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나무 괴(槐)’에 ‘뫼 산(山)’. 충북 괴산을 한자로 쓰면 이렇습니다. 실제로도 회화나무며 느티나무가 많긴 하지만, 괴산이 그 이유만으로 이런 한자 이름을 가진 건 아닐 겁니다. ‘회화나무 괴(槐)’자는 어떤 분야에서 으뜸이라는 의미로도 읽힙니다. 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를 ‘괴부(槐部)’라 했고, 왕궁을 ‘괴신(槐晨)’으로, 승정원을 ‘괴원(槐院)’으로 불렀던 것도 그래서입니다. ‘무엇이든지 모두 으뜸’까진 몰라도, 괴산이야말로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무렵의 손꼽히는 여행 명소라는 데는 흔쾌히 동의합니다. 구름이 걸리는 산자락은 첩첩이 이어지고, 그 산자락이 품은 계곡에는 수정 같은 물이 넘쳐 흐릅니다. 푸른 산과 맑은 물을 두른 마을 어귀에는 수백 년의 시간을 거느린 아름드리 거목 한 두 그루쯤 멋지게 서 있습니다. 괴산이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이즈음에 딱 맞는 여행지인 건, 그 이름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불교의 향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괴산의 ‘괴(槐)’자는 또 한편으로는 탑의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불탑이나 사원이란 종교적인 뜻이 스며있는 것이지요. 이런 이름 뜻에 걸맞은 오래된 마애불과 사찰이 괴산 땅 곳곳에 있습니다. 석벽에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새겨진 쌍둥이 마애불이 그렇고, 유독 입술이 붉은 석불상을 모신 각연사나 1000년에서 꼭 10년이 빠진 990년 묵은 느티나무가 지키고 선 공림사도 그렇습니다. 괴산에는 또 불가의 깨끗한 정신처럼 맑은 물이 흘러넘치는 계곡이며 강줄기가 곳곳에 있습니다. 유연한 굽이를 그리며 흘러내리는 괴강과 예부터 이름난 명소인 화양계곡과 선유동계곡, 여기다가 쌍곡계곡과 갈론계곡을 더합니다. 괴산에는 그 물길을 보며 걷는 이름난 도보코스 ‘산막이옛길’이 있습니다. 그 길에 이어붙여 갈론계곡과 마을을 지나는 도보코스 ‘충청도 양반길’이 최근에 새로 놓였습니다. 충청도 양반길은 바닥이 훤히 비치는 맑은 계곡의 물길을 따라가는 길이기도 하고, 숲이 수면에 드리운 진초록을 발아래 두고 산허리를 걷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의 절반쯤은 문경새재 넘어 옛 선비들이 드나들던 길이었으되, 나머지 절반쯤은 괴강변의 강변마을 주민들이 나무하러 드나들던 길이었으니 ‘양반길’이란 이름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다 해도 ‘충청도 양반’이란 이름에서 그 길이 ‘느린 팔자걸음’쯤이 적당하다는 것쯤은 쉽사리 짐작이 가실 겁니다. 만산(萬山)이 다 초록으로 짙어가는 이즈음에 괴산으로의 여정을 권합니다. 어지러운 저잣거리에서 사는 이들에게 수행이란 게 뭐 별 게 있겠습니까. 그저 일상의 어깨 위에 올라탄 것들을 잠깐이라도 내려놓고 가볍게, 그러면서도 느리게 걷는 일. 그것으로 ‘사는 기쁨’이 별 게 아니라는 깨달음에 가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걷는다는 것 그대로 ‘마음닦음’이 되는 건지도 모를 일입니다.
# 화려한 치장 없어도 정갈한 각연사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이다. 충남 괴산에 진의귀라는 선비가 살았다. 그가 괴산의 청안 땅 명승을 이르는 ‘청안팔경’에 시를 지어 얹었다. 시는 글로 썼으되, 마치 붓으로 그려둔 그림을 방불케한다. 짐작건대 그가 붓을 들었던 때는 아마 계절이 여름으로 넘어가던 요즘같은 때였으리라. “옛 절은 적막하나 / 층층마다 산을 대하고 있고 / 숲 사이 물길 안개 속에 있는데 / 낮이 고요하니 이끼낀 문 닫혔어라 /…(중략)…/ 선 탑에 해지도록 세상 일 생각하니 / 산 빛은 푸르러 옷을 적시려 하네.”
각연사에는 웅장한 불전도, 화려한 치장도 없다. 대신 각연사를 가득 채우는 건 맑음과 정갈함이다. 대웅전과 비로전, 요사체 앞마당은 가지런한 빗질 자국으로 정갈하다. 좀처럼 어지러워질 일 없는 산중 절집 마당에서의 빗질이란 더럽힘을 씻고자 함만은 아닐 터. 빗질 소임을 맡은 스님에게는 쓸어낸 자리를 또 쓸어내는 일은 그것 자체가 수행이었으리라. 그러니 빗질 자국 선명한 마당에서 곧 절집이 나아가는 ‘수행의 정신’을 본다. 각연사에서는 대웅전보다 비로전이다. 비로전에는 화강석을 쪼아 만든 비로자나불이 모셔져있다. 유독 입술이 붉은 비로자나불은 괴산이 가진 두 개의 보물 중 하나다. 불상과 함께 비로전 앞 마당의 아름드리 보리수나무도 눈여겨 봐둬야 할 것이다. 보리수는 불가에서 깨달음의 나무로 불린다. 부처가 보리수나무 그늘 아래서 깨달음을 얻어서 그렇다. 이즈음 각연사 보리수나무에 연초록의 새잎이 돋으면서 드리우는 그늘이 하루하루 넓어져 가고 있다.
