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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장의 송네 피오르의 속살과 만날 수 있는 사파리. 물살을 가르는 작은 보트 앞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내뢰 피오르가 보인다.
| 오랜 세월을 같이한 부부는 성격뿐 아니라 외모도 닮는다고 하지요. 지구 반대편 북구의 나라 노르웨이는 마치 오래 산 부부처럼 ‘자연’과 ‘사람’이 서로를 닮아 있는 듯했습니다.
인천공항에서 출발, 핀란드의 헬싱키를 경유해 노르웨이의 오슬로로 향했습니다. 헬싱키까지의 9시간여 비행을 거쳐 환승을 합니다. 국내선 같은 작은 비행기를 타고 1시간쯤 지나니 노르웨이의 자연이 보입니다. 아직은 봄이 살포시 발만 들여놨을 뿐, 겨울의 색깔이 곳곳에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곳곳에 흰 눈이 쌓여 있었고 나뭇잎도 한국의 자연처럼 싱싱한 신록이기보다는 암녹색에 가깝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짙은 침엽수들은 뾰족하지만 날카롭지는 않습니다. 위협적이라기보다는 ‘곧음’ 혹은 ‘지조’를 상징하는 곧게 뻗은 대나무의 느낌과 비슷합니다.
공항을 나서자 이번엔 또 다른 침엽수들이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말로만 듣던 장신(長身)들의 숲에 들어선 듯합니다. 세계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장신 국가라는 것이 실감납니다. 마치 부부처럼, 오랜 세월을 함께한 자연과 사람도 서로의 모습을 닮아가는구나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서쪽에 위치한 노르웨이는 동쪽으로는 스웨덴, 북동쪽으로는 핀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노르웨이를 상징하는 수많은 피오르가 자리 잡고 있지요. 영토 곳곳을 깊게 파고 들어온 피오르는 우뚝 솟은 산을 호위병으로 모신 듯합니다. 그 호위병들의 보호 아래, 부드러운 농경지들이 터를 잡고 있습니다.
북쪽에서 남쪽까지의 위도상 거리가 수도인 오슬로에서 이탈리아 로마까지의 거리와 같은 노르웨이는, 유럽에서 가장 긴 나라이기도 합니다. 땅도, 나무도, 사람도 모두가 길쭉길쭉하지요. 하지만 이곳의 참모습은 길이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방인에게도 활짝 웃어 주는 친절함, 가족에 대한 남다른 사랑,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자부심과 같은 ‘그들의 생활’에 노르웨이의 진면목이 있는 것이겠지요. 세상 어느 곳이나 사람들의 삶은 신산합니다. 장터를 가면 팔팔 뛰는 삶의 의지와 함께 어쩔 수 없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것이 생활의 고됨이겠지요.
농촌에 가면 다정한 풍광 뒤에 농부들의 힘든 농사일이 떡 하니 버티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노르웨이는 이런 신산함마저 지워 버린 듯했습니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이들의 삶은 피오르가 보호해 주는, 부드러운 농경지마냥 따뜻하고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천혜의 자연뿐만 아니라 일상마저도 아름다워 보이는 노르웨이의 삶의 터전, 도시와 자연으로의 여행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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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시에 위치한 그랜드 호텔에서 중심가인 칼 요한 거리를 내려다본 모습. 거리에는 기마병을 앞세운 군악대가 연주하며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 자연과 문화를 지킬 줄 아는 오슬로
오슬로 공항에서 중심가로 접어드는 초입은 공사가 한창이다. 도로를 넓히기도 하고 건물을 신·증축하기도 한다. 여느 대도시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초입을 지나 좀더 시내 깊숙이 들어서면 오히려 대도시의 풍모는 사라진다. 지방 중소도시의 모습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속살이 드러난다.
