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동양화가 말을 걸다_21

醉月 2013. 12. 24. 01:30

재상이 된 공자가 처음 한 일은 사형이었다

주소정묘

▲ 김진여, ‘주소정묘’, 1700년, 비단에 색, 32×57㎝, 전주박물관
공자가 소정묘(少正卯)를 주살(誅殺)했다. 조정에 나가 재상의 임무를 수행한 지 7일 만에 행해진 조치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예를 실천한다는 사람이 공직에 나가자마자 행한 일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니. 제자 자공(子貢)은 그 이유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스승께 여쭈었다.

“무릇 소정묘는 노나라에서 널리 알려진 사람인데 지금 선생님께서 정사에 나오셔서 그를 처음 표적으로 삼아 죽이셨으니, 혹 선생님께서 실수하신 것인지요?”

의구심과 걱정이 뒤섞인 질문이었다. ‘소정묘는 나라에서 알아주는 귀족입니다. 비록 스승님이 지금 대사구(大司寇)에 오르셨다고는 하나 자칫 권력남용으로 귀족들의 반발을 사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혹시 귀족 출신이 아닌 스승님이 높은 벼슬을 하게 되자 평소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사람에게 본때를 보여주시려는 것 아닙니까?’ 제자의 입장에서 에둘러 표현했지만 본뜻은 그런 의미였다.

사십대를 스승과 학자로 보낸 공자가 관직에 나아간 때는 오십대였다. 그 시기는 대략 4년여 동안으로 51세부터 55세까지였다. 첫 번째 관직은 중도재(中都宰)였다. 중도는 산둥성(山東省)에 있는 노(魯)나라의 현(縣)으로 중도재는 중도현의 현령(縣令)이다. 공자는 중도재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 소사공(小司空)으로 발탁된다. 중도재가 지방 공무원이라면 소사공은 중앙정부의 공무원으로 차관급에 해당한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소사공을 지낸 기간은 매우 짧았다. 얼마 되지 않아 대사구에 올랐다. 기원전 500년, 그의 나이 52세 때였다. 대사구는 삼경(三卿·세 명의 대신으로 司徒·司馬·司空)에 버금가는 벼슬로 현재의 법무부 장관에 해당하는 직위다. 귀족 출신이 아닌 사람이 맡을 수 있는 최고의 벼슬이었다.

높은 자리에 앉자마자 한 일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으니 제자들이 의아해 할 만도 하다. 소정묘는 살인자도 아니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도 아닌 데다 신분이 귀족인 대부(大夫)였다. 조용히 넘어가면 좋을 것을 벌집을 쑤셔놓은 격이니 제자로서 당연한 질문이었다.

제자의 걱정을 모를 리 없는 공자가 대답했다.

“좀 앉아라. 내가 그 까닭을 일러 주겠다. 천하에 큰 죄악이 다섯 가지가 있다. 절도 같은 것은 여기에 해당되지도 않는다. 첫째는 마음이 반역하고자 하는 위험한 생각을 하는 것이고, 둘째는 행실이 편벽되고 고집스러운 것이고, 셋째는 거짓된 말을 하고 변론을 잘하는 것이다. 넷째는 의리와 무관하게 가볍고 추한 것만 기억하고 잡다하게 아는 것이고, 다섯째는 그릇된 일만 따르면서 자신의 몸을 기름지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 다섯 가지 중에 하나만 범해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인데 소정묘는 이 다섯 가지 죄를 모두 저질렀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 거처하는 곳에서는 무리를 모아 당파를 이루고, 그 말솜씨를 보면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쩔쩔매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는 잘난 체한다. 이런 자는 사람 중의 간웅(姦雄)이니 제거해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은 소정묘가 ‘위험한 생각’의 소유자인데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서 죽여야 한다는 뜻이다. 공자의 생애를 살펴볼 때 가장 난해한 부분이 소정묘를 죽인 이유를 설명한 곳이다. ‘논어’에 언급된 공자의 말은 소박하면서도 간단명료하다. 뜻은 분명하고 논지는 확실하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다르다. 상당한 세력을 가진 벼슬아치를 사형시키면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간사한 사람’이기 때문이란다. 명분이 뚜렷하지 않다. 간사하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면 살아남을 자가 몇 명이나 될 것인가. 거짓과 권모술수가 판치는 우리 시대의 정치판에서는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명이다. 공자가 과연 이런 무모한 일을 했을 것인가 하는 점은 역대 공자 연구자들 사이에서 계속된 논란거리였다. 그러나 ‘사기’의 ‘공자세가’와 ‘공자가어’의 ‘시주’ 그리고 ‘순자’에는 소정묘를 주살한 내용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이런 논란과 관계없이 ‘공자성적도’에는 ‘주소정묘(誅少正卯)’라는 항목이 분명하게 삽입돼 있다. 김진여(金振汝·조선 후기)가 그린 ‘주소정묘’도 대표적인 작품이다. 관모를 쓴 대사구 공자가 양관(兩觀) 아래에서 소정묘를 단죄하는 장면이다. 양관은 노나라의 궁궐 이름이다. 공자는 병풍 앞에 앉아 있고 그의 앞에는 결박된 소정묘가 무릎 꿇고 앉아 있다. 제자들을 거느린 공자는 오른손을 들어 단호하게 소정묘의 처형을 지시한다. 공자의 지시에 따라 칼을 든 집행관이 곧 사형수의 목을 내려칠 것이다.

