에 조직된 승군 400여 명이 육지와 바다에서 전투에 참가했다고 한다. 또한 승군은 스스로 군량미를 조달하고 관군을 지원하기도 했다. 여느 가람의 배치와 달리 성문 역할을 한 공북루(攻北樓)도 존재했다. 지금은 허물어졌으나 이순신 장군이 쓴 것으로 알려진 현판이 남아있고, ‘공북루중수기’도 전하는 것으로 봐서 성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흥국사 승군의 전통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와해되지 않고 오래도록 계속됐다. 1729년의 ‘봉황대루상량문’, 1803년의 ‘적묵당상량문’ 등에도 3명의 승장과 300여 명의 승군 명단이 있다. 이렇게 예불소리와 함께 무술을 연마하는 스님들의 우렁찬 기합소리가 수백 년 간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으나 아쉽게도 20세기 초반인 구한말에 해체되고 말았다. 만약 지금껏 유지되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대단한 관심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흥국사는 이렇듯 호국신앙의 요람이기도 하지만, 불교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겐 불교미술의 메카로도 여겨진다. 흥국사는 원래 일주문이 없고 천왕문 아래의 영성문이 정문 역할을 해왔다. 홍교에서 세속을 떠나 성인을 맞이하는 영성문을 통과하면 사천왕의 보호를 받는 불법의 세계에 들어옴을 상징한다. 천왕문을 지나면 2층 누각인 봉황루가 앞에 나타난다.
그 뒤쪽에 법왕문을 돌아 오르면 드디어 대웅전이다. 적묵당과 심검당이 앞뜰 좌우로 앉아있다. 탑은 없으나 용조각의 괘불지주, 돌거북 위에 얹힌 석등, 용·거북이·게 등이 새겨진 축대와 중앙계단 산속이 아니라 마치 바다 속에라도 들어선 것만 같다. 대웅전을 반야용선(般若龍船)으로 표현하는 법화신앙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법화신앙에서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은 지혜를 실어나르는 배요, 고해를 헤쳐나가 피안의 세상으로 인도하는 배다. 대웅전 기단서부터는 바다다. 그러니 당연히 바다에 사는 생물이 있게 마련이다.
‘바다’를 벗어나 ‘배’에 올라탄다.
대웅전은 1624년(인조 2) 계특대사가 절을 고쳐 세울 때 다시 지은 건물로 석가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보물이다. 두 손 모아 삼 배 올리면 석가삼존불 뒷면에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여러 불·보살에게 설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영산회상도가 올려다 보인다. 천신(天信)과 의천(義天) 두 승려 화가가 1693년(숙종 19)에 그린 이 석가후불탱화는 고상한 색채와 원만한 형태의 조화로 17세기 후반기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역시 보물이다.불단 뒤편 흙벽엔 덧붙인 한지에 그려진 백의수월관음도가 있다. 오른쪽 발을 왼쪽 허벅지 위에 올리고 양손을 편안하게 두 무릎에 올린 반가사유의 관세음보살은 흰 두건을 머리부터 내려쓰고, 흰 장삼을 걸쳤으며 아래는 붉은 꽃무늬의 하얀 치마차림이다. 이 벽화의 조성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760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보물에 버금 가는 수준작이다.
대웅전을 벗어나기 전에 할 일이 있다. 400년 가까이 된 대웅전 문고리를 잡으면 중생이 악업의 결과로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도(地獄道)·축생도(畜生道)·아귀도(餓鬼道)의 삼악도(三惡道)를 면한다니 믿든 말든 한번 만져보지 않을 수 없다. 문고리는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신도들이 잡아서인지 반들반들하다.
대웅전 좌우엔 첨성각과 명부전이 있고, 그 뒤 높은 단엔 팔상탱화 대신 1741년(영조 17)에 그린 영산회상도를 모신 팔상전이 앉아있다. 팔상전을 중심으로 왼편엔 불화에 수묵화 기법을 도입한 의겸 스님의 화풍을 잘 보여주는 여섯 폭의 십육나한도가 있는 응진당, 오른편엔 지눌·법수·계특 등 흥국사 역대 큰스님들을 모신 불조전이 있다.
