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 속에 또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한 해 동안 LIFE & Style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까지 다양한 여행지를 다녀왔습니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리산 자락부터 신록이 반짝이던 금강변의 마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여름의 청량한 계곡과 가을의 핏빛 단풍이 물든 오솔길과 흰 눈을 이불처럼 덮은 겨울 풍경까지 가장 아름다운 곳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때로는 역사의 자취를 따라, 종교의 경건함을 길잡이 삼아, 계절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절정을 찾아 나선 길이었습니다. 모두 독자 여러분들의 소매를 끌고 데려가고 싶었던 곳이었지만, 한 해의 마지막 즈음에 그중 다섯 곳을 추려 뽑아봤습니다. 계절에 딱 맞춰서 찾아간다면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곳들입니다. 새해를 설계하며 한 해의 여행을 계획한다면 이곳들을 꼭 빼놓지 마시길. 그래서 그 길 위에서 LIFE & Style이 받았던 감동을 고스란히 느껴보시길….
시멘트에 담아낸 제주… 거장들이 빚은 新풍경 당대 최고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마리오 보타, 이타미 준(伊? = ?)…. 건축에 관심이 있다면 그 명성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려지는 이름들이다. 제주 곳곳에는 이들이 지어낸 기념비적 건축물이 곳곳에 있다. 시멘트가 어떻게 제주의 눈부신 빛과 바람, 풍경을 담아내고 있는지를 목격할 수 있는 곳들이다. 거기에서 건축이 자체의 미감을 뛰어넘어 자연을 극적으로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액자’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LIFE & Style이 제주에서 ‘건축여행’을 권했던 건, 건축물 자체의 미감을 감상하자는 것보다 건축가의 의도를 읽으며 ‘자연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자는 뜻이었다. 이 여행에서는 건물 자체의 미감은 일단 기본. 덧붙여 이런 것들을 봐야 한다. 완성된 건축물의 프레임을 통해 내다보이는 시선이 주는 감동, 건축이 품고 있는 메시지와 울림. 주변 자연 경관과의 자연스러운 조화….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제주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것은 자연과의 조화, 또는 휴식과 명상이다. 더러는 제주의 빛과 바람을 차용했고, 또 다른 건축가는 오름의 곡선을 빌려 건물을 지어냈다. 푸른 하늘과 투명한 바다를 건물 액자 속에 가두는가 하면 한라산 중산간에 호수를 만들어놓고 제주의 하늘을 그 안에 담기도 했다. 건축을 통해 동선과 시선을 이끌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시점을 만들어내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자연의 풍경’을 구성해내고 있는 것이다. 먼저 일본의 건축가 안도. 그는 제주의 섭지코지에다 ‘글라스 하우스’와 ‘지니어스 로사이’를 세웠다. 전망레스토랑 글라스 하우스는 노출콘크리트의 기하학적 상자 형태의 외벽을 유리로 마감해 그 안에 들어선 이들이 드넓은 시선으로 제주의 바다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지니어스 로사이는 명상의 공간으로 거대한 벽에 바람의 통로를 내놓고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며 제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도록 만든 곳이다. 섭지코지에는 또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보타가 지은 유리로 만든 피라미드 ‘아고라’도 있다. 근래 지어진 한라산 중산간의 본태박물관 건물과 그 앞에 제주의 하늘과 구름을 가득 담고 있는 연못도 안도의 솜씨다. 재일교포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 그는 제주 한라산 북서쪽 중산간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여럿 세웠다. 