오슬로 총면적의 3분의 2는 적송과 전나무, 자작나무가 가득한 숲과 크고 작은 언덕이다. 작은 언덕의 주인은 하얗고 노란, 혹은 담홍색의 목조 가옥들이다. 대부분의 가옥은 2∼3층 정도의 단독주택. 아파트가 도시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서울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다. ‘자연 친화’가 삶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는 이들의 도시. 시내 중심가라는 칼 요한 거리에서도 마천루를 찾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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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겐시에 위치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브리겐과 콘서트홀에서 바라본 그리그 작곡실(위부터).
| 고층 건물과 함께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은 오토바이. 거리 어느 곳에서도 경적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대조적으로 자전거는 지천이다. 두둑하게 배가 나온 아저씨도, 팔등신 미녀 아가씨도, 웃는 모습이 상큼한 소녀들도 자전거를 타고 있다. 자전거가 도시 생활의 기본으로 보였다. 이곳이 이른바 ‘슬로 시티’로 명성을 떨치는 이유도 알 것 같다. 자전거가 근거리 교통의 기본수단이라면 전차와 버스는 원거리 교통수단이다. 전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에드바르트 뭉크의 흔적을 뒤쫓았다.
석양이 지는 다리 위에서 양 볼을 감싸 쥐고 비명을 지르는 듯한 작품 ‘절규’(1893년작)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뭉크는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화가다. 4개의 버전이 존재하는 절규는 뭉크 미술관과 국립미술관에 분산, 소장돼 있다. 마침 올해는 뭉크 탄생 150주년. 두 미술관에서는 다양한 기념행사를 준비하느라 한창이다. 본격 행사가 시작되는 6월까지는 이 두 미술관에서 뭉크 작품의 진면목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대신 국립미술관 1층 전시실에서 ‘절규’를 비롯해 ‘마돈나’와 ‘문라이트’ 등의 걸작을 감상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
뭉크의 걸작들을 뒤로하고 칼 요한 거리에서 버스를 탔다. ‘절규의 다리’를 찾고자 현지인에게 물어본다. 역시나 친절하게 버스 노선과 정류장 이름을 알려 준다. 10여 분쯤 가니 오슬로 시내 남동쪽 이케베르그다. 다리인 줄 알았는데 난간이 있는 도로다. 이곳이 ‘다리’라는 표시는 난간의 시작점에 부착된 ‘동판’뿐이다.
노르웨이는 희곡작가 헨리크 입센의 나라이기도 하다. 입센의 희곡이 레퍼토리로 무대에 오르는 국립극장과 그가 자주 갔던 카페를 칼 요한 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 칼 요한 거리 초입에 위치한 그랜드 호텔 1층 그랜드 카페가 바로 그곳. 벽을 가득 메운 예술가들의 흔적이 반갑다. 비겔란트 조각공원도 빠뜨릴 수 없다.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조각가 구스타프 비겔란트의 작품들이 전시된 조각공원으로, 탄생에서 죽음까지 인간의 삶의 순간과 감정을 조각한 작품들이 공원 곳곳에 배치돼 있다. 공원 중심부 계단을 올라가면 17.3m의 화강암에 121명의 인간 군상이 조각된 모놀리스(거대한 돌기둥)가 있다. 제작에 13년이 걸렸다는 대작 중의 대작이다.
자연도 사람도 ‘자존심의 지존’ 베르겐
베르겐은 노르웨이 서해안에 위치한 제2의 도시이자 피오르의 관문이다. 1070년, 올라브 키레 왕에 의해 처음 세워진 이래 12∼13세기에는 노르웨이의 수도였으며, 19세기까지는 북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근세까지 도시가 번영할 수 있었던 힘은 대구 교역이었다. 그래서인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브리겐 뒤편엔 거대한 말린 대구 조각상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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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네 피오르에서 하당게르 피오르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난 이름 모를 마을. 봄을 시기하듯 수면엔 얼음이 아직 남아 있었다.
| 베르겐은 7개의 크고 작은 산들과 피오르에 둘러싸여 있으며 갸름한 언덕이 많다. 언덕에는 오슬로와 마찬가지로 컬러풀한 건물이 가득하다. 인구는 25만 명에 불과하지만 베르겐 시민들은 노르웨이인으로 불리기보다는 ‘베르게너(베르겐인)’로 불리길 원한다. 언어도 베르겐어로 따로 구별할 정도로 유독 자부심이 강하단다. 베르겐은 유럽 사람들 사이에서 ‘북유럽의 리버풀’이라고 불린다. 항구도시이면서 새로운 음악이나 새로운 밴드를 배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 우리 음악 팬들에게도 익숙한 노르웨이 출신 포크 듀오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의 멤버들도 이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베르겐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삼각 모양의 지붕을 얹은 중세풍 건물들이 일렬로 서 있는 브리겐. 1979년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지금의 건물들은 1702년 대화재 뒤 원형 복원해 놓은 것이다.