이어 첨성각 사잇길로 빠져나가면 원통전(圓通殿)이다. 현세를 관장하는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원통전엔 관세음보살상과 영산회상도, 신중탱화가 있는데, 눈길을 끄는 것은 건축양식이다. 건물은 기본적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중앙 칸을 중심으로 양쪽에 툇간이 있으며, 전면에는 따로 기둥을 세워 3칸을 배치해 丁자형을 하고 있다. 전면과 양 툇간에는 처마 밑으로 팔각의 활주를 세워 지붕의 하중을 받게 했는데, 사방에 마련한 퇴칸은 불단을 가운데 두고 돌며 기도할 수 있도록 배려한 공간이다. 이태 전에 건립한 ‘의승수군 유물전시관’에 들러 임진왜란 당시 승군들의 활약상을 둘러본다. 지상 2층에서 지하 1층까지 펼쳐진 대형 괘불은 흥국사측에서 관람객들을 위해 설치한 것으로서 쉽게 볼 수 없는 보너스다.
흥국사를 나와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항으로 달린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관할 지역은 5관5포(五官五浦)였다. 이는 곧 육지로는 순천부, 보성군, 낙안군, 흥양현(고흥), 광양현의 5관이요, 바다로는 방답진(돌산), 사도진(고흥), 여도진(고흥), 발포진(고흥), 녹도진(고흥)의 5포였다. 전라좌수영의 옛 흔적을 밟다보면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적·유물을 다른 곳 보다 많이 볼 수 있는데, ‘충민사/석천사~진남관~고소대(좌수영대첩비/타루비)~충무공 자당 기거지~오충사~시전동 선소’로 이어지는 동선은 일명 ‘충무공 루트’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17번 국도를 타고 여수항으로 가다가 중앙여고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 시립현암도서관이 나온다. 근처 마래산(385.2m) 기슭에 터를 잡은 충민사(忠愍寺·사적 제440호)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3년 뒤인 1601년(선조 34) 왕명으로 민심을 둘러본 이항복(李恒福·1556-1618)이 왕에게 간청해 건립했는데, 충무공을 모신 최초의 사액 사당으로서 1606년에 세워진 통영의 충렬사보다는 5년, 1704년(숙종 30)에 세워진 아산의 현충사보다는 103년이나 앞선다.
함께 배향한 인물은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 장군을 도와 당항포·옥포 등지에서 크게 승리했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칠천량 싸움에서 전사한 이억기(李億祺·1561-1597),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선봉장으로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안골포에서 전사한 안홍국(安弘國·1555-1597) 등이다. 사당 옆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을 도운 승장 옥형(玉炯)과 자운(慈雲)이 창건한 석천사(石泉寺)가 있다. 충민사 수호사찰이다.
이순신 장군이 지휘할 당시엔 진해루(鎭海褸)였다. 난중일기를 보면 충무공은 진해루에서 공무도 보고 활도 쏘았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한 뒤 좌수영은 왜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진해루도 이때 불타버렸다. 지금의 건물은 전쟁이 끝난 후 충무공 후임으로 온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1599년에 진해루터에 세운 것으로, 1718년의 중창이 그 뼈대가 됐다. 진남루 앞뜰엔 임진왜란 당시 의인전술(擬人戰術)로 세웠다는 여수 석인(石人)이 있다. 그런데 7기 중 하나만 남아있어 쓸쓸한 데다가 석인의 시선이 바다가 아니라 진남관을 바라보고 서있어 조금 어색하다.
고소대엔 통제이공수군대첩비와 타루비, 동령소갈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모두 장군과 관계 있는 소중한 비석이다. 그런데 작은 타루비(墮淚碑)에 자꾸 눈길이 간다. 조각 기법도 섬세하지 못하고, 글씨도 빼어나지도 않다. 그러나 지금껏 보아온 그 어느 비석보다 가슴에 와 닿는 까닭은 수많은 전투를 같이 치러냈던 휘하 장병들이 충무공을 위해 정성으로 세운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명도 ‘눈물이 한없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비문의 내용을 풀면 ‘영하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공순신을 위하여 짤막한 비를 세우니 이름하여 타루비라. 그 비를 바라다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니라. 만력(1603년) 가을에 세우다.’ 그랬다. 공이 떠난 지 5년 뒤에 세운 이 비석을 바라보던 길손의 눈가에도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비록 공이 가신지 400여 성상이 지났으나 뉘라서 이 비석 앞에서 눈물짓지 않을 수 있으랴.