생태휴양형 타운하우스 ‘제주 비오토피아’ 내의 미술관 네 곳을 비롯해 포도호텔, 핀크스클럽하우스, 방주교회 등이 그의 작품이다. 이 중 압권이라면 비오토피아 내의 물, 바람, 돌 미술관과 두손 미술관. 물 미술관은 물과 하늘이, 바람 미술관은 바람과 소리가, 돌 미술관에는 금속과 돌이 빚어내는 조화와 미감이 주인공이다. 돌아보면 못내 아쉬운 것은 당시 기사 첫머리에 소개했던 멕시코의 세계적인 건축가 리카르도 레고레타의 유작인 ‘까사 델 아구아’가 결국 철거되고 말았다는 것. 햇살을 받아 다양한 색감으로 빛나던 까사 델 아구아는 수많은 문화계 인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시적으로 허가받은 모델하우스’라는 이유로 기사가 나간 지 한 달여 만에 철거됐다. 2011년 타계한 레고레타의 생전 마지막 유작은 아쉽게도 이렇게 제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1.5㎞ 단풍터널… 임란 의병장 김덕령의 ‘슬픈 운명’ 무등산 북쪽 자락. 거기에 알려지지 않았으되 가장 화려한 단풍 숲이 숨어 있었다. 선홍색 단풍이 눈부셨지만, 그 여행을 이끌었던 키워드는 조선 중기의 의병장 김덕령이었다. 임진왜란의 영웅이었으되 역모의 굴레를 쓰고 형장에서 죽임을 당하고만 의병장 김덕령의 자취를 따라가는 여정. 그 여정에서 가장 빼어났던 곳이 무등산 원효계곡의 풍암정이었다. 단풍(楓·풍)과 바위(巖·암)로 이름을 삼은 정자. 정자의 주인은 김덕령의 동생 김덕보였다. 형 김덕령이 모진 고문 끝에 억울하게 세상을 등지자 그의 주검을 정성껏 수습한 동생은 지리산의 깊은 산중으로 숨었다. 지리산에서 이름을 숨긴 채 땅을 갈고 날품을 팔며 은둔하던 그가 6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세운 정자가 풍암정이다. 가을이 절정으로 치달을 무렵, 풍암정의 아름다움은 단풍에 있었다. 정자 주변의 기암괴석들 사이로 100여 그루가 넘는 단풍나무가 빼곡했었던 모양이었다. 가을이면 단풍이 핏빛으로 물들어 정자 앞의 시냇물까지 온통 붉게 달구었다고 전해진다. 정자 주변의 단풍은 지금은 다 사라졌지만, 대신 김덕보를 기억하기 위해, 형 덕령의 억울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 정자 주변에 있었다는 화려한 단풍을 잊기 않기 위해 오래전에 정자로 드는 1.5㎞ 남짓의 계곡 길 양옆에 단풍나무를 심어 두었다. 그 단풍나무들이 아름드리 풍성하게 자라나 계곡길은 아예 단풍터널을 이뤘다. 9개 코스 합하면 240㎞…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
그 길을 걷고나서 느끼게 된 것이지만 전북에는 다른 지방에 비해 종교적 상징을 가진 성지들이 유독 많았다. 천주교 신도들이 목숨을 잃은 성지부터 시작해서 오랜 시절 법맥을 이어온 늙은 절집까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종교 성지들이 전북 일대에 몰려 있는 이유에 대한 정반대의 두 가지 설명. 하나는 풍요로운 들판과 넉넉한 모성(母性)을 닮은 모악산의 비범한 기운의 그늘 아래로 종교가 찾아 들어왔을 것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너른 평야의 마을에 집중됐던 권력의 착취와 수탈이 지역민들의 불안감으로, 반항으로, 다시 종교혼으로 분출됐다는 것이다. 종교의 수난사와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짚어보면 ‘둘 다’ 답이겠다. 순례길은 모두 9개 코스. 전체 순례길 코스를 하루에 걸을 수 있을 만큼 잘라낸 것이다. 짧은 것이 14㎞ 남짓이고, 긴 코스는 27.5㎞에 이른다. 하나하나 코스를 걷는 데 짧게는 4시간 길게는 8시간 정도 걸렸다. 코스를 구분하고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 놓았지만 여행으로 이 길을 찾는다면 구태여 순서대로 다닐 필요는 없다. 어디서든 홀연히 시작할 수 있고, 어디선가에서 문득 끝낼 수도 있다. 나름의 형편과 체력으로 발길이 닿는 데서 시작, 원하는 데서 마치면 그뿐이란 얘기다. 순례길의 전체 구간에서 가장 의미있는 장소거나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스민 곳들만 추려서 찾았다. 첫 번째가 순례길 1코스의 출발지이자 9코스의 종착 지점인 전주의 풍남문. 200년 전 이 문 밖에서 우리 땅에서 최초의 천주교 순교가 있었다. 그리고 100년쯤 뒤 풍남문 부근에 전동성당을 세운 것은 최초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의미였다. 