이곳이 소름 끼치는 사형장인데 그림 왼쪽에는 사형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말을 몰고 가는 사람, 양을 놓고 흥정하는 사람, 얌전하게 걸어가는 여인들이 모두 처형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자신들이 하는 일에 열중해 있다. 세 무리의 인물들이 소정묘의 처형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일까. ‘공자가어’의 ‘상로’편에는 이 그림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다.

공자가 정치를 하기 전 노나라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었다. 양고기를 파는 심유씨(沈猶氏)라는 자는 양에게 아침마다 물을 먹여 크게 보이게 한 뒤 시장 사람들을 속였으며, 공신씨(公愼氏)라는 자는 자기 아내의 음탕한 짓을 제지하지 못했으며, 신궤씨(愼潰氏)라는 자는 사치를 부리는 정도가 법을 넘었으며, 가축을 파는 자는 말을 꾸며서 값을 제멋대로 받았다. 꼭 우리 시대의 신문 사회면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공자가 정치에 참여하자 이런 폐단들이 사라졌다. 심유씨는 감히 양에게 물을 먹이지 못했으며, 공신씨는 음탕한 아내를 축출해 버렸으며, 신궤씨는 국경을 넘어 이사를 가고 말았다. 이렇게 석 달이 되자 소와 말을 파는 자도 값을 더 받지 않게 되었고, 양과 돼지고기를 파는 자도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되었으며, 길 가는 남녀들은 그 다니는 길을 달리하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 가는 자가 없게 되었다. 또 남자는 충성과 신의를 숭상하게 되었으며, 여자는 정절과 순리를 숭상하게 되었다.

그림 왼쪽에 등장하는 말을 몰고 가는 사람과 양을 놓고 흥정하는 사람들은 ‘값을 더 받지 않고’ 정직하게 장사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저울을 들고 가격을 협상하는 사람들은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진다. 공정한 거래가 성사됐기 때문이다. 네 명의 여인이 걷는 모습은 ‘길 가는 남녀들은 그 다니는 길을 달리했다’는 문구를 묘사한 것이다. 품위를 잃지 않은 여인들의 걸음걸이가 얌전하다. 여자들과 ‘다니는 길’을 달리한 남자들의 모습은 어디에 있을까. 그 문제를 화가 김진여는 여인들과 장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언덕이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게 그려 넣음으로써 해결했다. 남자와 여자가 하는 일이 다르듯 가는 길도 다르다는 뜻이다.