현재 앞쪽에 있는 건물들은 식당과 양품점들로 사용되고 있으며, 뒤쪽 건물들은 예술가들의 스튜디오로 사용되고 있다. 수백 년을 버텨온 브리겐도 세월의 힘은 어찌할 수 없는지,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처럼(사실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조금씩 기울어 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내린다. 365일 중 비오는 날이 200일이나 될 정도로 비가 많은 베르겐에서는 낯설지 않은 풍경인 듯 현지인들은 저마다 우산을 꺼내 들거나 우비를 입었다. 삼각 지붕 위로 타닥타닥 떨어지는 빗줄기 소리는 콘크리트와는 달리 정겹다. 빗줄기가 거세지자 비겐 만의 어시장으로 들어갔다. 시장 특유의 어수선하거나 왁자지껄한 느낌 대신 조용하고 잘 정돈된 분위기였다. 이곳에서 맛본 생선수프는 별미였다. 어떤 고급 레스토랑보다 인상적인 맛이었다.
베르겐의 또 다른 상징은 플뢰엔 산의 케이블카. 케이블카는 여행객뿐만 아니라 플뢰엔 산골짜기 주거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교통수단이기도 하다. 해발 320m의 플뢰엔 산 정상까지 약 7분이 걸렸다. 짧은 시간이지만 사면이 유리로 돼 있어 주변 경관을 살피기에 충분하다. 사진 찍기를 즐긴다면 매 순간 셔터를 눌러야 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지나간다.
오슬로에 비겔란트와 뭉크가 있다면, 베르겐엔 작곡가 에드바르트 그리그가 있었다. 그리그는 베르겐을 사랑해 인생의 후반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부인 니나와 여생을 함께한 집은 트롤하우겐(도깨비집)이란 별칭으로 불린다. 트롤하우겐은 현재 그리그 박물관으로 보존돼 있으며 경사 지형을 활용한 콘서트홀에서는 그리그의 작곡실을 바라보며 연주회를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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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겐 시내 플뢰엔 산 정상에서 바라본 베르겐 항구.
| 플롬 열차를 타고 피오르의 진수로
베르겐에서 기차를 탔다. 베르겐과 오슬로를 잇는 열차다. 오슬로 방향으로 달리던 중간 뮈르달에서 ‘플롬’ 철도로 갈아탔다. 세계 철도의 최고 걸작이라고 자평하는 산악 철도다. 서해안에서 동쪽으로 204㎞를 내달리는 세계 최장의 피오르인 송네 피오르의 어깻죽지를 파고들어 내달리는 철도다. 험준한 산악 지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송네 피오르로부터 갈라져 나온 에울란 피오르의 계곡 마을 플롬이 이 철도의 기점이다. 20㎞에 이르는 이 기찻길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 매거진이 선정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10대 기차 여행길’ 중 하나로 뽑히기도 했다.
해발 2m의 플롬과 867m의 뮈르달을 연결한 철로는 표고 차만 865m에 이른다. 이 기찻길에는 세계적인 송네 피오르의 정수가 들어 있다. 열차의 창문으로 계곡과 협곡, 절벽이 연이어 나타나고 그 광경에 탄성을 지를 때 하얀 눈발이 창문을 때렸다. 산 정상에 남아 있는 잔설만으로도 놀랄 지경인데 아예 눈과 함께 달리고 있다. 4월 하순에 맞이하는 눈발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눈발 속을 내달리던 열차가 폭포 앞에서 잠시 멈췄다. 낯선 노르웨이어 안내가 나오더니 갑자기 한국말이 들려온다. ‘사진 촬영을 위해 5분간 정차하겠다’고 한다. 낯선 산속에서 들리는 한국말이 반갑다.