# 느티나무 군락 속의 공림사 낙영산 아래 공림사도 못지않은 절집이다. 각연사만큼은 아니지만 신라 경문왕 때 지어진 것이니 그 내력이 깊다. 경문왕이 나라의 스승(국사·國師)의 지위를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고 물러나서 초가를 짓고 수행에 전념한 자정선사가 창건했다. 나라의 부름을 거절했지만 그의 덕을 높이 산 왕은 초가 자리에 절을 세우고 친히 공림사란 이름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공림사에는 유독 오래된 느티나무가 많다. 절집은 뒤로는 군데군데 드러나는 낙영산의 흰 암릉을 두고, 앞으로는 우람하게 가지를 뒤튼 늙은 느티나무 군락을 품고 있다. 절집의 경내에도 범상찮은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그중에서도 종무소 곁에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 가장 우람하고 크다. 수령이 1000년에서 딱 10년이 빠진 990년이라는데, 그만한 시간의 깊이가 믿기지는 않지만, 촛농이 흘러내리는 듯한 밑동의 위용이 대단하다. 공림사는 잘 가꿔진 절집이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절집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고운 잔디를 깔아 두었는데, 마당 복판에 1993년에 세운 흰 빛의 오층짜리 적광탑이 세워져 있다. 두 마리 사자가 호위하고 있는 탑은 묵은 맛 대신, 탑면마다 가득 새긴 여래와 보살의 섬세하고 화려함이 돋보인다. 대웅전 옆에는 소박한 석가탑을 세워 적광탑의 화려함을 단정함으로 지그시 누르는 형국이다. 적광탑 주변은 지금 색색의 연등으로 화려하게 불붙어있다. 각연사와 공림사를 앞세우느라 뒤로 밀리긴 했지만, 사실 괴산에서 불법의 자취를 만나겠다면 ‘쌍둥이 마애불’을 맨 앞으로 둬야 하리라. 쌍둥이 마애불, 정식 명칭으로는 ‘원풍리 마애이병불좌상’이다. 이름이 좀 어렵지만, 뜻을 알고보면 쉽다. 원풍리는 마을이름. 마애(磨涯)는 ‘바위 벼랑에 새겼다’는 뜻이고, 이병(二倂)은 ‘둘이 나란히 섰다’는 얘기다. 불좌상이 ‘앉아있는 부처’란 건 다들 아는 일이겠다.
다보는 석가 이전의 과거불. 석가가 대중에게 설법할 때 다보는 탑으로 솟아서 그 말이 진실하고 영험하다는 걸 증거한단다. 다시 말해 다보는 이른바 석가의 ‘보증인’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쌍둥이 마애불 앞에서 기원의 손을 모은다면 속된 말로 ‘기도발’이 좀 더 잘 듣는 건 아닐까. # ‘종합선물세트’ 같은 도보코스 괴산에서는 불가의 깨끗한 정신처럼 맑은 물이 흘러넘치는 강과 계곡이 곳곳에 있다. 유연한 굽이를 그리며 흘러내리는 괴강과 오래 전부터 이름난 화양계곡과 선유동계곡, 여기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못지않은 풍광의 쌍곡계곡과 갈론계곡도 있다. 강도 그렇지만 계곡은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는 여름이 제격이다. 하지만 요즘의 정취도 즐기기에 모자람이 없다. 물에 몸을 담그기에는 한참 이르지만, 눈부신 신록의 그림자가 맑디맑은 옥수(玉水)에 드리우는 정취는 지금이 아니고서는 만날 수 없다. 산 아래의 신록은 때를 지났지만, 서늘한 계곡 속의 나무들은 이제 한창 연초록 물이 오르고 있다. 괴산에서 이런 경관을 ‘종합선물세트’처럼 두루 들러보는 코스를 추천한다면, 단연 지난 3월 말에 조성해 놓은 도보여행 코스 ‘충청도 양반길’이다. 괴산에는 기왕에도 명소가 된 도보코스 ‘산막이 옛길’이 있다. 산막이 옛길의 물 건너편으로 계곡과 강변을 따라 이어놓은 길이 충청도 양반길이다. 산막이 옛길은 지금은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은 길이 되고 말았다. 우선 물 위에 울릉도와 독도라며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악한 섬을 띄워놓고는 그 위에 소나무를 심어놓은 무신경이 참 거슬린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돈 들여 누구든 손가락질을 하는 흉물을 만든’ 셈이다. 거기다가 길 끝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식당들이 국수 한 그릇 말아내곤 6000원을 받아 챙기는 상혼이 극성이다. 괴산댐 안의 길지 않은 코스를 도는 자그마한 유람선의 승선 요금을 1만2000원씩이나 받는다는 것도 마뜩잖다. 하지만 이제 갓 조성한 충청도 양반길은 아직 인적이 드물고 때도 묻지 않았다. 사람들이 아직 많이 딛지 않아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흙길의 탄성도 살아있다. 순환해 제자리로 돌아오는 전체 코스는 길게는 6시간, 짧게 돌면 4시간쯤 걸리는데, 갈론계곡을 따라 오르는 구간과 괴산댐의 선바위 일대의 구간이 가장 아름답다. 갈론계곡은 괴산의 다른 계곡에 비하면 수량도 적은 편이고 규모도 작지만, 마치 잘 꾸며진 정원처럼 여겨질 정도로 아기자기한 맛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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