‘주소정묘’는 다른 시간대에 발생한 여러 가지 사건을 한 화면에 그려 넣은 방식이다. 다양한 이야기를 서술하듯 보여줄 때 화가들이 종종 차용하는 구도법이다. 소정묘를 처형한 사건과 주민들의 행동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성도 없지만 모두 공자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라는 공통성이 있다. 걸어가는 여인이 고개를 돌려 공자를 뒤돌아보는 모습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공자가 관직에 머물렀던 기간은 4년여 동안으로 매우 짧았다. 그러나 이때의 행적은 여러 자료에 비교적 자세히 수록돼 있다. 소정묘를 처형한 공자의 다음 목표는 ‘국격(國格)’을 세우는 일이었다. 공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목표를 실행한다

광대 죽인 공자 “군주 보필은 이렇게 하는 것!”

협곡회제

▲ 김진여, ‘협곡회제’ 공자성적도, 1700년, 비단에 색, 32×57cm, 전주박물관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순방 도중 발생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사건으로 나라가 떠들썩했다. 나라 밖에까지 가서 추태를 벌였으니 망신살이 단단히 뻗쳤다. ‘국격(國格)’은 지도자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협력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그림자처럼 보필하고 이끌어주고 때론 단호한 목소리로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책사(策士)가 옆에 있어야 지도자가 길을 잃지 않고 국정을 잘 이끌어갈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수많은 왕과 제후들이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부국강병의 기본이 사람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발목을 잡아서야 되겠는가.

중국 노(魯)나라 정공(定公)10년(기원전500) 봄이었다.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제와 노, 양국의 우호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협곡에서 만나자고 사신을 보냈다. 노나라 정공은 수레만 타고 경호도 없이 그곳으로 가려고 했다. 마침 공자가 대사구로 있으면서 임시로 재상의 일을 집행하고 있었다. 공자가 보기에 정공의 행동은 한 나라의 대표로서는 격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공자가 아뢰었다.

“제가 듣기로는 문(文)에 관련된 일을 하려면 반드시 무(武)를 갖춰야 하며, 무와 관련된 일을 하려면 반드시 문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제후가 국경을 벗어날 때 반드시 문무관원들에게 시중들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좌우사마(左右司馬)를 거느리고 가시기를 청합니다.”

왕의 행동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뜻이다. 한 나라의 대표답게 의전을 갖추고 가라는 충고다. 정공은 공자의 말을 따라 좌우사마를 데리고 갔다. 협곡에서 회맹(會盟)할 단을 마련하고 흙계단을 세 단계로 만든 후 예법에 따라 경공과 서로 읍하고 사양하면서 단에 올랐다. 서로 술잔을 돌리는 예가 끝나자 제나라의 관리가 나오더니 악공들에게 미리 준비한 음악을 사방에서 연주하게 했다. 그때 제나라 군사들이 음악에 맞춰 깃발과 창칼을 들고 북을 두드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강대국인 제나라의 힘을 과시하면서 약소국인 노나라 정공을 위협하려는 처사였다. 위기였다.

당시 제나라는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크고 부유한 강국이었다. 아무리 큰 나라라고 해도 그렇지, 이 자리는 두 나라 군주가 국가 대 국가를 대표해서 만난 자리가 아닌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힘의 우위를 핑계로 상대방을 무시해 수치심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모를 리 없는 공자였다. 공자가 재빨리 나와 한 발에 한 계단씩 올라가 대에 오르더니 마지막 한 계단을 오르지 않고 긴 소매를 쳐들고 말했다. “두 군주께서 우호 관계를 위해 만나셨는데 어찌하여 이곳에서 오랑캐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십니까? 청컨대 담당 관리에게 명령하십시오!”

담당 관리가 그들을 물러나게 했으나 그들이 물러나지 않자 주위의 수행원들이 안자(晏子)와 경공의 안색을 살폈다. 경공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면서 손을 저어 그들을 물러가게 했다. 얼마 후 제나라의 담당 관리가 달려 나와 말했다. “청컨대 궁중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십시오.”

경공이 허락했다. 광대와 난쟁이가 재주를 부리며 나왔다. 이들은 희극적인 분장을 하고 나와 사람들을 웃기고 재주를 부렸는데 노나라 정공을 야유하고 비꼬기 위한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공자가 발끈했다. 공자가 또 한 발에 한 계단씩 올라가 대에 오르더니 마지막 한 계단을 오르지 않고 말했다. “보잘것없는 무리로써 제후를 미혹되게 하는 자는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 청컨대 담당 관리에게 명하십시오!”