플롬 역과 송네 피오르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유서 깊은 프레타임 호텔이 있다. 19세기 말 스위스 양식으로 지어진 이 호텔에는 노르웨이의 유명 시인 페르 시블레 도서관이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시인이지만 그의 생전 소지품과 함께 작품집, 그와 호텔에 얽힌 일화 등을 접해 보는 것도 색다른 추억이 될 듯하다. 호텔을 나서면 작은 선착장이 있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피오르의 속살과 만나는 여정을 즐길 수 있다. 피오르는 빙하가 녹아 바다로 흐르면서 지형을 파내 U자나 V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 깊은 지형으로, 바닷물이 들어와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그중 세계 최대로 꼽히는 3곳의 피오르(송네, 게이랑에르, 하당게르)가 모두 노르웨이에 있다. 세계 최장인 송네의 지류 중에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내뢰 피오르도 이웃하고 있다. 내뢰 피오르의 길이는 17㎞며, 좁은 지점의 폭은 250m에 불과하다.
배를 타고 피오르의 장엄한 경관을 지나는 경험은 노르웨이 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빙하가 만들어낸 거친 산자락에는 이름 모를 수많은 폭포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따뜻한 계절엔 자연과 야생동물을 목격할 수도 있다지만, 눈발이 흩날릴 정도로 변화무쌍한 날씨에서는 한낱 꿈이었다. 그럼에도 에울란 피오르와 내뢰 피오르가 손에 잡힐 듯 펼쳐지는 광경에는 탄성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육지의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피오르는 그게 바다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잔잔하다. 배가 물살을 가르면서 얼굴까지 튀어오른 물방울의 짠맛으로 ‘피오르는 바다’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송네 피오르에 이어 찾은 곳은 하당게르 피오르. 부드러운 경사를 이룬 산들에 둘러싸인 하당게르 피오르는 노르웨이서 가장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초록빛 잔디가 올라오는 땅 위로 사과와 살구나무들이 조금씩 생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경사지 곳곳에 있는 과실수들은 약 800년 전 이 지역을 방문했던 수도승들에 의해 심어진 것. 사과와 살구꽃들은 5월에 한꺼번에 만발하며 여름에 과실을 맺는다고 한다. 아름다운 꽃향기에 취하지는 못했지만, 피오르 연안의 가득한 과실수들과 예쁜 목조 가옥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에 사는 농민들은 과실을 이용해 사과 사이다(탄산이 들어간 일종의 과실주)와 주스를 만들어 판매한다. 버스와 쾌속정을 이용해 조금 더 멀리 가면 울렌스방 지역의 우트네와 로프트후스의 유명한 휴양지들도 방문할 수 있다.
북유럽에 위치한 노르웨이 왕국은 동쪽으로는 스웨덴, 서쪽으로는 북극해, 북쪽으로는 러시아 및 핀란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총면적은 약 32만5000㎢이며, 해안선의 총길이는 2만5000㎞가 넘는다. 인구는 465만 명이며 그중 56만 명은 남동쪽에 위치한 수도 오슬로에 거주한다. 북대서양 기류의 영향으로 해안지역 기후는 온화한 편이다.
노르웨이는 국토 절반이 북극권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겨울에는 오로라, 여름에는 백야라는 독특한 자연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오로라는 태양에서 방출된 대전입자(플라스마)의 일부가 지구 자기장에 이끌려 대기로 진입하면서 공기분자와 반응해 초록, 파랑, 붉은색 빛을 발산하는 현상이다. 오로라는 기상조건이 좋은 9∼3월에 나타나며, 특히 보름쯤에 관측하기가 좋다.
여름에는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지 않는 백야를 즐길 수 있다. 필자가 노르웨이를 찾은 때는 백야가 시작되는 시기로 오후 10시에도 초저녁과 같을 정도로 해가 길어지고 있었다. 자정을 포함해 24시간 태양을 볼 수 있어 ‘미드나이트 선(Midnight Sun)’이라고 불린다.