두 번째로는 순례길 4코스의 익산 나바위성당과 두동교회다. 고딕식 종탑과 한옥 건물이 어우러진 나바위성당은 한국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돌아와 첫발을 내디딘 자리에 세워졌다. 인근에는 기독교 전래 초기의 대하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두동교회가 있다. 순례길 7코스가 지나는 금산사와 금산교회, 수류성당에는 저마다 깊은 이야기들이 잠겨있다. 금산사는 서로 다른 종파, 화엄종과 법상종의 건물이 하나의 절집 마당에 들어서 있다. 두 종파의 건물 사이에 자리 잡은 부처의 사리가 모셔진 방등계단은 두 종파의 갈등과 긴장을 자연스레 허물고 있었다. 인근의 금산교회는 일대의 땅을 다 가진 거부 주인과 그가 부리던 머슴 마부 이야기가 마치 동화처럼 전해진다. 목사가 된 머슴을 주인이 깍듯이 섬겼다는 이야기다. 순례길은 이런 흔적을 짚으며 지나간다. 길이 거칠고 지루하고 힘들수록, 그 길은 오히려 빛난다. 육체를 고통스럽게 할수록 정신은 명료해지는 법. 좌표를 잃고 안개 속을 헤매거나 누군가의 위로와 손길이 간절하게 필요하다면 이 길이 있음을 기억하시길….
길이 끊긴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연둣빛 환한 신록이 무르익을 무렵에 찾아간 곳은 금강 상류였다. 충남 금산에서 금강의 물길을 거슬러 전북 무주를 지나 진안까지 이어지는 강변길을 달렸다. 여린 봄꽃의 연분홍과 연둣빛의 무성한 잎들의 색감으로 흠뻑 젖어 있는 곳, 흐르는 물소리의 틈으로 새들이 날아오르고, 때 이른 소쩍새 울음이 끼어드는 곳이다. 금강 상류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길이 끊기는 곳에 있었다. 충남 금산 쪽에서 지도를 펼치고 금강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예외 없이 그랬다. 그러니 금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가는 건 어찌 보면 간단하다. 지도를 펴놓고 물길을 짚다가 길이 끊어지거나 흐려진 곳을 찾아가면 거기에 빼어난 풍경이 숨어 있다. 금강을 끼고 이어진 강변길이 바위에 막혀 끊어지는 곳. 충남 금산의 적벽강에는 강변의 버드나무와 관목들이 저마다 다른 채도의 연둣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산자락에는 환한 산벚꽃들이 피어 있었다. 거기서 만나는 건 눈부신 봄날의 고요와 평화. 강 건너 적벽과 신록으로 물든 강변을 바라보면서 자그락거리는 강 자갈을 밟으며 산책을 해도 좋고, 초록의 물그림자가 드리운 수면 위로 물수제비를 떠도 좋겠다. 아니 그저 강변에 앉아 건너편 산중에서 들리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볕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모자람이 없다. 적벽강을 거쳐 찾아간 곳은 방우리. 급하게 굽이쳐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 때문에 섬이 되려다가 아슬아슬 한쪽으로 내륙에 걸치고 있는 방울 모양의 지형에 들어선 마을인데 강변의 신록과 구릉마다 복사꽃까지 만개해 있어 운치를 더했다. 강변을 끼고 있는 마을의 정취도 못지않았다. 담벽이 무너진 폐가들도 적잖지만, 마을 분위기는 단정하다. 오래되고 낡은 집들이 모여 빚어내는 단정한 느낌에서 거기 깃들이어 사는 사람들의 품성이 느껴진다. 금강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무주의 잠두마을을 만난다. 여기는 봄날에 금강이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곳. 금강이 끼고 있는 산자락 어귀쯤에는 강을 굽어보며 이어지는 비포장도로 ‘잠두마을 옛길’이 있다. 금강의 전체 구간 중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어떤 길의 봄 정취와 비교한대도 가장 앞줄에 자신 있게 세울 수 있는 길이다. 벚꽃 흐드러진 잠두마을길을 한 번이라도 걸어보았다면, 해마다 봄이면 이곳을 떠올릴 수밖에 없겠다. 잠두마을에서 굴암리와 부남리를 지나 강을 따라 진안 땅으로 넘어가면 거기에 잠두마을 옛길에 버금갈 만한 감동마을의 강변 풍경이 펼쳐진다. 감동마을에서 용담댐 아래 섬바위까지 이끼 무성한 강변 숲길을 걷는 맛도 일품이었다. 금강변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은 곳에서 만난 찬란한 신록은 내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마찬가지이리라.