곧바로 담당 관리가 법을 적용해 집행했다. 음란한 행동을 하던 무리의 손과 발이 다른 곳으로 떨어져 나갔다. 이 모습을 본 경공은 제나라의 도의(道義)가 상대방에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는 놀라고 두려워했다.

이 사건은 공자가 대사구에 오른 후 대외적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례로 ‘협곡회제(夾谷會齊·협곡에서 제나라와 회합을 가지다)’라는 제목으로 ‘공자성적도’에 실려 있다. 그림은 회담하는 두 군주를 우측에 배치하고 두 무리의 악공들을 좌측에 배치했다. 좌측의 악공들 중 웃통을 벗어젖히고 깃발과 창칼을 휘두르며 춤을 추는 병사들은 상단에 배치했다. 광대와 난쟁이와 미녀들은 그 아래에 배치했다. 이들은 원래 시간 순서에 따라 등장하는 것이 정상이나 그림에서는 시간을 무시했다. 옛 그림에서 설화적 내용을 보여줄 때 종종 활용되는 기법이다. 화면의 상당 부분을 악공들에게 할애한 것은 이야기의 내용이 그들을 대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두 군주는 단 위에 앉아 진지하게 대화를 하고 있다. 우측에 앉은 군주 뒤로 질서정연하게 무리지어 서 있는 측이 노나라 정공과 그 신하들이다. 좌측에 앉은 군주 뒤로 자중지란에 빠진 듯 허둥대는 신하들 측이 제나라 경공과 그 신하들이다. 우측이 정(靜)이라면 좌측은 동(動)이다. 동은 움직임 때문에 정을 이길 것 같지만 질서를 잃은 움직임은 오합지졸에 가깝다. 제나라 경공과 악공들이 화면에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무게중심이 오른쪽으로 기운 것은 그 때문이다. 노나라 신하들은 단 위에 있는 사람이나 단 아래 있는 사람이나 한결같이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맞잡고 서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를 잃지 않는 노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다.

이 그림의 하이라이트는 공자다. 공자는 두 나라의 군주 앞에 서서 두 손을 맞잡은 채 단호한 어조로 제나라의 무례함을 항의한다. 공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크게 그렸다. 원래 몸집이 크고 키가 큰 공자였지만 그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그림 속에서 그의 몸집은 지나칠 정도로 크다. 마치 작금의 혼란을 정리할 사람이 공자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는 것 같다.

공자는 군주 앞에 두 차례 나아갈 때마다 한 발에 한 계단씩 올라가 대에 오르더니 ‘마지막 한 계단은 오르지 않고’ 말했다. 군주와 신하와의 관계를 지키려 함이다. 어떤 경우에도 군주의 위상은 높이되 신하된 자의 본분은 지키겠다는 태도다. 어쩌다 작은 권력이라도 손에 쥐게 되면 분수를 잃고 날뛰는 자들과는 다르다. 군주가 군주로서의 체통을 잊을 때 그 곁에서 군주의 역할을 일깨워주고 대신해주는 자가 진정한 신하다. 하물며 군주가 애써 이뤄놓은 성과를 와르르 무너뜨리게 하는 몰지각한 신하의 행동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다. 회담을 끝내고 제나라로 돌아간 경공은 군신들에게 말한다. “노나라는 군자의 도(道)로써 그 군주를 보필했는데 그대들은 단지 오랑캐의 도로써 과인을 가르쳐서 노나라 왕에게 죄를 짓게 되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담당 관리가 나와서 대답하여 말했다. “군자는 잘못을 저지르면 물질로 사과하는데, 소인은 잘못을 저지르면 꾸민 말로 사과합니다. 당신께서 만일 그 일을 걱정하신다면 물질로 사과하십시오.”

이에 제나라 경공은 즉시 노나라로부터 빼앗은 운(鄆)과 민양(汶陽), 구음(龜陰)의 전답을 돌려줌으로써 잘못을 사과했다. 이 이야기는 ‘공자성적도’에 ‘귀전사과(歸田謝過·토지를 돌려주며 사과하다)’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아름다운 결말이다. 군주를 보필하는 자의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필요한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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