인천과 오슬로를 잇는 직항은 없지만, 인천에 취항한 주변국인 네덜란드나 핀란드와 가까워 방문하기가 어렵지는 않다. 핀에어는 헬싱키를 경유하는 노선을 주 7회 운행한다. 오는 25일부터 6월 22일까지는 매주 토요일 총 5회에 걸쳐 인천∼오슬로 간 직항 전세기(대한항공)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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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오슬로에는 노벨평화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3곳의 장소가 있다. 여행시간이 촉박하더라도 이 3곳만은 꼭 들러 보자.
칼 요한 거리에 위치한 오슬로 시청. 시청 뒤편으로는 정원을 둘러싼 회랑의 벽면으로 부조 작품들이 늘어서 있다.
그 길을 따라 시청 안으로 들어가면 매년 12월 10일 거행되는 노벨평화상 수상식의 주요 무대가 펼쳐진다(필자는 이미 시청이 업무를 마치고 문을 닫은 이후라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바로 이곳에서 지난 2000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6개 노벨상 중 평화상이 오슬로에서 시상되는 것은 노벨의 유언 때문이라고. 스웨덴 출신인 그가 평화상의 시상지로 오슬로를 택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시청사 두 개의 사각기둥 탑은 각각 66m, 68m로 오슬로 9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건립됐다.
시청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는 노벨평화센터(Nobels Fredssenter)가 있다. 2005년 6월 개관한 이 센터는 역대 수상자들과 노벨의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다. 센터 내부에는 카페와 상점, 강의와 전시를 할 수 있는 다목적 공간도 있다. 오래된 기차역을 개조한 것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2012년 수상자인 유럽연합(EU)에 관련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장 한쪽에는 평화를 위해 EU에 바라는 말을 적을 수 있는 엽서도 비치돼 있었다.
다음은 매년 수상자들을 위한 연회가 열리는 그랜드 호텔 연회장. 별로 크지 않지만 매년 시상식이 끝난 뒤 만찬과 함께 축하 파티가 열린다고 한다. 빨간 카펫 위에 10여 개의 라운드테이블 사이로 샴페인 잔을 들고 건배를 나누고 있는 수상자들이 보이는 듯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평화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도 더 절실하지 않겠는가. 피상적인 개념보다 노벨평화상의 현장에서 진정한 평화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 아닐까.
오슬로에서 만난 집시들은 ‘베사메 무초’를 연주하고 있었다.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집시도, 쳄발로와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던 헝가리서 온 집시도 레퍼토리는 같았다. 비겔란트 조각공원과 칼 요한 거리라는 장소만 달리했을 뿐, 한결같이 이방인들의 귀에 익숙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선을 기대하며 앞에 놓은 모자 속에는 많은 돈이 모여들지 않았다. 유로존의 경제난을 보여주듯 취업이나 돈벌이를 위해 북구의 부국 노르웨이로 몰려든 남부 유럽인들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집시와 남부 유럽인들이 부국으로 찾아든 가난을 보여줬다면 베르겐에서 우연히 만난 한 모자(母子)는 노르웨이인들의 전형적인 친절함과 소박함을 보여줬다. 낯선 이방인들을 두려워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유명인(이나 그룽·킹스 오브 컨비니언스의 아이릭 글람벡 뵈의 아내·사진 오른쪽)이란 것도 내세우지 않았다. 단지 그는 올여름 남편과 함께 찾게 될 한국에서 온 이들을 반가워했고 미소로 답해 줬다. 또한 무례할 수도 있는 촬영 요구에도 가볍게 포즈를 취해줄 정도로 심성도 따스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은 이는 교민 손여영 씨. 노르웨이를 통틀어 450명 안팎인 한국 교민 중의 한 사람이다. 영국 유학 중 만난 남편과 함께 베르겐에 온 뒤 10여 년을 베르겐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명함엔 예쁜 한국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현지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들의 편의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영어식 이름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그는 간단한 한국말이라도 그의 이웃들이 구사할 수 있기를 바랐다. 디자인을 공부해 가끔 작품도 만든다는 그였다. 그의 자부심은 베르겐인으로서도 한국인으로서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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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베르겐·플롬(노르웨이)=글·사진 홍혜정 기자 haman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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