태백에서 봉화까지… 情 넘치는 ‘느림보 여행’ 올 한 해 가장 히트한 관광상품은 아마도 ‘백두대간 협곡열차’가 아닐까. 겨울철에만 한시적으로 운행하던 환상선(環上線) 눈꽃열차의 하이라이트 구간에다 아예 특별 제작한 관광열차를 투입해 사계절을 운행하도록 편성해 지난 4월에 운행을 시작한 열차가 바로 백두대간 협곡열차다. 환상선 눈꽃열차가 달리는 노선 중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이 펼쳐지는 경북 봉화의 분천역에서 강원 태백의 철암역까지의 구간. 여기에다 느릿느릿 왕복운행을 하는 특별열차를 투입한 것이다.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경관도 경관이지만, 규칙적으로 철커덕거리는 레일음, 객차 한쪽의 화목난로, 스쳐 지나는 오래된 간이역 같은 추억의 정서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느릿느릿 달리는 열차에서 불러내는 오래전의 풍경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초록빛 융단 느낌의 비둘기호 열차의 의자, 빨래집게처럼 손잡이를 쥐어서 여는 창문, 오래전 삶은 달걀 한 꾸러미와 사이다 한 병은 열차 여행에서 누리던 최고의 호사였다. 협곡열차의 속도는 시속 30㎞. 경관이 빼어난 구간에서는 속도가 더 늦다. 보통의 속도라면 불과 15분 남짓에 닿는 거리를 협곡열차는 1시간 10분 동안 달린다. 그 시간의 간극에서 저마다의 추억이 호명된다. 소화물차를 개조한 협곡열차의 객차는 경관 감상을 위해 창을 키우고 시야를 확보했다. 창문 외에 천장의 일부까지도 창으로 마감해 열차 안에서 느끼는 개방감이 대단하다. 특히 열차 맨 뒤칸은 상점의 진열장처럼 3면에 창을 내 시야가 탁 트였다. 객차 안에서 가장 이색적이었던 것은 객차마다 설치해 놓은 화목난로. 열차 안에는 냉난방 시설이 없다. 대신 겨울에는 열차 안의 화목난로로 난방을 하고 여름이면 천장에 매단 선풍기를 켠다. 분천역을 출발한 협곡열차는 줄곧 낙동강의 물길을 따라간다. 기차는 계곡 굽이를 돌고, 낙동강 위로 놓인 교량을 건너고 어둑한 터널을 통과한다. 승객들은 저마다 차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바깥 경치를 구경했고, 경치가 심드렁해지면 이내 화목난로 앞으로 모여들었다. 난로 위에는 고구마와 오징어가 구워지고 있었다. 승객들은 난로 앞에서 자연스레 서로 말을 섞었고, 대화가 이어지는 간간이 웃음도 섞였다. 이런 여정이라면 목적지가 어디라도 좋겠다. 가족과의 정겨운 대화, 어린 시절의 희미한 열차여행의 추억, 때묻지 않은 오지의 자연과 옆자리 승객과의 자연스러운 교감이 협곡열차의 여정에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백두대간 협곡열차의 예약이 하늘의 별 따기 하듯 어렵다는 점. 특히 주말이나 휴일은 서너 달 전에도 예약이 쉽지 않다.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현재 전국철도노조의 총파업 개시 이튿날인 12월 10일부터 운행이 전면 중단된 상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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