고소대를 내려오면 길은 이쯤에서 자연스레 여수의 얼굴인 오동도로 이어지게 된다. 파란 바다 물빛이 아름다운 고장, 여수의 겨울은 양지쪽에 피어난 오동도의 붉은 동백꽃의 수줍은 춤사위로 따뜻해진다. 한겨울에도 푸름을 자랑하는 6천여 평의 시누대 군락은 오동도의 또 다른 자랑. 임진왜란 당시 위력을 보여줬던 화살을 여기에서 만들었던 이력이 있다.
오동도를 나와 중앙동 해안도로를 따른다. 수산물공판장을 벗어나면 1948년 제주 출병을 거부하면서 여순사건의 단초를 제공했던 14연대가 주둔했던 신월동의 한화여수공장을 지나고, 이어 충무공의 모친 초계 변씨(草溪卞氏·1515-1597)가 5년 간 머물던 송현 마을의 충무공 자당 기거지, 임진왜란 당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정철·정대수 장군 등을 모신 오충사(五忠祠)를 차례로 지나 시전동 선소(船所)에 다다른다.
벅수 한 쌍의 안내를 받고 선소 마을로 들어서면 깊숙한 만(灣) 안에 다시 직경 40m에 이르는 굴강(屈江)이 보인다. 바로 여기가 거북선을 비롯한 선박들을 건조하고 수선했던 곳이다. 굴강 둘레엔 칼과 창을 만들던 풀뭇간, 무기를 갈고 닦았던 세검정(洗劒亭)과 군기고가 현재 복원되어 있고, 굴강 옆에도 2개의 벅수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세검정 앞 갯벌로 내려가면 약 2m 높이의 돌기둥이 서있는데, 정박중인 배를 묶어두는 계선주(繫船柱)로서 거북선을 메어두었다. 그러나 여느 계선주처럼 원형이 아닌 사각형이면서 항구 입구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계선주가 아니라 벅수로 보기도 한다. 아쉽게도 풍화가 심해 사람의 모양을 조각한지는 알기 어렵다. 이렇게 해서 여수의 ‘충무공 루트’는 어느 정도 둘러본 게 된다. 이 정도면 좌수영을 벗어나 섬으로 가도 좋다.
여수에 딸린 300여 개의 섬들 중에서
가장 큰 섬인 돌산도로 가려면 돌산대교를 건너면 된다. 눈보라가 몰아쳐도 비바람이 불어도 드나들 수 있으니 사실 돌산도는 육지나 다름없다. 지형도를 보면 여수는 순천에 왼쪽 날개를 대고 있는 거대한 나비처럼 생겼는데, 돌산도를 연결하니 오른쪽 날개가 보강되어 제법 균형 잡힌 나비가 되었다.돌산대교에서 남으로 뻗은 길은 향일암(向日庵)으로 이어진다. 가는 도중 무슬목의 해양수산관을 들러 세계적인 해양도시로 성장하려는 여수의 전통과 저력을 느낀 다음, 무슬목 해안의 몽돌밭을 한번쯤 거닐어보자. 지금은 양쪽에 제방을 쌓아 밀물이 되어도 폭이 좁지 않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썰물 때면 갯벌이 드러나고, 밀물이 되면 바다 속에 잠겼던 곳이다. 요즘으로 치면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곳인 셈이다.
전하는 말에는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도망치던 왜구를 이곳으로 유인해 물리쳤다고 한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1958년 소미산 아래에 이충무공유적기념비를 세워놓았다. 왕복 2차로 국도 하나가 겨우 지날 정도로 폭이 좁은 무슬목을 제대로 보려면 무슬목 남쪽의 대미산에 오르면 된다. 월암 마을에서 올라가는 길이 잘 닦여있다.
조선시대엔 말을 기르는 돌산목장이 있었고, 지금은 돌산갓 주산지로 탈바꿈한 죽포리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해안도로를 굽이굽이 달리면 사하촌인 임포 마을이다. 향일암은 ‘해를 향한 암자’라는 이름을 가진 절집답게 절마당에서 감상하는 일출 광경이 좋다. 임포 마을에서 가파른 계단을 5분쯤 오르면 비밀스런 세계로 들어서는 것 같은 좁은 바위틈이 나타난다. 향일암의 일주문인 셈이다. 여길 지나 바위덩이 사이로 나있는 길을 돌아가면 흔들바위를 배경으로 자리 잡은 대웅전이 반긴다.
언제나 깔끔한 절집 앞마당에 서면 넘실대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향일암을 품고 있는 금오산(323m)은 풍수지리상 바다로 들어가고 있는 거북의 형상이다. 오른발은 바다에 담근 상태로 왼발을 들어 바다로 들어가려는 거북 등엔 향일암이 앉아있고, 거북의 목과 왼발 사이엔 고깃배 드나드는 임포항이 자리 잡고 있다. 향일암은 경내의 건물들이 모두 해가 뜨는 쪽을 바라보고 있어 건물 주변 어디에서나 일출을 볼 수 있다. 대웅전엔 세 분의 부처가 모셔져 있는데,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르면서 퍼진 햇살이 세 부처 중 한 곳에 바로 비친다고 한다. 이는 계절에 따라 해 뜨는 위치가 조금씩 다른 것을 감안한 것이라고.
대웅전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바위틈을 이리저리 돌아 올라가면 널따란 바위 위에 관음전이 자리 잡고 있다. 역시 전망이 탁 트여 있어 대웅전에 뒤지지 않는 일출 포인트로 꼽힌다. 새해 첫날이나 동백 피는 계절엔 대웅전보다 이 관음전의 일출이 낫다. 길손은 향일암을 여러 번 찾았으나 일출을 제대로 만난 적이 거의 없다. 다행히 이번엔 만족스럽진 않았어도 일출을 감상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3월에 찾았을 때보다 왠지 허전했다. 그랬다. 향일암의 일출은 동백꽃 향기에 파묻혀 봐야 제 맛이었던 것이다. 또 해가 떴다고 총총히 향일암을 벗어날 일도 아니다. 10여 분 정도 오르면 바위들이 아슬아슬 걸쳐있는 암봉 정상에서 남해 푸른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향일암에서 내려와 승용차로 율림치 굽잇길을 넘으면 돌산 최남단의 성두 마을. 가파른 산기슭에 자리 잡고 그 앞으론 남해 푸른 파도 몰아치는 바다가 있다. 바닷바람에 의하여 생긴 구멍이 여기저기 드러나 있는 타포니(Tafoni) 지형을 들여다보고 길을 나서면 이후 띄엄띄엄 자리 잡은 작금·신기·예교 마을을 지나는데, 동쪽의 마을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시금치밭에서 일하던 할머니는 “갓은 메마른 땅에서 잘 자라지만, 시금치는 기름진 땅에서 잘 자란다”면서 “돌산도 동쪽보다 서쪽의 땅이 훨씬 기름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준다.
초록으로 가득한 시금치밭과 마늘밭을 훔쳐보며 찾아간 은적암(隱寂庵). 이름대로 고요함에 숨어있는 암자다. 흥국사 같은 거창한 유적도 전하지 않고 향일암 같이 빼어난 일출경관도 없으나, 소나무 빼곡한 산책로와 동백나무·후박나무 등으로 뒤덮인 난대림에 파묻힌 암자는 그 자체가 보물이다. 암자와 숲,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진 바다와 섬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명당은 암자 뒤쪽의 바위. 차 한 잔 권하는 스님 없어도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풍경소리 듣다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방답진(防沓鎭)은 1523년(중종18)에 화양면 용주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1895년 폐진될 때까지 전라좌수영의 전초기지가 있던 자리다. 이곳은 횡간수도·월호수도·제리수도·백야수도·계두수도 등 본영으로 통하는 수로를 드나드는 선박들을 감시하는 요충지였다. 그래서 전성기에는 한때 첨사 1명을 포함해 2,981명이라는 인원이 근무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지금도 웬만한 항구에 뒤지지 않는 규모의 돌산항을 보면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러나 선소는 작은 안내 팻말 하나 없어 주민들에게 물어 물어 찾아가야만 했다. 방답귀선이 태어난 이곳은 시전동 선소보다 규모가 작고, 민가에 둘러싸인 굴강은 허름했으나 제대로 복원만 이루어진다면 충분히 돌산의 새 명소가 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무슬목으로 빠져나와 돌산대교를 건너면 다시 여수항이다. 좌수영의 중심지로서 여수의 세력은 지대했다. 육지로는 순천부보다 격이 낮았지만, 바다로 나서면 사정이 달랐다. 남쪽의 낭도·백야도·개도·금오도 등이 있고, 먼바다에 있는 손죽도·초도·거문도·백도 등은 거리상으로는 여수가 아니라 오히려 고흥에 훨씬 가까움에도 여수 관할에 들었다는 것은 전라좌수영 여수의 세력을 증명한다. 현재도 여수에 속한 섬 숫자만 해도 유인도 49개, 무인도 268개를 합쳐 모두 317개나 된다. 그래서 섬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여수항 여객선터미널 앞에서는 누구나 머뭇거리게 마련이다.
공룡발자국의 화석지가 발견되면서 최근 방문객이 많아진 낭도리의 사도는 7개의 섬이 서로 연결되는 모세의 기적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현상은 음력 정월 대보름 사리와 풍어제가 열리는 2월, 그리고 4월 중순을 전후한 2~3일 정도 모습을 드러낸다. 이외에도 해안가 기암절벽과 울창한 활엽수림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금오도, 해안의 기암절벽과 푸른 파도가 아름다운 연도 등등 이렇게 수많은 섬들 중 가장 인기 있는 섬은 아무래도 가장 먼 바다에 있는 거문도(巨文島)와 백도(白島)가 아닌가 싶다.
여수에서 남으로 114km, 제주에서 북으로 108km로 오히려 제주가 가까운 섬, 100여 년 전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라는 이름으로 서구에 알려졌던 섬. 역사는 1885년(고종 22년) 군함 6척과 수송선 2척으로 구성된 영국 동양함대가 거문도를 2년간 점령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섬 언덕에는 영국군 수병 묘지가 남아 있는데, 수선화와 유채꽃이 무덤으로 가는 길섶에 피어 있다.
거문도 불탄봉(195m) 산길은 동백꽃 터널이다. 숲은 진록색으로 뒤덮여 어둑하다. 동백나무로만 이렇게 밀림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아직은 제철이 아닌 듯 이따금 만나는 붉은 동백 꽃송이의 화사한 미소가 반갑다. 육지는 물론이요, 남도의 웬만한 섬에서도 이런 동백 밀림을 만나기는 정말 어렵다.
일제 때의 벙커가 남아있는 불탄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동도와 서도 사이의 도내만(島內灣)은 잔잔한 호수다. 구한말 당시 유럽 열강이 동북아 전진기지로 차지하려고 군침을 흘렸던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정상에서 내려서면 이번엔 억새밭이다. 그 너머로 녹색의 동백숲이 다시 펼쳐져 있고, 아래로는 푸른 바다다. 가끔 만나는 무덤가엔 제주도에서만 보던 수선화도 피었다. 하얀 꽃잎, 노란 봉오리는 흰 접시 위에 금색의 술잔을 올려놓은 것만 같아 금잔은대(金盞銀臺)라고 부른다는 꽃. 바람 센 언덕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우는 수선화의 맑은 향내가 몸속으로 스며든다. 길은 다시 동백숲으로 이어진다.
한쪽엔 가파른 해안 절벽이 위태로운 기와집몰랑이다. 몰랑이란 산마루란 뜻의 전라도 방언이니 이는 기와집 닮은 산마루란 뜻이리라. 이 해안 절벽은 바다에서 보면 영락없이 웅장한 기와집 용마루를 닮았다.
산길은 다시 동백숲이다. 봄이면 온통 떨어진 동백꽃송이로 뒤덮이는 곳이다. 동박새 지저귀는 소리도 요란하다. 문득 해안에 우뚝 솟은 신선바위가 나타난다. 바위 사이로 조심스레 오르면 남성미 넘치는 해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로는 거문도등대가 아련하다.
파도가 센 날이면 바닷물이 넘나든다는 목넘이재 넘어 동백 터널을 지나면 등대까지는 한 달음이다. 등대 옆의 정자에 오른다. 먼발치엔 파도가 철썩인다. 동쪽을 바라본다. 눈을 벨 듯한 파란 수평선에서 환영인 듯 솟은 섬들이 햇살에 새하얗게 빛난다. 전설과 신비의 바위섬 백도(白島)다. 아, 내일은 저 섬으로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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